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 (게송)일중산진우일중~ / 본각진심(本覺眞心) 요요상지(了了常知) / 절대로 부처를 찾지 말고, 깨닫기를 바라지 말아! / ‘이뭣고?’ 열심히 하는 것이 최고의 기도.
〇절대로 깨닫기를 기다리지 마! 밥을 먹으면 밥 먹은 부처님이요, 똥을 누면 똥 누는 부처님이요, 누워 있으면 누워 있는 부처님이요, 앉아 있으면 앉아 있는 부처님이여. 그렇게만 잡드리 해 나가면 결정코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고만 마는 거여.
확철대오 할려고 몸부림치면 그런 동안에는 절대로 확철대오를 못하는 거고, 확철대오 할 생각 말고 화두 하나만을 성성적적하게 여법(如法)하게만 단속해 나가면 결코 그 사람은 깨닫고만 마는 거여. 그게 참 묘(妙)한 거여 이게. 참 이거 묘한 거여.
〇정말 기도를 성취하시고 싶으면 ‘이뭣고?’를 열심히 해서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하고, ‘이뭣고?’는 무엇이냐 하면은 이미 지은 업은 소멸을 하고,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는 가장 수승한 법이거든. ‘이뭣고?’를 열심히 하시다가 집안에 꼭 중대한 일이 있으면 그러한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시면 정말 기도가 마음먹은 대로 성취가 되는 것이다.
**송담스님(No.527)—94년 동안거해제 법회(94.01.15.음) (용527)
약 19분.
일중산진우일중(一重山盡又一重)하고 화진산운해월정(話盡山雲海月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일물중무진장(無一物中無盡藏)하야 백화유월유루대(百花有月有樓臺)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중산진우일중(一重山盡又一重)이여. 한 산이 다함에 또 산 밖에 또 산이 있어. 거듭거듭 산이 있다.
정진을 해 나가는 데에도, 정진을 하다 보면은 이런 문제가 일어났다가, 그 문제가 겨우 어렵게 애를 써서 좀 가라앉을 만하면 또 다른 문제가 있고,
몸도 여기가 조금 아파서 그거 좀 잘 다스리면 또 저기가 아프고 여기가 아프다, 이가 아프다가 위가 안 좋다가, 기관지가 안 좋다가, 간이 안 좋다가, 쓸개가 안 좋다가, 끝이 없어.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또 정신적으로 그렇고, 인간관계에서도 그렇고,
세속도 역시 마찬가지여. 남편 문제, 아내 문제, 아들 문제, 딸 문제, 학교 문제, 사업 문제, 혼사 문제, 거듭거듭 일이 한도 끝도 없이 끝이 없다 그말이여.
화진산운해월정(話盡山雲海月情)이여. 말이 산골짜기에 구름 일어나듯이, 바다에 달빛 같은 이 말이 끝이 없다 그말이여.
해제를 맞이해서 여러 선원에서 이렇게 도반들이 모이고 또 여기 백일기도에 동참한 여러 신도님들 또 보살선방의 보살님네들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이 오늘을 기해서 또 다시 흩어질 것을 생각하니까 이렇게 말이 두서없이 이렇게 나오는데, 사실은 한마디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할 말이 없는데 또 이렇게 만나다 보니 이렇게 여러 가지 말이 나오는데, 원래가 무일물중무진장(無一物中無盡藏)이거든. 한 물건도 없는 가운데에 무진장 있는 거여. 없는 것이 없어.
백가지 꽃이 피는데, 오색이 찬란한 꽃이 휘황찬란하게 피는데 그때 마치 쟁반 같은 달이 밝았어. 그런데 터억 오색단청을 한 누각이 있다 그말이여.(百花有月有樓臺)
이 세상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정진해 나가는 분상에도 그렇고, 세속 살아가는 데도 그렇고.
왜 그러냐? 알고 보면 한 가지도 없어, 한 물건도 없는데, 그런데 없는 것이 없이 다 있어.
생각 먹기에 따라서 한 물건도 없는 마음가짐으로 일생을 살 수도 있고, 또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모든 것이 없는 것이 없이 다 갖추어서 살 수도 있어.
우리가 딱! 우리 생각을 거두어 버리면 이 세상에 무엇이 있어? 아무 것도 우리가 집착할 아무 것도 없어.
가져야 할 것도 없고, 버려야 할 것도 없어. 그런데 한 생각을 내면 없는 것이 없이 다 있는 거여.
왜 그러냐 하면, 일체 유정(有情)이 다 본각진심(本覺眞心)을 가지고 있어.
무시이래(無始以來)로 그 본각진심이 상주(常住)해서 청정(淸淨)해서, 소소영령(昭昭靈靈)하고 불매(不昧)해서 요요상지(了了常知)해.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좋아할 줄도 알고, 뭘 주면 좋아하고, 뺏으면 싫어하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얼마나 소소영령하고 분명하냐 그말이여.
‘나는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답답하지, 깨닫고, 못 깨닫고 한 것을 따지지를 말어.
소소영령하고 요요불매(了了不昧)해.
그것을 고인은 체(體)의 입장에서 그것을 표현을 하면 그걸 일심(一心)이라 그러는 거고, 인과(因果)의 인(因)을 잡아서 표현을 하자면 그것을 여래장(如來藏)이라 표현을 해.
인과(因果)의 과(果)로 잡아서 표현을 하면 그것을 원각(圓覺)이라 그랬어. 원각이라 하는 것은 원만한 신령스러운 각성이다, 원각지성(圓覺之性)이다 그말이여.
절대로 우리는 부처를 찾지를 말고 깨닫기를 바래지를 말아.
일단 견성성불(見性成佛)하기 위해서, 그러한 신심과 원력으로 불법을 믿고, 출가까지 하고 참선을 시작했으면 찾는 생각은 버려. 이미 거기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까. 그것을 찾을라고 하고, 구할려고 그러고, 빨리 찾을려고 하는 생각을 놔 버려야 하는 거여.
놔 버리고 ‘이뭣고?’ 하나만을 단속하면 걸음걸음이 그것이 도(道)요, 터억 앉았으면 앉았는 대로 그 자체가 부처님이요, 누워 있으면 누워 있는 대로 그 자체가 와불(臥佛)이여. 깨닫기를 바래고, 기다리고, 못 깨닫는다고 짜증을 내니까 찰라 간에 그거 중생이 되는 거여.
그래서 화두를 ‘이뭣고?’ ‘이뭣고?’하라 하지만 ‘이뭣고?’는 똑같은 ‘이뭣고?’인데 그 정진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게 다 다른 거여. 똑같이 ‘이뭣고?’해도 다른 거여 그게.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독로(獨露)하도록만 잡드리 한 것뿐이여.
절대로 깨닫기를 기다리지 마!
밥을 먹으면 밥 먹은 부처님이요, 똥을 누면 똥 누는 부처님이요, 누워 있으면 누워 있는 부처님이요, 앉아 있으면 앉아 있는 부처님이여. 그렇게만 잡드리 해 나가면 결정코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고만 마는 거여.
확철대오 할려고 몸부림치면 그런 동안에는 절대로 확철대오를 못하는 거고, 확철대오 할 생각 말고 화두 하나만을 성성적적하게 여법(如法)하게만 단속해 나가면 결코 그 사람은 깨닫고만 마는 거여.
그게 참 묘(妙)한 거여 이게. 참 이거 묘한 거여.
오늘 보살선방에 방부들인 보살님, 오늘 다 이불이나 발우대나 그런 걸 싸 가지고 댁에 가시겠습니다마는 댁에 가셔서도 그냥 손자, 아들, 딸, 며느리 모다 만나면 만나는 대로 이야기도 하실 수가 있고 그러나,
가서도 꼭 인자 막 내가 말씀드린 대로 ‘이뭣고?’를 항상 놓치지 않도록 잡드리 해 나가셔! 오랜만에 왔다고 살림 간섭할라고 그런 생각도 마시고, 모든 것은 되아 가는 대로 사시면 됩니다.
아들도 여럿이 있으면 잘난 놈, 못난 놈 있을 수가 있고, 일을 하다 보면 잘되는 수도 있고 못되는 수도 있고,
우선은 잘 못된 것 같지마는 나중에 보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어서 차라리 무방하게 되는 수도 있고, 우선 잘된 것 같아도 나중에 보면 결과적으로 잘못되는 수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니까,
인간 세상의 흥망성쇠와 희로애락을 인연에다 다 맽겨 버려. 맽겨 버리고 ‘이뭣고? 하나가 이것이 내가 해 나갈 유일한 일이다!’ 그놈 하나만을 열심히 하셔.
밥을 먹게 되면 밥을 먹고, 죽을 먹게 되면 죽을 먹고, 국수를 먹게 되면 국수를 먹고, 그런 것도 다 인연에 다 맽겨 버리고 어쨌든지 댁에 가셔서도 열심히 하고, 또 산철에 오실 수 있으면 오시고,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보살님네는, 백일기도를 이 절에서도 아침마다 축원을 잘했어. 반드시 소원을 잘 성취하셨으리라고 생각하고.
소원이라는 게 중생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소원이 아니여.
어린애가 하자는 대로 무엇이든지 들어주는 것이 부모가 잘하는 것이 아니여. 어린애가 하고 싶다 해도 막아야 할 일도 있는 것이지, 무엇이든지 해 달라는 대로 해 준 것을 부모 노릇 잘한 것으로 생각하시거든.
어린애가 나도 쪼그만 차 하나 사달라고, 쪼끄만 차를 사줬어. 그 놈이 이리저리 운전하고 다니다가 거꾸로 떨어지고 교통사고 나서 죽으면 그거 뭐냐 그말이여.
‘나이 먹거든 사 주마’ 이렇게 되어야지. 아직 운전할 나이도 안 된 애를 돈 있다고 해서 어린애한테 차를 마음대로 사 주고, 권총을 사달라는데 권총을 사 주고, 칼을 사달라는 걸 칼을 사 줘 가지고 마음대로 거 어떻게 되냐 그말이여.
그래서 소원도 ‘이번에 꼭 이걸 하겄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처님한테 치성(致誠)을 드리거든.
치성드린 대로 되는 수도 있지만, 안 되는 수도 있다 그말이여. 안 될 때에는 안 되는 것이 차라리 무방하기 때문에 안 된 거여.
‘이번에 꼭 아들이 대학에 붙겄게 해 주십시오’해 가지고 쌀도 갖다 놓고, 돈도 갖다 놓고, 과일도 사다 놓고, 백팔배 삼천배를 했는데 뚝 떨어져 버렸어. ‘에이, 기도해 봤자 소용없다고. 나 기도 안 한다고’
이 절에 해서 안 되니까 또 어디 절에 가면 기도가 잘 성취된다니까 거기를 또 간다. 그러다 보면 되는 수도 있어. ‘그 절이라야 성취가 되지, 다른 절은 다 소용이 없다’하거든.
그게 아니여. 기도를 안 해도 되는 수도 얼마든지 있는 거고, 기도를 해도 안 되는 수도 있는 것이어서,
기도해 봤자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해서 안 되었다면 안 되는 편이 오히려 낫기 때문에 부처님이 안 되게 하신 거여.
그래서 안 될수록에 더 기도를 열심히 해야지. ‘에이, 기도해 봤자 소용없다’ 그게 아니거든.
그래서 백일기도 하신 분은 전부가 정말 성취가 잘되었다고 생각을 하시고 이 다음에도 또 백일기도에 빠짐없이 동참을 잘 하셔야 하고.
정말 기도는 ‘이뭣고?’ 열심히 하는 것이 최고의 기도여!
자기가 지은 업(業)에 따라서 모든 과보(果報)를 받게 되고, 거기에다가 자기가 노력하는 것에 따라서 자기의 앞에 모든 일이 하나씩 하나씩 다 결정이 되어 가는 것이지,
복을 짓지 않고 기도해 가지고 느닷없이 큰 부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건 잘못된 것이거든.
그래서 정말 기도를 성취하시고 싶으면 ‘이뭣고?’를 열심히 해서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하고.
‘이뭣고?’는 무엇이냐 하면은 이미 지은 업은 소멸을 하고, 앞으로 새로운 업을 짓지 않는 가장 수승한 법이거든.
‘이뭣고?’를 열심히 하시다가 집안에 꼭 중대한 일이 있으면 그러한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시면 정말 기도가 마음먹은 대로 성취가 되는 것이다.
내가 입춘기도 또 정월 신수기도 입제와 또 회향에 여러분 눈에는 참석을 안 했지만 나는 분명히 여기 참석을 해서 같이 기도를 했거든요. 그래서 혹 내가 참석한 것을 보시지 못한 사람이 계실까 해서 이 기도에 대해서 조금 언급을 했습니다.
해제를 하셔서 비록 해제의 날짜는 지냈지만 우리의 공부는 언제나 결제거든.
언제나 결제이기 때문에 방심하고 해태(懈怠)하지 말고, 오히려 방부를 들이고 선방에서 지내실 때 보다 여기저기 다니시는 걸음걸음, 댁에 가시거나 어느 절에 가더라도 항상 우리의 마음을 더 야무지게 단속을 하면서 다시 건강한 몸으로 건강한 마음으로 또 만나게 되기를 기약하면서 법상(法床)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57분59초~76분47초)(끝)
*(게송) ‘화진산운해월정(話盡山雲海月情)’ ; [벽암록(碧巖錄)] 제53칙 설두(雪竇)스님 송(頌) 참고.
*(게송) ‘無一物中無盡藏 有花有月有樓臺’ ; 소동파 시 '백지찬(白紙贊)' 참고.
*유정(有情) ; 산스크리트어 sattva감정이 있는 모든 생물. 번뇌와 아무런 생각이 없는 멍한 상태를 끝없이 되풀이하는 모든 존재. 번뇌에 얽매여 미혹한 모든 존재. 중생(衆生)과 같음.
*본각진심(本覺眞心) : 일체 중생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각성(覺性)의 뜻으로서 청정한 심성(心性)을 말함.
이 심성은 허명(虛明)해서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또 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본래 중생의 상념(想念)을 떠나서 법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망(迷妄)과 깨달음에 관계 없는 절대적인 경위(境位)이다. 일심(一心),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 원각(圓覺)이라고도 한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법성(法性)•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불매(不昧) ; 매(昧)하지 아니하다. 지혜가 어둡지 않다.
*요요상지(了了常知) ; ‘분명하게 항상 앎—본각진심(本覺眞心, 불성佛性)이 분명하게 항상 앎’
요요상지(了了常知)는 증득하여 아는 것이 아니며, 경계를 반연하여 분별하는 식(識)과 같지 않고, 체(體)를 비추어 요달한 지(智)와 같지 않고, ‘진여의 성품이 자연히 항상 앎’을 말하는 것이다.
*여래장(如來藏) ; 산스크리트어 tathāgata-garbha 본래부터 중생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여래가 될 가능성. 중생의 마음 속에 저절로 갈무리되어 있는 여래의 청정한 씨앗. 중생이 모두 갖추고 있으나 번뇌에 가려져 있는 여래의 성품. 모태(母胎)의 태아(胎兒)처럼, 중생의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는 부처의 성품.
*원각(圓覺) ; ‘원만(圓滿)한 신령스러운 각성(覺性)’ 부처님의 원만한 깨달음을 일컫는 말이다. 또한 원만한 깨달음의 경지인 청정한 본심을 일컬어 원각묘심(圓覺妙心)이라 한다.
일체의 생명에는 본래부터 깨달음[本覺]이 있고 진심(眞心)이 있어서, 체(體)의 입장에서 그것을 표현을 하면 일심(一心)이라 하고, 인과(因果)의 인(因)을 잡아서 표현을 하자면 그것을 여래장(如來藏)이라 표현하고, 인과(因果)의 과(果)로 잡아서 표현을 하면 그것을 원각(圓覺)이라 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 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세등26) (게송)일휘상인참춘풍~ / 혜가대사의 위법망구 / 바른 스승의 중요성 / (게송)일생장환주인공~ / 화두는 가깝게 들어야 한다.
〇법(法)이라 하는 것은 남으로부터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남에게 이것을 줄 수도 없는 것이지만, 바른 스승을 만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〇이것은 밖으로부터 얻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래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보는 것이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가 없다 이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이란 얼마든지 동서남북으로 찾고 또 찾아서 찾을 수가 있겠지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여.
〇바른 스승을 만나서 철저히 믿고 여지없이 자기의 선입관을 다 버리고 오직 지도한 대로만 여법(如法)하게 닦아 간다면, 그 사람은 바로 지혜의 눈을 뜰 수가 있을 것입니다.
〇이 도리는, 참선법은 저 멀리서 다른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뭣고?’ ‘이뭣고?’한 바로 그놈을 찾는 것이여.‘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성이 날 때도 ‘이 성내는 이놈이 무엇고?’ 기쁠 때도 ‘이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놈이 뭣고?」 「‘이뭣고?’하는 놈」을 그놈을 찾는 것이거든.
일휘상인참춘풍(一揮霜刃斬春風)이다. 서릿발치는 칼을 한번 휘두르니 봄바람을 비는 거와 같고, 설만공정(雪滿空庭)에 낙엽홍(落葉紅)이라. 눈이 가득한 빈 뜰에는 이파리가 떨어져서 붉다.
자리시비(這裏是非)를 재변료(才辨了)인댄 반륜한월침서봉(半輪寒月枕西峰)이니라. 이 속에 옳고 그른 도리를 알겠느냐? 반바퀴 차운 달이 서쪽 봉우리에 벼개 했느니라.
부처님으로부터서 28조(二十八祖) 달마대사는 중국에 건너오셔서 선종(禪宗)의 초조(初祖)가 되셨습니다. 일백사십의 고령으로 인도를 떠나 가지고 중국에 오셨습니다. 중국에 오셔서 맨 처음에 양무제(梁武帝)를 만났습니다. 양무제가 사신을 보내서 달마스님을 영접을 했습니다.
달마대사를 친견한 양무제는 중국 역대 천자 가운데에 가장 신심이 돈독한 그러한 천자였습니다. 어떻게 신심이 장했던지 자기도 몸소 가사를 수하고, 많은 절을 짓고, 불경을 인포하고 스님네를 많이 외호를 했습니다.
그래서 달마대사를 뵙자마자 “짐(朕)이 절을 짓고, 불상을 모시고 많은 스님네를 외호를 했으니, 짐의 공덕이 얼마나 되오니까?” 달마대사께서 대답하시기를 “소무공덕(小無功德)입니다. 조금도 공덕이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확연(廓然)해서 성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달마 스님이 대답을 했습니다.
양무제가 “그러면 짐 앞에 있는 당신은 누구요?” 달마대사가 대답하시기를 “불식(不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달마대사의 뜻을 양무제는 알지를 못하고 달마대사를 푸대접을 했습니다.
그길로 달마대사는 양자강을 건너서 위나라 숭산 소림굴(少林窟)에 들어가서 9년 동안을 벽을 향하야 가부좌를 하고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했습니다. 9년 동안을 묵무언(默無言)하신 채 면벽관심을 하고 계시는데, 그때 신광(神光)대사라고 하는 한 승려가 ‘인도로부터서 대도인이 오셔서 소림굴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거기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갔는데 그때가 12월 초아흐레경 엄동설한이라 초저녁부터서 눈이 내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굴 밖에 서서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받고자 서 있었는데, 밤새 눈이 퍼붓어 가지고 허리까지 눈이 차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광대사는 조끔도 움직이지 안했습니다.
밤이 깊어서 삼경을 지나고 새벽이 가까웠습니다. 달마대사가 너무 측은하게 생각을 하시고 “네가 그 눈 속에 밤새도록 서 있어 무엇을 구하느냐?” 신광대사가 대답하기를 “오직 큰스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널리 감로(甘露)의 법문을 열어 가지고 중생을 제도해 주십시오”
달마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묘한 도리는 무량겁을 두고 용맹정진을 해서 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하고,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음으로써 얻어지거늘, 어찌 너와 같은 소덕소지(小德小智), 적은 덕과 적은 지혜로 가벼운 마음과 건방진 마음으로 어찌 참불법의 도리를 바랜단 말이냐. 공연히 그러한 마음으로 헛되이 수고를 해봤자 소용이 없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광대사가 그 말씀을 듣고 살며시 허리춤에 찼던 칼을 뽑아 들고, 자기의 왼팔을 탁! 쳐 가지고 스님 앞에 바쳤습니다. 그때 칼로 왼팔을 치니까, 눈 속에서 새파란 파초(芭蕉) 이파리가 쑤욱 솟아올라 가지고 땅에 떨어지려는 팔을 받아 냈습니다. 파초에 받쳐진 팔을 들어서 달마스님 앞에 바쳤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달마 스님께서 ‘음, 그만하면 도를 닦을 수가 있겠구나’ 속으로 생각을 하시고, “모든 부처님이 최초에 도를 구할 때 법을 위해서 몸을 바쳤느니라. 네가 이제 내 앞에 팔을 끊었으니 그만하면 법을 구할 수가 있겠다. 네 이름을 신광이라 하지 말고 혜가(慧可)라고 해라” ‘그만했으면은 법을 구해 가지고 가히 지혜를 얻을만 하다’해서 혜가라고 이름을 고쳐 주셨습니다.
혜가대사는 달마대사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부처님의 법을 가히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부처님의 진리법을 저에게 일러 주십시오” 달마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니니라”
혜가대사가 말씀하시기를 “제자의 마음이 편하지를 않습니다” 달마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너의 마음을 나에게 가져 오너라. 내가 네 마음을 편안케 해 주마”
혜가대사가 가로되 “아무리 마음을 찾어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해서 너의 마음을 다 편안해 마쳤느니라”
2조 혜가대사가 달마 스님께 법을 구할 때 밤새도록 펑펑 쏟아지는 눈 속에 서 있어서 눈이 허리까지 차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마대사는 ‘너와 같은 소지소덕(小智小德)과 경심만심(輕心慢心)으로 무슨 법을 구한단 말이냐?’ 여기에서 팔을 꺾어서 올리고 비로소 달마대사는 ‘과연 그만했으면 법을 구할만 하다’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이 법(法)이라 하는 것은 남으로부터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남에게 이것을 줄 수도 없는 것이지만, 바른 스승을 만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달마대사는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라.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헛되이 일생을 보내리라’ 하셨습니다. ‘스승으로부터 얻을 것은 없지만 스승 없이 홀로 깨달은 사람은 만 명 가운데에도 희유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스승을 인(因)하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가 없느냐? 왜 스승으로부터 얻을 것도 없고, 스승이 줄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없이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던가?
이것은 밖으로부터 얻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래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보는 것이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가 없다 이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이란 얼마든지 동서남북으로 찾고 또 찾아서 찾을 수가 있겠지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여.
마치 자기의 눈으로 온갖 세상의 것을 다 볼 수 있지만, 자기가 자기 눈은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눈은 거울을 빌리지 아니하면 자기의 눈을 볼 수가 없습니다. 거울 없이 자기 눈은 볼 수가 없는 것이여.
어째서 자기의 눈으로 세상의 모든 것은 보고, 희고 검고 붉고 누르고 한 것을 다 보면서 자기의 눈은 볼 수가 없느냐? 거울을 가자해서만이 자기의 눈을 볼 수가 있는데, 거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자기의 눈은 자기의 눈의 그림자일 뿐 참 자기의 눈도 아니다 이거거든. 거울에 비친 자기의 눈은 자기의 눈의 영상이요, 자기의 눈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실지 자기 눈은 아니여.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있는 그 주인공은 하늘을 보고 파란 줄을 알고, 산을 보고 높고 낮차운 것을 알고, 물을 보고 흐르고 있는 것을 알고, 소리를 듣고 새 소리다, 개 소리다, 차 소리다 온갖 소리를 다 분간하고, 냄새를 맡고 냄새가 구수하다, 구리다, 온갖 냄새를 다 코를 통해서 알고, 혀로써 온갖 맛을 짜고 싱거운 것을 알고, 몸으로써 춥고 더운 것을 알고,생각으로써 슬프고 외롭고 성낼 줄을 알면서,
성낼 줄 알고, 희고 검은 줄을 알고, 짜고 싱거운 것을 아는 그놈은 과연 무엇으로써 보며, 무엇으로써 들으며, 무엇으로써 맛보며, 무엇으로서 냄새를 맡으며, 무엇으로써 만져 볼 수가 있는가?
눈으로 아무리 볼래야 보이지 아니하고, 귀로 아무리 들을래야 들을 수가 없고, 코로 냄새를 맡을래야 맡을 수 없고, 혀로 맛볼래야 맛볼 수 없고, 손으로 만져 볼래야 만져 볼 수 없는 그놈을 보고 깨닫는 이것이기 때문에, 스승 없이는 아무리 밥을 굶고, 잠을 안 자고, 피를 백 번을 토한다고 할지라도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바로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여.
바른 스승의 지도가 없이 이것을 깨달을라고 몸부림을 쳐봤자 애를 쓰면 쓸수록 빨리 미치는 수 밖에는 없는 것이여.
스승 없이 자기 혼자 산중에 들어가 가지고 토굴에 들어가서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밤잠을 안 자고 곡식을 끊고 풀 이파리와 나무 열매를 가지고 연명을 하면서 고행을 해봤자, 조금 식(識)이 맑아져서 겨우 된 것이 점쟁이 같은 것 밖에는 아니되고, 잘못되면 미치거나 삿된 종자가 되고 마는 것이여.
바른 스승만 만나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만 한다면 결정코 자기를 깨닫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처음~20분1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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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어렵다하지만 사실은 무엇이 깊이 숨어갔고 있고, 먼 데가 있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너무 가깝고 너무 쉬워서 어려운 것입니다. 너무 쉽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지, 멀고 깊고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른 스승만 만나고 위법망구적으로만 한다면 마치 목마른 소를 끌어다가 맑은 시냇물에다 대주면 그 소는 꿀꺽꿀꺽 물만 마시면 갈증이 풀리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끌고 가는데 싫다고 뒤로 버틴다든지, 끌어다 갖다 대주어도 그 물이 독이 섞여 있나? 이리 의심을 하고 안 먹는다든지 이러면 그 소는 갈증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서 철저히 믿고 여지없이 자기의 선입관을 다 버리고 오직 지도한 대로만 여법(如法)하게 닦아 간다면, 그 사람은 바로 지혜의 눈을 뜰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일생 동안을 ‘주인공(主人公)아! 주인공아!’ 이렇게 길이 불러서, 불수인만회불문(不受人謾回不問)이라. 어떤 도인(道人)이 일생 동안을 방에 들어가서 ‘주인공아!’ 자기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사람에게 속지 말어라’ ‘아무개야!’ ‘예!’ 자기가 자기를 불러 놓고 대답을 하고서 ‘사람에게 속지를 말어라’ 이렇게 일생 동안을 공부를 한 도인이 있었습니다.
금일성성하처거(今日惺惺何處去)오. 오늘 성성(惺惺)한데 어느 곳을 향해서 가느냐? 만산송백기비풍(滿山松柏起悲風)이라. 만산(滿山)에 소나무와 잣나무에 슬픈 바람이 일어나는구나. ‘만산 송백에 슬픈 바람 소리가 일어난다’ 확철대오(廓徹大悟)한 소식입니다.
이 도리는, 참선법은 저 멀리서 다른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뭣고?’ ‘이뭣고?’한 바로 그놈을 찾는 것이여.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성이 날 때도 ‘이 성내는 이놈이 무엇고?’ 기쁠 때도 ‘이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놈이 뭣고?」 「‘이뭣고?’하는 놈」을 그놈을 찾는 것이거든.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저 부모한테 나기 전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이냐?’
‘부모미생전 본래면목’하니까, 30년 된 사람은 ‘30년 전에 부모 배에 태어나기 전에 그놈이 무엇이냐?’ 무량겁을 윤회를 해 왔는데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기 전 본래면목이 무엇이냐?’ 이렇게 멀리 찾을 것이 아니라,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지금 당장 ‘이뭣고?’한 거기에서 찾아야, 가깝게 찾아야 한다.
‘이뭣고?’ ‘지금 '이'하는 이놈이 무엇고?’ 언제라도 바로 이 ‘이뭣고?’한 여기에서 찾어라. ‘이뭣고?’ 알 수 없어야 하거든. 알 수 없는 곳에 알 수 없는 그 의단(疑團), 그놈을 묵묵히 관조(觀照)해야 한다 그말이여.
‘이뭣고?’ 앉어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빨리 깨달을라고, 깨닫기를 기다리고, 깨닫기를 바래고, 누가 나를 깨닫게 해주기를 바라는데, 조끔도 조급한 생각을 낼 필요가 없다.(20분13초~28분2초)
*(게송) ‘일휘상인참춘풍~’ ; [청매집(靑梅集)] (청매인오 스님) 상권 ‘少林斷臂’ 참고. *선종(禪宗) ; 문자를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선(禪)을 닦아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체득하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종파. *달마대사, 혜가대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확연(廓然)하다 ; 넓게 텅 비어 있다. *감로(甘露) ;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번 믿으면 끝없는 공덕과 이익을 얻는다는 뜻에서 그 가르침을 다디단 이슬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법인(法印) ; ①묘법(妙法)의 인(印). 진리의 표시. 부처님의 가르침의 표시. 3법인(三法印)·4법인(四法印) 등이 있음. ②이치. *경심(輕心) ; 경솔(輕率 말이나 행동이 조심성 없이 가벼움)한 마음. *만심(慢心) ; 근본 번뇌의 하나. 자신을 지나치게 믿고 자랑하며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깔보는 마음. 우쭐거리는 마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부처님의 가르침. ④본성.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참고] [선문촬요 禪門撮要 上 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〇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식(識) ; ①인식작용. 식별작용. 대상을 다르게 아는 마음의 작용. ②마음·뜻과 같음. 마음.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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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게송) ‘일생장환주인공~’ ; 卍新纂續藏經 제65책 <禪宗頌古聯珠通集 31권> 불국백(佛國白) 스님 게송 참고.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이뭣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 분류 ‘화두(공안)’ 참고.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406) 쥐 법문(法門)—'화두'라고 하는 쥐 / 용궁(龍宮) 스님 / (게송)탐착몽중일립미~ / (게송)석화광음주~ / 참선 해서 무량겁 생사윤회의 쇠사슬로부터서 벗어나야.
〇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무명(無明)·업식(業識)·번뇌·망상을 쥐에다가 비유를 한 것입니다.그 끝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번뇌와 망상을 ‘화두(話頭)’라고 하는 쥐를 시켜서 그놈을 다 잡아먹게 만드는 것입니다.
〇앞으로 어떠한 불보살(佛菩薩)이 나타나셔서 더 좋은 방법을 설하시게 될런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이 활구참선법만큼 훌륭한 깨달음의 길은 없습니다.
〇참선을 안 하는 사람은 아미타불 불러야죠. 마지막 숨 거둘 때까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부르지만, 활구참선을 한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마지막 죽을 때도 ‘이뭣고?’하면서 숨을 딱 거두도록 이렇게 해야 돼.
〇인생 일생사가 비록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뭉쳐진 하루살이 인생이지만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해서 활구참선하신다면 정말 소중한 뭄뚱이고 이승에 사람 몸 받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릅니다.왜 그러냐? 무량겁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쇠사슬로부터서 벗어나서 영원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송담스님(No.406)—90년 1월 첫째일요법회 (용406)
(1) 약 15분.
(2) 약 13분.
(1)------------------
어떤 사람이 집에 어떻게 쥐가 들끓어서, 그 고양이를 갖다 놔봐도 몇 마리는 축(縮)지지만은 아주 잡을 수가 없고 또 쥐약을 갖다 놓으니까 집에서 키우는 개가 여러 마리 죽고, 도대체 그것 가지고도 안되고 그럴수록에 쥐는 점점 더 무성해져 가지고는 마을에 있는 쥐가 다 모여들고 산에 있는 쥐, 들에 있는 쥐까지 더 모여든다 그말이야.
파리도 파리채나 약으로 자꾸 잡아 싸면 몇 마리는 축지지만은 점점 더 모여든 것입니다. 잡아서 죽여가지고 그런 것을 해결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해 가지고 꾀를 냈습니다.
쥐를 잡아다가—쥐덫으로 쥐를 생포해 가지고 꽁댕이를 짤라 버리고는 그 쥐를 독에다 담아 넣고는 굶겼습니다. 굶겨가니까 이놈이 배가 고파서 못 견딘다 그말이야.
그래서 정 못 견뎌하면은 쥐를 잡아가지고는 쥐 고기를 쪼금씩 떼어서 먹였습니다. 그러니까 배고파서 못 견디는 놈이 쥐 고기를 먹더니 차츰차츰 생기가 나. 그래 가지고 나중에는 조금씩 더 주고 더 주고 해 가지고 완전히 쥐에게 쥐 고기를 먹여가지고 아주 뚱실뚱실하니 아주 건강하게 되었다 그말이야.
그래서 나중에는 산 쥐를 넣으니까 벌써 쥐 고기에 맛들인 놈이라 산 쥐를 탁! 잡아서 그놈을 잡아먹었다 그말이야. 매일 한 마리씩 잡아 넣으면 쥐 고기만 먹고도 아주 잘 살게 되었어.
그런 다음에 그 쥐를 풀어놨습니다. 풀어놓으니까 쥐구멍으로 맘대로 드나들면서 집안에 있는 쥐를 다 잡아먹었다 그말이야. 처음에는 새끼 어린 놈을 모다 다 줏어 먹더니 나중에는 큰 놈도 다 잡아먹어버려.
고양이를 놓으니까 어쩌다 겉으로 나돌아다니는 놈은 잡아먹지만은 쥐구멍 속에 딱 들어가 버리면 못 잡아먹는 데, 쥐를 시켜서 쥐를 잡게 하니까 맘대로 쥐구멍으로 다니면서 쏵 다 잡아먹었다 그말이야.
그전에는 마을 쥐, 들쥐 모다 오더니 그놈들도 신문이 있는지, 그 집에 갔다가는 뼈다구도 못 추린다 해가지고 인자 그 집에는 얼씬도 쥐가 안 와.
행여나 여러분 이 말씀을 듣고 쥐 잡아서 쥐 잡을 생각을 마십시오. 이건 쥐 잡으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고.
우리는 끊임없이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일어납니다. 눈으로 보면 망상이 일어나고, 귀로 들어도 망상이 일어나고 또 가만히 앉았어도 망상이 일어나고, 일어나는 생각—좋은 생각이 일어나면은 좋은 생각,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은 나쁜 생각으로 인해서 나쁜 죄를 또 짓게 되고,
희로애락, 흥망성쇠, 가지가지 생각이 일어나고 말로서 나타나고, 얼굴로서 나타나고, 행동으로서 나타나고 해가지고 업(業)을 지어서 그래가지고 무량겁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되는데, 그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무명(無明)·업식(業識)·번뇌·망상을 쥐에다가 비유를 한 것입니다.
그 끝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번뇌와 망상을 ‘화두(話頭)’라고 하는 쥐를 시켜서 그놈을 다 잡아먹게 만드는 것입니다.
화두는 공안(公案)인데 공안은 불덩어리와 같아서 중생이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질 수가 없어. 거기에 접근해 가지고 뭐라고 따질려고 생각하면 벌써 그 불에 타죽는 것이여. 그래서 사량분별로 화두는 따지면 안 돼. 그건 깨닫기 커녕은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야.
그 화두를 올바른 방법으로 잘 거각(擧却)을 하면 끝없이 일어나는 온갖 번뇌와 망상을 그놈으로 다 잡아먹을 수가 있는 것이야. 쥐를 잘 훈련을 시켜가지고 온 쥐를 다 잡아먹은 다음에 그 쥐 한 마리만 딱 없애버리면은 쥐는 아주 멸종이 될 것이다 그말이야.
화두 하나를 타 가지고 그 화두를 참구(參究)를 거각을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잡드리를 해 나가는데, 더이상 의심이 간절(懇切)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
산을 봐도 화두요, 들을 봐도 화두요, 사람을 봐도 화두요, 귀로 새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물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칭찬하는 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나에게 욕을 하는 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밥을 먹어도 화두요, 똥을 눠도 화두요,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만을 거각해서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즉각 화두로서 떠억 의단을 거각을 한다.
이 화두 앞에는 도무지 천하 없는 망상도 번뇌도 얼씬거리지를 못해. 얼씬거렸다면 화두를 딱 들어버리면 탁 잡아먹어버려.
처음에는 잘 안돼. ‘이뭣고?’해도, ‘이뭣고?’하는 속에도 저 속에서는 할 생각 다 하거든. ‘이뭣고?’하면서도 집안 생각 다 하고, 미국에 가 있는 아들 생각 다 하는데, 그래도 자꾸 하고 하고 또 하고 하면 언젠가는 할라고 안 해도 의단이 저절로 성성(惺惺)하게 들릴 때가 오고 마는 것이여.
더이상 간절할 수 없을 만큼 간절하고 더이상 성성할 수 없을 만큼 성성해질 때, 어느 찰나에 그놈이 탁! 터지게 된다 그말이야. 통 밑구녁 빠지듯이 턱 터지게 돼. 그게 확철대오(廓徹大悟)거든.
다른 공안도 환하거든. 이렇게 되면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자기의 그 깨달은 바가 바른가 그른가에 대한 점검을 받아야 되고, 그 점검을 받은 다음에는 공안을 타파한 뒤에 어떻게 정진해 가야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그래, 화두를 드는 것은 망상 없애기 위해서 방편으로 그런 것이지, 뭐 깨달음이 있기는 무슨 깨달음이 있어. 절대로 그렇지 않아’ 이것은 조사(祖師)들이 몸으로서 실지로서 우리에게 그 증거를 보여주신 것인데 어찌 이것이 거짓말일까보냐.
앞으로 어떠한 불보살(佛菩薩)이 나타나셔서 더 좋은 방법을 설하시게 될런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이 활구참선법만큼 훌륭한 깨달음의 길은 없습니다.
망상이 일어날수록에 그 망상을 버릴려고 하고 없앨려고 하고 쫓아낼려고 하지 말고 화두만 딱 거각하면 그만이야. 쥐가 나타나면 그놈 쫓아낼라고 하지 말고 그 독에서 키운 그 쥐만 갖다가 그리 풀어 놔버리면 그만이야. 어디로 도망갈 것이냐 그말이야. 도망갈 곳이 없거든.
고양이가 쫓으면 쥐구멍으로 들어가지만 쥐를 내보내는데야 도망갈 곳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면 이놈도 올라갈 것이고 땅속으로 들어가면 이놈도 들어갈 것이고, 갈 곳이 없거든. 화두만 딱! 거각해 버리면.
부애가 나도 ‘이뭣고?’요, 슬퍼도 ‘이뭣고?’요, 억울해도 ‘이뭣고?’요, 몸이 아파도 ‘이뭣고?’요,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될 때에도 다른 거 생각할 거 없어, 아미타불 생각할 거 없어. ‘이뭣고?’
‘이뭣고?’ 참선을 안 하는 사람은 아미타불(阿彌陀佛) 불러야죠. 마지막 숨 거둘 때까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부르지만, 활구참선을 한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마지막 죽을 때도 ‘이뭣고?’하면서 숨을 딱 거두도록 이렇게 해야 돼.
내가 아는 어떤 노보살님은 그 ‘이뭣고?’하고 가는데 차가 뒤집어졌어. 버스가 뒤집어졌는데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는데 그분은 아무데도 다치지도 않았어.
또 내가 아는 어느 비구니 스님은 화두를 들고 떠억 가는데, 저기 청평 큰 호숫가를 지내다가 버스가 호수로 빠져가지고 그 안에 탄 사람이 몰사(沒死)했습니다. 수십 명이 다 죽었는데, 그 화두를 들고 간 그 비구니 스님은 ‘이뭣고?’를 물에 빠져서도 고대로 ‘이뭣고?’를 하고 있는데 환하니 보여서 그 열려진 문으로 기어나왔다 그말이여.
기어나와 가지고 허부적허부적 헤엄을 치면서 이렇게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이고 이제 돌 돌아간 어린 아기가 물위에 떠가지고 허우적허우적하고 있어서 그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 애기 하나하고 그 비구니 스님 하나만 살았어.
그래서 그 애기를 갖다가 수양아들을 삼아가지고 그 애가 커서 지금 학교 잘 다니고 있고 한데, 그래서 그 비구니 스님을 용궁(龍宮)에 갔다 왔다 해서 용궁 스님이라고 별명이 붙었는데.
참 이상한 것이 화두를 들고 가다가 배가 침몰해도 그분은 죽지를 않아. 차가 뒤집어져도 죽지를 않아. 어떠한 난세(亂世)를 당한다 하더라도 화두를 들고 정진한 사람은 그 난세를 피하게 되고 꼭 죽게 된 데에서도 살아난다 그말이여.
그것이 왜 그러냐? 항상 이십오 신장(二十五神將)이 옹호를 하고 댕기거든. 보통 착한 마음만 가져도 선신(善神)이 지켜주는데,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하는 사람은 선신 하나 둘이 아니라 25신장이 항상 옹호를 하는 거야. 그러니 교통사고에 살아날 수 밖에는 없는 것이여.
여러분은 숙세에 얼마나 선근(善根)을 심었기에 이러한 활구참선을 믿게 되었고 그것을 또 실천하게 되셨냐 그말이야.(35분28초~49분42초)
탐착몽중일립미(貪着夢中一粒米)타가, 몽중에 꿈 가운데에 한 알갱이 쌀을 탐착하다가, 실각금대만겁량(失却金臺萬劫糧)이다. 금선대, 저 금선대에 만겁동안 먹을 수 있는 그 많은 양식을 잃어버리게 되는구나.
무상찰나(無常刹那)라 실난측(實難測)이여. 우리의 이 몸뚱이, 우리의 이 생명은 눈 한번 감었다 뜨지 못하면 내생(來生)이고,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내생이여. 참, 그 찰나(刹那)라! 언제 1년 후에 죽게 될런지, 한 달 후에 죽게 될런지, 사흘 후에 죽게 될런지, 1분 후에 죽게 될런지, 우리의 수명은 참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니,
호불맹성급회두(胡不猛省急回頭)오. 어찌 맹렬히 반성을 해서 마음보를 돌이키지 못하는고.
우리는 이렇게 해서 최상승법을 믿고 해탈도(解脫道)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엄동설한임에도 불구하고 사부대중이 법회에 참석을 하셨고 또 방부(房付)를 들이고 그렇게 참 고행을 하고 계시는데,
무엇이 우리를 구속(拘束)을 했기에 우리는 해탈(解脫)을 할라고 합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구속을 한 점 또는 내가 나 자신을 구속을 한 점. 쇠사슬 보다도 더 견고하고 무서운 것으로 우리 자신들을 그렇게 속박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렇게 얽히고, 물질에 얽히고, 명예와 권리와 재산 모다 그런 것에 얽히고, 원한으로 얽히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으로서 얽히고, 자존심과 체면에 얽히고, 마약 술 그런 것에도 얽히고, 무량겁 지어 놓은 습기(習氣)에도 얽히고, 자기가 자기를 얽히고 또 내가 다른 사람을 얽어매고, 다른 사람은 또 자기 자신을 얽어매고 또 그 사람이 또 나를 얽어매고 해서,
피차(彼此) 서로 많은 머리카락이 서로 얽히고설켜서 뭉쳐 있듯이 인간들이 그러한 형용할 수 없는 무서운 쇠사슬로 서로 얽히고 얽고 그렇게 해서 무량겁을 오늘날까지 이렇게 오고 있는 것입니다.
관성(慣性)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움직이고 있는 것은 계속해서 움직일려고 그러고, 정지되어 있는 물건은 계속해서 정지되어 있을려고 하는 그러한 성질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관성의 법칙이라 그러는데, 그래서 기차나 전철을 타고 가다가 급정거를 하면 사람이 와르르 넘어질려고 그런거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고, 또 가만히 차에 앉아 있는데 급작스럽게 차가 출발을 하면 사람이 버뜩 뒤로 자빠지려고 그러고 이런 것도 역시 관성의 법칙이고, 옷에 먼지가 있는 것을 탁! 이렇게 털면은 먼지가 떨어지는 것도 역시 그런 관성의 법칙을 이용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뉴월 뙤약볕도 쬐다가 안 쬐면 서운하다’고 그런 구속이라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데, 여태까지 구속되어 있다가 그렇게 풀어준다 해도 그것을 서운하게 생각한다 그말이야.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하면 그 무서운 쇠사슬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고 그렇게 목이 마르도록 말씀을 하고, 법문을 들어도 아! 그 무엇이 그렇게 그리운지 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여간 아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런 법문을 들으신 분은 ‘아! 내가 이제부터서는 그런 쇠사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나도 벗어나고 또 다른 사람 내가 얽어매고 있는 쇠사슬도 풀어주리라.’ 그렇게 다 얼굴을 제가 보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댁에 가셔서 정말 탁 풀어 버리실런지 그거 또 아까워서 계속 그러실런지 인자 스스로 가서 잘 생각해 보시면 알 것입니다.
어쨌든지 자유가 좋은 것입니다. 탁! 자기도 풀면 좋고 남 얽어맨 것도 탁 풀어주세요. 풀어주면 그 사람도 나한테 더 잘하고.
어떻게 그놈을 서로 얽어매 놓고 한집에서 살면서 그렇게 서로 불편한 관계로 사실 수가 있겠습니까. 탁 풀어주면은 저도 좋고 남도 좋고 그냥 어제까지의 감옥이 오늘은 극락세계로 변할 것입니다.
화두 한번 터억 화두 든 마음으로 쳐다보면 앞에서 봐도 이쁘고 뒤에서 봐도 이쁠텐데, 화두를 놓쳐 버리고 옛날에 품었던 원한심을 가지고 쳐다보면 볼수록 미웁다 그말이여. 그거 미워해 봤자 무엇이 좋을 것입니까. 터억 화두를 들고 풀어줘 버리면은 당장 그날 저녁 밥상부터 달라질텐데.
석화광음주(石火光陰走)여. 이 세월은 돌과 돌을 탁 부딪치면 불이 번쩍하듯이 그렇게 화살같이 그렇게 빨리 지나가 버리는 것이여. 홍안진백두(紅顔盡白頭)다. 그 젊었을 때 윤기 나고 불그스레한 얼굴이 벌써 머리가 허예져 버린 것이여.
인간(人間)은 백년몽(百年夢)이여. 인간은 백 년 동안 꾸는 꿈이여. 이 몸뚱이는 부유일생사(蜉蝣一生事)다. 하루살이 일생사야. 백 년이라고 하니까 굉장히 긴 것 같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인생 일생사란 것이 하루살이 신세 밖에는 안됩니다.
비록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하루살이 인생이지만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해서 활구참선하신다면 정말 소중한 뭄뚱이고 이승에 사람 몸 받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릅니다.
왜 그러냐? 무량겁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쇠사슬로부터서 벗어나서 영원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모든 악업으로 얽혀진 모든 사람들을 다 풀어버리니 일체가 다 좋은 도반(道伴)이요, 형제간이요 자매간이 되어서 온 세계 온 법계가 행복한 한 가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앞으로 해제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선방에 방부들인 스님네 또 보살님네 그 동안도 열심히 정진들 하셨지만 남은 동안을 더욱 알뜰히 정진을 해주시길 부탁을 하고, 또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하신 분들도 방부들이신 분들 못지않게 생활 속에서 열심히 정진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리고 법상에서 내려자고자 합니다.(49분43초~62분52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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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縮)지다 ; 축(縮)나다. ①일정한 수나 양에서 모자람이 생기다. ②몸이나 얼굴 따위에서 살이 빠지다. *꽁댕이 ; ‘꼬랑이('꼬리'를 속되게 이르는 말)’의 사투리. *얼씬 ; 조금 큰 것이 눈앞에 잠깐 나타났다 없어지는 모양.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 함[逼惱, 惱亂] 등의 뜻으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이러한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묶이게 되고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惑-業-苦 三道]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무명(無明) : [범] avidya 「어리석은 마음」 「어두컴컴한 마음」을 이름. <기신론(起信論)>에 는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법계(法界)의 참 이치에 어둡게 된 맨 처음 한 생각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하고, 이 근본무명으로 말미암아 가늘거나 거칠거나 한 온갖 망녕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 하였다. *업식(業識) ; ①과거에 저지른 미혹한 행위와 말과 생각의 과보로 현재에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작용. ②오의(五意)의 하나.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그릇된 마음 작용.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 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 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몰사(沒死 빠질 몰,죽을 사) ; 모두 다 죽음. *허부적허부적하다 ; '허우적허우적하다(사람이 팔다리를 자꾸 이리저리 내두르다)'의 사투리. *수양아들(收養아들) ; 자신이 낳지 않았으나 데려다가 기른 아들. *신장(神將) ;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신장. 또는 《화엄경》을 보호하는 신장. *선신(善神) ; 불법(佛法)과 그것을 믿는 이들을 보호하는 신. *선근(善根) ; 좋은 과보를 받을 만한 착한 인(因)·행위. 온갖 선(善)을 낳는 근본. 청정한 행위를 할 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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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탐착몽중일립미~’ ; 성철스님 ‘납자십게(衲子十偈)’—'회두(回頭)' 게송 참고. *내생(來生) ; 죽은 후에 다시 맞이하는 미래의 삶. *찰나(剎那) : [범] ksana 지극히 짧은 시간. 하루가 육백 사십 팔만 찰나라 하였는데, 지금 시간으로는 1초의 75분의 1에 해당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해탈도(解脫道) ;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습기(習氣) ; 과거의 인식•행위•경험•학습 등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관성(慣性 버릇·익숙하여짐 관,성질 성) ; [물리] 물체가 외부의 힘을 받지 않는 한 정지 또는 등속도 운동의 상태를 지속하려고 하는 성질. *(게송) ‘석화광음주(石火光陰走)~’ ; [청허당집(清虛堂集)] (西山 休靜, 朴敬勛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86쪽 ‘세상을 탄식함’ 게송 참고.(石火光陰走 紅顔盡白頭 山中十年夢 人世是蜉蝣) *불그스레하다 ; (물건이나 그 빛이)곱고 연하게 조금 붉은 데가 있다. *허옇다 ; (사물이나 그 빛이)정도에 지나치게 희다. *부유(蜉蝣) ; [동물] 하루살이목에 속한 곤충을 통틀어 이르는 말.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생사윤회(生死輪廻)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401) 심우송(尋牛頌) / 공안을 사량분별로 따지지 말라. 의단독로 하도록 잡드리해 가야 / 불가심문축구(不可尋文逐句) / 선용기심(善用其心).
〇우리가 지금 그러한 심우송(尋牛頌)을 자세히 따져보는 것도 퍽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단계는 어디까지나 이 '마음 소'를 찾기 위해서 화두를 들고 주삼야삼(晝三夜三)에 앞과 뒷이 콱 맥힌 상태에서 의단으로 공안을 참구(參究)해 나가는 그 단계, 그것이 매우 중요한 단계인 것입니다.
〇어쨌든지 공안을 참구하는데 가서는 앞뒤가 끊어져 버려야 하거든. 꽉 맥혀서 오직 의단만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두리를 해 가야 그래야 그 사람이 공안을 타파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〇오직 그 화두 한 마디, 한 의심만을 향해서 의단이 독로허도록 이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야 해. 답답허면 답답헐수록 그렇게 해 나가고, 아무리 공부가 안되면 안 될수록에 그렇게만 해 나가야 돼.
**송담스님(No.401) - 1989년 11월 첫째일요법회(65분)에서. (용401)
(1) 약 13분.
(2) 약 17분.
(1)------------------
방금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십우송(十牛頌)-10가지의 소를 찾는 게송에 대한 그 심우송(尋牛頌)에 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그 마음자리를 ‘소’에다가 비유해 가지고 고인(古人)들이 게송(偈頌)을 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리심(菩提心)을 발해 가지고,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견성(見性)해서 중생교화하는 데까지 10단계로 노나서 게송으로 읊은 것인데 그 게송에 따라서 고인들은 또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이 많이 여러 가지 종류의 게송도 나오고, 여러 가지 종류의 그것에 의한 그림도 나오고, 요새는 달력 캘린더에도 그런 그림이 나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습니다마는,
첫째, 제일의 심우(尋牛)-'찾을 심(尋)'자, '소 우(牛)'자-‘소를 찾는다. 심우(尋牛)’ 그 단계는 보리심을 발하는 위치여. 우리는 언제 생겨날 때가 없는, ‘언제 그 마음자리가 생겨났다’하고 헤아려 볼 수 없을 만큼 우주세계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서 있었던 그 '마음 소'인데, 그 '마음 소'를 부처님도 가지고 계시고, 모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도 그 '마음 소'를 다 가지고 계시고, 우리의 중생도 가지고 있고, 심지어 개·소·돼지·미물에 짐승·벌레까지라도 그 자리를 다 가지고 있다 그말이야.
근데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잊어 버렸어. 가지고 있으면서도 까마득해 모르고 살고 있다 그말이여. 그러니 부처님의 법, 조사의 법문에 의지해서 잃어버렸던 그 '마음 소'를 찾는다 그말이여. 그 마음, 진여불성 자리를 찾는 것을 그 ‘소를 찾는다’고 해서 심우(尋牛)라 그러는데, 보리심을 발(發)해야 그때부터서 '마음 소'를 찾기 시작한 거다 그말이여.
그래 아까 조실 스님께서 첫 번째 읊으신 게송이 바로 그 '마음 소' 찾는 데에다가 두고 읊으신 게송인데, 그 게송이 중국의 그 곽암(廓庵) 선사라고 하는 도인(道人)이 읊으신 게송입니다.
그 다음에 가서 견적(見跡)이거든. 자취를 봐. 소를 찾아서 인자 집을 떠나 가지고 그 소를 찾으러, 그 산이 험하고 물이 넓고 하는 것을 꺼리지 아니하고 그 소를 찾으러 방방곡곡이 다니는데 그 참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이 막심을 하다 그말이여. 근데 그렇게 찾아다니다 보니 발자취를 발견을 했어. 발자취를 발견한 것을 두 번째 견적이라 그러는데,
그리고 세 번째가 견우(見牛)고-소를 보고, 또 소를 본 다음에는 득우(得牛)-소를 붙잡는 거여. 그리고 다섯 번째 가서 목우(牧牛)여. 소를 먹이는 거여. 길들여서 먹여.
그러니 처음에 소를 찾을랴고 하는 그 보리심을 발한 것도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세계 50억 인구가 있다 하지마는 정말 그 '마음 소' 찾으려는 마음을 낸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다행히 우리는 1600년 전에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가지고 고구려·백제·신라를 거쳐서 또 고려, 해서 오늘날까지 이렇게 1600년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한국으로 태어난 사람은 참 이 불교에 인연이 있어서 우리는 이렇게 참 여기에 까지 왔으나 그러한 국가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런 불교와 인연이 없는 나라 사람들은 꿈에도 생각지도 못할 일인 것입니다.
그렇게 소를 열심히 찾다 보면은 그 자취를 발견하게 되고 그 자취를 따라서 나아가다 보면은 결국은 소가 거기에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 소를 본 다음에는 그놈을 붙잡을라고 하면 도망치거든.
그놈을 잘 어떻게 해서 지혜와 인내와 방편으로써, 그놈을 잘해서 접근을 해 가지고 그놈을 재치있게 붙들어야지. 소를 저 먼 밑으로 소 봤다고 해서 막 지혜없이 쫓아가서 어거지로 잡을라고 하면 그 소가 도망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말이여.
참선도 역시 그 바른 선각자의 바른 지도하에 여법하게 정진을 해야 되지, 자기 멋대로 아무렇게나 우격다짐으로 막 몰아붙인다고 해서 이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를 본 다음에는 그것을 잘 붙들고, 붙든 다음에도 그놈을 참 지혜롭게 요령있게 소를 잘 먹여야지, 붙들어만 놨다고 해서 그걸 아무렇게나 놔두면 다시 또 도망쳐 버릴 것이고. 무엇을 먹는가? 어떻게 이 소를 잘 다스려 나가는가? 그것을 참 정성을 다해서 잘 그 소를 먹이고 거두어 나가야 그 소가 토실토실 살이 찌고 번질번질하니 기름져서, 그 소가 농사도 짓고 병도 안 나고 그 소를 인자 맘대로 참 잘 길러 가지고,
여섯 번째 가서 그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외양간에다 딱 묶어 놓고 잘 먹이는데, 얼마동안 잘 먹이다 보면, 일곱 번째 가서 망우존인(忘牛存人)이거든. 소를 잊어버리고 사람만 있어. 인자 딱 잘 먹여서 외양간에다 해 놓으니까 소가 길이 들어서 도망가질 않으니까, 소에 대한 인자 관심을 놔 버리고 딱 주인만 있는 거지. '소에 대한 생각'은 인자 아주 길이 잘 들여있고, 편안하게 외양간에 길들여져서 있으니까, 이것도 다 공부해 나가는 절차를 거기에다 그렇게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쉬웁게 말하자면은 이 길을 들이는 과정에서는, 화두를 열심히 열심히 애를 써서 열심히 들다 보면은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제대로 의단(疑團)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리는 과정, 그놈을 거쳐서 나중에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확철대오를 하거든. 확철대오를 하면은 일체처 일체시에서 깨달음의 경지가 낭연독존하며-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한 경지에 이르르거든. 무수이수(無修而修)거든. 닦음이 없이 닦는 거거든.
그리고 여덟 번째 가서는 인우구망(人牛俱忘)이거든. 사람과 소를 완전히 다 잊어버리거든. 그래서 '집에 돌아와 가지고 소는 잊어버리고 사람만 있는 것[忘牛存人]'은 잊어버리고 그 다음에 사람과 소를 둘 다 잊어버린 것은 보리(菩提)를 이룬 위치다.
또 '소를 잊어버리고 사람만 있는 것[忘牛存人]'은 소승(小乘)에서는 아공(我空)의 경계를 그렇게 표현을 했다 그러고, 그 다음에 인우구망(人牛俱忘)의 자리는 대승의 경지에서 말하는 보리를 이룬 경지에다가 비유해서 그렇게 했다고 고인은 그렇게 해설을 합니다.
그리고 아홉 번째 와서 이 반본환원(返本還源) 이것은 열반(涅槃)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이것은 대승이나 소승이 다 같이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열 번 째 가서 수수입전(垂手入廛) 손을 드리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중생계로 나아가는 것인데.
이런 10가지 단계로 보리심을 발(發)해 가지고 도업(道業)을 성취해서 보림(保任)을 다 완성을 한 다음에 중생을 교화하러 나가는 그러한 단계를 10가지로 이렇게 구분한 것인데, 참 대단히 그 '마음 소'를 찾는 경계를 그 '소' 찾는 경계에다가 비유해서 이렇게 게송을 읊고 또 그림을 이렇게 그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를 닦아가는 데에 퍽 이해하기 쉽고 재미스럽게 표현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방금 조실 스님께서는 첫 번째 제일 심우(尋牛) 단계와 두 번째 자취를 보는 견적(見跡)의 단계만을 게송으로 읊으시고 그것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9분43초~22분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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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그러한 심우송(尋牛頌)을 자세히 따져보는 것도 퍽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단계는 어디까지나 이 '마음 소'를 찾기 위해서 화두를 들고 주삼야삼(晝三夜三)에 앞과 뒷이 콱 맥힌 상태에서 의단으로 공안을 참구(參究)해 나가는 그 단계, 그것이 매우 중요한 단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방금 산승이 읊은 그 게송에 ‘불법(佛法)이다. 전등(傳燈)을 계승한다’ 그러한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다못 자기의 공안-본참공안(本參公案)만을 위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공부를 지어 가는데,
공부를 지어 가는데 있어서 고인(古人) 공안 상에 복탁(卜度)하고 망령되이 해석을 가하지 말아라. 비록 낱낱이 해석을 해 가지고 그럴싸한 해답을 얻었다 할지라도 '참나'를 깨닫는 일과는 아무 교섭(交涉)이 없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공안을 갖다가 사량분별로 따져서 이것은 무슨 최초구다, 이것은 말후구(末後句)다, 이것은 제삼구(第三句)다, 이것은 제2구다, 이것은 체(體)다 용(用)이다, 체용동시(體用同時)다, 이런 식으로.. 이것은 본분이다 신훈이다. 옛날에 강사나 또는 의리선(義理禪)을 하는 사람들은 공안을 낱낱이 그렇게 분석하고 따져 가지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서 그 공안을 다 깨달은 것처럼 그렇게 여겼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아니여. 그러한 식으로 백 천 공안을 다 따져서 결론을 내려 봤자 그것은 생사해탈도 아니고 견성성불도 아니여.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와 같아서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그렇거늘, 하물며 그 불 속에 어떻게 앉거나 누울 수가 있겠는가? 공안을 가지고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비교하고 분석하고 그래 가지고 어떤 분별심으로 결론을 내린 것은 마치 불덩어리에 훨훨 타는 무서운 불길 가까이 가 가지고 그것을 만져 볼랴고 그러고 또 그 속에 들어갈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거거든.
그 공안 속에, 크게 나누고 작게 나누고 논상논하(論上論下) 이러쿵 저러쿵 체(體)다, 용(用)이다, 체용동시(體用同時)다, 신훈이다, 본분이다, 일구·이구·삼구다, 이렇게 따진 것이 다 분대분소(分大分小)하고 논상논하 한 것이거든. 이러면 그것이 상신실명(喪身失命)-벌써 수행자로써 공안을 갖다가 의리(義理)로 따지고 사량분별로 이렇게 따지는 짓을 하는 것은 벌써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여.
조실 스님께서 항상 말씀하신 것은 이 공안을 가지고 사량분별로 따진 것을 극히 엄격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까닭이 바로 공안은 큰 불덩어리와 같아서 가까이 하면은 수행자로서의 생명을 잃어버려.
공안을 그런 식으로 따져서 무슨 공안을 대하든지, 법문을 듣던지, 어록을 보던지, 보면은 자기 나름대로 이러쿵이러쿵 따져서 결론을 내려.
조실 스님께서는 그것을 말씀하시기를 사견종자(邪見種子)라 그랬습니다. 사견(邪見) 삿된 종자, 삿된 견해를 가진 씨알머리다 그거거든. 사견종자는 암만 해봤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일러주면 『예 알았습니다.』 그래 놓고는 금방 다음에 또 사견을 내거든.
어쨌든지 공안을 참구하는데 가서는 앞뒤가 끊어져 버려야 하거든. 꽉 맥혀서 오직 의단만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두리를 해 가야 그래야 그 사람이 공안을 타파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그리고 또 하나, 공부하는 사람이 주의할 것은 불가심문축구(不可尋文逐句)여. 글을 찾고 글귀를 쫓는 거여. 그것이 공부하다가 답답하고 암만해도 안 되고 하면은 뭐 전등(傳燈)·염송(拈頌) 기타 조사어록 모다 이런 것을 뜨적뜨적 하며 행여나 거기서 무슨 좋은 해결이 나올까?
워낙 해도 해도 안 되고 가슴은 못 견디게 그렇게 답답하니까 혹 그런 것을 보면 좀 후련하고 시원해지는 맛이 있어서 그런 것을 다 볼라고 그러고, 또 그런 어록 속에 기언묘구(奇言妙句)-'기특한 말과 묘한 글귀'가 있으면 그런 것을 마음속에 기억을 하고, 이런 것은 다맛 아무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공부에 큰 장애가 된다. 진실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러한 짓을 하지 말아라.
그 공부가 안 되고, 암만해도 공부가 진취가 없고, 해 갈수록 답답하기만 하고, 앉아서도 답답하고 서서도 답답하고 추호도 어떤 그 공부가 잘된다고 하는 그런 시원한 대목이 없으니까, 대단히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지마는, 그 답답하고 꽉 맥히고 이 단계가 이러한 경지가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좋은 경계라 그랬습니다.
대혜 스님도 그러한 경지야말로 깨달음에 나아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계니까, 거기에서 번뇌심(煩惱心)을 내지 말아라. 번뇌심을 내지 말고 거기에서-그 답답하고 답답한 그런 경지에서, 선용기심(善用其心)-잘 그 마음을 잡드리를 해 가지고, 화두를 놓치지 말고 참구를 잘 해가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고인이 한결같이 당부하신 말입니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은 이 비량(比量)-이것과 저것을 비교허고 공안을 이 공안과 저 공안을 비교허는 거야. 그래 가지고 마음을 가져서-이 공안 저 공안에 대해서 마음을 가지고 거기에서 주박(湊泊)을 혀. 그걸 따지고 그놈을 가지고 속으로 속 살림을 해 나가는 거여.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하고.
이것은 그렇게 하면은 도(道) 하고는 점점 더 멀어지는 거야. 공안을 가지고 이렇게 따지고 저렇게 따지고, 이놈과 저놈을 비교허고,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사량분별로 복탁(卜度)하고 이런 것은 미륵불(彌勒佛)-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출생허실 때까지 이르러도 그 사람은 참 깨달음과는 아무 교섭(交涉)이 없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을 허는 사람은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 속에 갇혀 있는 거와 같애서, ‘다못 어떻게 허면 이 사방이 은산철벽으로 둘러서 나갈래야 나갈 수가 없는데 어떻게 허면 여기서 빠져나갈까?’ 오직 그 활로(活路)를 찾는 그 한가지 일만이 문제가 되야 해.
그래서 그 활로를 찾는 방법이 「이 뭣고?」거든. 「이뭣고?」 아까 조실 스님께서는 판치생모 화두를 말씀허셨는데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했는고?」, 무자 화두를 허신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뭣고」 화두를 허신 분은 「이 뭣고?」
오직 그 화두 한 마디, 한 의심만을 향해서 의단이 독로허도록 이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야 해. 답답허면 답답헐수록 그렇게 해 나가고, 아무리 공부가 안되면 안 될수록에 그렇게만 해 나가야 돼.
또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머리가 개운하면서 화두를 들랴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리면서 그렇게 깨끗하고 조용하고 잘 들릴 때가 오되, 그럴 때라 하더라도 ‘아! 됐다. 이제 공부가 잘된다’ 그런 기쁜 마음을 내서는 안 돼. 그런 기쁜 마음을 내면 금방 또 경계가 확 변한 거거든.
그래서 설사 공부가 좀 수월허게 화두가 잘 들리고 의심이 의단이 잘 순일허게 된다 하더라도 조금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면 안 돼.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의 육근문두(六根門頭)에는 항상 마왕(魔王) 파순(波旬)의 권속이 육근문두에 와서 지키고 있거든. 그래 가지고 잠깐이라도 틈만 있으면 그 육근을 통해서 들어와 가지고 아주 내란을 일으킬라고 작정을 허는거여.
마치 한 국가도 이웃나라가 그 나라를 침범을 할라며는 항상 간첩을 보내 가지고 그 나라의 모든 것을 감시허다가, 감시허면서 계속 서로 이간(離間)을 붙이는 거여. 정부와 백성을 이간을 붙이고, 백성과 백성을 이간을 시키고, 신하와 임금을 이간을 시켜 가지고, 이간을 시켜서 싸움만 일어나면은, 그것이 바로 침범해서 그 나라를 갔다가 빼앗기가 가장 좋기 때문에, 그래서 그 나라가 이웃나라로부터서 침범을 안 받고 멸망을 안 할랴며는 어쨌든지 그 나라 백성이 서로 화합을 해야 하거든. 그 나라 백성이 화합이 돼 가지고 모두가 서로 믿고 자기의 맡은바 소임을 열심히 허고 그러면은 그것이 바로 가장 나라를 위하고 국가 민족을 위하는 것이 되어서 외부에서 침범해봤자 도저히 성공을 못 허는 것이여.
우리 공부해 나가는 사람도 눈과 코와 입, 귀-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서로 눈은 자기의 역할이 따로 있고, 입은 입의 역할이 따로 있고, 또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따로 있고, 그러니 우리의 발심한 그 마음으로 주재(主宰)가 되아야, 육근(六根)이 심왕(心王)의 명령에 모두가 다 복종을 하고 합심해서 한 대사(大事)를 향해서 합심이 될 때에 도(道)도 이룰 수가 있는 것이여.
그런데 그놈이 흩어져 가지고 오욕락(五欲樂)에 빠지고 탐진치(貪瞋癡) 삼독심의 종이 된다면 도업(道業)은 성취허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결국은 마군(魔軍)이의 함정에 빠지고 그 홀랑게에 걸려서 도업 이루기 커녕은 마군이의 종자(種子)가 되고 마는 것이여. 그 마군이의 종자가 안 되고 법왕 권속이 되는 길은 마군이의 올개미가 무엇인가를 잘 알면은 그 올개미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 올개미가 바로 사량분별이거든.
우리 공부하는 분상에는 사량분별(思量分別)이 가장 중요헌 것이야. 일체처 일체시에 알 수 없는 의단으로 그렇게 나가면은 마군이가 거기에는 발붙이지를 못하는거여. 꽉 맥히지 않고 알아 들어가고 이치 길이 있고 말 길이 있고 더듬어 들어 갈 것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마군이 올가미에 걸려드는 것이여.(9분43초~39분36초)
*고인(古人) ; 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의단(疑團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 ; 원각(圓覺)의 대지(大智)가 밝게 홀로 드러나. [참고] 원각(圓覺) ; 석가여래의 원만(圓滿)한 깨달음. 진여(眞如)의 체득. 부처님의 지혜.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아공(我空) ; 인공(人空). 인무아(人無我).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아집(我執)에 대해,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고 보는 견해 혹은 이치, 또는 이러한 깨우침을 증득한 상태 또는 경지이다.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불도의 수행. 진리의 실천. *보림(保任 보임) ;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 흔히 ‘보림’이라 읽는다.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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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방금 산승이 읊은 그 게송 ; >>> 이 법문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사량복탁(思量卜度)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마음이 시달려서(煩) 괴로워함(惱). 나쁜 마음의 작용.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는 정신작용.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미륵불(彌勒佛) ; Maitreya. 번역하여 자씨(慈氏).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출신으로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세존의 교화에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석가모니세존의 업적을 돕는다는 뜻으로 보처(補悽)의 미륵이라 한다. *은산철벽(銀山鐵壁) ; 철벽은산(鐵壁銀山). 은과 철은 견고해서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높아 오르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 *육근문두(六根門頭) ; 육근(六根-眼耳鼻舌身意)의 문 앞. 육근과의 경계. *마왕(魔王) 파순(波旬) ; 천마(天魔). 욕계(欲界)의 제육천(第六天) 곧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임금은 곧 마왕(魔王)이니, 그 이름이 파순(波旬)이다。그는 항상 불법을 파괴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은 불도를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그의 궁전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므로 누구나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낼 때에 곧 천마가 따르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이 곧 천마다. *이간(離間) ;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를 헐뜯어 관계가 멀어지게 만듦. 또는 두 사람 사이에서 각각 제삼자를 헐뜯고 일러바치고 하여 사이의 정을 떨어뜨림. *주재(主宰) ; 어떤 일을 중심이 되어 맡아 처리함. 또는 그 사람. *심왕(心王) : 의식 작용의 본체。객관(客觀) 대상에 대하여 그 일반상(一般相)을 인식하는 정신 작용。여기에 육식(六識), 팔식(八識), 구식(九識)의 구별이 있다.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성냄, 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마군(魔軍) ; 악마의 군세(軍勢).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 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홀랑게 ; '매듭'의 사투리. *올개미 ; '올가미'의 사투리. 노끈이나 철선 따위로, 잡아당겨도 매듭이 풀어지지 않도록 한 가닥을 고리처럼 만들어 짐승을 잡는 기구.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〇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세등68) (게송) 구명소일모선성~ /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알고 모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여 / 조백(糟魄). 〇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것이로구나!」헐 때 틀려버린 거여. 그렇게 헐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우리 수행자가 항상 주의할 것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알고 모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여.
〇다못 그 꽉 맥힌 의심으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의단으로 나아갈 때에 그 의단이 더 이상 간절(懇切)헐 수가 없고, 더 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 이상 순일(純一)하고 무잡(無雜)할 수가 없어. 그래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야 가지고는 그놈을 타파(打破)할 때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허는 것이지, 고요하고 맑고 깨끗한 경지에서 「하! 이것이로구나.」하고 그렇게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구명소일모선성(求名少日慕宣聖)타가 파사노년(怕死老年)에 친석가(親釋迦)다. 명예와 권리를 추구하던 젊은 날에는 공자님을 섬겨. 보통 사람들이 다 젊었을 때는 유교를 숭상하고, 유교의 법도에 따라서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지키면서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것이 다 공자님을 사모하는 것이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철이 들어 생사 무상(無常)한 것을 깨닫고, 정말 이 세상에 오욕락(五欲樂)이라는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기도 어렵지마는, 설사 뜻대로 이루어졌다 하드라도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내지 못한 그 무상함을 깨닫고 발심(發心)을 해서 불법(佛法)을 믿기 시작해. 그것이 바로 죽음이 무서운 늙으막에사 석가(釋迦)를 친했더라. 불법을 믿게 되었다 이거거든.
무량겁을 오욕락을 탐허다가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헌 것은 바로 이 젊은 날에 공자님을 사모한 것과 같은 것이고, 우리가 금생에 겨우 이렇게 생사가 무상한 것을 깨닫고 불법을 믿고, 불법에 귀의해서 특이한 사람은 출가해서 이렇게 납자(衲子) 생활을 하는 것은 바로 파사노년(怕死老年)에 친석가(親釋迦)다, 그렇게도 볼 수가 있는데.
응성점두지팔각(應聲點頭遲八刻)이여. 소리를 듣고서 고개를 끄덕끄덕 응두(應頭)를 허면 벌써 팔각(八刻)이 늦어져 버렸다 그말이여. 소리를 듣고 고개를 꺼떡거리면 벌써 팔각(八刻)이 늦어. ‘아무개야!’ 불러서 ‘예!’ 하고 대답한 것도, 벌써 부르는 시간이 있고, 대답하기 위해서 - 스스로 들은 바가 있기 때문에, 그놈에 응해서 대답을 허기 때문에 그 시간이 벌써 팔각이다.
초가저사검거구(稍加佇思劍去久)다. 조금 벌써 생각을 머뭇거리면 - '앗! 누가 나를 부르는구나' '앗! 응 그렇구나'하고 벌써 속에 잠깐 머뭇거리면, 칼이 이미 지내간 뒤다 그말이여. ‘칼 조심해라. 누가 너를 칼을 찌를라고 허니까 칼 조심해라’하고 그 소리 듣고 벌써 요리 피헐려고 하면 벌써 칼이 모가지를 지내간 뒤가 벌써 오래다.
우리 수행자가 공부를 헐 때에, '아! 바로 이것이로구나'하면 벌써 아닌 거여 그게. 누구한테 가서 물어보자말자 벌써 그게 모가지에 칼이 지내가 버린 거여.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것이로구나!'헐 때 틀려버린 거여. 그렇게 헐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우리 수행자가 항상 주의할 것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알고 모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여.
다만 그 꽉 맥힌 의심으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의단으로 나아갈 때에 그 의단이 더이상 간절(懇切)헐 수가 없고, 더이상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순일(純一)하고 무잡(無雜)할 수가 없어. 그래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아 가지고는 그놈을 타파(打破)할 때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허는 것이지, 고요하고 맑고 깨끗한 경지에서 '하! 이것이로구나'하고 그렇게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그것을 조백(糟魄)이라 그래. 그러한 조백을 안다면, 어떤 좀 그럴싸한 무슨 경지를 맛봤다고 해서 행여나 「이것이 깨달은 것이 아닌가?」 그런 서투른 생각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말이여.
우리 수행자는 이 일대사!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이미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들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 잡드리 해서 어쨌든지 가행정진, 명실공히 용맹정진을 해 나갈 따름인 것입니다.
--------------------- *(게송) ‘구명소일모선성 파사노년친석가’ ; 송(宋)나라 소강절(邵康節)의 ‘學佛吟’에서. *(게송) ‘응성점두지팔각 초가저사검거구’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p258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下 信心銘闢義解下 참고. *遲(더딜·늦을 지) *刻(시간·때 각) *稍(점점 초) *佇(우두커니 설·기다릴 저) *삼강오륜(三綱五倫) ; 유교의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의 강령과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도리.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을 이른다. *일장춘몽(一場春夢) ; 한바탕의 봄꿈이라는 뜻으로, 헛된 영화나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납자(衲子 기울•옷을 꿰맴 납/사람 자) ;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 스님을 이르는 말. *의단(疑團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타성일편(打成一片) : 참선할 때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경계.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조백(糟魄 술지게미 조/찌꺼기 백) ; 옛날부터 내려오는 성인들의 저서와 말은 모두 찌꺼기란 뜻으로, 무릇 참된 도는 말과 글로 전달될 수 없으므로 현재 전하는 모든 것은 술지게미에 불과하다는 뜻.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가행정진(加行精進) ; 어떤 일정한 기간에 수면을 매우 줄이고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여서 하는 정진. *용맹정진(勇猛精進) ; 견고한 의지로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264) ‘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 / 단전호흡과 의심, 득력(得力) / 경계에 속지 말아야 / (게송)묵조시귀굴~.
〇‘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 - 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
〇이 활구참선법은 캄캄한 밤에 기둥에 이마빡을 부딪친 거와 같은,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다못 꽉 맥혀 가지고, 알 수 없이 ‘이뭣고?’ 그 뿐인 것입니다.
〇어떠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에 현혹되지 말고 집착허지 말고,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두고, 정신만 탁 챙겨 가지고 눈을 뜨고서 화두를 챙겨나가면 그러헌 경계는 금방 저절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264) - 1985년 4월 첫째일요법회(91분)에서. (용264)
약 18분.
그런데 흔히 화두 하면 ‘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이기 때문에 ‘이뭣고?’를 많이 말씀을 허게 됩니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말은 임제(臨濟) 스님 이후로 임제종에서 이 화두라고 하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마는, 임제 스님 이전에 육조(六祖) 스님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사용하지 아니했지만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기둥하고 아래로는 땅을 떠받치며, 밝기로는 해보다 더 밝고 검기로는 옻칠보다도 더 검은데, 항상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허는 가운데에서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터억 앞에 나와서, ‘그것은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이로소이다. 이 하택신회에, 저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육조 스님이 ‘뭐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도 없다고 내가 그랬거늘, 어찌 불성이니 제불의 본원이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공부를 해서 일가(一家)를 이룬다 하드라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 되겠다. 불교 학자밖에는 못 되겠다’
이 불교(佛敎)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공부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참나’를 깨닫는 것이 목적인데, ‘너는, 앞으로 니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가를 이룬다 해도 지해종자(知解種子)밖에는 못 되겄다’ 이렇게 점검을 허셨습니다.
그러자 남악회양(南嶽懷讓)이 왔습니다. 와서 터억 절을 허니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셨습니다.
하! 그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헌 물음에 대해서 꽉! 맥혀서 뭐라고 대답헐 수가 없어 몸을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택신회는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니, 무슨 하택신회의 불성이니 이렇게 즉각 그 대답을 했는데, 남악회양은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허고 묻는데 대해서 앞이 꽉 맥혀 가지고 몸 둘 바를 몰라. 그 뒤로 8년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8년 동안을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앉아서도 그 생각, 서서도 그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그 생각, 일을 허면서도 그 생각, 똥을 누면서도 그 생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이렇게 허기를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그래 가지고 육조 스님 앞에 가서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조 스님이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헐 것이 있느냐?’허니까,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證)헐 것이 없들 않지마는 오렴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이렇게 해서 인가(印可)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참선법, 활구참선법은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더듬어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남악회양 선사처럼 대뜸 처음부터서 꽉! 맥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기둥에 이마빡을 부딪친 거와 같은, 캄캄하니 갑자기 걸어가다가 기둥이나 벼람박에 이마빡을 부딪쳤을 때 그때 상황이 어떻습니까?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다못 꽉 맥혀 가지고, 알 수 없이 ‘이뭣고?’ 그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꽉 맥혀서 앞뒷이 끊어져야 그 공부를 옳게 해 나가는 것이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 이론, 무슨 철학, 불교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 그것을 갖다가 아는 대로 끌어다가 이렇게 분석을 하고, 종합을 하고, 비교를 하고, 적용을 하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허는 것이 아닙니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도 그렇고, 마삼근(麻三斤)도 그렇고, 무자(無字) 화두도 그렇고, 시삼마(是甚麼)도 그렇고, 무슨 화두(話頭)를 어느 큰스님한테 탔든지 간에 한번 탔으면 그 화두,
공부가 잘되거나 못되거나, 못될수록에 그 화두 하나에 전력을 쏟을 것이고, 잘된다 하드라도 기쁘다 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무자 화두를 하는 분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지어갈 따름인 것입니다.
꽉 맥혀서 답답허고 알 수가 없지만 조금도 조급한 생각을 낼 것이 없고, 또 그렇게 해 가다 보면 화두가 순일하게 들려서 의심(疑心)이 순일(純一)하게 들린다 하드라도, 화두가 독로(獨露)한다 하드라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기쁜 마음을 내면 이미 화두는 달아나 버리고, 기쁜 마음의 마구니가 벌써 침입해 들어온 것이고, 안된다고 짜증을 내고 번뇌심을 내면 이미 번뇌의 마구니가 내 마음에 침입해 들어온 것이라. 그래서 이 공부는 잘된다고 해서 기쁜 마음도 내서는 아니되고, 잘 안된다고 해서 짜증낼 일도 아닌 것입니다.
다못 단전호흡을 허면서 숨을 쑤욱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는데, 볼록해지거든 약 3초 동안 딱 정지했다가, 또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허면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러면 숨이 다~ 나가면 배가 홀쪽해지죠. 그러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시면은 아랫배가 볼록해지는데, 볼록해지거든 딱 정지헌 상태에서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또 숨을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고... 허지만,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꼭 숨을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됩니다.
들었던 화두 ‘이뭣고?’헌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냥 화두는 더 들지 않고, 그 있는 의심을 묵묵히 반조(返照)를 허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는 한번 들고서 숨은 3번, 4번, 5번 내지 10번을 쉬어도 그 화두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은 덮치기로 화두를 들지 않다가, 화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지거나 딴 생각이 일어났다허면 그때 가서 또 화두를 떠억 한번씩 챙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해 가면, 처음에는 그렇게 들랴고 해도 깜빡한 사이에 달아나 버리고 들면 또 달아나 버리고 하는데, 나중에는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화두가 항상 들어져 있게 될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을 갖다가 공부가 많이 익숙해진 증거인 것입니다.
힘을 쓰지 아니해도 저절로 공부가 되어가니까 힘을 덜게 된다. ‘힘 덜게 되는 것을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라’ 이렇게 고인(古人)네들은 표현을 했습니다.
이 공부에 제일 주의헐 것은 사량분별로 따지지 말 것이며, 설사 공부가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순일허게 잘 들리고 의단이 독로헌다 해도 좋아하는 마음, 환희심(歡喜心)을 내지 말 것이다.
또 공부가 순일허게 잘되어 갈 때에 ‘빨리 깨달랐으면, 이럴 때 누가 나로 하여금 탁! 깨닫게 해줬으면’ 그러헌 생각도 내지 말 것이다.
또 공부가 그렇게 순일하게 잘되어 가게 되면은 여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떠한 그 신기한 경계(境界)가—혹 환한 빛을 광명을 본다던지, 꿈에 부처님을 친견하고 꿈에 어떤 깨달은 꿈을 꾼다든지, 또는 여러 가지 뭣이 알아진다든지, 그런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드라도 ‘이것은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환상(幻相)이다’ 생각하고. ‘이거 내가 깨달은 것이 아닌가?’ 그러헌 그 외람(猥濫)되고 잘못된 생각을 내지 말고.
어떠한 신기한 불보살이 나타나고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드라도 이것은 허상(虛像)이요, 환상이라 하는 것을 미리부터 잘 이해를 허시고, 그런 데에 현혹되지 말고 집착허지 말고.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두고, 정신만 탁 챙겨 가지고 눈을 뜨고서 화두를 챙겨 나가면 그러헌 경계는 금방 저절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스승을 바로 만나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옳게 해 나가는 것인가’를 잘 모르는 사람은 공부허다가 이런 허상과 환상과 마경(魔境)이 나타나면 이것이 도통(道通)헌 것으로 착각을 하고, 그것에 기쁜 마음을 내고 그것에 집착을 하고 신경을 써 가지고 영영 사도(邪道)에 빠지고, 까딱하면 정신병자가 되고 하는 예도 가끔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시작할 때부터서 바르게 시작을 해야 하고, 중간에도 바르게 해 나가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묵조시귀굴(黙照是鬼窟)이요 문자역조강(文字亦糟糠)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문해하종(若問解何宗)인댄 방행여우적(棒行如雨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묵조(黙照)는 시귀굴(是鬼窟)이요. 묵묵히 앉아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이 귀신의 굴택(窟宅)이요.
문자(文字)는 역조강(亦糟糠)이다. 문자, 이론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은 이것은 다 찌꺼기더라 그말이여.
참선을 허되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허면서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허도록 잡드리를 해 나가야지,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조용헌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그러헌 공부는 이것은 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 해 가지고, 이것은 아무리 평생을 들여다보고 있다 허드라도 이것은 귀신굴(鬼神窟) 속에서 살림살이를 허는 것이라 해서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입니다.
설사 오신통(五神通)이 난다 허드라도 이것은 정법(正法)이 아니고 외도선(外道禪)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經典)이라 하더라도 경전을 우리의 중생 분별심으로 사량분별로 이리저리 따져서 해석을 허고 있다면, 그것은 곡식의 바른 알곡을 먹지를 못하고 그 찌꺼기를 씹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부처님 경전도 그 경전을 바로 읽고 바로 봐서 부처님의 그 참뜻을 옳게 깨달라야지, 그것을 이론적으로 따지고 문자로 그것을 분석해서 그렇게 일생 동안을 경을 읽고 연구를 헌다해도 그것은 찌께기—엿 국 다 뽑아내고 엿기름 찌께기를 그것은 돼지나 주는 것인데 그것을 갖다가—엿 국물은 받아서 구정물 통에 붓어 버리고 그리고 그 엿밥, 찌께기를 먹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약문해하종(若問解何宗)이면, 그렇다면은 묵조(默照)도 아니오, 문자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대가 공부해 나가는 종지(宗旨)가 무엇이냐? 그대가 공부해 나가는 것은 어떠헌 공부를 허느냐? 무슨 목적으로 어떠헌 공부를 허느냐?’허고 묻는다면은,
방(棒)을 내리기를, 방맹이로 몽둥이질을 허기를 비 쏟아지듯이 몽둥이질을 허리라[棒行如雨滴].
‘그 무슨 공부를 허느냐? 그대가 하는 공부의 지취(旨趣)가 무엇이냐?’고 묻다가 뭇매를 맞게 된다 이것입니다.
어째서 ‘그대의 공부허는 종지가 무엇이냐?’하고 묻는데 방맹이를 맞게 되느냐?
여러분이 참선을 열심히 허시게 되면 이 뜻을 스스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61분32초~1시간19분45초)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임제, 육조, 하택신회, 남악회향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임제종(臨濟宗) ; 중국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이다.
임제종은 북방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송대(宋代)에 석상 초원(石霜楚圓) 문하에서 양기 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와 황룡 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가 나와, 양기파는 성행했으나 황룡파는 얼마 안 가 쇠퇴함.
양기파 문하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화두(話頭)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하여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그의 선풍(禪風)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동용(動用) ;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씀[用]. 움직이고 작용함. 활동. 동용(動容)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06) - 86년 8월 화두·불명·수계 법회(86.08.03)에서.
〇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지해종사(知解宗師) ; 참선 공부를 알음알이로 따져서 해석하고 강론하고 공부해 가는 강사나 이론가를 말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벼람박 ; ‘바람벽(--壁, 집의 둘레 또는 방의 칸막이를 하기 위해 만든 벽)’의 사투리.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마삼근 (麻三斤) : 화두의 하나。『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하는 물음에 대하여, 운문종(雲門宗)의 동산(洞山) 수초선사(守初禪師)가 대답하기를 『마 삼근(삼 서근)이니라』하였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〇‘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반조(返照) ; 돌이켜 살펴보는 것.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환상(幻相) ; 실체가 없는 무상한 형상.
*외람되다(猥濫-- 함부로·외람할 외/함부로·넘치다 람) ; (언행이나 생각이)분에 넘치는 데가 있다.
*마경(魔境) ; 마(魔)의 경계(境界).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번뇌를 말한다. 마(魔)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사도(邪道) ; 올바르지 않은 삿된 길.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길.
*(게송) ‘묵조시귀굴(黙照是鬼窟)~’ ; 『청허당집(淸虛堂集)』(동국대학교역경원) p63 ‘일선자(一禪子)에게’ 게송 참고.
*굴택(窟宅) ; 거처, 집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묵조사선(默照邪禪) ;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그러한 공부. 이것은 깜깜한 귀신굴(鬼神窟) 속에서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라 해서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이다.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94-95 참조.(가로판 p99~100)
〇“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그러면 그 활구참선법이란 어떠한 것이냐?이론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참선이 아니라, 일체 이론을 배제하고 오직 꽉 맥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하나의 화두를 참구하여 일체 공안을 타파하고 확철대오하는 참선법입니다.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둘째 호흡을 바르게 한 다음, 셋째는 화두를 의심해 나가는데,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심, 깨달음>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剎那)에 확철대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 깨달음>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참선을 해 나가는데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할 화두를 지금부터 말씀을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여기에 참선법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여러분을 이끌고 계시는 만덕장보살이 가자고 해서 왔다고 혹 생각헐런지 모르지마는, 그것은 표면에 나타나는 한 조건에 지나지 못하고,여기에 여러분이 온 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발이 여기를 온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몸뚱이가 제멋대로 온 것이 아니고, 남이 오자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 지금 편의상 ‘자신’이라는 말을 썼지마는 - ‘알 수 없는 놈’이 여기를 오기로 결정을 해서 그놈이 명령을 했기 때문에, 그 명령에 의해서 여러분의 몸이 움직여져 가지고 발로 걷기도 하고, 차를 타기도 해서 여러분은 여기에 와 진 것입니다.
그러면은 무엇이 여기를 ‘가자!’ 하고 이렇게 명령을 했겠느냐? 그놈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그놈’인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이 편의상 지어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이다 • 성품이다 • 주인공(主人公)이다 • 뭐 얼마든지.... 우리 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놨을 것입니다 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風月)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그만두고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에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그놈이 지옥에도 가 봤을 것이고, 천당에도 가 봤을 것이고, 귀신으로도 떠돌아댕겨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온 그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눈을 통해서 보기도 하고, 귀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고, 입을 통해서는 맛도 보고 말도 하고, 몸뚱이를 가지고는 차웁고 • 덥고 • 부드럽고 • 까끄러운 것도 알고, 여기 앉아서 백 리 •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맘대로 왔다갔다하고,또 10년 전 • 20년 전 • 30년 전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합니다.
그렇게 신통이 자재하고, 시간 • 공간에 걸림이 없는 묘한 물건을 우리 모두 낱낱이 다 지니고 있고, 그놈에 의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자체를 깨닫지를 못하고 계속 생사윤회를 할 수밖에는 없느냐?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 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에 자유자재하고, 그놈을 마음껏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삼천 년이 된 이 말세(末世)에 겨우 이 문제를 이제사 알고,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는 그러한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후회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금생에라도 알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약에 금생에마저도 그것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면, 무량겁 미래 언제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이 법을 알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다면은 한없는 생사윤회를 거듭할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몸은 금생에 언젠가는 버리게 됩니다. 버리고 난 다음에 다시 또 육도(六道)의 어느 곳에 몸을 받아나게 됩니다마는, 금생에 일생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마지막에 숨 딱 거둘 때에도 참선하는 그 마음가짐, 그 화두 일념으로 딱 숨을 거두게 되면 내생에 금방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좀더 일찍 좀더 공부하기 좋은 여건 하에 태어나게 되기 때문에 내생에는 훨씬 빨리 공부를 하여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도인들, 모든 성현(聖賢)들도 일 생, 이 생 닦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생을 공부해 가지고 금생에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을 받아 태어나 가지고 일찍 공부를 성취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입니다.차츰차츰 알아 들어가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자리 걸음만을 하는 것 같지마는 결국 깨달을 때에는 중생의 상태에서 성현의 상태로, 비약적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러나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해놓으면 설사 금생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드라도 그 공부가 허사가 아니기 때문에, 올바르게 해 놓은 공부는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점진적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지 못한다고 조급한 생각을 낼 것도 없고, 금생에 나이가 먹도록 죽음에 이르도록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下直)할 때까지,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 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물 - 우리 밖의 모든 사물 - 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있고, 그놈의 부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삼라만상, 우주법계를 내가 운전하고, 내가 요리하고,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밖의 물건에 의해서 내가 구속을 당하고 있고, 그 조종을 받고 있고, 그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나인데... 주인이 시원찮고 정신을 못 채리니까...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 내가 소유하고 있는 종들에게 주인이 멸시를 당하고, 주인이 종노릇을 하고, 종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들입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하! 그 공부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대단히 어렵겠구나!” 이렇게 생각허실런지 모르지마는 절대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내게 있는 것.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놈. 여러분이 듣고 있는 놈. 밥을 먹을 때는 먹고 있는 놈. 길을 걸어갈 때는 바로 그 걸어가는 놈. 성날 때는 바로 그 성내는 놈. 그놈을 돌이켜 살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날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괴로울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기쁠 때도 • 슬플 때도 • 밥을 먹을 때도 • 차를 탈 때도 • 앉었을 때도 • 누웠을 때도, 바로 <그때그때, 그 자리 그 자리>가 나를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는 것입니다.
책을 통해서 하는 공부는 장소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분위기가 필요하지마는, 이 공부는 때도 장소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한 생각 퍼뜩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51분28초~68분48초)
回 이 법어는 송담(松潭)스님께서 1978년 10월 1일, 「법련사 불일 청년회」의 청법으로 설하신 내용이며, 스님께서 직접 편집하신 것을 『불일회보』(1988년 6. 7. 8월)에 게재했었던 원고임.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풍월(風月) ; 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어깨너머로 배운 짧은 지식.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사바세계(娑婆世界);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생사윤회(生死輪廻)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여래(如來) ; 여래 십호(如來十號)의 하나. 진여(眞如)의 세계, 곧 열반에 다다른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다타가타(tathāgata)의 번역어이다. *하직(下直) ;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