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 (게송)일불이불천만불~ / 과거에 그런 부처님들은 어떻게 선근을 심었느냐? / 도를 깨닫는 첫째 관문(關門)인 아상(我相)을 뛰어넘는 가장 간단하고도 중대한 것이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
(게송)견색비간색~ / 팔풍(八風)이 휘몰아치는 오탁악세(五濁惡世)에 팔만사천 마구니를, 팔만사천 번뇌마(煩惱魔)를 퇴치할 수 있는 좋은 무기는 '이뭣고?' / 마구니는 자기(自己)로부터 나온 것들이 다시 자기(自己)로 돌아온 것이기 때문에, '이뭣고?' 하나로써 능히 퇴치(退治)할 수가 있다.
**송담스님(No.479)—1992년 하안거 해제(92.08.13) (용479)
(1) 약 11분. (2) 약 16분.
(1)------------------
일불이불천만불(一佛二佛千萬佛)이 각각안횡겸비직(各各眼橫兼鼻直)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석년친종선근래(昔年親種善根來)하여 금일의전득거력(今日依前得渠力)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일불이불천만불(一佛二佛千萬佛)이, 한 부처님, 두 부처님 내지 천만 부처님이,
각각안횡겸비직(各各眼橫兼鼻直)이여. 부처님들이 모두 다 눈은 옆으로 백이고, 코는 바로 이렇게 백이셨드라 그거거든.
석년친종선근래(昔年親種善根來)로, 석년(昔年)에 무량겁으로부터 오시면서 친(親)히 선근(善根)을 심어 왔어. 온갖 선근을 심어 왔기 때문에,
금일의전득거력(今日依前得渠力)이여. 금일(今日) 이와 같이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얻으시게 되었더라.
그러한 선근(善根)을 심어 오지 안 했으면 어찌 삼명육통과 32상과 80종호를 갖추어서 스스로 깨닫고 무량(無量) 중생을 제도(濟度)하실 수가 있겠는가.
그러면 그런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그런 부처님이 몸소 시범(示範)하신 바와 같이 그런 선근(善根)을 심지 않고서는 그런 삼명육통과 32상과 80종호를 갖출 수가 없을 것이다 그거거든.
그러면 과거에 그런 부처님들은 어떻게 선근을 심었느냐?
육조(六祖)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천만 부처님 처소(處所)에서 일심(一心)으로 공양(供養)을 하고, 그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수순(隨順)을 하고, 또 모든 보살(菩薩)이나 선지식 또는 스승님 · 부모 또는 연세가 많은 어른 존장(尊丈)의 처소에서는 항상 공경하고 그 뜻을 받들어서 순종하고, 그 명령에 어기지 않고 그 뜻을 받들어서 그렇게 해서 선근을 심어 왔고.
그런 부처님이나 보살님이나 또는 선지식 스승 부모뿐만이 아니라 육도(六道) 중생을 만나서는 살해(殺害)를 하지 아니하고, 그러한 중생을 속이지 않고, 천대하지 아니하고, 훼방하지 아니하고, 욕하지 아니하며, 그 축생(畜生)을 타지 아니하며 채찍질을 하지 아니하며 그 고기를 먹지 아니해. 항상 그 육도 중생을 '어떻게 하면은 좋게 해 줄까? 이익되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상대해 왔더라 그말이여. 그렇게 해서 선근(善根)을 심어.
그리고 일체 빈고(貧苦),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중생을 상대할 때에는 자민심(慈愍心),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엾은 마음으로 상대하고, 싫어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그 중생(衆生)이 요구하는 바는 자기의 힘 따라서 베풀고, 이렇게 해서 선근을 심었더라.
그러면 일체 악류(惡類), 악한 무리들—나를 해꼬자하고, 해꼬자하려는 그런 악한 무리를 상대할 때에는 유순(柔順)하고 화평(和平)한 마음으로 상대하고, 인욕(忍辱)하고 환희(歡喜)한 마음으로 이렇게 맞이하고.
나에게 좋게 해 준 사람을 환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악한 마음으로 나에게 피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그러한 상대를 만나서도 유순하고 인욕하고 환희한 마음으로 맞이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보살(菩薩)에 마음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맞이하면서 그 뜻을 어기지 아니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런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환희심을 내고, 고집 세고 비꼬인 생각을 쉬게 하는, 그렇게 해서 선근을 심었다 그거거든.
이것이, 그렇게 무량겁을 선근을 심어 왔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대표이신 석가모니 부처님, 우리의 교주(敎主)이시고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인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같은 그러한 성현 중에 대성현(大聖賢)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위대한 성현을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그 가르침에 우리는 목숨을 바쳐서 순종(順從)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낱낱이 구체적으로 간략히 선근(善根)을 심는 법을 육조(六祖) 스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말씀을 드렸거니와, 우리는 우리와 같은 하근기(下根機)로서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불보살과 스승과 어른 존장, 그리고 모든 육도 중생과 빈곤한 그런 중생들, 심지어는 우리를 해꼬자할 악한 무리들에까지도, 그러한 무리를 만나서도 우리의 마음을 변하지 아니하고 선근을 심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근기 약한 것만을 한탄하고 그러한 선근 심는 것을 포기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런 선근을 심는 데에는 첫째, 나의 욕심(慾心)을 버리고, 나를 생각하는 아상(我相)—우리가 도(道)에 들어가는, 도를 깨닫는 첫째 관문(關門)이 아상(我相)을 뛰어넘는 것인데, 그 아상을 뛰어넘는 가장 중요한 가장 간단하고도 중대한 것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입니다.(12분38초~23분18초)
우리는 눈을 통해서 온갖 색상(色相)을 보는데, 그 색상이 눈에 들어오면 들어오자마자 그것에 관여를 하게 됩니다. '빨갛다 노랗다 파랗다', '크다 적다', '좋다 나쁘다' 그것이 바로 색에 관여하는 것이거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여. 무슨 소리든지 귀로 들으면, '아, 저건 자동차 소리다. 비행기 소리다. 저건 애기 소리다. 저것은 개 짖는 소리다' 거기에서만 끝나지 아니하고, '저것은 나를 해롭게 하는 소리다. 나한테 욕하는 소리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다' 온갖 사람의 말을 듣고서 그렇게 관여를 하고, 거기에서 싫어하는 생각을 내고, 미워하는 생각을 내고, 다투는 마음이 속에서 일어나고, 원한심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색상(色相). '저 사람은 이쁘다. 미웁게 생겼다. 뵈기 싫게 생겼다. 입맛 떨어지게 생겼다' '저 아무 점께 나한테 저렇게 욕한 인간이 또 오는구나'
하루 종일 · 날마다 · 달마다 · 일 년 내내 · 일생 동안을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모든 색상을 보고 그렇게 시비(是非)를 일으키고 업심(業心)이 발동(發動)을 하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를 통해서 시비를 일으키고 업이 발동을 해서, 얼굴에 그 표현(表現)이 되고 행동으로 표현이 돼.
그래서 한량(限量)없는 업(業)을 짓고 업 위에 다시 또 업을 지어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되는데.
색성불애처(色聲不礙處)에,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거나 눈에 무슨 색상이 들어오거나, 처음에는 관여를 하지 않다가 나중에는 들어오거나 말거나 거기에 걸리지를 안 해.
눈에 보이면 보인 대로 맺겨 두고,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면은—내를 칭찬하는 소리를 듣거나, 나를 비방(誹謗)하는 소리를 듣거나 그냥 그런대로 놔두는 거여.
귀를 막고 안 들을려고 할 것도 없고, 눈을 감고 안 보려고 할 것도 없어. 보이면 보인 대로 놔두고 들으면 들린 대로 흘려보내는 거여.
부처님께서 어느 외도(外道)를 만나셨는데, 그 외도가 입에 못 담을 비방(誹謗)을 해. 온갖 비방을, 부처님 비방을 한다. 부처님 제자들에 관한 비방, 부처님에 관한 비방, 다 얼토당토않는 소리로 갖은 고약한 소리를 해 가지고 부처님 앞에 욕을 하고 비방을 하는데, 부처님이 아무 생각 없이 그 소리를 그만하라는 말도 않고 다 들으셨다 그말이여.
다 듣고 난 다음에, "이제 말이 끝났습니까?"
"네, 끝났다"고.
"응, 그러면 내가 한마디 묻겠는데, 내 집에 참 손님이 오셔서 그 주인이 참 갖은 음식을 많이 차려서 내놓고 손님한테 내놨는데, 손님이 그 음식을 안 먹고 가면 그 음식은 누가 먹어야 겠습니까?"
"그 손님이 안 먹으면 주인이 먹어야죠"
"그러면 되었다"고. 그리고서 부처님이 거기서 떠나셨습니다.
내게 당치않는 행동이나, 내게 당치않는 말로써 나를 비방을 하거나 욕을 하거나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것을 취(取)하지 아니하면, 그것에 관여(關與)하지 아니하면, 그 욕과 악한 비방은 한 사람이 다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공연한 사람을 흔들어 놓을 흔들려고 그러고, 공연한 사람을 비방을 하고 욕하고 했으면, 상대방이 그놈을 받아들이면 그리 건너가겠지만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무심(無心)으로 상대(相對)해.
화두(話頭)를 떠억—그럴수록에 당치않는 소리를 하면 얼굴 하나 찌푸릴 것도 없이 화두를 떠억 들고 '이 뭣고?' 그러면 구태여 안 들을라고 할 것도 없어.
그냥 열심히 들은 것처럼 눈을 따악 뜨고 잘 들은 척하고, 들으면서 그냥 '이뭣고?'를 떠억 하란 말이여. 그러면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는 한 사람 입으로 도로 들어가는 거여.
그놈 지가 토해 낸 독(毒)을 잔뜩 들어마시고, 그 사람은 그 지은 죄업(罪業)으로 삼악도(三惡道)에 가서 고(苦)를 받게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도, 그 (욕하는) 말을 들으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인 '이뭣고?'를 하고, '판치생모'를 하고, '정전백수자'를 하고, '무자' 화두를 했기 때문에 그 공덕(功德)으로—(욕한 사람은) 한량없는 삼악도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다가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그 (욕한) 사람이 불법(佛法)을 믿게 될 것이다 이거거든.
같이 싸우고 그랬으면 다 같이 지옥에 떨어질 텐데, 내가 거기에 관여하지 아니하고 시비(是非)에 말려들지 아니하고, 떠억 정심(正心)으로 상대를 하고 나는 화두를 들고 최상승법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욕한) 사람이 지은 죄 만큼은 받어야 되는 거고,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받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그래도 그놈을 받고 나서는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했을 때에는 불법(佛法)을 만나게 되니, 얼마나 그 인과법(因果法)이 역연(歷然)하고.
또 내가—그렇게 비방을 하고 욕을 한 데도—동심(動心)이 안 되고 떠억 화두를 들 수 있게끔 된 것을 생각해 보면, 그래도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많은 부처님과 많은 선지식에게 공양(供養)을 하고 선근(善根)을 심어 온 그 힘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나를 비방하고 욕한 데 마음이 동요가 안 되고 화두를 거각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들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이미 잘 길렀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단적으로 한 그런 예를 들었거려니와, 이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데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겠습니까. 팔풍(八風) 경계, 여덟 가지 종류의 바람이 휘몰아치는 그러한 오탁악세(五濁惡世)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가 부닥치는 많은 일들, 정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많할 것입니다마는, 이 예(例)와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 자기를 무장(武裝)하고 그러한 '이뭣고?'에 철갑과 투구로써 무장을 하고 나간다면 그 앞에 이기지, 당해낼 수 있는... 아무것도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천하 간단한 무기(武器)의 하나지마는 팔만사천 마구니를 퇴치(退治)할 수 있고, 팔만사천의 번뇌마(煩惱魔)를 퇴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말세에 그러한 좋은 무기를 우리는 지닐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선지식(善知識)과 여러 도반들께 뜨거운 감사를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 팔만사천 마구니를 우리가 그것으로 이겨 낼 수가 있느냐 하면, 팔만사천 마구니가 다른 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거든. 자기의 마음속에서 나온 팔만사천 번뇌(煩惱)가, 그놈이 자라고 자라 가지고 팔만사천 마구니가 되어서 자기(自己)에게 다시 핍박(逼迫)해 들어온 것이거든.
그 마구니가 다른 데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여. 저 타방세계(他方世界)에서 만들어져 가지고 침범(侵犯)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자기(自己)로부터 나온 것들이 다시 자기(自己)로 돌아온 것이거든. 자기가 심은 씨가 그러한 열매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이뭣고?' 하나로써 능히 퇴치(退治)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거거든.
'이 뭣고?' 하나만 탁! 챙기면 천하 없이 무서운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의 권속도 그 앞에는 무릎을 꿇 수밖에 없고, 결국은 그것들이 나를 보호하고 나로 하여금 보다 더 빨리, 보다 더 크게 깨달라서 성불(成佛)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는 호위병(護衛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도반들은 앞으로 어데서 어떠한 일을 만나고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항상 정심(正心)으로 화두(話頭)를 드는 그 정진력(精進力)으로 나아간다면 어디를 가거나 무장무애(無障無礙)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을 만나고 역경계(逆境界)에 처(處)하더라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화두(話頭)를 들고 나아간다면 무장무애하게 어려운 일을 만날수록에 더 분심(憤心)이 나고,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하고,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해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23분19초~38분35초)
§(332) (게송)우중간호월~ / 마음에 맞지 않는 일 속에서 바로 자기를 단속해 나가고 바르게 일을 처리해 나가면 그 속에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
〇부처님을 믿는 우리는 세세생생에 보복(報復)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설사 상대방이 나를 고의적으로 또는 고의가 아닌 어떠한 자기에게 물질적으로 해(害)를 끼쳤던지 정신적으로 해를 끼쳤던지,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보복할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거기에서 인과(因果)의 진리를 살피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할 수 있도록,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우리는 굳게 마음에 새기고, 그렇게 가족을 상대하고 친구를 상대하고 이웃을 상대하고 그렇게 하면서 수행을 한다면 우리도 반드시 부처님과 같이 될 때가 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87.06.07) (용332)
약 14분.
우중간호월(雨中看好月)하고 화리급청량(火裏汲淸凉)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직립두수지(直立頭垂地)하고 횡면각지천(橫眠脚指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우중(雨中)에 간호월(看好月)하고 화리(火裏)에 급청량(汲淸凉)이다.
비 가운데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가운데에서 그 밝은 달을 보고, 불이 훨훨 타는 불 속에서 시원한 맑은 물을 길을지니라.
밝은 달은 비가 안 올 때에 볼 수가 있고, 맑은 물은 맑은 샘에서 퍼야지,
어떻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구름 덮인 하늘에서 그 밝은 달을 찾으며, 훨훨 타는 불 속에서 어떻게 맑은 물을 길러낼 수가 있을까?
진리(眞理)에 입각해서 보면, 남(南)과 북(北)이 같은 것입니다.
북쪽의 반대가 남쪽일 것 같지만, 북쪽이 바로 남쪽이고 남쪽이 바로 북쪽이여.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다 보면 결국은 남쪽이 돌아오고만 마는 것입니다.
콜롬버스가 계속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다보니까 결국은 미국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에 맞는 일을 항상 만나고 항상 보기를 바래지만, 마음에 맞는 일을 만남으로써 행복(幸福)을 삼지만, 사실은 마음에 맞는 일만을 추구하다 보면 머지않아서 불행(不幸)이 돌아오는 거고,
마음에 맞지 않는 일 속에서 바로 자기(自己)를 단속(團束)해 나가고 바르게 일을 처리해 나가면 그 속에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더욱이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사람도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많고, 일도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많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자꾸 마음에 맞는 사람만 찾을라고 하면 어디에 그렇게 만나겠습니까? 내 마음에 꼭 든 일만 만나고자하나 그런 일은 만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혹 만났다 하더라도 잠시지 다시 또 그것은 나로부터 떠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차라리 마음에 맞지 않는 역경(逆境)에서 거기서 부딪히고, 거기에 몸을 옆으로 비틀고 용감하게 지혜롭게 끈기 있게 헤치고 나가면, 거기에서 이 사바세계에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도(道) 닦는 것도, 의리선(義理禪)은 따져 들어가면 알아진 것이 있고, 얻어진 것이 있고, 재미가 있고, 맛이 있으니까, 공안(公案) 하나 얻어서 이리저리 해가지고 통과하고, 또 공안 하나를 타가지고 이리저리 따져서 ‘아!’ 알아맞추고 하면 그것 곧 그냥 깨달음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 것같이 느껴지고, 재미가 있고 얻은 바가 있고, 남에게 '나는 공안 몇 개를 알았다' 이렇게 자랑할 것이 있고, 썩 할만 하지요.
그러나 그러한 공부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따져서 들어간다 해도 그것은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이여.
한 가정, 한 가족, 일가친척, 우리 마음에 맞은 사람 엄격히 말하자면 사실은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어렵다고해서 부모가 아니고 자식이 아니고 형제가 아니고 일가친척이 아니고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각각 숙세(宿世)로부터 지어 내려오는 업(業)이 다르기 때문에, 그러고 그러기 때문에 얼굴을 각각 다르게 태어났고, 생각도 성격도 각각 다르고, 따라서 본 바가 다르고 생각한 바가 다르니 다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여.
서로 지은 바 업(業)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것을, 그 근원은 모르고서 내 마음에 맞기만을 바래고 내 마음에 안 맞으면 미워하고 그 사람을 갖다가 짓밟고 쫓아내고 멀리하고 망하기를 바래고 이런다면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너무 참 어렵고,
정말 스스로 고통과 불행의 보금자리를 자기가 만들어서 그 안에서 자기가 고통을 받게 되는 거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생(生)을 거듭함에 따라서 점점 고통스러운 생을 만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이 유리태자가 그렇게 많은 살생을 하고—전생에 살생을 당했다고 해서 원한심(怨恨心)을 품고, 그렇게 해가지고 살생을 해서 무슨 좋은 꼴을 자기는 봅니까? 물에 빠져서 몰살을 당하고, 불이 나서 자기 궁실이 다 타 버리고.
그래가지고 이 전생에 우물 못 속에서 사람들로부터서 잡아먹히더니, 금생에 다시 와서 보복을 하고서 자기도 다시 멸망을 했습니다. 내생에 다시 원한심을 품고 또 보복을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부처님을 믿는 우리는 세세생생에 보복(報復)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설사 상대방이 나를 고의적으로 또는 고의가 아닌 어떠한 자기에게 물질적으로 해(害)를 끼쳤던지 정신적으로 해를 끼쳤던지,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보복할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거기에서 인과(因果)를, 인과의 진리를 살피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할 수 있도록,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전생(前生)에 코끼리의 왕이 되어 계실 때에 어떠한 포수(砲手)가 위경(危境)에 처해서 죽게 될 때 그 포수를 살려주었는데—포수가 가가지고 돌아갔는데, 그 광고를 보니까 '아금니가 여섯 개가 달린 코끼리를 잡어 온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소원을, 소원대로 해준다'하고 광고가 붙었어.
그 광고를 보고서 '내가 연전에 히말라야 산에 들어가가지고 죽게 되었을 때 나를 살려준 코끼리가 바로 이 상아(象牙)가 여섯 개가 붙었다' 한 것을 깨닫고서 "내가 그 코끼리를 잡어 오겠습니다"하고 자원을 했습니다.
"그래, 니가 잡어오너라"
그 코끼리는 스님네를 좋아하고 불법(佛法)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반 보통 사람한테는 도저히 잡혀서 죽질 않는데, 스님네는 살생(殺生)을 아니하기 때문에 그 스님네가 가까이 온 것은 경계(警戒)를 아니해.
그래서 그 포수(砲手)는 머리를 깎고서 가사(袈裟)를 떠억 수(垂)하고 스님으로 가장(假裝)해가지고 들어가 가지고 독 묻은 창으로 그 코끼리를 찔러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코끼리의 그 군사들이, 모다 백성들이 오백 마리가 달라들어서 그 포수를 갖다가 밟아서 죽일려고 하니까 그 코끼리의 왕이 그 포수를 갖다가 자기 네 다리 사이에다가 이렇게 숨겨놓고,
"너희들, 이 죽이지 말아라. 이 포수는 내가 저를 살려준 그 생명의 은혜를 갖다가 이렇게 나를 독 묻은 창으로 쑤셔서 나를 죽이니, 나는 이 포수에게 어떻게 이 보복을 할 것인가?
너희들 식으로 이렇게 밟아서 죽이면 내생에 또 이러한 보복을 당할 것이니, 내가 이 다음 생에 도(道)를 성취해서 성불(成佛)을 하게 되면은 저 포수는 나의 여섯 개의 이 아금니를 뽑아가기 위해서 나를 죽였지만, 내생에 내가 성불하게 되면 이 포수의 여섯 도둑놈을, 이 삼독(三毒)과 육적(六賊)의 마음을 내가 뽑아 주리라" 이렇게 선언을 하고서,
"내 아금니 여섯 개를 어서 뽑아다가 너의 임금님에게 바쳐서 영광(榮光)을 누릴지니라" 이렇게 선언을 하고서 그 코끼리는 쓰러져 죽은 것입니다.
부처님은 과거 전생에 생(生), 생(生)을 두고 그러한 식으로 해서 수행을 쌓고 또 새 몸을 받아서 또 그렇게 수행을 쌓고 해가지고 마침내는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시고 삼명(三明)과 육통(六通)을 얻어서 성불(成佛)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을 믿는 제자는 부처님의 그러한 이 높고 거룩한 뜻을 본받아서, 부처님과 같이 다는 실천을 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이 보복하는 마음, '내가 조금 손해를 보고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보복할 마음을 갖지 말자' 이러한 마음을 우리는 굳게 마음에 새기고, 그렇게 가족을 상대하고 친구를 상대하고 이웃을 상대하고 그렇게 하면서 수행을 한다면 우리도 반드시 부처님과 같이 될 때가 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62분37초~1시간 16분43초)
공안(화두)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뭣고?'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 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
요새 일본식 참선이 수입이 돼 가지고 화두 하나를 이리저리 따져서 “아, 이런 것이다!”, 또 그 다음에 다른 화두를 이리저리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또 하나를 해결 지어 놓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해서, 10개 20개······, 화두를 이렇게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그러한 참선이 지금 일본으로부터서 수입이 되어가지고 많은 지성인들이 그러한 참선을 하는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이런 참선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쪼끔 생각 있는 사람이면 능히 알고도 남을 상식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차라리 참선을 안하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부를지언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합니다. 활구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77분41초~79분50초)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〇업의 종류 ;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유리태자가 그렇게 많은 살생을 하고—전생에 살생을 당했다고 해서 원한심(怨恨心)을 품고, 그렇게 해가지고 살생을 해서 무슨 좋은 꼴을 자기는 봅니까? 물에 빠져서 몰살을 당하고, 불이 나서 자기 궁실이 다 타 버리고. 그래가지고 이 전생에 우물 못 속에서 사람들로부터서 잡아먹히더니, 금생에 다시 와서 보복을 하고서 자기도 다시 멸망을 했습니다' ; ‘석가족의 멸망 인과’ 법문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제26권, 34.등견품(等見品) [2]에 있는 석가족의 멸망 인과.
*보리심(菩提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할 수 있도록' ; 발심(發心).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위경(危境) ; 위태로운 처지나 지경(地境 경우, 형편).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 성냄 · 어리석음(貪瞋癡 탐진치)을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육적(六賊) ; 번뇌를 일으키는 근원이 되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六根)을 도둑에 비유한 말.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머금은 것,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 등등.
*삼명육통(三明六通) ;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갖추고 있는 3가지 자유 자재한 지혜와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6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삼명(三明) ;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갖추고 있는 3가지 자유 자재한 지혜.
①숙명지증명(宿命智證明) 나와 남의 전생을 환히 아는 지혜.
②생사지증명(生死智證明) 중생의 미래의 생사와 과보를 환히 아는 지혜.
③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지혜.
§(282) 진심(瞋心)을 내지 말자 / 안세고 스님의 일화 / 불법(佛法)은 ‘한 생각 다스리는 데 있다’ / (게송)모탄거해수~ / 마음속에 대혁명.
〇진심을 냄으로 해서, 죽어서 뱀이 되고 독사가 되고 구렁이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서 이 진심을 내는 그 찰나에 이 사람 몸뚱이를 하고 있으면서 바로 독사가 되고 구렁이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옷을 입고 향수를 바르고 연지곤지 찍어서 이쁘게 해서 남으로 하여금 이쁘게 보일라구 노력을 하면서,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 가지고 어찌 구렁이 · 독사 취급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〇성이 날 그 '한 생각' 탁 치밀어 오를 때, 그놈을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서 그 성나는 마음을 돌려 가지고 화두를 들어.
〇불법(佛法), 부처님 법이 좋은 줄을 알지만 우리가 생활 속에서 실지로 어떻게 그 불법을 우리 몸에 구현시켜 나가느냐? 이건 활구참선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한 생각' 잘못 해 가지고 무량겁을 윤회하기 보다는 그 '한 생각' 잘 돌이키면은 해탈도를 증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 (용282)
(1) 약 22분.
(2) 약 6분.
(1)-------------------
그러께는 ‘진심(瞋心)을 내지 말자’ 그해에 ‘진심을 내지 말자’ 이렇게 말씀을 했고.
작년에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진심(瞋心)을 내게도 하지 말자’ 물론 자기 자신도 진심을 안 내야겠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성내도록도 하지를 말자. 이러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금년에는 여러분에게 그 진심(瞋心) 나는 거, 어떻게 하면 진심을 안 내고 어떻게 하면은 남도 진심을 안 나게 할 수가 있을까?
사람이 살다 보면은 억울한 소리를 듣고,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니까 진심이 나는 경우가 있고, 또 내가 억울하고 그러면은 남에게도 또 한마디씩 할 수가 있는데, 하면 남도 진심을 나기 마련이고 그렇게 저렇게 그렇게 하다 또 풀어지고 또 성을 냈다가 풀어지고 가까운 사람일수록에 그러한 크고 작은 접촉과 알력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그것이 인생살이가 아니겠느냐?
이렇게 생각해 보면 또 뭐 성 좀 내는 것도 무방하다 할 수가 있겠지만, 이 '성낸다'고 하는 것이 얼마만큼 참 무서운 것이며 중대한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 한 일화를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중국 한나라 시대에 그 무렵인데 안식국(安息國)이란 나라가 인도 근처에 안식국이란 나라가 있었는데, 그 안식국에 세자(世子)가 있었는데 그 세자의 이름은 안세고(安世高)라 했습니다.
그 안세고는 안식국에 세자였었는데, 자기가 응당 왕위를 물려받아서 임금이 될 것인데, 자기가 왕이 되지 아니하고 숙부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 드리고서 자기는 출가를 했습니다. 출가를 해 가지고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다 섭렵(涉獵)을 해서 널리 공부를 해 가지고 큰 학승(學僧)이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동남아 일대를 불법을 널리 포교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중국에 인연이 있어서 그때는 중국은 한나라 시대인데, 한나라 건화 4년에 중국으로 들어와 가지고 이 낙양(洛陽)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침 난리(亂離)가 나 가지고 배를 타고서 노산이라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노산에 이르러 가지고 그 강변에 당집이 하나 있어서 그 당집에서 하룻밤을 쉬게 되었습니다.
난리가 일어났으니 정식으로 어디 절을 찾아가기도 어렵고 그래서 우선 당집을 들어가서 자는데, 그 묘당(廟堂)에 자고 있는데 그 묘신(廟神)이 ‘이 주변은 내가 관할하는 지역인데, 나는 전생에 당신하고 같이 도를 닦던 도반이여. 그런데 내가 파계(破戒)를 하고 진심(瞋心)을 낸 과보로 해서 이렇게 이런 추악한 몸뚱이를 받아 가지고, 그래도 이런 추악한 몸뚱이는 받았지마는 그래도 전생에 도를 닦은 그 인연으로 해서 내가 이 몇백 리 안통에를 갖다가 다스리는 아주 두목이 되었다’
그래서 '대관절 니가 무슨 추악한 몸뚱이를 받았느냐? 어디 그 몸뚱이를 좀 보여줄 수가 있느냐?'
‘내가 그 전체를 보여 줄 수는 없고 내 몸뚱이 일부를 보여주마’
보여 주는데 수십 미터가 되는 큰 대명이여. '대명이'라 하는 것은 구렁이라. 얼룩덜룩해 가지고 참 무서운 그런 구렁이 몸뚱이를 하고 있어.
그래서 보여주면서 ‘내가 이렇게 이런 몸뚱이를 받아 가지고 이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그 비늘 속에 가서 온갖 수천 마리의 균과 벌레가 득실거려 가지고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고 답답하고, 함부로 어디 나가자니 사람 눈에 띄면 까딱하면 죽일라고 그러고. 그래서 이 괴롭기가 말로써 형언할 수가 없어. 지옥고(地獄苦)가 얼마나 괴로운가는 몰라도 세상에 이보다 더 괴로울 수가 있겠느냐?
이 당집 안에는 많은 비단도 있고 금은 보배 많은 보물과 구슬이 있으니까 이걸 갖다가 팔아서 그 돈을 가지고 여기다가 절을 하나 지어다오. 그러면은 그 인연으로 내가 이 구렁이 몸을 벗고 천당에 가서 태어날 수가 있으니 그렇게 해다오’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이 깨어나 가지고 그 작관을 하면서 경을 읽고 축원을 했습니다.
그리고서 그 후에 묘당에 있는 많은 비단 피륙과 여러 가지 보물을 갖다가 팔아서 그래 가지고 거기다가 절을 지었는데, 그 절 이름이 대안사(大安寺)라 해 가지고 지금도 그 대안사라고 중국에 유명한 절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날 저녁에, 낙성(落成)을 한 그날 저녁에 소년, 아주 잘생긴 소년 하나가 떡 나타나더니 ‘스님의 덕택으로 내가 이 추악한 몸뚱이를 벗고서 좋은 곳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떠난 꿈을 꾸었는데, 그리고 난 뒤에 보니까 그 큰 강에 수십 미터 되는 구렁이가 죽어 가지고 썩어서 떠내려가는 것을 많은 사람이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진심(瞋心)을 내서, 그렇게 도를 잘 닦던 그런 스님도 진심을 낸 그 과보로 해서 그런 무서운 몸뚱이를 받은 한 일화입니다마는. 또 홍도 비구도 역시 진심을 내 가지고 그런 무서운 독사의 몸을 받았던 일화도 있고, 지금 이 안세고 스님의 전생에 도반도 진심을 내가지고 이런 무서운 구렁이 몸을 받아 가지고 한 그런 일화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승속을 막론하고 진심을 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고 중대한 일인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심도 내 버릇하면 그것도 질이 나서 자꾸 더 진심이 더 나게 되는 것입니다. 진심을 내는 것은 내가 내 스스로 내는 것도 좋지 않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진심을 내게 하는 죄도 또한 무서운 것입니다.
진심(瞋心)이라 하는 것은 그 진심을 냄으로 해서 여러 가지 일을 다 파탄으로 이끌게 되고 원수를 맺게 되고, 자기 자신 살아 있는 이 몸뚱이로—죽어서 뱀이 되고 독사가 되고 구렁이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서 이 진심을 내는 그 찰나에 이 사람 몸뚱이를 하고 있으면서 바로 독사가 되고 구렁이가 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러는 것입니다. 진심 낼 그 찰나에 '사람독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심을 내면 모든 사람이 다 싫어하는 것입니다. 왜 싫어하냐 하면, 누가 구렁이나 독사를 보고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까?
진심을 낸 사람을 사람들이 보고 싫어하기를 마치 구렁이나 독사처럼 보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부부간도 그렇고, 부모 자식 간에도 그렇고, 형제간에도 그렇고, 친구 간에도 그렇고, 직장에 상관이나 모든 사람이 다 진심을 내면 모두가 다 진심 내는 사람을 구렁이처럼 독사처럼 다 보기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좋은 옷을 입고 향수를 바르고 연지곤지 찍어서 이쁘게 해서 남으로 하여금 이쁘게 보일라구 노력을 하면서, '한 생각' 단속을 잘 못해 가지고 어찌 구렁이 · 독사 취급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그러니 이 진심(瞋心)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속에서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도 꽉 참고서 이를 악물고 그놈을 억지로, 대소변 내려온 것을 억지로 참듯이 이것도 억지로 참어야 하느냐?
경우에 따라서는 잠깐 참어야 할 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마는 이 진심(瞋心)이라 하는 것은 참고 또 참고 계속 한번 참고, 두 번 참고, 세 번 네 번 참고 또 참고 하다 보면 그놈이 속에 쌓이고 쌓이고 해 가지고, 언젠가는 참다 참다 못 참으면 폭발할 때에는 무서운 탄력을 가지고 폭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참으면 그것이 썩 좋은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이 있지만, ‘억지로 무엇을 참는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사람은, 정말 수행을 올바르게 해 가는 활구 참선객은 억지로 참는 것으로써 능사(能事)를 삼을 것이 아니라,
그 일어나는 성이 날 그 '한 생각' 탁! 치밀어 오를 때, 그놈을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서 그 성나는 마음을 돌려 가지고 화두를 들어.
성나는 생각을 누르지 말고 그놈을 돌리라 그말이거든. 돌려서 화두(話頭)를 든다면 그 성나는 생각이 화두 드는 마음으로 승화(昇華)를 하게 된다 그말이여.
기운이 왕성해서 넘쳐 가지고 싸우기를 좋아하고 때려 부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권투선수를 만들면, 그래 가지고 권투를 잘 가리켜서 사각 링 위에서 싸우게 해서 그 넘치는 힘을 갖다가 링에서 싸우게 만들면 동양선수권도 찾게 되고 세계선수권도 찾아서 돈도 많이 벌고 국위도 선양을 하게 된다 그말이여.
그놈을 그러한 권투 선수로 인도를 하지 아니하고 그냥 놔두면 닥치는 대로 사람을 뚜드려 패고 때려 부수고 싸움을 하고 하면은 갈 곳이 어디냐 그말이여. 폭행죄로 때로는 살인죄로 평생을 감옥을 제 집으로 삼고 드나들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말이여.
우리 중생은 지가 생각을 냈다 하면은 탐심(貪心)이요, 그렇지 않으면 진심(瞋心)이요, 그렇지 않으면 치심(痴心)일 것이다 그말이여. 무량겁을 그렇게 업(業)을 지어왔기 때문에 별 수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진심 아니면 치심이요, 그렇지 않으면 탐심이지, 지가 무슨 생각이 날거냐 그말이여.
다행이 우리는 부처님을 만나고 불법을 만났기 때문에 그 일어나는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을 갖다가 턱! 돌이켜서 삼학도(三學道)로 승화시키는. 해탈, 그래 가지고 해탈도를 얻게 해 주셨다 그말이여.
불법(佛法), 부처님 법이 좋은 줄을 알지만 우리가 생활 속에서 실지로 어떻게 그 불법을 우리 몸에 구현시켜 나가느냐? 이건 활구참선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장소도 따로 찾을 것이 없고, 시간도 따로 찾을 것이 없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눈으로 무엇을 볼 때나, 귀로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도 그 일어나는 생각을 즉각 돌이켜서 화두를 들어 나가.
특히 그 성내는 마음, 노여운 마음, 그 진심(瞋心) 탁 일어나자마자, 일어나려구 속에서 살짝 이렇게 꿈틀거리려고 할 때—이미 그놈이 터져 나온 다음에는 수습하기가 힘이 드니까—처음에 일어날라고 할 그 찰나(刹那)는 아직 남도 눈치채기도 전에, 밖으로 나타나기 전에 저 속에서 한 생각 일어나려고 하는 바로 그 찰나에 떠억 심호흡을 해. 숨을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서 그 생각을 돌이킨다면 그거 이 독사가 되기 이전에 바로 깨달음으로 한 걸음 성큼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잘못 해 가지고 무량겁을 윤회하기보다는 그 '한 생각' 잘 돌이키면은 해탈도를 증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해에 내가 각별히 당부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성내는 마음 돌이키는 것이 매우 어려워. 그 생각을 돌이키는데, 비단 성내는 마음을 돌이킬 줄 아는 사람, 성내는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밖에 무슨 생각, 다른 생각이야 뭐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가장 돌이키기 어려운 생각이 그 성내는 마음이요 또 탐내는 마음이요, 어리석은 마음이지만 그 가운데서 유독 그 중대한 것은 이 성내는 마음이거든. 그 성내는 마음을 돌이켜 버릇하면 그밖에 다른 생각은 문제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므로써 나도 성을 내지 아니하고, 남도 성을 내지 아니한다면은 한 가족이 화평(和平)을 얻을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공연히 한 생각 풀쑥 잘못해 가지고 상대방 기분을 쑤셔 놔 가지고, 쑤셔놓으면 상대방에서는 더 고약한 소리를 해서 나는 더 갑절로 또 충격을 받게 되고,
이렇게 한 것이 결국은 아침에 그런 일이 있어 가지고 직장에 나가면 직장에 가서 공연히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또 부애풀이를 하게 되고, 그래서 직장에서 그러면 또 집에 오면... 이래서 1년 열두 달 항상 그러한 일이 되풀이된다면 그 죄를 어떻다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언제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 생각 다스리는 데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바이니.
금년 새해에도 이 한 생각을 잘 다스려 나가셔 가지고 모든 재앙은 미연에 다 방지해 버리고 그리고 1년 내내 신심과 환희심과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단속해 나가신다면 정말 여러분은 가정에서는 행복을 성취하실 것이고, 도문(道門)에서는 해탈도를 증득을 하셔서 온 세계에 평화에 광명을 여러분은 선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27분48초~49분25초)
(2)-------------------
모탄거해수(毛呑巨海水)하고 개자납수미(芥子納須彌)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벽한일륜월(碧漢一輪月)이 청광육합휘(淸光六合輝)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모탄거해수(毛呑巨海水)하고 개자납수미(芥子納須彌)여.
조그마한 터럭이 저 큰 바닷물을 다 삼켜버리고, 쬐그만 겨자씨가 수미산(須彌山)을 갖다가 삼켜버린다. 그 어마어마한 큰 수미산이 겨자씨 속으로 다 들어가 버려. 겨자씨 속에 다 받아들인다 그말이여.
벽한일륜월(碧漢一輪月)이 청광육합휘(淸光六合輝)여.
저 푸른 하늘에 조그마한 한 달이 육합(六合), 오대양 육대주를 갖다가 맑게 비춘다 그말이여.
우리의 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생각들이여.
자잘구레한 희로애락과 오욕락(五慾樂)과 탐진치, 그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우리가 이 수없이 되풀이해 온 우리의 그 많은 생각들, 그 참 쇠털같이 많은 숫자고 그 보잘것없는 것들이지만 그 한 터럭 그 겨자씨만도 못한 그런 조그만한 생각이지만,
그놈이 어떠한 우리의 마음속에 대혁명이 일어나 버리면 그 한 터럭이 저 끝없는 바닷물을 다 둘러 마실 수가 있고, 그 큰 수미산 둥치도 다 집어삼킬 수가 있고, 이 육도법계(六途法界)와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도 다 줏어 삼켜 버릴 수가 있습니다.
마치 허공에 저 한 조각 달이 온 세계를 밝게 비출 수 있듯이 우리는 그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되어가지고 더이상 클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懇切)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르면 그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금년 한 해는 우리 모두가 그러한 결의를 가지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전진(勇猛精進)을 해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성취하는 해로 삼고자 합니다.(49분26초~55분6초)(끝)
*안식국(安息國) ; 기원전 250년경부터 기원후 220년경까지 지금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있던 고대 국가.
*안세고(安世高) ; 안식국(安息國)의 태자. 이름은 청(淸), 세고(世高)는 자(字). 부왕이 죽자, 왕위를 숙부에게 주고 출가함.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146-167) 초에 중국의 낙양(洛陽)에 와서 20여 년 동안 칠처삼관경(七處三觀經) · 보법의경(普法義經) · 인본욕생경(人本欲生經) ·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 음지입경(陰持入經) · 아비담오법경(阿毘曇五法經) · 도지경(道地經) 등 55부 60권을 번역함.
*삼장(三藏) ;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세 가지 불서(佛書)를 통틀어 이르는 말.
*섭렵(涉獵 건널·섭렵할 섭/찾을·사냥할 렵) ; 물을 건너[涉] 찾아다닌다[獵]는 뜻으로,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거나 다양한 경험을 쌓음을 이르는 말.
*당집 ; [민속] 신을 모셔 놓고 받들어 위하는 집.
*묘당(廟堂) ; 조상의 혼백을 모시거나 그 밖의 여러 신을 모신 당우(堂宇). 묘(廟), 묘우(廟宇)라고도 한다.
*피륙 ; 아직 끊지 아니한 베나 무명, 비단 따위의 천을 통틀어 이르는 말.
*안통 ; 안쪽(안으로 향한 부분이나 안에 있는 부분).
*낙성(落成) ; 건축물을 완성하여 공사를 끝냄.
*울화통(鬱火통) ; [주로 ‘치밀다’나 ‘터지다’, ‘터뜨리다’ 등과 함께 쓰여]몹시 답답하거나 분한 마음이 쌓이고 쌓인 것. ‘울화(鬱火)’를 강조하여 이르는 말이다.
*육바라밀(六波羅蜜) ;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 pāramitā의 음사로, 도피안(到彼岸)·도(度)·도무극(度無極)이라 번역.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감, 완전한 성취, 완성, 수행의 완성, 최상을 뜻함.
보살이 이루어야 할 여섯 가지 완전한 성취.
①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보시를 완전하게 성취함. 보시의 완성.
②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계율을 완전하게 지킴. 지계의 완성.
③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인욕을 완전하게 성취함. 인욕의 완성.
④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완전한 정진. 정진의 완성.
⑤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완전한 선정. 선정의 완성.
⑥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를 성취함. 지혜의 완성.
*인욕(忍辱) : [범] Ksanti 욕되는 것을 견디어 참는 것이다。여섯 가지 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하나. 무슨 곤란이나 역경을 당하더라도, 남을 원망하거나 성내거나 그 고통과 곤란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즐겁게 받아야 한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능사(能事) ; [주로 ‘아니다’, ‘알다’, ‘생각하다’, ‘여기다’ 따위와 함께 쓰여]잘하는 일. 또는 쉽게 잘 해낼 수 있는 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승화(昇華) ; 어떤 현상이 한 단계 더 높은 영역으로 발전함.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삼학(三學) ; 깨달음에 이르려는 자가 반드시 닦아야 할 세 가지 수행.
삼증상학(三增上學)·삼승학(三勝學)이라고도 하는데, 즉 계학(戒學)·정학(定學)·혜학(慧學)의 세 가지를 말한다. 이것을 증상(增上: 탁월하다는 뜻)계학·증상심학(心學)·증상혜학 또는 줄여서 계·정·혜라고도 한다.
①계는 악을 저지르지 않고 선을 닦는 계율(戒律), ②정은 심신을 고요히 하고 정신통일을 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하는 선정(禪定), ③혜는 번뇌를 파하고 진리를 증득(證得)하는 지혜를 가리킨다.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ṣ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윤회(輪廻) :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勢力)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오직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서로 연쇄 관계(連鎖關係)를 지어 가면서 변하여 갈 뿐이다。마치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물•수증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돌아다니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의 업식(業識)도 육체가 분해될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들은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쉴 새 없이 번민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을 따라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천상 또는 다시 인간으로 수레바퀴 돌듯 돌아다니게 된다。그러나 성품을 깨쳐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가 없게 되면 윤회는 끊어지는 것이다.
*부애풀이 ; 부아풀이. 분하고 노여운 마음을 푼다는 뜻으로, 엉뚱하게 다른 사람이나 딴 일에 화를 냄을 이르는 말.
*도문(道門) ; ①도에 이르는 문. 부처님의 가르침. ②불문(佛門). 부처님의 법문(法門). 불교(佛敎)라는 문.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어서는 문. 깨달음으로 들어서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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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모탄거해수~’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수미산(須彌山) : [범] Sumeru-parvata 또는 수미루(須彌樓•修迷樓)•소미로(蘇迷盧) 줄여서 미로(迷盧), 번역하여 묘고(妙高)•묘광(妙光)•안명(安明)•선적(善積)•사주세계의 중앙.
금륜(金輪) 위에 우뚝 솟은 높은 산. 둘레에 7산 8해(海)가 있고 또 그 밖에 철위산이 둘려 있어 물 속에 잠긴 것이 팔만 유순, 물 위에 드러난 것이 팔만 유순이며, 꼭대기는 제석천, 중턱은 사왕천의 주처(住處)라 한다.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산.
*육합(六合) ; 천지와 사방을 통틀어 이르는 말. 곧, 하늘과 땅, 동ㆍ서ㆍ남ㆍ북이다.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 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 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을 이른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321) 몸과 마음의 어떠한 경계(境界)에도 속지 말고 바로 화두로 돌이켜라 / 흥망성쇠, 희로애락 한 장면 한 장면이 바로 부처님과 선지식의 법문.
〇도 닦는 사람이 가장 경계(警戒)하고 두려워할 것은 속지 않는 것입니다. 바깥 경계에 속지 않는 것은 그래도 쉬운데, 정말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는 거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〇최상승법을 믿는 도학자는 산중에서 도를 닦건, 세간에서 도를 닦건, 슬픈 일을 당하면 바로 그 슬픈 일 자체가 나로 돌아오는 발판이요, 기분 나쁜 일을 당해도 기분 나쁜 그 일로 해서 오랫동안 그러한 경계에 묶여 있지를 않고 퍼뜩 화두를 들고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321) — 1987년 2월 첫째 일요법회(87.02.01) (용321)
(1) 약 20분.
(2) 약 9분.
(1)------------------
해마다 새해가 돌아오면 무엇인가 그 일 년 동안 항상 마음에 명심하고 그것을 하나의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아서 자기에 그 채찍을 삼고 자기를 다스려 나가는 말씀을 한마디씩을 했었습니다.
저지난해에는 ‘스스로 성내지 말아라’ 이런 말씀도 했고, 또 그다음에는 ‘남을 성나게 하지 말아라’ 이런 말도 했고.
그런데 금년에는 '속지 말아라. 경계(境界)에 속지 말아라'
우리는 항상 명심을 해서 도(道)를 닦을라고 그러고 부처님을 믿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깜박한 사이에 경계에 속고 마는 것입니다.
경계라고 하는 것은 외경(外境)도 있고 내경(內境)도 있는데, 밖에 모든 사람이나 사물에 그것에 내가 속는 것입니다. 그 속아 가지고 진심(瞋心)을 내기도 하고 또 원망하기도 하고 또 미워하기도 하고, 그래가지고 성을 내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 밖에 있는 모든 경계는 그 원인이 까닭 없이 밖에서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잘 관찰을 해 보면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기와 관계되는 사건이, 인연이 전부 자기로부터서 자기라고 하는 뿌리로부터서 뻗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자기한테 있는 것이지, 나타나기는 밖에 나타났지마는 그 원인의 뿌리는 자기한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중심을 잃어버리면 항상 속는 것입니다.
우리 도(道)를 닦는 사람이 '중심을 잃었다'고 하는 것은 화두(話頭)를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화두를 놓쳐버리면 보는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듣는 것이 제대로 들리지를 않고, 생각하는 것이 제대로 생각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 하나를 바로 거각(擧却)을 하고 바로 관조(觀照)를 할 줄 안다면 언제나 중심이 잡혀 있기 때문에 밖에 어떠한 사태가 벌어지고 어떠한 일이 자기에게 충격을 준다 하더라도 그 경계에 속지를 않는 것입니다.
도 닦는 사람이 가장 경계(警戒)하고 두려워할 것은 속지 않는 것입니다.
바깥 경계에 속지 않는 것은 그래도 쉬운데, 정말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는 거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열심히 수행을 하다보면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독로(獨露)하게 되고, 망상(妄想)을 없앨라고 하지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없어져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하고 화두가 독로하는 그런 경계를 만나게 되는데,
거기에서 밖에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시끄러운 줄을 모르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마저도 전혀 느끼지를 않는, 고요하고 편안하고 맑고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신기로운 그러한 경지를 맛보게 되는 것인데, 그럴 때에 자기에게 속는 것입니다.
‘아! 바로 이것이 참 경계로구나. 이러한 상태로 영원히 있었으면. 이럴 때 누가 나를 깨닫게 해 주지 아니할까. 어서 여기서 툭 터졌으면’ 이러한 생각들이 바로 경계에 속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가 독로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 끊어져서 순일무잡한 경계가 온다 하더라도 좋다고 하는 생각을 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물론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고, 혼침(昏沈)이 일어나고 가슴이 답답하고 모다 그래도 짜증을 내서는 아니된 것처럼, 경계가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순일무잡한 경지가 온다 하더라도 깨달음을 기다리거나, 빨리 깨닫기를 바래거나, '하! 좋다'고 하는 생각을 낸 것, 이것도 또한 경계에 속는 것입니다.
세속에서는 희로애락(喜怒哀樂)—기뻐하지 아니하면 성내고, 성내지 아니하면은 슬퍼하고, 슬퍼하지 아니하면 즐거워하고, 희로애락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또 흥망성쇠(興亡盛衰), 지금 한참 모든 일이 잘 되어가지 아니하면은, 또 모든 일이 또 여의치 못하고, 흥망성쇠 이게 잠시도 고대로 있지를 않는 것입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 모다 이러한 상황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러한 상황에 나도 계속해서 마음이 말려들어 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미워했다가, 때로는 원망했다가, 때로는 저주하고, 때로는 불평불만을 하고, 때로는 근심 걱정을 하고, 이러는 가운데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일평생 동안을 그렇게 살다가 결국은 한(恨)을 남긴 채 숨을 거두게 되는데, 다행히 이 불법을 만나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참선법을 아는 사람은 뭔 일이 내 뜻대로 되어도 우쭐대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화두를 들고, 뭔 일이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을 당해도 근심을 하고 성내기 대신 바로 화두를 들고.
바로 흥망성쇠와 희로애락 그 한 장면 한 장면이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요,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이요, 그것이 바로 참나로 돌아오는 수도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승법을 믿는 도학자는 산중에서 도를 닦건, 세간에서 도를 닦건, 슬픈 일을 당하면 바로 그 슬픈 일 자체가 나로 돌아오는 발판이요, 기분 나쁜 일을 당해도 기분 나쁜 그 일로 해서 오랫동안 그러한 경계에 묶여 있지를 않고 퍼뜩 화두를 들고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제 어떤 손님이 오셔서 변비증이 심하고, 또 삼백육십 골절이 마디마디 아프고, 또 기억력이 다 없어지고 그런다는 말씀을 호소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 드렸습니다.
몸에 육체는 나서 늙어서 병들어 가는 그 생로병사의 단계를 거쳐서 결국은 백년 미만에 이 몸뚱이를 버리고서 다시 새 몸을 받기 위해서 떠나는데, 그동안에라도 우리는 몸이 건강하기를 다 바랩니다.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거두어도 그래서 건강하다 하더라도 그래도 백년을 못 넘기고 다 가게 되는데, 그래도 사는 동안에는 건강을 해야지요.
어떻게 하면 건강하냐 하면, 첫째는 대소변을 잘 배설을 해야 합니다. 잘 먹어야 한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배설을 잘하는 것은 먹는 것보단 몇십 배가 더 중요합니다.
먹기만 잘 먹고 배설을 못하면 그 건강이 유지가 되지 않고, 그건 참 집안에서도 하수구가 맥혀서 고장이 난다든지, 또 화장실의 변기가 막혀서 안 나간다면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뭐 밥 한 끼니 두 끼니 굶어서는 별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수구가 막혀서 주방에 구정물이 나가지 않는다면 그거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변기가 막혀서 안 나간다면 그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의 대소변리(大小便利)가 잘 배설이 되지 아니하면 건강에 큰 소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게 인자 의학적으로 여러 가지로 그것이 다 설명을 할 수가 있을 것이고, 여러분은 설명을 하지 아니해도 잘 아실 것입니다.
대변을 눌 때 매일매일 배설을 하지 아니하고 이틀 삼일 이렇게 못 누게 되면, 그 처음에 영양을 섭취하고 그다음에는 그래도 안 나가면은 수분을 섭취하고, 그래도 안 나가면 대소변 속에 있는 독소까지 계속해서 흡입을 해 가지고 그 흡입된 그 독소는 혈관으로 몸으로 해서 전부 몸을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비가 있는 분은 결국은 몸이 무겁고 골치가 아프고 삭신이 아프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삭신만 아픈 게 아니라 오장육부에 독소가 다 돌고 돌기 때문에 오장육부에 전부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진대사(新陳代謝)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데, 활발하게 유지해 나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음식물, 그런 육체적인 물질적인 신진대사만 필요하냐 하면 우리 정신적인 것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기쁜 생각이 되었건, 성내는 생각이 되었건, 슬픈 생각이 되었건,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러한 생각에 오래 묶여 있으면, 그런 생각이 오랫동안 우리 마음속에 있어 가지고 없어지지 아니하면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성을 내고 있으면 그거 심장도 나빠지고 소화도 안 되고, 계속 아침부터서 성내는 일만 당하고 속에서 그 성내는 마음이 풀어지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얼굴빛이 대번에 아무리 원래 이쁘게 생긴 얼굴도 매일매일 성내 갖고 있다면 그 얼굴은 주름살이 생기고, 눈과 눈 사이에 ‘내 천(川)’자가 생기고, 눈에는 독사와 같은 독기(毒氣)와 살기(殺氣)가 풍기게 될 것입니다.
슬픈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슬픔에 잠겨 있다면 혈액순환도 잘 안될 것이고, 몸의 건강도 나빠질 것이고, 정신적인 것도 의기(意氣)가 소침(消沈)이 되고, 백병(百病)이 다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기쁜 것, 세속에도 기쁘면 참 좋은 것같이 생각이 되지만, 기쁨도 적당하니 기뻐야지 기쁜 것이 지나치면은 그것도 사람이 기절을 해서 죽기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영양이 있는 거라고 해서 많이 먹으면 좋을 거 같지마는 그것도 과잉섭취를 하면 당뇨병이 생기고 여러 가지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쁨도 역시 슬픔이나 성내는 것이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이 파랑 불이나 노랑 불이나 빨강 불이나 다 전깃불인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감정 그런 것은 지나치게 그런 감정에 사로잡힌 것은 우리의 정신위생을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낮 성내고 있다든지, 밤낮 슬퍼하고 있다든지 감정에 오랫동안 언짢은, 특히 그 원망하는 마음이 속에 항상 마음속에 있다든지, 남을 미워하는 생각이 항상 가슴속에 있어 가지고 없어지지 않는다든지, 그러면 결국은 남을 저주하게 됩니다.
남을 저주하게 되면 물론 상대방에게도 안 좋지마는, 상대방을 망하기를 바라고 상대방을 미워하고 하면 먼저 자기 먼저 안 좋은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안 좋기 때문에 그런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저주하는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잠깐 일어난다 하더라도 바로 그 생각을 돌려서 없애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선 자기가 그 독에 중독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대변 소변이 오랫동안 체내에 머물러서 배설이 아니되면 병이 난 것 몇백 배 해로운 것이 성내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 슬픈 마음, 저주하는 마음, 불평불만하는 마음, 이런 부정적인 이러한 생각들이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것은 우선 자기의 정신 상태도 안 좋지마는, 자기 건강을 해롭게 하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운명을 어찌해 볼 수 없는 그러한 구렁텅이로 몰고 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서 들어오는 어떠한 경계를 보고 속지를 말어.
속지를 말고서 바로!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터억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서 일 초 동안에 그것을 흩어 버려야 돼.
음식은 어느 시간만큼 위장에서 십이지장으로 소장으로 대장으로 그리 내려가면서 적당한 시간 동안 체내에 머물러 있어야 영양을 섭취하지요. 먹자마자 밑으로 흘러 내려간다면은 밤낮 설사만 하다가 영양실조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오랫동안 가지고 있으면은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 화두를 돌이켜서 깨달음으로 향하는 생각으로 돌이켜야지, 좋은 생각이나 기쁜 생각이나 슬픈 생각이나 성나는 생각, 심지어 원망하고 저주하는 생각은 자체가 그런 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하면사 좋지만, 우리는 무량겁을 지어온 업(業)이 있기 때문에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육창(六窓)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를 말고 바로 화두로 돌이켜라 그거거든.(11분50초~31분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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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생각을 억지로 참고, 성내는 마음을 억지로 참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억지로 참으면 임시 그 자리는 보류가 되겠지만 그 속에서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이고 해 가지고 오랫동안 쌓이게 되면 결국은 그놈이 일시에 폭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소! 참어! 참는 것이 약이네'
그리 나는 참기를 별로 권하지를 않고 돌리라고 그럽니다.
탁! 돌이켜. 돌이켜서 화두로 돌이켜 버리고 그래서 아무것도 우리의 마음속에 쌓여 있는 것이 없도록 그때그때 돌려서 풀어서 어떠한 종류의 생각도 바로 이 화두를 드는 밑거름으로 삼어라 이거거든.
그래서 처음에는 어렵지만 자꾸 해 버릇하면 그것도 길이 나서 습관이 되어 가지고, 주먹 같은 놈이 치밀어 오르다가도 탁!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해 버리면 스르르르르 녹아져서 없어져 버리거든. 이건 경험을 해 보신 분은 누구든 아실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불행한 자기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고, 고약한 성격을 아주 훌륭한 성격으로 개선을 하신 분도 참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경계에 속지 말고 바로 자기로 돌아오라.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염기불파(念起不怕)하고 유공각지(唯恐覺遲)라. 생각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각(覺) 더딘 것을 두려워하라'
이 각(覺) 더디다고 하는—'각(覺), 빨리 깨닫도록 해라'하는 게 ‘빨리 화두로 돌이켜라’ 그말이거든.
깨달은 사람은 대원각지(大圓覺智), 크고 뚜렷하게 깨달은 그 지혜가 낭연독존(朗然獨存)을 하도록 항상 그렇게 인자 다스려 나가겠지만.
우리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떤 것이 깨달은 경계인가를 모르는 우리로서는 화두를 드는 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돌아가는 첩경이니까 그렇게 화두를 자꾸 들면, 하근(下根)이 자꾸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상근(上根)이 되어 가는 거고.
서커스단에 그 묘기라든지, 올림픽 때에 체조하는 그 선수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어렵게 어렵게 부축을 받으면서 스폰지 위에서 수백 번, 수천 번을 되풀이해서 하면서 결국은 그러한 묘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뭣고?’야 무슨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고.
자꾸 생각은, 끊임없이 참선할 수 있는 계기는 자동으로 우리는 무진장 타고났으니까 그 계기를 놓치지 말고 그때그때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든다 말이여.
해 보면 '세상에 이렇게 좋은 것이 어디가 있는가?'
해 보기 전에는 ‘아이구! 그거 어려워서 상근대지(上根大智)나 하지 우리 업보중생(業報衆生)은 그런 거 해 봤자 어려울 거다’ 전부 다 해 보지도 않고 그런 생각들을 합니다마는, 해 보면 '이렇게 간단하고, 이렇게 쉬웁고, 정말 이렇게 신기하고도 묘한 것은 없구나' 그런 것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활을 해 나가는 데 항상 모든 것을 밝은 면을 볼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보는 방향에 따라서는 어두운 면도 있고 밝은 면도 있습니다. 똑같은 일 하나를 놔 놓고도 어떤 사람은 '잘했다' 그러고, 어떤 사람은 '못했다' 그러고, 어떤 사람은 '좋다' 그러고, 어떤 사람은 '좋지 않다'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밝은 면을 볼려고 노력을 하면 모든 것이 다 좋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운명을 밝게 운명을 열어가고자 하면 모든 것을—사람이 되었건, 어떠한 사건이 되었건, 어떤 물건이 되었건 무엇이든지 밝은 면으로 보도록 그렇게 습관을 들이십시오. 그러면 자기 운명이 밝아지는 것이여.
똑같은 일을 가지고 놓고도 그것을 어두운 쪽으로만 보고 비관적으로만 보고 그러면 점점 그 사람 운수 팔자는 점점 어두운 데로만 열려 나가는 것입니다.
밝은 쪽으로 볼려고 노력을 하고, 낙관적으로 모든 것을 볼려고 노력을 하고, 그러면 성격도 차츰 밝아지고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생기고, 자기 마음도 편안하고 또 모든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밝아짐으로 해서 얼굴도 밝아지고, 모든 생각이 밝기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말들도 모두가 밝고 명랑하고 희망적인 말이 입에서 흘러나오고, 행동도 역시 보람을 느끼게 되고.
남에게 그 사람을 보면은 용기가 나고, 부애 났던 생각도 그 사람하고 얘기를 좀 하다보면 그 부애 나는 것이 다 없어지게 되고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한테서는 항상 향내가 풍기게 되고 앞뒤에서 봐도 멋이 줄줄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정신 그리고 우리의 운명을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불행과 암흑으로 나를 끌고 가느냐, 행복과 희망으로 우리를 끌고 가느냐는 그 한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게 밝게 시원하게, 그리고 보람 있게 지혜롭게 우리의 생각을 가져 나가면서 어떠한 일을 보거나 어떠한 소리를 듣거나 무슨 생각을 느낄 때라도 항상 화두 ‘이뭣고?’ 이리 돌이키면서 산다면,
우리는 너무너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다행스럽고, 나에게는 얼마든지 풍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하는 것을 새록새록 느끼게 될 것입니다.(31분56초~40분25초)
*좌우명(座右銘 자리 좌/오른쪽 우/새길 명) ; 늘 자리[座] 옆[右]에 새겨[銘] 두고 가르침으로 삼는 말이나 문구.
*경계(境界) ; ①산스크리트어 viṣaya 구역을 나눈다(疆域分劃)는 뜻. 줄여서 경(境). 곧 감각기관[根] 및 인식작용[識]의 대상이나 인식이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 빈부귀천, 부모형제, 희로애락, 시비이해, 삼독오욕, 춘하추동, 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곧 인간은 경계 속에서 살고 있고, 경계가 삶의 내용이다.
②내용이나 각자의 능력 등이 분명한 한계지어진 범위 · 영역 등을 말한다. 부처님과 중생이 인지하는 능력의 범위가 구분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 ‘此佛境界 一切衆生 及諸菩薩 所不能知 이것은 부처님의 경계로 모든 중생과 보살들은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③금계(禁戒 부처님께서 제정한 나쁜 행위를 금하고 경계하는 계율)를 깨뜨리는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의 어떤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환경을 순경계(順境界), 자신의 마음에 어긋나서 마음이 언짢은 것을 역경계(逆境界)라고 한다. 경(境)에는 본래 차별이 없으나 중생의 마음이 미혹됨으로 말미암아 언짢거나 수순하는 구별이 있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진심(瞋心) ; 왈칵 성내는 마음.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〇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생로병사(生老病死) ; 중생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주요한 네 가지 현상. 출생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생(生), 노쇠하는 현상을 노(老), 병든 현상을 병(病),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현상을 사(死)라 한다.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의 일반적 형식으로서 사상(四相)이라고도 하고, 이것이 고통이기 때문에 사고(四苦)라고도 한다. 생로병사가 사라진 경계가 무위법(無爲法)인 열반(涅槃)이다.
삼라만상의 사상인 생주이멸(生住異滅)과 세계의 생성소멸 과정을 나타내는 성주괴공(成住壞空)도 동일한 형식이다.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생주이멸(生住異滅) ; 모든 사물이 생기고(生), 머물고(住), 변화하고(異), 소멸함(滅). 또는 그런 현상.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대소변리(大小便利 큰 대/작을 소/똥오줌 변/편리할 리) ; 대변(大便 '똥'을 점잖게 이르는 말)과 소변(小便 '오줌'을 점잖게 이르는 말). *便利(변리) : 똥, 오줌 따위를 무의식중에 배설함.
*삭신 ; 몸의 근육과 뼈마디.
*신진대사(新陳代謝 새 신/묵을 진/대신할·교체할 대/물러날 사) ; 생물체가 몸 밖으로부터 섭취한 영양물질을 몸 안에서 분해하고, 합성하여 생체 성분이나 생명 활동에 쓰는 물질이나 에너지를 생성하고 필요하지 않은 물질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작용. 물질대사(物質代謝)라고도 함.
*의기소침(意氣銷沈, 意氣消沈 뜻 의/기운 기/사라질 소/잠길가라앉을잃을 침) ; 의기(意氣 적극적으로 무슨 일을 하려는 마음이나 기개)가 사라지고[銷] 가라앉음[沈]. 기운이 없어지고 풀이 죽음.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〇업의 종류 ;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육창(六窓 여섯 육/창문 창) ; '육근(六根)'을 여섯 개의 창으로 비유한 것.
*육창일원(六窓一猿) ; 여섯 창문이 있는 집에 한 마리의 원숭이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이리저리 여섯 개의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다는 비유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육창(六窓)에 비유하고 심식(心識)을 한 마리의 원숭이에 비유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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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파염기(不怕念起) 유공각지(唯恐覺遲) ;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
[참고] 『마음 닦는 길(수심결 강의)』 (지눌 저,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14. 『수심결』 (지유선사 현토역해 | 도서출판 窓) p83~88 참고.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의 성품이 빈 것임을 알지 못하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눌러 조복하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하면서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문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 하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라고 하셨다.
다만 살생하고 도적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성품으로부터 일어난 것임을 자세히 관조한다면 일어남이 곧 일어남이 없는 것이라, 그 바탕이 고요한데 무엇을 다시 끊을 것인가. 그러므로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하셨고 또 ‘생각이 일어나거던 곧 깨달아라. 깨달으면 곧 없어진다’하셨다.
故 悟人分上 雖有客塵煩惱 俱成醍醐 但照惑無本 空華三界 如風卷煙 幻化六塵 如湯消氷
그러므로 깨친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록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있다 해도 그것은 다 제호를 이룬다. 다만 미혹(迷惑)이란 근본이 없는 것임을 관조하여 알면 허공의 꽃과 같은 삼계(三界)가 바람이 연기를 거둠과 같고, 꼭두각시와 같은 육진(六塵)이 마치 끓는 물에 녹는 얼음과 같을 것이다.
만일 이처럼 생각생각에 닦고 익히며, 마음을 관조하기를 잊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면, 곧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자연히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밝게 드러날 것이다. 죄업이 자연히 없어지고, 공덕이 절로 늘어나서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도 끊어질 것이다.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근본 무명, 근본 번뇌)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나투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응용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쾌락(快樂)해 근심이 없으리니, 이름하여 ‘크게 깨친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一O入九 ~ 一一六三) ‘答 汪內翰‘
〇先聖云 ’瞥起是病 不續是藥‘ ’不怕念起 唯恐覺遲‘
옛 성인이 이르시되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병이요, 계속되지 않는 것이 약이다’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
§(158) 참선에 있어서의 고황병이란 화두(話頭)를 의심(疑心)하지 않는 병 / 어떠한 길이건 순경계보다도 그 역경계에서 힘을 얻게 되는 것.
〇그 길이 어떠한 길이건 순경계보다도 그 역경계에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역경계가 없는 순탄하기만 한 길은 아무 매력도 없고 맛도 없고 재미도 없는 것이고, 또 비약적인 경계에도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목숨을 바치면서 인행(因行) 때의 수행을 거치셨고 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오셔가지고서도 12년간이라고 하는 피나는 고행(苦行)을 겪으시면서 도를 구하셨습니다.
**송담스님(No.158)—1982년 1월 첫째일요법회(82.01.03) (용158)
약 14분.
참선법(參禪法)에, 이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에 있어서 제일 무서운 병이 무엇이냐?
고황병(膏肓病)이라 하는 병인데, 고황병이라 하는 병은 한번 들어 버리면 천하 없는 명의도 이 병은 고칠 수가 없다. 이렇게 무서운 병인 것입니다.
'참선에 있어서의 고황병이란 화두(話頭)를 의심(疑心)하지 않는 병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두라는 것은 내가 결정코 타파(打破)해야만 할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타파하는 데 있어서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을 사용을 해서는 아니된다. 오직 그 화두에 대한 의심,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조(觀照)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화두를 의심을 하는데, 화두를 금방 들었는데 1분도 못 가서 딴생각[別念]이 들어와 버려. 또 화두를 '이뭣고?'하고 들면 불과 1분도 못 가서 딴생각이 들어와 버려. 딴생각이 들어온 줄 알면 다시 또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화두를 들어서 묵묵히 의심으로 관조하고.
앉아서 들었던 화두가 서면서 깜박 잊어 버리고, 금방 들었던 화두가 누가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그 찰나에 ”예“ 하면서 그 화두를 놓쳐 버리고.
그렇지만 끝까지 후퇴를 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해 나가면 나중에는 화두를 들려고 아니해도 제절로 화두가 들어져 있게 된 때가 꼭 오고만 마는 것입니다.
공부를 해 나갈 때 화두를 들면 잘 들리고, 들렸던 화두가 고대로 주욱 의심으로 관조가 되어 갈 때에는 머리도 개운하고 가슴도 시원하고 30분, 1시간이 어떻게 지나간 줄 모르게 휘딱 이렇게 지나가는데, 그리고 앉는 몸도 그렇게 편안하고 아무 부담이 없는데.
그렇게 잘 나가다가 뚝 변해 가지고 영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무겁고 시간이 5분, 10분이 그렇게 지루하고 몸뚱이가 그렇게 뒤틀리면서 지루하고 이렇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가슴은 답답하고.
이러할 때가 오는데, 이러할 때에 어떻게 이 고비를 넘겨야 하느냐? 이것이 우리 참선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중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境界)가 왔을 때 '아하! 내가 이 마장(魔障)이 이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를 말고, 그러한 경계가 왔을 때에는 '아! 내가 이 공부가 한 계단 올라서려는, 올라서기 위해서' 그러한 경계가 오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경계가 왔을 때 자세를 첫째,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서서히 부담없이 하면서 화두를 잘 들면 되는 것이고,
그리해도 그 가슴 답답하고 골이 아프고 지루하고 한 것이 잘 풀리지 아니하면 조용하게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가지고 포행(布行)을, 한 10m 내지 20m 직선으로 조용한 뜰이나 마당에 정해 놓고서 직선상으로 왔다갔다하면서 화두를 들고 또 그 화두를 들어서 관조하고 이렇게 5분 내지 10분을 하면 가슴이 좀 후련해지고 머리가 개운해지는 것입니다.
그때 또다시 자기 자리에 들어가서 또 가부좌(跏趺坐),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서 호흡을 고르면서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그러한 경계를 잘 고비를 넘기면 한결 공부가 수월하게 되어 질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는 마장이 붙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공부가 한 계단 올라서기 위해서 그러한 경계가 오는 것이라 하는 것을 잘 명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를 길러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설사병이 나건 또는 감기를 앓건, 병을 한번 앓고 나면 한결 키도 자라고, 살은 좀 빠진 듯하지만 키가 완연히 한 치 가량이 푹 자라고 되고, 그리고 그전에 아니하던 귀여운 재롱도 늘게 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크다가 감기를 앓는다든지 설사를 앓는다고 해서 이걸 나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때 잘 거두고 조리를 잘 시키면 그러는 가운데 아이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기 한번 앓지도 않고, 설사 한번도 앓지를 않고 갓난애기 때부터서 성인이 될 때까지 곱게 그렇게만 자란다고 하는 것은 있기가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과수(果樹)나무라든지 또는 화초 같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이 불고 눈서리를 맞으면서 그렇게 자라야만 그 나무가 온전히 굳세게 자라는 것입니다. 밤낮 온실 속에서 바람 한번 찬바람 한번 쐬 보지 못하고, 눈 · 비 · 서리도 맞아보지 아니하고 온실 속에만 자란 나무는 별로 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약해 빠져서 아무짝에도 못쓰는 것입니다.
우리 공부를 하는 사람도 그러한 역경계(逆境界) · 순경계(順境界), 때로는 공부가 순풍에 돛 달듯이 그렇게 수월하게 잘되어 가기도 하고, 때로는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세차게 부는 바람을 앞으로 맞으면서 그 힘들여서 배를 저으면서 올라가는 그러한 고비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하는데 밤낮 걸어가기 좋은 평탄한 길만 가기보다는 때로는 물을 건너기도 하고, 때로는 가파른 경사진 길을 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가기도 하고, 곱이곱이 고생을 하면서 여행을 하고 등산을 해야만 거기에서 몸도 건강해지고, 인상에 남는 것도 있고 그럴 것입니다.
등산이라고 하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은 '뭐하러, 오르기 좋은 그러한 산을 부담없이 기쁜 마음으로 올라갔다가 하루 재미있게 놀다가 내려오지, 왜 하필 히말라야 같은 그 힘든 얼음산을 올라가다가 둘씩, 셋씩 떨어져 죽고, 형이 떨어져 죽으면 또 동생이 가고. 그 사람이 운동도 좋지만 목숨까지 버리면서 그런 짓을 왜 할까 보냐, 미친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냐?'하고 생각이 될는지 모르지만, 등산에는 등산의 도(道)가 있는 것입니다.
예술에는 예술의 도(道)가 있고, 학문에는 학문의 도(道)가 있듯이, 우리의 참나를 깨닫는 참선에는 참선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이 어떠한 길이건 순경계보다도 그 역경계에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역경계가 없는 순탄하기만 한 길은 아무 매력도 없고 맛도 없고 재미도 없는 것이고, 또 비약적인 경계에도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목숨을 바치면서 인행(因行) 때의 수행을 거치셨고 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오셔가지고서도 12년간이라고 하는 피나는 고행(苦行)을 겪으시면서 도를 구하셨습니다.
물론 도라고 하는 것을 고행 일변도(一邊倒)로, 지나친 고행 위주(爲主)로의 수행도 바른 수행법이 아니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도를 닦는데 고행을 완전히 없이하고 순한 경계에서만 도를 닦으려는 마음도 또한 옳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잘 잠 다 자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그러면서 참나를 깨달으려는 생각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생각인 것입니다. 도저히 대각(大覺)을 그래가지고서는 바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18분28초~31분58초)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고황병(膏肓病) ; 고황(膏肓) · 고황지병(膏肓之病)이라고도 한다. 고황에 들어 고치기 어려운 병.
고황은 심장과 횡격막의 사이에 있는 부분으로 이 사이에 병이 생기면 낫기 어렵다고 한다. 고(膏)는 심장의 아랫부분이고, 황(肓)은 횡격막의 윗부분.
고황에 병이 들었다는 의미는 병이나 못된 버릇이 고칠 수 없도록 심하여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가벼운 것이 아닌 불치의 병, 중병 등을 말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영역.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어떤 일에 장애가 생기는 것. 불도(佛道) 및 선법(善法)의 수행에 장애가 생기는 것.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1분 32초)
[참고]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
〇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곱이곱이 ; 길이나 강물 따위가 여러 굽이로 휘어져 구부러진 모양을 나타내는 말.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인행(因行) ; ①수행. (부처가 되기 위한) 인(因)이 되는 행(行). 깨달음을 여는 근본이 된다.
②수행에 방해가 되는 외부의 요인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롯이 수행정진하는 것. 보살이 인행(因行)을 닦아서 깨달음의 과보(果報)를 얻는 것을 수인감과(修因感果)라고 한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고행(苦行) ; ①천상(天上)에 태어난다든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로 단식(斷食)이나 호흡의 제어와 같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닦았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육체에 고통을 줄수록 정신이 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본능과 욕망을 끊는 것.
③의식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 12두타(頭陀)의 고행이 여기에 상응하며 정진(精進)의 의미를 포함한다.
④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한 이에 상응하는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대각(大覺) ; 부처님의 깨달음. 정각(正覺) · 대오(大悟) 등과 같은 뜻이다. 스스로 깨닫고[自覺] 남들도 깨달음으로 인도하여[覺他] 각(覺)과 행(行)이 원만하게 갖추어졌으므로 대각이라 한다. 또는 부처님 자체를 가리키는 말.
§(122) 경계에 속지 마라 / 정법을 닦아 과거에 지은 업을 곱게 수월하게 받아넘겨라 / 방편에 떨어지지 마라 / 절에는 법(法)의 밥을 잡수러 오시는 것.
〇성현이라 해서 어려운 일을 안 당한 것이 아니어요. 자기가 과거에 지은 업(業)에 따라서 받을 것은 다 받되, 범부는 복수를 할 마음을 내고 마음이 독사처럼 되아 가지고 원망을 하고 저주를 하다가 결국은 죽어가지만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 정법에 있어서는 쪼끔도 마음에 동요가 없어.
〇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는 것이고,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는 것이여. 불법은 팔만사천 가지 방편이 있어서 정법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 방편이 버릴 것이 없이 다 좋은 법, 도(道)에 보탬이 되는 것이고, 정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방편에 떨어지면 오히려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22)—80년 5월 첫째일요법회 (80.05.04) (용122)
약 14분.
앞으로 이 일요법회 때는 참선법(參禪法)에 대해서 주로 중점을 두고 법회를 운영해 나가겠습니다마는,
혹 참선을 하면 무엇이 나타나고 보이고, 그래가지고 무엇이 뭐 허연 옷을 입은 사람이 획 지내가고, 뭐라고 나를 내 이마를 만져주면서 뭐라고 법문을 해주시고 그런다고 아주 처음 들어와서 아지도 못한 사람한테 자랑을 하고, 자기가 아주 반쯤 도통(道通)한 것처럼 갖다 위세(威勢)를 부리고 그런 사람이, 그런 삿된 소견(所見)을 가진 사람이 가끔 있는 걸로 듣고 있습니다.
처음 오신 분은 암만 앉아 봤자 가슴만 답답할 뿐이지 도대체 보이는 것도 없고.
'벌써 내가 이 화두(話頭)를 타고 참선한 지가 벌써 3년이나 되는데 아무것도 알아진 것도 없고 보인 곳이 없습니다. 근데 제가 뭘 화두를 잘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이렇게 문의를 하신 신도님이 계십니다.
근데 절대로 이 참선은 옳게 하는 한에는 그런 것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잘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른거리고 무엇이 보이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 잘못하는 데도 불구하고 떡! 처음 들어온 후배들한테 으시대기 위해서 그러한 못된 소리를 지껄이고 으시댄다고서야 그것 참 부끄럽기 한량이 없는 일입니다.
누가 그러한, 40년 50년을 댕겼다 하더라도 그런 소리하걸랑 '아하, 이 분이 공부가 잘못되었구나' 이렇게 탁! 알아차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그런 말을 듣고 '아이구, 나도 그런 것이 좀 빨리 나타났으면' 그렇게 생각한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또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게만 되었다 하면은 그 사람은 참선은 참 바로잡기가 어렵습니다. 공부만 하려고 하면 그런 것이 나타납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래가지고 그 사람은 공부 잘 못하게 되는 거여.
그래서 그런 것이 나타나기를 바래지도 말고, 누가 나타난다고 자랑삼아 얘기하면 '음, 당신 공부 잘못했구나'
'당신 잘못했다'고 일러줄 필요도 없습니다. 벌써 다 알고 있습니다. 많이 들어서 알고 있으면서도 원래 삿된 생각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나타난 것이에요. 일러줘도 소용이 없어요.
일러주면 '아, 그렇습니까. 아 감사합니다' 그래놓고는 나가서 또 고 짓을 하거든요. 그래서 절대로 그러한 말을 곧이듣지도 마세요.
공부할 때에 하다 보면, 능엄경(楞嚴經)에 보면 쉬흔 가지의 그러한 증상이 나타날 수가 있다.
누굴 보면 '아, 저 사람이 지금 시장에 간다고 나와 가지고는 친구 집에 춤추러 가는구나' 사람 떡! 보면 알아. '저 사람은 곗돈 가지고 계 추리러 가는구나' 그것도 척 보면 알아요. '아하! 저 사람은 시집을 두 번 갔구나' 척 보면 알거든.
'옴마니반메훔'이나, '관세음보살'이나, 기도 같은 거 또는 참선 하다 보면 그러한 것이 알아지는 수가 있어요. 근데 그것이 잘 공부를 해 갖고 도통을 했기 때문에 그러한 신통력이 생긴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알았으면...' 한 소원을 가지고 했다 이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런 것이 나타나는데, 그런 것이 나타나도 이것이 정법(正法)이 아니요, 이것이 깨달음 바른 깨달음이 아니라고 한 것을 애당초에 알고 탁! 용기허게 독하게 그것을 뿌리쳐 버리고서 탁! '이뭣고?'를 올바르게 해 가면 그런 것이 맥을 못 추리고 그냥 없어져 버리는데.
아, 그 묘하거든. '내가 어떻게 해서 내가 이런 좋은 것을 알았는가' 속으로 생각하면 재미가 옥실옥실하고.
또 딴 사람한테 그것을 탁! 한마디씩 알아맞출 때 그 사람이 나를 그냥, 아주 그냥 도사로 숭배를 하고, 막 내 말 한마디면 뭐 천하 없는 사람도 무릎을 꿇고 굽신굽신하니까 '이거 보통 좋은 것이 아니다' 그말이여.
그래가지고 그놈을 살살 눈치봐 가면서 한마디씩 써먹고 도사 노릇을 갖다가 하니까, 모두 그냥 사람들이 그냥 굽신굽신하니까는 거기서 그냥 아주 그냥 행세하기가 썩 좋다 그말이여.
돈도 갖다 주고, 옷도 갖다 주고, 말 한마디면 뭐 지가 장관부인 아니라 천하 없는 놈도 지 앞에는 호령 한마디에 그냥 꿈쩍을 못하거든.
그렇게 해가지고 삿된 짓을 하고, 도사 노릇을 하고 있는 그러한 분을 여러분 가운데에 혹 살살 나 몰래 찾아다니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은 참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을 하시고.
내가 설사 내일 어떻게 될 줄을 모르고, 내가 이 사업이 잘될지 못될지를 모르고, 자기 남편이 잘될지 못될지, 자기의 운수가 어떻게 될지 답답하고 모를망정 모를수록에 화두를 들고 자기의 근본 문제, 참나를 찾기를 위해서 노력을 해야지, 설사 자기 남편이 잘되고 못되고 한 것을 미리 알아봤자 별수가 없습니다.
잘될 때 잘되고, 결국은 아무리 그것을 알고 있더라도 또 망할 때 망하는 것입니다. 안다고 해서 안 망하는 것이 아니에요.
망하되 그 망함으로 인해서 자기의 본심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 흥하되 흥함으로 인해서 자기가 흔들림을 받지 아니할 것,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공자님과 같은 성현도 진나라에 들어가서 일주일 동안이라고 하는 기간을 굶주림에 시달림을 받았고,
양허라고 하는 공자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생긴 사람이 있었는데, 그놈이 온갖 못된 짓을 해가지고 관가에 쫓김을 받고 있었는데 마치 공자님 모습이 그 불량한 못된 사람하고 얼굴이 비슷해가지고 그 범인인줄 의심을 받아가지고 큰 곤경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제자가 공자님에 묻기를 "세상에 선생님은 성현이신데, 성현이 세상에 이러한 일을 당할 수가 있습니까? 성현도 이러한 곤란을 당할 수가 있습니까?"
"성현이라고 해서 어찌 곤경을 안 당할 수가 있느냐, 당하되 범부(凡夫)는 이러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마음이 변해가지고는 가누지를 못하는 것이고, 성현은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해도 조끔도 마음에 동요를 받지를 아니하고, 그것이 범부와 성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이 논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그러한 삼계(三界)에 대도사(大導師)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시고, 성인 가운데에 성현이시지만 때로는 어려운 일을 당하셨습니다. 조달(調達)이로부터서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당하셨고.
목련존자와 같은 (성현은) 그러한 신통이 자재한 그러한 성현이지만 외도(外道)의 돌팔매에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아가지고 결국은 열반(涅槃)에 드신 것입니다.
성현이라 해서 어려운 일을 안 당한 것이 아니어요. 자기가 과거에 지은 업(業)에 따라서 받을 것은 다 받습니다.
받되, 범부는 복수를 할 마음을 내고 마음이 독사처럼 되아 가지고 원망을 하고 저주를 하다가 결국은 죽어가지만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 정법에 있어서는 쪼끔도 마음에 동요가 없어.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이 곱게 그것을, 피할 수가 있어도 일부러 안 피한 것이여. 피해 봤자 오히려 이자까지 더 불어서 더 고약하게 당한 것인데 뭐하러 그것을 피할 것이냐 말이여.
그래서 그러한 것을 어떻게 미연에 피해 보자고 점쟁이 집으로, 관상 사주쟁이로 쫓아대닐 것이 아니라 자꾸 이 공부를 쌓아서 정법을 닦아서 과거에 지은 업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의 능력으로 그것을 곱게 받아넘기고 수월하게 받아넘기고, 마음의 움직임이 없이 그것을 잘 받아넘기고 오히려 웬수가 자기로 인해서 감화를 받도록 이러한 길을 우리는 모색해 나가야 할 걸 생각을 합니다.
불법은 방편(方便)이, 팔만사천 가지 방편이 있어서 정법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 방편법이 다 버릴 것이 없이 다 좋은 법이 되는 것이고 도(道)에 보탬이 되는 것이고, 정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방편에 떨어지면 오히려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는 것이고,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이 되는 것이여.
정법을 믿는 사람은 온갖 방편법이 다 조도법(助道法)이요, 도에 도움이 되는 법이 되고, 정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불법을 믿는다고 죽도록 한다는 것이 결국은 사도(邪道)에 떨어지는 원인밖에는 아니 되는 것이에요.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그러한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난 것이라 여러분은 반드시 금생에 이 정법을 통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라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하고 꼭 그렇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다음 법회는 사월초파일입니다. 앞으로 18일 간이 남아있습니다마는 서로서로 권고해서 사월초파일,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경축일에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더구나 그날은 공휴일로 지정이 되아 있어서 모두 다 참석하시기가 좋을 것입니다.
'가봤자 뭐 앉아서 밥 먹을 데도 없고, 뭐 비빔밥이나 뭐 거지처럼... 그래서 내가 챙피해서 못 간다'
맛있는 음식은 댁에서 잘해서 잡숫고, 절에는 법(法)의 밥을 잡수러 오시는 것입니다.
물질로 된 음식은 이 육체에 영양을 공급을 하는 음식이라면, 이 정법(正法)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하는 것입니다.
그날 오셔서 정법 들은 것으로써 배부른 것을 삼으셔야지, 맛있는 대접, 편안하니 앉어서 고급으로 잡숴 영혼과 육체까지 갖다 영양을 공급하려고 하는 생각은 너무 욕심이 지나치신 것입니다.
밥을 못 잡수면 물이라도 한 모금 먹고 가도 그것도 고맙게 생각을 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하고, 그날은 꼭 참석을 하셔서 우리의 스승이신,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부처님의 탄생을 마음껏 축복하고 그래가지고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을 가뜩 타 가지고 가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1시간13분44초~1시간27분7초)(끝)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위세(威勢 위엄·세력·힘 위/형세·권세·기세 세) ; ①위엄(威嚴)이 있거나 맹렬한 기세(氣勢). ②사람을 두렵게 하여 복종하게 하는 힘.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능엄경(楞嚴經)에 보면 쉬흔 가지의 그러한 증상이 나타난다, 나타날 수가 있다' ; 능엄경(楞嚴經) 변마장(辨魔障). 능엄경 조도분(助道分)에 있는, 수행도상에 있어 나타날 수 있는, 오음(五陰 -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이 녹아 없어질 때에 나타나는 갖가지 마장(魔障)을 밝혀, 수행자들이 사특한 길에 떨어지지 않게 한 부처님 가르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사촌 동생으로, 출가하여 그의 제자가 됨. 부처님에게 승단을 물려줄 것을 청하여 거절당하자 오백여 명의 비구를 규합하여 승단을 이탈함. 여러 번 부처님을 살해하려다 그 과보로 살아서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목련(目犍連, 目連) ; 산스크리트어 maudgalyāyana의 음사. 대(大)목건련 또는 마하(摩訶)목건련이라고도 한다. 원명 꼴리따. 부처님 십대제자(十大弟子)의 한 사람.
마가다국(magadha國)의 바라문 출신으로, 인근 마을의 사리불(舍利弗)와 친하여 어느 날 바라문교의 축제를 구경하다가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을 찾아나서 라자가하(王舍城)의 유명한 회의론자 산자야 문하로 들어갔으나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지는 못하던 중에,
사리불이 라자가하의 거리에서 탁발을 하던 부처님의 제자 앗사지(馬勝)를 만나 들은 “일체는 원인이 있어 생기는 것 / 여래는 그 원인을 설하시네 / 그리고 또 그 소멸까지도 / 위대한 사문은 이와 같이 가르치네”라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사리불한테 듣고는,
사리불과 산자야의 제자 250명과 함께 죽림정사를 방문해 부처님께 귀의했다. 신통력이 뛰어나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 일컬음. 사리불과 함께 불교교단의 중심인물이었다.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고, 탁발하는 도중에 외도(外道)들이 던진 돌과 기왓장에 맞아 고통을 겪는 중에, 사리불이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붓다에게 나아가 열반에 들겠다고 말씀 드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마수촌에서 열반에 들었다.
*'목련존자와 같은 (성현은) 그러한 신통이 자재한 그러한 성현이지만 외도(外道)의 돌팔매에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아가지고 결국은 열반(涅槃)에 드신 것입니다' ;
[참고] 『법구경 - 담마파다』 (전재성 역주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p451~454, 『법구경이야기 2』 (무념·응진 역 | 옛길) p 384~390.
〇목련존자의 과거 업연(業緣) ; 먼 과거 전생에 목련(目連)은 늙은 눈먼 부모를 모시고 나이가 들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고 살고 있었는데, 부모는 그것이 안타까워 성화를 하는 바람에 그는 젊은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에게 시집온 여인은 처음 며칠 동안에는 별 불평없이 눈먼 시부모를 잘 모시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시부모를 보기만 해도 짜증을 내며 같이 살수 없다고 했으나, 그는 아내의 말을 듣고도 모른 척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외출하여 일을 보러 간 사이에 그녀는 일부러 진흙과 쌀겨와 쌀죽의 찌꺼기를 집안 여기저기에 흩뜨려 놓았다.
이렇게 해 놓고 돌아온 남편에게 눈먼 당신의 부모가 이렇게 해 놓았다고, 자기는 이제 시부모와 더이상 같이 못 산다고 하며 계속 들볶자 그는 아내의 말만 믿고 부모를 버릴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딴 곳에 사는 친척이 부모님더러 한번 오라고 한다고 말하고는 수레에 태워 숲속에 깊이 들어가서, ‘아버지, 이 고삐 좀 잡고 계세요. 황소가 길을 잘 알고 있어서 가만 놔두어도 잘 갈 겁니다. 여기는 도둑들이 출몰하는 곳이니 저는 내려서 살펴봐야겠습니다.’하고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숲속에 들어간 그는 마치 도둑들이 공격을 해오는 것처럼 소리를 지르니까, 부모는 놀라면서 ‘아들아, 우리는 살 만큼 살았다. 우리는 신경쓰지 말고 너라도 어서 도망쳐라’고 하였다. 아들은 소리를 외치며 도적들처럼 다가와 부모를 죽여 시체를 숲속에 버린 뒤 집으로 돌아왔다.
이 악업으로 그는 무수한 세월동안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았다. 그러고도 악행의 과보가 아직 다하지 않아서 100생 동안 온몸이 가루가 될 정도로 두들겨 맞아죽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과거에 수없이 많은 부처님들을 모시고 열심히 수행하면서 서원을 세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 때 그는 미래 세상에 고따마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면 자기는 그 부처님 밑에서 으뜸가는 제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많은 공덕 바라밀을 성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목련존자의 태어남은 이번이 마지막이 되었고, 결국 외도들에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아라한을 이룬 성자였기 때문에 중생처럼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완전한 적멸(寂滅)을 실현했던 것이다.
이같이 목련존자의 전생과 그에 따른 과보를 말씀하신 다음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법구경 137~140)을 읊으시었다.
“죄가 없고 자신과 남을 해치지 않는 자에게, 폭력를 사용하여 해를 끼치면, 참으로 아주 빠르게 다음 10가지 중 하나에 떨어지리라.
①심한 고통을 당함. ②아주 가난해짐. ③몸의 상해(신체적 절단). ④중대한 질병이나 정신이상을 일으킴. ⑤왕의 노여움을 사 모든 재산을 빼앗김. ⑥재산과 명예를 회복할 수 없는 고소를 당함. ⑦가족이 생명을 잃음. ⑧재산이 천재지변 등으로 파괴됨. ⑨집에 벼락이 내리거나 불에 탐. @그런 뒤 그 어리석은 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리.”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〇업의 종류 ;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 (4분 51초)
〇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 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게 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124) 공부하는 사람은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어서 올바르게 닦아야만 바른 깨달음에 도달한다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〇이 공부는 이론, 지식, 상식, 이러한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알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이 참선하는 데는 동원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건 고대로 놔둬 버리고 다못 바보가 되어 가지고 「이뭣고?」 그 생각밖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많이 읽은 책, 많이 들은 법문이 하나도 필요가 없고 다못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〇공부하는 사람은 처음 시작할 때 바른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를 받어서 하고, 해 갈 때에도 자주자주 법문(法門)을 듣고서 그 법문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하면서 또 법문을 들어야 빗나가지 아니하고 올바르게 닦을 수가 있고 올바르게 닦아야만 바른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공부는 다른 게 아니고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오직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도업(道業)을 성취하고 못하고 하는 것이,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언제까지 하냐, 안 하느냐'가 오직 우리의 한 생각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생각 단속할 줄 아는 사람은 마침내 생사해탈(生死解脫) 하는 것이고, 한 생각을 섣불리 방치한 채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는 사람은 무량겁 생사윤회를 벗어날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그렇게 단속을 하신다면 금년 한 철에 결정코 득력(得力)을 하실 것을 저는 보장을 합니다.
'그렇게 알뜰히 공부를 해서 득력을 못한다면 내가 대신해서 지옥에 떨어지겠다' 이렇게 과거에 모든 도인(道人)들이 자신 있게 보증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금년 여름에 방부(房付)를 들인 분은 그렇게 공부하시려니와 사정에 의해서 직접 방부를 들이고 와서 공부를 못하시고 가정에서 하신 분들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가정에서 생활하신 그 가운데—손자가 떠들거나 아들이 떠들거나, 무슨 집안에 근심 걱정이 있거나 기쁜 일이 있거나 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것 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손으로 만질 때, 앉고 서고 눕고 할 때, 무슨 기쁨 · 슬픔 · 괴로움이 있을 때 그때그때를 잘 돌이켜서, 퍼뜩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도 퍼뜩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특히 속이 상하고 도저히 그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어려울 때, 긴장하고 당황하고 그럴 때, 그럴 때는 심호흡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셔. 들어마실 때는 배꼽 밑에 단전(丹田), 하복부 아랫배가 약간 볼록하도록 그렇게 느끼면서 숨을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들어마시되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아랫배) 뒤에서 직선으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들어마심에 따라서 아랫배가 약간 볼록해지도록, 그때 가슴은 신경을 쓰지를 말고 배만 아랫배만 약간 볼록해지도록 느끼면 되는 것입니다.
볼록해졌으면 그 상태로 딱 정지해 가지고 3초 동안, 약 3초 동안 지난 다음에 또 조용하니 숨을 내쉬되, '코로 내쉰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로, 쑤욱 배를 당기면서 뒤에로 내 보낸다' 이리 생각을 하세요. 내쉬면은 배는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고.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떠한 초학자라도 그렇게 공부를 다져 들어가면 머지않아서 호흡과 화두(話頭)가 동시에 들어지게 되고 차츰차츰 잊어버리는 시간은 줄어지고 화두를 드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는 그 편안하고 맑고 깨끗하고 저절로 신심과 분심이 나면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도(道)의 기쁨이 느껴질 것입니다마는 그럴 때에도 조금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서는 아니됩니다.
기뻐하는 마음 내면 기쁨의 마구니에 이미 끌려가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럴 때에도 '아! 좋다. 참 이런 상태로 영원히 있었으면' 이러한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됩니다.
조금도 잘된다는 생각, 기쁘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갖지 말고 그러한 가운데에도 계속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화두만을 역력(歷歷)히 들어 갈 따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가다가도 뚝 변해 가지고 영 화두가 잘 안 들리고, 의심이 잘 되지를 않고,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영 상태가 안되고, 그렇게 그러한 또 상태가 오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더라도 조금도 짜증을 내지 말고, 번뇌심도 내지 말고, 심호흡을 계속하되 그래도 여의치 못하면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지고 밖으로 나가서 일직선으로 길을 정해 놓고 한 5분 내지 10분 왔다갔다하면서 화두를 들어 보십시오.
자연히 가슴속이 후련해지고 머리가 청쾌해지면 그때 또 다시 자기 자리에 가서 딱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으십시오. 그렇게 해서 그 고비를 넘기면 또 수월하게 또 공부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공부는 스스로 '아, 공부가 잘된다' 생각할 때 그때 보다도 영 공부가 시간이 지루하기가 말로 할 수 없고 몸도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그렇게 그 애를 먹을 때, 그때가 참으로 공부에 있어서 중요한 때인 것입니다.
그때 짜증을 낸다든지 번뇌심을 낸다든지 에이! 공부를 못할거라고 해서 중단한다든지 하면 그건 안되는 것이고, 그럴 때에 아까 말하는 바와 같이 포행(布行)을 하고 심호흡을 해서 잘 고비를 넘기면서 화두를 밀밀(密密)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해서 그 고비를 넘기면 그때 공부가 한 걸음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가면 반드시 득력을 하고 도업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누차에 걸쳐서 말씀을 한 바지만 이 공부는 이론, 지식, 상식, 이러한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알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이 참선하는 데는 동원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건 고대로 놔둬 버리고 다못 바보가 되어 가지고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 생각밖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많이 읽은 책, 많이 들은 법문이 하나도 필요가 없고 다못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분별심으로 따져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거듭 말씀을 드리고.
공부를 하다가 어떠한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어떤 경지가 나타나면 설사 그런 경계가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던지, 부처님이 나타나서 무엇을 경책을 주시고, 무슨 손으로 이마를 만져 주시고, 또는 무슨 약을 주시고, 이런 것들이 그런 경계가 나타났다 하드라도 그것은 공부를 해 나가는데 있어서 환상(幻相)으로 나타나는 것이여.
환각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참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눈을 뜨고 성성(惺惺)한 마음으로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거각(擧却)해 나갈 따름이어야지 '하! 이런 것이 나타난 것 보니까 내가 무슨 큰 도를 통할란가보다. 어디 또 헌가 한번 눈을 감고 한번 찾어보자' 이래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가 나타나면 그것이 신기하고 묘해서 누구한테 자랑을 하고 싶고 그렇게 해 가지고 자기가 아주 공부를 잘한 증거로 그런 것이 나타난 것처럼 새로 들어온 사람한테 자랑을 해 가지고 한목 으시댈라고 그러한 짓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참으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옳게 공부를 해 나가면 그런 것이 나타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평소에 그러한 것이 나타나기를 바래는 마음이 잠깐이라도 있으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가지고 그러한 현상이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벽에다 던진 고무공이 다시 자기에게 튀겨져 오듯이 자기가 그러한 마음속에, 그러한 잠재의식 속에 그러한 것이 조금이라도 그런 그림자가 있을 때 그러한 것이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든지, 주력을 한다던지, 또는 염불한다든지, 참선 한다든지 해서 그런 경지가 나타난 것이 다 그러한 원인으로 해서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은 정신을 깨끗이 성성(惺惺)한 정신으로 해 나가고 눈을 절대로 감지 말고 뜨고 하고 그러면은 그런 것이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런 경지는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나타나는 것이어서 언제나 성성한 마음으로 공부를 다져 나가고 눈을 뜨고 하면 그런 것이 여간해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혹 본의 아니게 나타났다 하드라도 그것이 참 경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두시고 그런 것에 대해서 두 번 다시 신경을 쓰지 말고, 없는 것으로 취급해 버리고 다못 화두만을 성성히 들어 나가십시오.
그러한 신기한 경지가 나타나되 신경을 쓰지 아니하고 관심을 거기에 기울이지 아니하면 해로울 것도 말 것도 없지만,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자꾸 그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그런 것을 이리저리 남에게 말해 가지고 쓰여 먹고 하면 결국은 거기에서 외도(外道)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한번 삿된 경지에 떨어져 놓으면 여간해서는 바로 잡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나무나 판때기에 못을 박을 때 처음에 박을 때 정확하게 박어야지, 그 조끔 찌그러지게 박아 놓으면 빼서 다시 그 옆에다 박을라고 박아 봤자 다시 아까 그 구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처음에 올바르게 해 가야지, 한번 잘못 들어가 놓으면 잘못인 줄 알고 할려고 해도 하다 보면 다시 그 경지가 딱 나타나 버린다 그말이여.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은 처음 시작할 때 바른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를 받어서 하고, 해 갈 때에도 자주자주 법문(法門)을 듣고서 그 법문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하면서 또 법문을 들어야 빗나가지 아니하고 올바르게 닦을 수가 있고 올바르게 닦아야만 바른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다. 생사해탈이 사비상(事非常)이다. 진로형탈, 생사해탈이 이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라. 긴히 화두를 잡어서 한바탕 공부를 지을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번 그 추위가 뼛속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매화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오.
삼동(三冬)에 되게 강추위를 해야만 그 강추위 끝에 핀 매화꽃에서 그 코를 치는, 진동하는 향내가 나는 것입니다. 겨울 날씨가 뜨뜻하면 그러한 뜨뜻한 기후 끝에 매화가 피면 매화꽃이 피기는 피었지만 아무 향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진을 하되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 이 삼요소(三要素)가 돈발(頓發)해서 그 알뜰히 정진을 해야만 그 정진 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는 것입니다.
어제도 그럭저럭 오늘도 그럭저럭, 할 시비(是非) 다 참견하고, 잘 잠 다 자고, 먹을 것 다 먹고, 할 짓 다 하고, 그래 가지고 도업을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기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39분56초~56분7초)(끝)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그렇게 알뜰히 공부를 해서 득력을 못한다면 내가 대신해서 지옥에 떨어지겠다' ;
[참고 ①] 「최상승론(最上乘論)」 (5조 홍인대사 弘忍大師 六O二 ~ 六七五)
〇若有人依文行者即在前成佛. 若我誑汝當來墮十八地獄. 指天地爲誓. 若不信我世世被虎狼所食.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글(最上乘論)에 의지해 수행하면 곧 성불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너를 속인다면 다음 세상에 십팔지옥(十八地獄)에 떨어지리라. 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만약 나를 믿지 아니하면 세세생생에 호랑이 밥이 되리라.
승고선사께서 항상 여러 사람에게 권하되 “불법을 배우지 말고 다만 스스로 무심하여라. 영리한 근기의 사람은 한나절에 해탈하고, 둔한 근기의 사람은 혹은 3년 · 5년이며 멀어도 10년을 지나지 않는다. 만약 깨닫지 못하면 노승이 너를 대신해서 혀를 뽑는 발설지옥(拔舌地獄)에 들어가리라”
[참고 ③]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 『몽산법어』 (몽산화상 一二三一 ~ 一二九八 또는 一三O八) (용화선원刊) p97-99.
만약 이에 와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이 세상 인연을 다 여의며 제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다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잘 지키고 인사(人事)를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밤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〇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〇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 (1분 32초)
〇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 ; 완전히 잠이 들지도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정신이 어렴풋한 순간.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시비(是非) ; ①옳음과 그름. ②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 또는 옳고 그름을 따지며 하는 말다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