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게송) ‘대지촬래여립미~’ / 교외별전(敎外別傳) 선지(禪旨)가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 / 육조 스님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하택신회, 남악회양 / <사진작가의 ‘참선’ 질문에 대한 ‘풍선’ 법문> 

쥐가 쥐 잡아먹는 법문 /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것은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觀)하는 것’ / 의심관(疑心觀) /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깨달음은 갈 곳이 없는 것 / 체중현(體中玄), 현중현(玄中玄), 인가(印可) / 활구참선을 듣게된 숙세(宿世)의 깊은 인연.

생사해탈이 전부 우리의 일념(一念)을 두고 하는 것, 일념 단속하는 가운데에 진리를 터득하는 것이 최상승법 / 오후보림(悟後保任) / 다맛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는 것’ 그것뿐.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의심,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심관(疑心觀)이거든. 다른 어떠한 문제를 하나만을 생각해 가지고, 그 하나에다가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른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면, 무엇이 매우 어디 깊은 데가 있고 높은 데가 있고, 그래 가지고 어려워서 도저히 우리 범부(凡夫) 중생은 손이 닿는 것이 아니고 해 봤자 되지도 않는 것이다. 이리 겁을 집어먹고 그 자꾸 자포자기를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최상승법이야말로 우리 중생심, 중생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인데, 그것이 꾸준히 그리고 올바르게만 해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송담스님(No.287)—1986년 2월 첫째일요법회. (용287) (의심 화두드는 법)

 

(1/3) 약 20분.

 

(2/3) 약 19분.

 

(3/3) 약 18분.


(1/3)----------------

대지촬래여립미(大地撮來如粒米)하야  당양타고대가간(當陽打鼓大家看)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안중약미제금설(眼中若未除金屑)인댄  요변현황야대난(要辨玄黃也大難)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2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사부대중이 잘 들었습니다.
활구참선법.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조실 스님 생존시, 조실 스님께서 15년간을 이곳에 머무르시면서 많은 납자(衲子)를 제접(提接)하시면서 항상 활구참선법, 최상승법을 선양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실 때까지, 성불(成佛)을 하셔 가지고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시는데, 그 팔만사천 법문을 교(敎)라 한다면 그 교(敎) 밖에 따로 마음을 전하신 것이 그것이 교외별전(敎外別傳) 선지(禪旨)라 이렇게 말하는데, 그 교외별전 선지가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입니다.

아까 조실 스님께서도 잠시 언급하신 바와 같이 육조(六祖) 스님 이전에는 ‘화두(話頭)’라 하는 말이 없었습니다마는.
물론 그러한 체계화된 간화선(看話禪)은 없었지만, 부처님 때부터서 그 부처님의 설법과 중생을 교화하는 그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에는 일정한 모양이 없는 가운데에 그 법(法)이 자유자재로 구사되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것이 세상이 흐름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根機)가 차츰 약해지고 또 사량분별심이 점점 영리한 마음은 점점 늘어나 가지고 순박성을 잃어가고, 그러기 때문에 차츰차츰 그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편을 중생 근기 따라서 마련하실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께서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거기에 붙이지 안 했지마는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밝기는 태양과 같고 검기는 옻칠과 같은데, 항상 우리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놈이 무엇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화두’라고 하는 말은 안 붙였지만 이 화두선(話頭禪), 화두를 가지고 참선하는 이 간화선(看話禪)이 바로 그 체계화되기 시작한 근원을 바로 거기다가 두는 것입니다.

하택신회 선사는 그 물음에 대해서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이로소이다.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저 하택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뭐라고 이름을 붙일라야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뭐라고 모양을 그릴라야 그릴 수도 없는데 어찌 네가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니 신회의 불성이니, 그것이 벌써 이름이 아니냐? 이름이 없다고 그랬는데 왜 이름을 붙이느냐?’ 이렇게 꾸짖으시고서, ‘네가 나중에 열심히 공부를 해서 일가를 이룬다 하더라도 너는 지해종도(知解宗徒) 밖에는 되지 못하겠구나. 사량(思量)으로 따지고 이론적으로 따지는 강사와 같은 그러한 무리 밖에는 못되겠구나’ 이렇게 점검을 하신 것입니다.

그 뒤에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육조 스님을 뵈러 와서는 절을 하니까  ‘심마물(甚麽物)이 임마래(恁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물으셨는데, 남악회양 선사는 그 물음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뭐라고 대답을 할 수도 없고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꽉 막혀서 어쩔 줄을 모르고 물러 나와서 8년 동안을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이냐?’ 앉어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 눌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하는 그 의심이 꽉~ 찼던 것입니다.

일부러 ‘이뭣고?’ ‘이뭣고?’ 형식적으로 하고, 또 할 때는 잠시 알 수 없는 생각이 있다가 금방 돌아서면 의심이 없어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육조 스님의 그 물음 뒤끝에 꽉 막힌 그 의심이 잊어버릴라야 잊어버릴 수 없고, 안 할라야 안 할 수 없고, 저절로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꽉 막힌 그 의심이 차오르는데 뭐라고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한목 퍼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8년 동안을 그러한 상태에서 하루하루가 지나갔던 것입니다. 8년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던 것입니다.

이 활구참선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뭘 이리저리 좀 하다가 무슨 어떠구라한 무슨 경계가 나타난다고 ‘아! 알았다. 내가 알았다’ 이런 생각을 내고서 무슨 공안을 갖다가 자기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뭐라고 이를라고 하고. 그러헌....
차라리 깨닫지 못하면 말지언정, 깨달을려면 한번 깨달라서 조사(祖師)의 경지에 이르지 아니하면 차라리 알았다고 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누구나 애써서 한 철 두 철 하면 ‘일체가 곧 하나요, 하나가 일체다. 전체가 바로 나요, 나 밖에 이 세계가 어디가 있느냐.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산을 보나 들을 보나 돌을 보나 그것이 모두가 딴것이 아니고 바로 이것이 내 면목(面目)이다’ 이러한 체중현(體中玄)의 그런 공견(空見)이라 하는 것은 한 철 아니면 두 철이면 누구나 그러한 경계는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자기가 깨달랐다고 하는 소견(所見)을 내고,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살림을 떠억 지어간다면 그 사람은 조그만한 그릇을 하나 만들어 가지고 그것을 자기 그릇으로 평생을 수용하다 가는 것입니다.


작년에 세계적인 사진작가가, 그분은 우리나라 6.25동란 때 전쟁고아로서 미국에 양자를 가 가지고 그래 가지고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해 가지고 그 사진을 연구를 해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는데, 그이가 한번 어느 분의 소개로 찾아왔습니다.
이 참선에 대해서 항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참선이란 게 대관절 어떠한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며, 참선을 해 가지고 구경(究竟)으로 도달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러한 질문을 해 왔습니다.

그 사람은 한국 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전혀 하지를 못하고 겨우 자기 이름만을 한글로 서투르게 쓸 정도였습니다. 너무 어려서 갔기 때문에 그런 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 말도 잘 못 알아듣는 사람에게 통역을 통해서 짧은 시간에 참선에 대한 설명을 해 주기도 어렵고 그래서 풍선을 하나의 예로써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이 참선,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꼭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지도하고 있는 하나의 그 체계적인 양식이기는 하지만,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반드시 일정한 양식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는 일체처 일체시에 충만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선지식(善知識)의 수단과 능력에 따라서 어떠한 방법으로 지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세계적인 사진작가지마는 그 사진을 찍고, 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사람은 글씨를 쓰고, 또 쇠를 만드는 그러한 그 제철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 쇠를 녹여서 좋은 쇠를 만드는 그 가운데, 또 백정이 소를 잡는 데에는 소를 잡는 바로 거기에도 참선이 있을 수가 있고 깨달음이 있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얘기를 하고.

그래서 사람마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 하나의 풍선을 불고 있다.

누가 가장 큰 풍선을 불며, 금방 그 풍선을 잘못 불면 처음에 조금 훅 불다가 어문 가운데에서 툭 터져 가지고 실패해 버린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상당히 클 때까지 분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러나 개중에는 이 우주의 법계에 가득찰 만큼 그러한 큰 풍선을 불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 가지고 터트릴 수 있는, 그렇게 풍선을 불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이 우주, 동서고금에 가장 크고도 좋은 풍선을 분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지금 우리는 승려로서 우리 나름대로에 가장 좋은 풍선을 불려고 목숨을 바쳐서 노력을 하고 있지만, 당신은 사진작가로서 당신의 풍선을 잘 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 사람이, 예술가도 상당한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이런 도(道)나 법(法)에 관해서 얘기를 하면은 서양 사람이나 동양 사람이나 이해를 잘 하는 것을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몇달 후에 그이가 인편에 쪽지를 써서 보냈는데, '지금도 풍선을 열심히 불고 있다'고 하는 그러한 그 전단을 보내왔었습니다.

'참선을 꼭 가부좌를 하고 단전호흡을 하고 화두를 타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 고정된, 참선에 관한 고정된 관념을 가져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그런 고정된 생각을 가지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지루한 것이다. 장소가 없으면 못하고 시간이 없으면 못하고 어떠한 특별히 혜택 받은 사람이 아니면 참선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참선 자체를 경원시(敬遠視)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할려고 하니까 지루하고, 발이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아프고 나중에는 졸음이 오고 아무리 해도 재미가 없으니까, ‘하! 이거 화두가 나한테 맞지 않는 것이냐?’ 또는 '내가 공부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심지어는 '나는 이 참선하고는 인연이 없는 것이 아니냐? 내 근기가 참선을 할 만큼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니냐? 차라리 이렇게 아무리 해 봤자 재미도 없고 별 성과도 없는 참선을 이렇게 한다고 해 봤자 허송세월만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경을 읽어 볼까? 염불을 할까? 주력을 할까?'
그래 가지고 경을 읽다가 염불을 하다, 주력을 하다, 그러다가 보면 또 다시 참선을 하고 싶어서 또 참선을 하다가 말다가, 참 이러한 분을 상당히 많이 겪어 봤습니다.

이 참선은, 초학자를 위해서 물론 책에 있는 그런 그 자세와 호흡하는 법과 화두를 참구하는 그러한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서 잘 지도를 받아서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워낙 범위가 넓고 자유스러운 것이어서, ‘그렇게 해야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하는데, 망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 한 것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고, 또 망상이 일어남으로써 오히려 참선을 잘할 수도 있는 그러한 면도 있는 것입니다.(처음~20분18초)





(2/3)----------------

어떤 사람이 그 집안에 어떻게 쥐가 많이 들끓든지, 그 쥐를 갖다가 없애기 위해서 별별 약을 다 놓기도 하고, 고양이를 다 갖다 놓기도 하고 그러되, 오히려 더 약을 놓아 가지고 몇십 마리 잡아봤자 며칠 안 있으면은 더 쥐가 성해 가지고 더 야단을 치고 더 번성을 하고 하는 것을 보았고, 고양이를 갖다 놔봤자 몇 마리 잡아서 찢어발겨 놓기는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렇게 쥐가 없어지지를 않고.
오히려 더 부엌이나 창고나 다락이나 천정이나 수채구녁 할 것 없이 뭐 집안에 있는 걸 잡아도 이웃집에서 오고 또 산중에서 내려오고 들에서 오고 이렇게 해서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연구한 끝에.

쥐를 갖다가 잡아서, 새끼 때 그 쥐구녁을 파 가지고 그 새끼를 잡아 가지고는 살살 그 쥐를 꽁댕이를 잘라버리고서 그 쥐를 갖다가 키웠는데. 주로 무엇을 먹여서 키우냐 하면은 쥐를 덫을 놓아서 잡아 가지고, 쥐 고기를 썰어 가지고 새끼 때부터 먹였던 것입니다.
쥐의 고기를 먹여서 차츰차츰 크면서, 쥐를 잡아서 큰 쥐도 넣어주면 배가 고프니까 그 쥐를 막 깨물라 먹고 해서, 인자 그 육식을 하니까 쥐가 굉장히 빨리 잘 컸습니다. 그래 가지고 쥐가 쥐 고기를 참 잘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 쥐를 풀어놓으니까 그 쥐란 놈이 천장이고 부엌이고 쥐구녕이고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쥐란 쥐는 다 잡아먹었습니다. 고양이를 시켜봤자 쥐구녕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한나절씩 쥐구녁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오면 잡아먹을지언정 쥐구녁에 딱 들어가 갖고 안 나오면 잡아먹지를 못하는데, 이 쥐를 훈련을 시켜서 내 놓으니까 구녁구녁이 다 드나들면서 싹 다 잡아먹어.
그런 다음에 마지막에 그 쥐는 사람에게 잘 길이 들어져서, 저를 갖다 마지막에 그놈을 잡어가지고 ‘니가 그동안에 모든 쥐를 잘 잡은 공로를 크게 치하를 하고, 그러나 미안하지마는 너도 너 갈 데를 가거라’ 이렇게 해서 처단을 했다 그런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쥐 때문에 곡식을 많이 먹고 모든 물건을 다 쏠고 그래서 그렇게 쥐 때문에 피해가 많은, 미국이나 서양이나 한국이나 쥐가 1년에 먹는 양곡이 수십만 수백만 석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이 쥐를 훈련을 시켜서 쥐를 잡게 하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도 드는데, 여러분은 그러한 일은 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런 얘기를 한 것은 이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이 화두! 이론상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분석하고 해 가지고 어떠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라 하는 것은.
아까 조실 스님께서 법문 하신 바와 같이 ‘알 수 없는 의심,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하는 바로 이놈이 뭣고~?’ 다맛 그렇게만 참구하는 것이지,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경에 있는 부처님 말씀과도 비교해서 ‘하!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따진다든지, 조사의 어록이나 다른 공안을 가지고 따져서 비교해 보고 이렇게 해서 어떠한 해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도 꽉 막히고 뒤도 막히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관, ‘이뭣고~?’
또 판치생모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심관(疑心觀)이거든.

다른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하나만을 생각해 가지고 그 하나에다가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른 것입니다.

어떠한 글귀나, 어떠한 물건이나, 어떠한 일을 갖다가 그것만 밤낮 생각해 가지고 생각이 다른 데에 가지 못하고 그 생각만 하도록, 그러면은 애인을 이별한 사람이 밤낮 애인 사진만 놓고 애인만 들여다보고 애인 생각만 하면 그것이 참선이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죽은 자식을 생각해 가지고 밤낮 죽은 자식만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나깨나 생각 안 할라고 아무리 떨쳐 버릴려고 해도 그 자식 얼굴이 환히 나타나면서 자식 생각만 한다면, 그러면 꿈에서도 자식 꿈을 꾸고, 눈을 떠도 자식 생각, 누구 청년 학생들을 봐도 자식 생각하면 그 사람이 그러면 참선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왜 아니냐 하면, 그 한 일에 생각이 집중된다고 한 점에서는 그 점 하나는 혹 공통점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참선이라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는 것이고, 생사해탈을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화두! 화두를 참구해 가지고 하는 이 참선은 알 수 없는 의심! 의심으로 그것을 관(觀)하기 때문에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뭣고?’를 하되 의심이 없이 그냥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밤낮 ‘이뭣고’ 고것만 생각하고 있으면 ‘이뭣고’를 해도 그것은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의심이 아니기 때문에.

의심관이라야 하는데, 의심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한 것을... (그것은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뭣고?’를 하라니까, ‘이뭣고?’ 소리를 잊어버리고서 ‘이웃집 영감, 이웃집 영감’ 며칠을 하다가 와서 ‘이웃집 영감’을 많이 찾아도 잘 안된다고 그런 소리를 하고.
또 어떤 노인은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화두를 타고 법문을 듣고 집에 가서는 자나깨나 큰소리를 지르면서 ‘전강 스님! 전강 스님!’ 자꾸 전강 스님을 불러싸서, 그 며느님과 손녀가 그 할머니를 모시고 와 가지고 ‘원장 스님이 전강 스님을 자꾸 부르라고 했다’고, '그래서 밤낮으로 전강 스님을 불러싸니 정말 원장 스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느냐?'

나는 ‘이뭣고?’ 이렇게 하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그 할머니가 잘못 알아듣고 가서 밤새도록 전강 스님만 불러싼다고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잘 타일러 드려가지고 얼마 동안을 그 노보살님이 잘 하시다가 지금은 인자 저승으로 가셔서 극락세계를 가셨거나 다시 몸 바꿔 나셨지 않은가 그리 생각이 됩니다마는.

이 한 자리에서 같이 들어도 듣는 사람마다 다 각기 달리 듣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엉뚱하게 이해를 해 가지고 그러기 때문에 법회 때마다 이 참선 하는 법,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것은 새로 오신 분도 있고 또 오신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정말 가끔 한 번씩 ‘이뭣고?’ 소리는 듣지만 '대관절 이뭣고라는 것이 무엇이냐?' 전혀 감을 잡지 못한 그러한 분들도 있고, 또 자기 나름대로 여러 해를 다니면서 한다는 것이 결국은 '전강 스님'을 불러싸코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법회 때마다 말씀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잘 올바르게 하면서, 화두를 올바르게 참구할 줄만 알면 공부는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세도 바라지고 또 단전호흡을 함으로써 피로 회복도 되고 또 좋지 못한 성격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 잘 골라지고, 그러면서 이 참선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체 생활 속에서 자꾸 단속을 해 나가면 언젠가는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입니다.

걸어갈 때나, 차를 탈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세수를 할 때나, 직장에서나 언제라도 그 의단이 독로해서, 일이 있을 때에는 일하는 가운데에도 화두가 떠나지를 않고, 화두 드는 가운데에 모든 사람을 접견할 수도 있고, 일도 할 수가 있고, 그렇게 해서 주변이 시끄러워도 상관이 없고, 조용하거나 시끄럽거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 때가 기어코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뜰히 해 가다보면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갖다가 태양이고 달이고 별이고 무엇이고 간에 그것을 소반 위에 있는 쌀이나 곡식을 갖다가 거머쥐듯이[大地撮來如粒米], 온 삼천대천세계도 한 손으로 쏵 휘어잡아서 거머쥘 수 있을 것 같은 그러한 참, 기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온 태양과 별, 뭐 달까지라도 한 손에 거머쥐어다가 밝은 데다 갖다 놓고서, 그걸 갖다가 손바닥에다 놓고서 그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러한 걸림 없는 경계가 나타날 것입니다[當陽打鼓大家看].
그러면 제도 받을 중생이 어디가 있으며, 제도를 할 부처가 어디가 있느냐 그말이여. 천당과 지옥이 무엇이며, 중생과 부처가 무슨 차별이 있는 것이냐 그말이여. 

그러나 안중(眼中)에 약미제금설(若未除金屑)이면, 눈 가운데 만약 금싸래기를 제거, 빼 내지 못하면,
요변현황야대난(要辨玄黃也大難)이다. 어떤 것이 누르고 어떤 것이 검은 것을 가려내기는 크게 어려운 것이다.

겨우 공견(空見), 과거 · 현재 · 미래 삼세(三世)가 일념(一念) 속에 있고, 육도법계가 바로 이 일념 속에 있어서 동서남북에 걸릴 것이 없고, 시간과 공간에 막힐 것이 없는 그런 경지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현중현(玄中玄), 공안에 있어서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마치 눈 가운데에 금싸래기를 빼내지 못한 거와 같은 것입니다.

겨우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다'고 하는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그래 봤자 그것은 체중현(體中玄)의 경계라, 체중현의 경계는 공(空)의 이치거든.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인데, 진공의 이치도 이렇게 옅은 분별심으로 이렇게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확철대오해서 그렇게 크게 봐 버리면 그것도 상당히 어려운 것이고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바로 깨달랐다고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활구(活句) 문중에, 이 조사(祖師) 문중에 있어서는 체중현 도리 보는 그러한 것을 깨달랐다고 인증(認證)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러한 체중현 도리를 보는 것으로서 인가를 해 주면 그 각견(覺見)을 벗어 버리지를 못하고, 이치(理致)로는 짐작을 하지마는 사(事)에 걸림이 없어야 하는데, 자기는 부처가 와도 한 방맹이, 조사가 와도 한 방맹이, 그래서 뭐 거침이 없을 것 같은 그러한 횡행자재(橫行自在)한 그러한 생각을 갖지만, 이치로 그럴지언정 사(事)에 막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인가를 해 주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의 공부가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를 못하고.
그래 가지고 말을 함부로 해서, 법(法)을 설하되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는 것이고, 현(顯)과 밀(密)이 있는데 현밀(顯密)을 가리지를 못해 가지고 함부로 하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볼 때에는 기가 막힌 도인같이 보일는지 모르지만 정말 중생의 근기 따라서 해 줄 말이 있고 안 해 줄 말이 있는 것이며,
때에 따라서 인과법이라든지 모든 방편설이 다 적재적소에 쓰면은 좋은 약이 되려니와, 그것을 함부로 가리지 못하고 함부로 쓰게 되면, 법도 못쓰게 만들고 또 중생도 못쓰게 만들고 자기 자신도 그러한 중대한 과오를 범해서 용서받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자기보단 훨씬 나은 사람에게 인가를 해 주고 그 사람에게 법을 전해야지, 자기와 같은 정도의 사람에게 법을 전하고 인가를 해 주면, 인가 받은 그 사람은 그 사람의 반 밖에 못되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인가(印可)라 하는 것은 '옳다! 옳다! 니가 옳게 깨달았다' 이렇게 해 준 것이 인가가 아니고, 그 종사(宗師)가 그 학인(學人)한테 꼼짝을 못해야 그것이 바로 인가다" 이러한 말씀도 하신 바가 있습니다.(20분26초~39분23초)





(3/3)----------------

여러분께서는 활구참선을 하시되—이 불법(佛法)을 10년 20년 믿지마는 참선이 무엇인지, 활구참선이 무엇인지, 화두가 무엇인지, 그저 부지런히 시주하고, 염불하고, 부처님께 공을 들이고, 그러한 것이 불법인줄 알고 일생을 지극정성으로 믿고서 스스로도 많은 공덕을 쌓았다고 생각하고, 모든 다른 사람들도 '참, 그분이 신심이 있다. 참, 공덕이 장하다. 틀림없이 극락세계에 가셨을 것이다' 이러한 칭송을 듣고 그러면서 일생을 마친 분들도 참 많습니다마는, 활구참선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기에까지 이르른 사람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불문(佛門)에 들어와서 여러 해 되시고, 또 법문도 많이 들으시고, 경책(經冊)도 많이 보신 그런 분도 계시고, 여러 절을 거치고 거쳐서 오신 분들도 많이 계시고, 처음 오신 것이 바로 여기에 오신 분들도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이 자리에 법회에 참석하셔서 활구참선을 들으시게 된 인연(因緣), 이것은 숙세(宿世)의 깊은 인연이 아니고서는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시고 그리고서 그 49년 동안 설하신 교(敎) 밖에 따로 전하신 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이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듣기도 어렵고, 들어도 믿기 어렵고, 이렇게 듣고 믿어도 직접 정성과 목숨을 다해서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다른 공부는 하면 한 만큼 알아진 것이 있고, 열심히 하면 한 만큼 무엇이 얻어진 것이 있고 그래서 하면 재미가 있고 보람을 느끼는데, 이 활구참선은 무엇이 알아진 것도 없고 나타난 것도 없고 맨날 해봤자 이게 죽 떠먹은 자리고. 그러니 이거 재미 붙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하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지만, 확철대오 하기 전에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건강이 좋아진다든지 또는 자기의 모든 나쁜 성격이 완화가 되고, 예를 들자면은 신경질을 내는 거, 사소한 일에 싸우고 모다 그런 것이 이 참선을 함으로써 차츰차츰 그런 신경질을 안 내게 되고 또 감정에 끄달리지 않게 되고 또 자기의 감정을 자기의 힘으로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이러한 것은 한 달, 두 달, 석 달, 1년 열심히 하다보면 누구나 그런 효과를 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 하더라도 인간을 살아가는데 대단히 좋은 것이고, 모든 가족들에게 직장에서 사회에서 존경받을만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이 있고 없고, 지위가 높고 옅으고, 힘이 세고 약하고 간에 대부분 자기 감정을 자기가 마음대로 조정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감정이 일어나지 아니할 때는 참 훌륭한 분이라고 다 하는데, 한번 어디를 건드려 가지고 감정이 폭발했다 하면 뭐 박사고 교수고 장관이고 장군이고 간에 한번 속이 뒤집어졌다 하면은 여간 자기가 자기 감정을 수습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평소에 이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극기(克己)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자기가 자기를 이긴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인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도 ‘백만 군사를 호령을 해서 움직일 수는 있어도 자기가 자기를 이기기는 어려우니라. 자기가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다운 대장부(大丈夫)니라’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힘은 억지로 참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참선을 조석으로 한 시간씩 하고 낮에도 생활 속에서 항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또 화두를 들고 참구하고 이럼으로써 그것이 참선이 생활화 될 때에 무의식 속에서 모든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내 뜻에 어긋나는 말을 한다 하더라도, 찰나적으로 무슨 기분 나쁜 생각이 탁! 속에서 뭉클 일어날라가도 떠억 ‘이뭣고?’해 버리면 간단하게 없어지고, 그 일어나는 성나는 마음이 금방 화두로 돌이켜져 버린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참선하는 사람은 성을 낼라면 내고 안 낼라면 안 내고, 슬퍼할라면 하고 슬퍼 안 할라면 안 하고, 미워할라면 미워하고 또 안 미워할라면 안 미워하고. 그까짓 것 뭐 희로애락이 자유자재해.

이것이, '자유자재다, 해탈이다'하는 것이 다른 데에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生死)에 자유자재, 또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전부 우리의 일념(一念)을 두고 하는 것이고, 일념을 잘 단련을 하고 일념을 갖다가 돌이켜서 그놈을 갖다가 단속을 하는 가운데에 생사 자유의 이치, 진리를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인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면, 무엇이 매우 어디 깊은 데가 있고 높은 데가 있고, 그래 가지고 어려워서 도저히 우리 범부(凡夫) 중생은 손이 닿는 것이 아니고 해 봤자 되지도 않는 것이다. 이리 겁을 집어먹고 그 자꾸 자포자기를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최상승법이야말로 우리 중생심, 중생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빨리 깨닫고, 더디 깨닫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깨달음은 갈 곳이 없는 것이지, 뭐 금방 오늘 툭 깨쳤다고 해서 그러면 다 일이 끝났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확철대오를 한 것은 겨우 어린아이 낳아 놓은 거와 같다. 어린아이는 낳아놔서 분명히 그것도 이목구비가 다 있고 사람이지만, 젖을 먹이고 밥을 먹이고 또 이 옷을 입히고 가리키고 해서 제 앞을 꾸릴 만큼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인간이라고 하는 권리를 인증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안(公案)을 타파해서 자기의 면목(面目)을 깨달랐다 하더라도 그것으로써 우리의 수도(修道)가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은 바에 의해서 잘 보림(保任) 공부를 해서, 그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쓸 수가 있게 되어야 그래야 비로소 도인(道人)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깨달라 가지고 오후보림(悟後保任)을 안 하고 등한(等閒)히 하나, 더디 깨달라도 깨달을 때까지 그 공력을 들여서 정진을 해 놓은 사람은 깨달은 뒤에 오후보림 공부가 벌써 깨닫기 전에 많이 다 숙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고 더디 깨닫는 것을 문제 삼지 말아라. 다맛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는 것’ 그것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께서도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아라’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그런 조급한 생각을 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누누이 하신 것입니다. 생각을 내 가지고 빨리 깨달을려고 급한 생각 낸 것이야말로 깨달음을 더디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꾸준히 그리고 올바르게만 해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것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인데.

생각만 공연히 조급한 생각을 내 가지고 올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그건 깨달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명소일모선성(求名少日慕宣聖)타가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나사여하착의구(那事如何着意求)오  의사량처불상간(擬思量處不相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구명소일모선성(求名少日慕宣聖)타가, 명예와 권리를 구하는 젊을 때에는 공자님을 섬기다가,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로구나. 죽음이 두려운 늘그막에사 부처님을 믿게 되었다.
나사여하착의구(那事如何着意求)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뜻을 착(着)해 가지고 구해야 할 것인가?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다가 금생에 태어나서는 유교를 믿고 제 부모의, 제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우리나라 모든 생활이 대부분 다 이조(李朝) 동안에 유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종교가 없는 사람은 대부분 다 유교를 믿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공자님을 믿고 삼강과 오륜을 지키면서 그렇게 공자님을 믿어 오다가 늘그막에사, 죽음이 두려운 늘그막에사 부처님을 친하게 되었다. 이제사 부처님을 믿게 되었다 이것입니다.

부처님을 가까이 하게 되었는데,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정말 그것을 똑바로 알기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뉘기 짜서 이리저리 사량심(思量心)을 가지고 무엇을 찾고 알려고 하면, 벌써 그것은 이 최상승법에는 어긋나 버린 것이다[擬思量處不相干] 그말이지.
왜 그러냐 하면, 생각을 일으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느냐’고 생각하면 벌써 그것 자체가 중생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그 화두, 공안 모다 그런 것에 대해서 책이 나오기도 하고, 또 일본 책도 나오기도 하고 해서 그 참선에 대해서 좀 알고는 싶은데, 밤낮 ‘이뭣고?만 하라' 그러고 하니까,
일본말을 아는 사람은 일본 책을 사서 이리저리 읽어 보면 공안에 대해서 이리저리 해설도 되어 있고, 또 천착(穿鑿)이 되어 있고, 파설(破說)도 되어 있고 해서, 썩 그것을 보면은 재미가 있고, 그것 얼마동안 지내면은 자기도 다른 공안도 요리 보면은 가늠이 가고 하니까, 그 버썩 재미가 있다 그말이여.
그런 식으로 공안을 천착을 하고 사량심으로 따져서 알아 봤자 그것은 생사해탈과는 영판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생사심(生死心)을 더욱 치성하게 만들기 때문에 깨달음과는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어야. 알 수 없는 의심, 지금 이렇게 설교를 듣고 하더라도 이 들은 가운데에도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이 떠억 그 의심이 있어야. 그 의심 속에서 말을 들어야 하거든.
그 법문을 들을수록에 의심이 더 간절하고 돈발(頓發)을 해야 법문을 옳게 들은 것이고. 걸음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고 꺼질 때마다, 자기의 본참화두에 충실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를 올바르게 안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9분25초~57분5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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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대지촬래여립미~’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p166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尙廣錄 卷第十二之下 信心銘闢義解下 게송 참고.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칠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4) ;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ㆍ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 선사를 찾아가자 한암 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 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 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 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길로 만공 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 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 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 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 선사가 “옳다. 옳다![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을 하며 수행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탁마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시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날더라.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음 갑인년 12월 2일)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할(喝),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세수 77세, 법랍 61세.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 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ㆍ정우(正愚)ㆍ정무(正無)ㆍ정대(正大)ㆍ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전강대종사 법어집으로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가 있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납자(衲子 깁다·꿰매다·스님·장삼·스님의 옷 납/사람 자) ;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子]」이란 뜻으로 스님이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납(衲)」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수지백납천창리) 三足金烏徹天飛(삼족금오철천비)』란 것이 있다. 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本色)을 말하는 것이다.
*제접(提接 이끌 제/응대할•가까이할 접) ; (수행자를) 가까이하여 이끌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교외별전(敎外別傳) : 부처님께서 말씀으로써 가르친 바를 모두 교(敎)라 하는데, 교 밖에 따로 말이나 글을 여의고[不立文字] 특별한 방법으로써 똑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대번에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법문이 있으니 그것이 곧 선법(禪法)이다. 교는 말로나 글로 전해 왔지마는 선법은 마음으로써 전하여 왔으므로 이른바 삼처전심(三處傳心) 같은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세로판 p28, p34. 가로판 p29, p35.
世尊 三處傳心者 爲禪旨 一代所說者 爲敎門 故曰 禪是佛心 敎是佛語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니라.

是故 若人 失之於口則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則世間麤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旨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빙긋이 웃은 것[拈花微笑]이 모두 교의 자취[敎迹]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敎外別傳禪旨]가 되리라.
*선지(禪旨) : [범] dhyana 음을 따라 선나(禪那) • 타연나(駄衍那)라 쓰고, 줄여서 선(禪)이라고만 한다。고요히 생각함(靜慮), 생각하여 닦음(思惟修), 악한 것을 버림(棄惡) 또는 공덕림(功德林) 등으로 번역한다。진정한 이치를 궁리하고 생각을 안정하게 하여 산란치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가섭존자가 전한 선법이 널리 퍼지지 못하고 교법만이 유포되었었는데, 달마대사(達摩大師)가 건너온 뒤로부터 선법이 크게 발달되어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이 완성되었다.
*육조(六祖) : (638 ~ 713) 중국의 선종(禪宗)은 달마(達摩)대사를 초조로 삼고, 그로부터 육대 되는 혜능(慧能)을 육조라고 한다.
그는 속성이 노(盧)씨고,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 신흥(新興)에서 났다. 세 살에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하여 공부 하지 못하고, 날마다 나무를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스물 네 살 때에 장터에서 어떤 사람이 <금강경>읽는 것을 듣고 깨친 바 있어 그 사람의 지시로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黃州府) 황매산(黃梅山)에 가서 오조 홍인대사(弘忍大師)를 뵙고, 그의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를 찧고 있었다.

오조가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하는데, 교수사(敎授師)로 있는 신수(神秀)는 글 짓기를 「몸은 보리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 부지런히 닦아서, 티끌 묻지 않도록(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이라 하였다.
이때 노행자(盧行者)는 「보리 나무 없는 것, 마음 거울 비인 것, 아무것도 없는데, 티끌 어디 묻으랴(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고 지었다.

오조는 그를 인가(印可)하고 석가여래의 법통을 표시하는 의발(衣鉢)을 전해 주었다. 그는 남방으로 돌아가서 십 팔 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가 비로소 중이 되어, 소양(韶陽)의 조계산(曹溪山)에서 선법(禪法)을 크게 일으키니 견성(見性)하여 그 법을 이은 제자만 사십여 명이 있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1년에 칠십 육 세로써 입적하였다. 저술로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있다.

*신회선사(神會禪師) : (686 ~ 760) 또는 하택선사(荷澤禪師)라고도 한다. 호북성(湖北省) 양양부(襄陽府) 고(高)씨의 집에서 났다. 어려서 유교(儒敎)와 도교(道敎)의 글에 정통하였는데 <후한서(後漢書)>를 보다가 불교의 묘한 이치를 알고 출가하여 경을 많이 숭상하였다.
처음엔 형주(荊州)의 옥천사(玉泉寺)에 가서 삼 년 동안이나 신수(神秀)대사를 모시고 있다가, 그가 칙천 황후(則天皇后)의 청을 받고 서울로 가게 되자 그의 지시로 육조의 법회로 갔다.  그 때의 나이가 열 세 살이라기도 하고 마흔 넷이었다고도한다.

육조의 법을 받은 뒤에 남양(南陽)의 용흥사(龍興寺)와 낙양(洛陽)의 하택사에 있으면서, 육조의 종지를 크게 드날려서 신수의 종지가 쓰러지게 되었다. 어사(御史) 노혁(盧奕)의 무고(誣告)로 여러 해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고 「안록산(安祿山)의 난」에는 군비와 군수품을 많이 모집하여 나라에 바쳤다.
저술로는 <현종기(顯宗記)> 1권, <신회어록(神會語錄)> 3권, <하택미결(荷澤微決)> 1권이 있다. 그의 문하에 유능한 이가 많아서 한동안(150년 가량) 하택종이 큰 세력을 떨쳤다.

*남악회양 선사(南嶽懷讓禪師) ; 『육조단경(六祖壇經)』 참청기연품(參請機緣品)에서.
懷讓禪師  金州杜氏子也  初謁嵩山安國師  安發之曹溪參扣  讓至禮拜 師曰 甚處來  曰 嵩山  師曰 什麼物 恁麼來  曰 說似一物卽不中  師曰 還可修證否  曰 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회양 선사는 금주 두씨의 아들이다. 처음 숭산의 혜안 국사를 뵈니 혜안 국사는 조계로 보내 공부하도록 하였다. 회양 스님이 찾아뵙고 예배하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육조) “어디에서 왔느냐?[甚處來]”
(회양) “숭산에서 왔습니다[嵩山]”

(육조)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什麼物 恁麼來]”
(회양) “한 물건이라도 맞지 않습니다[說似一物卽不中]”

(육조) “도리어 닦아 증득할 수 있느냐?[還可修證否]”
(회양)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않으나 오염은 없습니다[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師曰 只此不汚染 諸佛之所護念 汝旣如是 吾亦如是  西天般若多羅 讖汝足下出一馬駒 踏殺天下人 應在汝心 不須速說  讓豁然契會 遂執侍左右一十五載 日臻玄奥 後往南嶽 大闡禪宗 敕諡大慧禪師

(육조) “다만 오염되지 않는 이것을 모든 부처님이 호념(護念)하는 바이라 네가 이미 이와 같고 나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서천의 반야다라 존자가 너의 발 아래 한 망아지가 나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인다고 예언을 하셨으니 네 마음속에 두고 모름지기 함부로 말하지 말라.

회양이 훤칠하게 깨우치고는 육조 스님을 15년 동안 모시면서 날이 갈수록 공부가 깊어졌다. 뒷날 남악으로 가서 선종(禪宗)을 크게 떨쳤다. 왕이 대혜선사라 호를 내렸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동용(動用) ;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씀[用]. 움직이고 작용함. 활동. 동용(動容)이라고도 한다.

 

송담 스님

 

[참고] 송담스님(No.306) - 1986년 8월 화두·불명·수계 법회(86.08.03)에서.
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33분18초~35분)
*지해종도(知解宗徒) ; 참선 공부를 알음알이로 따져서 해석하고 강론하고 공부해 가는 사람.
*지해(知解) ; 상량(商量). 알음알이.
*알음알이[知解. 解. 會. 解會]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 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 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남악회양 선사는 그 물음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뭐라고 대답을 할 수도 없고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꽉 막혀서 「어쩔 줄을 모르고 물러 나와서 8년 동안을」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이냐?’ 앉어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 눌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하는 그 의심이 꽉~ 찼던 것입니다' ; '망조(罔措)라가 지팔년(至八年)에사,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2. (가로판 p14)에 나오는 문구.
*망조(罔措) ; 망지소조(罔知所措 그물·근심할·없을 망/알 지/ 바·방법 소/둘·처리할·조처할 조). 너무 당황하거나 급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함.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1~13.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주해)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 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 說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너희들은 알겠는가?”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참고 ❷] 『육조단경(六祖壇經)』 (덕이본) 참청기연품(參請機緣品)에서. (남악회양 선사南嶽懷讓禪師)
懷讓禪師  金州杜氏子也  初謁嵩山安國師  安發之曹溪參扣  讓至禮拜 師曰 甚處來  曰 嵩山  師曰 什麼物 恁麼來  曰 說似一物卽不中  師曰 還可修證否  曰 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회양 선사는 금주 두씨의 아들이다. 처음 숭산의 혜안 국사를 뵈니 혜안 국사는 조계로 보내 공부하도록 하였다. 회양 스님이 찾아뵙고 예배하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육조) “어디에서 왔느냐?[甚處來]”
(회양) “숭산에서 왔습니다[嵩山]”

(육조)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什麼物 恁麼來]”
(회양) “한 물건이라도 맞지 않습니다[說似一物卽不中]”

(육조) “도리어 닦아 증득할 수 있느냐?[還可修證否]”
(회양)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않으나 오염은 없습니다[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師曰 只此不汚染 諸佛之所護念 汝旣如是 吾亦如是  西天般若多羅 讖汝足下出一馬駒 踏殺天下人 應在汝心 不須速說  讓豁然契會 遂執侍左右一十五載 日臻玄奥 後往南嶽 大闡禪宗 敕諡大慧禪師

(육조) “다만 오염되지 않는 이것을 모든 부처님이 호념(護念)하는 바이라 네가 이미 이와 같고 나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서천의 반야다라 존자가 너의 발 아래 한 망아지가 나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인다고 예언을 하셨으니 네 마음속에 두고 모름지기 함부로 말하지 말라. 회양이 훤칠하게 깨우치고는 육조 스님을 15년 동안 모시면서 날이 갈수록 공부가 깊어졌다. 뒷날 남악으로 가서 선종(禪宗)을 크게 떨쳤다. 왕이 대혜선사라 호를 내렸다.

[참고 ❸]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 (종조본) (육조혜능선사 술 | 학담 해의 | 큰수레) p413에서.
필자가 출가 초기에 보던 단경 판본에는 혜능선사와 회양선사의 문답에서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라고 묻자 회양이 '어쩔 줄 모르다 팔년이 지나서야[罔知所措 經八年]’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발간된 단경 판본에는 이 구절이 모두 빠져 있다. 그러나 두 선사의 문답에 대해서는 『불조정전고금첩록(佛祖正傳古今捷錄)』과 『남악단전기(南嶽單傳記)』에 자세하게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불조정전고금첩록(佛祖正傳古今捷錄, 속장경 제146권)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육조가 말했다.'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祖曰 甚麼物恁麼來]
회양이 말이 없다가 8년이 지나서 홀연히 깨닫고는 조사에게 아뢰었다.[師無語 遂經八載 忽然有省 乃白祖曰]
'제가 아는 곳이 있습니다'[某甲有箇會處]
육조가 말했다. '어떠한가?'[祖曰 作麼生]
회양이 말했다. '한 물건과 같다 해도 맞지 않습니다'[師曰 說似一物卽不中]

남악단전기(南嶽單傳記, 속장경 제146권)에서는 다음 같이 말하고 있다.
혜능이 말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能曰 什麼物恁麼來]
회양이 말이 없다가 8년이 지나서 홀연히 깨닫고 혜능선사에게 아뢰었다.[師無語 經八載 忽然悟 乃白能曰]
'제가 아는 곳이 있습니다'[某甲有個會處]
'어떠한가'[能曰 作麼生]
회향선사가 말했다. '한 물건과 같다 해도 맞지 않습니다'[師曰 說似一物卽不中]

[참고 ❹] 『불조정전고금첩록(佛祖正傳古今捷錄)』 淸 果性集 (卍新纂大日本續藏經 笫 86冊 No.1595)

第一世南嶽懷讓禪師
高宗儀鳳三秊佛誕日生 感異瑞應於玄象 太史奏聞 帝敕親慰其家 十五得度受具 同坦然謁安國師 安令詣曹溪見六祖 祖問 甚處來 曰嵩山來 祖曰 甚麼物恁麼來 師無語 <遂經八載> 忽然有省 乃白祖曰 某甲有箇會處 祖曰 作麼生 師曰 說似一物卽不中 祖曰 還可修證否 師曰 修證卽不無 染汚卽不得 祖曰 祇此不汚染 諸佛之所護念 汝旣如是 吾亦如是 西天般若多羅讖 汝足下出一馬駒 踏殺天下人民 不宜速說佛法 師得法後 侍祖復十五秊 先天二秊 往衡嶽 居般若寺 開元中 得沙門道一付法 示寂於唐玄宗天寶三秊八月十一日 諡曰大慧 嗣法九人 頌

甚麼物也恁麼來  天運違和花不開
寒到一回徹骨處  春風拖綠上莓苔

[참고 ❺] 『남악단전기(南嶽單傳記)』 淸 弘儲表 (卍新纂大日本續藏經 笫 86冊 No.1596)

第三十四祖南嶽懷讓禪師
金州杜氏子 唐儀鳳二年四月八日 降生 有白氣上屬天 太史奏之高宗 高宗問 是何祥乎 對曰 國之法器 不染世榮 高宗敕金州太守韓 偕親往存慰 年十歲惟樂佛書 有玄靜三藏 告師父母曰 此子若出家 必獲上乘 廣度衆生 至垂拱三年 年十五 依荊州玉泉寺弘景律師 出家 通天二年 受戒 習毗尼藏 一日歎曰 夫出家者 當爲無爲法 天上人間 無有勝者 遇同學坦然 相與謁嵩山安 安啟發 乃直詣曹溪 禮能大師 能曰 何處來 師曰嵩山 能曰 什麼物恁麼來 師無語 <經八載> 忽然悟 乃白能曰 某甲有個會處 能曰 作麼生 師曰 說似一物卽不中 能曰 還可修證否 師曰 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 能曰 只此不汚染 諸佛之所護念 汝旣如是 吾亦如是 西天般若多羅讖 汝足下出一馬駒 踏殺天下人 應在汝心 不須速說 師旣得法 侍能復十五年 先天二年 往衡嶽 居般若寺 示衆曰 一切萬法 皆從心生 心無所生 法無能住 若達心地 所作無礙 非遇上根 宜愼辭哉 僧問 如鏡鑄 像像成後 光歸何處 師云 如大德未出家時 相狀一向什麼處去 僧云 成後爲什麼不鑑照 師曰 雖然不鑑照 謾他一點不得

表曰 十八女兒不繫裙 難得入地獄如箭 堯封潛曰 判官手裏筆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송담스님(No.306)—86년 8월 화두 불명 수계 법회]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 참선법 A ]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 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下直)할 때까지,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64분6초~66분26초) [ 참선법 A ]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

오직 ‘이뭣고?’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꽉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를 생각하고 관조(觀照)해 나갈 때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분별식(分別識)이 다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해서 생각 없는 데에 도달하고, 생각 없는 데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이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큰 장독에다가 간장을 가뜩 부어놓은 것을 큰 메겡이로 메쳐서 그 간장독이 쩍! 벌어져서 간장이 와르르르 쏟아지듯이 우리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함으로써 무량겁의 칠통(漆桶)이 동시에 타파가 되고, 바로 나의 본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고, 불조(佛祖)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고, 우주의 근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송담스님(No.086)—78년 7월 관음재일 법회]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목 ; 한 번에 모두. 한꺼번에 몰아서 함.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 희로애락 · 빈부귀천 · 시비이해 · 삼독오욕 · 부모형제 · 춘하추동 ·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 · 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얼굴·모습).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 - 體中玄 • 句中玄 • 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가로판 p215, p219)
[三玄] 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2분48초)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 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19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2분19초)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19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2분26초)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19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2분36초)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 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공견(空見) ; 공(空)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그릇된 견해. 공(空)을 허무론적인 견해로 이해하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인과(因果)의 도리를 비롯한 모든 것의 존재가 부정된다.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전가부좌(全跏趺坐) · 온가부좌(온跏趺坐) ·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어문 ; '딴', '다른', '엉뚱한'의 사투리.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경원시하다(敬遠視--) ;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꺼리어 멀리하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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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5분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❷]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5분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관(觀)한다(관하다) ;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715)—2007년(정해년) 동안거결제 법어(07.11.24)(1분59초)
화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냐 하면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하는 글자 석 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하는 것은 그 의심을 나게 하는 것이고, 그 ‘이뭣고?’함으로써 나온 그 의심을 떠억 관(觀)하는 것입니다. ‘관(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하는 건데.

그 화두는 혼침(昏沈)이 오고 그럴 때에는 미간(眉間)에다가 두고 관하고, 혼침이 안 올 때에는 배꼽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초학자가 너무 미간에다가 화두를 들고 관(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上氣)가 될 수가 있으니, 어쨌든지 숨을 들어마실 때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다 들어마셨으면 한참 머물렀다가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이뭣고?’

화두를 들 때에는 기왕이면 들었다가 내쉴 때 ‘이뭣고?’를 초학자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마는 나중에 익숙해지면 호흡에 상관없이 항상 알 수 없는 의심이 단전에 딱 있도록 호흡은 무심(無心) 속에 항상 단전호흡을 하도록 이렇게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39분12초~41분12초)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19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1분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줄여서 대천(大千), 대천계(大千界), 대천세계(大千世界), 삼천세계(三千世界), 대천국토(大千國土)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금싸래기 ; 금싸라기(①금의 잔부스러기. ②아주 드물고 귀중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싸래기는 '싸라기(①부스러진 쌀알. ②빗방울이 갑자기 찬 바람을 만나 얼어서 쌀알처럼 되어 떨어지는 눈)'의 사투리.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현중현(玄中玄) ;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활구(活句) 문중(門中) ;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집안.
*조사문중(祖師門中) ; 교외별전(教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조사선(祖師禪)을 수행하는 집안.
*각견(覺見) ; 깨달음[覺]에 집착하는 견해. 불법은 모든 속박을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인데, 그 깨달음[覺]에 집착하여 반대로 또 하나의 속박을 초래하는 것을 경계하는 용어. 모든 견해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는 선종의 입장을 반영한다.
*사(事) ; ①구체성. 현상. 나타나는 현상. ②개별적 현상. 차별의 상(相)의 하나하나. 구체적, 차별적인 것. 이(理)의 반대. 현실.
*방맹이(방망이) ; 방(棒). 몽둥이. 또는 주장자(拄杖子). 방(棒)은 ‘방망이 봉’자이지만 불교에서는 덕산방(德山棒) 등의 용례에 따라 ‘방'으로 읽는다.
*방할(棒喝) ; 선가(禪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접 체험의 경지를 나타날 때, 또는 수행자를 점검하며 꾸짖거나 호통칠 때, 방망이나 주장자(拄杖子)를 세우거나 그것으로 수행자를 몽둥이질하는 것을 방(棒)이라 하고, 그러한 때 크게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할(喝)이라 한다.
덕산선감(德山宣鑑)은 방으로 가풍(家風)을 삼았으며, 임제의현(臨濟義玄)은 할로써 지도방법을 삼았다. 이것을 두고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이라 한다.
*횡행자재(橫行自在 가로 횡/갈 행/스스로 자/있을 재) ; 속박이나 장애가 없이 아무 거리낌이 없이 제멋대로 마음대로 행동함.
*현밀(顯密 나타나다·분명함 현/은밀할·숨길 밀) ; ①뚜렷함과 은밀함. ②현교(顯敎)와 밀교(密敎). 현로(顯露)한 가르침과 비밀스런 가르침. 드러나는 가르침과 비밀스런 가르침의 의미.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 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종사(宗師) ; 정법(正法)이나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전하여 대중의 존숭(尊崇)을 받는 스님.
*학인(學人) ;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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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대장부(大丈夫 큰·훌륭할 대/어른·존칭 장/사내·일꾼 부) ; 장부(丈夫).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깨달음은 갈 곳이 없는 것이지, 뭐 금방 오늘 툭 깨쳤다고 해서 그러면 다 일이 끝났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확철대오를 한 것은 겨우 어린아이 낳아 놓은 거와 같다.
어린아이는 낳아놔서 분명히 그것도 이목구비가 다 있고 사람이지만, 젖을 먹이고 밥을 먹이고 또 이 옷을 입히고 가리키고 해서 제 앞을 꾸릴 만큼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인간이라고 하는 권리를 인증 받게 되는 것입니다' ; 오후보림(悟後保任), 장양성태(長養聖胎).

[참고] 보조지눌 스님의 『수심결(修心訣)』에서.
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原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란 범부(凡夫)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妄想)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이 참부처[眞佛]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性品)자리에는 원래(原來) 번뇌(煩惱)가 없고,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이 본래(本來) 스스로 구족(具足)하여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라고 한다.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 云漸修也 比如孩子初生之日  諸根具足  與他無異  然  其力未充  頗經歲月  方始成人

점수(漸修, 차츰 닦음)란, 비록 본래 성품(本性)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習氣)를 갑자기 모두 없애기는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 공(功)을 이루어 성인(聖人)의 태(胎)를 길러 양성하면,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聖人)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라고 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諸根)이 갖추어 있음은 남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므로 제법 세월(歲月)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成人]이 되는 것과 같다.
*오후보림(悟後保任) ; 보림(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장양성태(長養聖胎).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고인(古人)께서도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아라’ ; 대오선(待悟禪).
*대오선(待悟禪 기다릴 대/깨달을 오/고요할 선) ; 참선하는 데 있어서 깨닫기[悟]를 기다리는 것[待].
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은 화두를 참구하는데 10가지 병(病)의 하나로, 수행자는 이런 생각없이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본참화두를 들어야 한다.

[참고 ❶]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111)—1979년 동지 법회 법문에서.(2분19초)
참선하는 데 있어서 제일 몹쓸 병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오선(待悟禪), 「어서 깨달랐으면...」
깨닫기를 바래는 그것이 설사 밤잠을 안 자고 용맹정진을 해서 화두가 제법 일여(一如)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모든 번뇌와 망상이 다 없어지고, 맑고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찰나간이라도 「어서 깨달랐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와서 탁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셨으면..」 이러한 생각을 먹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애써서 99%까지 올라갔다가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다시 저 천길만길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깨닫기를 바래는 마음, 「어서 속히 어떠한 목적을 성취했으면..」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 무엇고?」, 공부가 잘 되어갈수록 「이 무엇고?」
조끔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또 잘 안된다고 번뇌심이나 짜증도 내지를 말고, 오직 한 생각 한 생각, 산을 보든지, 물소리를 듣던지, 새소리를 듣던지, 기차 소리를 듣던지, 애 우는 소리를 듣던지, 문닫는 소리를 듣던지,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한 생각 한 생각 바로 거기에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하는 것입니다.(8분32초~10분51초)

*'꾸준히 그리고 올바르게만 해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것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인데' ; 항아리 속 자라. '참선은 내가 나를 찾는 것'의 비유.
[법문] 송담스님(No.245)—1984년(갑자)년 하안거 해제 법회(84.08.11)
이 공부는 '자기가 자기를 찾아서 자기를 깨닫는 법'이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 어떻게 하느냐 그것이 문제지, '기어코 되고야만 만다'고 하는 것을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보증(保證)을 서셨고, 다 맹세를 하셨습니다. 기어코 되는 것이라고 보증을 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인데, 그것이 안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은 손만 집어넣으면 거기에 있는 것이고, 항아리 속에 자라를 넣어 놓은 거와 같아서, 그 자라란 놈이 아무리 버르적거려 봤자, 밤에 가봐도 그 항아리 속에 들어 있고, 낮에 가 봐도 항아리 속에 들어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나를 찾는 것이여.
오히려 보지 아니할려고 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일지언정, 찾을려고 하면 바로 언제나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게송) '구명소일모선성(求名少日慕宣聖)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 ; 송(宋)나라 소강절(邵康節)의 ‘學佛吟’에서.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61~163. (가로판 p169, 171)
*불상간(不相干) ;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서로 관계가 없다.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천착(穿鑿 뚫을•궁구할 천/뚫을 착) ; ①깊이 살펴 연구함 ②공연히 이치에 맞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함.
*파설(破說) ; 설파(說破). 어떤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함.
*생사심(生死心) ;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Posted by 닥공닥정
용화선원2024. 3. 5. 07:23

§(229) (게송)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 / 전강스님께서 중생의 근기를 감안하셔서 용화선원에서 신수기도를 봉행하도록 하심 / 일체 법요식이 모두 일대사를 위한 방편 / 부처님께서도 방편을 써서 중생을 교화하심.

**송담스님(No.229)—1984년(갑자년) 신수기도 입재(84.02.04) (용229)

 

약 11분.


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에  일륜명월영청휘(一輪明月映淸輝)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부운엄단천인목(浮雲掩斷千人目)하야  득견항아면자희(得見姮娥面者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에, 만리나 되는 넓고 넓은 허공(虛空)에 비가 갰는데, 계속 작달비가 쏟아지다가 그 비가 활짝 갰어. 개니, 일륜명월(一輪明月)이 영청휘(映淸輝)로구나. 한 바퀴 밝은 달이 밝고 맑게 온 천지(天地)를 환히 비추는구나.

부운엄단천인목(浮雲掩斷千人目)하야, 그런데 뜬구름 한 점이 그 달을 가리워 가지고 천 사람의 눈을 그 달을 보지 못하게 했더라 말이여. 한 점에 뜬구름이 천 사람의 눈을 가리워 버려.
득견항아면자희(得見姮娥面者稀)로구나. 항아(姮娥)의 얼굴을 본 자가 드물구나.

이 '항아(姮娥)'는 옛날에 중국에 그 '예(羿)'라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예'라고 한 사람이 서왕모(西王母)한테 빌어 가지고 불사약(不死藥)을 얻었는데, 불사약은 그 약을 먹으면 죽지 않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그러한 약을 얻었다 말이여.
그런데 그 예(羿)라고 한 사람에 부인, 항아라고 하는 부인이 있었는데 그 부인이 그 불사약을 훔쳐 가지고 저 달 속으로 도망을 쳐 버렸어. 그래서 그 달을 갖다가 '항아(姮娥)'라고 한 별명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아무리 새카만 구름이 온 하늘을 덮고 있다 하더라도 그 구름 위로 올라가서 보면 달은 휘황창 밝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은 구름이 꽉 하늘에 끼어 있으면은 전혀 달도 보지 못하고 달빛도 보지 못하는데, 그 구름이 활짝 개 버리면 비가 개고 구름이 벗거지면 그 밝은 달이 온 세계를 낮과 같이 그렇게 환히 그렇게 비추는데.
구름 한 점이 떠와 가지고 딱 중간을 가로막아 버리면 모든 사람이 그 달을 볼 수가 없어. 그러기 때문에 '그 구름 한 점 때문에 사람들이 그 달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하는 게송(偈頌)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생을 두고, 또는 일평생 동안 잘 먹고 잘 입고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재산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데, 한 덩어리 구름으로 인해서 달을 보지 못하듯이 한 생각 잘못 먹어 가지고, 한 생각을 미(迷)해 가지고 평생 동안, 아니 영원토록 쓰고도 쓰고 남아서 남을 주고 또 주어도 무진장(無盡藏)으로 풍족한 그런 재산을 가지고서도 일생 동안을 가난뱅이 신세를 면(免)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건 불법(佛法)을 비유해서 보아도 맞는 말이고, 세속(世俗)에 빈부귀천(貧富貴賤)과 흥망성쇠(興亡盛衰)에다가 비유를 하더라도 맞는 말인 것입니다.


오늘은 갑자년(甲子年) 신수기도(身數祈禱) 입재(入齋) 날인데, 해마다 연례행사로 정월 초삼일에 입재(入齋)를 해 가지고 초아흐렛날 회향(廻向)을 합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이 용화사(龍華寺) 법보도량(法寶道場)에서 무슨 신수기도를 하는가?'
신심(信心)이 철저한, 정법(正法)을 철저히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철저히 믿는 입장에서 보면, '신수기도를 한다. 뭐 입춘기도를 한다’ 하는 것이 다 우습게 보여지는 그러한 분도 있겠습니다마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인 것을 감안하셔서 정월에는 이렇게 일주일간 신수기도를 봉행하도록 하셨습니다.

백천방편(百千方便)이 개위차야(皆爲此也)여. 천 가지 만 가지 방편(方便)이 다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한 것이다 그거거든.

정초(正初)에 신수기도를 한 것이나, 입춘에 입춘기도를 하는 것이나, 칠석에 칠석기도를 하고, 백중에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薦度)하고, 동지에 팥죽차례를 올리고, 일체 법요식(法要式)이 이름은 각각 다르지만 그 근본을 살펴볼 것 같으면은 모두가 다 이 일대사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같은 삼계(三界)에 대도사(大導師)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육신통(六神通)을 다 자유자재로 통달하신 그러한 세존(世尊)께서도 방편(方便)을 쓰지 않고서는 중생을 교화(敎化)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신수기도는 정초(正初)에 3일이나 또는 일주일, 이렇게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기도를 올림으로 해서 금년 일 년 동안 무장무애(無障無礙)하고 모든 소원을 뜻과 같이 이루기를 비는 그러한 기도입니다.(처음~11분)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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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11권 421칙 ‘백수(栢樹)’ 불감근(佛鑑勤) 게송 참고.
*작달비 ; 장대비. 굵직하고 거세게 좍좍 쏟아지는 비.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무진장(無盡藏 없을 무/다할 진/감출·곳집 장) ; ①다함이 없는[無盡] 창고[藏]라는 뜻으로 양적 질적으로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 불교에서는 덕(德)이 광대하여 쓰고 또 써도 다함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②배우고 배워도 다함이 없는 무궁무진한 진리. ③무한량으로 많은 재물.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갑자년(甲子年) ; 1984년.
*신수(身數)기도 ; 지난 1년 동안의 죄업을 참회하고, 새해를 맞아 정초에 1년 동안의 안녕과 소원을 기원하는 기도.
*신수(身數 몸·나·자신 신/운수 수) ; 사람의 운수(運數). 사람의 운명(運命)이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수.
*입재(入齋) ; 재(齋)를 시작하는 일. 또는 그 의식.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
*회향(廻向) ; 회전취향(回轉趣向)의 뜻. ①방향을 바꾸어 향하다. ②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 이익을 주려하거나 그 공덕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함. ③자신이 지은 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베풀어 그 중생과 함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 안에는 팔만사천 가지 법문(法門)이 있어서 그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이 모두가 다 이 정법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편이 아니면은 도저히 정법, 실법(實法)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방편 가운데에도 악방편(惡方便)과 선방편(善方便)이 있습니다. 선방편(善方便)은 일시적으로 의지했다가 바로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들어오게 하는 방편은 이것은 선방편이 되는 것이고.
사람을 방편으로 들어오게 해 가지고, 방편으로 긁어 들여 가지고 영원히 그 방편을 벗어나게 하지를 못하고 방편에 딱! 걸려 가지고 오금을 피지 못하고,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뛰지를 못하고서 그 방편에 딱! 얽매여 가지고 일생 동안을 그 방편에 걸려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러한 방편은 그것은 악방편(惡方便)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법, 내 마음 닦는 참선하는 사람은 상(相)이 없는 가운데에 일체 선법(善法)을 닦을 수가 있는 것이고, 모든 선법이 그 사람에게는 다 선방편(善方便)이요, 정법의 조도(助道)가 되는 것입니다. 보조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벗어나지 못한 불법(佛法)은 설사 그 사람이 삿된 고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해도, 그것이 정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사법(邪法)이 되는 것입니다.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일생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그 사람이 마음이 선량하고, 정직하고, 점잖하고, 그 말할 수 없이 착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사람은 사도(邪道)의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송담스님(No.243)—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부처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漢譯).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삼계도사(三界導師) : 삼계(三界)의 중생을 열반(涅槃)로 인도(引導)하는 위대한 사람. 부처님을 말함.
*삼계(三界) : [범] trayo-dhātavah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세 가지로 나누는데,
①욕계(欲界 kāma-dhā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ūpa-dhā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ārūpya-dhā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사생자부(四生慈父) ; 육도윤회(六途輪廻)하는 세계에서 4가지 방식(四生)으로—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태어나는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대자비(大慈悲)의 아버지. 부처님을 말함.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94-95 (가로판 p99-100) 참조.
*세존(世尊) : [범어] Bhagavat ; Lokanatha ; Lokajyestha의 음역(音譯)으로 바가범(婆伽梵) · 로가나타(路迦那他) · 로가야슬타(路伽惹瑟吒)라 하며 부처님 십호(十號)의 하나, 부처님은 원만한 공덕을 갖추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시므로, 이렇게 부르며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지극정성(至極精誠) ; 더할 수 없이 극진한 정성(온갖 힘을 다하려는 진실되고 성실한 마음).
*무장무애(無障無碍) ; 일이나 행동을 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 · 방해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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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활구참선 최상승법2024. 3. 1. 11:53

§(170) (게송)생전부귀초두로~ / 무상 속에서 변치 않는 영원성을 깨달음으로써 내가 바로 영원과 하나가 된다. 진리와 하나가 된다. 그래서 생사해탈을 할 수 있다 / 세상의 명예와 권리와 영화는 ‘떨어진 꽃[落花]’ /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보고서 대발심을 해야 / 생사윤회를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發)하지 말아라 / 소승(小乘)과 대승(大乘).

삿된 것을 버릴려는 생각, 바른 것을 구할려는 생각, 이것이 동시에 삿된 것. 버리고 취할 것이 없어야 된다 / 일체처 일체시에 '이뭣고?' / 버리지도 않고, 구하지도 아니하면서 바로 참나로 돌아가는 공부가 참선(參禪) 공부 / 공부는 한 생각 단속하는 데 있다 / 오조 홍인대사와 몽산스님의 극언 / 정말 여법하게 철두철미하게 정진을 해야.

꽃 한 송이를 봄으로써 그 한 송이 꽃에서 자기 일신(一身)의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자기의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무명업식(無明業識)을 통해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이 무상하고 허망한 것들이 낱낱이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이 될 것입니다.

**송담스님(No.170)—1982년(임술년) 하안거 결제 법어(82.04.15.음) (용170)

 

(1) 약 14분.

 

(2) 약 11분.


(1)------------------

생전부귀초두로(生前富貴草頭露)요  신후풍류백상화(身後風流陌上花)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만연탈래경부세(萬緣脫來輕浮世)허고  일성상래간낙화(一性常來看落花)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생전부귀(生前富貴)는 초두로(草頭露)요, 살아생전에 부귀(富貴), 재산이 많고, 높은 벼슬을 하고 명예와 권리를 누리고 하는 것은 풀 끝에 이슬과 같은 것이다 그 말이여.
풀 끝에 이슬이 맺히면 아침 태양빛에 그 이슬이 반짝거리기가 마치 보석처럼 빛난다 그 말이여. 반짝반짝반짝. 바람 한번 휙 불어 버리면 우시시 떨어져 버리면 간 곳이 없어.

부귀(富貴)와 공명(功名)이 그것이 내 몸에 있을 때에는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고, 어디를 가나 거침이 없고 살기가 그렇게 자랑스럽고 좋은데, 그것이 영원성이 있느냐 하면 운수(運數)가 불길(不吉)하면 하루아침에 재산이 날라가기도 하고, 그 높은 벼슬도 하루아침에 뚝 떨어져 버리기도 하고, 그런 높은 벼슬을 하다가도 스스로 쇠고랑을 차기도 하고, 틀림없이 풀 끝에 반짝거리는 이슬방울과 조끔도 다름이 없다 이 말씀이여.

신후풍류(身後風流)는 백상화(陌上花)로구나. 죽은 뒤에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학덕이 높았다, 권리가 높았다, 명예가 있다, 또는 재산이 많았다, 무슨 좋은 일을 많이 했다' 그 죽은 뒤에 그이의 자랑스러운 그런 이 명예도 백상화(陌上花)여. 그 언덕에 곱게 핀 한 떨기 꽃에 지내지 못하더라 그 말이여.
언덕바지에 그 꽃이 찬란하게 피어 있는데, 그 꽃이 본 사람마다 다 쳐다보고 다 아름답다 그러고, 모두가 좋아하고 칭찬을 하지만, 비 한번 오고 바람 한번 불어 버리면 우시시 다 져 버리고 만다 그 말이여.

만연탈래경부세(萬緣脫來輕浮世)여, 세상의 모든 인연—정든 고향과 부모와 형제와 사랑하는 사람, 재산과 명예와 권리와 모든 인연을 다 벗어 던져 버리고, 세상 뜬세상을 가벼이 여겨 버렸다 그 말이여. 만연탈래경부세(萬緣脫來輕浮世), 헌신짝 같이 버려 버렸다 그 말이여.
마치 부처님께서 왕궁에 부귀와 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려 버리듯이, 여기에 공부하러 오신 스님네는 말할 것도 없고... (녹음 끊김) 무상하고 허망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잘 깨닫고 느끼고, 비록 세속에 몸은 담아 있지만 그 마음은 스님네의 마음과 조끔도 차이가 없는 분들입니다.

일성상래간낙화(一性常來看落花)여. 한 성품 한결같은—비록 이 세상에 모든 현상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우리 몸 육체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우리의 생각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어서 생겨났다가, 잠시 그 모습을 유지하다가, 얼마 안 가서 그것이 변질이 되어 가지고 없어지고, 또 생겨났다 없어지고, 또 생겨났다 없어지고 하는 온 세계와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의식, 이것이 바로 무상(無常)한 것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고 허망한 것인데, 그 속에서 변치 않는 영원성(永遠性)이 있는데, 그 영원성을 우리는 그것을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영원성 깨닫기 위해서 신심(信心)을—'그 영원성 있는 것을 기어코 나도 깨달라야겠다.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내가 바로 영원과 하나가 된다. 진리와 하나가 된다. 그래서 생사해탈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 그것이 바로 신심이요. 그것을 위해서 분심(憤心)을 내고 그러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모두가 다 떨어진 꽃을 보는 거와 같애.
한참 곱게 피어 있는 꽃을 보고서도, 한참 지금 사람이 등왕(登王)을 해서 많은 재산을 가지고 높은 벼슬을 가지고 권리를 누리고 있다 하더라도, 바로 거기에서 '떨어진 꽃[落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이여.
발심(發心)해서 도(道) 닦은 사람의 눈에는 그러한 것들이 세상의 명예와 권리와 영화가 '떨어진 꽃[落花]'을 보는 거와 같다 이 말씀이여.

아무리 좋은 꽃이라 할지라도 그 꽃 한 가지를 꺾어서 화병에다 꽂아 놓으면 불과 이삼 일이면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 시들어 버리는 꽃을 보고서 발심(發心)을 하고, 분심(憤心)을 내고, 신심(信心)을 낸다면 수행자에게는 그것도 또한 좋은 법문(法門)이 될 것이고,
좋은 꽃 한 송이를 봄으로써 그 한 송이 꽃에서 자기 일신(一身)의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자기의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무명업식(無明業識)을 통해서 그 업식을 통해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이 무상하고 허망한 것들이 낱낱이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이 될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것을 보고 허망(虛妄)하다고 해서 그것을 버리고 피할 것이 아니라,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통해서 화엄경(華嚴經)을 읽고,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통해서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들을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가리켜서 최상승 학자(最上乘學者)라 하는 것입니다. 대승 학자(大乘學者)요, 최상승 학자라 하는 것입니다.
소승 학자(小乘學者)는 그 무상한 것을 보고 그것을 버리고 피해서 피하는 마음을 내겠지만, 대승 학자요 최상승 학자는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보고서 대발심(大發心)을 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불법(佛法)은 차라리 생사윤회를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發)하지 말아라. 이렇게 부처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승심(小乘心)이라 하는 것은 집착한, 세속에 허망한 것을 집착한 사람에게 집착심을 띠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설해진 방편설(方便說)이지, 불교의 구경법(究竟法)이 아닌 것입니다.
어린애, 화택(火宅) 속에서 노는데 팔려 가지고, 노는데 팔려 있는 어린애를 그 불 속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조그마한 양이나 사슴이 끄는 조그마한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장난감 수레, 그 장난감 수레를 가지고 어린애들을 그 불 속에서 빨리 달려나오게 하기 위하는 것이 바로 이 소승법(小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소승법인 장난감 수레는 어린애를 그 불이 타 들어가고 있는 집에서 끌어내는 데에만 필요한 것이지, 일단 그 어린애를 불이 타고 있는 집에서 끌어낸 뒤에는 그 장난감 수레는 쓸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장난감 수레는 버리고, 진짜 탈 수 있는 소가 끄는 수레에다가 그 어린애를 옮겨 실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가 끄는 큰 수레에다가 어린애를 실어 가지고 위험하지 아니한 편안한 곳으로 옮겨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大乘)이라 하는 것이고.
편안한 데로 옮겨간 뒤에는 참나를 깨닫는 바른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25분2초~38분48초)





(2)------------------

여기에 모이신 분들은 바로 이 최상승법을 믿고 그것을 직접 실천하려는, 실천하고 있는 분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은 이 최상승 학자는 버리고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고 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삿된 것을 버리는 생각, 그리고 참된 것을 구하는 생각—버릴려는 생각도 이것이 삿된 것이고, 바른 것을 구할려는 생각도 이것이 동시에 삿된 것입니다. 버리고 취할 것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버리고 취할 것이 없느냐?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좋은 것을 보아도 '이뭣고?' 악한 것을 보아도 '이뭣고?'
슬픈 것을 보아도 '이뭣고?' 슬픈 것을 버리고 기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슬픈 것을 보아도 '이뭣고?'여.
기쁜 것을 보면 그것에 집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일을 당했을 때에도 '이뭣고?'

'이뭣고?' 하는 데에 무슨 버리는 것이 있으며, 무슨 취할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이 없어.
버리지도 않고, 구하지고 아니하면서 바로 참나로 돌아가는 공부가 바로 이 참선(參禪) 공부다 이 말이여.

'공부가 안 된다. 영 공부가 진취가 없다'
많은 분들이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지마는, 사실은 그 고민한 그 잠깐의 시간이라도 '이뭣고?'를 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공부를 여법(如法)하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한 생각 단속하는 데 있는 것이지, 다른 어떠한 데에도 공부가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날 때에도 '이뭣고?'
몸이 괴로울 때도 '이뭣고?'
밥이 질 때에도 '이뭣고?'
밥이 될 때에도 '이뭣고?'
반찬이 좋을 때에도 '이뭣고?'
반찬이 안 좋을 때에도 '이뭣고?'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잘될 때에도 '이뭣고?'
내 비위에 안 맞을 때에도 '이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면 공부는 극일성지(克日成之)입니다. 극일성지. 머지않아서 득력(得力)을 하게 된다 이 말씀입니다.

『몽산법어(蒙山法語)』에 외출을 금하고, 모든 공양이라던지 모든 수용(受用)은 형편과 인연에 따라서 하고, 경(經)도 보지 아니하고 잡담도 하지 아니하고, 다못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하면 '3년을 그렇게 여법하게 해서 깨닫지를 못하면 내가 너희 대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가겠다. 거짓말한 죄로 내가 무간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극언(極言)을 하셨습니다.
극언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마는, 이 큰스님께서 그렇게 극언을 하신 까닭은 너무 조끔도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철저하게 보증을 하신 표현인 것입니다.

오조(五祖) 홍인(弘忍)대사께서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 한 법문 가운데에도 '내가 이렇게 한 법문을 믿지 아니하면 믿지 아니한 사람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것이고,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이 거짓이라면 나는 무간지옥에 가게 될 꺼다' 이렇게 참 가슴 아픈 법문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진실하고, 얼마나 우리 중생을 애끼신 뜻이 간절하시면 입에 담기조차도 황송하고 무서울 정도로인 이런 극언을 하셨겠습니까. 우리는 이런한 말씀을 통해서 콧등이 찡하고 눈뚜껑이 뜨거워짐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조사 스님의 간절한 법문을 듣고 '한 번 해보자. 내가 출가한 목적이 무엇이며 내가 이 도량에 와서 고행(苦行)을 하겠다고 온 목적이 무엇이냐? 그렇게 해서 3년을 해서 결정코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면 내가 왜 그렇게 안 할 까닭이 무엇이냐?'

죽비(竹篦) 치면 형식적으로 앉아서 하고, 방선(放禪)하면 둘씩 셋씩 모여서 잡담하고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하고 한화잡담(閑話雜談)으로 세월을 보내고, 이렇게 형식적으로는 정진을 한 것 같지마는, 실지 내용으로는 발심이 약하고 분심이 약하고 그렁저렁 세월을 보내는 그러한 정진을 하기 때문에 3년이 되어도 죽 떠먹은 자리요, 10년이 되어도 죽 떠먹은 자리요, 죽을 때까지 해도 아무 소식이 없어.

생긴 것은 눈치로 눈치만 늘어 가지고 무슨 법담을 하면 눈치로 '뭐라고 뭐라고...'
그런 것 가지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눈치로 무슨 공안은 어떻고, 무슨 법담은 어떻고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의 일신상의 생사(生死) 문제도 아무 교섭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불법(佛法)에도 아무 이익이 없는 것입니다.

기왕 출가를 하고, 기왕 이 참선을 하려면 정말 여법하게 고조사(古祖師)의 맹서(盟誓)에 부합이 되도록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만약 이 말을 따르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할 것이다.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후생(後生)이라 하니까 앞으로 몇십 년, 몇백 년 후가 아니라, 한 생각 뒤가 바로 후생인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정말 여법하게 정진(精進)을 해서 나도 성취를 하고, 다른 사람도 성취를 하도록 알뜰히 정진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38분49초~49분48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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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생전부귀초두로(生前富貴草頭露) 신후풍류백상화(身後風流陌上花)' ; 소식(蘇軾, 소동파)의 '陌上花(三首)' 참고.
*(게송) ‘만연탈래경부세(萬緣脫來輕浮世) 일성상래간낙화(一性常來看落花)’ ;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 45권(卍新纂大日本續藏經), 寶峰雲庵眞淨禪師 偈頌 「萬緣脫去輕浮世 一性常來看落花」
*운수(運數) ;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천운(天運 하늘이 정한 운수)과 기수(氣數 저절로 오가고 한다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수).
*언덕바지 ; 언덕의 꼭대기. 또는 언덕의 가파르게 비탈진 곳.
*뜬세상[浮世 뜨다·떠다니다·덧없다 부/세상 세] ; 헛되고 덧없는 세상(世上).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成],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住], 쇠퇴하여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壞], 모든 것이 괴멸되어 허공만 있는 과정(상태)[空]이 반드시 있게 된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34~135. (가로판 p139~141)
佛云,  無常之火가  燒諸世間이라 하시고  又云,  衆生苦火가  四面俱焚이라 하시며 又云,  諸煩惱賊이  常伺殺人이라 하시니  道人은  宜自警悟하야  如救頭燃이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덧없는 불꽃이 온 세상을 살라 버린다」하시고, 또 「중생들의 고뇌의 불이 사면에서 함께 불타고 있다」하시며, 또 「모든 번뇌의 적이 항상 너희들을 죽이려고 엿보고 있다」하시니, 수도인은 마땅히 스스로 깨우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할지어다.

註解(주해) 身有生老病死하고  界有*成住壞空하고  心有生住異滅하니  此無常苦火가 四面俱焚者也라
【謹白參玄人하노니  光陰을  莫虛度하라

몸에는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세계에는 이루어지고 지속되고 파괴되고 없어져 버리는 것이 있으며, 마음에는 일어나고 머물고 변해 가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덧없는 고뇌의 불이 사면에서 함께 불타고 있다는 것이다.
【이치를 참구하는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부디 광음을 아껴 헛되이 보내지 말라.

*생로병사(生老病死) ; 중생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주요한 네 가지 현상. 출생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생(生), 노쇠하는 현상을 노(老), 병든 현상을 병(病),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현상을 사(死)라 한다.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의 일반적 형식으로서 사상(四相)이라고도 하고, 이것이 고통이기 때문에 사고(四苦)라고도 한다. 생로병사가 사라진 경계가 무위법(無爲法)인 열반(涅槃)이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생주이멸(生住異滅) ; 모든 사물이 생기고(生), 머물고(住), 변화하고(異), 소멸함(滅). 또는 그런 현상.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原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등왕(登王 오르다·나가다 등/임금 왕) ; 등왕정(登王廷). 등왕조(登王朝). 조정(朝廷)에 나가다. 벼슬길에 오르다.
왕정(王廷) : 임금이 친히 다스리는 조정(朝廷).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무명업식(無明業識) ; 있는 그대로의 평등한 참모습을 직관하지 못하고 그릇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차별을 일으켜 모든 괴로움을 나게 하는 근본번뇌,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그릇된 마음작용[業識].
*업식(業識) ; ①과거에 저지른 미혹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의 과보로 현재에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작용. ②오의(五意)의 하나.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그릇된 마음 작용.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 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상주설법(常住說法) ; 우주 대자연의 운행 그대로가 설법이라는 말.
흐르는 물소리, 노래하는 새소리, 세월이 흘러가고 춘하추동 사계절이 돌아가는 것 모두 그대로가 부처님이 출세하신 모습이요, 쉴 사이 없이 하는 설법이다.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대승교(大乘敎) : [범어] Mahayana 대승(大乘)이란 큰 수레를 뜻한다. 큰 원(願)과 큰 뜻을 세워서 나를 희생하여 모든 중생을 즐겁고 편안하게 건져 주겠다는 보살심(菩薩心) 있는 이들을 위하여, 육도(六度)와 만행(萬行)을 닦아 가도록 깊은 이치를 말씀하신 법문이다. 그 대표적인 경전은 <반야경(般若經)> <해심밀경(解深密經)> <능가경(楞伽經)> <기신론(起信論)> <범망경(梵網經)> 같은 것들이다.

이 법문을 요약하여 말하면, 이 세상에 온갖 물질과 일[森羅萬象]이 벌어져 있으나, 낱낱이 현상(現象) 그대로 비어 없는 것이며, 모든 차별된 것이 그대로 다 평등하여 열반인 것이다. 따라서 무엇에나 걸릴 것이 없는 것이다.
소승의 열반이 소극적이며 작고 옅은 것이라면 대승의 열반은 적극적이며 크고 참된 것이다. 한 중생도 남음이 없이 모두 제도한 뒤에야, 자기가 성불하겠다는 소원이야말로 대승의 보살심인 것이다.
*소승교(小乘敎) : [범어] Hinayana 소승(小乘)이란 작은 수레란 뜻이다. 수레는 사람을 태워서 험한 곳을 지나 안전한 곳에 가게 하는 것인데, 작은 수레는 아이들이나 타게 되며, 옅은 물이나 건널 수 있는 것이다. <법화경>에는 「양의 수레」와 「사슴의 수레」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처음 인천교(人天敎)를 말씀하신 다음으로 옅고 낮은 이치의 길을 가르쳐, 생각을 끊고 마음을 비게 하여 열반(涅槃)의 고요한 즐거움을 얻도록 하셨다. 그 속에는 사제법(四諦法)을 깨치면 아라한(阿羅漢)이 되고, 십이 인연법(十二因緣法)을 깨치면 연각(綠覺)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소승에도 두 가지 길이 있으므로 이승(二乘)이라고도 한다.
소승법을 말씀한 대표적 경전은 <아함경(阿含經)> <구사론(俱舍論)> <성실론(成實論)> <사분승계본(四分僧戒本)> <사분비구니계본(四分比丘尼戒本)> 등이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방편설(方便說 방법·수단 방/편할 편/말씀 설) ; 실상(實相)으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 상대와 조건에 알맞는 방법을 설정하여 말하는 것.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구경법(究竟法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진리 법) ; 그 위에 더 없는 최고의 가르침. 궁극의 진리
*화택(火宅) 속에서 노는데 팔려 가지고, 노는데 팔려 있는 어린애를 그 불 속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조그마한 양이나 사슴이 끄는 조그마한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장난감 수레, 그 장난감 수레를 가지고 어린애들을 그 불 속에서 빨리 달려나오게 하기 위하는 것이 바로 이 소승법(小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소승법인 장난감 수레는 어린애를 그 불이 타 들어가고 있는 집에서 끌어내는 데에만 필요한 것이지, 일단 그 어린애를 불이 타고 있는 집에서 끌어낸 뒤에는 그 장난감 수레는 쓸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장난감 수레는 버리고, 진짜 탈 수 있는 소가 끄는 수레에다가 그 어린애를 옮겨 실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가 끄는 큰 수레에다가 어린애를 실어 가지고 위험하지 아니한 편안한 곳으로 옮겨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大乘)이라 하는 것이고 ; 『법화경(法華經)』 비유품(譬喩品)에 있는 말. 어떤 장자가 어디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집에 불이 났는데, 어린아이들은 철모르고 그 집안에 놀고만 있었다. 아무리 나오라고 불러도 듣지 않으므로, 양의 수레[羊車]와 사슴의 수레[鹿車] 같은 장난감으로 꾀어 대문 밖으로 이끌어 내고는, 온갖 보배를 실은 흰 황소의 큰 수레[白牛大車)] 태워 가지고 좋은 곳으로 이사를 시켰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번뇌의 불집 속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처음에는 이승(二乘 = 두가지 수레), 곧 소승(小乘 = 작은 수레) 법을 보이다가, 나중에는 대승(大乘 = 큰 수레) 법으로 가르쳐서 열반의 저쪽 언덕에 인도함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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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취(進趣 나아가다·오르다 진/달리다·향하다·재촉하다 취) ; (정진해) 나아가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공부는 한 생각 단속하는 데 있는 것’ ; 일념단속(一念團束).
*일념단속(一念團束) ;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몽산법어(蒙山法語) ; 중국 원(元)나라 「몽산 스님의 법어」로 참선 수행의 구체적인 길을 자상하게 제시한 법어집.
[참고] 송담스님(No.299)—1986년 5월 첫째 일요법회
『몽산법어』는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데에 관한 법문(法門)만을 수록한 법어집입니다. 여러분이 이 『몽산법어』 서문(序文)을 읽어보시면 이 책이 어떠한 책이며, 얼마나 공부해 나가는 데 요긴한 책인가를 아실 수가 있고.
그리고 이 몽산법어를 한 구절씩—여러분은 선지식(善知識)을 항상 만나 뵙기가 어려우니까 공부하다가 가끔 법문을 듣고 싶으면, 이 몽산법어를 한 편씩을 보시면 선지식 법문 들은 거와 같아서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하고 또 의정(疑情)이 돈발을 해서 참선이 잘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몽산법어> 총 68편의 동영상 법문을 보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몽산법어'에도 자세한 용어풀이와 함께 법문을 보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몽산법어(蒙山法語)』에 외출을 금하고, 모든 공양이라던지 모든 수용(受用)은 형편과 인연에 따라서 하고, 경(經)도 보지 아니하고 잡담도 하지 아니하고, 다못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하면 '3년을 그렇게 여법하게 해서 깨닫지를 못하면 내가 너희 대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가겠다. 거짓말한 죄로 내가 무간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극언(極言)을 하셨습니다 ; 『몽산법어』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p97-99. (가로판 p95~97)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몽산법어』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97-99. (가로판 p95~97)
若有來此(약유내차)하야  同甘寂寥者(동감적료자)인댄  捨此世緣(사차세연)하며  除去執着顚倒(제거집착전도)하고  眞實爲生死大事(진실위생사대사)하야  肯順菴中規矩(긍순암중규구)하야 截斷人事(절단인사)하고  隨緣受用(수연수용)호대  除三更外(제삼경외)에  不許睡眠(불허수면)하며 不許出街(불허출가)하며  不許赴請(불허부청)하며  未有發明(미유발명)이어든 不許看讀(불허간독)하며  非公界請(비공계청)이어든  不許閱經(불허열경)이니

만약 이에 와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이 세상 인연을 다 여의며 제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다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잘 지키고 인사(人事)를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밤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如法下三年工夫(여법하삼년공부)호대  若不見性通宗(약불견성통종)인댄 山僧(산승)이  替爾(체이)하야  入地獄(입지옥)호리라

법다이 3년 동안 공부해 만약 견성하여 종지(宗旨)를 통달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너희들을 대신하여 지옥에 들어가리라.

*수용(受用) ; (물건을 남에게) 받아 씀.
*오조(五祖) 홍인(弘忍) : (602 – 675) 이름은 홍인(弘忍)이고, 성은 주(周)씨인데, 호북성 기주(蘄州) 황매현(黃梅縣)에서 났다.
중국 선종의 제 4조(四祖) 도신(道信)의 법을 받아 황매현 쌍봉산(雙峰山)에서 오래 교화하였다. 많은 제자들 가운데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의 두 분이 있었으므로, 6조 혜능 계통은 남돈(南頓)의 남종선이 되었고, 신수 계통은 북점(北漸)의 북종선이 되어 두 종파가 생기게 되었다.
671년에 법을 혜능에게 전하고, 당나라 고종(高宗) 상원(上元) 2년에 74살로써 입적하였다. 시호(諡號)를 대만선사(大滿禪師)라 하고, 황매산 동산에 탑을 세웠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성립된 선종(禪宗)은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粲)을 거쳐 4조 도신(道信) 스님으로 이어진다. 도신의 제자 법융(法融) 스님이 우두산에서 선법을 선양하여 우두종(牛頭宗)이 생겼다. 그리고 5조 홍인 대사의 문하에서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져 남종선, 북종선이 되었다.
*최상승론(最上乘論) ; 1권. 5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의 저술. 자신의 몸과 마음이 본래청정하여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분별이 없음을 알아 그 근본 진심을 지키는 것[守本眞心]이 수도(修道)의 요점이라고 설명한 저술. 내제(內題 본문 첫머리의 제목)는 범취성도오해진종수심요론(凡趣聖道悟解眞宗修心要論)이다.

14개조의 문답 방식으로 자심본래청정(自心本來淸淨) · 자심본래불생불멸(自心本來不生不滅) · 자심위본사(自心爲本師) · 자심승념피불(自心勝念彼佛) · 중생여불진체기동(衆生與佛眞體旣同) · 진여법성동일무이(眞如法性同一無二) · 수본진심시열반지근본(守本眞心是涅槃之根本) · 수본진심시입도지요문(守本眞心是入道之要門) · 수본진심시십이부경지종(守本眞心是十二部經之宗) · 수본진심시삼세제불지조(守本眞心是三世諸佛之祖) · 무기심(無記心) · 아소심(我所心) · 득도무여열반(得到無餘涅槃) 등을 논하고 있다.
*오조(五祖) 홍인(弘忍)대사께서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 한 법문 가운데에도 '내가 이렇게 한 법문을 믿지 아니하면 믿지 아니한 사람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것이고,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이 거짓이라면 나는 무간지옥에 가게 될 꺼다' 이렇게 참 가슴 아픈 법문을 하셨습니다 ; 
若有人依文行者卽在前成佛 若我誑汝當來墮十八地獄 指天地爲誓 若不信我世世被虎狼所食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글(最上乘論)에 의지해 수행하면 곧 성불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너를 속인다면 다음 세상에 십팔지옥(十八地獄)에 떨어지리라. 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만약 나를 믿지 아니하면 세세생생에 호랑이 밥이 되리라.
*눈뚜껑 ; ‘눈꺼플’의 사투리.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읽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고행(苦行) ; ①천상(天上)에 태어난다든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로 단식(斷食)이나 호흡의 제어와 같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닦았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육체에 고통을 줄수록 정신이 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본능과 욕망을 끊는 것.
③의식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 12두타(頭陀)의 고행이 여기에 상응하며 정진(精進)의 의미를 포함한다.
④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한 이에 상응하는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한화잡담(閑話雜談) ; 심심풀이로 한가롭게 얘기를 나누거나[閑話], 쓸데없이 지껄이는 말[雜談].
*죽 떠먹은 자리 ; 죽(粥)은 곡식을 오래 끓여 알갱이가 무르게 되어 거의 액체화되어서, 한 숟갈 떠먹어도 금방 떠먹은 자리가 흔적이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조금 덜어 내어도 흔적이 나지 아니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죽 떠먹은 자리’라고 말한다.
*맹서(盟誓 맹세 맹/맹세할 서) ; '맹세(盟誓 임무나 약속을 꼭 실행하거나 목표를 꼭 이루겠다고 굳게 다짐함. 또는 그 다짐)'의 원래 말.
*철두철미(徹頭徹尾 통하다·꿰뚫다 철/처음 두/통하다·꿰뚫다 철/꼬리·끝 미) ; 처음[頭]부터 끝[尾]까지 빈틈없고 철저(徹底)하게.
*(게송) ‘금생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만단(萬端) ; 수없이 많은 갈래.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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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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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