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 (게송)영화능기일~ / 남녀노소 빈부귀천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나 도 닦을 수 있다 / 보현보살의 돼지 화현 / 스님의 인사 ‘잘 수용하겠습니다’ / 시주·보시는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〇세속에 살라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도 힘이 들고, 직장을 유지해야 하고 사업을 하는데도 보통 힘이 든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도 정법을 믿고 ‘이뭣고?’로써 중심을 잡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상근대지(上根大智)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〇전생에는 우리가 신도였었고 여러분이 스님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금생에 그것이 바뀌어져 갖고 신도와 스님으로 또 바뀌어졌을는지 모릅니다. 내생에는 우리가 또 신도가 되고 여러분이 스님이 되어서 선방에 와서 참선(參禪)을 할는지도 모릅니다.
**송담스님(No.627)—1999년 6월 첫째 일요법회(99.06.06)(용627)
약 22분.
우주가 이렇게 광활하고 넓고, 그 넓은 속에 지구라고 하는 것이 조그만한 존재에 지내지 못하지만, 그 지구에 60억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각 여러 가지 인종들이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오욕락(五慾樂)이 인간의 행복의 조건인 줄 대부분 그렇게 알고 살고 있습니다마는, 재산이나 부귀영화나 명예 권리라 하는 것은 잠시 꿈꾸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화능기일(榮華能幾日)이며 권속편시친(眷屬片時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종유천근금(縱有千斤金)이라도 불여임하빈(不如林下貧)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영화능기일(榮華能幾日)이며 권속(眷屬)이 편시친(片時親)이다.
한산(寒山) · 습득(拾得), 한산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화현(化現)이고, 습득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화현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산시(寒山詩)」를 여러분이 보시면은 그 안에는 마음에 참 새겨둬야 할 만한 아주 핍절(逼切)하고 요긴한 법문이 들어 있습니다. 그 속에 방금 읊은 게송(偈頌)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榮華)가, 그 부귀영화(富貴榮華), 왕이나 대신이나 대통령이나 천자나 부귀영화를 누린 것이 영화죠. 영화라고 하는 것이 능히 며칠이나 갈 것이냐 그 말이여.
일평생을 산다 해도 오육십 년 전이요 오육십 년 간에 불과하고, 천자가 되어 갖고도 얼마 안 되어서 맞아죽기도 하고, 왕이 되어 갖고도 얼마 안 있다 죽기고 하고, 쫓겨나기도 하고 그렀습니다. 잠깐 꿈 한 번 꾼 것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해방 전 이조 때 그 역대 임금들을 보십시오. 고려 때나 신라 때를 보십시오. 중국 역사를 보십시오. 세계 모든 역사를 보십시오. 그 영화라 하는 것이 잠깐 꿈 한 번 꾼 것에 지내지 못한 것이다 그 말이죠.
권속(眷屬)이 편시친(片時親)이다. 그 권속이, 부모가 훌륭하고 자식이 훌륭하고 형제간이 훌륭하다고 해서 다 그것을 배경 삼아서 목에다 힘주고 모다 그렇지마는 잠시 잠깐 인연이 있어서 금생에 그런 인연으로 태어난 것뿐이지 그것도 잠깐 지나가 버리면 별것이 아니다 이것입니다.
자기 형이 청와대에 가 있고, 뭐 자기 처남에 외삼촌에 동생의 친구가 청와대에 있다고 해가지고 그런 것을 해가지고 사기(詐欺)를 치고 모다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마는 그 다, 그 자기 친형이 있다 해도 별것이 아닌데 처남에 외삼촌에 친구에 뭣이고, 뭡니까 그게.
그게 다 권속이 편시친이라는 거, 잠깐 동안에 친한 것에 불과하시니, 그러한 것을 가지고 큰소리칠 것도 없는 거고.
종유천근금(縱有千斤金)이라도, 비록 천근이나 되는 금덩어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큰 석숭(石崇)이와 같은 그런 큰 부자라 하더라도, 한무옥당(漢武玉堂)과 같은 그러한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다 별것이 아니고.
불여임하빈(不如林下貧)이다. 그런 큰 부귀영화를 가졌다 하더라도 수풀 속에 임하(林下), 수풀 아래에 가난한 것만 같지 못하다.
‘수풀 아래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산중에 숲속에 들어가서 풀뿌리를 캐 먹고, 약 뿌리를 캐 먹고, 더덕을 캐 먹고 또 없으면 또 걸식을 하고, 솔잎을 썰어서 먹고, 그렇게 가난하고 가난하게 사는 그속에, 그 가난한 맛보다 못하다 그거죠.
나물을 뜯어서 삶아 먹고, 풀뿌리를 캐 먹고, 솔잎을 썰어서 먹고, 흘러가는 물을 마시고 그리고 졸리면은 팔을 베고 자도 낙(樂)이 그 속에 있다 이거거든.
도 닦는 낙(樂)이라 하는 것은 팔풍경계(八風境界)가 오지를 않거든. 세속에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린 것이 그렇게 굉장한 것 같지마는 하루도 다리를 뻗고 자들 못하는 것입니다.
그 권리를 지키고, 명예를 지키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경계심을 가지고 지켜나가야 하고, 누가 그것을 침범할까 봐서 미연에 그것을 차단해야 하고, 누가 자기 것을 빼앗아 가려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저지를 시켜야 하고 악랄한 방법을 써서 상대방을 역적으로 몰고 그래 가지고 상대방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간들 그것이 지옥에 갈 일을 남겨 놓고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다 내동댕이쳐 버리고 숲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다.
이 말씀을 하면 여러분이 다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사업도 버리고 너도 나도 숲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그런 뜻은 전혀 아닙니다.
세속에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과거에 지은 인연으로 가족도 맺어지고, 어떤 직장도 갖게 되고, 나라에 나가서 대통령도 되고, 장관도 되고... 지은 인연입니다.
빚이요, 인연이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처럼 왕궁에 부귀도 버리고 출가하신다면 그거야 뭐 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일이나, 그렇게 철저히 발심(發心)도 못하면서 도피처로 알고 느닷없이 다 버려버리고 어디로 산중에 들어가, 그건 별로 권장할 말한 일은 못됩니다.
발심을 하려면 진실하게 발심을 해야 하고, 버릴라면은 깨끗하게 버려야 하는 것이지, 섣불리 임시 잠시 괴로움을 책임 회피로 버릴 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임하(林下)에, 숲 아래 가난한’이라고 하는 것은 세속에 살면서도 그런 것에 너무 지나친 집착을 갖지 말 것이며, 그 속에서도 정법(正法)을 믿고 ‘이뭣고?’를 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숲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연꽃에다가 많이 비유를 합니다마는, 연꽃은 저 깊은 산중에 맑은 석간수(石間水) 속에는 연꽃이 되질 않습니다. 저 밑으로 내려가서 흙탕물 속에다 뿌리를 박고 거기서 연꽃이 필 때 연꽃도 잘 자라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세속에, 부모형제 오욕락이 있는 그 세속에서도 거기서 바로 ‘이뭣고?’를 하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속에서도 정법을 믿고 어려운...
세속에 살라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먹고살기 위해서도 힘이 들고, 직장을 유지해야 하고 사업을 하는 데도 보통 힘이 든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도 정법을 믿고 ‘이뭣고?’로써 중심을 잡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상근대지(上根大智)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유마거사(維摩居士)와 같은 그런 부처님과 맞먹는 대도사(大道士)가 있었고, 중국에서는 방거사(龐居士)와 같은 그러한 거사로서 대도인(大道人)이 있는 것이고, 우리나라에도 부설거사(浮雪居士)와 같은 그런 대도인도 있는 것입니다.
이건 특별히 최고로 훌륭한 분을 세 사람을 말한 것뿐이지, 지금도 역시 속가에 계신 거사님으로서 속가에 계신 보살님으로서 스님네 못지않게 열심히 도 닦는 분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 가운데에도 다 그런 훌륭한 스님네보다도 더 훌륭한 수행자가 있을 줄 믿습니다.
도(道)라고 하는 것이 꼭 산중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꼭 머리를 깎은 스님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산이나 들이나 섬이나 육지나 어디서도 도는 닦을 수가 있는 것이고, 옷을 먹물 옷을 입었건 어떠한 빛깔의 옷을 입었어도 그것은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승속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대승(大乘)이라고 하고, 최상승(最上乘)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래서 육도(六途)가 우리의 한 생각 속에 있는 것처럼 도(道)도 역시 법계(法界)에 가득차 있는 것이어서, 오죽하면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돼지가 되어 가지고 부잣집 돼지우리 속에 가서 꿀꿀하고 있었습니다.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은 항상 부처님의 왼팔이요 부처님의 오른팔이 되어가지고 조불양화(助佛揚化)를 하시지만, 두 분은 형제간이요 바로 도반(道伴)인 것입니다. 문수보살 있는 곳에 보현보살이 계시고, 보현보살 있는 곳에 항상 문수보살이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문수보살이, 그 보현보살이 장자(長者) 집에 돼지가 되어 있는 것을 보시고서 그 장자 집에 가니까 꿀꿀 돼지가 되어가지고 누워 있거든.
‘구재진로중(久在塵勞中)이면, 너무 오랫동안 진로(塵勞) 가운데 있으면은 혹망본래사(惑忘本來事)니, 혹 본래사(本來事)를 잊어버릴까 두려우니, 속히 행장을 거두어 가지고 이 산중으로 돌아오라[收拾行裝裡 速還靑山來].
게송 금방 생각이 안 나는데, 그런 뜻의 게송을 글씨에다 써 가지고 돼지우리에다 던져 줬습니다.
보현보살이 눈을 꺼먹꺼먹 뜯어보니까 ‘너무 오랫동안 진로 가운데 있으면 혹 본래사를 잊어버릴까 두려우니 행장을 거두어 가지고 속환청산래(速還靑山來)하라. 속히 청산으로 돌아오라’ 게송이 써졌거든. 요리 쳐다보니까 문수보살이거든.
비록 돼지 탈을 쓰고 꿀꿀하고 있어도 다 화현(化現)으로 나타난 것이라, 알아보고는 그 게송 써진 그 쪽지를 덥석덥석 씹어서 꿀떡 삼켰다 그 말이여. 그랬는데 그 돼지가 죽었어.
죽으니까,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쪽지를 던져 주니까 그 쪽지에 독약이 묻었던지 돼지가 죽었다‘ 해 가지고 그 사람을 관가에다 고발해 가지고 잡혀 갔어.
“나, 독약 한 일 없고 게송만 하나 써줬다”
“무슨 게송이냐?”
“죽었으니까 배를 갈라보면 알 것 아니냐” 배를 갈라보니까 아직도 그 종이에 글씨가 써졌는데 그 게송이 쓰여 있다 그 말이여. 뭐 조사해 봤자 아무 독도 안 묻어 있고. 그러니 그냥 ‘이상한 일도 있다’해 가지고 무혐의로 풀려났는데.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비단 돼지로만 나오겠습니까? 때로는 소 탈을 뒤집어쓸 수도 있고.
뭐 부처님 말씀에는 ‘저 소가 누군 줄 아느냐? 왕년에 시주것만 먹고 도를 열심히 안 닦은 것이 시주 은혜 갚으려고 저 소가 된 것이다. 저 소들은 모다 전생에 다 중이다’
이런 말씀을 내가 봤습니다마는, 그 말은 ‘시주것을 먹고 열심히 도 닦으라’고 하는 그런 간곡한 말씀을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표현하셨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스님네는 농사도 안 짓고 장사도 안 하고 오직 시주것만 먹고 오직 도 하나만을 위해서 목숨 바쳐서 일심(一心)으로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도만 닦으라고 해서 ‘장사도 하지 말아라, 농사도 짓지 말아라. 일체 오직 걸식(乞食)을 해가지고 한 끼씩만 먹고 도를 닦으라’고 까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의 형편은 걸식할 형편이 잘 못되고, 한 끼만 먹고는 도저히 도를 닦을 수 없을 만큼 지금 우리 근기(根機)가 약해서 세 때도 먹고 또 이 신도님네들이 갖다 주는 걸로 밥을 해 먹고 요렇게 참선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 딴은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보실 때에는 ‘과연 그만 하면 되겠다’고 하실는지 어쩔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참 부모형제 다 고향을 다 버리고, 일체 세속의 오욕락을 다 버리고 일생을 수절(守節)을 하면서 먹물 옷을 입고, 못난 척 바보같이 이렇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속의 명예나 권리나 부귀영화를 일찍이 부러워해 본 적도 없고, 다 그런 것이 다 허망한 줄 알았기 때문에 출가해서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마는, 여러분들이 부처님께 바치고 시주(施主)를 하시고 그래서 이 절도 짓고 선방도 짓고 이렇게 했습니다.
우리 승려로서 여러분께 부탁할 것은, 물론 여러분이 갖다 줘서 감사합니다마는 ‘감사하다’는 말을 잘 안합니다. 왜 그러냐? ‘감사합니다’ 하면은 여러분의 공덕(功德)이 그만큼 소실이 되어 버려.
‘감사하다’는 말로써 그것이 여러분 공덕이 이렇게 때워져 버리기 때문에 여간해서 ‘감사하다’고 안 합니다. ‘잘 수용하겠습니다’ 그뿐인 것입니다.
‘시주를 했는데 왜 스님네가 우리한테 굽신굽신을 안 혀? 용화사를 가면은 스님네들이 왜 대대해? 불친절해’ 그런 말을 한 분이 있다고 그럽니다.
용화사 스님네는 별로 스님네가 오시면 그저 수수하니,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을 업신여기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불친절이 한다고 해서 아닙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우리는 항상 화두(話頭) 드는 마음으로 여러분을 맞이할 뿐이지 그렇게 굽신굽신 안 한 것을 대대하고 건방지고 아만통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시면 오해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주를 하고 보시를 하더라도 무주상(無住相)으로 하셔야 합니다.
‘내가 이런 것을 했다. 했으니까 나를 알아줘야 하고, 나한테 굽신거려야 하고, 우리를 최고로 대우를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안 하시겠습니다마는, 그런 생각은 안 하신 것이 좋을 것이고. 오셔서 열심히 와서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또 여러분을 공부 잘하시라고 격려해 주시는 말씀을 뼈아프게 듣고 여러분도 열심히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속에서 유마거사와 같은 그리고 방거사와 같은 그리고 소동파... 보살님 가운데에도 훌륭한 도인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전생에는 우리가 신도였었고 여러분이 스님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금생에 그것이 바뀌어져 갖고 신도와 스님으로 또 바뀌어졌을는지 모릅니다. 내생에는 우리가 또 신도가 되고 여러분이 스님이 되어서 선방에 와서 참선(參禪)을 할는지도 모릅니다.
보현보살이 돼지가 되어가지고 장자 집에 가서 돼지우리에 있을 줄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다 도반이고, 서로가 다 부처님의 제자고 부처님의 아들딸인 것입니다. 누가 위고 누가 아래라 할 것도 없습니다.
신도면 신도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거고, 스님이면 스님의 도리를 다해서 열심히 도 닦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이 세계를 부처님 세계로 만들고, 우리가 모두가 다 부처님이 되는 최후의 목적까지 우리는 그렇게 가야 할 사명을 띠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인연이요 우리의 운명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24분38초~46분20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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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욕락(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 · 소리 · 향기 · 맛 · 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게송) ‘영화능기일(榮華能幾日)~’ ; 『한산시(寒山詩)』 (김달진 역 | 문학동네) p168.
我見世間人 茫茫走路塵 不知此中事 將何爲去津
榮華能幾日 眷屬片時親 縱有千斤金 不如林下貧
내 바라보니 세상 사람들, 티끌 길에서 분주히 달리는구나. ‘이 가운데의 한 가지 일[此中事]’ 모르고, 무엇으로 나룻배 삼으려는고.
빛나는 그 영화는 몇 날이던고. 많은 권속들도 잠깐의 친함일세. 설령 천근의 황금덩이 있다 해도, 이 숲속의 가난보다 못하니라.
*차중사(此中事) ; 차사(此事). 이[此] 일[事]. 본분사(本分事). 본래자기를 깨닫는 일.
*권속(眷屬 친족 권/무리 속) ; 한집안(혈연관계가 있는 같은 집안)에서 거느리고 사는 식구.
*한산(寒山) ; 중국 당나라 때 사람. 성명은 알 수 없고, 천태(天台) 당흥현(唐興縣)의 서쪽 70리에 한암(寒巖)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대개 그 바위굴 속에 있었으므로 ‘한산’이라 하고, 때로는 국청사(國淸寺)에 가기도 했다.
몸은 바싹 마르고, 꼴은 거지와 같고 보기에 미친 사람 비슷한 짓을 하며, 국청사 절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습득(拾得)에게 대중이 먹고 남은 밥을 얻어서 댓통에 넣어가지고 한산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미친 짓을 부리면서도 하는 말은 불도(佛道)의 이치에 맞으며 또 시를 잘하였다.
어느날 태주자사(台州刺史) 여구윤(閭丘胤)이 사람을 보내 한암(寒巖)에 찾아가서 옷과 약 등을 주었더니, 한산은 큰 소리로 “도적놈아! 이 도적놈아!” 하면서 바위굴로 물러났고 “너희들에게 말한다, 각각 노력해라!” 하면서 바위굴로 들어간 뒤에는 그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한다. 세상에서 한산, 습득, 풍간(豊干)을 3성(聖)이라 부르며, 또 한산을 문수보살, 습득을 보현보살 화현이라 한다. 『한산시』 3권이 있다.
—[참고] 여구윤(閭丘胤)의 ‘한산자시집서(寒山子詩集序)’
*습득(拾得) ; 중국 당나라 때, 천태사 국청사에 있던 이. 천태산 국청사 풍간(豊干) 선사가 산에 갔다가 적성도(赤城道) 곁에서 주어 온 작은 아이라 이렇게 이름. 한산(寒山)과 친히 사귀었고 풍간선사가 산에서 나온 뒤에 한산이 바위굴로 들어가 소식을 알 수 없는 뒤로 습득도 어디론가 사라져 종적을 알 수 없었다 한다.
*문수보살(文殊菩薩) ;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부처의 완전한 지혜를 상징함.
문수사리는 산스크리트어 만주슈리(mañjuśrī)의 음사(音寫). 문수시리(文殊尸利), 만수실리(蔓殊室利)라고도 쓴다. ‘문수’는 묘(妙 : 신묘하다, 훌륭하다) ‘사리’는 길상(吉祥 : 상서로움)의 뜻이다. 묘길상(妙吉祥) · 묘덕(妙德) · 유수(濡首)라 번역.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보좌하는 보살.
문수보살은 일반적으로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기도 하고, 경권(經卷)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化身).
『화엄경』 속에서도 문수보살은 보현보살(普賢菩薩)과 함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양쪽 협시 보살(挾侍菩薩)을 이룸.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보현보살(普賢菩薩) ; 불교의 진리와 수행의 덕을 맡은 보살. 한량없는 행원(行願)을 상징함.
산스크리트어 사만타바드라(Samantabhadra). 삼만다발타라(三曼多跋陀羅)라고 표기. 보현(普賢) · 편길(遍吉)이라 한역. 경전을 수호하고 널리 퍼뜨리며, 불법을 펴는 보살. 석가모니불을 오른쪽에서 보좌하는 보살. 연화대에 앉거나 여섯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있다.
보현보살은 또 중생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졌으므로 연명보살(延命菩薩)이라고도 한다. 모든 보살들은 다 각각 부처님 공덕의 어느 한 부분만을 나타내어 그것이 그의 특징이 된다.
*한산시(寒山詩) ; 『한산자시(寒山子詩)』. 중국 당나라 때의 한산자라는 전설적인 은자(隱者)가 천태산의 나무, 바위 그리고 촌가의 벽에 써놓은 시를 국청사(國淸寺)의 스님이 편집했다고 전해지는 시집. 또 한산의 시 3백여 수(首)외에 습득(拾得)의 시 50여 수, 풍간(豊干) 선사의 시 2수가 실려 있으므로 『삼은시집(三隱詩集)』이라고도 불린다.
『한산시(寒山詩)』의 내용은 꽤 다양하여 여러 가지이나 전형적인 부분인 자연과 함께 있는 즐거움을 노래한 것 외에 허망한 삶을 깨치고 진정한 도를 구하라는 주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핍절하다(逼切-- 닥치다·가까이하다·몰다 핍/정성스럽다·절박하다 절) ; ①정성스러운[切] 모습과 아주 가깝다[逼]. ②(사정이나 표현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고 매우 간절하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영화(榮華 영화·영예·꽃 영/빛나다·꽃 화) ; ①이름이 세상에 드러나 영광(榮光)스럽고 빛남[華]. ②부귀영화(富貴榮華). 권력과 부귀를 마음껏 누리는 일.
*권속(眷屬 돌보다·식솔食率 권/무리·혈족 속) ; ①돌봐 주어야(眷) 할 한집안 식구[屬]. ②‘아내’의 낮춤말.
*석숭(石崇 249~300) ; 중국 서진(西晉)의 부호(富豪). 항해와 무역으로 거부가 되었다.
*한무옥당(漢武玉堂) ; 중국 한무제(漢武帝)가 머무는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玉堂]을 이르는 말.
*걸식(乞食 빌·구할·청할 걸/밥·음식 식) ; ①빌어서 얻어먹음. ②수행자가 수행을 위해 육신을 지탱하고자 일정한 법도에 따라 남에게 음식을 받는 것.
*팔풍(八風) : 팔경(八境). 팔풍경계(八風境界). 팔세법(八世法 세간이 따르는 여덟 가지 법). 세간팔법(世間八法 산스크리트어 loka-dharma). 세간팔풍(世間八風).
[참고 ❶]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세로판 p155. (가로판 p148)
팔풍은 세상에서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바로서 능히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서 움직이게 하므로 팔풍(八風)이라 함. 팔풍경계를 요약하면 결국 역순경계(逆順境界)이다.
①이쇠(利衰 이로울 리/약할 쇠) : 내 뜻에 맞고[利], 내 뜻에 어기는 것[衰].
②예훼(譽毀 기릴 예/비방할 훼) : 나 안 보는 데서 나를 찬미하는 것[譽], 나 안 보는 데서 나를 비방하는 것[毀].
③칭기(稱譏 일컬을 칭/나무랄 기) : 면전에서 찬미하는 것[稱], 면전에서 비방하는 것[譏].
④고락(苦樂 괴로울 고/즐거울 락) :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것[苦],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것[樂].
[참고 ❷] 『칠각지(七覺支)』 (고요한소리 刊) p57.
팔풍, 팔세법(八世法, 팔리어 ațțha loka-dhammā) : 세간(世間, 중생의 세계) 특유의 여덟 가지 어려움. 이득과 손실[이쇠利衰], 좋은 평판과 나쁜 평판[예훼譽毀], 칭찬과 비난[칭기稱譏], 고통과 행복[고락苦樂]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정법(正法 바르다·올바르다 정/부처님의 가르침 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정법시대(正法時代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석간수(石間水) ; 바위틈에서 나는 샘물.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상근대지(上根大智)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 뛰어나고, 지혜가 큰 사람.
*상근(上根 위 상/뿌리 근) ; 상근기(上根機).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고 실천할 수 있는 매우 뛰어난 소질과 능력, 또는 그러한 소질과 능력을 지닌 사람.
*유마거사(維摩居士) ; [산스크리트어(범어)] Vimalakīrti. 부처님 재세 시 비야리성(毘耶離城 산스크리트어 Vaiśālī)의 거사. 음(音)대로 써서 유마라힐(維摩羅詰) • 비마라힐(毘摩羅詰) • 유마힐(維摩詰) 등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유마(維摩)라고도 한다. 뜻으로 번역하면 구역(舊譯)은 정명(淨名)이고 신역(新譯)은 무구칭(無垢稱)인데, 우리 말로는 「깨끗한 이름」이란 뜻이다.
중인도 비야리성의 대부호인데 재가자로서 보살행을 닦고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으며 변재에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유마경』 「관여래품(觀如來品)」에는, 유마힐이 무동여래(無動如來 : 아촉불阿閦佛, 산스크리트어 Akșobhya)께서 계신 동방 묘희국(妙喜國, 산스크리트어 Abhirati)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그곳에서 죽어 이곳에 와 태어났다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주유마힐경(注維摩詰經)』 「병서(竝序)」에서 승조는 유마힐을 법신대사(法身大士 온전히 성불한 대보살)라 하였다.
『유마경』은 7종의 한역본(漢譯本)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판본은 3종이다.
① 『유마힐경(維摩詰經)』 혹은 『불법보입도문삼매경(佛法普入道門三昧經)』 상하 2권. 지겸(支謙) 역. 222~229년.
②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상중하 3권. 구마라집(鳩摩羅什) 역. 406년.
③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6권. 현장(玄奘) 역. 650년.
『유마경』 「불이법문품(不二法門品)」 내용. 유마힐이 병들어 누우매 문수보살을 위시하여 부처님 제자들이 병문안을 위해 갔는데, 유마힐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하여 물음에 여러 보살들이 차례차례 말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이 유마힐에게 “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합니까?” 하고 묻자, 유마힐은 침묵하며 말이 없었다[默然無說]. 이에 문수보살이 “유마거사가 참으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깨달아 들었다”고 칭찬하였다.
[참고]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현장玄奘 역 | 장순용 번역 |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4권. 제9 불이법문품(不二法門品)에서.
時無垢稱 普問衆中諸菩薩曰 云何菩薩善能悟入不二法門 仁者皆應任己辯才各隨樂說 時衆會中有諸菩薩 各隨所樂次第而說
그때 무구칭(無垢稱, 유마힐維摩詰)이 그곳에 모인 여러 보살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둘이 아닌 법문[不二法門]에 잘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까? 모두들 자신의 변재(辯才)로 내키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대중 속에 있던 보살들은 제각기 내키는 대로 차례로 말했다.
-중략- (차례로 31 분의 보살들이 각자 깨달아 아는 바에 말을 하였다)
如是會中有諸菩薩 隨所了知各別說已 同時發問妙吉祥言 云何菩薩名爲悟入不二法門 時妙吉祥告諸菩薩 汝等所言雖皆是善 如我意者 汝等此說猶名爲二 若諸菩薩於一切法 無言 無說 無表 無示 離諸戲論 絶於分別 是爲悟入不二法門
이와 같이 모임 속에 있는 보살들은 각자 깨달아 아는 바에 따라서 제각기 말을 마쳤다. 그리고 동시에 묘길상(妙吉祥,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보살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까?”
그러자 묘길상[文殊菩薩]이 여러 보살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말한 내용은 비록 모두 훌륭하나 내가 생각하건대, 그대들의 이러한 말들은 여전히 둘[二]이라는 낱말[名字]이 남아 있습니다. 만약 보살이 일체 모든 법에 대해 말도 없고 설명도 없고 명시하거나 가르칠 것도 없다면, 온갖 어리석은 논쟁을 벗어나고 모든 분별도 끊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時妙吉祥 復問菩薩無垢稱言 我等隨意各別說已 仁者當說 云何菩薩名爲悟入不二法門 時無垢稱默然無說 妙吉祥言 善哉善哉 如是菩薩 是眞悟入不二法門 於中都無一切文字言說分別
그리고는 묘길상[文殊菩薩]은 다시 무구칭[維摩詰] 보살에게 물었다. “우리들은 각자 자기 뜻대로 말했습니다. 이젠 당신께서 말씀하셔야 합니다. 어떤 것을 보살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까?”
무구칭[維摩詰]은 잠자코 침묵하면서 말이 없었다[默然無說]. 묘길상이 말했다. “정말 훌륭합니다. 보살은 이렇게 불이법문에 참되게 깨달아 들어가며 그 속에는 언어나 문자에 의한 분별이 전혀 없습니다”
此諸菩薩說是法時 於衆會中五千菩薩 皆得悟入不二法門 俱時證會無生法忍
모든 보살들이, 이러한 법문을 설하자 그곳에 모인 대중 5천 명의 보살이 모두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갔고 다 함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했다.
*도사(道士) ; ①불도(佛道 :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닦아 깨달은 사람. ②불도를 닦는 사람. ③도교(道敎)를 믿고 수행하는 사람. ④어떤 일에 아주 익숙하여 썩 잘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방거사(龐居士 ?~808) ; 당나라 형주(衡州) 형양(衡陽 : 湖南) 출신이다. 자는 도현(道玄)이다. 성은 방씨고, 이름은 온(蘊)이다. 방옹(龐翁) · 방공(龐公) · 방노(龐老) · 노방(老龐) 등이라고도 한다. 가족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였으나, 거사만이 불교에 귀의했다.
당나라 정원(貞元) 초년(785~804)에 석두희천(石頭希遷)을 친견하고 말을 잊으면서 종지를 이해했고, 다시 단하(丹霞) 선사와 도반이 되었다.
어느 날 석두가 이렇게 물었다. “그대가 나를 만난 뒤에 날마다 하는 일[日用事]이 무엇인가?(子自見老僧已來日用事作麼生)”
“날마다 하는 일을 물으신다면 입을 열 곳이 없습니다(若問日用事卽無開口處)” 그리고는 다시 게송을 지어 석두에게 바쳤다.
날마다 하는 일에 별다른 것 없으니 오직 나 스스로 짝과 조화할 뿐이네.(日用事無別 唯吾自偶諧)
가지가지마다 취하고 버리지 않으니 곳곳에서 벌리거나 떼어 놓지 마십시오.(頭頭非取捨 處處勿張乖)
붉은 빛과 자줏빛을 어느 누가 호칭했나? 언덕이든 산이든 한 점 티끌마저 끊어졌네.(朱紫誰爲號 丘山絶點埃)
신통과 묘한 작용이라는 것은 그저 물 긷고 나무하는 일뿐입니다.(神通竝妙用 運水及般柴)
석두가 옳다고 여기면서 말했다.(石頭然之曰) “그대는 스님이 되겠는가, 속인으로 있겠는가?(子以緇耶素耶)”
거사가 대답했다. “원컨대 바라는 바를 따르고 싶습니다(願從所慕)” 그리고는 끝내 머리를 깎지 않았다.(遂不剃染)
나중에 강서(江西)에 가서 마조(馬祖)를 뵙고서 물었다. “만법과도 반려가 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不與萬法爲侶者是什麼人)”
마조가 말하기를 “그대가 한 입에 서강(西江) 물을 다 마시기를 기다렸다가 그대에게 말해 주리라(待汝一口吸盡西江水卽向汝道)”
거사가 그 말끝에 단박에 현묘한 요체를 깨달았다. 그리하여 곁에 머물면서 섬기고 배우기를 2년 동안 했다
원화(元和) 때에 북쪽으로 양양(襄陽) 지방을 유람하다가 그 풍토가 마음에 들어서 마침내 방거사가 타고 유람하던 배와 그것에 실은 살림살이를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도 그에게 빚을 지게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모두 통째로 상수(湘水)의 강물에 침몰시켜 버리고 그 딸 영조(靈照)가 조리(笊籬)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친구인 주목(州牧) 우공(于公)이 문병을 오자 거사가 그에게 말했다.
“다만 온갖 있는 것[所有]을 비우기를 바랄지언정 온갖 없는 것[所無]을 실답다고 하지 말아야 하오.(但願空諸所有 愼勿實諸所無) 세간에 즐겨 머무는 것은 모두 메아리나 그림자와 같은 것이오(好住世間 皆如影響)”
말을 마치자 공의 무릎을 베고서 열반하였다. 유언에 따라 시체를 태워서 버리니, 강호(江湖)의 승속이 모두 애도하면서 말하였다. “선문(禪門)에 방 거사가 있는 것은 마치 비야리성(毘耶離城)에 유마(維摩) 거사가 있는 것과 같다”
후세에 그의 뛰어난 선풍을 기려서 양양방대사(襄陽龐大士) · 동토유마(東土維摩) 등이라 불리우며, 양나라 때의 부대사(傅大士)와 더불어 널리 칭송되었다. 우공이 평생의 문답과 글을 모아 『방거사어록』을 편집하였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부설거사(浮雪居士) ; 신라 후기의 스님으로, 서울(王都, 慶州)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진광세(陳光世). 법명(法名)은 부설(浮雪). 자(字)는 천상(天祥).
어려서 불국사에 출가하였다. 영조(靈照), 영희(靈熙) 두 도반과 함께 두륜산 등지에서 10년간 정진한 뒤, 오대산 문수보살의 도량을 참배하러 북으로 향하여 가던 길에 두릉(杜陵 : 전북 만경) 구무원(仇無寃)이라는 신도의 집에서 며칠을 묵었다.
구무원에게 딸 묘화(妙花)가 있었는데, 부설을 흠모하여 부설과 부부가 되길 원하고, 만일 버림을 당하면 목숨을 끊겠다고 하니, 묘화의 부모도 부설에게 딸을 버리지 말고 제도하여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부설은 출가의 뜻이 견고하여 굽히지 않았으나, 또 돌이켜 보살의 자비로운 뜻을 생각하여 마침내 묘화와 결혼하였다.
그는 비록 재가(在家)에 있었으나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고 정진을 계속하여 도를 이루었다. 등운과 월명도 출가, 수도하여 도를 깨우쳤다. 묘화부인은 110세를 살았는데, 말년에 집을 내놓아 사원으로 삼아 부설원(浮雪院)이라 하였다.
*대승(大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 이에 반해, 그들은 전통의 보수파를 낮추어 소승(小乘)이라 함.
②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수행자•보살, 또는 그들을 위한 붓다의 가르침.
③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존칭. 위대한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조불양화(助佛揚化 도울 조/부처 불/날릴·나타낼 양/가르칠 화) ; 부처님[佛]을 도와[助] 교화(敎化)를 드날리다[揚].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장자(長者) ; ①덕망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아 세상일에 익숙한 어른. ②큰 부자를 점잖게 이르는 말.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본래사(本來事) ; 본래의 일. 본분사(本分事 : 본분을 깨우치는 일. 깨달음).
*본분(本分 근원·마음·본성 본/신분·뜻 분) ;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꿈속에서 하는 말이다. 본래 어둡고 밝고 알고 모를 것이 없으며, 온갖 속박과 고통을 새로 끊을 것이 없고, 대자유(大自由) • 대해탈(大解脫)을 비로소 얻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깨달음(本覺)’이라기도 하는데, 『선가귀감』 첫구절에서 말한 ‘ 〇 일원상(一圓相)’은 이것을 나타냄이다.
*행장(行裝 다니다·여행 행/꾸미다·행장·옷차림·물품 장) ; 길을 떠나거나 여행(旅行)할 때에 사용하는 물건과 차림[裝].
*부처님 말씀에는 ‘저 소가 누군 줄 아느냐? 왕년에 시주것만 먹고 도를 열심히 안 닦은 것이 시주 은혜 갚으려고 저 소가 된 것이다. 저 소들은 모다 전생에 다 중이다’ ;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세로판 p144~145. (가로판 p150~151)
(64) 故(고)로 曰(왈), 要識披毛戴角底麼(요식피모대각저마)아 卽今(즉금)에 虛受信施者是(허수신시자시)어늘 有人(유인)은 未飢而食(미기이식)하며 未寒而衣(미한이의)하니 是誠何心哉(시성하심재)아 都不思目前之樂(도불사목전지락)이 便是身後之苦也(편시신후지고야)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말씀하시되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을 알고자 하느냐? 그것은 지금 신도들이 베푸는 것을 헛되이 받은 자가 이것이어늘, 어떤 사람은 배고프지 않아도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니 이 진실로 무슨 마음일까? 눈앞의 쾌락이 바로 후생의 괴로움인 줄을 도무지 생각지 않는구나! 」하시니라.
註解(주해) 智論(지론)에 一道人(일도인)이 五粒粟(오립속)으로 受牛身(수우신)하야 生償筋骨(생상근골)하고 死還皮肉(사환피육)하니 虛受信施(허수신시)가 報應如響(보응여향)이니라
『지도론』에 이르기를 「한 수도인이 다섯 낱 좁쌀 때문에 소 몸을 받아, 살아서는 뼈가 휘도록 일해 주고, 죽어서는 가죽과 살로써 빚을 갚았다」 하시니 헛되이 시주것 받은 응보가 메아리와 같으니라.
[참고 ❷] 『법원주림(法苑珠林)』 (제26권). (석도세釋道世 撰 |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18. 숙명편(宿命篇) < 제3 숙습부(宿習部).
又處處經云 佛言 有憍梵鉢提 已得阿羅漢道 反作牛齝 弟子問佛 何以故 佛言 是比丘前世宿命時 七百世作牛 今世得道 餘習未盡故作齝食
또 『처처경(處處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교범발제(憍梵鉢提)는 이미 아라한의 도를 얻었는데도 도리어 소처럼 되새김질을 한다’
제자가 부처님께 물었다. ‘무슨 까닭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비구는 전생에 7백 생 동안 소로 태어났었다. 금생에 도를 얻었으나 남은 습기가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되새김질을 하는 것이다’”
若依智度論 問何以作牛 答由過去世經他穀田 取五六粒粟口嘗吐地 以損他粟故作此牛 由作牛 多身故牛腳齝食也
또 『지도론(智度論)』에 의거하면 다음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소가 되었는가?
【답】 그는 전생에 남의 밭을 지나가다가 대여섯 알의 조[粟]를 따서 맛보고 땅에 뱉어버렸다. 남의 조[粟]를 해쳤기 때문에 소가 되었고, 소가 되어 여러 생을 지냈기 때문에 소 다리처럼 되고 새김질을 하는 것이다”
*시주것(施主것) ; 절이나 스님에게 조건없이 베푼 물건..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布施)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主].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āna-pati)이라고도 함.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세로판 p142~145. p147. (가로판 p148~151. p153)
(63) 於戱라 佛子여 一衣一食이 莫非農夫之血이요 織女之苦어늘 道眼이 未明하면 如何消得이리요.
(註解) 傳燈에 一道人이 道眼이 未明故로 身爲木菌하야 以還信施하니라.
아 ! 불자여. 그대의 한 벌 옷과 한 그릇 밥이 농부와 직녀의 피와 땀 아닌 것이 없거늘, 도의 눈이 밝지 못하다면 어떻게 소화하리요!
(주해) 전등록에 「옛날 어떤 도 닦는 사람이 도의 눈이 밝지 못한 탓으로 죽어서 나무버섯이 되어 시주의 은혜를 갚았다」고 하니라.
(64) 故로 曰, 要識披毛戴角底麼아 卽今에 虛受信施者是어늘 有人은 未飢而食하며 未寒而衣하니 是誠何心哉아 都不思目前之樂이 便是身後之苦也라 하시니라.
(註解) 智論에 一道人이 五粒粟으로 受牛身하야 生償筋骨하고 死還皮肉하니 虛受信施가 報應如響이니라.
그러므로 말씀하시되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을 알고자 하느냐? 그것은 지금 신도들이 베푸는 것을 헛되이 받은 자가 이것이어늘, 어떤 사람은 배고프지 않아도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니 이 진실로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니 이 진실로 무슨 마음일까? 눈앞의 쾌락이 바로 후생의 괴로움인 줄을 도무지 생각지 않는구나!」하시니라.
(주해) 「지도론」에 이르기를 「한 수도인이 다섯 낱 좁쌀 때문에 소 몸을 받아, 살아서는 뼈가 휘도록 일해 주고, 죽어서는 가죽과 살로써 빚을 갚았다」하시니 헛되이 시주것 받은 응보가 메아리와 같으니라.
(66) 故로 曰, 道人은 進食을 如進毒하고 受施를 如受箭이니 幣厚言甘은 道人所畏라 하시니라.
(註解) 進食을 如進毒者는 畏喪其道眼也요 受施를 如受箭者는 畏失其道果也니라.
그러므로 이르시되 「도를 닦는 사람은 음식 먹기를 독약을 먹는 것같이 하고, 시주를 받을 때에는 화살을 받는 것과 같이 할지니, 두터운 대접과 달콤한 말은 도를 닦는 사람의 두려워할 바라」하시니라.
(주해) 음식 먹기를 독약을 먹듯 하라는 말은 도의 눈을 잃을까 두려워해서이고, 시주 받기를 화살을 받듯 하라는 말은 도의 열매를 잃을까 두려워함이니라.
[참고 ❷] (1)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권상(卷上) 백운화상초록(白雲和尙抄錄 | 원조각성 번역·해설 | 현음사) p111~112. (2) 『전등록(傳燈錄) 1』 ‘제15조 가나제바迦那提婆’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110 참고.
迦那提波尊者得法 後至毗羅國 彼有長者 名梵摩淨德 一日園中 樹生大耳如菌 味甚美 唯長者與第二子羅睺羅多 取而食之 取已隨長 盡而復生 自餘他人 皆不能見
가나제바 존자께서 용수 대사에게 법을 얻으시고 그 뒤에 비라국에 가시었다. 그곳에 장자가 있으니 이름은 범마정덕이었다.
어느 날 정원 가운데 나무에 큰 귀가 생기되 버섯과 같고 맛은 매우 좋았다. 오직 장자와 그의 두 번째 아들 라후라다가 따다 먹었는데 따고 나면 다시 자라고, 없어진 다음에도 다시 또 생겼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보지 못했다.
時尊者知其宿因 遂至其家 長者問其故 尊者曰 汝家昔曾供養一比丘 然其比丘道眼未明 虛沾信施故 報爲木菌 唯汝與子精誠供養 得以享之 餘卽否矣 又問 長者年多少 答曰七十有九 乃說偈曰 入道不通理 復身還信施 汝年八十一 其樹不生耳
이 때 가나제바 존자께서 그 전생의 인연을 아시고 드디어 그 집에 가셨다. 장자가 그 까닭을 물으니 가나제바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전생에 한 비구를 공양했다. 그러나 그 비구는 도안(道眼)이 밝지를 못해서 헛되이 신심으로 시주한 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 과보로 나무의 버섯이 되었다. 오직 너와 너의 둘째 아들만이 정성껏 그 비구에게 공양을 올렸기 때문에 누릴 수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한 것이다”
또 물으시되 “장자의 나이가 얼마냐?” 장자가 답하기를 “79세입니다”
가나제바께서 이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도에 들어가 진리를 통달하지 못하면 몸을 바꾸어 시주의 것을 갚아주나니, 너의 나이가 81세가 되면 그 나무에서 버섯이 나지 않으리라’
*일심불란(一心不亂) : ①두 생각이 없이, 딴 생각이 없이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 ②마음을 흩어지지 않게 함.
*걸식(乞食 빌·구할·청할 걸/밥·음식 식) ; ①빌어서 얻어먹음. ②수행자가 수행을 위해 육신을 지탱하고자 일정한 법도에 따라 남에게 음식을 받는 것.
*‘한 끼씩만 먹고’ ; 일종(一種). 일종식(一種食).
*일종(一種) ; 일종식(一種食).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❶] 『대승의장(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참고 ❷] 『육조단경(六祖壇經)』 (덕이본德異本) 「2. 공덕과 정토를 밝히다[釋功德淨土]」에서.
公曰 弟子聞達磨初化梁武帝 帝問云 朕一生造寺供僧 布施設齋 有何功德 達磨言 實無功德 弟子未達此理 願和尙爲說
師曰 實無功德 勿疑先聖之言 武帝心邪 不知正法 造寺供養 布施設齋 名爲求福 不可將福便爲功德 功德在法身中 不在修福
자사(刺史) 위공(韋公)이 말했다. ‘제자가 듣기에 달마대사께서 처음 양무제를 교화할 때 황제가 「짐은 평생 절을 짓고 스님을 공양하며 보시를 하고 재를 베풀었는데 어떠한 공덕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달마대사께서 「실로 공덕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제자는 이 이치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화상께서 말씀해주십시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실로 공덕이 없습니다. 옛 성인의 말씀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무제는 마음이 치우쳐 정법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절을 짓고 공양을 올리고 보시를 하며 재를 베풀어 행한 것은 복(福)을 구했다고 하는 것이니 복이 공덕(功德)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공덕은 법신(法身)에 있지 복을 닦는 데 있지 않습니다.
師又曰 見性是功 平等是德 念念無滯 常見本性眞實妙用 名爲功德 內心謙下是功 外行於禮是德 自性建立萬法是功 心體離念是德 不離自性是功 應用無染是德 若覓功德法身 但依此作 是眞功德
若修功德之人 心卽不輕 常行普敬 心常輕人 吾我不斷 卽自無功 自性虛妄不實 卽自無德 爲吾我自大 常輕一切故
대사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견성(見性)이 공(功)이요 평등(平等)이 덕(德)이니, 생각 생각에 막힘이 없이 항상 본성품의 진실하고 묘한 작용[眞實妙用] 보는 것을 공덕이라 합니다. 안으로 마음이 겸양하여 낮추면 이것이 공이요 밖으로 예(禮)를 행하면 이것이 덕이며, 자신의 참성품[自性]이 만법을 건립하는 것이 공이요 마음의 본바탕[心體]이 생각을 여읜 것[離念]이 바로 덕이며, 자성(自性)을 여의지 않음이 공이요 사물에 응해 쓰되 물들지 않음이 덕입니다. 만약 공덕의 법신을 찾으려면 다맛 이에 의하여 공덕을 지어야 참된 공덕입니다.
공덕을 닦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이 가볍지 않아 항상 널리 공경을 행합니다. 마음이 항상 남을 가벼이 여기고 나를 내세우는 생각을 끊지 않으면 스스로 공이 없는 것이고, 자심이 허망하여 진실하지 못하면 스스로 덕이 없는 것이니, 이는 나를 내세우는 생각이 스스로 커져서 항상 일체를 가벼이 여기기 때문입니다.
善知識 念念無間是功 心行平直是德 自修性是功 自修身是德 善知識 功德須自性內見 不是布施供養之所求也 是以福德與功德別 武帝不識眞理 非我祖師有過
선지식이여, 생각 생각 끊임이 없는 것이 공이요, 마음을 평등하고 곧게 쓰는 것이 덕이며, 스스로 성품을 닦는 것이 공이요,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덕입니다.
선지식이여, 공덕은 모름지기 자성(自性) 안에서 보는 것이요, 보시나 공양만으로 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복덕(福德)과 공덕(功德)은 다른 것이니, 무제가 진리를 알지 못하였을 뿐 우리 조사에게 허물이 있지 않습니다.
*대대하다 ; ‘거만(倨慢)하다. 도도하다’ 뜻의 전라도 사투리.
*화두(話頭)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아만통(我慢통) ; 아만(我慢)의 마음보. 교만(憍慢)한 마음보.
*아만(我慢 나 아/거만하다·업신여기다 만) ; ①오온(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일시적 화합에 지나지 않는 아(我)를 실체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견해에서 일어나는 교만. 자아가 실재한다는 교만. ②우열의 관점에서 남과 나를 차별하여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는 자아관.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교만(憍慢 교만하다·방자하다·까불다·뽐내다 교/거만하다·업신여기다 만) ; 교(憍, mada)는 자신 스스로 자신의 장점들에 대해 그릇되이 집착하여, 마음이 오만방자(傲慢放恣)하게 되어 타인을 돌아보지 않는 성질을 뜻하고, 만(慢, māna)은 자신의 입장에서 타인과 비교하여 갖는 마음의 오만(傲慢)한 상태를 뜻한다.
*무주상(無住相) ; 집착함이 없는 모습. 집착함이 없는 상태.
*‘여러분은 시주를 하고 보시를 하더라도 무주상(無住相)으로 하셔야 합니다’ ;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대승불교도들의 실천덕목 중 하나. 상(相)에 머뭄[住]이 없는[無] 보시.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의미한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한다. 무주상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세로판 p105~106. (가로판 p110)
貧人이 來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을 따라 나누어 주라. 한 몸같이 두루 어여삐 여기는 것이 참 보시니라.
(註解) 自他爲一曰同體요, 空手來空手去가 吾家活計니라.
나와 남이 둘 아닌 것이 한 몸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니라.
[참고 ❷] 『금강경오가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무비 역해 | 불광출판부) p141~145, 『금강경오가해 설의 - 육조스님 금강경』 (원순 옮김 | 도서출판 법공양) p101~104.
復次 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 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또 수보리야, 보살은 법(法)에 응당히 머문 바 없이 보시를 할지니, 이른바 색(色)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相)에 머물지 않아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만약 보살이 상(相)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육조 스님 해의解義)
부차(復次)라 한 것은 앞을 이어서 뒷말을 일으키려는 것이니라.
범부(凡夫)의 보시는 다만 아름다운 외모와 오욕의 쾌락을 구하는 고로, 그 과보가 다하면 곧 삼악도(三惡途 지옥,아귀,축생)에 떨어지므로, 세존께서 크나큰 자비로 ‘어떠한 것에도 집착이 없는 무상보시(無相布施)’를 행하도록 가르치시니, 아름다운 외모나 오욕(五欲)의 쾌락을 구하지 않고, 다만 안으로는 인색한 마음을 없애고 밖으로는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함이니, 이와 같이 상응(相應)하는 것이 ‘색에 머물지 않는 보시(不住色布施)’이니라.
무상(無相)의 보시를 한다는 것은, '보시한다'는 마음도 없고, 베푸는 물건도 없으며, 받는 사람도 분별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不住相布施)'라 하느니라.
보살이 보시(布施)를 행할 때 마음으로 바라는 것이 없으면 그 얻는 복이 시방(十方)의 허공과 같아서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일설에 '보(布)'란 '普(넓다)'요, '시(施)'란 '散(사방에 흩어버린다)'이니, 가슴 가운데 있는 모든 망념·습기·번뇌를 널리 흩어버려 사상(四相)도 끊어지고 마음에 전혀 쌓여 있지 않는 것이 '참 보시(眞布施)'라 하며, 또 일설에는 '보(布)'란 '普'니 육진 경계(六塵境界)에 머물지 않으며 유루(有漏)의 분별도 하지 않아 오직 항상 청정한 데 돌아가서 만법(萬法)이 공적(空寂)함을 요달함이니라.
만약 이 뜻을 요달하지 않으면 오직 온갖 업(業)만 더하므로, 모름지기 안으로 탐애(貪愛)를 없애고 밖으로 보시를 행해서 안밖이 상응하여야 무량한 복을 얻게 될 것이니라.
다른 사람들의 악행을 보아도 그 허물을 보지 않아서 자성(自性) 가운데 분별을 내지 않음이 '이상(離相)'이 되느니라.
가르침에 의해 수행해서 마음에 능소(能所)가 없는 것이 곧 선법(善法)인 것이라. 수행인이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선법이라 할 수 없고, 능소심(能所心)이 멸하지 않으면 마침내 해탈치 못하니, 순간순간 항상 반야지혜를 행하여야 그 복이 무량무변한 것이니라.
이같은 수행에 의지하면 일체 인천(人天 사람과 하늘신)의 공경하고 공양함이 따르니 이것을 복덕(福德)이라 하도다. 항상 부주상보시(不住相布施 어떠한 것에도 집착이 없는 보시)를 행하여 널리 일체 모든 중생들을 공경하면 그 공덕이 끝이 없어서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참고 ❸]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4분53초)
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 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15분50초~20분41초)
*유루복(有漏福 있을 유/새다·번뇌 루/복 복)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은 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漏]이 있는, 번뇌[漏]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무루복(無漏福 없을 무/새다·번뇌 루/복 복) ; 번뇌[漏]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게 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소식(蘇軾 1036~1101) ; 북송(北宋) 때 문장가. 자는 자첨(子瞻). 자호(自號)는 동파(東坡). 사천성(四川省) 미산(眉山) 출신.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사람으로 시와 서화(書畫)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문장이 호방하고 웅혼하며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평가받는다.
비록 문인이자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선종(禪宗)의 조사들과 교유하여 선(禪)의 경계가 투영되어 있는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선과 정토가 동일하다는 관점을 받아들여 선정겸수(禪淨兼修)를 주장하기도 했다.
1080년(원풍3) 강주(江州) 동림선원(東林禪院)의 상총(常總) 선사를 친견하고 무정(無情)의 설법을 주제로 대담하고 지은 게송이 유명하다.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
계곡 물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고, 산의 모습이 어찌 부처님의 청정한 법신이 아니겠는가. 밤사이에 팔만사천 게송이 있으니, 다른 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명할까.
이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시냇물 소리와 산빛을 선의 종지와 연결시키는 구절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참고] 『속전등록(續傳燈錄)』 20권. 大鑑下第十四世 東林照覺常總禪師法嗣 < 內翰蘇軾居士.
內翰東坡居士蘇軾字子瞻 因宿東林與照覺論無情話有省 黎明獻偈曰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 未幾抵荊南聞玉泉皓禪師機鋒不可觸 公擬仰之 卽微服求見 泉問 尊官高姓 公曰 姓秤乃秤天下長老底秤 泉喝曰 且道這一喝重多少 公無對 於是尊禮之 後過金山有寫公照容者 公戲題曰 心似已灰之木 身如不繫之舟 問汝平生功業 黃州惠州瓊州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佛] ; 불(佛)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Buddha의 음사(音寫)인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 깨달은 분) · 각(覺 깨달음)이라 번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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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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