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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 (1/4) 고담화상 법어.

 

**전강선사(No.249) - 고담화상법어 1 (72.06.02.새벽)[몽산법어 부록 05]

 

(1) 약 20분.

 

(2) 약 17분.

 

(1)------------------

 

만리경년별(萬里經年別)이요  고등차야심(孤燈此夜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하시(何時)에 봉견안(逢見顔)고  산색의구청(山色依舊靑)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만리경년별(萬里經年別)이다. 만리나, 그만 서로 살다가 이별(離別)을 해.

부부간이든지 부모 간이든지 친척 간이든지, 그저 내 몸뚱이던지 뭐든지 그만 만리경년별이여. 만리나 그만 격(隔)해 버려. 콱 맥혀 버리고 이별해 버린다 그말이여. 한번 이별하면 그만이야.

 

그 낯빤대기, 그 얼굴, 그 모양 그대로는 도저히 만날 수가 없어.

금생(今生) 부모가 후생(後生)에 만난들 얼굴이 똑같을 수가 있나. 얼굴 다 달라 버리고, 뭐 전체가 변해 버리고,

 

뭐 모두 그저 그만 참, 뿔따구를 뒤집어 쓰고 나올런지, 꼬리를 달고 나올런지, 기다란한 무슨 그런 놈의 배암 같은 게 되어 나올런지, 원 당최 뭐 거.

 

얼굴 그 얼굴 다시는 못 보지. 만리나 경년, 그 이별해 버리고 만다.

 

고등차야심(孤燈此夜心)이로구나. 외로운 등(燈)에, 턱! 그만 이별허면 등불만 훤허니 써 놓고 앉아서 이 마음이다. 이 슬픈 마음. 얼마나 슬퍼.

 

내 몸뚱이도 내버릴 때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무서우며, 이 가진 몸뚱이지마는 이별을 꼭! 하고 말 때가 있으니 그때를 생각해 봐라.

 

내 몸뚱이 밖, 부모니 처자니 뭐 친척이니 뭐 재산이니 뭐든지 그거 다 내버리는 거 그거 한번 생각해 봐.

 

하시(何時)에 봉견안(逢見顔)이냐. 어느 때에 다시 이별하면 만날 때가 있으리오.

도저히 이 몸 내버린 뒤에 무엇을, 이 몸도 다시는 못 만나. 요렇게 생긴 몸뚱이는 못 만나. 어떻게 생겨 나올런지.

 

산색(山色)은 의구청(依舊靑)이니라. 산빛은 예를 의지해 항상 푸르다.

산색의구청(山色依舊靑)이여. 산색의구청이라는 것은 내 본래가풍(本來家風), 내 본래면목(本來面目). 변태없는, 산색이 그놈이 어디 변태가 있나. 어느 때던지 산은 퍼렇지.

 

그저, 내가 나 하나 깨달라서 생사 없는 해탈대도(解脫大道)에 거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게송.

 

 

고담화상(高潭和尙) 법어(法語)다. 고담선사(高潭禪師)라고 참 유명한 도사인데. 선사의 법어라.

 

약욕참선(若欲參禪)인댄, 참선을 허고저 헐진댄,

참선 밖에 없는디 허고저 혀? 참선 해야지! 꼭 해야지! 안 혀?

참선 안 할 바에는 무슨 중노릇해서 뭣 혀? 중노릇해야 그 뭣 할 거여?

 

이번에 미국 중도 왔다 갔지마는 그 미국.. 영국 중인가? 영국 사람인가? 영국 중이란가? 미국 중이란가? 그런 중이지마는 태국에 와서 중이 되었어.

 

중이 되어 가지고는 오후불식(午後不食) 허는 거, 그것 딱! 그놈 죽어도 오후불식 밖에 몰라. 때만 지나가면 안 먹어. 열두 시만 치면 안 먹어.

그러고는 계행(戒行) 지키는 거, 그저 살생 않고, 도둑질 않고, 모도 사음질 같은 거 않고, 딱! 독신으로.

 

그러지마는 고기는 또 먹는다 하든구만.

한국에 와서는 안 먹는대. 한국에는 고기를 안 먹으니까 또 한국에 와서는 안 먹는다 하드구만. 즈그 나라에 가면 먹는데. 산 놈을 잡아서 먹든 않지마는 죽여서 모도 이리저리 매육(賣肉)은 먹는 모냥이지?

 

그것이 불법(佛法)이라고. 그 그런 계행 지키고, 오후불식 허는 거, 그 이외에는 몰라. 나를 찾는 법, 생사해탈 하는 법은 몰라.

거, 우리 부처님의 정법(正法)이 생사해탈법이건만, 어찌 똑 동토(東土)로만 건너오고는 그런 나라에는 그렇게도 안 갔는고. 그저 무슨 주문 외우는 것뿐이고. 그것 참.

 

그것이, 그 오후불식도 허며, 계행도 가지니 얼마나 일등인인가? 참, 사람으로써 훌륭한 사람이지마는.

그것만 가지고 아무리 닦아 봤던들 복진타락(福盡墮落), 그놈 그렇게 닦아서 그 복 받고 나서 마지막에는 타락(墮落)을 허니, 타락할 때 생각해 보면, 뭐 본래 안 닦고 안 받은 때나, 타락할 때 그때 다 받고 타락할 때나, 다를 게 뭐가 있나.

 

그러니 그 윤회를 면치 못허니, 닦아 가지고 받아 가지고는 나중에 타락하면은 도로 그만 지옥에서—와서 잘 닦아 가지고 낙(樂) 받다가 도로 또 복 다 받고 나면, 도로 지옥으로 풍 빠져 버리니 그거 뭐 마찬가지지. 뭐 좀 어느 때 좀 혹고혹영(或苦或榮)이지.

혹 영화스러울 때가 있다고 하지마는 그 고(苦)가 닥쳐오면은 마찬가지 아닌가. 윤회고(輪廻苦)라는 것이 그렇다 그말이여.

 

그러니 윤회를 면치 못허는 그것이 어디 참말로 우리 부처님의 정법(正法)인가?

꼭 윤회를 면하는 법이래야, 이 도는 물레바퀴처럼 돌아가는 그 윤회를 면하는 법이래야 참으로 법 아닌가.

척 한번 응, 참선을 해서 자아를 발견허는 것이 그것이 참 법(法)이고 도(道)지.

 

이러헌 일등 참선객(參禪客)이 되어서 참선을 할 자인대는, 참선을 허는 선객일진대는 행동부텀 무엇을 첫째 가져야 하냐 하면 불용다언(不用多言)이다. 다언(多言)이 없어야 할 것이다.

꼭 할 말이야 안 할 수가 있나. 꼭 헐 말은 허지마는 헐 말 밖에는 쓸데없는 말 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언(多言)을 말어라.

 

항상 공안(公案)을, 조주(趙州) 공안을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인고'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때기 이빨에 털났느니라'

 

무슨 도리(道理)냐 말이여. 따져 가지고는 되지 않는 도리여. 아무리 이놈을 수수께끼처럼 별 생각을 다 붙여 봐도 고것은 안되거든, 선(禪)이라는 것은. 그러니 그걸 주의하라는 것이여.

 

그러헌 의리선(義理禪), 해석선(解釋禪), 따지고 붙이는 선(禪), 그것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그런 종자는 여지없이 쫓아내 버리고 그것은 기르지 않아야 돼. 그래야 활구학자(活句學者) 활구선(活句禪)이지. 그런 것이 생겨 나오면 못쓰거든.

 

다언(多言)하나, 다언 말을 하지 말고 공안선(公案禪)을 해라.

공안을 떠억 염념상련(念念相連)해라. 생각생각에 그 의심(疑心)을 연(連)해라. 의심(疑心), 알 수 없는 놈을 연속해라.

 

시심마(是甚麼)면, ‘이뭣고?’ ‘이-뭣고?’

 

‘이-’ 아! ‘이-’한 놈이 있다 말이여, 분명히.

‘이-’해 놓고 보니 뭐냔 말이다. 도대체 뭐냔 말이다.

 

별놈의 이치를 다 때려 붙여 봐라. 별 모양 있는 지견을, 모양 있는 무슨 모양을 다 때려 붙여 봐라. 오색을 다 갖다 붙여 보고 오색 없는 지경을 또 다 붙여 봐라. 그런 건 공안참선(公案參禪)이 아니여.

 

‘이뭣고?’ 알 수 없는 하나가 떠억 나와 가지고는 그만 그놈 하나뿐이다. 전체가 그놈 하나뿐이여.

가나오나 그놈 하나뿐이여. 일체처(一切處)에 그놈 하나뿐이여.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그놈 하나뿐이여. 똥 눌 때라도 오줌 눌 때라도 밥 먹을 때라도 그놈 하나뿐이여.

 

아, 그놈 하나 다뤄 나가는데 뭐가 그리 어렵냐 그말이여. 천하에 쉬운 것이 그뿐인데.

 

이놈을 생각생각이 연(連)해라.

전념(前念)이 끊어지기 전에 곧 후각(後覺)이, 뒤에 깨달은 그 알 수 없는 놈이 항상 꼬리를 연(連)해.

 

염념상련(念念相連)을 해라.

좋지, 참 재미나지.

 

그 일념(一念)이, 알 수 없는 일념이 독로(獨露) 된 데 가서 일체 중생고(衆生苦)가 거기 없다.

중생이라는 고가 뭐냐 하면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중생고인데, 그저 그 분별식이 들이 일어나 가지고는 못 견디지.

 

그 분별식 가운데 얻지 못한 것이 있고, 되지 않은 일이 있고, 무슨 애가 탄 일이 있고, 뭐 별놈의 중생고가 다 거기서 일어난다.

중생고 퍼일어나는 것이 망상번뇌(妄想煩惱)에서 일어나는 건데, 망상번뇌가 거기 붙덜 못혀. ‘이뭣고?’에는. ‘이뭣고?’

 

또 하나, ‘이뭣고?’ 그놈이 또 ‘이뭣고?’

찾는 놈 또 찾는구나 ‘이뭣고?'

‘이뭣고?’한 놈을 또 ‘이뭣고?'한다.

 

아, 이렇게 법상에 올라와서 아침마다 일러주는데 무엇을 물어 사석(私席)으로. 왜 사석으로 물을 게 뭐여? 물을 게 있어야 묻지.

 

‘이뭣고~?’

그 ‘이뭣고?’해 놓고는, 알 수 없는 ‘이뭣고?’ 그 의심 그놈의 덤뱅이가 그놈이 참, 그것 ‘이뭣고?’라도 깰래야 깰 수 없고 흩을래야 흩을 수 없고 그놈 뭐.

 

잘~ 그놈 해 보지. 당장에 거가서 직하(直下)에 거가서 무변리(無變理) 거가 있고, 변함이 없는 도리가 있고.

 

그대로가 독로(獨露)인데, 의단독로(疑團獨露) 그것이 바로가 그대로가 그놈 연속(連續)해 나가는 것이 그것이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인데,

언제나 언제나 오래오래 몇 철 몇 해 해 가지고사 타성일편이 올라는가, 그때 올라는가?

 

요런 놈의 소견(所見) 봐라.

직하에 그만 타성일편도 오는 것이고, 지금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도 거기서 오는 것이고.

 

항상 상련(相連)해라. 그 상련(相連) 참 묘(妙)하다.

 

'이뭣고~?' 이뭣고? 그놈을 야물딱지게 다잡이해서, 그 거각(擧却)해서 해 나가 봐. 잠이 어디서 들어오며, 번뇌 망상이 어디서 올 것인가? 오는 곳이 있어야 오지.

'이뭣고?' 그놈 일어난 놈이 다 차지해 버렸는데, 어디서 그놈이 틈을 타서 들어올 것인가.

 

생각생각이 상련(相連)을 해라.

 

비단 행주좌와(行住坐臥)에도 해라.

행주좌와에는 왜 안 하나? 갈 때에 왜 그냥 가나? 그대로 왜 어디를 그냥 허행(虛行)으로 가냐. 허행을 허냐 그말이여. 아! 갈 때 왜 못해?

 

'이뭣고?' 걸음걸음이 '이뭣고?'

걸음 내딛는 것도 모른다. 이뭣고? 때문에. 그걸 갖다 행부지행(行不知行)이라 햐. 행해도 행을 몰라.

 

왜 앉을 때는 왜 안 해? 앉을 때 왜 못혀? 앉으면서 왜 못허며 서면서 왜 못혀?

앉을 때 터억 그놈, 참 앉을 때 더 조심해서 이뭣고?를 거각하고 척 앉어 보아라.

 

뭐 행할 때나, 좀 어디 가서 주(住)할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나 왜 못혀?

그렇게 좀 다잡이를 좀 해 보아라. 살림살이를 좀 그렇게 좀 알뜰히 좀 해 보아라.

 

이걸 않고는 안되아. 될 수가 없어.

인생 문제를 어떻게 헐 테여? 이놈의 인생의 문제, 깨닫지 못허고 밤낮 이렇게 칠통(漆桶)이 되어 가지고야 뭣혀?

 

어디서 하생(何生)했으며, 하사(何死)오? 어디서 뭣하다가 나왔으며, 어떻게 또 죽어서 뭣 될 것인가? 좀 생각해 봐. 하생(何生)이며 하사(何死)오? 이게 무슨 생이며 이게 무슨 죽음이냐 말이여.

 

죽지 않는 놈, 그놈 뭐 그대로가 딱 갖춰져 있는데. '이뭣고?'가 죽나?

 

‘이뭣고?’ 하나 득력(得力)해서 그만 타성일편(打成一片) 되어보지.

깨닫지 못하고 죽더라도 그 일편(一片)이 그대로 가서 그만 정법신심가(正法信心家)에 가서 그대로 몸뚱이 턱 받아 가지고 나와서 또 ‘이뭣고?’하는 것이여.(처음~20분24초)

 

 

 

 

 

(2)------------------

 

상대목전(相對目前)해라. 목전(目前)에 탁! 드러나야 한다. 독로. 독로(獨露)가 그거여.

눈앞에, 이 내 눈 뜬, 이 눈깔 눈앞에도 나타나지마는 심안(心眼)에, 내 마음 눈이 있지 않은가. 이 눈 보다도 눈 감아도 보이는 눈이 있지 않은가. 눈 감아도 보이는 눈앞에 탁! 나타날 것이다.

 

분금강지(奮金剛志)해라. 금강 같은 뜻을 가지고 분(奮)을 한번 내라.

스르르르 풀어지는 고런 놈의 그, 금방 났다가 금방 없어진 놈의 고런 놈의 마음, 거 뭣 할거냐. 그게 도심(道心)이냐? 도 닦는 마음이 그러하냐?

 

금강(金剛) 같은 마음을 분(奮)을 내라!

 

분심(奮心)이 제일이다.

왜 내가 나를 모르다니? 왜 내가 내 면목(面目)을 내 낯빤대기를 내가 몰라? 내 콧배기를 내가 몰라?

우째서 모르냐 말이여, 무슨 까닭으로 몰라? 왜 못 봐?

 

 

그런 뜻을 한번 가지고 일념만년(一念萬年)이다. 그 생각이, 그 깨짐이 없는 그 철저한 마음 그 뭉태기는 만년(萬年)이다.

만년이면 만년 지낸 뒤에는 없어지나? 벌써 만년인데. 만년이면은 또 만년이지. 또 만년이면 또 만년이지. 억만년(億萬年)이지.

 

그 염(念)이, 그 도렴(道念)이 ‘이뭣고?’ 마음이 이처럼 견고하고 이처럼 맺어져 한덩어리로 풀려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는 화두(話頭)가 그 민첩하게 아름답게 틈없이 온당한 한덩어리 떠억 될 때 회광자간(廻光自看)해라.

 

회광자간(廻光自看)이라는 건, 다시 더 맹렬하게 ‘이뭣고?’를 한번 봐라. 관(觀)해라.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 판치생모 의지(意旨)를, 조주(趙州)가 ‘판때기 이빨에 털 났다’고 했으니, ‘어째 판치생모라고 했는고?’ 그놈을 한번 심안(心眼)으로 회광(廻光)해라.

 

가만~히 관(觀)을 해라. 관(觀)이 고 의단(疑團)뿐이거든. 알 수 없는 놈뿐이다 그말이여.

알 수 없는 놈 딱! 틀림없이 나온 놈이 그놈이, 그것이 반조(返照)여. 회광반조(廻光返照)를 달리 했다가는 큰일나. 여기 다 그렇게 해 놨으니.

 

그놈을 찰이(察而)하고 부관(復觀)해라. '살피고 또 다시 관(觀)하라'하는 건, 의심(疑心)을 더 맹렬히 하고 후렴(後念)을 더 알 수 없는 의심을 자꾸.

 

의단뿐이니까, 의단독로(疑團獨露)니까.

관(觀)이나, 부관(復觀)이나, 찰(察)이나 전부가 의단(疑團)이라는 거여. 의심 하나뿐이여.

 

의심을 가만~히.

어디 꼭 ‘어째서 판치생모~’ 그 해서 되나? 나중에는 그만 판치생모가 그대로 의심 하나뿐인데, 이뭣고가 그대로 의심 하나뿐인데.

 

살피고 다시 관하는[察而復觀] 것이, 그것이 거기에 가서 용맹도 더하고 신심도 더하고 분심도 더하고 못된 중생념이 붙지 못하게, 거기서 뭐 그러헌 무슨 별념(別念)이 생겨 나올 것이 뭣이 있나?

 

그렇게 되어 나가는데 가서 혼침(昏沈) 산란(散亂)이 어디가 붙어 있어? 혼침(昏沈)이, 잠이 어디서 오며 산란심(散亂心)이 어디서 들어와?

진력가편(盡力加鞭)해라. 그래서 그 혼침 산란도 못 들어오고 화두(話頭) 독로(獨露)에 힘을 더하고 채찍을 더해라. 행여라도 거기 뭐가 붙을라.

 

거다가서 사렴(邪念) 사의상량(邪意商量)이 붙어?

그래 가지고 고인(古人) 공안을 천착(穿鑿)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알았다'고. 아! 이걸 붙이고 저걸 붙이고, 이런 것이요 저런 것이요. 아! 요런 놈의 짓을.

아무리 가르켜 주어도 안 듣네. 고런 것은 참 큰일나지.

 

작년에 거년에 혜우가 어쨌어? 혜우가 여기서 입 한번 벌릴 때, 내 다시 한번 물으니 거기서 그만 입 딱.. 주먹으로 볼태기를 두 번을 내가 쳐부숴 가지고 안 쫓아내 버렸어?

 

그런 것이 큰일나는 것이여. 그러기 땀세 방(棒)이 여우적(如雨滴)이라, 방할(棒喝)이 여우적(如雨滴)이여. 방할(棒喝)이라는 게 뭣이여? 방맹이(棒)와 할(喝)인데.

 

임제 스님 가풍도 보란 말이여. 적수단도(赤手單刀)로 살불살조(殺佛殺祖)다. 붉은 손 홑칼로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느니라. 뭐 이사(理事)가 다 막 들어가는 것이지.

 

그러니 그 활구참선 화두에는 분석, 그 해석, 될 것이여?

 

아! 그 조그만한 그 어린 녀석, 인자 들어온 어린 거, 그저께 벌써 따지고 들어서 헌 풍을 보니, 벌써 알거든. 아! 이놈이 그만 그 무슨 염화미소(拈花微笑)니 뭐니 다 해석을 혀. 아! 이것 보소.

그래 가지고는 그 모도 그렇게 종류가 있어. 그렇게 모도 가르키고 '옳다!' 해 놓고 요런 놈의 것, 선지식이라는 게 그러고 앉었는 게 있어. 거가서 지내고 나온 사람 다 그 모냥이여. 이것 참 큰일이지.

 

스승 만나지 못하면은 다 도깨비 되고 마는 거여. 될 거여? 그 뭣혀?

아! 제 경계(境界)를 제가 생각해 봐도 알 것이고. 참 부끄러울 일이지.

 

깨달지도 못한 것이 깨달은 체 해 가지고 그만 주뎅이만 모도 논하(論下)를 하고 논상(論上)을 하고, 고인(古人)의 공안을 천착(穿鑿)하고. 미득위득(未得謂得)허고 미증위증(未證謂證)해서, 그 죄 보다 더 큰 죄는 없네.

 

뒷 후인(後人)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쫓아내야 하는 것이고, 여지없이 때려 멸망시켜 버려야 하는 거여. 고런 종들이 모도 일어나 가지고 불법 망해 버리고 그 되겄는가 말이여?

 

 

천마만련(千磨萬鍊)해라. 천 번이나 화두를 의심을 하고 만 번이나 화두를 단련해라.

 

화두 하나 밖에 없으니, 깨달기 전에는—깨달을라면 언하(言下)에도 있고 그저 그만 일념지간(一念之間)에도 있고 중생성불(衆生成佛) 찰나간(刹那間)에도 있다마는, 그놈이 잘 못 깨달을라고 할 것 같으면 참 누년(累年)도 가고 일생(一生)도 가고 삼생(三生)도 가고 이런 것이다.

 

깨달기 전에는 네 실력이 그뿐인데, 네가 원래 깨달지 못할 만한 업력(業力)이 그만큼 눌은밥 눌데끼 퍼눌러 있으니 그런 건데 한탄(恨歎)하면 뭣할 것이냐, 한탄도 그만두고 그저 해라.

 

아무리 업력이 태산(泰山)같이 눌은밥 같이 눌러 붙었더라도 그까짓것 돌아보지 말고 그저 하면은 화신투입(和身透入)한다. 네 온전한 몸뚱이, 네 전체 몸뚱이 한번 푹! 들어갈 때가 있다.

 

안된 법이 없는 것이 화두(話頭)니라.

천 번이나 만 번이나 퇴타(退墮)없이 금강(金剛) 철석 같은 마음을 가다듬어서 이렇게 닦아 나가라.

 

전전신선(轉轉新鮮)이다. 그렇게만 신심이 철저히 닦아 화두만 해 나갈 것 같으면 신심이 점점 더 난다.

신심도 한량이 없으니까 바다와 같애서 전입전심(轉入轉深)이다. 들어갈수록 더 깊다. 신심도 해 들어갈수록 더 난다. 전전신선(轉轉新鮮)이다.

 

일구월심(日久月深) 해 봐라.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봐라. 그렇게 잘 해 나가면서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봐라. 밀밀면면(密密綿綿)하야, 그 화두가 은밀허고 은밀허고 면면허다.

 

은밀(隱密)이라는 것은 아주 조그만한 티끌만큼도 망상이 섞이지 않는 것을 밀밀(密密)이라고 해햐. 다른 마음이 조금도 섞이지 않고 의심만 따악 독로(獨露)헌 것이 그것이 밀밀이여.

 

면면(綿綿)이라는 것은 솜이 한덩거리가 되아, 솜 그놈이 모도 한덤벵이 되아 가지고, 그 먼지 같은 것이 그것이 면(綿)인디 면(綿) 털인디, 털 같은 것이 모도 그놈이 한데 합해져서 덩어리가 되어 가지고 떨어지지 않고 뭉쳐져 있는 것을 면면(綿綿)이라 해야.

 

화두가 그렇게 되었다 그말이여. 조금도 떨어짐이 없이 조금도 흩어짐이 없이 고대로 탁! 몽쳐져 있는 것을 면면(綿綿)이라 해야. 밀밀(密密)과 면면(綿綿)이 똑같은 거여.

 

화두 한덩이가 그렇게 철저허게 들어붙으면은 그만 내외(內外)가 지시일개의단(只是一箇疑團)이다. 바깥 경계나 내 안 마음 경계나 의단 하나뿐이여. 아무것도 없어.

 

허! 이런 경계가 닥쳐오면은 화두낙(話頭樂)도 기맥히네.

 

못된 것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 잠 같은 것이 모도 들어와서 무기(無記)가 모도 거기에 섞여졌기 때문에 그만 고롭고, 그만 이놈의 잠을 억지로 뗄라고 해도 들어붙고 잠이 오고, 자꾸 망상이 또 들어붙고 이놈이 야단치고 헌게, 화두 해 나가는디 고로와 죽겄다 그말이여.

'아이고! 이놈의 화두 내 던져버리고 좀 누웠으면' '아이고! 편안히 잠 좀 자 봤으면' 맨 요따구로 되어 버린다 그말이여.

 

고놈이 깨끗 깨끗해서 무기와 망념이 들어오지 못하고 화두가 밀밀면면만 되아 번진다면은 그 화두낙이라는 게 기맥히네. 거다가 그 또 너무 낙관해도 못쓰지마는, 화두의 낙이라는 거 기가 맥혀.

 

 

불거자거(不擧自擧)가 된다. 화두 들라고 할 것이 없다 그때는. 화두 챙길 것이 없어. ‘이뭣고?’ 헐 것이 없어. ‘판치생모?’ 헐 것이 없어.

그대로 ‘이뭣고?’뿐인디 뭘 ‘이뭣고’를 또 추켜들어? 뭐 ‘판치생모’를 다시 헐 게 뭐 있나?

 

이러헌 지경이 꼭 오고 마는 것이고, 공부허는 지경이 이러헌 지경인 것인디.

그 뭐여, 참선헌다고 앉으면 자고. 잠 그놈 깨면은 별 망상(妄想) 더하고. 별 망상 더혀. 선방에 들어와서 더혀.

 

허! 그 망상도 또 이상하지. 망상도 재미난 망상이 있네.

'돈이나 많이 벌어 놓고, 돈 그놈 내년에는 지르면 얼매고, 내년에 지뤄서 얼매가 되면 그놈 논 사고, 그놈 밭 사 놓고' 요런 같은 망상하면 좋네. 부자 될 것인께. 서호당마냥으로.

 

그런 것 생각하다 보니 한 시간이 버떡 가 버리고, 두 시간이 버쩍 가 버리고.

자기는 고런 것 생각하니 잠 안 자면서 남 존 것은 숭보고. 요러고 앉은 참선이 있네. 고약한 참선이지.

 

불거자거(不擧自擧)가 된다. 화두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가 없는 지경이 온다.

그러헌 지경이 그게 참으로 응, 일진(日進) 지경이다, 날로 참된 지경이다.

일용 거각을, 날마다 참선 거각(擧却)을 이와 같이 해야겄다.

 

역여유천(亦如流泉)이니라. 비유컨댄 항상 새암물 흐르는 것 같다.

어디 더 흐르고 덜 흐르나? 고 구녁에서 나온 그 물이. 고대로 항상 흐르는 물같이 그렇게 화두가 처억 될 때가 와.

 

 

만리경년별(萬里經年別)이요  고등차야심(孤燈此夜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이 몸뚱이 얻어서, 이 몸뚱이를 터억 가지고 불문(佛門)에 들어와서 도학자가 되었구나.

자, 이 몸뚱이, 이 도 닦는 몸뚱이, 도학자의 이 참 만나기 어려운 이 몸 이별해 버리면 만리경년별(萬里經年別) 되어 버려 다시 또 얻기 어렵다. 과연 어렵다.

 

고등차야심(孤燈此夜心)이여. 이 원통(寃痛)헌 마음, 이 외로운 등(燈)에 이 원통헌 마음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이 몸 만나서 이렇게 만났으니 금생에 결정코 속성대각(速成大覺)하야 광도중생(廣度衆生)이니라.(20분27초~37분28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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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만리경년별~ ; 『청허당집(淸虛堂集)』 - 서산 휴정(西山休靜) (박경훈 역,동국대학교 역경원) p70 ‘행선자(行禪子)에게 답함’ 게송 참고

*‘등불만 훤허니 써 놓고~’ ; 쓰다 —> ‘켜다’의 사투리(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함경)

*본래가풍(本來家風) ; 본가풍(本家風). 본래의 가르침. 천연 그대로의 가르침.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오후불식(午後不食) ; 정오(正午), 낮 열두 시가 지나면 먹지 않는 것.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계율에 정해진 규칙을 성실하게 실천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윤회고(輪廻苦)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며 받는 고통.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공안선(公案禪) = 활구선=활구참선(活句參禪)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다잡이 ;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무시(無始) 이래 쌓인 번뇌가 불성(佛性)을 덮고 있는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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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념만년(一念萬年) : ‘한 생각이 만년(萬年) 가도록’의 뜻으로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낸 말.

*회광자간(廻光自看) :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는 뜻이다.

*회광반조(廻光返照) :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참고] 송담스님(No.524)—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오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 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 - 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별념(別念) ; '딴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천착(穿鑿 뚫을•궁구할 천/뚫을 착) ; ①깊이 살펴 연구함 ②공연히 이치에 맞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함.

*‘방할(棒喝)이 여우적(如雨滴)’ ; 방할(棒喝)을 비가 내리듯 주라. 태고 보우(太古普愚) 스님의 참선명(參禪銘) 참고.

*방할(棒喝) ; 선가(禪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접 체험의 경지를 나타날 때, 또는 수행자를 점검하며 꾸짖거나 호통칠 때, 방망이나 주장자(拄杖子)를 세우거나 그것으로 수행자를 몽둥이질하는 것을 방(棒)이라 하고, 그러한 때 크게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할(喝)이라 한다.

덕산선감(德山宣鑑)은 방으로 가풍(家風)을 삼았으며, 임제의현(臨濟義玄)은 할로써 지도방법을 삼았다. 이것을 두고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이라 한다.

*‘적수단도(赤手單刀)로 살불살조(殺佛殺祖)’ ; ‘맨손에 한 칼 들고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임이로다’. 『선가귀감』(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201 임제가풍(臨濟家風) 참고.

*염화미소(拈花微笑) ;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 범어의 Grdhrakuta를 음대로 써서 기사굴산(耆闍崛山)이라 하고, 뜻으로 번역하여 영취산(靈鷲山) • 취봉(鷲峰) 또는 영산(靈山)이라고만 한다。그 산 모양이 독수리 같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그 산 위에 독수리가 많았던 탓이라고도 한다。이 산은 중인도 마갈타(摩竭陀 Magadha)의 서울 왕사성(王舍城 Raja-grha) 동북쪽 십 리에 있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이 곳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부처님은 그 꽃송이 하나를 들어 보이니, 백만 대중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는데,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었다。이에 부처님은 『바른 법 열반의 묘한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다』고 선언하셨다 한다.

*경계(境界) ; ①대상,인식 대상 ②경지 ③상태 ④범위,영역 ⑤일, 사건.

*미득위득(未得謂得) 미증위증(未證謂證) ; 얻음[得]이 없는데 얻었다고 말하고, 증(證)한 것이 아닌데 증했다 말하는 것.

*업력(業力) ; 과거에 한 행위가 결과를 낳는 힘. 업(業)이 원인이 되어 과보를 일으키는 힘.

*화신투입(和身透入) ;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60~61 

此事는  如蚊子가  上鐵牛하야  更不問如何若何하고  下嘴不得處에  棄命一攅하야  和身透入이니라.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된 소에게 덤벼들듯이, 다시 여하약하를 묻지 말고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떼어 놓고 한 번 뚫어 보면, 몸뚱이째 들어갈 때가 있으리라.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면면밀밀(綿綿密密) ; 면면(綿綿)하고 밀밀(密密)하게. 면밀(綿密)이란 말을 거듭하여 뜻을 강조한 것으로 '끊어지지 않고 아주 빈틈없이 빽빽하게 죽 잇따라 들어차 있다'는 말. 끊이지 않고 빈틈없이 행하는 것을 말한다.

*면면(綿綿 솜·이어질·연속할 면) ; 끊어지지 않고 죽 잇따라 계속 이어지는 것.

*밀밀(密密 빽빽할·촘촘할 밀) ; 빈틈없이 빽빽히 들어찬 것.

*무기(無記) : [범] Avyaksita 선(善)•악(惡)•무기(無記) 3성의 하나。 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고롭고 ; 고롭다—> ‘괴롭다’의 사투리(경상).

* ; 다른 것은 섞이지 않고 온통.

*요따구 ; ‘요따위’의 사투리(전남).

*요따위 ; 요러한 부류의,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기맥히네 ; 기막히다—> (무엇이)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

*지르면 ; 지르다—> ‘기르다’의 사투리(강원,전라,충남)

* ; ‘흉’의 사투리(강원,경상,전남,함경)

*원통하다(寃痛--) ; 몹시 억울하여 가슴이 아프다.

 

Posted by 닥공닥정

§(256) 의심관(疑心觀) / 일관(日觀) /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용256)

 

약 6분.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房付)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그렇게 참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이렇게 삼위(三位)가 일체(一體)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그 이튿날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그 다음 날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인자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터얻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 터억—그 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하게 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70분56초~76분5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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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 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해제끼다 ; 헤치우다. (사람이 어떤 일을)빠르고 시원스럽게 끝내다.
*의관(疑觀)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면면밀밀(綿綿密密) ; 면면(綿綿)하고 밀밀(密密)하게. 끊어지지 않고 아주 빽빽하게 죽 잇따라 있는.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맷방석 ; 주로 매통(벼를 넣고 갈아서 겉겨를 벗기는 데 쓰는 기구)이나 맷돌(곡식을 가는 데 쓰는 도구) 아래 깔아 곡식을 담거나 방석으로 쓰는 짚으로 만든 물건.
멍석보다 작고 둥글며 전(물건의 위쪽 가장자리가 조금 넓적하게 된 부분)이 있다.
*백골관(白骨觀) ; 시신(屍身)의 피부와 근육이 모두 없어져 백골(白骨)만 남아 있거나, 흩어져 있는 모습을 관(觀)하여 몸에 대한 집착을 없애고, 인생무상을 깨닫는 관법(觀法). 고골관(枯骨觀)이라고도 한다. 구상(九想)의 하나.
[참고] 구상(九想) ; 구상(九相)이라고도 함. 탐욕을 제거하고 혹업(惑業 무명번뇌와 업)을 멀리하기 위해 사람의 시신(屍身)에 대해 수행하는 9종류의 관상(觀相 깊이 생각에 집중하는 것). 부정관(不淨觀)의 9단계를 말한다.
①시신이 부어 팽창하는 것을 관상하는 창상(脹想).
②바람에 날리고, 햇빛에 쪼여 시신의 색이 변하는 것을 관하는 청어상(青瘀想).
③시신이 부패되는 것을 관하는 괴상(壞想).
④부패를 끝내고 혈육이 땅에 스며드는 것을 관하는 혈도상(血塗想).
⑤시체에서 벌레와 고름이 흘러나오고 살이 흩어져 낭자한 모습을 관하는 농란상(膿爛想).
⑥새나 짐승이 와서 시신을 먹는 것을 관찰하는 담상(噉想).
⑦새나 짐승에게 먹혀 근골두수(筋骨頭手)가 분열, 파산되는 것을 관하는 산상(散想).
⑧육신이 이미 다해 백골만 남게 되는 것을 관하는 골상(骨想).
⑨백골이 불에 태워져, 재로 돌아가는 것을 관하는 소상(燒想).
*관법(觀法) ; 마음의 본성을 자세히 살피는 수행. 어떤 현상이나 진리를 마음 속으로 떠올려 그것을 자세히 살피는 수행. 한 생각만 주시하여 한결같이 그것을 잊지 않는 수행.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 덩어리 단, 홀로•오로지 독, 드러날 로)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일관도천(一串都穿 한 일/꼬챙이 관/모두 도/꿰뚫을 천) ; 한 꼬챙이에 모두 꿰뚫다.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