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게송)취적기우자~ / 갈수록에 없는 것이 그게 진미(眞味).

 

이뭣고?’ 그저 그전에는 들리다가 인자 하도 오래오래하니까 일구월심(日久月深)하니까 화두가 인자이뭣고?’ 자꾸 들리기는 허지. 들리기는 허지마는 들어갈수록에 모른다. ! 일체 번뇌 망념이 거기 와서는 붙도 못하지. 아는 것도 붙지. 일체 번뇌 망념이 어디 가서 붙어?

아니 모를 수밖에 없는데, ‘ 들어갈수록에 모른다한다 그말이여. 말은 옳지. 들어갈수록 모르지.

 

없으면 없는 가지고—‘이뭣고?’하면이뭣고?’ 없으니까 그놈 가지고, 그저 찾고 찾고, ‘찾으면 죽는다하지마는 그와 그와 달러. 벌써 무엇을 물으면은 할라고 찾는 것과 없어서나의 진면목이, 내가 나를 참으로 몰랐으니 진면목 찾는 거와 달러. 없이이뭣고?’ 찾는다.

 

**전강선사(No.277)—달마사행론 제법부동적정문, 조실스님 출가인연(임자 72.11.04.새벽) (전277)

 

약 15분.

 

올라왔소. 용맹정진한 것을 보니 ! 내가 발심이 되었어. 발심이 수가 없어. 발심이 되어서 그래 법문할 마음이 나서 올라왔소마는 그저 그렇소. , 당초에 .. 

 

취적기우자(吹笛騎牛者)  동서임자재(東西任自在)니라

나무~아미타불~

청원연우리(靑原煙雨裏)  비진기쇠의(費盡幾衰衣)

나무~아미타불~

 

소를 타고 젓대를 불면서 동서(東西) 자재(自在)하는구나.

! 그놈 보배 소를 찾아 가지고는 , 굴레 끼워서 고삐 달아서 길들여서 탔으니, 이놈이 가자 오자 해도 임자재(任自在). 마음대로 동서에 이렇게 임자재 하는구나.

 

청원연우리(靑原煙雨裏)에서, 청원(靑原) 푸른 언덕 연기 안개 속에서,

비진기쇠의(費盡幾衰衣). 얼마나 옷을 찢기며, 가시에 몸을 찔리며, 틈새기를 헤매 댕기며 무진 고생을 얼마나 했느냐?

 

비유인데, 우리 선객(禪客)들이 지금 화두 하는 법이 그려.

처음에 들어와서 화두를 하니, 그놈의 화두가 이뭣고?’하니 대체 뭐냔 말이여? ‘이뭣고?’

, ‘이뭣고?’ 분명히이뭣고?’라고 하지마는 뭐여? 깜깜하니 도무지 , 깜깜해도 분수가 있지.

 

이뭣고?’ 뭐여? 당최.

, 봐도 그렇고, 봐도 그렇고, ‘ 들어갈수록 모른다하지.

들어갈수록 모르지, 그러면 무엇을 것인가?

 

들어갈수록 아는 것이 나오면은 외도(外道)? 외도 참선이고, 무슨 점쟁이 참선이고, 무슨 사주쟁이처럼 아는 참선이고, 타심통 외도 참선이고, 그런 것이게? ! 분명히 그런 법문이 있지 않어?

 

그런데 아는 것을 바래 가지고 소리인가? 알어?

들어가 봐도 들어갈수록에 점점점점 이뭣고?’. ‘이뭣고?’ 점점 자주 찾아지고, 그저 하는 것이이뭣고?’뿐이기 때문에 홑으로 홑으로 하다가 나중에는 첩첩(疊疊)으로 이놈이 되지.

 

이뭣고?’ 그저 그전에는 들리다가 인자 하도 오래오래하니까 일구월심(日久月深)하니까 화두가 인자이뭣고?’ 자꾸 들리기는 허지. 들리기는 허지마는 들어갈수록에 모른다.

 

! 일체 번뇌 망념이 거기 와서는 붙도 못하지. 아는 것도 붙지. 일체 번뇌 망념이 어디 가서 붙어?

아니 모를 수밖에 없는데, ‘ 들어갈수록에 모른다한다 그말이여.

말은 옳지. 들어갈수록 모르지. 들어갈수록 수가 없으니깐 재미가 없어 무덤덤혀. ‘재미없어 아이고! 못하겠다, ‘ 되아 못하겠다.

에이! 참선 해봤던들 되도 하고 하니까, ‘퇴타(退墮) 수밖에 없다, 퇴타를 한다 그말이여.

 

불쌍한 인간이지.

세상에도, 갈수록에 없는 것이 그게 진미(眞味), ! 도무지 일점 티끌만큼도 거기에 무엇이 붙지 못한 것이 보배인지를 모르고, 이런 놈의 소리를 하고 앉았구나.

 

무엇이 붙어? 들어갈수록에 지해(知解) 상량(商量) 도무지 붙지 못혀.

그러기 때문에 고인들이 법을 물을 , “, 주장자를 여의고 일러라그런다 그말이여. 이거 아니여. 선지식 스님네가 법상에 올라가면 하는 말이지.

 

주장자(拄杖子) 명상(名相) 여의고 일러라, 이름과 () 여의고 일르는 것이 그것이 참선법인데, 이름 버리고, 이놈 모냥 여의어 버리고, 어떻게 이를까?

 

그것 () 붙이지 말고, 이름 명상(名相) 붙이지 말고 일러 보아라

뭐라고 이를까? 입만 벌리면 이름이고, ()이고 나오는데?

 

아무것도, 이름도 성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그래도, 죽은 ()이라 못써. “이름도 없는 것이다그래도 못쓴다 그말이여.

이름이니 ()이니 모냥이니 일체를 여의고 한번 일러 봐라그래 묻거든?

 

이치는 걸림이 없는 것이다 말이여. 이치가 걸린 법이 없어. () 걸린 법이 어디 있나?

무슨 모냥이 있어야 걸리고, 무슨 얼거리가 뭐가 있나? 무엇이 있어서 걸려?

! 그런 , 대답하기라는 것이 천하 쉬운 것이다 그말이여.

 

! 주장자가 본래 모냥이 없거니 무엇을 이르란 말이요?” 물어 봐도 것이고, 그렇지 않아?

주장자를 여의고 무슨 도리를 이르란 말이요?” 그래도 것이고. 별소리 있지 않어? 이치 막힐 것이 무엇이 있는가?

 

물으면 걸리지. 찾느라고 죽어.

뭐라고 일러야 할까?’ 무슨 뭐라고 이를라고 찾느냐 말이여, ?

 

없으면 없는 가지고—‘이뭣고?’하면이뭣고?’ 없으니까 그놈 가지고, 그저 찾고 찾고. ‘찾으면 죽는다하지마는 그와 그와 달러.

 

벌써 무엇을 물으면은 할라고 찾는 것과 없어서나의 진면목이, 내가 나를 참으로 몰랐으니 진면목 찾는 거와 달러. 없이이뭣고?’ 찾는다.

 

세상에 먹고 입고 사는 것이 목적이 무엇인가? 살아서 무엇 것인가? 그거. 하루 살면 하며, 살면 무엇 것인가?

! 살아보지, 무엇 것이냐?’ 싱겁기는 짝도 없지. 그날 살아봐도 그날 그것, 내나 맛이여. 살아 뭣해?

 

오직이뭣고?’ 하나를 하기 위해서 살아야겠다 그말이여. 결코 살아야 하겠다 말이여. ‘이뭣고?’

오직이뭣고?’ 학자가이뭣고?’ 찾아서 망상 속에서이뭣고?’ 어떻게 놨던지 숭칙한 망상(妄想) 제대로 뿌리가 뽑혀 버리고 아무것도 없구나. 아무것도 없어. ‘이뭣고?’ 하나뿐이지!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만큼 되다 보니 얼마나 청산 연우리(煙雨裏)에서 청산, 비오고 가시밭 어그러진 놈의 산속에서 그놈의 보배를, 소를 찾느라고 고행(苦行) 어쨌는가?

우리 학자들 지금 닦는 고행이 여차(如此)하다 그말이여.

 

이놈을 그래, 그러나 저러나 이놈을 하세월(何歲月)이지. 어디 무슨 하세월이지, 아무 때라도 바로 찾아 깨달을 때까장은 내가 언제 마음 놓을 있나? 일순간(一瞬間)인들 마음을 ?

 

그래 가지고서는 기운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쓰고 댕기는 삿갓도 찢기고, 옷도 찢기고, 그저 몸뚱이도 긁히고, 그저 가지고는 기필(期必) 찾아서, 이놈을 길을 들여 찾아놨구나. 보배지보배여.

 

무슨 놈의 생사(生死) 있나? 중생이라는 것은 밑도 끝도 없는 중생이여. 아무것도 모르는 중생이여. 죄만 받는 중생이여.

죄도 무슨 죄냐? 생사죄(生死罪) 받는데, 나만 나와 가지고 죄지어 가지고 죽어 가지고 죄받고 밤낮 생사죄 짓는 , 죄지어 죄받는 중생이여. 이건 중생이란 역사도 없이 그대로 있는 놈이 중생이네.

 

, 이놈을 ! 깨달라 장부(丈夫) 되는 아닌가? 보우(寶牛) 깨달라서 탔으니 임자재(任自在). 자재하는 행이다.

 

항상 듣는 법문이지마는 법문이 어디 내놓고 있나? 듣는 법문이 어디 있어?

듣는 법문, 금강경, 밤낮 금강경, 밤낮 화엄경, 그저 법화경, 그저 원각경, 그저 무슨 , 경이지, 누가 들은 어디 있나?

 

올라왔으니깐 조금 여기 인자 , 하나 일러 있고. 그러고는 다시 시작할 테여.(처음~1519)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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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취적기우자~’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휴정) ‘제목암(題牧庵)’ 참고.

*젓대 ; ‘(가로로 불게 되어 있는 관악기를 통틀어 이르는 )’ 일상적으로 이를는 . ().

* ; 뜻밖의 일을 당하여 놀라거나 기분이 언짢을 내는 . () ①원, 세상에 ②원, 싱겁긴 ③이거 , 남이 알면 안되는데.

*선객(禪客 참선 /손님·사람 )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당최 ; 도무지(아무리 해도, 이러니저러니 없이 아주). .

*첩첩(疊疊) ; ①겹겹(여러 ). ②여러 겹으로 겹쳐 있는 모양.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

*퇴타(退墮 물러날 /떨어질·게으를 )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진미(眞味) ; 어떤 대상에서 느껴지는 참된 가치나 재미.

*지해(知解) ; 상량(商量). 알음알이.

*주장자(拄杖子 버틸 /지팡이 /접미사 ) ; 수행승들이 좌선(坐禪) 때나 설법(說法) 때에 지니는 지팡이.

*명상(名相) : 모든 물건이나 일이 이름과 형상이 있는 것이다。우리는 이름만 들으면 사물의 형상을 생각하게 되는데, 형상이란 것은 바탕과 모양이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공간적으로 있는 형용과 체적(體積질량(質量) 아니라,

시간적으로 나타나는 나고 머물고 늙고 죽는 것이나, 시작되고() 진행하고() 쇠퇴하고() 파멸하는()것도 형상이며, 오관(五官)으로 감촉하게 되는 열도(熱度소리(音響(냄새(() 같은 것도 또한 형상이다.

그러나 이름이나 형상은 자체가 본래 확실히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망녕된 생각이 지어낸 이름이며, 때의 인연을 따라 생겨난 거짓 형상인 것이다.

* ; ①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듣는 이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하는 .(), 조용히 합시다. ②남에게 어떤 행동을 권하거나 재촉할 하는 . (), 어서 뛰자. ③안타깝거나 의아한 일을 당했을 내는 . (), 이제 어쩌지?

*숭칙하다 ; ‘흉칙하다(흉하다. 보기에 민망하다)’ 사투리. *흉칙(凶칙) : 흉측(凶測, 兇測)—흉악망측(凶惡罔測 몹시 흉악함).

*고행(苦行) ; ①어떤 경지에 이르거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깨달음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며 하는 수행.

*여차(如此)하다 ; (일의 상태나 속성이)이와 같다.

*하세월(何歲月) ; 매우 오랜 세월.

*일순간(一瞬間 /눈깜박일 /사이 ) ; 지극히 짧은 순간.

*기필(期必 만날·약속할·결심함 /반드시·기필할 ) ; 어떤 일을 이룰 것을 때를 정하여 약속함.

*장부(丈夫) ;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불성(佛性) 이치를 깨달은 사람.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15. 7. 10. 11:29

§(232) 한 생각 단속 / 생사유전(生死流轉) / (게송)득지재심응재수~ / “찾다가 저 죽는다” / 신심·분심·의단이 한목 돈발해야 /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요달(了達).

 

남이 나한테 은혜를 베풀어 주되, 나는 화두를 들고 화두를 듦으로써 그 사람의 은혜를 갚아야 하고, 남이 나에게 섭섭하게 하고, 남이 나에게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화두를 듦으로써 그 사람이 나한테 해롭게 한 보답으로 삼는다면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는 가장 현명한 길인 것입니다.

세수할 때는 세수한다고 그놈이 어디로 갈 거냐 그말이여. 먹을 때는 어디로 가? 그 먹는 놈 내놓고 그게 어디로 갈 거냐 그말이여. 비를 들고 마당을 쓸 때는 쓰는 놈 내놓고 어디 가서 찾느냐 그말이여.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찾다가 저 죽는다” 그런 말씀이 있는데, 바로 그놈을 내놓고 따로 찾으면 그 무엇이 나올 거냐 그말이여.

흔히 가까운 데다 놓고 멀리 찾다가 시간을 낭비하는 수가 있는데, 우리가 우리의 자성(自性)을 찾는 데에도 언제나 가까운 데에 있는 것입니다. 가까운 데 있는데 그놈을 멀리 찾으면 그건 없거든.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일신상으로 마음 편안한 것을 얻으려는 그러한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제도해서 온 법계가 부처님으로 가득차게 될 때까지 우리의 수행은 계속되어야 하고 우리의 과제는 계속 풀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원대한 큰 원(願)을 가지고 우리는 정진하는 사람이라, 조끔 무슨 얻은 소견 그것을 가지고 만족함을 삼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 법(法)에는 승속(僧俗)이 없고, 남녀가 없고, 노소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대중 스님네와 보살님네, 연세가 많다고 해서 양보를 하시지 말고, 여자라고 해서 양보를 하지 말고, 이제 금방 출가한 사미승(沙彌僧)이라고 해서 양보를 하지 말고, 각기 다 장부(丈夫)의 기상을 가지고 어서 속히 도를 이루어서 이 산승(山僧)을 제도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대승법, 최상승법은 생사(生死) 속에서 ‘생사가 본래 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이여. 생사를 피해 가지고 열반을 구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눈에 생사로 보이는 이 생사 속에서 바로 생사 없는 도리를 요달(了達)해 버리는 거여.

 

**송담스님(No.232)—84년 동안거해제 법어(84.02.16) (용232)

 

(1) 약 21분.

(2) 약 17분.

 

(1)------------------

 

경전에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서 오십오위(五十五位) 점차(漸次)를 거쳐서 등각(等覺), 묘각(妙覺)을 갖다가 성취를 한다’ 그러는데,

삼아승지겁이라고 하는 것은 일아승지겁만 해도 몇억만 년인데, 삼아승지겁이면 얼마나 많은 천문학적 숫자로도 비유할 수가 없는 그런 긴 세월인데,

 

무엇을 삼아승지겁에다 비유했냐 하면 우리 그 중생심, 중생의 끊임없이—육진(六塵)·육근(六根)·육식(六識), 이 십팔천(十八天)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중생의 선(善)·악(惡)·무기(無記), 삼성(三性)의 생멸식이 그 고비 고비가 바로 삼아승지겁에다가 비유를 한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단속(團束)을 하고, 또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단속을 하고, 단속하면 그 단속하는 그 생각에서 또 생각이 일어나고, 좋은 생각이 일어나도 그렇고, 좋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도 마찬가지고,

수 없는 생각, 하루에면 몇천만 가지 생각이 일어나는데, 한 생각 속에 그놈을 더 미세하게 관찰을 하면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들어있다 그말이여.

 

그러니 일생 동안에 우리의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멸심(生滅心)을 무슨 전산기나 무슨 특별장치를 해서 그것을 갖다가 기록을 해서 그놈을 확대해 놓고 보면 정말 삼아승지겁이라고 표현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들을 단속을 하지 아니하고 방치해 두고 또 일어나는 그 생각 따라서 자기도 같이 장단을 치고 춤을 추고, 생각으로 입으로 몸으로 놀아나서 업(業)을 짓게 되면,

그것이 무량겁 생사윤회(生死輪廻)가 되는데—무량겁을 육도윤회를 하면서 생사윤회를 하는데,

 

천당에 갔다 지옥에 갔다, 축생이 되었다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되어도 빈부귀천 남녀노소로, 쪼끔 좋았다 나빴다, 울었다 슬펐다, 성냈다 풀어졌다, 괴로웠다 즐거웠다,

그 많은 생사유전(生死流轉), 그것이 무량겁으로 연속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그렇게 해 왔습니다.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 갈 것입니다.

 

 

그 아무 힘 안 들이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 근원이 무엇인 줄도 모르고, 왜 그런 것들이 일어나는 가도 모르고, 그 일어나는 그 생각에 자기도 덩달아서 휩쓸려서 넘어가면서 고락 속에서 곤두박질을 치고 있는데,

그 원인이 온전히 자기한테 있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전부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轉嫁)를 시킵니다.

 

그래 가지고 크나 작으나 남을 원망합니다. 남에게 그 허물을 뒤집어씌우고,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원수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잘해 주어도 원수가 되고, 더군다나 못해 주면 더 큰 원수가 되고,

잘해 주면 은인이 되어야 할 텐데, 잘해 주면 반드시 그 사람이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못해 주면 당장 그 자리에서 원수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잘해 주는데 왜 원수가 되느냐 그말이여?

처음에는 좀 ‘고맙다’ 그러지만 결국은 그렇게 해서 맺어진 인연이 나중에는 원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원수는 친한 데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그만한 은혜도 남이 나한테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은 아무리 조그만한 것이라도 평생 동안 잊지 말고, 아무리 큰 원수라도 즉시 잊어 버려라’ 이렇게 고인은 말씀하신 바도 있지만,

 

남이 나한테 은혜를 베풀어 주되, 나는 화두를 들고 화두를 듦으로써 그 사람의 은혜를 갚아야 하고,

남이 나에게 섭섭하게 하고, 남이 나에게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화두를 듦으로써 그 사람이 나한테 해롭게 한 보답으로 삼는다면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는 가장 현명한 길인 것입니다.

 

그 말은 어찌 생각해 보면 현실에 맞지 않는 말 같이 생각이 될는지도 모릅니다.

 

‘왜 남이 나한테 잘못하면 즉각 방어를 해야 하고 대처를 해서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고, 또 남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면 그 고마운 보답으로 물심양면으로 그 은혜를 갚으면서 살아야지,

어찌 남이 나를 해친다고 해서 화두만 들고 가만히 그것을 다 당할 수가 있으며, 또 남이 나에게 물심양면으로 은혜를 베풀었을 때에는 그것을 반드시 보답을 해야지, 화두만 들고 다 똑똑 따먹고 있을 수가 있느냐? 이건 현실적으로 안 맞는 소리다

 

출가해서 머리를 깎고 도를 닦는 스님네라면 삼륜(三輪)이 공적(空寂)해서—보시하는 것이나, 보시하는 물건이나, 받는 사람이 모두가 공적(空寂)—무심(無心)해 버리면 그것이 바로 청정(淸淨)한 것인데, 스님네는 혹 그럴 수가 있다 하지만,

세속에서 사는 사람이 어떻게 화두만 들고 그렇게 한다면 다른 사람이 볼 때 미쳤다고 하거나 모자란다고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영 똑똑 따먹고 다시는 보답하는 법이 없으면 그 사람은 아주 숭악한 욕심쟁이라고 할 것이 아니겠느냐?’

 

또 현실적으로 보면 그런 점도 있습니다. 있으나, 화두를 드는 마음으로 또 물질적으로 보답을 할 때는 하고,

또 상대방이 나를 해(害)를 치면 지혜롭게 방어를 하되 원수의 마음을 가지고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으로 대처를 하지 말고, 그 상대방이 나를 해를 가하되, 퍼뜩 화두를 들고서 먼저 이성에 입각해서 대처를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화두를 놓쳐 버리면 감정에 떨어져 버리니까, 화두를 한 번 탁! 챙길 수 있는 여유만 있어도 우선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자기의 중심을 찾고서 모든 사리를 판단하게 되고 처리하게 되니까,

그리만 되어도 얼마나 훌륭한 일이며, 얼마나 지성인다우며, 얼마나 부처님 제자다우냐 이것입니다. 

 

말은 쑥떡 같이 해도 듣기를 참! 진수성찬으로 잘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옳게 일러 주어도 사사건건이 삐뚤어지게 받아들이고 이상하게 해석을 붙이면 그건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질문을 하되 현명한 답을 하게 되고, 어리석은 사람은 현명한 질문을 하되 어리석게 답을 하게 됩니다.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또 이 산승이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듣기를 잘 들으셔야 합니다. 듣기를 잘 들어야 그것이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도를 닦아 가는데 좋은 채찍이 되고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못 들으면, 이것이 자기의 분별심과 번뇌의 불에 섶을 가하는 격이 되고 말 것입니다.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하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라. 마음에 얻으면, 마음에 도리를 얻으면 손에 응하고,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다. 겨울이 되면 눈 내리고, 가을이 되면 밝은 달이 뜨며, 봄바람이 불면 아름다운 꽃이 피어서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 가더라.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인데, 아침마다 새벽마다 닭은 오경(五更)에 울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봄이 오매 곳곳이 산에 아름다운 꽃이 울긋불긋 피더라.

 

무슨 색상을 보던지 무슨 소리를 듣던지, 그 보고 듣고 생각하는 데에 그 본질을 잃어버리면,

일상 생활하는 것을 그것이 다 복잡하고—밥해 먹고 옷 빨아 입고, 남편을 섬기고 자녀를 모두 돌보아주고, 살림을 꾸려나가고 세간살이를 해 나가고 한 것이 그것이 모두 복잡하고 그것 때문에 공부가 못한다 해 가지고, 그런 일용을 갖다가 다 버려버리고 따로 어떠한 특별한 생애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벌써 ‘가정 생활 그것이 공부에 방해가 되고, 그런 것들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집안 식구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그것이 다 업으로 만나는 원수 것들이다’ 이러한 생각이 속에서 뽁짝뽁짝 일어난 때에는 벌써 그 사람 공부가 잘 안되는 때거든.

화두를 놓쳐 버리고 공부가 안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속에서 막 퍼일어나 가지고 ‘어떻게 해야 이것을 벗어날꼬?’ 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님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평과 불만이 속에서 일어나 가지고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어디로 갈까? 떠나 버릴까, 휘저어 버릴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날 때에는 벌써 공부가 안되는 때거든.

공부가 안되기 때문에 그 뜻을 얻지를 못해. 그 뜻을 얻지를 못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는 것이 그렇게 나를 갖다가 뒤흔들거든.

 

그 근원을 얻으면—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바로 거기에서 탁! 자기의 근본으로 돌아올 수 있으면 자기의 근원으로 돌아온다면, 모든 기회와 모든 경계상에서 바로 그놈을 막 잡어 쓸 수가 있는 거여.

 

세수할 때는 세수한다고 그놈이 어디로 갈 거냐 그말이여.

먹을 때는 어디로 가? 그 먹는 놈 내놓고 그게 어디로 갈 거냐 그말이여.

비를 들고 마당을 쓸 때는 쓰는 놈 내놓고 어디 가서 찾느냐 그말이여.

 

바로 뜻을 얻어 가면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모든 색상(色相)이 바로 그것이 부처님 진신(眞身)이요.

이 세상에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는 일체가 다 법신불(法身佛)의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냐 그말이여.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찾다가 저 죽는다” 그런 말씀이 있는데, 바로 그놈을 내놓고 따로 찾으면 그 무엇이 나올 거냐 그말이여.

 

이건 너무 가까워서—무슨 물건을 잃어 버렸을 때 자기 손에 쥐고 찾는다든지, 바싹 바로 자기 무릎 밑에 코앞에 있는 것을 놔두고 저 멀리 찾으면 그건 찾을 수가 없는 거여.

흔히 가까운 데다 놓고 멀리 찾다가 시간을 낭비하는 수가 있는데, 우리가 우리의 자성(自性)을 찾는 데에도 언제나 가까운 데에 있는 것입니다. 가까운 데 있는데 그놈을 멀리 찾으면 그건 없거든.(36분38초~57분5초)

 

 

 

 

 

(2)------------------

 

‘가까운 데에 있으니까 찾다가 저 죽는다 했으니, 찾지 아니하면 언제나 거기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공부할 게 뭐 있느냐. 눈에 볼 때는 보는 놈이고, 귀로 들을 때는 듣는 놈이고, 무슨 생각을 할 때는 생각하는 놈 그놈인데 무엇을 찾을 거 뭐 있느냐.

그렇다면 뭐 참선도 군더더기고 찾는다는 자체가 틀려 버렸다니까, 안 찾고 고대로 놔두면 언제나 거기 있다’ 그 일리가 있는 말 같지만,

 

찾다 찾다가 아주 목숨을 바쳐서 찾고, 찾다가 찾다가 해 가지고 ‘찾는 놈’과 ‘찾으려는 놈’과 일체가 하나가 되어서 그래 가지고 ‘찾는다’는 생각까지 끊어지되,

그 속에서 알 수 없는 의단이, 의관(疑觀)이 한담(寒潭)에, 파도 없는 못에 뚜렷한 달이 턱! 박히듯이,

 

알 수 없는 의단이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한 가운데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가지고, 독로하되 거기에도 빠지지 말고 오직 의단만이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독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가지고,

거기에서 그놈이 타파(打破)되어 가지고 그런 뒤에 바로 보는 놈이요, 듣는 놈이요, 생각하는 놈이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총가옹(摠家翁)으로 이렇게 되는 것이지,

 

그러한 고비를 넘지 아니하고 의리(義理)로, 들은 풍월(風月)로,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 ‘찾는 놈이 그놈이고, 듣는 놈이 그놈이고, 바로 이거 말하는 놈이 이놈이다’

이러한 생각 가지고는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생사해탈도 아니요, 견성도 아니고 그러한 것은 의리선(義理禪)도 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우리는 화두를 거각(擧却)을 해 가지고, 화두를 갖다가 여법(如法)하게 참구(參究)를 해서 화두 공안 타파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원래 화두라고 하는 것이, 자연 발생적으로 ‘대관절 이 인생이란 게 무엇이냐?’ ‘대관절 이 '내'라는 게 무엇이냐?’

 

형식적으로 화두를 어디서 타 가지고 그놈을 형식적으로 ‘이뭐꼬? 이뭐꼬?’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까닭도 없이 ‘대관절 이 인생이란 게 뭐냐?’ 자나깨나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자연 발생적으로 속에서 불타듯이 분심과 신심과 의단이 한데 뭉쳐서 돈발(頓發)을 해야 할 것입니다마는,

 

우리는 중생의 근기가 미약해 가지고 이 3가지 요소가 한목 돈발하지를 못하고 또 일시적으로 돈발하되 이것이 오랫동안 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좋은 도반들과 서로 같이 방(榜)을 짜 가지고 또 선지식(善知識)에 의지해서 선지식의 지도하에서 가끔가끔 법문을 들으면서 서로 서로 경책(警策)을 하면서 해야만,

힘이, 그 정진하려는 그 분심이 그런대로 지속이 되고 퇴타(退墮)를 하지 않고서 한 철 두 철 이렇게 알뜰히 해 나가다 보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이 한목 이렇게 일어나는 때가 꼭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은 화두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성성하게 들려서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계속해서 해 나가면 결국은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를 타파했을 때에 선지식의 점검을 받아서 이것이 옳은 경계인가 아닌가? 이것 체중현(體中玄)에 떨어진 것인가? 그것을 점검을 받아서 나아가야지,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소견이 난 것을 속으로 딱 깊이 간직하고 그것을 지켜 나가고, 말하자니 자신이 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그러니까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속으로 딱 그놈을 들여다보고 앉었으면 그건 큰 공부는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일신상으로 마음 편안한 것을 얻으려는 그러한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제도해서 온 법계가 부처님으로 가득차게 될 때까지 우리의 수행은 계속되어야 하고 우리의 과제는 계속 풀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원대한 큰 원(願)을 가지고 우리는 정진하는 사람이라, 조끔 무슨 얻은 소견 그것을 가지고 만족함을 삼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나 자신도 수행 과정에 있는 사람으로 내 일이 참 바쁘고, 이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누구 다른 사람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이 법상에 올라 와서 말 할 분상도 아니지만,

전강 조실 스님의 은혜와 불조의 은혜와 여러 신도분들의 은혜가 지중해서 분에 넘치는 일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법상에 올라와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간곡히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이 말은 여러분 들으라고 하기 보다는 나 자신을 향해서 항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입 밖으로 울려 나가 가지고 여러분의 귀에 들려서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공부해 나가시는 데에 도움이 되신다면 이것은 뜻 밖에 공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법(法)에는 승속(僧俗)이 없고, 남녀가 없고, 노소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대중 스님네와 보살님네, 연세가 많다고 해서 양보를 하시지 말고, 여자라고 해서 양보를 하지 말고, 이제 금방 출가한 사미승(沙彌僧)이라고 해서 양보를 하지 말고,

각기 다 장부(丈夫)의 기상을 가지고 어서 속히 도를 이루어서 이 산승(山僧)을 제도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오늘은 해제날이요, 또 정월 대보름이 되어서 또 백일기도 회향이고, 그래서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 천도 법요식(薦度法要式)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대광명 양정모 거사의 부친이신 정태진 영가의 특별 천도를 하게 됩니다.

그 천도재를 위해서 재자(齋者)가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께 대중공양(大衆供養)을 올리게 됩니다. 검소한 사중의 공양이지만 어쨌든지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점심 공양을 잘 하시고,

 

또 이 법요식에 어쨌든지 화두를 들고 작관을 해서 우리의 선망부모와 또 오늘 천도재를 올리는 이 정태진 영가, 여러 영가들이 오늘 해제를 기해서 무량억겁의 모든 업이 봄눈 녹듯이 다 녹고,

모든 인간 세상에 있어서의 애착과 미련을 깨끗이 다 끊어 버리고 그래 가지고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往生)하시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을 합니다.

 

인간의 애착(愛着)—아내가 남편, 남편이 아내,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자식이 부모에 대해서, 모두 애착으로 얽혀서 우리는 이렇게 몸을 받아 나고 또 이렇게 유전(流轉)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인간 세상에 애정이 없다면 참! 부모 자식도 아니요, 남남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면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또 생사유전(生死流轉)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소승(小乘)에 있어서는 목적이 태(胎) 속으로 안 들어가는 것을 구경(究竟)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태중(胎中)으로만 들어가면 태어나게 되고, 태어나면 생노병사가 있어 가지고 생사윤회를 하게 되기 때문에 열반의 경계에 탁 머물러 있어 가지고 멸진정(滅盡定), 그 멸진정에 들어가 가지고 영원히 뱃속으로 안 들어가는 거여.

 

어머니 뱃속으로만 들어갔다 하면 태어나야 하고, 태어나면 또 병들어 늙어서 죽어야 하니까,

어쨌든지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아니하고 완전 무심의 경계를 거쳐서 멸진정에 들어가 가지고는 탁 그 속에 잠겨 있으면 다시는 태 속에 들어갈 이유가 없거든. 이것은 소승의 경계로써,

 

부처님께서는 “차라리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할지언정 소승심은 내지 말어라” 그러셨거든.

 

대승법, 최상승법은 생사(生死) 속에서 ‘생사가 본래 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이여.

생사를 피해 가지고 열반을 구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눈에 생사로 보이는 이 생사 속에서 바로 생사 없는 도리를 요달(了達)해 버리는 거여.

 

그래서 사람이 되거나 짐승이 되거나, 지옥에 가거나 천당에 가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바로 그것이 해탈(解脫) 경계가 되도록 그러한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고,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처음 공부 시작할 때부터서 벌써 사상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피해 가지고 조용한 것을 구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시끄러운 속에서 바로 ‘시끄러운 것 자체가 시끄러운 것이 아닌 도리’를 요달해 버리는 거여.

 

그 도리 요달하려는 방법이 바로 그 시끄러우면 시끄러운 속에서 화두를 탁! 들어 버리거든.

이렇게 모든 생각, 모든 경계, 모든 시간에서 그렇게 자기를 잡드리를 해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원수는 싸움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57분6초~73분36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 ;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을 말한다.

아승지겁(阿僧祇劫)은 보살이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 수행하는 아주 긴 시간. 이 수행의 기간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이라 한다.

*오십오위(五十五位) ; 처음 건혜지(乾慧地)를 지나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사가행(四加行)·십지(十地)를 하나하나 거쳐서 올라가야 성불하게 된다는 말.

*점차(漸次) ; 시간이나 차례에 따라 조금씩.

*등각(等覺) ; ①등정각(等正覺), 금강심(金剛心), 일생보처(一生補處), 유상사(有上士). 보살의 지극한 지위이지만 지금부터 묘각(妙覺)의 불과(佛果)를 얻으려는 지위. 불과(佛果)를 얻을 수 있는 지위. 부처님의 깨달음과 거의 같은 깨달음이라는 뜻. ②부처의 다른 이름.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이 평등하다는 뜻. 평등각(平等覺).

*묘각(妙覺) ; ①부처님의 불가사의 무상(無上)의 깨달음. 절묘한 깨달음. 깨달음 그 자체. 구경각(究竟覺).

②보살이 십지(十地), 등각(等覺)의 수행을 마치고 마침내 부처님의 과위(果位)를 얻는 것. 스스로의 깨달음과 남을 깨닫게 하는 자각(自覺)과 각타(覺他)의 각행(覺行)이 원만하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을 말한다.

*삼성(三性) ; 모든 현상의 성질을 윤리적 측면에서 선(善), 악(惡), 무기(無記)로 나눈 것.

①선(善) ; 산스크리트어 kuśala 올바르고 청정하여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이익이 됨. 궁극적인 진리에 따름.

②악(惡) ; 산스크리트어 pāpa 올바르지도 청정하지도 않아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됨. 궁극적인 진리에 따르지 않음.

③무기(無記) ; 산스크리트어 avyākṛta 선도 악도 아닌 것. 또는 그러한 마음 상태.

*단속(團束) ; ①주의를 기울여 다그쳐 보살핌. ②규칙, 법령, 명령 등을 어기지 않게 통제함.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생멸심(生滅心) ; 변화 동요하여 그치지 않는 마음.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생사유전(生死流轉)중생 불교 근본 원리 통달하지 못하여 죽음  끝없이 되풀이하는 .

*전가(轉嫁 돌릴 전, 떠넘길 가) ; 잘못이나 책임 등을 남에게 떠넘겨 덮어씌움.

*삼륜공적(三輪空寂) ; 타인에게 물건을 줄때, 실체가 공(空)한 것을 관(觀)하여 보시에 집착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 ‘시자(施者 베푸는 사람) · 수자(受者 받는 사람) · 시물(施物 보시한 물건)의 3륜(輪)이 모두 본래 공(空)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함. 삼륜체공(三輪體空),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고도 함.

*무심(無心) ; ①아무런 생각이나 감정이 없음. ②세속적 욕망이나 가치 판단에서 벗어난 마음 상태.

*청정(清淨 맑을 청, 깨끗할 정) ; 허물이나 번뇌가 없이 깨끗함.

*숭악하다 ; ‘속이 응큼하다(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엉뚱한 욕심을 품고 있거나 음흉陰凶하다)’ ‘흉악凶惡하다(성격, 언행이 모질고 악랄하다)’의 사투리.

* 붙어 있는 땔나무 잡목 잔가지잡풀 따위  땔나무  통틀어 이르는 .

*(게송) 득지재심응재수~ ; [금강경오가해]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오경(五更) ; ①하룻밤을 초경(初更)에서 오경(五更)까지 다섯으로 나눈 시각을 아울러 이르는 말.
②하룻밤을 다섯 시기로 나누었을 때의 다섯째 부분.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이다.

*진신(眞身) ;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를 뜻함. 법신(法身).

*법신불(法身佛)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즉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2)

 

*의관(疑觀)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 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좌선할 때 자타(自他)의 대립이 끊어져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경계.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두두물물(頭頭物物) ; 온갖 사물과 현상.

*가옹(家翁) ; 집안의 주인(主人). 주인공.

*의리(義理)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거각(擧却 들 거, 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참구(參究 헤아릴 참, 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방(榜) ; 용상방(龍象榜)을 말함.

[참고] 용상방(龍象榜) ; 절에서 하안거 동안거 결제 때나, 큰일을 치를 때에 각자 할 일을 정해 붙이는 명단. 행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붙여서 각자가 맡은 일에 충실하도록 한 것이다.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경책(警策 깨우칠 경, 채찍 책) ; 타이르고 채찍질하여 깨우치게 하는 것.

*퇴타(退墮 물러날 퇴, 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승속(僧俗) ; 스님과 스님이 아닌 속인(俗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사미(沙彌) ; 산스크리트어 śrāmaṇera 팔리어 sāmaṇera의 음사. 근책(勤策)·구적(求寂)이라 번역. 출가하여 십계(十戒)를 받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비구(比丘)가 되기 전의 남자 수행자.

십계는 살생·도둑질·음행·거짓말·음주뿐만 아니라, 때가 아닌 때에 식사하는 것, 춤과 노래를 보고 듣는 것, 향수를 바르고 몸을 단장하는 것, 높고 큰 평상에 앉는 것, 금은 보물을 지니는 것 등을 금지하는 10가지이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장부(丈夫) ; ①참선하는 수행자. ②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③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천도 법요식(薦度法要式)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 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 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재자(齋者) ; 절에 재(齋)를 올리거나 불공(佛供)하러 온 사람.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참고] 우바새—upasa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남자. 우바이—upasi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여자.

*대중공양(大衆供養) ; ①수행자에게 음식을 올리는 일. ②대중이 함께 식사하는 일.

*왕생(往生)죽어서 다른 세계에 가서 태어남. 이 세상에서 쌓은 공덕으로 죽어서 정토에 태어남. 염불한 공덕으로 죽어서 극락에 태어남.

*애착(愛着) ; 사랑하여 집착함. 애집(愛執).

*생사유전(生死流轉) ; 깨달음, 붓다의 지위에 도달하지 못한 중생이 무명, 번뇌에 의하여 생사 인과가 단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삼계육도(三界六道)를 계속해서 윤회하는 것. 윤회(輪廻)라고도 한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 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멸진정(滅盡定) ; ①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을 소멸[滅盡]시켜 무심(無心)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선정.

②무소유처(無所有處)의 경지에 이른 성자(聖者)가 모든 마음 작용을 소멸시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닦는 선정(禪定).

멸진정은 무색계의 4천 중 제3천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번뇌를 이미 떠난 상태에서 닦는 선정이기 때문에, 그 경지가 거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적정(寂靜)에 비견된다.

멸정(滅定)·멸진등지(滅盡等至)·멸진삼매(滅盡三昧)·상수멸정(想受滅定)·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 한다.

*요달(了達 마칠•완전히 료/통달할 달) ; 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해탈(解脫) : [범] Vimoksa ; Vimukta ; mukti  [파] Vimokha ; Vimutta ;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또는 열반(涅槃)의 딴 이름으로도 쓰인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Posted by 닥공닥정
기도2014. 9. 21. 17:19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111) 경절문(徑截門) 기도법—원인과 결과가 동시 / (게송)좌간백운청수성~ / 대오선(待悟禪) / “찾다가 저 죽는다” / 육도법계가 바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깨달음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진묵겁(盡墨劫) 전에 이미 깨달음,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부처님과 조끔도 차별 없는 진여불성을 우리도 원만구족(圓滿具足)해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구족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한 생각 딱 돌이키면—어디서 깨달음이 오는 것도 아니요, 누가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 곳에 이미 있는 것입니다. 원만구족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항시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너무나도 간결하고 송곳으로 찌르듯 하는 그러헌 법문을 해 주신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라도 진여불성 아닌 것이 없고 법신불(法身佛) 아닌 것이 없건만, 왜 볼려고 허면 볼 수가 없고, 들을려고 허면 들을 수가 없느냐? 우리 모두에게 진묵겁 전부터서 원만구족해 있으면서 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를 못하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이냐?
육도법계(六道法界)가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시기 때문에 육도(六道)를 여의고 적광토(寂光土)는 따로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뭣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요긴한 길은 오직 이 한마디 밖에는 없습니다.


**송담스님(No.111) - 79년 동지 법회(79.12.22) (용111)

 

(1) 약 19분.

 

(2) 약 6분.


(1)------------------

법요식을 맞아서 전강 조실 스님의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듯 한 그리고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은 종횡무진한 활구(活句)법문을 우리 사부대중은 들었습니다.

이 법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로 듣는 그것만으로써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사부대중은 무량겁 업장(業障)이 찰나간에 다 녹아 없어졌습니다.
무량겁 업장이 녹아 없어졌기 때문에 동지 법회에 참석하신 동참하신 여러분은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시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장차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것입니다.
법문(法門)을 듣자마자 업장이 소멸이 되고, 업장이 소멸됨과 동시에 모든 소원은 그 자리에서 당장 성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소원을 앞으로 차츰차츰 쪼끔씩 성취되어 간다고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미 성취가 다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경절문(徑截門)에 있어서의 기도법인 것입니다. 경절문은 비약적인 것이요 점진적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무엇을 듣고 이해를 해 가지고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는 것—그것은 점진법이고 점진적인 것이고,
한 생각에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여래지(如來地)에 도달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경절문인 것입니다.

경절문은 시간과 공간이 없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동시(同時)인 것입니다.
어떠한 원인이 있어 가지고 어떤 시간을 거쳐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자 동시에 그것이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허신 분은—‘참선을 해 가지고 언젠가 내가 깨달으리라’ 하루바삐 깨닫기를 바래고 바래는 마음으로 화두를 들고,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딱! 화두 한번 거각(擧却)할 때 그곳에는 버려야 할 중생도 없고, 새로 깨달라야 할 부처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화두를 들더라도, 한 번을 들더라도 그렇게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졸음이 어디에서 오며, 망상이 어디에 일어날 것이 있는 것입니까?

 


좌간백운청수성(坐看白雲聽水聲)허니  도로성색본가풍(都盧聲色本家風)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륜상월만공산(一輪霜月滿空山)한데  한안여천향북비(寒雁唳天向北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좌간백운청수성(坐看白雲聽水聲), 앉아서 흰구름을 보고 물소리를 들으니,
도로성색(都盧聲色)이 본가풍(本家風)이로구나. 모든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경계가 본래 가풍이로구나.

일륜상월(一輪霜月)이 만공산(滿空山)한데, 한 바퀴 서릿달이 공산(空山)에 가득한데,
한안(寒雁)이 여천향북비(唳天向北飛)로다. 차운 기러기가 하늘에 울며 북쪽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우리는 깨닫기를 위해서 참선을 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깨닫기를 위해서 참선을 하고,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장차 자기가 바래는 일과의 사이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시간적인 거리, 공간적인 거리가 있습니다.

벌써 거리를 두고 기도도 하고 참선을 하고 그러기 때문에 그 거리로 인해서 장벽이 가로막혀 가지고, 현재 하고 있는 그 자체도 정말 올바르게 해 가지를 못하고,
올바르게 해 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소원성취가 어렵고 목적지에 도달허기 어려운 것입니다.

시간적인 거리와 공간적인 거리를 자기가 만들어서 딱 가로막아 놓고서 아무리 갈려고 발버둥을 친들 그것이 될 것이냐 이 말씀입니다.

참선허는데 있어서 제일 몹쓸 병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오선(待悟禪), 「어서 깨달랐으면...」

깨닫기를 바래는 그것이 설사 밤잠을 안 자고 용맹정진을 해서 화두가 제법 일여(一如)하게 들린다 하더라도, 모든 번뇌와 망상이 다 없어지고, 맑고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찰나간이라도 「어서 깨달랐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와서 탁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셨으면..」
이러헌 생각을 먹게 된다면 이것은 바로 애써서 99%까지 올라갔다가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다시 저 천길 만길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깨닫기를 바래는 마음, 「어서 속히 어떠헌 목적을 성취했으면..」 그런 생각은 허지 말고,
오직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 무엇고?」
공부가 잘 되어갈수록 「이 무엇고?」 조끔도 잘 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또 잘 안 된다고 번뇌심이나 짜증도 내지를 말고,

오직 한 생각 한 생각, 산을 보든지, 물소리를 듣던지, 새소리를 듣던지, 기차 소리를 듣던지, 애 우는 소리를 듣던지, 문닫는 소리를 듣던지,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한 생각 한 생각 바로 거기에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나 「옴마니반메훔」을 부르는 그러헌 수행을 하시는 분은 누워서도 「관세음보살」, 앉아서도 「관세음보살」, 차를 타면서도 「관세음보살」, 기쁜 일을 당해도 「관세음보살」, 슬픈 일을 당해도 「관세음보살」, 속이 상한 일을 당해도 「관세음보살」,
이렇게 염념불망(念念不忘)으로 일여(一如)하게 정진을 해 간다면 아무리 업장이 두터운 업보(業報) 중생이라 할지라도 거기에서 시간과 공간의 거리가 없이 바로 그 자리에 소원성취가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진묵겁(盡墨劫) 전에 이미 깨달음,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부처님과 조끔도 차별 없는 진여불성을 우리도 원만구족(圓滿具足)해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구족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한 생각 딱 돌이키면—어디서 깨달음이 오는 것도 아니요, 누가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 곳에 이미 있는 것입니다. 원만구족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실 스님께서 항시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너무나도 간결하고 송곳으로 찌르듯 하는 그러헌 법문을 해 주신 것입니다.

다못 알 수 없는 꽉 맥힌 의심, 「이 무엇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망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앉았거나 누웠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죄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괴롭거나 쓰리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아프다고 가려 내놓고, 바쁘다고 그 시간은 가려 내놓고, 망상이 일어난다고 그 시간은 가려 내놓고,
잠잘 때라고 가려 내놓고, 속상헌다고 가려 내놓고, 기쁘다고 가려 내놓고,
이리저리 다 가려 내놓으면 언제 공부를 해야 할 때냐?

중생은 단 한 생각 동안이라도 생각 없는 시간이 없습니다.
생각 없는 편안하고 고요하고 그러헌 때를 찾어서 공부를 할려고 하면 일생 동안 공부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는 보아야 하고, 귀를 통해서는 들어야 하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아야 하고, 숨쉬어야 하고, 입을 통해서 맛보고 말을 해야 하고, 손과 몸을 통해서는 따뜻하고 차웁고 딱딱하고 부드러운 거 그런 것을 다 감각을 해야 합니다.

잠시도 육근(六根)을 쉬고 일 없는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나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활동하는 시간을 없이 하고 참선을 헐랴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토록 그 사람이 생각하는 참선은 헐 기약이 없습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너무나도 크고, 너무나도 위대하고, 너무나도 맑고 깨끗하고 영특해서,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언제나 어디에나 두루하지 아니헌 곳이 없습니다.

그 표현이 바로 우리가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요.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육근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진여불성의 표현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눈으로 볼 수 없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없고, 손을 통해서 잡을 수 없는 진여불성을 우리는 깨달라야 합니다.

왜 눈으로 코로 귀로 육식(六識)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진여불성의 표현인데,
어째서 눈으로 볼랴고 하면 보이지 아니하고, 귀로 들을랴고 하면은 들리지 아니하고, 손으로 잡을랴고 하면은 잡히지를 않는 것이냐?

우리는 목숨 바쳐서,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라도 진여불성 아닌 것이 없고 법신불(法身佛) 아닌 것이 없건만, 왜 볼려고 허면 볼 수가 없고, 들을려고 허면 들을 수가 없느냐?
우리 모두에게 진묵겁 전부터서 원만구족해 있으면서 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를 못하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이냐?

육도법계(六道法界)가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시기 때문에 육도(六道)를 여의고 적광토(寂光土)는 따로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뭣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요긴한 길은 오직 이 한마디 밖에는 없습니다.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할 때, 불이 펄펄 타오르는 지옥으로 느껴졌던 것이,
한 생각 돌이킨 곳에 바로 그것이 천당이 되고, 극락이 되는 그 묘한 방법이 바로 참선법, 활구참선법 ‘이 무엇고?’ 뿐인 것입니다.(처음~19분3초)

 

 

 



(2)------------------

동지(冬至)는 일년 중에 밤이 제일 긴 날입니다. 하지(夏至)는 일년 중에 낮이 제일 긴 날이고, 동지는 밤이 제일 긴 날입니다.

그래서 동지에는 저 옛날부터 중국의 당나라 때부터 500명, 1000명, 1500명, 1700명, 이렇게 참선하는 대중 스님네가 많은 그런 선방에서도 이 동짓날에는 다 법회를 갖고, 또 선망부모의 천도를 해 드리고,
도량(道場)의 모든 수호신들에게도 다 공양을 해서, 앞으로 새로 다가오는 새해에 모든 업장이 소멸이 되고 모든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래는 그러헌 법요식을 거행해 왔는 것이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조실 스님 계실 때도 항시 동지에는 여러분들이 모다 팥도 가지고 오시고, 찹쌀도 가지고 오시고 그렇게 해서 동지 팥죽공양을 올리고 법요식을 가졌습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동지에는 팥죽을 쑤어서 선영(先塋)에 모다 제사(祭祀)도 잡숫고, 차례(茶禮)도 잡숫고 헌 풍속이 예절이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습니다마는,

동지 법요식을 맞아서 어떻게 허는 것이 정말 우리의 선영을 천도(薦度)해 드리는 것이 되며, 어떻게 허는 것이 도량 신장(神將)을 안위하는 길이 되며, 어떻게 허는 것이 우리 자신들의 업장을 소멸하게 되는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소원을 성취허는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조실 스님의 법문과 제가 말씀드린 말씀을 통해서 잘 이해하셨을 줄 생각합니다.

묵은 한 해를 청산하고 돌아오는 새해를 발전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각오를 해야할 줄 생각합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塔在玉欄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한줌, 한아름 버들가지를 거두어 잡지 못해서,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라. 바람에 맡겨서 옥난간(玉欄干)에다가 걸어두노라.

버들가지는 바람에 일렁일렁해서 아무리 잡을라야 잡을 수가 없어. 그래서 바람 부는대로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걸쳐있게 놔둔다. 이런 내용의 게송(偈頌)입니다.

참 법문은 입을 통해서 설(說)할 수 없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헌 게송을 읊어 보았습니다.(처음~24분18초)(끝)

 

 

 



------------------(1)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진리)를 구하기 위해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경절문(徑截門 지름길 경,끊을 절,문 문) ; 지름길문. 경절(徑截)이란 ‘바로 질러 간다’는 뜻.
교문(敎門)의 55위 점차를 거치지 않고 한 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 참선법(活句參禪法). 즉 일체의 어로(語路), 의리(義理), 사량 분별의 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마음의 본체에 계합함을 일컫는다.
*여래(如來) : 부처님 10호의 하나。 범어 Tathagata의 역(譯).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여래지(如來地) ; 불지(佛地). 부처의 지위(地位)·경지(境地). '부처의 상태를 이루었다'는 뜻의 성불(成佛)과도 같은 뜻.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대오선(待悟禪 기다릴 대,깨달을 오,고요할 선) ; 참선허는데 있어서 깨닫기(悟)를 기다리는 것(待).
이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은 화두를 참구하는데 10가지 병(病)의 하나로, 수행자는 이런 생각없이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본참화두를 들어야 한다.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p163-164)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일여(一如) ;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나눌 수 없음.
*본참화두(本參話頭) :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옴마니반메훔 ; 자비의 화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성스러운 자비(慈悲)를 나타내는 진언(眞言)으로 ‘오! 연꽃 속의 보석이여!’라는 뜻이다. 여기서 보석은 자비의 상징이고, 연꽃은 지혜·깨달음의 상징이다.
산스크리트어 oṃ maṇi padme hūṃ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 육자진언(六字眞言)이라 한다.
이 진언을 외우면 관세음보살의 자비에 의해 번뇌와 죄악이 소멸되고, 온갖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된다.
*업보(業報) ; 자신이 행한 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게 되는 과보(果報).
*진묵겁(塵墨劫) ; 티끌이 쌓여 먹(墨)이 될 만큼의 오랜 시간.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원만구족(圓滿具足)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법신불(法身佛)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즉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적광토(寂光土) ; 상적광토(常寂光土). 상적광(常寂光). 법신불(法身佛)이 머무르는 정토(淨土).
상적광토는 이상(理想)과 현실(現實), 정(靜, 寂)과 동(動, 光)의 본래(本來, 常) 일체(一體)인 세계로 그것은 여기와 저기,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넘어 체득되는 참된 절대계(絕對界)이고, 법신불의 상주(常住)의 정토(淨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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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道場) : [범] bodhimandala 도를 닦는 곳이란 말이다。습관상 「도량」으로 발음한다.
*선영(先塋) ; 조상의 무덤. 또는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
*제사(祭祀) ;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나타냄. 또는 그런 의식.
*차례(茶禮) ;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의 낮에 지내는 제사.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망자의 넋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신장(神將) ;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신장. 또는 《화엄경》을 보호하는 신장.
*(게송) ‘一把柳條收不得  和風塔在玉欄干’ ;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 제23권 황정견(黃庭堅)거사 게송 참고.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