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심 팔풍 경계대처2020. 3. 14. 11:15

§(332) (게송)우중간호월~ / 마음에 맞지 않는 일 속에서 바로 자기를 단속해 나가고 바르게 일을 처리해 나가면 그 속에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

 

부처님을 믿는 우리는 세세생생에 보복(報復)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설사 상대방이 나를 고의적으로 또는 고의가 아닌 어떠한 자기에게 물질적으로 해(害)를 끼쳤던지 정신적으로 해를 끼쳤던지,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보복할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거기에서 인과(因果)의 진리를 살피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할 수 있도록,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우리는 굳게 마음에 새기고, 그렇게 가족을 상대하고 친구를 상대하고 이웃을 상대하고 그렇게 하면서 수행을 한다면 우리도 반드시 부처님과 같이 될 때가 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87.06.07) (용332)

 

약 14분.

 

우중간호월(雨中看好月)하고  화리급청량(火裏汲淸凉)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직립두수지(直立頭垂地)하고  횡면각지천(橫眠脚指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우중(雨中)에 간호월(看好月)하고  화리(火裏)에 급청량(汲淸凉)이다.

비 가운데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가운데에서 그 밝은 달을 보고, 불이 훨훨 타는 불 속에서 시원한 맑은 물을 길을지니라.

 

밝은 달은 비가 안 올 때에 볼 수가 있고, 맑은 물은 맑은 샘에서 퍼야지,

어떻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구름 덮인 하늘에서 그 밝은 달을 찾으며, 훨훨 타는 불 속에서 어떻게 맑은 물을 길러낼 수가 있을까?

 

진리(眞理)에 입각해서 보면, 남(南)과 북(北)이 같은 것입니다.

북쪽의 반대가 남쪽일 것 같지만, 북쪽이 바로 남쪽이고 남쪽이 바로 북쪽이여.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다 보면 결국은 남쪽이 돌아오고만 마는 것입니다.

 

콜롬버스가 계속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다보니까 결국은 미국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에 맞는 일을 항상 만나고 항상 보기를 바래지만, 마음에 맞는 일을 만남으로써 행복(幸福)을 삼지만, 사실은 마음에 맞는 일만을 추구하다 보면 머지않아서 불행(不幸)이 돌아오는 거고,

마음에 맞지 않는 일 속에서 바로 자기(自己)를 단속(團束)해 나가고 바르게 일을 처리해 나가면 그 속에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더욱이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사람도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많고, 일도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많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자꾸 마음에 맞는 사람만 찾을라고 하면 어디에 그렇게 만나겠습니까? 내 마음에 꼭 든 일만 만나고자하나 그런 일은 만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혹 만났다 하더라도 잠시지 다시 또 그것은 나로부터 떠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차라리 마음에 맞지 않는 역경(逆境)에서 거기서 부딪히고, 거기에 몸을 옆으로 비틀고 용감하게 지혜롭게 끈기 있게 헤치고 나가면, 거기에서 이 사바세계에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도(道) 닦는 것도, 의리선(義理禪)은 따져 들어가면 알아진 것이 있고, 얻어진 것이 있고, 재미가 있고, 맛이 있으니까, 공안(公案) 하나 얻어서 이리저리 해가지고 통과하고, 또 공안 하나를 타가지고 이리저리 따져서 ‘아!’ 알아맞추고 하면 그것 곧 그냥 깨달음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 것같이 느껴지고, 재미가 있고 얻은 바가 있고, 남에게 '나는 공안 몇 개를 알았다' 이렇게 자랑할 것이 있고, 썩 할만 하지요.

 

그러나 그러한 공부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따져서 들어간다 해도 그것은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이여.

 

한 가정, 한 가족, 일가친척, 우리 마음에 맞은 사람 엄격히 말하자면 사실은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어렵다고해서 부모가 아니고 자식이 아니고 형제가 아니고 일가친척이 아니고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각각 숙세(宿世)로부터 지어 내려오는 업(業)이 다르기 때문에, 그러고 그러기 때문에 얼굴을 각각 다르게 태어났고, 생각도 성격도 각각 다르고, 따라서 본 바가 다르고 생각한 바가 다르니 다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여.

 

서로 지은 바 업(業)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것을, 그 근원은 모르고서 내 마음에 맞기만을 바래고 내 마음에 안 맞으면 미워하고 그 사람을 갖다가 짓밟고 쫓아내고 멀리하고 망하기를 바래고 이런다면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너무 참 어렵고,

정말 스스로 고통과 불행의 보금자리를 자기가 만들어서 그 안에서 자기가 고통을 받게 되는 거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생(生)을 거듭함에 따라서 점점 고통스러운 생을 만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이 유리태자가 그렇게 많은 살생을 하고—전생에 살생을 당했다고 해서 원한심(怨恨心)을 품고, 그렇게 해가지고 살생을 해서 무슨 좋은 꼴을 자기는 봅니까? 물에 빠져서 몰살을 당하고, 불이 나서 자기 궁실이 다 타 버리고.

그래가지고 이 전생에 우물 못 속에서 사람들로부터서 잡아먹히더니, 금생에 다시 와서 보복을 하고서 자기도 다시 멸망을 했습니다. 내생에 다시 원한심을 품고 또 보복을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부처님을 믿는 우리는 세세생생에 보복(報復)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설사 상대방이 나를 고의적으로 또는 고의가 아닌 어떠한 자기에게 물질적으로 해(害)를 끼쳤던지 정신적으로 해를 끼쳤던지,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보복할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거기에서 인과(因果)를, 인과의 진리를 살피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할 수 있도록,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전생(前生)에 코끼리의 왕이 되어 계실 때에 어떠한 포수(砲手)가 위경(危境)에 처해서 죽게 될 때 그 포수를 살려주었는데—포수가 가가지고 돌아갔는데, 그 광고를 보니까 '아금니가 여섯 개가 달린 코끼리를 잡어 온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소원을, 소원대로 해준다'하고 광고가 붙었어.

 

그 광고를 보고서 '내가 연전에 히말라야 산에 들어가가지고 죽게 되었을 때 나를 살려준 코끼리가 바로 이 상아(象牙)가 여섯 개가 붙었다' 한 것을 깨닫고서 "내가 그 코끼리를 잡어 오겠습니다"하고 자원을 했습니다.

"그래, 니가 잡어오너라"

 

그 코끼리는 스님네를 좋아하고 불법(佛法)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반 보통 사람한테는 도저히 잡혀서 죽질 않는데, 스님네는 살생(殺生)을 아니하기 때문에 그 스님네가 가까이 온 것은 경계(警戒)를 아니해.


그래서 그 포수(砲手)는 머리를 깎고서 가사(袈裟)를 떠억 수(垂)하고 스님으로 가장(假裝)해가지고 들어가 가지고 독 묻은 창으로 그 코끼리를 찔러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코끼리의 그 군사들이, 모다 백성들이 오백 마리가 달라들어서 그 포수를 갖다가 밟아서 죽일려고 하니까 그 코끼리의 왕이 그 포수를 갖다가 자기 네 다리 사이에다가 이렇게 숨겨놓고,


"너희들, 이 죽이지 말아라. 이 포수는 내가 저를 살려준 그 생명의 은혜를 갖다가 이렇게 나를 독 묻은 창으로 쑤셔서 나를 죽이니, 나는 이 포수에게 어떻게 이 보복을 할 것인가?

너희들 식으로 이렇게 밟아서 죽이면 내생에 또 이러한 보복을 당할 것이니, 내가 이 다음 생에 도(道)를 성취해서 성불(成佛)을 하게 되면은 저 포수는 나의 여섯 개의 이 아금니를 뽑아가기 위해서 나를 죽였지만, 내생에 내가 성불하게 되면 이 포수의 여섯 도둑놈을, 이 삼독(三毒)과 육적(六賊)의 마음을 내가 뽑아 주리라" 이렇게 선언을 하고서,

 
"내 아금니 여섯 개를 어서 뽑아다가 너의 임금님에게 바쳐서 영광(榮光)을 누릴지니라" 이렇게 선언을 하고서 그 코끼리는 쓰러져 죽은 것입니다.

 

부처님은 과거 전생에 생(生), 생(生)을 두고 그러한 식으로 해서 수행을 쌓고 또 새 몸을 받아서 또 그렇게 수행을 쌓고 해가지고 마침내는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시고 삼명(三明)과 육통(六通)을 얻어서 성불(成佛)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을 믿는 제자는 부처님의 그러한 이 높고 거룩한 뜻을 본받아서, 부처님과 같이 다는 실천을 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이 보복하는 마음, '내가 조금 손해를 보고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보복할 마음을 갖지 말자' 이러한 마음을 우리는 굳게 마음에 새기고, 그렇게 가족을 상대하고 친구를 상대하고 이웃을 상대하고 그렇게 하면서 수행을 한다면 우리도 반드시 부처님과 같이 될 때가 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62분37초~1시간 16분4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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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우중간호월(雨中看好月)~' ; 『금강경오가해』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함허 득통 스님의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게송 참고.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2분 10초)

[참고] 송담스님(No.88) - (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 (2분10초)

공안(화두)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뭣고?'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 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

 

요새 일본식 참선이 수입이 돼 가지고 화두 하나를 이리저리 따져서 “아, 이런 것이다!”, 또 그 다음에 다른 화두를 이리저리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또 하나를 해결 지어 놓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해서, 10개 20개······, 화두를 이렇게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그러한 참선이 지금 일본으로부터서 수입이 되어가지고 많은 지성인들이 그러한 참선을 하는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이런 참선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쪼끔 생각 있는 사람이면 능히 알고도 남을 상식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차라리 참선을 안하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부를지언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합니다. 활구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77분41초~79분50초)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업의 종류 ;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유리태자가 그렇게 많은 살생을 하고—전생에 살생을 당했다고 해서 원한심(怨恨心)을 품고, 그렇게 해가지고 살생을 해서 무슨 좋은 꼴을 자기는 봅니까? 물에 빠져서 몰살을 당하고, 불이 나서 자기 궁실이 다 타 버리고. 그래가지고 이 전생에 우물 못 속에서 사람들로부터서 잡아먹히더니, 금생에 다시 와서 보복을 하고서 자기도 다시 멸망을 했습니다' ;  ‘석가족의 멸망 인과’ 법문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제26권, 34.등견품(等見品) [2]에 있는 석가족의 멸망 인과.

 

*보리심(菩提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할 수 있도록' ; 발심(發心).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위경(危境) ; 위태로운 처지나 지경(地境 경우, 형편).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 성냄 · 어리석음(貪瞋癡 탐진치)을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육적(六賊) ; 번뇌를 일으키는 근원이 되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六根)을 도둑에 비유한 말.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머금은 것,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 등등.

*삼명육통(三明六通) ;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갖추고 있는 3가지 자유 자재한 지혜와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6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삼명(三明) ;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갖추고 있는 3가지 자유 자재한 지혜.

①숙명지증명(宿命智證明) 나와 남의 전생을 환히 아는 지혜.

②생사지증명(生死智證明) 중생의 미래의 생사와 과보를 환히 아는 지혜.

③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지혜.

 

*신통(神通 불가사의할 신,통할 통) : 수행을 통(通)하여 도달하는 걸림없는 초인간적인(神) 능력.

*육신통(六神通) ;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6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⑥누진통(漏盡通)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Posted by 닥공닥정

§(332)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부처를 얻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의심(疑心)!

 

본래 우리는 부처님이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미륵불(彌勒佛)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본래 비로자나불과 똑같은, 조끔도 차이가 없는 바로 동일(同一)한 부처님이었습니다.

 

일체처 일체시에서 그 화두 하나로써 단속해 나가면, 거기에서 번뇌는 없앨려고 하지 안 해도 저절로 없어지는 거고, 깨달음을 구하지 아니해도 거기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87.06.07) (용332)

 

약 5분.

 

설사 화두(話頭) 하나를 타가지고 일심(一心)으로 참구(參究)를 해서 '이뭣고?'


해 갈수록 재미가 없고, 알아진 것도 없고, 얻어진 것도 없고, 해 갈수록 답답하기만 하고 그러더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참을성 있게, 끈기 있게 공부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부처님이었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나, 미륵불(彌勒佛)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본래 비로자나불과 똑같은, 조끔도 차이가 없는 바로 동일(同一)한 부처님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부처를 찾을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처이기 때문에 절대로 부처를 찾아서는 안돼.

 

그리고 그 부처님으로부터서 나오는 번뇌망상(煩惱妄想) 이것이 딴 것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서 나오는 작용(作用)이기 때문에 그 번뇌망상을 버릴려고 해서는 안돼.

다맛 우리가 확인을 못했을 뿐이지 본래부터 부처님이었고, 그 부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들은 바로 그것이 '깨달음의 작용(作用)'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해 나가는 사람은 철저히 믿기를, '자기가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는 것이여.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는다면, 자기도 도(道)를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는 자신만만한 그런 긍지를 가져야 하는 것이고, 자기가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을려고 하고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그런 생각을 잠시도 일으켜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또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만, 물론 그 '번뇌(煩惱)다' '망상(妄想)이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그것을 버릴려고 하는 생각을 내서는 안되아.

버릴려고 한다고 버려지지도 않고, 버릴려고 하는 그 생각이 또한 하나의 망상(妄想)으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버릴려고 해서는 안돼.

 

부처 되기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을려고 하는 생각을 냈다하면 그것도 망상(妄想)이고,

번뇌를 버릴려고 하는 생각을 내고, 번뇌 일어나는 것을 성화(成火)를 대고 짜증을 낸다면 그것도 번뇌망상이요, 탐심(貪心)이요 진심(瞋心)이기 때문에 점점 불에다가 섶을 집어넣은 거와 같애서 깨달음으로부터서는 정말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 하는 사람은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부처를 얻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의심(疑心)!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밥 먹으면서도 '이뭣고?'

 

진심(瞋心)이 날 때에도 퍼뜩 '이뭣고?'

슬픔이 있을 때에도 '이뭣고?'

괴로움이 있을 때에도 '이뭣고?'

 

넘어져도 '이뭣고?'

뒤집어져도 '이뭣고?'


사업이 잘되아도 '이뭣고?'

사업이 실패해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그 화두 하나로써 단속해 나가면, 거기에서 번뇌는 없앨려고 하지 안 해도 저절로 없어지는 거고, 깨달음을 구하지 아니해도 거기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58분~62분3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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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Posted by 닥공닥정
인과 인연 비유2020. 3. 11. 11:56

§(332) 부처님의 조국, 석가족의 멸망 인과 /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보복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 정법을 믿고, 실천을 해서 바른 깨달음을 얻어야 영원한 생사해탈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조국인 가비라왕국과 사위국 유리왕과의 악연. 가비라왕국과 사위국의 멸망.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제26권, 34.등견품(等見品) [2]에 있는 석가족의 멸망 인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은 남한테 원수를 본의(本意) 아니게 짓기도 하고, 또 보복(報復)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보복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보복으로써 정말 깨끗하게 일이 처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보복을 하면 그쪽에서는 다시 또 보복을 하고, 이쪽에서 또 보복을 하고 해서 생(生)을 거듭하면서 점점 원결(怨結)은 더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87.06.07) (용332) 인과인연

 

(1) 약 15분.

 

(2) 약 14분.

 

(1)------------------

 

옛날에 부처님 재세시(在世時)에 그 사위국(舍衛國)에 파사익왕(波斯匿王)이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부인을 얻었는데, 그 말리부인(末利夫人)이라 한 왕후(王侯)를 얻었습니다.

그 말리부인은 원래—부처님의 고국(故國)이신 그 가비라왕국(迦毘羅王國)에 마하남(摩訶男)이라고 하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에 종의 아들입니다.

 

그 부처님 나라는 가비라왕국이라 해서 나라가 조그만하고, 파사익왕이 있는 그 사위국은 대단히 인도에서도 참 큰 나라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비라왕국에 그 공주를 자기 왕후로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비라왕국은 나라는 적지마는 양반의 나라고, 또 이 사위국은 나라는 워낙 크고 했지만 가비라왕국에서 볼 때에는 '나라만 크고 모다 그래서 그러기는 허되 참 양반의 나라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을 했던지, 공주를 왕비로 달라고 하니까 차마 공주를 줄 수가 없으니까 그 궁녀(宮女), 종 가운데에 잘 생기고 비슷한 사람을 골라서 공주로 속여가지고 시집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시집간 그가 누구냐 하면 바로 그 말리부인인데, 그 말리부인은 평소에 항상 마음속으로 자기는 신분이 종이지만 '왕비가 한번 되었으면...' 하고 항시 마음속으로 축원을 하고 기도를 하고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래가지고, 그러면서 참 마음으로 부처님을 믿고 그러면서 그렇게 인자 왕비가 되기를 서원을 하다가 결국은 그 왕비로, 이상스럽게 그 공주 대신 자기가 왕비로 시집을 가게 되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이고 일심으로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고 서원(誓願)을 세우고 원(願)을 세우면 반드시 우리 누구라도 그렇게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러한 참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그러한 위신력(威神力)이 있어서, 지극정성으로 기구(祈求)하고 축원을 하고 빌면 그렇게 이루어질 수가 있는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왕이면 바르고 좋은 원을 세워야 합니다마는.

 

그래서 그 말리부인이 파사익왕한테 시집을 가가지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 이름이 ‘유리태자(瑠璃太子)’입니다. 아주 영특하고 잘나고 그랬는데, 여덟 살이 되어서 그래서 인자 그 왕이 그 아들을 여덟 살이 되었으니 자기 외가로 보내서 거기서 모든 것을 잘 배우고 그러라고 외갓집으로 외할아버지한테 보냈습니다.

 

그 외가댁에서 그 외손자가 왔으니 그걸 참 잘 가리켜야겄는데, 활 쏘는 법도 가리키고 말 타는 법도 가리키고 모든 학문도 가리키고 그런데, '혼자만 가리키기보단 기왕이면 오백 명의 그 고관대작(高官大爵)이라든지, 양반의 집 아들들 뽑아가지고 같이 공부를 시켰으면 참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내가지고 큰 수련도장(修鍊道場)을 하나를 지었습니다.

 

그래가지고 맨 처음에 부처님을 모셔다가 설법(說法)을 먼저 듣고, 그리고 나서 인자 활 쏘는 법과 그 밖에 모든 공부를 시키리라 해가지고 새로 집을 짓고, 인자 오백 명의 동자(童子)들과 함께 요렇게 해서 했는데,

그 유리태자는 자기로 인해서 그렇게 참 외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참 오백 명의 동자를 모다 모아가지고 같이 공부하게 하고 새로 집을 짓고 하니까 너무너무 기뻐서, 그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가지고는 거기서 막 너무너무 기뻐서 그냥 활발하게 거동을 하고 막 그냥 자기가 일인자가 되어가지고 그러니까, 그 사람, 거기에 모인 동자들이 수근덕 수근덕거리면서 "종놈의 자식이 까분다"고, 아!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아, 그러니까 그 애가 그 말을 듣고서 깜짝 놀랬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내용을 갖다가, 그러니까 "왜 나보고 욕하냐"고 막 하다가 그 위~하니 달라들어서 아주 치고받고 해서 욕설을 퍼붓고 해서 큰 망신을 하고 사위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에 그 같이 모시고 간 바라문(婆羅門) 하나가 호고(好苦)라고 하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내가 나중에 부왕마마가 승하(昇遐)하시고 임금이 되거든, 오늘 내가 당한 이 치욕과 이 봉변을 나한테 일깨워다오" 그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결국은 그 왕이 승하하고 자기가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되었을 때에 그 호고(好苦)라고 하는 그 대신이 그때 그 봉변 당했던 일을 또 이 기억을 개득(이해)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래가지고 많은 병사를 갖다가 이끌고 가비라왕국을 갖다가 쳐부시러 갔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그 소식을 들으시고서 가비라왕국과 사위국 그 중간 경계 국경지대에 가가지고 큰 고목나무가 하나 죽어 갖고 있었는데 그 고목나무 그늘에 가서 떠억 이렇게 앉아 계셨습니다.

 

그리자 그 유리왕이 대군을 통솔을 해가지고 국경을 넘어서려고 하는데 고목(枯木)나무 밑에 부처님이 터억 앉아 계시거든.

 

"아니 부처님께서 왠 이리 고목나무 밑에 와서 이렇게 앉아 계십니까?"헌께,

"비록 고목은 되었으나 나에 고국(故國)의 그늘이 아니냐. 말라 죽은 고목일망정 조국(祖國)의 그늘이 좋아서 이렇게 그늘 밑에가 있노라"

아! 그 말씀을 듣고서 유리왕이 회군(回軍)을 했습니다. 군사를 몰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얼마 있다가 또 이 호고(好苦)라고 하는 대신이 또 유리왕을 충동(衝動)이를 쳐가지고,

"먼저는 부처님 때문에 못했지마는, 아! 어찌 그 참 치욕을 당하고서도 그 가비라왕국을 그냥 둘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또 충동이를 치니까, 대군을 몰아가지고 또 쳐들어갔습니다.

 

"이제는 부처님이 설사 거기에 계신다 하더라도 그걸 무시해버리고 가야합니다" 그래가지고 가기로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이제 막어봤자 소용이 없는 줄 짐작을 하시고 그냥 안 가셨는데.

 

가비라왕국에 쳐들어갔는데 성문을 갖다가 탁 때려 잠그고 그래 있는데, 큰 소리를 치면서 성문을 갖다가 열고 결국은 들어갔는데, 그때 그 유리왕의 외할아버지인 마하남(摩訶男)이,

"좋다! 니가 이 나라를 치는 것을 내 힘으로 어찌 막겠냐마는 내가 한 가지 소원이 있다. 내가 이 궁정(宮廷) 뜰에 있는 연못 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 성문을 열어놓고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도망가게 해라. 내가 물속에 들어가서 참고 있은들 얼마 동안을 있겠느냐? 그 소원 한번만 들어다오"

 

"그것 그렇게 하지요"

마하남이 물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래가지고 '이제 도망갈 사람은 도망가라' 해가지고 사람들이 동서남북 사문(四門)을 다 열어놓고 도망가라 그러는데, 서로 앞을 다투어서 도망가는데 벌집 건드려 놓은 것처럼 와- 허니 쏟아져 나가는데, 남문(南門)으로 나갔던 사람이 계속 도망가지를 않고 동문(東門)으로 도로 들어오고, 북문(北門)으로 나갔던 사람은 서문(西門)으로 들어오고, 서문(西門)으로 나갔던 사람은 남문(南門)으로 들어오고,

아! 계속 줄달음질쳐서 도망가면 다 살아갈텐디 어쩐 셈인지 다시 다른 문으로 들어오고 들어왔다 나가고 나가고 해가지고는 별로 많이 도망가지를 못했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과거에 업(業)이 있어서 결국은 죽을 수 밖에는 없구나'

하여간 한참 있어도 연못 속에 들어갔던 그 마하남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사람을 시켜서 연못 속에 들어가서 보라니까, 머리를 그 연못 속에 있는 나무 등걸에다가 칭칭 틀어 감고서 그래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마하남은 자기 한 몸을 죽여서 많은 사람들을 피난을 시키기 위해서 그러한 참 희생적인 방편을 썼는데, 결국은 별로 많이 도망가지를 못하고 모두 다, 참 이 경전에는 '9천9백9십만 명이다'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그 사람들을 모두 다 잡어서 땅에다가 묻고, 흙으로 다 덮어서 포개서 다 묻고서 많은 코끼리를 동원을 해가지고는 밟아서 다 죽였는데, 거기서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그렇게 죽일라고 할 때에 목련존자가, 내나 부처님의 제자고 신통이 제일인데 부처님의 그 가슴 아파하신 것을 알고서,

"제가 가서 그 가비라(迦毘羅) 성중(城中)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저 허공계(虛空界)로 데려다가 피신을 시킬까요?" 이렇게 여쭈어봤습니다.

 

"니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글쎄요. 참 어렵겠습니다마는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궁중에 왕족과 모다 거기 사람들을 오천 명을 갖다가 뽑아가지고 바리때에다 담았습니다. 담아가지고 저 공중으로 갖다가 놓았습니다.

 

갔는데, 그리고 그 가비라왕국에 다 사람들을 죽이고 다 인자 가버렸는데, 그때 목련존자가 그 허공중에 올라가가지고 그 오천 명 피난시킨 그걸 보니까 바리때 안에 다 고스란히 죽어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어피차 그 전생(前生)에 과보(果報)로 죽게 된 그런 경우는 억지로 어떤 신통술로 그것을 억지로 그것을 살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28분40초~43분54초)

 

 

 

 

(2)------------------

 

그 살상(殺傷)이 난 뒤에 부처님께서는 여러 비구 제자들을 거느리고서 그 현장에를 가셨습니다.

당신의 고국이고, 당신의 모다 친척이고 사촌들이고 모다 그래서 안 가볼 수가 없죠. 그래서 제자를 거느리고 가서 보시니까 참 그 비참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어.

 

"내가 그전에 여기에 와서 설법을 해가지고 참 수천만 중(衆)을 갖다가 득도(得道)케 했는데 오늘은 이렇게 참 비참한 현장이 되고 말았구나. 내가 이제부터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디디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유리왕과 여기 와서 이렇게 참 참혹한 행동을 한 저 군사들은 오래 살지를 못할 것이다. 지금부터 7일 후에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다 멸종(滅種)을 하고 말 것이다" 하고 부처님께서 예언을 하셨습니다.

 

유리왕이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을 듣고서 너무너무 공포에 떨고 그래가지고 그 군사를 이끌고 강변에 가가지고 거기서 풍악을 잽히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가만히 있자니 두렵기만 하고 그러니까 강변에 가가지고는 날을 새서 술을 마시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래가지고 궁중으로 돌아오지 않고 거기서 그렇게 지새는데, 갑자기 밤중에 비구름이 일어가지고 폭풍이 불어서 아주 큰 폭우가 쏟아져가지고는 강변이 넘쳐서 왕과 그 병사들이 수십만 명이 다 큰물이 져서 다 떠내려 가가지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위국에 궁전에는 벼락을 쳐가지고,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쏟아져서 벼락을 쳐가지고는 삽시간에 불이 타서 재가 다 되아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무참하게 많은 사람을 죽여서—코끼리를 시켜서 밟아 죽이고 그래가지고 그 과보가 워낙—부처님께서 직접 나서서 그것을 막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조국이요 부처님의 친척이요 사촌들이고 부처님의 조국에 백성들을 갖다가 그렇게 무참하게 짓밟아서 죽였으니, 마땅히 큰물이 져서 죽을 수밖에는 없고 또 하늘에서 벼락을 쳐서 그 악당들이 살던 궁은 잿더미가 될 수밖에는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그때에 부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저 자들이 모다 죽어서는 무간아비지옥(無間阿鼻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비구들이 부처님께, "무엇 때문에 저 유리왕이 저렇게 이 가비라왕국에 부처님의 그 권속과 왕과 병, 백성을 저렇게 참혹하게 죽이게 되았을까요? 전생(前生)에 무슨 인연(因緣)으로 저렇게 되았을까요?" 하고 여쭤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과거 구원겁(久遠劫)에 이 사위국(舍衛國)에 강변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살았었는데, 그때 이 큰 못에 그때 인자 많은 고기가 살고 있었는데, 그때 나라에 가뭄이 들어서 농사가 잘 안되고 흉년이 들어가지고 모다 배가 고프니까 그 못에서 많은 고기를 잡아먹었어"

 

수없이 많은 백성들이 그 많은 고기를 다 잡아서 먹었었는데, 그때에 그 구쇄(拘璅)라고 하는 고기가 하나 있었고 양설(兩舌)이라 하는 두 고기가 있었는데, 그 고기 중에는 제일 참 큰 왕이었었는데, '우리들이 아무 인간을 해롭게 한 일이 없는데 저 사람들이 우리를 이렇게 씨를 말리고 다 죽이니 우리가 언젠가는 내세(來世)에 사람이 되면은 우리가 이 원한(怨恨)을 갚자' 하고 그렇게 맹세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그 사위국에 그 고기를 잡아먹고 모다 그런 그 사이에 어린 소년이 하나가 있었는데, 고기를 잡아서 이 언덕으로 잡아 올리면은 그 막대기를 가지고 고기 그 머리빡을 탁! 치고 그러면서 고기가 잡혀 올라올 때마다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고, 또 잡아 올리면은 막대기로 탁! 치고 이 탁! 치고 해서 아 그렇게 참 뭣도 모르고 그렇게 좋아서 그랬던 소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때에 고기를 잡아먹던 사람들이 바로 이 가비라왕국에 마하남(摩訶男)을 위시(爲始)한 많은 가비라 모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가친척 그 백성들이고,

그 잡아먹힌 고기에 그 구쇄(拘璅)라고 하는 고기는 이 유리태자(瑠璃太子)고, 또 이 양설(兩舌)이라고 하는 고기는 아까 그 호고(好苦)라고 하는 바라문, 임금으로 하여금 자꾸 충둥이를 쳐서 그 가비라왕국을 공격하라고 충둥이 친 그 바라문이고.

그때 소년이 고기를 갖다가 탁 탁 막대기로 때리면서 좋아하던 그 소년이 누구냐하면 바로 석가세존(釋迦世尊)이다 이거거든.

 

과거에 그러한 그 못에 수천 마리, 수만 마리 고기를 그렇게 참 잡아서 회쳐 먹고 삶아 먹고 지저 먹고 볶아 먹고 그 이렇게 했다 그말이여.

그러한 과보(果報)로 해서 금생에 그 무서운 참 이 살생(殺生)을 당하게 되았습니다.

 

금생의 인연(因緣)으로만 본다면, 종을 갖다가 공주로 속여가지고 왕비로 시집을 보낸 그 잘못이 있고. 또 거기서 태어난 그 유리태자를 갖다가 '종의 자식'이라고 놀려대고 모다 그러한 원인을 찾을 수가 있지만.

설사 그렇기로서니 자기 외조부—사실은 뭐 종의 자식이니까 외조부라고 할 수도 없고, 또 그 입장에서 보면은 그러한 자기를 갖다가, 일국에 태자(太子)를 갖다가 '종의 자식'이라고 그렇게 놀린 그 말을 듣고 그만큼 참 분(憤)이 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로서니 그렇게까지 무참(無慘)하게 살생을 하고 그럴 수는 없어.

 

웬수를 갚을라면 거기에 관계되는 사람만 허지, 그렇다고해서 아주 그 많은 사람을 갖다가 생(生)으로 매장을 해가지고 코끼리로 밟혀서 죽이고. 그 살생을 하되 그런 방법이 그렇게 참혹하고 악독한 방법으로 그러는 법이 아니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은 남한테 웬수를 본의(本意) 아니게 짓기도 하고, 또 본의 아니게 또 보복(報復)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보복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보복으로써 정말 깨끗하게 일이 처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보복을 하면 그쪽에서는 다시 또 보복을 하고, 요쪽에서 또 보복을 하고 해서 생(生)을 거듭하면서 점점 원결(怨結)은 더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오늘날 이 세계가 이렇게 서로 이 사상(思想)이 다르고 이념(理念)이 다르고 또 이해관계(利害關係)가 다르면 서로 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싸우는데, 그렇게 싸와가지고 자기나라가 행복해질 수도 없는 거고, 싸와가지고 이 온 세계가 평화롭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참 이 살생(殺生), 예수교에서는 '모든 동물은 사람으로 하여금 잡어먹으라고 그렇게 하나님이 만들어 놨으니까 소고 돼지고 닥치는 대로 동물은 잡어먹어야 옳다'고 그런 말들을 합니다마는.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하면서, 그래서 그러면 지금은 사람 몸뚱이에 이나 벼룩이 없어졌지만 참 해방 직후 굉장히 이가 참 많고, 이 없는 사람이 없고 그런데 "그러면 사람 몸뚱이를 이나 벼룩이, 벼룩이나 빈대가 그 (피를) 빨아 먹고 사는데, 그러면 사람은 이나 벼룩 빈대가 (피) 빨아 먹으라고 이 세상에 태어났겠느냐?"고 이렇게 반박을 하고 웃은 일도 있습니다마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 짐승이 태어났다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약육강식(弱肉强食)이 되아가지고 힘 강한 놈이 약한 놈을 갖다가 먹고 살고 이렇게 하고 있으나 이것은 떳떳한, 마땅히 그렇게 되아라고 누가 만들어 놨다고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서로 도우면서 살 수 있는 세계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런 그 미물(微物)의 고기를 잡아먹은 그 과보(果報)로도 그렇게 참 무참한 과보를 받게 되거든, 하물며 사람이 사람을 죽여가지고 그 무서운 과보를 어떻게 면할 길이 있겠습니까?

사람을 죽인 죄도 그렇게 무섭거든, 하물며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는, 정법(正法)을 멸망하게 하는 죄는 또한 무엇에다가 비유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법(邪法)을 믿고, 바른 정법을 믿고 실천하지 아니하면 먼저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런 삿된 법을 남에게 가리키면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정법을 실천을 해서 바른 깨달음을 얻어야 영원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43분55초~57분5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Posted by 닥공닥정
활구참선 최상승법2020. 3. 10. 12:24

 

 

§(332) (게송)행주좌와일체처~ / 이조 말엽 한국의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경허선사 / 육조 스님의 '이뭣고?' 화두, 하택신회와 남악회양 / 한국의 활구참선은 조사선 / 조사선(祖師禪)은 활구선(活句禪)이라 하고,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선(死句禪)이라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 일체시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한국에 참선(參禪)은 화두(話頭) 하나를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으면, 그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되 이론적으로 따지거나, 무슨 교리적으로 따지거나, 또는 철학적으로 따지거나 일체 그러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들어가는 참구가 아닙니다.

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 있어서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그러한 이론을 여기에 동원을 해서도 안 되고, 그동안에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이나 상식이나 이론도 이 화두 참구하는 데에 동원되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알 수 없는 의심'으로만 이 화두를 참구를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바로 이 육조 스님과 남악회향 선사와의 사이에서 전해진 이 법이 바로 활구참선법이고 이것이 조사선(祖師禪)인 것입니다.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87.06.07) (용332)

 

(1) 약 16분.

 

(2) 약 13분.

 

(1)------------------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여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 걸어다니고 머물르고 또 앉고 눕고 하는 것 그러한 모든 곳에서,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라. 옷 입고 밥 먹고 하는 모든 때라.

 


(요 소리가 더 크게 안되나? 정전 되았어? 응.)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그대가 지금 평상도리(平常道理)를 알고자할진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南斗)의 성(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느니라.

 

이 게송은 평상화(平常話) 도리(道理), 평상 도리.

진리(眞理)라고 하면은 저 깊고 깊어서 알라야 알 수 없고, 높고 높아서 볼라야 볼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정묘년(丁卯年) 6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방금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많은 신남신녀와 사부대중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셨습니다.

녹음법문을 통해서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부처님으로부터 오늘까지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부처님 정법(正法)이 전해 내려왔습니다.

 

이조에 와서, 이조 말엽에 와서 이 불법(佛法)이, 이 참선법(參禪法)이 잠시 침체했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그러다가 백여 년 전에 경허성우(鏡虛惺牛) 선사께서 출현(出現)을 하셔가지고 처음에 동학사 강원(講院)에서 경(經)을 배우시고, 어떻게 참 두뇌가 명석하시고 또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공부를 하셨던지 일찌감치 그 전강(傳講)을 받아가지고 대강사(大講師)가 되어서 천하에 학인(學人)을 모다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무서운 전염병(傳染病)에 무데기로 죽어가는 광경을 보시고, '경(經)을 아무리 종횡으로 맥힘이 없이 알고 설(說)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아니다. 확철대오(廓徹大悟)가 아니다' 한 것을 깨달으시고서 학인을 다 흩어버리고 이래가지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셨습니다.

 

그리해서 확철대오를 하셔가지고 침체(沈滯)한 한국의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을 하셔서 경허 큰스님 밑에 만공(滿空) 스님, 혜월(慧月) 스님, 수월(水月) 스님, 여러 도인(道人)들이 나오셨습니다.

 

그래가지고 한국에 선풍이 크게 융성을 해가지고 만공 스님 밑에 고봉(高峰) 스님, 전강(田岡) 스님, 보월(寶月) 스님, 또 여러 도인들이 나오셔서 오늘날 한국에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 이렇게 전해 내려오고,

도처에 선방(禪房)이 있어서 많은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이 정진(精進)을 해서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정법이 오늘날 한국에 이렇게 전통해 내려온 것은 오직 경허 스님께서 대강사로 발심(發心)을 해가지고 확철대오해서 선풍을 진작한 그 공덕(功德)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이 참선(參禪)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참선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좋은 경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아까 조실 스님께서도 녹음을 통해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참선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오종가풍(五宗家風)이 있고 그 종파(宗派)에 따라서 가풍이 모다 다르고, 현재도 일본에는 일본식 참선이 전해 내려와서 그 일본 사람들에 의해서 서구에 참선이 소개 되어서 서구 사람들이 많은 일본 참선에 대해서 모다 듣고 배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이 한국에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참선하고는 하늘과 땅에 그러한 차이가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에는 모두가 다 참선이고 다 좋은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참선법은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여' 털끝만큼만 차이가 있어도 그것이 바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되어.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참선은, 한 말로 말해서 의리선(義理禪)입니다. 공안(公案)을 의리(義理)로, 의리로 따져서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한 화두(話頭)를 받어가지고 며칠 이마를 찡그리고 애써서 이리저리 천착(穿鑿)을 하다 보면 그럴싸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래가지고 그 조실 스님한테 가서 자기 본 바를 말하면 "옳다!" 그러고 또 다른 공안을 또 줍니다.

 

또 새로 공안을 하나, 화두를 타가지고 또 며칠간 끙끙 앓으면서 그래가지고 뭐라고 그럴싸한 답을 하면, 안 맞으면 "안 맞다! 또 다시 더해라"

또 며칠 애써서 가서 뭐라고 대답하면 "되았다!" 그러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그래서 영리한 사람은 금방 이르기도 하고, 이삼일이면 이르기도하고, 사오일이면 이르기도하고,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이 백 개의 화두를 통달하기도 하고 또 오백 개의 화두를 통달하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대체적으로 백 개 이상의 화두를 통과하면 조실(祖室) 자격을 준다. 이런 말을 듣고 있습니다.

 

한국에 참선(參禪)은 그러한 식으로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화두(話頭) 하나를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으면, 그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되 이론적으로 따지거나 무슨 교리적으로 따지거나 또는 철학적으로 따지거나 일체 그러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들어가는 참구가 아닙니다.

 

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 있어서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그러한 이론을 여기에 동원을 해서도 안 되고, 그동안에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이나 상식이나 이론도 이 화두 참구하는 데에 동원되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알 수 없는 의심'으로만 이 화두를 참구를 하는 것입니다.(처음~15분26초)

 

 

 

 

(2)------------------

 

예를 들자면, 육조(六祖) 스님께서,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으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는데 항상 우리 일상생활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하되 그 속에서 그놈을 찾어보면 알 수가 없으니 이놈은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어. 그러니 대관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하고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말하자면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뭣고?' 화두가 바로 이 육조 스님의 이 "심마물(甚麽物)이냐,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그렇게 물으신 이 공안(公案)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니까, 그때에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에 근원(根源)이며 이 하택 저 신회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고, 일찍이 생겨난 때도 없고 없어진 때도 없으며,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어. 머리도 없고 꽁무니도 없으니 대관절 이게 무슨 물건이냐?"

"모든 부처님에 근원이며 이 신회의 불성입니다"

아, 그럴싸하니 대답을 하지 안했습니까. 이론적으로 말할 때 뭐이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그 맞는 말이지.

 

육조 스님께서 크게 꾸지람을 하시기를,

"내가 내동 말하기를,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다고 그러는데 너는 어찌 '모든 부처님에 본원(本源)'이니, '하택신회의 불성(佛性)'이니 하고 왜 이름을 붙이는고? 너는 나중에 애써서 공부를 해가지고 일가(一家)를 이룬다 해도 너는 얼자(孼子)가 되고, 지해종사(知解宗師) 밖에는 못되겄구나"

 

지해종사(知解宗師)라 하는 것은 이론으로 불교를 공부하는 강사(講師)같은 거,

참으로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 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만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하는 이론적으로 연구하고, 교리적으로 연구하는 그러한 지해종사 밖에는 못되겄구나' 이렇게 평을 하셨습니다.

 

얼마 있다가 남악회양(南嶽懷讓)이라고 하는 수좌가 왔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물으시기를, "심마물(甚麽物)이 임마래(恁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고 물으셨습니다.

아! 남악회양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물으신데 대해서 망지소조(罔知所措)여, 무어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어. 꽈악 맥힌 체 물러나와 가지고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그래 8년 동안 '무슨 물건인고?... 무슨 물건인고?...' 도저히 꽉 맥혀서 입을 벌릴 수가 없어.

그러한 그 콰악 맥혀서 알 수 없는 그 의심(疑心)으로, 그 의단(疑團)으로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육조 스님의 법(法)을 이어받았습니다.

 

한국에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바로 이 육조 스님과 남악회향 선사와의 사이에서 전해진 이 법이 바로 활구참선법이고 이것이 조사선(祖師禪)인 것입니다.

 

의리선(義理禪), 일본 사람들이 화두를 뭐 백 개를 통과(通過)하고, 오백 개를 통과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며칠 동안 이리저리 따지고 분석하고 해가지고 "이것이 아닙니까!"그러면 "옳다"하고 또 하고,

천칠백 공안을 다 통과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조사선이 아니고 활구참선이 아니고 이것은 정법(正法)이 아닌 것입니다.

 

백 개를 통과해봤자 중생심(衆生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지, 이것은 참다운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지식(知識)을 얻기 위해서 참선을 한 것도 아니고, 무슨 화두를 몇 개 통과했는가? 많이 통과했다고 해서 무슨 명예(名譽)를 얻기 위해서 참선을 한 것도 아닌 바에는 확철대오를 하고, 안 하고 한 것은 놔두고 '바르게 공부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한 공부는 한 만큼 그것이 깨달음으로 향해 가는 공부지만, 바르게 하지 못한 공부는 벌써 방향을 잘못 잡고 가는 길이라 서울을 간다며, 저 호남에서 서울을 간다면서 북쪽을 향해서 가지 아니하고 동쪽이나 서쪽이나 남쪽으로 향해 가는 거와 같애서, 바르지 못한 길을 아무리 쉬지 않고 열심히 간다고 해도 바르게 목적지에 이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살부살모(殺父殺母)하는 죄(罪)는 불전참회(佛前懺悔)어니와, 부모를 죽인 죄는 부처님 앞에 참회를 하거니와, 미득(未得)을 위증(謂證)하고 미증(未證)을 위증(謂證)하는 죄는 참회무로(懺悔無路)다, 참회할 길이 없다"하셨습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죽인 죄를 어디 가서 참회를 해.

 

정법(正法)을 설(說)하고 또 그 정법을 의지해서 수행(修行)을 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길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이 아닌 의리선(義理禪), 사구선(死句禪).

이 의리선을 의리로 이론으로 이렇게 따져서 들어가고, 더듬어 들어가고, 알아 들어가고 분석해 들어가는 이런 의리선은 이것을 ‘사구선(死句禪)이라, 죽은 구(句)의 참선이다, 죽은 참선이다’ 이렇게 말을 하기도 하는데.

 

왜 조사선(祖師禪)은 활구선(活句禪)이라 그러고, 요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선(死句禪)이라 허냐하면,

아까 남악회양 선사가 하는 그러한 참선(參禪)—알 수 없는,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공부를 해 나가면, 우선 답답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고 아무 재미도 없고 그렇지만, 그렇게 알 수 없는 의단으로 그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마침내는 툭! 터져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으로 따져서, 교리적으로 따지고 철학적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또는 종합하고 이래가지고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의리선은 이것을 사구선(死句禪)이라 그러는데, 해 갈수록 점점 중생(衆生)의 생사심(生死心), 생사심을 더욱 치성(熾盛)하게 맨드는 결과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사심(生死心)을 조장을 시키고 치성하게 맨들면 결국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구렁탱이로 빠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 의리선(義理禪)으로 참선을 하면 그것이 이미 바르지 못한 수행이기 때문에 바른 깨달음이 있을 수가 없고, 어떠한 그 나름대로 의리선도 열심히 하다보면 무엇인가 스스로 느낀 바가 있고 그 어떤 경계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른 깨달음이 아니여.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을 스스로 그것이 바른 깨달음인줄 착각을 하고, 많은 사람에게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는 그런 삿된 참선을 지도하고.

또 그런 삿된 참선을 배워가지고 그 사람이 또 그런 삿된 수행을 해가지고 또 삿된 어떤 것을 깨달라 가지고 그걸 또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전하고 해서 영영 부처님의 정법은 다 믿는 사람이 없고 실천한 사람이 없어지고 삿된 참선만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가득차게 되면, 그것이 바로 불법이, 정법(正法)이 멸망(滅亡)한 때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다른 종교나 어떠한 국법(國法)으로 불법(佛法)이 멸망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탄압을 하고 아무리 파괴를 한다 하더라도, 겉으로 나타난 어떠한 그러한 것은 탄압을 할 수가 있고 그 파괴를 할 수가 있겠지만—사찰(寺刹)이라든지 또는 불상(佛像)이라든지 경전(經典)이라든지 그런 상(相)이 있는 그러한 것들은 파괴할 수가 있겠지마는, 정법(正法)은 그것으로서 멸망이 되지 않습니다.

 

정법은 우리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불제자들이 우리 불법을 삿되게 믿고 삿되게 행할 때에 정법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15분27초~28분3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