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구참선 최상승법2015. 10. 3. 18:42

 

 

§(212) (게송)백운아향만리표~ / 정법(正法) 위태로움 / 육조 스님의 남악회양 선사 인가. 활구참선 /  아내(육신, 재산, 부모형제, 마음) 비유.

 

남악회양 선사 같은 도인(道人)은  숙세에 선근종자(善根種子)로  전생에부터서 많이 닦으신 그러한 도인이 태어나셨겠지만 그래도 8년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이 걸린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근기(根機)가 박약(薄弱)한 우리 말세(末世) 중생들은 8 아니라 80년이라도 지루한 생각을 갖지 말고 목숨을 바쳐서  화두(話頭)에 대해서 참구(參究)를  나가야  것입니다.(용212)

 

**송담스님(No.212)—83 9 첫째 일요법회 (1983.9.4) (용212)

 

(1) 약 19분.

 

(2) 약 19분.

 

(1)------------------

 

백운아향만리표(白雲兒向萬里飄)한데   종래불망청산부(從來不忘靑山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내하유자부지환(乃何遊子不知還)허고   장재미도축풍파(長在迷途逐風波)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백운아향만리표(白雲兒向萬里飄)한데  종래불망청산부(從來不忘靑山父)로구나.

백운(白雲)이라고 하는 자식이 만리의 바람에 나부끼는데, 원래 백운은 청산에 의지해서 뭉쳐서 있다가 바람이 부니까  바람에 실려서  만리 하늘에 나부껴 날아갔다 그말이여.

종래불망청산부여. 그렇게 바람에 불려서 만리 하늘을 떠내려갔지만  백운은 항시  마음속에는 자기가 본래 놀며 의지하며 살고 있던  푸른 산을 마음속에는 잊지를 않고 있더라 그말이지.

 

내하유자부지환(乃何遊子不知還)인데, 어째서 무슨 일로  백운은 청산으로 다시 돌아올 줄을 모르고,

장재미도축풍파(長在迷途逐風波)로구나. 길이길이 자기 본래 살던  청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타향으로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을 이리저리 바람 따라서 물결 따라서 떠돌이 신세가 되어있구나.

 

우리는 본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처럼 본래는 똑같은 본각(本覺)의 경지에 있었습니다.

새로 닦지 아니하고, 닦을 것도 없이 본래 깨달아져 있는 그러한 본각성(本覺性)이었건마는  생각 잘못 일어나는 것이 동기가 되어서 풍파에 나부껴 가지고 무량겁을 동서사방 육도(六途)를 돌고 돌면서 오늘에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래  부처님과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집에서  자리에서 기거를 같이 하고 생활을 같이 했건마는 그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이렇게   자리로 돌아갈 줄을 모르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이렇게 돌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 바람이 그칠런지, 바람이 부는 한에 있어서는 동풍이 불면 서쪽으로 날아가고, 서풍이 불면 동쪽으로 날아가고, 북풍이 불면 남쪽으로 몰려가고, 남풍이 불면 북쪽으로 나부껴서 동서사방 정처가 없습니다.

 

쪼끔 착한 일을 하면 천당에 가고, 악한 일을 하면 지옥에 가고, 축생도 되었다 인간도 되었다인간으로 태어나되   살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 착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악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마치 우리의  존재가 청산을 떠난 흰구름과 같이 그렇게 비유를 해서 읊은 게송입니다.

 

 

부처님께서 삼천 년 전에 가비라(迦毘羅) 왕국의 태자로 태어나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설산에 들어가서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팔만사천(八萬四千) 묘법(妙法) 설하시고,

그래가지고 삼처전심(三處傳心)을 해서 현재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오늘날까지 이렇게 면면(綿綿)히 전해오고 있습니다마는,

 

삼천 년이라고 하는  세월 동안에 부처님께서 전하신  정법(正法)은 실오라기처럼 위태로운 썩은 사내끼에 매달려 있는 바윗돌과 같이 언제  썩은 새끼가  끊어져 가지고  바윗돌이 땅에  떨어질른지 모른 그러한 위급한 상황 속에 불법이라고 하는  맥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불교가 동양에 여러 나라에 전해 내려오고  경전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번역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있지마는,

참으로  불법에 등등상속해서 내려오는  법맥(法脈)이라고 하는 것은 실오라기만큼 그러한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금방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육조(六祖) 스님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은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마는 육조 스님께서 대중을 향해서 물으시기를,

 

여기에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떠받고 아래로는 땅을 기둥하며,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냥도 그릴 수가 없다. 항상  동용(動用)하는 가운데에 있으되 동용하는 가운데에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는 제불지근원(諸佛之根源)이며 신회(神會)의 불성(佛性)이로소이다.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고  하택  자신의 불성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꾸짖으시기를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냥도 그릴  없다고 내가 그랬거늘 어찌 제불의 근원이니, 하택의 불성이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고? 네가 앞으로 커서 공부를 열심히  가지고 설사 네가  스님이 된다 하더라도 너는 마침내 지해종사(知解宗師) 밖에는 되것다

 

지해종사라 하는 것은이론적으로 불법을 공부하는 학자나 강사 그러한 알음알이로 불법을 해석하고 강론하고 그러한 지해종사 밖에는  되것다 이렇게 점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남악회양 선사가 육조 스님 앞에 와서 절을 했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고 물으니까, 남악회양 선사는 망지소조(罔知所措)여.  맥혀 가지고 뭐라고 대답을  수도 없고 완전히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래가지고 물러 나와서 8년 간을 대관절  무슨 물건인가?’    없는 의심이 가슴속에 북받치는데  맥혀서 대관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무슨 물건인가?’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이틀을 그렇게 지내고,  달을 그렇게 지내고 1년 이태 3년을 그렇게 되아 8 만에사 ! 깨쳤는데, 육조스님 앞에를 갔습니다. “제가 깨달랐습니다

 

깨달랐으면 어디 일러봐라

설사일물(說似一物)이라도 즉부중(卽不中)입니다. 설사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할 것이 있느냐?”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할 것은 없지 아니하나 더럽히고 물들인 것은 없습니다. 오렴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러니라 이렇게 해서 쾌히 인가(印可)를 하시고 법(法)을 남악회양 선사에 전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는 것은 제불의 근원’이니, 무슨 나의 불성’이니 그렇게 이론으로 따지고  길이 있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있고, 이렇게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공부해서 그럴싸한 결론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알음알이요 사량분별(思量分別)을 떠나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맥혀서 답답해  수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가자니 은산철벽(銀山鐵壁)이 가로막고 있고, 뒤로 물러서자니 천길만길 절벽이라,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  수도 없고 다못  맥혀서   없어.

 무엇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앉으나 서나 밥을 먹으나 옷을 입으나 이렇게 해서 일체처 일체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정진을 다져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남악회양 선사 같은 도인(道人)은  숙세에 선근종자(善根種子)로  전생에부터서 많이 닦으신 그러한 도인이 태어나셨겠지만 그래도 8년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이 걸린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근기(根機)가 박약(薄弱)한 우리 말세(末世) 중생들은 8 아니라 80년이라도 지루한 생각을 갖지 말고 목숨을 바쳐서  화두(話頭)에 대해서 참구(參究)를  나가야  것입니다.

 

그만한 공력과 그만한 끈기와 그만한 노력이 없이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어떻게 기약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해서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 만진 것보다도  쉽다’ 이렇게도 쉬웁기로 말하면 그렇게 쉬웁다고 표현을 하셨지만,

 

어렵기로 말하면은   말을 갖다가  알씩을  나무 뿌럭지 있는 데서부터서 굴려서   길이나 되는 나무 꼭대기까지 굴려서, 그 나무의 몸뚱이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씩 하나씩을 굴려서 나무 꼭대기에다 올려다 놓고,

다시 또 내려와서 깨 한 알을 갖다가 뿌리에서부터 굴려서 올려 가지고 저 꼭대기에 갖다 놓다가, 중간에 잘못해서  떨어지면 다시 뿌리부터서 굴려 올리고 그래서  한 말을 굴려 올릴 만큼.

 

그것이 얼마나 공력을 드려야—그 하나를 평면으로 굴려 올린다면 모르지만, 서 있는 나무에 굴려서 올린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시라 그말이여. 그만큼 공력과 끈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겠다고 출발을 했지만 중도에서 물러서거나 중도에서 쉬어버리거나 또는  길로 빠지거나 이러기가 십상(十常) 쉽고, 끝까지 나아가서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그렇게 흔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까딱하면 중간에 어떠한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해태심(懈怠心)을 내기도 하고 그래가지고 한결같이 쉬지 않고 나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항시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 모시고 법문(法門)을 들어야 하고,  좋은 도반들과 항시 같이 수행을 해 나가야,

내가 혹시 해태심이 나거나  생각을 내더라도 도반(道伴)으로부터 경책(警策)을 받고 선지식으로부터 법문을 들어서 그러한 위기를 면하면서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처음~192)

 

 

 

 

(2)------------------

 

옛날에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거사(居士)가 있었는데 그때에  거사는  사람의 아내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사람을그때 당시는 일부다처제로 아마 부인을 첫째 부인, 둘째, 셋째, 넷째  사람 능력 따라서 여러 부인을 거느리고  수가 있었던지  사람의 아내를 데리고 살았었는데,

 

 사람은 첫째 부인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앉을 때나 섰을 때나, 잠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어디 외출을  때나 일을  때나, 언제 어데서라도 잠시도  첫째 부인과 같이 붙어서 살았습니다그만큼  첫째 부인을 사랑하고 애끼고 좋아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먹는 것도  먹이고 세상에서 없는 제일 좋은 것은  먹이고,  입히고 누가 조금이나 해꼬자 할까 항시 자기  가까이에 놓고 그렇게 사랑하고 이뻐했습니다.

아마  세상에 아무리 아내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사랑하기는 어려웠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둘째 부인도 첫째 부인만큼은 못해도 너무너무 사랑해서 도대체 다른 사람이  자기 아내를 볼까 두려워서 항시 가둬놓고  아내를 사랑을 했습니다.

행여나 남이 눈독을 들일까  남이 아내를 훔쳐갈까 이래가지고 아내는 도저히 어디 밖에 내보내지도 않고, 마당에도  내보내지도 않고, 항시 자기 방이나 특실에다가  넣어 놓고 쇠통을 채워 놓고 그렇게 아내를 사랑을 했습니다.

 

너무너무 애끼고 사랑을 하고 심지어는 의처증(疑妻症)이라고  만큼  아내를 밖으로 내놓지를 않고 남이 보는 것을 그렇게 꺼려했습니다. 

 

셋째 부인은셋째 부인도 애끼는 생각도 있고 사랑하는 생각도 있고 그랬지만마음대로 밖으로도 외출하고 싶으면 하게 하고, 그렇게 날마다 보지는 아니하고 가끔 한번씩 보기만 하고 그저 수수허니 그렇게 살았습니다.

 

넷째 부인이 있었는데,  넷째 부인은 항시자기(거사)는 그렇게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지마는 넷째 부인은 그렇게 남편을 하녀가 상전 모시듯이 그렇게  따르고  명령을 복종을 하면서 그렇게 했습니다마는,

 

남편은 여간해서    명절이 되어도 해주도 않고, 그냥  그저  비슷하니 그렇게 취급만 했지 별로 그렇게 아끼지도 않고 따뜻하게  주지도 않고, 그렇게 해서  아내를 그렇게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러자  장자(長者)는 하룻날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데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가면 다시는 돌아오기가 어려울 그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째 부인을 보고 내가 이렇게 인자 가는데 다시 돌아올런지  돌아올런지  수가 없고, 나는 당신을 여의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 그러니 나를 따라서 가자”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니  마누라는 내가 평생동안 당신을 모시고 살았고, 당신도 나를 끔찍이 애끼고 사랑한 것은 사실이나 나는  따라 가겠다”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했지만  이상은 죽었으면 죽었지  따라 가겠다하는 것입니다그래  수 없이 이런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여자가 있다 말이냐”고 호통을 치고, 그래도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하는 데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둘째 부인한테  말을 했습니다둘째 부인도 당신이 나를 너무 지극히 사랑해서 평생을 참 문밖을 마음대로  나가고 가둬 놓고 키우고 그랬지만 나는 당신을 따라갈 수가 없다 둘째 부인도 거절을 했습니다.

 

그래 셋째 부인한테  말을 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그동안에 살면서 첫째와 둘째한테만 내가 주로 사랑을 쏟고 당신한테는 그렇게 사랑을  해주고 해서내가  마지막 가게 될런지도 모른   나라를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하기가 미안하나, 어디 그래도 첫째 둘째가 저렇게 배은망덕을 해서 안 가니 당신이라도  같이  수가 없겠느냐?” 사정을 하니까,

 

평생동안 괄세를 하고 첫째 둘째한테만  빠져 가지고  돌아본 채도 안 해 놓고서 어째 오늘은 나보고 아주 가자고 하냐”고, “그런 철면피(鐵面皮) 같은 소리를  수가 있단 말이냐”고나도 그렇게는  하겠다”고  잡아뗐습니다.

 

그래 마지막에 넷째 부인한테 부탁을 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당신을 하녀처럼 생각하고    변변히   것도 없고,  한번 내가 따뜻하게 만져주지도 않았는데저렇게  여자들이 저렇게 배은망덕을 하고  따라가니 도저히  혼자 가기는 도저히  수가 없고 천상 당신이 나를  따라가 줘야 하지 않겠냐?”고 하니까,

 

넷째 부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어피차 나는 일생동안 당신의 종노릇을 하면서 푸대접을 받아도 그것이 나의 팔자거니 하고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당신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내가 기꺼이 내가 따라 모시겠다 그래 가지고 승낙을 했던 것입니다.

 

첫째 부인은 국경까지는 바라다 주겠다, 둘째 부인은   방안까지 밖에는  가겠다,  셋째 부인은  마을 밖에까지 밖에는  가겠다이렇게 모다 해서 거절을 당하고 그렇게 인자 마지막 넷째 부인과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첫째 부인은 무엇이냐 하면은 우리의 육신(肉身)이라 이것입니다사람이  영혼이  세상에 태어날  육신을 받아서 태어나게 되고  그러기 때문에 일생동안  육신을 떠나서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떠나는데 육신이 따라갈 수가 없고, 육신은 결국은 영혼이 떠날  육신은 떨어져서 쓰러지면 땅에다 묻거나 불에 때우거나 하지, 육신이 절대로 영혼을 따라갈 수가 없는 데다 비교를  것이고.

 

둘째 부인은 재산에다가 비교를  것입니다육신이라 하는 것은 자나깨나 항시 같이 살고 있는 것이지만 재산은 누가 보면 훔쳐갈까, 달라고 할까 두려워서 항시 창고나  속에다 가둬 놓고 쓰기 때문에 둘째 부인은 재산에다가 비유를  것이고,

 

셋째 부인은 부모나 형제나 처자권속에다가 비교를  것이어서 가끔 만나면 좋고 그저 든든한 맛으로 그저 형제간은 그렇게 살되,  영혼이 죽은다 해서 형제간이 같이 죽어갈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런데 마지막 넷째 부인은 우리의 마음에다가 비교를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동안 살면서  마음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게 사는 것입니다.

 

 몸뚱이라든지, 재산이라던지, 부모 형제에 대해서는 온갖 인정을 쏟고 애지중지 하고,  어쩔 줄을 모르고 심지어는  육신을 위해서는 온갖 음식이다 보약이다  좋은 옷이다 화장품이다 해 가지고,

그렇게  정성을 쏟아서  육체 하나를 갖다가  가꾸기 위해서 평생동안 보호를 하고 애지중지 하지만  데로 떠나는 날에는 완전히 언제 봤던가 완전히 배신을  버리고 따라가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둘째 재산도  재산을 벌기 위해서 그렇게  피땀 흘려서 고생을 하고 밤잠을 안 자고 고생을 하고,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 알고 모르고 지은 죄가 얼마인 줄을  수가 없고 그렇지마는 죽어 가는 마당에는 재산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부모라던지 형제간이라던지 처자권속도 내가 희생을 해 가면서 봉사를 하고 그걸  먹이고  입히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쏟고 하지만,

내가 죽어 갈 때에는 부모도 어찌하지 못하고 형제간도 어찌하지 못하고 심지어 처자와 아내와 자식들도 내가 죽어 갈 때에는 나 대신 죽어  수도 없고 내가 죽을  따라 죽어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넷째에 평생에 괄세를 하고 소박을 했던 넷째 마누라는 바로 우리의 마음자리에다 비교한 것인데 마음자리 마음은 제일 소중하고 애끼고  먹이고  입혀야  넷째 마누라인데,

그것을 등한히 하고 첫째 마누라, 둘째 마누라, 셋째 마누라한테만  빠져 가지고 괄세를 했기 때문에,  셋째까지 먹여 살리느라고 죄만 퍼지었지, 마지막 가는 마당에는  죄만 짊어지고 가게 되고 아무도 따라와 주지 아니한 것처럼,

 

우리의 본성(本性)을 갈고 닦아서 과거에 지은 업(業)도 소멸하고, 새로 업을 짓지 말아야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 태어나거나,

또는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되 좋은 가문과 좋은 부모와  정법을 만날  있는 그러한 환경에 태어나서 인물도 좋고 머리도 좋고 인품도 좋게 태어나서 공부도 걸림이 없이 하고   최상승법과도 인연이 있어서 바르게 살아갈  있게 되겠지만,

 

그것을 괄세를 하고, 불고(不顧) 하고 그랬기 때문에,  마음자리를 괄세를 하고 닦지를 않았기 때문에 악도(惡道)에 떨어져서 그동안에 애끼고 가꾸고  육신이나 재산이나 부모 처자권속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특히 우리나라는 지금 부인을 하나 밖에는 갖지를 못하게 법률이 되어 있습니다마는그러한 이  명의 부인을 갖는다 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와 재산과 부모와 형제 처자권속과  우리의 본래부터 타고난  마음자리와   가지를 비유를 했을 ,

 

사실 우리는 아직도 불법을 믿고, 도를 닦고 이렇게 와서 법문을 듣지만첫째 둘째 셋째만 이뻐하고, 넷째 부인은  겨우 시간이 쪼끔 있으면 형식상으로 쪼끔 들여다본  하고 실재 마음을    있고,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분이 많이 계시다면,

이것은 불법(佛法)위태로운  썩은 새끼에 매달린 불법이위태로운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불법을 그렇게 위태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마지막 가는 길에는 여지없이 배신해 버리고 말아버릴 그러헌 첫째 둘째 셋째 부인한테만  빠져 가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고,

진짜 나를 따라가  넷째 부인한테는 그렇게 등한히 하기 때문에 마지막 떠나는 길이 그렇게 처량할 수 밖에는 없는 것처럼,

 

우리의 자성(自性) 본성(本性) 바로 그놈을 제일 애끼고 사랑하고 돌봐줘야 하고  먹이고  입혀야  터인데 그것을 괄세를 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의 장래우리 자신들의 금생은 말할 것도 없고,  내생 무량겁을 두고 처량한 신세로 객지로 육도윤회를 떠돌이  수 밖에는 없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불법의 명을 실오라기처럼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몰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193~385) 용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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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백운아향만리표~’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함허득통 설의(說誼) 게송 참고.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 ; 끝도 없이 아득히 넓고  하늘.

*본각(本覺) : 일체 중생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각성(覺性) 뜻으로서 청정한 심성(心性) 말함.

 심성은 허명(虛明)해서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본래 중생의 상념(想念) 떠나서 법계에 두루 가득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망(迷妄) 깨달음에 관계 없는 절대적인 경위(境位)이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 (, 의지에 기초한 행위)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 있다.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 vairocana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 .

①진리  자체인 법신(法身) 형상화한 . ②대일여래(大日如來) 같음."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 응보(應報)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고락(苦樂)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

*가비라(迦毘羅) 왕국 ;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 아버지 슈도다나왕(Śuddhodāna ; 淨飯王) 다스리던, 인도와 지금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 있던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 迦毘羅) 나라를 말함.

*팔만사천(八萬四千) : 법수(法數)에는  말이  많다。그것은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삼처전심(三處傳心) ; 세존이 가섭(迦葉)존자에게 마음-() 등불을 따로 전했다는  .

 곳이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다자탑전분반좌 多子塔前分半座) 첫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영산회상거염화 靈山會上擧拈花) 둘째요, 사라쌍수 아래에서  속으로부터  발을 내어 보이심(사라쌍수하곽시쌍부 沙羅雙樹下槨示雙趺) 세째이다.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

다자탑(pahuputraka) 중인도 비사리(毘舍離Vaisali) 서북쪽에 있다。이 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는데,   하나는 어떤 장자(長者)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아 이룬 뒤에,  아들  육십 명이 아버지가 공부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탑을 쌓았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곳에서 설법하실 때에 가섭존자가 누더기를 걸치고 뒤늦게 참석하자, 여러 제자들이 그를 낮보았다。이에 부처님께서 앉으셨던 자리를 나누어  분이 함께 앉으셨다 한다.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

범어의  Grdhrakuta 음대로 써서 기사굴산(闍崛山)이라 하고, 뜻으로 번역하여 영취산(靈鷲山) • 취봉(鷲峰) 또는 영산(靈山)이라고만 한다。그  모양이 독수리 같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위에 독수리가 많았던 탓이라고도 한다。이 산은 중인도 마갈타(摩竭陀Magadha) 서울 왕사성(王舍城 Raja-grha) 동북쪽  리에 있다.

부처님께서 어느   곳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부처님은  꽃송이 하나를 들어 보이니, 백만 대중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는데,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었다。이에 부처님은 『바른  열반의 묘한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다』고 선언하셨다 한다.

 

사라쌍수하곽시쌍부(沙羅雙樹下槨示雙趺) : 사라쌍수 아래에서  속으로부터  발을 내어 보이심.

부처님께서 북부 인도의 구시라(拘尸羅 Kusinagara) 서북쪽으로 흐르는 발제하(跋提河 Ajitavati) 물가, 사라수 여덟 대가 둘씩 마주  있는 사이에 침대를 놓게 하고 열반에 드시니,  숲이 하얗게 변하였다。그리하여 학의 (鶴林, 鶴樹)이라고도 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몸은 금으로 만든 관에 모시고 다시 구리로 지은 덧곽에 모셔 두었는데,  곳에 갔다가 부처님이 열반하신  7 만에 당도한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관을 3 돌고 3 절하매, 관곽 속으로부터  발을 내어 보이셨다 한다.

*등등상속(燈燈相續) ; () 중생의 무명(無明) 밝히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 비유한 ,  진리의 () 스승이  제자로 해서 계속 면면히 이어짐을 일컬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

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면면히(綿綿히 ·이어질·연속할 ) ; 역사나 전통 따위가 끊어지지 않고  잇따라.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실오라기 ;  가닥의 .

*사내끼 ; 새내끼. 산내끼. ‘새끼(짚으로 꼬아 만든 )’ 사투리.

*법맥(法脈) ; 세속에서 조상의 전래 혈통(血統) 밝히고 있듯이, 불교 선종(禪宗)에서는 스승에서 마음을 깨친 제자로 계속 이어져 전해 ,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법통(法統) 전승을 법맥이라 한다.

*육조 스님, 남악회양 선사, 하택신회 선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지해종사(知解宗師) ; 참선 공부를 알음알이로 따져서 해석하고 강론하고 공부해 가는 강사나 이론가를 말한다.

*망지소조(罔知所措 그물·근심할·없을 망/알 지/ 바·방법 소/둘·처리할·조처할 조) ; 너무 당황하거나 급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함.

*인가(印可 도장 , 옳을·인정할 )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 같은 .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리(事理)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바가 아니다’라고 .

*은산철벽(銀山鐵壁) ; 철벽은산(鐵壁銀山). 은과 철은 견고해서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높아 오르기 어려움을 나타낸 .

*천길만길(千길萬길) ; 매우 깊거나 높은 모양을 이르는 .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의단(疑團 의심할 , 덩어리 ) ; 공안·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疑心) 덩어리().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 드러날 ) ; 홀로() 드러나다().

*선근(善根) ; 좋은 과보를 받을 만한 착한 (행위. 온갖 () 낳는 근본. 청정한 행위를  근성.

*근기(根機 뿌리 /베틀 )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박약(薄弱 엷을 / 약할 ) ; ①의지나 체력 따위가 굳세지 못하고 여림. ②근거 따위가 충분하지 못하거나 모자란 데가 있음.

*말세(末世  , 세상 )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 세상,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 세상,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 세상이라고 한다.

*참구(參究 헤아릴 , 궁구할 ) ; ①다못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십상(十常) ; ①열에서 아홉일 정도로 확률이 높다는 . '십상팔구(十常八九, 열에 여덟이나 아홉 정도로 거의 예외가 없음)'에서  .

*해태(懈怠 게으를 , 게으를 )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 )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 진리에 이르는 .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 수행하는 . 불법(佛法) 닦으면서 사귄 .

*경책(警策 깨우칠 /채찍 ) ; 타이르고 채찍질하여 깨우치게 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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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居士) ; ①고대 인도에서 ·공업에 종사하던 부호②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남자 신도. 출가하지 않고 법명(法名) 받은 재가(在家) 남자.

*해꼬자 ; 해꼬지. 해코지(害코지)—남을 해치고자 하는 .

*의처증(疑妻症 의심할 /아내 /증세 ) ;  이유도 없이 아내의 행동을 지나치게 의심하는 변태적인(變態的, 정상적이지 못하거나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달라진 ) 성격이나 병적 증세.

*장자(長者) ; ①덕망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아 세상일에 익숙한 어른. ②큰 부자를 점잖게 이르는 .

*귀양 ; 예전에, 죄인을 고향이 아닌  시골이나 섬으로 보내어 일정한 기간 동안 제한된 곳에서만 살게 하던 형벌을 이르던 .

*끔찍이 ; 정성이나 성의(誠意, 진실되고 정성스러운 ) 따위가 매우 극진(極盡). --극진히 : 마음이나 대접이 매우 정성스럽게.

*배은망덕(背恩忘德) ; 남에게 입은 은혜를 잊고 배반함.

*괄세 ; 괄시(恝視 소홀히 할·푸대접 할 괄/ 볼·대우할 시)—사람을 업신여겨 하찮게 대함.

*철면피(鐵面皮 쇠 철/낯·얼굴 면/가죽 피) ; 철로 만든 낯가죽이라는 뜻으로, 염치(廉恥, 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없고 뻔뻔스러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 : [] karma []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 업이라 한다.

개인은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 윤회(輪廻)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안락국(安樂國)•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무량청정토(無量清淨土)라고도 함.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꼭대기에서 12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56 7천만  뒤에)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 뜻은 지족(知足).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로 다시 태어남.

*불고(不顧 아니 불/돌아볼 고) ; 돌아보지 않음.

*악도(惡道, 惡途) ; 악한 짓을  중생이  과보로 받는다고 하는 괴로움의 생존. 지옥아귀축생 등의 세계. 삼악도(三惡道).

Posted by 닥공닥정
법회(성도재)2015. 1. 23. 13:15

§(062) 중생의 근기, 팔만대장경, 참선법 / 방편(方便), 구경법(究竟法) / 화두 의심은 꽉 맥혀야 한다 / 참선의 자세, 호흡, 바른 생각 / 있는 그 자리에서 ‘이뭣고?’ 뿐.

 

대오(大悟), 확철대오를 얻을려면은 의심이 깊고 간절하고 커야 하는 것입니다. 「깊고 간절하고 커야 한다」고 하는 것은 꽉 맥혀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이 맥혀야 하는 것입니다.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큰 의심 아래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위대한 스승을 만나서 그 지긋지긋하고 무서운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고 위대한 정법(正法)을 금생에 만났습니다. 만나 가지고서도 열심히 닦지 않는다면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열심히 닦느냐, 닦지 않느냐’에 우리는 문제가 거기에 있을 뿐인 것입니다.

 

‘내일이 있다. 이 일만 끝나고 다음에 하지. 금년, 이삼년만 더 기다리고 3, 4년 뒤에 하리라’ 이러한 생각은 가장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참으로 발심(發心)한 사람은 자기가 지금 어떠한 처지에 놓여있건 그것은 가릴 것이 없이, 있는 그 자리에서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 있는 그 자리에서 그때 그때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 나가게 되면은 이것이 바로 무량겁 생사를 끊어 나가는 가장 유일한 방법이요, 가장 지혜 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송담스님(No.062)—77년(정사년) 성도재 법문(77.12.08.음)

 

(1) 약 20분.

(2) 약 13분.

 

 

(1)------------------

 

부처님께서는 기원전 558년에 탄생하셔 가지고, 기원전 479년에 80세를 일기로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열반(涅槃)을 보이셨습니다.

 

기원전 558년에 탄생하셔 가지고, 29세에 출가하셔서 6년 동안 고행을 하시고, 35세에 대도(大道)를 깨달으셨습니다.

일설에는 19세에 출가하셔서 12년 동안 고행 수도하신 끝에 30세에 대도를 성취했다고 그렇게 전해지기도 합니다만은,

대도를 성취하신 뒤 부처님께서는 3년 뒤에 고향에 돌아가셔서 아버님을 가서 뵈옵고, 아버님과 계모이신 '마하파자파티'를 비롯한 '야수다라' 아내와 '라후라'라고 하는 아드님 그리고 궁중의 모든 일가친척을 두루 다 만나셨습니다.

 

그리시고서 법을 설하시고 80세를 일기로 돌아가실 때까지 일생 동안을 이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 벗어나는 위대한 위없는 법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 그 어머니이신 마야 부인(人)께서—그때 인도의 풍속은 여인이 포태를 해 가지고 해산기가 되면은 친정으로 돌아가서 해산(産)을 하는 풍속이 있었으므로—친정으로 가는 도중에 룸비니(Lumbinī) 동산이라고 하는 동산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실 때 부처님께서는 탄생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친정으로 가시는 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29세에 출가하셔 가지고 일생 동안을 길에서 사시면서 모든 중생들에게 법을 설하시고,

 마지막에 열반하실 때에도 길에서—'구시나가라(kuśinagara 拘尸那伽羅)'라고 하는 나라에 사라쌍수(沙羅雙樹) 간에서, 결국 거기도 길이였습니다. 길에서 최후의 임종을 맞으셨던 것입니다.

 

길에서 나셔서, 길에서 사시다가, 길에서 사시면서 사람이 가야 할 길을 가르켜 주시고 마지막에 길에서 고요히 열반에 들으셨던 것입니다.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 해 가지고, 그 일생동안 설하신 법문을 결집(結集)을 해서 목판에다 조각한 그 경판(板)이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경전들은 무엇 때문에—이 참선법(參禪法)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고 간단하건만은, 간단하게 그 참선법만을 말씀을 하시지 왜 그 팔만대장경과 같은 방대한 법을 설하셨느냐?

그것은 중생들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각도에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말씀을 49년 동안에 걸쳐서 설하시다 보니, 그렇게 방대한 법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부처님의 제자들이 그 스승으로부터 지도 받아서 도를 닦고, 또 자신이 체험을 통해서 또 다음 제자에게 전수하고, 이렇게 해서 삼천 년을 내려오면서 수행하는 방법이 세련(練)되고 다듬어져서,

오늘날에는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읽지 않고서도 바른 스승만 만나서 직접적으로 지도만 받을 수 있다면, 간단한 방법으로 나 자신을 깨달아서 고해로부터 해탈을 하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고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지도할 수 있는 역량(量)까지도 갖출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도저히, 출가해서 머리를 깎고 일생을 도만 닦은 스님네들도 어렵거든 하물며 세속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도를 닦아서 목적을 달성한다고 하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다. 그러니 옴마니반메홈 이나 아미타불, 그런 염불(念佛), 주력(呪力)을 함으로 해서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아미타불의 48대원(四十八大願)에 의해서 숨지자마자 극락세계에 가는 그러한 우리에게 알맞은 길이 있다’고,

이렇게 믿고 그렇게 주장하는 그러한 종파도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하나의 방편(方便)은 될 수 있을지언정 구경법(究竟法)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은 방편은 일시적으로 이용할지언정 그 방편을 어떠한 단계에 이르러서는 버릴 줄 알고 새로운 단계에 나아가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단계에 나아가지 못하고 오랜 시간 동안을 방편에만 걸려 가지고 몸부림친다고 하는 것은 결단코 지혜 있는 수행인이 아닌 것입니다.

 

깨달음에, 우리가 수행을 열심히 해 가지고 깨달음을 증득했다 하더라도 그 깨달음에 착(着)해서는 아니되거든, 하물며 깨달음에 이르는 중간에 어떠한 방편 또는 중간의 어떤 과정에서 딱 얽매이고 착(着)해 가지고 나아갈 줄을 모른다면은 그것은 안타깝고 가련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번 믿는 마음이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때까지 그 믿음이 변함이 없어야하지마는, 닦아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나날이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고 구태의연(然)해서 답보(步)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매일 한결같이 공부를 해 나가되 언제나 새롭게 새롭게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단계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선을 경전에 있는 말씀이나 또는 어떠한 스님네한테 들은 법문이나 또는 자기가 알고 있는 어떤 교리적인 철학적인 지식을 통해서 계속 추구하고, 따지고, 비교하고, 적용하고 해서 차츰차츰 파고들어 가고 알아들어 가고 이렇게 공부하라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참선은 다른 학문과 달라서—다른 모든 학문은 점진적으로 차츰차츰 쌓아올려 가야 하고, 차츰차츰 알아들어 가야 하고, 점점 깊이 파고들어 가야 되지마는, 이 참선은 언제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처음부터 다못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계속 정진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육조(六祖) 스님 앞에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라고 하는 스님이 젊었을 때 육조 스님 앞에 떠억 나왔습니다.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육조 스님이 물으시기를,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옛날부터 소소영령(昭昭靈靈)해서 부증생부증멸(不曾生不曾滅)이라, 일찍이 생겨난 때도 없고 일찍이 멸한 때도 없다. 밝기는 태양보다도 더 밝고, 검기는 옻칠보다도 더 검으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어. 항상 일상생활 속에 보고 듣고 생각하는 가운데에 그놈이 있건마는 찾아봤자 도저히 잡히지를 않는다. 그러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때 하택신회 선사가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요, 하택신회의 본 마음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너는 나중에 공부를 열심히 해봤자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 밖에는 못되겠구나. 지해종사란 말은 알음알이로 따져서 공부해 가는 강사나 이론가 밖에는 안되겠다 이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왔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남악회양 선사는 그 한 말씀 육조 스님의 물음에 꽉 막혀 가지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길로 물러나와 8년 동안을 ‘무슨 물건인고?’ 다못 알 수 없는 마음으로 꽉 막혀 가지고 밥을 먹으나, 똥을 누나, 옷을 입으나, 일을 하나, 앉았거나 누웠거나 섯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알 수 없는 마음, ‘무슨 물건인고?’

아무리 생각해봤자 꽉 막혀서 알 수가 없고, 이렇게 해서 8년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의심이 깊고 간절해서 꽉 막힐수록에 터질 때는 무섭게 터지는 것입니다.

 

의심이 시원치 않고, 꽉 막히지 못하고 자꾸 이리저리 따지고, 알음알이가 거기에 게재가 되고 이러한 식으로 참선 공부를 해봤자 깨달음에 이르기도 어려우려니와, 설사 어떠한 깨달음에 도달했다 해도 지극히 미약한 그런 깨달음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오(大悟), 확철대오를 얻을려면은 의심이 깊고 간절하고 커야 하는 것입니다.

「깊고 간절하고 커야 한다」고 하는 것은 꽉 맥혀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이 맥혀야 하는 것입니다.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큰 의심 아래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참선 공부를 잘할려면은 첫째, 몸을 바르게 골라야 합니다. 바르게 가지고 바르게 단속을 해야 하고.

둘째는, 호흡을 바르게 쉬어야 합니다. 호흡을 바로 하지 못하면 참선 공부의 중간에 큰 지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셋째에 가서는, 우리의 생각을 잘 단속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살았다'고 하는 것은 첫째 몸이 있어야겠고, 몸이 있는 한에는 숨을 쉬어야 하고, 숨을 쉬고 있는 한에는 생각을 할 수밖에는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긴(緊)히 몸을 가질 바에는 바르게 가져야 되겠고, 긴히 호흡을 할 바에는 바르게 호흡을 해야 하고, 긴히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고는 안될 바에는 바른 생각을 해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바르게 몸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가부좌(坐) 또는 반가부좌.

허리를 쭉 펴고, 코끝이 배꼽 밑에 단전(丹田)과 수직으로 놓이게 하고, 두 귀가 두 어깨에 수직으로 놓이도록. 그렇게 몸을 가지면은 그 몸이 전후좌우로 기울어짐이 없이 단정하게 앉아지는 것입니다.

 

단정하게 앉되, 어깨와 목과 몸의 긴장은 완전히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긴장은 다 풀면서도 몸은 단정하게 가지고.

 

이는 어금니부터 지그시 물고, 입은 '한 일'자로 딱 다물고, 눈은 자기 앉은자리로부터 3미터 지점에다 떨구고 이렇게 앉으면은 몸이 단정하게 몸을 갖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흡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게 하는 것이냐?』

우리 보통 사람들은 가슴으로 호흡을 하고 무의식적으로 호흡을 하기 때문에 숨이 짧고 빠릅니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호흡은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까지 숨을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깊이깊이 들어마셔. 쑥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5~6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이렇게 내쉬도록.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입니다.

 

복식 심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가벼워지고, 오장육부가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되면서 깨끗해지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서 생각을, 바른 생각을 단속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22분14초~41분33초)

 

 

 

 

(2)------------------

 

『바른 생각이라는 게 무엇이냐』 아까 육조 스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물으신 문제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우리는 '나'라고 하면은 이 몸뚱이 육체가 '나'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 육체는 ‘참나’가 아닙니다. ‘참나’는 이 몸뚱이 육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물질이라 자기 멋대로 행동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행동은 이 몸뚱이의 주인인, 주인공(主人公)의 명령에 따라서 이 몸뚱이는 움직이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놈이 들어서 이 몸뚱이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보지마는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보는 놈은 나의 주인인 것이고, 듣는 것도 그렇고, 웃고 울고 성내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아무리 잡을라야 잡히지는 않지만은 그것이 나의 주인이지, 이 몸뚱이는 그 주인이 살고 있는 임시로 살고 있는 집에 지나지 못하고, 임시로 입고 있는 옷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집이나 옷은 얼마 동안 살다가 낡고 못쓰게 되면은 버리고 또 새집으로 이사 가거나 새집을 짓지 아니하면 아니 됩니다. 옷이 낡고 더러워지면 그 옷은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이 몸뚱이도 어떠한 단계에까지는 입고 있지마는 단계가 지나면은 이 몸뚱이는 언젠가는 기어코 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사(生死)입니다.

 

이 몸뚱이 있을 때 그 주인공이 무엇인가? 그놈을 깨달아 버려야 영원한 생사윤회(生死輪廻)로부터 해탈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이 몸뚱이가 자기인 줄 알고, 이놈에다가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분을 바르고, 연지를 찍고, 향수를 발라서 이 몸뚱이는 이쁘게 이쁘게 단속하고 가꿀 줄 알면서,

이 몸뚱이 안에 있는 ‘참나’, 나의 주인공은 밥 한 숟갈 먹일 줄도 모르고, 약 한 모금 먹일 줄도 모르고, 그놈이 어디가 있는 줄도 모르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채 일생을 살고 또 다음 생에 또 그렇게 해서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거쳐서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그 깨달음, 깨닫는 법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영원을 두고 생사(生死)의 그 괴로운 윤회(輪廻)를 계속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러한 위대한 스승을 만나서 그 지긋지긋하고 무서운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고 위대한 그러한 정법(正法)을 금생에 만났습니다.

 

만나 가지고서도 열심히 닦지 않는다면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열심히 닦느냐, 닦지 않느냐’에 우리는 문제가 거기에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 문제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가만히 있어도,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도 무엇인가 과거 일이 생각이 나고, 괴로운 일이 생각이 나고, 슬픈 일이 생각이 나고, 기뻤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그것이 바로 우리를 괴롭히는 고민이요, 망상이요 번뇌입니다마는 그놈 일어나는 그...(녹음 끊김)

 

버스에서나, 절에서나 언제라도 내가 나를 찾을 수 있는 기회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단 1분, 1초도 틈이 없이 우리에게는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장소와 때가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한번 버리면 다시 또 사람 몸을 받을지, 지옥에 갈지, 축생이 될지, 천당에 갈지, 아귀가 될지, 수라가 될지, 우리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몸 있을 때 열심히 참선을 해놔야 내생에 다시 사람 몸을 받는 것이고, 다행히 금생에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자유자재 할 수 있다면 그때는 중생 교화하기 위해서 지옥에를 가건, 축생이 되건, 다시 사람이 되건 그것은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이고.

 

문제는 어쨌든지 이 몸은 시시때때로 늙어가고 있고, 시시때때로 낡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룻밤 자고 나면 또 낡아지고, 이틀 밤 자고 나면 낡아지고, 철없는 어린 아이들은 설이 되면 좋다고 춤을 추고 야단이지마는 설이라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사형 무대 앞에 한 해 성큼 다가선 것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몸이 잠시도 쉬지 아니하고 걸음걸음이 시시때때로 수명이 단축이 되어가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단 1초도 단 한 생각도 범연(然)히 그럭저럭 지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1초 1초가 쌓이고 쌓여서 1년 10년이 되고, 금방 이 몸을 버려야만 할 죽음의 문이 돌아오고 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상(無常)함을—이 몸뚱이가 정말 허망하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정말 허망한 것임을 철저히 깨달아야만 도를 닦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일이 있다. 모래사 있다. 이 일만 끝나고 다음에 하지. 금년, 이삼 년만 더 기다리고 3, 4년 뒤에 하리라’ 이러한 생각은 가장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참으로 발심(發心)한 사람은 자기가 지금 어떠한 처지에 놓여있건 그것은 가릴 것이 없이, 있는 그 자리에서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

있는 그 자리에서 그때 그때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 나가게 되면은 이것이 바로 무량겁 생사를 끊어 나가는 가장 유일한 방법이요, 가장 지혜 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 나간 사람에게는 어떠한 어려운 일도 그 사람 앞에는 다 풀려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우리는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당황해서 지혜로운 생각은 간 곳 없고, 계속 자기를 해롭게 하고, 괴롭게 하고, 일을 그르치게 하는 생각만이 계속 퍼일어나게 마련인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이뭣고?’ 이렇게 한번 들 때에 그 사람에게는 온갖 쓸데없는 생각이 거기서 끊어지는 것이며, 당황하는 생각이 거기에서 일어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이 거기에서는 일어나지 아니했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안정이 됨으로 해서 마음이 맑아지고, 마음이 맑아진 데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지혜로울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생각으로 어려운 일을 처리해야 그 일이 풀려나가는 것이지 당황한 마음, 어리석은 마음, 삿된 마음으로 어려운 일이 풀려날 리가 있겠습니까?

점점 복잡하게 만들 뿐이고, 그럴수록에 자기만 점점 괴로워지고 점점 주변을 불행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찾는 사람에게는 과거의 한량없는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앞에는 녹아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죄가 녹아질 때에 불보살이 그 사람을 돌봐 주시지 아니할 리가 없습니다.

일체 선신(善神)이 계시다면은 그 사람을 옹호(護)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삿된 마음을 일으킬 때에 잡신과 악귀(鬼)들이 그 사람을 맴돌면서 따라다니는 것이고, 맑고 깨끗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가졌을 때에 불보살과 일체 선신들은 그 사람을 돌보아 주시고, 옹호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믿고,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어떠한 괴로운 일을 당하더라도 그 괴로운 일에 나의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그러한 괴로운 일을 당할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서 몸을 바로잡고 깊은 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가다듬어 보십시오.

 

한 번, 두 번,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쌓아 나갈 때에 여러분들은 정말 여러분 자신이 어디로부터서 이러한 위대한 힘이 생겨났는가에 대해서 스스로 놀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팔만대장경을 한덩어리로 뭉쳐서 여러분 앞에, 낱낱이 여러분의 가슴속에다가 선사(賜)드리는 새해의 선물입니다.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신 오늘, 정사년 납월팔일(臘月八日)을 기념해서 부처님의 뜻을 받들고, 조실 스님의 법문에 의지해서 제가 자신 있는 마음으로 여러분 앞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이 법을 진즉부터 알고 닦으신 분, 새로 오신 분, 누구를 막론하시고 희망과 자신과 용기를 가지시고 열심히 정진을 해서 결정코 금생에 우리의 목적인 견성성불을 성취하시기를 간곡(懇曲)히 부탁드리고 말씀을 맺습니다.(41분34초~53분56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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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도(道) ; ①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②깨달음. ③가르침. ④궁극적인 진리. ⑤이치. 근원.

*생사고해(生死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삼계(三界-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와 그 괴로움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마야 부인(人)māyā.  석가모니 어머니인도 콜리야족(koliya각왕(善覺王)의 딸로 카필라바(Kapilavastu) 슈도다나

uddhodana, 정반왕淨飯王)과 결혼하였으나석가모니 낳고 7 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당시의 풍속으로 정반왕은 마야의 여동생 마하프라자파티(mahāprajāpatī)과 재혼함.

*해산(解産) ; 아이를 낳음.

*룸비니(Lumbinī) ;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ārtha), 즉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가 탄생한 곳으로 네팔 남동부 테라이(Terai) 지방, 바이라와(Bhairawa)의 서방에 있다. 석가족(샤카족)의 도읍 카필라바스투의 유적이 약 16km 서쪽에 있다.

 

이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는 19세게 말까지만 해도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중, 1896년 독일의 고고학자 앨로이스 휘러(Alois Anton Führer)가 오늘날의 네팔 테라이 지역에 있는 옛 사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울창한 숲에 버려져 있는 아쇼카왕 석주(石柱)를 발견했다. 석주에 새겨진 내용은,

‘자비로운 삐야다시 왕(아쇼카 왕의 다른 이름)은 왕위에 오른지 20년에 이곳을 방문하고 참배하였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Śākyamuni Buddha)께서 이곳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주위에 돌담을 쌓고 돌기둥(石柱)을 세우게 했다. 부처님께서 여기 룸비니 마을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에 이 마을에 세금을 면제하였고, 단지 생산의 8분의 1만  내도록 하였다.’ 이로써 부처님의 탄생지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구시나가라(拘尸那伽羅) ; 산스크리트어 쿠시나가라(kuśinagara). 지금의 네팔 남쪽에 인접해 있던 말라족(malla族)의 거주지로, 붓다가 입멸한 곳. 붓다는 이 나라의 북방의 사라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고 오른쪽 겨드랑이를 밑으로 해서 입멸하셨다.

*사라쌍수(沙羅雙樹) : 북부 인도의 구시성(拘尸城 kuśinagara) 서북쪽으로 흐르는 발제하(跋提河 Ajitavati) 물가, 사라수 여덟 대가 둘씩 마주 서 있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사라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고 오른쪽 겨드랑이를 밑으로 해서 입멸하시니, 그 숲이 하얗게 변하였다. 그리하여 학의 숲(鶴林, 鶴樹)이라고도 하게 되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결집(結集)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saṃgīti  상기티는 결경(結經)·집법(集法) 또는 합송(合誦)·합창(合唱)으로 해석하며, 회의(會議)를 의미한다고도 한다. 많은 자격 있는 사람들이 모여 불전(佛典)을 올바로 평가하고 편찬하는 일을 의미한다.
인도에서는 붓다의 입멸 후부터 2세기경까지 4차례의 결집이 있었고, 그 후 현대에 오기까지 세계 각국에서 여러 차례의 대장경(大藏經) 결집이 있었다.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세련되다(練-- 씻을 세,익힐 련) ; 서투르거나 어색한  없이 훌륭하고 미끈하게 가다듬어 있다.
*염불(念佛) ;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불•보살님의 이름을 외움. 흔히 어떤 일을 기원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일을 말한다.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12에서.
(52)念佛者는  在口曰誦이요,  在心曰念이니  徒誦失念하면,  於道無益이니라.
 
염불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이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염불이니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아무 이익이 없으리라.
 
註解
阿彌陀佛六字法門이  定出輪㢠之捷徑也라.
心則緣佛境界하야  憶持不忘하고,  口則稱佛名號하야  分明不亂이니,  如是心口相應이  名曰念佛이니라.
 
「나무아미타불」의 육자 법문은 바로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되 분명하고 일심불난(一心不亂)해야 하니,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것이 염불이다.
*주력(呪力) ; 진언(眞言)·다라니(陀羅尼)로 하는 기도. 진언(眞言)·다라니(陀羅尼)의 효과.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사십팔대원(四十八大願) : 아미타불이 지난 세상에서 수행할 때에,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 가 되어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 - Buddha) 앞에서 장차 자기가 성불하여 주지(住持)할 이상적인 국토의 구체적 조건을 들어서, 그것이 실현될 때라야 성불한다고 맹세하고 발원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그가 무한히 분투 노력하여 그의 복과 덕이 쌓이고 쌓여, 그가 목표한 극락세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무량수경>에 나오는 그 서원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그 나라 안에는 온갖 고통과 비참한 일이  아주 없을 것.
3.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 얼굴이나 몸이 똑 같게 될 것.
5.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 육신통이 있을 것.
15.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 끝없는 수명과 한량없는 광명을 가질 것.
18. 어느 세계의 어떤 중생이나 그 이름(아미타불)을 열 번만 염하면 그 나라에 태어날수 있을 것.
33. 시방 세계의 어떤 중생이나 모두 그의 빛을 쏘이면 그 몸과 마음이 함께 아름답게 될 것 등등.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구경법(究竟法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진리 법) ; 그 위에 더 없는 최고의 가르침. 궁극의 진리.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구태의연(然)하다(생각 태도방법 따위)발전하거나 진보되지 않고 예전 묵은 모습 그대로이다.
*답보( 밟을 답,걸을 보) ; ① 따위 진행되지 못하고 한자리 머물러 있음 유적으로 이르는 . ②으로 나아가지 않고제자리에서 걷는 처럼 다리 움직이는 동작.
*육조 스님, 하택신회, 남악회양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법성(法性)•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긴(緊)히 ; ①꼳 필요하게. ②매우 간절하게.
 
 
 
 
------------------(2)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시시때때 ; 시시(時時, 지나가는 시각 시각)를 강조하는 말. 시간이 흐르는 매 순간.
*걸음걸음이 ; 걸음을 걸을 적마다.
*범연(然) ; ①두드러진  없이 평범하게. ②특별한 관심 없어 데면데면하게.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이뭣고(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1700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1700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에서]
*선신(善神) ; 불법(佛法)과 그것을 믿는 이들을 보호하는 신.
*옹호하다(護-- 안을 옹,보호할 호) ; 「…을」 두둔하고 편들어 지키다.
*성도(成道) ; 깨달음.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됨.
*납월팔일(臘月八日) ; 납월(臘月)은 음력으로  해의  마지막  이르는 .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35세의 12월 8일 샛별이 뜰 무렵 중인도 마갈타국 니련하(河)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불도(佛道)를 이루던 날. 납팔(臘八)이라고 줄여 쓰기도 한다. 일명 성도재일(成道齋日).
*간곡히(懇曲- 간절할 간,간절할 곡) ;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Posted by 닥공닥정

 

 

§(346) ‘이뭣고?’ 화두 / ‘알 수 없는 의심’을 관(觀)해야 / 용화선원의 가풍(家風)-평상시가 용맹정진 / 여법하게 정진하는 것이 참다운 불사 / 장애 극복은 정진력으로.

사실 이 ‘이뭣고~?’ ‘이뭣고?’ 이 문제는 불법(佛法)이 생겨나기 이전에, 부처님이 탄생하시기 이전에,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의 커다란 숙제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볼라고 동서고금의 모든 성현들이 철인들 철학자들이 이것을 알아볼라고 별별 방법을 썼습니다마는, 오직 이 문제를 깨달으신 분, 바로 깨달라서 바로 지도하신 분은 오직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신 부처님이시고, 부처님의 그 법을 깨달은 방법이 바로 법(法)이고 그 법을 이어받아서 깨닫고 또 그 제자에게 전하고 하신 분들이 바로 역대조사 선지식들이 아니시겠습니까.


‘이뭣고?’하는 그 글자, ‘이뭣고?’한 글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했을 때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 그것이 화두에 요긴한 것입니다.


화두가 정말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되는 것은 마지막 깨닫기 한 일주일 전부터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을 하기 위해서, 생사윤회를 아니할라면은, 그런 부처님의 5계(五戒)를 잘 지켜야만 한다.


**송담스님(No.346)(참선법 D) - 88.1.21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 (용346)

 

(1) 약 20분.

 

(2) 약 19분.


(1)------------------

<‘이뭣고?’ 화두>

 

이 화두, 그 천칠백 화두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요, 동시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가 ‘시삼마(是甚麼)’ 화두입니다.  ‘시삼마’는 우리말로는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그말이여.
‘이것이 무엇이냐?’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육조 스님께 딱 찾아가 뵈옵고 절을 하니까, 『십마물(什麽物)이 임마래(恁麽來)냐?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이렇게 물으셨어.

그리고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가 내나 그분도 육조 스님의 제자인데, 하택신회 선사 젊어서 육조 스님 앞에 딱 가서 절을 하니까, 『십마물(什麽物)이냐? 무슨 물건이냐?』하고 물으니까,
하택신회 선사는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요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이 자기 자신 신회의 불성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어.

그런데 남악회양 선사가 떠억 와서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육조 스님이 물으시니까,
남악회양 선사는 망지소조(罔知所措)여. 몸 둘 바를 몰라.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말이여.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묻는데 꽉 맥혀 가지고 어찌할 바를 몰라. 몸 둘 바를 몰랐어.

그런데 육조 스님께서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하고 대답한 하택신회에게는 『네가 나중에 공부를 해서 깨달은 바가 있다 하더라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 밖에는 안 되겠다』
지해종사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불교를 연구하는 그런 강사와 같은 그런 것 밖에는 너는 못 되겠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남악회양 선사는 꽉 맥혀 가지고 그 뒤로 8년 간을 ‘무슨 물건이냐? 그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한 그 의심을 가지고 8년 동안을 그놈을 가지고 앉으나 서나 밥을 먹으나 일을 하나, 8년 동안을 그것을 참구를 한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그래 가지고 육조 스님한테 『설사일물(說似一物)이라도 즉부중(卽不中)입니다. 설사 ‘한 물건(一物)’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 깨달은 바를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수증할 것이 있느냐?』 그러니까,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수증할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오렴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 가지고,
『여시여시(如是如是)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그렇게 쾌히 인가(印可)를 하신 것입니다.

지금 용화선원에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 또 제가 말씀을 드린 모든 것이 완전히 그 남악회양 선사가 하던 그 참선법, 그것을 바로 조사선(祖師禪)이라 그러고, 그것을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그러는데 그 활구참선법, 남악회양 선사처럼 그렇게 해 가도록 항상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물건이냐?’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거거든.

지금 여러분이 이렇게 집을 떠나서 여기에 오셔서 석 달 동안을 고생을 하면서 고행을 하면서 이렇게 와서 계신데, ‘무엇이냐?’ 그말이여.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이 몸뚱이가 여러분이라고 혹 생각하실 분이 계실런지 모르지마는, 이 몸뚱이는 흙 기운과 물 기운과 불 기운과 바람 기운이 뭉쳐서 이렇게 몸뚱이라고 하는 것을 임시 이렇게 이루고 있는 것뿐이지, 몸뚱이 이것이 여러분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해서 늙어가다가 나중에 결국은 이 몸뚱이에서 영혼이 떠나 버리면 그냥 10분 못 가서 내장이 버글버글버글 썩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바람은 바람 기운으로 나가 버리고, 불 기운은 불 기운대로 흩어져 버리고, 물 기운은 물로 돌아가 버리고, 흙 기운은 흙으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그래서 송장 덩어리인 것입니다.

송장 덩어리를 운전을 하고 있는 놈, 운전하고 있는 그놈을 우리는 찾는 것이거든.

그것을 고인들은 다 ‘자성(自性)’이라 하기도 하고, ‘마음’이라 하기도 하고, 또는 ‘영혼’이라 하기도 하고 또는 ‘진여(眞如)’라 하기도 하고 또는 ‘불성(佛性)’이라 하기도 하고, ‘법계(法界)’라 하기도 하고, ‘여래(如來)’라 하기도 하고, 경전마다 그것에 대한 이름을 달리 말씀을 하셨고 세계 나라마다 그것에 대한 이름도 다 각각 다르지만,

그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 우리는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몸뚱이를 바꿔서 태어나면서 이렇게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데, 그 자체를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생사고해(生死苦海)를 이렇게 유전(流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놈을 우리는 깨달라야겠다. ‘그놈을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자’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그놈이 무엇이여?’ 눈으로 볼라야 볼 수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고, 냄새를 맡을라야 무슨 냄새가 거기서 나며, 그놈을 ‘어떻게 생겼는가?’ 아무리 생각해 본들 알 수가 없다 그말이여.

사실 이 ‘이뭣고~?’ ‘이뭣고?’ 이 문제는 불법(佛法)이 생겨나기 이전에, 부처님이 탄생하시기 이전에,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의 커다란 숙제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볼라고 동서고금의 모든 성현들이 철인들 철학자들이 이것을 알아볼라고 별별 방법을 썼습니다마는, 오직 이 문제를 깨달으신 분, 바로 깨달라서 바로 지도하신 분은 오직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신 부처님이시고, 부처님의 그 법을 깨달은 방법이 바로 법(法)이고 그 법을 이어받아서 깨닫고 또 그 제자에게 전하고 하신 분들이 바로 역대조사 선지식들이 아니시겠습니까.

이것은 그 법을 모르고서는 도저히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만 법을 모르고서는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법이요,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아무리 따져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과 지식 가지고 따져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화두를 참구(參究)해 가지고 그 화두를 타파(打破)함으로 해서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아까 ‘이뭣고?’라고 하는 화두는 그밖에 ‘마삼근(麻三斤)’이라든지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든지 ‘판치생모(板齒生毛)’라든지 천칠백 개나 되지만, 그 많은 화두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이고 최초의 화두가 바로 ‘이뭣고?’거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앉아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일을 할 때나 속이 상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이뭣고?’


<단전호흡과 화두 의심>

 

그러면 언제 단전호흡을 하고 언제는 이 화두를 드느냐?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꾸었다가 내쉬면서, 그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숨이 다 나가면 또 스르르 하니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동안 딱 정지했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뭣고?’를 길게 숨 다 나갈 때까지 ‘이뭣고?’를 길게 하시라 그말이여. ‘이뭣고~?’ 또 숨이 다 나가면 또 스르르 호흡을 들어마셔 가지고 또 약 3초 동안 딱 머꾸었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처음 하신 분은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시지만, 나중에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그리고 ‘이뭣고?’한 뒤에 알 수 없는 생각이 있으면은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疑心)」,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다시 또 ‘이뭣고?’ ‘이뭣고?’ 안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알 수 없는 그 의심’이 흩어져 없어져 버리거나, 딴 생각이 나오거나 하면은 그때 또 다시 ‘이뭣고?’하고 한 번 챙기는 것입니다.

‘이뭣고?’하는 그 글자, ‘이뭣고?’한 글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했을 때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 그것이 화두에 요긴한 것입니다.

의심은 없으면서 「이뭣고?」 「이뭣고?」 밤낮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를 잠시도 잊어버리지 말고 ‘이뭣고?’를 해라』 그러니까,
아하! 그렇게 생각하고는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이뭣고?’를 마치 ‘관세음보살’하듯이 그렇게 하면은 그것은 잘 모르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이것이 무엇이냐?’한 그 알 수 없는 그 간절(懇切)한 의심, 그 의심이라야 옳게 하는 것입니다. 의심이 있어야.
그래서 입으로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그 ‘대관절 이것이 무엇인고?’한 그 알 수 없는 의심 그것이 있으면 화두를 이미 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무슨 물건'을 가지고 다니다 어디다 놔 버렸는데, ‘아! 그걸 어디다 놨나? 그것이 어디가 있는가? 아! 그거 참 어디가 있는가?’ 그렇게 찾은 것처럼,
‘이거 참!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그 의심이 그것이 화두인 것입니다.

그 의심이 항상 있어야 하고, 그 의심이 있으면 ‘이뭣고?’ ‘이뭣고?’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할 필요가 없어요. 「알 수 없는 그 의심」을 단전호흡을 하면서 그 의심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앉아서도 그 의심, 서서도 그 의심, 이것은 자꾸 안 될수록에 더 열심히 하시면 나중에 언젠가는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현전(現前)하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입선(入禪)을 할 시간이나 또는 방선할 때나 그 의심이 항상 있어야 하거든.

그래서 ‘방선(放禪)해도 잡담을 하지 말아라.’ 이런 소리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입선·방선이 전혀 상관이 없어요. 공부가 그렇게 되면은....

여러분이 댁에 계시면은 다 편안하고 잘 잡숫고 자유롭게 계실 텐데,
아! 여기 오셔서 백 명 이렇게 많은 수가 사시니 식사도 반찬도 변변치 못하고 모든 이 목욕탕이라든지 화장실이라든지 그런 시설도 다 불편하고, 아침에 좀 늦잠도 자고 싶은데 자도 못하고, 여러 가지로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것도 모든 자유가 제한이 되고 그래서 생각해 보면은 참 이러한 고생이 없습니다.

이러한 고생을 무릅쓰고 여기 와서 계시는 것은 순전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기 오신 것인데, 어디에 음식이 맛이 있고 없는 것이 상관이 있으며, 입선·방선이 무슨 상관있습니까?

입선을 하나 방선을 하나, 반찬이 쓰거나 달거나, 밥이 질거나 되거나, 분 따라서 잘 수용을 하고 섭취를 하고 모든 것에 적응을 하면서 자나깨나 우리가 정신 쓸 곳, 신경 쓸 것은 오직 ‘이뭣고?’ 하나 뿐이거든.

‘이뭣고?’ 벌써 화두를 떠억 들고 있는 사람을 보면 눈매가 달라지고 모습이 엄숙하고 경건하면서 벌써 눈이 왔다갔다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눈이 딱 못박혀 있는 것처럼 눈동자가 따악 박혀 있는 것입니다.
엄숙하고 경건해서 누가 감히 옆에 가서 장난도 칠 수가 없고, 말 붙이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입선시간은 말할 것도 없이 하지마는 방선해서 설사 자리에서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시기도 하고 혹 밖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하신다 해도 각자 자기 나름대로 속으로 ‘이뭣고?’가 따악 자리잡혀 있어야 하거든, 어디 가서 잡담을 하고 히히덕거리고 수군덕거리고 남의 흉보고 그럴 시간이 어디가 있느냐 이 말씀이여.

이 용화선원 조실 스님 열반(涅槃)하신 뒤로 벌써 13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흘렀고 그 동안에 처음에 한 2~30명 하다가 4~50명 하다가 6~70명 하다가 이제는 백삼십이 명까지 방부를 드려서,
참 팔도에서 여러 발심(發心)한 보살님네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이렇게 정진을 하시니 이러한 기쁠 도리가 없고 이렇게 고맙고 감사할 도리가 없고, 또 선방의 규칙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좋아졌으나 아직도 멀었습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는 참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분도 많이 계십니다마는 아직 오신지 얼마 안 되신 분, 아직도 공부하는 요령을 확실히 터득을 못 하신 분도 계시고, 또 오시기는 오셨지만 아직 불법이 무엇인지, 참선이 무엇인지, 선방이 무엇인지, 좋다고 하니까 오시기는 오셨으나 막상 확실히 모르시기 때문에 좀 그런 분이 계실 줄 압니다마는,

여러분 가운데 발심을 해서 공부하신 분이 계시면 그분의 거룩한 모습을 보고 모두가 다 그 본(本)을 봐 가지고 입선·방선이 상관없이, 입승(立繩) 스님이나 누가 ‘잡담하지 말아라. 떠들지 말아라. 시끄럽게 하지 말아라’ 이러한 말씀 듣기 이전에, 각자 방선 시간에도 주욱 앉아서 정진하시고 또 졸리면 나가서 포행하다가 들어오셔서 하시고 해서,

입선·방선이 상관이 없게 이 큰방을 언제나 묵언(默言) 구역으로 해 놓고, 부득이 해서 할 요긴한 말씀이 있으면 밖에 나가서 간단하게 끝마치고 들어와서 또 정진을 하셔야죠.
이 큰방에 둘씩·셋씩·넷씩·다섯씩 구석구석이 모여 가지고 수군덕수군덕 해 쌌고 그래 싸면 공부를 좀 할려고 한 분까지 공부를 못 하시게 됩니다.(55분5초)

 

 



(2)------------------

<용화선원의 가풍(家風)>

오늘부터서 지금 섣달 초하루부터서 8일날 까지는 용맹정진(勇猛精進) 기간입니다.
전국에 선방이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온전히 만 일주일 간을 갖다가, 공양하고 변소에 갈 시간만 내 놓고는 전부가 큰방에 앉아서 다 법복을 수하고 그렇게 용맹정진하는 시간입니다.

조금만 졸아도 죽비를 갖다가 탁탁 쳐서 경책(警策)을 주면서 그렇게 합니다마는, 이 용화선원은 왜 그렇게 용맹정진을 아니하냐 하면은 평상시가 바로 용맹정진이 되도록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비록 잠은 여섯 시간을 자지만 그 밖의 시간은 완전히 용맹정진으로 석 달 동안을 그렇게 하자는 것이 조실 스님의 지도 방법이십니다. 그래서 조실 스님께서 열반하신 뒤로도 그렇게 주욱 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데 선방은 용맹정진도 하고 잠도 조금씩만 자고, 참선 입선 시간을 (한번에) 3시간씩 이렇게 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이 용화선원이 선방이 좋다고 와 보니 맨 잠만 자고 입선 시간도 겨우 8시간 밖에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용화선원의 가풍(家風)을 잘 이해를 못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가풍을 따르지를 못하고 실천을 안 해서 그렇지, 가풍이 무른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도량(道場)에 들어와서 무슨 잡담을 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그 전에 강월 스님이 입승을 할 때에 지대방이고 어디고 일체 잡담을 못하게 하고, 심지어 화장실에 가서도 말을 못하게 하고, 누구하고도 둘이 마주서서 말을 주거니 받거니 못하게 하고, 몇철 간을 그렇게 한번 해 봤습니다.
그러니까 정진할려고 애쓴 보살님네들은 참 좋다고 그러고 지금도 그렇게 했으면 좋다고 원하시는 보살님들도 상당수가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유치원 학생이 아닙니다. 국민학교 학생도 아니고 중학교 학생, 고등학교 학생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니고 대학을 졸업한 대학원 학생들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대학원 학생한테다가 유치원 학생 다루듯이 해서 되겠느냐 그말이여.
그것은 여러분에 대한 대접도 아니고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특수한 일 아니고선 기본법 외에는 완전히 여러분에게 자유를 드려 가지고 자발적으로 여러분들이 조실 스님의 가풍에 적응하고 순종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셔서 나시면 잘 하신 분은 당신 좋고 여러분에게 모범이 되어서 좋고 또 용화선원의 가풍을 순종을 함으로써 용화선원을 빛내는 일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불법을 빛나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큰 절을 짓고 돈을 많이 내서 그것이 불사(佛事)가 아니라,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이 도량에 터억 들어서서 여법(如法)하게 참되게 정진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참다운 불사를 이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불법이 일어나는 것이지 큰 절을 몇 억씩 들여서 절만 크게 진다고 해서 불법이 흥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물론 그런 불사도 필요하지요. 필요하지만 그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불사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진실한 불자(佛子)로서 수행을 알뜰히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견성(見性)을 하게 되고 견성을 해야 부처님이 탄생을 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아주 그 동안에 잘 하시는 분은 계속해서 잘 하실 것이고, 그 동안에 혹 그렇게 철저히 잘 못 하신 분은 오늘부터서 아주 완전히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여법하게 해 주실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단전호흡, 화두 의심>

 

아까 단전호흡을 하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꽉 맥힌 분, 그분은 호흡을 들어마실 때 배를 볼록이 하지 말고 배를 홀쪽하게 하고 또 내쉴 때 배를 볼록하게 하고 해서 반대로 이렇게 하시라는 것과,
숨을 들어마셔서 이리해서 차츰차츰 해서 저 배꼽 밑에까지 쪄 넣을라고 그러한 호흡법을 하시지 말고, 그냥 코로 스르르 하니 숨은 들어마시되 배꼽 밑의 단전, 아랫배만 약간 볼록...

 

볼록하게 맨들으라니깐 저 개구리 배에다가 바람 넣은 것처럼, 아랫배가 그냥 포대화상(布袋和尙)처럼 맨들라고 애를 쓰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 약 2, 3센치 조금만 볼록하게 자기 느낌상으로만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내쉴 때도 너무 뱃가죽이 등어리에 가서 따악 붙도록 그렇게 억지로 헐라고 하시지 마세요. 약간 홀쪽하게 하는 듯만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면 그렇게 답답한 것은 저절로 없어지게 될 것이고.

그리고 ‘암만 화두를 들고 할라고 해도 화두가 잘 순일하게 들리지 않는다. 한 철, 두 철 내지 3년, 4년, 5년째 해도 영 화두가 순일하게 들리지 않고 자꾸 그런다.’ 그런 것을 호소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화두가 정말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되는 것은 마지막 깨달으기 한 일주일 전부터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순일무잡하게 되어서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리고, 뭐 놓고 들 것도 없이 그냥 새벽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잠을 자도 꿈속에서도 화두가 고대로, 자다가 눈을 새벽에 딱 뜨면 새로 화두 들 것도 없이 엊저녁에 들고 잠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 딱 떠도 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세수를 해도 고대로 있고, 양치질을 해도 고대로 있고, 화장실 가도 고대로 있고, 밥을 먹어도 고대로 있고, 뭐 소지를 해도 고대로 있고, 옆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전혀 상관이 없이 고대로 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경에 이르르면 일주일이 못 가서 툭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일주일 되어서 안 터지더라도 ‘빨리 터졌으면’ 그러한 생각을 가질 것이 없습니다. 그런 상태로 있으면 일주일을 가도 좋고, 열흘을 가도 좋고, 한 달을 가도 좋고, 계속 고대로 해 나가면은 언젠가는 지가 터지지 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일무잡하게 되었을 때에 깨닫기를 바래거나, ‘누가 이럴 때에 나를 툭 깨닫게 해 줬으면’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고대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공부 막 좀 될라고 하면 옆에서 떠들어 싸서 못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공부가 진짜 잘된 것이 아니에요. 떠든다고 화두가 달아나 버린다면은 그 화두는 아직도 지금 들렸다 안 들렸다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그래서 이렇게 - 뭐 참선은 집에서는 못할 바 아니지마는, 그래도 여기 와서 조실 스님 법문을 들으면서 또 모두 여러 발심한 도반들과 같이 규칙생활을 하면서 가정의 모든 복잡한 것을 떠나서 이렇게 와서 하신 것이니,
서로 서로 목적이 같을 진대는 서로 서로 여법하게 잘해서, 나로 인해서 다른 분들이 공부를 잘하고, 다른 분들로 인해서 내가 공부가 잘 되도록 이렇게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가 안 들려도 그걸 성내거나 성화하시거나 번민, 번뇌심을 내실 필요가 없어요. 망상이 일어나면 그냥 고대로 놔둬 버리고 - 오늘 아침에 조실 스님께서 참 아주 요긴한 법문을 해 주셨는데,
망상 일어난 거 그걸 버릴라고 할 것이 아니고 고대로 놔두고, 그냥 다시 화두만 떠억 -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화두만 딱 다시 한번 들은 것뿐이지, 일어나는 망상을 누를라고 하거나 쫓아낼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말이여.

쫓아낼려고 하고 누를라고 하면은 그것이 눌러지지도 않고 화두만 더 달아나 버린다 그말이여.
 


<장애 - 지계·정진력으로 이겨야>

 

그리고 자기가 지은 업(業)에 따라서 - 전생에 지은 업, 또 금생에 지은 업, 그런 업으로 해서 몸에 자기가 아닌 다른 영혼, 이런 것이 항시 자기 주변을 맴돌거나 자기에게 이렇게 붙거나 그러한 경우가 있습니다.
참선을 안 하신 세속에 사신 분 가운데에도 그런 분들이 상당수가 있고, 또 그것이 남이 보면은 전혀 모르지마는 자기 혼자만 아는 일이죠.

그것이 전생에 어떤 인연있는 영가 - 그것이 원결(怨結)이 있는 영가라든지, 서로 짝사랑을 하던 그런 영혼이라든지, 자기가 너무 그 사람에 대해서 너무 애착을 하고 집착을 하던 그런 영혼이라든지, 또는 무슨 원결이 있어 가지고 나한테 복수를 하기 위해서 나한테 따라붙은 그런 영혼이라든지,
그런 것이 요렇게 붙어서 항상 자기 주변에 이렇게 맴돌며 있는 그런 경우도 있고, 아주 언제나 자기한테 붙어 갖고 다니는 그런 경우도 있고, 뭣한 경우는 계속 귀에다가 뭐라고 계속 소곤대고 명령을 하고,

자기가 이렇게 살고 있지마는 실지는 하나도 자기 마음대로 못 하고, 먹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못 먹고, 그 영혼이 먹으라고 하면 먹고 먹지 말라면 안 먹고, 어디를 가자고 하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고, 일체가 다 그 영혼에 - 특수한 그것이 신(神)인지 영(靈)인지 - 조종한대로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애착(愛着)을 갖지 말아라. 물질에 대한 탐착·애착도 못쓰고 사람에 대한 애착과 탐착도 그것이 괴로움의 근본밖에는 아니 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자기의 잇속을 챙겨 가지고 남을 해롭게 하고 남을 갖다가 억울하게 탄압을 하고 심지어는 남을 죽이고 이러한 일은 참 해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그때는 조금 이익을 얻었을런가 모르지마는 세세생생에 원결이 되어 가지고 기어코 그 앙갚음을 하게 되기 때문에 어찌 우선 조금 이익을 보기 위해서 그런 큰 고통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 남에게 고통을 주지 말아라.

 

남의 물건도 훔치지 말 것이며, 남에게 진심(瞋心)을 내지 말 것이며, 산목숨을 죽이지 말 것이며, 또 남을 거짓말하고 속이고 사기를 하지 말 것이며, 또 술을 마시면은 자기의 바른 정신을 놔 버리고 그래가지고 못할 짓 없이 온갖 본의 아니게 못된 행동이 나오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말라’한 것이,
반드시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생사해탈을 하기 위해서 생사윤회를 아니할라면은 그런 부처님의 5계(五戒)를 잘 지키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안 지켜 놓으면은 금생에도 그 과보(果報)를 받는 수가 있지마는, 내생에 두고두고 세세생생에 그런 참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행히 금생에 이렇게 발심을 해서 선방에 나오셨지만, 과거에 지은 업연(業緣)으로 해서 그런 영혼이 우리한테 따라붙어 가지고 참선만 할라고 하면은 와 가지고 자기를 직접 간접으로 괴롭히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참선을 안 하고 그럭저럭 지내면은 또 괜찮은데 참선만 할라고 떠억 앉으면은 와서 괴롭히는 수가 있거든.

그건 왜 그러냐 하면은, 참선을 해서 확철대오를 해 버리면 자기가 발붙일 곳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이 참선을 해서 차츰차츰 공부가 잘 되어가면 ‘도고마성(道高魔盛)이다. 도가 높아갈수록에 마군이가 성하게 된다’ 이거거든.

그렇다고 해서 참선을 안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럴수록에 더 신심을 돈독히 해 가지고 자꾸 올바른 방법으로 꾸준히 공부를 해 나가고, 옆에 와서 집적대거나 귀에다 대고 소곤거리거나 말거나, 그것을 가지고 탓을 해서는 안 돼요.
그놈을 탓하고 억지로 떼어 내버릴려고 할수록 그놈은 더욱 꽉 붙잡고 늘어지기 때문에, 떼어 버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놔둬 버려.

놔둬 버리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자꾸 화두를 간절히 일심(一心)으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면, 그렇게 해서 화두가 점점 순숙해져서 순일무잡하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그까짓 잡신·영혼이 어디에 들러붙을 것이냐 그말이여.

오직 그것을 이겨내는 방법은 정진력(精進力), 이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으로 밀고 나가는 도리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조금도 조급한 생각내지 말고, 원망하고 한탄하지도 말고, 짜증내고 번민하지 말고서, 오직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을 하면서 화두를 간절히 참구해 나가면,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이틀을 그렇게 지내고 한 달, 석 달을 그렇게 지내고 1년, 이태, 3년을 그렇게 지내고 10년 세월을 그렇게 쪼옥 해 나가면 자연히 그런 원결이 있는 영혼도 거기에 감복(感服)이 되어가지고 그냥 원결을 풀고 좋은 곳으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드릴 말씀이 한이 없지만 오늘은 이만 말을 맺고자 합니다.(35분15초~73분48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이뭣고?’ 화두 ; 분류 ‘이뭣고 화두’ 참고.
*남악회양, 육조 스님, 하택신회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십마물 이마래(什麼物伊麼來) : 십마(什麼)는 의문의 말로 '무엇이냐'의 뜻이며, 이마(伊麼)는 임마(恁麼)와 같은 말로 '이렇게'의 뜻으로, 십마물 이마래(什麼物伊麼來)라는 말은 곧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는 말。
*망지소조(罔知所措) ; 너무 당황하거나 급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함.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조사선(祖師禪) ; 교외별전(教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조사선이라 한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생사고해(生死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와 그 괴로움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유전(流轉) ; 생사 인과(因果)가 서로 끊임없이 이어짐.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화두(話頭)를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 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 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마삼근(麻三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판치생모(板齒生毛) ; 분류 ‘화두(공안)’ 참고.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법성(法性)•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본(本) ; 모범으로 삼을 만한 대상.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묵언(默言) ; 말을 하지 않음.

 

 



------------------(2)

*용맹정진(勇猛精進) ;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경책(警策 깨우칠 /채찍·회초리 ) ; 선방에서 대중이 좌선할  졸거나 자세가 흐트러지는 스님의 어깨를 쳐서 졸음을 깨워 정진을 독려하는 행위. 또는 그때 사용하는 장군죽비를 가리키기도 한다.

*장군죽비(將軍竹) ; 보통 죽비()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쓰는 40~50센티의 불교 용구인데, 장군죽비는 참선할  졸거나자세가 흐트러진 수행자의 어깨를 쳐서 졸음을 쫓는  1.5~2m  죽비.

*가풍(家風) ; 한집안에서 오래 지켜 온 생활 습관이나 규범.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절. 사찰. [참고] ‘도장’으로 일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지대방 ; 절의 큰방 머리에 있는 작은 방. 이부자리, 옷 등의 물건을 넣어 두는 곳이며, 스님들이 잠깐 휴식을 하기도 하는 곳이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제사,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이 중생을 교화(敎化)하는 일.
*여법(如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포대화상(布袋和尙) ; 중국 후량(後梁) 때의 스님. 본이름은 계차(契此).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 출신. 체구가 비대하고 배가 불룩하게 나왔으며, 항상 포대를 지팡이에 걸어서 어깨에 메고 동냥한 것을 그 속에 담고 떠돌아다니면서 수행한 선승(禪僧). 916년에 명주 악림사(嶽林寺)에서 입적함.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마음이 시달려서(煩) 괴로워함(惱). 나쁜 마음의 작용.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는 정신작용.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원결(怨結 원망할 원/맺을·번뇌 결) ; 원망(怨望)의 마음이 얽혀 풀리지 않는 것을 말함.
*애착(愛着) ; 사랑하여 집착함. 애집(愛執).
*앙갚음 ; 남에게 해를 받은 만큼 저도 그에게 해를 다시 줌.
*과보(果報) ; 인과응보(因果應報,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
*업연(業緣) ; 업보(業報)의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의 인연을 부른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참선할 때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경계.
*감복(感服) ; 마음속으로 감동하여 탄복함.

Posted by 닥공닥정
이뭣고 화두2013. 12. 12. 09:33

§(264) ‘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 / 단전호흡과 의심, 득력(得力) / 경계에 속지 말아야 / (게송)묵조시귀굴~.

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 - 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

이 활구참선법은 캄캄한 밤에 기둥에 이마빡을 부딪친 거와 같은,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다못 꽉 맥혀 가지고, 알 수 없이 ‘이뭣고?’ 그 뿐인 것입니다.

어떠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에 현혹되지 말고 집착허지 말고,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두고, 정신만 탁 챙겨 가지고 눈을 뜨고서 화두를 챙겨나가면 그러헌 경계는 금방 저절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264) - 1985년 4월 첫째일요법회(91분)에서. (용264)

 

약 18분.

 

 

그런데 흔히 화두 하면 ‘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이기 때문에 ‘이뭣고?’를 많이 말씀을 허게 됩니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말은 임제(臨濟) 스님 이후로 임제종에서 이 화두라고 하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마는, 임제 스님 이전에 육조(六祖) 스님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사용하지 아니했지만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기둥하고 아래로는 땅을 떠받치며, 밝기로는 해보다 더 밝고 검기로는 옻칠보다도 더 검은데, 항상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허는 가운데에서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터억 앞에 나와서, ‘그것은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이로소이다. 이 하택신회에, 저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육조 스님이 ‘뭐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도 없다고 내가 그랬거늘, 어찌 불성이니 제불의 본원이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공부를 해서 일가(一家)를 이룬다 하드라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 되겠다. 불교 학자밖에는 못 되겠다’

 

이 불교(佛敎)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공부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참나’를 깨닫는 것이 목적인데, ‘너는, 앞으로 니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가를 이룬다 해도 지해종자(知解種子)밖에는 못 되겄다’ 이렇게 점검을 허셨습니다.

 

그러자 남악회양(南嶽懷讓)이 왔습니다. 와서 터억 절을 허니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셨습니다.

하! 그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헌 물음에 대해서 꽉! 맥혀서 뭐라고 대답헐 수가 없어 몸을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택신회는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니, 무슨 하택신회의 불성이니 이렇게 즉각 그 대답을 했는데, 남악회양은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허고 묻는데 대해서 앞이 꽉 맥혀 가지고 몸 둘 바를 몰라. 그 뒤로 8년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8년 동안을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앉아서도 그 생각, 서서도 그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그 생각, 일을 허면서도 그 생각, 똥을 누면서도 그 생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이렇게 허기를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그래 가지고 육조 스님 앞에 가서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조 스님이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헐 것이 있느냐?’허니까,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證)헐 것이 없들 않지마는 오렴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이렇게 해서 인가(印可)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참선법, 활구참선법은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더듬어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남악회양 선사처럼 대뜸 처음부터서 꽉! 맥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기둥에 이마빡을 부딪친 거와 같은, 캄캄하니 갑자기 걸어가다가 기둥이나 벼람박에 이마빡을 부딪쳤을 때 그때 상황이 어떻습니까?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다못 꽉 맥혀 가지고, 알 수 없이 ‘이뭣고?’ 그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꽉 맥혀서 앞뒷이 끊어져야 그 공부를 옳게 해 나가는 것이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 이론, 무슨 철학, 불교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 그것을 갖다가 아는 대로 끌어다가 이렇게 분석을 하고, 종합을 하고, 비교를 하고, 적용을 하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허는 것이 아닙니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도 그렇고, 마삼근(麻三斤)도 그렇고, 무자(無字) 화두도 그렇고, 시삼마(是甚麼)도 그렇고, 무슨 화두(話頭)를 어느 큰스님한테 탔든지 간에 한번 탔으면 그 화두,

공부가 잘되거나 못되거나, 못될수록에 그 화두 하나에 전력을 쏟을 것이고, 잘된다 하드라도 기쁘다 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무자 화두를 하는 분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지어갈 따름인 것입니다.

 

꽉 맥혀서 답답허고 알 수가 없지만 조금도 조급한 생각을 낼 것이 없고, 또 그렇게 해 가다 보면 화두가 순일하게 들려서 의심(疑心)이 순일(純一)하게 들린다 하드라도, 화두가 독로(獨露)한다 하드라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기쁜 마음을 내면 이미 화두는 달아나 버리고, 기쁜 마음의 마구니가 벌써 침입해 들어온 것이고, 안된다고 짜증을 내고 번뇌심을 내면 이미 번뇌의 마구니가 내 마음에 침입해 들어온 것이라. 그래서 이 공부는 잘된다고 해서 기쁜 마음도 내서는 아니되고, 잘 안된다고 해서 짜증낼 일도 아닌 것입니다.

 

다못 단전호흡을 허면서 숨을 쑤욱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는데, 볼록해지거든 약 3초 동안 딱 정지했다가, 또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허면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러면 숨이 다~ 나가면 배가 홀쪽해지죠. 그러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시면은 아랫배가 볼록해지는데, 볼록해지거든 딱 정지헌 상태에서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또 숨을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고... 허지만,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꼭 숨을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됩니다.

들었던 화두 ‘이뭣고?’헌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냥 화두는 더 들지 않고, 그 있는 의심을 묵묵히 반조(返照)를 허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는 한번 들고서 숨은 3번, 4번, 5번 내지 10번을 쉬어도 그 화두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은 덮치기로 화두를 들지 않다가, 화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지거나 딴 생각이 일어났다허면 그때 가서 또 화두를 떠억 한번씩 챙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해 가면, 처음에는 그렇게 들랴고 해도 깜빡한 사이에 달아나 버리고 들면 또 달아나 버리고 하는데, 나중에는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화두가 항상 들어져 있게 될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을 갖다가 공부가 많이 익숙해진 증거인 것입니다.

 

힘을 쓰지 아니해도 저절로 공부가 되어가니까 힘을 덜게 된다. ‘힘 덜게 되는 것을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라’ 이렇게 고인(古人)네들은 표현을 했습니다.

 

이 공부에 제일 주의헐 것은 사량분별로 따지지 말 것이며, 설사 공부가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순일허게 잘 들리고 의단이 독로헌다 해도 좋아하는 마음, 환희심(歡喜心)을 내지 말 것이다.

 

또 공부가 순일허게 잘되어 갈 때에 ‘빨리 깨달랐으면, 이럴 때 누가 나로 하여금 탁! 깨닫게 해줬으면’ 그러헌 생각도 내지 말 것이다.

 

또 공부가 그렇게 순일하게 잘되어 가게 되면은 여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떠한 그 신기한 경계(境界)가—혹 환한 빛을 광명을 본다던지, 꿈에 부처님을 친견하고 꿈에 어떤 깨달은 꿈을 꾼다든지, 또는 여러 가지 뭣이 알아진다든지, 그런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드라도 ‘이것은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환상(幻相)이다’ 생각하고. ‘이거 내가 깨달은 것이 아닌가?’ 그러헌 그 외람(猥濫)되고 잘못된 생각을 내지 말고.

 

어떠한 신기한 불보살이 나타나고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드라도 이것은 허상(虛像)이요, 환상이라 하는 것을 미리부터 잘 이해를 허시고, 그런 데에 현혹되지 말고 집착허지 말고.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두고, 정신만 탁 챙겨 가지고 눈을 뜨고서 화두를 챙겨 나가면 그러헌 경계는 금방 저절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스승을 바로 만나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옳게 해 나가는 것인가’를 잘 모르는 사람은 공부허다가 이런 허상과 환상과 마경(魔境)이 나타나면 이것이 도통(道通)헌 것으로 착각을 하고, 그것에 기쁜 마음을 내고 그것에 집착을 하고 신경을 써 가지고 영영 사도(邪道)에 빠지고, 까딱하면 정신병자가 되고 하는 예도 가끔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시작할 때부터서 바르게 시작을 해야 하고, 중간에도 바르게 해 나가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묵조시귀굴(黙照是鬼窟)이요  문자역조강(文字亦糟糠)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문해하종(若問解何宗)인댄   방행여우적(棒行如雨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묵조(黙照)는 시귀굴(是鬼窟)이요. 묵묵히 앉아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이 귀신의 굴택(窟宅)이요.

문자(文字)는 역조강(亦糟糠)이다. 문자, 이론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은 이것은 다 찌꺼기더라 그말이여.

 

참선을 허되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허면서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허도록 잡드리를 해 나가야지,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조용헌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그러헌 공부는 이것은 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 해 가지고, 이것은 아무리 평생을 들여다보고 있다 허드라도 이것은 귀신굴(鬼神窟) 속에서 살림살이를 허는 것이라 해서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입니다.

설사 오신통(五神通)이 난다 허드라도 이것은 정법(正法)이 아니고 외도선(外道禪)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經典)이라 하더라도 경전을 우리의 중생 분별심으로 사량분별로 이리저리 따져서 해석을 허고 있다면, 그것은 곡식의 바른 알곡을 먹지를 못하고 그 찌꺼기를 씹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부처님 경전도 그 경전을 바로 읽고 바로 봐서 부처님의 그 참뜻을 옳게 깨달라야지, 그것을 이론적으로 따지고 문자로 그것을 분석해서 그렇게 일생 동안을 경을 읽고 연구를 헌다해도 그것은 찌께기—엿 국 다 뽑아내고 엿기름 찌께기를 그것은 돼지나 주는 것인데 그것을 갖다가—엿 국물은 받아서 구정물 통에 붓어 버리고 그리고 그 엿밥, 찌께기를 먹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약문해하종(若問解何宗)이면, 그렇다면은 묵조(默照)도 아니오, 문자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대가 공부해 나가는 종지(宗旨)가 무엇이냐? 그대가 공부해 나가는 것은 어떠헌 공부를 허느냐? 무슨 목적으로 어떠헌 공부를 허느냐?’허고 묻는다면은,

 

방(棒)을 내리기를, 방맹이로 몽둥이질을 허기를 비 쏟아지듯이 몽둥이질을 허리라[棒行如雨滴].

‘그 무슨 공부를 허느냐? 그대가 하는 공부의 지취(旨趣)가 무엇이냐?’고 묻다가 뭇매를 맞게 된다 이것입니다.

 

어째서 ‘그대의 공부허는 종지가 무엇이냐?’하고 묻는데 방맹이를 맞게 되느냐?

여러분이 참선을 열심히 허시게 되면 이 뜻을 스스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61분32초~1시간19분4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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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임제, 육조, 하택신회, 남악회향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임제종(臨濟宗) ; 중국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이다.

임제종은 북방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송대(宋代)에 석상 초원(石霜楚圓) 문하에서 양기 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와 황룡 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가 나와, 양기파는 성행했으나 황룡파는 얼마 안 가 쇠퇴함.

양기파 문하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화두(話頭)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하여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그의 선풍(禪風)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동용(動用) ;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씀[用]. 움직이고 작용함. 활동. 동용(動容)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06) - 86년 8월 화두·불명·수계 법회(86.08.03)에서.

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33분18초~35분)

*지해종사(知解宗師) ; 참선 공부를 알음알이로 따져서 해석하고 강론하고 공부해 가는 강사나 이론가를 말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벼람박 ; ‘바람벽(--壁, 집의 둘레 또는 방의 칸막이를 하기 위해 만든 벽)’의 사투리.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마삼근 (麻三斤) : 화두의 하나。『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하는 물음에 대하여, 운문종(雲門宗)의 동산(洞山) 수초선사(守初禪師)가 대답하기를 『마 삼근(삼 서근)이니라』하였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반조(返照) ; 돌이켜 살펴보는 것.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환상(幻相) ; 실체가 없는 무상한 형상.

*외람되다(猥濫-- 함부로·외람할 외/함부로·넘치다 람) ; (언행이나 생각이)분에 넘치는 데가 있다.

*마경(魔境) ; 마(魔)의 경계(境界).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번뇌를 말한다. 마(魔)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사도(邪道) ; 올바르지 않은 삿된 길.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길.

*(게송) ‘묵조시귀굴(黙照是鬼窟)~’ ; 『청허당집(淸虛堂集)』(동국대학교역경원) p63 ‘일선자(一禪子)에게’ 게송 참고.

*굴택(窟宅) ; 거처, 집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묵조사선(默照邪禪) ;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그러한 공부. 이것은 깜깜한 귀신굴(鬼神窟) 속에서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라 해서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이다.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94-95 참조.(가로판 p99~100)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정법(正法 바르다·올바르다 정/부처님의 가르침 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정법시대(正法時代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엿 국물(엿물) ; 곡식을 엿기름으로 삭힌 뒤에 자루에 넣어 짜낸 국물. 맛이 달고 끈적끈적하다. 엿 국물을 고아 굳힌 것이 우리가 보통 먹는 ‘엿’이다.

*엿밥 ; 엿을 만들 때 엿물을 짜내고 남은 밥찌끼.

*종지(宗旨 근원 종/뜻 지) ; ①종문(宗門, 종파宗派)의 교의(敎義 어떤 종교의 진리로서 공인된 가르침)의 취지(趣旨 긴요한 뜻). ②주장이 되는 요지나 근본이 되는 중요한 뜻.

*지취(旨趣 뜻 지/뜻 취) ; ①어떤 일에 대한 깊은 맛. 또는 그 일에 깃들여 있는 묘한 뜻. ②취지(趣旨 어떤 일에 대한 기본적인 목적이나 의도).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