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안거 해제 백종2020. 4. 14. 15:24

 

 

§(593) (게송)사시순환난부한~ / 심원의마(心猿意馬) / 우란분재. 목련존자가 수행자들에게 올린 공양 공덕으로 아귀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어머니를 구제 /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11장, 무심도인(無心道人). 제18장. 제27장.

사견(邪見) 공견(空見)에 빠지지 말라 / 의심관(疑心觀) / 여러분은 자식들을 사랑하듯이 정말 부모한테는 잘해야 하고, 나의 부모한테 잘하듯이 다른 연세 많은 분한테도 그런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어가느냐?

 

본참공안(本參公案)—'이뭣고?' 화두가 되었건, '판치생모' 화두가 되었건, '무자' 화두가 되었건,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정 받은 그 본참공안을 하나를 가지고 일체처 일체시에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은산철벽(銀山鐵壁)에 탁! 부딪힌 것처럼, 나아갈라야 나아갈 데도 없고 물러설라야 물러설 수도 없고, 오직 꽉 맥힌 의단이 독로하도록 본참공안에 실참실수(實參實修) 해 나감으로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해서 마침내는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는 것이고, 확철대오해서 참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왕궁에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설산(雪山)에서 고행을 하셔가지고 일생,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해서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신 요점이,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과법을 철저히 믿되, 거기에 '어떻게 하면 인과(因果) 속에서 해탈(解脫)할 수 있느냐?'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여.

정법(正法)을 철저히 믿고 정법에 의해서 수행(修行)을 해야 우리가 이 생사(生死)의 윤회(輪廻) 속에서 살면서 거기에 얽히지 아니하고 해탈(解脫)하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593)—1997년 정축년 하안거 해제 (61분) (용593)

 

(1/3) 약 21분.

 

(2/3) 약 19분.

 

(3/3) 약 21분.

 

(1/3)----------------

 

사시순환난부한(四時循環暖復寒)헌디  미후심련육화촌(獼猴深戀六華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이성안색증무하(가)(耳聲眼色曾無暇)헌데  염념나지시사문(念念那知是死門)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사시순환난부한(四時循環暖復寒)이다. 춘하추동 사시(四時)가 돌고 돌아서 따뜻하다가 또 다시 추워지고, 추워졌다가 다시 또 따뜻해지고, 그게 사시가 돌고 도는 가운데에,

미후심련육화촌(獼猴深戀六華村)이다. 원숭이는 깊이 육화촌(六華村)을 그리워하더라.

 

원숭이는 계절 따라서 맛있는 열매가 여는 계절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말이지.

꽃이, 여섯 가지의 아름다운 꽃이 피고 지고 하면 거기에는 맛있는 과일이 열렸다가 또 익어 가니까 육화촌(六華村)을 항상 그렇게 깊이 그리워한다 그말이여.

 

이성안색증무하(가)(耳聲眼色曾無暇)여. 귀로 소리를 듣고 눈으로 온갖 색상을 보는데 틈이 없어.

이 말은 아까 원숭이가, 산에서 사는 원숭이로 여러분은 알아들으셨었는지 모르는데, 이 원숭이는 '마음에 원숭이'를 말하는 거여.

 

우리의 '마음'을 원숭이에다가 비유하고, 우리의 '뜻'을 말에다가 비유해서 '심원의마(心猿意馬)'라고 고인(古人)네들이 비유해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건데,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 팔식(八識)이 원숭이처럼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뛰었다가 내려갔다 이 나무 저 나무로 건너다니면서 온갖 수선을 피고, 저는 운동을 하느라 그러는지 그렇게 설쳐대는 것이 마치 우리의 마음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반연(攀緣)해가지고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나부대는 우리의 마음에 원숭이가 마치 그와 같다.

 

그 눈과 코와 귀와 혀와 몸뚱이를 통해서 우리의 팔식(八識)이 놀아나는, 그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희로애락과 흥망성쇠 속에 우리의 마음의 원숭이가 육근(六根)을 통해서 놀아나는 그 한 생각 한 생각이 바로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누가 알거나 그말이여.

 

 

오늘은 정축년 하안거(夏安居) 해제(解制)날입니다.

하안거 해제에다가, 백중(百中) 우란분재일(盂蘭盆齋日)에다가, 백일기도 회향을 겸해서 이렇게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어째서 우란분재,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薦度)하는 우란분재에 법요식을 하안거 해제일에 행하게 되느냐?

이것은 부처님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에 신통제일(神通第一)인 목련존자의 효도(孝道)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목련존자의 어머니 청제(靑提) 부인은 남편이 남겨놓은 많은 재산을 삿된 생각으로 낭비를 하면서 살생(殺生)을 하고 갖은 죄(罪)를 지었습니다. 그 죄 지은 과보로 아귀도(餓鬼道), 무간지옥도(無間地獄道)에 떨어져서 참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그 아들 목련이 효심(孝心)이 지극해가지고 그 어머니가 어디서 무얼하고 무슨 고통을 받고 계신가 그것이 궁금했고, 급기야는 지옥고(地獄苦)를 받고 있는 것을 알고서 갖은 방법으로 어머니를 그 지옥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해 드리려고 애를 썼지마는 끝내 이루지를 못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부처님께 간청을 해서 어머니를 구제(救濟)하는 방법을 여쭈어보니까, '여름 하안거 해제날 석 달 동안을 더위를 무릅쓰고 열심히 도 닦은 스님네께 공양(供養)을 올림으로 해서 그 공덕(功德)으로 어머니를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가 있느니라' 그 방법을 가르켜 주셨어.

 

그래서 목련존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공양할 거리를, 백 가지 과일과 모다 맛있는 음식을 잘 마련을 해가지고 해제 때—부처님 회상(會上)에서 지내던 스님네는 말할 것도 없고, 멀고 가까운 데에서 각기 모다 공부하고 있던 수행자(修行者)들이 부처님 회상에 해제 때에는 모다 모여들었습니다.

그 많은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이 공양(供養)을 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그 공덕으로 지옥에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을 그 어머니 청제 부인을 지옥고로부터 이렇게 벗어나게 해 드린 고사(故事)가 『목련경(目連經)』이라든지 『우란분경(盂蘭盆經)』이라든지 그런 경전을 보시면은, 사람으로서는 그 처절한 고통 받는 그 내용을 소상(消詳)하니 알 수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因緣)으로해서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신지 삼천년이 되는 오늘날에 이르도록 동남아 여러 국가나 중국 · 한국 · 일본 불교국가에, 믿는 나라에서는 이 칠월(七月) 해제일을 기해서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저 선망부모를 위시(爲始)해서, 가족에 아들딸 형제자매 원근친척들의 영혼을,

물론 그 가운데는 비명(非命)으로 돌아가신 분—횡사(橫死)해서 돌아가신 분, 교통사고나 또는 물에 빠져죽고 목 매달아 죽고, 약 먹고 자살하고 한 온갖 비명횡사한 그런 영가(靈駕)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러한 영가들을 천도하는 법요식을 해마다 연례 행사로써 거행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왜 백중(百中)날이 좋으냐 하면은 석달 동안을 열심히 수행해서 몸도 청정하고 마음도 청정한 수행자들, 수행자들에게 공양 올린 공양공덕(供養功德)이 얼마나 장(壯)한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보면은,

‘악(惡)한 사람 백 명에게 공양하는 것보단 착한 사람 한 사람한테 공양(供養)하는 것이 낫고,

착한 사람 천 명에게 공양하는 것보단 오계(五戒)를 지키는 한 사람에게 공양하는 게 낫고,

 

오계를 지키는 사람 만 명에게 공양하는 것보단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증득한 한 사람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수다원과를 증득한 백만 명에게 공양한 것보단 사다함(斯陀含)을 증득한 한 성현한테 공양한 것이 낫고,

사다함 천만 인에게 공양한 것보단 아나함(阿那含) 한 사람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아나함 일 억의 성현에게 공양한 것보단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 한 분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십 억의 아라한에게 공양한 것보단 한 분의 벽지불(辟支佛)에 공양한 것이 낫고,

백 억의 벽지불에게 공양한 것보단 한 사람에, 삼세제불(三世諸佛)의 한 분에게 공양한 것이 낫고,

천 억의 삼세제불에 공양한 것보단 한 무심도인(無心道人)에게 공양한 것이 낫다’

 

『사십이장경』에는 '무념(無念) · 무주(無住) · 무수(無修) · 무증(無證)한 사람에게 공양(供養)한 것이 낫다' 그러는데.

무념(無念)이요, 무주(無住)요, 무수(無修)요, 무증(無證)한 사람은 한마디로 말해서 무심도인(無心道人)이라 그말인데.

 

이 무심도인은 어떠한 것이 무심도인(無心道人)이냐?

생각을 하되 생각 없는 생각을 하고, 행(行)을 하되 행이 없는 행을 하고, 닦되 닦음이 없이 닦고, 증(證)하되 증한 바가 없이 증하는 이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무심도인(無心道人)이라 하는데, 이 무심(無心)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이러한 것이 무심도인이다’ 이렇게 말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무심도인(無心道人)인지 아닌지를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석 달 동안을 열심히 수행한 수행자 가운데에는 몸도 마음도 청정(淸淨)해서 무심(無心)한 경계(境界)에 들어간, 들어갈 공부를 했고 그 가운데에는 이미 무심한 경계에 들어간 스님이 몇 분인가는 있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설사 오늘날 당장 완전히 진무심(眞無心) 경계에 들어가지 안 했다 하더라도 그 목적지를 향해서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분도 준(準) 무심도인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름 해제 때 모이신 그 스님네들에게 공양을 올리면은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비명횡사해서 거리 중천에서 갈 곳을 모르고 해매고 있는 우리의 선망부모와 가족들로 하여금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공덕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무심도인(無心道人).

 

'내가 무심도인이다'하면 그게 무심도인이 아니여.

'내가 한 소식을 했다'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무심도인이 아니고, '나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했다'한 생각을 가지면 이미 그것이 무심도인이 아닌 거여.

 

어떻게 하면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어가느냐?

 

본참공안(本參公案)—'이뭣고?' 화두가 되었건, '판치생모(版齒生毛)' 화두가 되었건, '무자(無字)' 화두가 되었건,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정(指定) 받은 그 본참공안을 하나를 가지고 일체처 일체시에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은산철벽(銀山鐵壁)에 탁! 부딪힌 것처럼, 나아갈라야 나아갈 데도 없고 물러설라야 물러설 수도 없고, 오직 꽉 맥힌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본참공안에 실참실수(實參實修) 해 나감으로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해서 마침내는 무심도인이 되는 것이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참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왕궁에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설산(雪山)에서 고행(苦行)을 하셔가지고 일생,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해서 팔만사천 법문을 설(說)하신 요점이, 목적(目的)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해제법문(解制法門)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녹음법문을 통해서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그것을 경청(敬聽)을 했음으로 해서 해제법문을 산승(山僧)이 설할 것은 없습니다. 또 설할 줄도 모릅니다.

다맛 석 달 동안을 그 삼복성염(三伏盛炎)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수행을 하고 모이신 여러 도반(道伴)들을 만났으니 너무 반갑고, 고향에 일가친척을 만난다고해서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일가친척은 만나봤자 거북하고 신경쓰이고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서 저기서 한 철을 지내고 모인 도반들은 안면이 있는 분이나, 안면이 없는 분이나 이렇게 해제를 하고 만나면 수십년 보고 싶었던 고향친구가 이보다 더 반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변이 없어서 내가 반가운 척은 못합니다마는, 마음속으로는 정말 반가운 것입니다.

 

나와 같이 한 목적을 향(向)해서 가는 도반(道伴)이요, 현재 한 목적을 향해서 고행(苦行)을 해 나가는 형제이기 때문에, 그리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또 다시 만나야 할 도반이요 궁극(窮極)의 목적지에서 다시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또 만나가지고 중생교화(衆生敎化)를 해야 할 그러한 도반이기 때문에 그러리라고 생각을 합니다.(처음~21분1초)

 

 

 

 

(2/3)----------------

 

부처님께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말씀하시기를,

'대저 도(道)를 닦는 것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은, 한 나무토막이 물에 있어서 흐름을 따라서 흘러 흘러가다보면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않고, 또 흘러가다가 어떠한 사람한테 이렇게 사람이 건져버리지 않고 또 어떠한 귀신이나 그런 것에 의해서 차단을 당하지 아니하고, 또 소용돌이치는 그런 물 소용돌이 속에 빠져서 빙빙 돌면서 떠내려가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가다가, 흘러 내려가다가 썩어져서 없어져버리지만 않는다면, 그 나무토막은 결정코 바다에 도달하는 거와 같다'

 

그러면 <양쪽 언덕에, 물이 흘러가다가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않는다>하는 것은 생사(生死)니 열반(涅槃)이니 하는 그러한 소견(所見)에, 그러한 두 언덕에 집착(執著)을 하지 아니한 것을 비유한 것이고.

<사람에게 건짐을 당하지 않는 것>은 인천(人天)에, 사람의 세계나 하늘나라에 선업(善業)을 지어가지고 복(福) 받는데 빠지지 아니한 것을 비유한 것이여.

 

사람이 살아감에 악(惡)한 짓은 하지 말고 선업(善業)을 닦아서 사람으로 태어나되 좋은 곳에 태어나고, 하늘나라에 태어나서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이 도문(道門)에 있어서는 그렇게 복(福) 받고 호강하고 잘 먹고 잘산 거 그렇게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복 받고,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하고 그러면 자연히 사람이 교만해지고 거만해지고 남을 업신여기고 편안한 데에 빠져가지고 도(道) 닦을 마음을 내기가 어려워서 그거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별로 그걸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귀신에 차단(遮斷)을 당하지 않는 것>은 사견, 불법을 믿으면서도 정법(正法)에 대한 바른 사상이 백히지를 못하고 사견(邪見)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사견에 빠져 놓으면 겉으로는 열심히 도(道)를 닦은 것 같애도 속마음에 사견에 떨어져 있어 놓으면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출현(出現)해도 그 사람은 제도할 수가 없다 그랬습니다.

이미 그릇에, 아무리 그 그릇이 좋아도 못된 것이 가뜩차 갖고 있으면 다른 것을 아무리 그 그릇에다 담으려고 담어도 소용이 없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견 가운데에도 가장 으뜸가는 사견은 인과법(因果法)을 믿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공견(空見)에 집착해 빠지는 것이여.

공견에 빠지면은 인과법을 믿지 않고 막행막식 해가지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법도(法度)가 없어가지고 마구잽이 닥치는 대로 하거든.

 

인과법을 철저히 믿으면 말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하고 무서운 것을 알며, 행동 하나가 얼마나 무섭고 소중한 것인 줄 알며, 그러기 때문에 인과법을 철저히 믿어야 저절로 악업(惡業)을 짓지 아니하고 정법(正法)을 믿고서 정법에 대한 바른 사상이 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물이 빙빙빙 도는 회오리 소(沼)에 한 번 빠지면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해> 삼계(三界)의 회오리거든.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 삼계(三界)의 회오리 속에 빠지면 여간해서 거기에서 헤어나지를 못해.

그속에는 오욕락(五欲樂)—재산에 대한, 색(色)에 대한, 명예 권리에 대한, 또 안락(安樂)과 수면(睡眠)에 대한 그런 오욕락에 빠져가지고, 그리고 서로 인연을 악연(惡緣)과 선연(善緣)을 지어가지고 서로 좋아하고 미워하고 또 복수하고 은혜를 갚고 그러한 업연(業緣)에 얽혀가지고 여간해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그말이여.

 

인과법을 믿되, 믿기는 철저히 믿되, 거기에 '어떻게 하면 인과(因果) 속에서 해탈(解脫)할 수 있느냐?'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여.

정법(正法)을 철저히 믿고 정법에 의해서 수행(修行)을 해야 우리가 이 생사(生死)의 윤회(輪廻) 속에서 살면서 거기에 얽히지 아니하고 해탈(解脫)하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그 나무토막이 흘러가다가 썩어서 부패해가지고 부서져버리면 바다에 이르지 못하는데> 그것은 무엇에다가 비유한 것이냐 하면은 불교에 소승(小乘)과 중승(中乘)에, 이승(二乘)에는 멸진정(滅盡定) 외도(外道), 멸진정이라고 하는 경계(境界)가 있는데 그 멸진정에 한 번 빠져 놓으면 몇만 겁(劫)이 지내도 거기서 헤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말이여.

 

수행을 하되, 참선(參禪)을 하되 무기(無記)에 빠져가지고, 그 편안하고 깨끗하고 조용한 그 경계에 빠져서 그것에 맛을 들여 가지고 거기에 빠진 채 그것이 공부인 줄 알고 수행을 하면 결국은 이승(二乘)의 멸진정(滅盡定)에 빠져가지고 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참선을 하되 처음에는 화두를 들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자꾸 일으켜 가지고 또 챙기고 또 챙기고 하지만, 차츰차츰 망상(妄想)이 가라앉고 조용하고 깨끗해지면 화두 드는 것도 귀찮애지고, 화두를 들면은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가 흩어질까 두려워서 화두를 들지 않고 가만히 고요한 것을 맛보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기공(無記空)에 빠지게 된다 그말이여.

 

그래서 산승(山僧)이 항상—화두가 끊어지거나, 딴생각[別念]이 들어와서 화두를 놓치거나 하면 다시 자기의 화두를 들되, 이미 들어진 화두가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한 가운데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거든 거기에서는 자꾸 거기다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그렇게 어거지로 거기다가 덮치기로 화두를 들지 말고, 이미 독로한 그 의단을 묘(妙)하게 잘 관(觀)해 가도록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보면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다 보니까, 그 의심관(疑心觀)을 하다가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르르 하니 의심이 성성(惺惺)하지를 못하고 그냥 의심이 없어져버리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럴 때는 터억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자기의 화두[本參話頭]를,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때는 한 번 또 챙겨야 하는 거여. 챙겨가지고 또 성성하고 적적한 가운데 의단이 독로하면 그때는 그 독로한 의단을 터억 관(觀)해 나가는 거여.

 

'어떤 것이 무기(無記)냐?' '어떤 것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들려져 갖고 있느냐’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관찰을 해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않고, 생사(生死)니 열반(涅槃)이니 한 소견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인천(人天)의 선업(善業)에 걸리지 아니하고> <사견(邪見)에 맥히지 아니하고> <삼계(三界)의 회오리에 빠지지 아니하고> <이승(二乘)의 멸진정(滅盡定)에 빠지지 아니하고>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거각(擧却)해 가지고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화두를 들지 안해도 성성적적하게 의단이 독로한 채로 나가면 결정코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고조사(古祖師)가 한결같이 보증(保證)을 하시고 증명(證明)을 하신 바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성성적적하게 화두를 들어갈 수 있도록 간곡(懇曲)하게 설법을 해 주시는 선지식, 또 그러한 선지식이 설해주신 법문을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라도 자주 들으면서 정진(精進)을 해 간다면 사견(邪見)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사십이장경』에 말씀하시기를,

'내 법(法)은 염무념념(念無念念)이요, 생각하되 생각 없이 생각하고, 행무행행(行無行行)하며, 행하되 행하는 바가 없이 행하고, 언무언언(言無言言)하며, 말을 하되 말함이 없이 말하고, 수무수수(修無修修)하야, 닦되 닦음이 없이 닦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바로 나의 정법(正法)이다' 그 말씀입니다.

 

이 무념(無念)의 념(念), 무행(無行)의 행(行), 무언(無言)의 언(言), 무수(無修)의 수(修)의 이 뜻을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수행하는 요지(要旨)가 거기에 있어.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고.

이 수행법을 아지를 못한 사람은, 미(迷)한 사람은 저 멀다 그말이여.[會者近爾 迷者遠乎]

 

이것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하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닦아가는 이 법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여, 말길이 끊어졌으며, 비물소구(非物所拘)여, 이것을 가로막을 아무 물건도 거기는 없는 것이며, 그런데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여.

 

'이것이 무념(無念)이요, 이것이 무행(無行)이요, 이것이 무언(無言)이요, 이것이 무수(無修)요, 이것이 무증(無證)이로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그것이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그말이여.

실지수유(失之須臾)여. 수유(須臾)라고 하는 것은 잠깐, 번갯불 번쩍하는 그 찰나간(刹那間)을 ‘수유(須臾)’라 그러는데, 수유 동안에 놓쳐버리는 것이여.

 

근게 도저히 이 도리(道理)는 여기에 나아가려면은 활구참선(活句參禪)보다 더 요긴(要緊)한 방법은 없다 그말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녹음법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나아가야 거기에는 병폐(病弊)가 붙지를 못하고 사견(邪見)이 거기에는 붙지를 못하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복탁(卜度)으로 요리조리 따지고 비교하고 분석해서 의리(義理)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면은 바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할 뿐만 아니라 점점 도(道)에는 멀어져 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결론을 얻었다고 해 보았자 그것은 사견(邪見)이요, 저 죽고 남 죽이고 불법(佛法)을 망해 먹을 외도(外道)가 되는 것이다.

 

일생 동안을 알 수가 없고, 아무것도 얻은 바도 없고, 본 바도 없고, 느낀 바도 없어도 그 상관이 없어.

알 수 없는 의단으로 나가면은 결정코 깨달음을 얻고야만 마는 것이고,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到來)하지 아니해서 그렇다면 그것은 아무도 원망할 것도 없고, 그것은 별로 나쁜 것이 없어.

 

아무리 바르게 열심히 해도 인연이 도래하지 아니하면 더디 깨닫게 되는 것이고, 얼마 안 닦아도 퍼뜩 깨달은 사람은 전생(前生)에 많이 닦아 놓은 사람이고.

전생에 닦아 놓은 것이 없으면은 금생(今生)에 비록 열심히 한다고 해도 더디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고, 마지막 죽어갈 때도 깨닫지 못하고 의단이 독로한 채 터억 숨을 거둘 수 있다면은 무엇이 원통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빨리 깨달라 가지고 '아무개가 견성(見性)했다', '내가 빨리 조실(祖室)도 한바탕 해야겠다', '천하(天下)를 향해서 큰소리도 한번 쳐봐야겠다'

쯧! 도(道)가 무엇인 줄 모를 때에는 혹 그런 생각도 할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먹을 것도 안 먹고, 하고 싶은 것도 안 하고 청춘을 버리고 참 도(道)를 닦게 될 수도 있을런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해도 그것이 오히려 좋고, 누가 나를 무시를 하거나 업신여기거나 일생을 바보처럼 산다 해도 그 속에 한량없는 법희선열(法喜禪悅)이 있는 법이지, 누가 알아주고 그런다고 해서 그게 괴롭기만 하지 그 별로 좋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여러 도반(道伴)들은 과거에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께서 말씀하신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든지,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선교석(禪敎釋)」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바보가 되아 가지고 말귀도 못 알아듣고, 오직 배고플 때 밥이나 먹고 화장실이나 갈 줄이나 알제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똥멍청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고.

만공(滿空) 스님께서도 "그러한 바보가 되어서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야 일대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니라"고 간곡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 도반들께서도 그러한 마음으로 수행을 하신다면은 결정코 남에게 속지 않는, 속임을 당하지 않는 진정한 수행자가 되실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많은 수행자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21분2초~39분55초)

 

 

 

 

(3/3)----------------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다. 진로형탈, 진로(塵勞)라는 것은 생사의, 생사진로(生死塵勞)여. 생사진로를 멀리 해탈(解脫)하는 일은 이것 보통일이 아니다 그말이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긴히 콰악 승두(繩頭)를 잡어서, ‘마음의 머리’, ‘화두의 머리’를 잡어가지고 한바탕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야 할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바탕 그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하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오.

 

매화꽃은 눈 속에서 눈이 펄펄 휘날릴 때에 매화꽃이 피는데, 삼동(三冬)에 기후가 되게 강추위를 해야, 헌 뒤 끝에 매화가 피어야 그 향취(香臭)가 진동하는 법이여. 이상난동(異常暖冬)으로 겨울이 춥지를 않고 뜨뜻한 속에서 매화꽃이 피면 향취가 없다.

 

그와 같이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해서 바보 천치가 되어서 오직 하나만을 향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열심히 정진을 해서 그래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얻어져야 대오(大悟)를 할 수가 있다는 황벽(黃檗) 스님의 우리의 후학자(後學者)들에게 위해서 남겨주신 게송(偈頌)입니다.

 

 

이것은 우리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들께 말씀드리는 말씀이고, 오늘 백중날을 기해서 선망부모와 비명에 간 원근친척 형제자매의 그 영가를 천도하기 위해서 모이신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에게 한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그동안에 칠칠일, 천도재(薦度齋)도 지내시고 사십구재(四十九齋)도 지내시고 백일이나 또 이 소상(小祥) · 대상(大祥)의 천도재도 여러 번 모다 지내시고 해서 그러한 정성(精誠)으로 이미 다 좋은 곳에 가서 태어나신 영가도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인연이 아직 도래하지 못해서 좋은 곳에 태어나지 못한 그런 영가를 위해서는 이런 칠월 백중날 이런 우란분재(盂蘭盆齋)에—우란분(盂蘭盆)이란 말은 범어(梵語)인데, 한문으로는 '구도현(救倒懸)'이여. '구제할 구(救)'자, '꺼꾸러질 도(倒)'자, '매달릴 현(懸)'자. '꺼꾸로 매달려서 지옥고를 받고 있는 그런 선망부모에 영가를 구제한다'는 뜻에 '구도현'인데, 범어로는 '우란분(ullambana)'이라 그러는 거여.

 

우란분재일(盂蘭盆齋日)을 맞이해서 여러분이 이렇게 오셨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자리에는 용주사 선방, 또 저 승련사라든지 또 전주 위봉사라든지, 또 대전에 세등선원이라든지 또 회룡사라든지 또 저기 윤필암이라든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다 열심히 공부한 수행자, 무심도인(無心道人)이거나 준(準) 무심도인 후보자거나 그러한 수행자(修行者)들이 이 자리에는 많이 참석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 법회(法會)가 끝나면은 그런 분들에게 여러분이 내신 정성스러운 동참금, 모다 가지고 오신 모든 맛있는 과일들, 그런 것들, 그 정성 들여 온 공양구(供養具)가 그러한 스님네께 바쳐질 것입니다.

 

그런 스님네께 공양한 그 공덕으로 여러분이 그렇게 마음속에 묻었던, 마음속에 떠나지 못한 그러한 영가들이 좋은 곳으로 다 해탈해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동안에 마음속에 묻었던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그런 영가들을 오늘을 기해서 깨끗이 잊어버리시고 밝고 명랑한 마음으로, 그 대신 철저히 정법(正法)을 믿고 여러분들은 열심히 참선(參禪)을 하셔야 합니다. 참선을 해야 아귀도나 지옥고나 축생도에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떨어진 뒤에, 여러분의 자손들이—또 우란분재(盂蘭盆齋)에 해주면 그때 가도 늦지 않으리라—그런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자식들이 나중에도 또 이 불법(佛法)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알 수가 없고, 개종(改宗)을 할는지 종교를 안 믿게 될는지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부처님께서 사람의 마음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셨거든요.

자기가 자기 마음도 믿지를 못하는데, 똥 누러 갈 때 다르고 올 때 다르고, 아침에 먹은 마음 막 금방 일어서면서 마음이 변하는 건데, 어떻게 자식이 아무리 착한들 자식을 꼭 믿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살아서 정법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해 놔야 금생에 확철대오를 하면 그건 말할 것도 없고, 확철대오 하는 길로 가는 길을 알고 열심히 가기만 해도 그 어디냐 그말이여.

정법을 믿고 화두(話頭)를 타고 안거증(安居證)을 탁 타놓으면 도솔천내원궁에 가는 특별 뭐, 그 차표라고 하나, 비행기표라고 하나, 티케트(ticket)를 타놓은 것이나 마찬가지거든.

 

그러니까 첫째는 믿어야 하고, 믿었으면 그것을 실천을 해야 하고, 실천을 하되 실다웁게 실천을 해 나가면 그거이 어디로 가냐 그말이여. 공든 탑은 절대로 무너지는 법이 아니거든.

 

이 법문이 끝나면은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고 축원(祝願)을 하고 그다음에는 이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셔진—위패는 오만육천 번의 위패가 모셔져가 있고, 그 위패 가운데 모셔진 영가 수는 팔만육천 위(位)의 법보영가(法寶靈駕)가 이 법당(法堂)에 모셔져 있습니다. 나날이 그 위패의 수가 불어나서 머지않아서 이 법당 안에 가뜩차게 되아서 법당을 새로 짓던지 무슨 수를 내야겄는데.

 

이것은 그 여기 법보단(法寶壇)에 영가를 모셔 놓으면 이렇게 법회(法會) 때마다 영가도 우리와 같이 법문(法門)을 듣고—다 몸, 육체는 없지마는 그 영가의 그 영식(靈識)은 소소영령(昭昭靈靈)해서 우리 육체를 가진 사람보다도 법문을 더 잘 들으십니다.

그래서 생존시에 얽혔던 원한 관계도 다 풀어지고, 못다 푼 한도 다 풀고, 그래가지고 영가의 위치에서 나름대로 터억 정진을 하다가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돌아오면 극락세계나 도솔천내원궁에 가서 환생(還生)을 할 거고 또 인간에 인연이 있으면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여러분의 좋은 아들로, 손자 손녀로, 며느리로 이렇게 또 만나게 됩니다.

 

만나봤자 숙명통(宿命通)이 열리지 아니하면 한솥밥을 같이 평생을 먹어도 모릅니다.

모르지만 아들딸 · 손자 · 손녀 · 며느리 · 손자 · 손부가 우연히 만나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우연히 만나지는 것이 아니고, 인연(因緣)을 지어가지고 그 인연에 의해서 만나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왕이면 좋은 인연을 맺어야 좋은 가족으로 또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으로 오는 사람이 꼭 남의 식구만 오는 게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가,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자기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또 아버지 어머니가 자기집에 돌아오는 확률이 제일 많습니다.

 

왜 많으냐?

제일 인연을 많이 지어놨거든.

 

그러니 부모님께 또는 조부모님께 효도로써 잘 봉양(奉養)을 하면, 그 집에 아들딸 · 손자 · 손녀 · 손부로 요렇게 오되 효자 · 효녀 · 효부로 들어온다 그말이고.

 

부모에게 불효(不孝)를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불효를 하고 그러면, '이놈!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가르켰는데, 내가 못 먹고 못 입으면서 너를 내가 어떻게 가르켰는데, 니가 나한테 불효를 해? 장가가더니 기집한테 빠져서 나한테 불효를 해?'

 

부모가 성현(聖賢)이 아니거든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성현이 아닙니다.

잘해 드리면은 좋아하시고, 잘 못해 드리면은 '이놈! 두고보자'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중생(衆生)이기 때문에.

그러한 원한을 품고 돌아가셨을 때에 그 집에 아들딸 · 손자 · 손부(孫婦)로 오면은 그 사람이 효자(孝子) 효부(孝婦)가 되겠냐 이 말씀이여.

 

그러니 자기의 부모는 자기를 그렇게 키웠는데, 자기는 부모한테 효도를 못하거든. 그러면서 그 자식이 자기한테 효도를 하기를 바래겠습니까?

못 바랩니다. 그놈은 더 불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안이 문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이야 정법(正法)을 믿는 여러분인데 이런 말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다 효자이시고 효부이시고 다 그러셔서 이런 말이 군더더기 말인 줄 알면서도 그래도 주마가편(走馬加鞭)으로,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는 식으로 내가 말씀을 드리는 건데, 여러분은 정말 자식들을 사랑하듯이 부모님께도 효도를 해야 합니다. 그동안에 효도를 하셨어도 더욱 잘하셔야 합니다.

 

효도하는 방법은 맛있는 것 많이 해 드리고 좋은 옷 해 드린 것, 그것은 껍데기 효도고,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마는 마음으로부터서 우러나와서 해 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해 드리냐 하면은 '시부모다' 생각하지 말고, '친어머니, 친아버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좀 말도 좀 임의(任意)롭게 해도 좋고, 그냥 형편이 안되면 쪼끔 잘 못해 드려도 흉허물이 없습니다.

 

'시어머니다, 시아버지다' 생각하니까, 형식적(形式的)으로 하니까 하기가 매우 힘들고,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시부모는 먼저 알고 있습니다. 흥! 지가 형식적으로 한 것 빤히 알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받드는 것 잘 압니다.

미처 형편이 안 닿고, 미처 시간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형편이 안되어서 못해 드려도 더 알고 있어.

친정 친어머니 친아버지는 더 잘 아시는 법이예요. "염려마라!" 피차 지내기가 대단히 편합니다.

 

여러분이 아들, 딸을 시집보낼 때 "시어머니한테 잘해라. 잘해라"하지 말고, "친정어머니 아버지한테 하듯 해라" 그 말만 하면 더이상 자세한 설명이 필요가 없어.

나는 어쩌다 한 번씩 옛날에는 주례(主禮)를 섰는데, 지금은 해달라고 해도 내가 그거 하다보면 한이 없으니까 미안하지마는 나는 사절(謝絶)을 하고 통 안 하는데, 이 자리에 아들딸 여의지 않은 분들에게 주례사(主禮辭) 겸해서 하는데, 친정어머니한테 하듯, 친정아버지한테 하듯 하면 그 복잡한 주례사가 필요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가운데 연세가 많으신 분도 있고, 연세가 아직 젊으신 분도 있고 어린 사람도 있고 그러는데, 정말 부모한테는 잘해야 하고, 그 나의 부모한테 잘하듯이 다른 연세 많은 분한테도 그러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그 집안도 복(福)을 받게 되고, 그 사회도 살기 좋은 사회가 되고, 그러한 사람이 기업을 운영을 해야 그 기업체도 잘되어가고, 그러한 분이 정치를 해야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정치를 해야 정치도 잘하는 법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인간세상이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만드는 법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내가 나를 찾는 사람은 자연히 십선(十善)을 행하게 되고, 십선을 하나로 뭉치면 그것이 바로 '이뭣고?'요, 그것이 바로 부모에게는 효도가 되고 나라에게 대면 충성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한 말씀은 육체를 가진 여러 도반들뿐만이 아니라 이 법보전(法寶殿)에 팔만육천의 법보영가(法寶靈駕)를 비롯한 우주법계에 가득찬 우리의 인연 있는, 인연 없는 모든 영가(靈駕)도 다 이 말씀을 들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사 과거에 인연을 잘못 지어서 아직 좋은 곳에 가시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법문과 산승(山僧)의 이 간곡한 말씀을 듣고서 원한을 다 풀어버리시고 좋은 곳으로 가서 태어나시게 되기를 바래고,

기왕이면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우리 법보가족이 되기를 바래고, 인간이 아주 질렸으면 저 극락세계나 도솔천내원궁에 가셔서 거기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시기를 바랩니다.

 

이것으로써 오늘 정축년 하안거 해제와 또 우란분재와 백일기도 회향에 즈음해서 산승이 여러분께 간곡히 말씀드리는 것을 맺고자 합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금생에 만약 이렇게 간곡히 해 드린 말씀을 믿고 실천하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후세에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39분56초~60분30초)(끝)

 

 

 

 

----------------(1/3)

 

*(게송) ‘사시순환난부한(四時循環暖復寒)~’ ; 중봉명본 스님의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峯和尙廣錄)』 제30권 '警世二十二首' 게송 참고.

*심원의마(心猿意馬) ; 마음[心]이라는 원숭이[猿]와 생각[意]이라는 말[馬]. 의마심원(意馬心猿).

마음과 생각이 제멋대로 대상(對象)을 향해 항상 동요하고 고요하지 못한 모양이 질주하여 달리는 말[馬]과 쉼 없이 움직이고 조잘대는 원숭이[猿]와 흡사하기 때문에 생긴 비유이다. 일정하지 않게 예측불허로 변화하는 생각을 나타낸다.

*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〇전오식(前五識) ; 팔식(八識) 가운데 앞의 다섯 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말한다.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〇의식(意識) ; 팔식(八識) 가운데 제6 의식을 말한다. 육식(六識)의 하나.

①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 인식하는 마음 작용. ②알고 사고하는 마음. 생각하는 마음. 의식은 과거, 미래에의 대상에 대해서도 작용한다. 즉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예상할 수가 있다.

6식설(六識說)에서는 의식(意識)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제6 의식은 흔히 '마음'이라고 부르는 존재인데, 그 단계를 셋으로 나누면 첫째 제6 의식, 둘째가 제7 말나식, 셋째가 제8 아뢰야식이다.

 

〇말나식(末那識) ; 말나(末那)는 [산스크리트어] manas의 음사로, 의(意)라고 번역.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과 구별하기 위해서 의(意)라 하지 않고 말나(末那)라고 한다.

8식설(八識說)에서 마음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8식(八識: 8가지의 식) 가운데 하나로 제7식(第七識), 제7말나식(第七末那識) 또는 말나(末那)라고도 한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밑에서 조절하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으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끊임없이 자아(自我)라고 오인하여 집착하고, 아뢰야식과 육식(六識)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여 끊임없이 육식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으로, 항상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의 네 번뇌와 함께 일어난다.

제8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種子)를 이끌어 내어 인식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생각과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

 

〇아뢰야식(阿賴耶識) ; 8식설(八識說)에서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진(眞)과 망(妄)이 함께 있다고 하여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라고도 하며, 본래 깨끗한 것이 드러나 있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고 하여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반연(攀緣 잡을·매달릴·의지할 반/인연 연) ; ①마음이 대상경계에 의지해 움직임(작용을 일으키는 것). 대상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의 혼란. ②인식함. ③인식 대상. ④얽매임. 집착함. ⑤인연에 끌림.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우란분재(盂蘭盆齋) ; 지옥도와 아귀도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베푸는 재(齋).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극심한 고통을 받는 악도(惡途) 중생과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일체 유주무주(有主無主) 영가를 구제하고자 삼보(三寶)에 공양하고 재(齋)를 베푼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부터 우란분재가 성행하였다고 전한다.

 

우란분회(盂蘭盆會) · 우란분절(盂蘭盆節) · 우란법회(盂蘭法會) · 우란재(盂蘭齋)라고도 한다.

우란분재일인 음력 7월 15일은 많은[百] 대중에게 공양하는 날이라 해서 백중(百衆), 많은 음식을 마련하여 공양한다 해서 백종(百種), 안거(安居)가 끝나는 날이라 해서 백종(百終)으로 부르고, 세시일로는 백중(百中 · 白衆 · 백족白足)이라 한다.

*우란분(盂蘭盆) ; 산스크리트어 ullambana. 우란은 오람바나(烏藍婆拏)라고도 음사(音寫)하고, 도현(倒懸 :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극심한 고통), 또는 구도현(救倒懸 : 거꾸로 매달린 고통에서 구제한다)이라 한역(漢譯)한다.

분(盆)은 그릇(식기)의 뜻으로, 한역하면 구기(救器)라고 하며, 뜻으로 구성해 말하자면 '거꾸로 매달린 고통에서 구제하기 위해 (음식을 가득 담아 삼보三寶에 공양 올리는) 그릇[救倒懸器]'이라 한다.

 

절에서, 음력 7월 15일에 지옥이나 아귀의 세계에서 거꾸로 매달려 고통 받고 있는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님과 승가에 공양하는 의식.

『우란분경(盂蘭盆經)』에 의하면 부처님 제자 중에 신통력이 제일인 목련존자가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고 있는 어머니를 구해주려고 하였으나 신통력으로도 어찌 할 수 없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모두 모이는 하안거가 끝나는 7월 15일인 자자일(自恣日)에 삼보(三寶)에 공양하게 하여 목련존자의 어머니를 악도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송담스님(No.243)—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십대제자(十大弟子) ; 석가모니의 제자 중 수행과 지혜가 뛰어난 10명을 이르는 말.

*공양(供養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목련경(目連經) ; 목련 존자(目連尊者)가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건진 일을 다룬 경문으로, 음력 칠월 백중날이면 이 경을 읽고 기도한다.

*우란분경(盂蘭盆經) ; 1권. 서진(西晋)의 축법호(竺法護) 번역. 목련(目連)존자가 아귀(餓鬼)의 고통을 겪고 있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해 세존의 가르침대로 자자일(自恣日)에 여러 부처님와 보살, 그리고 스님에게 갖가지 음식과 과일을 지성으로 공양하여 어머니를 제도하였다는 효성을 설한 경.

*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十一)』

佛言 飯惡人百 不如飯一善人

飯善人千 不如飯一持五戒者

 

飯五戒者萬 不如飯一須陀洹

飯百萬須陀洹 不如飯一斯陀含

飯千萬斯陀含 不如飯一阿那含

飯一億阿那含 不如飯一阿羅漢

 

飯十億阿羅漢 不如飯一辟支佛

飯百億辟支佛 不如飯一三世諸佛

飯千億三世諸佛 不如飯一無念無住無修無證之者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나 망상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구체적인 대상 속에 있으면서 그 대상에 대한 어떤 망상 분별도 없으므로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없다거나 사물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며, 대상을 지향하되 그 대상에 대한 망상 분별과 집착이 없음을 나타낸다. 또한 일정하게 정해진 마음의 양태가 없이 대상에 응하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은산철벽(銀山鐵壁) ; 철벽은산(鐵壁銀山). 은과 철은 견고해서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높아 오르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 은(銀)으로 만든 산이요, 쇠로 만든 벽에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앞뒤가 다 끊어져 버린 절박한 상황에 직면(直面)하여 아무것도 사량분별(思量分別)이 거기서 있을 수가 없는 것을 가리킴.

 

수행자에게 이 은산철벽은 내 몸과 목숨을 다해서 뚫고 들어갈 수밖에는 없는 관문(關門)으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마치 모기가 쇠로 된 소 등어리에 올라타고서 그 입부리를 소 등에다가 처쑤셔박는 것처럼,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막론(莫論)하고 입부리와 머리와 몸을 압량해서, 합해서 처박고 돌격을 해 들어가야 한다.

자기의 근기(根機)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건강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어리석고 영리한 것도 따질 것도 없고, 남녀노소도 따질 것도 없고, 유식 무식도 따질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되 불급불완(不急不緩), 너무 용을 쓰고 몰아붙여도 안 되고 너무 늘어져 처져도 안 되고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게 자기의 본참공안을 들어야 한다. 공부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도 따질 것이 없다.[송담스님(No.577) 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7~158 에서.(가로판 p150~151)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실참실수(實參實修)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수행하는 것. 실참(實參), 실답게 참구(參究)한다는 것은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을 말한다. 참(參)은 참선(參禪) 또는 참구(參究).

관념에 그치거나 들어서 아는 지식에 그치지 않고 참으로 실천하는 선수행을 말한다.

*공안(公案, 話頭)을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2/3)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二十七 無著得道)』 -- 卍新纂大日本續藏經 第37冊 No.669 四十二章經註 (1卷) 【宋 守遂註 明 了童補註】

佛言 夫爲道者 猶木在水尋流而行 不觸兩岸 不爲人取 不爲鬼神所遮 不爲洄流所住 亦不腐敗 吾保此木決定入海

(註) [不觸生死涅槃兩岸 不爲人天有漏善業所取 不爲邪見鬼神所遮 不爲三界洄流所住 亦不腐敗於二乘滅定 決入薩婆若海]

 

學道之人 不爲情欲所惑 不爲衆邪所嬈 精進無爲 吾保此人 必得道矣

(註) [情欲不能惑 衆邪不能嬈 正進無爲 道遠乎哉]

 

*별념(別念) ; '딴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5분 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十八)』

佛言 吾法 念無念念 行無行行 言無言言 修無修修 會者近爾 迷者遠乎 言語道斷 非物所拘 差之毫釐 失之須臾.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시절인연(時節因緣) ; 시절이 도래(到來)하고 인연이 합쳐지는 기회.

[참고] 시절(時節) : 어떤 시기나 때. 도래(到來) : 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기회(機會)—어떠한 일, 행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

*도래(到來 이를 도/올 래) ; 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법희선열(法喜禪悅) ;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듣고 따르는 기쁨[喜]과 선정(禪定)에 드는 기쁨[悅].

 

 

 

 

----------------(3/3)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ṣ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승두(繩頭) : 승(繩)은 목수가 쓰는 직선을 긋는 노끈이고 두(頭)는 어조사다。 불조의 계법(戒法) 규칙. 화두.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황벽(黃檗) : (? – 850) 법명은 희운(希運), 복건성(福建省) 복주부(福州府) 민현(閩縣)에서 났다. 어려서 신동이라고 불리더니, 강서성 서주부 황벽산에 가서 출가하였다가, 백장에게서 마조의 할에 백장이 깨치던 사연을 듣고, 그 자리에서 크게 깨치고 나서 백장의 법을 이었다。그 뒤에 배휴(裵休)의 청을 받아 여러 곳에서 교화하였으나, 가는 곳마다 그 산 이름을 처음 출가하던 산 이름 그대로 황벽산이라 하였다.

그가 염관사(鹽官寺)에 있어 예불하는 자리에서 뒷날의 선종(宣宗)이 그에게 법문을 묻는데, 그가 세 번이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뒤에 선종이 즉위하여 그에게 추행사문(麤行沙門), 곧 행실이 거친 중이란 법호를 주려고 하자, 배휴가 간하기를 『황벽선사가 폐하에게 세 번 손질한 것은, 폐하의 삼제(三際 곧 三世) 윤회를 끊는 뜻입니다』하여 단제선사(斷際禪師)의 호를 내리게 되었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無常)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 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 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사십구재(49재, 四十九齋) ; 사십구일재(49일재, 四十九日齋) 또는 칠칠재(7 · 7재, 七七齋).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면서 또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천수경, 무상계, 반야심경, 장엄염불, 금강경 등), 한 생각 돌려 무상을 깨달아 윤회를 벗어나 해탈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 죽은 날로부터 7일마다 7회에 걸쳐 행하는 영가를 위해 베푸는 법회의식.

불교의 내세관(來世觀)에서는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이 죽어서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49일 동안을 중음(中陰)이라 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과보를 받을 다음 생이 결정되므로, 이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 영가가 죄업을 참회하고 지혜의 눈을 밝혀 해탈의 길을 가도록 이 재(齋)을 지냄.

특히,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날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이라고 하여 7회째의 재(齋)를 중요시함.

 

불경(佛經)에서 설한 바에 의하면 사람의 존재 상태를 4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①생유(生有: 태어나는 순간) ②본유(本有: 生에서 死까지 생애) ③사유(死有: 죽는 그 순간) ④중유(中有: 이생에 죽어서 다음 生까지를 말함)이다.

이들 중 네 번째의 중유(中有)의 상태의 정상적인 기간이 49일이다. 즉 사람이 죽은 뒤에는 일반적인 경우 49일이면 중유(中有)가 끝나고 다음 생(生)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전인 48일째에 정성을 다하여 영혼의 명복을 비는 것이 49일재이다.

*소상(小祥 작을 소/제사 상) ; 사람이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

*대상(大祥 큰 대/제사 상) ; 사람이 죽은 지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

*무심도인(無心道人) ; ①모든 번뇌망상이 사라져 더이상 추구할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른 사람을 가리킨다. 모든 것에 대하여 구하는 것이 없고 얻는 것도 없는 수행자.

②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 무심적적(無心寂寂)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 사량계교심을 다 놓아버리고 언제나 천진무구한 본연자성(本然自性)으로 살아가는 사람.

*공양구(供養具) ; 부처님이나 보살님께 바치는 음식물·향·꽃 등의 물건, 또는 그 물건을 바칠 때 사용하는 기구.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임.

*공양(供養)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만년위패(萬年位牌) ; 전강 조실스님께서 우리들의 선망부모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

영가에게 대웅전(舊 법보전) 법보단에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여 이 법보단에서 좋은 도반들과 한 가족이 되어, 용화선원이 있는 한 계속 매일 예불시 축원하고 법회 때나 평소에 법문(法門)을 들려드려 영가가 원한심을 내려 놓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스스로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강선사께서 만드신 제도.

*영식(靈識) ; 영묘한(靈妙- 신령하고 미묘한) 의식. 제8식. 영혼.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人道]로 다시[還] 태어남[生].

*숙명통(宿命通) :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여섯 가지의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인 육신통(六神通)의 하나로,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자유 자재한 능력.

*임의롭다(任意롭다) ; ①얽매이는 것이 없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②서로 친하여 거북하지 아니하고 행동에 구애됨이 없다.

*극락정토(極樂淨土) ;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  아미타불이 계시는 청정한 국토로, 이 세계에서 서쪽(西方)으로 십만억 불토(佛土)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일체의 괴로움이 없고 자유롭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세계. 수가마제(須呵摩提, 須訶摩提), 수마제(須摩提) 등으로 음사하고 정토(淨土), 안락(安樂), 안양(安養), 서방정토(西方淨土), 낙방(樂邦) 등으로도 한역한다.

*십선(十善) ; 십악(十惡)을 행하지 않는 일.

*십악(十惡) ; 몸(身)과 말(口)과 뜻(생각 意)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〇몸(身) : ①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②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③사음(邪婬 삿된 음행).

〇말(口) : ④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⑤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⑥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⑦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〇뜻(생각 意) : ⑧탐욕(貪欲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⑨진에(瞋恚 성냄). ⑩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게송) ‘금생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