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활구참선은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 다못 바보처럼 거두절미하고 '이뭣고?' / 불교는 지식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요구하는 길 / 번뇌망상을 발판 삼아서 본참화두를 들어 나가면 깨달음의 과(果)를 성취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요, 채찍이요, 법문이 될 것입니다.
〇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어서 결단코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 갖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따져 봤자 그것은 중생심(衆生心), 중생심만 더욱 조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지고 있는 동안에는 깨달음은 우리에 이르러 오지 않는 것입니다. 경(經)을 보고 연구하고 어록(語錄)을 보고 이리저리 따져 봤자 중생심을 조장하고 시간을 낭비한 것뿐인 것입니다.
불교는 지식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요구하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으로 중생심을 보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니까 중생심(衆生心)을 떠나서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이뭣고?'를 한다 하드라도 역시 화두를 드는 그 생각은 역시 하나의 중생심(衆生心)입니다. 중생심으로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태여 말로 하자면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되겠습니다.
〇다할 길이 없는 그 번뇌(煩惱)가 그러면 나쁜 것이냐?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그 끝없이 일어나는 번뇌 망상, 중생심 그놈을 놓치지 아니하고 잘 발판 삼아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어 나간다면 그 수많은 중생심이 바로 우리를 성불(成佛)의 길로 인도하는 불보살(佛菩薩)의 자비로운 손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00)—1979년 동안거 해제(79.02.11)(용100)(활구참선)
약 10분.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활구참선(活句參禪), 활구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꽉 맥힌 상태에서 자기의 화두(話頭)를 관조(觀照)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고 했는고?' 또는 '이뭣고?' 다못 그것뿐인 것입니다. 앞도 없고, 뒷도 없고 그동안에 자기가 경을 읽었다던지, 법문을 들었다던지,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이라도 여기에 동원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못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
다른 화두와 비교하려 하지도 말고, 다른 데서 들은 말씀을 여기다 끌어대 가지고 이리저리 따지려 하지도 말고 다못 바보처럼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뭣고?'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괴로울 때나, 어데서 언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다못 '이뭣고?'인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懇切)히 홑으로 홑으로 간절히 해 나감으로써만이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해 가지고 홀연히 통 밑구녁 빠진 경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큰 간장독에다가 간장을 담아 놓은 것을 그걸 갖다가 메갱이, 쇠 메갱이로 쳐서 그 항아리가 쩍! 갈라지면서 항아리 속에 있는 장(醬)이 우르르르 한목 쏟아지듯이, 우리가 한 생각 한 생각 단속(團束)해서 쌓였던 그 의심이 점점 커져 가지고, 그 의심 덩어리가 우리의 가슴속과 이 허공계에 가뜩차서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풍선이 터지듯이 대의단(大疑團)이 타파(打破)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자기의 본참화두 하나에 충실함으로써만이 그렇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은 따져서 알려고 하지 안 해도 한눈에 환해져 버린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어서 결단코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 갖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따져 봤자 그것은 중생심(衆生心), 중생심만 더욱 조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지고 있는 동안에는 깨달음은 우리에 이르러 오지 않는 것입니다. 경(經)을 보고 연구하고 어록(語錄)을 보고 이리저리 따져 봤자 중생심을 조장하고 시간을 낭비한 것뿐인 것입니다.
불교는 지식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요구하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으로 중생심을 보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니까 중생심(衆生心)을 떠나서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이뭣고?'를 한다 하드라도 역시 화두를 드는 그 생각은 역시 하나의 중생심(衆生心)입니다.
중생심으로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태여 말로 하자면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슬픈 생각도 중생(衆生)의 하나의 감정이요, 기쁜 생각도 중생심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이요, 괴로운 생각도 역시 하나의 중생의 감정입니다. 그러한 슬프고 · 괴롭고 · 외롭고 · 쓸쓸하고 · 썽내고 하는 그러한 모든 중생심이 전부가 다 '한 생각'도 등한히 방치해서는 아니될 중요한 고비인 것입니다. 중요한 계기(契機)인 것입니다.
괴롭다고 화두를 놔버리고, 슬프다고 화두를 놔버리고, 기분이 나쁘다고 화두를 놔버리고, 몸이 괴롭다고 화두를 놔버린다고 하면 우리는 화두를 들 때가 과연 언제인 것입니까?
일생을 통해서 우리는 잠시도 조용할 때가 없습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던지 일어났다 꺼지고, 꺼졌다 일어나고 이러는 것입니다. 그 많은 수없는 생각들 그것이 바로 번뇌무진(煩惱無盡)입니다. 중생(衆生)이 무변(無邊)이요, 번뇌무진(煩惱無盡)입니다. 그러한 번뇌가 끊어지지 않는 동안에는 중생이 다할 날이 없는데, 중생계를 다할려면은 번뇌가 다해야 합니다. 그 번뇌는 다할 길이 없습니다.
다할 길이 없는 그 번뇌(煩惱)가 그러면 나쁜 것이냐?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그 끝없이 일어나는 번뇌 망상, 중생심 그놈을 놓치지 아니하고 잘 발판 삼아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어 나간다면 그 수많은 중생심이 바로 우리를 성불(成佛)의 길로 인도하는 불보살(佛菩薩)의 자비로운 손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끝없이 일어나는 중생심 그 많은 생각들을 그때그때, 그 생각이 두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우리의 본참화두 '이뭣고?'를 들면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관조해 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깨달음을 구태여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아니하고 알뜰하게 일어나는 생각들을 잘 단속(團束)해서 자기 본참화두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타성일편(打成一片)으로 들어가는 바로 직전인 것입니다.
구슬이 수천만 개, 하늘에 반짝거리고 있는 별만큼 그렇게 많은 구슬이 있다 하더라도 그 구슬을 꿰어야 보배인 것입니다.
수많은 우리의 생각들, 하늘에 별보다도 더 많은 수에 우리의 생각들을 오직 우리의 본참화두(本參話頭)로써 꿰어 내려간다면 그 많은 생각들은 깨달음을—보리(菩提)의 과(果), 보리과(菩提果), 깨달음의 과(果)를 성취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요, 채찍이요, 법문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슬픔도 괴로움도 어떠한 육체적인 정신적인 아픔도 그이에게는 소중한 것이 될 것입니다.
해제를 맞이해서, 또 백일기도 회향을 맞이해서 행여나 그럭저럭 지내실까 봐 아주 고준한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아울러서 당부에 말씀을 전해 드린 것입니다.(20분25초~30분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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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관조(觀照 보다·관찰하다 관/비출 조) ; ①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봄. ②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❶]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❷]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거두절미(去頭截尾 버리다·덜다 거/머리 두/끊을 절/꼬리 미)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53~54 (가로판 p53~55)
(13)凡本參公案上(범본참공안상)에 切心做工夫(절심주공부)하되 如鷄抱卵(여계포란)하며 如猫捕鼠(여묘포서)하며 如飢思食(여기사식)하며 如渴思水(여갈사수)하며 如兒憶母(여아억모)하면 必有透徹之期(필유투철지기)하리라.
무릇 본참공안에 대하여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공부하되 마치 닭이 알을 품듯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하며, 주린 사람이 밥 생각하듯 하며,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 하며, 아기가 엄마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꿰뚫을 때가 있으리라.
(註解) 祖師公案(조사공안)이 有一千七百則(유일천칠백칙)하니 如狗子無佛性(여구자무불성)과 庭前栢樹子(정전백수자)와 麻三斤(마삼근)과 亁屎橛之類也(간시궐지유야)라 鷄之抱卵(계지포란)은 暖氣相續也(난기상속야)요 猫之捕鼠(묘지포서)는 心眼(심안)이 不動也(부동야)요 至於飢思食渴思水兒憶母(지어기사식갈사수아억모)가 皆出於眞心(개출어진심)이요 非做作底心故(비주작지심고)로 云(운), 切也(절야)니 參禪(참선)에 無此切心(무차절심)하고 能透徹者(능투철자)가 無有是處(무유시처)니라.
조사들의 공안이 천칠백 가지나 있는데, 「개가 불성이 없다」라든지, 「뜰 앞에 잣나무」라든지 「삼서근」 「마른 똥막대기」 같은 것들이다. 닭이 알을 품을 때에는 더운 기운이 늘 지속되고 있으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에는 마음과 눈이 움직이지 않게 되고, 주릴 때에 밥 생각하는 것 목마를 때에 물 생각하는 것 어린애가 엄마를 생각하는 것은 모두 진심(眞心)에서 우러난 것이요, 억지로 지어서 내는 마음이 아니므로 ‘간절(懇切)하다’고 하는 것이니, 참선하는 데 이렇듯 간절한 마음이 없이 깨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참고 ❷]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59~162, 186~187 (가로판 p153~155, 177~178)
〇做工夫(주공부)호대 最要緊(최요긴)이 是個切字(시개절자)이니 切字(절자)가 最有力(최유력)하니라. 不切則懈怠生(부절즉해태생)하고 懈怠生則放逸縱意(해태생즉방일종의)가 靡所不至(미소부지)하리라. 若用心(약용심)이 眞切(진절)하면 放逸懈怠(방일해태)가 何繇得生(하유득생)이리요 當知(당지)하라 切之一字(절지일자)는 不愁不到古人田地(불수부도고인전지)하며 不愁生死不破(불수생사불파)이니라.
공부를 짓되 가장 요긴한 것은, 이 간절 절(切)자이니 절자(切字)가 가장 힘이 있느니라. 간절치 않으면 해태심이 생기고 해태심이 생기면 방종함이 이르지 아니함이 없으리라. 만약 마음씀이 참으로 간절하면 방일 해태가 무엇을 말미암아 나리요? 마땅히 알라. 절(切)자 한 자는 고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없으며, 생사를 깨뜨리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없느니라.
切之一字(절지일자)는 當下(당하)에 超善惡無記三性(초선악무기삼성)하나니 用心(용심)이 甚切則不思善(심절즉불사선)하며 用心(용심)이 甚切則不思惡(심절즉불사악)하며 用心(용심)이 甚切則不落無記(심절즉불락무기)하나니 話頭切(화두절)이면 無掉擧(무도거)하고 話頭切(화두절)이면 無昏沈(무혼침)이니라.
간절 절(切)자 한 자는 당장에 선과 악과 무기(無記) 세 가지 성품을 뛰어넘나니, 마음씀이 매우 간절한즉 선(善)을 생각지 않을 것이요, 마음씀이 매우 간절한즉 악(惡)을 생각지 않을 것이며, 마음씀이 매우 간절한즉 무기에도 떨어지지 않나니, 화두가 간절하면 산란심도 없고 화두가 간절하면 혼침도 없나니라.
切之一字(절지일자)는 是最親切句(최친절구)이니 用心(용심)이 親切則無間隙故(친절즉무간극고)로 魔不能入(마불능입)하고 用心(용심)이 親切(친절)하야 不生計度有無等(불생계탁유무등)하면 則不落外道(즉불락외도)하리라.
간절 절(切)자 한 자는 이 가장 친절한 말이니, 마음씀이 간절한 즉 틈이 없으므로 마(魔)가 침노하지 못하고 마음씀이 간절하야 「있다, 없다」하는 등 계교하고 헤아림이 나지 아니하면 외도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〇做工夫(주공부)호대 疑情(의정)을 發得起(발득기)어든 更要撲得破(갱요박득파)니 若撲不破時(약박불파시)에는 當確實正念(당확실정념)호대 發大勇猛(발대용맹)하야 切中(절중)에 更加個切字(갱가개절자)하야사 始得(시득)다.
공부를 짓되, 의정이 일어났거든 다시 그 의정을 깨뜨려야 하나니, 만약 깨뜨리지 못한 때에는 마땅히 바른 생각을 확실하게 하되 큰 용맹심을 발하야 간절한 가운데 더한층 간절을 더해야사 옳다.
徑山(경산)이 云(운) 大丈夫漢(대장부한)이 決欲究竟此一段大事因緣(결욕구경차일단대사인연)인댄 一等打破面皮(일등타파면피)하야 性燥(성조)히 竪起脊梁骨(수기척량골)하야 莫順人情(막순인정)하고 把自己平昔所疑處(파자기평석소의처)하야 貼在額頭上(첩재액두상)호대 常時(상시)에 一似欠人(일사흠인)이 萬百貫錢(만백관전)하야 被人追索(피인추색)호대 無物可償(무물가상)하야 怕被人恥辱(파피인치욕)하야 無急得急(무급득급)하며 無忙得忙(무망득망)하며 無大得大底一件事(무대득대지일건사)라사 方有趣向分(방유취향분)이라 하니라.
경산(徑山)스님이 말씀하시되 「대장부가 결단코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궁구하고저 할진대, 첫째로 체면을 차리지 말고 성급히 척추뼈를 똑바로 세워 인정에 따르지 말고, 평소에 자기가 의심해 오던 것을 잡아 이마 위에 붙여 놓고 항상 남의 돈 백만 관을 빚진 사람이 빚장이에게 추심을 받되 갚을 물건이 없어 남에게 수치와 욕을 입을까 두려워하야,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없으며, 이보다 더 바쁜 일이 없으며, 이보다 더 큰일이 없는 것같이 하여야사 비로소 공부를 해나갈 분이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메갱이 ; ‘메공이’의 사투리.
*메공이 ; 메처럼 자루가 따로 달린 절굿공이. 흔히 떡을 치거나 떡가루 따위를 빻을 때 쓴다.
*단속(團束 모이다·통치하다 단/묶다·단속하다·삼가다 속) ; ①주의를 기울여 다그쳐 보살핌. ②규칙, 법령, 명령 등을 어기지 않게 통제함.
*공안(公案, 話頭)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한눈 ; ①한 번 봄. 또는 잠깐 봄. ②한꺼번에, 또는 일시에 보는 시야(視野).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어록(語錄 말씀 어/기록할 록) ; ①위인이나 유명한 사람의 말[語]을 간추려 모은 기록(記錄), 또는 그 책. ②조사어록(祖師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무진(無盡) ; ①다함이 없는 것. 다함이 없을 만큼 매우. 끝이 없을 정도로 매우. ②무궁(無窮 공간이나 시간 따위가 끝이 없음). 무제(無際 넓고 멀어서 끝이 없음).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보리과(菩提果) ; 깨달음.
*보리(菩提) : [산스크리트어(범어)]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 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 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 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과(果 열매·결과 과) ; ①열매를 맺음. 또는 그 열매. 원인으로부터 생긴 결말의 상태. ②원인으로 인하여 생기는 일체의 법(결과).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회향(廻向) ; 회전취향(回轉趣向)의 뜻. ①방향을 바꾸어 향하다. ②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 이익을 주려하거나 그 공덕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함. ③자신이 지은 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베풀어 그 중생과 함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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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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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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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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