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146'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2.12.12 •§• 초심(2/7) (讚唄祝願~流蕩邪心) - 전강선사(No.146) 1
초발심자경문(초심)2022. 12. 12. 06:54

 

 

•§• 초심(2/7) (讚唄祝願~流蕩邪心) - 전강선사(No.146)

**전강선사(No.146)—초심(2/7)(讚唄祝願~流蕩邪心)(임자72.08.11) (전146)
*「초심(初心)」은 「초심문(初心文)」으로 고려 보조지눌 스님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의 준말이다. 이 「초심」과 신라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과 고려 야운 스님의 「자경문(自警文)」을 합쳐 한 권으로 엮은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이 있다.

 

약 29분.


녹수청산천만리(綠水靑山千萬里)에  고인별후정하허(故人別後情何許)오
나무~아미타불~
일성장적(一聲長笛)은 이정고(離情苦)인데  제조낙화춘적적(啼鳥落花春寂寂)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그 고인(古人)들도 서로 청산, 녹수청산(綠水靑山)에서 도를 닦다가 그 도반(道伴)이라는 것이 천하에 없단 말이여. 문수보살도 그 두 분이 도반이거든. 문수보살 (보현보살) 두 분이 도반으로서 조불양화(助佛揚化) 하기를 원력을 세웠거든.

어떤 부처님이든지 부처님이 출세(出世)허면은 쌍족제자(雙足弟子)가 되어가지고 그 부처님의 정법을 조불양화, 그 잘 발전을 허게 그렇게 허자고 원력을 세우고 두 문수(文殊)와 보현(普賢)이 눈을 쥐어뜯고서 도를 닦았어. 서로 경책(警策)해 가면서 그 도를 뭐 일생뿐만 아니라 다생을 그렇게 도반이 되어가지고 닦아. 그 인연으로 늘 만나거든. 서로 도반이 되어서 도를 닦았기 따문에 또 만나고 또 만나고 그런 거여.

녹수청산천만리(綠水靑山千萬里)에 고인별후정하허(故人別後情何許)냐. 서로 살다가 도를 같이 닦고 살다가 한 분이 돌아가시면은 그 이별한 후에 정(情)을 어따가 그 하소연할 것이냐. 기가 맥히지. 그 정을 말로 다 할 수가 있겠나.

일성장적(一聲長笛)은 이정고(離情苦)다. 그 한 소리 긴 젓대소리는 기가 맥히게 좋은 그 젓대소린데, 그게 그 기가 맥힌 고(苦)다. 이별고(離別苦). 이별을 생각하니 천하 없는 젓대소리가 귀에 들리는데 그 젓대소리가 온전히 괴롭다. 정 따문에.
제조낙화춘적적(啼鳥落花春寂寂)이로구나. 새는 우는데 꽃 떨어진 봄 적적허구나. 고인(古人)의 시(詩)여.


부처님께 예경할 때, 찬패축원(讚唄祝願)허되, 그 축원을 떠억 부처님께 허는데, 수송문관의(須誦文觀義)다.
"앙고(仰告)~" 허면서도 그 송문(誦文)허면서, 축원(祝願)을 읽으면서 그 관의(觀義)를 해라. 의(義)를 관(觀)혀. 관이 제일이여. 그 축원, 그 뭐 입으로 '아무개 보체' 뭐 그 뭐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의(義)를 따악 관허는 법이다. 관법(觀法).

부득단수음성(不得但隨音聲)해라. 음성을 딸치 마라. 그 소리 그거 뭐, 뭐 무슨 소용이 있나?
또 할라면은 부득운곡부조(不得韻曲不調)다. 예경(禮敬)을 또 그래도 소리를 내서 헐 때는 있지 없는 건 아니니, 여러 이 대중이 모여서 부처님께 예경할 때 그럴 때 또 예경을 허는데 누구는 “지심귀명례” 크게 내고, 어떤 이는 “지심귀명례(낮은 음성)” 그러고, “삼계대사(높은 음성)”는 “삼계대사(낮은 음성)” 허고.
모도 이렇게 운곡(韻曲)을 따라서 창(唱)을 똑같이, 이 다 있단 말이여 「초심(初心)」에. 운곡을 똑같이 내서 정성스럽게 이렇게 할 것이다. 그래 운곡을 고르지 않지도 말아라. 그 골라야 한다 그 말이여. 같이 똑 골라서 그 예경답게 해라.

첨경존안(瞻敬尊顔)하되, 조실(祖室) 스님 같은 인자 그런 존안을 높이 보되, 날 가르키는 조실 스님이니, 선방(禪房)에는 조실 스님이 아 그 중 조실 스님 아닌가. 법(法)을 가르키는 조실 스님이니 그 법을 높일라니까, 법 가진 조실 스님이니 법을 높여야 할 것 아닌가. 법을 중히 여길 것 아닌가.

그 높은 얼굴을 공경히 보되, 부득반연이경(不得攀緣異境)이다. 요새 가만히 봐. 어디서 객(客)이든지 그 배우지 못한 객은 오면 절을 허면서, 절을 이렇게 허면서도 조실 스님한테 존안(尊顔)에 절을 허되, 이런다 그 말이여. 뭐 이래 보면서 이래. 그거 그 아니다 그 말이여.
꼭 존중히 예를 허는 것이지. 고갯짓을 허고 딴 걸 보면서, 이경(異境)을 보면서 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초심행, 우리 중, 도 닦는 중의 행이 그렇다 그 말이여. 부득반연이경(不得攀緣異境)이다. 그런 예경을 허는데 다른 경계를 보면서 그렇게 허지 말아라.

수지자신죄장(須知自身罪障)이, 모름이 알거라. 자신죄장(自身罪障)이, 내 이 몸뚱이 죄장(罪障)이 죄가—우리 몸뚱이—유여산해(猶如山海)다. 산과 바다 같다. 산 바다도 우리 죄장에 오히려 모지래, 비유헐 수 없어. 산이 그렇게 높고 많고, 바닷물이 그렇게 많지마는 산과 바다보담도 더 많이 죄를 지었다.
다생겁(多生劫) 중으로 지은 놈의 죄가 한량도 없다. 그 지금 저 숙업(宿業)이 한량이 없이 쌓여 있는데 차례차례 받는 것이여. 좀 암만 그 어떻게 마구잽이 막 드리 주는 것이 아니라, 이 죄업 받는 것이 차례로 차례로 차츰차츰 아무 때 받을 때가 있고, 그 때가 있어.

자신죄장(自身罪障)이 산해(山海)와 같다. 그러니 이렇게 참회를 이참(理懺)으로, 사참(事懺)으로 해라. 우리가 사참으로 허는 것이 이 절을 이렇게 아침마당 지금 참회하는 것이여. 이 '참(懺)을 꼭 해라'고, 아 바로 「초심(初心)」에 안 있는가?
참회를 하되 껍데기로만 입으로만 다시는 살생 안 하고, 다시는 도둑질 않고, 사음질 않고, 그러지 말고 뜻으로 참말로 실행을 꼭 해라. 그 참회를 꼭 해 가지고는 꼭 실행을 닦아라.

그래서 가이소제(可以消除)니라. 그래사 가히 써 가이소제(可以消除)가 되는 법이다. 아 그 다시 안 할라고 맹세하고 아침마당, 아침마당 이렇게 사참(事懺)을 허니, 뜻으로 또 그렇게 이참(理懺)을 허니, 아 죄가 좀 사해질 것 아니냐.

심관능예소례(深觀能禮所禮)가, 깊이—우리가 부처님이 계시는데, 능예(能禮), 예를 받는 이가 부처님이고, 소예(所禮), 예를 허는 사람이 우리인데—부처님이 예를 받고, 우리가 절을 허는 것이 진성연기(眞性緣起), 내 참성품 인연으로 쫓아 일어난 것을 꼭 관(觀)해라.
내 마음으로 쫓아 일어나는 것을 그걸 관을 해라. 관법(觀法)이여. 몸뚱이만 그 아무것도 아니어. 몸뚱이만 허는 게 뭐냐? 관을 딱 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서 깊이 감응(感應)하는 것이, 부처님이 깊이 감응하는 것이 헛되지 아니한 줄로 관(觀)해라. 꼭 그 참 진실로 관을 해라. 그래서 영향상종(影響相從)이니라. 그림자와 메아리가 서로 쫓는 것 같이 해라. 여그서 “억!” 허면 저그서 “억!” 허지 않는가?
우리가 허는 것이 꼭 그런 거여. 부처님한테 한번 공경하고 진심으로 참된 마음으로 참회를 허면은 부처님이 참회를 받고, 응허고 죄업 소멸하는 것이 메아리여. 여그 “억!” 허면 저그서 “억!” 허데끼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렇게 안 될 것인가?

거중요(居衆療)허되, 중요에 살되, 중요(衆療)라는 것은 우리 선방 여럿이 살되 항상 상양(相讓)해서 내가 헌 것이라도 못헌 체, 아무리 잘한 것이라도 잘 못헌 체, “제가 소승(小僧)이 뭘 압니까?” 이렇게 상양(相讓)을 해서 다투지 말아라.
제가 잘헌 체해 가지고 꼭 싸우는 것이니까. 거 남의 허물을 기어니 파내 가지고 덕을 잃고 싸우는 것이니까. 상양해서, 허는 것도 못헌 것 같이 해서 항상 저 사람을 도와주고, 저 사람이 잘한 것 같이 해 주고 내가 못헌 것 같이 해서, 상양해서 싸우지 말아라. 서로서로 붙잡아 도와서 보호를 해라.

승부쟁론(勝負諍論)을 말아라. '내가 제일이고 너는 못쓴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헌 승부를 모도 말해 가지고는 '내 말이 옳다' 우겨 가지고 싸우지 말아라. 꼭 그 승부라는 게, 싸우는 게 거그서 나온 것이다.

머리를 모아 가지고 한화(閒話)를 말아라. 세상에 중이, 중 되어 가지고 도학자가 머리를 모아서 왜 한담(閒談)을 하냐? 한담할 겨를이 어디 있나? 꼭 그저 되나 안 되나, 망상이 나거나 말거나 항상 헐 것은 '이뭣고?'뿐이다. '이뭣고?'뿐인데 어디 한화(閒話), 한담(閒談)할 겨를이 어디가 있어서 머리 모아서 한담하냐? 그것 한담 못쓰는 것이여.
왜 방에서 항상 글안혀? 혹 물을 말만 묻고, 대답할 말만 대답하지, 말 두 말도 말어라. 어디서 뭐라고 뭔 말 한참 그런 뭔 말을 하면은 내 쫓아가서 말하지 않어? 왜 한담(閒談)하냐? 왜 머리를 모아서 무슨 그러헌 그 잡담을 하냐? 내가 그러지 않어?

저그 내려가서도 선방 안에서 뭔 말을 주고받고 무슨 말을 혀? 왜 왜 이 묵언(默言) 구역, 그대로 묵언 구역이 아닌가. 도 닦는 데가 묵언 구역이 그대로 아닌가. 항상 거그는 앉으면 화두만 들 일이지 무슨 얘기를 허냐 그 말이여. 선방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법 없어.

백월 스님이, 저 태백산 백월 스님이 선방 원주(院主) 스님인데, 양식이 떨어지면 속가에 어디 내려가서 시주 집에 가서 “양식을 좀 주십시오. 우리 선방에 양식이 떨어져 왔습니다” 아 그러면 시가(施家)에서 안 주어?
아 '선방에 양식이 없다'고 하니까, '아이고! 우리가 굶더라도 드려야겠다'고 모도 이런 원력으로써 정성적으로, 정성스럽게 쌀을 모도 주면은 그놈을 받아 가지고 올라와.

가만히 짊어지고 선방 앞으로 오면 선방 안에서 아무 말이 없이 가만히 도를 닦고 앉았으면 절을 백배(百拜)를 혀. 그저 절을 백배를 혀. 지극히 정성으로만 절을 혀. '참으로 감사하시다. 저렇게 도를 닦아서 중생을 제도헐 우리 스님네 참 감사합니다'
만약 얘기 소리가 나. 그 선방 안에서 얘기 무슨 한담을 혀. 잡담을 헌다든지 허면, 쌀을 놓고 말리(마루)에다가 쌀을 팍! 부딪쳐 버리고, “내가 저런 것들을 갖다가 쌀 갖다가 얻어다가 밥을 멕이다니 내가 죄를 더 짓는구나” 아 그러고 울었어. 그렇게 수좌(首座)를 보호를 했어. 백월 스님이여. 뭐 별로 오래 되지도 안 했어.

그런데 생전 당시에 뜻밖에 도솔천(兜率天)에서 동자가 내려왔다고, 도솔천에서 내려왔다고 떠억 그러면서 대중스님네 꿈에 '저 백월 스님을 도솔천으로 모시고 올라가니까 그리 아십시오' 아 모도 그렇게 현몽(現夢)을 했어. 도솔천에다 모신다고, 그 선객(禪客) 그 공부허게 그렇게 보호해 주는 거, 그거 참 그렇게 장하다 그 말이여.
'생전에 도솔천에서 모시러 왔습니다' 한두 분 꿈이 아니라 대중 전체 똑같이 그런 꿈을 꾸었어. 꿈꾸고 나서 아침에 대중이 모아 앉아서 꿈 얘기를 했어. "아! 우리 원주 스님이 도솔천 내원궁에서 모셔간다고 아! 이런 꿈을 꾸었으니 웬일인가 모르겠다"고, 아 모도 그 말 듣고, "아! 이거 참, 우리 원주 스님 도솔천에서 참말로 모셔 갈란갑다"고 이랬다 그 말이여.

과연 정오(正午)가 되니까, 한 오정(午正)쯤 되니까 백월 스님이 앞에 와서, 대중스님네 모도 앞에 와서 “소승은 박복(薄福)해서 큰스님네를 오래 모시지 못허고, 오래 좀 뒤를 보호허지 못허고는 오늘 갑니다, 소승은” 아주 목욕재계 따악 하고는 그만 그대로 와서 앉아서 예(禮)를 혀. “도솔천 내원궁에서 청장(請狀)이 왔으니 헐 수 없이 올라갑니다” 그러고 절을 허고는 그대로 사르르르르 좌탈입망(坐脫立亡) 했지.
그렇게 참! 그런 거여. 이 선객 보호허고 선방을 보호허고 선원을 짓고 도를 닦게 만드는 이 승복(勝福)은 말할 수가 없다. 백월 스님 역사가 증명하지 않아? 그런 일이 없어? 없는 걸 내가 얘기허고 앉았어?

항상 이렇게 상양(相讓)해서 다투지 말고 서로서로 부조(扶助)해서 보호허며 승부를 말아라. 그래가지고 머리를 모아서 그 한담(閒談), 취담(聚談), 그런 거 허담(虛談), 절대 말아라.

또 어디를 나감에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인 설법 장소라도 그런 데 나가고 들어갈 때, 신발 같은 것을 한쪽에 잘 벗어 놨다가 똑 찾아 신고 나가거라. 내 신 신지, 넘의 신 신고 그만 어디 가고. 그 중은 그런 법 아니어.
또 앉고 누울 때에 꼭 내 자리에 앉고 눕고 그러허지, 아무데나 가 푹 앉고, 아무 자리나 가서 눕고 그러지 말아라. 도학자라는 것은 그러는 것이 아니어.

객(客)을 대(對)해서 말을 헐 때, 어디서 객이 오면 그 객을 대해서 말을 헐 때, 가추(家醜)를 들날치지 말아라. 내 집안에 아무리 나쁜 일이 있닥 하드래도 그 나쁜 일을 객(客)한테 말허지 말아라. 그거 않는 것이여.

항상 '원문(院門)에 우리 참선하는 이 참선 대중이 잘 허신다'는 그러헌 불사적 말을 복 있는 말을 헐지언정, 원문불사(院門佛事)의 말을 찬탄헐지언정, 저 모도 어디 돌아댕이면서 댕이며 나가서 숭보고 돌아댕이지 말아라.
그 숭보고 돌아댕이는 그런 거, 그 무슨 허물이 있는 거 그런 거, 그걸 모두 들내서 역부러 말을 허고 돌아댕이거든. 그것 천하에 못쓴 것이여. 그건 쫓아내 버려야지 된 법이 없어. 그건 으레껀 쫓아내 버려야 하는 거여.

뭔 잡된 일을 못된 일을 보고 듣고, 어디 가서 잡된 그런 일을 듣고 의혹(疑惑)을 내지 말아라. 그 의심 내고 의혹을 내지 말어.
이번에 모도 뭣 저, 뭣 헌다고 모도 나와서 여 모도 말하지 안 했는가? 그 말하는데 왼통 이북(以北) 사람이 나와서 그 부모 만나기, 가족 찾기도 모도 운동헌다고 그 야단하고 했는데 뭐 나와서 라디오 방송으로 어떻게 말을 잘허고 당최 뭐 그 거그는 그렇게 잘 살고, 그렇게 좋게 되고 뭐 어짜고, 어저께도 누가 그런 소리를 헌다 그 말이여. 내 벼락을 내 버렸어.

'고놈들이 허는 지정머리라는 것은 곧 백성들 모도 피 전부 빨아서 제 혼자 제일이고, 제 혼자 독재주의를 해 나가는 놈의 정치를 가지고 그따구 놈의 소리를 허냐'고, 내가 그만 벼락을 내 버렸어. 그놈들 허는 지정머리가 전부가 그뿐 아닌가 말이여.
뭐 그런 짓이여. 그런 의혹 같은 거 모도 집안 잡된 일 같은 거 있닥 하드래도—왜 우리, 우리 국가에는 어째서? 이렇게 문화 건설을 잘 해놓고, 얼마나 우리 자유국이 얼마나 지금 자유스럽냔 말이여.

요긴한 일이 아니거든—저 어디 공원에 놀고, 뭔 요긴한 일이 없이 고약한 데 그런 데, 유주엽현(遊州獵縣), 엽현(獵縣)이라는 건 그건 모도 못쓸 데란 말이여.
잡된 데 가서 모도 놀고, 저 속인(俗人)으로 더불어서 도 닦지 않은 사람으로 더불어서 가서 쫓아가서 뭔 얘기나 하고, 그래가지고 모도 저로 하여금 미워허지 말아라. 미워허고 모도 그런 허물허지 말아라.

실자도정(失自道情)이어다. 이러헌 도정(道情)을 잃지 말 것이니라. 도(道), 이거 도정(道情) 잃는 것이거든, 도학자라는 것은 그러한 데 가서 그렇게 놀면서, 가추(家醜)를 모도 들내면서 도정을 잃지 말아라.
만일 꼭 요긴한 일이 있어서 출행(出行)을 허거들랑, 어디를 나가거든 조실 스님이나 주지 스님한테 고(告)해서, 말을 해서 관중자(管衆者), 그 관중자, 그렇게 대중을 가르켜 나가는 관중자한테 고해서 그 가는 곳을 꼭 알릴 것이니라.

같이 살다가 슬쩍 어디 간다고 가고 없으면은 그 어찌 간지 아냐 그 말이여. '어디 가 도둑놈이 잡아갔나? 어디 가서 무슨 큰일을 당했나? 어디 가 죽었나? 무슨 일이 있어 이렇게 없어졌노?' 거 되겄어?
절대로 '어느 때 뭔 일이 있으니 거가 좀 보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고(告)허고 거처를 알리고 갈 것이니라.

만약 속가(俗家)에 들거들랑 모름이 굳게 정념(正念)을 가져라. 어쩌다가 속가에 가거들랑, 출가한 사람이 도학자가 내 고향을 찾아 부모한테를 찾아갔다 하드래도 정직한 마음을 꼭 가지고 가거라. 저 색(色)을 보고 소리를 듣고 삿된 마음을 그 내서는 안 된다.

속가에 가면 흔히 부모라도 도 닦는 도를 잘 닦는 그 자식인데, 도를 잘 닦도록 그저 이렇게 보호를 해 주고 그 자식을 천하에 없이 부처님처럼 이렇게 보면 허지마는, "장가나 가거라"
그거 뭐 그저 가서 그저 멕일 것, 못 멕일 거 뭐 그저 산목숨이나 얼른 닭이나 모가지 홀켜 잡아 가지고는 푹푹 끓여서, "아나, 어서 먹어라" 모도 요런 짓이나 하거든. 속가라는 게 그렇거든. 어디 그 도 닦는 사람 대접인가?
전부 도를 못 닦게 하는 장애뿐이거든. 그러니까 정념을 가지고 갔다가 그 정념을 잃지 말고 와야 한다. 행여나 절대 삿된 마음을 내지 아니 해야 하느니라.

코가 꽉 맥혀서 당최 뭐... 또 코가 어째 이렇게 맥힌고? (처음~29분25초) (끝)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