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 (게송) 법법지인무구구~ / 무산지몽(巫山之夢) / 중생이 석가의 임 / 삼무차별(三無差別) /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길이 열리는 것.

 

과연 부처님의 임은 중생(衆生)이다. 중생의 임이 부처님이 아니라 중생이 석가의 임이다.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임도 나를 사랑한다 그거거든.

'과연 부처님과 모든 보살은 손바닥만한 땅도 불보살이 중생을 위해서 몸을 버리지 않은 곳이 없다' 경전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네들이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중생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의 몸을 수백억만 번 무량겁을 두고 몸을 바쳐왔다. 중생이 불보살의 임이기 때문에 임을 위해서 그렇게 몸을 바치셨다.

 

찰나 동안 ‘이뭣고?’를 하면 찰나 동안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고, 1분 동안 ‘이뭣고?’를 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함으로써 사량이 끊어지면 1분 동안 내 마음과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거여.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거든.

그러기 때문에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일부러 사량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고, 망상을 없앨려고 할 것도 없어. ‘이뭣고?’ 콱 막혀 나가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거든.

 

**송담스님(No.428) - 1990년 11월 첫째일요법회 (용428)

 

(1) 약 18분.

 

(2) 약 14분.

 

(1)------------------

 

법법지인무구구(法法只因無咎咎)허고  심심다위불생생(心心多爲不生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한원야곡무산월(寒猿夜哭巫山月)헌디  객로원래불가행(客路元來不可行)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법법지인무구구(法法只因無咎咎)요, 모든 법(法)은 다못 허물 없음을 인해서 허물이 되고,

심심다위불생생(心心多爲不生生)이다. 모든 마음, 마음 마음은 불생 때문에, 불생(不生)—나지 아니함으로부터서 나게 된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설하실 때, 육조 스님이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다. 뻑뻑이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

그 주(住)한 바 없이 마음을 낸 것이 바로 불생(不生) 때문에 마음이 생하게 된다. 생(生)할 것이 있어서 생(生)한 것이 아니라 원래 남[生]이 없는 데에서 마음이 난다.

 

한원야곡무산월(寒猿夜哭巫山月)한데, 차운 원숭이는 밤에 무산의 달을 보고 곡(哭)을 하는데 우는데,

객로원래불가행(客路元來不可行)이다. 나그네 길이 원래 가히 행할 수가 없더라.

원숭이가 그 무산(巫山)의 달을 보고 어떻게 간장(肝腸)이 끊어지도록 슬피 울던지 그 슬피 우는 원숭이 소리를 차마 들을 수가 없어서 객(客)이 그 밑에를 지나갈 수가 없더라.

 

 

무산은 저 중국 사천성 기주부에 있는 무산현 동쪽에 있는 산 이름인데 그 무산에 무산지몽(巫山之夢)이라 하는 고사(故事)가 있는데, 초나라 양왕(襄王)이 고당(高唐)이라고 하는 누대(樓臺)가 있어서 그 누대에 유람을 가 가지고 하룻밤 거기서 자게 되는데, 낮에 꿈을 꾸었다.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천하절색(天下絶色) 여인이 떠억 나타나더니, '저는 무산에 있는 여자로서 이 고당이 하도 경치가 좋다고 그래서 놀러 왔는데, 들으니 임금님께서 여기에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임금님을 친견하고 하룻밤 동침하면서 잘 모시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래 보니 어떻게 이쁘던지 양왕이 그 여자를 거절하지 못하고 하룻밤을 잤어. 그게 인자 꿈에 잤겄다.

 

자고서 그 이튿날 떠나면서 '저는 무산 양지바른 높은 언덕에 살고 있는데, 앞으로 날마다 아침이면 임금님에 구름이 되어서 보여 드리고 저녁때가 되면 비가 되어서 임금님께 뿌려 드리오리다'

그리고서 작별을 했는데, 그리고 나서는 이 양왕도 깨고 보니 꿈이다 그말이여. 꿈이지만 그 아리따운 모습이 눈에 삼삼해.

 

그런데 그리고 난 뒤에는 아침에면 항상 그 무산에 구름이 끼고 저녁때가 되면은 비가 내려.

'아! 저게 무산에 아름다운 여자가 나에게 신호를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하루는 무산에 가서 그 양지바른 언덕을 찾아가서 거기에다가 그 여인의 사당(祠堂)을 지어 주었어.

 

그런 고사가 있는데 그 여인이 밤에면 원숭이가, 그리고 나서 세월이 많이 흘러간 뒤에도 그 밤이 되면 임이 그리워서 간장이 끊어지도록 슬피 울어. 그래서 무산 밑에는 나그네가 그 울음소리 때문에 차마 지나갈 수가 없더라.

 

 

한용운 스님의 『님의 침묵(沈默)』이라고 하는 시집에 서문 격으로 쓴 ‘군말’이라 한 제하(題下)에 쓴 글이 있는데 그 모두 다 잘 아시겠지만,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그런 첫마디에 그리 썼는데, 한용운 스님은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33인 중에 한 분이시고 참 학덕이 높고 독립운동의 사상, 애국심이 투철하시고 그때면 옛날인데 어떻게 그런 ‘님의 침묵’과 같은 현대의 어디에다 내놔도 손색이 없을만한 그러한 참 감동을 주는 그런 시를 썼는지.

 

한용운 스님은 부처님을 님이라고 믿고 시를 읊기도 하고, 불교의 진리를 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잃어버린 우리 국가를 님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한 글자의 님이지만 한용운 스님은 여러 가지 뜻으로 시를 읊었는데,

과연 부처님의 임은 중생(衆生)이다. 중생은 부처님의 임이라고 표현을 했다 말이여. 중생의 임이 부처님이 아니라 중생이 석가의 임이다 그랬다 말이여.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임도 나를 사랑한다 그거거든.

 

'과연 부처님과 모든 보살, 불보살은 손바닥만한 땅도 불보살이 중생을 위해서 몸을 버리지 않은 곳이 없다' 경전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모든 보살님네들이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중생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의 몸을 수백억만 번 무량겁을 두고 몸을 바쳐왔다.

중생이 불보살의 임이기 때문에 임을 위해서 그렇게 몸을 바치셨다 그말이여. 구체적인 예로 부처님은 배고픈 호랑이를 위해서 몸을 던져 주시기도 하고 그밖에도 수없이 몸을 중생을 위해서 축생을 위해서까지 몸을 버리셨다 그말이여.

 

부처님의 제자 둘이 여행을 하여,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저 머나먼 여행을 하다가 목이 말랐다.

한 사람은 그 물을 떠서 먹을라고 하니까 아주 눈에 보일락 말락한 미세한 벌레가 우물거리고 있어. 한 사람은 그것을 먹고, 한 사람은 그것을 먹으면 그 벌레가 죽을까 봐서 안 먹었기 때문에 목말라서 죽었어.

 

그 안 죽은 사람이 돌아와서 부처님께 와서 ‘한 사람은 그 물을 안 먹었기 때문에 죽고, 저는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목말라 죽으면 못 만나 뵈옵기 때문에 그래서 그 물을 먹고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꾸지람을 하셨다. ‘니가 어찌 나를 친견한 목적이 무엇이냐? 구경(究竟)에 가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나를 만나려고 했는데 나를 친견하기 전에 그 많은 중생을 죽이고 왔단 말이냐' 이리 꾸중을 하셨다고 하는 말씀이 경전에 있는데.

 

그렇게 많은 생을 부처님은 몸소 중생을 위해서 몸을 바치셨어. 부처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수많은 목숨을 바치고 우리를 그렇게 사랑을 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불교를 믿는 불자(佛子)로서 얼마만큼 간절히 부처님을 잊지 않고 생각을 하는가?

무산의 여자는 아침엔 구름이 되어서 임에게 보여 드리고 저녁때는 비가 되어서 임에게 뿌려 드리고 밤중에는 잔나비가 되어서 간장이 끊어지도록 울고 울어서 임을 그리워했건만, 우리는 과연 얼마만큼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부처님을 사랑하고 부처님을 받들었던가.

 

물론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은 부처님을 위해서 청춘도 바치고 명예와 권리와 인생을 다 바치고 그리고 부모와 형제와 일가친척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출가해서 도를 닦으신 분도 많이 계실 것이고, 많은 재산을 자기는 아까와서 못 먹고 그러면서도 그 소중한 재산을 불사(佛事)를 위해서 바친 그런 분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무수배례(無數拜禮)를 부처님께 올리고 3천배, 3만배 또 자기집의 모든 재산 · 살림 · 자녀 · 남편까지도 부처님을 위하는 신심을 위해서는 그런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런 돈독한 신심을 가지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너무도 그 임을 자기 나름대로는—아까 한용운 스님의 시처럼 임만 임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임이다 했으니 여자에게 남자가 임이 되고, 남자에게는 여자가 임이 된 것 나쁘다 할 것이 없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재산이 임이 될 수도 있고, 높은 벼슬이나 명예나 권리도 임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임은 정말 내가 목숨 바칠 수 있고, 한 목숨 뿐만이 아니라 수천 · 수만 · 수백만의 목숨이라도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고 끝이 없고 한이 없어야 할 그러한 임을 임으로 삼았으면 참 좋으련만.

세속 사람들이 흔히 임으로 섬기는 재산을 임으로 삼는다든지, 남녀간에 색정(色情)을 임으로 삼는다든지, 식도락가는 맛있는 음식을 임으로 삼는다던지, 명예나 권리를 임으로 삼는다든지, 또는 안락과 수면을 임으로 삼는, 한마디로 말해서 오욕락(五欲樂) 따위를 임으로 삼고, 그것을 향해서 몸과 목숨과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다면 그 사람은 결국은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처음~17분 43초)

 

 

 

 

 

(2)------------------

 

재산을 위해서 너무 좋아한 나머지 법을 어기고 불법(不法)을 저질러 가지고 감옥살이를 하고, 권리를 한번 잡으면 그것을 내놓기가 싫어서 온갖 수단을 부려서 상대방을 역적으로 몰아붙이는 그래 가지고 그 뒤끝이 뭣이 되겠습니까.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역사, 특히 가까운 이조 오백년의 역사가 노론(老論) · 소론(少論)이니 해 가지고 정권을 잡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상대방을 역적(逆賊)으로 몰아붙였다 그말이여. 노론도 자기가 잡고자 하는 정권을 임으로 생각하고, 쫓겨 나가는 소론도 정권 야욕(野慾)을 임으로 생각하는, 그래 가지고 결국은 싸우고 싸운 것이 자기네들만 멸망하겠습니까?

 

결국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두 사람이 일본을 가서 잘 살피고 오라고 보내니까, 한 사람은 ‘풍신수길이가 참 무서운 사람이다. 참 주의해야 할 사람이다. 반드시 한국을 침범할 야욕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나라도 거기에 대비해서 모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고.

한 사람은 ‘풍신수길이는 아무 보잘것없는 못난 사람으로 그런 야욕이라고는 추호도 없고 일본이 한국을 침범할 그러한 것은 전혀 보이질 않으니 이 태평성대에 그런 무력증강 모다 양병 그런 것 할 필요가 없다’고. 다 같이 갔다 와서 똑같이 보아놓고 자기네 정당에 명령을 받아 가지고 각각 정반대의 보고를 했다 그말이여.

 

그러니 조정에서는 편한 것이 좋아서 아무 방비를 안 하다가 임진(壬辰) 6년간의 그 왜란(倭亂)을 겪어서 삼천리강토(三千里疆土)가 피바다가 되었고.

참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뇌묵대사와 같은 그러한 도인들이 나와 주시지 안했다면 그리고 바다에 이순신 장군 같은 그러한 참 충신이 없었다면 그때 한국이 무엇이 되었겠습니까.

 

이러한 사색정당(四色政黨)의 싸움으로 인해서 나라가 그렇게 안 당해도 괜찮을 그런 모욕과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자유당 때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해방이 되어 가지고 그 정당 때문에 사리사욕만 챙기고 그래 가지고 아무 준비도 없이 그러다가 육이오 동란(六二五動亂)과 같은 그러한 일을 당했다 그말이여.

 

지금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화합하고 그런 임을 오욕락을 임으로 삼지 말고 기왕이면 한용운 스님처럼 국가를 임으로 삼고, 민족을 임으로 삼고, 정의를 임으로 삼고, 진리를 임으로 삼아서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올바르게 수행해 나간다면 국가도 잘될 것이요, 자기들도 보람 있는 정치인이 될 것이고, 보람 있는 경제인이 될 것이고, 보람 있는 학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과연 얼마만큼 ‘거룩한 임’을 ‘임’으로 삼고 항상 잊지 않으신지.

 

부처님, 우리는 '부처님, 부처님'하고 몹시 참 공경하고 또 사모하고 떠받듭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말은 부처님인데 그분이 믿고 있는 부처님의 내용에는 천 명이면 천 명, 만 명이면 만 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경을 많이 본 사람 또 경 가운데에도 무슨 경—화엄경을 많이 봤느냐, 법화경을 많이 봤느냐, 원각경을 많이 봤느냐, 또는 금강경을 많이 봤느냐, 어느 경을 많이 봤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마음속에 공경하고 그리워하는 임의 모습이 다를 것입니다.

또 경을 전혀 보지 않고 아미타불만을 열심히 부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 나름대로의 거룩한 부처님이 있을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에게는 또 그 사람 나름대로의 거룩한 부처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엄경에는 ‘부처님과, 우리 중생의 마음과, 또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한량없는 모든 중생이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셨어.

왜 그러냐? 삼계(三界)는 오직 한마음 뿐이고, 마음밖에는 별(別) 법(法)이 없다. 그래서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은 이 세 가지가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셨어.

 

해나 달이나 별이나, 산이나 들이나 돌맹이 그 조그만한 모래알 하나도 우리의 마음의 나타남이여.

우리가 마음이 없다면 우리에게 그것은 모래도 아니고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모래이고 모래가 존재하는 것이여. 그래서 태양도 역시 마찬가지요, 달도 역시 마찬가지여.

 

달은 저 홀로 창공에 떠서 휘황창 밝아 있지만, 보는 사람이 슬픈 눈으로 보면 그 달은 슬프고, 기쁜 마음으로 그 달을 보면 그 달은 기뻐. 그 달 자체는 '내가 슬픈 달이다, 기쁜 달이다'하는 것이 없거든. 보는 사람이 슬픈 달도 만들고 기쁜 달도 만드는 거여.

봄에 아름답게 피는 향그러운 꽃도 기쁜 사람이 볼 때 아름다운 것이지, 슬픈 사람이 보면 조금도 아름답지를 안 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고해(苦海)다, 말세(末世)요 투쟁견고(鬪諍堅固)의 시대다, 오탁악세(五濁惡世)라 하지만 부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사바세계나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다 같은 적광토(寂光土)여.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보니까 이 세계가 고해지, 깨달은 눈으로 보면 이십팔천(二十八天)이나 삼십팔천이나 극락세계나 여기나 똑같은 곳이다 그말이여.

 

그러면 왜 부처님께서 말세니, 부처님께서 고해니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중생의 입장이 되어서 그렇게 중생이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발심(發心)하게 하기 위해서 중생의 말을 빌려서 하신 것이지, 부처님 스스로에게는 모두가 극락세계요, 모두가 깨달음의 세계요, 모두가 부처님의 몸뚱이다 그거거든.

 

그러면 우리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불자는 슬픈 생각이 나거나, 기쁜 생각이 나거나, 속이 상하거나, 누가 원망스럽거나 야속하거나,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다못 화두만(話頭)을 거각(擧却)하면 되는 것이여.

 

화두는 무엇이냐?

 

중생의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해결 되는 것이 아니여.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 ‘이뭣고?’,

‘이뭣고?’ 한번 터억 거각할 때 슬픔도 거기에서는 끊어져 버리고 기쁨도 끊어지고 원망도 끊어지고, 괴로움도 끊어지며 즐거움도 끊어지고 선(善)도 끊어지고 악(惡)도 끊어져. 그럴 때에 우리는 해탈(解脫)로 한 걸음 나아가는 거여.

 

찰나(刹那) 동안 ‘이뭣고?’를 하면 찰나 동안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고, 1분 동안 ‘이뭣고?’를 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함으로써 사량이 끊어지면 1분 동안 내 마음과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거여.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거든.

 

그러기 때문에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일부러 사량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고, 망상을 없앨려고 할 것도 없어. ‘이뭣고?’ 콱 막혀 나가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거든.(17분45초~31분1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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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법법지인무구구~’ ; 『신심명(信心銘) -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년 개정판) p104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법(法) : [범] dharma [파] dhamma 음을 따라 달마(達磨•達摩) 또는 담무(曇無)로 써 왔다。온갖 것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니, 온갖 일과 모든 물질이며, 온갖 이치와 옳은 것(是), 그른 것(非), 참된 것(眞), 거짓된 것(妄)이 모두 이 「달마」에 들어 있다。그러나 흔히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만을 법이라고 한다.

*전강 조실 스님 ;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에서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육조단경(六祖壇經) ; 중국 선종의 제6조로서 남종선의 개조인 혜능(慧能:638~713)이 사오관[韶關]의 대범사(大梵寺)에서 행한 공개 설법의 기록을 중심으로 생애와 언행을 제자 법해(法海)가 모았다고 전해지는 책. 본래 명칭은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이며 약칭하여 '단경'이라고도 한다. '단'은 계단 (戒壇)을 가리키고 '경'은 경전과 같은 권위를 부여하여 붙인 말이다.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법보단경(法寶壇經)'이라고도 한다.

*무산지몽(巫山之夢) ; 남녀의 정교(情交). 출전은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로서, 중국 초나라의 양왕(襄王)이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무산의 신녀(神女)를 만나 정을 맺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고사(故事 옛 고/일 사) ; 예[故]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유서 깊은 일[事]. 또는 그것을 나타낸 어구. 옛날 이야기.

*누대(樓臺 다락 루/대 대) ; 크고 높게 지은 정자나 누각, 또는 높은 건물.

*슬피 ; 마음이 아파 슬프게.

*간장(肝腸 간 간/ 창자·마음 장) ; 애(근심에 싸여 초조한 마음속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나 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간장을 끊다 ; (소리 따위가) 몹시 슬프고 애달프다.

[참고] ‘단장(斷腸)의 슬픔’에 대한 고사가 전해져 오는 것이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출면편(黜免編)》에 보면 진(晉)나라 환온(桓溫)이 촉(蜀)을 정벌(征伐)할 때의 얘기가 나온다. 환온이 촉을 치기 위해 여러 척의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가는 중이었다. 양쯔강 중류의 협곡(峽谷)인 삼협(三峽)이라는 곳을 지날 때 한 병사가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아 왔는데, 그 어미 원숭이가 환온이 탄 배를 좇아 백 여리를 슬피 울며 뒤따라오다가 배가 강어귀가 좁아지는 곳에 이를 즈음, 어미 원숭이는 몸을 날려 배 위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어미 원숭이는 자식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애를 태우며 달려왔기 때문에 배에 오르자 안타깝게도 죽고 말았다. 배에 있던 병사들이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창자를 끊어낸 것이었다. 배 안에 있던 군사들이 모두 놀라 환온에게 고하니 이 말을 전해들은 환온이 새끼 원숭이를 풀어주고, 그 원숭이를 잡아왔던 병사를 매질한 다음 내쫓아 버렸다.

*천하절색(天下絶色 하늘 천/아래 하/뛰어나다·더이상 없음 절/미인 색) ; 하늘[天] 아래[下] 비길 데 없이 매우 뛰어난[絶] 미인[色].

*삼삼하다 ; [주로 ‘눈’과 관련된 명사와 함께 쓰여](모습이나 풍경이 눈에)보이는 것처럼 잊히지 아니하고 또렷하다.

*사당(祠堂 사당·제사 사/집 당) ; 조상의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셔 놓은 집. 또는 신주를 모셔 놓기 위해 조그맣게 집처럼 만들어 둔 곳.

*님(임) ; 사모하는 사람. ‘님’은 ‘임’의 옛말.

* ‘~기룬 것은 다 님이다’ ; 기룬-->‘기루다’ : 어떤 대상을 그리워하거나 아쉬워하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마치니(Giuseppe Mazzini, 1805-1872) ; 근대 이탈리아 건국 운동의 정치가.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팔만사천(八萬四千) : 법수(法數)에는 이 말이 퍽 많다。그것은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부처님은 배고픈 호랑이를 위해서 몸을 던져 주시기도 하고' ; 『불설보살투신이아호기탑인연경(佛說菩薩投身飴餓虎起塔因緣經)』 북량(北涼) 고창국(高昌國) 사문법성(沙門法盛) 한역. (아래 글은 요약 정리한 것임)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건타월국(乾陀越國)에 머물러 계실 때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과거 9겁 때 세상에 한 큰나라에 전단마제(栴檀摩提)라는 태자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항상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몸과 목숨과 재물을 남기고 아끼는 바가 없고, 자신과 신하 사야(闍耶)의 모든 것을 보시하고서도 오히려 가난한 이를 만족시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다가, 태자는 배제사(裴提舍)라고 하는 나라로 들어가 자신의 몸을 바라문에게 팔은 돈을 또 모두 가난한 이에게 보시하고 나무를 해다가 파는 종이 되었다.

나무를 하다가 얻은 우두전단(牛頭栴檀)으로 그 나라의 왕의 나병(癩病)을 치료하여 준 인연으로 왕에게 받은 큰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보시하였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태자는 부왕의 큰 환영을 받고 부왕은 나라 곳간의 무엇이던지 마음대로 베풀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 그 나라의 수도 가까운 산에서 용맹(勇猛)이라는 5통(五通) 신선도사(神仙道士)가 오백 명의 제자와 함께 수행하고 있었는데, 태자 전단마제는 그들에게 음식을 바치고 선사(仙師)의 설법을 듣고 세상의 덧없음[無常]을 깨닫고 무위(無爲)를 구하여 모든 괴로움을 제도코자 그길로 선인들과 함께 수행하기 시작했다.

왕후와 태자의 후비는 태자의 뜻이 견고함을 알고 때때로 산 속의 태자에게 음식을 공양하기를 여러 해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산 아래 낭떠러지인 언덕의 깊은 골짜기 밑에 어미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새끼 일곱 마리를 낳았다. 이때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려 먹을 것을 얻지 못하여 어미와 새끼가 곧 죽게 되었고 어미 범은 이미 굶주림에 핍박되어 도리어 새끼를 먹고자 하였다. 산 위에서 수행하던 선인들은 이 비참한 광경을 보고 안타까워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태자는 낭떠러지의 끝에 서서 아래에 어미 범이 새끼를 안고 눈에 덮여 있음을 보고 대비심(大悲心)을 내어 산꼭대기에 서서 머물러 고요히 정(定)에 드니 곧 청정무생법인(淸淨無生法忍)을 얻어 과거 무수겁(無數劫)의 일과 미래도 또한 그러한 것을 보았다. 과거 생에 자신은 중생을 위해 '천 번 몸을 버리겠다'고 서원하였고, 이미 9백99번의 몸을 버리었음을 알게 되었다. 태자는 천 번의 몸을 채우기를 결심하였다.

스승과 오백의 신선 도사와 마침 공양하러 온 부란(富蘭)이라는 장자와 남녀 오백 사람은 태자가 몸을 버리려는 것을 보고 슬피 느껴 울부짖으면서 또한 태자를 따라 산 언덕 끝에 이르렀다.

 

이에 태자는 모든 사람의 앞에서 큰 서원을 발하였다.

'내가 이제 몸을 버리어 중생의 목숨을 구제하오니 이 공덕으로 빨리 보리를 이루고 금강의 몸인 상(常) · 락(樂) · 아(我) · 정(淨)의 무위(無爲)의 법신(法身)을 얻어서 제도치 못한 이를 제도하며 해탈치 못한 이를 해탈케 하며 편안치 못한 이를 편안케 하소서.

나의 이제 몸은 무상하며 번뇌의 모든 독이 모인 것이며, 이 몸은 청정치 못하여 아홉 구멍이 차서 흐르고 사대(四大)의 독사가 쏘는 바며, 다섯의 칼 뺀 도적이 쫓아서 상해(傷害)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몸은 반복이 없도다. 맛나고 감미로운 음식과 오욕락(五欲樂)으로 이 몸을 공양할지라도 목숨을 마친 뒤에는 선한 은혜를 갚음이 없고 도리어 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오직 괴롭게 하는 것이요, 즐거움을 주지 않는 것이다'

 

태자는 가지가지로 그 몸의 허물을 꾸짖은 뒤에 또한 서원을 발하였다.

‘이제 내가 살과 피로 저 주린 범을 구제하오니 남은 사리(舍利)와 뼈로 우리 부모가 후일에 꼭 탑을 세워서 일체 중생의 몸에 모든 병으로 인한 괴로움이 숙세 죄의 인연으로 생겨 탕약(湯藥)과 침구(鍼灸)로는 낫지 못하는 이로 하여금 내 탑에 이르러 지극한 마음으로 공양하면 병의 가볍고 중함에 따라 백 일이 지나지 아니하여 반드시 낫게 하소서. 만일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할진댄 모든 하늘은 향기로운 꽃을 비내리소서’

모든 하늘은 소리에 응하여 만타라(曼陀羅)꽃을 비처럼 내리고 땅은 모두 진동하였다.

 

태자는 곧 몸을 범의 앞으로 던졌다. 이에 어미 범은 태자의 살을 먹어서 어미와 새끼가 다 살아나게 되었다.

이 일로 오백 선인은 위없는 정진도(正進道)의 뜻을 발하였으며 신선의 큰 스승은 무생인(無生忍)을 얻었다.

 

이튿날 왕과 부인과 후비와 모든 신하들은 이 사실을 알고 기절하여 사람을 알지 못하였다. 이때 신하들은 왕께 여쭈어 곧 태자의 뼈를 거두어 칠보탑을 세우고 보배로운 물건으로 장엄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때 태자는 나의 몸이요, 이때 부왕은 곧 지금의 나의 아버지 열두단(閱頭檀)이요, 이때 부인은 어머니 마야(摩耶)요, 이때 후비는 지금의 구이(瞿夷)요, 이때 대신 사야는 아난이요, 이때 산 위의 신선의 큰 스승은 미륵(彌勒)이요, 배제사(裴提舍)왕은 난타(難陀)요, 이때 바라문은 라운(羅雲)이니라.

미륵보살은 옛적부터 항상 나의 스승이었는데 내가 보시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중생을 구제한 까닭에 스승보다 앞서 훌쩍 9겁(劫)을 초월하였으니 지금의 부처를 얻음에 이르기까지 제도함이 끝이 없었느니라”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무수배례(無數拜禮) ; 헤아릴 수 없이[無數] 많은 절을 하여 예를 표함.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 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 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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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正使)와 부사(副使) 두 사람이 일본을 가서 잘 살피고 오라고 보내니까, ~~ 각각 정반대의 보고를 했다' ; 임진왜란이 있기 2년 전 1590년에 일본이 사절단 파견을 요청해 일본 통신사에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이 임명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다녀왔다(1590년 3월~1591년 3월). 임무는 일본의 실정과 일본 전국시대 혼란을 통일한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탈을 계획하고 있다는 저의를 알아 오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돌아온 후 선조 임금의 질문에 정사인 황윤길(서인)은 "앞으로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옵니다[必有兵禍]" 부사인 김성일(동인)은 "그러한 조짐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事宜 일의 마땅함)에 매우 어긋납니다[臣則不見如許情形 允吉張皇論奏, 搖動人心, 甚乖事宜]"라고 하였다.

 

또 선조의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의 질문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其目光爍爍, 似是膽智人也]"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其目如鼠, 不足畏也]"라고 하였다.

두 사람의 상반된 보고에 조선 조정은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결국 전쟁은 없을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삼천리강토(三千里疆土) ; 삼천리강산(三千里江山). 우리나라 땅의 남북의 길이가 삼천리라 하여 우리나라의 강산을 이르는 말. 강토(疆土)는 '나라의 경계 안에 있는 땅'을 말한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에서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사색정당(四色政黨) ; 사색당파(四色黨). 조선 선조 때부터 후기까지 사상과 이념의 차이로 갈라서서 조선의 정치적인 판국을 좌우한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네 당파.

*'화엄경에는 ‘부처님과, 우리 중생의 마음과, 또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한량없는 모든 중생이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셨어'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나타낸 말.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爾時 如來林菩薩承佛神力 普觀十方 以偈頌曰:

譬如工畫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色 四大無差別 四大非彩色 彩色非四大 不離四大體 而別有彩色

心非彩畫色 彩畫色非心 離心無畫色 離畫色無心 彼心不常住 無量難思議 顯現一切色 各各不相知

猶如工畫師 不能知畫心 當知一切法 其性亦如是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諸佛悉了知 一切從心轉 若能如是解 彼人見眞佛

心亦非是身 身亦非是心 作一切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

 

[참고] 80권본 『화엄경(華嚴經)』 실차난타(實叉難陀 制譯) 제19권 ‘제20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에서 각림보살(覺林菩薩) 송(頌). 『대방광불화엄경 강설(19권)』 (여천 무비 강설 | 담앤북스) p133~142 참고.

爾時 覺林菩薩承佛威力 遍觀十方而說頌言 譬如工畵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相 大種無差別 大種中無色 色中無大種 亦不離大種 而有色可得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 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 물감의 요소)은 차별이 없느니라. 대종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心中無彩畵 彩畵中無心 然不離於心 有彩畵可得 彼心恒不住 無量難思議 示現一切色 各各不相知 譬如工畵師 不能知自心 而由心故畵 諸法性如是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悉從生 無法而不造

 

마음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 그림을 찾을 수 없도다. 저 마음 항상 머물지 않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일체 빛깔을 나타내 보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도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나니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도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 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 없도다.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應知佛與心 體性皆無盡 若人知心行 普造諸世間 是人則見佛 了佛眞實性 心不住於身 身亦不住心 而能作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별(別) ; [주로 ‘없다’, ‘아니다’ 따위의 부정어나 부정적인 의미의 명사 등과 함께 쓰여]보통과 다르게 별나거나 특별한.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투쟁견고(鬪諍堅固 싸움 투/다툴 쟁/굳을 견/굳을 고) ;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이천오백 년을 불법(佛法)의 성쇠(盛衰)에 따라 나눈 다섯 시기 가운데 다섯 번째 시기. 수행승들이 자기 주장만 옳다고 싸워 불법이 자취를 감추는 시기이다.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적광토(寂光土) ; 상적광토(常寂光土). 상적광(常寂光). 법신불(法身佛)이 머무르는[住] 정토(淨土).

상적광토는 이상(理想)과 현실(現實), 정(靜:寂)과 동(動:光)의 본래(本來:常) 일체(一體)인 세계로 그것은 여기와 저기,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넘어 체득되는 참된 절대계(絕對界)이고, 상주(常住)의 정토(淨土)이다.

*이십팔천(二十八天) ; 삼계제천(三界諸天)을 통틀어 이르는 말. 곧, 욕계(慾界)의 육천(六天)과 색계(色界)의 십팔천(十八天)에 무색계(無色界)의 사천(四天)을 합친 스물여덟 개의 하늘이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열가지 병이 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