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精進) 수행2022. 2. 26. 22:24

§((128)) 이리저리 따져 가지고 참선하는 것을 구두선(口頭禪)이라 그러고. 이것을 의리(義理)로 따져서 한다 해서 의리선(義理禪)이라 한다. 구두선은 '죽은 참선'이라 해서 사구선(死句禪)이다. 깨달음은 없고 생사윤회로 떨어지는 참선 / 화두는 이론으로 풀 수 없는 것.

이 공부는 잘되어 간다 할지라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 것이며 또 영 공부가 지루하고 괴롭고 잘 안되어 간다고 느껴질 때라도 번뇌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 영 공부가 잘 안되어 갈 때 그때야말로 한 고비 넘으려고 하는 중요한 고비. 그러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반드시 도(道)를 성취할 사람이다.

**송담스님(No.128)—1980(경신)년 칠석법회 법문(80.08.17) (용128) (정진수행)

 

약 14분.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구두선(口頭禪),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구두선이라 그런 말씀을 하셨고 '구두선은 사구선(死句禪)이다'

구두선이라 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 입으로 따져서 하는 것이다 이 말이여. 입으로 '그것은 이러쿵저러쿵, 체(體)다 용(用)이다, 법신이다, 여래다, 뭣이다' 해 가지고는 참선을 입으로 이래이래이래 따져 가지고 답을 알아맞히고, 또 제자들에게 참선을 가르치기를 무슨 수수께끼를 푸는 데에 있어서 힌트를 주는 것처럼 살살 가리켜서 힌트를 주어 가지고,
'아! 이것이 아닙니까?'
'오! 옳다 옳다. 아! 그것 참 어지간하다'

또 다른 공안을 내줘 가지고 '이걸 오늘 해 전에 이것을 알아 오너라'
이렇게 저렇게 이렇게 저렇게 따지고 그냥 골치가 아플 정도로 하루 종일 따져 가지고는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 가지고 쫓아가서 '알았습니다. 이것이 아닙니까?'
'아니다. 그 조금 틀렸다'

다시 또 이리저리 따져 가지고는 '이것이 아닙니까?'
'아! 인제 되았다'

이러한 식으로 참선을 가리키고, 이러한 식으로 참선을 배우는 것을 이것을 갖다가 구두선(口頭禪)이라, 이것을 의리(義理), 의리로 따져서 한다 해서 의리선(義理禪)이라 그러고.

이렇게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참선은 아무리 그럴싸하게 따져서 모든 공안을 다 풀이를 했다 하더라도 마침내 중생의 분별심(分別心)을 여의지를 못하고, 따질수록에 중생의 분별심만 더욱 치성하게 한 결과가 되기 때문에 분별심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점점 생사(生死)의 불에 섶을 더한 것에 지내지 못한 것이라, 더욱 생사의 번뇌에 분별의 불은 치성하게 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참선은 생사윤회의 주검으로 떨어지는 참선이여. 그래서 이것을 '죽은 참선' 이라 해서 사구선(死句禪)이라 그러는 것이거든.

그러면 '어떠한 것이 활구선(活句禪)이요, 바른 참선이냐?' 하면 '분별심, 이론으로 따지는 버릇을 쓰지를 말아라. 이건 유(有)다, 무(無)다, 비유(非有)다, 비무(非無)다, 이것은 허공이다, 허공 같으되 허공도 아니다, 이러한 이론을 쓰지를 말아라 이 말이여'

'화두는 이론으로 풀 수 없는 것이여. 이론으로 따지지도 말고 이론으로 풀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 '그렇다면은 왜 화두를 드느냐? 아마 이것은 모든 번뇌와 망상을 싹 쓸어버리기 위해서 이 화두는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화두는 바로 쇠로 맨든 빗자락과 같은 것이다. 일체 번뇌 망상을 다 쓸어버리는 빗자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론으로 사용하지 말고 다맛 이뭣고? 만 하라는 것이로구나'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한 생각도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화두를 들면 번뇌와 망상이 해결되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러기 위해서 화두를 든다고 하는 생각은 갖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마치 장님들이 모여 가지고 코끼리를 갖다가 생전 처음 코끼리를 만나서 '대관절 코끼리란 말만 들었지 한 번도 보지를 못했다, 우리가'
그래서 각기 코끼리를 모다 달려들어서 만지는데, 코를 갖다가 이리저리 더듬어 본 장님은 '코끼리 코끼리 하더니 구렁이 같이 생긴 거로구나' 또 한 장님은 배를 갖다가 만져 보고 '아! 코끼리라는 게 벼람박 같이 생긴 것이다' 코끼리 다리를 만져 본 사람은 '코끼리라는 게 기둥 같이 생긴 것이다' 각기 자기가 만져본 대로 얘기를 하고 자기가 코끼리의 전체를 파악을 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참선을 해 나가는 데, 화두를 자꾸 드는 데 있어서 모든 망상이 처음에는 더 치성하게 일어나지만 그래도 한결같이 화두를 들고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해 나가면 번뇌와 망상이 일어날 겨를이 없게 되고, 일어나도 금방 화두를 들므로써 간 곳이 없어지니까 쇠빗자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런 면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화두를 갖다가 쇠빗자락과 같은 것이다'
'코끼리는 구렁이 같은 것이다' 이러한 장님과 같은 견해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또 '계려궐(繫驢橛), 나귀를 매는 말뚝이다' 나귀를 매놓지 않고 놔두면 그 나귀란 놈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왔다갔다해서 밭도 밟고 곡식도 밟고 막 함부로 할 텐데, 그 나귀의 고삐를 갖다가 말뚝에다 콱 매놓으니까 그 나귀가 먼 곳을 가지 못하고 그 말뚝 주변에만 뱅뱅 돌게 되니까,
화두만 자꾸 들므로 해서—화두를 안 들면 이 생각, 저 생각, 번뇌 망상, 희로애락 모다 그러한 생각으로 우주법계가 좁다하고 이리저리 돌아칠 텐데, '화두를 착 들므로써 잠깐 뭔 생각이 났다가도 금방 이뭣고? 이뭣고? 하니까 마치 나귀를 말뚝에다 매놓은 거와 같다. 화두란 게 바로 그러기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이로구나'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러한 견해도 화두에는 혹 그러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화두가 바로 그런 것이다'고 하는 것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져 보고 기둥과 같다고 하는 견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러쿵저러쿵하는 분별심을 하지를 말고, 다못 화두만을 들되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그 말은 '슬퍼한 놈이 무엇인고?', 기쁠 때는 '기뻐한 놈이 무엇인고?' 배가 아플 때는 '배가 아픈 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배가 아플 때도 나는 '이뭣고?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하라는 것이지, 배가 아플 때는 '배 아픈 놈이 무엇인고?' 똥 눌 때는 '똥 누는 놈이 무엇인고?' 세수할 때는 '세수하는 놈이 무엇인고?' 낱낱이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수할 때도 '이뭣고?' 똥을 눌 때도 '이뭣고?' '지금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라 이 말씀이에요.
낱낱이 '세수하는 놈이 무엇인고?' 저거 차 소리가 나면 '차 소리 나는 놈을 듣는 놈이 무엇인고?' 손님이 오면 '손님이 온 맞이한 이놈이 무엇인고?' 밤낮 그때그때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에요. 그럴 때에도 화두를 잘 챙겨서 들어나가라 그런 말씀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처음에는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면 곧잘 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해 가면 차츰차츰 계속해서 쭉 잘되어 가면 참 이거 뭐 어려울 것이 없고 참 좋겠는데, 얼마 동안 해 가다 보면 마치 나귀나 소를 갖다가 우물로 끌고 들어갈려고 한 것처럼 아무리 끌어 잡아당겨도 끌어 잡아당길수록 뒤로 버티고 뒤로 물러서려 그러고, 뒤에서 억지로 몰아넣어서 우물로 밀어넣을려고 해도 그럴수록에 이놈이 더욱 뒤로 버텨서 안 들어갈려고.

화두를 들고 좀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좀 할려고 하면 그럴수록에 더 가슴이 먹먹하고 영 머리가 띵하고 망상이 더 퍼일어나고, 몸이 괴롭고 시간이 지루하고 이래서 때로는 냉랭하고, 때로는 열열하고, 때로는 그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고, 때로는 번뇌와 망상이 겨우 좀 가라앉을 만하면 자꾸 혼침(昏沈)에 떨어지고, 이렇게 해서 영 공부가 진취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이래 가지고 내가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것이 참으로 공부를 옳게 하는 것인가? 공부를 잘못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번민을 하고 괴로워하게 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공부를 꼭 잘 못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옳게 해 나가도 때에 따라서 그러한 여러 가지 종류의 현상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느냐?
일어나서 한 5분 내지 10분간 좀 포행(布行)을 해서 정신을 깨끗이 한 다음 다시 또 자리에 떠억 앉아서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약 3초 가량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또 화두를 들면 한결 가슴이 시원하고 후련하면서 또 얼마 동안 공부가 잘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잘되어 간다 할지라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 것이며 또 영 공부가 잘 안되어 가고 지루하고 괴롭고 잘 안되어 간다고 느껴질 때라도 번민(煩悶), 번뇌심을 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잘 안되어 갈 때, 영 공부가 잘 안되어 갈 때 그때야말로 한 고비 넘으려고 하는 그러한 중요한 고비가, 거기가 바로 중요한 고비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비를 지혜롭게 잘 넘기면 바로 공부가 한결 수월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중대한 고비를, 좋은 중대한 고비인 줄을 모르고 거기서 번뇌심을 내 가지고 '에이! 이거 공부는 못할 것이다. 이거 차라리 아미타불이나 부르다가 죽어서 극락이나 가지, 근기가 약해서 참선은 도저히 안 된다고 하더니 정말 이거 안 될려나 보다' 이렇게 해서 포기를 하면 그 높은 태산준령을 걸어서 걸어서 올라가다가 조금만 더 올라가면 고개를 넘을 텐데 거기서 포기를 하고 내려와 버린 거와 마찬가지여. 그러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반드시 도(道)를 성취할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이 칠석 법회 이렇게 아침부터 비가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이 모다 참석을 해 주셨습니다. 그 정성 하나만으로도 여러분은 반드시 소원을 성취할 것입니다. 성취할 것을 나는 깊이 믿고 의심하지 않으며 반드시 성취되시기를 간절히 축원을 하는 것입니다.(54분23초~67분37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용화선원2022. 2. 25. 15:31

 

 

§(098) (게송)약야산중봉자기~ / 용화사에서는 방편설에 그치지 않고 활구참선법을 들려 드린다 / 포대화상, 미륵불의 화현 / 중생심으로 나를 보는 것이 견성 /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부처님 계신 곳, 바로 그 도리 보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 ‘이뭣고?’

**송담스님(No.098)—1979년 입춘 법회(79.02.04) (용098) (용화선원)

 

약 20분.


약야산중봉자기(若也山中逢子期)인대는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냐
나무~아미타불~

만약 산중에서 자기(子期)를 만났다면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리요. 어찌 누런 이파리를 가지고 산아래로 내려갈 것이냐.

자기(子期)라고 하는 사람은 성(姓)은 ‘쇠북 종(鍾)’ 자 종씨인데, 종자기(鍾子期)라고 하는 사람은 저 중국 고대에 요임금 당시 거문고의 이치, 음악의 이치에 달통한 사람입니다.

그때 백아(伯牙)라고 하는 사람이 대단히 거문고를 잘 탔습니다. 백아라고 하는 사람은 아주 거문고를 타기로 아주 통달한 사람인데, 백아라고 하는 사람이 거문고를 떠억 뜯으면 너무 거문고를 잘 뜯고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서 보통 사람은 그 백아의 거문고 타는 것을 능히 감상을 할 줄 모릅니다.
오직 종자기(鍾子期)라고 하는 사람만이 그 백아(伯牙)의 거문고 타는 것을 듣고서, '아! 지금 백아라고 하는 사람이 유유히 흐르는 큰 강물을 생각하면서 거문고를 뜯고 있구나' 또 어쩐 때는 '아! 지금 저 백아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들어보매, 높고 높은 태산준령을 생각하면서 저 거문고를 뜯고 있구나'

그렇게 종자기라고 하는 사람은 백아의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백아의 마음 소리를 능히 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종자기라고 하는 사람이 천명(天命)을 다하여 죽게 되자 백아라고 하는 사람은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아니했다고 그럽니다.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탄생을 하셔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대도를 성취하신 다음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묘법(妙法)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종자기와 같은 그러한 사람을 만났다면 어찌 49년 동안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동안 그러한 많은 방편설(方便說)을 설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자기(子期)와 같은 사람을 산중에서 만약 만났다면 어찌 누른 이파리을 가지고 산아래로 내려갈 것이냐?

누른 잎[黃葉]이라 하는 것은 은행잎이나 단풍잎 같은 그런 아주 예쁘고 고운 그러한 단풍잎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린애들을 달랠 때에 노란 또는 빨간 단풍잎을 주면서 ‘여기 있다. 돈, 여기 있다. 돈’ 이렇게 우리는 어린애들을 곧잘 달래는 것입니다.

방편설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 불가결(不可缺)한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린애를 달랠 때에 사탕 같은 것이 있으면 다디단 사탕을 입에다 넣어 줘서 달래기도 하고, 사탕이 없으면 무슨 노란 이파리나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조그만한 돌멩이라도 집어 줘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슨 장난감 같은 것도 집어 줘서 잠시라도 어린애의 울음을 달래는 경우를 엄마들은 얼마든지 경험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방편, 또 동지 법회, 입춘 법회, 칠성 법회, 사월 초파일 관등(觀燈) 법회, 이런 법회가 노란 이파리를 가지고 어린애 울음을 달래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방편설, 이것이 모두 일맥상통(一脈相通)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노란 이파리만 가지고 달래 봤자 어린애는 잠깐 울음을 그쳤을 뿐, 배가 고픈 허기(虛飢)는 완전히 가시질 않은 것입니다. 다시 또 울음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일양(一樣)으로 노란 이파리만 가지고 여러분의 울음을 달래는데에 그치지를 아니하고, 정말 입에 넣어서 먹으면 배가 부를 수 있는 영양제를 여러분에게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국 각 사암에서는 입춘 불공이라 해 가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특히 입춘이 들은 시간을 기해서 불공(佛供)을 드리고 굉장히 복잡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용화사에서는 입춘에 이렇게 최상승 활구법문(活句法門)을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경청을 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새벽부터 저녁까지 목탁을 치면서 여러분이 일 년 동안 무장무애하시고 복을 많이 받도록 그렇게 간곡히 불공을 드린 것과 이렇게 경건한 자세로 활구참선법을 들은 것과 비교를 해보시면, 조금이라도 뜻이 있으신 분은 능히 어느 것이 정말 올바른 불법(佛法)이고, 어느 것이 정말 우리를 영원히 복되게 하고, 행복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인가를 충분히 이해하시고 남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최초에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에 대해서 말씀이 계셨고, 그다음에는 포대화상(布袋和尙)에 법문을 하셨습니다.

포대화상은 중국 당나라 시대에 중국에 출현하신 이름도 성도 모르는 고향이 어딘지 그것도 알 수 없는 그러한 도인(道人)이 계셨습니다. 다못 큰 포대(布袋), 자루를 항시 어깨에다가 메고 다니시면서 사람만 만나면 손을 내밀면서 무엇이고 달라고 그랬습니다.

누가 무엇을 먹고 있으면 ‘나 좀 달라’고 해 가지고, 주면은 한입 뚝 비어 먹고 나무지기는 자루 속에다가 퐁 집어넣고, 그저 고기가 되었건, 과일이 되었건, 떡이 되었건, 닥치는 대로 얻어서 먹고 집어넣고, 얻어서 먹고 집어넣고, 자루 속에서 배고프면 꺼내 먹고, 썩거나 말거나. 누구든지 만나면 ‘나 돈 한푼 달라’고, 돈 한푼 주면 자루 속에다 탕 집어넣고.
‘너! 모레 물가에 가지 말아라’ ‘너! 이달 보름께는 차를 타지 말아라’ ‘너 내일 저녁에 니 마누라하고 싸우지 말아라’ 무엇이고 한마디 딱! 일러줍니다. 그러면 그 점이 백발백중 맞았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려고 하면은 나막신을 신고 줄달음질을 치고, 날씨가 좋은 날은 짚신을 신고 돌아다니고, 그래서 포대화상이 무슨 신을 신었는가 볼라면 일기(日氣)를 미리 알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과학 기구를 사용해서 기상대(氣象臺)에서 일기 예보를 해도 혹 맞기고 하고, 안 맞기도 하고 합니다마는 포대화상 발만 보면 백발백중이었습니다.

포대화상이 생존 시에는 아무도 그이가 도인(道人)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돌아가신 뒤에사 비로소 그분이 56억 7천만 년 뒤에 염부제(閻浮提)에 미륵불(彌勒佛)로 출현하실 부처님의 권화신(權化身)이라고 하는 것을 선지식(善知識)들은 짐작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 미륵불은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미륵보살(彌勒菩薩)로서 지금 머물러 계십니다. 56억 7천만 년 후에 미륵불로 출현하시지마는 그때까지는 너무너무 세월이 많기 때문에 우두커니 거기에 계시지를 아니하고 가끔가끔 보살로서, 보살의 몸으로 화현(化現)해 가지고 인연 따라 중생을 교화하시게 되는데, 그 경우에 한 경우가 바로 포대화상으로 출현하신 것이 되겠습니다.

어째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화현으로 나투시려면 누가 보든지 존경할 수 있고 거룩하고 위대한 그러한 몸가짐과 행실로써 출현을 하시지 아니하고, 몸뚱이는 비대해 가지고 배가 소 배만큼 불러 가지고, 여러분이 사진을 통해서 포대화상의 모습을 짐작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배는 장구통 배아지에다가, 항시 배는 떠억 배꼽까지 다 내놓고 남자이지만 유방이 여자 유방처럼 그렇게 양쪽에 드리워진 채,
자루를 하나 짊어지고 슬슬 거리로 다니면서 걸식을 하시면서 그러니까 어린이들이 항시 뒤를 따라 다니면서 올라타고 옷을 잡아당기고 같이 친구가 되었다가 유시에는 놀려댔다가, 이렇게 하면서 포대화상은 어린애로 더불어 벗 삼아서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세월을 보내시되, 인연 따라서 점도 쳐주고 때로는 역행(逆行)과 순행(順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시면서 중생 교화를 하셨습니다.

그때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이요’ 아까 조실 스님께서 읊으신 ‘밤마다,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또한 같이 일어난다[朝朝還共起]. 밤에 잘 때에는 부처님을 떠억 끌어안고 자다가 아침에는 그 부처님하고 같이 일어난다'

‘욕식불거처(欲識佛去處)인댄’ 네가 지금 그 어젯밤에 끌어안고 자고, 아침에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났던 그 부처님 간 곳을 알고자 할진대는, '지자어성시(只這語聲是)니라. 지금 이 말하는 이놈이니라'
이 게송(偈頌)은 지극히 쉬운 글이지마는 이 쉬운 한마디의 게송을 똑바로 마음에 얻는다면 바로 자기의 부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 견성성불’ 누구나 입에 거는 말이지만. '성품(性品)을 보고 성불(成佛)을 한다' 중생심(衆生心)을 떠나서는 성품을 볼 수가 없는 것이고, 중생심을 떠나서는 성불할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천하 없이도 희노애락(喜怒哀樂) · 탐진치(貪瞋癡) 이것이 모다 오욕락(五欲樂), 전판 다 중생심으로 이루어진 중생심의 표현이지마는 그 중생심 여의고는 견성(見性)할 도리도 없는 것이고, 성불(成佛)할 기약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도, 잠시도 여읠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중생심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말하고, 손으로 글씨 쓰고 일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성냈다, 웃었다, 울었다 하는 이것이 전부 중생심의 발로(發露)인데 그 중생심 떠나서 ‘참나’ 찾을 길은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중생심 버리지 아니하고, 중생심에서 중생심으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견성(見性)입니다.

그 가장 단적이고 가까운 것이 '부처 간 곳을 알고자 할진대는 바로 이 말하는 이놈이니라'
어찌 하필 말하는 놈일 뿐이겠습니까. 귀로 듣는 놈, 눈으로 보는 놈, 손으로 만지는 놈, 발로 차고 걷는 놈, 성내고 웃고 우는 놈,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부처님 계신 곳이요, 바로 그 도리 보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한번 드는 곳에 팔만사천 마구니가 물러가는 곳이요, 소멸하는 곳이요, 일체 재앙(災殃)과 액난(厄難)이 소멸되는 때인 것입니다.(처음~19분4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게송) ‘若也山中逢子期 豈將黃葉下山下’ ; 『태고집(太古集)』 (雪栖 편, 김달진 역주 | 세계사) '석가 출산상(釋迦出山相)' p229 참고.
*지음(知音) ; ①음악의 곡조를 잘 앎. ②새나 짐승의 소리를 가려 잘 알아들음. ③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이르는 말.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악상(樂想)을 잘 이해해 준 벗 종자기(鐘子期)가 죽자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여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열자(列子)』에 나오는 말.
*천명(天命) ; ①타고난 수명. ②타고난 운명. ③하늘의 명령.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방편설(方便說 방법·수단 방/편할 편/말씀 설) ; 실상(實相)으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 상대와 조건에 알맞는 방법을 설정하여 말하는 것.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불가결(不可缺) ; 없어서는 안 됨.
*관등(觀燈 볼 관/등 등) ; 등(燈)을 밝히고 봉축(奉祝 공경하는 마음으로 축하함)하는 행사. 연등(燃燈)과 같은 말. 주로 음력 사월 초파일에 행하였으며, 이 날을 관등절, 그 놀이를 관등놀이라고 하였다. 집집마다 등을 달고, 관청, 시장 거리의 가게, 절 등에서 등대를 세워 등을 달아 부처님의 탄생을 봉축하였다.

오늘날에는 이 날을 '부처님 오신날'이라 하여 국가공휴일로 정하고 밤에는 수많은 신도들이 등을 들고 거리를 돌면서 제등행렬(提燈行列)을 한다.
요즈음에는 특별한 사찰의 행사 때에도 때때로 관등을 하며, 천등불사 · 만등불사 등 관등 위주의 행사를 한다. 그 기원은 통일신라 때 행해졌던 팔관회(八關會)이다.
*일맥상통(一脈相通 한 일/줄기·맥 맥/서로 상/통할 통) ; 사고방식이나 성질 등이 두 대상 간에 어느 면에서 한 가지[一脈]로 서로[相] 통(通)하거나 비슷해짐.
*허기(虛飢 빌 허/주릴·굶주림 기) ; 굶어서[飢] 속이 비어[虛] 몹시 배가 고픔.
*일양(一樣) ; ①한결같은 모양. 또는 같은 모양. ②한결같이 그대로. 또는 꼭 그대로.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 · 등(燈) · 꽃 · 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포대화상(布袋和尙) ; 중국 후량(後梁) 때의 스님.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 출신. 자기가 자칭하는 이름은 계차(契此)였다. 체구가 비대하고,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배가 불룩하고, 말이 일정하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자고 누웠다.
항상 지팡이에 베자루 하나를 걸어 메고, 소용되는 물건은 모두 그 속에다 넣었다. 저자나 마을에 들어갔다가 물건을 보면 달라고 하여, 먹을 것은 무엇이나 주기만 하면 받아 먹으면서 조금씩 나누어 그 자루에 넣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별호를 지어 장정자(長汀子) 또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고 불렀다. 혹 사람들에게 무엇을 달라 했다가 돈을 주면 돌려 주었고, 남에게 길흉을 예언해 주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916년 3월에 명주 악림사(嶽林寺) 동쪽 행랑 밑의 반석 위에 단정히 앉아서 게송을 읊었다.

미륵진미륵(彌勒眞彌勒)  분신천백억(分身千百億) 시시시시인(時時示時人)  시인자불식(時人自不識)
미륵 부처님, 참 미륵 부처님이 분신(分身)해서 천백억 부처님이 되었다. 때때로 당시 사람들에게 보이되,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 아지를 못하는구나.

게송을 마치고 편안히 앉아서 떠났는데, 그 뒤에 다른 고을 사람들은 여전히 대사가 포대를 메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에 사람들은 포대화상을 미륵 보살의 화현(化現)이라 하여, 그 모양을 그려서 존경하여 받드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참고] [전등록 3] (제27권) (동국역경원 | 김월운 옮김) p459-463 참고.
*비다 ; '베다(사람이 과일을 입으로 끊거나 자르다)'의 사투리.
*나무지기 ; ‘나머지’의 사투리.
*기상대(氣象臺) ; 기상(氣象 바람, 구름, 비 등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관측, 통보하거나 또는 조사, 연구하기 위한 시설. 또는 그 기관.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염부(閻浮) ; 염부제(閻浮提). 남염부제(南閻浮提). 섬부주(贍部洲). 남섬부주(南贍部洲).
산스크리트어 jambu-dvīpa의 음사. 염부(閻浮), 섬부(贍部)는 jambu의 음역어이며, 제(提)와 주(洲)는 dvipa의 각각 음역어 및 의역어이다. jambu는 나무 이름.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수미산(須彌山)의 사방에 네 대륙(四洲)이 있는데, 염부라는 이름은 여기에 자란다는 점부(jambu)에 유래하며, 남방에 있기 때문에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 한다.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라 하며, 여러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은 사주(四洲) 가운데 이곳뿐이라 함. 불전에서는 인간세계의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권화신(權化身) ; 불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변하여 나타난 몸.
*권화(權化) ; 산스크리트어  avatāra ①불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몸이나 모양으로 변하여 나타나는 것. 권현(權現) · 화현(化現) · 응현(應現)이라고도 한다. ②화신(化身)과 같음.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호명(護明) 보살의 이름으로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임.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전판(全판) ; 하나도 남김이 없는 전부.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발로(發露 드러내다·밝히다 발/드러내다 로) ; 숨은 것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숨은 것을 겉으로 드러냄. 또는 그런 것.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재앙(災殃 재앙 재/재앙 앙) ; 뜻하지 않게 생긴 불행한 변고(變故). 또는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생긴 불행한 사고.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상(相)없이2022. 2. 24. 06:57

 

 

§(330) (게송)허공경계기사량~ / 영랑신선, 불로장생, 일장춘몽, 달팽이 뿔 / 비사왕과 가섭존자 설화 / 도에 들어가는 첫째 단계가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버리는 것.

옛날 도인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도(道)에 들어가는 첫째 단계가 그러한 국집을 버리는 것이여.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버리는 것이여. 
우리 중생은 아애(我愛), 아만(我慢), 아치(我癡), 이것이 우리 중생 그 제7식(七識)의 본업인데, 그놈에 딱 국집을 해 가지고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내 것이다’  ‘내가 잘한다’  ‘내가 옳다’ 이러한 아애, 아만, 아치, 이것 때문에 도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자기의 국집을 버려야 합니다.


**송담스님(No.330)—87년 5월 첫째일요법회(87.05.03) (용330)

(1) 약 17분.

 

(2) 약 20분.


(1)------------------

허공경계기사량(虛空境界豈思量)고  대도청유이갱장(大道淸幽理更長)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단득오호풍월재(但得五湖風月在)인댄  춘래의구백화향(春來依舊百花香)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허공경계(虛空境界)를 기사량(豈思量)고, 허공의 경계를 어찌 사량(思量)할고?
이 허공이, 허공세계가 동서남북 사유(四維) 사방으로 끝없이 높고 끝없이 넓은데 그 허공의 경계를 어찌 우리 사량분별로써 가늠을 할 수가 있겠느냐.

대도청유이갱장(大道淸幽理更長)이다. 대도(大道), 큰 도의 맑고 그 깊은 도리는 그 허공만큼 그렇게 멀고도 높고도 길더라.
저 허공도 그 갓을 알 수가 없고, 얼마나 넓고 높은 그것을 알 수가 없거든 하물며 대도의 그 깊고 넓은 이치를 그거 어떻게 사량분별로 알 수가 있겠느냐 이거여.

단득오호풍월재(但得五湖風月在)인댄, 다맛 오호(五湖)의 그 풍월(風月)이 있음을 얻는다면—동서남북의 그 호수가 있고 거기에 풍월이 있으면,
춘래의구백화향(春來依舊百花香)이니라. 봄이 오면 옛을 의지해서 백 가지 꽃이 향기롭다. 산이 있고 들이 있고 호수가 있고 그러면 봄이 오면은 방방곡곡에 빨갛고 노랗고 온갖 백화(百花)가 그 향그럽게 필 것이다.


오늘은 정묘년 5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방금 우리는 조실스님의 녹음법문을 경청을 했는데 여러분께서 들으신 바와 같이 원효(元曉) 스님 당시 그 야운(野雲) 비구라고 하는 그 스님이 도를 깨닫는 그 기연(機緣)에 대해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영랑신선이라고 하는 신선이 저 동해가 몇 번 말랐다 다시 또 물이 찼다 하도록 그러니까 몇 겁 동안을 죽지 않고 신선으로써 그것을 다 겪고 불로장생(不老長生)하는 인자 그러한 신선이,
다 이 오신통(五神通)이 자재해서 천안통과 천이통, 숙명통, 타심통 모다 이런 신족통, 이 다섯 가지 신통을 얻은 영랑신선이, 아주 신선도 사뭇 몇 겁이 되어 가지고 늙으니까, 아주 원숭이인지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인자 초췌해져 가지고 추워서 못견디니까,
원효스님 토굴에 와 가지고 그 불씨를 찾아가지고 그 불을 쬐고 그렇게 하다가 원효스님한테 붙들려서 그래 가지고 결국은 원효스님의 언하(言下)에 대도를 성취했다고 하는 그런 전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여기서 이 설화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신선도를 닦아가지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그러한 도리를 터득을 하면 오신통이 다 나고 해서, 중국의 팽조(彭祖) 같은 사람도 칠백 세(歲)를 살았다고 전해오고 그 이후에도 많은 신선도를 닦은 사람들이 뭐 오백 세 삼백 세는 보통 다 살고 그런데,

신선도의 도 닦아 가는 그 요령이 무엇이냐 하면은 순전히 이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해 가지고 단전호흡에 통달을 하면 그렇게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장생불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아주 참 계행(戒行)을 지키면서 잘하면 오신통이 난 걸로 그렇게 전해집니다.

그런데 우리 불법(佛法)은 그런 신통 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또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장생불사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지를 않는 것입니다.
물론 참선을 하면서 단전호흡을 하기는 합니다만은 단전호흡을 하기는 하되, 신선들이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장생불사하고 신통이 나기 위해서 하는 그러한 목적으로 단전호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신선도를 잘 닦아가지고 오신통이 나가지고 이 몸뚱이를 가지고 몇 겁을 살았어도 결국 초췌해져 가지고 나중에는 그러한 그 영랑신선처럼 비참한 양상으로 타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행히 원효스님과 같은 그러헌 도인(道人)을 만났기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지, 그렇지 않았으면 결국은 가련하게 비참하게 처량한 종말을 맞이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물며 인간 세상에 있어서 부귀영화나 그 오욕락을 자기의 뜻대로 얻어서 그것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 70년, 높은 벼슬도 해 보고, 큰 부자도 되어 보고, 큰 권리도 써 보고, 예쁜 아내를 얻고, 좋은 아들들을 갖고, 그래 가지고 참 남부럽지 않게 부귀공명을 이룬다 하더라도 잠깐 꿈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오신통과 불로장생법을 얻었어도 결국 끄터리 가서는 그렇거든, 하물며 이 허망한 인간 세상에 있어서의 오욕락(五欲樂)—재산이라든지, 색(色)이라든지, 명예 권리나 안락 그런 것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봄날 뜨뜻한 양지에서 잠깐 낮잠을 졸다가 꿈속에서 부귀를 누리다가 퍼뜩 낮잠을 깨고 보니 참!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내지 못하다’ 이렇게 인간의 부귀영화와 흥망성쇠를 춘몽에다가 고인(古人)들은 다 비유를 했습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지(實地)가 그런 것입니다.

정말 그래서 옛날 도인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현들은 그러한 인간 세상의 부귀영화를 달팽이 뿔에다가도 비교를 했습니다.

달팽이의 그 뿔이라는 것이 잠깐 푹 길게 나왔다가 또 그냥 쑥 속으로 들어갔다가, 또 가만 놔두면 또 쑥 길게 뻗었다가 또 살짝 건들면 또 쑥 들어갔다가, 부자가 되었다가 가난해졌다가, 무슨 권리를 누렸다가 또 권리가 없어졌다가, 이러한 것이 달팽이 뿔따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데 사람들은 그 달팽이 뿔따구 보다도 더 허망한 부귀공명을 위해서, 그 받기 어려운 사람 몸, 만나기 어려운 이 세상에 몸을 받아 나 가지고 그 달팽이 뿔따구와 같은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그 몸과 목숨과 시간을 거기다 다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추구한 만큼 마음대로 얻어지기도 어렵지만, 얻어 놓고 보면 ‘아! 이것이 아니다’고 하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는 것이고, 얻어 놓고 보면 참다운 행복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겪은 뒤에사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한 번 두 번 겪어보면 퍼뜩 그것을 깨닫게 되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일생 동안에 수없이 그러한 부귀공명이라든지 흥망성쇠가 허망하다고 한 것을 수십 번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 해보고 겪어보고 그래 가지고 마지막 죽을 때에사 ‘하! 인생이라고 한 것은 참 허망한 것이었구나’ 죽을 때에사 겨우 깨닫게 되고,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숨 끊어지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미련과 원망과 한을 품고서 숨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비사왕(鞞肆王)이라고 하는 임금님이 있었는데, 그때 가섭(迦葉)이라고 하는 큰 도인이 계셨습니다.

그 비사왕이 그 가섭존자를 만나 가지고 묻기를, 『불교에서는 착한 일을 하면 천상에 태어나고, 악한 일을 하면 내생에 지옥에 간다고 모다 그래 쌌는데, 나는 그 소리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디가 내생이 있고, 어디가 무슨 지옥 천당이 있겠습니까?

그건 허무맹랑한 소리고 사람들을 속이는 소리고, 괜히 악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 하라고 그렇게 그 권선징악을 하기 위해서 공연히 사람들을 겁을 주는 소리지, 어디가 그 뭐 내생이 어디가 있고, 숨 한 번 끊어져서 죽어버리면 그만이지 무슨 내생이 있겠느냐고.
그런 명색이 도인이고 성인이라고 한 사람들이 멀쩡한 소리를 가지고 혹세무민을 한다, 세상을 속이고 모다 그런다 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 머리 위에 떠있는 해와 달은 그러면 금세(今世)를 위해서 있는 것이요? 내생(來生)을 위해서 있는 것이요?』하고 가섭존자가 물었습니다.
물으니까 비사왕이 『그런 소리 물어봤자 나는 내생은 도저히 있다고 믿을 수가 없다』고, 『해야 오늘을 위해서 떴건, 내일을 위해서 떴건 그것은 가만 놔둬도 떴다 졌다 하는 것이지 무슨 거기다 대고 금생 내생을 따지느냐? 나 그래도 그런 것은 내생은 나는 안 믿는다』고.
『인과(因果)도 안 믿고 내생도 그런 것도 안 믿는다.』 그러니까,(처음~17분9초)

 

 

 



(2)------------------

가섭존자의 천당, 지옥 비유.

『그러면 어째서 그렇게 안 믿소?』 그러니까,
『내가 잘 아는 사람, 아주 일생 동안을 착한 일만 하고 그런 사람보고 그 사람이 죽을라고 할 때, ‘당신은 일생 동안을 좋은 일만 하고, 마음씨를 착하게 하고, 행동을 착하게 하고 그랬으니 당신은 틀림없이 천당에 갈 거요. 만약에 천당이라고 하는 곳이 사실 있다면 당신은 천당에 갈 것이니, 천당에 가걸랑 바로 와 가지고 나한테 천당이 이렇게 이렇게 생겼고, 실지로 있다고 한 것을 나한테 보고를 해 주시오’하고 신신부탁(申申付託)을 했는데, 그 사람이 한번 죽어가더니 천당에를 갔는지 어디로 꼬꾸라졌는지 다시는 와서 말 안하더라 이거지요.

또 자기가 안 사람 가운데 천하에 고약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은 사기협잡에다가 사람을 많이 죽이고, 온갖 못된 짓을 다하고, 참! 인간으로서는 그럴 수가 없는 짐승만도 못한 그런 못된 놈이 내가 잘 아는 사람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어서,

내가 그래도 마지막 죽게 된다고 그래서 그 문병을 안 갈 수가 없어서 가 가지고, ‘참, 죽어갈라고 하는데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당신은 틀림없이 죽으면 지옥에 갈 거요. 지옥에 갈 건데 제발 지옥에 가거든, 나한테 와서 그 지옥이 사실로 있는 고대로 그 본대로 와서 얘기를 해달라’고
그러면서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 사람이 한번 죽더니 다시는 오지 않더라. 그러니 어찌 그 지옥도 있다고 내가 믿을 수가 없고, 천당도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안 믿는다.』 그러니까,

그 가섭존자가 『참, 그 대왕 말씀을 들으니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내 말을 한번 들어보시오.
어떤 사람이 똥구덩이에 빠졌다가 겨우 거기서 나와 가지고 깨끗이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몸에다 향수를 치르고 그랬던 사람이 어찌 다시 똥항에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겠소?
그와 같아서 인간세상에 모다 그 죄 많은 이 고해에 있다가 착한 일을 한 그 공덕으로 천당에 한번 갔으면 거기 가서 보니깐 너무너무 좋고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이 인간세상에 당신한테 그 소리 할라고 여기를 오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이 대왕이 역적을 한 놈을 잡아가지고 취조를 하는데 그 죄인이 ‘내가 마지막 이렇게 죽어가니 내 부모형제와 고향을 한번 가서 다 둘러보고 하직 인사라도 하고 그러고 올 테니 나를 좀 놔 주시오’하면은 당신이 놔 주겠습니까?』

『나 안 놔 주지요.』
『그와 같습니다. 죄 지어가지고 지옥에 한번 갔으면 저는 쇠사슬에 묶여서 고문 받느라고 볼 일을 못 볼 텐데, 누가 당신한테 가서 지옥고 구경한 것 얘기하라고 지옥에서 놔 주겠습니까?

그러니 천당에 한번 올라가면은 갔다 왔다고 보고한 사람도 없을 것이고, 지옥에 한번 떨어진 사람이 지가 무슨 그 권리가 있어서 와서 그것을 보고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거지. 천당이 없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지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존자가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으나 그런 소리 쯤 가지고 내가 인과를 믿을 사람이 아니여.』 그래 가지고 아주 인과를 막 부인을 하고,
『그런 소리는 하나의 비유는 될지 모르지만은 나는 그래 지옥이니 천당이니 그따위 소리를 나는 믿을 수가 없다.』

 



새끼 타래와 은전, 금전의 비유.

『그러면 내가 또 하나 비유를 들어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둘이 여행을 가는데, 둘이 다 가는데 좋은 새끼를 꽌 타래가 있으니까 둘이 그놈을 짊어질 만큼 가득 짊어졌다 이것입니다.
‘이건 참, 집에 가지고 가면은 농사 짓는데도 필요하고, 뭘 묶는데도 필요하고 그러니 우리 이것 임자도 없고 버린 것이니까 우리가 짊어지고 가자’

짊어지고 가다가 얼마쯤 땀을 흘리다 가니까, 아! 뭔 주머니가 하나 있는데 그 주머니를 열어보니까 은이 가득 주머니 속에 들었다 그말이여.
묵직한 은전(銀錢)이 들어있어서 그 앞서간 사람이 그 은전을 자기가 딱 짊어지고 그 은전이 무거우니까 ‘에이, 이까짓 거’ 새끼 짐은 갖다가 벗어 내동댕이쳐 버리고 얼마만큼 가니까,

또 무슨 주머니가 있어서 그 주머니를 보니까 아! 그 속에는 황금이 번쩍번쩍한 황금전이, 황금이 그냥 그 속에 가득 들었다 그말이여.
이것 자기가 갖고 싶지만 자기는 이미 은전 뭉텅이를 줏었으니까 뒤에 온 사람보고 ‘여기에 금전(金錢)이 있으니 당신 그 새끼 뭉텅이 버려버리고 이 금전 뭉텅이를 당신 가지시오’하니까,

‘아니 나 그것 싫소. 내가 이 새끼 뭉텅이가 이걸 얼마나 필요해서 이것을 여기까지 참! 수십 리를 이놈을 짊어지고 애써서 왔는데, 이것 고향에 가지고 가면 농사짓는데 꼭 필요한데, 이렇게 애써서 짊어지고 온 것을 내가 버리고 그 금전 뭉텅이를 내가 가지고 가겠느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고 기어이 그 사람이 금전 뭉텅이를 안 가지고 새끼 뭉텅이를 가지고 간다고 고집을 하니까,
아! 이 사람은 할 수 없이 그 사람이 안 갖는다 하니까, 은전 뭉텅이를 둘 다 가지고 가면 좋겠는데 너무 무거워서 은전 뭉텅이는 그냥 버려버리고 금전 뭉텅이만 갖다 한 짐 짊어지고 인자 고향에로 오니까, 그 가족들이 모두 그 금전을 그놈을 갖다가 한 닢만 팔아도 논이 몇 마지기요, 두 닢만 팔아도 그냥 고대광실(高臺廣室) 좋은 집을 짓고 아주 그냥 양식도 사고, 종도 들이고.

또 그 돈이 그리고도 한량없이 남으니까 절에 시주도 하고, 양로원 고아원에다가 또 보시도 하고, 뭐 일가친척 가난한 사람도 노나주고, 돈 없어서 학교 못 다니는 사람, 돈 없어서 병 앓고 있는 사람, 그런 데다 아주 적절히 써서 참 그 사람은 잘살게 되었는데,

아! 새끼 뭉텅이만 잔뜩 짊어지고 간 사람은 짊어지고 가자 집안 식구들한테, ‘아무개는 금전을 가지고 와서 저렇게 잘사는데, 병신 같은 것이 새끼 뭉텅이만 짊어지고 와 가지고 그까짓 것 무엇에 쓰냐’고 막 혼구녕만 났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는 집안 식구한테도 대접을 못 받고 아! 계속해서 가난뱅이 신세를 못 면하는데, 마치 대왕은 그 ‘내생이 없다’하고, 「무슨 착한 일을 하면 천당에 간다. 악한 일을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하는 이런 인과법을 믿지 않는 것으로써 자기의 고집을 삼고,
끝까지 내가 이 성현의 말씀을 해 준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것은 마치 새끼 뭉텅이 그놈 그것 땀 흘리면서 짊어지고 온 것이 아까워서 그 은전 뭉텅이나 금전 뭉텅이를 보고도 그놈을 취하지 아니하고, 새끼 뭉텅이만 잔뜩 짊어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과 대왕님과는 너무나도 같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대왕님이 말이 꽉 막혔습니다. 


한참을 말이 막혀서, 이것 내가 이 고집을 꺾자니 이 존자 앞에 참 창피하기도 하고, 또 가섭존자의 말씀이 절대로 들어보니 그럴싸하기는 하고,
그래서 『사실은 내가 여태까지 임금 노릇을 하면서 입만 벌렸다 하면은 ‘내생이라는 것은 없다’ 입만 벌렸다 하면은 인과를 부인을 하고 이래 왔는데, 이런 것을 만조백관(滿朝百官)이 다 알고 있는데, 내가 존자 말을 듣고서 그 여러 해 동안을 내가 그 주장을 해 오고 고집을 해 온 이것을 존자한테 설복(說伏)을 당했다 한다면 내 임금의 채신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그것이 참! 딱해서 그럽니다.
그거 그 문제만 아니면은 내가 그냥 그것 참! 존자 말씀이 그것 참! 틀림없는 말인데, 임금으로써, 내가 평민만 같아도 모르겠는데 임금으로써 존자한테 내가 설복을 당했다고 해서야 내가 앞으로 어떻게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나의 고집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맷돼지 왕의 똥 갑옷 비유.

『참! 딱합니다. 내가 비유를 하나 더 들어서 얘기를 하지요.
아주 큰 멧돼지가 있었는데, 그놈은 많은 그 작은 멧돼지를 거느리고 사는 멧돼지의 왕인데 왕초인데, 그놈이 그 자기네 부하들을 거느리고 아주 큰소리를 치고, 쪽 자기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은 그 나발대로 받아가지고 그냥 막 혼구녕을 내고 해 가지고 누구고 그 멧돼지 왕초한테는 수백 마리 멧돼지들이 꼼짝을 못하고 그러는데 아! 그렇게 큰소리를 뻥뻥 치다가 호랭이를 만났습니다.

호랭이를 만났는데 인자 그 부하들 보는 데에서 호랭이한테 참 항복할 수도 없고, 정면상대해서 싸우자니 호랭이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한번 할퀴어서 쥐어 뜯어버리면 꽥 소리도 못하고 죽을 것 같고,
참 딱해서 그 멧돼지 왕이 한참 동안을 꾀를 내다가 호랭이 보고 ‘내가 잠깐 우리 선조 때부터서 내려오는 그 갑옷이 있으니 내가 그 갑옷을 입고 나와 가지고 내가 한바탕 당신하고 해볼 양이니, 내 갑옷 입은 것이 무서우면 당신이 먼저 길을 비켜서 먼저 가고, 나하고 기어코 한바탕 해볼 생각이 있으면 내가 갑옷 입을 때까지 잠깐 기달려 주오’ 그러니까,

호랭이가 지까짓 놈이 갑옷 아니라 별것을 입고 온들 그까짓 것 문제가 없으니까 ‘갑옷 입고 나올테면 입고 나와 보라’고,
멧돼지란 놈이 꿀꿀거리면서 어디를 가더니 사람 똥항 속에 풍 들어가서 허우적허우적하면서 온 몸뚱이에다가 똥을 잔뜩 쳐바르고 나와 가지고는 ‘자 덤빌라면 한번 덤벼보라’

그러니까 호랭이란 놈이 저놈이 갑옷이라더니 어디서 똥을 뒤집어쓰고 나와 가지고,
‘야! 그것이 네 선조 때부터서 내려오는 갑옷이냐?  에이, 더러운 놈의 자석. 나 너하고 싸움 안할 테니까 빨리 꺼져라 이 자식아!’

그래 가지고 그 멧돼지가 그 꾀는 참 비루하고 추잡한 꾀를 냈지만 영락없이 호랭이를 싸우지 않고 물리쳤습니다. 저는 그리고서 부하 앞에서 ‘아! 내가 나의 이 지혜로써 저 건방진 놈을 내가 물리쳤다’고 아주 뻐개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번연히 대왕님의 생각이 틀리고 그 성현의 말씀이 옳고 내 말이 옳은 데도, 그 신하들이 창피하다고 해서 그 자기의 잘못된 소견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 똥을 뒤집어쓰고 나와 가지고 호랭이 보고 물러서라고 한 것과 어찌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임금님이 참 너무 부끄럽게 생각을 하고 이 동곳을 빼고 그 존자 앞에 항복을 했습니다.
이것은 참, 한 설화(說話)입니다만은 이게 중아함경(中阿含經)에 나오는 부처님의 설화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선입관(先入觀)이 있습니다.
정치가나 법률가나 학자나 또는 실업가나 또는 뭐 무역이나 장사하는 사람 모든 사람, 심지어 구두를 닦는 사람은 구두를 닦는 사람, 또 구들을 놓는 사람은 구들 놓는 사람, 목수, 미쟁이 무엇을 하든지, 남 보면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은 자기 자신은 자기 나름대로의 일가지견(一家之見)이 있고 철학이 있습니다.

또 여기에 사부대중이 모다 모이셨습니다만은 당신 나름대로 다 경도 보고, 기도도 해 보고, 염불도 해 보고, 또 주력도 해 보고, 또 참선도 해 보고, 그래 가지고 각기 일가지견이 자기 나름대로 있습니다.
다 해 봐 가지고 「참선은 이러한 것이다.」 「염불은 이런 것이다.」 「불법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다 자기 소견(所見)이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비사왕처럼 딱 자기 소견이 있어 가지고 여간해서 그것을 버리지를 않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러한 선입관에 국집(局執)이 되어 가지고 깨달음에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불법은 깨달음을 얻어가지고서도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한 생각만 가져도 벌써 그것이 미(迷)한 것인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했거나 수다원(須陀洹)이나 사다함(斯陀含)이나 아나함(阿那含) 이런 성과(聖果)를 얻어가지고서도 ‘내가 이러한 성과를 얻었다’하는 생각을 내면, 벌써 그것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에 떨어진 것이어서 그것이 참다운 도에 들어간 것이 아닌데, 깨달음에 들어간 것도 아닌 그밖에 다른 생각에 국집을 한다면 그것은 참 언어도단인 것입니다.

도(道)에 들어가는 첫째 단계가 그러한 국집을 버리는 것이여.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버리는 것이여. 

우리 중생은 아애(我愛), 아만(我慢), 아치(我癡), 이것이 우리 중생 그 제7식(七識)의 본업(本業)인데, 그놈에 딱 국집을 해 가지고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내 것이다’  ‘내가 잘한다’  ‘내가 옳다’ 이러한 아애, 아만, 아치, 이것 때문에 도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자기의 국집을 버려야 합니다.

이 말을 ‘자기의 주관을 버리라’  ‘자기의 주체의식을 버리라’ 이러한 말과 혼동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물론 한국 국민은 한국 국민으로서의 주체의식이 있어야 하고, 내가 어떠한 사업을 하니 무엇을 하는데 있어서도 확고한 주관이 서야지요.
하지만 도에 있어서의 그 선입관, 선입관이 딱 가로막고 있으면 어떠한 선지식의 말을 들어도 먹혀 들어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까 이 비사왕이 그러한 삿된 소견을 국집을 해 가지고 그렇게 존자가 알아듣겄게 얘기를 해 주어도 거기에 항복을 하지 아니하고 믿지 않을려고 한 것처럼, 다행이 이런 가섭존자와 같은 그러한 참 그 변재(辯才)가 무궁무진한 그리고 지혜와 자비가 넘치는 이런 훌륭한 도인을 만나서 결국은 항복은 해서 다행입니다마는, 우리도 어쨌든지 그러한 사견(邪見)에 빠져가지고 정법에 나아가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17분10초~37분13초)

 

 

 



------------------(1)

*(게송) ‘허공경계기사량~’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야부 게송 참고.
*풍월(風月) ; ①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어깨너머로 배운 짧은 지식. ②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읊거나 노래함. 또는 그 시나 노래.
*백화(百花) ; 온갖 꽃.
*기연(機緣) ; 어떤 기회를 통해 맺어진 인연(因緣).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선가귀감](용화선원) p94-95 참조.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끄터리 ; '끄트머리'의 사투리.
*일장춘몽(一場春夢) ; '한바탕의 봄꿈'이라는 뜻으로, 헛된 영화나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실지(實地) ; ①실제의 처지나 경우. ②실제의 땅이나 장소.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가 지은 복(福)으로, 복을 지은 만큼 쓰면 다함이 있다.
*삼생(三生) ; 과거와 현재, 미래를 뜻하는, 전생(前生), 현생(現生), 후생(後生,來生)을 아울러 이르는 말.
*비사왕과 가섭존자의 설화 ; 중아함경 제16권  6.왕상응품 (71) 비사경(鞞肆經) 참고.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 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
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2)

*신신부탁(申申付託) ; 여러 번 되풀이하여 간곡하게 하는 부탁.
*똥항(똥缸 항아리 항) : 재래식 화장실(칙간)의 바닥을 파고 이를 묻어 분뇨를 저장하던 것으로 이 항아리에 분뇨가 가득 차면 똥장군 등에 퍼담아 밭에 내다 거름으로 이용하였다.
*고대광실(高臺廣室) ; '높은 누대(樓臺)와 넓은 집'이라는 뜻으로, 크고 좋은 집을 이르는 말.
*혼구녕 ; 혼꾸멍나다(魂----  '혼나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
*만조백관(滿朝百官) ; 조정의 모든 벼슬아치.
*설복(說伏) ; ①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알아듣도록 말하거나 타일러서 수긍하게 함. ②남의 주장이나 이론을 깨뜨려 굴복하게 함.
*채신 ; ‘처신(處身, 세상살이나 대인 관계에 대해서 가지는 몸가짐이나 행동)’을 낮잡아 이르는 말.
*호랭이 ; ‘호랑이(虎狼-)’의 사투리.
*자석 ; 자식(子息, 남자를 욕할 때 '놈'보다 낮추어 이르는 말)의 사투리.
*뻐개다 ; 뻐기다. 얄미울 정도로 매우 우쭐대며 뽐내다.
*번연히 ; ‘번히(어떤 일의 결과나 상태 따위가 훤하게 들여다보이듯이 뚜렷하고 분명하게)’의 본말.
*동곳(을) 빼다 ;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힘에) 머리를 풀어 항복을 표시한다는 뜻으로, 주장이나 뜻을 굽히고 복종하다.
*동곳 ; 상투를 튼 후에 상투가 풀어지지 않게 꽂는 물건. 금, 은, 호박, 비취 따위로 만드는데, 길이는 약 4센티미터 정도이다.
*설화(說話) ; ①어느 민족이나 집단에 예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 신화(神話), 전설(傳說), 민담(民譚) 등이 있다. ②실제 있었던 일이나 만들어 낸 내용을 재미있게 꾸며서 하는 말.
*중아함경(中阿含經) ; 아함경(阿含經)의 하나. 아함(阿含)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āgama의 음사로, 전해 온 가르침이라는 뜻. 초기 불교시대에 성립된 수천의 경전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팔리(pāli) 어로 된 니카야(nikāya)가 있고, 여기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sanskrit) 본(本)이 아가마(āgama)임.
이 아가마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아함경으로 여기에는 ①장아함경(長阿含經) ②중아함경(中阿含經) ③잡아함경(雜阿含經) ④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네 가지가 있다.
(1) 장아함경(長阿含經). 22권 30경. 문장의 길이가 긴 경전을 모은 것.
(2) 중아함경(中阿含經). 60권 222경. 문장의 길이가 중간 정도인 것을 모은 것.
(3) 잡아함경(雜阿含經). 50권 1,362경. 짧은 경전을 모은 것.
(4)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51권 471경. 사제(四諦)·육도(六度)·팔정도(八正道) 등과 같이 법수(法數)를 순서대로 분류하여 엮은 것. 이에 해당하는 니카야는 다음과 같음.

(1) 디가 니카야(dīgha-nikāya, 長部). 내용이 긴 34경을 모은 것으로 3편으로 분류되어 있음. 한역 장아함경에 해당함.
(2) 맛지마 니카야(majjhima-nikāya, 中部). 중간 정도 길이의 152경을 모은 것으로 약 50경씩 3편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다시 각 편은 5품으로, 각 품은 대개 10경 단위로 구성되어 있음. 한역 중아함경에 해당함.
(3) 상윳타 니카야(saṃyutta-nikāya, 相應部). 짧은 경전 2,875경을 주제에 따라 분류하여 배열한 것으로 전체가 5품으로 되어 있음. 한역 잡아함경에 해당함.
(4) 앙굿타라 니카야(aṅguttara-nikāya, 增支部). 2,198경이 법수(法數)에 따라 1법에서 11법까지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음. 한역 증일아함경에 해당함.
(5) 쿳다카 니카야(khuddaka-nikāya, 小部). 법구경·경집·본생담 등 15경으로 구성되어 있음.
*선입관(先入觀) ; 어떤 사람이나 사물, 또는 주의나 주장에 대하여, 직접 경험하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 형성된 고정 관념이나 견해.
*일가지견(一家之見) ; 일가견(一家見). 어떤 일에 관하여 일정한 경지에 오른 안목이나 견해.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수다원(須陀洹) ; 산스크리트어 srota-āpanna 팔리어 sota-āpanna의 음사(音寫). 예류(預流)·입류(入流)라고 번역.
욕계·색계·무색계의 견혹(見惑)을 끊은 성자. 깨달음의 길을 하천의 흐름에 비유하여 그 흐름—처음으로 성자의 계열에 들었으므로 예류·입류하고 함.
이 경지를 수다원과(須陀洹果)·예류과(預流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수다원향(須陀洹向)·예류향(預流向)이라 함.
초기불교에서 - 성문(聲聞)으로서 - 해탈하는 길은 ‘성문사과(聲聞四果)’라고 하여, 수다원(須陀洹)·사다함(斯陀含)·아나함(阿那含)·아라한(阿羅漢)의 4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견혹(見惑)—①사제(四諦)를 명료하게 주시하지 못함으로써 일어나는 번뇌. 이 번뇌에는 유신견(有身見)·변집견(邊執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급취견(戒禁取見)·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가 있음. 
② 유식설에서, 후천적으로 습득한 그릇된 지식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 곧 분별기(分別起)를 말함.]
*사다함(斯陀含) ; 산스크리트어 sakṛd-āgāmin 팔리어 sakad-āgāmin의 음사(音寫). 일래(一來)라고 번역.
욕계의 수혹(修惑)을 대부분 끊은 성자. 그러나 이 성자는 그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한번 천상의 경지에 이르렀다가 다시 인간계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다고 하여 일래(一來)라고 함.
이 경지를 사다함과(斯陀含果)·일래과(一來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사다함향(斯陀含向)·일래향(一來向)이라 함.
[수혹(修惑)—① 수도(修道)에서 끊는 번뇌라는 뜻.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일어나는 번뇌. 이 번뇌는 욕계에 탐(貪)·진(瞋)·치(癡)·만(慢), 색계와 무색계에 각각 탐(貪)·치(癡)·만(慢)의 열 가지가 있음.
② 유식설에서, 선천적으로 타고난 번뇌, 곧 구생기(俱生起)를 말함.]
*아나함(阿那含)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anāgāmin의 음사. 불환(不還)·불래(不來)라고 번역.
욕계의 수혹(修惑)을 완전히 끊은 성자. 이 성자는 색계·무색계의 경지에 이르고 다시 욕계로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환(不還)이라 함.
이 경지를 아나함과(阿那含果)·불환과(不還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아나함향(阿那含向)·불환향(不還向)이라 함.
*아라한(阿羅漢) ; 산스크리트어 arhat의 주격 arhan의 음사. 응공(應供)·응진(應眞)·무학(無學)·이악(離惡)·살적(殺賊)·불생(不生)이라 번역.
마땅히 공양 받아야 하므로 응공(應供), 진리에 따르므로 응진(應眞), 더 닦을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 악을 멀리 떠났으므로 이악(離惡), 번뇌라는 적을 죽였으므로 살적(殺賊), 미혹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불생(不生)이라 함.
① 성문(聲聞)들 가운데 최고의 성자. 욕계·색계·무색계의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무학위(無學位)로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번뇌는 다하였으며, 해야 할 바를 다하였고, 윤회에서 해탈하여 열반을 성취한 성자.
이 경지를 아라한과(阿羅漢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아라한향(阿羅漢向)이라 함.
② 존경받을 만한 불제자.
③ 고대 인도의 여러 학파에서, 존경받을 만한 수행자를 일컫는 말.
*성과(聖果) ; 성자(聖者)의 지위. 성인(聖人)의 도달경지[果].
성자, 성인이란 무루혜(無漏慧, 번뇌를 끊어내는[無漏] 지혜[慧])의 일부를 성취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도(聖道, 성스러운 길, 성인의 길,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말한다.
수도(修道), 성도(聖道)는 부파불교의 사향사과(四向四果), 대승불교의 보살십지(菩薩十地)를 말한다.
*아상(我相) ; 산스크리트어 ātma-saṃjñā  나라는 관념·생각.  자아(自我)라는 관념·생각.  자의식.  남과 대립하는 나라는 관념·생각.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
*인상(人相) ; 산스크리트어 pudgala-saṃjñā  인간이라는 관념·생각. 사람은 고귀하므로 지옥 중생이나 축생들과 다르다고 집착(執着)하는 견해.
*중생상(衆生相) ; 산스크리트어 sattva-saṃjñā  중생이라는 관념·생각. 부처와 중생을 따로 나누어 나 같은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고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고 스스로 타락하고 포기하여 향상과 노력이 없는 소견.
*수자상(壽者相) ; 산스크리트어 jīva-saṃjñā  목숨이라는 관념·생각. 목숨이 있다는 관념·생각. 생명체라는 관념·생각. 자기의 나이나 지위나 학벌이나 문벌이 높다는 것에 집착된 소견.
*아애(我愛) ; 자아에 대한 애착심.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아만(我慢 나 아/거만할·게으를 만) ; 스스로를 높여서 잘난 체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① 오온(五蘊)의 일시적 화합에 지나지 않는 신체에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는 그릇된 견해에서 일어나는 교만. 자아가 실재한다는 교만.
②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김. 자신을 과대 평가함.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아치(我癡) ; 자아(自我)를 바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말나식(末那識) ; 말나(末那)는 [산스크리트어] manas의 음사로, 의(意)라고 번역.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과 구별하기 위해서 의(意)라 하지 않고 말나(末那)라고 한다.
마음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8식(八識: 8가지의 식) 가운데 하나로 제7식(第七識), 제7말나식(第七末那識) 또는 말나(末那)라고도 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끊임없이 자아(自我)라고 오인하여 집착하고, 아뢰야식과 육식(六識)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여 끊임없이 육식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으로, 항상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의 네 번뇌와 함께 일어남.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種子)를 이끌어 내어 인식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생각과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
*본업(本業) ; ①주가 되는 직업. ②주로 하는 일.

Posted by 닥공닥정
법회(입춘기도)2022. 2. 21. 23:56

 

 

§(098) (게송)약야산중봉자기~ / 용화사에서는 활구참선법을 들려 드린다 / 포대화상, 미륵불의 화현 /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부처님 계신 곳, 바로 그 도리 보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 ‘이뭣고?’ / 참회, 이참(理懺)과 사참(事懺) / 업장소멸, 재난을 멀리하는 영원한 효력의 진짜 부작, ‘이뭣고?’ / 부처님 삼불능(三不能) / 무당집에 다니신 발은 깨끗이 씻어라.

**송담스님(No.098)—1979년 입춘 법회(79.02.04) (입춘기도)

 

(1) 약 20분.

(2) 약 17분.


(1)------------------

약야산중봉자기(若也山中逢子期)인대는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냐
나무~아미타불~

만약 산중에서 자기(子期)를 만났다면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리요. 어찌 누런 이파리를 가지고 산아래로 내려갈 것이냐.
자기(子期)라고 하는 사람은 성(姓)은 ‘쇠북 종(鍾)’ 자 종씨인데, 종자기(鍾子期)라고 하는 사람은 저 중국 고대에 요임금 당시 거문고의 이치, 음악의 이치에 달통한 사람입니다.

그때 백아(伯牙)라고 하는 사람이 대단히 거문고를 잘 탔습니다. 백아라고 하는 사람은 아주 거문고를 타기로 아주 통달한 사람인데, 백아라고 하는 사람이 거문고를 떠억 뜯으면 너무 거문고를 잘 뜯고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서 보통 사람은 그 백아의 거문고 타는 것을 능히 감상을 할 줄 모릅니다.
오직 종자기(鍾子期)라고 하는 사람만이 그 백아(伯牙)의 거문고 타는 것을 듣고서, '아! 지금 백아라고 하는 사람이 유유히 흐르는 큰 강물을 생각하면서 거문고를 뜯고 있구나' 또 어쩐 때는 '아! 지금 저 백아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들어보매, 높고 높은 태산준령을 생각하면서 저 거문고를 뜯고 있구나'

그렇게 종자기라고 하는 사람은 백아의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백아의 마음 소리를 능히 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종자기라고 하는 사람이 천명(天命)을 다하여 죽게 되자 백아라고 하는 사람은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아니했다고 그럽니다.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탄생을 하셔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대도를 성취하신 다음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묘법(妙法)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종자기와 같은 그러한 사람을 만났다면 어찌 49년 동안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동안 그러한 많은 방편설(方便說)을 설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자기(子期)와 같은 사람을 산중에서 만약 만났다면 어찌 누른 이파리을 가지고 산아래로 내려갈 것이냐?

누른 잎[黃葉]이라 하는 것은 은행잎이나 단풍잎 같은 그런 아주 예쁘고 고운 그러한 단풍잎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린애들을 달랠 때에 노란 또는 빨간 단풍잎을 주면서 ‘여기 있다. 돈, 여기 있다. 돈’ 이렇게 우리는 어린애들을 곧잘 달래는 것입니다.

방편설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 불가결(不可缺)한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린애를 달랠 때에 사탕 같은 것이 있으면 다디단 사탕을 입에다 넣어 줘서 달래기도 하고, 사탕이 없으면 무슨 노란 이파리나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조그만한 돌멩이라도 집어 줘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슨 장난감 같은 것도 집어 줘서 잠시라도 어린애의 울음을 달래는 경우를 엄마들은 얼마든지 경험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방편, 또 동지 법회, 입춘 법회, 칠성 법회, 사월 초파일 관등(觀燈) 법회, 이런 법회가 노란 이파리를 가지고 어린애 울음을 달래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방편설, 이것이 모두 일맥상통(一脈相通)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노란 이파리만 가지고 달래 봤자 어린애는 잠깐 울음을 그쳤을 뿐, 배가 고픈 허기(虛飢)는 완전히 가시질 않은 것입니다. 다시 또 울음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일양(一樣)으로 노란 이파리만 가지고 여러분의 울음을 달래는데에 그치지를 아니하고, 정말 입에 넣어서 먹으면 배가 부를 수 있는 영양제를 여러분에게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국 각 사암에서는 입춘 불공이라 해 가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특히 입춘이 들은 시간을 기해서 불공(佛供)을 드리고 굉장히 복잡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용화사에서는 입춘에 이렇게 최상승 활구법문(活句法門)을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경청을 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새벽부터 저녁까지 목탁을 치면서 여러분이 일 년 동안 무장무애하시고 복을 많이 받도록 그렇게 간곡히 불공을 드린 것과 이렇게 경건한 자세로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들은 것과 비교를 해보시면, 조금이라도 뜻이 있으신 분은 능히 어느 것이 정말 올바른 불법(佛法)이고, 어느 것이 정말 우리를 영원히 복되게 하고, 행복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인가를 충분히 이해하시고 남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최초에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에 대해서 말씀이 계셨고, 그다음에는 포대화상(布袋和尙)에 법문을 하셨습니다.
포대화상은 중국 당나라 시대에 중국에 출현하신 이름도 성도 모르는 고향이 어딘지 그것도 알 수 없는 그러한 도인(道人)이 계셨습니다. 다못 큰 포대(布袋), 자루를 항시 어깨에다가 메고 다니시면서 사람만 만나면 손을 내밀면서 무엇이고 달라고 그랬습니다.

누가 무엇을 먹고 있으면 ‘나 좀 달라’고 해 가지고, 주면은 한입 뚝 비어 먹고 나무지기는 자루 속에다가 퐁 집어넣고, 그저 고기가 되었건, 과일이 되었건, 떡이 되었건, 닥치는 대로 얻어서 먹고 집어넣고, 얻어서 먹고 집어넣고, 자루 속에서 배고프면 꺼내 먹고, 썩거나 말거나. 누구든지 만나면 ‘나 돈 한푼 달라’고, 돈 한푼 주면 자루 속에다 탕 집어넣고.
‘너! 모레 물가에 가지 말아라’ ‘너! 이달 보름께는 차를 타지 말아라’ ‘너 내일 저녁에 니 마누라하고 싸우지 말아라’ 무엇이고 한마디 딱! 일러줍니다. 그러면 그 점이 백발백중 맞았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려고 하면은 나막신을 신고 줄달음질을 치고, 날씨가 좋은 날은 짚신을 신고 돌아다니고, 그래서 포대화상이 무슨 신을 신었는가 볼라면 일기(日氣)를 미리 알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과학 기구를 사용해서 기상대(氣象臺)에서 일기 예보를 해도 혹 맞기고 하고, 안 맞기도 하고 합니다마는 포대화상 발만 보면 백발백중이었습니다.

포대화상이 생존 시에는 아무도 그이가 도인(道人)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돌아가신 뒤에사 비로소 그분이 56억 7천만 년 뒤에 염부제(閻浮提)에 미륵불(彌勒佛)로 출현하실 부처님의 권화신(權化身)이라고 하는 것을 선지식(善知識)들은 짐작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 미륵불은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미륵보살(彌勒菩薩)로서 지금 머물러 계십니다. 56억 7천만 년 후에 미륵불로 출현하시지마는 그때까지는 너무너무 세월이 많기 때문에 우두커니 거기에 계시지를 아니하고 가끔가끔 보살로서, 보살의 몸으로 화현(化現)해 가지고 인연 따라 중생을 교화하시게 되는데, 그 경우에 한 경우가 바로 포대화상으로 출현하신 것이 되겠습니다.

어째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화현으로 나투시려면 누가 보든지 존경할 수 있고 거룩하고 위대한 그러한 몸가짐과 행실로써 출현을 하시지 아니하고, 몸뚱이는 비대해 가지고 배가 소 배만큼 불러 가지고, 여러분이 사진을 통해서 포대화상의 모습을 짐작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배는 장구통 배아지에다가, 항시 배는 떠억 배꼽까지 다 내놓고 남자이지만 유방이 여자 유방처럼 그렇게 양쪽에 드리워진 채,
자루를 하나 짊어지고 슬슬 거리로 다니면서 걸식을 하시면서 그러니까 어린이들이 항시 뒤를 따라 다니면서 올라타고 옷을 잡아당기고 같이 친구가 되었다가 유시에는 놀려댔다가, 이렇게 하면서 포대화상은 어린애로 더불어 벗 삼아서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세월을 보내시되, 인연 따라서 점도 쳐주고 때로는 역행(逆行)과 순행(順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시면서 중생 교화를 하셨습니다.

그때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이요’ 아까 조실 스님께서 읊으신 ‘밤마다,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또한 같이 일어난다[朝朝還共起]. 밤에 잘 때에는 부처님을 떠억 끌어안고 자다가 아침에는 그 부처님하고 같이 일어난다'
‘욕식불거처(欲識佛去處)인댄’ 네가 지금 그 어젯밤에 끌어안고 자고, 아침에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났던 그 부처님 간 곳을 알고자 할진대는, '지자어성시(只這語聲是)니라. 지금 이 말하는 이놈이니라'
이 게송(偈頌)은 지극히 쉬운 글이지마는 이 쉬운 한마디의 게송을 똑바로 마음에 얻는다면 바로 자기의 부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 견성성불’ 누구나 입에 거는 말이지만. '성품(性品)을 보고 성불(成佛)을 한다' 중생심(衆生心)을 떠나서는 성품을 볼 수가 없는 것이고, 중생심을 떠나서는 성불할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천하 없이도 희노애락(喜怒哀樂) · 탐진치(貪瞋癡) 이것이 모다 오욕락(五欲樂), 전판 다 중생심으로 이루어진 중생심의 표현이지마는 그 중생심 여의고는 견성(見性)할 도리도 없는 것이고, 성불(成佛)할 기약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도, 잠시도 여읠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중생심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말하고, 손으로 글씨 쓰고 일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성냈다, 웃었다, 울었다 하는 이것이 전부 중생심의 발로(發露)인데 그 중생심 떠나서 ‘참나’ 찾을 길은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중생심 버리지 아니하고, 중생심에서 중생심으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견성(見性)입니다.

그 가장 단적이고 가까운 것이 '부처 간 곳을 알고자 할진대는 바로 이 말하는 이놈이니라'
어찌 하필 말하는 놈일 뿐이겠습니까. 귀로 듣는 놈, 눈으로 보는 놈, 손으로 만지는 놈, 발로 차고 걷는 놈, 성내고 웃고 우는 놈,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부처님 계신 곳이요, 바로 그 도리 보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한번 드는 곳에 팔만사천 마구니가 물러가는 곳이요, 소멸하는 곳이요, 일체 재앙(災殃)과 액난(厄難)이 소멸되는 때인 것입니다.(처음~19분46초)




(2)------------------

입춘에 무당 절은 말할 것도 없고, 전국 조그마한 썩한 사찰 또는 절에서 신도들의 요청에 의해서 부작(符作)을 노나 드리는 절이 적지 않습니다. 부작을 빨강 물로 찍어 가지고 여러분에게 손바닥만씩 한 것을 노나 드릴 수가 있습니다. 또 노나 드리는 절이 많습니다. 그 종이를 한 장뿐만이 아니라 지금은 인쇄술이 발달해서 몇천 장, 몇만 장이라도 찍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갖다 붙여서 액난(厄難)을 면한다면 아무 걱정이 없겠습니다. 온 집안에 도배를, 안팎으로 부작으로 도배를 하고, 온 몸뚱이에 옷을 부작으로 찍어서 옷을 해 입고 다니는 사람은 일평생 동안 감기 한번 안 들고 교통사고도 없고, 욕 한마디도 무슨 못된 짓을 하고 다녀도 감옥에도 안 가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일체 업(業)은 우리가 지어서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러한 악업(惡業)을 지어 가지고 그러한 죄를 받는 마당에 부작을 차고 다닌다고 해서 그 업이 소멸이 된다고 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자기의 액난을 멀리하고 죄를 닦고자 하면, 첫째 자기의 잘못을 참회(懺悔)하고 앞으로 그러한 죄업을 짓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상책이 될 것입니다. 참회에는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이 있어서 이치로 참회하고 또 사(事) 면, 실천 면으로 참회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참(理懺)이라 하는 것은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라고 하는 것은 원래 자성(自性)이 없어서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죄가, 성불할 수 있는 그 자성, 견성성불하는 그 자성과 달리 죄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이—불성 말고, 죄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체 죄는 우리가 바로 견성성불하는 그 성품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그래서 마음이 비어버리면, 마음 일어나는 생각이 가라앉으면 바로 죄도 또한 없어지는 것이다'
마음이 깨끗하게 무념(無念)으로 돌아가고 죄가 없어지면, 이 두 가지가 한목 없어져 버리면 깨끗해지면[罪滅心亡兩俱空] 이것이 바로 참다운 참회라고 하느니라.[是卽名爲眞懺悔]

이렇게 죄의 성품이 자체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한 마음 돌이켜서 비우게 하면 이것이 참으로 죄를 닦아 없애는 것이다. 이렇게 관해서 마음을 빨리 깨끗하게 만드는 법, 이것이 바로 '이뭣고?'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참선이라 하는 것은 죄를 소멸을 하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아니함으로 해서 빨리 인격을 완성하는 견성성불하는 가장 요긴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사참(事懺)은 자기가 이미 저지른 죄과(罪過), 죄과에 대해서 몸으로써 선행(善行)을 해 가지고 자기의 죄를 참회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앞에 절을 백팔배 내지 삼천배 절을 하는 가운데에 자기의 죄를 참회하는 것, 이것도 사참의 하나가 되겠고 또 적극적으로 자기가 잘못한 이상으로 남에게 봉사하고, 자비행을 함으로 해서 자기의 죄를 참회하는 거, 이것도 사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참과 사참을 참선, '이뭣고?'를 함으로 해서 마음을 비우게 해 가지고 참회하고, 몸으로 실천을 해서 사참을 함으로써 이참 사참을 겸해서 닦으므로 해서 우리의 업장(業障)을 빨리 소멸하고 빨리 견성성불할 수 있는 그러한 수행을 쌓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입춘날에 다른 절에서도 모다 부작을 노나 드리니까, 종이로 만들은 부작을 만들어 드리고 있습니다마는, 다른 절에서.
우리 절에서는 불에다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다 넣어도 망가지지 않는 정말 우리의 업장을 소멸하고 재난을 멀리 할 수 있는 진짜 부작(符作), 영원히 유효한—종이로 만든 것은 내년 입춘 때까지 겨우 일 년 동안 효력이 유지된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우리 용화사에서 지금 노나 드리고자 하는 부작은 영원히 효력이 상실되지 않습니다. 영원히 효력이 상실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해를 거듭해 갈수록 그 영험이 더 뚜렷해지는 그리고 영원히 타지 아니하고 망가지지 아니한 그러한 부작을 노나 드립니다.

작년에 그렇게 노나 드린다고 하고서 부작을 손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여러분에게 부작을 노나 드렸습니다. 작년 입춘에 이 법회에 참석하신 사부대중(四部大衆)은 손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그 부작을 받어 가셨습니다.
'부작을 노나 주었다'하는 말이 그 녹음을 통해서 여러 신도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입춘이 훨씬 지난 뒤에 "저도 부작을 좀 주십시오" 그래가지고 "아, 그 그때 제가 바뻐서 딸이 해산하는 관계로 거기를 가서 제가 못했는데 다른 이들은 모다 부작을 받았다고 하는데 저만 못 받았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셔서 웃음 한번 웃었습니다마는, 정말 올 입춘에 여러분은 좋은 부적을 받으셨을 줄 생각합니다. 이 부적을 주고받는 데는 시간이 필요치 않습니다. 손으로 주고 손으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우리가 지은 대로 받게 됩니다. 받게 되지마는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그 받는 자세가 다릅니다.
자기가 지은 것 받는 것에 대해서는 부처님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부처님 같은 그러한 대성현도 자기가 지은 것을 면할 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세 가지 불능(不能)이 계시는데, 자기가 지은 인(因)을 면할 수가 없는 거, 또 인연 없는 중생을 제도할 수 없는 거. 아무리 육신통(六神通)이 구족하신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인연 없는 사람은 제도할 수가 없다. 또 이 육도법계(六途法界)에 한 사람도 남음이 없이 중생을 다 없애게 하는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랬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연이 다 있다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제도해 마칠 수가 있지만 인연 없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또한 중생계(衆生界)가 끝날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또한 부처님의 힘으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부처님 삼불능(三不能) 가운데에 '내가 지은 업(業)을 면할 것이 없다' 그러는데, 하물며 우리 중생이야 자기가 무량겁 이래로 지어 온, 자기가 지어 놓은 업을 금생에 부작 한두 장 가지고 면하리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치원 학생에게 물어봐도 알 수가 있는 일입니다.
온갖 못된 짓 다하고 부작만 무당한테 가서 사 가지고 다닌다면 강도, 살인강도나 사기꾼들은 이 세상을 횡행천하(橫行天下)할 것입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혹 여러분 가운데에는 '아! 빨리 법회가 끝나서 점심을 먹고 그 무당집에 가서 신수(身數)를 보고 그 부작을 타 와야 할 텐데, 용화사에서는 부작을 입으로만 주고 진짜 부작은 주지도 않는다'고 지금 조바심을 내고 계신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정말 무당집 출입하는 것은 오늘 금년 입춘을 기해서 아주 발을 씻으셔야 합니다. 무당집은 드나들 곳이 못됩니다.

답답하면—약을 써도 안 듣고, 별짓을 해도, 불공을 해도 별수가 없고, 그러니 그 영(靈)하다니까 족집게 점쟁이한테 가서 점을 해 보자 그래 가지고.
그 물에 빠진 사람 아쉬울 때는 지푸락도 잡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무당집에 한번 발 딛어 놨다 하면은 그 사람의 갖은 협박과 공갈 위협을 주어가지고 '당신 남편 금년에 큰 굿 한번 안 하면 직장에서도 떨어지고, 독자 있는 거 그거 키우기 어려울 것이다' 아! 이런 못된 소리를 하면 그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그 무당 말을 순종 아니하고는 못 배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번 두 번 다니다 보면 무당이 진짜 자기의 귀의(歸依) 사찰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절은 다 한 부처님이고, 다 같은 절이라' 이런 말들 하시지마는, 그 옳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가 버릇하면 아주 거기에 꽉 매여 가지고 다시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나를 등지고 나를 배신하면은 안 된다'고 몇 번을 갈 때마다 다짐을 하고 족치는 통에 무서워서 나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당집에는, 그동안에 다니셨던 분, 안 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부처님의 도력(道力) 법력(法力)과 무당의 삿된 힘과는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한테 다니다가 무당한테 가면 벌을 받게 됩니다. 삿된 데에 빠졌으니 재앙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겠죠? 부처님이 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러한 삿된 구렁텅이에 들어간 자체가 이미 벌을 받기 시작한 때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무당 절에 다니다가 절에 오신 것은 벌을 받지 않습니다. 혹 무당이 부리는 잡귀가 쫓아온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지키고 있는 신장(神將)은 잡귀 만 명도 당해내기 때문에 염려 말고 무당집에 다니신 발은 깨끗이 씻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금년 새해부터서는 어쨌든지 법문(法門) 잘 들으시고 '이뭣고?' 참선 공부 열심히 하시므로 해서 금년 내내 무장무애하시고, 묵은 온갖 재앙과 원한도 다 깨끗이 씻어 버리고, 모든 소원을 성취하시도록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더군다나 금년 입춘은 초여드레가 되어서, 초삼일부터 구일까지 우리 절에서 신수기도를 지금 봉행 중에 있는데 그 가운데 입춘이 들어서 더 입춘 법회에 참석하신 분은 다른 해에 입춘보다도 훨씬 더 복을 많이 받으시고 소원을 성취하실 줄 믿습니다.(19분47초~36분22초)




------------------(1)

*(게송) ‘若也山中逢子期 豈將黃葉下山下’ ; 『태고집(太古集)』 (雪栖 편, 김달진 역주 | 세계사) '석가 출산상(釋迦出山相)' p229 참고.
*지음(知音) ; ①음악의 곡조를 잘 앎. ②새나 짐승의 소리를 가려 잘 알아들음. ③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이르는 말.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악상(樂想)을 잘 이해해 준 벗 종자기(鐘子期)가 죽자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여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열자(列子)』에 나오는 말.
*천명(天命) ; ①타고난 수명. ②타고난 운명. ③하늘의 명령.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방편설(方便說 방법·수단 방/편할 편/말씀 설) ; 실상(實相)으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 상대와 조건에 알맞는 방법을 설정하여 말하는 것.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불가결(不可缺) ; 없어서는 안 됨.
*관등(觀燈 볼 관/등 등) ; 등(燈)을 밝히고 봉축(奉祝 공경하는 마음으로 축하함)하는 행사. 연등(燃燈)과 같은 말. 주로 음력 사월 초파일에 행하였으며, 이 날을 관등절, 그 놀이를 관등놀이라고 하였다. 집집마다 등을 달고, 관청, 시장 거리의 가게, 절 등에서 등대를 세워 등을 달아 부처님의 탄생을 봉축하였다.

오늘날에는 이 날을 '부처님 오신날'이라 하여 국가공휴일로 정하고 밤에는 수많은 신도들이 등을 들고 거리를 돌면서 제등행렬(提燈行列)을 한다.
요즈음에는 특별한 사찰의 행사 때에도 때때로 관등을 하며, 천등불사 · 만등불사 등 관등 위주의 행사를 한다. 그 기원은 통일신라 때 행해졌던 팔관회(八關會)이다.
*일맥상통(一脈相通 한 일/줄기·맥 맥/서로 상/통할 통) ; 사고방식이나 성질 등이 두 대상 간에 어느 면에서 한 가지[一脈]로 서로[相] 통(通)하거나 비슷해짐.
*허기(虛飢 빌 허/주릴·굶주림 기) ; 굶어서[飢] 속이 비어[虛] 몹시 배가 고픔.
*일양(一樣) ; ①한결같은 모양. 또는 같은 모양. ②한결같이 그대로. 또는 꼭 그대로.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 · 등(燈) · 꽃 · 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포대화상(布袋和尙) ; 중국 후량(後梁) 때의 스님.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 출신. 자기가 자칭하는 이름은 계차(契此)였다. 체구가 비대하고,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배가 불룩하고, 말이 일정하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자고 누웠다.
항상 지팡이에 베자루 하나를 걸어 메고, 소용되는 물건은 모두 그 속에다 넣었다. 저자나 마을에 들어갔다가 물건을 보면 달라고 하여, 먹을 것은 무엇이나 주기만 하면 받아 먹으면서 조금씩 나누어 그 자루에 넣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별호를 지어 장정자(長汀子) 또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고 불렀다. 혹 사람들에게 무엇을 달라 했다가 돈을 주면 돌려 주었고, 남에게 길흉을 예언해 주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916년 3월에 명주 악림사(嶽林寺) 동쪽 행랑 밑의 반석 위에 단정히 앉아서 게송을 읊었다.

미륵진미륵(彌勒眞彌勒)  분신천백억(分身千百億) 시시시시인(時時示時人)  시인자불식(時人自不識)
미륵 부처님, 참 미륵 부처님이 분신(分身)해서 천백억 부처님이 되었다. 때때로 당시 사람들에게 보이되,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 아지를 못하는구나.

게송을 마치고 편안히 앉아서 떠났는데, 그 뒤에 다른 고을 사람들은 여전히 대사가 포대를 메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에 사람들은 포대화상을 미륵 보살의 화현(化現)이라 하여, 그 모양을 그려서 존경하여 받드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참고] [전등록 3] (제27권) (동국역경원 | 김월운 옮김) p459-463 참고.
*비다 ; '베다(사람이 과일을 입으로 끊거나 자르다)'의 사투리.
*나무지기 ; ‘나머지’의 사투리.
*기상대(氣象臺) ; 기상(氣象 바람, 구름, 비 등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관측, 통보하거나 또는 조사, 연구하기 위한 시설. 또는 그 기관.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염부(閻浮) ; 염부제(閻浮提). 남염부제(南閻浮提). 섬부주(贍部洲). 남섬부주(南贍部洲).
산스크리트어 jambu-dvīpa의 음사. 염부(閻浮), 섬부(贍部)는 jambu의 음역어이며, 제(提)와 주(洲)는 dvipa의 각각 음역어 및 의역어이다. jambu는 나무 이름.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수미산(須彌山)의 사방에 네 대륙(四洲)이 있는데, 염부라는 이름은 여기에 자란다는 점부(jambu)에 유래하며, 남방에 있기 때문에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 한다.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라 하며, 여러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은 사주(四洲) 가운데 이곳뿐이라 함. 불전에서는 인간세계의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권화신(權化身) ; 불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변하여 나타난 몸.
*권화(權化) ; 산스크리트어  avatāra ①불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몸이나 모양으로 변하여 나타나는 것. 권현(權現) · 화현(化現) · 응현(應現)이라고도 한다. ②화신(化身)과 같음.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호명(護明) 보살의 이름으로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임.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전판(全판) ; 하나도 남김이 없는 전부.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발로(發露 드러내다·밝히다 발/드러내다 로) ; 숨은 것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숨은 것을 겉으로 드러냄. 또는 그런 것.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재앙(災殃 재앙 재/재앙 앙) ; 뜻하지 않게 생긴 불행한 변고(變故). 또는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생긴 불행한 사고.




------------------(2)

*부작(符作) ; ‘부적(符籍)’의 변한 말. 부적(符籍 부적 부/문서 적)—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붉은색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몸에 지니거나 집에 붙이는 종이.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악업(惡業) ; 나쁜 결과의 원인이 되는 나쁜 행위. 또는 전생(前生)의 나쁜 행위.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이참(理懺) ; 진리의 참모습을 관찰하여 참회를 얻는 것. 관찰실상참회(觀察實相懺悔)라고도 한다.
과거와 현재에 지은 죄(罪)라고 하는 것은 자성(自性)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어서, 마음이 본래 공적(空寂)한 것임을 알게 되면 죄도 또한 없어진다(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이 도리를 철저히 믿고 참선을 하면 거기에서 죄가 소멸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업의 실상을 관찰하여 죄를 멸하는 것을 이참(理懺)이라 한다.
*사참(事懺) ; 지은 바 행위를 분별하여 그 행위에 대해서 참회하는 것으로서,
몸(身)으로는 부처님께 무수배례(無數拜禮) 절을 하고, 입(口)으로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偈頌)을 외우며, 마음(意)으로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모습을 그리면서, 과거와 현재에 지은 죄업을 참회한다.
법계(法界)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없는 중생이 부처님의 자비에 의지하여 참회하는 것. 일반적으로 ‘참회한다’하면 이 사참을 뜻한다. ‘수사분별참회(隨事分別懺悔)’라고도 한다.
*무념(無念) ; ①망념이 없는 것. 정념(正念)을 말한다. ②모든 법을 보면서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것.
[참고] 『육조단경(六祖壇經)』 (德異本) ‘제1 오법전의(悟法傳衣, 법을 깨닫고 가사를 전해 받다)’에서.
善知識 智慧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本解脫 若得解脫 卽是般若三昧 卽是無念

선지식들이여, 지혜로 비추어 보면 안팎이 밝게 사무쳐서 자기의 본심을 아나니 만일 본심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며, 만일 해탈을 얻는다면 곧 그것이 반야삼매(般若三昧)며 또는 이것이 무념(無念)이니라.

何名無念 若見一切法 心不染着 是爲無念 用卽徧一切處 亦不著一切處 但淨本心 使六識 出六門 於六塵中 無染無雜 來去自由 通用無滯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行

어찌하여 무념이라 이름하는가? 만일 모든 법을 보더라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이것이 무념이니, 작용을 일으킨 즉 일체처에 두루 하되 일체처에 집착하지 않고, 다만 본심을 깨끗이 하여 육식(六識)으로 하여금 여섯문(六門)을 나오더라도 육진(六塵) 가운데 물들고 뒤섞임이 없어서, 오고 감에 자유롭고 널리 쓰되 걸림이 없으므로 이것이 곧 반야삼매며 자재해탈이고 그 이름이 무념행이니라.

若百物 不思 當令念絶 卽是法縛 卽名邊見 善知識 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法者 至佛地位

그러나 만일 백가지를 다 생각하지 아니하고 아주 생각을 끊는 이것은 법에 얽매인 것이며 한쪽에 치우친 견해[邊見]이라 이름하느니라.
선지식아, 무념(無念)의 법(法)을 깨달은 이는 만법에 걸림없이 통하며,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며, 부처님의 자리에 이르느니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죄과(罪過 허물 죄/허물 과) ; 죄가 될 만한 과실이나 허물.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삼불능(三不能) ; 당나라 숭악(崇嶽)의 원규(元珪 : 644 ~716) 선사가 말씀하신 부처님의 3능(三能)과 3불능(三不能).
(1) 3능(三能) - 부처님의 3가지 능한 것.
①일체 상(相)이 공(空)함을 깨달아서 만법의 지혜를 이루시는 것. ②모든 중생의 성품을 다 아시고, 억겁(億劫)의 모든 일을 다 아시는 것. ③한량없는 중생(무량중생)을 제도하시는 것.

(2) 3불능(三不能) - 부처님의 3가지 능치 못한 것.
①결정된 업[定業]은 즉시 멸하지 못함. ②인연 없는 중생을 제도하지 못함. ③중생계를 다 제도하지 못함.

[참고] 『전등록(傳燈錄)』 제4권. '숭악 원규 선사'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283~284.
佛能空一切相 成萬法智 而不能卽滅定業 佛能知群有性 窮億劫事 而不能化導無緣 佛能度無量有情 而不能盡衆生界 是謂三不能也

부처님께서는 온갖 형상의 공(空)함을 깨달아서 만법의 지혜를 이루셨으나 결정된 업[定業]을 즉시 없애지는 못하고, 부처님께서는 뭇 중생의 성품을 다 아시고 억만 겁의 일을 기억하시나 인연 없는 중생을 제도하지는 못하고,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유정(有情)을 제도하시나 중생 세계를 다하게 하지는 못하나니, 이것을 세 가지 능하지 못함[三不能]이라고 말한다.

定業亦不牢久 無緣亦謂一期 衆生界本無增減 更無一人能主有法 有法無主是謂無法 無法無主是謂無心 如我解佛亦無神通也 但能以無心通達一切法爾

결정된 업[定業]이라도 영원한 것은 아니고, 인연이 없다 함도 일기(一期)를 말한 것이고, 중생 세계도 본래 증감(增減)이 없는 것이라서 한 사람도 유법(有法)을 능히 주재하는 자가 없다. 유법에 주재자가 없는 것을 무법(無法)이라 하고, 무법에 주재자가 없는 것을 무심(無心)이라 한다. 가령 내가 이해하기로는 부처님은 본래 신통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다만 무심으로써 온갖 법을 통달했을 뿐이다.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횡행천하(橫行天下)하다 ; 거리낌없이 제멋대로 세상을 나돌아다니다.
*신수(身數 몸·나·자신 신/운수 수) ; 사람의 운수(運數). 사람의 운명(運命)이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수.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힘.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힘.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法)의 힘. ②가르침의 힘. 불법의 공덕. 불•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을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것.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힘. *신장(神將) ;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신장. 또는 《화엄경》을 보호하는 신장.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활구참선 최상승법2022. 2. 18. 12:04

§(560) 화두는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야 /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이것은 ‘최상승법이다. 활구참선이다’ 이렇게 전강선사께서 말씀하신다.

용화사에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방법은 이것은 ‘최상승법(最上乘)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이렇게 조실 스님께서도 말씀을 하시고, 산승(山僧)도 그런 말을 하게 됩니다마는, 이것은 천 년을 두고 많은 선지식들이 이 간화선을 통해서 수행을 해 오셨고, 그래서 이것은 바르게 이 화두를 거각(擧却)하고, 바르게 정진을 해 가면 거의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송담스님(No.560)—95년 동안거결제 법회(95.12.07) (용560) (활구참선)

 

약 12분.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신해년에 설하신 녹음 법문을 우리는 경청했습니다마는 화두(話頭)! 선지식으로부터 딱 지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렇게나 천칠백 공안(公案)이나 있으니까 이리저리 책을 『염송(拈頌)』이나 그런데 뒤적거리다가,
요새는 『염송(拈頌)』도 번역이 되어 나온 것이 있고 그래서 한문을 잘 모르더라도 이리 보고 ‘에잇! 나는 이 공안으로 한번 해보자’ 조금 해 보다 잘 안되면 ‘에이! 이것으로 한번 해보자’ 한 철마다 화두를 이리저리 바꾸고.

또 어떤 선지식한테 가서 화두를 타서 한 철, 두 철 해 봤지만 암만해도 바닥이 안 나고 잘 안되니까 또 저 다른 선지식을 찾아가서 화두를 타가지고 이리저리 해봐도 안된다 그말이여.
처음에는 곧잘 된 것 같아서 ‘이제는 이것이 내 본참공안으로서 좋다’ 이리 생각하고 해 보면 나중에 또 영 안돼. 안되고는 먼저 했던 공안이 다시 떠오르면서 그것을 해보니까 이제 좀 된 것같다 그말이여.

그래서 말도 이놈도 타 보고, 저놈도 타 보고 그래서 그 말 타는 사람은 말을 가끔 바꿔보는 재미도 있다고 그런 말도 들었는데, 화두를 만약에 자꾸 이놈으로 해보다 저놈으로 해보다, 그것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
우물을 파는데 이놈 조금 파 보다가 안되면 저쪽에 가서 또 파 보고, 그놈 파서 안되면 이쪽에 파보고 해서 몇 군데를 우물을 파 간신히 물이 나왔는데, 가무니까 물이 차츰차츰 줄어들어. 장마철에는 물이 출출출 넘고, 이러한 샘물은 그게 건수(乾水)라 해서 먹을 수가 없는 거여.

화두도 처음에 조금 요리 해 보고 되니까 ‘된다’고 그러다가, 안되니까 또 이리저리 바꾼 사람은 우물 파는 사람과 같애.
그 사람은 뭔 소견이 나 봤자 그것은 의리선(義理禪) 따위이지 정말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확철대오한 것이 아니어.

그래서 이 화두는 아무데서나 함부로 타고, 제멋대로 책에서 골라 잡아가지고는 아니 되고, 정말 자기가 믿어지는 그리고 또 믿을 수 있는 그러한 선지식으로부터 어렵게 화두를 타야 해.
화두를 타 가지고 한 번 탔으면 확철대오 할 때까지 10년이고 20년이고 한 화두를 가지고 꾸준히 해나가야 해.

이 참선 공부라 하는 것이 처음에는 곧잘 잘된다고 느껴져. ‘참 좋다. 이 공부가 잘 되는구나’하고.
뚝! 변해 가지고 또 안돼. 가슴이 답답하고, 가슴에 주먹 같은 것이 치밀러 올라와가지고 소화도 잘 안되고, 숨도 잘 안 쉬어지고 고약하다 그말이여.

이거 상기병(上氣病)이 걸렸나? 호흡을 잘못해서 그랬나? 화두를 잘못 들어서 그러나? 심지어는 이  화두가 나한테 맞지 않아서 그런가?
이래 가지고 이리저리 번민을 하고 고민을 하고, 화두를 바꾸려고 했다가 또 선지식이 내 근기를 잘 몰라가지고 나한테 공부하는 법을 잘못 일러줘서 그랬나?

천 가지 만 가지 번뇌심이 일어나고, '차라리 이거 참선을 하지 말고 경(經) 공부를 할까?' '이 공부를 하지 말고 무슨 주력(呪力)을 할까?' '내가 업장(業障)이 두터우니까 기도를 해가지고 업장을 소멸한 다음에 참선을 할까?'
이러다가 요새 비파사나(vipassanā)라고—‘사념주관(四念住觀)’이라고 관법(觀法)이 있는데, 부처님 때부터 관법이 있어서 동남아에서는 그러한 관법이 지금까지도 전해 와서 그런 관법 수행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도 한국 스님이 동남아에 가 가지고 그 법을 배워가지고 와서 널리 권장을 하고, 포교를 하는 그런 분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그런 관법이 차츰차츰 중국으로 건너와서 중국에서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임제종(臨濟宗)의 화두로서 공부를 하는 그러한 참선으로까지 발전을 해서 한국에까지 지금 전해 와서 우리가 그런 간화선(看話禪)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근기 따라서 팔만사천 가지의 방편(方便)을 설하셨습니다.
어느 하나도 나쁘다 할 것은 없고 다 그 나름대로 중생의 근기에 맞으면—마치 수천 가지, 수만 가지 약이 약국에서 팔려지고 있지만, 어느 약이 좋다 나쁘다 하기가 어렵고, 약마다 그 체질과 병에 맞으면 그 병을 나을 수가 있는 것이고,

또 아직도 계속 약이라든지 의술이 발전 과정에 있어서 그 증상에는 잠시 효과가 있지마는 나중에 부작용이 남아서 좋지 않은 약을 장기간 복용을 하면은 작은 병은 나았지마는 큰 병을 얻는 수가 허다 해서 약을 너무 함부로 남용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처럼,
부처님께서 설하신 방편법이 팔만사천 가지가 있지마는 그런 방편법에 우선 잠시 효과가 있다고 해서 방편법에 떨어져 가지고 그런데 집착을 하게 되면 임시는 좋은 것 같아도 정말 구경(究竟)의 깨달음에는 이르기가 어렵고, 그러한 폐단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방편법일수록에 바른 선지식, 그러한 방편법을 통해서 목적을 달성한 그러한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주문을 외워서 주력을 하는 거라든지, 어떤 관법(觀法)을 닦아가지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일수록에 바른 지도자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화사에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방법은 이것은 용화사에서는 ‘최상승법(最上乘)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이렇게 조실 스님께서도 말씀을 하시고, 산승도 그런 말을 하게 됩니다마는,
이것은 천 년을 두고 많은 선지식들이 이 간화선을 통해서 수행을 해 오셨고, 그래서 이것은 바르게 이 화두를 거각(擧却)하고, 바르게 정진을 해 가면 거의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물론 이 간화선도 잘못하면 얼마든지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자세를 바르게 안 한다든지, 호흡을 바르게 안 한다든지, 화두를 거각하고 화두를 의심하되, 잘못되게 화두를 의심하면 이것도 또한 잘못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그 약을 먹고 효험을 봤다고 해서 체질도 다르고 또 약 먹는 방법을 잘못 먹고, 지나치게 과격하게 먹는다든지, 잘못 먹으면 그 약을 먹고 해(害)를 입을 수도 있는 거와 같아서, 이 참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심을 해라. 간절히 이 화두를 의심해라’ 그러니까 간절히 한답시고 너무 용을 써 가지고 미간(眉間)에다가 ‘적을 소(小)’자를 쓰면서 이마를 찡그리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래가지고 너무 힘을 쓰다 보면, 용을 쓰면, 기(氣)가 위로 올라가 가지고 나중에는 눈이 벌게지고, 골이 뽀개지도록 아프고 이러한 병을 얻는 수도 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아주 젊은 소년 시대에 발심을 해가지고 너무 그렇게 용을 쓰고 정진을 하다가 상기병(上氣病)을 얻어서 머리가 터지고, 코로 입으로 피가 넘어오고 하는 그러한 경험을 가진 분의 한 분인 것입니다.

녹음 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그러한 처절한 그 광경을 들으셔서 많이 다 알고 계실 줄 압니다마는 여러 도반들은 그래서 조실 스님의 녹음 법문을 자주자주 들으시면서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15분22초~26분4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선문염송(禪門拈頌) ;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고려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제자 진각국사 혜심(慧諶) 스님이 1226년 수선사(修禪社, 지금의 송광사松廣寺)에서 화두 1125칙(則)과 각각의 칙(則)에 대한 짤막한 해설과 게송 등을 모아 엮은 30권의 책이다. 염송(拈頌)이라고도 한다.
*건수(乾水 마를 건/물 수) ; 평상시에는 물이 고여 있지 않다가, 장마 때 땅속으로 스몄던 빗물이 잠시 솟아나서 괴는 샘물.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곧잘 ; 제법 잘.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熱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주력(呪力) ; 진언(眞言)·다라니(陀羅尼)로 하는 기도. 진언(眞言)·다라니(陀羅尼)의 효과.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비파사나(팔리어 vipassanā, 산스크리트어 vipaśyanā) ; 비바사나(毘婆舍那)·비발사나(毘鉢舍那)로 음역. 능견(能見)·정견(正見)·관찰(觀察)·관(觀)이라 번역.
비파사나(위빳사나)는 ‘분리해서vi  보는 것passanā’이라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대상[유위제법(有爲諸法)—오온(五薀)·십이처(十二處)·십팔계(十八界)]을 나타난 모양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명상하고 관찰하여 법(法)의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무아(無我)인 특성을 통찰하는 수행.

비파사나는 마음[心]·마음부수[心所]·물질[色]로 구분되는 71가지 구경법들 가운데 하나를 통찰하는 수행인데 이처럼 법을 통찰해 들어가면 제법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徹見)하게 된다.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비파사나의 힘으로 탐·진·치의 뿌리를 멸절시켜야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며 그래야 해탈·열반을 실현하게 된다.
비파사나는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 그 자체이지 결코 특정한 수행기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 「초기불교 이해」 (각묵 스님, 초기불전연구원) 참고.
*사념주관(四念住觀) ; 현장법사(600~664) 이전에 번역한 경전의 번역을 말하는 구역(舊譯)에서는 사념처(四念處)라 하고, 신역에서는 사념주(四念住)라고 함. 사념처관(四念處觀)과 같음.
네 종류의 수행방법. 네 가지의 관상법(觀想法). 네 종류의 마음이 고요해지는 내관(內觀).
신념주(身念住, 身念處) · 수념주(受念住, 受念處) · 심념주(心念住, 心念處) · 법념주(法念住, 法念處)의 네 가지를 마음에 떠올리는[觀] 수행.

①신념주(身念住, 身念處) : 부모에게 받은 육신이 부정(不淨)하다고 관하는 것.
②수념주(受念住, 受念處) : 우리의 마음에 낙(樂)이라고 하는 음행·자녀·재물 등을 보고, 낙이라고 하는 것은 참 낙이 아니고, 모두 고통(苦痛)이라고 관하는 것.
③심념주(心念住, 心念處) : 우리의 마음은 항상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늘 변화 생멸하는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관하는 것.
④법념주(法念住, 法念處) : 위의 셋을 제하고, 다른 만유에 대하여 실로 자아(自我)인 실체(實體)가 없으며, 또 자아가 없으므로 소유도 없다고, 무아관(無我觀)을 하는 것.

신·수·심·법(身·受·心·法) 네 가지를 따로따로 관하기도 하고, 신수심법(身受心法)은 부정(不淨)하며, 고(苦)이며, 무상(無常)하며, 무아(無我)라고 총합하여 관하기도 한다.
*임제종(臨濟宗) ; 중국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이다.
임제종은 북방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송대(宋代)에 석상 초원(石霜楚圓) 문하에서 양기 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와 황룡 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가 나와, 양기파는 성행했으나 황룡파는 얼마 안 가 쇠퇴함.
양기파 문하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화두(話頭)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하여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그의 선풍(禪風)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 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도 말씀하신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관법(觀法) ; 마음을 지금 여기에 두고, 분별적인 사유에 휩싸이지 않고, 대상[諸法]의 인상이나 겉모습에 떠돌지 않고, 대상을 꿰뚫어서 대상[諸法]의 진실한 모습을 통찰하는 수행. 이로써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고 올바른 길에 들어서게 하고 열반(涅槃-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을 깨닫게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 ; [주로 ‘용을 쓰다’의 구성으로 쓰여]무리하게 어떤 일을 해내려고 마음을 몰아 애써서 한꺼번에 내는 힘.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12/18) 박산무이선사의 선경어.

**전강선사(No.384)—박산무이선사 선경어(12) (갑인.74.01.26.새벽) (전384)

 

약 37분.



한안척진몰(寒雁尺盡沒)이요  영락백운간(影落白雲間)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호호하처거(乎乎何處去)오  월침서해흑(月沈西海黑)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감찰원장이 나한테 “전강 스님은 돌아가시면은 어느 곳으로 가실랍니까?” 이래 물어서, 내가 송구(頌句)로 답을 했어. 정각사에서 저 정각사에서 지리산. 송구로 답을 허되 이렇게 했다 그 말이여.

한안(寒雁)은 척진몰(尺盡沒)이다. 차운 기러기는 재질을 허다가 빠져 버렸다. 저 허공에 날라가다가 빠져 버려. 그 날래를 훨훨 재질을 허다가는 그 빠져 없어져 버렸지.
영락백운간(影落白雲間)이로구나. 그림자는 백운(白雲) 사이에 떨어졌구나.

호호하처거(乎乎何處去)오. 호호(乎乎)야 어느 곳으로 갔느냐? ‘온 호(乎)’ 자여, ‘온 호(乎)’ 자. 호호하처거(乎乎何處去)오. 호호야 어느 곳으로 갔느냐?
월침서해흑(月沈西海黑)이니라. 달은 침(沈)했는디 빠졌는디 서해(西海)는 검다. 그렇게 일렀어. 잘 들어 둬야지.

주공부(做工夫)허되, 참선 공부를 허되 최파사유(最怕思惟)다. 가장 사유(思惟)를 두려워해야한다. 사유(思惟)라 하는 것은 화두를 들고 앉았으면 판치생모, ‘어째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했는고?’ 벌써 조주(趙州) 뜻, 알 수 없는 뜻, 알 수 없는 의지, 그놈 하나가 척 나와 가지고 관이 관(觀)이 따악 관(觀)! 알 수 없는 관.
관(觀)이 즉 알 수 없는 놈이고, 알 수 없는 놈이 관(觀)이지. 그 알 수 없는 관(觀) 가운데 무슨 사유가 붙어 있을 것인가? 거기는 사유가 붙어 있들 못혀.

불, 불꽃에 무슨 놈의 그 먼지 같은 거, 진태미 같은 거, 뭐 그런 티끌 같은 것이 어디 붙나? 꼭 같지.
조주 공안에는, 참선 공안에는 사유가 붙들 못혀. 사유(思惟)라는 것은 벌써 ‘생각 사(思)’ 자, ‘생각 유(惟)’ 자. 무슨 생각이든지 조그만한 생각만 일어나면 그만 그 화두에는 독해(毒害)여. 화두(話頭)는,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은 어디로 도망가는 것이여. 그걸 알아야 혀.
사유(思惟), 그 사유심(思惟心)이 있기 따문에 사유에서 왼갖 장애가 일어나고, 별별 마구니가 일어나고, 그게 못쓴 것이다 그 말이여.

활구학자(活句學者)가 그것 무슨 뭐 전생 · 금생 · 후생, 삼세사(三世事)에 무슨 뭐 잘잘못이 어디 있으며, 무슨 죄 짓고 안 지은 것이 어디 있나? 죄니 무슨 무간업(無間業)을 지었다 하드래도 발심(發心) 떡 해서 화두 공안 타 가지고 공안(公案)허는 학자가 되어 있으면은 다시는 거기에 사유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무슨 사유가 붙어 있나?
왜? 벌써 그 사유심(思惟心)이 생사심(生死心)이고, 사유심이 망상심(妄想心)이고, 사유에서 모든 마구니 제경(諸境)이 퍼 일어나는 것이여.

그러기에 활구학자라는 것은 변동, 무변리거여. 변동이 없어야 혀. 뭐 별거 있나?
말산요연(末山了然) 비구니가, 여자 비구니인데, 여자 비구니가 견성을 했다고 학자를 거느리고 설법을 허고 있으니까, 관계(灌溪) 스님이 관계 스님은 유명헌 제방 선지식인데, 관계 스님이 “이까짓 놈의 말산요연 같은 것이 학자를 접(接)헌다고, 제가?” 비구니를 업신여겼다 그 말이여. 여자라고. 여자는 성불 못헌다고.
여자가 왜 성불 못했나? 여자는, 무슨 남녀가 어디 거기에 구별이 있나? 남녀가 무슨 뭐 무슨 놈의 구별이 있어서 여자는 성불 못햐?

관계(灌溪)가 “말산요연 같은 비구니 요까짓 것이 성불을 했어? 그만 내가 가서 이것을 그만 벼락을 내서 출세를 못허게 만들어야, 요런 것을 출세를 시켜 놓을 것 같으면 학자를 모도 버리고 불법을 망칠 것이니 이걸 없애야겄다. 외도(外道) 마구니다” 이래 가지고는 들어갔다.

말산의 회상(會上)을 떡 들어가서 대번 묻기를, 법담을 하되
“여하시말산(如何是末山)고? 어떤 것이 말산이냐?”
“불노정(不露頂)이니라. 정(頂)이 들나지 않았느니라” 그만 그렇게 들어 두어.

“여하시말산주(如何是末山主)냐? 어떤 것이 말산주(末山主)인고?”
“비남녀상(非男女相)이니라. 남녀상(男女相)이 아니니라”

관계 스님이 할(喝)을 냅대, 벽력같은 고함을 한번 질렀다. “하불변거(何不變去)야? 어찌 변해 가지 않느냐?” 관계가 그렇게 허니까,
말산이 “불시신(不是神)이요, 불시귀(不是鬼)다. 신(神)도 아니고 귀(鬼)도 아니다. 변개십마(變箇什麽)냐? 변개(變箇)가 뭣이냐?”

그 그 말 한마디에 관계가 답 못허고 거기서 관계가 죽었네. 거기서 죽었어. 그 언하(言下)에 죽었어. 그만 거기서 말산(末山)이한테 항복허고 3년 시봉을 했다. 3년을 꼭, 그런 법이여. 3년을 시봉..

꽉 맥혔어. “불시신(不是神)이요 불시귀(不是鬼)허니 변개십마(變箇什麽)냐?” 변해간 낱[箇]이 뭣꼬?
'어찌 변해 가지 않느냐?' 자기가 만들어 놓고 자기가 죽지. 제가 사유를 만들어 놓고 제가 죽지. 제게서 모도 나온 것이지 어디 딴 데서 나오나?

"신(神)도 아니고 귀(鬼)도 아니거니 변개십마(變箇什麽)냐? 변개(變箇)는 십마(什麽)냐? 무엇이냐?" 묻는디 답 못해, 그 3년 시봉을 했어. 3년만에사 깨달랐다 그 말이여, 관계(灌溪)가 말산요연(末山了然)한테. 법(法)이라 하는 것이 그렇게 미끄럽게 그대로 써 나가는 것이여.


공부를 허되, 가장 처음에 화두를 처음 타 가지고는 사유(思惟)를 두려워해라. 그 무슨 사유, 조그만헌 무슨 마음이라도—이치, 무슨 이치든지 이치를 붙이거나, 무슨 그 말을 붙이거나, 무슨 뭐든지 사유 그 사유에 다 들어가 있는 거여. 사유(思惟)치 말아라.

주시(做詩), 또 거다가 시를 짓고 주시(做詩), 주게(做偈) 무슨 게송(偈頌)을 짓고, 주문부등(做文賦等)이다. 문부(文賦) 등을 또 짓지 말아라. 요런 것 고런 것이나 모도 짓고, 거다 모도 붙이고, 거다 이치를 붙여서 견성했다고, 모도 고런 알음알이를 붙이고 요따구 짓, 견성이 그런 것 아니다 말이여.
시도 짓지 말고, 참선허는 사람이 무슨 놈의 시(詩)인가? 게송(偈頌)도 짓지 말고, 아무리 글이 훌륭하다 하드래도 문부(文賦) 등도 짓지 말고, 문부(文賦) 글 짓고 모도 문부(文賦) 등을 짓고.

시게성즉(詩偈成則), 시(詩)를 짓고 게(偈)를 짓고 문부(文賦) 등을 모도 짓고 고런 짓을, 공부허다가 공부는 그만 내던지고는 화두는 저버려 버리고, 그런 짓을 하다가는 시승(詩僧)밖에 안 된다. 글허는 중밖에 안 되아. 그 시승(詩僧)이 거 뭣허는 거여? 글만 허는 중이지, 중인가 그것이? 참선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야 중이지. 시승(詩僧)밖에 안 되고.
문부공즉(文賦工則), 문부를, 모도 글을 짓고 문부(文賦)를 공부헌 즉 칭문자승(稱文字僧)이여. 문자승(文字僧)이라고 밖에는 헐 수 없다 그 말이여. 그 무슨 뭐 뭐 그 중이 그런 것인가? 문자승(文字僧)이나 시승(詩僧)이나 그 뭐 글 잘하는 것이 뭐 중이여?
여참선(與參禪)으로는 총몰교섭(總沒交涉)이다. 참선허는 학자는 그런 법이 없다. 참선허는 학자가 언제 시(詩) 짓고, 게(偈) 짓고, 문부(文賦) 등을 지을 수가 있겠느냐?

오직 참선이다. 오직 견성(見性)해서 성불(成佛)허는 법이다. 견성해서 보림(保任)허면 사사무애(事事無碍) 증(證)허면 부처 안되어 버리는가?
암만 견성을 했닥 하드래도 옳게 했지마는 보림을 안 할 것 같으면은 미(迷)해서 도로 그만 처백혀 버리니 되아? 오후재미(悟後再迷)니. 오후(悟後)에, 깨달은 후에 도로 미(迷)해 버리니 되아? 이런 것을 선후를 분명히 알아야사 되는 것이여. 그런 것도 아지 못하고 선후를 아지 못허고는.

보조(普照) 스님 『수심결(修心訣)』에 그런 말이 있지?
'어찌 요새 요새 그 견성헌 사람들이, 견성해서 모도 공부해서 견성했다는 사람들이 무유일인(無有一人)도 신통변화(神通變化)하오이까? 한 사람도 신통변화가 난 사람이 없습니까?'
'견성을 헐 것 같으면은 하늘도 올라갈 수 있고, 땅도 땅속에도 들어갈 수 있고, 은신도 헐 수 있고, 호풍환우(呼風喚雨)허고 바람도 이룰 수도 있고. 승천입지(昇天入地) 호풍환우, 그 무슨 별별 짓을 다 신통변화를 헐 수 있으며, 능히 능살능활(能殺能活)도 헐 수, 능히 죽기도 허고 살 수도 있으며, 아! 뭐 별짓을 다 해야 그 견성인데, 그 그런 짓 하나도 없는 것이 무슨 견성입니까?' 물으니까.

보조 스님이 말씀을 하사대, '여부득경발광언(汝不得輕發狂言)하라. 네가 그 개벼히 그 미친놈의 말을 말아라. 네가 미친놈이지, 그 옳은 놈이냐? 공부를 허되 선후(先後)를 알덜 못허고 본말(本末)을 알덜 못헌 놈이 무슨 놈의 그 네가 공부헌 사람이냐? 네가 무슨 숭악한 미친놈이로구나.
거기 답(答)을 허시되, 아무리 견성을 했닥 하드래도 여불(與佛)로 무수(無殊)허게 부처님으로 더불어서 부처님과 같이 깨달랐닥 하드래도, 이즉돈오(理卽頓悟)다마는 이치는 몰록 깨달랐다마는, 사비(事非)를 돈제(頓除)다. 사상사(事象事)는 그대로 돈제(頓除)여. 몰록 제(除)헐 수가 없어.

그러면 그 비유해서 말을 허자면 식빙지이전수(識氷池而全水)인디, 얼음 못이 얼음이 온전히 물이다마는 차양기이용소(借陽氣以鎔消)허고, 양기(陽氣)를 가자(假藉)해사 그 얼음을 녹히고.
구름이 한 점 없어 볕이 나사 얼음이 녹고, 날이 더워야사 얼음이 녹고, 빙소즉수류윤택(氷消則水流潤澤)이다. 얼음이 녹아야사, 볕이 나서 해가 나와서 얼음이 녹아야사 수류윤택(水流潤澤)이다. 물이 윤택허다.
방정개척지공(方呈漑滌之功)이니라. 바야흐로 척지(滌之)의 공(功)을 이룬다, 물이 얼음이 녹아야사 마음대로 쓰고 마시기도 허고 밥도 짓고 마음대로 쓰지 않나?

아! 그러헌 것이니 오범부이즉불(悟凡夫而卽佛)이다마는, 범부가 곧 부처인줄은 깼다마는 대번에 그만 그 깨달라 가지고는 얼음, 얼음같이 되어 가지고 쓸 수가 있나? 얼음 녹히듯기 보림(保任)을 해서 인자 그 물 다 녹혀서 마음대로 쓰는 거와 같느니라.
어린 자식을 막 낳아 놓았는디 그놈이 어디 그 눈 · 코 있고, 입 · 귀 다 있지마는, 그놈이 눈으로 온당하게 보고, 귀로 온당하게 듣고, 입으로는 온당하게 말을 하나? 막 낳아 논 것이? 다 이목구비는 갖추어져 있지마는 말도 못허고, 듣도 못허고, 그렇게 모도 포복(匍匐) 방자(放恣)허기만 하지?

같다. 견성(見性)허면 그와 같다마는, 이놈이 차츰 세월이 방기허면은, 바야흐로 세월이 이르면은 차츰 자라 커서 말도 허고 가기도 허고 오기도 허고. 한 20살, 한 30살 먹으면 인자 그때 가서는 성인(成人)이 되는 법이니, 마음대로 허지 않나? 사람 일을.
그와 같애서 견성(見性)도 역부여시(亦復如是)니라. 견성해 가지고는 그렇게 보림을 잘해서—참! 견성헌 후에 보림(保任)이 어렵다. 견성은 일언지하(一言之下)에도 헐 수 있고, 눈 한번 깜짝 사이에도 터꺽 볼 수 있다마는, 보림이라 하는 것은 자식 막 낳아, 푹 나 놓지마는 키울 때가 얼마냐? 10년 20년을 모도 기른 거와 같고, 얼음도 그놈이 물이 어디 대번 녹나? 차츰차츰 볕이 또 쬐이고, 또 쬐와 녹듯기 이래야 되는 법이니라. 그런 차서(次序)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공부인이.

그런 차서를 알지 못하고는 푹! 그만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란께 얼른 툭 깨 가지고는 부처님과 똑같애 가지고 그만 마음대로 구름도 타고 제멋대로... 고따구 놈의 사견심(邪見心), 고따구 놈의 못된, 그거 써? 그게 아무것도 아니여. 저 미쳐 버리고 마는 거여. 도문(道門)에 들어와 다 미쳐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이여.

화두를 배왔으면은 사유(思惟)를 두려워혀. 사유, 못된 망상이나 막고, 망상 안 나는 방법은 얼른 관(觀)을 돌이켜. ‘어째서 무(無)라고, 조주 스님은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했는고?’ 요놈만 딱! 해버려. 그러면 딱! 고놈만 나와번지면은 그 무슨 사유가 어디 붙어 있고, 어디 나올 곳이 있나?
심무이념(心無二念)인디, 마음이 두 마음이 없는디 어디 가서 나와? 그 온당한 마음으로 철저헌 마음으로써 화두만 돌이키면은, 공안만 떠억 ‘어째 판치생모라고 했는고?’ 없제.
요 하나를 온당하게 이루지 못하고. 그러니 망상이 퍼 일어나면은 이 우게서만, 입에서만 밤낮 돌면 구피변(口皮邊)으로만 하면은 망상 따문에 못헌다. 도를 못 닦아.

가만히~ 사유(思惟) 없는 마음으로써, 숨을 가만히~~~ 내쉴 적에 저 단전(丹田) 밑에 화두를 두고는 화두부텀, 사유 없는 화두(話頭)부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부텀, 딱 단전 밑에다가서 화두를 떠억 거각(擧却)하고는. 가만히 화두 관허는 철두헌 마음이 철저헌 마음이, 알 수 없는 마음이, 단전 배꼽 밑에 손그락 한 마디 두 마디 밑에, 두 마디 거가서 마음이 따악~ 알 수 없는 놈이 있어 가지고는 가만히~ 홍모(鴻毛)가, 기러기 털이 코에다 대도 흔들거리지 않게 쉬라고 했어.

가만히~ 내쉴 것 같으면 배꼽이 저 등에가 붙는다. 등에가 붙으면은, 얼른 또 숨을 내쉬어야지 안 쉬면 안된께 조금 멈춰 가지고는, 화두 알 수 없는 거다가 딱 멈춰 가지고 가만히 내쉬면은, 가만히 내쉬는데 홍모(鴻毛)도 흔들거리지 않게 가만히 내쉬는데 가서, 화두는 온당하니 관(觀)해져 있다.
물달, 물에 달 떨어져 있듯기, 물빛 가운데 달 있듯기 온당하니 있다. 온당하게 있는 그 화두는 조금도 어디 가고 오고, 무슨 뭐 자리를 옮기고, 없다.
자리가 잡혀서 그 자리 꽉! 있으면서 들이쉰 숨은 스르르르 또 제대로 들어가 가지고, 그 화두 있는 디까장 가서 화두에 가서 그 숨이 그대로. 뭐 그 마음을 내서 있는 것이 아니여. 저절로 숨이 들어가서 또 거가서 잠깐 멈추어 있다가, 또 가만히 사르르르 내쉬고.
요렇게 그 아주 묘하게, 너무 힘을 되게 쓴다든지, 자꾸 자주 헌다든지, 억지로 헌다든지 큰일난다 그 말이여. 제대로 가만~히 그저 해 보면은 묘재기중(妙在其中)이여. 묘헌 것이 그 가운데 있어.

그렇게 야단치게—그 급허지도 않고 되지도 않고, 되면 또 그 좀 늦추고 이래 가지고 기운을 이렇게 내려버릴 것 같으면은 상기(上氣)가 올라오는 법이 없어.
억지로 그만 자꾸 숨만 들이쉬고 안 내쉬면 여가 배에 가서 기운이 몽쳐 가지고 안 나오면 큰일나고. 또 그 잘못하면은 역효과가 일어나서 화두가 되도 않고, 그 못되아.
이게 달마 스님 태식인디, 달마 스님 태식(胎息) 이렇게 해서 9개월만 헐 것 같으면은—그 걸음도, 그게 공부허는 사람은, 그놈을 전력(全力)헌 사람은 걸음을 걷는 것 봐도 알아. 우디디디디 그런 법도 없고. 9개월만 할 것 같으면은 일체 신유경모(身猶輕毛)다. 몸이 경모(輕毛)같다.

나도 이렇게 말만 설허지 그렇게 해보들 못허니까, 나도 허지 못허고 넘을 가르키는 것 같지마는, 나는 달마태식경을 보았다 그 말이여. 봤어도 낮에로는 그저 이것저것 모도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키고 뭣도 허고, 밤으로는 전공을 헌다 그 말이여.
허지마는 아직 득력(得力)은 그 태식 득력은 못했으니까 말할 것도 없지마는 그렇게 허라고 한 거 있어. 그래, 그렇게 해보면은 망상(妄想)은 대번 안 일어나니까. 한 4~5시간 댓시간씩 앉었어도 망상 하나... 마음대로 허니까. 그 화두가 거가 따악 있어서 자리가 잽히면은 망상이 없어. 나오도 안 해. 그 그렇게 그 늘 허던 못허드래도 가끔 익혀서 그렇게 해보란 말이여. 내가 늘 헌 말이여.


참선학자가 그 사유(思惟)를 해 가지고 글 짓고, 무슨 게(偈) 짓고, 문부(文賦) 등 짓고 허면 시승(詩僧)이요, 거 무슨 뭐 문자승(文字僧)이요, 무슨 그 그런 것이지, 무슨 참선으로는 몰교섭(沒交涉)이여. 거그 빠져 가지고 글이나 짓고 그렇지. 뭐 중이면 다 중인가?
뻘로 돌아댕기면서 밤낮 그만 그저 그 절이나 맡을라 하고, 어디 가서 넘 절이나 뺏을라 하고, 무슨 행동이나 그렇게, 그거 뭐여? 그것이. 그 사람이여, 그 중이여? 뭣이?

거 도 닦는 도학자라는 것은—요새 선객이라고 돌아댕기면서 절이나 뺏을라고 금방 중이 되어 가지고 와서는 뭐 비구승이라 해 가지고는 돌아댕김서, 금방 또 뺏어 맡아 가지고는 주먹이나 쓴 놈이 맡아 가지고는, 해 봤나?
절이라는 것은 맡으면 어떻다고. 그 도량 청소도 헐 줄 알아야 할 것이고, 신도 오면은 그 신도 제접(提接)허는 법도 그 참 점잖하게 개볍지 않게 잘 헐 줄 알아야 하고, 주인노릇 얼마나 하기가 어렵다고.

이놈 툭탁거리고 돌아댕기고 꺼덕허면 그만 주먹이나 쓰고 헌 놈이 헐 줄 알아야지? 자꾸 뺏을라고만 하니, 그 어릴 때부텀 잘 배워서 도량 깨끗이 해서 해 나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허물을 잡아 쫓아낼라 하니 되나?
모도 쫓아내 가지고는 맡아 가지고는 그만 팔아먹네. 돈이나 얼마 받고 팔아먹어, 못허니까. 이러고 돌아댕기니까 지금 세상에서 비구승 비평이 굉장해. 말로 헐 수 없고.

선객으로도 또 들어와서 선방에 참선헌다 하면서 괴상스러운 그런 모도 사유를 해 가지고 사유심(思惟心)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불기심(不起心)을 억제허지 못허고는, 그만 이기지 못허고, 그저 장난이나 내고 왔다갔다하고, 조금 있다가 그만 픽 달아나고, 무슨 제멋대로 하고, 그것 뭣헐 거냐 그 말이여. 그런 것 하나를... 이번에 숙청 다 된다 그 말이여. 그 감찰원에서도 시방 그러지마는 서울서 그걸 연구를 무척허고 요새 모도 중된 거, 절이나 뺏고 돌아댕길라고 헌 거, 싹 다 숙청을 해.
그러고 선방에도 돌아댕김서 그 모도 그 그런 못된 행동이나 하고, 옛날부텀 거 무슨 칼수좌니 아라사 병정이니 그런 것들이 들어와서 선방에 그만 장난을 내 가지고 참선을 못허게 허고 모도, 대중이 모도 갈리게 맨들고, 그런 것들 지금 있을 수 없어.
고런 것들은 발끈 묶어서 한 댓새 단식을 시켜 굶겨 놨다가 쫓아버려. 내쫓가버린다 그 말이여. 다시 가 행동머리 못허게, 옷 탁! 벳겨서 쫓아내 인자. 그런 것을 옷을 입혀 보내면 딴 데 가 또 그러게? 인자 이러헌 법칙이 나와 있어. 지금 다 있어.
참선승이라는 것은 그런 법이 없다.

범우착역순경연동인염처(凡遇着逆順境緣動人念處)에 변당각파(便當覺破)해. 무릇 일체 역순경계(逆順境界) 동(動)헌 염처(念處) 일체처에, 그런 처(處)를 만나서 변당각파(便當覺破)해라.
문득 탁! 화두를 처꺽 들어 버려라. 천만경계가 어디 화두 하나, 공안 하나 처꺽 들어 단도리허면은 거각(擧却)하면은 그만 천하 없는 경계가 어디 가 붙어 있을 거냐?
마음에서 일어나는 건데, 마음이 그만 공안인디, 알 수 없는 공안만 찾아가는구나. 알 수 없는 공안이 낸디, 내가 나를 찾는 곳에 가서 뭐 그런 것이 있겠느냐?

좀 도학자(道學者)다워라. 학자답게 좀 해 보아라.
뻘로 학자니, 뻘로 돌아댕기면서, 일생을 미륵하생까장 고러헌 학자답지 못헌 행을 해 보아라, 뭣 되는가? 뭐가 되느냐? 업(業)만 퍼짓고, 미륵하생까장 고따구 학자 되나? 밤낮 들어가 죄만 받지?
그만 각(覺)으로 파(破)해 버려라. 얼른 깨달라. 제기화두(提起話頭)해라. 화두만 들어라. 항상 화두만, 알 수 없는 놈만. 화두 하나뿐 아닌가?


못된 것 받아 놓으면은 못된 것 하나 따문에 대중이 흔들거려서 안되니까 그걸 안 받는 것이여. 받아 그런 것을? 대중이 꽉 묶아버리란 말이여. 나 혼자 받고 안 받아? 나는 내가 뭐 인제, 대중이 절대 꽉 그래 가지고 틈새기도 없이 받지 말란 말이여. 그러고 그런 건 당최 받아들이지 말어! 어림도 없다. 여기 그런 거 시방 받나?

그 불량한 놈들 나한테 와, “네 이놈들 불량한 행동해 봐. 네 이놈 뭣이 옷 아니고 뭣이 뭣이, 뭐 써봐 이놈아!” 대갈빡을 착 치면은 이놈이 나한테 대들던 못하네. 내가 어디 그놈들 뭔 이길 능력이 있나? 뭣 유도가 4단이니, 무슨 뭐 당수가 몇 단이니 헌 놈들, 나 그놈들 보면 역부러 “이놈의 자식! 주먹으로 모가지를 쳐버려. 느그가 뭐 써 그걸? 왜 써?” 내 그놈들 다 다룬다 내가. 내 다 다루아. 내가 한 놈도 그놈들 나한테...
한 놈 뭐 모가지 떨어.. 인가해 달라고 모가지 떼서 “이놈의 자야...” 그놈이 여기 와 하면 뭐 어디 어떻게 헐 수가 있나?

“그 이리 이래도 안 해 줄라느냐?”고.
“아! 이 자식아, 모가지 떼 가면 그만이지, 이놈아 인가가 뭐 너한테 인가가 뭐여? 이놈아! 목 떼 가!” 내 그래버렸지 뭐.


꼭 그 각(覺)으로 파(破)해라. 화두 각(覺), 알 수 없는 각(覺)으로 파(破)해라. 그 각(覺)만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했는고?’만 해 봐라. 지극히 해 봐라. 안 되는가? 안 될 리가 없으니께 해 봐.
께을코 그만, 잠이 오면 그만 께을고 뇌곤허고 잠잘라고 허는 마음이 게으른 놈이 들어와서 그만 잔다. 역부러 자 주는 거이 잔다.
(잠이) 들어오거들랑 일어나던지. 깨우는 방법을, 일어나. 일어나서 정중(靜中)에도 나갔다 오고. 잘 만큼 잤는디 뭐. 자 주었는디 뭐.

불수경연전(不隨境緣轉)해라. 그 경연전(境緣轉)에, 그 일어나는 마음 요러니 전(轉)허지 말아라. 고놈 수용해 주지 말아라. 잠 온다고 잠에 수용해 주고, 게으른 마음 들어온게 고놈 수용해 주니라고 자올고, 망상 내고, 사유허고, 이러고 있다 그 말이여. 그런 짓 없이 한번 좀 다루어 봐라. 좀 학자다와 봐라 말이여. 못혀? 뭐 학자(學者) 법문이여. 이것 뭐 신도들한테 허는 법문이여?

그래사 꼭 올리라. 이래서 고인(古人)도 다 부처님도 견성성불 했지, 이렇지 않고는 못한다.

뻘로 밥 먹고, 옷 입고, 놀 때가 있고, 무슨 얘기헐 때가 있고, 수군축대(隨群逐隊)할 때가 있고, 한가히 뭐 이러고저러고, 고러고 나서 인제 앉으면 허다가 잠 온다고 자 주고, 망상 난다고 사유해 주고, 되아? 그게 그게 학자여? 그 도학자(道學者)여? 참 밥 먹이기 아깝고, 참 그런 것 기룰까 무섭다. 모도 그 모양이지. 참 그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혹(或)이 운(云)허되 불타긴(不打緊)이락 하니, 긴(緊)을 치지 안 해야 한닥 하니, 긴(緊)을 치지 않는닥 하니, 자삼개자(這三個字)가 최시오인(最是悞人)이다.
불타긴, 불타긴(不打緊)이라는 석 자(字), 긴(緊)을 치지 않아. 아주 긴절히 허지 안 해야 한다. 너무 긴(緊)허면 못쓰니까 긴절(緊切)히 허지 안 헌닥 하니, 그러면 긴(緊)을 안 허면은 긴절히 안 허면 어떻게 헐 것이여?

아주 긴허게 간절허게—긴(緊)이라는 놈은 급(急)헌 거 아니고 꼭 허는 마음. 그 긴(緊)헌 마음, 참 요긴한 오묘한 마음, 꼭 화두를 거각(擧却)하는 마음, 화두를 잘 관수(管守)허는 마음, 그것이 있어야지, 어디 없어 되야?
그거 그것이 소용없다고 이러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이여. '급허면 안 된다'고. 허니 이 그 오인(悞人)이다. 이 석 자가 그르친 것이다. 사람을 그르치게 맨든 것이여.

학자(學者)가 불가불심(不可不審)이냐? 어찌 긴(緊)허지 안 헐까 보냐? 간절(懇切)히 긴허게 참 다루어라. 그러니 '긴절히 안 헌다'는 그런 말은 사람 버리는 말이니 믿지 말아라.(처음~36분54초) (끝)

Posted by 닥공닥정

 

•§•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11/18) 박산무이선사의 선경어.

**전강선사(No.383)—박산무이선사 선경어(11) (갑인.74.01.25) (전383)

 

약 32분.


송명경숙조(松鳴驚宿鳥)요  운파노청산(雲破露靑山)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납청한객(一衲淸閑客)이  장년독엄문(長年獨掩門)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송명경숙조(松鳴驚宿鳥)다. 솔이 울어서—솔바람이 부니, 솔이 휘이~ 솔바람이 부니 자는 새가 놀랜다. 저 솔바람 부는 산중이란 말이지. 적적(寂寂)헌, 인간 떨어진 저 산중에 가서 솔바람 부는디 자는 새는 놀래고. 운파노청산(雲破露靑山)이다. 구름은 흩어지니 청산이 들나는구나.

청산 속의 일납청한객(一衲淸閑客)이, 한 납자(衲子), 도 닦는 도학자(道學者), 청한객(淸閑客)이—청한(淸閑)이지. ‘맑을 청(淸)’ 자, ‘한가할 한(閑)’ 자.
깨끗헌 참선허는 우리 학자가 장년독엄문(長年獨掩門)이다. 길게 긴 해에 홀로 문을 닫고 앉었구나.

좀 궁둥이에 땀이 푹 젖게, 궁둥이가 좀 땅에 좀 붙게, 그 좀 자리가 잽히게 이렇게 앉어서 도를 닦아야 하는 것이지, 도문(道門)에서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거 안되아. 누구를 막론하고 여기는 있다 갔다, 왔다갔다, 간단 말도 안 하고 갔다왔다 안 되아.
될 수 있으면은 항상 도좌(道座)에 앉어서 도를 닦아야 하는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몸이 아파서 가게 될 때에는 간단 말허고 무슨 일에 갔다온단 말하고 갔다와야 하는 법이지, 그저 왔다갔다 왔다갔다 거 안 되아. 누구든지!
그렇게 간단 말, 온단 말도 없이 그냥 내 집보담도 더 출입을 그렇게 그만 무상하게 아무때나 그래서는 도문(道門)이라는 건 안 되는 것이여.

산철이라고 해서 그만 오늘 왔다갔다 왔다갔다 그 안 돼. 차후부텀은 절대 없어. 차후부텀이 아니라 그전부텀도 그래 나오지마는. 그 내 집, 내 집에도 말이여, 너무 그렇게 출입이 잦으면은 뭐 필요가 있나? 아무 필요 없는 것인데.
도문(道門)에는, 도 닦는 법이라는 것은 그렇게 출입이 너무 그 갔다왔다 분요(紛擾) 분다(紛多)하면 된 법도 없고, 옆에 사람들도 모도 공연히 모도 마음이 따라서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 모도 뽄보고 모도 습관 되고 안 되는 것이거든.
장년(長年)을 독엄문(獨掩門)이다. 길게 문을 닫고 앉어 도 닦는 것인디, 도문(道門)에 도찰(道刹)에 들어와서 그 안 된다 그 말씀이여.

절대로 우리 학자들도 그저 너무 그렇게, 너무라니! 너무 보담도 아주 없어야지. 꼭 갈 일에는 간단 말 승낙 얻고 나가고, 그래야지. 또 그 시일 내에 시간 내에 돌아오고, 그래야지.
마구잽이 돌아댕김서 도학자(道學者)가 고만 세상에 나가서 무어 뭐 헐 일이 뭐여? 뭘 헐 일이 있냐 그 말이여. 그 또 세상에 헐 일이 많이 있는 사람이 뭣허러 들어오냐 그 말이여? 여그 들어와서 공연히 분다(紛多)를 피우고 왔다갔다하냔 말이여.

한 대중이, 옛날에 큰스님 대중이 있는디, 큰스님께서 조실(祖室) 스님께서 규칙을 짜놓고 학자를 똑 도(道)를 가르키는디, 학자 하나가 늘 나가. 그 쓸데없이 그만 가만히 휙 나가고, 휙 나가고. 자기집도 그렇지 못할 것이어늘 하물며 그 도 닦는 선원에서, 이렇게 모도 시주(施主)가 집 지어 주어서, 시주가 집 지어 논 도문(道門)에서 그저 제 마음대로 마음껏 왔다갔다 왔다갔다. 아! 이거.

그래 싸니 대중이 그만 공사(公事)를 허고는 “아! 그 아무 학자가 그렇게 출입이 자재하니 너무 많이 나갔다 들어갔다 해 싸니, 산문출송(山門黜送)을 시켜야 허겄습니다. 쫓아내 버려야겄습니다. 그 사람을 집에 두면은 여러 사람이 다 모도 뽄보기도 허고, 또 세상에 나가서 어디 나가서 무슨 짓을 헌지 알 수도 없고, 아무 디 도학자가 나와서 그 함부로 행동헌다는 그런 말 나기도 쉽고, 불가불 산문출송을 시켜야겄습니다” 허니까. “그래야지. 쫓아내야지” 그러고는 안 쫓아내아.

또 그다음에 대중이 또 공사를 해 가지고는 “아무개를 쫓아내야겄습니다. 그 사람 두어서는 안 되겄습니다”
“쫓아내야지” 그러고는 또 안 쫓아내. 큰스님 명령이 있어야 쫓아낼 턴디. 조실 스님 명령에 대중이 어디 안 쫓아내는 법이 있나? 조실 스님 명령 하에 선방(禪房)이 다 되어 나가는 것인디, 안 되지.

세 번 만에는 “그래 쫓아내야겄네” 그래 놓고서는 조실 스님이 연구를 했다.
그 어떻게 해야만... 아! 그 사람을 쫓아내면—밤낮 선방에 있다가 자기 볼 일, 제 볼 일, 뭔 일, 사사(私事) 볼 일, 어디가 못된 일, 별일 다 나가서 헐 것이고. 안 쫓아내자니 대중이 당최 다 싫어허고. 아! 이것, 그 할 수가 없다.
이거 선원(禪院)이라는 건 달러. 다른 절과 달러서 그렇게 마음대로 자기 혼자 무슨 일 있으면 출입이 어디 있나? 그 없어. 출입이 없는 법이여. 따악 대중이 묶아서 한 다발 묶어 가지고는 그래 규칙 지키고, 아! 똑 죽비(竹篦) 치고 돌아앉고 또 방선(放禪)하고, 밥 같이 먹고, 이래야.

지나(支那)에 총림(叢林)에도 어림도 없어. 개인주의가 없어. 그런데 들어와서, 남의 절에 들어와서 괜히 개인주의로 왔다갔다 왔다갔다, 금방 있다 금방 없다, 거 절대 안 되는 거여. 뭐 우리 선객(禪客)이고, 뭐 신도고, 신남(信男)이고 안 되야. 그런 사람 여 받을 필요도 없고, 이다음에 받으면은 받는 사람이 벌을 당한다 그 말이여.

그래고 지금 어디 그렇게 난잡허게 어디 그럴 수가 없는... 세상이 어떻게 밝아지던지, 도복(道服)을 입고 그만 마구잡이 거리에 댕기면서 그 고갯짓을 허고, 그것까장 다 숭보고 있어. 숭 안 본 줄 알어? 도복을 입고 댕기면서, 그 중 옷을 입고 댕기면서 함부로 모도 고갯짓허고 손 내젓고.
"팍! 썩어버렸다"고, 저 인천 감옥소에 그 소년 감옥에 포교허는 대지라는, 대지(大志), ‘큰 대(大)’ 자, ‘뜻 지(志)’ 자, 대지라는 청년이 거기에 포교사로 있는데, 그 포교사가 저 창제의원 병원에 와서 말을 허는디 들을 수가 없다 그 말이여.

누구한테 그 말허냐 하면은 청와대에 있는 비서, 청와대에 있는 저번에 내가 말을 했는데, 무슨 비서? 민원비서? 뭐 뭐 비서가 그 사람이, 그 사람 아버지가 무여 선생의 친구인디, 그래 '친구 아들'이라고 허면서 나한테 소개를 헌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인사를 다 허고 났는데, 거그 앉어서 그 얘기를 허는데, 그 중의 비평을 그렇게 헌다 그 말이여.
'그 중의 옷을 거 입고는 그저 나댕김서, 그 거리 노상에 댕기면서 허는 행동이 거 기가 맥혀, 폭! 썩었다'고, '불교는 폭 썩었다'고 이렇게 그만 악평(惡評) 평판을 허는디 참 듣기 어렵드구만.

내가 그래서 그 말 대답에 뭐라고 헌고 하니, “자 세계적으로 세계 만방에 불교가 지금 태국이든지, 저 몽고든지, 저 버마로든지 저 모도 사방 전체에 그 불교가 얼마나 퍼졌든지 말할 것 없고. 또 신라 때 불교가 어떻게 왕성했든지 말할 것 없고, 일본도 불교가 지금 얼마나 흥왕했는지 다른 교는 번식을 못허고 맨 불교뿐이고, 세계가 불교가 그렇게 굉장하게 발전된 이때인디, 해필 한국불교 한국 중만 가지고 논평할 것이 없다. 그 개인적으로 볼 일이지, 한 개인이 그런 것이지, 그 전체적으로써 그렇게 갖다가 막 때려 '폭 썩었다'고 그래서야 될 것인가?
우리 부처님의 그 문화가 지금 한국에 얼마나 쌓여 있으며, 팔만대장경이 한국에 있으며, 한국불교가 그래도 활구참선법이 있어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법이 있고 헌디, 그런 좋은 것은 들내지 않고, 한 개인 중이, 하나둘이 인자 엊그저께 들어와서 세상에서 무슨 대학이나 졸업허고 세상에 있다가 들어와서 금방 중이 되어 가지고는 중 옷 좀 입고 고갯짓허고 돌아댕긴다고, 아! 그 사람 하나를 가지고 그런 전체를 집어넣어서 걸어넣어서 몰아서 막 악평을 허면 거 쓸 것이냐?”고, 내가 그랬다 말이여.

"그런게 전체, 세계 전체를 보고 우리 불교 가운데에 주욱 그 한국 또한 그 신라시대라든지 그거 다 그런 것을 봐 가지고 불교 전체를 진비판을 헌다는 것은 몰라 그러허되, 그러지 말라"고 한마디했더니 그 쑥 들어가 버렸지. 내가 이기기는 이겼지. 그 민원비서한테 내가 얼굴을 들게 되었지. 얼굴 까딱하면 못 들게 되었는데.
참 이랬지마는, 너무 그렇게 그 왔다갔다 왔다갔다, 그 이런 선원(禪院)에 있으면서 그 출입 자재, 그거.

꼭! 볼 일은 헐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가령 무슨 지금 모도... 무엇인가 군인에 예비군에 모도 해당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그걸 해놔야 되니까 그런 거 허는 거. 승적(僧籍)도 다시 인자 모도 허니까 승적 같은 거 허는 거 이런 일, 와서 딱 말허고 가고 그래야지. 그런 것도 말이 없이 그만 그저 왔다갔다 왔다갔다 절대 그래서는 못쓴다 그 말이여.
똑 그렇게 알리고 가고, 알리고 들어오고. 고주지인(告住持人)과 급관중자(及管衆者)한테 그 영지거처(令知去處)라. 거처(去處)를 다 알리는 법이라, 본래 법이. 그런 법을 모도 ‘뭐 그까짓 것 뭐 내 멋대로 하지’ 그래서는 안 된다 그 말이여.

그 대중 가운데에도 '그 사람을 쫓아내자'고 하니까, 세 번 만에는 그 조실 스님께서 “저 놈을 저 사람을 내가 쫓아내면은 저렇게 행동이 온당치 못헌 사람을 쫓아내놓으면은 간 곳마다 그 짓을 헐 터이니, 내게 있다가 간 사람이 다른 데 가서 모도 그 그러헌 행(行)답지 못한 짓을 해놓으면은 내 가풍(家風)만 상하고, 내 문풍(門風)만 상할 것이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생각허다가는.
거 늘 월장(越牆)을 해서 밤에 넘어와. 어디 갔다가 똑 밤에 들어와. 가만히 미안하니께 밤에 들어오고 모를 때 들어온다 그 말이여. 그 그래 쓰는가 말이여.

밤에 들어오는 틈을 타서 고 담 넘어오는, 그리 넘어오는 디를 따악 알고 계시다가 그 밑에 가서 가만히 쪼그리시고 앉었었다, 그 조실 스님이.
이놈이 거 어디 가서 인자 술도 먹고 그럭저럭 모도 지내고 허다가는 휘딱 넘어오다가 아! 그 큰스님, 조실 스님 모가지를 콱! 밟아버렸단 말이여. 아! 그냥 조실 스님이 팍 엎어지면서 “꽉!” 험서 고개를 그만 땅에다 부비고는 돌아가신 시늉을 했다 그 말이여. 돌아가시지는 안 했겠지마는 그런 그 돌아가신 흉내를 이렇게 냈다 그 말이여.

아! 이놈이 그렇게 온당하지 못헌 행동을 허고 댕기다가도 그렇게 밤에 넘어오다가 그 조실 스님을 한번 차버리는 바람에, 아! 그만 그 간담이 떨어지고 '내가 조실 스님을 갖다 이렇게 차버렸구나. 조실 스님을 차서 돌아가실 지경에 이르게 맨들었구나'
깜짝 놀래 가지고는 간이 그만 벌떡 뒤집어져 가지고는, 그래도 제 양심은 있든가 조실 스님을 꽉! 보듬고는 끌어안고 들어와서 조실방에다 갖다 뉘여 놓고 물을 끓여서 잡숫게 허고, 모도 사방을 주무르게 허고 이래 가지고는 눕혀 놓고 기다리고, 가만히 앞에서 울고 앉었다 그 말이여. 과연 잘못해... 양심에 인자 이놈이 놀랬던 것이여. 평생에 그걸 모르고 지내다가.

그래 나중에 조실 스님이 깨어나 가지고는 “내가 네 발에 꼭 밟혀서 죽을라고 내가 거기 앉었었는디 왜 나를 이렇게 살렸노? 나를 살게 맨들었노?” 하! 이래 놓으니까, 아! 이놈이 그만, 그 그만 “잘못했습니다. 차후는 다시 이런 짓이 있으면은 모가지를 바치겄습니다” 참 진참회(眞懺悔)를 했어. 진참회를 허고서는 그다음부텀은 출입이 없고, 꼭 그 참 어떻게 잘했던지 아주 훌륭한 학자가 되었다, 이런 말씀이 있어.

도학자(道學者)라는 것은 도(道) 닦는 학자(學者)인디, 도학자가 그렇게 왔다갔다 왔다갔다 밤낮 그래서는 미륵하생(彌勒下生)까장 가도 도업(道業)을 이룰켕이는 마구니 업(業)도 못 이루는 것이여. 그걸 알어야 혀.
참선허는 학자가 한철 지내면 밤낮 돌아댕긴다고 돌아댕기기만 하지. 밤낮 돌지. 그것이 그 오입 그것 길들여 놓으면 참 고약한 것이여. 그거 안 된 것이여.

본래 해제(解制) 후에 댕기라는 것은 도(道)를 얻어 가지고, 도를 증득(證得)해 가지고는 인자 두타행(頭陀行)을 허는 것이여. 동사섭(同事攝)으로 댕기면서 포교도 허고, 사방 댕기면서 인연 찾아 댕기면서 인연도 맺고.
그때 가서는 헐 일이 있나? 도를 깨달라 증(證)했으니, 아! 도인이 인자는 가만히 있으면 뭣혀, 중생 모도 제도(濟度)를 해야지. 사방 댕기면서 모도 인자 참 제도허는 것이란 말이여. 그래 댕기는 것이지.

오전(悟前)에도, 깨닫기 전에도 여상부모(如喪父母)처럼 부모 죽은 것 같이, 내가 나를 깨닫지 못했으니 꼭 깨달라야 하겄으니 그저 어디 돌아댕길 겨를이 있나?
정중(靜中)에 득력(得力)이 최다(最多)한디, 정력(靜力) 가운데에서 도를 성취허는 법이지, 요중선(鬧中禪)이라는 것은 정력(靜力)에서 득력(得力)해야 되는 것이여. 시끄러운 가운데, 분다(紛多)한 가운데에서는 못혀. 처음에는 헐 수 없어.

부처님 같이 상근대지(上根大智)가 없는데, 부처님이 하강(下降)허셔 가지고 설산(雪山)에 6년 좌부동(坐不動)헌 것은 후래(後來) 중생을 모범.. 중생을 위해서 그렇게 허라고 설산에 들어가서 왕궁 부귀를 버려 버리시고, 처자 권속(妻子眷屬)을 이별해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셔서 그렇게 계신 것이 후래 중생을 보라고, 뽄보라고 그렇게 헌 거 아닌가?
달마(達摩) 선사도 소림굴(少林窟)에 들어가서 소림에서 9세(九歲)를 면벽(面壁)헌 것이 그 후래 중생을 위해서 헌 것 아닌가? 왜 그런 고인(古人)의, 부처님과 조사(祖師)의 해 논 그 모범을 안 받을 수..., 뽄 안 받을 수가 있나?

좀 좀 답게 주(住)해 가지고는 도학자(道學者)가 되야 혀. 참말로 좀 닦아 봐야 혀. 이 말세(末世)인디, 참 말세 극악한 말세인디. 이 말세에, 말세라도 인자 이 말세(末世)에 이거 헛되이 보내 버릴 것 같으면은 이 뒤에 점점 더 말세(末世)가 와서 도(道)를 닦들 못혀. 심의식(心意識)이 고식지(姑息至)해서, 마음이 말세일수록에 점점점점 더 그 모도 번뇌 망상이 더 더 끓고 더 많고 허들 못혀. 참선을 못허는 법이라.
지금 이때가 그래도 참 참선헐 때거든. 지금 '한양 말세에 도인(道人)이 콩 튀듯 한다'는 말도 있고 허니까 좀 잘 주(住)해서 도를 닦고, 보살님네도 여기에 인자 그 왔다갔다 그저 그만 그저 질서 없이 그런 이는 방부(房付) 영 인자 이런 안 받아. 받들 않고. 비구니도 안 받고.
도문(道門)인디, 도 닦는 선방(禪房)에 아무나 그런 사람 받아 놓고서는 밤낮 자기네 일이나 보러 왔다갔다 왔다갔다 인자 그럴 수가 없으니까. 그러고 부디 규칙이 그런 줄을 다 알고. 내가 그래서 오늘 아침에 여까장 말허는 것이여.

‘간절 절(切)’ 자가 많이 나와. 참선허는 디는 ‘간절 절(切)’ 자가 참 제일이다 그 말이여.
절지일자(切之一字)가 시최친절구(是最親切句)다. 가장 제일 중요헌 글귀다. 간절헌 자, 간절헌 것이 없으면 잠도 오고, 망상도 나고, 별 마음이 다 일어나고.
용심(用心)이 친절즉(親切則), 공부허는 마음이 간절헌 즉 무간극(無間隙)이다. 간극(間隙)이 없어. 틈이 없어. 뭔 틈이 있나? 무슨 틈이 있어야사 망상이 일어나고 그런데, 간절한 마음, 내가 나를 깨닫지 못했으니 오늘 일이 어떻게 될는지, 내일 일이 어떻게 될는지, 명년 일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고 앉어서, 중생으로 앉어서, 이래 깜깜허게 앉어서, 간절헌 마음이 없이 잠이나 자고, 망상이나 내고, 틈이 생겨서 별별 그 틈, 그 틈 틈난 사이에 별 유작상(有作想)을 짓고 무작상(無作想)을 짓고, 별별 모도 사기 협잡심을 모도 내고 별것이 다 나오지. 그놈의 간극(間隙) 속에서.

그 간극이 없어. ‘간절 절(切)’ 자라는 거는. 고(故)로 마불능입(魔不能入)이여. 마구니가 그놈이 공부허는 디는 모도 들어와서 못허게 허는 건디.
망상심도 마구니요, 잠도 그놈이 잠 마구니요, 거기에 무슨 마음 들어온 것도 선(善)이나 악(惡)이나 들어온 것도 마구니요, 모도 이런 마구니여 그것이. 다른 게 아니여. 세상 애착심과 애욕심 같은 것도 마구니여. 부모도 도(道)를 못 닦게 헐 것 같으면 마구니요, 부부지간도 도(道)를 못 닦게 허면 마구니요, 자식도 도를 못 닦게 허면 마구니여.
어쨌든지 내가 나를 깨달른 법이, 마구니란 놈이 들어오면 쓰겄는가? 틈이 없으면은, ‘간절 절(切)’ 자만 있어서 틈이 없으면은 그런 마구니가 어디 올 곳이 있나? 내 마음에서 들어온 건디.

심극마침(心隙魔侵)이지. 마음이 틈이 있으니깐 마구니란 놈이 들어오지. 심(心), 마음이 틈이 없는데 무슨 마구니가 들어올 것이냐? ‘간절 절(切)’ 자라는 것은 마구니를 막는 절(切) 자다.
일체 선악 그저, 일체 애욕경계 그저, 일체 부귀경계 그저, 일체 지위경계 그저, 모든 망상을 막아주는 ‘간절 절(切)’ 자다. 절(切) 자라는 게 중요허다. 최친절구(最親切句)다.

용심(用心)이 친절(親切)허면, 이렇게 공부허는 마음이 간절헐 것 같으면은 불생계도유무등(不生計度有無等)이다. 뭐 계교유무등(計較有無等), '뭐 견성했네, 무슨 뭐 이치를 알았네, 뭐 깨달랐네' 고까짓 것도 그 붙들 못헌다. 그까짓 것이 어디 있는 거냐?

어제 어떤 놈 뭐, 나한테 무슨 질문헌다고 어떤 놈 그러데. 그 어떤 놈이여? 뭘 질문을, 법상(法床)에 있는데 질문헌다고 턱 불러서 제 사사(私事) 말허듯 그려? 그 어떤 놈이 그런 놈이 있어?
그 도산이 그 닥트렸다면서 뭐여? 뭐 어떤 놈이냐? ( ... ) 뭣헌 놈이여? ( ... )
주장자 들고 있는디 어쩌? ( ... ) 참! 별.. ( ... ) 그만둬. 별놈이 다 있지. 그놈, 아! 공석 법상에 앉았는디 제 사사(私事)로 질문이 있다고, 그런 호래아들 놈.

용심(用心)이 친절(親切)이면, 용심(用心)이 공부허는 마음이 간절헐 것 같으면은 불생계도유무등(不生計度有無等)이다. 유무등(有無等)이니, 뭐 일체니, 무슨 뭐 별별.. 없어. 무슨 마음속으로 일체 이치도 없어. 견성했느니, 뭐 내가 알았느니, 뭐 그따구 놈의 소.. 어디서 고런 것이 나와? 어디 견성이 고런 것인가?

즉불락외도(則不落外道)니라. 외도에 떨어지지 않는 법이다. ‘간절 절(切)’ 자만 있을 것 같으면은 ‘간절 절(切)’ 자 속에서 알 수 없는 의단독로(疑團獨露), ‘이뭣고?’ ‘이- 헌 놈이 뭣고?’ ‘뭣고? 헌 이놈이 도대체 뭐냔 말이여? 뭐가 내냔 말이여?’ 뭐가 내길래 나를 이렇게 몰라?
이래 가지고도 '사람'이라 그러고, 이게 이래 가지고 눈 뜨고 뭐 보고 허니까 살았닥 햐? 뭘 살아, 살기는? 그 산 것이여? 송장이 그저 좀 보고 돌아댕기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여.

어쨌든지 내가 나는 깨달라야 되아.

내가 나 깨닫는 거이 참선법인디, 내가 나 깨달은 법을 그렇게도 믿지 않고, 그렇게도 허지 않고, 이 송장덤뱅이 하나 멕여 살릴라고 돌아댕김서 야단을 피우고 왔다갔다 왔다갔다하고, 별짓 다 하고.

척 들어앉어서 도(道)만 닦아 보지. 누가 도 양식 안 주며, 누가 도 닦는디 옷이 없으며, 옷 주고 밥 주고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부담을 했어. 천하에 제석천주(帝釋天主) 같은 임금이 없는디, 제석천주가 일체 우리 도(道) 닦는 학자(學者)의 의복을 담당 부담을 했다 그 말이여.
앉어서 도 닦으면 저절로 모도 갖다 주네. 헌디 무엇 때문에 공연히 그 모도 불려서 왔다갔다 왔다갔다 그러냔 말이여? 좀 지긋허니 앉어서 좀 닦아 봐야 혀.

이 또! 또 절(切) 자가 있어. 박산무이선사(博山無異禪師)의 법문인데, 내가 여태까장 이걸 안 했구만. 한량없어. 이거 나가면서 절(切) 자가 한량이 없어.
『초심(初心)』을 좀 새길라고 해도 아직 기운이 좀 없어서, 여 모도 학자들 『초심(初心)』을 가르켜야겄고. (처음~31분59초) (끝)

Posted by 닥공닥정

 

•§•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10/18) 박산무이선사의 선경어.

**전강선사(No.381)—박산무이선사 선경어(10) (갑인.74.01.24.새벽) (전381)

 

약 17분.


백운천만리(白雲千萬里)에  방초고향춘(芳草故鄕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낙일등루망(落日登樓望)허니  동해만리파(東海萬里波)니라
나무~아미타불~

내가 나를 깨달라 놓고 보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놓고 볼 것 같으면은 어디 가서 맥힘이 있으며, 어디 가서 걸림이 있으며, 어디 가서 생사고(生死苦)가 있으며, 뭐가 있나?
그렇게도 일이 없거니와 그렇게도 상락아정(常樂我淨)이여. 항상 생사 없는 아정락(我淨樂)밖에 없어. 즐거운 낙(樂)밖에 없어.

깨닫지 못하면은 항상 중생(衆生) 그 번뇌 지경, 중생 그 망상 지경, 중생의 그 생사 지경, 기가 맥히다. 모도 맥혀. 모도 그만 형극(荊棘), 가시 형림(荊林)이여. 뚫고 나갈 곳이 없어.
전생도 깜깜혀. 후생도 깜깜혀. 금생에도 이놈 몸뚱이 하나 짊어지고는 모도 걸려. 애착(愛着) 애연(愛緣)에 걸려. 애착 애연이 하나도 내 것이 아닌디.

허! 모도 번뇌 망상에서 건립된 것이지 내 물건이 아니여. 그 내 소집(所執)이 조금도 아니여.
'남편이니, 자식이니, 손자니' 헌 것이 내 눈앞에 모두 있건마는, 그게 남편이나 자식이나 그런 것이 내 소집(所執)이, 내 애집(愛執)이 그렇게 애착할 집(執)이 못되아. 그만 갈려 버리면 그만인 것이여.
어디서 서로 만난 것도, 인연 모도 만난 것도 어떻게 소집(所執)된 것이여, 그것이? 공연히 이 몸뚱이 하나 받아 가지고 나와서 무슨 남편이니, 뭐 남편 속에서 남편 하나 만나 인연 만나 가지고 자식 하나 낳았어. 그것을 내 자식이니 내 손자니 허지마는 그까짓 그 몸뚱이 그녀러 것이 그 무슨 뭐 나무토막 하나 얻었다가 태워버리고 내버린 것 같지, 그것이 뭐 내 거냐 그 말이여? 실소집(實所執)이냐 그 말이여? 생각을 좀 해보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여.

인생 일생이라고 해 봤던들 칠팔십 년 못된 놈의 것인데, 칠팔십 년은 그건 장수자(長壽者)에게 한(限)헌 말이고. 그저 금방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목숨 내버리기도 허고, 조금 크다가 내버리기도 허고. 아! 이것 뭐 뭐 이놈의 몸뚱이라는 것이 어디 일순간인들, 눈 한번 꿈적거릴 사이인들 믿을 수가 있는가? 이렇게 무상(無常)하고 허망(虛妄)한 놈의 몸뚱이를 가지고는 내 것이락 햐?
내 몸뚱이도 이렇게 무상하고 허망헌 건대, 거다가 남편이니 무슨 자식이니 손자니 고따구 놈의 애집(愛執)을 가지고는 그저 일생을 못 견뎌서 죽다가, 왼통 그만 ‘어쩌까?’ 허고 근심 걱정허다가, 내 정말 목숨 뚝 끊어진 뒤에 내 목숨 내버린 내 주인공(主人公), 내 소소영령(昭昭靈靈)헌 나는 갈 바 올 바도 모른다. 그놈의 애집(愛執) 속에서 죄만 퍼지어 놓고서는 나 홀로 돌아선 놈의 황천(黃泉)길이다.

자식이니, 남편이니 자식이니 뭐 권속이니, 무슨 천만 지위 권리니 그것 와각공명(蝸角功名)이여. 달팽이 뿔때기같이 되어 번지고. 나 혼자 돌아선 놈의 길, 참 고독헌 놈의 길이다. 향하처거(向何處去)냐? 어디로 갈 것이냐? 가는 곳이 어디냐, 도대체?
흥! 혼자 고독허게 가는 길, 혼자 마음대로 고독허거나 따나 외로우나 따나 마음대로 어디 갔으면 허련마는 마음대로 못 가.

고독헌 놈의 길인디, 외로운 놈의 길인디, 거다가 또 창칼이 들어오고 내 몸뚱이 모도 얽을 쇠사슬이 들어오고, 염라국(閻羅國)에서 막 나와서 뭐 꼼짝달싹도 못허게 묶어 가지고 끌고 들어간 놈의 삼악도(三惡途). 이놈의 몸뚱이 내버린 뒤에 괴로운 것이 이런 무서운 것이 있어. 변시신후지고마(便是身後之苦麽). 몸뚱이 내버린 뒤에 고(苦)를 아느냐?
이런 것을 깨달라야 혀. 무상헌 걸 깨달고, 허망헌 걸 깨달고, 이렇게 포구(怖懼), 두려운 걸 깨달라 가지고는 내가 나를 찾는 법이여.

내가 나를 어서 깨달라야지. 응! 나를 가지고 나를 깨닫지 못하다니, 그게 될 말이여? 결코 내가 나를 깨닫는 것이여.
나를 깨달을 사람이, 내가 나를 찾는 사람이 얼마나 그 참 귀중한 사람이며 독보건곤(獨步乾坤), 홀로 건곤(乾坤)에 걸음허는 사람이여. 참 귀엽고 잊지 못헐 드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되었으매 행동인들 얼마나 정직허며, 세상에 꼭 헐 일만 허고, 안 헐 일은 안 허는 것이여. 이게 도학자(道學者)란 말이여.

백운천만리(白雲千萬里)에  방초고향춘(芳草故鄕春)이다.
백운(白雲) 터억 떠서 천만리에 자취 없이 갔다 왔다 허는 경계든지, 방초처처(芳草處處)헌 그 모도 봄 경계, 그 모도 그 기가 맥힌 '내'의 그 가풍, 묘용가풍(妙用家風) 깨달라 놓을 것 같으면은 자재가풍(自在家風)이여. 한량도 없는 걸림이 없는 가풍. 어디가 걸려? 생사죄에 걸려? 지옥이, 무슨 지옥이 내게 관계가 있어?

낙일등루망(落日登樓望)한디, 해는 떨어졌는디 저 높은 누각에 턱 올라앉았다. 바람은 스르르르르 부는 봄바람에 동해만리파(東海萬里波)로구나. 동쪽 바다를 보니 만 리 물결이다.
일체경계가 도대체 무슨 걸릴 것이 뭣이 있으며, 그것이 모도 열반경계(涅槃境界), 생사 없는 해탈경계(解脫境界)니라.

깨달라 놓으면 모든 경계가, 중생 전체 경계가 그대로 각경계(覺境界)여. 묘용가풍(妙用家風) 각경계여.
깨닫지 못하면은 모도 걸린 놈의 경계, 모도 나를 모도 꼼짝 못허게 맨든 놈의 경계. 게송(偈頌).


어제 아침 절지(切之), ‘간절 절(切)’ 자 법문을 했지마는 오늘 아침에 또 나온다 그 말이여.
절지일자(切之一字)가, 간절(懇切)헌 자, 공부에 간절헌 그 절지일자(切之一字), 내가 나를 깨닫지 못했으니 나를 깨달라야 하겠다는 간절헌 마음.
그 간절헌 마음이—저 남편에다가, 그 남편 보고 싶어 죽을 지경 된 간절한 그 글자에다 댈 것이며, 남자가 마누라 보고 싶어서 간절헌 거그다 댈 것인가? 어린 자식을 금방 낳아 놓았는디 보고 싶은 절(切) 자 거다 댈 것인가? 내가 나를 모르는 마음이.

나를 내가 꼭 알아야 할 거 아닌가? 내가 나를 몰라 가지고 이렇게도 도무지 전후좌우 사면이 흑(黑) 먹통 칠통(漆桶)인디. 깜깜혀. 이렇게 깜깜해 가지고 어떻게 사는고?
봉사가 보들 못허니 참 답답하지. 귀먹은 놈이 듣지 못허니 참 답답허지. 앉은뱅이가 걷지를 못하니 참 앉어 탄식 기맥히지.
우리 범부(凡夫) 중생이 나를 깨닫지 못했으니 깜깜 칠통(漆桶)인디 그걸 알지 못허고는 눈깔을 뜨고 뭐 본다고 돌아댕기고, 듣는다고 뭐 듣고 야단치고 댕기지마는, 우리가 뭐여? 먹통 칠통, 그 참 어두운 밤중이지. 어서, 어서 속히 내가 나를 깨달라야 할 것 아닌가?

허니 나 깨달을 마음이, 나를 찾을 마음이 얼마나 간절해야 할 것인가? 간절(懇切)허다. 참으로 간절허다. 뼛속에 사무친 '간절 절(切)' 자다. 간절헌 그 글자만 하나가 떡 간절헌 마음이 있으면은 일순간인들 광음(光陰)을 허송헐 까닭이 있으며, 어디 헛된 말헐 택이 있으며, 못된 일을 헐 필요가 있나 말이여?
흥! 또옥 그 화두(話頭) 하나를 가지고는, ‘판치생모(板齒生毛)’나 ‘이뭣고?’나 그 화두 하나를 가지고서는 주삼야삼(晝三夜三)에 밤이나 낮이나 그놈 하나 시애(厮睚), 겨루어야 한다 그 말이여. 그놈 딱! 가지고는 그저 일념도 딴마음 없이 그놈만 꼭 다루어 나가야 혀. 그것이 절지일자(切之一字)여. 간절(懇切), 한 글자여.



당하(當下)에 초선악무기삼성(超善惡無記三性)허리라. 마땅히 아래에 무기 삼성(三性), 선(善)이나 악(惡)이나 무기(無記), 삼성(三性)에 뛰어나 버릴 것이다.
무기(無記) 삼성(三性), 무기(無記)라는 것은 고 잠이 들어오는 무기(無記), 또 산란심(散亂心)—무기(無記)도 아니고 산란심(散亂心)도 아닌 중(中), 이놈의 무기도 잠도 안 옴서 또 산란심도 없음서 먹먹헌 놈의 경계가 있다 그 말이여.

선(善)이나 악(惡)이나 무기(無記)나 산란(散亂)이나, 그 세 가지에 뛰어나 버린다. 간절헌 일자(一字)가 있을 것 같으면은.
그놈이 없기 따문에 그저 잠이 들어와서 꾸뻑꾸뻑, 그저 산란심 산란심. 이렇게 도를 닦고 앉었다 그 말이여. 그 도 닦는 법이 어디 그럴 수가 있나? ‘간절 절(切)’ 자 하나가 꼭 있어야지! 절지일자(切之一字) 소중허다.

용심(用心)이 심절즉(甚切則), 마음을 가지는 공부허는, 화두를 가지고 공부허는 마음이 심히 간절헌 즉—오직 깨달을 마음, 어서 깨달라야겄다는 그 깨달라야겄다는 마음이 아니여.
화두 허는 마음, 화두 똑 드는 마음이 간절헌 즉은 불사선(不思善)이다. 선(善)도 거그는 붙들 못헌다. 아무리 좋은 선(善)이지마는 선(善)도 붙들 못혀. 선행이고 뭣이고 그것도 붙지 못혀.

용심(用心)이 심절즉(甚切則), 그 마음이 간절헌 즉은 불사악(不思惡)이다. 악(惡)도 붙들 못한다. 무슨 놈의 악(惡)이 가 붙어?
용심(用心)이 심절즉불락무기(甚切則不落無記)니라. 무기(無記)에도 떨어지지 않느니라. 선(善)에도 떨어지지 않고, 악(惡)에도 떨어지지 않고, 무기(無記)에도 떨어지지 않고, 아! 이런 거여.

그런데 앉으면은 그만 그 간절헌 마음이 없으니, 나를 내가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헐 마음이 간절헌 마음이 없으니 그저 시주것이나 뭐 그저 마음대로 퍼먹고 그저 그만, 그 기가 맥힌 시은(施恩)을 제멋대로 퍼먹고는 앉으면 졸기나 하고, 앉으면 그만 그저 산란 망상이나 하고. 이래 가지고 무슨 놈의 도(道) 닦는다고 들어와서 도문(道門)에 와서 광음만 허송하고, 이게 무슨 짓이냔 말이여.

화두(話頭)가 심절(甚切)이면은, 화두가 간절헐 것 같으면 무도거(無掉擧)다.
도거(掉擧)라는 것은 기가 맥힌 모도 번뇌 망상인디, 도거(掉擧) 뿌럭대기인디 그러헌 도거(掉擧)도 없다. 망상 가운데도 고약한 망상이지, 도거(掉擧)라는 거? 도거도, 그 망상 뿌럭대기도 없다. 항상 앉으면은 화두 하나뿐이지. 알 수 없는 활구참선(活句參禪).

화두(話頭)가 절(切)이면은, 화두가 그와 같이 간절해서 자리가 잽혀서 딱 들어와 있으면은 무혼침(無昏沈)이여, 무슨 놈의 혼침이 있어? 무슨 놈의 잠이 와?
부모 때려죽인 원수 그놈 꼭 내가 원수를 갚아야 잠이 오지, 원수 갚지 못하고 잠이 와?

오늘 낮에 법문이 있을 테니까 조금 허고. (처음~17분11초) (끝)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