조실 스님께서 아까 "불 가운데에 그 화택(火宅) 속에 있고, 사방에서 불이 타 들어오고 있고, 바로 불더미 속에 우리가 있으니 거기에서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해서 거기서 해탈(解脫)을 해야 한다"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이 과연 무엇이냐? 납월 팔일(臘月八日)에 - 초하룻날부터서 십이월 팔일 새벽까지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앉아서 정진을 하고, 화장실에 가는 시간만을 제외하고는 노상 앉아서 정진을 하는데, 그것을 보통 용맹정진이라 그러고, 가행정진이라 그러는데,어찌 참다운 가행정진, 참다운 용맹정진이 어찌 옆구리를 땅에 대고 안 대고 하는 데에 걸려있겠습니까?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잠을 억지로 안 자기 위해서 장군죽비(將軍竹篦)로 치면서 - 그렇다면은 불면증이 들어서 잠 못 자는 사람,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나서 잘 수 없는 사람은 일찌감치 견성성불(見性成佛)하지 않겠습니까?절대로 용맹정진, 가행정진이 옆구리를 땅에 대고 안 대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여.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빨래하고, 소지를 하고, 목욕하고 양치질하면서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한눈 팔지 아니하고, 경계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보되 본 바가 없고, 듣되 듣는 바가 없고, 먹되 먹는 바가 없고, 걸어가되 걸어가는 바가 없어.
오직 화두(話頭) 하나만을 잡드리 해 나가되,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생각없는 생각으로 터억 의단(疑團)을 관조(觀照)해 나간다면, 저녁 9시나 10시에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난다 하드라도, 눈뜨고서는 일체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오직 한 생각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를 잡두리 해 나가고,잠을 10시나 9시에 취침시간이 되아서 자리에 눕되, 누워서도 계속 그 의단을 관조해 나가고 잡두리 해나가다가 언제 잠이 든중 모르게 잠이 든다 그말이여.
잠이 들어서도 꿈속에서도 화두를 - 꿈속인지 꿈이 아닌지 하여간 언제 잠이 든 중 모르게 잠이 들어서도 고대로 그 화두가 있고,새벽에 눈을 딱! 떴을 때 새로 화두를 들 것도 없이 엊저녁에 들고 자던 그 화두가 고대로 있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나간다 그말이여.이것이 바로 가행정진이요, 이것이 바로 용맹정진인 것이여.
석 달 동안 안거(安居)를 하는데 결제 때부터서 해제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 거기에 무슨 시비가 있으며, 무슨 분별이 있으며, 무슨 밥이 어떻고 반찬이 어떻고, 차가 어떻고, 옆에 사람하고 시비할 겨를이 어디가 있으며, 일체 수용(受用)은 인연(因緣)에 맡겨 버려.
밥이 되면 된 대로, 질면 진 대로, 반찬이 짜면 짠 대로,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차를 한번 먹게 되면 한번 먹고, 두 번 먹게 되면 두 번 먹고, 그 사찰 선방의 모든 규칙에 따라서 순응(順應)하면서, 오직 자가철주(自家鐵柱), 자기 스스로에 쇠기둥과 같은 법도(法度)를 탁! 세워서 처음 시작한 날부터서 끝나는 날까지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일념만년(一念萬年)으로 한결같이 그렇게 잡두리를 해 나간다면 이것이야말로 명실공히 용맹정진이요, 가행정진이 되는 것이여.
듣자니 이번에 세등선원에 결제한 모든 대중, 그리고 저기 군산에 반야선원의 대중들이 정말 산승(山僧)이 이렇게 말한 고대로 정진을 해왔다고 들었습니다. 이 부처님 가신 뒤 삼천 년이 되어서 말세(末世)라 할 수가 있는데, 말세에 이르러서 한국에 이 여러 군데 비구·비구니의 선방에서 이렇게 알뜰히 정진을 허고 있습니다.이렇게 알뜰히 해 가지고 일대사(一大事)를 요달하지 못하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전생(前生)에 닦은 것, 모든 시절인연(時節因緣)에 따라서 빨리 깨닫기도 하고 더디 깨닫기도 헐 뿐이지, 중간에 중단하지 아니하고, 중간에 사견에 빠지지 아니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그렇게 열심히 해 간다면 결국은 깨닫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나무토막이 강 상류에서 강을 따라서 흘러 내려가되, 중간에 맥히지 아니하고,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아니하고, 가다가 썩어버리지 아니한다면, 그 나무토막은 결정코 망망대해(茫茫大海)에 도달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 한 덩어리의 나무둥치를 우리 중생의 발심(發心)한 한 수행자에다 비교한 것입니다.
출가해서 선지식을 찾아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바른 법으로 목숨 바쳐서 도를 닦아나갈 때에, 중간에 중단하지 않고, 중간에 사견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끝까지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한다면은 만이면 만, 천만 명이면 천만 명, 한 사람 빠짐없이 다 견성성불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20분44초~28분40초)
*화택(火宅) ; 번뇌와 괴로움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불에 타고 있는 집에 비유한 말. 불길에 휩싸인 무서운 세계. 법화경에 나오는 「三界無安猶如火宅」라는 구절에 근거. *해탈(解脫) ;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납월 팔일(臘月八日) ;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성도(成道)한 날을 말함. 이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선원에서는 초하루부터 팔일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는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 *장군죽비(將軍竹篦) ; 보통 죽비(竹篦)는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쓰는 40~50센티의 불교 용구인데, 장군죽비는 참선할 때 졸거나 자세가 흐트러진 수행자의 어깨를 쳐서 졸음을 쫓는 약 2m의 큰 죽비.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 보아 깨달아 부처가 됨.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잡드리(잡두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의단(疑團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 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물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수용(受用) ; (물건을 남에게) 받아 씀. *순응(順應) ; 상황의 변화나 주위 환경에 잘 맞추어 부드럽게 대응함. *법도(法度) ; 규칙•법칙•율법•법규•결정들. *일념만년(一念萬年) : 한결같은 마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시절인연(時節因緣) ; 시절이 도래(到來)하고 인연이 합쳐지는 기회. [참고]시절(時節)-어떤시기나 때. 도래(到來)-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기회(機會)-어떠한 일•행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 *망망대해(茫茫大海) ; 한없이 넓고 큰 바다.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화두는 간단한 한마디에 지나지 않지마는, 아무 재미도 없고 그러한 한마디지만, 이 한마디 화두가 나의 생사(生死)의 명근(命根)을 끊는, 확철대오해서 자기의 자성불(自性佛)을 깨닫는, 본마음 고향으로 돌아가는 가장 없어서는 안 될 나침반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화두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그 화두를 바로 거각하기 위해서는 기본 준비가 필요합니다.
<참선하는데 세 가지 갖출 요건(三要)>
첫째는 신심(信心)이여.
이 한마디 화두를 가지고—이 화두에 근본은 의심(疑心)이니까, 이 의심을 타파(打破)함으로 해서 ‘참나’를 깨달을 수가 있고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철저한 신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신심이 철저하지 못하고서는 참선은 바로 가지 못하는 것이고, 이 신심이 철저하지 못하면 공부는 하다가 별 재미가 없으면은 중단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니, 신심이 철저해야 하거든. 대신심(大信心)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대분심(大憤心)이 있어야 한다.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모든 과거의 선지식(善知識)들은 일찍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을 해서 다 중생교화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이 일대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가. 나도 결정코 이 일대사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하는 대분심이 있어야 한다.
신심을 가지고서도 분심이 약하면 공부가 중단될 수 밖에 없고 자꾸 중간중간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것이어서 대분심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화두에 대한 의심이,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해야 한다 이것입니다. 이것을 고봉선사께서는 ‘참선하는 데 세 가지 요긴(要緊)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세 — 가부좌, 반가부좌>
그러한 것을 전제로 하고서, 초학자(初學者)는 몸을 바르게 갖는 법을 알아야 한다.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 이것이 부처님께서도 설법을 하실 때나 또는 공양을 잡술 때나 항상 이 가부좌를 하시고 계셨고, 탁발(托鉢) 걸식(乞食)을 하실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가부좌를 하셨는데,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도 이 가부좌가 가장 기본자세이고 안락지묘문(安樂之妙門)이기 때문에 가부좌를 항상 하시게 된 것입니다.
가부좌를 하면은 저절로 허리가 주욱 펴지고, 번뇌와 망상과 혼침이 침노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좋은 자세이기 때문에, 참선을 하는데는 가부좌나 또는 반가부좌를 하는 것이 가장 요긴한 것입니다.
<호흡 — 단전호흡>
그 다음에는 호흡(呼吸)을 고르는 일인데, 호흡은 우리가 무심코 있어도 저절로 숨이 들어갔다 나갔다 해서 살아있는 증거가 바로 호흡을 하고 있냐, 안 하고 있느냐 그것으로써 죽고 사는 것을 알 정도로 호흡이란 것은 대단히 중요한데,
참선하는데 가장 마음을 안정을 시키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또 몸도 편안하게 하고, 몸 안에 있는 모든 노폐물을 밖으로 다 내보내고, 따라서 혈액도 맑아지고, 몸도 가벼워지고, 마음도 안정이 되게 하는 데에는 이 단전호흡이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단전호흡(丹田呼吸)만을 전문으로 가르키는 그런 수련원도 있고 학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마는, 이 활구참선 하는 사람은 그런 데에서 가르키는 단전호흡과는 조금 다른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단전호흡은, 호흡을 들어마시되 조용하게 들어마셔서 아랫배가 약간 볼록하게 되는 것을 느끼면서 호흡을 들어마시고, 들어마셨으면 그것을 조용허니 내쉬되, 내쉼에 따라서 볼록해졌던 아랫배가 차츰차츰 홀쪽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숨을 들어마실 때나•잠깐 머물렀다가•숨을 내쉴 때나—배만 약간 볼록해졌다가 잠깐 머물렀다 또 조용하게 아랫배가 홀쪽해진 것을 느끼되, 순전히 그것만을 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고, 들어마셨다 내쉴 때 ‘알 수 없는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하고 단전호흡만 하면은, 이것은 도교(道敎)나 신선도(神仙道)나 외도(外道)들이 그 단전호흡을 함으로 해서, 이 몸을 건강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수단으로 단전호흡을 하는데,
우리 활구참선에 있어서 단전호흡은 이 몸을 가지고 백 년, 이백 년 오래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단정히 하고 호흡을 잘 고르므로 해서 상기병(上氣病)과 같은 그런 병을 예방하고, 또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맑아야 화두를 들고 정진하는데 대단히 효과가 있기 때문에 단전호흡을 이렇게 권장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외도들이 하는 단전호흡과는 차등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근본, 주(主)가 화두를 들어서 의단이 독로해서 그 의단을 타파하는 데에 있지, 장생불사 하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몸을 단정히 하고 그리고 단전호흡을 해서 호흡을 고르게 하며, 거기에 동시에 화두를 들고 의단이 독로하도록 해야 하는데, 이 화두를 들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나, 이 화두를 잘못 들면 자칫 잘못하면 골이 아프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상기병이 생겨서 공부를 지속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잘하지 못하는 사람도 간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기본이 잘못되어 갖고 있고 마음만 급해 가지고 억지로 용을 쓰면서 잘못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참선을 함으로 해서 병이 생겼다’하고 참선을 비방을 하고 그래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화두드는 법 - 화두의심>
화두를 드는 데 있어서는,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따져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말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더듬어 들어가서 알아 들어가는 그런 공부가 아닙니다. 화두를 참구(參究)한다 하니까, 참구라고 하는 게 무슨 이론을 동양철학이나 서양철학처럼 이론적으로 뭣을 따져서 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무이로(無理路)요 무어로(無語路)요 무모색(無摸索)이여. 이치길도 없고 말길도 없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없는 것이여. 다맛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의단(疑團).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일을 하고, 밥 먹고, 옷 입고, 똥누면서도 ‘이뭣고?’뭔 말을 들어서 기분이 나쁠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요. 일체처 일체시에 알 수 없는 의단, 의심을 자꾸 거각하는 것인데,
‘이뭣고~?’하면서도 생각은, 그런 가운데 벌써 딴 생각[別念]이 일어나는 경우도 얼마던지 있습니다. 일어나는 딴 생각, 번뇌망상을 없앨라고 하지 말고 또 번뇌망상 일어났다고 성화를 하지도 말고, 무슨 딴 생각이 일어나드라도 그 생각 그냥 고대로 놔둔 채, 나는 퍼뜩 ‘이뭣고?’ 이렇게 챙겨 나가는 것입니다.
아까 조실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그런 말씀이 계셨습니다마는, 일반적으로 참선을 할라면 망상이 일어나는 것 그리고 조금 마음이 고요해지면은 혼침이 오는 거, 혼침(昏沈)과 산란(散亂) 이 두 가지로 인해서 참선을 해나가는데 막대한 지장이 있다고 느끼고, 그것 때문에 공부가 순일(純一)허게 되지 않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서 번뇌도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또 혼침도 안 온다면은, 참선하기가 퍽 수월하고 공부가 일취월장해서, 금방 의단이 타파해 가지고 확철대오 할 거 같은데, 혼침 아니면 망상, 망상 아니면 혼침 이 두 놈이 번갈라가면서 들락거리니 그러니 공부가 한결같이 안된다. 이렇게 대부분의 참선을 허는 도반들은 그것을 성화를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이 되나,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의 최상승 법문에 보면은, ‘혼침이 들락거리고 망상이 들락거리는 것은, 간절한 마음이 속에서부터서 솟구쳐 오르지를 않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간절한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하지 않기 때문에 망상이 일어나고 혼침이 나온 것이지, 정말 속에서부터서 간절한 마음이 나온다면 어디에 그런 것이 붙을 수가 있겠느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이 말은 우리도 틀림없는 말씀이라고 인정을 할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화두는 알 수 없는 의심, 그 알 수 없는 의단—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놓쳐버리면 또 챙기고, 딴 생각이 일어나면 또 챙기고, 거각하고 또 거각해서, 결국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자꾸 챙기다보면, 어느날인가는 화두를 챙기지 안 해도 저절로 의단이 독로할 때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설사 의단이 독로해서, 간단(間斷)이 없고 또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그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경계를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경계가 온다 하더라도, ‘야! 인자 내가 공부가 제대로 되아가는구나’ 좋아하는 환희심(歡喜心)도 내지 말라 이것입니다. 환희심을 내면 환희의 마군(魔軍)이가 벌써 그 마음에 들어온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게 잘되어 가다 뚝 변해가지고, 영 혼침이 오고 망상•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래도 번뇌심을 내지 말라 이것입니다. 번뇌심을 내면 번뇌의 마군(魔軍)이가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 잘되어 간다고 좋아하는 마음 내지 말 것이며, 혼침•산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번뇌심도 내지 않고서, 한결같이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해서, 이렇게 간절한 '간절 절(切)'자, 한 글자를 놓치지 말도록 고인네들은 그렇게 간절(懇切)히 당부를 하셨습니다(10분 31초~26분 50초)
**송담스님(No.457) - 1991년 11월 첫째 일요법회(67분)법문에서. (용457)
(1) 약 20분.
(2) 약 8분.
(1)------------------
일주무영수(一株無影樹)를 이취화중재(移就火中栽)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부대삼춘우(不待三春雨)라도 홍화난만개(紅花爛漫開)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주무영수(一株無影樹)를 이취화중재(移就火中栽)다.
한 그루 그림자 없는 나무를 불 속에다가 옮겨 심어서 재배를 했더라.
부대삼춘우(不待三春雨)라도 삼춘(三春)—봄, 삼춘의 비를 기다리지 안 해도 홍화(紅花)가 난만개(爛漫開)다. 붉은꽃이 난만히 피었더라.
나무는 다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여. 큰 나무나 작은 나무나 그림자가 다 있는 것인데, 이 한 그루의 나무는 그림자가 없는 나무여. 그 그림자 없는 나무를 땅에다가 심는 것이 아니라 불구덩이 속에다가 심었더라.
그림자 있는 나무를 땅에다 심으면 반드시 비가 내려야 그 수분을 흡수해 가지고 다 자라게 되고 꽃도 피고 그럴텐데, 이 그림자 없는 나무는 땅에다 심지 않고 불구덩이에다 심었어. 그러기 때문에 봄비를 기다리지 아니해도 봄비가 오지 안 해도, 그림자 없는 나무에서 그 붉은 꽃이 곱게 곱게도 피었더라 이거거든.
이 그림자 없는 나무, 이것은 그 나무 모양이 푸른 것도 아니요 노란 것도 아니요 빨간 것도 아니여. 일체 모양이 없는데 어떻게 그 나무를 또 불구덩이 속에다 심느냐 그거거든.
볼래야 볼 수 없고 들을래야 들을 수 없고 잡을래야 잡을 수 없고 아무리 알라고 해도 알 수 없는 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그놈을 나무에다가 비유해서 읊은 시(詩)다 그거거든.
그 나무를 왜 하필 불구덩이에다 심느냐 하면, 우리 중생의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몸뚱이요, 그 몸뚱이 속에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불이 항상 훨훨 타고 있거든. 그 불구덩이 속에, 탐진치삼독에 훨훨 타오르고 있는 그 불구덩이 속에다가 이 그림자 없는 나무를 한 그루를 심었더라.
이 우리의 몸뚱이는 항상 이 몸뚱이 자체는 똥과 피와 오줌 고름 모다 그런 것이 속에 가득차 있는데, 그것을 엷은가죽으로 싸아 가죽 주머니 속에다 그것을 담어놨다 그말이여.
그래서 나오느니 아홉 구멍에서 항상 더러운 것이 꾸역꾸역 기어나와, 매일 같이 아침 저녁으로 씻고 닦고 분을 바르고 향수를 발라봤자 아홉 구멍에서는 끊임없이 더러운 것이 기어나오거든.
그리고 그 더러운 똥주머니속에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은 그 마음의 불—그 탐진치 삼독의 불이 끊임없이 타오르고있거든 훨훨~훨훨훨 타올라.
혹 부처님 경전을 읽거나 이렇게 법문을 들을 때에는 잠시 그것이 꺼진 듯 했다가 금방 돌아서면 도로 타오르거든.
어떻게 하면 이 똥주머니를 좋게 가꾸며 영양을 섭취하고 건강관리를 하고, 그리고 또 예쁘게 옷을 입히고 단장을할까? 거기에는 사람들이 많이 관심을 갖는데,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는 이 탐진치 삼독의 불 그놈을 잡드리하는 데는, 물론 이 자리에 계신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은 참 그 문제 때문에 지금 여기에 오시고 정진(精進)을 할라고 애쓰신 분들이지만 세계 50억 60억 인구가거개가 다 별로 그 그림자 없는 나무를 가꾸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이 몸뚱이는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혀봤자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금방 무너져 버린거여. 십 분도못 가서 내장부터서 썩어 들어가는 것이야. 그렇게 저를 위해서 참 몇십 년간을 공력을 들여서 봉양(奉養)을 했건만 한 숨에 배신을 해 버려.
그놈 받들다가—속담에 ‘모진놈 옆에 있다가 벼락맞는다’고, 그놈 하나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단속하다가 결국은가는 것은 잔뜩 업(業)을 짓고 결국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 버리고 만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림자 없는 나무가 불구덩이 속에 심어져 있는데 그냥 그대로 놔 둬도, 삼춘(三春)의 비를 맞지 않아도 붉은 꽃이 난만(爛漫)하게 필 수가 있을까?
그 타오르는 불속에 있는 그림자 없는 나무를 잘 가꾸어서 거기에서 영원히 시들지 않는 그 아름다운 꽃을 피게 할라면 정말 나의 모든 것, 이 몸뚱이와 우리의 모든 정신을 거기에다 바쳐서 그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할려고노력을 해야 그 그림자 없는 나무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다.
봄비는 필요가 없어. 봄비가 온다고 해서 불속에 있는 『그림자 없는 나무』가 꽃이 필 리는 없거든. 그래서 봄비는기다릴 것은 없으나,
정말 발심을 해서 철저하게 무상(無常)을 깨닫고 명예와 권리와 재산과 모든 그런 오욕(五慾)이 정말 허망하고 믿을 것이 못된다고 하는 철저한 발심(發心),
그리고 ‘이 문제는 오직 내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고 하는 결심,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있다’고 하는 신념,
그러한 바탕 위에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話頭)를 간택 받아 가지고 이 화두에 대한 의심, 아까 전강 조실스님의 임자년 녹음법문을 통해서 여러분은 아주 잘 들으셨을 줄 생각합니다마는,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염염상속(念念相續), 오직 인생으로 태어나서 이것 밖에는 할 것이 없다고 하는 철저한 신념만 있다면,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밥 먹으면서도 이뭣고? 똥 누면서도 이뭣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가만히 있어도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것을 듣고, 몸뚱이를 통해서 모든 것을 감각하고, 코를 통해서 냄새 맡고, 생각을 통해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때로는 성을 내고 때로는 슬퍼하고 기뻐하고, 우리는 아무 그런 생각없이 완전 무념(無念)의 경지에는 단 1분 동안도 있어 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생각이 일어나고, 무엇인가 육근(六根)을 통해서 무엇인가 알음알이가 움직일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그 곳에서 화두를 드는 것 뿐이여.
망상(妄想)이 일어난다고 조금도 걱정할 것도 없어. 그 망상 일어나는 그 찰나에 떠억 고대로 놔둔 채, 일어나는 망상을 없앨라고 하지 말고 그대로 놔둔 채, ‘이뭣고?’ 화두만 거각하면 되는 것이여.
학식이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똑똑하고 안 똑똑한 것도 상관 없고, 남자니 여자도 따질 것도 없고, 출가 재가도 따질 것도 없어.
앉았을 때는 앉아서 ‘이뭣고?’
서 있을 때는 서서 ‘이뭣고?’
슬픈 생각 일어날 때는 슬픈 그 생각에 오래 잠겨 있지 말고 퍼뜩 돌이켜서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속상하는 생각에 왜 오래 거기에 머물러 있느냐 그말이여, 속상하는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터억 숨을 들어마셔. (그리고) 내쉬면서 ‘이뭣고?’
세상에 이보다 더 간단하고도 쉬운 법이 어디가 있느냐 그말이여, 온갖 괴로움으로부터 그 괴로움을 이기고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가 있느냐.
그렇게 해서 자꾸 거각하고 또 거각하고.
‘화두가 잘 안 들린다, 망상 때문에 화두가 잘 안 들린다,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안된다’ 안된다고 걱정할 시간이 어디에 있느냐 그말이여, 안되면 다시 들면 그만이고.
망상이 일어난다고 걱정할 것이 뭐 있느냐 그말이여, 일어난 줄 알면 ‘이뭣고?’거든.
‘이뭣고?’ 이 공안,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이는 무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는 분은 정전백수자,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시는 분은 판치생모,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알 수 없는 의단만을 자꾸 거각해서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해 나가거든.
거기에 무슨 망상이 거기에 붙으며, 붙어봤자 그냥 놔둔 채 화두만 들면 망상은 저절로 자취가 없어져 버리는 건데,
이렇게 정성을 들이고 노력을 하는 것인데 그럼으로써 거기에 의단을 타파(打破) 그래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이 도리(道理)는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몸으로써 경험을 하고 깨달음으로써 우리에게 증명(證明)을 해 주신 것이여.
이 세상에 이것 밖에는 믿을 것이 없고 이것 밖에는 할 것이 없다 이거거든.
자식이 없는 사람은 자식을 낳기를 원하고, 재산이 많지 않은 사람은 많은 재산을 갖기를 원하고, 명예나 권리가 없는 사람은 갖은 수단을 써서 그런 것을 구하지만,
그 마음먹은 대로 다 구해지지도 아니 할 뿐 아니라 설사 뜻대로 이루어졌다 해도 그건 영원성이 없고 잠시 그러다가 또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가는 거여.
그런데 이 일대사 문제는 자꾸 하고 또 하고 하면 아무 재미가 없는 것 같지마는 그 속에 신심이 나고 환희심이 나고 분심(憤心)이 나고 더욱 해 갈수록 더 발심이 되는 거여.
‘내가 어쩌다 이런 좋은 법을 만났을까? 내가 만약에 이 법을 안 만났으면 내 신세가 어떻게 되었을까?’ 해를 거듭할수록 이렇게 신심이 굳건해져 가고.
그렇다고 해서 급한 생각을 낼 필요가 없거든. 급한 생각을 낸다고 해서 공부가 더 잘된 것이 아니여.
초심(初心), 초발심(初發心), 처음으로 발심을 해 가지고 참선을 시작한 사람은 그 초발심의 그 강렬한 신심으로 우격다짐으로 막 몰아부칠라고 그러거든.
초발심자가 그만한 분심이 있어야 하고 그만한 열의가 있어야 하기는 하지만 차츰차츰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여법(如法)하게 해 나가다 보면 그런 만용적인 우격다짐 식의 그런 신심이 차츰 순화가 되고,
그래서 이 몸뚱이와 생각을 알날신심(遏捺身心)—막 완력으로 몰아붙이고 몸뚱이를 들볶으고 생각을 너무 지나치게 막 몰아대고—하는 그런 것이 차츰차츰 순화가 되어서 정신을 올바르게 가다듬고 나가는 묘한 관(觀)을 스스로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까지는 정말 참 열심히 함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서 그럭저럭 하다말다 해 가지고서는 안되는것입니다마는.(처음~19분51초)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이냐. 몇 번이나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三惡途)에 들어갔고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을 몇 번이나 겪어왔더냐 그말이여. 몇 수십만 번을 짐승이 되었다가 날짐승이 되었다가, 긴짐승이 되었다가, 네발 달린 짐승이 되었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이러면서 돌고 돌아서 금일에까지 왔더냐.
원래는 우리도 비로자나 법신불(法身佛)과 똑같은 조금도 차등(差等)이 없는 본심왕이었다 그말이여. 그 본심의 왕을 배반한 탓으로 해서 우리는 삼악도와 사생을 돌고 돌아서 몇 억만겁을 겪어가지고 오늘에까지 이르렀더라.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고, 오늘 번뇌에 물든 그 번뇌염을 깨끗이 다 씻어버리고,
수연의구차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다. 인연 따라서 옛을 의지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을 떠나서 객지(客地)로 객지로 떠돌아 다니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떠돌이 신세로써 참 거러지 신세가 되어 가지고 그렇게 떠돌다가 비로소 자기 고향 갈 길을 찾았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기쁘겠느냐.
남북 이산가족들이 몽매지간에도 잊지 못할 가족 상봉, 그것참 그러한 경험이 있으신 분이 많이 계시겠지만 정든 사람과 이별하고, 고향과 가족 친지를 이별하고, 한 나라에 손바닥만한 땅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한 그런 것 생각해보면 참 기가 막히지마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원래 본심왕이였었는데 그 왕이 그 본심왕을 갔다가 등져버리고 떠돌이 신세가 되어가지고 삼악도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돌고 돌면서 갖은 고초를 당하고 금생에까지 무량겁을 겪어 왔을 뿐만 아니라 내생(來生)에도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또 그런 것이 거듭될 그런 신세가,
다행히 불법(佛法)을 만나고 정법(正法)을 만나서 우리가 본심왕의 본위치로 돌아갈수 있게 되었다면 이건 참 50억 인구 가운데 가장 행운아라고 할까, 가장 행복한 삶을 받아났다고 할것입니다.
이 정법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는 것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고 한 걸음 한 걸음을 헛되이 지내지 아니하고 본참공안(本參公案) 본참화두(話頭)를 잘 거각하고 단속하고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함으로써 우리의 본고향(本故鄕)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 이거거든.
고향을 모를 때에는 갈 곳도 없고, 가 봤자 별 목적이 없어. 그러니 우선 잘 먹고 보자 우선 잘 입고 보자 나중에 삼수갑산(三水甲山)을 가더라도, 우선 부자로 살아 보자, 좋은 차도 가져 보자, 좋은 집도 가져 보자 하지만,
고향이 있는 것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았다면 한시바삐 고향길을 향해서 계속 걸어야 하거든. 입는 것도 얼어죽지 아니하면 족하고 먹는 것도 굶어죽지 아니하면 족하고,
어쨌든지 한 걸음이라도 빨리 고향을 향해서 게으르지 않게 걸어가는 것 밖에는 어디에다가 시간과 힘을 허비할 것이냐 그거거든.(19분 50초~27분13초)
*사생(四生) ;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인 육도(六途)에서의 네 가지 생(生),네 가지 태어나는 방식.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이른다. *육도(六途) ; (=六道)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인(業因)에 의하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육도윤회(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道)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내생(來生) ; 죽은 후에 다시 맞이한다는 미래의 삶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회광반조(廻光返照) :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삼수갑산(三水甲山) ;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각각 함경남도 북서쪽과 동북쪽에 있는 오지(奧地)의 지역명이다. 이 두 지역은 특히 날씨가 춥고 산세가 험하여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귀양지로 유명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삼수갑산(三水甲山)’은 ‘춥고 험한 지역’이나 ‘유배지’ 등과 같은 일반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삼수갑산을 가다 ; ‘멀고 험한 곳으로 가다’ ‘매우 어려운 지경에 이르다’의 의미를 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