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송담 스님의 출가 일화 / 간화선(看話禪)은 모든 중생의 근기에 맞는, 사견(邪見)에 빠지지 아니하고 확철대오 할 수 있는 가장 수승한 법.
〇전강 조실 스님을 모시고 있으니까 아침마다 법문을 듣고, 그때도 꼭 『초발심자경(初發心自警)』 법문을 설하시고 그래서 법문을 듣고, 또 법회가 가끔 있어서 법문을 듣고, 또 대중과 같이 하니까 해태심(懈怠心)을 낼라야 낼 수가 없고 그래 좋더니, 혼자 있으니까 아무리 정신을 차려서 헐라고 해도 그 혼침(昏沈)을 막기가 어렵고, 해태심이 나서 억지로 이를 갈아붙이고 해도 잘 안된다 그말이여.
〇앞으로 육조 스님이나 부처님과 같은 또는 달마 스님과 같은 그러한 대종사가 나오셔서 우리 중생의 근기에 맞춰서 이 간화선보다도 더 훌륭한 법을 개척을 해서 지도를 하신 때에는 몰라도, 그러기 전까지는 이 간화선(看話禪)보다도 더 수승한 모든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는, 사견(邪見)에 빠지지 아니하고 확철대오 할 수 있는 법은 아직까지는 없다고 산승(山僧)은 믿는 바입니다.
**송담스님(No.201)—1983년(계해년) 춘계산철 해제 법회 (용201)
(1) 약 21분.
(2) 약 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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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담이 처음에 출가할 때, 출가하기 전에 학생 때부터 ‘참선을 하면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책방에 가서 참선에 관한 책을 여러 권을 구해 가지고, 근데 일본 책인데 구한 책이 마치 조동종 계통의 책을 구했습니다.
일본의 도원 선사(道元禪師)는 귀족 출신으로 어려서 조실부모를 해서 출가해 가지고 당나라로 건너가 가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선지식(善知識)을 찾은 것이, 여정 선사(如淨禪師)라고 하는 조동종 계통의 대종장(大宗匠)을 만나가지고 거기서 한 3년 간 목숨을 바쳐서 정진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아서 일본으로 돌아와가지고 조동종(曹洞宗)의 초조(初祖)가 되었습니다.
그 조동종 도원 선사의 어록을 구하고 또 조동종의 참선법 · 교리 · 선학 그런 것을 해설해 놓은, 도원 선사에 대한 연구하는 책을 구하고 그래가지고 그놈을 날마다 읽고 그래가지고 조동종의 참선을 참 여러 달을 내 나름대로 했는데, 그 조동종에서는 임제종(臨濟宗) 계통에 간화선(看話禪)을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법이라 해 가지고 힐난하게 비방하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또 임제종 계통에서는 조동종의 참선을 묵조사선(默照邪禪)이니 해 가지고 대단히 또 조동종 계통의 묵조선을 공격을 하고 해서, 중국에서부터서 임제종과 조동종 간에는 대종사끼리 그렇게 힐난하게 아주 사마외도라고 참 극렬한 표현을 하면서 피차 비방을 하고.
그런데 내가 학생 때 마치 그 조동종 계통의 책을 읽어 가지고 나도 '확실히 조동종 계통의 참선법이 옳다'고 생각을 하고 '간화선은 대단히 나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아무래도 속가(俗家)에서는 도저히 참선을 할 수가 없어요. 여러가지 복잡하고 그래서 ‘아무래도 내가 참선을 할라면은 천상 절로 가서 해야겠다’하는 생각이 들어서 절에를 갔는데, 마치 전강(田岡) 조실 스님이 훌륭하시단 말씀을 듣고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신 절을 찾아갔습니다.
광주 지산동 골짜구니에 들어가면 향로봉 밑에 ‘자운사’라 한 조그만한 암자가 있었는데, 그 절에다가 그해 여름에 전강 조실 스님과 또 종정을 지내신 윤고암 스님, 두 스님이 거기에서 참선방을 하신다 그래 가지고 거기를 찾아가서 방부(房付)를 들였습니다.
내가 꼭 중노릇을 할려고 간 것은 아니고 참선을 할려고 갔는데, 집에서 다 한복을 만들고 그래가지고 식량과 찬대(饌代) 모다 그런 것을 다 준비를 해 가지고 가서 방부를 들이고 그래 있는데.
가자마자 조실 스님을 만나 뵈옵고, 나는 거기서는 화두 어쩌고 해도 ‘그건 다 못된 참선을 하고 있다’ 이리 생각을 하고, 나는 내 속으로 조동종의 묵조선(默照禪)을 딱 하고 있는데 조실 스님이 "너는 앉아서 뭣을 하냐?"
"참선합니다"
"무슨 참선을 어떻게 하느냐?"
"그냥, 이렇게 속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고 소상하니 (말하라 해서) "생각없는 생각으로 관조를 하고 있습니다"
"너 조동종의 묵조선을 하고 있구나"
"예, 그렇습니다. 왜 그것이 나쁩니까?"
"차라리 참선을 안 하는 것이 낫지, 천하 못쓸 것이니다"
"그것이 왜 나쁜가요? 어떤 참선이 좋습니까?"
"화두를 타 가지고 화두를 의심을 해야지, 화두도 없이 그렇게 앉아서 무슨 깨달음에 이르겠느냐"
"그 화두라 하는 것이 화두를 들고 앉아서 깨닫기를 기다리고 앉었는 것이 그것이 어찌 바른 참선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원래부터 우리는 본래 이 자신이 부처고 우리 자성이 있는데, 그 있는 자성을 바로 보기 만하면 관조하기 만하면 고대로 새로 깨달을 것 없이 본래 부처인대, 무엇을 깨달을 것을 기다릴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벌써 시작할 때부터서 소견이 삿된 것이 아닙니까?"
내가 조동종 계통에 읽은 책을 본 대로, 있는 대로 다 조실 스님 앞에 내 놓으면서 계속 조실 스님하고 토론을 해서 며칠을 해가지고 며칠 동안을 내가 강경허니 버티다 버티다 내가 딸려 가지고, 결국은 조실 스님한테 항복을 하고 화두(話頭)를 정식으로 타서 참선을 했습니다.
난 중이 될려고 가지도 않았는데 조실 스님이 장삼(長衫)을 주시면서 입으라고 하시고, 들어가자마자 나를 조실 스님이나 고암 스님이나 거기에 계신 여러 스님네들 또 신도들도 이십 여명 있었는데 모다 나를 스님 대우를 했습니다. 계(戒)도 받지도 않고 또 행자(行者)도 아니죠.
그랬는데 나를 ‘은(隱) 수좌, 은 수좌’하고 수좌(首座)로 아주 정식으로 대접을 받었습니다. 장삼을 입고 예불을 하고 또 조실 스님이 어디 법회가 있어서 가시게 되면은 나를 시자(侍者)로 데리고 가시고, 그래서 승속 간에 나를 아주 스님으로 대접을 하고 그래서 참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철을 지냈는데, 그 지내보니까 모다 거기에 모이신 스님네나 모다 정말 이 고봉 스님처럼 목숨을 바쳐서 철두철미하게 정진을 했으면 나도 그것을 보고 발심(發心)을 해서 그냥 그길로 계를 받고 출가를 했을런지도 모르는데,
모다 입선(入禪)하고 방선(放禪)하고 하는데 형식적으로 하고, 방선만 했다 하면은 돌아서서 잡담하고 맨 뭐 못된 소리나 하고.
그래서 내 자신이 ‘에이, 이런 데 있으면은 나까지 물이 들겠다’ 그래 가지고 '절에 가서 있을 것이 아니라 다시 집으로 가서 선조(先祖) 산소 밑에 그 산재각(山齋閣)이 여러 군데가 있는데 그런 데 가서 방을 하나 치워 놓고 혼자 생식(生食)을 하면서 차라리 참선을 한 것이 낫겄다’ 이리 생각을 해 가지고 해제를 하고서 짐을 꾸려 가지고 나오니까,
조실 스님께서 "아, 중이 될 줄 알았는데 중이 안 되고 가는가?"
"예, 애당초부터 중이 될라고 오지도 않았고, 어디 산재각 같은 데 가서 혼자 생식을 하면서 정진을 좀 해보고 싶습니다"
"그래, 자네가 언제라도 중이 될 때에는 내한테 와서 중이 되어야 하네"
"아, 그렇고 말고요. 되기만 함사 내가 스님한테 와서 상좌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중 될 생각은 아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실 스님이 손을 잡고 이별을 하시면서 "자네가 아무때라도 날 찾아오고 말 것이네" 그러시거든요.
그래도 속으로는 ‘내가 확철대오나 하면 스님을 찾을까, 내가 중은 될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속으로는 생각을 하면서도 각박하게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없어, "예, 제가 스님을 찾아 오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로 그렇게 하고는 보따리를 짊어지고 집으로 와서 다시 산재각 재실(齋室)을 찾아가서 생식을 하면서 겨울 한철을 지냈습니다.
지내고 보니, 절에 있으니까 새벽 3시가 되면 자동으로 대중과 같이 일어나서 같이 정진하게 되고 시간 맞춰서 하니까 참 좋은데, 혼자 가서 하니까 새벽에 영 일어나기가 어렵고,
또 자명종을, 시계를 틀어 놓고 하니까 일어나기는 일어나는데 일어나서 억지로 세수를 하고, 추우니까 이불을 둘러쓰고 앉었으니까는 영 졸음이 퍼오고 참 안 좋다 그말이여.
조실 스님을 모시고 있으니까 아침마다 법문을 듣고, 그때도 조실 스님이 꼭 『초발심자경(初發心自警)』 법문을 설하시고 그래서 법문을 듣고, 또 법회가 가끔 있어서 또 법문을 듣고,
또 대중과 같이 하니까 해태심(懈怠心)을 낼라야 낼 수가 없고 그래 좋더니, 혼자 있으니까 아무리 정신을 차려서 헐라고 해도 그 혼침(昏沈)을 막기가 어렵고, 해태심이 나서 억지로 이를 갈아붙이고 해도 잘 안된다 그말이여.
그래서 다시 내가 결심을 하기를 '내가 천상 이 공부를 헐라면은 싫거나 좋거나 가서 출가를 해서 중이 되어야겠고, 일단 중이 된 이상에는 남이야 공부를 하거나 말거나, 잡담을 하거나 말거나, 술을 먹거나 담배를 먹거나 고기를 먹거나, 무슨 별 못된 짓을 하거나 말거나, 남의 흉을 보지를 말아야겠다.
다른 사람이 잘못하고 해태를 할수록에 나는 더 분심을 내고 더 신심을 내서 공부를 해야겠다. 그러니 그 시비에 내가 말려들지 아니하고, 잡담하고 그런 데 내가 말려들지 아니할려면 묵언(默言)을 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때가 아직 학교를 졸업을 채 못한 때인데, 그때 집안에선 모다 다니던 학교니까 졸업하고 절에 가도 늦지 않으니까 졸업을 마치고 가라 그래서, 그래서 다시 학교에 들어가가지고 그럭저럭 그냥 졸업을 하고는,
졸업한 날 학교 이발소에 가서 면도로 머리를 싹 깎어버리고는 그길로 절로 가서 조실 스님을 찾아가서 뵈옵고, 가니까 마침 고암 스님도 계시고 조실 스님도 계시고 해서 거기서 며칠 사이로 그저 가사 · 장삼을 준비를 해가지고는 계(戒)를 받았습니다.
받고 나서 며칠 안 있다가 묵언을 하고 그렇게 정진을 했는데, 근기(根機)가 원래 둔하고 약해서 고봉 스님처럼 그렇게 철저히 정진을 못하고, 묵언을 하면서도 온갖 시비에 다—자연히 뭔 말을 하면은 손짓 발짓을 하고 뭐라고 써서 문답을 하고, 그렇게 철저히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한 과거를 생각해 볼 때에 ‘선지식(善知識)을 여의고서는 이 공부는 못할 것이다’한 것을 알고.
조동종은 원래 그런 무슨 삿된 종파가 아니고, 육조(六祖) 스님 밑에 청원행사(靑原行思) 선사라고 하는 큰 도인이 있었는데, 그 청원행사 선사 밑에서 벌어지는 종파가 이 조동종입니다.
임제종은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 밑에서 벌어졌고, 조동종은 청원행사 선사 밑에서 벌어진 동산(洞山) 선사나 조산(曹山) 선사, 그런 대선지식 밑에서 벌어진 종파로써 전혀 삿된 종파가 아닙니다.
아닌데, 왜 묵조사선이라고 하냐?
선학사(禪學史)적으로 본다면은 오히려 조동종이 임제종보다도 더 사형(師兄)이기 때문에 조동종이나 그 선학사상(禪學史上)으로 볼 때에는 조동종이 오히려 달마 스님으로부터서 내려오는 정통이다. 이렇게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에는 이 조동종 계통의 종파가 정식으로 내려오지를 못했습니다.
조동종이 내려오지를 못하고 임제종이 계속해서 계계승승해서 오늘날까지 내려와서, 그러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사람으로서 조동종 계통의 묵조선을 헐라야 내려오는 종사(宗師)가 없어서 천상 묵조선을 할라면은 책을 통해서 할 수밖에 없는데, 책을 봐가지고 참선을 한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하는 방법은 알 수가 있지만 공부를 하다가 어떤 소견이 난다든지 경계(境界)가 났을 때에 어떤 종사가 없기 때문에 점검을 받을 수가 없어. 이런 어떤 경계가 났을 때 이것이 옳은 경계인지 나쁜 경계인지 알 수가 없다 그말이여.
그래서 옳게 해 가면서도 그른지 옳은지 의심을 끊틀 못하고, 잘못된 경계가 나타나도 그것이 옳은 경계인 줄 알고 거기에 그대로 나간다면은 정말 삿된 소견에 떨어져서 자기도 그르치고 자기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도 그르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말이여.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아닌 것을 생각하라’ 조동종 계통의 어록을 보면 공부하는 방법을 그렇게 표현을 했다 그말이여.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아닌 생각을 생각하라’ 무슨 말이여?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아닌 것을 어떻게 생각해?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 믿어지는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타 가지고, 아까 고봉 스님께서 말씀하신 그 단(丹), 단을 얻어가지고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목숨 바쳐서 정진을 여법히 하지 않고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앞으로 육조 스님이나 부처님과 같은 또는 달마 스님과 같은 그러한 대종사가 나오셔서 우리 중생의 근기에 맞춰서 이 간화선보다도 더 훌륭한 법을 개척을 해서 지도를 하신 때에는 몰라도, 그러기 전까지는 이 간화선(看話禪)보다도 더 수승한 모든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는, 사견(邪見)에 빠지지 아니하고 확철대오 할 수 있는 법은 아직까지는 없다고 산승(山僧)은 믿는 바입니다.
‘과거에, 무슨 육조 스님 이전에 무슨 화두란 소리가 어디가 있느냐?’
좁은 소견으로 내가 삼십 여년 전에 국집(局執)했던 그러한 생각이 떠올라서, 마치 오늘 고봉 스님의 단(丹)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확철대오 할 수 있는 그 단(丹)이라고 하는 법문이 나왔기에 지나간 일을 더듬어서 여러 대중께 말씀을 드렸습니다.(31분2초~51분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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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추위가 한바탕 강추위를 해서 뼈골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어찌 코를 치는 진한 향기를 얻을 수가 있을까 보냐.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종장(宗匠 근본·우두머리 종/장인·우두머리 장) ; 수행한 바가 다른 이의 사표(師表)가 될 만하여 법맥을 이어받은 고승(高僧).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조동종(曹洞宗) ; 중국의 선종은 달마(達磨)로부터 시작하여 당나라 때의 6조(六祖) 혜능(慧能)에 이르러 크게 성했다. 조동종은 이 혜능 문하인 청원행사(靑原行思)의 계통으로부터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와 그의 제자 조산 본적(曹山本寂, 839-901)에 의해 형성된 종파이다.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은 자신이 본래 부처의 청정한 성품을 갖추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묵묵히 좌선만 하면 저절로 그 청정한 성품이 드러난다는 묵조선(默照禪)을 선양하였다.
이 이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자세하지 않으나, 법안 문익(法眼文益)선사의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에 있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일 것이다.
「동」은 동산양개(洞山良价)의 동이겠지만, 「조」는 동산의 제자 조산 본적(曹山本寂)이 그 종지를 크게 밝혀서 완성한 때문이라 하는 말도 있다. 중국의 문법에 선후와 시종을 거꾸로 붙이는 전례가 아주 없는 바도 아니지만 제자의 이름을 스승의 이름 위에 놓은 것이 당연한 경우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송나라 이후에는 조계산(曹溪山)의 「조」로써 육조의 바른 갈래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왔다. 또한 조산 본적의 조산도 조계산을 사모하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 것이다.
그 가풍은 정편 오위(正偏五位)를 세워서 아주 세밀하고 말과 행실이 서로 일치하고, 이치와 일이 무르녹게 합하여, 본래면목으로써 종지(宗旨)를 삼는다.
일본의 조동종은 도원(道元: 1200~1253)이 1223년 송나라에 들어가 중국 조동종의 선승인 여정(如淨)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계승하였다. 도원 선사는 1227년 귀국하여 일본에 조동종을 전파하였다.
*초조(初祖) ; 한 종(宗)을 처음 세운 스님.
*임제종(臨濟宗) ; 중국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이다.
임제종은 북방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송대(宋代)에 석상 초원(石霜楚圓) 문하에서 양기 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와 황룡 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가 나와, 양기파는 성행했으나 황룡파는 얼마 안 가 쇠퇴하였다.
양기파 문하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화두(話頭)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하여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그의 선풍(禪風)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마외도(邪魔外道) ; 불법(佛法)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외도. ‘사마’란 삿된 마구니라는 뜻으로 불도(佛道)를 성취하기 위한 수행을 장애하는 모든 것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인데, 외도 중 삿된 견해로써 불도 수행자를 어지럽히는 자를 사마외도라 한다.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묵조사선(默照邪禪) ;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그러한 공부. 이것은 깜깜한 귀신굴(鬼神窟) 속에서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라 해서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장삼(長衫) ; 스님의 웃옷. 길이가 길고 품과 소매를 넓게 만든다.
*행자(行者) : ①수행자.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사람. ②계(戒)를 받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절에 있으면서 여러 소임 밑에서 일을 돕고 있는 사람.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시자(侍者) ; ①시중(侍從)을 드는 사람. ②스승, 장로를 따라서 시중을 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승(高僧)의 가까이서 시중을 들고 명령에 따르며, 항상 용무를 다하는 제자를 말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재각(齋閣) ;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
*선조(先祖) ; 한집안에서 윗대의 조상.
*생식(生食) ; 음식물을 익히지 않고 날로 먹음. 또는 그런 음식.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 고려 중기 보조지눌(普照知訥)이 지은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과 신라의 원효(元曉)가 지은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고려 후기 야운(野雲)이 지은 《자경문(自警文)》의 세 가지의 글을 합쳐서 한 권으로 엮은 책.
《계초심학인문》은 불교에 입문한 초심 행자가 알아야 할 범절과 수행에 관한 내용이고, 《발심수행장》에는 수행에 필요한 마음가짐이 적혀 있고, 《자경문》에는 수행인이 스스로 일깨우고 경계해야 할 내용이 담겨 있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육조(六祖) : (638 ~ 713) 중국의 선종(禪宗)은 달마(達摩)대사를 초조로 삼고, 그로부터 육대 되는 혜능(慧能)을 육조라고 한다. 그는 속성이 노(盧)씨고,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 신흥(新興)에서 났다. 세 살에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하여 공부하지 못하고, 날마다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스물네 살 때에 장터에서 어떤 사람이 <금강경>읽는 것을 듣고 깨친 바 있어 그 사람의 지시로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黃州府) 황매산(黃梅山)에 가서 오조 홍인대사(弘忍大師)를 뵙고, 그의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를 찧고 있었다.
오조가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하는데, 교수사(敎授師)로 있는 신수(神秀)는 글 짓기를 「몸은 보리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 부지런히 닦아서, 티끌 묻지 않도록(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이라 하였다.
이때 노행자(盧行者)는 「보리 나무 없는 것, 마음 거울 비인 것, 아무것도 없는데, 티끌 어디 묻으랴(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고 지었다. 오조는 그를 인가(印可)하고 석가여래의 법통을 표시하는 의발(衣鉢)을 전해 주었다.
그는 남방으로 돌아가서 십팔 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가 비로소 중이 되어, 소양(韶陽)의 조계산(曹溪山)에서 선법(禪法)을 크게 일으키니 견성(見性)하여 그 법을 이은 제자만 사십여 명이 있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1년에 칠십육 세로써 입적하였다。저술로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있다.
*청원 행사(靑原行思) : (? – 740) 속성 유(劉)씨。강서성 길안부(吉安府) 여릉현(廬陵縣)에서 났다。어려서 출가하여 깨친 바 있어, 조계(曹溪)에 가서 육조의 인가를 받고, 대중의 상수(上首)로 있었다.
그리하여 육조 문하의 장로(長老)이더니, 뒤에 그 고향인 길주(吉州) 청원산 정거사(青原山靜居寺)에서 교화하였는데, 육조가 열반한 뒤에 학자들이 그 곳에 많이 모였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28년에 입적하였다.
§(109) (게송)산월투창백~ / 물의 습성 / 중생의 망념을 여의지 말고 거기서 화두를 거각하는 것이 참나를 깨닫는 가장 가까운 길 / 일념단속 / 도솔천내원궁 / 득력.
〇일어나는 그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중생의 망념 그놈을 여의지 말고 거기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도리, 오직 여기에서만 바로 참나를 깨닫는 가장 가까운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모든 우리의 중생심, 번뇌 망상을 버리고 따로 찾는다면 그 사람은 무량겁을 닦아도 깨달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중생심(衆生心)을 여의고 불성(佛性)이 존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심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부처님이 있다.
〇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진여자성, 참나, 나는 성불(成佛)을 해서 부처님으로 계실 때나, 죄를 짓고 지옥에 가서 있거나, 우리 중생으로서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건 간에 우리의 진여불성에는 조금도 늘거나 줄거나 새로 생겨나거나 죽거나, 때가 묻거나 깨끗하거나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함이 없으면서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 천 가지 만 가지로 모습을 나투면서도 원래로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물에 있어서의 습성에다가 비유해서 말씀을 드렸지마는 이것은 하나의 비유에 지내지 못하고 '참나'라고 하는 것은 오직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참선(參禪)을 함으로서만이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을 드린 것은 우리 모두가 올바르게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이 몸으로, 이 죄 많은 몸으로, 이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으로 가득찬 이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반드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여러분에게 증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〇결제가 석 달 동안, 내년 보름까지 석 달입니다마는 하루 하루씩을, 「오늘 하루 결제다」 이렇게 생각하고 하루를 딱! 작정을 하고서 알뜰하게 하루를 지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09)—1979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2.4) (용109)
(1/3) 21분.
(2/3) 19분.
(3/3) 9분.
(1/3)----------------
산월투창백(山月投窓白)이요 계성입호명(溪聲入戶鳴)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욕지구년묵(欲知九年黙)인댄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산에 산위에 뜬 달이 창에 비추어서 환하구나. 그리고 시냇물 소리는 문안에까지 들려온다. 산월투창백(山月投窓白)이요 계성입호명(溪聲入戶鳴)이라.
욕지구년묵(欲知九年黙)인댄,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묵무언(默無言) 하신 뜻을 알고자 할진댄, 그 말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알고자 할진댄,
수향차중명(須向此中明)이니라. 모름지기 이 가운데를 향해서 밝힐지니라.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그 도리를 알고자 할진댄, 산 달이 창에 비추어서 희고 시냇물 소리가 방안에까지 들려온다. 이 속을 향해서 밝힐지니라[須向此中明].
오늘기미년10월15일동안거결제일을맞이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격외선(格外禪) 도리, 내가 나를 깨닫는 도리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도리는 깨닫지 못한 분상에서는 아무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무슨 뜻인지 요량을 할 수가 없지마는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고 깊고 깊어서 그래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산 달이 창에 비추어서 환하니 희고, 방안에 앉아서도 시냇물 소리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농부가 쟁기를 짊어지고 논으로 가고, 밥을 먹을 때 숟갈로 밥을 떠서 입에다 넣으면 저분은 반찬 그릇으로 간다.
바로 이 평상화(平常話)—우리 일상 생활에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한숨 자고, 부르면 대답하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봄이 오면 풀은 파릇파릇 풀이 돋아오고, 가을이 오면 단풍이 져서 떨어지는 이 도리,
이 도리를 내놓고는 최상승 활구법, 격외선 도리, 도솔천 내원궁,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寂滅宮)을 장엄하는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가장 빨리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발로 걸어 다니고, 손으로 일하고 글씨 쓰고, 입으로 말하고 하는 중생으로서 육체적인 모든 동작, 정신적인 모든 작용, 일상 생활을 떠나서 이것을 찾을라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 그때 거기서 생각 생각이 일어나는 그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중생의 망념 그놈을 여의지 말고 거기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도리, 오직 여기에서만 바로 참나를 깨닫는 가장 가까운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모든 우리의 중생념, 중생심 번뇌 망상을 버리고 따로 찾는다면 그 사람은 무량겁을 닦아도 깨달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을 버리고서 물의 습성(濕性)을 찾아서는 영원히 그 사람은 습성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중생심을 물에다가 비유한다면 물은 온도에 따라서 때로는 흐를 수 있는 액체로 되기도 하고, 때로는 영하로 내려가면 얼어서 고체가 되기도 하고, 섭씨 백 도가 되면 끓어서 증기로 기체로 변하기도 합니다.
기체도 되었다, 액체도 되었다, 고체도 되었다, 그때 그때 상황 따라서 물도 되었다, 얼음도 되었다, 김으로도 되었다 또는 눈도 되었다, 서리도 되었다, 우박도 되었다 그때 그때 상황 따라서 변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모양으로 있던지 간에 변함이 없는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습성(濕性)이라 하는 것입니다. 습한 성질. 물의 습성이라 하는 것은 그 모양의 여하에 따라서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진여자성(眞如自性), 참나, 나는 성불(成佛)을 해서 부처님으로 계실 때나, 죄를 짓고 지옥에 가서 있거나, 우리 중생으로서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건 간에 우리의 진여불성에는 조금도 늘거나 줄거나 새로 생겨나거나 죽거나, 때가 묻거나 깨끗하거나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함이 없으면서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 천 가지 만 가지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천 가지 만 가지로 모습을 나투면서도 원래로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물에 있어서의 습성에다가 비유해서 말씀을 드렸지마는 이것은 하나의 비유에 지내지 못하고 '참나'라고 하는 것은 오직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참선(參禪)을 함으로서만이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을 드린 것은 우리 모두가 올바르게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이 몸으로, 이 죄 많은 몸으로, 이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으로 가득찬 이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반드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여러분에게 증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대보살님들도, 모든 성현들도 깨닫기 전에는 우리 범부(凡夫)와 똑같은 것입니다. 깨달으면 그것을 '깨달은 분'이라 해서 '붓다(Buddha)'라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이고, 깨닫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범부인 것입니다.
범부와 성현과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차이가 있다기보다는 부처님 경전에 말씀에는 「중생과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은 참 말씀이요, 진실한 말씀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중생심(衆生心)을 여의고 불성(佛性)이 존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심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부처님이 있다.
물이 있는 곳에는 설사 그것이 얼음이 되었건, 우박이 되었건, 눈이 되었건, 물의 변화체에 어떠한 변화된 상태에 있건 간에 거기에는 반드시 습성(濕性)이 있는 거와 같이, 모든 중생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중생을 여의지 아니하고 거기에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서,
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지도하에 열심히 생활 속에서 슬픈 일을 당하면 슬픈 일 속에서, 괴로운 일을 당하면 괴로운 일을 당한 바로 거기에서 괴로운 것을 띠어 버릴려고 하지 말고, 슬픈 것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 슬픔 속에 젖어 있는 그 자리에서 그 속에서 '이 뭣고?' 이렇게 한 생각을 돌이킨다면 그 슬픈 그 상황이 바로 선방(禪房)이요, 선불장(選佛場)이요, 부처님 회상(會上)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 하는 방법이며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최상승법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넓고 범위가 넓고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그러한 좋은 길인 것이며 또한 어떠한 근기가 하열 하건, 죄가 많건, 몸이 아프건 그런 것, 오히려 그러한 역경계(逆境界) 속에서 더욱 간절해질 수 있는,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는 그래 가지고 깨달을 수 있는 그러한 미묘하고도 고마운 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절로 절로 다니시면서 기도를 주로 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주로 염불이나 경을 읽으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천수(千手)를 열심히 하시거나, 여러 가지 그러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것도 다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한, 정법(正法)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한 부처님과 성현들이 설허신 다 미묘한 방편(方便)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마는, 우리는 방편을 통해서 그것을 징검다리로 해서 바로 구경(究竟)의 길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지, 방편에 오래 집착해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동안 용화사에서 누누이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과 저의 말씀을 통해서 어떠한 것이 방편이고, 어떠한 것이 바로 직접적으로 설해 드리는 경절문(徑截門), 바로 가깝고 바른 길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동안거 결제(結制)일인 동시에 백일기도 입재(入齋)일입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 오대산이라든지 남해 보리암이라든지 강화 보문, 낙산사 이런 성지(聖地)로 가서 기도를 하시는 것도 좋습니다마는 참 기도는 때와 장소가 따로 없어야만 정말 참다운 기도가 된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부처님은 꼭 오대산만 가야 거기에 계신 것이 아니고 바닷가만 가야 거기에 관세음보살이 꼭 계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편의상 보다 더 철저한 마음으로 일주일이나 사흘 간을 철저하게 기도를 하기 위해서 그러한 성지를 찾아가는 것도 또한 뜻이 있다고 하겠습니다마는 우리는 노상 그런 성지만 찾아가야만 기도가 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한 생각 간절한 마음으로 불보살(佛菩薩)의 명호(名號)를 염(念)할 때 그곳에는 언제라도 불보살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먼 데서 오셔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생각 정성스럽고 간절할 때에는 언제나 거기에 불보살이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 특별히 기회를 내서 성지에 가는 것도 뜻은 있다고는 하지마는, 우리는 꼭 그때만을 기도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 가정에서 직장에서 거리에서 차중에서,
더군다나 이 절에 오시고 가시고 할 때 또 절에 와 계실 때 언제 어디라도 바로 그 자리가 법당이요, 성현이 계시고 기도 도량으로 알고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가신다면 그분이야말로 정말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처음~20분42초)
(2/3)----------------
언젠가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옴마니반메훔'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다 좋은 염불이요 주문이지만 '이 무엇고?' 한번 거각(擧却)하는 것이 '관세음보살, 옴마니반메훔' 육백만 번하는 공덕보다도 더 수승하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드는 곳에 최상승 활구참선을 하면 그것은 바로 팔만대장경을 다 읽고 그것을 바로 실천에 옮긴 것과 똑같은 이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많은 경을 읽으신 분도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아무리 많은 대소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을 다 읽으신다 하더라도 올바르게 읽으신다면 결국은 '이뭣고?' 참선을 할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읽지 아니하고도 이 말씀을 정말 뼛속 깊게 믿고 느끼고 그리고 실천을 하신다면 더욱 좋은 것입니다.
참선을 하라고 권고를 하면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경전도 읽어보지를 못했고 절에도 별로 다니질 안 해서 뭘 좀 알아야 하지, 아무것도 몰라가지고 무슨 참선을 하겠습니까?'
그래 가지고 무슨 읽을 책을 좀 구해달라고 이러한 부탁을 하시는 분들 가끔 만납니다.
많이 알아 가지고, 불교에 교리에 대해서 모다 많이 알아야만 참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저것을 많이 알아가지고 참선을 잘 못한 그런 분도 많이 있습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경도 별로 읽어 보지를 못하고 다못 시키는 대로만 고지식하게 진실하게 하는 분이 오히려 더 공부를 잘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많이 읽고 생각하고 알고 그래 가지고 교리에 대해서 '뭐?'하면 줄줄줄줄 줄줄줄 아주 거 잘 해설을 하고 말을 하고 그리고 그것으로써 스스로도 흐뭇하게 생각하고, 많이 불교에 대해서 자기가 참 공부를 많이 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신 분도 있습니다.
물론 불교에 대해서 후배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불교는 좋다고 하는 것을 얘기함으로써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불법을 믿겄게 하는 데에는 하나의 좋은 재료가 될 수가 있고 방편이 될 수가 있지마는, 자기 스스로의 공부를 위해서는 그러한 것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공부를 잘한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공부에 장애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물론 불법은 자기 한 사람만 좋으면 그만인 게 아니고—자기만 옳게 믿고 닦으면 그만이다, 그것이 아니라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도 이러한 좋은 불법을 믿고 실천하게 하도록 해 주기 위해서 손을 이끌어 주고 권고하고 이렇게 하는 것도 큰 복을 짓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자리이타(自利利他), 자기도 좋고 남도 이롭게 하는 대승불교요,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물론 여러분들께서도 한 사람이라도 더 이 불법을 믿고 정법을 믿어서 참선을 하도록 서로 이끌고 권고하고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자기가 공양미(供養米)라든지 성금을 갔다가 부처님께 올리고 불공을 드리고 기도를 하고 그런 것보다도 한 사람이라도 더 이 불법을 믿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그 공덕이 몇십 배 더 수승하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다른 사람에게 밥을 주고 돈을 주고 옷을 준 그런 물질적인 공덕 짓는 것은 한정이 있어. 언젠가는 거기에 해당한 복을 받고 나면 그것으로써 끝이지만,
말로써건, 자기의 마음으로써건 또는 행동으로써 남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어 가지고 자기를 인연해서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닦도록 해 준다면 그것은 영원한 무루(無漏)의 복(福)을 짓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공부를, 자기 마음 닦는 화두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계속 동분서주, 그런 복을 짓기 위해서 동분서주(東奔西走)하라,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동시에 이루어질랴면 오면서 가면서, 일을 하면서 차를 타면서 화두를 들고 가고, 화두를 들고 오고 이렇게 해서 자기 생활이 완전히 화두를 중심으로 해서 화두 관조(觀照)하는 것을 여의지 아니하면서 생활을 하게 되면 자기도 나날이 향상되어 가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향상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에 모든 재앙과 장애와 업은 자기의 마음으로부터 지어서 받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정법으로 돌려서, 참나 깨닫기 위한 진실한 수행이 바로 생활이 될 때에 그 생활은 한 걸음 내디디고 한 손 올렸다 내린 모든 자기의 동작, 눈 한번 감았다 뜨고 입으로 말하고 밥 먹는 모든 동작이 고대로 참된 수행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같이 생활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 그러한 행동, 그러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들은 다른 사람에게 많은 좋은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수행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는 조금도 옛날보다 더 향상되는 것이 없이 입으로만 '참선을 해라, 정법을 믿으라' 아무리 권고해 봤자 별로 그렇게 그 사람이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내 먼저 철저히 정법을 믿고 일상 생활 속에서 아주 진실하게 수행을 함으로써 '그분의 말과 마음가짐과 모든 행동이 그 전보다 더 모든 점에 있어서 향상이 되고 개선이 되야 한다'고.
나아가서는 그 사람 몸에서는 코로 맡을 수 없는 미묘한 향내가 풍기게 될 때에 주변 사람들은, 더욱이 가정에 모든 사람들 이웃에 모든 사람들은 자연히 그 사람을 따르게 되고 믿게 되고 말 한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순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의 수행법이며, 생활이며 포교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기도 입재요, 결제로써 우리는 물론 이 용화사 선원에 결제에 방부(房付)를 드린 분도 계시고, 또 결제에는 들지 아니하지만 백일기도에 참석하신 분도 계시고 그러겠습니다.
어떻든 간에 '한 생각' 간절하게 돌이켜서 화두를 드는 곳에 백일기도는 거기에서 소원을 성취할 수 있도록 여물어 가는 것이 되는 것이고, 한 생각,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고 간에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드는 곳에 성불(成佛)을 향해서 스스로 향상되어 가는 것입니다.
백일기도는 한 생각 단속으로,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따라서 백일기도를 성취하느냐 못하느냐에 기로가 거기에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단속하지 아니하고 방치한 곳에는 마구니가 들어올 수 있는 문을, 틈을 거기에서 열어주는 것이 되는 것이고, 모든 재앙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을 터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무량겁이 바로 이 한 생각, 일념지간(一念之間)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한다면 무량겁 업도 소멸이 되고, 무량겁 생사를 끊는 길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한 생각이 바로 무량겁(無量劫)인 것입니다. 한 생각을 떠나서 무량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도 그러려니와 이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자리를 여의고서 육도윤회(六途輪廻)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솔천, 아까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대한 말씀이 계셨지마는 도솔천 내원궁은 불과 물 그런 삼재(三災)의 겁풍이 도달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외원궁까지도 불과 물에 겁풍이 도달하지만 내원궁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도솔천 내원궁은 모든 부처님께서 출현(出現)하시기 위해서 지금 대기하고 계신 곳이 바로 도솔천 내원궁입니다.
도솔천 내원궁은 바로 극락세계와 조금도 차등이 없을 만큼 그렇게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성현들이 도솔천 내원궁에 환생(還生)하시기를, 거기에 왕생(往生)하시기를 발원을 하셨습니다.
지금 앞으로 56억 7천만년 뒤에 출현하실 하강(下降)하실 미륵 부처님, 미륵불도 지금 도솔천 내원궁에 대기하고 계십니다.
그 도솔천 내원궁이 저 하늘나라 높은 데에 있다고 생각하시지를 말고 도솔천 내원궁은 우리의 자성(自性) 본궁이다. 내가 한 생각 탁! 깨달으면 깨달은 바로 그 본각 자리가 도솔천 내원궁이다.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그러한 뜻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것은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볼 때에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죽어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기를 발원하기보다는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실 수 있다면 그것이 더욱 좋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길을 열심히 한다면 살아서 가는 사람이 죽어서 못 갈까 걱정할 것은 하등에 없는 것입니다.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법이 바로 우리의 중생의 일념, 그 한 생각이 슬픈 생각이건 또는 어떠한
노여운 생각이건, 괴로운 생각이건, 어떠한 생각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떠한 고약한 욕심스런 생각이건, 누구를 해롭게 헐랴고 하는 그러한 나쁜 생각일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때일수록 그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숨을 깊이 들어마셔서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돌이켜서 단속해 나가면, 그러한 노도(怒濤)와 같이 일어나는 어떠한 중생에 번뇌 망상에 마음이라 할지라도 스르르르르 가라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가다 보면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한 달 일 년 이렇게 일구월심(日久月深), 날이 가고 달이 감에 따라서 점점 그것이, 생각 돌려서 화두 드는 것이 습관이 되고 또 나아가서는 그것이 체질화가 되어서 그렇게 할려고 안 해도 제절로 그렇게 되어진다면, 언제나 순일무잡하게
일여(一如)하게 그렇게 공부가 되어간다면 바로 그것이 득력(得力)을 하는 것이여.
'득력(得力)은 생력(省力)이다, 힘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힘을 더는 것이다'
애를 써도 처음에는 잘 안되고 깜박 잊어버리고 잊어버려서 못하고 그러다가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공부를 함으로써 할랴고 안 해도 무심 속에 저절로 그렇게 공부가 되어 가면 그것이 바로 힘을 더는 것인데, 그 힘을 더는 것이 바로 득력하는 것이다, 힘을 얻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질 때 스스로 가만히 자기 자신을 반성을 해 보면, 완연히 내가 이 참선 공부를 하기 전의 자기와 참선을 해 가지고 벌써 오늘에 이르러서와 스스로 냉정하게 반성을 해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달라진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때에 '내가 어쩌다가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났던가?' 스스로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참 보람을 느끼고 스스로 참 이 행복함을 느끼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이 정법에서 물러나지 않겠다' 이러한 결심이 서게 될 것이며, '내가 금생에 이 몸 있을 때 기어코 대도를 성취하겠다'고 하는 이런 신심이 돈발(頓發)하게 될 것입니다.(20분46초~40분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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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가 석 달 동안, 내년 보름까지 석 달입니다마는 하루 하루씩을, 「오늘 하루 결제다」 이렇게 생각하고 하루를 딱! 작정을 하고서 알뜰하게 하루를 지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선방에 계신 스님네와 보살님 또 가정에 계신 보살님네나 거사님들, 하루씩을 딱 결정을 하셔요.
「하루 결제다」 이리 생각하고,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가벼운 운동도 하고 그래가지고 좌선(坐禪)을 떠억 해서 30분이건 한 시간이건 이렇게 딱! 하고서 새벽부터서 하루 결제가 시작하는 것입니다.
직장에 가실 때, 직장에서 모든 사람을 만날 때,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건 간에 하루 결제를 아주 알뜰하게 하셔서 그날 저녁에 침대에 들기 전에 또 30분 내지 1시간을 터억~ 좌선을 하시고,
자리에 누워서 '내가 오늘 하루는 얼마만큼 알뜰히 공부를 했나? 이러이러한 일은 내가 이때 내가 잠깐 화두를 놓쳤었구나. 내일은 더 알뜰히 해야겄다' 이렇게 반성을 하고서 눈을 딱 감은 채 심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숨을 스르르르 들여마셔 가지고 잠깐 머물렀다 내쉬면서 '이뭣고?'
눈을 감고 자리에서 잠을 청하지를 말고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생각 생각에 화두를 거각하면은 언제 잠이 오는 줄 모르게 잠이 스르르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그 이튿날 자기가 필요할 때 저절로 눈이 딱! 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이 딱! 뜨자마자 새로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엊저녁에 잠자리에 누워서 들던 그 화두가 고대로 딱 들어져 있는 것을 느끼게 될 날이 있습니다.
시간을 보면은 대여섯 시간이 지내갔는데, 실지 자기 생각에는 한두 시간 잠깐 눈 붙인 거 같이 그렇게 잠을 별로 안 잔 거 같이 느껴지지만 그렇게 몸이 가볍고 정신이 깨끗하고, 그러지만 너무 깊이 너무 맛있게 달게 잤기 때문에 대여섯 시간을 잤어도 그렇게 짧은 시간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바로 눈을 감고 자는 상태에서도 고대로 화두가 들려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공부가 무르익어 가면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는 것입니다. 잠을 잘 때나 눈을 떴을 때나 언제라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가 될 때까지 한 생각 한 생각을 꾸준히 들고 열심히 해 나가면 누구라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할까 염려할 것도 없고, 빨리 깨닫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일여하게 되어 간다면 버려야 할 망상도 없고, 해탈해야 할 생사도 없고, 깨달라 증득해야 할 열반(涅槃)도 따로 바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버려야 할 생사가 없는데 증득해야 할 열반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祖師)가 말씀하시기를 「단진범정(但盡凡情)이요 별무성해(別無聖解)니라. 다못 범부에 정이 다할지언정 별무성해다. 따로 성스러운 알음알이를 내지 말아라」
간절한 마음으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묵묵히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곳에 일체 범정(凡情), 범부의 망상 번뇌는 거기에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 그 범부에 번뇌 망상이 바로 보리심(菩提心)으로 바꿔지는 곳인 것입니다.
보리심으로 바꿔졌는데 무슨 성인의 성스러운 알음알이를 새로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해(聖解)를 새로 짓는 곳에 망상의 물결이 치게 되는 것입니다.
'(법문 끊김) 그것 때문에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었습니다마는.
저에게가 오늘 말씀드린 말을 잘 이해를 하신다면 번뇌가 일어난다고 짜증을 낼 것도 없고, 화두가 잘 안 들린다고 짜증을 낼 필요도 없습니다. 바쁘다고 핑계댈 것도 없고 몸이 아프다고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몸이 아프건 바쁘건, 가정에 어떤 근심 걱정이 될 만한 일이 있건 없건, 그럴수록에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서 오직 이 하나를 위해서 모든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정성이 똘똘 뭉쳐서 일념 단속하는 데에 회향(廻向)이 된다면 바로 거기에서 모든 재앙(災殃)과 액난(厄難)은 거기에서 소멸이 되고, 재앙과 액난 없으면 소원은 성취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결제와 백일기도 입재를 기해서 여러 사부대중께 간곡히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욕식불조회광처(欲識佛祖廻光處)인댄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만약 부처와 조사의 회광처(廻光處)를 알고자 할진대는 다못 그 뜻을 허공과 같이 할지니라.
일부로 마음을 비워서 허공과 같이 헐랴고 허면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로서 가장 빨리 부처님의 마음과 같이 될려면 우리로서는 화두를 거각하는 것이 가장 요긴한 것입니다.(40분9초~49분12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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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산월투창백~’ ; 『소요당집(逍遙堂集)』 소요 태능(逍遙太能)의 ‘무제(無題)’ 게송 참고.
*달마대사(達摩大師)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https://emokko.tistory.com/55
*면벽구년(面壁九年) ;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가 9년 동안 면벽했던 고사를 가리킨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양 무제(武帝)를 만나 문답하였으나 무제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마침내 물러나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의 낙양으로 가서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다. 경론을 강설하지도 않고, 불상에 절을 하지도 않으며 종일토록 말하지 않고 벽을 향하여 좌선하기 9년을 지냈다. 이를 '면벽구년(面壁九年)'이라 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뒤부터 선승(禪僧)들이 선원에서 벽을 향하여 좌선하게 되었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불교의 대혁명을 일으켰는데, 경(經)이나 모든 글이 소용없다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였고, 계율이나 염불이나 송주(誦呪)를 죄다 부인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들어 있다(觀心一法總攝諸行)」하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대번에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한다(直指人心見性成佛)」고 하였다.
실로 그의 문하에서 많은 성인이 나왔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다투어 묵은 불교를 버리고 이 새 법, 참선법(參禪法)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란 것은 달마조사가 전하여 온 특별한 법, 비밀한 이치 곧 「불법의 똑바른 이치(佛法的的大意)」란 말과 같은 말이다.
*격외선(格外禪) ; 언어 · 문자로 의론할 수 있는 격식을 초월한 선법. 조사선(祖師禪)에서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는 선을 말한다.
*분상(分上 분수 분/윗 상)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참고] 분(分) : 분수(分數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상(上) : ①‘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②‘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적멸(寂滅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탐욕(貪欲)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相)을 여의고 있는 것.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장엄(莊嚴 엄숙할·삼가할·꾸밀 장/엄할·공경할·꾸밈 엄) ; ①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고, 훌륭한 공덕을 쌓아 몸을 장식하고, 향이나 꽃 따위를 부처님께 올려 장식하는 일. ②건립하는 것. 건립. 훌륭히 배치, 배열되어 있는 것. ③장식. 물건을 장식하는 것. 아름답게 장식함. 훌륭한 것. 엄숙하게 장식된 모양, 모습. 장식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진여자성(眞如自性)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부처님 경전에 말씀에는 「중생과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다」'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근본 성품, 각성(覺性), 자성(自性).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〇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〇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과거시험(科擧試驗 예전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리 채용 시험 제도로서 보는 시험)을 보는 장소에서 유추된 말이다.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선당(禪堂) · 승당(僧堂) · 선방(禪房) 등을 가리킨다. 수행자들이 선방에서 좌선하여 도를 깨달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등주 단하천연선사는 어느 곳의 사람인지 모른다. 처음에 유교를 배워서 장안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길에 여관에서 자다가 홀연히 밝은 빛이 방에 가득차는 꿈을 꾸었다. 이에 점치는 자가 '공을 터득할[解空] 상서로운 조짐이다'라고 풀었다.
우연히 어떤 선객(禪客)이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 '관리 뽑는 시험을 보러 갑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선객이 '관리 뽑는 시험이 어찌 부처 뽑는 시험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단하가 '부처 뽑는 시험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선객이 '지금 강서(江西)에서 마조대사가 출세 했습니다. 그곳이 부처를 뽑는 시험장[選佛之場]이니 그곳에 가보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말을 듣고 그길로 강서로 갔다.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세간(世間)의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音聲)을 듣고(觀) 대자비와 지혜로써 자유 자재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보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왼쪽 보처(補處).
또 자재롭게 보는 이(觀自在者), 자재로운 관찰 등의 뜻으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 한다. 또 광세음(光世音)·관세음(觀世音)·관세자재(觀世自在)·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으로 쓰며, 줄여서 관음(觀音)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의 주처는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다.
한국에서는 동해에 있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가 관음 도량으로 유명하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명호(名號) ; 명자(名字), 명(名)이라고도 함. 이름. 주로 부처님과 보살의 이름이기에 존호(尊號), 가호(嘉號) 등이라고도 한다. 이 명호(名號)를 듣기도 하고 부르기도 하는 것에 커다란 작용이 있다고 여기고, 여기에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등의 행(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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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 ; 십이부경(十二部經)은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그 경문의 서술 형식 또는 내용을 열두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은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팔만사천법문.
*대승교(大乘敎) : [범] Mahayana 대승(大乘)이란 큰 수레를 뜻한다。큰 원(願)과 큰 뜻을 세워서 나를 희생하여 모든 중생을 즐겁고 편안하게 건져 주겠다는 보살심(菩薩心) 있는 이들을 위하여, 육도(六度)와 만행(萬行)을 닦아 가도록 깊은 이치를 말씀하신 법문이다。그 대표적인 경전은 <반야경(般若經)> <해심밀경(解深密經)> <능가경(楞伽經)> <기신론(起信論)> <범망경(梵網經)> 같은 것들이다.
이 법문을 요약하여 말하면, 이 세상에 온갖 물질과 일(森羅萬象)이 벌어져 있으나, 낱낱이 현상(現象) 그대로 비어 없는 것이며, 모든 차별된 것이 그대로 다 평등하여 열반인 것이다。따라서 무엇에나 걸릴 것이 없는 것이다。소승의 열반이 소극적이며 작고 옅은 것이라면 대승의 열반은 적극적이며 크고 참된 것이다。한 중생도 남음이 없이 모두 제도한 뒤에야, 자기가 성불하겠다는 소원이야말로 대승의 보살심인 것이다.
*공양미(供養米) ; 공양에 쓰는 쌀. 공양으로 바치는 쌀.
*공양(供養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무루(無漏 없을 무/샐·구멍·번뇌 루) ; 유루(有漏)의 대칭어. 마음과 몸을 괴롭히는 번뇌에서 벗어남.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마음 상태. 번뇌가 사라진 경지.
누(漏)는 누설(漏泄, 漏洩 흘러나온다)의 뜻으로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곧 육근(六根)과 아홉 구멍(九孔)에서는 항상 부정한 것이 흘러나오므로 누(漏)라 한다. 혹은 누란 누락(漏落)의 뜻으로 중생을 삼악도(三惡途 : 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이러한 누(漏)를 동반한 법을 유루, 그렇지 않은 법을 무루라 한다.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게 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〇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삼재(三災 석 삼/재앙 재) ; 사람의 태어난 해(十二支)에 따라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 나쁜 운수를 의미한다.
①대삼재(大三災)라 하여 물(水災), 불(火災), 바람(風災)에 의한 재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②도병(刀兵 : 서로 흉기를 갖고 살해함), 기근(饑饉 : 기근이 일어남), 질역(疾疫 : 큰병이 유행함)을 뜻하기도 하며,
③자연 현상으로 입은 세 가지 재해(災害) 즉 곡식이 익지 않는 기(飢), 채소가 익지 않는 근(饉), 과일이 익지 않는 황(荒)을 가리키기도 한다.
④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인한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재난.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본각(本覺) : 일체 중생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각성(覺性)의 뜻으로서 청정한 심성(心性)을 말함。 이 심성은 허명(虛明)해서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또 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본래 중생의 상념(想念)을 떠나서 법계에 두루 가득차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망(迷妄)과 깨달음에 관계 없는 절대적인 경위(境位)이다.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일여(一如)하다 ; 내가 몸과 마음이 깨끗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하면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나 망상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구체적인 대상 속에 있으면서 그 대상에 대한 어떤 망상 분별도 없으므로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없다거나 사물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며, 대상을 지향하되 그 대상에 대한 망상 분별과 집착이 없음을 나타낸다. 또한 일정하게 정해진 마음의 양태가 없이 대상에 응하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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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선(坐禪) ; 단정히 앉아서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단정히 앉아서 선(禪) 수행을 하는 것.
*오매일여(寤寐一如 잠이 깰 오/잠잘 매/하나 일/같을 여) ; 자나깨나 언제나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나눌 수 없음.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단진범정(但盡凡情) 별무성해(別無聖解) ; ‘다만 범부의 생각이 다할지언정, 따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없는 것이니라’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83. (가로판 p87)
〇修行之要는 但盡凡情이언정 別無聖解니라
수행의 요결은 다만 범부의 생각이 다할지언정, 따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없는 것이니라.
(註解) 病盡藥除하면 還是本人이니라
병이 없어지고 약까지 쓰지 않는다면, 앓기 전 그 사람이니라.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범정(凡情 무릇·보통 범/뜻 정) ; 범부(凡夫 번뇌에 얽매여 생사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의 생각. 또는 범부의 망상분별을 말한다. 깨닫지 못한 이들이 근거 없이 범상한 알음알이로 헤아리는 것. 범심(凡心)과 같은 말.
*보리심(菩提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
*회향(廻向) ; 회전취향(回轉趣向)의 뜻. ①방향을 바꾸어 향하다. ②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 이익을 주려하거나 그 공덕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함. ③자신이 지은 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베풀어 그 중생과 함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함.
*재앙(災殃 재앙 재/재앙 앙) ; 뜻하지 않게 생긴 불행한 변고. 또는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생긴 불행한 사고.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게송) '욕식불조회광처(欲識佛祖廻光處) 당정기의여허공(當淨其意如虛空)' ; '부처님과 조사님의 회광처(廻光處 깨치신 도리)를 알고자 하거든, 마땅히 그 뜻을 허공처럼 맑히어라'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다. 적적(寂寂)하고 요요(寥寥)해서, 고요하고 고요해서 색(色)과 공(空)이 끊어져 버렸다.
목전근기취(目前勤記取)하라. 목전(目前)에 부지런히 기취(記取), 정신을 차려서 그놈을 똑바로 봐라.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다. 산이 백운(白雲) 가운데 서 있느니라.
중생은 무엇을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반드시 거기에 분별심을 일으켜.
‘좋다 나쁘다, 이것은 니 것이다 내 것이다, 푸르다 누르다' 그러한 분별심을 일으키고. '이것은 색이다 공이다' 그러한 차별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벌써 분별심을 내고 차별심을 내면 그것이 바로 주객에 떨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공(空) 아니면 색(色)이요, 색(色) 아니면 공(空)에 걸린 것이다 그말이여.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사람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눈으로 무엇을 보던지,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무슨 한 생각이 일어나던지 다못 목전에 알 수 없는 자기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갈 뿐이여.
금방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활구참선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여러분들이 이 바쁜 세상에 일주일 동안을 부지런히 일하고 생활을 하다가 일요일이 되면 산이나 들이나 강이나 어디 그런 데 가서 피로를 풀고 하루 동안을 재미있게 부담없이 잘 지내야 피로가 해소가 되고 그래서 또 월요일이 되면은 가뿐한 마음으로 직장에 모두 나가시고 생업에 종사를 하셔야 할 텐데 왜 그러한 재미있는 곳을 버리고 여기를 이렇게 많이 오셨느냐?
재미있는 얘기를 들을라고 오신 것도 아니요, 무슨 어려운 교리를 설명을 듣자고 오신 것이 아니여.
재미있기로 말하면 극장에 가서 연극을 보던지, 영화를 보던지 얼마든지 재미있는 곳이 있을 것이고, 어려운 교리 모다 경에 대한 해설을 듣고 싶으면은 여러 군데 다른 절에서도 경에 대한 해설을 하는 곳이 많이 있으니 거기를 가시면 될 것인데, 왜 하필 이 주안(朱安) 염전 가에 이런 절에까지 이렇게 오셨느냐?
그것은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그거 하나를 위해서 여기에 오신 것이다.
마침 오늘 전강(田岡) 대선사(大禪師)의 활구참선에 관한 법문을 오늘 듣게 되었습니다.
활구참선.
요새 참선에 관한 관심이 나날이 높아져 가고 있지마는, 정말 이 활구참선을 지도하고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흔치 않는 것입니다. 참선이면 다 같은 것 같지마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활구참선은 숙세에 정법(正法)의 씨를 심은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들어도 믿어지지 아니하고, 아무리 권고해도 마음이 쏠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활구참선은 재미가 없거든.
이론적으로 분별해서 일러주고 또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들을 것이 있고 이리해야 가리키기도 좋고 배우기도 좋고 또 고대로 따라서 하면은 할 맛도 나고 그러니 재미도 있고 그럴 텐데,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 없으니 어떻게 여기에 재미를 붙일 수가 있느냐 그거거든.
그래서 숙세의 종자(種子), 바른 종자가 아니면 이것은 발을 붙이지를 못합니다.
전부 다 비방하고 돌아서 버리고, 자기도 아니할 뿐만 아니라 남도 못하게 하는 것이여. '그게 무슨 재미가 있어서 하느냐? 그거 해서 뭐하느냐?'
활구선(活句禪)의 상대되는 말이 사구선(死句禪)인데, 이 활구선(活句禪)은 참구(參句)여, 참구. 그리고 사구선(死句禪)은 참의구(參意句)고.
참구(參句)라 하는 것은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져서 더듬어 들어갈 것도 없다.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가 무엇입니까?'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셨는데, 인도는 서쪽에 있고 중국은 남쪽에 있으니까, “달마 조사가 서쪽에 있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조주 스님이 답을 하시기를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어.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이냐?’하고 묻는데 대해서 여러 가지로 대답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참선법을 펴시기 위해서 왔다든지, 부처님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심전심(以心傳心)한 그 진리법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든지, 여러 가지 그리고 누구든지 알아들을 만한 대답이 있을 텐데, 밑도 끝도 없이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어.
또 다른 학자가 또 조주 스님에게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물으니까 ‘하파부주(下坡不走)니라. 언덕에 내려서 달아나지 않느니라’ 이렇게 대답하기도 하고.
그 묻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대답을 하셨는데, 도무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어떻게 따져 볼 수 없고, 따져 봐야 알 수 없는 그러한 대답을 하셨다 그말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이리저리 따지고 분별하고 복탁(卜度)하고 그래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아하! 이런 뜻이로구나’ 이렇게 따져 들어가면서 그래 가지고 그것을 참선을 한 걸로 착각을 하고. 또 그렇게 따져서 그럴싸한 어떤 결론을 얻으면 자기가 그 공안을 깨달았다고 이렇게 착각을 하고 그런데.
그러한 식의 참선을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의리선(義理禪)이다'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또 '참의구(參意句)다, 그 뜻을 참상(參詳)한다' 이렇게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들이 모다 '죽을 사(死)'자 사구선, 죽은 참선이여. 영원히 따지고 별별스런 결론을 얻어 봤자 참다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참선이여.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죽은 참선이라 해서 이것을 사구참선이라, 사구선(死句禪)이라 이러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렇게만 해 나가는 거여.
'판치생모'란 뜻이 무슨 뜻인지 그것도 알 필요도 없고, 다못 ‘어째서 조주 스님이 판치생모라 했나?’ 그렇게만 자꾸 해 나가는 거여.
이것은 남녀노소도 상관이 없고, 무슨 지식의 유무도 상관이 없고, 또 무슨 경전 금강경이나 뭐 법화경이나 반야심경이나 또는 화엄경이나 능엄경이나 그런 경전에 대한 풀이라든지 해석 그런 것을 알고 모른 거도 전혀 상관이 없어.
다못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만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무어로(無語路)하고 말 길도 없고, 무이로(無理路)하고 이치 길도 없고, 무모색(無摸索)이다. 더듬어 찾을 것도 없어. 거두절미(去頭截尾)여. 머리도 꼬랑지도 없이, 앞도 뒤도 없이 무조건하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뿐이여.
이렇게 해 나가면 아무 재미도 없지만, 한 생각이 무슨 생각이 일어났다 하면은 퍼뜩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눈으로 하늘에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 퍼뜩 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귀에 들리면 그 자동차가 소리로 따라가지 말고 탁! 생각을 돌이켜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보거나 좋은 소리를 듣거나 좋은 생각이 나거나 화두를 들고, 슬픈 것을 보아도 나는 화두를 들고, 기쁜 것을 보아도 화두를 들고, 불교의 교리에 관한 어떤 의심이 나거나 세속사에 관한 어떤 의심나는 점이 있어도 나는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렇게 단속을 해 가고, 하루하루를 이렇게 공부를 해 가면, 처음에는 화두를 챙기려고 해도 잊어버리고 챙겨도 금방 잊어버리고 자꾸 화두를 놓쳐 버리고 그런데.
일구월심(日久月深) 이렇게 애를 써 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져.
앉아서도 화두요, 서서도 의심이요, 걸어가도 의심이요. 이것이 바로 힘을 더는 것이여. 애써서 안 해도 저절로 되어지니까 그 힘을 더는 것이다 그말이여.
공부가 이렇게 차츰차츰 익숙해 가면 자기가 가만히 자기를 가끔 반성을 해 보고 자기를 돌아보거든.
'내 공부가 과연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나의 신심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내가 불자(佛子)로서 지금 불교를 믿고 참선을 시작한지가 1년이 되었다든지 또는 3년이 되었다든지 이렇게 되었으니 과연 내가 불자로서 얼마만큼 되어 가고 있는가?' 자기를 한 번씩 반성을 해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여.
참선을 놓아 버리고 세속 일에 얽매여서 그럭저럭 지낸 뒤끝에 생각해 보고.
또 세속 생활, 그 복잡한 생활 희로애락 속에 살면서도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서 한 시간 내지 30분이라도 한결같이 새벽 정진을 하고, 낮에도 생각 생각에 돌이켜서 애를 쓰고 그럴 때 반성을 해 보고.
애써서 한 뒤끝에는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생각해 봐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고, 공부를 놓아 버리고 그럭저럭 지낸 뒤끝에 생각해 보면 부끄럽고 죄송하고 또 공연히 불안하고 초조함을 느낄 것입니다.(처음~20분28초)
*(게송)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 휴정 著) ‘도능선자(道能禪子)에게’ 참고.
*요요명명(了了明明) ; 요요(了了)하고 명명(明明)하다.
*요요(了了 마칠·깨달을·분명할 요) ; 뚜렷하고 분명한 모양. 명확한 모양. 슬기로운 모양. 현명한 모양. 분명하게 알고 있거나 뚜렷이 드러나는 경계를 수식하는 말이다.
*명명(明明) ; 환히 드러난 모양. 분명한 모양.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적적(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요요하다(寥寥-- 쓸쓸할·텅 빌 료) ; ①(장소가)고요하고 쓸쓸하다. ②매우 적고 드물다.
*색(色) ; ①인식의 대상이 되는 물질적 존재의 총칭. ②육체. ③집착 또는 색욕.
*공(空) ; ①모든 존재는 여러 인연으로 생겨남으로 항상 독자적으로 불변하는 실체가 없음. 자성이 없음(無自性).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가 불교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
공은 전혀 없다는 무(無)나, 결국 사라져 덧없다는 허무(虛無)가 아니다. 또 공(空)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불변의 실체 · 본질이 아니라, 존재의 무실체성 · 무자성 등을 자각함으로써 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지표이다.
공을 허무나 실체로 보는 것은 공에 대한 집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참된 공[眞空]이 아니라 무기공(無記空) · 편공(偏空) · 악취공(惡取空) 등이라고 한다. 이러한 공의 병[空病]에 대한 약으로 '공도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②차별과 분별로써 인식된 대상은 관념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 가치나 감정이 부여된 인식 대상은 인식 주관이 조작한 허구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대상은 허구라는 뜻.
③잇달아 일어나는 분별과 망상이 끊어진 상태. 번뇌와 분별이 소멸된 상태. 분별과 차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기취(記取) ; 명심하다. 기억하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〇깨달음은 생사심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생사심에 즉(卽)해서 의단이 독로하도록 그렇게 잡드리해 나가는 데에서 거기에서 마음 길이 끊어져, 말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없어. 이리 해야 그것이 바로 참선을 해 가는 거고, 참선을 바로 해 가야 바른 깨달음에 도달을 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356)—88년 4월 첫째일요법회(1988.04.03) (용356)
약 11분.
금강보검의천한(金剛寶劍倚天寒)한디 일휘능최만인봉(一揮能摧萬仞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변계마군종차락(徧界魔軍從此落)하면 유하정매틈기중(有何精魅闖其中)고
나무~아미타불~
금강보검의천한(金剛寶劍倚天寒)이다. 금강의 보배 칼이 하늘을 의지해서 서릿발이 치는데,
일휘능최만인봉(一揮能摧萬仞峰)이다. 한번 휘둘러서 능히 만 길이나 되는 봉우리를 갖다가 꺾어 버리더라.
변계마군종차락(徧界魔軍從此落),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두루 꽉 차 있는 그 마구니가 이로 좇아 떨어지니,
유하정매틈기중(有何精魅闖其中)고, 무슨 정매(精魅), 도깨비 같은 것이 있어서 그 속을 엿볼 수가 있겠는가.
방금 전강 조실 스님께서—갑인년이면 조실 스님께서 열반하신 해인데, 그해 정월에 설하신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여러분께서 들으신 바와 같이 언제나 조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설하신 법문의 요점은 활구참선(活句參禪)입니다.
활구참선!
활구참선은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없어요.
요새 참선, 많은 사람들이 참선(參禪)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모두 참선을 알려고 그러고, 참선을 할려고 노력을 하고—그런데 조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그 선양을 하신 그 참다운 활구참선을 허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 않다 그말이여.
공안(公案)을 가지고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분석하고 따지고, 그래서 분별하고 따지면,
아무리 그 공안을 타파해서 생사해탈하는 그러한 공안이라 하더라도 중생심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그러면 그 훌륭한 공안이 사구(死句)가 되고 말아버린 것입니다.
백 년을 따지고 천 년을 따지고 무량겁을 따져도, 따질수록 점점 공안의 참뜻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고.
따라서 참 깨달음을 향해서 정진을 해야 할텐데 따지다 보면 깨달음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 가거든.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어져 버리고 말아버리는 것이여.
비단 조실 스님 법문뿐만이 아니라 역대조사(歷代祖師)께서 설(說)하신 법이 바로 이 활구참선을 설하신 것입니다.
성현이 가신 때가 멀고, 법은 마강법약(魔强法弱), 마구니는 강해지고 법(法)은 약해져.
그러니 부처님의 설하신 법도 중생 나름대로 사견(邪見)을 붙여서 사법(邪法)을 만들고, 조사가 선양하신 활구참선법도 이렇게 말세가 되니까 자꾸 중생의 소견으로 사량분별을 붙이고, 이치 길로 따지고 말 길로 따져서 더듬어 들어가서 자기 나름대로 온갖 삿된 소견을 붙여서 분석을 하니, 그것이 참다운 참선인 줄 알고 전부 후래(後來) 학자들은 그 공부 첫걸음부터 그르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기가 쉬우냐 하면 활구참선은 말 길이 끊어지니 뭐라고 입을 벌릴 수도 없고, 이치 길이 끊어졌으니 뭐라고 거기 분석을 할 수도 없고.
밤낮 ‘알라야 알 수 없고,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곳을 향해서 의단(疑團)을 거각(擧却)하라!’ 그렇게 한 달을 해보고 두 달을 해보고 일 년을 해보고 이태를 해봤자 해 갈수록 답답하기만 하고 재미가 없어.
그런데 일본 책이라든지, 그런 모다 공안을 이리저리 분석해서 따져 논 그런 책을 보면 모두 읽을 맛이 있고 재미가 있다 그말이여. 알아지는 것이 있고 얻은 것이 있고 그러니까.
그러니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모두가 다 그런 책을 읽어 가지고, 명색(名色)이 참선을 한답시고 한 것이 모두 의리선(義理禪)만 허게 된다 그말이여.
우리 나라에 경허 스님, 만공 스님 이후로 쭉 내려오는 활구참선법은 공안을 그런 식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은 행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떠한 사람이 뭐라고 말을 해도 사구참선(死句參禪)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
설사 10년을 하고 30년을 하고 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아무 소견이 나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해 갈지언정, 무슨 사량분별을 가지고 어떤 소견이 나기를 바래고 어떤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무슨 가늠이 가고 이러기를 바래지를 말어야 한다.
열 가지 공안 또는 백 개, 이백 개 내지 삼백 개, 천이백 공안에 대해서 해석이 내려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생 소견이라, 중생의 무명업식(無明業識)으로 얻어지는 해석은 생사심(生死心)만을 더욱 조장할 뿐 깨달음에는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이여.
깨달음은 생사심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생사심에 즉(卽)해서 대의단으로 의단이 독로하도록 그렇게 잡드리해 나가는 데에서 거기에서 마음 길이 끊어져, 말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없어.
이리 해야 그것이 바로 참선을 해 가는 거고, 참선을 바로 해 가야 바른 깨달음에 도달을 하는 것입니다.(처음~11분14초)
*금강보검(金剛寶劍) ; 금강(金剛 : 다이아몬드)으로 만든 견고하고 예리한 보배로운 검. ①모든 번뇌를 자유자재로 끊어 없애는 지혜를 비유한 말. ②진리를 꿰뚫는 선지식의 날카로운 마음 작용을 비유한 말.
*서릿발(이) 치다 ; ①서릿발이 생기다. ②기세가 매우 매섭고 준엄하다.
*서릿발 ; 겨울철에 땅속의 수분이 얼어 성에처럼 되어 기둥 모양으로 뻗어 있는 것. 또는 그로 말미암아 지면이 부풀어오르는 현상.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정매(精魅 도깨비·정령·요괴 정/도깨비·요괴 매) ; 도깨비(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잡된 귀신의 하나).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공안(公案) ; 화두(話頭)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사법(邪法) ; 삿된 법. 이치에 맞지 않고 잘못된 길로 이끄는 부정한 가르침. 외도(外道)의 가르침.
*후래(後來) ; ①뒤에 오거나 뒤져서 옴. ②장차 오게 되는 앞날.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명색(名色) ; ①어떤 부류에 붙여져 불리는 이름. ②실속 없이 그럴듯하게 불리는 허울만 좋은 이름.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경허 스님, 만공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중생(衆生) ; ①생존하는 것. 목숨이 있는 것. 산것. 살아있는 것. 특히 인간. 사람들. 세상 사람. 유정(有情)이라고도 함. ②번뇌에 얽매여 미혹한 모든 존재.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무명(無明) ; 모든 현상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 근본 번뇌. 사제(四諦)에 대한 무지로서,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 번뇌. 본디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원초적 번뇌.
*업식(業識) ; ①과거에 저지른 미혹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의 과보로 현재에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작용. ②오의(五意)의 하나.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그릇된 마음 작용.
*생사심(生死心) ;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〇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364) (게송)월원불유망~ / 중생의 탐진치 욕심의 무서운 불을 끄는 것이 참선이다 / 재진출진(在塵出塵) 불가잠폐(不可暫廢) / 번뇌의 바다에 들어가야 거기에서 지혜 보물을 얻는다.
〇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탐진치의 불, 이 불 때문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 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 탐진치 삼독의 이 불 때문에 우리는 삼악도(三惡途)의 불구덩이로 결국은 여지없이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허면 이 삼악도의 불을 끄고 영원히 청량한 그러한 경지에서 그러한 속에서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게 할 수 있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 부처님께서 열어 놓으신 불법(佛法)이요,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〇번뇌 망상 이놈에서 탐진치 삼독의 거센 파도가 일어나고 있지만, 그놈 때문에 지옥에도 가고 축생도 되고 아귀도 되고 그렇지만, 그 파도를 잘 타면서 잘 지혜롭게 저어 들어가면 무량겁을 쓰고도 남을 지혜의 보물을 거기에서 얻을 수가 있더라. 참 기가 막힌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게 정명경(淨名經)에 있는 말씀인데.
**송담스님(No.364)—88년 8월 첫째일요법회(88.08.07) (용364)
약 18분.
월원불유망(月圓不逾望)이요일중위지경(日中爲之傾)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여독야사시청(獨也四時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월원불유망(月圓不逾望)이요. 달이 둥굴매, 아무리 달이 둥글고 더이상 둥글 수 없이 둥글다 하더라도 보름을 넘지를 못해. 보름이 되면, 보름날이 되면은 그 이튿날부터서는 차츰차츰 이그러져 가고.
일중위지경(日中爲之傾)이다. 해가 정 중천(中天)에 오면 계속해서 그 자리에 있을 수는 없어. 정오가 되면은 되는 그 찰나부터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여독야사시청(獨也四時靑)이다.
달도 보름을 넘지 못해서 기울어져 가고, 해도 정오를 넘자마자 서쪽으로 기울어져 가건만 오직 뜰 앞에 잣낭기는 독야사시청(獨也四時靑)이다. 홀로 춘하추동 사시(四時)에 푸르른구나.
지금 삼복(三伏) 중에 이 폭염(暴炎)이 최고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일기(日氣)만, 날씨만 이렇게 더운 것이 아니라 온 세계가 불구덩이 속에 훨훨 타고 있는 것입니다.
저 이란과 이라크라는 데는 땅을 한 치라도 더 뺏고 뺏기 위해서 그 피투성이가 되어 가지고 싸우고, 세계 도처에서는 서로 자기 나라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서로 경제적으로 싸우고 있고, 사상적으로 이념적으로 싸우고 있고, 종교와 종교 사이에서는 자기네 종교를 보다 더 펴기 위해서 온갖 꾀를 내 가지고 발버둥을 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올림픽에 어떻게 하면 이걸 잘 치르느냐? 그리고 우리나라 선수들이 보다 더 메달을 많이 따느냐?’ 이런 문제로 주야불철(晝夜不撤)하고 피땀을 흘리고 있고. 여당과 야당은 자기 당의 세력을 펴기 위해서 당의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이 무더위 속에 그 속에서 불을 태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헌 싸움은 설사 그 싸움에 이겼다 하더라도, 또 이기고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다 잠정적(暫定的)인 것뿐인 것입니다. 잠시 그러다가 금방 또 기울기 시작하고, 계속해서 이기고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이렇게 용광로처럼, 사방팔방(四方八方) 일체처 일체시에 이렇게 용광로처럼 중생의 욕심의 불이—입으로는 명분을 내세우고, 국가를 내세우고, 민족을 부르짖고, 세계의 평화를 부르짖고 있지만 그 속에는 시커먼 중생(衆生)의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욕심의 불이 훨훨 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욕심의 불이 언제 꺼지느냐?
꺼질 기약이 없습니다. 그 욕심의 불이 타고 있는 동안에는 세계의 평화도, 국가의 민주주의도, 민족의 통일도 행복도 이루어질 가망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삼복더위가 치성을 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 더위에 이기지 못해서 어떻게 허면 이 더위를 좀 피헐 수가 있을까? 산으로도 가고 바다로도 가고 강으로도 가고 이렇게 해서 좀 피헐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지 근본적으로 그 더위를 모면헐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사면(四面)이 이렇게 불이 타 오고 있구나」 이렇게 말씀하시고, 고봉 선사도 「진대지(盡大地)가 이렇게 훨훨 타고 있는 이 불구덩이인데 어떻게 허면 이 불구덩이로부터 살아날 수가 있겠느냐?」 이런 실중삼관(室中三關) 속에 이러헌 공안(公案)을 설하시기도 했습니다.
온 세계가 이렇게 그 태양이 이글이글 이렇게 타므로 해서 이렇게 더운 것쯤은 차라리 바다로도 가고 산으로도 가고 또 선풍기도 돌리고 에어컨도 틀고 해서 부채질도 하면서 그럭저럭 허다 보면, 오늘이 바로 입추입니다마는 입추를 지내고 또 말복이 지내면 금방 처서(處暑)가 오고 해서 조석으로 서늘한 바람이 일기 시작해서 그까짓 것쯤은 별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타 일어나고 있는 이 중생의 탐진치에 욕심의 불, 이것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불인 것입니다.
태양이 뜨거워가지고, 물론 비는 오지 아니하고 이렇게 혹서(酷暑)가 계속이 되면 세계 어딘가는 더위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도 없지는 않지만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더위 때문에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말은 아직은 못 들었습니다. 아무리 더워도 그것이 뜨거워서 타 죽지는 여간해서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탐진치의 불, 이 불 때문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 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 탐진치 삼독의 이 불 때문에 우리는 삼악도(三惡途)의 불구덩이로 결국은 여지없이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허면 이 삼악도의 불을 끄고 영원히 청량한 그러한 경지에서 그러한 속에서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게 할 수 있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 부처님께서 열어 놓으신 불법(佛法)이요,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재진출진(在塵出塵)이요 불가잠폐(不可暫廢)다. 티끌 속에 있으면서 티끌에서 뛰어나며. 그 티끌 속에서 티끌에서 뛰어나는 그 도리, 그것을 불가잠폐(不可暫廢)여. 잠깐 동안도 등한(等閒)히 헐 수가 없어. 정지헐 수가 없는 일이다.
‘티끌 속에서, 티끌 속에 있으면서 그 티끌에서 뛰어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는 전체가 티끌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몸 밖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티끌이고, 우리의 식(識)으로써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전부가 그것이 다 티끌인 것입니다.
티끌 속에서 도저히 우리는 일 초 동안도, 한 걸음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왼발을 들면 오른발이 땅에 닿아 있고 오른발을 들면 왼발이 땅에 들어있어. 공중으로 뛰어 봤자 1미터도 못 뛰고 다시 도로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지만, 우리의 생각도 이 생각 저 생각 희로애락 일체 생각이 선 · 악 · 무기(無記)의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 그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변해서 그 생각이 또 꺼지자마자 또 다른 생각이 또 일어나고, 이렇게 해서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껴졌다 하는데, 이것이 모두 티끌 속에 있는 상황입니다.
그 티끌 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해야 그 티끌 속에서 뛰어날 수가 있느냐? ‘이뭣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갑인년에 설하신, 갑인년이 바로 조실 스님 열반하시던 해인데 지금부터 15년 전입니다. 그해에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마는.
‘이 무엇고?’
잠시도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고, 탐진치 삼독에 번뇌와 망념이 불타듯이 이렇게 훨훨훨훨 타오르고 있는데, 그 일어나는 그 생각 거기에서, 바로 거기에서 그놈을 뛰어나는 방법이 있다.
그놈을 피해가지고 서늘한 데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바로 거기에 즉(卽)해 가지고 거기에서 뛰어나는 도리가 바로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여.
비유컨대 저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아니허면 그 바다 밑에 무진장(無盡藏)으로 있는 그 무가보주(無價寶珠)를 얻을 수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번뇌의 대해(大海) 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파도치는 그 번뇌의 바다 속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일체 지혜의 보물을 얻을 수가 없다. 지혜를 얻을 수가 없다.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우리 중생의 본업(本業)이고, 우리의 재산이고,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번뇌와 망상을 여의고 살 수가 없지만, 바로 그 번뇌와 망상 그놈이 없으면 우리는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바다가 큰 바다가 깊고 넓고 파도가 쳐서 그놈 함부로 들어가면, 작은 배를 타고 들어가면 휘떡 엎어져 갖고 그 바다에 빠져 죽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도저히 그 바다 속에 있는 그 희귀한 보물을 얻을 수가 없어.
이 번뇌 망상 이놈 때문에, 아! 이놈에서 탐진치 삼독의 거센 파도가 일어나고 있지만, 그놈 때문에 지옥에도 가고 축생도 되고 아귀도 되고 그렇지만,
그 파도를 잘 타면서 잘 지혜롭게 저어 들어가면 무량겁을 쓰고도 남을 지혜의 보물을 거기에서 얻을 수가 있더라. 참 기가 막힌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게 정명경(淨名經)에 있는 말씀인데.(처음~18분17초)
*삼복(三伏) ; ①일 년 중에서 여름철의 가장 더운 기간. ②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을 아울러 이르는 말.
*폭염(暴炎 사나울·세찰 폭/불꽃·더울 염) ; 폭서(暴暑 매우 심한 더위). 불볕더위.
*일기(日氣) ; 날씨.
*주야불철(晝夜不撤 낮 주/밤 야/아닐 불/거둘·철수할·그만둘 철) ; 불철주야(不撤晝夜). ①어떤 일을 함에 있어 밤낮[晝夜]을 가리지[撤] 않음[不]. ②밤낮없이.
*잠정적(暫定的 잠깐·잠시 잠/정할·머무를 정/대상·것 적) ; ①우선 임시[暫]로 정(定)한 것[的]. ②잠시 동안 그런 것.
*사방팔방(四方八方 넉 사/모·방위·방향 방/여덟 팔) ; ①사방(四方 동, 서, 남, 북의 네 방향)과 팔방(八方 동, 서, 남, 북, 동북, 동남, 서북, 서남). ②모든 방향과 모든 방면.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함령(含靈), 함식(含識), 군생(群生), 군맹(群萌),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부처님께서도 「사면이 이렇게 불이 타 오고 있구나」 이렇게 말씀하시고’ ;
[참고] 『잡아함 시현경(示現經)』에서.
〇"비구들아,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눈(眼)이 불타고 있고, 물질(色)과 안식(眼識)과 안촉과 안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 즉 괴로운 느낌·즐거운 느낌·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불타고 있다.
귀·코·혀·몸도 마찬가지이며, 이와 같이 뜻(意)도 불타고 있고, 법(法)과 의식(意識)과 의촉과 의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 즉 괴로운 느낌·즐거운 느낌·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불타고 있다.
무엇에 의해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불타고 있고, 성냄의 불로 불타고 있으며,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늙음·병듦·죽음·근심·슬픔·번민·괴로움의 불로 불타고 있느니라.
*사면(四面) ; 전후좌후의 모든 방면(둘레).
*실중삼관(室中三關) ; '방장실의 3가지 관문' 고봉 스님이 학인을 제접(提接)할 때 사용하던 관문(공안)이라고 하며, 또는 깨달은 뒤 자신의 보림(保任)이라고도 한다.
돋는 해가 허공에 당도함에 비추지 않는 곳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조각구름에 가리움이 되었는가?
사람마다 하나의 그림자가 있어서 몸에서 조금도 떨어지지를 않는데, 무엇 때문에 밟혀지지 않는가?
온 대지가 하나의 불구덩이이니, 무슨 삼매를 얻어야 불에 타지 않을까?
*실중(室中) ; 실중(室中)은 실내(室內)의 뜻인데, 일반적으로 종사(宗師)가 머무는 곳으로 조실(祖室), 방장실(方丈室)을 가리킨다. 선종에서 전법(傳法)할 때 스승이 제자에게 면밀하고 친절하게 지도하는 장소를 말한다. 또는 스승이 제자에게 구전(口傳)한 가르침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삼관(三關) ; 3가지 관문. 종사가 세 가지 질문(공안)을 설정하여 학인의 수행 정도를 시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삼관을 제시하는 스님에 따라서 고봉삼관(高峰三關), 황룡삼관(黃龍三關), 도솔삼관(兜率三關), 자운삼관(慈雲三關) 등이 있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처서(處暑) ; 일 년 중 늦여름 더위가 물러가는 때. 이십사절기의 하나. 양력으로8월 23일경이며, 더위가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며 벼가 익는 시기이다.
*혹서(酷暑 독할 혹/더울·더위 서) ; 몹시 심한 더위.
*삼악도(三惡途) :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한다。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즉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등한(等閒)히 ; 무관심하거나 소홀하게.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식(識) ; 오온(五蘊) 중 하나.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세 번째 지분으로 지각(知覺), 요별(了別)의 의미를 갖는다. 대상을 알게 하는 정신적 작용이다.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 · 8식설(八識說) · 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모두 채택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6식설은 그 발생 근거에 따라 6가지 식(識)을 열거 한다.
즉, 눈이 물질을 대할 때 보는 안식(眼識)이 있으며, 귀가 소리를 대할 때 듣는 이식(耳識)이 있으며, 코가 냄새를 대할 때 냄새를 맡는 비식(鼻識)이, 혀가 맛을 대할 때 맛을 감지하는 설식(舌識)이, 몸이 감촉을 대할 때 느끼는 신식(身識)이 있으며, 의(意)가 법(法)을 대할 때 '안다'는 의식(意識)이 있다.
이와 같이, 6근 · 6경 · 6식은 서로 연관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意識)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전오근(前五根), 곧 안 · 이 · 비 · 설 · 신(眼耳鼻舌身)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전5식(前五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은 일종의 감각지각이고, 제6의식(意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각과 언어를 매개로 한 인식 등 두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8식설은 앞의 6식설에 제7 말나식(末那識)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한 것이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밑에서 조절하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으로서, 범부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의식이다. 이 말나식은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번뇌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이들을 제거하면 7식이 맑아져서 아공(我空)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제8 아뢰야식은 일반적으로 장식(藏識)이라고 번역된다. 장식이란 곧 여래를 감추고 있는 식이라는 뜻으로, 비록 중생이 생사 속에 있지만 이 감춰져 있는 여래만은 결코 상실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이 올바로 발현될 때 곧 여래(如來)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제8식에 대한 견해는 불교에 여러 학설이 있다.
*무기(無記) : [범] Avyaksita 선(善)•악(惡)•무기(無記) 3성의 하나. ①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②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즉해(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비유컨대 저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아니허면 그 바다 밑에 무진장(無盡藏)으로 있는 그 무가보주(無價寶珠)를 얻을 수가 없는 것처럼~’ ;
[참고]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구마라집鳩摩羅什 역) 제8 불도품(佛道品)
〇是故當知一切煩惱爲如來種譬如不下巨海不能得無價寶珠如是不入煩惱大海則不能得一切智寶
이와 같이 모든 번뇌야말로 여래가 되는 씨앗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유컨대 넓은 바다 밑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무가(無價)의 보주(寶珠)를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번뇌의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곧 일체지의 보배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선남자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폐유리 등의 무가(無價)의 진보(珍寶)를 끝내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생사(生死)의 번뇌라는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끝내 무가의 진보인 일체지에 대한 마음을 일으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생사 번뇌의 종성(種性)이 여래의 종성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무진장(無盡藏 없을 무/다할 진/감출·곳집 장) ; ①다함이 없는[無盡] 창고[藏]라는 뜻으로 양적 질적으로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 불교에서는 덕(德)이 광대하여 쓰고 또 써도 다함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②배우고 배워도 다함이 없는 무궁무진한 진리. ③무한량으로 많은 재물.
*무가보주(無價寶珠) ; 값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보배구슬이라는 뜻. 불성(佛性), 반야(般若), 일승(一乘) 등과 같은 불교의 요체(要諦)를 비유하는 말로 자주 쓰인다.
무가보(無價寶) · 무가지보주(無價之寶珠) · 무가대보(無價大寶) 등이라고도 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본업(本業) ; ①주가 되는 직업. ②주로 하는 일.
*정명경(淨名經) ; 『유마경(維摩經)』. 3권. 405년(후진 홍치 8년)에 구마라습 번역. 정식 명칭은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또는 『불가사의해탈경(不可思議解脫經)』이라고도 한다.
반야경에서 말하는 공(空)의 사상에 기초한 윤회와 열반, 번뇌와 보리, 예토(穢土)와 정토(淨土) 등의 구별을 떠나, 일상 생활 속에서 해탈의 경지를 체득하여야 함을 중인도 폐사리(吠舍離)에서 거사(居士)로 지내면서 보살행업을 닦아 크게 교화한 유마힐을 중심으로 설한 경.
유마힐(維摩詰)은 범어로 Vimalakirti 음대로 써서 유마라힐(維摩羅詰) • 비마라힐(毘摩羅詰)이라 하고, 줄여서 유마힐 또는 유마(維摩)라고만 한다. 뜻으로 번역하면 정명(淨名) 또는 무구칭(無垢稱)이 되는데, 우리 말로는 ‘깨끗한 이름’이란 뜻이다.
§(627) 우리 자신이 부처 / 번뇌를 여의고깨달음이딴 데에 가서있는것이아니다. 이것이 최상승법 /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바로거기에즉(卽)해서‘이뭣고?’ /극락가는연습이바로이뭣고?
〇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무처선(無處禪)무시선(無時禪)이여.시간도따로없는것이고,장소도따로없는것입니다.편의상입선,방선의시간을두고선방(禪房)이라고하는특별한조용한곳을마련해가지고거기에가서다같이죽비를치고정진하고있습니다마는,그것은어디까지나기본자세를익히는것이지진짜살아 있는공부는꼭선방에와야만되는것이아닙니다.
*노사나불(盧舍那佛) ; ①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의 준말. 또는 보리심(菩提心)의 당체(當體)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부처님과 보살들의 심지(心地)를 가리킨다. ②중생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오랜 수행으로 무궁무진한 공덕을 쌓고 깨달음을 성취하여 장엄된 몸을 가지고 보토(報土 : 부처님께서 과거 인위因位에서 행한 서원행에 대한 보답으로 이루어진 정토)에 계시면서 설법하는 부처님.
삼신불(三身佛)은 (1)영원불변의 진리[法]를 몸[身]으로 삼고 있는 법신불(法身佛), (2)수행에 의해 공덕을 쌓은 과보(果報)로써 온갖 덕이 원만구족한 불신(佛身)인 보신불(報身佛), (3)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身]으로 변하는[化] 화신불(化身佛, 應身)을 이르는 말인데, 노사나불은 이 중 보신불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법은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이 생각하고, 행하되 행함이 없이 행하며, 말하되 말함이 없이 말하고, 닦되 닦음이 없이 닦나니,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진리와 가깝지만 모르는 사람은 더욱 멀어지리라. 언어의 길이 끊어졌으며 물질에 매이지 아니하니 털끝 만큼이라도 어긋나면 잠깐 사이에 잃어버리리라.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수미산이 있는데그수미산정상에있는도리천의왕으로,사천왕(四天王)과32신(神)을통솔하면서불법(佛法)과불제자를보호한다.도리천에는33신이있는데,제석은그중앙에있는선견성(善見城)안의수승전(殊勝殿)이라는궁전에살고,나머지32신은그성(城)밖의궁전에서각각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