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회(법보재)2014. 10. 29.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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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8) (게송)올올불수선~ /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에게 원하시는 것 /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는 것이 생사 / (게송)야야포불면~.

영가를 여기다 모셨기 때문에 명절이나 제삿날을 기해서 여기 와서 부처님께 공양도 올리고, 영가를 위해서 제사도 모시게 되고 그러면서 또 조실스님 법문을 듣고 또 정법에 의해서 참선을 하시게 되니, 영가 때문에 영가만 좋을 뿐만 아니라 온 가정, 일가친척이 정법을 믿고 ‘참나’를 닦는 참선을 하시게 되니 어찌 그 영가가 편안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불공도 드리고 부처님께 와서 절도 하지마는 부처님께서는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깨달아서 생로병사(生老病死)에서부터서 해탈해 가지고 여러 중생들이 다 부처가 되기를 제일 좋아하시고 바라시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758)— 2013(계사년) 법보재(04.25)-30분 (용758)

 

(1) 약 22분.

 

(2) 약 9분.

 


(1)------------------

올올불수선(兀兀不修善)이요  등등부조악(騰騰不造惡)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적적단견문(寂寂斷見聞)이요  탕탕심무착(蕩蕩心無着)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올올불수선(兀兀不修善)이요, 올올하야 선(善)도 닦지 아니하고 등등(騰騰)하야 악(惡)도 짓지 않는다.
적적(寂寂)하야 보고 듣는 것이 끊고, 탕탕(蕩蕩)하야 마음이 착(着)함이 없다.

이 게송은 육조(六祖) 혜능(慧能)스님께서 임종하실 때 마지막에 이 게송을 읊으시고 열반을 하셨습니다.

올올(兀兀)하야 선(善)도 닦지 않는다.
‘올올하다’고 한 것은 태산처럼 동함이 없고 따악 정(靜)해져 갖고 있는 모습입니다.
등등(騰騰)하야 악도 짓지 않는다.
등등한 것도 태산처럼 움직이지 않고 따악 부동한 모습! 그러니 무슨 악을 지을 것이 있으며.

적적(寂寂)하야 견문(見聞)이 다 끊어졌다. 적적한 것은 말 그대로 고요하고 고요해서 보고 듣는 것이 다 끊어졌다 그말이여.
마지막에 탕탕(蕩蕩)하야 마음이 착(着)함이 없다. ‘탕탕하다’는 것은 넓고 넓은 모양을 표현한 것입니다.

올올하고, 등등하고, 적적하고, 탕탕한 모습은 육조스님께서 열반하실 그 장면을 — 그 몸가짐과 마음 상태를 고대로 읊으신 게송인 것입니다.

이 게송 안에는 생사(生死) 없는 모습,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으신 보살 화현(化現)으로서의 마지막 읊으시고 열반에 드신 그 게송인 것입니다.

이 게송을 오늘 계사(癸巳)년 3월 16일 법보재(法寶齋) 날에 읊은 것은, 이 법당에는 수많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원근 친척과 인연있는 분의 영가(靈駕)가 봉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 영가는 법당앞 전후좌우 사방에 다 모셔져 있는데 — 이 영가는 항상 앞에 부처님을 모시고, 조실스님을 모시고, 우주법계의 모든 불보살과 제석천왕과 신장들이 옹호를 하고 계신 이 법당 안입니다.

이 법당 안에 모셔져 있는 우리의 선망부모, 원근 친척의 영가들은 그러한 장엄한 외호 속에 편안하게 봉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영가들의 마음 상태는 불보살과 모든 신장(神將)의 가호(加護) 속에 아까 읊은,
‘올올하야 선도 닦지 않고, 등등하야 악도 짓지 아니하며, 적적하야 모든 견문이 다 끊어졌으며, 탕탕하야 마음이 착(着)한 바가 없다’고 하는 그러한 상태에 영가들도—육조스님이 열반하실 때의 그 마음과 그 모습 속에 영가들도 그렇게 편안하게 봉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많은 영가들은 성(姓)도 각각이요, 평생 동안 지은 업(業)도 각각이요, 평생 살아온 것도 다 다르지만 일단, 이 법보전(法寶殿) 안에 법보영가로 봉안된 뒤에는 지나간 과거는 하나의 꿈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고,

그 꿈속에서 희로애락과 성주괴공(成住壞空)과 생주이멸(生住異滅) 속에 많은 고통, 슬픔,외로움 모다 그런 한(恨)이 맺힌 영가도 계실 것이고, 비교적 편안하게 잘 사시던 영가도 계실 것입니다마는,
일단 이 법보전에 모시게 되면 그런 것은 다 없어지고 오직 이 육조스님께서 열반하실 때 읊으신 게송과 똑같은 상황 속에서 영원을 사실 것입니다.

이 영가분 가운데에는 이미 극락세계나 도솔천 내원궁이나 또는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마는 아직 인연이 있어서 이 법당 안에 고대로 안주하고 계시면서 극락세계나 도솔천 내원궁에 가실 날을 기다리고 계실런지도 모르고,

또는 이 법당 안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조실스님을 모시고 대중들이 조석으로 예불하고 축원하는 이러한 분위기가 너무너무 좋아서 딴데로 갈 생각이 없이 여기서 편안하게 계신 그런 영가도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은 일단 각 가정마다 비명에 간 영가도 있고, 일생을 참 괴로움과 슬픔 속에 사시던 영가도 있고, 또 돌아가실 때 병으로 앓다가 돌아가신 분, 전쟁에 나가서 전사한 그런 영가분,
또는 악연이 있어서 다른 사람한테 죽음을 당한 그런 영가도 있을런지 모릅니다만은 일단 여기에 모시게 되면 그 영가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모셔지지 않은 영가는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하고 원한을 품고 세상에 있게 되면 그 영가가 갈 곳이 없어서 자기가 살던 집, 자기가 아는 형제간, 부모, 일가친척,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여가 붙었다 저가 붙었다,
그러면서 고혼(孤魂)으로서 정처가 없는 불쌍한 영가로서 떠돌던 그런 영가들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런 영가들이 집안에 여가 붙었다 저가 붙었다 하고, 이 사람한테 붙었다 저 사람한테 붙었다 하면 집안에 병고액난(病苦厄難)이 끊어지지 않고 일체 관재구설(官災口舌)과 온갖 재난이 끊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실스님께서는 그러한 많은 인연 있는 신도와 그런 불쌍한 영가를 위해서 법보전 안에 법보 영가를 모시는 제도를 마련을 하셨습니다.

일단 여기에 모시게 되면은 영가도 편안할 뿐만 아니라 그 영가를 모신 가정과 가족들도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많은 그 동안에 겪었던 병고액난과 관재구설과 모든 불화가 다 녹아 없어지고, 그 인연으로 결국은 정법(正法)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영가를 여기다 모셨기 때문에 명절이나 제삿날을 기해서 여기 와서 부처님께 공양도 올리고, 영가를 위해서 제사도 모시게 되고 그러면서 또 조실스님 법문을 듣고 또 정법에 의해서 참선을 하시게 되니,
영가 때문에 영가만 좋을 뿐만 아니라 온 가정, 일가친척이 정법을 믿고 ‘참나’를 닦는 참선을 하시게 되니 어찌 그 영가가 편안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부탁할 것은 일단 영가를 모신 분은 항상 여기 와서 법회에도 참석하시고, 제삿날을 잊지 않고 꼭 와서 부처님께 공양도 올리고, 대중공양도 하고 , 또 조실스님 법문도 듣고 이렇게 함으로써,
영가는 ‘아, 내 식구가 와서 오늘 불공(佛供)을 하는구나’ ‘내 죽은 날을 기해서 제사를 지내는구나’ 영가는 환히 다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다 영가를 모신 분은 절에를 자주 오셔야 하고, 명절에는 꼭 잊지 않고 참여해서 불공을 올리고, 제사를 올리는 의식에 정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영가로 인한 인연으로 많은 신도들이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은 육도윤회에서 해탈을 해 가지고 ‘참나’를 깨달아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게 되는,
그러한 목적으로 이 법당을 창건을 해서 영가를 모시게 해 주신 전강영신(田岡永信) 대종사(大宗師).

여러분이 보시고 계신 이 사진을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만은 이러한 제도가 없으면 ‘불교를 믿는다’고 믿어도 무엇이 불법(佛法)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불법은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거다’ 막연히 그렇게 알고 절로 왔다갔다 하고, 불공이나 드리고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불(佛) 자가 ‘부처 불(佛)’ 그러지만, ‘부처’라는 게 무엇입니까? ‘깨달은 분’이란 말인 것입니다.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 깨달으셨으니까 부처님인데, 그 부처님을 믿는 것은 당연히 우리의 교주이시고 그러니까 당연히 존경하고 믿어야 하지마는 부처님은 당신을 믿고 존경하라고 그것만을 바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든 중생들이 정법을 의지해서 자기가 자기를 닦아서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원하신 것입니다.

불교를 믿으면 부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데 부처님은 절에 많는 돈과 쌀을 갖다 주신 것, 그것을 그렇게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스님네는 혹 좋아할런가 모르나 부처님은 그것을 좋아하시지 않고,
불공도 드리고 부처님께 와서 절도 하지마는 자기가 자기의 부처를 깨닫는 — 자기의 마음을 깨달아서 생로병사(生老病死)에서부터서 해탈해 가지고 여러 중생들이 다 부처가 되기를 제일 좋아하시고 바라시는 것입니다.

용화사 이 법보전은 그러한 의미에서 비록 부처님 열반하신 뒤로 삼천 년이 되어서 말세가 되었다 하지마는 법보 제자들은 말법(末法) 속에 다시 정법(正法) 시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자리에 모이신 비구·비구니·사미·행자·청신사·청신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기가 자기를 깨닫는 것은 남이 대신 깨달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깨닫는데, 깨닫는 것이 무슨 팔만대장경 어려운 경전을 읽고 외우고 해석하고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경도 공부하고, 외울 경(經)도 있곤하나 그것이 경이라고 하는 것은 다 알고보면 팔만대장경이 다 ‘자기가 자기를 깨달으라’고 하는 말씀을 이러한 각도에서도 말씀하시고 저런 각도에서도 말씀하신 것이라,

경전을 옳게 본 사람은 자기 마음을 깨닫는 공부를 해야만 되는 건데, 중생은 길이 잘못 들었거나 근기(根機)가 약해 가지고 자기 깨닫는 것은 뒷전으로 두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 소원을 성취한다, 복을 많이 짓는다’ 이러한 정도로 해서 불교를 믿으면서, 일생을 나름대로 ‘나는 불교 신자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분이 참 많습니다마는,

정말 ‘나를 깨닫는 공부’는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무엇을 볼 때 보는 데로 따라가지 말고, 보는 바로 ‘나’ — ‘이놈이 무엇인가?’
귀로 무엇을 들을 때는 듣는 그리 쫓아가지 말고, 바로 ‘이뭣고?’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기 조실스님 영정(影幀) 옆에
생야시(生也是)  사야시(死也是)  두두비로(頭頭毘盧)  물물화장(物物華藏)

나는 것도 이놈이요, 죽은 것도 이놈이다.
생사(生死)는 보통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이 몸뚱이가 태어나면 생(生)이라 그러고, 살다가 죽으면 그것을 사(死)라고 그러는데,

이 불법 문중에서는 생사는 육체를 기준으로 두기 보다는 우리의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루에도 수백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 생각 일어나는 것이 바로 생(生)이고, 그 생각이 이리저리 하다가 또 꺼지면 그것이 죽음(死)인 것입니다.

생사(生死), 하루 동안에도 생각을 기준으로 해서 생사를 삼는다면은 우리는 하루에도 몇백만 번을 태어났다 죽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의 ‘죽었다 살았다’ ‘생겨났다 죽었다’하는 것이,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온갖 업(業)을 짓게 되고,
결국은 업 속에서 육체가 죽을 때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이고, 죽은 뒤에는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다행히 착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한 사람은 천당에 갈 것이고, 염불도 많이 하고 그런 사람은 또 극락에도 갈런지 모르나,
대부분 살다가 보면 알게 모르게 많은 업을 지어 가지고 지옥에도 안 간다고 아무도 보증을 할 수가 없고, 축생이 될런지 다시 또 인도환생할런지 모릅니다마는,

결정코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한 생각을 단속을 잘하면 지옥에 갈까 걱정할 것도 없고, 축생이 될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뭔 말을 듣거나, 생각에 무슨 생각이 떠오르거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내가 나를 챙길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누가 나한테 오장(五臟) 뒤집어지는 억울하고 그런 고약한 말을 하더라도, 그 말로 따라가면은 울화(鬱火)가 치밀어져 가지고 눈에 독이 오르고 얼굴이 변하고 당장 그 사람과 싸움을 하게 되는데,

정법을 믿고 참선하는 사람은 그 말을 듣자마자 숨을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이뭣고~?’
또 ‘이뭣고~?’ 이렇게 자기를 단속하는 참선으로 돌아오게 되면 상대할 아무 원수도 없고 미운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처음~21분28초)

 

 

 



(2)------------------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우리가 태어났지만은 이 정법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과 정법을 믿지 않고 빈부귀천, 성주괴공, 생로병사 속에서 사는 사람과는 세계가 다른 것입니다.

정법을 믿을 줄 모르고 ‘참나’를 찾는 참선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태어나 가지고 이 몸뚱이를 가지고 지옥에 가서 지옥고를 받는 중생과 별로 다를 것이 없고,
소나 돼지나 개처럼 겉은 분명히 사람인데 축생처럼 일생을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도반 여러분, 법보 가족 여러분!
정말 우리는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서 태어났습니다. 만나기 어려운 또 불법을 만났습니다.

불법 가운데에서도 이 법보전에 영가를 모신 법보 가족,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은 정말 이 세상에서 극락세계에 태어난 것보다도 천당에 태어난 것보다도 훨씬 더 다행하고 행복한 삶을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이요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로다
나~무~아~미~타~불~
욕식불거처(欲識佛去處)인댄  지자어성시(只這語聲是)니라
나~무~아~미~타~불~

이 게송은 포대화상(布袋和尚)이 읊으신 게송입니다.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이요, 밤이면 밤마다 부처님을 안고 자고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그 부처님과 함께 일어난다
욕식불거처(欲識佛去處)인댄, 부처님 간 곳을 알고자 할진댄
지자어성시(只這語聲是)다. 다못 이 말소리 이놈이다, 이것이다.

우리는 밤마다 부처님을 안고 자는데 자면서도 부처님을 안고 자는 줄을 모르고, 하루 지나간 일을 이 생각 저 생각 걱정하다가 잠든 줄 모르게 잠이 들고 밤에 꿈도 꾸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부처님과 함께 일어난 줄을 인식을 못하고 그냥 자고 일어나는 것 뿐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안에 반드시 자성불(自性佛)이 계신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하고 인식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자리! 우리의 본성(本性)자리는 얼굴이 잘생겼거나 못 생겼거나, 지식이 있거나 없거나, 늙었거나 젊었거나 일단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 몸안에는 자성(自性)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 자성이라는 것이 그것이 자기의 마음자리고, 그것이 자기를 지켜주고 살아가는 자기의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 부처님을, 잘 때 따악 부처님과 함께 잠에 드는 거고, 아침에 일어날 때는—이 육체는 송장인데 육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이 육체 속에 있는 부처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어나는데 부처님이 어디 계시냐?
눈으로 볼래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 볼래야 만져 볼 수 없습니다.

그 부처님은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것이 나의 부처님이고, 이 말을 듣고 있는 그것이 바로 여러분 자신의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항상 보다가 놓쳐버리고, 듣다가 놓쳐버리고, 골을 내다가 놓쳐버리고, 걸어가다가 잊어버리고.

그런데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항상 ‘이뭣고~?’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가?’

생하는 놈도 이놈이요, 죽은 놈도 이놈이다.
이놈이라는게 우리는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아무리 우리의 마음으로 찾아봤자 그것은 ‘아,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알기는 어려운 것이고,

항상 ‘이뭣고~?’
자꾸 그렇게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하다보면 나중에는 챙기지 안 해도 항상 알 수 없는 ‘이뭣고~?’한 의문이 마음속에 끊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열심히 한 사람에게는 언제 오더라도 그 경계(境界)가 오는 것이고,
그 경계가 와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의심이 끊어지지 않고, 그 의단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유지가 되어가면 반드시 그 사람은 자기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불법을 믿는 것은 이러기 위해서 불법을 믿는 것이고, 부처님께서 나오셔서 49년 동안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신 것은 오직 이 하나를, 이 한마디를 우리 중생들에게 일러주시기 위해서 탄생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법보재를 맞이해서 우리의 법보 영가의 재사를 모시면서 우리는 다같은 한 가족으로서 일생 동안을 이러한 마음으로 같이 살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또 이러한 정법 문중에서 다시 만나서 또 이 정법에 의해서 ‘참나’를 깨닫고, 이 깨닫는 법을 일체 중생에게 전달을 하고,
그래서 온 우주법계가 깨달은 부처님으로 가득 찰 때까지 우리는 한 형제요, 가족으로 이렇게 살게 되기를 바라면서 법상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박수)(처음~30분33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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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올올불수선~’ ; [육조단경(六祖壇經)] 육조(六祖) 혜능(慧能)대사 임종게(臨終偈).
*육조(六祖) 혜능(慧能)대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법보재(法寶齋) ; 매년 음력 3월 16일에 용화사 법보재자(法寶齋者)와 법보전 만년위패에 모신 선망부모 영가들과 인연 있는 영가들의 무량겁으로부터 지은 업장을 참회 소멸하고,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고, 재자와 영가 모두 진리의 세계에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전강 조실스님께서 개설(1963년)하신 합동 천도재(薦度齋).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신장(神將) ;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신장. 또는 《화엄경》을 보호하는 신장.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법보전(法寶殿) ; 법보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생주이멸(生住異滅) ; 모든 사물이 생기고(生), 머물고(住), 변화하고(異), 소멸함(滅). 또는 그런 현상.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안락국(安樂國)•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무량청정토(無量清淨土)라고도 함.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로 다시 태어남.
*고혼(孤魂) ;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넋.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전강영신(田岡永信)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말법(末法) : 부처님의 교법이 세상에 전하여 가면서 중생을 교화하는데 대하여 부처님께서 예언한 바가 있다.
처음 오백 년 동안은 정법(正法) 시기가 되어, 교법이 온전히 있음은 물론 닦아 가는 사람도 많고, 닦는 사람은 대개 깨쳐서 성과(聖果)를 얻게 되지마는,
그 다음 천 년 동안은 상법(像法) 곧 정법에 비슷한 시기가 되어, 교법도 있고 수행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깨치는 사람은 적게 되고, 그 다음 만 년 동안은 말법 곧 쇠잔하고 미약한 교법이 남아 있는 시기가 되어, 수행하는 사람도 별로 없으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 때 인도만을 표준한 말인 듯하다。인도의 불교사는 과연 그대로 되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대답하여 예언하기를, 불교가 중인도에서는 차츰 쇠미하게 되겠으나, 변지(邊地)와 외국에 널리 전파되어 점점 융성하게 되리라고 하였다。과연 불교의 중심이 중인도로부터 북부인도와 세일론으로 옮기었고, 다시 중앙아시아로, 북부아시아로 옮겨가게 되었다.
중국 • 한국 • 일본에 불교가 왕성하고 많은 도인(道人)이 난 것도 다 부처님이 열반한 지 1500년 이후의 일이었다。다시 말하면, 말법이라는 시기가 시작된 뒤의 일이다.
그러므로 세계적으로 불교 교단 전체를 통하여 볼 때에는 말법시기가 일정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파리어(巴利語)로 된 <잡아함경(雜阿含經)>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지런히 신(身) • 수(受) •심(心) • 법(法)의 사염주(四念住)를 닦아서 탐욕과 분심을 끊으면 정법은 영원토록 세상에 머물러 빛나게 될 것이나, 수행하지 않게 되면 정법은 곧 소멸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여러 경전에도 『누구나 부처님 말씀대로 닦으면(如説修行) 다 반드시 견성 성불한다』하였고 조사들의 말씀에는 『참선하는 이가 견성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처럼 아주 쉽고 당연한 일이다』하였으므로, 누구나 공부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사학(邪學)과 외도(外道)가 번성한 이 시대에 났으므로, 망녕된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줄기차게 정진한다면, 하나도 실패함이 없을(萬無一失)뿐 아니라 정법은 영원히 나아갈 것이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울화(鬱火 답답할 울,불 화) ;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여 일어나는 화(火 못마땅하거나 언짢아서 생기는 노엽고 답답한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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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게송) ‘야야포불면~’ ; 만신찬속장경(卍新纂續藏經) 제88책 <거사전(居士傳) 7> 부대사전(傅大士傳) 참고.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경계(境界) ; ①어떤 영역끼리의 한계. 또는 영역끼리의 사이, 접점. ②인식 또는 어떤 세력이 미치는 범위.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Posted by 닥공닥정

§(436) 만공 스님, 금봉 스님, 고봉 스님 / 임종게(臨終偈), 후사(後事) / 우리 용화사는 영원히 전강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공부를 해가자.


**송담스님(No.436)-91년 입춘기도 법회(90.02.04)에서. (용436)


약 13분.

 


오늘 신미년 입춘(入春)날입니다.

오늘 입춘날에 조실 스님(故전강스님)의 펄펄 살아있는 사자후(獅子吼)과 같은 그런 활구 법문(活句法門)을 들었습니다.

23세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하셔서 제방(諸方) 선지식(善知識)의 인가(印可)를 받으시고 그래가지고 나와서 겪었던 사항에 대한 살아있는 법문을 들었습니다. 방금 정말 조실 스님께서 살아서 이 법상에서 하신 것과 같은 그러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방금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나오는 금봉(錦峰) 스님은 성씨(姓氏)가 박(朴)씨시고, 조실 스님보다 훨씬 연세가 많으시고, 원래 경상도 김룡사 스님인데 만공 스님께 인가(印可)를 받으신 만공 스님의 수법제자(受法弟子)이십니다.

고봉 스님도 역시 만공 스님께 인가를 받으신 수법제자이고 그러신데, 그 스님들이 다 인가받은 구참(久參)이신데, 조실 스님께서는 그때 아주 어린, 훨씬 밑의 후배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금봉 스님은 굉장히 성질이 급해서 조용 조용히 대화를 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성질이 급하고 우악하고 그러신 어른인데, 제가 정혜사(定慧寺)에서 2년간, 금봉 스님께서 거기 조실(祖室)로 계실 때에 2년간을 정혜사에서 모시고 지내서 마음으로 참 숭배하고 그러시던 선지식이셨습니다.

그 어른은 정화(淨化) 때 선학원(禪學院)에 와서 얼마동안 머물러 계셨는데 그 선학원에 전국에서 모인 모다 수좌(首座)들 앞에서 항상 하신 말씀이 ‘1, 전강(田岡)이요. 2, 고봉(高峰)이요. 3, 만공(滿空)이다.’ 이런 말씀을 막 터놓고 하셨었습니다.
그리고 ‘전강 스님이 어디 가서 조실(祖室)을 하면 내가 그 밑에 가서 공양주(供養主)를 하겠다’고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혜사 조실로 계시다가 해인사 조실로 추대를 받아서 해인사 조실로 가실 때, ‘내가 해인사 조실로 가는 것은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내가 가서 터를 닦아 놓을 테니, 간 것은 전강 스님을 조실로 모시기 위해서 내가 간다’고 그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얼마동안 조실로 계시다가 그날 수박 공양을 하시고 그리고 그 여름에 해인사 옆에 맑은 계곡에 가셔서 터억 목욕을 하시고, 그리고는 거기에 앉아서 목욕을 하시고서,

거기 그 관광객이 광주(光州)서 왔다고 그러니까 ‘광주 가면 경양방죽 가에 하꼬방 장수를 하는 참 내가 잘 아는 분이 거기 있으니까, 내가 여기 몇자 적어 줄 테니 광주에 가거든 일부러 경양방죽 가를 찾아가서 이 편지를 전해 달라’고 그렇게 해서 전하고서, 그 계곡 가에서 목욕을 하고서 타악 앉은 채로 열반(涅槃)에 드셨던 것입니다.

그 게송(偈頌)은 무엇이냐? 하면,
“청산(靑山)은 문수안(文殊眼)이요. 수성(水聲)은 관음이(觀音耳)다. 물소리는 관세음보살의 귀다. 금일세연진(今日世緣盡)하니, 오늘 세상 인연이 다하니, 의구수동류(依舊水東流)로구나. 옛을 의지해서 물은 동쪽으로 흘러가는구나.” 이러한 금봉 스님의 임종게(臨終偈)였습니다.

그 임종게를 해인사 대중한테 떠억 내놓고 그리고 임종에 들으셔도 되겠지만, 어째서 그 임종게를 써서 그 인편(人便)에 전강 조실스님께 보냈느냐? 거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습니다.

고봉 스님께서도 열반하실 때 전강 조실스님을 청했습니다.
고봉 스님께서는 중풍을 앓으셔서 잘 보행도 못하시고 또 말씀도 잘 못했습니다. 그런데 임종이 가까워지자 단식을 하시고 공양을 안 잡수니까, 대중들이 아무리 공양을 하시도록 권고를 해도 안 들으셔서,

또 대중이 전강 조실스님한테 와서 어쨌든지 좀 오셔서 공양을 잡수도록 해 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해서, 가셔서 또 이렇게 여러 가지로 - 참 서로 법(法)이 통하고,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그러헌 사이시니까 말씀을 드려 가지고 다시 잡수시기도 하고 그런 일도 있다가,

얼마 있다가 고봉 스님께서 정식으로 전강 조실스님을 청했습니다.
청해 가지고 ‘나를 위해서 임종(臨終), 마지막 내가 가는 길에 임종 법문을 설해 달라’고 청을 하셨습니다.

고봉 스님도 확철대오해서 만공 스님께 인가를 받으신 대도인(大道人)이십니다.

그래가지고 기동을 못하시고 그러니까 앉아서 이렇게 청을 하셔서,
‘그래셔서는 안 됩니다. 법상을 차리고 정식으로 법식을 거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래가지고 부축을 받아가지고 큰방으로 나오시고, 법상을 차려서 조실스님이 떠억 법상에 올라가서 법을 설하시는데,
양쪽에서 부축을 해가지고 간신히 이렇게 나오셔 가지고, 앉으시라고 해 가지고 앉아서 법문을 조실스님께서 설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이나 일맥상통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후사(後事). 고봉 스님이나 또는 금봉 큰스님께서 열반하신 마당에 만공 스님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그 법등(法燈)과 그 후사를 유촉(遺囑)하기 위한 그러헌 뜻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절차가 없이 그냥 열반에 들으시면 고봉 스님을 신(信)하던 제자들이 누구를 의지해서 공부를 하며, 금봉 스님을 의지해서 공부하는 신도나 제자들이 그런 큰스님네가 열반하신 뒤에 누구를 의지해서 공부해야 하는가? 그러한 것을 무언(無言) 중에 유촉을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조실스님께서는 그런 받으신 편지를 열어 보니까 그러한 임종게가 쓰여 있어서, 또 49재에 해인사에서 조실스님을 청하고 그래서 일부러 해인사를 가셔서 금봉 스님의 49재 법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고조사(古祖師)들은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는 자기 자신 일신상의 문제가 아니고, 부처님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중대한 문제가 거기에 걸려있기 때문에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사조(四祖) 스님이 오조(五祖) 스님, 그 팔십먹은 노인이 인가를 받으러 오니까 ‘늙어서 전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래서 ‘몸을 바꿔 와라’해 가지고, 그 소나무를 심어 놓고 가서 몸을 바꿔가지고 온 재송도인(栽松道人)의 법문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마는.

이 문제는 대단히 중대한 것입니다. 고인(古人)들은 그렇게 해서 오늘날까지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정법의 등불이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용화사는 조실스님의 법문(法門)이 다행히 녹음(錄音)을 통해서 700개나 되는 그 많은 간절한 활구참선 법문이 녹음이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 용화사는 영원히 전강 대선사를 조실로 모시고, 우리가 모두가 같이 열반하셨지만 살아계신 조실스님으로 믿고 우리가 공부를 해가자’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입춘날을 기해서 조실스님의 사자후를 들음으로 해서 여러 사부대중 여러분은 무량겁으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크고, 작은 죄가 일시에 다 소멸이 되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저의 기분이 그렇고, 저의 믿음과 감동이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처음~13분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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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후(獅子吼) ; 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만공월면(滿空月面) ; (1871~1946) 법명은 월면(月面), 호는 만공(滿空), 속명은 송도암(宋道岩). 속성은 여산(礪山) 송(宋)씨, 아버지는 송신통(宋神通) 어머니는 김(金)씨이다.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1871년(신미년) 3월 7일 출생하였다.

 

1884년(갑신년) 14세에 태허 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 스님을 계사(戒師)로 충남 서산 천장암(天藏庵)에서 출가하였다.
그 뒤 계속 천장암에서 지내다, 어른 시봉(侍奉)을 하면서 공부하기란 퍽 힘드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어, 온양 봉곡사(鳳谷寺)로 가서 노전(爐殿)을 보며 공부를 계속하다가, 1895년(을미년) 7월 25일에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空)하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하룻밤을 지나 새벽 종송(鐘頌)을 할때,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외우다가 깨닫고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요  공산의 이기(理氣)는 고금 밖이요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라  백운과 청풍은 스스로 가고 오는구나.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고  달마는 무슨 일로 서천을 건넜는고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이라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느니라.

그 후 마곡사 근처 토굴에서 공부하다가, 스님 나이 26세 때, 1896년(병신년) 7월 보름날 경허 선사가 오시니, 선사께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을 낱낱이 고백하였다.
경허 선사가 스님에게 묻기를 ‘등(藤) 토시 하나와 미선(美扇) 하나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스님의 대답이 ‘토시를 부채라고 하여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
경허 선사가 ‘네가 일찌기 다비문(茶毘文)을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경허 선사가 다시 묻기를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라 하니 이 참뜻이 무엇인고?’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이르되,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를 모르고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알겠느냐?’
선사가 다시 이르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조주 스님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드는 것이 옳다.’하고,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다시 지으라.’하고 떠났다.

그 후 정진하던 중 경허 선사를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1898년 7월에 선사가 계신 서산(瑞山)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지내다가, 경남 범어사 계명암 선원으로부터 경허 선사께 청첩장이 와서 선사를 모시고 계명선원에 가서 하안거를 마치고, 선사와 배별(拜別)한 후 통도사 백운암으로 갔다.

마침 장마 때라 보름 동안을 갇혀 있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재차 깨달으니 요사장부(了事丈夫)가 되었다.
31세 때(1901년)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며 지내다가, 34세 때(갑진년 1904년 2월 11일)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가는 길에 천장암에 들른 경허 선사를 뵙고, 그동안 공부를 지은 것을 아뢰니, 선사가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운월계산처처동(雲月溪山處處同)  구름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수산선자대가풍(叟山禪子大家風)  수산선자(叟山禪子)의 대가풍(大家風)이여!
은근분부무문인(慇懃分付無文印)  은근히 무문인(無文印)을 분부하노니,
일단기권활안중(一段機權活眼中)  한조각 권세 기틀 안중(眼中)에 살았구나.

1905년 덕숭산에 금선대(金仙臺)라 이름한 초암을 짓고 지내고, 그 뒤 수덕사(修德寺)·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을 중창하고 선풍(禪風)을 떨치다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마하연(摩訶衍)에 가서 3년을 지내고,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와 서산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다.

말년에 덕숭산 동편 산정에 전월사(轉月舍)라 이름한 한칸 띳집을 짓고 지내다,
1946년(병술년) 10월 20일에 목욕 단좌(端坐)한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고 껄껄 웃고 문득 입적(入寂) 하였다.
나이 76, 법랍(法臘) 62. 제자들이 스님의 법어를 모은 「만공법어(滿空法語)」가 있다.
[참고]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수법제자(受法弟子) ; 스승으로부터 법(法)을 인가(印可) 받은 제자.
*구참(久參) ; 오랫동안 참선한 수행승.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정화(淨化) ; 한국 불교 정화운동. 1910년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 국권을 상실한 한일합병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이를 공포한 경술국치(庚戌國恥)이후, 1911년 일제는 한국 불교를 억압하고 민족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사찰령을 제정·공포하였다. 그 후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승단이 급속도로 세속화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 불교계를 혁신하고 한국 불교에 남아있는 식민주의 불교, 왜색 불교를 청산하기 위해 1954년부터 1960년대에 걸쳐 일어난 한국 불교 정화운동.
*선학원(禪學院) ;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절. 1921년 남전(南泉)·도봉(道峰)·석두(石頭) 등 3인을 중심으로 지었다. 선학원은 당시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합하고 사찰령을 반포하여 한국 불교를 일본 총독부의 관할 아래에 다루게 되었을적에,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승단이 급속도로 세속화되어 가는 것을 개탄, 불조(佛祖)의 정맥을 굳게 계승하기 위하여 창설된 선종의 중앙기관이다.
사찰령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하여 절(寺, 庵)이란 이름을 쓰지 않고, 선학원이라 하였다. 그 후부터 한국 불교 선종의 책원지(策源地)로서 은연한 가운데 선객들을 통솔하였으며, 1934년 12월 5일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으로 발족하여 초대 이사로 만공·한암·적음·남전·성월 스님이 선임되었다. 해방된 뒤에는 재단법인 선학원으로 정관을 고쳤다.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공양주(供養主) ; 절에서 밥을 짓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하꼬방 ; 판잣집(판자로 허술하게 지은 집). 箱房. 箱(상자)의 일본어 훈독 ‘ばこ(하꼬)’+방(房)이 결합된 말.
*하꼬방 장수 ; 전강 선사와 송담 스님이 광주(光州) 경양방죽 가의 판잣집에서 3~4년 낮에는 판잣집 한편에서 장사를 하고 밤에는 판잣집의 작은 방에서 정진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임종게(臨終偈) ; 열반게(涅槃偈)·열반송(涅槃頌)·입적게(入寂偈)라고도 한다.
선승(禪僧)이나 고승(高僧)들이 열반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후인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을 말한다. 한시의 오언절구나 칠언절구 형태를 취한다.
*일맥상통(一脈相通) ; 사고방식이나 성질 등이 두 대상 간에 서로 통하거나 비슷해짐.
*후사(後事) ; ①뒷날에 생길 일. ②죽은 뒤의 일.
*법등(法燈) ; 부처님의 가르침. 미(迷)한 세계의 캄캄한 마음을 없애는 것을 등불에 비유한 것.
*유촉(遺囑) ; 죽은 뒤의 일을 부탁함. 또는 그런 부탁.
*사십구재(49재, 四十九齋) ; 사십구일재(49일재, 四十九日齋) 또는 칠칠재(7 · 7재, 七七齋).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면서 또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천수경, 무상계, 반야심경, 장엄염불, 금강경 등), 한 생각 돌려 무상을 깨달아 윤회를 벗어나 해탈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 죽은 날로부터 7일마다 7회에 걸쳐 행하는 영가를 위해 베푸는 법회의식.
불교의 내세관(來世觀)에서는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이 죽어서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49일 동안을 중음(中陰)이라 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과보를 받을 다음 생이 결정되므로, 이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 영가가 죄업을 참회하고 지혜의 눈을 밝혀 해탈의 길을 가도록 이 재(齋)을 지냄.
특히,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날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이라고 하여 7회째의 재(齋)를 중요시함.

불경(佛經)에서 설한 바에 의하면 사람의 존재 상태를 4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①생유(生有: 태어나는 순간) ②본유(本有: 生에서 死까지 생애) ③사유(死有: 죽는 그 순간) ④중유(中有: 이생에 죽어서 다음 生까지를 말함)이다.
이들 중 네 번째의 중유(中有)의 상태의 정상적인 기간이 49일이다. 즉 사람이 죽은 뒤에는 일반적인 경우 49일이면 중유(中有)가 끝나고 다음 생(生)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전인 48일째에 정성을 다하여 영혼의 명복을 비는 것이 49일재이다.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재송도인(栽松道人) ; 중국 선종(禪宗)의 제4조 도신대사(道信大師 580~651)가 제자를 맞아 인증을 하였지만, 제자가 너무 늙어 스승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법을 이을 사람이 없으니 몸을 바꾸어 오도록 하였다.
이에 몸을 바꾸어 후에 다시 만날 때 증거로 삼기 위해 황매산에 소나무를 심었다. ‘소나무를 심었다’는 뜻에서 ‘재송도인(栽松道人)’이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 5조 홍인대사(弘仁大師 602~675)이다.
*등등상속(燈燈相續) ; 등(燈)은 중생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등(燈)에 비유한 말, 이 진리의 등(燈)을 스승이 그 제자로 해서 계속 면면히 이어짐을 일컬음.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