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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無心)중에 그만 산을 보다가도 툭, 뭘 보다가도 툭, 새란 놈이 돌아와 지저거려도 깨달네, 새소리에도.
월백노화처(月白蘆花處)에, 달 떠올라와 노화처(蘆花處)에, 그 달 모도 갈대꽃 사이에 달 비친 데에 툭 깨달라.
그래 초택창랑사(楚澤滄浪詞)라. 일 마쳐 버린다 그말이여.
이렇게 어제 아침에는 주작(做作) 때문에 안된 것을 억지로,
발심도 안되고, 신심도 갖추지 못하고, 분심도 없고, 그저 사람이면 ‘그저 사람인가 보다, 살다 죽는가 보다’
죽는 거 누가 아나? 당장에 그만 곧 숨 떨어질 지경이 앞에 있지마는 그런 것조차 생각할, 그런 것까지도 생각할 겨를도 없는 것이고, ‘이렇게 그저 인생이 몸 받아 나와서 이렇게 사는 것이로구나’
‘그 참선이나 좀 어디 선방(禪房)이나 좀 들어가 볼까?’
삼동(三冬)에 선방에 들어와서 그날그날 그저 하루하루 그저 이틀, 남 따라서 그저 그럭저럭 그럭저럭 그렇게 지내는 것, 그것은 발심(發心)을 못한 관계여.
참으로 발심을 해서 꼭 할 것이 참선(參禪)뿐이다. 미룰 수도 없고.
언제 시간을 미뤄? 언제 내일 해? 오늘은 이것 해 놓고 내일 해? 금년만 이것 해 놓고 명년부터 해? 그런 식으로는 틀린 거여.
직하(直下)에 발심을 해서—한번 그 시간에 발심했거든, 마음을 발했거든, 그때부터 해야 하는 것이여.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할 것이 참선 밖에는 없어. 그렇지 않어?
깨달지 못하면은 그 깨달지 못한 곳에서 그놈의 중생고(衆生苦)를 어떻게 할거여?
우리가 지금 깨달지 못하고 이 몸 뒤집어쓰고 있지만은 그것 편안한 거 아니여.
그 조끔 편안하고 밥 먹고 배부르니까, 아들도 있고 딸도 있고 뭐 그도 어쩌고 어쩌고 이래 있으니까,
뭐 그것이 인생만족, 이만 했으면 족해? 소용없어. 그런 것을 믿고 앉어서, 참선은 않고 그럭저럭 소용없어.
발심이 안됐기 때문에 혼침(昏沈) 도거(掉擧)가 개입작득(皆入作得)을 해.
잠 아니면 망상, 그놈의 것 밖에는 없어.
어디 참선을 발심을 했어야지. 발심 발심 하니까 어떻게 발심인가?
발심을 못했으니 도거와 혼침뿐이여. 그놈 안 들어오면 할 것이 없어.
앉었으나 섰으나 뭐 그밖에는 들어온 것이 없어. 그래서 그날그날, 그날그날, 그날도 그날, 이렇게 해서 일생 보내 버리는 것이여.
발심을 척! 해 가지고는 공부를 한바탕 하고 앉었어 보아라.
그 망상 시간, 혼침 잠자는 시간, 그놈이—이것 참 얼마나 원통하고 그까짓 짓을 하고 앉었는가?
그까짓 짓을 할라면 뭣 할라고 선방에 앉었어? 맹렬하게 다루어라.
그 ‘이뭣고?’ 하나, 세상에 ‘이뭣고?’가 ‘나’인데, 내가 나를 그렇게도 몰라. ‘이뭣고?’를 그렇게도 몰라.
부처님이 출세하셔서 그렇게까지 다 말씀을 해 줘도 몰라.
그 숭악한 못된 애착, 세상에 모도 그 인연 애착, 그까짓 것이 도대체 뭣이냐 그말이여.
애착 다 끊어버리고 이렇게 들어와서 선방에 와 앉았음에 한바탕 참선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참선을 하는 데는 발심이 그놈이 되어야 하지. 발심도 되지 않고 앉었으니 되어?
발심이 없기 때문에 분심(憤心)도 없고, 분한 마음—나를 내가 알지를 못하고 산다는 것이 뭣이여? 분한 마음뿐이지. 그놈 분한 마음.
그 분한 마음이 없으니 뭐 신심(信心)인들 있어? 콱 믿는 마음인들 어디 있어?
첫째, 발심을 해서 화두를 들고 ‘이뭣고?’를 들고, 그 하는 시간을 꼭 일념(一念)을 다루어라.
화두 일념 ‘이뭣고?’ 고놈 하나, 고놈을 다스려 ‘이뭣고?’를 자꾸 계속 해.
‘이뭣고?’ 그놈이 없어지기 전에, 도망가기 전에, 그 뒤에 ‘이뭣고?’를 거다가 딱 때려 붙여. 또 때려 붙이고 또 때려 붙이고. 그놈이 일념이 계속해서, 일념이 연속해서 끊어지지 않게 해 나가는 것이여.
‘하루를 그날 하루를 공부를 잘해라. 하루 동안을 그놈을 잘해라. 또 내일 하루를 또 다시 더 잘해라’
그럴 것 없어. 하루 동안, 하루 동안 그거 너무 늘어져서 못써.
일념 일념을 단속해라.
‘이뭣고?’ 하나 했거든 그 뒷 ‘이뭣고?’가 더 분명하게 때려 붙여야 한다.
‘이뭣고? 대체 이뭣고?’ 아! 이뭣고 그놈이 게을지 않게 틈이 없이 거다 붙여 다루어 해 나갈 것 같으면은 그게 곧 의단독로(疑團獨露) 아닌가? 그 타성일편(打成一片) 아닌가?
그놈이 계속해 나갈 것 같으면은 하루가 뭣이여, 이틀이 뭣이며, 일년도 그만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것이고.
그놈 하나를 단속 못하고, 그만 한번 하다가는 어디로 도망가 버리고는, 그만 망상심 그 못된 번뇌 거기 쳐박혀 가지고는 그만 몇 시간씩 지내간다. 화두 하는 학자가 이리하여 되어?
맨 그래서 혼침(昏沈) 도거(掉擧) 그놈이 개입작득(皆入作得)해 버려. 고놈 생활해 버려.
종일 가야 살림살이가 그놈의 것 뿐이여. 잠 아니면 망상, 망상 아니면 별놈의 생각 다 짓고 앉었다 그말이여.
갱요좌득단정(更要坐得端正)해라.
공부할 때에도 아무 때나 앉지 말고—그냥 픽 들어와 앉어서 다리 쭉 뻗고 앉었던지, 허리를 굽히고 그냥 앉던지, 고개를 그만 숙이고 앉던지, 그것 벌써 참선하는 사람 아니여. 좌선(坐禪)하는 사람 아니여.
좌선하는 사람은 좌(坐)부터 단정(端正)해라. 단정하게 깨끗이 앉어라.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금강권(金剛拳)을 쥐고 하는 법식에 그런 건 너무 필요 없어.
금강권 쥐고, 무슨 다리 가부좌하고 드리(마구) 앉었다고 다리만 점점 그만 끊어질 것 같지, 그거 그만두고.
단정히 앉을 수가 있지 않는가?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허드래도 단정히 앉을 수가 있는 것이고.
딱! 앉어서 어쨌든지 수기척량(竪起脊梁)해라. 척량(脊梁)은 펴라.
이거 순전히 참선해 나가는 거 얘기해 주는 거여. 뭐 다른 법문 아니여. 선객(禪客)들이 참선하는데 참선 법문해 주는 거지. 무슨 다른 법문이 있어?
좌득단정(坐得端正)해라. 좌를 단정히 하고, 척량(脊梁)은 세워. 등줄기가 굽으면 안되니까, 이걸 세워.
딱! 세우고는 앉어서 첫째 ‘이뭣고?’를 해.
화두(話頭)—‘판치생모(板齒生毛)’면 ‘판치생모’, ‘이뭣고?’면 ‘이뭣고?’ 화두를 탁! 챙긴다 그말이여. 그게 첫 조건이여. 그럴 거 아닌가?
좌(坐)만 단정히 앉었다고 뭔 소용이 있나? 허리만 굽히지 않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나? 좌득단정도 소용없고, 허리를 척량을 세운다고 소용없어.
수기척량(竪起脊梁)을 하고, 척량을 세우고 좌(坐)를 단정히 앉는 것은 ‘이뭣고?’하나 하자는 것이여. 목적이 ‘이뭣고?’여. 참선 화두여.
화두 하나를 역력(歷歷)하게 거각(擧却)을 해라. 그놈을 추켜들어 거각을 해라.
그러면은 수마(睡魔)가 어디서 와? ‘이뭣고?’가 그렇게 분명한데 어디서 와? 잠 그놈이 어디서 오냐 그말이여.
발심도 없고, 신심도 없고, 분심도 없고, 공연히 들어와서 남의 시비나 하고, 그러고 왔으니까 그렇지. 그리 해 온 사람이니 그밖에는 올 것 없지.
앉으면 잠이나 오고, 망상이나 들어오고, 남은 참선하지마는 어디가 참선한 체 하고 앉아서 망상 번뇌 모도 고런 것만 분석 따지고 앉었지.
이까짓 놈의 경계, 이까짓 놈의 짓을 할라고 들어왔나? 선방에 잠이나 졸고 번뇌 망상이나 할라고 들어왔나?
거기서 망상이 들어오던지, 혼침이 들어오던지, 무엇이 오던지, 통(전혀) 고까짓 것을 걱정 근심도 하지 말어라. ‘이뭣고?’만 챙겨라. 오직 ‘이뭣고?‘ ‘시심마(是甚麽)오, 이뭣고?’ 그저 ‘이뭣고?’만.
그저 무엇이 올라오든지 말든지 그까짓 것 통 불고(不顧)해 버리고,
염기(念起)를 불파(不怕)하고—무슨 망상 일어나는 놈을 두려워하지 말고, 유공각지(唯恐覺遲)니라—그저 이건 ‘이뭣고?’ 깨달으라는 것이여.
‘이뭣고?’ 아니면은 ‘판치생모’ 다 배운 대로.
이놈 쪼끔 하다가 또 안된다고 또 저놈 또 쪼끔 하고, 또 저놈 하다가 안된다고 이놈 쪼끔 하고. 그건 화두 아니여. 되들 안 해. 그런 법 없어.
똑같은 거니까. 하나 딱! 들거들랑 고놈 하나, 그 화두 일념 일심, 그 화두 하나, 그 참 소중한 거여.
한 생각씩 꼭 한 생각씩, 그 첫 생각 그놈이 끊어지기 전에 연속(連續)을 해. 뒤 연속을 해. 뒷 생각을 척! 거다 때려 붙이고 때려 붙이고.
‘이뭣고?’ 그놈이 분명할 때 더욱 ‘이뭣고?’. ‘이뭣고?’가 더욱 더 ‘이뭣고?’.
그것 해서 그 틈 없이, 사이 없이 그만 해 나갈 것 같으면, 한 시간이 두 시간 되고, 하루 되고 이틀 되고 기맥힌 것이여. 화두정락(話頭定樂)이라니! 화두가 들어와서 그 정락(定樂)! 참 좋다.
세상에, 견성(見性)하기를 목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뭣고?’ 하나 의단독로(疑團獨露)를 목적해라.(처음~20분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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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떡허면 건방지게 들어와서 ‘법담(法談)한다’고 ‘대답한다’고.
당장 쫓아내 버린다 내가. 했어야지! 그걸 옳게 했으면은 왜?
(견성)한 건 벌써 알어. 두말 할 것도 없어. 답할 것도 없고 벌써 알어.
그것 못쓴 거여. 그 거짓 견성. 그 뭐할라고, 벌써 자기는 알면서도 그따구 짓 하거든. 천하에 건방지고 못쓸 것이 그거여.
벼락이지. 이번에 그 쫓겨난 아이, 가서 기맥힌 또 편지를 했구만. ‘다시는 그런 버릇없이, 큰스님을 여의고 어디가 하겠습니까’하고 ‘다시 용서해 달라’고.
용서가 무엇이 용서여? 용서할 것이 따로 있지. 용서가 뭣이 용서여.
똑 그놈의 데서 올라온 것들은 다 그 모양이여! 웬일이냐 그말이여. 불교가 이렇게 되다가는 큰일나 버리겠어.
“양말 한 짝입니다” 이따구 소리나 하고, 아 이런 놈의 응..
견성 벌써 알어. 말할 것 없어.
재각안피중(纔覺眼皮重)이다.
이렇게 다루어 갈 것 같으면은—그 ‘이뭣고?’를 하던지, ‘판치생모’를 하던지, 화두를 이렇게만 똑 다루어서 해 나갈 것 같으면은, 화두뿐이여. 아무리 해도 화두뿐이여.
그러다가 없을 수가 없어. 점점 그 무기(無記)가 들어와서 잠이 들어오던지, 산란이 일어나든지 하면 조끔 일어나. 그때는 좀 일어나. 좌(坐)에만 착(着)하고 앉었지를 말고 일어나.
한번 척 일어나서 밖에 와서 바람도 쐬고 하되, 화두를 추켜들고 밖에 나온 사람은 그저 벌써 보면 알아.
어디를 가고 오던지 전체가 화두가 그대로 딱 벌써—화두가 그 방에서 애써 하든 그 화두 경계가 도망가지 않고 고대로 있어 가지고 나와서, 걸음을 걷고 가고오는 것이 환해.
아무 데나 왔다갔다 왔다갔다 쓰잘 데 없이 이러지를 말고, 어디 가서 한쪽에 조용히 걸음을 걷고 조용히 경행(經行)을 해가면서 잠을 깨 가지고 그 경계(境界)를 깨끗하게 맨들어 가지고 다시 얼른 들어와.
너무 그렇게 오래 자리를 비워 놔두면 되아? 항상 그 자리가 참 중(重)하다. 나 앉어 공부한 자리가 그렇게 중하다.
꼭 비유를 하자면은 암탉이란 놈이 알 나 가지고는 알 품고 있듯 해야 해. 그 닭 짐승인들, 고놈의 것이 그 제 새끼를 만들기 위해서 알 그놈, 그 껍데기 속에 든 것, 그거 품고 있는 것 좀 봐.
한 이십 여일, 스무 닷새나, 닭 그거 그 방정맞은 것이 한시도—그저 뭐 주워먹기도 하고, 돌아다니면서 그저 헤비고 모도—그 일순간도 참지 못하고 그런 것이,
알만 낳아 놓으면은 고놈을 품고 이십 여일 동안, 스무 닷새 동안, 근 한달 동안을 가만히 앉었네. 닭 같은 것도 보란 말이여. 그래 가지고 거그서 새끼를 만든다 그말이여.
소위 중생이 성불(成佛)하는 법이, 나를 내가 깨치는 법이, 그렇게 쉽고 언하대오(言下大悟)도 있고 하지마는,
그렇게 언하대오도 그 대오가 얼마나 참말로 그 정성스러운 언하대오며, 사흘을 한다 하드래도 사흘이 얼마나 참 기가 맥힌 사흘인가?
뻘로 그렇게 될 줄 알어? 아무 때나 될 줄 알어?
그 모도 못된 망념(妄念)이 섞여 가지고는 화두는 그 가운데 한번 쬐끔 있다가 어디로 간 곳도 없고, 번뇌 망념만 꽉 들이차 가지고 앉어서 그 될 것인가 그게?
닭이란 놈이 고놈 딱 꼬누고 있을 때, 인자 다 되어가면은 알속에서 그 무슨 동정이 있대야.
따르르.. 딸그르르 소리가 나던지, 뭣이 하나 나면 고놈을 듣고 앉었다가 고걸 톡 쪼사 주어야 입이 톡 터져. 그래 가지고 알을 새끼를 깐다 그말이여.
벌레란 놈이, 굼벵이 같은 것이 거름 속 같은 데 가서, 땅속 같은 데 묻혀 있어도,
그놈이 굼벵이 되어 가지고 고거 인자 제 몸뚱이를 둘러싸 가지고 가만 두어야, 가만히 그놈 누가 건들도 안하고—그 건들어 놓으면 못써. 안되어버려.
가만 두어야, 그 딱 몇 달 차면은 아! 고놈이 그 속에서 되어 가지고는 나비가 되어 나온다 그말이여.
우리 참선 학자가 참선 화두하는 법이 무엇이 섞여? 무슨 그 잡것이 섞여? 잡독(雜毒)이 입심(入心)해 가지고는 모도 번뇌 망상으로 되아?
생각해 봐! 지극히 화두 한번 해 봐야지.
내가 돌아가신 큰스님네 말씀도 많이 듣고, 돌아가신 금오 스님도 그 선지식, 우리 나라에 유명한 이인데,
금오 스님도 당신 몸뚱이에 그와 같은 중풍 같은 거—어떻게 해 그 몸뚱이로 난 거야, 색상(色相)으로 난 병이야, 어떻게 해 도인(道人)인들.
‘도인이 저런 중풍 나고 그래?’ 고런 놈의 소리를 하지, 고런 멍청하고 미련한 게 다 있어.
몸뚱이라 하는 것은 별 수가 없어. 밥 먹고 옷 입고 사는 것 똑같으고 병난 것 똑같은 건데,
부처님은 왜 병이 나 돌아가셨나? 색신(色身)을 받어 나면 별 수 없는 것이지.
금오 스님 같은 이도 그 병이 들어 가지고 앓고 있다가 그 병중에 하는 말이 “세상에 내가 화두 한번 원 없이—견성 보다도 화두 한번 원 없이, 정진 한번 원 없이 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恨)이다” 내가 그 말을 들었어.
이 몸뚱이 건강할 때, 이만 할 때, 이만큼 그래도 이 몸뚱이 가지고 이만 했으면 살지.
거기서 화두 한번 잘해!
화두에 그만 의심이 뭉쳐서 한덩어리 되어서—무엇이 뭉칠 것인가? 어째 화두가 뭉친다 하노?
일체 중생의 번뇌렴이, 중생의 번뇌가 한정이 없으니까. 뭐 구백생멸(九百生滅)이라고 하지만 구백생멸뿐인가? 한정이 없어. 별놈의 것이 다 일어나.
고런 놈의 그 먼지 같은, 가루 같은 그 번뇌 망념 그놈이 ‘이뭣고?’만 추켜들면은 전부 한덩어리 돼.
고놈이 없어져 버리니까. 그거 어디 있나? 그거 어디가 있어 그것이?
알 수 없는 의심 하나, 그 의심이라 해. 의단독로. 알 수 없는 놈 하나가 딱 하나.
알 수 없는 것이—없는 것 본래 없어 버리면 그만인데—알 수 없는 놈 하나가 있거든.
그 천하에 보물을, 그 내 보물 고놈 하나 없으면 나는 그만 죽는 건데 그 보물을 내가 잊었으니,
그놈을 도둑놈한테 잊은 게 아니고, 어디다가 두었다가 내가 둔 줄을 몰라 잊었으니, 어디다가 두었노? 그놈 어디다가 두었노? ‘어디다가 둔 곳을 찾는 거’와 ‘이뭣고?’가 마찬가지니까.
이뭣고 이놈이 내 몸뚱이 속에 있어서, 이 몸 가운데 있어서 이 몸을 마음대로 끌고 댕기고, 이 몸을 마음대로 부리고 댕기고, 앞세우고 댕기고, 온통 고놈이 들어서 하지, 뭐 이 몸뚱이가 하나?
그놈을 모른다 이말이여, 그놈을. 그놈의 낯반대기도 모르고, 코빼기도 모르고, 눈깔도 모르고, 모른다 그말이여.
그놈이 뭐냐 말이여? 도대체 ‘이’한 놈, 이놈이 뭐냔 말이여?
의단이, 의단독로가 안돼? ‘오래오래 해서 3년이나 10년이나 해서 그런 의단이 오리라’ 그것 소용없어. 직하에 의단독로가 되는 거여.
어쩌, 화두해 나가는 법을 그렇게 일러주어도 안돼? 안될 이치가 있냐 이말이여.
세상에 이놈 하나 안해 놓고는 제가 낯반대기 들고 사람이라고, 사람 뭐 지랄 사람,
사람이면 뭐해? 금생에 코빼기 사람됐다고 그까짓 것, 그 낯반대기 바꿀 때는 벼락인데 뭐.
이렇게 의심을 잡드리를 해 나가거라.
그래서 밖에 수십 보 거닐다가 그 청정하고 깨끗할 때가—인자 완전히 다 망상도 그런 것도 없이 화두만 또 더, 앉아서 하던 화두가 거닐 때 더 와서,
따악 그놈이 항상 있는 데 가서, 내 제하일촌(臍下一寸)에, 배꼽 단전 밑에 1촌(寸)에 가서 의심이 탁 박혀서 있거들랑.
그렇게 잘 안되어서 하고, 만약 그래도 그놈 잠이 들입다 와서 게을받아서, 그런 사람이 있어.
그놈의 잠이 자꾸 오고, 몸이 게을고, 그만 하기 싫고, 발심이 안되고 이러면 안돼. 그건 천성(天性)이 그 지경 되어서는 틀려.
이렇게 정신을 차려서 그놈이 물러간다.
물러가거들랑 화두를 인자 그때 들어와서는 전제(全提)로 한번 해라. 단제(單提)로 말고, 전제로 한번 해라.
『세상에, 일체처에 도무지 요놈이 일체처에 도무지 밥 먹고 옷 입고, 가고 오고 그저 무슨 뭐,
아! 이런 놈이 이 소소(昭昭)한 요놈이 분명히 이놈인데 ‘이놈이 뭣꼬?’ ‘시심마(是甚麽)오? 이뭣고?’』
전제로 한번, 전제로 그놈을 주욱 끄집어 가지고 한번 해.
한번 해 가지고는 인자 의심이 다시 일어나거들랑 ‘시심마(是甚麽)오? 이뭣고?’만 해. 또 늘 전제를 말고.
그러면 수마(睡魔) 그 같은 놈의 것이 안 물러갈 까닭이 있나? 수마(睡魔) 그까짓 놈의 것은 그건 마구니인데,
여지기량(汝之技倆)은 유진(有盡)이여. 네 힘은 다함이 있어. 마구니 네 까짓 것 밖에서 들어온 것은 네 다함이 있어. 네가 못 들어올 때가 있고, 안될 때가 있고, 내게 못 와!
내가 아지불채무궁(我之不采無窮)인데, 내가 네 까짓 것 간섭 안 하는데, 잠 네 까짓 걸 내가 환영 않는데, 네 까짓 거 어디로 들어와?
의심 ‘이뭣고?’가 있는데, ‘이뭣고?’가 분명한데 어디가 그놈이 들어서냐 그말이여.
가여상좌(可如常坐)하야, 그렇게 턱 물리쳐 버리고는 항상 가(可)하게 상좌(常坐)를 해라.
똑 그대로 여법(如法)히 그저 법다이 또. 삐딱하게 앉지 말고 아까 마냥으로 좌(坐)를 단정히 또 앉어라.
그렇게 한바탕 해서도 또 안되거들랑, 그래도 또 금방 앉으면 또 잠이 들어와서 또 마찬가지로 되거들랑,
약불퇴(若不退)면, 물러가지 않고 그놈의 경계가 잠이 오든지, 망상이 들어오든지, 그만 어디 놀러가고 싶던지 이런 망상이 퍼일어나거들랑,
불가불 어쩔 수 없다. 하지(下地)해서, 저런 어디 따로 딱 나와서 이런 본 데라도 나와서 거닐되, 왔다갔다 왔다갔다 여 갔다 저 갔다 그렇게 거닐지를 말고, 왔다갔다한 장소를 지정을 딱 해 놓고 거 좀 걸어라.
좀 시간이 있게 걸어. 한 10분이든지 20분이든지 걸어라.
오직 고인(古人)도 안되어서 이렇게 말씀을 해 놓았어. 몽산(蒙山) 스님이 고원상인(古原上人)한테다가 이렇게 해 주었어.
몽산 스님도 그렇게 불교를 반대하다가 들어와서 견성(見性)해 가지고는 허! 보니 이뿐이거든. 세상에 이뿐이니 이렇게 자세히 해 놨어. 글도 잘하고 하니까.
(수마가) 점점 물러가지 않거든 달리 하지 말고 가만히 나와서 땅을 정해 놓고 갔다왔다 왔다갔다 이렇게 수십 보(數十歩)를 이렇게 행해라.
그래 수십 보를 해라고 했어! 한 수십 보를, 그 화두를 추켜들고 자꾸 수십 보를 하면 고놈이 인자 물러가.
그러거들랑 또 거좌(去坐)해라. 또 와서 또 자리에 앉어. 그 자리를 너무 비우지 말고 앉어야 해.
그 자리가 아깝다 그말이여. 내가 공부하는 그 자리가 오래 비어 있으면 아까와.
그 앉어서 공부하는 자리인데 비어져 있으면 쓰는가? 나 있는 그 자리, 닭 알 품고 앉아있는 그 자리인데.
좌선(坐禪)이니깐, 좌선하는 사람이니 나 앉는 그 자리를 또 비우지 말고 와서 앉어.
잠깐 수십 보 하지, 오래 너무 비워놓지 말아라.
안두(眼頭)가 깨끗하고 청명(淸明)해도 돌아댕기면 또 못쓴다 그말이여. 그러거들랑 얼른 들어와서 또 앉어라. 또 거좌(去坐)를 해라.
천만조고화두(千萬照顧話頭)해라. 그래 가지고는 천 번이나 만 번이나 염(念)을 계속해서, 똑 계속해서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계속해서 해라.
견성뿐이다, 그것이 견성뿐이여.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뿐이여.
이것이 정법(正法)이여, 이게 참선법(參禪法)이고.
날마다 와서 도 닦는 사람, 저 법문 들은 사람들, 밤에는 복잡해서 잘 수가 없으니까 밤에 제일 잘 수 없어서 (낮에) 오라고 하는데, 밤에 와 자고,
낮에는 뭐 아무 데라도 공부할 수 있고, 누워 자는 사람이 기다란하게 누워 자면 자리가 많이 없어지지마는, 앉었는 데는 자리가 많이 생기니까 앉어서는 할 수 있고 한데, 밤에는 복잡할 때 자고, 낮에 오고 뭔 짓을 해.
밥 먹는 것을 그 뭐 다 자기네가 싸고 댕기는 것이지, 도 닦는데 뭐 제천(諸天)이 여의식(與衣食)인데.
밥 먹는 것이 없어서 나 (이런 말) 한 것 아니여. 여기 대강 지내도—뭐 식량 떨어지면은 탁발(托鉢) 갈라고 작정 딱 해놔도 탁발 한번도 안 하고—먹고 살아가는데.
그 뭐 식량으론 여그 못 있겠다는 거 아니고,
밤에 잘 때에 그 너룹게 방 하나 차지하고 다 활발하게 자든 그 어진 보살님네가 오셨다가 도실(道室)이라고 방이 복잡해서 누워 잘래야 잘 수도 없고, 하! 당초에 너무 그만 복잡하니 그래서 내가 할 수 없어 좁다고 내가 그런 거지.
그렇게 날마다 저녁에 왔다 자고 아침 때 가고 그럴라면은 너무 길은 멀고 여비는 많이 들고 그럴 것 없으니까,
그만 에지간만 하면은, 정 그래도 여그 요새 늘 와서는 자니까, 그 잘만 하면은 갔다왔다 할 것 없이 해제도 얼마 안 남고 했으니, 여그 앉어서 공부해. 뭣할라고 갔다왔다 할 것 없어. 그렇게 해. 여기까장.
천만 번 화두를 조고(照顧)해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화두를 연속해 나가거라.
이렇게 않고는 된 법 없어! 절대 된 법이 없어.
이 화두는, 이 활구참선, 활구화두라는 것은, 하다가 말다가—참나무로 바로 그 줄로 나무를 뭐 비빈다?
활 비비듯이 이렇게 해 가지고 드리 비벼대. 막 드리 비벼대면 거그서 불이 나듯이 그래야 되는 법이지,
하다 말다, 좀 비비다 말다, 불이 나?
된 법이 없어.
이 말을 깊이 깊이 잘 듣고, 들은 대로 여설수행(如說修行)하면 되는 것이지. 꼭 그대로 듣고 그대로 법문 대로 하면 되는 것이지!
안되아? 안되는 것을 지금 이리 고인이 말을 해 놨어?(20분5초~41분16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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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無心雲峀出 有意鳥知還’ ; [청허당집(淸虛堂集)] ‘次李秀才韻(이수재의 운을 차함), 無心雲出峀 有意鳥知還 儒佛雖云一 一忙而一閑’ 참고.
*(게송) ‘蘆花月白處 楚澤滄浪詞’ ; [청허당집(淸虛堂集)] ‘漁翁(어옹), 月白蘆花處 風淸竹葉時 扣舷歌一曲 楚澤滄浪詞’ 참고.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일언지하(一言之下) ; 한마디 말 끝에.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의 성품이 빈 것임을 알지 못하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눌러 조복하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하면서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문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 하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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