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구참선 최상승법2020. 11. 23. 07:49

§(175) (게송)운기남산북산우~ / 물의 변하지 않는 것, 습성(濕性) / 영가가 오히려 법문을 잘 들을 수 있다 / 불법(佛法)은 생사윤회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에 목적.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것이니, 내가 나를 깨닫는 데에는 일체 방편이 필요없다 / (게송)자성구삼신~ / '참불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

 

우리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불법을 올바르게 믿고 올바르게 실천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영원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참사람은 생사 속에서 바로 생사가 없는 열반(涅槃),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것이니, 내가 나를 깨닫는 데에는 일체 방편이 필요가 없는 것이여. 오직 한 가지, 견문각지(見聞覺知)—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모든 것을 감각할 때, 그리고 뜻으로 알 때, 바로 그때의 그 인연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인연에 즉(卽)해서 '참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75)—1982년 7월 첫째 일요법회. (용175)

 

(1) 약 20분.

 

(2) 약 11분.

 

(1)------------------

 

운기남산북산우(雲起南山北山雨)허고   여명마자기다반(驢名馬字幾多般)고

나무~아미타불~

청간호묘무정수(請看浩渺無情水)하라   기처수방기처원(幾處隨方幾處圓)고

나무~아미타불~

 

운기남산북산우(雲起南山北山雨)요. 구름이 남산에서 일어나는데 북산에 비가 와.

여명마자기다반(驢名馬字幾多般)고. 이것은 나귀다, 이것은 말이다, 이것은 소다, 이것은 돼지다, 그러한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낱낱이 다른 이름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 이 말이여.

 

청간호묘무정수(請看浩渺無情水)하라. 청컨댄 저 넓고도 넓고 넓은 저 무정(無情)한 저 물을 보라 그말이여.

기처수방기처원(幾處隨方幾處圓)고. 어느 곳에서는 모나고, 어느 곳에서는 둥근가?

 

물이라 하는 것은 모난 그릇에 담으면 모나게 담겨지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담아지고, 긴 그릇에 담으면 길게 담아지고, 깊은 그릇에 담으면 깊게 담아지고. 깊은 데를 만나면 밑바닥부터서 차츰차츰 차 올라가 가지고 가뜩차면은 넘고, 높은 데에 처하게 되면 나차운 데로 나차운 데를 향해서 계속 떨어져 흘러 내려가고.

추위를 만나면 얼고, 더위를 만나면 녹고, 뜨거운 것을 만나면 수증기가 되고, 알고 보면 본래 한 물인데 장소와 여건에 따라서 모냥도 변하고 움직임도 변합니다.

 

그렇지마는 그 본바탕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얼음이 얼었다 하더라도 분명 우리 눈으로 볼 때에는 고체가 되어 가지고 만져 보면은 찹지마는 차운 고체일 때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그것이 녹아서 물이 되어서 액체가 되어 있을 때에도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그것이 증기가 되어서 기체가 되어 있어도 변하지 않는 바가 있어.

 

그러면 그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 습성(濕性)이라 하는 것이여. 습성! 젖은 성품.

습성은 액체일 때에도 그 습성 그 본질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고, 고체인 얼음덩어리로 있을 때에도 젖은 그 습성은 변함이 없고, 수증기가 되어서 기체가 되어 있을 때도 그 습성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 그말이여. 남산에 구름이 일어날 때나 북산에서 비가 내릴 때, 그 습성에 있어서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변한 바가 없다.

 

 

우리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육도(六途)를 돌고 돌아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사람으로 태어나 가지고 오늘 이 시간에 이 용화사 법보전(法寶殿)에 자리를 같이했습니다마는, 무량겁을 돌고 돌았지만 그 도는 가운데에 때로는 소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말로 태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돼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범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나라에 하늘나라 사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옥에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는 지옥 중생이 되기도 했습니다마는,

그 무량겁을 두고 육도를 윤회(輪廻)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도록 조끔도 변하지 아니한 바가 있으니 그것이 이름을 진여(眞如)라 하고, 자성(自性)이라 하고, 본성(本性)이라 하고, 참나라 하고, 또는 일물(一物)이라 하고 때로는 밑 없는 배라 하고, 구멍 없는 퉁수라 하고, 그림자 없는 나무라 하고, 천 가지, 만 가지 이름이 있지만, 그 자체는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아무리 우리의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49재를 맞이한 영가(靈駕)도 있고, 3재를 맞이한 영가도 있지만, 그 영가들도 현재 우리 사부대중과 함께 법문(法門)을 듣고 계십니다. 영가라고 해서 우리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양복을 입다가 그 양복을 벗어 놓고 한복을 입었다고 해서 그 사람 성이 변한 것도 아니요, 이름이 바뀌어진 것도 아니고 사람이 딴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 것처럼 우리의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육체를 잠깐 벗어버리고 새 몸을 받아 나기 위해서 중음신(中陰身)의 위치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얼마 안 가면 또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날 것입니다.

헌옷 벗어버리고 아직 새 옷을, 다른 옷을 입기 전에 잠깐 빨가벗은 몸으로 있는 것입니다. 빨가벗은 몸으로 있으면 오히려 모든 가식(假飾)을, 거짓 꾸민 것을 다 벗어버렸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온전히 숨김없이 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법문을 들어도 더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잘 들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가는 그리고 우리 법보전에, 법보단(法寶壇)에 봉안되어 있는 수천수만의 법보 영가들도 지금 법문을 잘 듣고 계실 것입니다.

 

법문은 원래 입으로 설(說)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부득이해서 입을 빌려서 설(說)하게 되고 귀를 통해서 듣게 될 뿐입니다마는 '참법'은 입을 통하지 아니하고 설(說)해지는 것이고 귀를 통하지 아니하고 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영가는 입도 없고 귀도 없지만, 입과 귀를 통해서 설하고 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가는 더욱 법문을 실(實)다웁게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전국에 많은 분들이 우리 용화사 법보전에 만년위패(萬年位牌)를 모시고—조상이나, 비명(非命)에 간 영가나, 한(恨)을 남기고 허공계를 방황하고 있는 많은 영가들을 용화사에 모시고, 모심으로써 많은 영가들이 돌아갈 곳을 찾고 의지할 곳을 찾아서 한을 풀고 좋은 곳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러기는 저 하늘갓으로 날아갔는데 기러기 놀다간 발자취는 모래사장에 남아 있듯이, 사람은 저 황천길로 떠나갔는데 그 사람의 이름만 집에 남아 있습니다.

억겁(億劫)을 두고 한번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 빠짐없이 다 또 그 몸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모든 사람도 언젠가는 이 몸을 벗어버리고 또 다음 새로운 몸을 받기 위해서 이승을 하직하게 될 것입니다. 알고 보면 태어났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이승을 하직했다고 해서 조끔도 슬퍼할 것이 없건마는, 사람은 정(情)이 있는 존재가 되어서 한 번 보고 두 번 보면 정이 들게 되고 하루 이틀 살다 보면 애착(愛着)이 생기고, 정과 애착으로 인해서 기뻐할 것도 없는 곳에 기뻐하고, 슬퍼할 것도 없는 터에 슬픔으로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불법을 올바르게 믿고 올바르게 실천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영원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참사람은 생사 속에서 바로 생사가 없는 열반(涅槃),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참나'를 깨달을 수가 있는가?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첫째, 철저하게 무상(無常)을 깨달러라. 정말 이 세상에 모든 존재는 삼라만상과 모든 동물과 만물의 영장인 사람까지라도 무상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렇게 무상한 줄을 철저히 깨닫고 그 무상한 가운데 영원한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을 믿어라.

물과 얼음과 수증기, 모냥은 장소와 때에 따라서 이리저리 바뀌지만, 바뀌어지지 아니한 변함없는 습성(濕性)이 있듯이 생로병사와 흥망성쇠와 성주괴공이 있는 이 무상한 속에서 변함없는 '참나'가 있다고 하는 사실,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는 바로 그것을 깨달은 선각자이다.

 

「우리도 부처님의 법에 의해서, 선지식(善知識)의 지도에 의해서 깊이 믿고 철저하게 수행을 하면 우리도 생사 속에서 영원을 살 수가 있다. 부처님이 될 수가 있다」 이렇게 믿어야 한다 이것입니다.

무상함을 깨닫고 참나를 깨닫는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을 믿었으되 용맹심(勇猛心)과 분발심(奮發心)이 없으면 정진이 나아가지를 않는 것이니 정말 용맹심과 분심을 내라.

「과거에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해 가지고 생사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왜 나는 오늘날까지 범부(凡夫)에 고해(苦海)를 해탈하지 못하고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五欲樂) 속에 빠져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가?」 이를 악물고 분발심을 내서 시간을 아껴서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공부를 하는 데에는 참선(參禪)이 제일이니,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이 그 방대한 법문이 있지마는,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방편(方便)으로 많은 법문을 설하셨지마는 궁극에 부처님께서 설하시고자 한 바는 방편법이 아니라 최상승법 하나일 뿐인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것이니, 내가 나를 깨닫는 데에는 일체 방편이 필요가 없는 것이여.

오직 한 가지, 견문각지(見聞覺知)—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모든 것을 감각할 때, 그리고 뜻으로 알 때, 바로 그때의 그 인연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인연에 즉(卽)해서 '참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처음~20분6초)

 

 

 

 

(2)------------------

 

자성구삼신(自性具三身)하니   발명성사지(發明成四智)니라

나무~아미타불~

불리견문연(不離見聞緣)허고   초연등불지(超然登佛地)니라

나무~아미타불~

 

자성(自性)은 삼신(三身)을 갖추어 있어. 부처님에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이 있는데, 우리의 자성(自性)에도 법신과 보신과 화신, 이 삼신을 갖추고 있다 그말이여.

 

'부처님'하면은 삼천년 전 석가모니불을 우리는 연상(聯想)을 하지만,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삼천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부처님 얼굴을 보는 거울에 지내지 못합니다.

최상승법에 있어서의 부처님은 지금 산승(山僧)에 말을 듣고 있는 그 자체입니다. 지나간 부처님을 통해서 현재의 부처님을 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현실을 보다 더 훌륭하게 살기 위함이요, 미래를 보다 더 훌륭하게 건설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부처님을 우리가 존경하고, 과거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현재의 '참부처님', 내게 있는 참부처님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내게 있는 참부처 · 참나를 깨닫는 데 온통 불법에 목적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참나를 깨닫는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참나를 깨닫는 참선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팔만장경을 종횡으로 읽고 외우고 풀이를 한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산승의 설법을 듣고 있는 그놈, 지금 산승의 얼굴을 여러분은 쳐다보고 계시는데 그 볼 줄 아는 놈, 바로 그 들은 놈, 바로 그 보는 놈, 보고 듣고 하는 그곳을 여의지 아니하고 초연히 부처님 경지에 올라가는 것,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바로 들을 때에 듣는 그 찰나를 즉(卽)해서 참나로 돌아가야 하고, 볼 때 보는 그 찰나를 여의지 아니하고 부처님 경지에 올라가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오금위여설(吾今爲汝說)하니  체신영무미(諦信永無迷)니라

나무~아미타불~

막학치구자(莫學馳求者)에  종일설보리(終日說菩提)니라

나무~아미타불~

 

오금위여설(吾今爲汝說)하노니,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해서 설하노니,

체신영무미(諦信永無迷)니라. 간절히 영원히 미(迷)함이 없도록 깊게 깊게 알뜰히 믿어서 철저히 믿어서 영원히 방황하지 말어라. 무엇이 방황이던가?

 

막학치구자(莫學馳求者)에 종일설보리(終日說菩提)니라.

밖으로 밖으로 교리적으로 따지고 학문적으로 따지고, 사량분별로 더듬어 들어가고 불법이 마치 글자나 말속에 있고 무슨 책 속에 있는 줄 알고 계속 '어디를 가면 무슨 좋은 법문을 들을까? 어디를 가면 귀에 탁! 앵기는 좋은 법문을 들을까?' 밖으로 이치를 구하고 도리를 찾는 그러한 사람들이 종일토록 입으로 '불법, 불법, 깨달음, 도리, 열반' 입으로 이렇게 설하는 그러한 것을 찾고 돌아다니고, 그러한 것을 얻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방황을 하는 것입니다.

 

'참불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을 설하셨지마는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하신 뜻은 바로 그것을 가리키시는 말인 것입니다. 행여나 중생들이 49년 동안에 설하신 팔만장경 속에 불법(佛法)이 있는가 하고 그 경을 뒤적거리면서 거기에서 찾을까 두려워서 '참으로 내 설한 바 법을, 법문의 뜻을 옳게 이해한다면 내가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는 그 말을 이해할 것이다'

 

법(法)이라 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여.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봐야지, 하늘에 있는 달은 보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다면, 달을 가리키는 사람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은 우리 중생 낱낱이 가지고 있는 참나, 나의 마음, 마음자리 그놈을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관조(觀照)하는 거, 이것이 불법입니다. 이것이 최상승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20분12초~30분3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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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운기남산북산우~'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7.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줄여서 대천(大千), 대천계(大千界), 대천세계(大千世界), 삼천세계(三千世界), 대천국토(大千國土)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무량겁을 두고 육도를 윤회(輪廻)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도록 조끔도 변하지 아니한 바가 있으니 그것이 이름을 진여(眞如)라 하고, 자성(自性)이라 하고, 본성(本性)이라 하고, 참나라 하고, 또는 일물(一物)이라 하고 때로는 밑 없는 배라 하고, 구멍 없는 퉁수라 하고, 그림자 없는 나무라 하고, 천 가지, 만 가지 이름이 있지만, 그 자체는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아무리 우리의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

*무저선(無底船 없을 무/밑·바닥 저/배·선박 선) : 밑바닥이 없는 배. ①몰저선(沒底船 밑 없는 배) · 무영수(無影樹 그림자 없는 나무) · 몰현금(沒絃琴 줄 없는 거문고) · 무공적(無孔笛 구멍 없는 피리) 등과 같은 말로 '진여(眞如)'의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한 경지.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중음신(中陰身) ; 이 생(生)을 끝내고 다음 생(生)을 받을 때까지의 중간 존재 상태.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법보단(法寶壇) ;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인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안에 위패를 모신 단(壇).

*만년위패(萬年位牌) ; 전강 조실스님께서 우리들의 선망부모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

영가에게 대웅전(舊 법보전) 법보단에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여 이 법보단에서 좋은 도반들과 한 가족이 되어, 용화선원이 있는 한 계속 매일 예불시 축원하고 법회 때나 평소에 법문(法門)을 들려드려 영가가 원한심을 내려 놓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스스로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강선사께서 만드신 제도.

*'우리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불법을 올바르게 믿고 올바르게 실천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영원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참사람은 생사 속에서 바로 생사가 없는 열반(涅槃),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상락아정(常樂我淨 항상 상/즐거울 락/나 아/청정할 정) :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깨달음)의 네 가지 덕(德). 『열반경(涅槃經)』에 의하면, 열반의 경지는 생멸 변천함이 없으므로 상(常)이고, 생사의 고통을 여의어 무위안락(無爲安樂)하므로 낙(樂)이고, 망집(妄執)의 아(我)를 여의고 8대자재(八大自在)가 있는 진아(眞我)이므로 아(我)이고, 번뇌의 더러움을 여의어 담연청정(湛然清淨)하므로 정(淨)이다.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 ; 팔자재(八自在)라고도 함. 열반(깨달음)의 4덕(四德, 常樂我淨) 중 아(我)에 8종의 대자재(大自在)의 뜻이 있는 것을 말함.

[참고] 『열반경(涅槃經)』 제 21권,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③(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之三)' (이운허 옮김 | 동국역경원) p514-516.

善男子 大 名不可思議 若不可思議 一切衆生所不能信 是則名爲大般涅槃 唯佛 菩薩之所見故 名大涅槃 以何因緣復名爲大 以無量因緣然後乃得 故名爲大

 

선남자여, 크다[大]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음[不可思議]을 말함이니, 만일 헤아릴 수 없어서 일체 중생들이 믿을 수 없으면 대반열반이라 이름하며, 부처님이나 보살들만이 보는 것이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무슨 인연으로 대(大)라 하는가? 한량없는 인연으로써 얻을 수 있으므로 대라 하느니라.

 

善男子 如世間人 以多因緣之所得者 則名爲大 涅槃亦爾 以多因緣之所得故 故名爲大

云何復名爲大涅槃 有大我故 名大涅槃 涅槃無我 大自在故 名爲大我

 

선남자여, 세상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얻은 것을 대(大)라 하나니, 열반도 그러하여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얻는 것이므로 대(大)라 하느니라.

어찌하여 다시 대열반이라 이름하는가? 큰 나[大我]가 있으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열반에는 내[我]가 없지만 대자재(大自在)하므로 대아(大我)라 하느니라.

 

云何名爲大自在耶 有八自在則名爲我 何等爲八

一者、能示一身以爲多身 身數大小猶如微塵 充滿十方無量世界 如來之身實非微塵 以自在故現微塵身 如是自在則爲大我 <①능시일신위다신(能示一身爲多身)>

 

어떤 것을 대자재(大自在)하다 하는가? 여덟 가지 자재[八自在]가 있으므로 나[我]라 하나니, 무엇이 여덟인가?

첫째는 한 몸으로 많은 몸을 능히 보이는 것이니, 몸의 수는 마치 미진수와 같아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가득하며, 여래의 몸은 실재로는 미진수가 아니나 자재로써 미진수의 몸을 나타낸다.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二者、示一塵身滿於三千大千世界 如來之身實不滿於三千大千世界 何以故 以無礙故 直以自在故 滿三千大千世界 如是自在名爲大我 <②시일진신만대천계(示一塵身滿大千界)>

 

둘째는 한 티끌 같은 몸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나니, 여래의 몸은 실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것 아니지만 걸림이 없는 까닭이며, 자재함으로써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는 것이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三者、能以滿此三千大千世界之身輕擧飛空 過於二十恒河沙等 諸佛世界而無障礙 如來之身實無輕重 以自在故 能爲輕重 如是自在名爲大我 <③대신경거원도(大身輕擧遠到)>

 

셋째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몸으로 훨훨 날아서 이십 항하사 등의 많은 부처님 세계를 지나가도 장애가 없느니라. 여래의 몸은 가볍고 무거움이 없건만 자재한 연고로 가볍기도 무겁기도 한 것이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四者、以自在故而得自在 云何自在 如來一心安住不動 所可示化無量形類各令有心 如來有時或造一事 而令衆生各各成辦 如來之身常住一土 而令他土一切悉見 如是自在名爲大我 <④현무량류상거일토(現無量類常居一土)>

 

넷째는 자재한 연고로 자재를 얻는 것이다. 어떻게 자재한가? 여래의 일심은 편안히 머물러 동하지 않지만 , 무량한 형상을 드러내어 각각에 마음이 있게 한다. 여래는 어떤 때는 한 가지 일을 짓지만, 중생들로 하여금 각각 마련하게 하며, 여래의 몸은 언제나 한 세계에 있지만 다른 세계로 하여금 모두 보게 하나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五者、根自在故 云何名爲根自在耶 如來一根亦能見色 聞聲 嗅香 別味 覺觸 知法 如來六根亦不見色 聞聲 嗅香 別味 覺觸 知法 以自在故 令根自在 如是自在名爲大我 <⑤제근호유(諸根互有)>

 

다섯째는 근(根, 감관)이 자재한 까닭이니, 어떤 것을 근이 자재하다 하는가? 여래는 하나의 근으로 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변별하고 감촉을 느끼고 법을 인식한다. 여래의 육근(六根)은 또한 색을 보지 않고 소리를 듣지 않으며 냄새를 맡지 않고 맛을 구별하지 않으며 감촉을 느끼지 않고 법을 인식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재하는 까닭으로 근으로 하여금 자재케 하나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고 하느니라.

 

六者、以自在故 得一切法 如來之心亦無得想 何以故 無所得故 若是有者 可名爲得 實無所有 云何名得 若使如來計有得想 是則諸佛不得涅槃 以無得故 名得涅槃 以自在故 得一切法 得諸法故 名爲大我 <⑥득일체법무득상(得一切法無得想)>

 

여섯째는 자재한 까닭으로 일체 법을 얻거니와, 여래의 마음에는 얻었다는 생각이 없나니, 왜 그런가? 얻을 바가 없는 연고니라. 만일 있는 것이라면 얻었다 이름하려니와 실제로 있는 바가 없는데 무엇을 얻었다 하겠는가. 만일 여래께서 얻었다는 생각이 있다면, 모든 부처님들이 열반을 얻는다 할 수가 없지만, 얻음이 없으므로 열반을 얻었다 하느니라. 자재함으로써 일체 법을 얻고, 모든 법을 얻었으므로 대아라 이름하느니라.

 

七者、說自在故 如來演說一偈之義 經無量劫義亦不盡 所謂若戒 若定 若施 若慧 如來爾時都不生念 我說 彼聽 亦復不生一偈之想 世間之人四句爲偈 隨世俗故 說名爲偈 一切法性亦無有說 以自在故 如來演說 以演說故 名爲大我 <⑦설일게의경무량겁(說一偈義經無量劫)>

 

일곱째는 말씀이 자재하므로, 여래가 한 게송의 뜻을 연설할 때에 무량겁을 지내어도 그 뜻을 다하지 못하나니, 계행이거나 선정이거나 보시이거나 지혜 따위니라. 그러나 여래는 조금도 내가 설하고 저가 듣는다는 생각을 내지 아니하며, 한 게송이라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지만, 세상 사람들이 네 글귀를 한 게송이라 하므로 세상을 따라서 게송이라 말하는 것이며, 모든 법의 성품을 말할 곳이 없지만 자재로써 여래가 연설하는 것이며, 연설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八者、如來遍滿一切諸處 猶如虛空 虛空之性不可得見 如來亦爾 實不可見 以自在故 令一切見 如是自在名爲大我 如是大我名大涅槃 以是義故 名大涅槃 <⑧신변제처유여허공(身遍諸處猶如虛空)>

 

여덟째는 여래가 모든 곳에 두루함이 마치 허공과 같나니, 허공의 성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여래도 이와 같아 볼 수 없지만 자재로써 모든 이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자재를 대아라 이름하는 것이요, 이와 같은 대아를 대열반이라 이름하며, 이런 이치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오욕락(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 소리, 향기, 맛, 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시대, 상법시대, 말법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정법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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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自性具三身 發明成四智 不離見聞緣 超然登佛地 吾今爲汝說 諦信永無迷 莫學馳求者 終日說菩提' ; 『육조단경(六祖壇經)』 「참청기연(參請機緣)」 참고.

*삼신(三身) ; 삼신(三身)은 깨달은 존재로서의 부처님에 대한 불신관(佛身觀)의 대표적인 견해로,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의 3가지 몸 또는 3가지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개념.

①법신(法身).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여기에 해당함.

②보신(報身). 중생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거듭 수행한 결과,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 아미타불과 약사여래가 여기에 해당함.

③응신(應身). 때와 장소와, 중생의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나타나 그들을 구제하는 부처. 석가모니불을 포함한 과거불과 미륵불이 여기에 해당함. 응화신(應化身)·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삼신(三身)의 명칭과 분류, 각각의 해석에 대해서는 경론(經論)에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일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이 세 가지 몸, 삼신(三身)을 서로 다른 부처님으로 보지 않고 동일한 불신(佛身)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삼신(三身)의 상호관계는 흡사 달의 체(體)와 그 빛, 그리고 그 그림자와 같다고 하며, 이것을 일월삼신(一月三身)이라고 한다.

곧 법신(法身)의 이체(理體)가 유일상주불변(唯一常住不變)인 것을 달의 체(體)에 비유하고, 보신(報身)의 지혜가 법신의 이체(理體)에서 생겨 일체를 비치는 것을 달의 빛에 비유하며, 응신(應身)은 변화하는 작용으로서 기연(機緣)에 따라서 나타나는 불신(佛身)이므로 달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念佛三昧寶王論卷中).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참불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을 설하셨지마는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하신 뜻은 바로 그것을 가리키시는 말인 것입니다 ; 불설일자(不說一字).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미증(未曾), 부증(不曾) : 일찍이 ~한 적이 없다]

부처님의 교설은 언어문자로 드러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문자의 틀을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원래 『반야경』이나 『능가경』 등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이 말을 선종에서 강조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

[참고 ❶] 『금강선론(金剛仙論)』 (세친=천친 造 | 금강선 釋 | 보리유지 한역) 제5권.

如來從得道夜 至涅槃 更不說一字者 明證法無名相 言語道斷 心行處滅 不可以名相往說 故言不說一字也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밤부터 열반에 드시는 날에 이르기까지 결코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는 말은 법(法)은 명상(名相)이 없어 언어로 표현할 길이 끊어졌고, 마음으로 헤아릴 방법도 소멸하여 명상으로써 설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하게 증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참고 ❷] 『선교석(禪敎釋)』 (서산대사)

世尊偈云 始從鹿野苑 終至跋提河 於是二中間 未曾說一字 此固敎外別傳之謂也.<智度論>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처음 녹야원에서부터 마지막 발제하까지, 이 두 기간 사이에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교외별전의 취지를 가리킨다.<『지도론』>

 

[참고 ❸]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제5권 (실차난타 역 | 김진철 번역 | 한글대장경) '3. 무상품 ② 無常品第三之餘'

大慧 若人說法墮文字者 是虛誑說 何以故 諸法自性離文字故 是故 大慧 我經中說 我與諸佛及諸菩薩 不說一字 不答一字 所以者何 一切諸法離文字故 非不隨義而分別說

 

대혜여, 만약 어떤 이가 법을 설하되 문자에 떨어진다면 이것은 허망하게 속이는 설법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자성은 문자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나는 경 가운데서 '나와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은 한 자도 설하지 않고 한 자도 답하지 않았다'고 설하였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법은 문자를 떠났으므로 뜻을 따르지 않고 분별하여 설하지 않는다.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관조(觀照)하는 거, 이것이 불법입니다. 이것이 최상승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 회광반조(廻光返照 방향을 바꾸다·돌리다 회/빛 광/돌이키다 반/비칠 조). 회광자간(廻光自看).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자신의 본성을 조견(照見)하는 것. 언어 문자에 의하지 않고 바로 자기 본래의 면목(面目)을 보는 것.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참고] 송담스님(No.524)—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오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 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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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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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