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뭣고 화두2017. 4. 18. 09:54

<핸드폰에서, 아래 법문은 위 유튜브에서 24분 29초부터 시작됩니다>

 

 

§(086) (게송)작야삼경월만루~ / 바른 선지식의 지도 / 최초의 화두, 가장 기본적인 화두가 이뭣고?’ / 화두를 관조(觀照)하라 /  공부는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해야만  그러한 .

 

분명 숨은 코로 들어갔다 코로 나오겠지마는, 우리 의식으로는 코로 들어마신다 내쉰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궁뎅이 뒤에서 쑤욱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에 머물렀다가 다시 나갈 때에는  궁뎅이 뒤로 쑤욱 나가는 그러한 기분으로 숨을 쉬어라.

 

몸도 건강해지고 정신도 건전해져서 참선하는 데에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  단전호흡법입니다.

 

천칠백 화두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화두, 가장 기본적인 화두가 바로 시심마(是甚麽), 이뭣고?’ 화두인 것입니다. ‘이뭣고?’ 바로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목적이 어릴 때부터서  ‘이뭣고?’대한「대관절  인생이란  무엇이냐? ‘내’라는  무엇이냐?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이냐? 이것을 바로 구체화하고 체계화한 것이 시심마(是甚麽)’ 화두인 것입니다.

 

오직 ‘이뭣고?’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생각하고 관조(觀照)해 나갈 때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분별식(分別識)이 다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해서 생각 없는 데에 도달하고, 생각 없는 데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장독에다가 간장을 가뜩 부어놓은 것을  메겡이로 메쳐서  간장독이 ! 벌어져서 간장이 와르르르 쏟아지듯이 우리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함으로써 무량겁의 칠통(漆桶)이 동시에 타파가 되고, 바로 나의 본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고, 불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고, 우주의 근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서 몸과 마을과 국가와 민족을 잊어야 하고 그렇게 잊음으로써 진리를 체달(體達)하게 되고, 진리를 체달한 사람은 인류와 국가와 민족과 모든 것을 위해서  몸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086)—78 7 관음재일 법회(78.08.27) (용086)

 

(1) 약 20분.

 

(2) 약 16분.

 

(1)------------------

 

작야삼경월만루(昨夜三更月滿樓)헌데  고가창외노화추(古家窓外蘆花秋)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불조도차상신명(佛祖到此喪身命)허니  암하유수과교래(岩下流水過橋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게송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견성(見性)을 하시고 오도송(悟道頌)으로 읊으신 게송(偈頌)입니다.

 

작야삼경월만루(昨夜三更月滿樓), 어젯밤 삼경에 달이 다락에 가득했는데, 누각에 달빛이 가득히 비추었는데,

고가창외노화추(古家窓外蘆花秋). 옛집 창밖에는 갈대꽃이 허옇게  가을이로구나.

불조도차상신명(佛祖到此喪身命)헌데, 부처와 조사가 여기에 이르러서 몸과 목숨을 잃었는데,

암하유수과교래(岩下流水過橋來). 바위 밑에 흐르는 물은 다리로 지나오는구나.

 

 게송은 조실 스님께서 깨달으신 경계를 고대로 읊으신 것입니다.

 

조실 스님은 글을 많이 배우신 문장가도 아니시고, 그러시면서 23살의 젊은 어리신 몸으로 경을 쪼끔 배우시다가 너무너무 사랑한 정든 친구가 비명에 비참하게 죽어가는 현상을 보시고 너무 무상(無常)을 철저히 깨달으신 나머지 책을 던져버리고 선방(禪房)으로 가셔서 참선(參禪) 공부를 하시다가 23살의 어린나이로 대도를 깨치셨던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읊으신 게송이 바로  게송입니다.

 

 게송은 어떠한 시인 문장가도  게송의 뜻을 올바르게 풀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각자 깨달은 분은 깨달은 분만이  게송이 내포하고 있는 참뜻을 속으로 느낄 뿐이고  깨닫지 못했을망정 참선 공부를 하시는 분은  게송을 접하므로 해서 뭐라고 표현할  없는 깊은 감명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철저히 정진함으로 해서  게송의 참뜻을 직접적으로 깊이 계합(契合)이  날이 오기를 바라고, 우리 자신도 반드시 머지않은 장래에 도업(道業)을 성취해서 이러한 진리의 게송을 읊음으로 해서 많은 후인들에게 감명을   있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자리에는 처음 오신 거사님도 계시고, 보살님도 계신만큼 참선을 해 가는 데에 구체적인 그리고 기초적인 것을 지도해 달라고 말씀을 하신 분이 여러분이 계셔서 한 분, 한 분에게 그러한 시간을 가질 수가 없어서 법회를 통해서 간단히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참선은 첫째, 바른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서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 이것은 필수 조건이 되는 것이고.

첫째는 몸을 바르게 가져야 한다. 둘째는 호흡을, 단전호흡(丹田呼吸)을 바르게 해야 한다. 셋째는 화두를 선지식으로부터 받아가지고 바르게 참구(參究)해 나가야 한다.

 

 

첫째, 몸을 바르게 갖는 것은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해라. 오른발목을 왼다리 무릎에다가 구부려 올려놓고, 왼발목은 오른다리 무릎 위에다가 올려놓아라.

그리고 허리는  펴고 그리고  발 위에다가 오른손을 얹어놓고  위에다 왼손을 포개서 올려놓은 다음, 엄지손은 서로 배끼리 이렇게  맞대서 세워라. 그래가지고  손을 배꼽  앞에다가 갖다가  대라. 배꼽 앞에 발 위에다 얹어 놔라.

 

그리고 어금니는 지그시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갖다 대라.

 귀는  어깨 위에 수직상(垂直上)에 놓이도록 하고, 코끝은 배꼽 밑에 단전과 수직상에 놓이도록 해라. 이렇게 하면 몸이 단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몸을 단정하게  다음에는 몸을 좌우로 서너 번 흔들어서 한가운데에다가  안정을 시켜라.

 

그리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떠서 앉은 자리에서 3미터 지점에다 떨구어라. 3미터 지점에다 눈을 떨구되 의식적으로 어떠한  점을 응시(凝視)해서는 아니되고, 의식적으론 아무것도  바가 없이 그저 평상으로만 떠라. 이렇게 자세를 갖는 것이 몸을 바르게 갖는 것이다.

 

 

그다음 호흡을 바르게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은 가슴으로 호흡을 하는데, 아랫배로 호흡을 해라.

숨을 들어마실 때는 배꼽 밑에 단전이 앞으로 불룩하니 나오도록 하면서 숨을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배를 차츰차츰 홀쪽하게 하면서 숨을 조용하게 그리고 길게 내쉬어라.

 

들어마실 때나 내쉴 때나 코로 들어마시고 코로 내쉬되 코로 들어마신다 코로 내쉰다’는 생각은 전혀 갖지를 말고,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궁뎅이 뒤에서,  뒤에서 쑤욱 궁뎅이를 통해서 들어마신 호흡이 아랫배로 가득히 들어오도록 이러한 기분으로 들어마시고, 들어마신 호흡은  3 동안 정지 상태로 머물렀다가 내쉴 때는  뒤로, 쑤욱  뒤로 내보내는 기분으로 내쉬어라.

 

분명 숨은 코로 들어갔다 코로 나오겠지마는, 우리 의식으로는 코로 들어마신다 내쉰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궁뎅이 뒤에서 쑤욱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에 머물렀다가 다시 나갈 때에는  궁뎅이 뒤로 쑤욱 나가는 그러한 기분으로 숨을 쉬어라.

 

들어마신 시간은  3 동안에 들어마시고, 머무르는 시간  3초 동안, 내쉴 때는  4 ,5 걸려서 내쉬도록. 이렇게 해서 한번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쉬기를  10 내지 11 이러한 정도로 시간을 잡어서 하되 절대로 무리하게 억지로 시간을 오래 머무르려 하지 말고, 너무 호흡을 배가 가뜩 들어마시지 말어라.

들어마실 때는  8부(八部) 정도만 들어마셔.  들어마실  있지마는 8부쯤 해서 숨을 멈추고 3 동안 머물렀다 조용하니 내쉬는 이것이 바로 단전호흡입니다.

 

이 단전호흡을 하면은 혈액 순환이 잘되어서 몸안에 머물러 있는 많은 노폐물, 피로의 원인이 되는 독소를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통해서 코로 그리고 혈액 순환을 통해서 밖으로 전부 다 배설하게 됩니다.

그래서 피가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져서 오장육부 기능이 활발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안정이 되고 정신이 맑아져서 그러한 상태에서 참선을 해 나가게 되면은 공부가 잘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몸도 건강해지고 정신도 건전해져서 참선하는 데에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  단전호흡법입니다.

 

이러한 호흡법을 모르고서 무턱대고 화두만을 파고들게 되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운이 위로 올라가서 골이 아프고 상기병(上氣病)에 걸려서 도저히 참선을 더이상 계속할  없게 되는 것이고, 소화불량 내지 온갖 오장육부에 부작용이 생겨나서 도업은 성취하기도 전에  먼저 앓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옛날부터 수식관(數息觀), 부처님 당시부터 수식관을 권장을 하셨고, 대대로 조사(祖師)들이 내려오시면서  단전호흡을 통해서 더위도 그놈으로 이겨내고, 추위도  단전호흡으로 이겨내고 나아가서는  오는 , 혼침(昏沈)도 그놈으로 이겨내고, 산란심(散亂心)도  단전호흡으로써  제어를 해가지고 나아가서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하기에 가장 편리하도록 그렇게 지도를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단전호흡에 대해서도 직접 하시면서  열흘,  ,  , 직접 해보시면 다시  문의해 보고 싶을 때에 다시  와서 물어보시면 되는 것입니다.

 

 

몸을 바르게 하고  다음에 호흡을 바르게  다음에는 화두(話頭)를 참구를 해야 합니다.

 

화두 가운데는 천칠백(千七百) 화두가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문헌에 오른 것만이고, 문헌에 오르지 아니한 공안, 이 우주세계에 가득찬 것이 바로 공안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선지식으로부터 주어진 화두  하나만을 철저히 참구를 해서  화두를 여지없이 통과를 해서 타파(打破)를 하게 되면은 천칠백 공안도 동시에  통과를 하게 되는 것이고, 천칠백 공안이 통과가 되면은 우주법계에 가득찬 모든 공안을 현성(現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지식으로부터  하나의 화두만을 받아가지고 철저하게 참구해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어떤 화두 하나를 잡아가지고 이리저리 해본다든지  화두  해봤다,  화두  해봤다, 이렇게 해서 그러한 사람은 도저히 바르게 깨달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허송(虛送) 생활을 하게 되고,  안타까운 신세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천칠백 화두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화두, 가장 기본적인 화두가 바로 시심마(是甚麽), 이뭣고?’ 화두인 것입니다.

‘이뭣고?’ 바로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목적이 어릴 때부터서  ‘이뭣고?’ 대한「대관절  인생이란  무엇이냐? ‘내’라는  무엇이냐?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이냐? 이것을 바로 구체화하고 체계화한 것이 시심마(是甚麽)’ 화두인 것입니다.

 

부처님 출현하시기 이전에부터  시심마 화두는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출현하시기 이전 몇억만 년 이전부터서  우주가 생겨날 때부터서 우주 자체가 바로  「이뭣고?」의 뭉텡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불법(佛法)이 무엇인 줄도 모르고, 참선이 무엇인 줄도 모르는 그러한 사람 가운데에 대관절  인생이라는  무엇이냐?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는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철학을 통해서 자기 나름대로 시나 소설이나 또는 예술, 과학 모든 자기의 분야에 있어서 결국은 그러한 분야를 통해서 「이뭣고?」라고 하는 것을 해결하고자 노력을 하고 있지 않나 이렇게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빨리 인생 문제를 해결   있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이요,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서 철저하게 참선을 해 나가는 길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냐?

 

삼천 년을 두고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은 오직  문제 하나만을 위해서 정든 고향과 부모 형제와 가족을 버리고 청춘과 인생을  버리고서 오직   문제만을 전문적으로 참구해 왔었던 것입니다.

목숨 바쳐 참구를 해서  일대사(一大事)를 통달하셔 가지고 그것을  제자에게 전하시고,  제자는   제자를 전해서 삼천 년을 내려오면서 77 조사(祖師)가 바로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이십니다.

 

이러한 분명한 법통(法統)을 이어받으신 그런 어른으로부터 참선 지도를 받고 화두를 타고 공부를 해야만  자신도 올바른 깨달음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른 안목을 갖지 못하고서 남을 바르게 가르킬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자기는 바로  목적지에까지 가보지도 않고서 남을  목적지에까지 올바르게 인도할  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번도 가보지도 아니하고 그러한 안내자 없이 올바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있다고 하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적을 바래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실(實)다웁게 닦아서 실다웁게 깨달아야지, 요행(僥行)을 바랜다든지 기적을 바래고서야 대도를 성취할 가망성은 없는 것입니다.(23분29~4318)

 

 

 

 

(2)------------------

 

‘이뭣고?’

대관절 지금 여러분들이  더위를 무릅쓰고 수백 리 밖에서, 수십 리 밖에서 이렇게 참석을 하셨는데 무엇이 왔느냐?”

내가 왔다

 

내가 누구냐?”

 아무개다

 

 아무개가 누구요?”

나여

 

내가 누구여?”

 아무개여

이러한 대답은 바른 대답이  수가 없습니다.

 

금생에  아무개’지, 전생에는  아무개었을런지 모르고. 금생에 김팔봉’이 이름을 칠봉이라고 지으면 칠봉이고, 삼봉이라고 지으면 삼봉이지, 이름이야 수천 , 수만 개라도 새로 갈아붙일 수가 있는 것이어서 그것은 임시로 붙여 놓은 이름이지 그것은 나’가 아니여.

 

“이 몸뚱이가 나’다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四大)가 뭉쳐져서 임시로 건립되어 있는,  나’가 살고 있는 임시 주택이요,  벌의 옷에 지내지 못한 것이지 이것은 나’가 아니다.

 

 나’는  몸뚱이를 운전하고  몸뚱이를 주재하는 주인공(主人公), 그것은 수십 수백 가지의 이름이 있지마는  이름 붙이기 이전에  참모습이 무엇이냐? 참면목(面目)이 무엇이냐?

이것은 우리의 희고, 검고 하는 것을 보는 눈으로는  수가 없는 것이고, 새소리 닭소리를 듣는  귀로서는 아무리 들을라고 해도 들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이뭣고?’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생각하고 관조(觀照)해 나갈 때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분별식(分別識)이 다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해서 생각 없는 데에 도달하고, 생각 없는 데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장독에다가 간장을 가뜩 부어놓은 것을  메겡이로 메쳐서  간장독이 ! 벌어져서 간장이 와르르르 쏟아지듯이 우리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함으로써 무량겁의 칠통(漆桶)이 동시에 타파가 되고, 바로 나의 본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고, 불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고, 우주의 근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천칠백 공안은 우리가 나를 깨닫기 위한 나침판이요, 지팡이요, 등불이며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잠시도 화두를 떠나서는 우리의 공부는 생각할 수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화두는 우리의 앞에 역력(歷歷)하고 또록또록하게 나타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하 싱겁고 맛없는 한마디 말이지마는 계속 들고  들고, 생각하고  생각하고—‘생각한다’고 하면은 조금 어폐(語弊)가 있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어 나가는 데에는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못   없는 의심에  맥힌 상태에서 ‘이뭣고?’ 이것을 생각이라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라 하면 이리저리 따지고 비교하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인데  화두를 생각하는 것은 따지고 더듬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하는 그런 이론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생각이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인(古人)들은 관(觀)’이라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 ()’.

“화두를 관조(觀照)하라” ‘ ()’. “관(觀)하라 이렇게 본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없는 것이고, 재미없는 말이지마는 자꾸 하고  하고 하는 가운.... 또 생각하고  생각해 나가면...(녹음 끊김)

큰방살이가 작은방살이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언제가 수백억만 년 옛날에는 참나’가 나의 주인공이였었고, 번뇌 망상은 그때 작은방살이였었습니다.

 

그것이 아는 동안에 차츰...(녹음 끊김) 조국을 찾자는   생각뿐이었던 것입니다. 조국에 모여가지고 모래 위에 흙을 퍼다가 붓고 모래 속에다가 수도 시설을 해가지고 모래땅을 옥토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국에 유학을  있는 학생들도 조국에 싸움이 일어났다 큰일이 일어났다 하면은 조국에서 부르기 전에 서로 앞을 다투어 조국으로 모여든다고 합니다. 조국을 잃어  사람이 아니면 조국이 얼마나 소중하다고 하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36년간이라고... (녹음 끊김) 근자에 와서 세계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놀랄 만큼 오히려 선진국들이 우리를 경계하지 아니하고서는 안될 만큼 그러한 수준에 지금 육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 경제면에서 세계 사람을 놀라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녹음 끊김) 그러한 내가 참나를 찾는 진리를 탐구하는 그러한 (녹음 끊김) 자칫하면 비참한 구렁텅이에 빠지지 아니한다고 단언할 수가 없습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나라들이 한때 물질면에서 경제면에서 그렇게 (녹음 끊김 ) 지금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고 해서 조끔도 안일에 빠질 수도 없고, 허리띠를 늦출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검박하게 살면서 우리는  물질 이상으로  정신면에 있어서 우리 정신력을 강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정신력 강화가 바로 참선법보다  좋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참나를 찾는  수행이야말로 부처님을 믿는 신도에 국한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어떠한 종교를 믿는 사람도  참선은 해야만 되고 불교를  믿는 사람도 참선법만은 바로 배워 가지고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 참나를 찾는...(녹음 끊김) 

 

누차 말씀을 드리는 바이지만 이론으로 따져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다. 경전에 씌어진 어떠한 경전의 말씀도 ‘이뭣고?’ 참구하는 데에 동원되어서는 아니된다 이것입니다. 다못 바보가 되어서 ‘이뭣고?’  번이고  번이고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 머물렀다 내쉬면서 ‘이뭣고?’ 초학자는 이렇게 공부를 지어 들어가면 호흡과 화두가 함께 잘되어 가는 단계에 도달할 것입니다.

나중에 익숙해지면 들어마실 때나 내쉴 때나 그것에도 구애받을 것이 없고,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누워서나 일을  때나, 차를  때나  먹을 때나 그러한 것에도 조끔도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더라도 ! 인자 되었다. ! 잘되었다 이러한 기뻐하는 마음을 내서는 아니 되고, 공부가 순일하게 잘되어 가더라도 계속 화두만을 더욱 간절하게 들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순일하게 잘되어 가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변해가지고  화두가   들리고, 졸음이 퍼오거나 망상심이  일어나거나 화두가 도저히 잘  들리는 경우가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조끔도 번뇌심이나 짜증을 내지 마시고 계속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이뭣고?’를 계속 들어나간다면 얼마 안 가서 어려운 고비를 넘게 됩니다.  고비를 지혜스럽게 참을성 있게  넘기고 나면 그때 가서는  한결 공부가 수월한 단계에 이르른 것입니다.

 

대혜종고(大慧宗杲) 스님이 「서장(書狀)」에 말씀하시기를  몸이 뒤틀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화두가   들리고 이러한 경지가 절대로 나쁜, 공부가  안되는 마장(魔障)의 경지가 아니라 참으로 한 걸음 올라설  있는 좋은 중요한 계기니까 그것을 놓치지 말고  정신을 차려서 지혜롭게  고비를  넘기도록 이렇게 간곡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부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해야만  그러한 길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집안을 위해서는  몸을 버려야 하고  몸을 잊어야 하고, 마을을 위해서는 집안을 잊어야 하고, 국가나 민족을 위해서는 마을을 잊어야 한다. 진리를 위해서 도를 위해서는 몸과 집안과 마을과 나라까지도 버려야 하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참선하는 사람은 집안이고  국가도  버려 버려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참선이 국가를 위해서는 아무 이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나라 삼천오백만 민족이 전부 참선을 하게 되면 나라는 누가 지킬 것이냐?’ 혹 이러한 생각을 하실 분이 계실런지 모릅니다마는.

 

‘이뭣고?’하는 동안에는 정말 나의 목숨까지도 바쳐야 하는 것이거늘 목숨 없는 곳에 나라 생각, 민족 생각이 거기에 떠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모든 것을  바칠 , 모든 것을  잊어버릴 때에 도(道)의 문(門)에 들어갈  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고.

 

그렇게 해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존재냐?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과 국가 민족은 말할 것도 없고,  인류는 말할 것도 없고, 우주법계에 가득찬 모든 중생을 위해서  사람의 모든 것은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서 몸과 마을과 국가와 민족을 잊어야 하고 그렇게 잊음으로써 진리를 체달(體達)하게 되고, 진리를 체달한 사람은 인류와 국가와 민족과 모든 것을 위해서  몸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팔만대장경을 통해서 우리는  읽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부처님의 참뜻을 옳게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한문(漢文)에 통달한 사람은 무슨 경전이든지 맥힐 것이 없다 이렇게 보실는지 모릅니다마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참선을 통해서 진리를 깨달아야만 어떠한 경전의 쉬운  글귀라도 바로  수가있는 것입니다.

 

부디 덥다 핑계대지 말고, 춥다 핑계대지 말고 아직도 나는  일이 많다. 아들을 위해서 딸을 위해서  일이 많다. 집안을 위해서  일이 많다 그러한 핑계대지 말고,

1분 1초라도  생각을 돌려서 화두를 참구하심으로 해서   이만큼 건강할  반드시 참나를 깨닫도록  자리를 통해서 다짐을 하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4315~5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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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작야삼경월만루~’ ; 전강 선사 오도송(悟道頌). 원래는 이렇게 7언이었으나 후에 5언으로 만드심.

〇작야월만루(昨夜月滿樓)  창외노화추(窓外蘆花秋)  불조상신명(佛祖喪身命)  유수과교래(流水過橋來)

*전강 조실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http://emokko.tistory.com/231)’ 참고.

*견성(見性) : ‘성품() 본다()’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 뜻이다。자기의 심성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인 당체(當體) 일치하는 정각(正覺)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 성불이라 한다.

*오도송(悟道頌) ; 불도(佛道) 진리를 깨닫고  경지 또는  기쁨을 나타낸 게송.

*게송(偈頌) ; (), () ()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 조건()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 없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 ②선원(禪院).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계합(契合 맺을 /합할 ) ; (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들어맞음.

*도업(道業) ; () 깨달음. ()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 수행. 진리의 실천.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 마음의 . 선우(善友).

*참구(參究 헤아릴 /궁구할 ) ; ①다못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책상다리할 /앉을 ) ; 결가부좌(結跏趺坐) 줄임말.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 발바닥을, ()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 :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

*응시(凝視 엉길 /보일 ) ; ①시선을 한곳으로 모아 집중해서 뚫어지게 바라봄. ②어떤 일이나 현상에 대하여 깊이 살핌.

*팔부(八部)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복식 호흡(腹式呼吸) ; 숨을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해서 가로막의 신축에 의하여 하는 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

*상기병(上氣病 오를 /기운 / )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 머리에 치밀게()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수식관(數息觀) ; 출입하는 숨을 세어서 마음을 통일하는 . 그것에 의해 마음의 산란을 막음. 호흡을 세어서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행법.

*조사(祖師) : 1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 깨달아서이를 전하는 () () 상응(相應)하는 도인.

*혼침(昏沈 어두울 /잠길 )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 떨어진 상태.

*산란(散亂 흩을 /어지러울 ) ; 혼침(昏沈)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 마음이 어지러운 .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화두(話頭) 대한 의심(疑心) 관조(觀照) 나가는 ,   없는 그리고  맥힌 의심으로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이상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이상 의심이 커질  없고, 이상 깊을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가슴속이 가득 차고,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때에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때에는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항아리를  돌로 내려치면은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 받아 계승해  대대의 조사(祖師).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 삶과 죽음,  생사(生死) .

①부처님이 중생 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법통(法統 부처님의 가르침 /거느릴·벼리·혈통) ; 불법(佛法) 물려받음. 또는 대대로 불법을 계승하는 계통. 법맥(法脈) 같은 .

*법맥(法脈) ; 세속에서 조상의 전래 혈통(血統) 밝히고 있듯이, 불교 선종(禪宗)에서는 스승에서 마음을 깨친 제자로 계속 이어져 전해 ,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법통(法統) 전승을 법맥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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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四大) ; ①지() · () · () · () 말함. () 원소란 . 일체의 물질을 구성하는 () 가지 원소().

(1)지대(地大) : 굳고 단단한() 것을 ()으로 하고, 만물을 실을 (負載) 있고,  질애()하는 바탕. 질애()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여 다른 존재와 서로 융화하지 못한다는 . (2)수대(水大) : 습윤(濕潤) 성으로 하고, 모든 () 포용(包容)하는 바탕. (3)화대(火大) : () 성으로 하고, () 성숙(成熟)시키는 바탕. (4)풍대(風大) : () 성으로 하고 ()성장케 하는 바탕.

②신체를 말함. 원래, 신체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함.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 주인옹(主人翁).

*면목(面目  / ) :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로써 (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 (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 ()하여 바르게 아는 .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하여 체성(體性) 없음이 마치 물에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功行]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 () 앞에 나타나 ()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분별식(分別識) ; 팔식(八識) 가운데 6 의식(意識) 말한다.  의식은 차별하여 사유하고 판단하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칠통(漆桶  / ) ; ①옻칠을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본래면목(本來面目  / / / )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역력(歷歷 겪을·지낼·수를 ·가릴 ) ; ①뚜렷한 모양. 분명한 모양. 똑똑한 모양. ②사물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모양.

*어폐(語弊 말씀 /해어질·쓰러질 ) ; ①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생기는 말의 폐단이나 결점. ②남에게 오해를 일으킬  있는 .

*대혜종고(大慧宗杲)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 · 『대혜서(大慧書) · 『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62()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 역설하였다.

*마장(魔障 마귀 /장애 )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 [참고]헤살;남의 일이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한역. ().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방법. ③무상(無上)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체달(體達) ; 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

 

Posted by 닥공닥정
법회(신수기도)2015. 2. 17. 10:52

§(324) (게송)조화무사부사력~ / 기도는 정성이 제일 / (게송)송백천년취~ / 참선, 기도가 둘이 아니다 / 의심관(疑心觀) / ‘관세음보살’하는 자기 음성을 자기가 관(觀)해.

 

몸과 마음이 한결같고 청정하고 정성스러우면 기도 시작할 때 이미 목적은 달성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기도(祈禱)하는 그 경건하고, 엄숙하고 간절한 그 마음을, 앞으로 살아가시는 1년 내내 하루도 퇴타함이 없이 방심함이 없이 그렇게 경건하게 엄숙하게 그리고 청정하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생활 속에서 참선(參禪)하는 참선 기도로 살아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화두가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그것을 관조(觀照)를 할 줄 알아야 돼. 의심관(疑心觀).

그러다가 그 의심이 희미해져서 없어져 버리거나, 딴 생각[別念]이 들어오면 그때 ‘이뭣고?’하고 또 챙기는 거여. 없어지면 챙기고 또 끊어지면 챙기고, 이리 되어야 하거든.

 

‘관세음보살’ 부를 때에는 음성을 고르게 하되, 자기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는 자기의 그 음성을 자기가 관(觀)하면서 해야 돼.

 

**송담스님(No.324)—87년 신수기도 회향(87.02.06) (용324)

 

 

(1) 약21분.

 

(2) 약 21분.

 

 

(1)------------------

 

조화무사부사력(造化無私不思力)이요  일일청청세한색(一一靑靑歲寒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장단대소재목전(長短大小在目前)한데  가소시인회부득(可笑時人會不得)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화무사부사력(造化無私不思力)이요. 자연의 조화, 천지의 조화가 사사로움이 없어. 사사로움이 없는 그 부사의력(不思議力)이다 그말이여.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알 수 없는 그런 위대한 힘이, 일일청청세한색(一一靑靑歲寒色)이다.  낱낱이 푸르고 푸르러서 세한(歲寒)의 빛이여. 누가 사람의 인조(人造)로 인력(人力)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아무도 인공(人工)으로 손을 대지 아니하는데, 자연의 이법(法)에 의해서, 불가사의한 그 힘에 의해서 소나무는 푸르고, 대나무도 푸르고, 산천에 초목이 각자 그 종류에 따라서 여러 가지 빛깔을 나투는데,

 

장단대소(長短大小)가 재목전(在目前)하건만,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고,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아서 형형색색으로 우리의 눈앞에 조금도 숨김없이 펼쳐져 있건마는,

가소시인회부득(可笑時人會不得)이다. 우습다, 모든 사람들이 그 숨김없는 적나라(裸)한 그 도리를 알지를 못하는구나.

 

 

오늘은 정묘년 정월 초아흐레 신수기도 회향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에 여러분께서는 7일 동안을 정말 정성껏 기도에 동참하시고 또 직접 기도에 참석을 하셔서 정성을 다해서 목이 쉬도록 정근(精勤)을 하셨습니다. 

 

기도 입재 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도는 정성(誠)이 제일인데, 정성이라 하는 것은 말로써 ‘이러 이렇다’ 이렇게 표현을 할 수는 없지만 구태여 말하자면,

첫째,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고 그리고 한결같아야 하고, 그리고 참된 그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이미 몸과 마음이 한결같고 청정하고 정성스러우면 시작할 때 이미 목적은 달성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3일이라든지 7일이라든지 또는 백일이라든지 천일기도, 만일기도 그렇게 기도 날짜를 많이 잡은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아니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억지로라도 참고 견디면서 노력을 하다보면 그 어느 땐가는 청정하고 일여하고 참된 생각에 부합(合)이, 계합이 되는 것입니다.  

 

자고(自古)로 기도를 정말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간절히 해서 성취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 어려운 일을 당해서, 중대한 일을 당해서 많은 분들이 기도를 여기서 저기서 모다 하시지만 기도했다고 해서 자기가 바라는 만큼 그때에 바로 성취 되냐 하면은 혹 된 사람도 있고, 안된 사람도 있고 혹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고,

그 사람과 그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과 모다 그런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서 한결같이 다 되지를 않는 것을 우리는 보고 또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데 그렇게 정성스럽게 했는데 기도가 성취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하느냐?

첫째는 자기의 정성이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냐, 그렇게 볼 수도 있고 또 정성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차라리 안되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루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 기도를 자기 목적을 성취함으로써 오히려 안된 것보다 더 해로울 때에는 그 기도 성취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이고 또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목적을 이루기커녕은 생각지도 않는 견디기 어려운 여러 가지 고통이 한목 몰아닥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금생, 내생, 저 내생까지 계속해서 그 좋지 못한 과보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말하자면 전생에 그러한 업(業)으로 그렇게 많은 고통을 받게 되어있는 삼생(三生)에 걸쳐서 받을 죄를,

금생에 신심껏 기도를 하고 그 공덕으로, 기도를 한 공덕으로 삼생에 걸쳐서 받을 것을 금생 일생 동안에 다 몰아서 다 받아 버리고 그리고서 이 다음 생에는 정말 큰 원을 성취하도록 그렇게 될 경우에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코앞에 조그만한 원(願)을 세워서 목이 쉬도록 기도를 했다가 그것이 이루지 못한다고 해서 불평을 하고 ‘그 기도해 봤자 소용이 없다. 나도 기도해 봤지만 그거 이루지도 못하더라’ 이러한 반감심(感心)을 갖고 불신을 하고 퇴타심(退墮心)을 낸다면 그 사람이 기도할 때 정성스러운 그 정도가 과연 어느 정도였었다고 하는 것을 짐작할 만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원했다가 큰 것을 바라지도 안 했는데 성취되는 수도 있고, 큰 것을 원했는데 조그만한 것이 우선 코앞에 이루어진 경우도 있고,

코앞에 전혀 이루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니 별로 소원을 이룬 것 같지도 않은데, 살아가면서 점점 신심이 돈독하고 모든 일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잘 풀려나가고 그러한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경우가 있어서,

 

그래서 이 기도라 하는 것은 청정한 몸과 마음 그리고 한결같은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기도를 하되 기도가 회향(廻向)을 했다고 해서 인자 빨리 자기 목적한 것이 돌아오기만을 급급하게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기도가 끝난 뒤에도 그 기도 때와 같은 그 정성스러운 행동,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한결같이 ‘이뭣고?’ 참선을 하면서 계속 정성스러운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다져 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기도 성취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받을 수 있는 그 자세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송백천년취(松栢千年翠)로되  불입시인의(不入時人意)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모란일일홍(牡丹一日紅)한대  만성공자취(滿城公子醉)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송백(松栢)은 천년취(千年翠)하되, 소나무와 잣나무는 천년 동안을 푸르르되,

불입시인의(不入時人意)요, 세상 사람들의 뜻에는 들지를 안 해. 별로 그렇게 소나무, 잣나무 그렇게 '좋다'고 '아름답다'고 별로 안 그런다 그말이여.

 

목단(牧丹), 모란(牡丹)은 하루 피었다가 시들어 버리는 하루 동안 밖에는 붉지를 않는데,

만성공자취(滿城公子醉)요. 모든 사람들은 그 목단이 꽃 가운데 왕이라고 그렇게 모다 좋아하고 칭찬을 하고 거기에 모다 반하더라 그말이지.

 

송백은 무루법(無漏法), 무루복(無漏福), 영원한 복에다가 비유한 것이고, 모란은 유루복(有漏福)에다가 비유한 게송(偈頌)입니다.

 

영원한 우리 생사해탈법은 한번 깊이 믿고 실천을 하면 당장 금생에부터 모든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벗어나는 그러한 참 좋은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로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지를 안 해.

 

물론 특수한 신심이 있는 사람은 모르되, 대부분의 사람은 별로 그것에 관심이 없고,

유루복(有漏福)—당장 부자가 된다든지, 높은 벼슬자리 벼슬을 한다든지, 부귀영화 모다 이런 해봤자 별 수 없고 또 뜻대로 얻어진다고 해도 영원성이 없는 그런 재산이나 명예, 권리 모다 그런 것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못 얻어서 야단이고 그것을 얻으면 거기에 빠져서 헤어날 줄을 모르고,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기도에 동참하신 여러분들은 과연 무루(無漏)의 복(福)을 원하셨는가? 또는 영원성이 없는 유루복만을 목적에다 두고 기도를 하셨는가?

또 저 궁극적 목표는 무루복에다 두되, 우선 당장 급해서 그래서 유루복에 원도 세우시고 하시는 분도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살아가는 것은 우선 당장 급한 것은 재산이요, 명예요, 권리요, 가족의 행복이요, 아들딸의 대학에 들어가는 일이요, 아무리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참선을 한다 해도 당장 코앞에 그 문제가 절박할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원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을 절대로 나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1년에 한 번 있는 신수기도에 동참을 해 가지고 정성을 다해서 기도를 하는 것도 참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어머니, 우리 할머니는 참선 밖에는 모르고 자식들이 대학에 가고 못한 것은 관심이 없다’ 이러한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되고, 또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가 자기 아들딸의 학교 문제에 관심이 없을 수가 없고, 우선 나중에야 어떻게 될망정 우선 대학에는 들어가 놓고 봐야 하는 것이고, 그놈이 대학엘 못 들어가면 어떻게 될 것이냐 그말이여.

 

그래서 기도를 일주일 동안 목이 쇠도록 그렇게—그 날씨가 상당히 강추위 했는데 그 눈을 뒤집어쓰면서 새벽기도부터서 모다 참석을 하시고, 대단히 참 감동을 했습니다.

 

그러한 이 신수기도 때와 같은 그러한 간절한 마음, 열렬한 마음, 그 추위도 무서워하지 않고, 편안히 자고 싶은 잠을 깨고 새벽에 날마다 이렇게 참석하신 그럴 수 있는 그런 정성이면 내가 나를 찾는 참선 공부에도 응당 그렇게 할 수 있는 저력(底力)이 있다고 하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처음~21분13초)

 

 

 

 

 

 

(2)------------------

 

부디 일주일 동안 기도(祈禱)하는 그 경건하고, 엄숙하고 간절한 그 마음을 앞으로 살아가시는 1년 내내 하루도 퇴타함이 없이 방심함이 없이 그렇게 경건하게 엄숙하게 그리고 청정하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생활 속에서 참선(參禪)하는 참선 기도로 살아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 동안에 일주일 간은 기도 참선을 하셨는데 앞으로 일 년간은 참선 기도—참선하면서 바로 그 참선이 기도가 되도록, 그 동안에는 ‘기도의 참선’을 했는데 ‘참선의 기도’를 하시라 그말이여.

 

그러면은 참선과 기도가 둘이 아니거든. 절대로 참선과 기도가 둘일 수가 없습니다.

참선을 하는 데에도 청정한 몸과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 한결같은 마음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기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참선도 역시 그러한 마음가짐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정성껏 할 수 있는 사람은 참선도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있고 또 평소에 참선을 열심히 하신 분은 기도 때가 되면 기도도 또한 그렇게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속담에 ‘국수할 줄 아는 사람이 수제비 못 끓여 먹겠느냐’ 그런 말이 있듯이 참선하나 제대로 할 줄 알면 기도고, 주력(呪力)이고, 경을 읽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참 훌륭하게 해 낼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에  일륜명월영청휘(一輪明月映淸輝)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부운엄단천인목(浮雲掩斷千人目)한데  득견항아면자희(得見姮娥面者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에, 저 만 리나 된 넓고도 긴 저 하늘에 비가 갰어.

일륜명월(一輪明月)이 영청휘(映淸輝)다. 한 바퀴 밝은 달이 밝고 맑게 빛나는데, 비가 오고 운무가 끼었을 때에는 그 달이 떠도 보이지를 않고 컴컴하니 그러다가 비가 쫙 개 가지고 그 새파란 하늘에 밝은 달이 휘영청 밝았다 그말이여.

 

부운엄단천리목(浮雲掩斷千人目)이여. 뜬구름이 한덩어리가 날아와 가지고 달을 가리워 버리니까, 모든 사람의 눈에 그 밝고 맑은 달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 구름이 가리워 버리니까 그 달을 보기가 어렵더라.

 

사실은 우리의 그 본성(本性) 마음자리는 부처님의 마음자리와 둘이 아니고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둘이 아니어. 우주의 진리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마음에 원하면 그것은 반드시 이르러 와서 얻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하고 원해도 잘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은 일념(一念)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나의 참된 마음과 그 어두운 부정적인 생각에 가로막혀서 장애를 받아가지고 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가로막는 것만 없으면 바로 원하는 대로 바로 그것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눈앞에 장벽만 없다면 몇백 미터고 저 앞을 다 볼 수 있지만 앞에 종이 한 장만 가로막혀 있어도 밖이 보이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기도와 참선 공부가 내나 서로 상통한 것이고 둘이 아니라’하는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정말 기도를 목이 쇠도록 큰 소리로 정근만 하면 그것이 정성을 다한 것이냐?

참, 기도가 쉬운 거 같아도 정말 이 기도가 참선과 똑같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 목청을 돋아서 한 시간, 두 시간 내지 네 시간을 불러대면 되냐?

 

어떻게 해야 기도를 참 정말 훌륭하게 하는 것이 되는 것이냐?

 

‘관세음보살’ 부르면서도, 입으로는 ‘관세음보살’ 부르고 목이 터지도록 부르면서, 그렇게 부르는 속에도 우리의 생각은 계속 집안일도 생각하고, 과거 일도 생각하고, 어릴 적 일도 생각하고, 이일 저일 할 것은 다 합니다.

그 ‘관세음보살’ 부를 때는 오직 관세음보살만을 불러야 되겠는데, 입으로는 관세음보살 외치면서 속으로는 온갖 잡념 망상이 조금도 거침없이 왔다갔다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거든. 기도를 해 보면서 가만히 자기 스스로를 이렇게 관조해 보면 알 수가 있고, 그것을 경험을 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기도를 하면서 탁자 위에 촛불이라든지, 향이라든지 또는 청수 그릇이라든지 또는 탁자 위에 모신 부처님 눈, 코, 입이라든지 이런걸 보면서, 입으로는 외치면서도 그 눈으로 보이는 그런 것들에 계속 우리의 생각이 그런 데로 다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촛불이 크게도 보였다, 작게도 보였다, 자기 앞으로 가까이도 보였다, 멀리도 보였다, 부처님 얼굴도 이렇게 우러러 보면서 정근을 하면 부처님 얼굴이 이리 변했다, 저리 변했다, 가까이 왔다, 멀어졌다 야단이거든. 단 1분 1초도 정말 망상이 없이, 번뇌가 없이 깨끗하게 정진이 되어 가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할 때 눈으로 보이는 부처님 얼굴에다가 집중을 하는 것이 좋으냐? 훨훨훨 타고 있는 촛불에다가 눈을 대고 하는 것이 옳으냐? 무엇을 어디다가 우리의 눈을 고정하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

 

대단히 이것도 참선할 때에 덮어놓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계속 그렇게 하는 것을 그 참선을 잘한다고 할 것이냐?

‘참선을 어떻게 해 나가야 올바르게 하느냐?’한 것과 똑같이, ‘기도도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하는 것이냐?’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참선은 그저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아주 그 관세음보살 부르듯이 ‘이뭣고?’를 계속 끊임없이 찾고 또 찾고, 찾고 또 찾고, 물론 처음에 시작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 밖에는 없고 그렇다고 하되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을 가면서는 그렇게 화두를 염불하듯이 그렇게 자꾸 들먹이는 것이 아니에요.

 

‘이뭣고?’한 그 알 수 없는, ‘이뭣고?’했을 때 그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이 있을 때에는 그 의심을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그 의심을 관(觀)해 나가야지,

거기다 대고 이미 화두가 없어지지 않고, 화두에 대한 의심이 있는데도 거기다 대고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래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어린애, 애기 잠재울 때 잠 막 잘라고 한 놈을 더 잘 자라고 가슴을 턱! 턱! 때리는 거와 마찬가지거든 그게.

 

그러니 화두가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그것을 관조(觀照)를 할 줄 알아야 돼. 의심관(疑心觀).

그러다가 그 의심이 희미해져서 없어져 버리거나, 딴 생각[別念]이 들어오면 그때 ‘이뭣고?’하고 또 챙기는 거여. 없어지면 챙기고 또 끊어지면 챙기고, 이리 되어야 하거든. 그래서 그 관(觀)이, 의심관(疑心觀)이 그것이 공부해 나가는데 아주 중요한 것이여. 

 

이 관세음보살도 목이 터지도록 막 부를 것이 아니라 적당한 음성으로,

물론 여기서 목탁을 치면서 여러 사람이 정근할 때에는 자기도 소리를 내어서 같이 그 음성과 음성이, 내 음성과 다른 사람 음성이 혼연일치(致)가 되어서 전체 동참 대중이 한마음이 되어야 하거든.

자기 혼자 어디 가서 한 것 보단 여러 사람이 모여서, 여러 사람의 마음이 정성도 하나요, 그 정근하는 음성도 그 목탁에 맞춰서 하나가 되어야 하거든.

 

어떤 사람은 (음을 아주 낮게)‘관세음보살’하는데, 어떤 사람은 (음을 고음으로)‘관세음보살’ 이래 가지고 한 사람은 크게 하고 작게 하고, 한 사람은 더디게 하는데, 한 사람은 늘어져 쳐지게 하고 도저히 그래서는 안되거든.

목탁을 치면은 그 목탁 소리에 저 법당에 가득한 그 동참제자가 한마음 한뜻이 되고, 음성도 같이 이렇게 나가야 되거든.

 

우리가 남북통일을 바라는데 한 사람이 바란 것 보다는 전 국민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통일을 염원하고, 통일을 위해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혼연일치가 될 때에 우리의 생활도 달라지고 나라에 대한 충성도 달라지고 모든 면에서 다 나날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마침내 통일 성업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칠일 동안의 기도도 모든 점에 있어서 전 동참재자가 한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한마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입재 법요식도 하고 또 시간도 맞추고 또 병법(秉法) 스님이 나서서 목탁도 치면서 같이 하고, 이것이 바로 전 동참제자로 하여금 한결같은 마음, 한덩어리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구태여 추운 새벽같이 오시지 않고 집에서 해도 기도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원근에서 그 바쁘고, 춥고 하는 데도 불구하고 나오신 것은 여러 사람이 같이 마음을 합해서 하는 데에서 몇백 배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 부를 때에는 음성을 고르게 하되, 자기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는 자기의 그 음성을 자기가 관(觀)하면서 해야 돼.

생각은 딴 데 가 있고, 눈은 눈 앞으로 보는 데에 제멋대로 요리 갔다 저리 갔다 하고, 목소리만 크게 불렀지 조금도 그것이 경건성이 없이 부른 것은 그 목만 쉬었지 정말 기도의 참된 경계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목소리를 참 경건하고 엄숙한 저 뱃속에서 부터서 울려 나오는 그 정성스러운 음성 소리로 해야 하거든. 그래 가지고 자기의 목소리를 자기가 관(觀) 해.

 

다른 사람 목소리를 들을 것이 아니고 ‘아이고, 저 사람 목소리도 되게 크다’ 다른 사람 목소리를 듣지 말고, 자기의 음성을 들어야 되요.

자기의 음성을 들으면서 ‘관세음보살’하면 눈을 떴으되 딴 것이 보이지를 않고, 귀가 열렸으되 다른 소리가 들리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한결같이 한다면 가장 여법(如法)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탁은 너무 늘어지게 쳐도 힘이 들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빨리 쳐도 숨이 가빠서 따라갈 수가 없고, 그런데 처음에는 느릿느릿 쳐도 점점 10분, 20분, 30분 이렇게 해 가다보면 열기가 올라가지고 약간은 빨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빨리 하는 것은 너무 숨이 가쁘고 그러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이 대체적으로 한결같은 것이 좋은데, 하다보면 좀 빨라져요.

 

그렇게 해서 하여간 일주일 동안을 내가 법당에 올라와서 참석은 안 했지만 계속해서 나도 그 기도에 참석을 했고, 기도 정근하는 소리와 목탁 소리를 계속 나도 거기에 마음을 합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에 기도가 얼마만큼 정성스럽게 잘 진행이 되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반드시 크고, 작은 여러분 각자의 소원이 성취가 되실 것이고, 또 그런 유루의 복은 말할 것도 없고, 나아가서 무루의 대원(大願)까지 연결이 되어서 기도 성취는 정말 원만히 성취가 되시리라고 나는 확신(信)을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확신을 하십시오. 그 원이 빨리 이루어지고 더디 이루어지고 하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확신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목적이 달성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또 정월 대보름이 한 오륙일 남았습니다. 대보름에 해제 법요식과 백일기도 회향 법회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계속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시는 분은 기도를 하시고 또 참선기도 하시는 분은 참선을 열심히 하셔서 백일기도 회향 때 또 해제 법회도 참석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21분15초~42분1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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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조화무사부사력~’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11권 421칙 ‘백수(栢樹)’ 진정문(眞淨文) 게송 참고.

*부사의(不思議) ; 불가사의(不可思議). 불보살의 해탈, 지혜, 신통력이 헤아릴 수 없다는 말.

*불가사의(不可思議)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는 오묘한 이치 또는 가르침을 뜻하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상태를 일컫기도 한다.

*세한(歲寒) ;  전후  추위라는 으로 심한 한겨울 추위 이르는 .

*적나라(裸)하다(실상이나 감정)있는 그대로  드러나 더이상 숨김 없다.

*정근(精勤) ; ①쉬거나 게으름 피우지 않고 이나 공부 아주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힘써 일하는 것. ②기도를 할 때 별념(別念)이 없이 일심으로 불보살의 명호를 염불하는 것.

*자고(自古)로로부터 내려오면서.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회향(廻向) ; 회전취향(回轉趣向)의 뜻. ①방향을 바꾸어 향하다. ②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 이익을 주려하거나 그 공덕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함. ③자신이 지은 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베풀어 그 중생과 함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함.

*이뭣고(是甚麼) ; 「이뭣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찾는 것이다.

*(게송) ‘송백천년취~’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11권 421칙 ‘백수(栢樹)’ 묘지곽(妙智廓) 게송 참고.

*모란(牡丹)작약과의 낙엽 활엽 관목높이는 2미터 정도이고 가지는 굵고 이 없으며은 크다.

늦봄에 붉고  이 피는데 꽃빛은 보통 붉으나 개량 품종에 따라 흰색붉은 보라색검은 자주색누런복숭앗빛을  흰색 따위의 여러가지가 있다.

*목단(牧丹) ; 모란(牡丹).

*무루법(無漏法) ;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마음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 상태. 사제(四諦) 가운데 깨달음의 결과인 멸제(滅諦)와 그 원인인 도제(道諦)에 해당하는 모든 현상.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도인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 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써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생사윤회(生死輪廻)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저력(底力)으로 간직하고 있는 밑바탕 든든한 .

 

 

 

 

 

 

 

------------------(2)

 

*기도(祈禱) ;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 중생을 이롭게 하는 불보살의 자비)를 받들어 재앙을 피하고, 복(福)을 더하도록 기도하는 것.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주력(呪力) ; 진언(眞言)·다라니(陀羅尼)로 하는 기도. 진언(眞言)·다라니(陀羅尼)의 효과.

*(게송) ‘만리장공우제시~’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11권 421칙 ‘백수(栢樹)’ 불감근(佛鑑勤) 게송 참고.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일념(一念) ; 

*번뇌(煩惱) : 망념(妄念)이라고도 하는데,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는 정신작용의 총칭.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딴 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혼연일치(致)완전히 하나 일치함.

*병법(秉法 잡을 병,법 법)사찰에서 의식의 진행을 담당하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확신( 굳을 확,믿을 신) ;  믿음또는 그러 신념.

Posted by 닥공닥정
활구참선 최상승법2014. 7. 28. 17:16

§(337) (게송)적수성동신유지~, 심수만경전~, 청군앙면간허공~ / 중생의 모든 희로애락이 바로 그곳이 선불장(選佛場) / 자기 소임을 하면서 거기에 즉해서 '이뭣고?'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은 분명 그것이 중생의 생각이지만, 그 중생심을 버리지 아니한 채 바로 화두(話頭)로 돌이켜 버리면, 그것이 바로-거기서 생사심(生死心)이 끊어져 버리고 깨달음으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된다.


번뇌나 망상을 없앨려고 허면은 더욱 일어나는데, 없앨려고 허지 말고 끊을려고 허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거기에서 화두를 들고 나아가면, 끊을려고 허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번뇌가 끊어져.


**송담스님(No.337) - 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용337)

 

(1) 약 14분.

 

(2) 약 13분.

 


(1)------------------

 

적수성동신유지(滴水成凍信有之)하고  녹양방초색의의(綠楊芳草色依依)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추월춘화무한의(秋月春花無限意)여  불방한청자고제(不妨閑聽鷓鴣啼)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적수성동신유지(滴水成凍信有之)나  녹양방초색의의(綠楊芳草色依依)로다.
방울 물이 얼음을 이룬다 그말이여. 엄동설한에 물방울이 똑 떨어지면은 떨어지자마자 탁 얼어버리고 또 물방울이 떨어지면 떨어짐과 동시에 얼어버리고. 그러헌 진리가 진실로 있어. 사실 그런 것이로되,

녹양방초색의의(綠楊芳草色依依)여. 푸른 버드나무와 향그러운 꽃이 그 색이 아름답고 아련하다.

엄동설한에는 그렇게 꽁꽁 얼어붙어 가지고 물방울마다 얼어가지고, 결국은 흐르는 강물도 온통 전체가 얼어붙어서 흘러가는 물을 볼 수가 없으나,
어느덧 소한·대한이 지내고 입춘·우수가 돌아오면 그 꽁꽁 얼어붙었던 강물과 온 천지가 녹아가지고 푸릇푸릇 새싹이 돋아온 것이다 그말이여.

강물이 얼어붙고 온 산천이 꽁꽁 얼어붙을 때에는 풀 한포기 이파리 하나 푸른 빛깔을 볼 수가 없지만 봄이 돌아오면은 푸릇푸릇 새싹이 돌아오고 누른 꽃도 피고 빨간 꽃도 피게 된다 그말이여.

이 진리 체(體)에 입각해서 본다면 입으로 가히 설할 법이 없고 귀로 가히 들을 수 있는 법이 아니지만, 그러나 백척간두(百尺竿頭)에 한 걸음을 내려디디면 거기에는 무수방편(無數方便)이 다 이 한 일을 위해서 설해지는 것이여.

부처님께서 녹야원(鹿野苑)에서 법(法)을 설하시기 시작해 가지고, 발제하(跋提河)에서 열반에 들으실 때까지 팔만사천 법을 설하시고도 마지막에 가서는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팔만사천 법을 설하시고도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셨으니, 그러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이 있느냐?’할 때에 ‘설한 바가 있다’고 한다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고, ‘설한 바가 없다’고 한다면 경을 비방하는 것이여. 법을 비방한 것이다 그말이여.

설하시고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시고, 설한 바가 없다고 하시면서도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엄동설한이 세월이 지나가면 다시 새싹이 나서 잎이 피고 꽃이 피는 도리.

추월춘화무한의(秋月春花無限意), 가을에는 휘황창 달이 밝고 봄에는 울긋불긋 아름다운 꽃이 피는 거기에 한없는 뜻이 있다 그말이여. 한없는 그러한 현상 속에 무한한 뜻이 그 속에 들어있어.

그러기 때문에 불방한청자고제(不妨閑聽鷓鴣啼)여. 한가히 자고새 우는 소리를 듣는 것이 방해롭지 않다. 봄이 돌아와서 잎이 피고 꽃이 피면은 그 꽃이 향기로운 속에는 자고새란 새가 그 노래를 하는데, 그 자고새 노래 소리를 듣는 것이 방해롭지를 않더라.

오늘 정묘년 칠석날을 맞이해서 방금 조실스님의 녹음 법문을, 그 어느 해 칠석날에 설하신 녹음 법문을 사부대중은 경청을 했습니다.
구구절절이 그 감동에 넘치는 그 간곡한 법문을 듣고 바로 12년 전에 열반허셨던 전강 선사(田岡禪師)께서 바로 이 법상에서 육성으로 실지로 설하신 거와 같이 그렇게 낭랑(朗朗)하게 그렇게 법문을 설해 주셨습니다.

칠석날이라 허면은 모든 신남신녀들이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조촐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와서 모두 복을 빌고 명을 빌고 소원을 빌어왔습니다.
저 신라·백제 때부터 다 칠성단(七星壇)에 기도를 허고, 칠성단에 공양을 올리면은 업장이 소멸이 되고 수명장수허고 복덕이 구족허고, 아들이 없는 사람은 아들을 낳고, 돈이 없는 사람은 부자가 되고, 모든 소박한 우리 인간의 모든 소원을 빌어오는 그러헌 유서(由緖) 깊은 날입니다.

그날에 조실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설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기도를 하고 어떻게 복을 빌고 하면 부자가 되고 수명장수 하고 복덕이 구족하느냐? 그런 말씀은 한 말씀도 허시지 아니허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최상승 법문을 설해 주셨는데,

그 법문 가운데에 “중생의 모든 중생심을 버리고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衆生)의 마음 - 희로애락과 탐진치 삼독(三毒) 그러헌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허는데 그 마음을 버리고 그래 가지고 청정한 어떠헌 부처님 마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 마음이 일체 경계를 따라서 마음이 이렇게 굴러 가는데,
전처실능유(轉處悉能幽)다. 그 굴르는 곳마다 다 능히 유심(幽深)하다, 깊숙하다.

중생은 경계를 보고 무슨 소리를 듣고 그러면은 그 경계에 따라서, 그 색상 따라서, 거기에 상응해서 온갖 생각이 일어납니다.

 

슬픈 일을 보면은 슬퍼허고, 기쁜 일을 보면은 기뻐허고, 희로애락에 따라서 경계 따라서 온갖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 경계 따라서 일어나는 그 마음이 그 경계를 여의고 깨달음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경계에 즉해서 자기 본성품을 봐 버리면(隨流認得性) 기뻐헐 것도 없고 근심헐 것이 없다(無喜亦無憂).
우리가 모다 공부를 해 나가는데 가장 중요헌 요점인 것입니다.

중생은 경계에 따라서 온갖 마음이 일어나되, 일어나는 그 마음으로 인해서 둘째 생각 셋째 생각 넷째 생각 해서 점점점점 그 생각이 변해서 발전해 가지고 결국은 한없는 업(業)을 짓게 됩니다.
그 생각이 얼굴에 표현이 되고 행동으로 나타나 가지고, 조그마한 '한 생각'이 동함으로 해서 그 생각이 결국은 행동으로 나타나 가지고 큰 업을 짓게 돼.

그러허기를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그렇게 해왔고, 현실적으로도 그렇게 해오고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이 최상승법,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그 생활해 나가는데 있어서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물론 참선헌 사람이라 하드라도 눈으로 무엇을 보면은 아, 저것은 붉다·누리다·빨갛다, 저것은 사람이다·개다, 그런 것을 느끼지 아니헌 것은 아니여. 느끼되, 그 느낌이 다음 생각으로 발전하기 전에 ‘이뭣고?’하고 화두를 턱! 들어 버린다 그말이여.

그러기 때문에 일어나는 그 한 첫 생각은 분명 그것이 중생의 생각이지만, 그 중생심을 버리지 아니한 채 바로 화두(話頭)로 돌이켜 버리면, 그것이 바로 - 거기서 생사심(生死心)이 끊어져 버리고 깨달음으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된다 그말이여.

이것이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 공부를 한 사람과 이 최상승법을 믿지 아니허고 그냥 마구 살아가는 사람과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처음~14분17초)

 

 

 

 


(2)------------------

 

청군앙면간허공(請君仰面看虛空)하라  확락무변불견종(廓落無邊不見蹤)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해전신사자력(若解轉身些子力)하면  두두물물총상봉(頭頭物物總相逢)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청군앙면간허공(請君仰面看虛空)이라. 청컨댄 그대는 머리를 들고 저 허공을 보아라.
확락무변불견종(廓落無邊不見蹤)이다. 확 트여서, 갓이 없이 트여가지고 그 자취를 볼 수가 없느니라.

약해전신사자력(若解轉身些子力)허면, 만약 거기에서 몸을 뒤치면, 몸을 돌리면,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총상봉(總相逢)이다. 일체 두두물물이 모두가 다 '그'더라. 모두를 거기에서 다 만날 수가 있더라. 모든 이치를 거기에서 다 볼 수가 있더라.

화두를 들어서, 들고 또 들고 해서 들어갈수록 알 수가 없다 그말이여. 꽉 맥혀서 알 수가 없어. 한 달, 두 달, 석 달, 1년, 2년, 3년, 4년, 해 갈수록 답답허고 알 수가 없어.
알 수가 없지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을 향해서 화두를 관조(觀照)해 나갈 따름이거든. 거기에서 망상을 끊을려고 허지 않아도 망상이 끊어지고, 번뇌를 끊을려고 허지 않아도 거기서 번뇌가 끊어져.

번뇌나 망상을 없앨려고 허면은 더욱 일어나는데, 없앨려고 허지 말고 끊을려고 허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거기에서 화두를 들고 나아가면, 끊을려고 허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번뇌가 끊어져. 오직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허다 그말이여.

순일무잡해서, 그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한 그 경계는, 그 맑고 깨끗하고 고요허고 순수무잡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헐 수가 없어.
거기서 한 생각 더디 의심하면, 한 생각 의심을 놓치면 - 좋다느니, 편안하다느니, 맑다느니 - 딴 생각을 거기서 먹게 되면 찰나(剎那)간에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지는 것이여.

깨달음을 기다리지도 말고, 누가 깨닫게 해주기를 바라지도 말고, 영원히 그런 상태로 계속 되었으면 허는 그런 생각도 헐 필요가 없어. 알 수 없는 화두만을 끝없이 관조해 나가.

행주좌와 어목동정 간에 걸어갈 때나, 앉았을 때나, 누워서나, 차를 탈 때나, 일을 할 때나, 가정에서 살림을 헐 때, 살림을 허게 되면 살림, 설거지를 허게 될 때나, 장사를 허거나, 무슨 밥을 짓거나 찌개를 끓이거나, 똥을 누거나, 옷을 입거나, 빨래를 허거나, 무엇을 허거나 상관이 없어.

가정에서 생활을 하고 직장에서 생활을 하다 보면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고 속상하는 일도 있고 걱정스런 일도 있겠죠.
바로 그 기쁜 일이 있을 때에는 기쁜 일을 당한 그 자리에서 ‘이뭣고?’ 슬픈 일을 당허면 슬픈 일을 당한 바로 거기에 즉해서 ‘이뭣고?’ 오늘같이 칠석날을 당허면은 칠석날을 당해서 목욕재계허고 와서 동참을 허고 이렇게 법요식에 참석허면 바로 거기에서.

 

그렇게 살아가면 중생의 모든 희로애락이 바로 그곳이 선불장(選佛場)이고.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기복(祈福)불교는 안 믿는다. 그까짓 무슨 복을 빌고, 무슨 소원을 빌고. 인간의 흥망성쇠 재산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나 또는 음식이나 명예나 세속의 모든 안락이 그까짓 것이 하루아침 꿈에 지나지 못헌데 얻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
그까짓 것 빌어서 뭐해? 자식도 다 꿈속에서 만난 한 꿈속의 인연이요, 부귀영화도 그까짓 것 한평생 잠깐 왔다 가버리는 그까짓 것을 얻으면 무엇허고 잃으면 무엇해?’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복도 빌지도 않고 칠석에도 동참(同參)도 허지도 않고, ‘나는 오나가나 참선 뿐이다. 「이뭣고?」면 그만이지. 그밖에 무엇을 구헐 것이 있어?
구해 봤자 무슨 얻어져 봤자 그거 몇 조금 가냐? 인생 칠십이 하루아침인데 죽어 갈 때 가지고 갈 무슨 소용이 있느냐? 오직 나는 「이뭣고?」뿐이 없다.’

 

이렇게 나간다면, 그런 사람이 만약에 있다면 그건 참 대발심(大發心)을 허고 인간을 완전히 체달(體達)해 버린 사람이지.

슬퍼도 「이뭣고?」 기뻐도 「이뭣고?」 뭐 집안이 흥해도 「이뭣고?」 망해도 「이뭣고?」 뭐 누가 죽어도 「이뭣고?」 태어나도 「이뭣고?」 좋아헐 것도 슬퍼헐 것도 말 것도 없다.

 

그렇게 전체가 오직 「이뭣고?」 하나로 딱 되어 가지고 산을 봐도 산일 줄 모르고, 물을 봐도 물인 줄 모르고, 남편을 봐도 남편인 중도 모르고, 자식을 봐도 자식인 줄도 모르고, 이렇게 되어 버렸다면, 그리고 오직 자나깨나 「이뭣고?」 하나 밖에 안 되았다면 그 사람에게는 언어가 끊어져 버려, 시비가 끊어져 버려.
그렇게 되아버렸다면 불일성지(不日成之)여. 그 사람은 며칠 안 가서 언제 툭 터질런지를 몰라, 그런 사람은.

그렇게 실지로 된 사람이 있다면. 승속을 막론허고 그렇게 되어 버렸다면은 그건 누가 그 사람 보고 이래라저래라 시비헐 것이 없어요.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면은 그런 사람이야말로 신심과 분심과 의단이 이 삼요(三要)가 일시에 폭발헌 사람이라.

그렇게 되지 못해서 한(恨)이여. 출가해서 10년 20년 공부해도 그렇게 되지 못하기 때문에 금일야임마(今日也恁麽) 명일야임마(明日也恁麽)거든.

그렇게 되는 것 밖에 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면 선방에서는 선방의 법도(法度)가 있고, 가정에서는 가정의 법도가 있어. 사회에 나가면 사회의 법도가 있는 법이여.
그래서 그 법도에 따르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그 속에서 항상 일부러 마음을 일으켜서라도 「이뭣고?」를 해야 되는 것이여.

 

그렇게 애를 쓰고 또 애를 쓰고 허다 보면은 아까와 같은 그러헌 타성일편지경(打成一片之境)이 오는 것입니다.

타성일편지경에 오지도 않으면서 ‘나는 참선을 허니까 운력도 나는 안 한다. 나는 참선을 허니까 예불도 안 한다. 나는 참선 허니까 법당에 갈 것도 없다.’
또 ‘참선을 허니까 나는 그까짓 거 기복불교 허지 아니허고 참선만 헌다. 난 절에도 갈 필요도 없다. 참선 밖에 더 있냐.’ 이렇게 헌다면 그것은 조금 옳은 것 같은데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참의심(眞疑)'이라 하는 것은 '주작(做作)이 끊어진 자리'인 것입니다.
주작(做作)이라 하는 것은 '지을 주(做)자, 지을 작(作)자' 지어서 하는 것, ‘지어서 한다’는 것은 속은 그렇지 못허면서 겉으로 그렇게 헌 것처럼 꾸미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놓여진 자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이 있습니다. 방부를 들이고 방(榜)을 짜면 각기 소임을 맡듯이 이 가정에서도 소임이 있어.
엄마로서의 해야 할 소임, 아내로서 해야 할 소임, 또는 아들로서 해야 헐 소임, 딸로서 해야 헐 소임, 시어머니로서 해야 헐 소임, 며느리로서 해야 헐 소임, 학생으로서 해야 헐 소임, 회사나 관공서의 직원으로서 해야 헐 소임이 있습니다.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을 최소한 허면서 거기에 즉해서 「이뭣고?」를 해야 허는 것입니다.

분심(憤心)과 의심(疑心)과 신심(信心)이 한목 폭발한 상태도 아니면서, 소임도 아니하면서 소임을 포기하고 ‘불법을 믿네, 참선을 헙네’하고 그럭저럭 그렇게 나가면 그것은 꼴불견인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바른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사람은 참선을 바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최상승법을 옳게 실천해 나간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까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이요 전처실능유(轉處悉能幽)’도 역시 그것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36분28초~49분5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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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적수성동신유지~’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백척간두(百尺竿頭 일백 백, 자 척, 장대 간, 머리 두) ; ①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 올라섰다는 뜻으로, 몹시 어렵고 위태로운 지경을 이르는 말. ②모든 상대적 차별을 없앤 절대의 경지.
*무수방편(無數方便) ; 헤아릴 수 없이(無數) 많은 방편.
*녹야원(鹿野苑) ; 석가(釋迦)가 35세에 성도(成道)한 후 최초로 설법을 개시한 곳이며, 이때 교진여(僑陳如) 등 5명의 비구(比丘)를 제도(濟度)하였다.
갠지스 강 중류, 지금의 바라나시(Varanasi, 베나레스 Benares)에서 북동쪽 약 7㎞ 지점에 있는 사르나트(Sarnath)의 유적이 곧 녹야원의 터. 사슴동산(녹야원), 즉 사르나트(Sarnath)는 산스크리트어로 ‘사슴의 왕’을 뜻하는 ‘사란가나타(Saranganatha)’가 줄어든 말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우루벨라(uruvelā) 마을의 붓다가야(buddhagayā)에서 녹야원까지는 직선 거리로 약 200㎞됨.
탄생(誕生:룸비니) ·성도(成道:붓다가야) ·입멸(入滅:쿠시나가라)의 땅과 더불어 불교(佛敎) 4대 성지의 하나.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발제하(跋提河) ; 석가모니가 열반한 쿠시나가라 옆에 흐르는 강의 이름.
*칠성단(七星壇) ;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신격화한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모신 단. 칠성에 대한 신앙은 특히 중국의 도교에서 발달하여 이후 ①불교에서 칠성은 호법선신(護法善神)의 하나로 수용되었고 ②민간에서는 특히 수명과 재복을 관장하는 신으로 믿어졌다.
*유서(由緖) ;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까닭과 내력.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함령(含靈)• 함식(含識)• 군생(群生)• 군맹(群萌)•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성냄, 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게송) ‘심수만경전~’ ; [직지(直指)] (白雲和尙 抄錄, 조계종출판사) 63쪽 마나라(摩拏羅) 존자 게송 참고.
*유심(幽深)하다 ; 깊숙하고 그윽하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善業)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생사심(生死心) ;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2)

 

*(게송) ‘청군앙면간허공~’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참고] 위의 야부도천 게송을 함허 스님이 설의(說誼)한  ‘정체종래절성색~’에 대한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두두물물(頭頭物物) ; 온갖 사물과 현상.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①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②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
*체달(體達) ; 사물의 진상을 통달함.
*금일야임마(今日也恁麽) 명일야임마(明日也恁麽) ; 오늘도 그럭저럭 내일도 그럭저럭.
*법도(法度) ; 생활상의 예법과 제도(制度)를 아울러 이르는 말.
*타성일편(打成一片) : 좌선할 때 자타(自他)의 대립이 끊어져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경계.

Posted by 닥공닥정
참선(자세 호흡)2014. 7. 6. 12:38

§(455) 계행(戒行) / 단전호흡, 상기병 주의 / 화두 드는 법 / 화두 가운데에 가장 처음, 가장 근원적인 화두가 시삼마(是甚麼) 화두, ‘이뭣고?’

단전호흡은 항상 자연스럽게 무리가 없이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정법,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몸 건강해 가지고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여.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참나’를 깨닫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거든.

 

참선을 해 나가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잘 여법하게 하면서 화두를 드는데, 이 화두 드는 것이 참선의 요점이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송담스님(No.455)-91년 9월 첫째일요법회(91.09.01)에서. (용455)


약 15분.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을 받아 가지고 그 화두를 여법(如法)하게 참구해 나가는 것, 그것 밖에 없지마는, 그래도 공부를 바르게 해 나갈랴면은

첫째, 계행(戒行)을 지켜야 한다. 계행을 지키되 계상(戒相)에 집착함이 없이 계상에 떨어지지 않고 계를 지키고,
또 화두를 참상(參祥)하되, 간절한 의심으로 참구를 한답시고 막 용을 쓰면서 억지로 눈썹 미간을 갖다가 찡그리면서 억지로 파고 들어가면 상기병(上氣病)에 십상(十常) 걸리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되, 맨 처음에는 폐 속에 들어있는 호흡을 전부 다 내뿜어. 다 내뿜은 다음에 또 스르르르 들어마셔. 들어마셨으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참았다가 또 후~ 하고 다 내뿜어버려. 다 내뿜은 다음에는 또 스르르르 들어마셔.

 

이렇게 하기를 두 번 내지 세 번을 해서 허파 속에 들어있는 묵은 공기를 다 청소를 해낸 다음에, 그때부터서 본격적으로 단전호흡을 하는데,
들어마시는 호흡 약 3초, 3초 동안에 스르르르 들어마시고, 또 들어마신 다음에 딱 정지를 해. 호흡을 정지하기를 약 3초 동안 정지를 했다가 또 내쉴 때도 약 3초 동안 걸려서 내쉬고,

내쉰 다음에 약 3초 동안 또 정지를 하고, 그렇게 해도 좋지만 내쉬는 시간을 아주 미세하게 조용하게 가늘게 주욱 내쉬다 보면은 한 4초나 5초 이렇게 되니까, 다 내쉰 다음에 특별히 정지할 것이 없이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가늘게, 조용하게 내쉬면 되는 거여.

그래서 다 내쉬면 또 들어마시는 시간 3초, 들어마셔 가지고 정지하는 시간이 3초, 그래가지고 내쉬는 시간은 조용하게 미세하게 길게 내쉬다 보면 내쉬는 시간은 약 4~5초 이렇게 걸리도록.

그런데 처음에 준비 호흡을 할 때에는 더이상 들어마실 수 없을 만큼 가득 들어마시고, 또 정지하는 시간도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참았다가, 또 내쉬는 것도 더이상 내쉴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다 내쉬지만,

이 정식 본(本) 단전호흡에 들어가서는 그렇게 가득 들어마셔도 안 되고, 너무 오랫동안 억지로 참아도 안 되고, 내쉬는 시간도 너무 완전무결하게 다 내쉴라고 해서는 안 돼.

왜 그러냐? 그러면 땀이 나고 무리가 가서 몇 분 안 가서 헛숨을 쉬어야 하고 그러니까, 절대로 이 준비호흡은 그렇게 철저하게 들어마시고 철저하게 내쉬고 하지만,
본(本) 단전호흡에 가서는 8부만 들어마시고 또 3초 동안만 정지했다가 내쉬는 것도 8부 정도만 내쉬어. 더 내쉴 수 있지만 완전히 다 내쉴라고 하면 안 된다.

그것을 잘 알고 해야지, 덮어놓고 무리하게 하면은 너댓 번도 못해서 등어리에 땀이 나고 하는데,
혹 겨울에 너무 춥거나 또 음식을 먹은 것이 소화가 잘 안되고 체했을 때에는 이 준비호흡과 같은 그러한 호흡을 다섯 번 내지 열 번을 하면 등어리에 땀이 나면서 트림이 나오면서 체한 것도 툭 터지는 거여.

그러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전호흡은 항상 자연스럽게 무리가 없이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조실 스님 녹음 법문에 병이 안 나고 참 묘(妙)하게 공부해 나가는 법이 바로 이 단전호흡에 관한 말씀인데 좀 이렇게 자세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단전호흡도 중요하지만은 단전호흡 하나만 하고 화두를 안 하면, 그것은 몸은 건강해지고 정신 집중력도 생기고 여러 가지로 살아가는데 좋고 하지만,
화두가 없이 밤낮 단전호흡만 하면,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신선이 되려고 하는 도교의 그런 사람들이 밤낮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법,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몸 건강해 가지고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여.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참나’를 깨닫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거든.

‘참나’를 깨달라 가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인데,

이 몸뚱이만 가지고 삼백 년... 팽조라는 사람은 칠백 년까지도 살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지마는, 이 몸뚱이는 인연 따라서 장수(長壽)한 사람은 장수하고 6~70 살 사람은 살고 그런 것이지, 이 몸뚱이로 오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돼.

그러나 사는 날까지 건강은 해야 한다 그말이여. 사는 날까지 건강하고, 건강해야 참선도 마음껏 할 수가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 단전호흡을 하기는 같은 방법으로 한다 해도 목적이 다르다 그말이여.

이 참선을 해 나가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잘 여법하게 하면서 화두를 드는데, 이 화두 드는 것이 참선의 요점이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선방에 들어와서 참선을 하는 스님네나 또 보살님 10년 20년씩 선방에 다녀도 이 화두를 여법하게 들 줄 알기가 어렵다.

‘이뭣고?’ 또는 아까 조실스님께서 말씀하신 판치생모(板齒生毛), 무자(無子) 화두나 문헌에 오른 화두만 해도 천칠백 개가 넘는데 그 천칠백 개나 되는 화두 가운데에 가장 처음 화두, 가장 근원적인 화두가 시삼마(是甚麼) 화두여. ‘이뭣고?’

‘이뭣고?’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 부르면 대답할 줄 아는 놈, 욕하면 성낼 줄 아는 놈,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아는 놈, 눈으로 보면은 저것이 꽃이다·새다·나비다, 그 아는 놈.
귀로 들을 줄 알고, 코로 냄새 맡을 줄 알고, 혀로 맛볼 줄 알고,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알고, 그러할 줄 아는 놈이 다 사람마다 다 있다 그말이여. 그것이 나의 주인공(主人公)인데, 그놈을 찾는 것이거든.

그 주인공이 분명히 이 몸뚱이에 딱 주재하고 있으면서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기도 하고, 귀를 통해서 모든 것을 들을 줄도 알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모든 육체적인 작용, 정신적인 작용을 하는...
차로 말하면은 운전사와 같은 그러한 주인공이 있는데, 그것을 찾는 것이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인고?’ 맨 처음에는 그렇게 들어.
나중에는 ‘이뭣고?’  ‘이뭣고?’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바로 그 ‘이뭣고?’하는 그놈을 다시 되돌려 찾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생각이 그 ‘이뭣고?’하는 놈으로부터서 나오는데, 그 일어나는 생각이 우리의 마음자리로부터 모든 작용이 나오는데,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그 뿌리를 관조(觀照)하는 것이여.

‘이뭣고?’  ‘이뭣고?’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런데 단전호흡을 안 하고 자꾸 그렇게만 해 나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上氣)가 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숨을 스르르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길게,
또 다 나갔으면 또 스르르르 하니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가면 날 새기를 하면서 해도 상기가 되는 법이 없어.

처음에는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 하지만, 나중에는 숨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
숨을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이뭣고?’, 다 내쉰 다음에 스르르르 들어마시면서도 아까 들었던 그 ‘이뭣고?’ 의심(疑心)이 고대로 있으면, 그 있는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딱 관(觀)하면서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쉴 때에도 고대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내쉴 때 새로 또 화두를 들지 안 해도 되아. 있는 그 의심을 떠억 관조(觀照)하면서 내쉬거든.
다 내쉬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시되, 들어마실 때에도 딴 생각이 안 일어나고, 아까 들었던 그 화두의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 그 의심을 관조해.

그래서 그렇게 주욱 해 나가다가 어느새 화두가 달아나버리고 없거나 딴 생각이 일어났으면 그때 또 화두를 떠억 한 번씩 챙겨 나가는 거여.

이렇게 해 나가면 망상(妄想)을 안 일으킬라고 할 필요도 없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망상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화두를 들어버리기 때문에 망상을 일부러 쫓아낼려고 할 것도 없어.
이렇게 해 나가면 차츰차츰 망상은 줄어지고 또 이렇게 화두를 들 때 단전호흡을 하면 혼침도 안 일어나는 것이여. 혼침(昏沈)과 산란심(散亂心)을 두 가지를 다 힘 안들이고 내가 잘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단전호흡이다 그말이여.

단전호흡을 하되 항상 들어마시고 내쉴 때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이 성성(惺惺)하게 적적(寂寂)하게 현전(現前)되도록 그렇게 잡두리를 해 나가는 것이다.(7분20초~22분2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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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주로 좌선(坐禪) 수행을 말한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여법(如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계행(戒行) ; ①계() 지켜 수행하는 . 계율에 정해진 규칙을 성실하게 실천수행하는 . ②계율과 도덕.

*계상(戒相) ; ①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4가지 분류[계사별 戒四別],  계법(戒法) · 계체(戒體) · 계행(戒行) · 계상(戒相) 하나. 계율을 실천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차별 있는 행동 양상. () 지키거나[持戒] 범한[破戒] 상태, 또는 계를 범한 경우 그에 대한 죄의 가벼움과 무거움 등의 차별된 상.

②계() (). 계율에 대한 생각.  계상(戒相) 청정성, 집착의 여부는 그것을 일으키는 주체에 따라 달라진다. [참고] 『화엄경』 60권본 10 14 명법품(明法品)(대정장9. p.460c)  계를 지킨다는 () 일으키지 않으므로 계에 집착함이 없다. 이것을 청정시바라밀이라 한다. 不生持戒相故  於戒無著  是名淸淨尸波羅蜜

*참상(參祥) ; 참구(參究)와 같음.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氣)가 머리에 치밀게(上)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십상(十常) ; ①열에서 아홉일 정도로 확률이 높다는 말. ②'십상팔구(열에 여덟이나 아홉 정도로 거의 예외가 없음)'에서 온 말.
*헛숨 ; 공연히 내쉬는 숨. 자연스러운 호흡과 상관없이 내쉬는 숨을 이른다.
*8부(八部)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장생불사(長生不死 길 장/날 생/아니 불/죽을 사) ; 오래도록(長) 살고(生) 죽지(死) 않음(不).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공안(公案)을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 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 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소소영령(昭昭靈靈)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법성(法性)•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머트럽고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잡두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Posted by 닥공닥정
참선(자세 호흡)2014. 3. 25. 14:26

§(445) 단전호흡과 상기(上氣) / 호흡은 무리가 없이 편안하게 하는게 요점 / 호흡과 화두의 관계 / 상기병의 약은 단전호흡과 요료법.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과 「화두를 바르게 들어가는」  3가지를  알아서 해나가는 것은 우리가 도업(道業) 바르게 빠르게 그리고 크게 성취하는데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호흡은 그때 그때 상황 따라서 어쨌든지 무리가 없고 편안하도록 하면 되어. 언제나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여. 누구에게나 고정된 것이 아니고 때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길게 해도 편안하면 길게하고, 짧게 해서 편안하면 짧게 하고, 어쨌든지 무리가 없이 편안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송담스님(No.445)—1991 5 첫째 일요법회. (용445)

 

17분.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참구(參究)하는 방법을 바로 알고 하면 공부하다가 사견(邪見) 떨어지지 않고, 이걸 바르게 참구를 안 하면 이거 하다가 정신이 샐쭉해지기도 하고,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도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착각을 하는 수가 있고, 이걸 참구를 잘못하면 상기병(上氣病) 올라서 골이 뽀개질라 그러고 눈알이 빠질라 그러고  안돼.

 

그래서 바르게  화두를 들어가는 법을 알고 공부를 해야 한다 그말이여.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대발심(大發心)을 하시고 대분심(大憤心)이 나고 대의단(大疑團)이 한목 일어나 가지고 어떻게 무섭게 하셨던지, 다못 거문고  고를 때에 너무 팽팽하게 해도 안되고 너무 느슨하게 해도 안되는 것인데, 어릴적  순수한 마음으로 너무 ()하게 ()하게 하셨기 때문에 상기병이 일어나셨다 그말이여.

그래서 눈알이 뻘겋게 충혈이 되고, 머리에 부스럼이 일어나 가지고 툭툭 터지고, 코에서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말이여.

 

그래서  참선을 해나가는 데에는 앉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그런 상기병이라든지 그런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아무리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더라도 상기병과 같은 그런 무서운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호흡법,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알아서 하고.

 

그런 가운데에 올바르게 화두를 잡드리 해나가는,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과 「화두를 바르게 들어가는」  3가지를  알아서 해나가는 것은 우리가 도업(道業) 바르게 빠르게 그리고 크게 성취하는데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상기(上氣) 단전호흡>

 

 

얼마 하지도 못해 가지고 상기병이 나서 고생하는 스님네가  많습니다. 미리 일어나지 않도록 지혜롭게 해서 단속을 해야지, 한번 상기병이 터져 놓으면 약을 먹어 가지고도 안되고 여간해서 이거 고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머리가 띵하고 목이 뻣뻣하고 이뭣고?’ 할라면 골치부터 아퍼서, 공부만 조금 가행정진을 하고 애써  힘차게 할려고만 하면 벌써 골치부터 아퍼.

그럭저럭 잡담하고 살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신차려서 화두만 들고 공부만 할려고 하면 아프기 시작해.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안 할 수도 없고.

 

출가를 안 했다면 이거  잡담을 하고 지내도 상관이 없고,  장사를 하고 지내도 상관이 없고,  농사를 지어도 상관이 없고 아무렇게 지낸들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머리를 깎고 출가 해가지고 참선을 안 하면 무엇을 할 것이냐 그말이여. 천상  것은 참선밖에는 없고, 할려고 하면은 골치만 아프고, 큰일이거든.

 

어떤 분은 가끔 단전호흡 안 하면 참선 못합니까?’ 그런 질문을 가끔 와서 하는데 상기만 안된다면   단전호흡을  해도 상관이 없어.

체질상 단전호흡을 안 하면 상기가  오르게  그런 체질을 가진 사람이 있거든. 그런 사람은  단전호흡을 해야 하고.

 

아무리 신경을 쓰고 해도 상기가  안된 체질을 타고난 사람이 있어. 기운이 밑으로 내려가서 그런 사람은  단전호흡을  해도 상관이 없겠지만. 특히 체질을 기운이 위로  올라가는, 조금 신경쓰면 얼굴이 벌게지는 그런 체질을 가진 사람은 단전호흡을  해야 하거든.

출가를   사람도 그런 사람은 단전호흡을 해야 하고, 참선을   사람도 사회의 학문을 해도 단전호흡을 해야 . 지지리 공부해 가지고 고시에 합격해 갖고도 상기로 고생하는 사람도 내가 봤거든.

 

 단전호흡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보통 호흡보단 조금  길게. 보통 호흡은 1 동안에 들어마셨다 1 동안에 내쉬고 보통 그렇게 하고,  호흡이  느린 사람은 2 동안에 들어마셨다 2 동안에 내쉬고 그런데.

1초가 걸린지 2초가 걸린지 그것도 아지도 못하고, 무심 속에 호흡은 마지막 죽기 전까지는 그때그때 따라서 달음박질하거나 산을 올라가고 그럴 때는  급하게 쉬고  그렇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는 느리게 쉬고, 호흡에 대해서는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눈을 뜨나 감으나 호흡을 하고 있는데,

 

 단전호흡이란 것은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거여. 어떻게 하느냐?

들어마시는 호흡  3 동안에 들어마셔 가지고  3 동안 정지했다가 내쉬면서 조금 길게 3~4, 이렇게 해서 한번 들어마셨다가 정지했다가 내쉬는데  10 가량 걸리도록. 의식적으로 하거든.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배꼽 밑에 단전, 아랫배가 약간 볼록하게 만들면서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셔 가지고  3 동안  정지를 하거든. 정지했다가 조용하게 숨을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만드는 거여.

 

그러면 들어마신 호흡을 이렇게  가지고는  아랫배까지 이렇게 밀어넣을랴고 생각할 필요는 없고, 그냥 들어마시기만 하고 배는 약간 볼록하게만 만들면 . ‘호흡이 거기까지 내려간다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들어마신 다음에는 정지를 하거든. 정지한 상태로  3 동안을 가만히 있다가  내쉬면서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그거 조금도 힘이 드는 거 아니여.

 

처음에는  10 걸려서 하면은 별로 힘이 안 드는데 될 수 있으면 오래 참을수록 좋다 가지고, 그런 소리를 어디서 들어가지고, 들어마셔 가지고 참기를  30 정도 참었다가 얼굴이 벌게지면 그때 내쉬고. , 그렇게 억지로 하는 사람이 있다 그말이여. 그러다가는 큰일난 것이다 그말이여.

 

처음에는 그렇게  9초나 10 동안에 하다가 차츰차츰 1년을 하고 이태를 하다 보면 호흡이 조금씩 길어져서 나중에는  20 동안에 들어마셨다가 머물렀다 내쉬고,

나중에는 10 동안에 들어마시고, 10 동안에 머물르고, 10 동안에 내쉬고 해서 한번 숨을 들어마셨다 내쉬는데 30 걸려서 하는, 무리가 없이  수가 있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리를 하면서까지 억지로 그렇게 시간을 늘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아셔야 .

 

그런데 호흡은 그때 그때 상황 따라서 어쨌든지 무리가 없고 편안하도록 하면 되어. 

언제나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여. 누구에게나 고정된 것이 아니고 때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길게 해도 편안하면 길게 하고, 짧게 해서 편안하면 짧게 하고, 어쨌든지 무리가 없이 편안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호흡과 화두의 관계>

 

 

그러면 호흡에 신경을 쓰면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 시원찮고, 화두에 대해서 간절히 의심을 하면 호흡이  안된다' 이런 말씀을  분이 있는데, 그럴 것이다 그말이여.

그럴 것이나, 처음으로 참선하는 사람은  호흡 쪽으로 신경을 써서 해서 호흡이  익숙해져서 무심 상태에서도 호흡이 잘되면은 나중에는 호흡에 대해서는 그냥 저절로 놔둬 버리고 화두에  신경을 쓰는 것이 좋다 그말이여.

 

그런데 호흡과 화두의 관계는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시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숨이 나가면  스르르~하니 들어마셨다가  정지했다가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그러면은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이뭣고?’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이뭣고?’ 최초에 시작하는 얼마 동안은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그러다가  달쯤  다음에는   ,   이렇게 지나간 뒤에는  호흡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지 않아도 되요.

 

들어마셨다가 머물렀다가 내쉴  이뭣고---?’

이뭣고  글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   『알  없는 의심』  의심이 있으면,  다음에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화두를 새로 들지 않고,  들어있는 의심을 따악 관조(觀照) 하거든. 『알  없는 의심』을 보는 거여.

 

 숨을 들어마셨다가 머물렀다가 내쉴 때도 아까 들었던  화두에 대한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 세 번째에도 화두를 새로 이뭣고?’  들어도 괜찮은 거여. 그러다가 딴 생각[別念]이 나거나 화두가 없어져버리면 그때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이뭣고?’ 한번  거각(擧却) 하는 거여. 챙기는 거여.

 

이렇게 해서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점심밥 먹을 때까지 그대로 의심이 있으면,  아침에 한번 들은 채로 그냥 그대로 있으면 되는 거고, 한번 들었던 화두가 하루 종일 있으면 자꾸 이뭣고?’ ‘이뭣고?’ 필요가 없거든.

 

그리고 그렇게  나가면 상기(上氣) 일어날 까닭이 없으나, 그러나 이미 상기가 일어났거나  중간에 본의 아니게 상기가 일어날 때에는,  상기를 낫을려고 약도 먹고 쑥도 뜨고 온갖 좋다는 건 해도 그렇게 별로  효과가 없어.

 

상기를 낫으는 약은 결국은 단전호흡으로 낫어야 . 단전호흡을 정말—우선 화두 드는 것은 보류해 놓고, 상기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은 화두는  보류해 놓고 단전호흡에 전력을 해야 . 그러면 상기가 다스려지고, 상기가 다스려지면 그때 화두를 챙기면 되는 것이고.

 

그리고 부득이해서 단전호흡을 해도  안되는 경우는 요료법(尿療法) 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여. 그건 기운을 밑으로 내리고 혈압도 내리고 기운을 내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건 굉장히 효과가 있는 거여. 그건 새삼스럽게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26분30초~4246)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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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구(參究 헤아릴 /궁구할 ) ; ①다못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

*상기병(上氣病 오를 /기운 / )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 머리에 치밀게()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 상기병이 생기면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이 사용된다.

*요료법(尿療法) ; 요료법은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가행정진(加行精進) ; 어떤 일정한 기간에 일상생활보다도 좌선정진(坐禪精進)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함.

*용맹정진(勇猛精進) ; 견고한 의지로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단전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잡드리 ; ‘잡도리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대책.

*지지리 : ‘기껏 전라남도의 사투리.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 삼푼 되는 (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 () 뜻하며, '단전'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도업(道業) ; () 깨달음. () 영위. 불도의 수행. 진리의 실천.

*별념(別念) ; ‘ 생각[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생각[別念]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생각[別念] 있으면 고인이 말한  「잡독(雜毒)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생각[別念]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외에는, 불법(佛法) 온갖 좋은 일이라도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 취하거나[], 버리거나[], 집착하거나[], 변화하는[] 것이 모두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것이요,  묻는 사람이 친히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거각(擧却  /어조사 )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丹田]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없는 생각 ()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14. 3. 10. 12:50

§(세등68)  가행정진(加行精進)•용맹정진(勇猛精進)이 과연 무엇이냐? / 자가철주(自家鐵柱).

 

**송담스님(세등선원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에서. (세등68)

 

약 8분.

 


조실 스님께서 아까 "불 가운데에 그 화택(火宅) 속에 있고, 사방에서 불이 타 들어오고 있고, 바로 불더미 속에 우리가 있으니 거기에서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해서 거기서 해탈(解脫)을 해야 한다"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이 과연 무엇이냐?
납월 팔일(臘月八日)에 - 초하룻날부터서 십이월 팔일 새벽까지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앉아서 정진을 하고, 화장실에 가는 시간만을 제외하고는 노상 앉아서 정진을 하는데, 그것을 보통 용맹정진이라 그러고, 가행정진이라 그러는데, 어찌 참다운 가행정진, 참다운 용맹정진이 어찌 옆구리를 땅에 대고 안 대고 하는 데에 걸려있겠습니까?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잠을 억지로 안 자기 위해서 장군죽비(將軍竹篦)로 치면서 - 그렇다면은 불면증이 들어서 잠 못 자는 사람,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나서 잘 수 없는 사람은 일찌감치 견성성불(見性成佛)하지 않겠습니까? 절대로 용맹정진, 가행정진이 옆구리를 땅에 대고 안 대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여.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빨래하고, 소지를 하고, 목욕하고 양치질하면서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한눈 팔지 아니하고, 경계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보되 본 바가 없고, 듣되 듣는 바가 없고, 먹되 먹는 바가 없고, 걸어가되 걸어가는 바가 없어.

오직 화두(話頭) 하나만을 잡드리 해 나가되,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생각없는 생각으로 터억 의단(疑團)을 관조(觀照)해 나간다면,
저녁 9시나 10시에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난다 하드라도, 눈뜨고서는 일체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오직 한 생각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를 잡두리 해 나가고, 잠을 10시나 9시에 취침시간이 되아서 자리에 눕되, 누워서도 계속 그 의단을 관조해 나가고 잡두리 해나가다가 언제 잠이 든중 모르게 잠이 든다 그말이여.

잠이 들어서도 꿈속에서도 화두를 - 꿈속인지 꿈이 아닌지 하여간 언제 잠이 든 중 모르게 잠이 들어서도 고대로 그 화두가 있고, 새벽에 눈을 딱! 떴을 때 새로 화두를 들 것도 없이 엊저녁에 들고 자던 그 화두가 고대로 있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나간다 그말이여. 이것이 바로 가행정진이요, 이것이 바로 용맹정진인 것이여.

석 달 동안 안거(安居)를 하는데 결제 때부터서 해제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
거기에 무슨 시비가 있으며, 무슨 분별이 있으며, 무슨 밥이 어떻고 반찬이 어떻고, 차가 어떻고, 옆에 사람하고 시비할 겨를이 어디가 있으며, 일체 수용(受用)은 인연(因緣)에 맡겨 버려.

밥이 되면 된 대로, 질면 진 대로, 반찬이 짜면 짠 대로,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차를 한번 먹게 되면 한번 먹고, 두 번 먹게 되면 두 번 먹고, 그 사찰 선방의 모든 규칙에 따라서 순응(順應)하면서,
오직 자가철주(自家鐵柱), 자기 스스로에 쇠기둥과 같은 법도(法度)를 탁! 세워서 처음 시작한 날부터서 끝나는 날까지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일념만년(一念萬年)으로 한결같이 그렇게 잡두리를 해 나간다면 이것이야말로 명실공히 용맹정진이요, 가행정진이 되는 것이여.

듣자니 이번에 세등선원에 결제한 모든 대중, 그리고 저기 군산에 반야선원의 대중들이 정말 산승(山僧)이 이렇게 말한 고대로 정진을 해왔다고 들었습니다.
이 부처님 가신 뒤 삼천 년이 되어서 말세(末世)라 할 수가 있는데, 말세에 이르러서 한국에 이 여러 군데 비구·비구니의 선방에서 이렇게 알뜰히 정진을 허고 있습니다. 이렇게 알뜰히 해 가지고 일대사(一大事)를 요달하지 못하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전생(前生)에 닦은 것, 모든 시절인연(時節因緣)에 따라서 빨리 깨닫기도 하고 더디 깨닫기도 헐 뿐이지, 중간에 중단하지 아니하고, 중간에 사견에 빠지지 아니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그렇게 열심히 해 간다면 결국은 깨닫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나무토막이 강 상류에서 강을 따라서 흘러 내려가되, 중간에 맥히지 아니하고, 양쪽 언덕에 걸리지 아니하고, 가다가 썩어버리지 아니한다면, 그 나무토막은 결정코 망망대해(茫茫大海)에 도달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 한 덩어리의 나무둥치를 우리 중생의 발심(發心)한 한 수행자에다 비교한 것입니다.

출가해서 선지식을 찾아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바른 법으로 목숨 바쳐서 도를 닦아나갈 때에,
중간에 중단하지 않고, 중간에 사견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끝까지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한다면은 만이면 만, 천만 명이면 천만 명, 한 사람 빠짐없이 다 견성성불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20분44초~28분40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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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택(火宅) ; 번뇌와 괴로움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불에 타고 있는 집에 비유한 말. 불길에 휩싸인 무서운 세계. 법화경에 나오는 「三界無安猶如火宅」라는 구절에 근거.
*해탈(解脫) ;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납월 팔일(臘月八日) ;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성도(成道)한 날을 말함. 이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선원에서는 초하루부터 팔일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는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
*장군죽비(將軍竹篦) ; 보통 죽비(竹篦)는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쓰는 40~50센티의 불교 용구인데, 장군죽비는 참선할 때 졸거나 자세가 흐트러진 수행자의 어깨를 쳐서 졸음을 쫓는 약 2m의 큰 죽비.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 보아 깨달아 부처가 됨.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잡드리(잡두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의단(疑團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 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물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수용(受用) ; (물건을 남에게) 받아 씀.
*순응(順應) ; 상황의 변화나 주위 환경에 잘 맞추어 부드럽게 대응함.
*법도(法度) ; 규칙•법칙•율법•법규•결정들.
*일념만년(一念萬年) : 한결같은 마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시절인연(時節因緣) ; 시절이 도래(到來)하고 인연이 합쳐지는 기회. [참고]시절(時節)-어떤시기나 때. 도래(到來)-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기회(機會)-어떠한 일•행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
*망망대해(茫茫大海) ; 한없이 넓고 큰 바다.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68) (게송)개개면전명월백~ / 의심관(疑心觀) /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68) - 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에서. (세등68)

 

약 21분.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인인각하청풍불(人人脚下清風拂)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跡)하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니라
나무~아미타불~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모든 사람 사람 얼굴 앞에는 밝은 달이 희고,
인인각하청풍불(人人脚下清風拂)이로구나. 사람 사람의 다리 아래는 맑은 바람이 불고 있다.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跡)하면, 거울을 타파해서 그림자와 자취가 없으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다.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  인인각하청풍불(人人脚下清風拂)은
부처님이나 조사나 모든 성현, 우리 모두 범부, 범성(凡聖)을 막론하고 낱낱이 다 본구재 도리(本具在道理), 새로 닦아서 깨달을 것도 없이 본래 원만구족(圓滿具足)하게 갖추어 있는 그 도리가 있다.

그것을 본구재 도리(本具在道理)라고도 하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도 하고, 본각대지(本覺大智)라고도 하는데, 본래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자성(自性)의 법신불(法身佛)을 다 가지고 있지마는 왜 우리는 이렇게 중생의 탈을 쓰고서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면서 생사고(生死苦)를 받고 있는가?

까닭 없이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멀쩡한 탈을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오늘날까지 오면서 그 탈을 바꿔 쓰면서, 여기서 나서 저기서 죽고, 저기서 나서 여기서 죽기를 수없이 해왔어.

그 무량겁을 탈을 바꿔 쓰면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해오면서, 우리에는 그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한 거울을 가지고 있는데, 그 거울 속에 그 동안에 겪어오는 모든 일들 그 거울 속에 다 녹화(錄畵)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제8 아뢰야식(第八 阿賴耶識)이라 하는 것이여.
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는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오면서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모든 사실들이 터럭끝 만한 작은 일로부터서 이 세계가 파괴되는 그런 큰일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그 속에 다 녹화·녹음이 되어 있는 거여.

그 거울을 타파(打破)해 버려라.
그 거울 속에 녹화되고 녹음이 되어 있는 것이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면서 어떠한 인연을 만나면은 거기서 녹화된 것이 밖으로 이렇게 현행(現行)을 하는 것이여. 밖으로 그것이 이렇게 나와.
행동으로 나타나고, 생각으로 나타나고, 눈을 통해서 나타나고, 귀를 통해서 나타나고, 그 현행을 하면서 동시에 또 새로운 사실들이 또 녹화가 되고 녹음이 돼.

녹화·녹음이 새로 되는 것을 훈습(薰習)이라 그러고, 또 훈습한 것이 밖으로 또 나타난 것을 현행이라 그러는데, 현행(現行)과 훈습(薰習)이 동시에 돌아가는 거여. 이것이 바로 우리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모습이여.

활구참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 공안(公案)을 타파해서 이 거울을 갖다가 여지없이  깨트려버려서 흔적조차도 없어질 때(打破鏡來無影跡),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다,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생사 없는 도리’를 간단한 한 구절로 표현을 했지만, 새가 꽃가지에 올라와서 한 소리 우는 것이 그것이 평범한 사실이지만,
깨달은 도리를 말로써 표현할 수 없지마는 표현할 수 없는 바를 이렇게 고인(古人)은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 평범한 한 구절이 깨달은 사람은 여지없이 그 깨달은 경지를 바로 볼 수가 있지만은, 깨닫지 못한 사람이 볼 때에는 새가 꽃가지에 올라서 소리내어 우는 것이 하나의 평범한 사실에 불과한 것이여.
이 평범한 새 한 마리가 꽃가지에 올라가서 그 우는 것을 여기에다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붙여서 이러쿵저러쿵 자기의 소견을 붙이고 사량분별을 붙인다면, 그 깨달은 도리를 표현한 이 법(法)이 완전히 죽은 소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방금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출가해서 스승을 찾아서 바른 깨달음에 이르는 활구참선! 활구참선(活句參禪)에 의해서 이 화택(火宅)으로부터 해탈하는 법문을 고구정녕(苦口叮嚀)한 육성으로 들었습니다.

활구참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본참공안에 대해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지는 것이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말로 따지고, 또 더듬어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래가지고 ‘아하 바로 이 뜻이로구나.’ 이렇게 해서 사량분별로 공안을 따지는 거여. 그 '따져서는 안 된다'고 천 번 만 번 법문을 들어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따지고 앉았어.

특히 두려운 것은 한 철,두 철, 세 철 열심히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는데, ‘이무엇고?’ ‘이뭣고?’ 마삼근(麻三斤)을 하는 사람은 ‘어째서 마삼근이라 했는고?’ 끝없이 끊임없이 일구월심(日久月深) 이렇게 해 나가면 여법(如法)하게 해 나가다 보면,
그렇게 번뇌·망상이 일어나던 것이 번뇌·망상은 차츰차츰 줄어지고, 화두를 그렇게 들려고 해도 화두는 잘 안 들렸던 것이 차츰차츰 화두가 들어지기 시작해. 화두가 차츰차츰 들어지는 시간이 불어남에 따라서 망상은 차츰차츰 줄어진다 그말이여.

그래서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고,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하고,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서 기쁨을 아니 느낄 수가 없어. 참 그 고요하고, 깨끗하고, 편안한 경계를 무어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

‘아! 이것이 바로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하는 것이로구나.’ ‘이것이 바로 법열(法悅)이라 하는 것이로구나.’ ‘이것이 바로 도(道)에 낙(樂)이라 하는 것이로구나.’ ‘이것이 바로 완전하게만 된다면은 이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이로구나.’ 그래 가지고 이런 상태로 계속해서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바래는 것입니다.

생각을 내서 바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중에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지에 빠져서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것을 스스로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리라 해서가 아니라,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그러니까, 그냥 그 고요한 경지에 빠져 들어가서 그것을 떠억 즐기고 있다 그말이여.

거기에서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이 주의할 바는 아무리 고요하고, 아무리 편안하고, 아무리 맑고 깨끗하다 하드라도 '깨끗하다, 편안하다, 맑고 고요하다' 그런 데에 탐착해 가지고 화두를 잃어버리는 사실.
화두를 잃어버린다면 거기에서 벌써 공부는 삐뚤어져 버린 것이여. 거기에서 저 죽을 구덩이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여. 사견(邪見)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여.

그렇게 고요하고 깨끗할수록에 그런 데에는 조금도 생각을 두지 말고, 오직 자기의 본참화두!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잡드리를 해 나가야 되는 것이여.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힘을 쓰면서 용을 쓰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허고 막 힘을 쓰면서 허라는 게 아니여.
처음에 공부를 헐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허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허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허고 자주자주 들을 수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 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 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아니 되는 거여.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 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 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일 분의 백천 분의 일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할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처음~20분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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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개개면전명월백~’ ; [소요당집 逍遙堂集] (한글대장경169, 동국대학교역경원) p100 ‘순 상인(淳上人)에게’ 게송 참고.
*범성(凡聖) ; 범인(凡人)과 성인(聖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원만구족(圓滿具足)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법신불(法身佛)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즉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육도윤회(六途輪廻) ; 생사윤회(生死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겁(劫) ; (산) kalpa의 음사. 인도에서의 가장 긴 시간단위. 지극히 긴 시간. 무한히 긴 시간.
[참고] 겁(劫)의 무한히 긴 시간을 개자겁(芥子劫)•반석겁(盤石劫)으로 비유한다.
개자겁(芥子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성(城) 안에 겨자 씨를 채워, 100년에 한 알씩 집어내어 겨자 씨가 다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함.
반석겁(盤石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큰 반석(盤石)을 부드러운 천으로 100년에 한 번씩 쓸어 반석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함.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아뢰야식(阿賴耶識) ;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거주지·저장·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참고] 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여덟 가지 마음 작용.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팔식(八識) 가운데 앞의 다섯 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오식(前五識)이라 하고, 第六 意識, 第七 末那識, 第八 阿賴耶識이라 한다.
*현행(現行) ;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種子)가 변화하고 성숙하여 일어나는 인식 작용.
[참고]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훈(熏 연기낄 훈) ; 훈습(熏習 , 薰習) ① 어떤 성질에 물듦. 어떤 기운이 배어 듦. ② 산스크리트어 vāsanā 마치 향 냄새가 옷에 스며들 듯, 몸과 말과 뜻으로 일으킨 행위의 기운과 생각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잠재력으로 이식되는 현상.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공안(公案, 화두)을 타파(打破)해서 ;
[참고] 화두(話頭)를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사량분별(思量分別) ; 생각하여(思) 헤아려서(量) 종류에 따라 나누어 가름(分別).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화택(火宅) ; 번뇌와 괴로움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불에 타고 있는 집에 비유한 말. 불길에 휩싸인 무서운 세계. 법화경에 나오는 「三界無安猶如火宅」라는 구절에 근거.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법희선열(法喜禪悅) ;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기쁨과 선정(禪定)에 들어가 마음이 즐거운 것.
*법열(法悅)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거나 배우는 기쁨. ②진리를 깨달았을 때 가슴에 잔잔히 사무치는 기쁨.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이뭣고(是甚麼) / 판치생모(板齒生毛) / 마삼근(麻三斤) ; 분류 ‘화두(공안)’ 참고.
*잡드리(잡두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의단(疑團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관조(觀照) ; 참된 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함.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61~62.
〇工夫는  *如調絃之法하야  緊緩을  得其中이니,  勤則近執着하고  忘則落無明하리니,  惺惺歷歷하고  密密綿綿이니라.


공부는 거문고의 줄을 고르듯 하여 팽팽하고 느슨함이 알맞아야 하니, 너무 애쓰면 병 나기 쉽고 잊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지게 된다。성성하고 역력하게 하면서도 미세하게 끊임없이 하여야 하느니라。

<註解>
彈琴者曰,  緩急이  得中한  然後에야  清音이  普矣라 하니,  工夫도  亦如此하야  急則動血囊하고,  忘則入鬼窟이니,  不徐不疾하야사  妙在其中이니라.


거문고를 타는 자가 말하기를 '그 줄의 느슨하고 팽팽함이 알맞은 뒤라야 아름다운 소리가 잘 난다'고 한다。공부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조급히 하면 혈기가 고르지 못한 병이 나고, 잊어버리면 흐리멍덩하여 귀신의 굴로 들어가게 된다。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되면 오묘함이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제물에 ; 저 혼자 스스로의 바람에.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
*선방(禪房) ; 참선(參禪)하는 방.
*공부처(工夫處) ; 배우거나 수행하는 곳.

Posted by 닥공닥정
이뭣고 화두2013. 12. 7. 13:45

§ 활구 ‘이뭣고’ (본참공안)

 

**송담스님(No.88) - (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용088)

 

약 8분.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화두)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들이 사용한 화두가 1700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1700공안이 일시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

요새 일본식 참선이 수입이 돼 가지고 화두 하나를 이리저리 따져서 “아, 이런 것이다!”, 또 그 다음에 다른 화두를 이리저리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또 하나를 해결 지어 놓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해서, 10개 20개······, 화두를 이렇게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며 참선을 하는 지성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이런 참선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쪼끔 생각 있는 사람이면 능히 알고도 남을 상식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차라리 참선을 안하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부를지언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합니다. 활구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뭣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 내쉴 때, “이··· 뭣고······?”

다 내쉬면 스르르 숨을 들이마시되, 들이마시면서도 아까 그 ‘이뭣고’ 한 그 의심의 그 여운이 그때까지 오도록 그렇게 조용하게 관조를 하는 것입니다.
3초 동안 머무르는 동안에도 그 의심을 묵묵히 관조하다가 조용하게 내쉴 때에 다시 또, “이···뭣고······?”

처음에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하다가 차츰차츰 딴 생각은 줄어들고 ‘이뭣고?’ 가 잘 되어지면, 두 번 들이마셨다 내쉴 때 한 번씩만 ‘이뭣고?’ 를 들다가, 나중에 더 익숙해지면 다섯 번 호흡하는 동안 ‘이뭣고?’ 한 번의 의심으로 쭉 이어지도록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공부가 더욱 익숙해지면 아침에 눈 딱 떴을 때, “이···뭣고······?” 한 번 해놓으면 하루 종일 그 ‘이뭣고?’ 한번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될 때가 꼭 올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 깨달을래야 안 깨달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일상 생활이 바로 알 수 없는 화두 하나로써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화두를 들고서 밥도 먹고, 똥도 누고, 차도 타고, 걷기도 하고, 사람하고 대화도 하고,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팔만 사천 마구니(魔軍)가 엿보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팔만 사천 마구니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팔만 사천 번뇌 망상인데, 화두가 독로(獨露)한 사람한테는 와서 들어 붙지를 못합니다.

잠깐 잠깐 필요 있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 필요한 일을 적절히 처리하되, 나의 이 화두 일념은 근본적으로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요, 우주법계의 주인공이 되어서 우주법계를 내가 요리해 나가고,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운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이 법이 바로 불법(佛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팔만대장경에 그렇게 많은 법문이 있지마는 그 말씀을 하나로 뭉치면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이 법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76분35초~84분2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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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 이 법어는 송담(松潭)스님께서 1978년 10월 1일, 「법련사 불일 청년회」의 청법으로 설하신 내용이며, 스님께서 직접 편집하신 것을 『불일회보』(1988년 6. 7. 8월)에 게재했었던 원고임.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생사윤회(生死輪廻)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 세간(世間)의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音聲)을 듣고(觀) 대자비와 지혜로써 자유 자재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는 보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왼쪽 보처(補處). (범어) 'Avalokitesvara'의 한역(漢譯).
*아미타불(阿彌陀佛) ; Amitabha Buddha(無量光佛-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Amitayus Buddha(無量壽佛-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대승불교의 중요한 부처님. 줄여서 미타(彌陀).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관조(觀照) ; 참된 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함.
*마군(魔軍) ; 악마의 군세(軍勢).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 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번뇌(煩惱) ; 나쁜 마음의 작용. 번요뇌란(煩擾惱亂)의 뜻.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는 정신작용.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있다. 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망상(妄想) ;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독로(獨露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