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장'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19.04.01 §(124) 최상승법은 생사 화택(火宅) 속에서 화택을 면하는 길 / 극한 상황 그 자체가 훌륭한 선불장, 선방 / 분별지로 아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분별지는 생사를 윤회하게 하는 원인.
  2. 2018.09.01 §(792) (게송)인생여환우여몽~ / 자성 부처님을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이것이 생사해탈의 길이요, 말세를 정법시대로 만드는 오직 유일한 길.
  3. 2017.05.30 §(627) 우리 자신이 부처 /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이 딴 데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최상승법 /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 / 극락 가는 연습이 바로 이뭣..
  4. 2016.01.15 §(422) (게송)사서순환난부한~ / 대혜종고 선사 법문 ‘선(禪)이라 하는 것은~’ / 도(道)가 어찌 꼭 산중에만 있겠습니까? / (게송)수류상출몰~.
  5. 2015.05.07 §(세등24) 유루복, 무루복을 겸해서 지어야 / 自利利他 / 飯器已破 / 단전호흡과 화두가 함께 되어가게 /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있는 선방.
  6. 2014.07.28 §(337) (게송)적수성동신유지~, 심수만경전~, 청군앙면간허공~ / 중생의 모든 희로애락이 바로 그곳이 선불장(選佛場) / 자기 소임을 하면서 거기에 즉해서 '이뭣고?'
  7. 2014.06.14 §(401) (게송)기래끽반냉첨의~ / 발심한 사람에게는 모두가 불보살의 화현신이다 / 화두는 가장 무서운 무기 / 내가 곧 세계 / (게송)생사차무승여속~ / 일념단속.
  8. 2014.03.09 §(세등68) (게송)개개면전명월백~ / 의심관(疑心觀) /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
  9. 2013.12.06 §(088) 화두, 화두의심, 깨달음
  10. 2013.11.27 §(140) 정진(精進)이란? 정진심(精進心)을 일으킨 것은 벌써 바른 정진이 아니다.
아는 것과 깨달음2019. 4. 1. 06:57

 

 

§(124) 최상승법은 생사 화택(火宅) 속에서 화택을 면하는 길 / 극한 상황 그 자체가 훌륭한 선불장, 선방 / 분별지로 아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분별지는 생사를 윤회하게 하는 원인.

 

이 도리는 가르켜 줄래야 가르켜 줄 수가 없는 것이지만 자기의 모든 정성을 다해서 가르켜 줄려고 노력을 해야 그것이 바로 자비심(慈悲心)이고, 이 도리는 배울 수가 없는 것이지만 목숨을 바쳐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 버릴 정도의 그러한 철저한 신심으로 배울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을 바로 믿고 바로 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도업(道業)을 성취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24)—1980년(경신년) 하안거 결제 법어(80.05.28) (용124)

 

(1) 약 19분.

 

(2) 약 10분.

 

(1)------------------

 

오늘은 경신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날입니다. 동시에 백일기도 입재일입니다.

해마다 4월 15일이면 결제를 해 가지고 석 달 동안 그 더운 여름철 더위를 모르고 정진을 해서 7월 보름날, 백중날 해제를 해 왔습니다.

 

금년 여름에는 법당 신축 관계도 있고 또 저 밑에 두 선방과 후원, 창고 해서 대소 건물 일곱 채가 철거가 되게 되어서 결제(結制)를 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를 했었는데, 다행히 이렇게 오늘 결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헐릴 때 헐리드라도 그때까지는 우리가 서로 결제를 해 가지고 열심히 정진을 하는 것이 도리에도 합당하고 우리 불사(佛事)를 위해서도 좋으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위태로운 그러한 지경에 놓여 있고 우리나라도 대단히 걱정된 그러한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 말세에 우리의 생명과 가정과 사회 국가 민족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위태로운 지경에서 우리는 살 수밖에는 없게 되었는가?

 

이것은 이웃나라가 나뻐서 그런 것도 아니고, 저 소련이나 무슨 공산국가가 나뻐서 그렇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 인과(因果)의 법칙에서 보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한때 태어날 수밖에는 없도록 동업(同業)을 지어 놓은 것이 있어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이렇게 함께 같은 시대에 하늘을 머리에 이고 그 괴로움과 근심을 함께 하면서 살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나의 몸을 단속하고, 나의 입을 단속하고, 나의 마음을 단속해야 할 것인가?

물어 볼 것도 없이 최상승법(最上乘法), 불법(佛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 이외에는 우리의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단속해서 이 생사고락(生死苦樂)의 구덩이 속에서, 이 생사 화택(火宅) 속에서 화택을 면하는 길은 오직 최상승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지어 가지고 받는 것을 누구를 원망해 본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지어 가지고 이러한 시대를 만났고 이러한 일을 당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진댄 내가 지은 그 업(業)에 근원을 해결을 해야만 당장 자기의 앞길이 트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빚을 자기가 갚어야 그 부채로부터 자기는 해방이 될 것입니다. 빚을 갚지 않고 아무리 이리저리 피해 다닌다고 해서 그 빚이 없어질 까닭이 없고, 피해 다닐수록 더욱 불안하고 더욱 공포에 싸여서 그러는 동안에 죄는 더욱 가증(加增)해 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지은 빚 갚고 빚을 다 갚아 버리면 그때는 다리를 쭉 뻗고 잘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에 태어난 사람들이 살아갈 오직 한 길이요, 분명한 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자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최상승법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렇게 산승(山僧)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들이 듣고 계십니다. 듣고 있을 때는 그 듣고 있는 그놈, 그놈을 여의고 우리는 자성(自性)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하는 동안에는 영겁을 두고 찾어도 그 사람은 찾을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장소가 따로 없고, 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물론 적당한 시간과 적당한 장소가 있으면 앉아서 기본자세,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그리고 공부를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가 언제 어디서라도 그러한 시간과 공간이 꼭 나에 알맞게 마련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알맞게 마련되지 아니했다 해서 밤낮 그러한 장소와 시간만 찾아다니다가는 결국은 금생에 그 사람은 공부를 못할 사람인 것입니다.

 

섰을 때도 「이뭣고?」

앉았을 때도 「이뭣고?」

밥을 먹을 때도 「이뭣고?」

걸어 다닐 때도 「이뭣고?」

일을 할 때도 「이뭣고?」

 

성이 날 때 오히려 더 정신을 차려서 「이뭣고?」

속이 상할 때 「이뭣고?」

괴롭고 슬플 때 「이뭣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 「이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을 해 나갈 때 그 사람에게는 가장 정진하기에 알맞은 시간이 제공이 되는 것이며, 가장 정진하기에 알맞는 장소가 제공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시간과 장소를 찾아다니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시간과 공간이 만나지지 않지만, 시간과 공간을 따로 찾지 아니하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바로 그때 그 찰나 찰나를 놓치지 아니하고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어 나간다면은 그 사람은 어떠한 극한 상황 속에 놓여 진다하더라도 바로 그 극한 상황 그 자체가 훌륭한 선불장(選佛場)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뜻있는 좋은 선방(禪房)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승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한 시간 한 시간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온통 세계가 불바다가 되고 온통 나라가 난리가 일어나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진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오히려 발심(發心)하고 오히려 분심(憤心)을 내고 철저한 부처님 제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서 공부를 못한다. 화두가 잘 들리지 아니한다. 의심이 잘 나지를 않는다. 몸이 아퍼서 공부를 잘 못한다' 이러한 말들은 그와 같이 공부한 사람에게는 그러한 말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꽃 피고 잎이 피고, 새가 울고 물이 흐르고 구름이 나르고 있는 고대로 열반(涅槃)의 세계요, 극락세계요, 고대로 가 전부 불세계(佛世界)인데 무엇을 깨닫느냐? 무엇을 찾으며 깨달을 것이 무엇이 있느냐?' 아까 어떤 학인(學人)이 와서 그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열반경』에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라고 하는 게송(偈頌)이 있습니다. 바로 그 학인은 그 게송의 뜻을 그렇게 물어 온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비단 그 게송뿐만이 아니라 열반경이나 원각경이나 경을 보면은 그러한 내용의 뜻이 전편의 경전에 다 그러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경을 읽고, 그러한 경에 대한 법문을 듣고서 그런 줄로 알면 그 사람에게는 도 닦을 필요도 없고 참선(參禪)도 할 필요가 없느냐? 그렇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전부가 부처님의 몸뚱이요,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는 부처님의 참 설법이다' 이렇게 믿고.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고, 우리 몸 이대로 고대로 성불(成佛)이고 그대로 열반이다. 따로 버려야 할 생사도 없고 증득해야 할 열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고서 그리고서 참선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내용을 경(經)을 통해서 알았다고 해서, 그렇게 믿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우리가 참선이 할 필요도 없고 깨달을 필요도 없고, 무슨 뭐 법문을 들을 필요도 없고 법을 설할 필요도 없고, 중생을 제도할 필요도 없고 제도 받을 필요도 없다. 뭐 있는 그대로가 바로 열반인데 무슨 해탈을 생사해탈 하냐' 그래 가지고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자고.

 

참으로 이 도리를 요달(了達)한 사람은 할 일이라고는 없어서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한숨 자고 그뿐인 것입니다마는.

요달하지 못한 분상에는, 아까 '이대로가 곧 전부가 열반이요, 열반이기 때문에 벗어야 할 생사도 없다'고 하는 내용을 알기만 알았지, 실지 그러한 경계에 자기가 계합(契合)하지 못하고 투철하지 못한 분상에는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하고,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목숨 바쳐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그것이, 아는 것 그것 가지고 생사(生死)에 자유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에 아는 것이 그것이 도(道)고, 아는 것으로써 구경(究竟)의 경지라고 한다면 가르켜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라면 가르켜 줄 수가 있어요.

 

그러나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의 뜻을 아무리 알아듣기 쉽게 납득이 되도록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그럴싸하게 설명을 해 주면 '아하, 그런 뜻이로구나' 이렇게 우리는 그런 경전에 있는 어려운 말씀을 어느 정도 납득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별지(分別智)로써, 중생의 분별지로써 이해를 한 것은 어디까지나 아는 것이지 그것이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분별지로 아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그럴싸하게 알았다 하드라도 깨달음이 아니라 바로 그것은 중생의 분별지요, 분별지는 생사를 윤회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生死輪廻)가 다른 데에서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분별심이 끊어지지 아니하면 천하 없이 그 생각이 옳은 생각이요, 경전에 쓰여 있는 말씀 고대로를 외우고 이해하고 있다 하더라도 분별심으로 따지고 있는 동안에는 어디까지나 부처님 말씀이라 하드라도 그것은 분별지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분별지로 무엇을 알고 분별지가 끊어지지 않는 동안에는 계속 생사윤회의 원인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경전에 있는 말씀을 올바르게 배우고 알았다면 목숨 바쳐서—정말 생사가 무상(無常)하다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 이튿날로 미룰 것도 아니요, 그날 저녁으로 미룰 것도 아니고 당장 그 자리에서부터 바른 선지식을 찾아서 선지식의 지도하에 참선을 하는 그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도리는 가르켜 줄래야 가르켜 줄 수가 없는 것이지만 자기의 모든 정성을 다해서 가르켜 줄려고 노력을 해야 그것이 바로 자비심(慈悲心)이고, 이 도리는 배울 수가 없는 것이지만 목숨을 바쳐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 버릴 정도의 그러한 철저한 신심으로 배울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을 바로 믿고 바로 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도업(道業)을 성취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처음~19분13초)

 

 

 

(2)------------------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몽산(蒙山) 스님이 마을에 학자로서 불법(佛法)을 심히 비방을 하든 사람이 강아지 꿈을 꾸고서 자기가 자칫했으면 강아지로 태어날 뻔 봤다고 하는 것을 확인을 하고 거기에 발심을 해 가지고 출가해서 대도인이 된 인연 설화를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경전 가운데에도 수없이 많은 비유의 설화와 인연의 법문이 많지만 그러한 한 토막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와 같은 그러한 비유 인과설 속에서 신심과 분심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면 그야말로 부처님의 살아 있는 법문을 바로 알아들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약이 꼭 인삼, 녹용과 같은 그러한 값비싼 약만이 우리의 병을 나수는 것이 아니고 값이 헐어디 헐은 들과 산에 나 있는 야생초 몇 뿌리를 삶아서 먹어도 병을 신효(神效)하게 낫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 하면 어려운 법문, 암만 듣고 또 읽어도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그런 어려운 경전의 말씀만이 정말 높고 깊은 진리다. 그러한 어려운 경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혹 그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시는지.

 

'나는 아직 경도 한 권도 읽지 못했고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천수(千手)도 아직 못 욉니다. 그러니 불명(佛名)도 아직 탈 수가 없고 더군다나 참선은 할 생각조차도 못 냅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신 분을 가끔 만납니다마는,

무슨 천수(千手)를 달달 외우고, 무슨 경전을 많이 보고, 어려운 한문으로 된 경전을 해석할 줄 알고 그러한 것은 활구참선을 하는데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경전을 많이 보고 그래 가지고 알아 가지고 자기가 '참, 나는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 누가 뭐 어떠한 승려라 하더라도 감히 내 앞에 무슨 법문을 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법화경이고 화엄경이고 금강경이고 닥치는 대로 다 외우고 읽고 해석할 줄 안다. 나를 덮을 사람이 누가 있느냐?'

이러한 거사나 신도가 계신다고 하면 참 그렇게 딱하고 안될 수가 없습니다. 불법을 무슨 그런 지식으로 생각하고, 이론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불법은 많이 아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많이 외우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그러면 경은 뭐하러 부처님이 설하셨으며, 경은 뭐하러 해인사에 그렇게 경판을 오래 보관하면서 인쇄를 해서 내놓을 필요가 있느냐? 뭐 많이 봐도 소용이 없다면 한 권도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이렇게 또 생각을 하실는지 모르지만.

 

보되 한 글자도 남은 바가 없어야 하고, 글자로 된 경전을 읽으므로 해서 그 글자로 된 경전은 완전히 소화가 되어서 그것이 없어지고서 부처님께서 입을 통해서 설할 수 없는 참 진리를 자기의 마음에서 깨달라야만 그 사람은 경전을 옳게 보았다고 할 것입니다.

 

'닭똥이 거름이 된다. 또는 사람 똥이 거름이 된다. 또는 풀을 참 많이 비어서 그래 가지고 퇴비를 하면 좋다' 그러지만 닭똥을 썩히지 아니하고 푹 띄워서 완전히 발효를 시킨 거름이라야 그것을 밭에다 주고 식물에다 주어도 거기서 그 참으로 비료가 되는 것이지,

푹 썩지 아니한 발효하지 아니한 쌩똥을 갔다가 과실 과목(果木)이나 채소나 곡식에 주면 거기서 열이 나 가지고 과일 나무 뿌리가 참으로 썩어 버리고 채소고 곡식이고 하나도 건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말씀도 그 경전을 읽고서 완전히 그놈이 삭아서 한 글자도 남음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거기에서 참나를 깨닫게 되아야 그 경전을 옳게 보는 것입니다.

 

태권도나 유도나 검도 그런 걸 처음에 배우면 그 주먹이 근실근실해 가지고 누구하고 한번 싸워 보고 싶고, 벽도 한번 차 보고 싶고, 조그만한 일에 누가 있으면 싸움하는 데만 있으면 자기가 탁! 가로막고 나서서 한번 그놈을 뽐내 보고 싶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 삼단 사단 오단 육단 올라가면 여간해서 어디 가서 주먹을 내놓지도 않고 자기가 그러한 무술을 가지고 있는 척을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푹 썩어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썩어서 아주 흔적이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도 해 갈수록—'내노라'하는 생각, '나는 이렇게 참선을 잘했다 잘하고 있다'는 생각, '나는 참선을 해서 한 소식을 했다' 그래 가지고 그런 것을 그러한 얻었다고 하는 생각, '깨달랐다'고 하는 생각,

'나는 참선을 깨닫지는 못했어도 30년을 했다'고 하는 그러한 밥그릇 수를 따져서 자기가 으시대고 새로 공부하는 사람을 갖다가 자기가 오래했다고 하는 그것으로써 짓이기고 욱박지르고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참선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오래할수록 참으로 바르게 한 사람이라면 아무 냄새가 나지를 아니하고 더욱 겸손하고 그 마음은 허공과 같이 맑고 깨끗하고 조용할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지어 나가는 사람은 30년을 했건 10년을 했건 또는 공부를 시작한지가 불과 1년 밖에 안 되었다 하드라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진실하게 참되게 닦아 간 사람은 그 사람이 참으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닦아 가야만 도업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깨닫고서도 깨달랐다고 하는 각견(覺見)이 없어져야 그 사람은 바로 깨달은 사람인 것입니다.

하물며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깨달은 척하고 으시대고 뽐낸다고 해서 그것이 어디다 쓸 것이여.(19분14초~28분2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

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동업(同業) ; 동일한 부류의 업(業). 동일한 과보를 받는 원인이 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삼업(三業) : trini karmani  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동 전체를 말한다.

몸으로 짓는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세 가지와, 입으로 짓는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네 가지와, 뜻으로 짓는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의 세 가지가 있다。이것이 삼업이다.

*생사고락(生死苦樂) ; 삶과 죽음, 괴로움과 즐거움을 통틀어 이르는 말.

*화택(火宅) ; 번뇌와 괴로움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불[火]에 타고 있는 집[宅]에 비유한 말. 불길에 휩싸인 무서운 세계. 법화경에 나오는 「三界無安猶如火宅」라는 구절에 근거.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과거시험(科擧試驗 예전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리 채용 시험 제도로서 보는 시험)을 보는 장소에서 유추된 말이다.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선당(禪堂) · 승당(僧堂) · 선방(禪房) 등을 가리킨다. 수행자들이 선방에서 좌선하여 도를 깨달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참고]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4권 「단하천연전(丹霞天然傳)」

鄧州 丹霞天然禪師不知何許人也 初習儒學 將入長安應擧 方宿於逆旅 忽夢白光滿室 占者曰 解空之祥也 偶一禪客 問曰 仁者何往 曰 選官去 禪客曰 選官何如選佛 曰 選佛當往何所 禪客曰 今江西馬大師出世 是選佛之場 仁者可往 遂直造江西

 

등주 단하천연선사는 어느 곳의 사람인지 모른다. 처음에 유교를 배워서 장안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길에 여관에서 자다가 홀연히 밝은 빛이 방에 가득차는 꿈을 꾸었다. 이에 점치는 자가 '공을 터득할[解空] 상서로운 조짐이다'라고 풀었다.

 

우연히 어떤 선객(禪客)이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 '관리 뽑는 시험을 보러 갑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선객이 '관리 뽑는 시험이 어찌 부처 뽑는 시험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단하가 '부처 뽑는 시험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선객이 '지금 강서(江西)에서 마조대사가 출세 했습니다. 그곳이 부처를 뽑는 시험장[選佛之場]이니 그곳에 가보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말을 듣고 그길로 강서로 갔다.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4분 48초)

[참고 ❸] 송담스님(No.401)—1989년 11월 첫째일요법회.

이제 가을도 가고 겨울철에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음력 10월 보름에 겨울철 안거(安居)가 시작이 됩니다. 보살님네는 뒤로 미루지 말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다 보면 한량이 없습니다. 탁! 큰 마음을 내서 결단심을 내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또 이 한 철을 열심히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에 새로 선방(禪房)을 확장을 했으니 어찌던지 와서 정진을 잘 하시길 바라고,

부득이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접 나와서 공부를 못하신 보살님네, 거사님네들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 속에서 항상 '바로 있는—발 디디고 서 있는 그 자리, 앉어 있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뭣고?」만 탁 들면 벌써 용화사 선원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용화사에 방부를 들이고, 와서 큰방에 앉어 계셔도 밤낮 여기 앉어서 집안 생각, 아들 생각, 딸 생각 그러고 있으면은 그건 방부 들이나마나 하는 거고.

댁에 계시더라도 항상 「이뭣고?」를 들고 일 하다가도 퍼뜩 챙기고, 앉어서 챙기고, 서서 챙기고, 밥 먹으면서 챙기고, 똥 누면서 챙기면은 바로 집이 용화사 선원이거든.

 

시간도 공간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척지간(咫尺之間)이 수천 리, 수천 리가 지척이 되는 것입니다. 백년 천년 하면 긴 것 같지마는 일 찰나간이고, 일 찰나간이 잠깐인 것 같지마는 이것이 바로 무량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법성게(法性偈)」를 외우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거든. 이것은 진리에 입각해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래.

 

둘이 나란히 한집에서 한 이불 속에서 자도 벌써 생각이 틀어져 버리면은 천리(千里)거든. 부부간도 천리 웬수여. 저 천리 밖에 떨어졌어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고 있으면은 벌써 부부일신(夫婦一身)이거든.

 

시간과 공간을 그것이 또 다른 것이 아니야. 시간이고 곧 공간이고, 공간이 시간이거든.

공간 없는 시간이 없고 시간 없는 공간이 없어. 시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공간이고 시간과 공간은 베의 날과 씨가 서로 이렇게 짜여져서 베를 짜듯이 시간과 공간도 역시 마찬가지여.

 

그래서 어느 때, 어느 시간 무엇을 하실 때라도 항상 화두를 들고, 화두 하나만을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저 딱 화두를 거각(擧却)하면 그 자리에는 부처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는 모든 조사(祖師)가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입승(立繩) 스님이 탁! 죽비를 들고 앉아 있는 자리다 그말이거든.

 

그러니 입승 스님이 죽비를 들고 앉아 있고, 조실 스님이 탁! 지켜보고 계시고, 모든 조사 스님이 그 자리에 계시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자리에 계시는데 어느 곳이 선불장(選佛場)이 아니겠습니까?(54분57초~59분45초)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학인(學人) ;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요달(了達 마칠·완전히·밝을 료/통달할·이룰 달) ; ①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밝게 통달함. ②깨달음에 도달하다.

*분상(分上 분수 분/윗 상)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참고] 분(分) : 분수(分數 -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상(上) : ①‘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②‘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예) 정진하는 분상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분별지(分別智) ; 생멸 변화하는 물심(物心)의 모든 현상을 분별하는 지혜.

범부(凡夫)의 지위에서는 허망하게 헤아리며 분별하는 망상이며, 불지(佛地)에서는 방편을 발휘하는 후득지(後得智)이다. 범부의 허망한 분별을 떠나면 무분별지(無分別智, 근본지根本智)와 상응하게 되는데, 이것이 근본적인 진실한 지혜이다.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후득지(後得智) ; 근본지(根本智)에 이른 후(後)에 얻는[得] 지혜(智慧)라는 뜻.

모든 분별이 끊어진 경지에 이른 후에 다시 차별 현상을 있는 그대로 확연히 아는 지혜. 모든 번뇌와 망상이 끊어진 깨달음을 이른 후에 다시 온갖 차별을 명명백백하게 아는 지혜.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혜명(慧命) : 지혜를 생명에 비유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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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千手) ; 천수경(千手經). 관음신앙을 구체화하기 위해 엮어진 경으로, 현재 사찰에서 독송하고 있는 천수경의 구성은 천구백년 이후에 갖추어진 것이다.

천수경은 한국불교 신앙의례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경전으로, 천수관음(千手觀音)의 공덕을 찬탄하고 그에게 귀의하여 참회하고 발원하는 글과 진언(眞言)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근실근실하다 ; 가려운 느낌이 자꾸 나다.

*각견(覺見) ; 깨달음[覺]에 집착하는 견해. 불법은 모든 속박을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인데, 그 깨달음[覺]에 집착하여 반대로 또 하나의 속박을 초래하는 것을 경계하는 용어. 모든 견해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는 선종의 입장을 반영한다.

 

Posted by 닥공닥정
최근 법문2018. 9. 1. 14:14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792) (게송)인생여환우여몽~ / 자성 부처님을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이것이 생사해탈의 길이요, 말세를 정법시대로 만드는 오직 유일한 길.

 

어피차 인생이라 하는 것은 한번 태어나면 늙어서 병들어서 죽기 마련인데, 그 생로병사 속에 살면서 영원을 사는 길이 바로 나의 불성(佛性)을 찾는 ‘이뭣고?’인 것입니다.

 

비록 말세라 하더라도 참나를 찾는 최상승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해서 나의 속에 있는 나의 자성 부처님을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바로 현대 말세가 생부처님[生佛]이 살아계신 시대와 같은 것입니다.

 

방법이 있고 길이 있는데 안 하는 것은 자기가 신심이 부족하거나 게을러서 그런 것이니 신심을 내서 게으른 생각을 이겨내고, 그 속에서 ‘이뭣고?’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오히려 이 흥망성쇠가 있는 이 말세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철저하게 무상을 깨닫고 참나를 찾는 공부를 하기에 좋은 선불장이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792) - 2018년 하안거 해제 (용792)

 

약 21분.

 

인생여환우여몽(人生如幻又如夢)이요  낙일종시고일장(樂日終時苦日長)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야심두무정혜(若也心頭無正慧)하면  사장하물답명왕(死將何物答冥王)고

나무~아미타불~

 

인생여환우여몽(人生如幻又如夢)이요  낙일종시고일장(樂日終時苦日長)이다. 인생은 환상과 같고 또 꿈과 같은 것이며, 즐거운 날이 끝나면 괴로운 날이 길도다.

 

만약 마음에 바른 지혜가 없으면,(若也心頭無正慧)

죽어서 무슨 물건으로 염라대왕 앞에 대답을 할 것인가.(死將何物答冥王)

 

이 게송은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읊으신 게송(偈頌)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빈부귀천과 생로병사 속에서 일생을 살다가 가는데, 냉정히 살펴보면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못하고 꿈과 같은 것이다 그말이지. 부자로 살거나 높은 벼슬을 하거나 권리를 행하거나 다 환상이요 꿈이다 그거거든.

즐거운 날이 있으면 잠시간이요, 금방 즐거움이 끝나면은 고통 오는 날이 돌아온다 그말이지.

 

만약에 마음에 바른 지혜가 없다면, 참선(參禪)을 해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사장하물(死將何物)로 답명왕(答冥王)고, 죽어서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끌려가면 무엇을 가지고 대답을 할 것이냐.

 

이 게송은 정말 우리 말세(末世)에 태어났으나 다행히 불법을 믿고, 이 자리에 모이신 비구・비구니・청신사・청신녀 여러분은 이 법당에서 서산대사의 진리가 담긴 이 게송을 우리가 같이 듣게 됩니다.

 

세상은 비록 말세가 되어서 세계가 여기저기서 전쟁을 하고 조용할 날이 없지마는 우리는 다행히 불법을 믿고, 또 이 자리에 모여서 전강 조실 스님의 최상승 법문(法門)을 다 같이 듣고 또 산승(山僧)의 간절한 말씀을 여러분에게 하고, 여러분이 듣게 된 인연을 생각하면 말세라고 한탄할 것도 없고.

비록 말세라 하더라도 우리가 정법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면 바로 말세가 바로 정법시대(正法時代)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7월 15일(음력), 하안거 해제날이고 백종날입니다.

온 세계가 서로 전쟁을 하고 헐고 뜯고 조용한 날이 없지마는 우리가 정법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면 말세라고 조끔도 한탄할 것도 없고,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모다 그런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데에 관여할 것도 없고, 말세일수록 더욱 무상(無常)을 깨닫고 열심히 정법을 믿고 ‘이뭣고?’를 한다면 오히려 이 말세에 태어난 것이 대단히 다행하고 다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천년 전에 태어났거나 삼천년 전에 부처님 때에 태어났거나 불법을 믿고 참나를 찾는 공부를 하면 삼천년 전이나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차등이 없을 것입니다.

어피차 인생이라 하는 것은 한번 태어나면 늙어서 병들어서 죽기 마련인데, 그 생로병사 속에 살면서 영원을 사는 길이 바로 나의 불성(佛性)을 찾는 ‘이뭣고?’인 것입니다.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뭔 일이 마음대로 되어도 ‘이뭣고?’ 마음대로 안 되어도 ‘이뭣고?’를 찾아서 나의 몸속에 있는 나의 부처님을 찾는 참선을 한다면 말세라고 해서 조금도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다 흥망성쇠의 이야기고 생로병사의 사건들이지마는 그럴수록에 항상 나의 자성불(自性佛)을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오히려 온 세상이 무상하고 흥망성쇠가 있을수록에 우리는 무상을 깨닫고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말세라고 해서 무엇이 부족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천년 전에 부처님 계실 때 태어났어도 불법을 믿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고, 비록 말세에 태어났어도 정법을 믿고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말세가 한탄할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듣고 하는 것이 모두가 흥망성쇠의 사건들이지마는 그 흥망성쇠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 나의 자성(自性)의 부처님을 찾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성 부처님을 찾는 것이, 이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이요, 말세를 정법시대로 만드는 오직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오늘은 무술년 7월 15일(음력), 하안거 해제일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경청을 했습니다. 옛날 녹음기가 없을 때는 돌아가시고 안 계신 조실 스님의 법문을 육성으로 어떻게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행히 말세라 하더라도 녹음법문(錄音法門)을 들을 수가 있는 것은 과학의 힘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조실 스님 법문을 녹음기를 통해서 듣고, 그리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열심히 ‘이뭣고?’를 하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행주좌와 간에 항상 한다면 말세일수록 더욱 다행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흥망성쇠가 있고, 우리의 몸에는 생로병사가 있지마는 흥망성쇠와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 생사 속에서 생사해탈하는 길이 바로 나의 자성의 부처님을 찾는 길인 것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고, 벼슬이 아무리 높고 하다 하더라도 나의 자성불을 찾는 공부를 안 하면 돈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권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비록 말세라 하더라도 참나를 찾는 최상승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해서 나의 속에 있는 나의 자성 부처님을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바로 현대 말세가 생부처님[生佛]이 살아계신 시대와 같은 것입니다.

 

슬플 때도 ‘이뭣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참나를 찾는 선불장(選佛場)이요,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방법이 있고 길이 있는데 안 하는 것은 자기가 신심이 부족하거나 게을러서 그런 것이니 신심을 내서 게으른 생각을 이겨내고, 그 속에서 ‘이뭣고?’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오히려 이 흥망성쇠가 있는 이 말세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철저하게 무상을 깨닫고 참나를 찾는 공부를 하기에 좋은 선불장이 되는 것입니다.

 

어피차 한번 태어나면 늙어서 병들어 죽는 것은 아무리 권리가 높고, 재산이 많고, 힘이 세다 하더라도 그것은 면할 수가 없는데, 그 흥망성쇠 속에서 항상 ‘이뭣고?’를 하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열심히 나의 자성 부처님을 찾는 수행을 한다면,

이 말세야말로 부처님을 깨닫고 나의 몸속에 있는 자성의 부처님을 찾는 열심히 최상승법을 실천을 해 나간다면 말세일수록에 우리로 하여금 무상을 깨닫고 참나를 깨닫는 가장 좋은, 부처님 찾는 선불장이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 모이신 비구・비구니・사미・사미니・청신사・청신녀 여러분은 산승이 이렇게 구십이 넘은 늙은이로서 이렇게 간곡한 마음으로 여러분께 이 말씀을 드리게 된 보람을 산승은 느낍니다.

여러분은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의지해서 열심히 ‘이뭣고?’를 해서 이 받기 어려운 사람몸 받은 이 말세에 여러분은 나를 찾는 참선법에 의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시리라고 산승은 굳게 믿습니다.

 

그렇게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분은 손을 한번 들어보세요.

(대중 손 든 다음, 박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세에 비록 우리가 만났지마는 이렇게 최상승법을 말씀을 드리고, 여러분이 그것을 듣고 열심히 실천을 하겠다고 손을 들어주셨으니 산승은 굳게 믿겠습니다.

(대중 박수)

 

권리가 아무리 높고, 재산이 아무리 많고, 힘이 아무리 세다 하더라도 그것 가지고는 생사(生死)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돈이 있거나 없거나, 권리가 있거나 없거나,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열심히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내가 나의 마음의 부처를 찾는 공부를 열심히만 한다면 이 말세가 바로 부처님 정법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박수를 치고 손을 들어주신 것을 정말 믿습니다.

 

이것을 열심히 해야 불법을 옳게 믿는 것이고, 이것을 열심히 해야 생사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서 열리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산승이 이렇게 간곡히 열심히 여러분에게 하는 이 말씀을 믿고 따르지 아니하면 후생에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 무엇을 가지고 대답을 할 것인가.

그때 가서 ‘아! 내가 그때 그 법문을 듣고 열심히 이뭣고?를 안 했구나’하고 그때 가서 후회하고 한탄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산승이 이렇게 간곡히 말씀드린 말을 명심을 하고 열심히 ‘이뭣고?’를 해서 결정코 자성불을 깨달아서 견성성불하실 것으로 확신을 합니다.(처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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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인생여환우여몽(人生如幻又如夢)~'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 휴정) '계쌍인소사(誡雙印小師, 쌍인소사에게 훈계함)'

*서산대사(西山大師) ; (1520~1604) 조선의 스님. 평남 안주 출신.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淸虛). 서산(西山)인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서산(西山)이라고도 함.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안주 군수를 따라 한양에 가서 12세에 성균관에 입학함.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동배(同輩) 여러 명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며 지내다 숭인(崇仁)의 설법을 듣고 남아 여러 경전을 정독하고 다시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에게 3년 동안 지도를 받았다. 그 때 그의 나이 18세. 그 3년뒤 21세에 계(戒)를 받음.

 

그 후 명산 제찰(名山 諸剎)을 찾아다니면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벗을 찾아 봉성「鳳城(南原)」을 지나가다 우연히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쳐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었다.

 

발백심비백(髮白心非白) 고인증누설(古人曾漏洩) 머리 세어도 마음 안 센다고 옛 사람 일찌기 일렀더구나.

금문일계성(今聞一鷄聲) 장부능사필(丈夫能事畢) 닭울음 한 소리 이제 듣고 나니 장부의 할 일을 다 마쳤도다.

홀득자가저(勿得自家底) 두두지차이(頭頭只此爾) 문득 자가 것을 깨닫고 나니 온갖 것이 다만 이뿐이로세.

천만금보장(千萬金寶藏) 원시일공지(元是一空紙) 팔만대장경도 본시는 한 장 빈 종이로세.

 

그 뒤로 관동(關東)의 명산을 두루 편답하니 그 때 나이가 30이었다.

1552년(명종 7)에 새로 부활된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이 되고, 3년 후에는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으나 2년 후에 그 직책을 사양하고 금강산·지리산·묘향산에서 수행함.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휴정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임명하니, 그는 묘향산에서 나와 전국 승려들에게 총궐기하는 격문을 방방곡곡에 보내 승군(僧軍)을 평남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켜 여러 곳에서 큰 공을 세움.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79세의 휴정은 그의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으로 들어감. 그 뒤로도 금강산, 지리산, 묘향산 등지를 왕래하며 많은 제자를 이끌었다.

1604년(선조 37) 정월 23일에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함. 세수 85세, 선납(禪臘) 65.

 

그 날 아침 대사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눈이 쌓인 길을 헤치고 남여(籃輿 : 주로 산길에 쓰이는 뚜껑이 없고 의자같이 된 가마)를 타고 여러 암자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신 후 원적암으로 돌아와 손을 씻고 위의를 갖추고 불전에 분향한 다음 스스로 붓을 들고 조실에 들어가서 그의 자화상에 이렇게 적었다. 즉

 

팔십 년 전 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내러니

팔십 년 후 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뒤 오늘은 내가 너로다.

 

하고, 다시 임종게(臨終偈)로써 ( 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

억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  불에 떨어진 흰눈 한 조각

진흙 황소가 물 위로 가고  땅과 허공이 꺼져 버렸네.

 

이렇게 써놓고 고요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저서 : 삼가귀감(三家龜鑑)·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청허집(淸虛集)·운수단(雲水壇).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자성불(自性佛) ; 자성(自性)이 즉 부처라는 뜻.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생부처님[生佛] ; ‘현실로 살아있는 부처님’이라는 의미로, 부처님과 같이 덕이 높은 사람을 존칭하여 부르는 말로 고승(高僧 행동이나 덕이 높은 스님)을 찬미하는 호칭이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부처님을 만들어 내는 장소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승당(僧堂). 선방(禪房).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게송) ‘금생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〇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Posted by 닥공닥정
활구참선 최상승법2017. 5. 30. 07:54

§(627) 우리 자신이 부처 /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이 딴 데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최상승법 /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 / 극락 가는 연습이 바로 이뭣고?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여. 시간도 따로 없는 것이고, 장소도 따로 없는 것입니다. 편의상 입선, 방선의 시간을 두고 선방(禪房)이라고 하는 특별한 조용한 곳을 마련해 가지고 거기에 가서  같이 죽비를 치고 정진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자세를 익히는 것이지 진짜 살아 있는 공부는  선방에 와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어쩌다가 감옥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감옥에서도 탁! 이뭣고?’   있다면 감옥이 바로 선방이요 선불장(選佛場)이요, 부부간에 사랑하고, 싸우고, 생활에 대한 근심 걱정을  바로 그곳이 살아 있는 선원이라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는 다시 참선에 대한 관념을 바로 잡아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뭣고?’ 천하에 간단하고 별로 맛은 없지만, 내가 바로 부처요, ‘이뭣고?’ 바로 살아서 극락에 가고,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연습이고, 바로  생각에 여래(如來)의 경지(境地)에 올라가는 공부.

 

**송담스님(No.627)—99 6 첫째 일요법회(99.06.06) (용627)

 

약 17분.

 

우리는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께 공경을 최고의 존경과 공경을 바치고 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불공(佛供)을 드리고 합니다마는,  모든 신앙 생활 가운데에 으뜸이 되고 뿌리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철저히 믿는 데에서부터서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이 말씀을 하시기를 중생이  부처니, 바로 내가  자신이 부처니 부처를 밖에서 찾지 말아라’하시는 거고.

번뇌(煩惱)가  보리(菩提)이니, 우리 깨닫지 못한 사람은 눈으로 봤다 하면 거기서 번뇌의 물결이 일어나고, 귀로 무엇을 들었다 하면은 번뇌의 물결이 일어나고, 무슨 생각이 일어났다 하면은 번뇌의 생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없는 끝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번뇌를 여의지 않고 거기에 보리가 있다는보리(菩提)는 깨달음이다. 최고의 깨달음을 보리라고 하는데 번뇌를 여의지 않고 깨달음이 거기에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붙어 있다고 하면  어폐(語弊)가 있을는지 모르지마는, 바로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이 딴 데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말이여. 이것이 바로 대승법(大乘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알기 쉽게 비유를 하자면은 파도가 일어나고 있을 ,  파도는 물이  인연 따라서 움직거리면 그것이 파도인데, 파도는 물을 여의고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파도 있는 곳에는 반드시 거기에 물이 있는 거고, 물이 있으면은 물결이 파도가 일어나게  것입니다.

 

물결을 버리고 물을 찾는 한에는 물속에 들어앉어서도 물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중생을 여의고 부처를 찾을 수가 없는 거고,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을 구하는 한에는 깨달음 속에 있으면서 깨달음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참선(參禪)을  것은 깨닫기 위해서 한다’하지만 깨달으려고  필요가 없습니다. 참선 해  사람이면 끊임없이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마는,  번뇌를 여의고 참선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몸뚱이가 바로 부처님 몸뚱이고, 우리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수없는 번뇌가 바로 그것이 깨달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승법에서는 아까 부처님으로부터 달마 스님까지 인도에서 28, 달마 스님이 중국으로 오셔서 육조 혜능 스님까지 6, 그래서 육조 스님까지 해서 33대를 삽삼이라고 합니다마는 삽삼조사(卅三祖師).

 삽삼조사로 육조 스님  화두(話頭)라고 하는, ‘이뭣고?’라고 하는 것이 나왔다고 하는 것을 금방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그것이 오늘날까지 조사들에 의해서 등등상속(燈燈相續)으로 오늘날까지 최상승법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최상승법은 굉장히 어렵고 복잡하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부처도   밖에서 찾지  , 참선도 번뇌를 여의고 찾지  ,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내가 바로 부처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고.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를 여의고 참선을 할라고 하지를 마세요. 무슨 망상이 일어나거나 번뇌가 일어나거나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는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

 

탐심이 일어날 때도  탐심이 일어나는 바로 거기에 ! 즉해 가지고 이뭣고?’. 미운 생각이 일어나거나 원망하는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생각을 버리고 따로 참선을 하려고 하지 말고 바로 일어나는 그놈에 즉해 가지고 이뭣고?’

이렇게  나간다면 바로 이렇게 살아 있는 참선을  버릇하면 번뇌가 일어날수록  좋은 것이고, 탐진치 삼독심이 치열하게 일어날수록에 바로 거기에다 발판을 두고 거기에 즉해서 이뭣고?’ 한다면 혼침(昏沈)이 일어날 수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누워서도 이뭣고?’ 미운 생각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그래서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여. 시간도 따로 없는 것이고, 장소도 따로 없는 것입니다.

 

편의상 입선(入禪), 방선(放禪)의 시간을 두고 선방(禪房)이라고 하는 특별한 조용한 곳을 마련해 가지고 거기에 가서  같이 죽비(竹篦)를 치고 정진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이고 기본자세를 익히는 것이지 진짜 살아 있는 공부는  선방에 와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태권도나 검도나 유도나 기본자세를 철저히 익힘으로 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기본의 살아 있는 응용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을 철저히 익힌 것은 대단히 좋은 것이기는 하나, 언제나 기본에만 입각해서  틀어박힌 참선이 그것은 진짜 살아 있는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어쩌다가 업(業)에 걸려서 감옥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감옥에서도 탁! 이뭣고?’   있다면 감옥이 바로 선방이요 선불장(選佛場)이요, 부부간에 사랑하고 부부간에 싸우고 부부간에 생활에 대한 근심 걱정을  바로 그곳이 바로 그곳이 살아 있는 선원이라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는 다시 참선에 대한 관념을 바로 잡아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해서 무척 살기가 교통이라든지 모든 생활이 편리하게는 되었습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 행복해졌냐 하면  그렇지는 않은  같습니다. 점점 사는 것이  복잡하고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교육도 그렇고 일체가  곳마다  복잡해지고 다단해지고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때일수록  살아 있는 활구참선(活句參禪) 이것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인생을 바로 살기가 어렵고,  어려운 고비를 극복해 나가기가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 오늘  번뇌의 생각을 깨끗이 씻어 제(除)한다고 하는 것은 활구 참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올바르게 활구참선하는  근본을 딱! 알고 보면 삼도고(三途苦)니,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이니 그것 버릴 것이 못됩니다.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지옥은 현실 속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면 형무소 교도소가  지옥이냐 하면 그게 아니고,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 바로 우리 몸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육도(六途)가 들어있다고 봐야 정말 육도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하고 있다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생각 뒤집어지면 지옥도 되고, 독사도 되고, 아귀도 되는 것입니다.  생각 ! 바로 잡으면 아까까지 지옥에 있었던 사람이  생각으로 인해서 천당에도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죽은 뒤에, 금생에 살아서 악업(惡業)을 지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하는  말씀을 나는 믿습니다마는, 살아서 우리가 들어가는 지옥도 있다고 하는 것을 철저히 우리가 인식을 한다면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은 걱정이 없습니다.

내나 살아서 지옥 가는 연습을  사람이 죽어서 틀림없이 지옥에  것이기 때문에 살아서부터서 지옥에  가는 행위를 한다면 지옥 그렇게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서 지옥이 무엇인가를 알고,  마음속에 있는 지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안다면 살아서 지옥  짓을  하게 되고, 살아서부터 지옥 가는 연습을  한다면 죽어서 지옥 것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술을 많이 먹고 술버릇이 고약한 사람은 술을  먹을 때는 성현 군자고 그렇게 착한 사람이 술만 들어갔다 하면은 자기 자신을 자제를 못하고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어가지고 어떻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용케도 자기집은 찾아갑니다. 가서 꺼꾸러져도 자기집  앞에 가서 꺼꾸러져 가지고 거기서 쓰러져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꺼꾸러져서 잡니다.

 그러냐?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을 항상 자기집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술에 취해가지고 완전히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어도 자기집을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지옥에 가는 것도 살아서 지옥 가는 행위를 많이  사람은 틀림없이  몸뚱이를 버리고 영혼이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서 지옥에  가는, 천당에 가는 연습을 많이  사람은  떨어지자마자 천당에 가는 거고, 살아서 극락(極樂) 가는 연습을 많이  사람은  떨어지자마자 쏜살같이 극락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서 극락에 가는 연습,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는 연습이 바로 이뭣고?’ 이것입니다.

 

탐심이 나도 바로 거기서 이뭣고?’  버리면, 탐심의  생각 일어날  그것이 구체화되기 전에 탁! 이뭣고?’  버리면 영락없이 지옥으로  차를 타려다가  타버리고 극락으로 가는 차에 올라탄다면 물어  것도 없이 극락에  거여.

 

그래서 이뭣고?’ 천하에 간단하고 별로 맛은 없지만, 내가 바로 부처요, ‘이뭣고?’ 바로 살아서 극락에 가고,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연습이고, 바로  생각에 여래(如來)의 경지(境地)에 올라가는 공부라고 하는 것을 믿고 고대로 실천한다면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고 혼탁하고 그래도 한탄할  없습니다.

어려운 고비고비 만날 때일수록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이뭣고?’ 열심히 한다면 거기서부터서  지상에 극락이 되어가는 분위기가 조성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엄동설한(嚴冬雪寒) 소한, 대한 때는 이대로 가다가는  얼어죽을  같지만  시간에 지혜롭게 건강을 관리하고  하다보면 금방  입춘, 우수가 돌아와서 봄이  거와 마찬가지로,

세상이 이렇게 어렵고 힘들고 그래도 ! 정신만 차리고 이뭣고?’ 열심히 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직장, 자기가 해야  일을 찾아서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다보면 머지않아서 우리도 잘살게 됩니다.

 

 사람 한 사람이 그러한 마음으로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디서 무엇을 하드라도 자기  일을 찾아서 열심히 하다보면 반드시  살아  길이 있습니다.  국민이 그렇게 노력할  우리나라는 잘사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죽을  같지마는  살길이 열리고 좋은 세상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역사는 누가 눈에  보이는 어떤 존재가 있어서 역사를 만든  아니라 내나 인간이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좋은 역사도 만들고, 어려운 시대를 좋은 시대로 맨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기 때문에 각자 주인이 자기 살림을  돌보고 자기 일을 잘할   집안도 잘되고 회사도 잘되고 사회도 올바르게 되어가는 것입니다.(814~2437)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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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佛供 부처 /이바지할·바칠 ) ; 부처님 앞에 ((·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괴로워할 )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 · 성냄() · 어리석음()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앞의 () () ()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 삼도(三道) 설명한다.  번뇌[]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 과보를 받게 된다.

*보리(菩提) : [] bodhi  () • () • ()이라 번역。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곧 불과(佛果)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 —> ) ‘보리 읽는다。따라서 보제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것이다.

*깨달음 ; (). 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 깨달음.

*어폐(語弊 말씀 /해어질·쓰러질 ) ; ①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생기는 말의 폐단이나 결점. ②남에게 오해를 일으킬  있는 .

*대승(大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 이에 반해, 그들은 전통의 보수파를 낮추어 소승(小乘)이라 . ②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수행자, 보살, 또는 그들을 위한 붓다의 가르침. ③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존칭. 위대한 가르침.

() '타는 '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삽삼조사(卅三祖師) : 삼십삼세 조사(三十三世祖師).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부처님을 대신할  교단(敎團) 어른을  분씩 정하여 내려왔다。그것은 스승되는 어른이  제자들 가운데서 빼어난 이를 선택하여 () 전하고,  증거로써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衣鉢) 전해 주었다.

그리하여 인도에서 1.가섭존자, 2.아란존자, 3.상나화수....이렇게 전승되어 28 되는 달마대사(達摩大師) 중국에 와서 중국의 초조(初祖) 되고, 그로부터 2 혜가, 3 승찬, 4 도신, 5홍인, 6 혜능대사(慧能大師) 내려왔는데,  33인의 조사를 삽삼조사라 한다.

육조 혜능에 이르러서는 불법을 대중화하기 위하여 정통(正統)으로 내려가는 전례를 폐지하고, 따라서 의발을 전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육조 스님  화두(話頭)라고 하는, ‘이뭣고?’라고 하는 것이 나왔다’ ;

 

[참고] 송담스님(No.264)—1985 4 첫째 일요법회에서.(5분 50초)

흔히 화두하면 이뭣고?’ 시삼마(是甚) 화두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러냐 하면은 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이기 때문에 이뭣고?’ 많이 말씀을 하게 됩니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말은 임제(臨濟) 스님 이후로 임제종에서  화두라고 하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마는, 임제 스님 이전에 육조(六祖) 스님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사용하지 아니했지만,

내게  물건이 있으니,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위로는 하늘을 기둥하고 아래로는 땅을 떠받치며, 밝기로는 해보다  밝고 검기로는 옻칠보다도  검은데, 항상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하는 가운데서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터억 앞에 나와서, ‘그것은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이로소이다.  하택신회, 저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육조 스님이 뭐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도 없다고 내가 그랬거늘, 어찌 불성이니 제불의 본원이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공부를 해서 일가(一家) 이룬다 하드라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 되겠다. 불교학자밖에는  되겠다

 

 불교()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참나 깨닫는 것이 목적인데, ‘앞으로 니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가를 이룬다 해도 지해종자(知解種子)밖에는 못 되겠다 이렇게 점검을 하셨습니다.

 

그리자 남악회양(南嶽懷讓) 왔습니다. 와서 터억 절을 하니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셨습니다.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물음에 대해서  맥혀서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 몸을  바를 몰랐습니다.

하택신회는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니, 무슨 하택신회의 불성이니 이렇게 즉각  대답을 했는데, 남악회양은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고 묻는데 대해서, 앞이  맥혀 가지고  바를 몰라.  뒤로 8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 했습니다.

 

8 동안을 대관절 이게 무슨 물건인고?’ 앉아서도  생각, 서서도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생각, 일을 하면서도  생각, 똥을 누면서도  생각, ‘대관절  무슨 물건인고?’ 이렇게 하기를 8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그래 가지고 육조 스님 앞에 가서 설사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조 스님이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 도리어 닦아 () 것이 있느냐?’하니,

수증(修證)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염(汚染)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 것이 없지를 않지마는 오염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이렇게 해서 인가(印可) 받게  것입니다.

 

 참선법, 활구참선법은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 더듬어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남악회양 선사처럼 대뜸 처음부터서  맥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기둥에 이마빡을 부딪친 거와 같은, 갑자기 걸어가다가 기둥이나 벼람박에 이마빡을 부딪쳤을  그때 상황이 어떻습니까? 앞뒷이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다못  맥혀 가지고,   없이 이뭣고?’ 그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맥혀서 앞뒷이 끊어져야  공부를 옳게  나가는 것이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 이론, 무슨 철학, 불교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 그것을 갖다가 아는 대로 끌어다가 이렇게 분석을 하고, 종합을 하고, 비교를 하고, 적용을 하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6131~6722)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이뭣고(是甚 시심마) : ‘이뭣고? 화두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 ,   ()이다. ‘이뭣고?(이뭐꼬)'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뜻은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왔다.

*등등상속(燈燈相續) ; () 중생의 무명(無明) 밝히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 비유한 ,  진리의 () 스승이  제자로 해서 계속 면면히 이어짐을 일컬음.

*() ; 자기의 뜻에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악견(惡見) 여섯 가지 근본 번뇌] 하나.

*()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악견(惡見) 여섯 가지 근본 번뇌] 하나.

*()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악견(惡見) 여섯 가지 근본 번뇌]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 해치는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 ; 인과(因果)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즉해서(-- ·즉시 ) ; .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순간 바로. 당장에 ).

*혼침(昏沈 어두울 /잠길 )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 떨어진 상태.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 ; 어떤 특정한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체처 일체시에 다못 일여(一如)하게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

[참고] 송담스님(No.299)—1986 5 첫째 일요법회 법문에서.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신 분은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정진(精進)이여. 그래서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거든. ‘어느 곳이고 () 아닌 곳이 없고, 어느 때고 참선 아닌 때가 없다 그래서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라 하는 것이여.

그래서 걸음 걸음이 미륵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요, 생각 생각이 석가여래가 탄생하신 곳이어야 한다 그런 것이 바로 이러한 도리를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3019~312)

 

[참고] 송담스님(No.152)—1981 10 첫째일요법회(참선법B)에서.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  문성시증시(聞聲是證時)니라  염념석가출세(念念釋迦出世)  보보미륵하생(步步彌勒下生)이니라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 어떤 색상을 보는 그때가 바로 참나 깨달을 때요. 문성시증처(聞聲是證處). 어떤 소리를 듣는 그때가 참나 증득(證得) 바로  곳이드라

그렇게  생각  생각을 무엇을  때마다, 무슨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렇게 (화두를 들고) 다져 나가면,  생각 일어날 때마다 그때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때요,  걸음 걸음 걸어가는   걸음  걸음이 바로 미륵 부처님이 하강하시든 바로 그것이더라.(4122~449) - (게송) ‘견색시증처~’ ; [금강경오가해]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함허 설의(說誼) 게송 참고.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 들어가는 , 좌선(坐禪) 시작하는 . 참선(좌선)수행.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죽비( 대나무 /빗치개·통발 )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 행위에 따라받는 고락(苦樂)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선불장(選佛場) ; 부처[] 뽑는[] 장소[]라는 . 부처님을 만들어 내는 장소라는 .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 승당(僧堂). 선방(禪房).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 방거사(龐居士)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無爲)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도고(三途苦, 三塗苦) ; 악한 일을  중생이  과보로 받는다는 3가지 미혹한 생존(지옥아귀축생)에서의 고통.

*사생(四生) ;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인 육도(六途)에서의  가지 ().  가지 태어나는 방식.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 이른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 ( : 의지에 기초한 행위)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 있다.

*고주망태 ; 술을 많이 마셔 취하여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

*인사불성(人事不省 사람 인/일 사/아니·못할 불/살필 성) ; 사람[]으로서 지켜야  [] 살피지[] 못함[]. 정신이 흐리멍덩한 상태.

*극락(極樂) ; 극락세계(極樂世界). 극락정토(極樂淨土).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  아미타불이 계시는 청정한 국토로,  세계에서 서쪽(西方)으로 십만억 불토(佛土)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일체의 괴로움이 없고 자유롭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세계. 수가마제(須呵摩提, 須訶摩提), 수마제(須摩提) 등으로 음사하고 정토(淨土), 안락(安樂), 안양(安養), 서방정토(西方淨土), 낙방(樂邦) 등으로도 한역한다.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꼭대기에서 12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56 7천만  뒤에)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 뜻은 지족(知足).

*여래(如來) : 부처님 10호의 하나。 범어 Tathagata () () 진여(眞如) 뜻이니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 뜻。  여거여래(如去如來)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경지(境地 지경·경계 / ) ; 정신이나 몸이 도달해 있는 어떤 상태.

*엄동설한(嚴冬雪寒 혹독할 /겨울 / / ) ; 혹독하게[] 추운 겨울[] [] 내린 뒤의 추위[].

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16. 1. 15. 10:37

§(422) (게송)사서순환난부한~ / 대혜종고 선사 법문()이라 하는 것은~’ / () 어찌 산중에만 있겠습니까? / (게송)수류상출몰~.

 

집착하지도 말고 버릴라고 하지도 말아라이것이 우리 참선하는 사람이 항상 어떻게 자기 마음을 단속해 나갈 것인가? 분명하게 가운데 말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버리지도 않고 거기에 집착하지도 말며, 거기에 집착하지도 말고 그걸 버릴라고도 하지도 말고서 오직 일체처 일체시에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만을 일체처 일체시에 떠억 거각을 나가라 그말이여

 

제가 여러분께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언젠가 출가할 하고, 이렇게 선방에 아주 들어와서 방부를 들이고 참선 하실 하더라도 우선 당장 있는 자리에서이뭣고?’ 들으라 이거거든. 이뭣고?’ 눈으로 그때 들고, 귀로 소리를 들을 드는 것이지, 보는 버리고 드는 것이 아니고, 귀로 듣는 버리고 드는 것이 아니라, 듣자마자이뭣고?’ 챙기면 바로 자리가 선방이요 선불장(選佛場)이여.

 

() 어찌 산중에만 있겠습니까? 어찌 머리를 깎은 스님에게만 확철대오(廓徹大悟) 있겠습니까?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고요한 데에나, 시끄러운 데나, 일용응연처나, 사량분별처우리 중생은 사량분별을 여의고는 1분도 지내지를 못하는데바로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그걸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거기에 ()해서 화두를 들으라 말입니다.

 

**송담스님(No.422)—90 7 첫째일요법회(90.07.01) (용422)

 

(1) 약 20분.

(2) 약 8분.

 

(1)------------------

 

사서순환난부한(四序循環暖復寒)한대  미후심련육화촌(獼猴深戀六花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이성안색증무가(耳聲眼色曾無暇)하야  염념나지시사문(念念那知是死門)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사서순환난부한(四序循環暖復寒)이요  미후심련육화촌(獼猴深戀六花村)이다.

춘하추동 사시절이 돌고 돌아서 더워졌다 추워지고 추워졌다 더워져.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좋다 싶으면 어느새 여름이 와서 잎이 피고 삼복성염(三伏盛炎) 돌아와. ‘! 이거 더워서 못살겠다하면 어느덧 입추 처서가 돌아오면은 조석(朝夕)으로 서늘바람이 온다.

서늘해서 인제 좋다 싶으면 어느덧 찬바람이 불어서 입동 소설 대한이 돌아온다. ‘! 이렇게 추워서 수가 없다, 얼어죽겠다싶으면은 입춘 우수가 돌아온다 그말이여.

 

그러는데, 사람도 나서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고 우는 때가 엊그제 같은데 금방 유치원을 가고, 금방 유치원을 다니는가 싶으면 얼마 후에 보면 벌써 중학생이 되고, 얼마 후에 보면은 대학생이 되고, 얼마 후에 보면 벌써 첫아들을 낳았다고 그런다 그말이여.

첫아들을 낳은 지가 엊그제인데 금방 환갑이 돌아왔다그러고손자를 봤다 그런다 그말이여. 아마 자리에 앉으신 청신사(清信士) 청신녀(淸信女) 분께서도 당신의 일생을 돌아다보면 이와 마찬가지였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 세상에 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게 되는데, 원숭이란 놈은 꽃이 피고 꽃이 곳에는 맛있는 열매가 열려, 육화촌(六花村)—여섯 가지 꽃이 피는 마을을 항상 그리워한다 그말이여.

 

그런데무엇을 원숭이가 육화촌을 그리워한다고 비유를 했냐?’하면은 시시각각으로 이렇게 죽음을 향해서 우리는 가고 있는데,

눈으로는 예쁜 것을 보고자 하고, 귀로는 좋은 소리와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데에 정신을 쏟고, 코로는 좋은 향내를 그리워하고, 혀로는 맛있는 음식에 끄달리고, 몸뚱이로는 부드러운 옷과 가벼운 , 울긋불긋하고 좋은 옷을 입을려고 그러고, 우리의 마음으로는 잘한다는 칭찬을 듣기를 좋아하고 명예와 권리를 탐한다.

 

이러한 것이 마치 원숭이란 놈이 육화촌의 아름다운 꽃과 향기와 맛있는 음식 과일을 그리워해서 밤낮 거기만 들락거린 거와 무엇이 다르냐 그말이여.

귀를 통해서 좋은 소리를 듣는 데에 탐착하고, 눈으로 아름다운 것을 탐착하는 동안에(耳聲眼色曾無暇), 생각 생각 초가 지나가면서 우리가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망각할 수가 있겠느냐?(念念那知是死門)

 

 

그래서 우리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완성을 대혜종고(大慧宗) 선사는 우리 공부해 나가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선()이라 하는 것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아니하며, 또한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아니하며, 또한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 일용응연처는 하루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때까지 우리가 보고 듣고 만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경계를 일용응연처라 그러는 거여.

사람을 만나서 얘기 하나, 일을 하나, 먹고 입고 누는 그것이 일용응연처인데 거기에도 참선은 있지 않어. 사량분별처(思量分別處)에도 있지 않어. 과거 일을 생각하고, 미래 일을 생각하고, 현재 일을 생각하고 일체 것을 생각하고 따지는 거기에도 있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것이냐? 고요한 , 시끄러운 , 일용응연처, 사량분별처를 버리지도 말아라.

거기에, 고요하고 시끄럽고 일용응연(日用應緣)하고 사량분별(思量分別) 거기에 있지 아니하니 거기에 집착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을 버릴라고 하지도 말아라』

 

집착하지도 말고 버릴라고 하지도 말아라이것이 우리 참선하는 사람이 항상 어떻게 자기 마음을 단속해 나갈 것인가? 분명하게 가운데 말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버리지도 않고 거기에 집착하지도 말며, 거기에 집착하지도 말고 그걸 버릴라고도 하지도 말고서 오직 일체처 일체시에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

이뭣고?’ 사람은이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사람은판치생모(板齒生毛)’ ‘무자(無字)’ 사람은무자(無字)’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사람은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본참공안(本參公案)만을 일체처 일체시에 떠억 거각을 나가라 그말이여. 그렇게 해서 안되어도 안된다는 생각도 내지 말고이뭣고?’ 잘되어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이뭣고?’

불급불완(不急不緩)하게 잡드리 나가면 나중에 순일무잡(純一無雜) 경계가 오고야만 말아. 들라고 해도 저절로 화두가 현전(現前)하면서 순일무잡해지거든.

 

순일무잡해지더라도 조금도 좋아하는 생각도 말고, ‘! 이것이로구나그런 생각도 내지 말고, ‘! 이럴 빨리 터졌으면그런 생각도 내지 말고, ‘이럴 어느 선지식을 만나서 깨닫게 해줬으면그러한 생각도 내지 말어. 이러한 생각들이 모두 지각심(知覺心)이라 하는 거여.

애써서 잘되아 가는 데다 뿌린 거여 그게. 그런 생각을 내지 말고 잡드리 나가면 어떠한 찰나에 홀연히 축착합착(築着磕着)해서 ! 터지게 되는 거여.

 

이것이 바로 자신의 몸속에 있는 살림살이여. 자기한테 있는 것을 자기가 깨닫는 견성성불하는 도리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병이 나면 건강할 때를 기다리고, 일이 바쁘면 일이 끝나기를 바래고, 시끄럽고 복잡하면은 조용하기를 기다리고, 밤낮 기다리다가 세월이 지내간다 그말이여. 아들 대학이나 들여보내 놓고, 시집이나 보내 놓고, 인제 아들 장가나 보내 놓고 선방(禪房) 가서 하리라.

 

일이라 하는 것은 한도 끝도 없어. ‘ 다하고 죽은 무덤은 없다이런 속담도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세상에 온갖 인연을 맺어놓고 많은 빚을 져놨기 때문에 다하고 죽을 수는 없습니다.

 

용기를 다해 가지고 ! 끊어 버리고 출가를 하던지—‘자식이고 딸이고 자기 있으면 잘살 것이고, 자기가 좋은 인연을 맺었으면은 좋은 시집 장가갈 것이고, 내가 신경 없다. 살림도 자기가 있으면 잘살 거다. 내가 신경 없다

! 끊어 버리고 아주 머리를 깎아 버리던지, 선방에 와서 아주 방부(房付) 들이고 죽이 끓거나 밥이 끓거나 모르쇠 하던지, 대용기가 있으면 한번 그렇게 만한 것이고.

 

그렇게까지 용기가 없으면 괜히 있지도 못한 용기를 가지고 댕겅 머리부터 깎았다가 며칠 가서 가발 쓰고 갈라고...  , 그런 출세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끊고 들어올 수만 있으면야, 중국 청나라 순치 황제는 천자의 지위도 버려 버리고 나온 예도 있고, 부처님은 머지않아 자기가 임금이 있는 그러한 위치에 있는 태자의 신분도 버리고 출가를 했고, 달마 스님도 향지국에 3 왕자의 귀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버리고 출가하고,

이러한 예를 들자면은 인도, 중국, 한국에 끝도 없지마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기를 나는 여러분께 재촉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언젠가 출가할 하고, 이렇게 선방에 아주 들어와서 방부를 들이고 참선 하실 하더라도 우선 당장 있는 자리에서이뭣고?’ 들으라 이거거든.

 

이뭣고?’ 눈으로 그때 들고, 귀로 소리를 들을 드는 것이지, 보는 버리고 드는 것이 아니고, 귀로 듣는 버리고 드는 것이 아니라, 듣자마자이뭣고?’ 챙기면 바로 자리가 선방이요 선불장(選佛場)이여.

그렇게 평소에 잡드리를 하다가 어느 정도 시절인연(時節因緣) 돌아와서 선방에 와서 달씩 있을 있게 오신다면 그때는 누워서 먹기야. 잘될 것이다 그말이여.

 

집에서 복잡한 살림살이 속에서 바로 그때 장소에서 자꾸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고 아침저녁으로 시간 나는 대로 30분씩 시간씩 잡드리를 나가면, 그렇게 잡드리를 놓으면 나중에 머리를 적당한 ! 깎는다 하더라도 다시는 가발 같은 쓰게 것이다 그말이여.

 

() 어찌 산중에만 있겠습니까? 어찌 머리를 깎은 스님에게만 확철대오(廓徹大悟) 있겠습니까?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고요한 데에나, 시끄러운 데나, 일용응연처나, 사량분별처우리 중생은 사량분별을 여의고는 1분도 지내지를 못하는데바로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그걸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거기에 ()해서 화두를 들으라 말입니다.

 

 

, 그러면 10 동안만 죽비() 치고 입선(入禪) 하겠습니다.

편안하게 앉으셔서 반가부좌(半跏趺坐) 하고 몸을 좌우로 서너 흔들어요. 흔들어서 한가운데에다 안정을 시켜.

몸은 단정하되 어깨의 힘을 빼고, 목도 머리도 전후좌우로 삐뚤어지지 않게 단정하니 하되 목에 힘을 빼고, 눈은 부릅뜨거나 감지를 말고 평상(平常)으로 떠요. 어금니는 지긋이 물어. 너무 물지 말고 가만히 맞닿도록 그렇게 하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 갖다가 대고서...

 

(죽비입선죽비)

 

이렇게 잠시 같이 입정(入定) 뜻은, 여러분은 댁에 돌아가시면은 집에 가서 삼십 분도 하시고, 시간도 하시고, 시간도 하실 있겠고 선방에 계신 스님네나 보살님네는 하루에 여덟 시간, 시간을 얼마든지 하실 있지만,

 

우리가 이렇게 법회에 이렇게 법당에 이렇게 같이 모이셨으니 인연으로같이 죽비를 치고 같이 입선한 인연으로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도 같이 가서, 분도 낙오자가 없이 같이 가서, 거기서 같이 만나, 같이 가서 미륵(彌勒)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같이 확철대오 하고,

사바세계(娑婆世界) 인연이 있어서 다시 하강하게 되어서 일체 중생을 제도하더라도 우리가 모두 같은 형제간이 되고, 같은 도반이 되고자 해서 일부러 이런 시간을 갖고자 것입니다.(3248~5210)

 

 

 

 

 

(2)------------------

 

수류상출몰(隨流常出沒)하고  불체왕래종(不滯往來)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두두무취사(頭頭無取捨)하고  처처절소친(處處絶疎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수류상출몰(隨流常出沒)하고, 흐름을 따라서, 인연 따라서 나왔다 죽었다 왔다갔다 이렇게 하되, 불체왕래종(不滯往來)이요. 가고 오는 자취에 맥힘이 없어.

 

두두무취사(頭頭無取捨)  처처절소친(處處絶疎親)이다.

두두물물(頭頭物物) 취하지도 말고 버리지도 말아라. ‘()한다 하는 것은 집착하는 것이고, ‘버린다 하는 것은 그걸 멀리 할려고 하는 거다 그말이여.

 

모든 나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취할려고 하지도 말고, 취하는데 집착하지도 말고 버릴려고 하지도 말아라. 그러면모든 애착을 버리라그러는데, 애착을 버리면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모두 버리고 사업도 버리면 모든 사람이 버리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그말이여.

 

()하지도 말고 버리지도 말라 말은 취하되 취한 바가 없고 버리되 버린 바가 없어.

취할 것을 취하되 취한 데에 집착하지 말고, 능히 버려야 것을 버리되 버린 데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거거든.

 

친하고 성근 , 친소(親疎) 끊어 버려라그러는데, 친소를 끊어 버리면 부모자식 간은 친한 사이고 친구 간도 친한 것이고, 스승 상좌도 친한 것인데, 친한 것을 끊어 버리면은 그거 어떻게 되냐 그말이여.

친할 것을 친하되 친한 데에 집착하지 말고, 성근 것을 집착하지 않고 버리되 버린 바에 집착하지 않다이건 대단히 말로는 쉽지마는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는 상당히 이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아니해.

 

그러나 친한 가운데에 화두(話頭) 들면 친한 집착하지 않고, ‘취하되 취한 바에 집착하지 않는다하는 것은 취하되 화두를 들면 집착하지 아니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를 들고,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것으로 생활화하면, 생활 속에 충실하되 집착한 바가 없으니 그것이 바로 취사(取捨) 없는 데에 나아갈 수가 있고,

인간은 친소(親疎) 속에서 친소의 인연 속에서 살아가되 화두를 들고 모든 사람을 상대해 나가면 친하다고 해서 애착에 떨어질 것이 없고, 성글다고 해서 원수처럼 원수를 맺을 까닭도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오늘 가지 광고 것이 있습니다.

해마다 중고등부 학생회 어린이 학생회에서 행하는 수련대회가 있는데 중고등부는 8 6일부터서 8 9일까지 34일로 해인사로 가서 수련대회를 갖게 되고, 어린이 학생회는 8 11일부터서 8 13일까지 23일로 천안 광덕사로 수련대회를 가게 됩니다.

 

구체적인 것은 사무실이나 교무 스님께 의논을 해서, 여러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의 자녀들이 있으면 수련대회에 참석을 하도록 그렇게 권장을 합니다.

 

모두 시험, 입학 시험이다 과외공부다 모든 그런 계획이 짜여져 있어 가지고어떻게 그런 황금 같은 시간을 34, 23일씩 그렇게 수가 있겠는가? 된다. 어쨌든지 시간이라도 공부를 해야 좋은 학교에 들어간다 이렇게 생각이 드시겠지만,

방학 동안에 34일이나 23 수련대회를 갔다오면 업장(業障) 소멸(消滅) 되고 신심이 돈독해서 마음속에 쌓였던 스트레스를 깨끗이 씻어 버리고 청정한 마음으로 불보살(佛菩薩) 가피(加被) 짊어지고 가슴 가득히 돌아오면 업장이 소멸이 되었으니 공부가 무장무애(無障無碍)하게 공부가 저절로 잘되어 것입니다.

 

어쨌든지 인원 초과가 되어서 교무 스님이 쩔쩔매도록, 차라도 불러야 정도로 그렇게 주시기를 부탁을 드리고 오늘 법회 법어를 마치겠습니다.(5211~605)()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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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사서순환난부한~’ ; 중봉명본 스님의 '天目中峯和尙廣錄卷第三十'에서 '警世二十二首' 게송 참고.

*삼복(三伏) ; ①일 중에서 여름철의 가장 더운 기간. ②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 아울러 이르는 .

*성염(盛炎 성할 /불꽃·더울 ) ; 매우 심한 더위. 또는 최고조에 달한 더위.

*서늘바람 ; 첫가을에 부는 서늘한 바람.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혜종고(大慧宗) 선사 ; 분류역대 스님 약력참고.

*()이라 하는 것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아니하며~’ ;

[참고]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47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 (30) 【宋 온문(蘊聞)編】 19示妙證居士(묘증거사에게 보임)(聶寺丞)’에서.

禪不在靜處。不在鬧處。不在思量分別處。不在日用應緣處。然雖如是。第一不得捨卻靜處鬧處日用應緣處思量分別處參忽然眼開。都是自家屋裏事.

 

() 고요한 [靜處]에도 있지 않고 또한 시끄러운 [鬧處]에도 있지 아니하며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일상생활에서 인연에 응하는 ,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때까지 우리가 보고 듣고 만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경계)에도 있지 않고 사량분별처(思量分別處)에도 있지 않습니다.

비록 이와같으나 제일(第一) 정처(靜處) 요처(閙處)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 사량분별처(思量分別處) 버리고서도 아니됩니다. ()하여 홀연히 눈을 뜨면 바야흐로 모두 자가옥리사(自家屋裏事자기 집안의 )입니다.

*자가옥리사(自家屋裏事) ; ①자기 집안의 . ②자기의 내부에 갖추어져 있다는 . 가리사(家裏事옥리사(屋裏事)라고도 한다.

불법의 진리를 깨치고 보면 인간세상의 모든 일은 자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번뇌와 보리, 부처와 중생, 모든 것이 자기 내부에 있는 것이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 ; 선지(禪旨) : [] dhyana 음을 따라 선나(禪那)• 타연나(駄衍那) 쓰고, 고요히 생각함(靜慮), 생각하여 닦음(思惟修), 악한 것을 버림(棄惡) 또는 공덕림(功德林) 등으로 번역한다.

진정한 이치를 궁리하고 생각을 안정하게 하여 산란치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중국에서는 가섭존자가 전한 선법이 널리 퍼지지 못하고 교법만이 유포되었었는데, 달마대사(達摩大師) 건너온 뒤로부터 선법이 크게 발달되어 이른바 조사선(祖師禪) 완성되었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잡드리 ; ‘잡도리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대책.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하나 /없을 /섞일 ) ; 대상 자체가 순일(純一)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 없음[].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축착합착(築着磕着) : 맷돌 아래짝이 서로 들어맞듯이 수행자가 애를 쓰다가 어느 홀연히 진리에 계합하는 것을 비유함。 「축착합착(築着磕着)」합해서 쓰임.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 선실(禪室) 같은 .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참선하러 절에 간다또는참선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방부(房付)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 참가하다.

*모르쇠 ; 아는 것이나 모르는 것이나 모른다고만 하는 .

*선불장(選佛場) ; 부처() 뽑는() 장소()라는 .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개당보설(開堂普說)’, 거사(龐居士)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無爲)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

*시절인연(時節因緣) ; 시절이 도래하고 인연이 합쳐지는 기회. *시절(時節) ; 어떤 시기나 .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 깨달음.

*죽비( 대나무 /빗치개·통발 )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 들어가는 , 좌선(坐禪) 시작하는 . 참선(좌선)수행.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

*입정(入定) ; ①선정(禪定) 들어가는 . 마음을 한곳에 정하고 ··(身口意) 삼업(三業) 갈무리는 . ②수행하기 위하여 안에 들어앉는 . 입선(入禪). ③입적(入寂, 수도승이 죽음).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꼭대기에서 12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56 7천만 뒤에)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 뜻은 지족(知足).

*미륵불(彌勒佛) : []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呾麗耶), 매달례야(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불의 5().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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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隨流常出沒  不滯往來 ;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 25, 처인선사(蘄州靈泉山處仁禪師) 참고.

*(게송) 頭頭無取捨  處處絶疎親 ;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 17, 월암선과선사(潭州大溈月庵善果禪師) 참고.

*두두물물(頭頭物物) ; 온갖 사물과 현상.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궁구할 ) ; ①다못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 행동··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생긴 장애() 사라져 없어짐.

*가피(加被 더할·베풀 /입을·두를 ) ; 불보살(佛菩薩)에게 위신력(威神力) 받는 . 불보살이 중생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부여해서 이익을 주는 . 가호(加護) 같음.

*무장무애(無障無碍) ; 일이나 행동을 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방해가 없음.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24) 유루복, 무루복을 겸해서 지어야 / 自利利他 / 飯器已破 / 단전호흡과 화두가 함께 되어가게 /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있는 선방.

참으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나 극락세계나 또는 영원히 생사 없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느냐 하는 것은 오직 내가 나를 깨쳐야만 됩니다.

복을 짓되 무루복(無漏福)을 지어야 합니다. 유루복(有漏福)만 지으면은 복은 받지마는 윤회(輪廻)는 면틀 못하고, 유루복을 지으면서도 무루복을 겸해서 지을 줄 알아야 해. 무루복이란 무엇이냐? 함이 없는 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이여.

 

단전 호흡에다 화두를 꼭 붙여 가지고 의단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순일무잡(純一無雜)하도록 그렇게 해 나가면 몸도 건강하고 마침내는 깨달음에까지 이르른다. 이것이 바로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장소야 어디건 그거 상관이 없어. 한 생각 딱! 챙겨 가지고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선방(禪房)이여. 선불장(選佛場)이여.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있는 선방이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 (세등24)

 

(1) 약 21분.

(2) 약 6분.


(1)------------------

대도(大道)를 성취하는 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야심경이 좋다니까 반야심경을 읽고, 천수경이 좋다니까 천수경을 냅다 틀어재끼고, 관세음보살이 좋다면 아들을 위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죽은 영감을 위해서는 지장보살을 부르고 아미타불을 부르고, 그러다 참선이 좋다니까 앉아서 참선 흉내 좀 내고, 입춘이 되면은 또 무당집에 가서 5만원 10만원짜리 또 부작을 사고, 좋다는 데는 다 쫓아다니고, 그러다가 결국은 눈 한번 감았다 뜨지 못하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내생(來生)입니다.

이리저리 좋다는 것은 다 인연을 맺고 공덕을 지었으니까 악도(惡途)에는 떨어지지 않기를 나도 바래고, 원(願)대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가실 것을 나는 다같이 바래기는 하지마는 과연 그분이 극락세계에 꼭 갈 것인가? 나는 보증을 못합니다.

복을 짓고 착한 일을 한 만큼 내생에 천당에도 가고 또 사람이 되더라도 부자도 되고 인물도 잘 태어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나도 믿습니다마는, 참으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나 극락세계나 또는 영원히 생사 없는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느냐 하는 것은 오직 내가 나를 깨쳐야만 됩니다.

복을 짓되 무루복(無漏福)을 지어야 합니다. 유루복(有漏福)만 지으면은 복은 받지마는 윤회(輪廻)는 면틀 못하고, 유루복을 지으면서도 무루복을 겸해서 지을 줄 알아야 해.

무루복이란 무엇이냐? 함이 없는 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이여.

다른 사람에게 이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을 수 있도록 이것이야말로 샘이 없는 복[無漏福]이요, 함이 없는 법[無爲法]이라. 이 복이야말로 영원한 것입니다.
남 보고 하라고만 하고 자기는 안한 사람이 있거든. 자기만 하고 남 보고는 별로 권고를 하지 않은 사람이 있거든.

자리이타(自利利他),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의 법이야말로 이것이 바로 대승법이요, 새에 두 날개가 있는 거와 같고, 수레에 두 수레바퀴가 있는 거와 같아서, 새가 날개 하나만 가지고서는 도저히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레바퀴 하나만 가지고서는 굴러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리이타, 이 세등선원을 짓는 것도 역시 자리이타를 하기 위해서 짓는 것이요, 이 세등선원을 짓는데 여러 신남신녀가 시주(施主)를 하고 화주(化主)를 하는 것도 이것 또한 자리이타를 하는 것이여.

부처님 출현하신 것도 역시 자리이타를 위하는 것이여. 부처님 경지에 있어서야 원래 생사 없는 본각(本覺)자리에 계시는데 무엇이 다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실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렇지마는 중생을 위해서 대자비심을 일으켜 가지고 사바세계에 출현하신 것이다.

한 글자도 설할 곳이 없는 곳을 향해서 팔만사천(八萬四千) 법을 설하셨다. 이것이 또한 자리이타를 위하는 것이다.
한 글귀도 설할 곳이 없는 곳을 향해서 역대 조사(祖師)가 많은 어록(語錄)을 남기셨다. 이것이 또한 자리이타를 위한 자비심에서 나오신 소식이다.

오늘 산승이 나와서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는 것도 내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수행 과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내 시간도 바쁘다. 무엇 때문에 여기에 올라와서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중언부언 두서없는 소리를 하고 있느냐?

부처님께서 다겁(多劫)을 두고 스스로 생사 속에서 윤회하신 그런 뼈아픈 경험이 계셨기 때문에 여러 중생들을 위해서  나오셨어.

저 자신도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스스로 정진을 해봤기 때문에 선지식한테 들은 말씀, 나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바를 여러분에게 간곡히 말씀을 드림으로 해서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정진을 잘할 수 있는, 발심하실 수 있는 채찍이 되고 도움이 된다면 하는 그러한 마음에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진즉부터서 공부를 해서 이런 말을 듣지 아니하고라도 잘 정진을 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처음으로 공부를 하러 오셔서 이러한 말씀이 꼭 필요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미 다 잘 알고 공부를 잘하고 계신 분은 증명을 하시면 되는 게고, 처음 와서 들으신 분은 뼈에 사무쳐서 명심해서 듣고 발심을 해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 선배 후배 도반들의 그 돈독한 정의가 아니고 무었이겠습니까.


‘참 법문’이라 하는 것은 설할래야 설할 수가 없는 것이여. 따라서 들을라야 들을 것 없는 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이여.

아까 조실 스님 법문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쥐는 바로 고양이의 밥인데, 고양이는 쥐를 먹고 사니까 쥐가 바로 고양이 밥인데, ‘쥐가 쥐를 먹었다’ 이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라 일러 가지고 인가(印可)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미제(美製) 자물쇠통과 같아서 아무리 것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생겼어도 제 번호가 아니면은 열리지를 않습니다.

체중현(體中玄) 도리에서 본다면 손을 한번 드나, 고함을 한번 치나, 발을 한번 구르거나, 좌복을 한번 들었다가 내동댕이를 치거나, 빰을 한 대 올려붙이거나, 눈을 한번 감았다 뜨거나, 일거수 일투족이 다 맞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방귀를 한번 뀌거나, 부처라고 하거나 똥이거나, 일체가 다 한 소식입니다. 한 맛입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그러한 체중현 도리, 일체가 텅 빈 도리, 한 맛인 도리로 보아 가지고서는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이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이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하는 그러한 식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을라고 해서는 그것은 공연한 헛수고인 것입니다. 얻었다고 해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맞지 아니하니 다시 일러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는데, 무슨 밥그릇이 어떻게 깨져?
이 도리는 우리가 아무리 따져 봤자 알 수가 없는 도리여. 가르켜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도리여. 반기이파(飯器已破) 도리.

여러분이 가지고 하는 판치생모, 또는 정전백수자, 또는 시삼마 이런 모든 공안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따질라야 따질 수 없고, 꽉 맥힌 상태에서 ‘어째서 판치생모(版齒生毛)라 했는고?’ 알 수 없는 꽉 맥힌 상태에서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가야지,
‘쥐가 고양이 밥을... 밥...,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앞에 잣나무 잣나무......’ 이런 식으로 해서 이렇게 따지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이러한 참선은 이건 ‘죽은 참선’이여. 절대로 그런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언제든지 좌선을 해서, 참선 시작할 때에는 준비 호흡으로 숨을 가득 가슴으로 들어마셨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만큼 참었다가 입으로 ‘후—’하고 다 내쉬어 버리고 나서, 그렇게 2번을 하고서,
3번째는 가슴으로 들어마시지를 말고 가슴과 윗배는 고대로 놔두고 아랫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불어나도록, 볼록해지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면서 숨을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시되 윗배와 가슴은 약간은 움직이겠지만 거의 가만히 있도록 유지를 하면서 아랫배만 약간 볼록해진다.

들어마시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3초, 3초 동안에 스르르르 하니 아주 수월하게 들어마시는 거여.

너무 오랜 시간을 걸려서 들어마실라고 하지를 말고,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셨으면 너무 가득 들어마시지를 말고, 아까 준비 호흡을 할 때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지만 인자 본(本) 호흡, 단전 호흡에 들어가서는 배가 터지도록 들어마시면 안된다 그말이여.

8부쯤만 들어마셔. 더 들어마실수 있지마는 8부쯤만 스르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8부쯤 들어마신 상태에서 약 3초 동안을 머물러.
딱 정지한 상태에서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이렇게 홀쪽해지도록.

그 홀쪽해지기 시작할 때 그때 ‘이뭣고~?’ 속으로 그렇게 하면서 숨을 내쉬는 거여.

이것은 아주 초보자를 위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보자는 이러한 방법을 써서 하면 단전 호흡과 화두가 함께 되어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지어 들어가면 머지않아서 단전 호흡도 잘되고, ‘단전 호흡했다’하면 화두도 거기에 붙여서 함께 잘되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익숙해진 사람은 숨을 들어마시거나, 내쉬거나,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그까짓것도 구애 없이 항시 화두의 의단(疑團)이 항시 목전(目前)에 상주해서, 눈앞에 항시 나타나서 일여(一如)하겠지만, 처음 한 사람은 ‘이뭣고?’해도, 금방 ‘이뭣고?’한 사이에 생각은 동쪽으로 서쪽으로 왔다갔다 하고, 어렸을 때로 날아갔다, 집으로 날아갔다, 야단이거든. 그러다 보면 화두를 놓쳐 버린다.

그래서 다시 또 챙길라면은 힘이 들거든. 그러다 억지로 ‘이뭣고?’ ‘이뭣고?’하다 보면은 모가지만 뻣뻣해 가지고 골만 빠개질라고 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도 안되고, 아! 이러니 할려고 마음은 내는데, 할려고 하면은 잘 안되니 그거 어떻게 하냐?
그래서 과거에 도인(道人)들이 여러 가지로 다 경험을 해 보고 연구를 한 결과 이 단전 호흡을 겸해서 하도록 이렇게 모다 지도를 해 오셨다 그말이여.
그래서 지금 오늘 유독 결제날이기 때문에 단전 호흡하는 법과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히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시간이 벌써 넘어서 배가 고파 죽겠는데, 고만 했으면’ 이러시겠지만 굶어서 돌아가시지를 않습니다. 조금 배가 고파야 말이 들어가지 잔뜩 먹고 쌕쌕거리게 되면은 졸음만 오지, 법문이 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금 시장한 다음에 잡숴야 밥이 맛이 있습니다.

숨을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하면서 내쉬는데, 숨을 들어마실 때 어떻게 들어마시냐 하면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가 불룩하도록 이렇게 하지를 말고, 물론 코로는 들어가겠지만, 우리의 기분으로는 저 궁둥이 뒤에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가 이렇게 볼록해지도록 그런 기분으로 들어마시고,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머물렀다 내쉴 때는 코로 내쉰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고, 내쉴 때도 저리 뒤로 해서—궁둥이 뒤로 해서 저 뒤로 쑤욱 내보낸다는 그런 기분으로 내쉬어 보시라 그말이여.
저 뒤에서 쑤욱 들어마셨다, 들어마신 호흡을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쉴 때는 저 뒤로 쑤욱 배꼽을 뒤로 잡어당기면서 뒤로 내쉬는 거여.

그런데 절대로 무리하게 억지로 하지를 말어. 너무 억지로 해 가지고는 그냥 한 두어 번만 하면 숨이 가쁘게 이렇게 하시다가 ‘아이고! 그거 되서 못하겠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예요.

아주 수월하게—들어마시는데 3초 걸리고, 3초 머물렀다가 내쉴 때는 한 4~5초 걸리게 조용하게 내쉬고, 이렇게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하는 거기에다가 ‘이뭣고~?’하는 알 수 없는 의단을 거기다가—배꼽밑에 배가 나왔다가 들어갔다 하는 거기다가 관심을 두고서 화두를 거각(擧却)해 보시라 그말이여.

백 명이면 백 명, 몸도 차츰 건강해지고 가벼워지고 골치 아픈 병이 있는 사람도 그렇게 하면 병이 낫거든. 가슴이 답답한 증세가 있는 사람도 그게 낫고, 집안에서 무슨 일로 속이 상해서 가슴앓이 속병이 있는 사람도 이것을 하면 그 병이 낫는다 그말이여.

이것을 하면서 화두까지 거기다 겸해서 하면은 결정코 깨달음까지 이르른다 이말이여. 화두는 아니하고 밤낮 고것만 하고 있으면 그것은 병을 고치는 데에는 효과가 있지만 그래 갖고는 그건 깨닫지는 못하는 것이여.

거기에다 화두를 꼭 붙여 가지고 의단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순일무잡(純一無雜)하도록 그렇게 해 나가면 몸도 건강하고 마침내는 깨달음에까지 이르른다. 이것이 바로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이렇게 해 나가면 선방에 방부(房付)를 들이지 아니하고 가정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그렇게 하시고 낮에도 시간 있는 대로 그렇게 하시고,

이 공부는 꼭 앉어서만 하는 게 아니라 일하면서, 말하면서, 걸어가면서, 차 타면서, 행주좌와간에 할 수 있는 것이라, 오늘 백일기도에 동참하시고 또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은 모두가 다 이 세등선원에 방부를 들인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다못 장소가 형편상 이 세등선원일 수도 있고, 또 보문사일 수도 있고, 군산일 수도 있고, 또 시내일 수도 있고, 조치원일 수도 있고, 청주일 수도 있고, 서울일 수도 있습니다.

장소야 어디건 그거 상관이 없어. 한 생각 딱! 챙겨 가지고 ‘이뭣고?’할 때 바로 그 자리가 선방(禪房)이여. 선불장(選佛場)이여.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을 모시고 앉아있는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한 생각 한 생각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말고, 한 생각 일어나는 그자리에서 숨을 스르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이뭣고?’ 이렇게 단속해 나가. 업장(業障)이 거기에서 봄눈 녹듯이 녹아 없어져. 업장이 녹아지면은 소원성취는 거기에 있거든.(60분26초~80분55초)





(2)------------------

내가 그전에는 얼굴이 아주 시커먼 사람인데, 아! 30년을 참선을 하니까, 내 얼굴보고 검다고 하지 않는다 그말이여.
성질이 아주 불같아 가지고 신경질을 잘내기로 아주 유명하고, 고집이 센 사람인데, 아! 참선을 했더니 나 보고 마음보 고약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 별로 없다.

여러분 가운데도 얼굴이 검어서 고민인 사람, 얼굴에 무엇이 많이 나서 고민인 사람, 또 신경질을 많이 내고 고집이 세다고 욕을 먹고 그러한 평판이 있는 분, 오장육부에 병이 많은—내가 또 병주머니여서 학교를 다닐 때는 1년에 한 달 내지 두 달은 꼭 결석을 했다.

그런데 출가해 가지고 참선을 하니까, 사람들이 나보고 대단히 건강하다고 그런는데, 내가 별로 약도 많이 먹지도 않고, 병원에 가기를 그렇게 죽기보다 더 싫어한 사람이어서 병원에 잘 안 가고 그러는데, 참선을 해서 이렇게 몸도 건강해 진 것 같어.

여러분들도 참선을 열심히 하시고, 제가 금방 이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의식주 문제라든지, 일상 생활 속에서 화두를 단속하는 이러한 법을 명심을 해서 실천에 옮기신다면 얼굴도 예뻐질 것이고 오장육부의 병도 다 나아질 것이고,
성격이 고약하다고 평판이 있는 시어머니, 며느리, 스승, 상좌 할 것 없이 다 불보살과 같이—나는 워낙 고약한 사람이라 그렇지, 보통 된 사람이 그만큼 열심히만 하면 틀림없이 금생에 불보살과 같이 될 것을 나는 맹세를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아까 몽산 스님한테 책임을 따져야 됩니다. 몽산 스님이 대신 지옥에 간다고 맹세를 하셨거든.
나도 역시 몽산 스님과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깨닫지 못한다면 나도 여러분 대신해서 지옥에 간다』고 자신있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나는 경험을 통해서도 그것을 느꼈고, 이러한 선지식(善知識)들의 법문을 여지없이 믿기 때문에 추호(秋毫)도 나는 의심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오늘 결제일을 기해서 여기에 모이신 출가한 스님네나 마을에 계신 신도 여러분들, 오늘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정말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결정코 대도를 성취해 주시기를 간곡(懇曲)히 부탁을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수설운산천만사(雖說雲山千萬事)라도  해천명월본무언(海天明月本無言)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구름 일어나듯이, 산에 구름 일어나듯이 한도 없이 끝도 없이 천 가지, 만 가지 말을 이렇게 말을 한다 하더라도 저 바다 위에 떠있는 밝은 달은 원래로 말이 없느니라.

마지막 한마디는 끝내 여러분에게 드리지를 못합니다. 이 주장자에게 맡기고 내려갑니다.(80분56초~86분14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악도(惡道, 惡途) ; 악한 짓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고 하는 괴로움의 생존. 지옥•아귀•축생 등의 세계. 삼악도(三惡道).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안락국(安樂國)•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무량청정토(無量清淨土)라고도 함.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4분 51초)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

 

복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과 무루복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 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위법(無爲法) ; (산스크리트어: asaṃskrta-dharma) 무위법은 무위의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진리의 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또는 그러한 개별 존재(법·法)를 가리킨다.
원래 무위 혹은 무위법은 열반(涅槃)의 다른 명칭.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화주(化主) ; ①중생을 교화(敎化)하는 주(主). 부처님를 말함. ②신도들의 집을 돌며 절에 필요한 양식·물건·비용 등의 시물(施物)을 얻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본각(本覺) : 일체 중생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각성(覺性)의 뜻으로서 청정한 심성(心性)을 말함.
이 심성은 허명(虛明)해서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또 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본래 중생의 상념(想念)을 떠나서 법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망(迷妄)과 깨달음에 관계 없는 절대적인 경위(境位)이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자비(慈悲) ; 자(慈)는 ‘우정•친애의 생각’라는 원의(原義)로, 남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뜻, 비(悲)는 ‘연민•동정’을 원의(原義)로, 남의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뜻.
불•보살이 중생을 불쌍히 여겨 고통을 덜어 주고 안락하게 해주려는 마음.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어록(語錄) ; 조사어록(祖師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 예로부터 석취미모(惜取眉毛, 눈썹을 아낄지어다)라고, 경(經)의 뜻을 잘못 해석하여 진리로부터 동떨어진 설법을 하면 미모(眉毛•눈썹)가 빠진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런데 ‘한 물건(一物)’이라 표현하는 진리의 본체는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고 하였으니,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설법을 한다'는 것은 선지식의 중생을 위한 간절한 자비심을 나타내는 뜻이다.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

 

체중현(337:2분48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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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2분 48초)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하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하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체중현(282:2분19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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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2분 19초)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체중현(466:2분26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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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2분 26초)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체중현(112:2분36초).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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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2분 36초)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 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8부(八部)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

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선실(禪室)과 같은 말. ②‘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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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주머니 ; 갖가지 병이 많은 사람 또는 그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몽산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추호(秋毫 가을 추/가는 털 호) ; ‘추호도’, ‘추호의’의 꼴로 쓰여, 가을에 짐승의 털이 매우 가늘어지는 데에서 가을 털끝만큼 ‘매우 조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간곡히(懇曲- 간절할 간/간절할 곡) ;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Posted by 닥공닥정
활구참선 최상승법2014. 7. 28. 17:16

§(337) (게송)적수성동신유지~, 심수만경전~, 청군앙면간허공~ / 중생의 모든 희로애락이 바로 그곳이 선불장(選佛場) / 자기 소임을 하면서 거기에 즉해서 '이뭣고?'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은 분명 그것이 중생의 생각이지만, 그 중생심을 버리지 아니한 채 바로 화두(話頭)로 돌이켜 버리면, 그것이 바로-거기서 생사심(生死心)이 끊어져 버리고 깨달음으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된다.


번뇌나 망상을 없앨려고 허면은 더욱 일어나는데, 없앨려고 허지 말고 끊을려고 허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거기에서 화두를 들고 나아가면, 끊을려고 허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번뇌가 끊어져.


**송담스님(No.337) - 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용337)

 

(1) 약 14분.

 

(2) 약 13분.

 


(1)------------------

 

적수성동신유지(滴水成凍信有之)하고  녹양방초색의의(綠楊芳草色依依)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추월춘화무한의(秋月春花無限意)여  불방한청자고제(不妨閑聽鷓鴣啼)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적수성동신유지(滴水成凍信有之)나  녹양방초색의의(綠楊芳草色依依)로다.
방울 물이 얼음을 이룬다 그말이여. 엄동설한에 물방울이 똑 떨어지면은 떨어지자마자 탁 얼어버리고 또 물방울이 떨어지면 떨어짐과 동시에 얼어버리고. 그러헌 진리가 진실로 있어. 사실 그런 것이로되,

녹양방초색의의(綠楊芳草色依依)여. 푸른 버드나무와 향그러운 꽃이 그 색이 아름답고 아련하다.

엄동설한에는 그렇게 꽁꽁 얼어붙어 가지고 물방울마다 얼어가지고, 결국은 흐르는 강물도 온통 전체가 얼어붙어서 흘러가는 물을 볼 수가 없으나,
어느덧 소한·대한이 지내고 입춘·우수가 돌아오면 그 꽁꽁 얼어붙었던 강물과 온 천지가 녹아가지고 푸릇푸릇 새싹이 돋아온 것이다 그말이여.

강물이 얼어붙고 온 산천이 꽁꽁 얼어붙을 때에는 풀 한포기 이파리 하나 푸른 빛깔을 볼 수가 없지만 봄이 돌아오면은 푸릇푸릇 새싹이 돌아오고 누른 꽃도 피고 빨간 꽃도 피게 된다 그말이여.

이 진리 체(體)에 입각해서 본다면 입으로 가히 설할 법이 없고 귀로 가히 들을 수 있는 법이 아니지만, 그러나 백척간두(百尺竿頭)에 한 걸음을 내려디디면 거기에는 무수방편(無數方便)이 다 이 한 일을 위해서 설해지는 것이여.

부처님께서 녹야원(鹿野苑)에서 법(法)을 설하시기 시작해 가지고, 발제하(跋提河)에서 열반에 들으실 때까지 팔만사천 법을 설하시고도 마지막에 가서는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팔만사천 법을 설하시고도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셨으니, 그러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이 있느냐?’할 때에 ‘설한 바가 있다’고 한다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고, ‘설한 바가 없다’고 한다면 경을 비방하는 것이여. 법을 비방한 것이다 그말이여.

설하시고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시고, 설한 바가 없다고 하시면서도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엄동설한이 세월이 지나가면 다시 새싹이 나서 잎이 피고 꽃이 피는 도리.

추월춘화무한의(秋月春花無限意), 가을에는 휘황창 달이 밝고 봄에는 울긋불긋 아름다운 꽃이 피는 거기에 한없는 뜻이 있다 그말이여. 한없는 그러한 현상 속에 무한한 뜻이 그 속에 들어있어.

그러기 때문에 불방한청자고제(不妨閑聽鷓鴣啼)여. 한가히 자고새 우는 소리를 듣는 것이 방해롭지 않다. 봄이 돌아와서 잎이 피고 꽃이 피면은 그 꽃이 향기로운 속에는 자고새란 새가 그 노래를 하는데, 그 자고새 노래 소리를 듣는 것이 방해롭지를 않더라.

오늘 정묘년 칠석날을 맞이해서 방금 조실스님의 녹음 법문을, 그 어느 해 칠석날에 설하신 녹음 법문을 사부대중은 경청을 했습니다.
구구절절이 그 감동에 넘치는 그 간곡한 법문을 듣고 바로 12년 전에 열반허셨던 전강 선사(田岡禪師)께서 바로 이 법상에서 육성으로 실지로 설하신 거와 같이 그렇게 낭랑(朗朗)하게 그렇게 법문을 설해 주셨습니다.

칠석날이라 허면은 모든 신남신녀들이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조촐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와서 모두 복을 빌고 명을 빌고 소원을 빌어왔습니다.
저 신라·백제 때부터 다 칠성단(七星壇)에 기도를 허고, 칠성단에 공양을 올리면은 업장이 소멸이 되고 수명장수허고 복덕이 구족허고, 아들이 없는 사람은 아들을 낳고, 돈이 없는 사람은 부자가 되고, 모든 소박한 우리 인간의 모든 소원을 빌어오는 그러헌 유서(由緖) 깊은 날입니다.

그날에 조실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설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기도를 하고 어떻게 복을 빌고 하면 부자가 되고 수명장수 하고 복덕이 구족하느냐? 그런 말씀은 한 말씀도 허시지 아니허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최상승 법문을 설해 주셨는데,

그 법문 가운데에 “중생의 모든 중생심을 버리고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衆生)의 마음 - 희로애락과 탐진치 삼독(三毒) 그러헌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허는데 그 마음을 버리고 그래 가지고 청정한 어떠헌 부처님 마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 마음이 일체 경계를 따라서 마음이 이렇게 굴러 가는데,
전처실능유(轉處悉能幽)다. 그 굴르는 곳마다 다 능히 유심(幽深)하다, 깊숙하다.

중생은 경계를 보고 무슨 소리를 듣고 그러면은 그 경계에 따라서, 그 색상 따라서, 거기에 상응해서 온갖 생각이 일어납니다.

 

슬픈 일을 보면은 슬퍼허고, 기쁜 일을 보면은 기뻐허고, 희로애락에 따라서 경계 따라서 온갖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 경계 따라서 일어나는 그 마음이 그 경계를 여의고 깨달음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경계에 즉해서 자기 본성품을 봐 버리면(隨流認得性) 기뻐헐 것도 없고 근심헐 것이 없다(無喜亦無憂).
우리가 모다 공부를 해 나가는데 가장 중요헌 요점인 것입니다.

중생은 경계에 따라서 온갖 마음이 일어나되, 일어나는 그 마음으로 인해서 둘째 생각 셋째 생각 넷째 생각 해서 점점점점 그 생각이 변해서 발전해 가지고 결국은 한없는 업(業)을 짓게 됩니다.
그 생각이 얼굴에 표현이 되고 행동으로 나타나 가지고, 조그마한 '한 생각'이 동함으로 해서 그 생각이 결국은 행동으로 나타나 가지고 큰 업을 짓게 돼.

그러허기를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그렇게 해왔고, 현실적으로도 그렇게 해오고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이 최상승법,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그 생활해 나가는데 있어서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물론 참선헌 사람이라 하드라도 눈으로 무엇을 보면은 아, 저것은 붉다·누리다·빨갛다, 저것은 사람이다·개다, 그런 것을 느끼지 아니헌 것은 아니여. 느끼되, 그 느낌이 다음 생각으로 발전하기 전에 ‘이뭣고?’하고 화두를 턱! 들어 버린다 그말이여.

그러기 때문에 일어나는 그 한 첫 생각은 분명 그것이 중생의 생각이지만, 그 중생심을 버리지 아니한 채 바로 화두(話頭)로 돌이켜 버리면, 그것이 바로 - 거기서 생사심(生死心)이 끊어져 버리고 깨달음으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된다 그말이여.

이것이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 공부를 한 사람과 이 최상승법을 믿지 아니허고 그냥 마구 살아가는 사람과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처음~14분17초)

 

 

 

 


(2)------------------

 

청군앙면간허공(請君仰面看虛空)하라  확락무변불견종(廓落無邊不見蹤)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해전신사자력(若解轉身些子力)하면  두두물물총상봉(頭頭物物總相逢)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청군앙면간허공(請君仰面看虛空)이라. 청컨댄 그대는 머리를 들고 저 허공을 보아라.
확락무변불견종(廓落無邊不見蹤)이다. 확 트여서, 갓이 없이 트여가지고 그 자취를 볼 수가 없느니라.

약해전신사자력(若解轉身些子力)허면, 만약 거기에서 몸을 뒤치면, 몸을 돌리면,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총상봉(總相逢)이다. 일체 두두물물이 모두가 다 '그'더라. 모두를 거기에서 다 만날 수가 있더라. 모든 이치를 거기에서 다 볼 수가 있더라.

화두를 들어서, 들고 또 들고 해서 들어갈수록 알 수가 없다 그말이여. 꽉 맥혀서 알 수가 없어. 한 달, 두 달, 석 달, 1년, 2년, 3년, 4년, 해 갈수록 답답허고 알 수가 없어.
알 수가 없지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을 향해서 화두를 관조(觀照)해 나갈 따름이거든. 거기에서 망상을 끊을려고 허지 않아도 망상이 끊어지고, 번뇌를 끊을려고 허지 않아도 거기서 번뇌가 끊어져.

번뇌나 망상을 없앨려고 허면은 더욱 일어나는데, 없앨려고 허지 말고 끊을려고 허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거기에서 화두를 들고 나아가면, 끊을려고 허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번뇌가 끊어져. 오직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허다 그말이여.

순일무잡해서, 그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한 그 경계는, 그 맑고 깨끗하고 고요허고 순수무잡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헐 수가 없어.
거기서 한 생각 더디 의심하면, 한 생각 의심을 놓치면 - 좋다느니, 편안하다느니, 맑다느니 - 딴 생각을 거기서 먹게 되면 찰나(剎那)간에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지는 것이여.

깨달음을 기다리지도 말고, 누가 깨닫게 해주기를 바라지도 말고, 영원히 그런 상태로 계속 되었으면 허는 그런 생각도 헐 필요가 없어. 알 수 없는 화두만을 끝없이 관조해 나가.

행주좌와 어목동정 간에 걸어갈 때나, 앉았을 때나, 누워서나, 차를 탈 때나, 일을 할 때나, 가정에서 살림을 헐 때, 살림을 허게 되면 살림, 설거지를 허게 될 때나, 장사를 허거나, 무슨 밥을 짓거나 찌개를 끓이거나, 똥을 누거나, 옷을 입거나, 빨래를 허거나, 무엇을 허거나 상관이 없어.

가정에서 생활을 하고 직장에서 생활을 하다 보면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고 속상하는 일도 있고 걱정스런 일도 있겠죠.
바로 그 기쁜 일이 있을 때에는 기쁜 일을 당한 그 자리에서 ‘이뭣고?’ 슬픈 일을 당허면 슬픈 일을 당한 바로 거기에 즉해서 ‘이뭣고?’ 오늘같이 칠석날을 당허면은 칠석날을 당해서 목욕재계허고 와서 동참을 허고 이렇게 법요식에 참석허면 바로 거기에서.

 

그렇게 살아가면 중생의 모든 희로애락이 바로 그곳이 선불장(選佛場)이고.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기복(祈福)불교는 안 믿는다. 그까짓 무슨 복을 빌고, 무슨 소원을 빌고. 인간의 흥망성쇠 재산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나 또는 음식이나 명예나 세속의 모든 안락이 그까짓 것이 하루아침 꿈에 지나지 못헌데 얻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
그까짓 것 빌어서 뭐해? 자식도 다 꿈속에서 만난 한 꿈속의 인연이요, 부귀영화도 그까짓 것 한평생 잠깐 왔다 가버리는 그까짓 것을 얻으면 무엇허고 잃으면 무엇해?’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복도 빌지도 않고 칠석에도 동참(同參)도 허지도 않고, ‘나는 오나가나 참선 뿐이다. 「이뭣고?」면 그만이지. 그밖에 무엇을 구헐 것이 있어?
구해 봤자 무슨 얻어져 봤자 그거 몇 조금 가냐? 인생 칠십이 하루아침인데 죽어 갈 때 가지고 갈 무슨 소용이 있느냐? 오직 나는 「이뭣고?」뿐이 없다.’

 

이렇게 나간다면, 그런 사람이 만약에 있다면 그건 참 대발심(大發心)을 허고 인간을 완전히 체달(體達)해 버린 사람이지.

슬퍼도 「이뭣고?」 기뻐도 「이뭣고?」 뭐 집안이 흥해도 「이뭣고?」 망해도 「이뭣고?」 뭐 누가 죽어도 「이뭣고?」 태어나도 「이뭣고?」 좋아헐 것도 슬퍼헐 것도 말 것도 없다.

 

그렇게 전체가 오직 「이뭣고?」 하나로 딱 되어 가지고 산을 봐도 산일 줄 모르고, 물을 봐도 물인 줄 모르고, 남편을 봐도 남편인 중도 모르고, 자식을 봐도 자식인 줄도 모르고, 이렇게 되어 버렸다면, 그리고 오직 자나깨나 「이뭣고?」 하나 밖에 안 되았다면 그 사람에게는 언어가 끊어져 버려, 시비가 끊어져 버려.
그렇게 되아버렸다면 불일성지(不日成之)여. 그 사람은 며칠 안 가서 언제 툭 터질런지를 몰라, 그런 사람은.

그렇게 실지로 된 사람이 있다면. 승속을 막론허고 그렇게 되어 버렸다면은 그건 누가 그 사람 보고 이래라저래라 시비헐 것이 없어요.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면은 그런 사람이야말로 신심과 분심과 의단이 이 삼요(三要)가 일시에 폭발헌 사람이라.

그렇게 되지 못해서 한(恨)이여. 출가해서 10년 20년 공부해도 그렇게 되지 못하기 때문에 금일야임마(今日也恁麽) 명일야임마(明日也恁麽)거든.

그렇게 되는 것 밖에 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면 선방에서는 선방의 법도(法度)가 있고, 가정에서는 가정의 법도가 있어. 사회에 나가면 사회의 법도가 있는 법이여.
그래서 그 법도에 따르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그 속에서 항상 일부러 마음을 일으켜서라도 「이뭣고?」를 해야 되는 것이여.

 

그렇게 애를 쓰고 또 애를 쓰고 허다 보면은 아까와 같은 그러헌 타성일편지경(打成一片之境)이 오는 것입니다.

타성일편지경에 오지도 않으면서 ‘나는 참선을 허니까 운력도 나는 안 한다. 나는 참선을 허니까 예불도 안 한다. 나는 참선 허니까 법당에 갈 것도 없다.’
또 ‘참선을 허니까 나는 그까짓 거 기복불교 허지 아니허고 참선만 헌다. 난 절에도 갈 필요도 없다. 참선 밖에 더 있냐.’ 이렇게 헌다면 그것은 조금 옳은 것 같은데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참의심(眞疑)'이라 하는 것은 '주작(做作)이 끊어진 자리'인 것입니다.
주작(做作)이라 하는 것은 '지을 주(做)자, 지을 작(作)자' 지어서 하는 것, ‘지어서 한다’는 것은 속은 그렇지 못허면서 겉으로 그렇게 헌 것처럼 꾸미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놓여진 자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이 있습니다. 방부를 들이고 방(榜)을 짜면 각기 소임을 맡듯이 이 가정에서도 소임이 있어.
엄마로서의 해야 할 소임, 아내로서 해야 할 소임, 또는 아들로서 해야 헐 소임, 딸로서 해야 헐 소임, 시어머니로서 해야 헐 소임, 며느리로서 해야 헐 소임, 학생으로서 해야 헐 소임, 회사나 관공서의 직원으로서 해야 헐 소임이 있습니다.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을 최소한 허면서 거기에 즉해서 「이뭣고?」를 해야 허는 것입니다.

분심(憤心)과 의심(疑心)과 신심(信心)이 한목 폭발한 상태도 아니면서, 소임도 아니하면서 소임을 포기하고 ‘불법을 믿네, 참선을 헙네’하고 그럭저럭 그렇게 나가면 그것은 꼴불견인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바른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사람은 참선을 바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최상승법을 옳게 실천해 나간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까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이요 전처실능유(轉處悉能幽)’도 역시 그것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36분28초~49분51초)

 

 

 

 


------------------(1)

 

*(게송) ‘적수성동신유지~’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백척간두(百尺竿頭 일백 백, 자 척, 장대 간, 머리 두) ; ①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 올라섰다는 뜻으로, 몹시 어렵고 위태로운 지경을 이르는 말. ②모든 상대적 차별을 없앤 절대의 경지.
*무수방편(無數方便) ; 헤아릴 수 없이(無數) 많은 방편.
*녹야원(鹿野苑) ; 석가(釋迦)가 35세에 성도(成道)한 후 최초로 설법을 개시한 곳이며, 이때 교진여(僑陳如) 등 5명의 비구(比丘)를 제도(濟度)하였다.
갠지스 강 중류, 지금의 바라나시(Varanasi, 베나레스 Benares)에서 북동쪽 약 7㎞ 지점에 있는 사르나트(Sarnath)의 유적이 곧 녹야원의 터. 사슴동산(녹야원), 즉 사르나트(Sarnath)는 산스크리트어로 ‘사슴의 왕’을 뜻하는 ‘사란가나타(Saranganatha)’가 줄어든 말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우루벨라(uruvelā) 마을의 붓다가야(buddhagayā)에서 녹야원까지는 직선 거리로 약 200㎞됨.
탄생(誕生:룸비니) ·성도(成道:붓다가야) ·입멸(入滅:쿠시나가라)의 땅과 더불어 불교(佛敎) 4대 성지의 하나.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발제하(跋提河) ; 석가모니가 열반한 쿠시나가라 옆에 흐르는 강의 이름.
*칠성단(七星壇) ;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신격화한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모신 단. 칠성에 대한 신앙은 특히 중국의 도교에서 발달하여 이후 ①불교에서 칠성은 호법선신(護法善神)의 하나로 수용되었고 ②민간에서는 특히 수명과 재복을 관장하는 신으로 믿어졌다.
*유서(由緖) ;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까닭과 내력.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함령(含靈)• 함식(含識)• 군생(群生)• 군맹(群萌)•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성냄, 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게송) ‘심수만경전~’ ; [직지(直指)] (白雲和尙 抄錄, 조계종출판사) 63쪽 마나라(摩拏羅) 존자 게송 참고.
*유심(幽深)하다 ; 깊숙하고 그윽하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善業)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생사심(生死心) ;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2)

 

*(게송) ‘청군앙면간허공~’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참고] 위의 야부도천 게송을 함허 스님이 설의(說誼)한  ‘정체종래절성색~’에 대한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두두물물(頭頭物物) ; 온갖 사물과 현상.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①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②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
*체달(體達) ; 사물의 진상을 통달함.
*금일야임마(今日也恁麽) 명일야임마(明日也恁麽) ; 오늘도 그럭저럭 내일도 그럭저럭.
*법도(法度) ; 생활상의 예법과 제도(制度)를 아울러 이르는 말.
*타성일편(打成一片) : 좌선할 때 자타(自他)의 대립이 끊어져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경계.

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14. 6. 14. 15:37

§(401) (게송)기래끽반냉첨의~ / 발심한 사람에게는 모두가 불보살의 화현신이다 / 화두는 가장 무서운 무기 / 내가 곧 세계 / (게송)생사차무승여속~ / 일념단속.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추울 때는 더운 옷을 껴입을 줄 알기만 하면, 바로 거기에 바른 공부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거야.


발심(發心)해서 도 닦는 사람은 이쁜 사람을 보고도 이쁜 생각이 나자마자 찰나에 「이뭣고?」하고 화두를 든다면, 그 사람은 불보살이 잠시 나로 하여금 화두를 들어서 깨달음에 나아가기 위해서 화현신(化現身)으로 나타난 사람이 될 것이다.
어느 때, 어느 시간 무엇을 허실 때라도 항상 화두를 들고, 화두 하나만을-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저 딱 화두를 거각(擧却)하면 그 자리에는 부처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는 모든 조사가 계신 자리.


이 화두는 간단한 한마디고 참 평범한 한마디지만 혁범성성(革凡成聖)이거든. 범부를 고쳐서 성현을 맨드는 그러헌 무서운 무기거든. 원자탄 100개를 던진들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겠습니까?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생사고, 그 생사가 결국 우리에게 육체적인 생사 또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허게 허는 그 원인이요 장본인이거든. 그 일념 일념을 단속허는 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의 자물통이여.


**송담스님(No.401) - 1989년 11월 첫째일요법회(65분)에서. (용401)

 

(1) 약 20분.

 

(2) 약 6분.


(1)------------------

 

기래끽반냉첨의(饑來喫飯冷添衣)헌데   삼척지동야공지(三尺之童也共知)니라
나무~아미타불~
일개화두명역력(一箇話頭明歷歷)하면   여하개안자우치(如何開眼恣愚癡)리요
나무~아미타불~

기래끽반냉첨의(饑來喫飯冷添衣). 배고픔이 오면 밥을 먹고 추워지면 옷을 껴입어.
삼척지동야공지(三尺之童也共知)다. 이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다 함께 아는 바다 그말이여. 배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더운 옷을 껴입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는 일이니,

일개화두명역력(一箇話頭明歷歷), 이 한 개의 화두가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역역(歷歷)하게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허도록 이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면,
여하개안자우치(如何開眼恣愚癡)리요. 어떻게 눈을 뜨고서 어리석고 어리석은 방자(放恣)의 우치(愚癡)에 빠질 것인가?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추우면 더운 옷을 껴입을 줄 아는, 이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라 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해서 해탈도를 증득헐랴고 허는 여기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추우면은 더운 옷을 껴입을 줄 아는 바로 거기에 있거든.

배고프면 밥 먹을 줄도 모르고 추워도 옷을 껴입을 줄도 모른 정도가 되었다면 그 사람은 공부해 봤자 소용이 없어.

‘그것을 누가 모르겠느냐?’하는데,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다 이 정법(正法)을 믿고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다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헐 수가 있다고 허는 증거거든, 이게.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추울 때는 더운 옷을 껴입을 줄 알기만 하면, 바로 거기에 바른 공부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거야.

「이뭣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안 사람이면 어찌 「이뭣고?」를 못해. 「이뭣고?」
정법을 안 믿고 화두를 타서 공부를 아니한 사람은 배고프면 맛있는 것을 생각하고, 무엇을 먹어야 맛있을까? 어떻게 무엇을 먹어야 배가 부를까? 어떻게 먹어야 영양을 섭취할까? 잘했다 못했다 짜다 싱겁다 그러다가 말아 버린다 그말이여.

그런데 공부허는 사람은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아는 생각 날 때, 밥 먹으면서 「이뭣고?」거든.
우리는 이 공부를 일상 생활과 띠어서 생각해서는 안 돼.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 때 바로 배고프다 헐 때 「이뭣고?」거든. 춥다 헐 때 「이뭣고?」거든.
「이뭣고?」부터 탁 챙기면서 옷을 껴입고, 배고프면 즉각 「이뭣고?」를 탁 추켜들면서 밥을 먹어.

하물며 그 밖에 성이 날 때, 슬플 때, 괴로울 때, 속상할 때, 억울할 때, 원망스러울 때, 미울 때, 아까 증애심에 대한 말씀을 했지마는 사람이니까 이쁜 사람도 있고 또 미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쁜 생각이 나자마자 「이뭣고?」를 들고, 미운 생각이 들자마자 「이뭣고?」를 든다면, 이뻐하고 미운 것으로 인해서 큰 업(業)을 짓지 아니하고,

그 이쁜 생각·미운 생각 나자마자 「이뭣고?」를 척 든다면 그 이쁜 생각·미운 생각이 바로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미운 사람을 보고도 나는 「이뭣고?」를 드니까, 미운 사람은 웬수가 아니라 바로 잠깐 내 앞에 나타난 불보살(佛菩薩)일 것이고,
이쁜 사람을 보고 이쁜 생각을 내고 그것으로 인해서 음심(淫心)을 내고, 그것으로 인해서 업연(業緣)을 맺게 되면 그 사람은 바로 나를 마왕(魔王)으로 끌고 가는 올개미가 될 것입니다마는,

발심(發心)해서 도 닦는 사람은 이쁜 사람을 보고도 이쁜 생각이 나자마자 찰나에 「이뭣고?」하고 화두를 든다면, 그 사람은 불보살이 잠시 나로 하여금 화두를 들어서 깨달음에 나아가기 위해서 화현신(化現身)으로 나타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말이여.

그래서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나와 인연 있는 사람은 미운 사람이나 이쁜 사람이나, 다 발심한 사람에게는 다 불보살 화현이여.

발심을 못하고 정법을 믿지 아니하고 공부를 아니헌 사람은 사랑만 했다면은 머지않아서 그 사람 허고는 웬수가 되고 ‘다생원채(多生怨債)가 기어친(起於親)이거든-다생에 웬수 빚이 다 친한 데에서 일어나.’
친했다 하면은 사랑하게 되고, 사랑했다 하면은 머지않아서 웬수로 변하거든.
중생세계,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는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야.

발심을 해서 정법을 닦는 사람은 이 사바세계처럼 공부허기 좋은 곳은 없고, 깨달음에 나아가는데 가장 적절한 데가 없다 이거거든.

일개화두(一箇話頭)가 명역력(明歷歷)하면 여하개안자우치(如何開眼恣愚癡)리요.
어떻게 눈을 뜨고서 어리석은 마음을 방자히 헐 수가 있으리요.

화두(話頭) 하나로서 사바세계의 탐진치를 극복을 하고,
이 화두라고 허는 이 무서운 무기로써-이 무기는 총보다도 더 무섭고, 칼보다도 무섭고, 원자탄보다도 무섭고, 또 그 밖에 어떤 화학무기보다도 더 무서운 무기가 바로 이 화두인 것입니다.
아무리 화학무기가 무섭고, 원자탄이 무섭고, 수소탄이 무섭고, 총칼이 무섭다 해도 이 화두 하나 보다는 덜 무서워.

왜 그러냐? 이 화두는 간단한 한마디고 참 평범한 한마디지만 혁범성성(革凡成聖)이거든. 범부를 고쳐서 성현을 맨드는 그러헌 무서운 무기거든.
원자탄 100개를 던진들 중생을 제도할 수 있겠습니까? 수소탄 1000개를 던진들, 사람과 모든 것을 파괴할 것뿐이지, 그걸 가지고 이 세계를 평화롭게 맨들 수도 없는 것이고,
한때 잠시 두려움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영원한 평화는 가져오지 못하거든.

1945년에 원자탄을 일본에 나가사끼, 히로시마에 던져서 2차 대전(大戰)이 종식은 되었지만,
그래봤자 몇 해 안 가서 다시 중생심은 계속해서 발동을 해 가지고 온 세계는 이렇게 평화를 향해서 잘 되아가는 기미는 보이지 아니하고 언제 어떻게 해서 또 그와 같은 무서운 싸움이 일어날른지 모르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정법에 귀의해서 「이뭣고?」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 가지고,
온 세계가 멸망해 버릴지도 모를 그러헌 상황 속에서 우리가 나 자신을 구제하고, 가족을 구제하고, 국가 민족을 구제하고, 세계 인류를 구제하고, 이 자연계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이 정법 밖에는 없습니다.

왜 그러냐? ‘온 세계가 왜 이것이 존재허냐’하면은, 나 각자 나의 마음의 표현이 세계거든.
내 몸 밖에 세계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으므로 해서 세계가 있어. 내게 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의 식(識)이 밖으로 나타나서 표현된 것이 우주법계, 삼라만상 두두물물이야.

그래서 내 마음이 즐겁고 편안하면 온 세계가 다 좋게 보이고, 내 마음 하나가 슬프고 괴로우면 온 세계가 다 뵈기 싫어.
아름다운 꽃이 피었거나 휘황찬 밝은 달이 하늘에 떠 있어도 내 마음이 슬프면 꽃도 슬프고 하늘에 밝은 달도 슬퍼. 내 마음이 기쁘면 내 마음에 행복이 있으면 저 밝은 달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그 이쁘게 핀 꽃도 그렇게 고울 수가 없다 그말이여.

그러니 온 세계의 모든 것도 내가 좋아야 세계가 좋아. 친구도 내가 좋아야 친구를 보면 반갑지, 내가 불행허면 친구도 반가운 줄도 모르고 이 세상에 아무것도 좋은 것이 없어.

그러니 세계가 곧 나요, 내가 곧 세계거든.
그러기 때문에 세계의 평화를 이룩헐라면은 내 마음이 행복해져야 해.

어떻게 허면 내 마음이 행복허게 허냐?
세상 사람들은 많은 재산을 모으고 높은 벼슬을 하고 그러면은 행복헐 것 같지마는, 그렇게 생각해서 밖에서 그런 것을 얻을랴고 아우성을 치지만 그거 얻는다고 해서 정말 행복해지들 않애.
그런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면  잠시 참 좋다는 생각이 들고 기뻐하지만 그 얼마 안가요. 얼마 안가면 또 재산이 없어지기도 하고 벼슬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기도 헌다 그말이여.

그래서 진정한 행복은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야. 자기 마음속에서 찾아야 한다.

이제 가을도 가고 겨울철에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음력 10월 보름에 겨울철 안거(安居)가 시작이 됩니다. 보살님네는 뒤로 미루지 말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다보면 한량이 없습니다.
탁! 큰 마음을 내서 결단심을 내서 방부(房付)를 드리고 또 이 한철을 열심히 정진을 허시기를 바랍니다.

금년에 새로 선방(禪房)을 확장을 했으니 어찌던지 와서 정진을 잘 허시길 바라고,
부득이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접 나와서 공부를 못하신 보살님네, 거사님네들도 가정에서·직장에서·생활 속에서 항상 바로 있는-발 디디고 서 있는 그 자리, 앉어 있는 그 자리-그 자리가 바로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뭣고?」만 탁 들면 벌써 용화사 선원에 와서 방부를 드리고 죽비를 치고 입선(入禪)을 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용화사에 방부를 드리고, 와서 큰방에 앉어 계셔도 밤낮 여기 앉어서 집안 생각, 아들 생각, 딸 생각 그러고 있으면은 그건 방부 드리나 마나 하는 거고.
댁에 계시더라도 항상 「이뭣고?」를 들고 일 허다가도 퍼뜩 챙기고, 앉어서 챙기고, 서서 챙기고, 밥 먹으면서 챙기고, 똥 누면서 챙기면은 바로 집이 용화사 선원이거든.

시간도 공간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척지간(咫尺之間)이 수천 리, 수천 리가 지척이 되는 것입니다. 백년 천년허면 긴 것 같지마는 일 찰나간이고, 일 찰나간이 잠깐인 것 같지마는 이것이 바로 무량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법성게(法性偈)를 외우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거든.
이것은 진리에 입각해서 허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헐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래.

둘이 나란히 한집에서 한 이불 속에서 자도 벌써 생각이 틀어져 버리면은 천리(千里)거든. 부부 간도 천리 웬수여. 저 천리 밖에 떨어졌어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고 있으면은 벌써 부부일신(夫婦一身)이거든.

시간과 공간을 그것이 또 다른 것이 아니야. 시간이고 곧 공간이고, 공간이 시간이거든.
공간 없는 시간이 없고 시간 없는 공간이 없어. 시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공간이고 시간과 공간은 베의 날과 씨가 서로 이렇게 짜여져서 베를 짜듯이 시간과 공간도 역시 마찬가지여.

그래서 어느 때, 어느 시간 무엇을 허실 때라도 항상 화두를 들고, 화두 하나만을-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저 딱 화두를 거각(擧却)하면 그 자리에는 부처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는 모든 조사가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조실 스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입승 스님이 탁 죽비를 들고 앉아 있는 자리다 그말이거든.

그러니 입승(立繩) 스님이 죽비를 들고 앉아 있고, 조실 스님이 탁 지켜보고 계시고, 모든 조사 스님이 그 자리에 계시고, 삼세제불이 그 자리에 계시는데 어느 곳이 선불장(選佛場)이 아니겠습니까?(59분45초)

 

 

 



(2)------------------

 

생사차무승여속(生死且無僧與俗)하고  성진나유오화미(性眞那有悟和迷)리요
나무~아미타불~
가타사기동참자(伽陀寫寄同參者)하니  두우성건일우서(杜宇聲乾日又西)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생사차무승여속(生死且無僧與俗)이요. 생로병사는 승속(僧俗)이 없어. 스님네나 속가에 계신 여러 청신사·청신녀 여러분이나 누구에게나 생사는 다 있다 그말이여.

성진나유오화미(性眞那有悟和迷)리요. 성품 참다운 것은, 진여(眞如) 성품은 깨달은 사람이나 미(迷)한 사람이나, 깨달은 부처님이나 미(迷)한 중생이나 다 똑같애.
깨달은 성현이라 해서 진여 성품이 더 크고 위대하고 좋고,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고 해서 진여 성품이 작고 추하고 그런 것이 아냐. 그 진여 성품 그 자리에 가서는 다 똑같다 그말이여.
출가한 스님이라고 해서 생로병사가 없고 속가에 계신 분만 생사가 있는 것이 아닌 거와 마찬가지.

가타사기동참자(伽陀寫寄同參者)는 이 게송을 써서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동참 도반들에게 기증하노니,
두오성건일우서(杜宇聲乾日又西)다. 두견(杜鵑)이는 쉬지 않고 소쩍소쩍 울고 있는데 해는 또 서쪽으로 지는구나.

'한 생각' 일어났다 없어지고 또 '한 생각' 일어났다 없어진 것이 그것이 바로 생사(生死)니라.
일념(一念) 속에 구백 생멸(九百生滅)이 있어. '한 생각' 속에도 미세허게 보자면, 원자 현미경 같은 그런 미세한 현미경으로 일념을 갔다가 들여다보면 구백 생멸이 있다 그랬어.
부처님 말씀에는 ‘털구먹 일 모공(一毛孔) 속에 구억 충(九億蟲)이 들었다. 구억 개의 벌레가 우글거리고 있다’하셨어. 그때 당시에는 현미경도 뭐 원자 현미경도 없었는데 부처님은 다 알고 계셔.

일념 속에 구백 생멸이 있어.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생사고, 그 생사가 결국 우리에게 육체적인 생사 또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허게 허는 그 원인이요 장본인이거든.
그 일념 일념을 단속허는 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의 자물통이여 그게, 자물쇠가 거기에 있거든.

‘그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데에 휩쓸려 나가느냐’, ‘거기에 끌려 들어가지 않고 화두를 드느냐’에 따라서 삼악도(三惡道)로 가느냐 해탈도(解脫道)로 가느냐의 분간이 있는 것입니다.

소쩍새는 쉴새 없이 울고 있는데 해는 오늘도 또 서쪽으로 넘어가.
이 게송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고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39분44초~65분28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게송) ‘기래끽반냉첨의~’ ; 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三十 ‘警世卄二首’ 게송 참고.
*삼척동자(三尺童子) ; 키가 아직 석 자밖에 자라지 않은 아이라는 뜻으로, 철모르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역력(歷歷) ; 훤히 알 수 있게 분명하고 또렷함.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방자(放恣) ; 방자하다. 어려워하거나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없이 무례하고 건방지다.
*우치(愚癡) ; ①삼독(三毒)의 하나. 사상에 의혹되어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이른다. ②매우 어리석고 못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음심(淫心) ; 주로 남녀 사이의 성적인 일과 관계되어 먹은, 바르지 않은 마음.
*업연(業緣) ; 업보(業報)의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의 인연을 부른다.
*마왕(魔王) ; 천마(天魔). 욕계(欲界)의 제육천(第六天) 곧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임금은 곧 마왕(魔王)이니, 그 이름이 파순(波旬)이다。그는 항상 불법을 파괴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은 불도를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그의 궁전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므로 누구나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낼 때에 곧 천마가 따르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이 곧 천마다.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사바세계(娑婆世界);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식(識) : 오온(五蘊)의 하나. 식별하고 판단하는 마음 작용. 인식 작용. 인식 주관.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지척(咫尺) ; '한 자의 거리'라는 뜻으로, 아주 가까운 거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법성게(法性偈) ; 통일 신라 시대에,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화엄경을 연구하고 그 경의 핵심을 추려서 지은 7언 30구(210자)의 게송.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

 

 

 



-------------------(2)

 

*(게송) ‘생사차무승여속~’ ; 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三十 ‘警世卄二首’ 게송 참고.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해탈도(解脫道) ; ①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②사도(四道)의 하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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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등68) (게송)개개면전명월백~ / 의심관(疑心觀) /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68) - 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에서. (세등68)

 

약 21분.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인인각하청풍불(人人脚下清風拂)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跡)하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니라
나무~아미타불~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모든 사람 사람 얼굴 앞에는 밝은 달이 희고,
인인각하청풍불(人人脚下清風拂)이로구나. 사람 사람의 다리 아래는 맑은 바람이 불고 있다.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跡)하면, 거울을 타파해서 그림자와 자취가 없으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다.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  인인각하청풍불(人人脚下清風拂)은
부처님이나 조사나 모든 성현, 우리 모두 범부, 범성(凡聖)을 막론하고 낱낱이 다 본구재 도리(本具在道理), 새로 닦아서 깨달을 것도 없이 본래 원만구족(圓滿具足)하게 갖추어 있는 그 도리가 있다.

그것을 본구재 도리(本具在道理)라고도 하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도 하고, 본각대지(本覺大智)라고도 하는데, 본래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자성(自性)의 법신불(法身佛)을 다 가지고 있지마는 왜 우리는 이렇게 중생의 탈을 쓰고서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면서 생사고(生死苦)를 받고 있는가?

까닭 없이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멀쩡한 탈을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오늘날까지 오면서 그 탈을 바꿔 쓰면서, 여기서 나서 저기서 죽고, 저기서 나서 여기서 죽기를 수없이 해왔어.

그 무량겁을 탈을 바꿔 쓰면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해오면서, 우리에는 그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한 거울을 가지고 있는데, 그 거울 속에 그 동안에 겪어오는 모든 일들 그 거울 속에 다 녹화(錄畵)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제8 아뢰야식(第八 阿賴耶識)이라 하는 것이여.
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는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오면서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모든 사실들이 터럭끝 만한 작은 일로부터서 이 세계가 파괴되는 그런 큰일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그 속에 다 녹화·녹음이 되어 있는 거여.

그 거울을 타파(打破)해 버려라.
그 거울 속에 녹화되고 녹음이 되어 있는 것이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면서 어떠한 인연을 만나면은 거기서 녹화된 것이 밖으로 이렇게 현행(現行)을 하는 것이여. 밖으로 그것이 이렇게 나와.
행동으로 나타나고, 생각으로 나타나고, 눈을 통해서 나타나고, 귀를 통해서 나타나고, 그 현행을 하면서 동시에 또 새로운 사실들이 또 녹화가 되고 녹음이 돼.

녹화·녹음이 새로 되는 것을 훈습(薰習)이라 그러고, 또 훈습한 것이 밖으로 또 나타난 것을 현행이라 그러는데, 현행(現行)과 훈습(薰習)이 동시에 돌아가는 거여. 이것이 바로 우리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모습이여.

활구참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 공안(公案)을 타파해서 이 거울을 갖다가 여지없이  깨트려버려서 흔적조차도 없어질 때(打破鏡來無影跡),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다,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생사 없는 도리’를 간단한 한 구절로 표현을 했지만, 새가 꽃가지에 올라와서 한 소리 우는 것이 그것이 평범한 사실이지만,
깨달은 도리를 말로써 표현할 수 없지마는 표현할 수 없는 바를 이렇게 고인(古人)은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 평범한 한 구절이 깨달은 사람은 여지없이 그 깨달은 경지를 바로 볼 수가 있지만은, 깨닫지 못한 사람이 볼 때에는 새가 꽃가지에 올라서 소리내어 우는 것이 하나의 평범한 사실에 불과한 것이여.
이 평범한 새 한 마리가 꽃가지에 올라가서 그 우는 것을 여기에다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붙여서 이러쿵저러쿵 자기의 소견을 붙이고 사량분별을 붙인다면, 그 깨달은 도리를 표현한 이 법(法)이 완전히 죽은 소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방금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출가해서 스승을 찾아서 바른 깨달음에 이르는 활구참선! 활구참선(活句參禪)에 의해서 이 화택(火宅)으로부터 해탈하는 법문을 고구정녕(苦口叮嚀)한 육성으로 들었습니다.

활구참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본참공안에 대해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지는 것이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말로 따지고, 또 더듬어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래가지고 ‘아하 바로 이 뜻이로구나.’ 이렇게 해서 사량분별로 공안을 따지는 거여. 그 '따져서는 안 된다'고 천 번 만 번 법문을 들어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따지고 앉았어.

특히 두려운 것은 한 철,두 철, 세 철 열심히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는데, ‘이무엇고?’ ‘이뭣고?’ 마삼근(麻三斤)을 하는 사람은 ‘어째서 마삼근이라 했는고?’ 끝없이 끊임없이 일구월심(日久月深) 이렇게 해 나가면 여법(如法)하게 해 나가다 보면,
그렇게 번뇌·망상이 일어나던 것이 번뇌·망상은 차츰차츰 줄어지고, 화두를 그렇게 들려고 해도 화두는 잘 안 들렸던 것이 차츰차츰 화두가 들어지기 시작해. 화두가 차츰차츰 들어지는 시간이 불어남에 따라서 망상은 차츰차츰 줄어진다 그말이여.

그래서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고,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하고,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서 기쁨을 아니 느낄 수가 없어. 참 그 고요하고, 깨끗하고, 편안한 경계를 무어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

‘아! 이것이 바로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하는 것이로구나.’ ‘이것이 바로 법열(法悅)이라 하는 것이로구나.’ ‘이것이 바로 도(道)에 낙(樂)이라 하는 것이로구나.’ ‘이것이 바로 완전하게만 된다면은 이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이로구나.’ 그래 가지고 이런 상태로 계속해서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바래는 것입니다.

생각을 내서 바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중에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에 빠져서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것을 스스로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리라 해서가 아니라,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그러니까, 그냥 그 고요한 경지에 빠져 들어가서 그것을 떠억 즐기고 있다 그말이여.

거기에서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이 주의할 바는 아무리 고요하고, 아무리 편안하고, 아무리 맑고 깨끗하다 하드라도 '깨끗하다, 편안하다, 맑고 고요하다' 그런 데에 탐착해 가지고 화두를 잃어버리는 사실.
화두를 잃어버린다면 거기에서 벌써 공부는 삐뚤어져 버린 것이여. 거기에서 저 죽을 구덩이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여. 사견(邪見)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여.

그렇게 고요하고 깨끗할수록에 그런 데에는 조금도 생각을 두지 말고, 오직 자기의 본참화두!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잡드리를 해 나가야 되는 것이여.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힘을 쓰면서 용을 쓰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허고 막 힘을 쓰면서 허라는 게 아니여.
처음에 공부를 헐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허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허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허고 자주자주 들을 수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 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 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아니 되는 거여.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 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 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일 분의 백천 분의 일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할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처음~20분4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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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개개면전명월백~’ ; [소요당집 逍遙堂集] (한글대장경169, 동국대학교역경원) p100 ‘순 상인(淳上人)에게’ 게송 참고.
*범성(凡聖) ; 범인(凡人)과 성인(聖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원만구족(圓滿具足)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법신불(法身佛)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즉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육도윤회(六途輪廻) ; 생사윤회(生死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겁(劫) ; (산) kalpa의 음사. 인도에서의 가장 긴 시간단위. 지극히 긴 시간. 무한히 긴 시간.
[참고] 겁(劫)의 무한히 긴 시간을 개자겁(芥子劫)•반석겁(盤石劫)으로 비유한다.
개자겁(芥子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성(城) 안에 겨자 씨를 채워, 100년에 한 알씩 집어내어 겨자 씨가 다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함.
반석겁(盤石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큰 반석(盤石)을 부드러운 천으로 100년에 한 번씩 쓸어 반석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함.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아뢰야식(阿賴耶識) ;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거주지·저장·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참고] 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여덟 가지 마음 작용.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팔식(八識) 가운데 앞의 다섯 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오식(前五識)이라 하고, 第六 意識, 第七 末那識, 第八 阿賴耶識이라 한다.
*현행(現行) ;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種子)가 변화하고 성숙하여 일어나는 인식 작용.
[참고]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훈(熏 연기낄 훈) ; 훈습(熏習 , 薰習) ① 어떤 성질에 물듦. 어떤 기운이 배어 듦. ② 산스크리트어 vāsanā 마치 향 냄새가 옷에 스며들 듯, 몸과 말과 뜻으로 일으킨 행위의 기운과 생각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잠재력으로 이식되는 현상.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공안(公案, 화두)을 타파(打破)해서 ;
[참고] 화두(話頭)를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사량분별(思量分別) ; 생각하여(思) 헤아려서(量) 종류에 따라 나누어 가름(分別).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화택(火宅) ; 번뇌와 괴로움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불에 타고 있는 집에 비유한 말. 불길에 휩싸인 무서운 세계. 법화경에 나오는 「三界無安猶如火宅」라는 구절에 근거.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법희선열(法喜禪悅) ;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기쁨과 선정(禪定)에 들어가 마음이 즐거운 것.
*법열(法悅)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거나 배우는 기쁨. ②진리를 깨달았을 때 가슴에 잔잔히 사무치는 기쁨.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이뭣고(是甚麼) / 판치생모(板齒生毛) / 마삼근(麻三斤) ; 분류 ‘화두(공안)’ 참고.
*잡드리(잡두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의단(疑團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관조(觀照) ; 참된 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함.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61~62.
〇工夫는  *如調絃之法하야  緊緩을  得其中이니,  勤則近執着하고  忘則落無明하리니,  惺惺歷歷하고  密密綿綿이니라.


공부는 거문고의 줄을 고르듯 하여 팽팽하고 느슨함이 알맞아야 하니, 너무 애쓰면 병 나기 쉽고 잊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지게 된다。성성하고 역력하게 하면서도 미세하게 끊임없이 하여야 하느니라。

<註解>
彈琴者曰,  緩急이  得中한  然後에야  清音이  普矣라 하니,  工夫도  亦如此하야  急則動血囊하고,  忘則入鬼窟이니,  不徐不疾하야사  妙在其中이니라.


거문고를 타는 자가 말하기를 '그 줄의 느슨하고 팽팽함이 알맞은 뒤라야 아름다운 소리가 잘 난다'고 한다。공부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조급히 하면 혈기가 고르지 못한 병이 나고, 잊어버리면 흐리멍덩하여 귀신의 굴로 들어가게 된다。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되면 오묘함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제물에 ; 저 혼자 스스로의 바람에.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
*선방(禪房) ; 참선(參禪)하는 방.
*공부처(工夫處) ; 배우거나 수행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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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 화두, 화두의심, 깨달음.

 

**송담스님(No.088) - (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용088)

 

약 18분.

 


그러면 그 활구참선법이란 어떠한 것이냐? 이론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참선이 아니라, 일체 이론을 배제하고 오직 꽉 맥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하나의 화두를 참구하여 일체 공안을 타파하고 확철대오하는 참선법입니다.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둘째 호흡을 바르게 한 다음, 셋째는 화두를 의심해 나가는데,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심, 깨달음>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剎那)에 확철대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 깨달음>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참선을 해 나가는데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할 화두를 지금부터 말씀을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여기에 참선법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여러분을 이끌고 계시는 만덕장보살이 가자고 해서 왔다고 혹 생각헐런지 모르지마는, 그것은 표면에 나타나는 한 조건에 지나지 못하고, 여기에 여러분이 온 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발이 여기를 온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몸뚱이가 제멋대로 온 것이 아니고, 남이 오자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 지금 편의상 ‘자신’이라는 말을 썼지마는 - ‘알 수 없는 놈’이 여기를 오기로 결정을 해서 그놈이 명령을 했기 때문에, 그 명령에 의해서 여러분의 몸이 움직여져 가지고 발로 걷기도 하고, 차를 타기도 해서 여러분은 여기에 와 진 것입니다.

그러면은 무엇이 여기를 ‘가자!’ 하고 이렇게 명령을 했겠느냐? 그놈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그놈’인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이 편의상 지어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이다 • 성품이다 • 주인공(主人公)이다 • 뭐 얼마든지.... 우리 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놨을 것입니다 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風月)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그만두고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에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가 봤을 것이고, 천당에도 가 봤을 것이고, 귀신으로도 떠돌아댕겨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온 그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눈을 통해서 보기도 하고, 귀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고, 입을 통해서는 맛도 보고 말도 하고, 몸뚱이를 가지고는 차웁고 • 덥고 • 부드럽고 • 까끄러운 것도 알고,
여기 앉아서 백 리 •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맘대로 왔다갔다하고,또 10년 전 • 20년 전 • 30년 전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합니다.

그렇게 신통이 자재하고, 시간 • 공간에 걸림이 없는 묘한 물건을 우리 모두 낱낱이 다 지니고 있고, 그놈에 의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자체를 깨닫지를 못하고 계속 생사윤회를 할 수밖에는 없느냐?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 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에 자유자재하고, 그놈을 마음껏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삼천 년이 된 이 말세(末世)에 겨우 이 문제를 이제사 알고,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는 그러한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후회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금생에라도 알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약에 금생에마저도 그것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면, 무량겁 미래 언제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이 법을 알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다면은 한없는 생사윤회를 거듭할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몸은 금생에 언젠가는 버리게 됩니다.
버리고 난 다음에 다시 또 육도(六道)의 어느 곳에 몸을 받아나게 됩니다마는, 금생에 일생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마지막에 숨 딱 거둘 때에도 참선하는 그 마음가짐, 그 화두 일념으로 딱 숨을 거두게 되면 내생에 금방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좀더 일찍 좀더 공부하기 좋은 여건 하에 태어나게 되기 때문에 내생에는 훨씬 빨리 공부를 하여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도인들, 모든 성현(聖賢)들도 일 생, 이 생 닦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생을 공부해 가지고 금생에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을 받아 태어나 가지고 일찍 공부를 성취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입니다.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자리 걸음만을 하는 것 같지마는 결국 깨달을 때에는 중생의 상태에서 성현의 상태로, 비약적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러나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해놓으면 설사 금생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드라도 그 공부가 허사가 아니기 때문에, 올바르게 해 놓은 공부는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점진적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지 못한다고 조급한 생각을 낼 것도 없고, 금생에 나이가 먹도록 죽음에 이르도록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 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下直)할 때까지,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 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물 - 우리 밖의 모든 사물 - 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있고, 그놈의 부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삼라만상, 우주법계를 내가 운전하고, 내가 요리하고,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밖의 물건에 의해서 내가 구속을 당하고 있고, 그 조종을 받고 있고, 그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나인데... 주인이 시원찮고 정신을 못 채리니까...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 내가 소유하고 있는 종들에게 주인이 멸시를 당하고, 주인이 종노릇을 하고, 종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들입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하! 그 공부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대단히 어렵겠구나!” 이렇게 생각허실런지 모르지마는 절대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내게 있는 것.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놈. 여러분이 듣고 있는 놈. 밥을 먹을 때는 먹고 있는 놈. 길을 걸어갈 때는 바로 그 걸어가는 놈. 성날 때는 바로 그 성내는 놈.
그놈을 돌이켜 살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날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괴로울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기쁠 때도 • 슬플 때도 • 밥을 먹을 때도 • 차를 탈 때도 • 앉었을 때도 • 누웠을 때도, 바로 <그때그때, 그 자리 그 자리>가 나를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는 것입니다.

책을 통해서 하는 공부는 장소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분위기가 필요하지마는, 이 공부는 때도 장소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한 생각 퍼뜩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51분28초~68분4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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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 이 법어는 송담(松潭)스님께서 1978년 10월 1일, 「법련사 불일 청년회」의 청법으로 설하신 내용이며, 스님께서 직접 편집하신 것을 『불일회보』(1988년 6. 7. 8월)에 게재했었던 원고임.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풍월(風月) ; 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어깨너머로 배운 짧은 지식.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사바세계(娑婆世界);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생사윤회(生死輪廻)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여래(如來) ; 여래 십호(如來十號)의 하나. 진여(眞如)의 세계, 곧 열반에 다다른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다타가타(tathāgata)의 번역어이다.
*하직(下直) ;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13. 11. 27. 16:08

§ 정진(精進)이란? 정진심(精進心)을 일으킨 것은 벌써 바른 정진이 아니다.

 

**송담스님(No.140) - 1981년 3월 첫째일요법회(용140)

 

약 17분.

 


해제가 지난 음력 대보름에 끝나고, 오늘이 벌써 열흘째 되었습니다.
앞으로 4월15일, 여름결제 때까지는 80일 가량이 남아 있습니다. 그 동안에 춥도 덥지도 않는 이러한 좋은 계절을 이용을 해서 산철 결제를 해 가지고 또 열심히 정진을 할려고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대단히 갸륵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정진(精進)이라 하면,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잠을 덜 자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고, 묵언(默言)을 해 가지고 말을 않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다든지, 또는 아침밥을 안 먹는다든지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해 가지고 밥을 적게 먹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다든지,
요새 무슨 그런 잠 안자는 거, 밥 안먹는 거, 말 안하는 거, 그러한 것을 정진으로 삼는 분은 안 계시겠지만,

좀더 알뜰히 공부하기 위해서, 공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
혹 잠을 1~2시간씩 덜 자 보기도 하고, 말도-입을 열었다 하면 쓸데없는 말이 나오게 되고 시비(是非)에 참견하게 되고 그러니까, 그러한 뜻에서 묵언도 하고 또 가행정진(加行精進)도 하고 그러하신 걸로 생각을 할 때에,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마는,
말을 아니한 것보다는, 필요한 말 한마디 딱 해 버리고 또 화두를 들고 차라리 그것이 낫지, 아주 묵언을 하면 꼭 해야할 말을 아니하니까, 자연히 필답(筆答)으로 말하게 되고, 손짓으로 의사를 소통하게도 되고 하니 더 복잡하게 되고 답답하다 이 말씀이여.

조금이라도 공부에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잠을 덜 자고 가행정진 하는 것 대단히 좋지만, 가행정진을 한다 해 가지고 잠을 적게 자 놓으면 그 이튿날 오히려 낮 정진할 때에 혼침에 빠지기가 쉬웁다고 볼 때에,
차라리 5시간이나 6시간 푹 자 주고, 그 대신 그 이튿날 성성(惺惺)하게 정진을 해 나가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라고도 보는 것입니다.

아침을 굶는다든지 또는 저녁을 굶는다든지 또는 단식을 한다든지, 이래 가지고 ‘정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이러한 생각을 가진 것 대단히 참 일리(一理)가 있지만,
차라리 세 때를 너무 적게 먹지도 않고 너무 과식하지도 않고 잘 저작(咀嚼)을 해서 적당히 먹고서, 원기(元氣)를 차려서 그래 가지고 정진을 알뜰히 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롭고 효과적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바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고 자기를 깨달은 사람만이 정진은 옳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산대사께서도 선가귀감(禪家龜鑑)에 ‘미심수도(迷心修道)는 단조무명(但助無明)이다.’ ‘마음을 미(迷)해 가지고 도를 닦는다고 하는 것은, 다맛 무명(無明)만 더 치성(熾盛)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정진심(精進心)을 일으킨 것은 벌써 바른 정진이 아니다. 정진심-오늘부터서 잠을 2시간씩 덜 자리라, 밥을 한끼씩을 덜 먹고 하리라, 묵언을 하리라, 오늘부터서는 가행정진을 하리라, 좀더 열심히 하리라-이러한 정진할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벌써 정진에서 탈선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바로 정진한 것인고?
당체(當體)가 변적(便寂)이다. 당체가 문득 공(空)한 것이다. 당체가 변시(便是)다.

당체(當體)!
눈으로 보는 놈, 귀로 듣는 놈, 코로 맡은 놈, 혀로 맛보는 놈, 손으로 만질 때 춥다 더웁다 부드럽다 깔끄럽다. 그 당체가 문득 고요해야 한다. 당체가 문득 이놈이다.

눈으로 볼 때 ‘이무엇고?’, 귀로 들을 때 ‘이무엇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이무엇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앉았을 때, 섰을 때, 걸어갈 때, 차를 탈 때, 음식을 먹을 때, 일을 할 때, 말을 들을 때, 말을 할 때, 일체처 일체시에 무엇을 하든지 간에, 바로 당체가 변적(便寂)으로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면,
잠을 덜 잘라고 할 것도 없고, 잠을 더 잘라고 할 것도 없고, 밥을 더 먹을라 할 것도 없고, 덜 먹을라 할 것도 없고, 말을 하느니 말을 안 하느니, 거기에 무슨 그러한 군더더기 생각을 일으킬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진하는 사람은 스스로 시비심(是非心)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시비를 일으켜 가지고 그 시비 속에 자기가 말려들어가 가지고, 그래 가지고 마음이 불안하고 짜증이 나고 불평과 불만이 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한테 시비를 걸어와도 내가 거기에 끄달리지 아니해야 수행인이거늘, 자기가 자기 속으로 공연히 시비를 일으켜 가지고, 자기가 그 시비의 물결 속에 휘말려 들어가 가지고,
그 원망을 남에게 갖다가 하고, 그 원인을 남에게 갖다가 전가(轉嫁)를 시키는 그러한 마음가짐으로서야 어찌 최상승 참선객(參禪客)이라 하겠습니까?

어느 선방이 좋다, 어느 사람이 좋다, 어느 사람은 나쁘다, 어떠한 사람하고는 내가 같이 공부를 아니하리라, 어떤 사람하고 같이 하면 좋다, 이러한 생각들이 너무나도 소극적이고 너무나도 소승적인-최상승 활구참선을 하는 최상승 활구참선객답지 못한-그러한 생각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라도 어떠한 사람을 만나거나 어떠한 일을 당할지라도, 최상승적이어야 하고, 최상승 참선객다웁게 살아가야 하고 공부를 해 가야만 될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명색(名色)이 활구참선을 한다는 사람이, 마음자세가 너무나도 소극적이고 너무나도 소승적(小乘的)인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아무리 해 봤자 공부에는 조금도 진취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자세부터 바로잡어버려.
그렇다면은 차 가운데도 좋고, 장바닥도 좋고, 산중(山中)도 좋고, 도시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고요한 데만 찾고, 편한 데만 찾고, 일 없는 데만 찾아서 공부하면 무사안일(無事安逸)에 빠지고, 오히려 해태(懈怠)에 빠지고, 조그마한 일에도 시비(是非)가 일어나고 짜증이 나고 이럴 것입니다.

마음 하나를 대승적이고 최상승적인 그러한 자세를 가질 때는, 눈으로 무슨 색상이 나타나도 상관이 없고, 귀에 어떠한 온갖 소리, 사람소리, 짐승소리, 어떠한 기계소리, 새소리, 물소리가 들린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며,
오히려 그러한 소리가 내 귀에 울림으로써 그것을 계기로 해서, 정신을 차려 가지고 화두를 거각하고 생각을 새롭게 가다듬는다면, 오히려 그러한 색상 그러한 음성이 없는 것보단 더 나을 것입니다.

최상승 참선을 하는 사람은 ‘니가 주인이다 내가 주인이다, 니가 객이고 나는 주인이다’, 그런 주객-주관, 객관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내다, 대상이다’, 그러한 것도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객 또는 나다, 대상이다’ 이러한 소견, 이러한 생각이 결국은 나를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육도윤회(六途輪廻)로 나를 끌어가고야만 말게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날 때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이뭣고?’, 귀로 무엇을 들을 때 ‘이뭣고?’, 누가 나를 칭찬한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나는 ‘이뭣고?’, 누가 나를 비평하고 나의 흠처(欠處)를 말을 하고 비방을 한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속이 상할 것이 아니라 나는 ‘이뭣고?’

이렇게 화두로써 의단(疑團)으로써, 나를 다스리고 모든 것을 다스려 나갈 때 주객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거기에는 주(主)와 객(客)이 없기 때문에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참나’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는 것이고,
이 법계(法界)에 가득차 있는 것은 나를 위한 불보살(佛菩薩)의 화현(化現)이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법문(法門)일 것입니다.

눈을 감아도 비로자나불을 친견하고 눈을 떠도 삼세제불(三世諸佛)을 친견할 때에, 꿈에 부처님만 보고 꿈에 스님만 봐도 업장(業障)이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한다는데,
현실세계에 있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불보살을 친견하고 불보살의 법문을 들을 수 있게 된다면, 어디에 육도(六道)가 있으며 어디에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군(魔軍)이가 있겠습니까?

팔만사천 마군이는 나의 팔만사천 번뇌(煩惱), 나의 일신상(一身上)에서 일어나는 팔만사천 번뇌가 돌아서 나한테로 되돌아올 때에 그것은 마군이로써 나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념(一念)이 불생(不生)하면 팔만사천 마군이는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이렇게 닦아 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23분33초~40분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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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精進) ; 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불교] 잡념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깨우치기 위해 수행에 힘씀.
*오후불식(午後不食) ; 정오(正午), 낮 열두 시가 지나면 먹지 않는 것.
*시비(是非) ; ①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다툼. ②옳고 그름.
*가행정진(加行精進) ; 어떤 일정한 기간에 일상생활보다도 좌선정진(坐禪精進)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함.
*필답(筆答) ; 글로 써서 대답함.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저작(咀嚼 씹을 저,씹을 작) ; 음식물을 입에 넣고 씹음.
*선가귀감(禪家龜鑑) ; 조선 서산대사(휴정, 1520-1604)가 경전과 어록 중에서 수행의 지침이 될-선종(禪宗)을 중심으로-가장 요긴하고도 절실한 부분을 가려 뽑은 불교 개론서.
*무명(無明) ; 모든 현상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 근본 번뇌. 사제(四諦)에 대한 무지로서,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 번뇌. 본디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원초적 번뇌.
*치성(熾盛 성할 치,성할 성) ; 불길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성하게 일어남.
*당체(當體) ; 본체(本體). 참 이치. 모든 법(法)의 실상(實相).
*전가(轉嫁 돌릴 전, 떠넘길 가) ; 잘못이나 책임 등을 남에게 떠넘겨 덮어씌움.
*참선객(參禪客)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소승적(小乘的) ; 작은 일에 얽매이는. 또는 개인의 이익이나 작은 이익에 집착하는.
*무사안일(無事安逸) ; ①아무런 일이 없이 편안하고 한가함. ②일을 쉽게 생각하고, 편안하게만 처리하려는 태도.
*해태(懈怠 게으를 해,게으를 태)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성냄, 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육도윤회(六途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흠처(欠處 모자랄 흠,머무를 처) ; 잘못되거나 완전하지 못한 점.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를 의인화한 부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군(魔軍) ; 많은 수의 악마의 군세(軍勢)를 뜻함.
[참고 -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 선가귀감 十九, p64에서]

* ‘일념(一念)이 불생(不生)하면’ ; [참고] ‘경계를 당하여 마음이 일지 않은 것을(見境心不起) 나지 않는다고 이름하고(名不生), 나지 않는 것을 무념이라 하며(不生名無念), 무념을 해탈이라 하느니라(無念名解脫).(선가귀감 四四, p103에서)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