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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 (2/4) 고담화상 법어.

 

**전강선사(No.250) - 고담화상 법어 2 (72.06.03.새벽)[몽산법어 부록 06]

 

(1/3) 약 22분.

 

(2/3) 약 22분.

 

(3/3) 약 21분.

 

(1/3)----------------

 

활구참선객(活句參禪客)이여  하인작득쌍(何人作得雙)고

나무~아미타불~

보연천사일(報緣遷謝日)에  염왕자적항(閻王自寂降)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여. 전 세계와 저 비비상천까지, 삼계(三界) 비비상천(非非想天)까지 없어, 참선활구법이.

똑 이 남섬부주(南瞻部洲)에 있는데, 남섬부주라도 인자 한국밖에 없다 그말이여. 기가 맥히지.

 

내가 조금도 헛소리 아니여. 만국 그때 뭐 지도자 대회에 어디 뭐 참선법이 있어? 한 나라도 없지.

그 불교 유명한 나라는 다 왔는데. 또 이 중간에 16개국이 또 모였었고.

 

없어. 그 공안법을 물어 보니 공안(公案) 뭐 알도 못햐.

불교는 각처에 다 있지마는 참선허는 법은, 참선법은 없다 그말이여.

 

나는 그래도 그렇게는 안 알았거든.

'그 참선법이 어디 들어간 데가 더러 있는가? 혹시 아는 데가 있는가?'했더니, 참 과연 없다 그말이여.

 

우리 꼭 활구(活句)를 고대로 공부허는, 공안 참선을 고대로 공부허는 학자는 우리나라밖에 없거든.

언제든지 이렇게 그저 야삼주삼(夜三晝三)에 안벽(眼壁)허고 관심(觀心)허고 앉어서 꼭 그 공안을 연구해 나가는 거, 화두 의심해 나가는 거.

 

'누가 행여나 행여나 그 해석해 줄까, 누가 행여나 그 모두 글 가르켜 주드끼, 글 가르쳐 알려 주드끼 고렇게 해 줄까' 오히려 무서워허고, 학자는.

 

우리 참다운 학자는 그렇지 않어? 그저 뭐 천하 없는 해석을 다 해 줄까 무서워서.

응, 어림도 없지. 참다운 우리 학자가.

 

이렇게 닦아 나가는 데는 없어. 그걸 정법(正法)이라 하는데. 꼭 그 정법이여, 다른 정법 아니여.

부처님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수도허셔서 견명성(見明星) 오도(悟道)허신 그 법이여. 그 정법이여.

 

고 정법 이외에는 다 사견(邪見)이여. 다 별별 것이 다 방편(方便)이고 환(幻)이여. 환이여. 방편이고.

'내가 방편으로 했다, 내가 모도 환으로 했다, 내가 사견으로 느그를 꼬였다' 부처님이 다 해 놓으신 말씀 아니신가.

 

똑! 정법, 정법 고대로 우리나라에 와서 머물렀네, 달마 선사의 법이.

한참 중국에 건너와서, 중국에 달마 스님이 첫 조사요. 달마 스님, 2조 혜가 스님, 3조 승찬 스님, 4조 도신 스님, 5조 홍인 스님, 6조 혜능 스님까지.

 

그 밑에 내려와서는 임제종, 위앙종,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 5종이 벌어져서, 하 참! 거 대단했지. 그때 도인이 참 무수허게 나오고.

그래 가지고 우리나라로 딱 건너온 뒤에는 여기서 활구참선 딱 멈추어져 버리고는.

 

어디 일본 건너갔자 일본이 어디 무슨 뭐 일본이 어디 임제종이 건너갔다 가기는 하지만 임제종 역시 조동종 임제종 조동종이 선종(禪宗)이라고는 허지마는 임제종 조동종에 지금 그 모도 뭐 해 놓은 거, 『벽암록(碧巖錄)』 같은 거 뭐 해 놓은 거, 전부 해석 다 해 놓았지.

 

하나나 무슨 활구학자 한국마냥으로 한국 선객(禪客)마냥으로 안벽관심허고 어디 무슨 뭐 화두 해 나가는 거, 여기 있어?

'하나씩 깨닫는다'고. 하루 하나씩 깨달는다든가? 날마다 하나씩 깨닫는다든가? 그거 있다지? 그것 참!

 

활구참선객이 우리나라밖에는 없어.

 

하인(何人)이 작득쌍(作得雙)이냐. 어떠헌 사람이 참선객(參禪客)과 쌍(雙)을 허겄냐? 참선허는 사람하고 같은 쌍이 되겄나?

참선허는 사람 같을 사람이 누고? 천상천하에는 없어. 아무리 천상락(天上樂)이 그렇게 훌륭허고 허지마는 참선은 없어.

 

보연천사일(報緣遷謝日)에, 이 목숨, 참선허다가 이 목숨 내버릴 날에.

우리가 내버릴 날이 있지 않는가. 이 몸은 얻으면 내버리는 것밖에 없지. 이 몸 하나 어머니한테 받아 가지고, 가지고 있다가 내버릴 날이 오지.

 

그날이 안 와? 안 내버릴 사람이 누구여?

천하에 필생필멸(必生必滅)이지. 이 몸뚱이 받아 나면은 내버리기 마련이요, 죽기 마련이요.

어디 안 내버리고 안 죽을 수 있나? 그건 없어. 고금으로 통해 놓고 없어.

 

원효 국사가 안 돌아가셨다고?

안 돌아가시기는 왜 안 돌아가셔. 안 돌아가신 이 누구여, 글쎄. 부처님인들 안 돌아가셔?

 

그 같은 몸뚱이 그거 죽는 것이 거 죽는 것 아니여.

몸뚱이 그놈 내던져 버리고 죽지 않는 놈을 바로 봐 버려야사 그걸 도통(道通)이라고 햐. 도통을 참선이라고 하고.

 

참선이라 한께 못 알아듣거든. 아! 여기 지금 진여궁 보살님이 대단히 혜(慧)가 밝은 보살님인데, 참선법 인자 들어오니까 모르거든.

인자 들어와서 들으니 알 것이여? 참선법이 뭔지 모르지.

 

알게 좀 알아듣도록 말하자면은 참선법이라는 것은 도통허는 법입니다. 도통허는 법. 도를 통헌다 그말이여.

왜 '도통했다'고 안 합니까? 도통법(道通法)이여.

 

그 도통을 할 것 같으면은 그만 이 몸뚱이 가지고 있는, 이 몸뚱이 뒤집어쓰고 댕기는 내 마음, 내가 내 마음, 내 말허고 보고 듣고 아는 내 마음, 그놈을 알아 버린다 그 말입니다. 그놈을 통해 버린다 그말이여.

그렇게 들으면 거 쉽게 듣지 않겠소?

 

밥 먹는 놈, 옷 입는 놈, 가는 놈, 오는 놈이 몸뚱이 고것이 헙니까? 송장 몸뚱이 고것이 혀?

내 마음, 내 마음이 허지.

내가 내 마음, 그놈을 바로 통해 버려. 그러면 도통이여. 그걸 참선이라 햐.

 

보연천사일(報緣遷謝日)에, 이 몸뚱이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이 몸뚱이 내버릴 날이 닥쳐와.

 

염왕(閻王)이 자귀강(自歸降)이라.

염라대왕은 이 삼계 모도 화택(火宅) 중생, 우리 모도 인생들 선악을 관찰하고 앉었는데, 누구는 죄를 짓고, 누구는 선을 짓고, 그러헌 모도 그 선악 관찰을 딱 하고 있다가, 이 몸뚱이 내버리면은 혼을 잡아다가 그 다스리는데.

 

몸뚱이 그 같은 건 내던져 버렸으니 몸뚱이가 뭐 소용 있나? 몸뚱이 그놈이 뭐 죄 지었나?

마음 그놈이 모두 시켜서 죄는 지었지마는, 그 같은 거 주인이 마음인디 그거 소용 있나?

갖다 다루어서 죄를 모도 “너 이놈 세상에서 무슨 죄를 지었으니 무슨 지옥 가거라. 어떠헌 죄를 지었으니 어떠헌 지옥 가거라” 모도 이렇게 죄를 다 다슬러 그 염라대왕인디.

 

염라대왕이 참선허는 분께는 참선해서 도통헌 이는 말할 것도 없고, 이거 도통헌 이를 말하는 거 아니여. 바로 참선허는 학자한테는 스스로 항복하니라 그래 버렸어.

염라대왕이 무슨 선악 관찰할 것이 없어. 과거에 천만 겁 중에 전겁(前劫)에 아무리 죄업이 많이 있다 하드래도 숙업(宿業)도 거기 다시 문제가 없어.

 

'염왕(閻王)이 이렇게 귀강(歸降)하느니라' 이랬습니다. 이 참선법입니다.

 

 

참선법은 세상에 그렇게 쉬운 것이 없어.

 

'원 참선법, 참선을 해 되나?' '참선을 해서 견성(見性)을 혀? 아! 참선해서 견성헌 사람이 있나?' 아! 이러고 있다 그말이여.

 

세상에 참선같이 쉬운 것은—다른 것은, 저 돈 같은 것을 번다든지, 무슨 금 같은 것을 그놈을 금 같은 것을 어떻게 땅속에서 캔다든지, 여의주 보배 같은 것을 바닷속에서 구한다든지, 이런 것은 무척 어렵고 못혀.

 

땅속에 그놈 금이 꼭 거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나?

어쩌다가 참, 땅을 파 가지고 금도 나와서 얻기도 허지마는, 거 어쩌다가 그거 원 참! 봉사 문고리 잡기라더니. 문고리같이 쉬운 것이 없지마는 봉사는 눈이 없으니까 문고리를 못 잡거든.

 

금이 땅속에 바로 모두 묻혔지마는, 알면 파면 거기 있지마는, 그거 누가 아나?

모르니까 금 있는 데는 파들 못하고, 없는 데만 파 제끼니 생전 파니 있나?

 

바닷속에 여의주가 있건만, 바닷속에 여의주가 그놈이 어디가 있는지를 알 수가 있어야 바닷속의 여의주를 캐지.

그것은 어쩌다가 바닷속의 여의주를 캘 수도 있고, 어쩌다가 땅속에 금을 팔 수도 있고, 어쩌다가 다행히 봉사가 문고리를 잡을 수도 있지마는, 참으로 얻기가 어렵다 그말이여. 영판 어려워. 전연 없던 않지마는 어려워.

 

허지마는 참선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를 찾아』

내가 나를—보는 놈, 아는 놈, 밥 먹는 놈, 똥 싸는 놈, 가는 놈, 오는 놈, 그놈이 낸디, 그놈을 찾는 것이여. 그 찾는 놈을 찾아.

그놈은 분명히 있거든. 분명히 있는 놈을 찾는디.

 

어디가 뭐 바닷속에 여의주는 없나? 있지. 허지마는 어디가 있는지 아나?

허지마는, 아! 이 참선은 찾는 놈 고놈이여. 이것 보소. 말하는 놈 이놈이여.

 

세상에, 내가 '나'다.

어째서 내가 나를, 찾은 놈을 찾는데 못 찾아?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다 찾느니라' 내가 한 말이여, 이 말이? 부처님이 바로 허신 말씀이지.

'콩인지 팥인지만 아는 사람이면은 다 찾느니라' 하! 이렇게 말씀해 놓았다 그말이여.

 

그런데 참선허라고 허면, “아이고! 참선을 해서 견성을 혀? 하이고! 견성헌 사람이 있는가?” 이렇게 그만 이렇게 미(迷)해 버렸다 그말이여.

이 미(迷)해서, 하도 오래오래 미(迷)해서, 내가 나를 찾을 줄 믿지 않아서.

 

믿으면 그만이요. 믿으면 그만 그놈이 낸.. 응, 참선인데.

믿지 않고, 하지 않고, 겁약심만 낸다. “흐! 내가 어찌...” 이것 참.

 

참선이라는 것은 안 된 법이 없느니라.

 

 

또 화두를 어제 아침에 말했지마는 '이뭣고?'

화두 어저께 와, 어제 좀 감서 옴서 떡 서서 “화두 좀 가르켜 달라”고. 그런 법이 아니여. 어디 도를 그렇게 묻고, 그렇게 배우는 법 있는가?

 

그 단정히 참, 위법망구(爲法忘軀)라니 법을 위해서 몸을 바치는 법이고.

하룻밤 하룻낮을, 참선이 천하에 쉽고 찾는 놈, 내가 나를 찾는 놈, 찾는 놈을 되찾는 놈, 아! 천하에 쉽지마는 불가불 배우자면은 그 스님을 찾아가서 조실(祖室) 스님을 찾아가서 여법(如法)히 법다이 그 신심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그렇게 배우는 법이지,

 

가다오다가 '나 참선 좀 가르켜 주시오' '나 화두 하나 일러주시오' 그렇게 허는 법이 아니다 그말이여. 생각해 봐. 거기서 화두를 일러줄 거여?

 

똑 부처님이 사석(私席)에서—부처님이 평생에 그렇게 출세(出世)해 가지고는 중생을 가르킬라고 원허고 원허고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강림하셨지마는 부처님이 사석 설법이 없어.

가다오다 아무데나 앉어서 “화두 해라” 이렇게 일러준 법이 없어. 사석 설법이 없다 그말이여.

 

이렇게 법상(法床)에 올라서 법상에서 해 준 참선법을 잘 들어야 하지.

왜 법상에서 헌 설법을 잘 못 듣고, 설법을 잘 못 믿고 왜 사석에서 가다오다가 아무데나 그렇게 물을 수가 있나 말이여.

 

'이뭣고?'를 허는데 '이-뭣고?' 시심마(是甚麽)거든. 시심마.

'이 시(是)'자, 심(甚)자는 '무엇'이란 심(甚)자여. '무엇인고?' 그 심(甚)자여.

시심마(是甚麽), 마(麽)자는 아무 거 의미 없는 자여. '뭣이냐?' 그말이여. 뜻 밑에 그 받침이여.

 

두 자뿐이여. 심마(甚麽)뿐이여. 심마(甚麽).

시심마(是甚麽)여. 석 자뿐이여.

 

“이”, 봐 “이” 했지.

“이”, “이” 해 놓고 보니 뭐냐? 그말이여. 뭐여?

 

다시 들어보시오. “이” 해 놓고 보니 뭐여?

그걸 못 들어? 못 들을 게 뭐여.

 

천하에 도무지 무슨 뭐, 어디 그 무슨 뭐 뭐 뭐, 어디 거다가 뭐 책보로 싸 놨나? 뭘로 뭐 뭉쳐 놓았나?

 

'이뭣고?' '이- 뭣고?'

'이- 헌 놈이 뭣고?' 할 것 없어. '이- 뭣고?'(처음~21분48초)

 

 

 

(2/3)----------------

 

'뭣고?' 허면 '이- 뭣고?'

'뭣고?' 허면 알 수 없는 놈 하나 딱! 불거진다.

알 수 없다. 알 수 없구나. 그거이 그걸 활구(活句)라 햐. 알 수 없는 걸 활구라 햐.

 

요만큼이라도 조만큼이라도 터럭끝만큼이라도 실끝만큼이라도 뭣이 붙으면, 뭐 거 따질, 분석할 것이, 해석할 것이, 아는 것이 붙으면 그걸 사(邪)라 햐. 사견(邪見)이라 햐. 그거 사견참선(邪見參禪)이여. 그것은 해석참선이고. 못써.

 

그까짓 참선은 미(迷)헌 중생이 더 미(迷)혀. 단조무명(但助無明)이여. 더 무명만 더 죄만 짓는 것이여. 참선헌다고 해 봤던들 죄만 짓는 것이여.

따져 보고, 분석해 보고, 알아보고 허면은 그만 고것이 숭악한 사선(邪禪), 삿된 선이여.

 

더 참선 되도 않고, 더 되기만 하고, 참선방 앉을래야 앉을 수도 없고, 앉으면 잠 아니면 따지고 분석허고. 천하에 못쓸 것이여.

 

'이- 뭣고?' '이-헌, 이- 뭣고?' 가만히 힘쓸 것 하나 없어. 거 힘쓸 것 하나 없어.

'이뭣고?' 그놈 인자 가만히 '뭣고?'해 놓고는 알 수 없는 놈이 하나 나오면은, 가만히 알 수 없는 그놈의 대가리를, 알 수 없는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가만히 관(觀)헌다. 관혀.

 

관(觀)은 무슨 관인고? 관이라는 것이 '볼 관(觀)'자인디 뭐 다른 것인가?

 

아! 우리집이, 지금 우리집 방안이 어떻게 생겼으며, 우리 방안에 농이 어디 놓아져 있으며, 우리 방 자리는 뭘로 깔았으며,

그 가만히 여기 있어도, 가서 직접—우리 실눈은 지금 여기 와 있고, 내 눈뜨고 보는 이 실눈은 여기 있지마는 눈 감아도 보이지 않어? 환하니. 그와 같은 관(觀)이 있어.

 

거 가서 눈으로 뚝 뜨고 내 눈깔 뚝 뜨고 보는 관(觀) 말고, 눈을 감아도 관이 있어. 그놈이 역력(歷歷)허게 나타나.

 

'이뭣고?' '이- 뭣고? 뭣고?' 의심 좋다.

그 의심, 알 수 없는 '의심 의(疑)'자거든, 알 수 없는 그 '의(疑)'자거든.

 

그게 활구참선이여. 서산 스님께서 바로 또 활구참선 말씀도 해 놓으셨지마는.

수참활구(須參活句)요, 오직 학자가 활구를 헐지언정 막참사구(莫參死句)다. 사구(死句) 말아라.

사구, '죽을 사(死)'자, 사구(死句) 죽은 참선. 사구(死句)란 건 아까 사선(邪禪) 모도 삿된 거, 요리 생각해서 알고, 조리 생각해서 붙여 보고, 요것이다 조것이다.

 

응, 요거 조그만한 것이, 조그만 어린 아이가 아! 그 여러 가지를 내가 한 댓 가지나 낱낱이 해석을 허고 앉었다 그말이여.

"그 어디서 배웠느냐? 니 어디서 그래 가지고 너 왔느냐?” 물은즉, 저 어디 정혜사에서인가 어디서인가 모도 그렇게 해석해 가지고 왔대.

 

고놈 정혜사서 했다고 않지마는, 아! 고런 몇이 거그서 왔는디 다 그러거든.

아 이거 이거 참, 큰일나 버렸어. 맨 그렇거든.

 

거기에는 무슨 참선이 그런 참선이 있는고, 참 이상스러운 선(禪)이여.

그래가지고 그 우리 견성이 어디 있으며, 생사해탈이 어디 있으며, 부처님의 정법이 거기에서 그만 모도 매장되어 버리지, 어디 있어?

그것을 그 뿌럭대기를 좀 파버리고 캐버려야 되지.

 

'이뭣고?'

해 들어갈수록에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 증대되면 그놈만 자꾸 해 나가면은 세상에 그뿐이여, 그뿐이여.

알 수 없는 놈 하나뿐이여. 단, 알 수 없는 놈 하나뿐이니 그렇게 단순하고 그렇게 그대로 응, 그대로 활구 아닌가. 얼마나 쉽냐 그말이여. 얼마나 그 참 직접이고.

 

하! 이런 내 참, 왜 거다가서 뭣 땀새 글쎄 사구(死句)를 만들아.

활구(活句)인디, 본래 활구인디 활구를 갖다 따지고 붙이면 사구가 되어 번져.

 

'참선 학자들아! 참선 허는 학자야! 활구참선을 허지 사구참선 말아라. 말아라' 부처님 말씀이 그 말뿐이여. 꼭 활구참선 하나뿐이여, 다시.

 

활구참선법이라는 건 경절문(徑截門)이여.

저 성불도(成佛圖) 놀아 보셨지? 성불도 놀아 보면은 왜 그 각 제취(諸趣)로 천취(天趣)로 모도 돌고, 저 지옥 아귀 삼악도 악취(惡趣)로 돌고 모도 그렇게 되고, 그 다음에는 오십오 위(五十五位) 점차(漸次)로 올라가기도 허고, 이 도 들어가지 못허고 있지?

 

경절문은 바로 뚝딱 올라가서 대각(大覺)으로 올라가 버리는 거여.

 

참선법은 점차(漸次) 지위도 없고, 이렇게 차제(次第)도 없고, 한 계단 한 계단 뛰어서 부처 되아 가는 법도 없고.

바로 그만 내 마음, 내 마음 '이- 헌 놈 이놈, 이- 헌 놈이 뭣고? 이놈' 툭 깨달라 버리면 그만 한발에 한걸음에 오십오 위(位)니 뭔 위(位)니 없어. 그냥 저 최상 대각에 올라가 버려.

 

무슨 점차가 있으며 무슨 지위가 있어?

아! 그런 참선법, 경절문 법이란 말이여. 그렇게 활구참선을 허셔야 된다 그말이여.

 

그러니 내 마음 내가 깨닫는 걸 참선법이라고 허는디—도통법, 그것이 그 바로 도통법이여.

그 법을 내놓고, 정법을 내놓고 뭘 할 것이냐 그말이여.

 

 

이 법을, '이뭣고?'를 해 나가는데....

 

'이뭣고?'를 한번 거각(擧却)하고 또 한번 거각하고.

처음에는 대체 원 그 하도 처음이니까, 하도 내가 생겨난 때가 없건마는 역사가 없건마는, 한번도 해 본 때가 없기 땀새, 처음이기 땀새 안되아.

 

한번 해 봐도 안되고, '이뭣고?' 해 봐도 안되고, '이뭣고?' 허면 도무지 그놈의 자리가 점점 더 껌껌허기만 하고, 뭣이 '이뭣고?'만 허면 뭣이 아는 것이 푹 나올까 싶고.

별별 망상이 그만 뒤끓고, 아무 망상이니 뭣이니 없다가도 '이뭣고?'만 탁 허기만 하면은 그만 그런 놈의 망상이 더 퍼일어나고, 잠이 또 그놈만 생각하면은 그놈 마구니 잠이 들어오네.

 

그놈 참, 그러니까 좀 성가셔. 좀 처음에는 그렇게 성가셔.

 

한 철 혀. 첫 철, 한철 해 보면은 안되아. 그러지마는 안된다고 해서 퇴타(退墮)해 버리고 안 해 버리면 쓸 것인가? 무엇을 헐라고.

 

이놈을, '이뭣고?'를, 내가 나를 깨달라 놓지 못하면, 찾아 놓지 못하면 밤낮 이놈의 칠통(漆桶), 이놈의 깜깜한 중생—세상에 내 낯반대기 나를 몰랐으니 내 온 곳도 깜깜하고,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때도 깜깜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건마는 깜깜해. 열 달 동안을 어머니 뱃속에서 그 감옥 생활 했지마는 깜깜혀. 나올 때까장도 깜깜혀. 두어 살 응, 서너 살 먹도록까장 깜깜혀.

아! 겨우겨우 한 너더댓 살 먹으면 인자 그 사람의 그 의식이, 사람의 그 식(識)이 뭣이 붙어서 인제 다 안다 그말이여.

 

자! 허니, 인생 문제다. 세상에 이놈의 인생 문제가 어째도 이렇게 나를 몰라 가지고 이렇게 깜깜해 가지고는 거기에서 남[生]에, 늙어서, 병이 들어서, 뒈지는 것 밖에 없으니 죽는 것 밖에 없으니,

죽으면은 몸뚱이만 죽지, 내가 죽는가? '참내'가 죽어?

 

그 내가 어째 이놈의 고(苦)뿐이 하고야, 아이고야! 고(苦)밖에는 없어.

지옥밖에 떨어질 디 없고, 짓는 것이 죄밖에는 지은 것이 없고, 그저 천사만념(千思萬念)이 깨닫지 못한 중생은 그저 이놈의 생각 일어나는 것이 맨 죄다.

 

맨 삿된 마음, 못된 마음, 살생할 마음, 넘 속일 마음, 도둑질헐 마음, 사음질헐 마음, 그저 맨 그런 못된 마음뿐이니, 마음 죄가 더 크다. 몸뚱이로 짓는 죄보담도 마음으로 짓는 죄가 더 크다.

내가 이 몸뚱이로 남을 때려 패 죽이는 것보담도 마음으로 '저놈 내가 죽여야지' 그것이 더 커. 그게 대승계(大乘戒)여. 더 크다 그말이여.

 

중생의 거족동념(擧足動念)이, 우리 인생의 거족동념이—발 한 번 옮겨 놓고, 마음 한 번 내는 것이 전부가 죄뿐이니, 이놈의 죄만 퍼지어서 저 악도(惡途), 지옥에 떨어지고 개 배때기, 말 배때기, 구렁이 배때기 속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문제냐 그말이여. 인생 문제.

 

금생에 사람 몸뚱이 요까짓 것 좀 되었다고, 똥자루 하나 짊어지고 돌아댕기는 것이지.

참선도 않고 그만 그저 동념 죄업(罪業)만, 거족동념 죄업만 퍼짓고 말 것이여?

 

이놈의 인생 문제 봐라.

인생이 이런 문제를 두고 오늘 살았으니깐 족하고, 오늘 이만 하니깐 족하고, 내 세상이야 싶지. 아이고, 참!

 

이 좀 편안하고, 이 좀 젊고, 이 좀 이만헌 요만한 기회 있을 적에 정신채려라 말이여. 참 채려라.

어찌 '이뭣고?'를 모르냐? 아! '이뭣고?' 하나를 몰라? 글쎄. '이뭣고?' 허는 법이다.

 

한 번 혀, 또 한 번 혀. 그렇게 안되지마는 퇴타하지 말아라. 안될수록에 더욱 발심(發心)을 하고 더욱 믿고 더 철저히 해야 하는 법이다.

 

한 번 혀, 두 번 혀, 세 번 혀, 열 번 혀, 백 번 혀, 천 번 혀, 만 번 혀, 자꾸 해 봐라.

자꾸 허면은 그 모도 일어나는 망념 망상이 고놈이 그 자리에서 잦아지고, 그 자리에서 다 녹아지고, 나중에는 '이뭣고?'가 의심이 그 들입대 일어나는 바람에—잠도 고놈이 어디 온 곳이 있나? 잠도 고놈이 오도 않는다. 인자 '이뭣고?' 그놈의 의심이 턱 일어나면은 잠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오래오래 할 것 같으면 역여유천(亦如流泉)이다. 흐르는 저 물, 솟아 올라오는 물구녁에 물 나오듯, 그 물 항상 떨어지지 않고 나오는 물이 있지 않는가?

항상 부증불감(不增不減)으로 나오는 석간수(石間水) 같은 물 같애서, 항상 물이 나오드끼 이 화두도 그 자리에서 그렇게 일어난다.

 

그 반야력(般若力)이 '이뭣고?' 생각하는, '이뭣고?', '이뭣고?' 그 참 생각하는 그 활구 의단이 의심이 그 일어나기 시작하면 없앨래야 없애지 못해아.

그 물구녁 아무리 막아 봐라. 껍닥에서 나오는 디 아무리 틀어 막아봐라. 기어니 옆을 뚫고 나온다.

 

'이뭣고?' 역시 똑같다. '이뭣고?' 역시 그렇게 나오는 거여. '이뭣고?'가 똑 새암물 솟아 나오드끼 그 '이뭣고?'가 절로 자꾸 나온다. 이것을 유천(流泉)이라 한다. 흐르는 샘에 물 나오듯 헌다 비유했어.

 

역여유천(亦如流泉)한다. 그래 가지고는 나중에 심공경적(心空境寂)이 된다.

마음이 공(空)한다, 심공(心空)이라는 것은, 마음이 공(空)했다는 것은 이놈 마음이 들어서 구백생멸심(九百生滅心)이 일어나고, 별별 망념이 구름 퍼일어나 듯헌디, 고것이 없어져 버려. 고걸 심공(心空)이라 햐.

 

일체 망념이 자진해 버려. 아! 그놈이 뭐 암만 낼라고 해도 없어. '이뭣고?'뿐이지. 하! 그것 참.

뭐 그전에 그 제대로 돌아댕김서 금방 있다가도 나도 자신도 자기도 모르게 나가 버리고 돌아댕기고 망념이, 아! 이러든 놈이 도무지 뭐 어디 간 곳 온 곳이 없다. 거 없어.

 

알 수 없는 '이뭣고?'만 나오는구나. 그 소 발자취 아닌가? 소 발자취, 거 얻은 놈 아닌가?

거 '이뭣고?'만 자꾸 새암물 솟드끼 솟는구나.

 

아! 이렇게 해 주어서 못 알아들으면은 그 어떻게 헐 것이여. 못 알아들어?

 

눈을 저렇게 뜨고 있으면 잠을 자는 것인가, 설법을 듣는 것인가? 모르겠구나.

 

우주다, 삼라만상이다, 모든 상이 마음에서 일어나서 있는 것인데, 마음이 공(空)해 버렸으니 뭐 일체 경계가 없다. 있어도 없어. 발을 딛고 걸어 댕겨도 없어. 하! 이런 꼴 좀 봐라.

마음이 공(空)해 번지고 경계(境界)가 적적(寂寂)해 번져.

 

'이뭣고?' 하나는 그만 언제거나 그대로 가만히 원 자나깨나 뜨나오나 아! 잠은 잤지마는 언제 잠잤는지 눈 뚝 떠 보면 '이뭣고?'뿐이다.

 

내가 실지로 해 봤구만. 법화경을 읽다가 글쎄 초저녁에 '이까짓 내가 경, 경(經)을 이거 읽다가 뒈지면 뭣 할 것이냐? 이거'

나이 그때 어리지마는 어릴 때 글을 읽으라고 해 쌌지마는 '경(經)만 읽다가 응, 죽으면 어찌 되아?'

 

모기 좀 뜯어먹으면 보시 좀 허지, 딱딱 소리를 내고 앉아 있어? 응.

그 무슨 짓이여 그것이? 보시도 좀 헐란지라 그 좀 배부르게 먹여 주지.

 

법화경을 읽다가 법화경 그 방편품, 그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들어가서 지옥고 받는 그 대문(大文)을 읽다가 '그 세상에 이거 이것만 내가 이 설식기포(부)(說食飢夫)지, 글만 읽고 앉었으면, 참선을 해야지! 아, 내가 이뭣고?를 해야지. 이것만 해, 뭣혀 이거?'

 

원 책을 그만 내던져 버리고 싶고 하다가는 에잇! 책 딱 덮어 번지고 가만히 앉어서, 조주(趙州) 무자(無字) 해 나가는 것을 내가 배웠거든.

내가 어디서 탔든지 탔는데, 옳게 큰스님한테 가 타들 못하고 그럭저럭 탔는디, 그냥 조주 무자(無字)를 허래.

가만히 무자를.. 아! 무자(無字)가 들어와서 가슴 가운데 와서 딱! 붙었는디, 아 이것 참 기맥히데 처음인디.

 

처음에 글 읽다가 좀 해 보는디, 어떻게 독하게 한바탕 무상한 생각이 일어났든지, 경 읽다가 그 방편품 지옥고 받는 데를 보다가 발심이 되았든지 어쨌든지, 참 발심인지 뭔지 딱! 들어오더니 화두가 그만 딱 붙었네.

이놈을 관(觀)해 가지고는 어떻게 그날 밤에 그 탁! 했든지, 아 그래도 어떻게 앉어서 그럭저럭 허다 잤는디, 자고 일어났는디 새벽에 화두가 그대로 가만히 있어.

 

옳게 헌 화두인지, 글케 헌 화두인지 알도 못헐 때지마는, 고 생각헌 대로 고대로 가만히 있대, 화두가.

아따! 어떻게 참 좋은 생각이 나고 혼자 '곧 뛰겄어. 이러면 내가 곧 견성허겄구나. 이거 곧 견성헐... 내가... 아, 세상에 이러헌 참선법을 내가 가서 어서 참선을 해야지. 곧 견성을 헐 것인데 내가 경만 읽고 있어? 이까짓 놈의 경을 읽고 있어?'

 

나갈 생각이 굴뚝 같애도 내보내야지. 스님이 뭐 어떻게 안 내보내니깐 못 나간다 그말이여. 그러다가 어쩌다가 틈을 타 나오기는 나왔지마는.

 

곧 되는 것이여. 거 한 철, 두 철도 될 수 있는 것이고.(21분49초~43분10초)

 

 

 

(3/3)----------------

 

그거, 한 번 허다가 '아이고! 이거 안되아' 두 번 하다가 '에이고! 이놈의 것 못혀' 또 한 번 해보다가도 '아이고! 이거 좀 어디 가 좀 놀았으면, 아! 어디 가서 화투나 한번 치꺼나'

이렇게 이렇게 어떻게 그만 허다가 또 그만 뭔 별념(別念) 냈다가, 또 그만 퇴타 좀 했다가 또 해보다가, 요렇게 허면은 육억칠천만 년 미륵하생(彌勒下生)이니까, 미륵하생까지 계산해 보면 육억칠천만 년이여.

 

육억칠천만 년을 해봐. 아무 소용없어.

화두라고 헐 것도 말 것도 없고, 그건 공부라고 헐 것도 말 것도 없고, 그건 죽은 참선도 아니여.

 

참선이라는 건 그렇게 허는 법이 아니여.

그저 똑 절대 발심(發心)이고, 절대 분심(憤心)이고, 분심 가운데 의단(疑團)이 일어나 가지고는 입지여산(立志如山)을 해라. 뜻을 세우기를 산같이 해라.

 

이것 않고는 뭣을 헐 바냐? 무엇을 해?

응, 세상에서 글쎄 임금 노릇을 허면 다할 때가 있고, 백만장자가 백만 부귀가 부귀 다할 때가 있고, 인간이 아무리 별짓 다 허드래도 죽을 날이 오니, 그날을 생각해야 할 거 아니냐?

 

죽은 날 생각해 봐라. 부귀 다한 날 생각해 봐라. 지위 다 가버린 날 생각해 봐라. 어떠냐?

 

나 원, 저 이박사 야단치고 처음에 왼통 우리 대통령이라고 야단치고 그 야단 쳐 쌌더니, 이박사 죽을 때 어디서 병이 들어 가지고 와서는 고국을 생각해서 돌아오지 못하고 앓는단 말 듣고, 그 앓으면서 그 한탄 탄식헌단 말 듣고 기가 차더라.

 

지위나 권리나 부귀 명예라는 것이 다할 날이 없음사 하지마는 다할 날이 앞에 곧 닥쳐오고.

인생이라는 것은 이별밖에 없다. 다 여의고 버리고, 나 홀로 돌아서는 그때 가서 참선밖에는 없다. '이뭣고?' 밖에는 없어.

 

'이뭣고?'를 바로 깨닫지는 못하고 의심만 독로, 알 수 없이만 가드래도 염라대왕이 자귀의(自歸依)를 혀. 항복을 해 버려.

 

헌데, 이러헌 심(心), 마음이 일체 번뇌 망상이 그만 제대로 공, 그대로 공도 없어.

공(空)해 버리고, 마음이 공했으니 경계(境界)가 적적(寂寂), 경계도 아무것도 없다. 이런 때가 온다. 참말로 그때래야 화두가 하나 독로해야 쾌락안연(快樂安然)허리라. 그 쾌락하고 안연할 것이다.

 

쾌락안연을 거다가 둘 거 뭐 있나?

의단 하나 독로해 번지면 뭐 쾌락(快樂)이니 안연(安然)이니 안락(安樂)이니 붙지 못해야 그놈이 참 화두지. 안연(安然)허리라.

 

화두를 '이뭣고?' '이-뭣고?' 요렇게 똑 해 나가란 말이여. 여까지 화두는 해 두고.

 

 

송광사 강사 얘기를 하나 해야겠다.

 

순천 송광사에 강사가 처음에 들어와서 사미과 배우고, 사집과 배우고, 사교과 읽고 그다음에 대교과 봐 가지고는 그 강(講)을 허는데, '극락세계(極樂世界) 어쩌든지 극락세계를 가야겠다. 극락세계 서방 극락세계를 가야겠구나. 십만오백십육 국토만 지내가면은 유국(有國)헌디 나라가 있는디, 서방 극락세계다.

 

극락세계만 갈 것 같으면은 그 도무지 참 극락세계 상품상생(上品上生)에만 나 놓으면은 그 참 기가 맥히지. 그 복락, 극락이라니! 얼매나 낙(樂)이 하도 굉장해서 극락이여.

 

극락 가기를 아주 발원을 딱 하고서는 항상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고 대승경전을 학생들한테 대승경전을 강(講)해 주고, 이러고 똑 강을 허고 지내는데.

 

하루는 죽었다. 병이 나 죽었다 그말이여.

원청 원력이 장하니까 병 나 죽었지마는 몸뚱이는 죽었지마는 극락을 간다. 인자 그 서방 극락세계 깊은 원(願)만 세웠으니 갈 밖에 없지.

 

극락을 가는데, 바라지문을 썩 열고 나가니까, 한참 가니 그 생사대해(生死大海)를 건너가는 바다가 있다.

 

생사, 생사대사(生死大事)의 바다가 있는데, 인자 생사 없는 저 피안, 도피안(到彼岸)—이짝에는 생사, 이짝에 아직 안 건너는 요짝 부두는 생사가 있는 세계고, 사바세계고, 중생세계인디,

저 건너를 건너가면 피안, 도피안(到彼岸) 생사 없는 세계인디, 생사 없는 세계를 건너 들어가서 극락세계로 올라가 상품(上品)으로 올라간다.

 

생사 노두(路頭)를 건널라고 허는데 그 앞에 동자(童子) 하나가 척 나와서, 동자가 보통 동자가 아니여. 기가 맥힌 동자가 떠억 나와서 절을 헌다.

절을 썩 허고는 “큰스님께서 극락세계 발원을 하도 허시고, 오늘은 큰스님께서 극락세계를 가시는 날이어서 제가 환영 왔습니다. 여까장 모시러 나왔습니다”하고 절을 헌다 그말이여.

 

그렇게 잘난 예쁜 동자가 참 그 그림같이 그릴래야 그릴 수 없는 동자가 앞에 나와서 절을 하고 아! 저 환영 나왔다 하니, “아! 그럴 것이다. 내가 극락세계를 내가 원해 발원허고 꼭 내가 갈라고 했거늘 안 갈 이치가 있겠느냐? 나도 지금 극락세계를 가는 길인디 네가 마침 나왔구나. 오냐, 너를 따를 수밖에 없다”

“예, 저를 따릅시오” 아! 이놈 동자를 앞세우고 생사대해를 건너갔다.

 

생사대해를 건너가는 금단청... 금다리여. 다리가 당최. 건너갔어.

그 건너가서는 극락세계 상품(上品)을 올라가는디 다리가 층계 층계 있다. 한 층, 두 층, 층을 이렇게... 뭐 금사다리여, 사다리. 발 딛고 올라가는 층계 다리여.

 

그 금이라니 당최 뭐 뭐 금빛이 그럴 수가 있나? 찬란한 그런 저 위에는 극락세계 보궁(寶宮)이 있어. 보이여. 보궁으로 올라간다. 층계 층계 올라가는데.

 

 

아! 무용 노장(老長)이, 무용 노장이라고 그 산중에 있어. 암만 쫓가내도 도로 들어오고, 열두 번 중이 떨어졌어.

 

중노릇 허다가 즈그 스님 물건이라도 옷이라도 있으면 다 퍼 넘 줘 버리고, 쌀도 퍼내서 모도 거지 줘 번지고, 아! 이런께 쫓겨나고.

사람은 무던헌디 또 딴 데가 중노릇 시키면 또 그래 버리고. 할 수 없어. 그걸 상좌(上佐)로 둘 수 없으니께 쫓아내 버리고.

 

중도 아니고, 인자 중노릇 허다가 사미중 노릇 허다가 쫓겨났으니 그것 뭐 중인가?

그래 가지고는 패방 거지, 인자 그 패방 거지란 것은 그거 여관, 그 절에 그 여관 뽀이 같은 거, 인자 이런 거, 심부름이나 해 주고 밥도 얻어먹고 그냥 그러다가 거지 노릇을 혀.

 

거지로 있으니깐 산중에서 그저 그만 무용(無用), 못쓸 물건이라고 무용이라고 했어, 이름을.

이름이 그때 사미(沙彌) 때 이름이 무용이여. '없을 무(無)'자 '쓸 용(用)'자, 아무 쓸데없다 그말이여. 저 못된 물건이다 그말이여.

 

“무용아”

“예” 그럼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키고, 시켜 먹다가 잘못허면 뺨대기도 때리고 그저 뺨도 맞고.

 

그러다가도 또 마을에 가서는 또 탁발을 혀. 동냥을 해 가지고는 동냥 생기면은 쇠고기를 사다가서, 아! 이놈이 무용이 똑 절에 들어와서 다리 밑에 그 그런 데서 그만 조그만한 냄비 같은 거 그런 걸 걸어 놓고 그놈을 지글지글 꾸어서 찌져서 먹고.

인자 무용이니까, 무용 그 뭐 거지니까 그 인자 말할 거 없어. 이렇게 똑 지냈는데.

 

아! 그런 무용이가 차츰 나이 많아서 나이도 인자 그 30이 넘어 근 40지년 된 무용이가 항상 패방에 얻어먹고 댕기는 아! 그 무용이가—금단청에 시방 보궁(寶宮)을 올라가는데 불과 몇 층 안 올라가서 극락세계 보궁을 들어가는디,

아! 무용이가 아! 그만 작대기를 가지고 쫓아 발발발발발발 쫓아 올라오더니, 그만 그 강사 뒷 넙덕치를 팍 패대면서 “이놈아! 정신채려 이놈아. 네가 이놈 극락세계 간다고 네 이놈 보궁을 찾아가지마는 거가 어딘디 이놈아 들어가는디, 어디냐 이놈아 들어가기를”

 

아 이럼서 강사 옆에 서도 못한 것이 아! 극락세계로 들어가는디 뒤에 와서 때린다 그말이여, 작대기로. 얻어먹는 작대기로.

 

아따! 그냥 뚝! 떨어지다 깨어나니까 꿈이여.

죽었어. 죽어서 깨어났어. 꿈이라도 꿈 같은디 죽어 깨어났다 그말이여.

 

아, 그러니께 그때 마침 죽어 깨어났는데 대중은 모도 열반종(涅槃鍾)까장 다.. 죽었다고 열반종까장 다 쳤네.

 

아! 깨어나 가지고 가만히 보니까 하도 죽었다가 깨어난 것 같지 않고, 꿈꾸다가 깨어난 것이여.

그 죽었다 깨어난 것이 죽은 줄 누가 아나? 꿈꾸다 깨어난 것이 그것이지. 꿈에 깨어난 것, 그 꿈꾸고 깨어났어.

 

깨어나서 아! 옆에 보니까 무용 노장이 딱 앉았다 말이여, 무용이. 얻어먹는 패방 거지가 앉었어.

쓸데없는 무용 그것이 와서 딱! 앉아, 강사가 죽는다고 헌께 무용이 들어와서 작법을 했든 것이여.

 

작법, 작법허니 누가 무슨 작법을 아나? 도인(道人)의 작법을 누가 아나 말이여?

무용 선사는 그때 패방 거지 노릇허면서 벌써 그때부텀 참선을 해서 숨은 도인이야. 아무도 모르게 저 무용(無用)이다, 못쓸 물건이 되어 가지고 참선을 해서 바로 도통을 했던 것이여.

 

그래 가지고 강사가 죽으니까, 강사 죽은 임명(臨命) 증사(證師)가 되었어.

청(請), 누가 청헐 것 뭐 있나? 청헐 것도 말 것도 없지. 가서 가만히 입정관(入定觀)을 해 주었어. 강사가, 입정관 해준디 극락세계를 못 갔다 그말이여.

 

그 무용당(無用堂)이 거기 앉었으니께 아! 부해가 나서 “저놈의 무용이 저 못된 무용이 내가 이번에 극락세계를 가는디 저것이 내 열반석에 와서 저것이 모두 모두 나를 갖다가 극락세계 못 가게 모도 마구니가 되았구나. 저 못된 것이 저 무행꾼이 괴기나 쳐 먹고 괴기나 찢어 먹고 저 무행(無行)헌 것 저것이 나를 극락세계 못 가게 했구나, 저것이. 타락시켰구나”

아, 부해가 나서 그냥 무용을 그냥 나무래 대고, 깨어나 가지고는 그랬다 그말이여.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 말이 없이 며칠 지냈는데, 병이 차츰 쾌차했어. 병이 나았어.

낫은 뒤에는 무용(無用)이 강사한테를 가서 스님이 인자 겨우 일어나실만 하니까 "나와 산보 좀 갑시다" 그런게.

 

“썩을 녀러 자식, 더러운 자식, 저런 것이 나를 뭐 산보 가자고 허네”

사람 같잖은 게 그걸 누가, 그 이렇게 높으신 강사인디 강사 큰스님이 그까짓 무용을 가지고 어디 말이나, 뭐 말이나 되나?

 

아! 그래도 수차 “날 좀 따라 나오십시오. 내가 할 말이 있으니까”

아! 꿈꾼 것이 하도 이상스러우니까 꿈도 그렇거니와, 그 또 그 죽은 그 열반석에 와서 앉어 있는 것도 이상스럽고 병은 좀 나았고, 저것이 뭣 헐라고 가자고 헌고 싶어서 따라나섰다.

 

앞에 떡 서서, 무용이 앞에 서서 강사를 뒤에 요렇게 따라오게 맨들고는 “스님이 이번에 돌아가실 적에 이번에 가실 적에 요 문으로 나왔지요?”

그 문으로 나왔거든. 뒤 바라지문으로 나왔거든.

 

“바라지문 열고 요리 콱 나오셨죠?”

“응, 그랬지. 그랬다”

 

또 한참 가다 “여기서 동자 만났지요?”

하! 이거 “그랬지”

 

아! 그때부텀은 참 기맥히네. 그 동자가, 그 잘 어여쁜 동자 만난 것이 역력하다. 그랬지.

 

“여기서 생사대해를 건넜지요?”

그 그러니까 그 내나, 그 송광사 앞에서 그 물또랑 개천 하나 건넌 다리가 고것이 생사 노두로 보였든 것이여. “요 생사대해를 건넜지요?”

 

한참 가다가 큰 역사적 고목 둥구나무가 하나 있어. “둥구나무 여기서 그 나무 저 공중누각을 올라갔지요? 차츰차츰 올라갔지요?”

여지없거든! 생사대해도 그 또랑이 분명허고, 그 좀 건네가서 몇 발 건네가서 그 올라간 것도 분명하고, 그 냉기[나무]로 올라간 것이 금단청이란 말이여.

 

아! 이런 말이 분명 다시 뭣이 여지없어.

저기 저 집이, 저 나무 위에 저 까치집 저것이 공중누각으로 보였든 것이여.

 

“저건 공중보전이 누각 공중미타전으로 보였고, 이것 모도 올라가는 이 냉기 모도 그 혹 달린 것이 모도 다리로 보였고, 이렇게 변했소. 이 개천이 생사대해로 보였고, 그 어린아이는 그 스님을 인도허는 그 저 까치집으로 인도허는 인도비요.

까치 새끼가 꼭 될 것인디, 내가 당신을 그 일대 강사(一大講師)로서 그래도 우리 대본산(大本山), 우리 본산에 큰 산에 그 대승경전 강(講)허는 강사 스님이 까치 새끼가 되어서야 되겄소? 내가 그래서 그 내가 작법해서 까치집에 못 들어가게 만든 것인데 나를 왜 그렇게 모두 원망허우”

 

세상에 그 설법을 들으니까 기맥히다 그말이여.

'과연 참 무용 선사로구나. 무용으로 있으면서 쓸데없는 무용이 되아 가지고 참선을 해서 '이뭣고?'를 깨달라서 도통을 했구나' 그 생각이 꽉 드면서, 부처여. 다시 무용 스님이 부처여.

 

"꼭 그러헌디 저 냉기 시방 올라가서 저 까치집에 가 볼 것 같으면은 까치 새끼 한 마리가 죽었으니 그걸 한번 알아보십시오”

냉기 잘 올라가는 사람을 올려 보내서 가서 보니께 까치 새끼가 죽었어. 한 마리가 죽었어. 고 한 마리 속으로 들어갈 것인디, 안 들어갔다 그말이여.

 

알 탁! 터짐서 영(靈)이 붙기도 허고, 여러 가지가 다 있다드구만.

그놈의 누가 생리적으로 알 수가 있나? 허지마는 알이 하나가 곯았어, 안 나오고. 새끼가 죽은 게 아니라.

 

그걸 보고서는 참으로 믿었어. 믿어서 그 강사 스님이 무용 스님 제자가 되었어. 불과 얼마 안되았어.

그 강사, 무용 스님 제자, 강사여.

그 강(講) 내던져 버리고 저 선객이 되어 가지고 '이뭣고?'를 잘 허다가 돌아가신 일이 있습니다. 그 사실 얘기 하나 오늘 법문 끝에 했습니다.

 

사견(邪見)으로, 아무리 부처님의 경을 보지마는 방편에 사견으로, 사견으로 그 보니 되아?

 

그거 응, '이뭣고?'를 깨닫지 않고 극락을 가냐 그말이여. '이뭣고?'와 극락은 한 곳인디.

극락이거든. '이뭣고?'를 깨달은 곳이 극락이여. 도솔천 내원도 그렇고.

 

허! 그걸 알아야지.(43분11초~63분52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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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활구참선객~’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대사) (2권) '贈熙長老' 참고. ⋯降은 '항복할 항', '내릴 강'으로 발음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남섬부주(南贍部洲) ; 수미산(須彌山 :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산)의 사방에 있다는 사주(四洲 : 네 대륙)의 하나. 섬부(贍部)는 산스크리트어 jambu의 음사(音寫)로 잠부(jambu) 나무가 많다고 하여 이와 같이 일컫는다.

수미산 남쪽에 있으며,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다. 여러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은 사주(四洲) 가운데 이곳뿐이라고 한다. 염부제(閻浮提), 염부주(閻浮洲)와 같음.

*공안(公案) ; 화두(話頭),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주삼야삼(晝三夜三) ; 밤낮. 밤이나 낮이나.

*안벽관심(眼壁觀心) ; 눈은 벽을 보고, 마음은 화두를 관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견명성(見明星) ; 부처님이 12월 8일 새벽별[明星]을 보시고 성도하였다는 고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저히 깨닫는 것을 말한다.

*명성(明星) ;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金星)’을 이르는 말. 새벽별, 샛별, 태백성(太白星), 계명성(啓明星), 장경성(長庚星) 등이라고도 한다. 『보요경(普曜經)』에 따르면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이 별이 돋을 때, 정각(正覺)을 이루었다고 한다.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환(幻) ; ①허깨비. 모든 사물은 여러 가지 인연(因緣)이 모여서 생긴 것으로 실체가 없는 것에 비유함. 환(幻)을 실(實)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중생의 미혹한 생각임. 환(幻)을 무(無)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승(二乘 - 聲聞,緣覺)의 공(空)에 얽매인 견해, 단공(但空 - 단지 空만을 집착하는 것)임.

환(幻)은 또 화(化)와 거의 같은 뜻이므로 환화(幻化), 꿈과 비슷하므로 환몽(幻夢)•몽환(夢幻)이라고도 한다.

②신기루, 아지랑이 같은 것.

*벽암록(碧巖錄) ; 선종의 대표적인 공안평창집(公案評唱集). 10권. 본이름은 『불과원오선사벽암록(佛果圜悟禪師碧巖錄)』. 또는 벽암집(碧巖集)이라고도 한다. 송나라 때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이 지음.

이 책은 원래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이 경덕전등록 · 조주록 · 운문록 등에서 백 개의 고칙(古則 ; 공안)을 선별하여 각각의 게송을 붙인 『설두송고백칙(雪竇頌古百則)』을 그 뒤 원오극근이 제자들의 청에 의해서 1102년 성도의 소각사, 협산의 영천원, 상서의 도림사등에 머물면서 『송고백칙(頌古百則)』을 강의했다.

 

이 『송고백칙(頌古百則)』의 각 칙에 대한 서론 형식의 '수시(垂示)'와 본칙과 송에 대한 해설·비판·선양의 '평창(評唱)' 그리고 본칙의 각 구절과 송의 각 구절을 평가하는 형식의 '착어(著語)' 등을 붙였는데, 제자들은 스승의 강의를 1105년경부터 모아 기록하기 시작하여 1125년에는 이미 『벽암록』 필사본이 나왔다고 한다. 『벽암록』의 간행은 1128년(남송 건염 2년) 원오극근의 제자 보조(普照)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원오극근의 제자인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가 당시의 학인들 중 이 책의 선화(禪話)를 익혀 알음알이를 늘리기만 하고 실제적인 수행을 게을리 하는 자가 많은 폐단을 보고, 근본 뜻을 다시 세우고자 벽암록 판각과 책들을 모두 한 데 모아 대중 앞에서 불태워버려(1156년 또는 1163년 무렵) 총림에서 사라졌었다.

그러다가 원나라 때인 대덕년간(1297~1307)에 장명원(張明遠)이 여러 절에 비장되어 있던 것을 모아서 중간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유통되었다.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화택(火宅) ; 번뇌와 괴로움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불에 타고 있는 집에 비유한 말. 불길에 휩싸인 무서운 세계. 법화경에 나오는 「三界無安猶如火宅」라는 구절에 근거.

*숙업(宿業) ; 숙세(宿世), 즉 과거세(過去世), 전생(前生)에 지은 선악의 행업(行業 : 고락苦樂의 과보果報를 받을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 현세에 그 과보를 초래하는 업을 말하며, 숙작업(宿作業) · 선업(先業)이라고도 한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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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무명(但助無明) ; '오직 무명만 도와 줄 뿐이니라'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용화선원刊) p82. (가로판 p86)

迷心修道하면  但助無明이니라

미욱한 마음으로 도를 닦는 것은 오직 무명만 도와 줄 뿐이니라.

 

(註解) 悟若未徹이면  修豈稱眞哉리요  悟修之義는  如膏明이  相賴하고  目足이  相資니라

철저히 깨치지 못하였다면 어찌 참되게 닦을 수 있으랴!  깨침과 닦는 것은 마치 기름과 불이 서로 따르고, 눈과 발이 서로 돕는 것과 같으니라.

*관(觀)한다 ;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715)—2007년(정해년) 동안거결제 법어(07.11.24)

화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냐 하면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하는 글자 석 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하는 것은 그 의심을 나게 하는 것이고, 그 ‘이뭣고?’함으로써 나온 그 의심을 떠억 관(觀)하는 것입니다. ‘관(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하는 건데.

 

그 화두는 혼침(昏沈)이 오고 그럴 때에는 미간(眉間)에다가 두고 관하고, 혼침이 안 올 때에는 배꼽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초학자가 너무 미간에다가 화두를 들고 관(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上氣)가 될 수가 있으니, 어쨌든지 숨을 들어마실 때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다 들어마셨으면 한참 머물렀다가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이뭣고?’

 

화두를 들 때에는 기왕이면 들었다가 내쉴 때 ‘이뭣고?’를 초학자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마는 나중에 익숙해지면 호흡에 상관없이 항상 알 수 없는 의심이 단전에 딱 있도록 호흡은 무심(無心) 속에 항상 단전호흡을 하도록 이렇게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39분12초~41분12초)

*역력(歷歷 지낼·수를 셀·다할·두루 력) ; '뚜렷하다'는 말. 눈앞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그 무엇에 대한 묘사이다. 사유 분별할 여지도 없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현상을 묘사한다.

*역력명명(歷歷明明) ; 뚜렷하고 분명하다는 말. 역력과 명명은 동일한 뜻이며, 중첩하여 어감을 강하게 한다.

사유 분별할 여지도 없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현상을 묘사한다. 어떤 조작도 없고 어떤 분별도 들어설 여지없는 본분(本分)이 드러난 경계를 나타낸다.

*수참활구(須參活句) 막참사구(莫參死句) ; '활구를 참구할지언정, 사구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용화선원刊) p49~50. (가로판 p50~51)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를 참구할지언정, 사구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이 아래는 특히 활구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는 경절문 활구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지름길 경/끊을 절/문 문) ; 지름길문. 경절(徑截)이란 ‘바로 질러 간다’는 뜻. 교문(敎門)의 55위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 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즉 일체의 어로(語路), 의리(義理), 사량분별의 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마음의 본체에 계합함을 일컫는다.

*성불도(成佛圖) ;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놀이 가운데 하나.

염불 · 참선 · 교학의 수행을 통해 성불의 길에 들어가게 되는 과정을 108단계로 구성한 도판(그림판)과 '나무아미타불'이 적힌 3개의 주사위와 두 분의 부처님과 18분 보살님 명호가 적힌 20개의 말을 사용하여 수행을 통해 육도윤회를 벗어나 깨달음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알 수 있게 구성된 놀이.

*오십오위(五十五位) ; 처음 건혜지(乾慧地)를 지나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사가행(四加行)·십지(十地)를 하나하나 거쳐서 올라가야 성불하게 된다는 말.

*점차(漸次) ; 시간이나 차례에 따라 조금씩.

*대각(大覺) ; 부처님의 깨달음. 정각(正覺) 대오(大悟) 등과 같은 뜻이다. 스스로 깨닫고[自覺] 남들도 깨달음으로 인도하여[覺他] 각(覺)과 행(行)이 원만하게 갖추어졌으므로 대각이라 한다. 또는 부처님 자체를 가리키는 말.

*차제(次第) ; 차례(次例 순서 있게 구분하여 벌여 나가는 관계).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땀세 ; 땀새. ‘~땜에(~때문에)’의 사투리.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대승계(大乘戒) ; 대승의 보살이 받아 지켜야 할 계율. 보살계라고도 한다.

*악도(惡道, 惡途) ; 악한 짓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고 하는 괴로움의 생존. 지옥 · 아귀 · 축생 등의 세계. 삼악도(三惡道).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동[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罪] 행위[業 : 身口意 三業].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들입다 ; 세차게 마구.

*반야력(般若力) ; 반야의 힘. 참된 지혜를 가리키는 말이다.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가 생사윤회의 원인이며, 반야는 진리에 대한 바른 인식을 통해 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지혜를 가리킨다.

*심공(心空) ; ①허공과 같이 큰 마음. 마음이 본질적으로 무한히 넓고 커서 만상을 포용하는 허공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마음이 텅 빈 경계 또는 그러한 도리. 마음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 텅 비고 고요하며 어떤 상에도 걸리지 않는 경지에 들어 있다는 뜻.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적적(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이 지옥에 떨어진 중생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끊임없이 고통을 받기 때문에 무간(無間)이라 한다.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나쁜 마음으로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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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념(別念) ; '딴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원(願) ; 소원(所願). 바라고 원함. 또는 바라고 원하는 일. 숭고한 뜻을 성취하려는 결의.

*바라지문 ; '사립문(잡목의 가지를 엮어서 만든 문짝을 단 문)'의 사투리.

*생사대해(生死大海) ; '생사의 큰 바다[大海]' 중생이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윤회의 세계를 바다에 비유한 말.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삼계(三界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중생이 생사유전하는 세계를 '큰 바다[大海]'에 비유함.

*생사대사(生死大事) ; ①삶과 죽음, 생사(生死)의 큰 일. ②수행을 하여 생사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는 큰 일.

*도피안(到彼岸) ; 산스크리트어 pāramitā 바라밀(波羅蜜), 바라밀다(波羅蜜多), 바라미다(波羅弭多), 피라밀다(彼羅蜜多) 등으로 음사하였고, 사구경(事究竟) · 도(度) · 도무극(度無極) 등이라고 한역하였다. '到'는 '度'라고도 한다.

생사를 윤회하는 이쪽 언덕으로부터 건너가 열반의 저쪽 언덕에 도달했음을 뜻한다.

[참고]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2권 '大智度論釋初品中檀波羅蜜法施之餘'

若能直進不退 成辦佛道 名到彼岸 復次於事成辦 亦名到彼岸<天竺俗法 凡造事成辨 皆言到彼岸>

만약 곧바로 나아가고 물러나지 않고 불도를 완성한다면 이것을 도피안(피안에 도달함)이라 하며, 또한 일을 완성하는 것도 도피안이라 한다.<인도의 세속법에서는 일을 하여 완성하는 것은 모두 도피안이라 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8권 '大智度論釋般若相義第三十'

摩訶 秦言大 般若 言慧 波羅蜜 言到彼岸 以其能到智慧大海彼岸 到諸一切智慧邊 窮盡其極故 名到彼岸

마하는 중국어로 '크다'이며, 반야는 '지혜'를 말하고, 바라밀은 도피안(피안에 도달함)이라 한다. 그것으로 능히 지혜대해의 피안에 이르며, 모든 일체 지혜의 끝에 도달함이 남김없이 그 궁극이기 때문에 도피안이라 한다.

*노두(路頭) ; 길거리(사람이나 차가 많이 다니는 길).

*당최 ; 도무지(아무리 해도, 이러니저러니 할 것 없이 아주). 영.

*노장(老長 늙을 로/길·맏·어른·우두머리 장) ; ①노장 스님의 줄임 말. ②노스님(나이 많은 스님)의 존칭. 나이가 많고[老] 덕행이 높은[長] 스님.

*상좌(上佐 윗 상,도울 좌) ; 윗사람을 도운다는 뜻. 곧, 한 스승의 제자를 일컬음.

*사미(沙彌) ; 산스크리트어 śrāmaṇera 팔리어 sāmaṇera의 음사. 근책(勤策)·구적(求寂)이라 번역. 출가하여 십계(十戒)를 받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비구(比丘)가 되기 전의 남자 수행자.

십계는 살생·도둑질·음행·거짓말·음주뿐만 아니라, 때가 아닌 때에 식사하는 것, 춤과 노래를 보고 듣는 것, 향수를 바르고 몸을 단장하는 것, 높고 큰 평상에 앉는 것, 금은 보물을 지니는 것 등을 금지하는 10가지이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임명(臨命) ; 임종(臨終 목숨이 끊어져 죽음에 이름. 또는 그때).

*부해 ; ‘부아(분하고 노여운 마음)’의 사투리.

*무행(無行 없다·~하지 않다 무/행하다·계행·행실 행) ; 계행(戒行)이 없다[無]. 계를 지키지 않는 것. 또는 수행(修行)을 하지 않다[無].

*녀러(-녀러) ; ‘~놈의’를 뜻하는 단어.

*둥구나무 ; 크고 오래된 정자나무(亭子-- 집 근처나 길가에 있는 큰 나무).

*대본산(大本山) ; 대본사(大本寺 총본사 아래에 있거나 독립적으로 같은 종지宗旨의 작은 말사를 통할하는 큰 절).

 

Posted by 닥공닥정
최근 법문2019. 4. 21. 21:27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797) (게송)약인정좌일수유~ / 성주괴공, 생로병사가 허망하나 참선하는 사람에게는 깨달음으로 가는 발판 / (게송)안비천말적유사~ / 생사호흡지간 / 생사해탈 길은 ‘이뭣고?’뿐.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누구도 반드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성불(成佛)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권리가 높고 재산이 많고 그래 봤자 그것 때문에 참나를 깨닫지는 못합니다.

돈이 많거나 권리가 높거나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하면서도 항상 ‘이뭣고?’를 챙기면 되는 것입니다.

 

「생사는 호흡지간에 있다」고 철저히 믿고, 한 숨 내쉴 때 ‘이뭣고?’ 들어마실 때 ‘이뭣고?’ 앉아서 ‘이뭣고?’ 서서 ‘이뭣고?’ ‘이뭣고?’를 항상 챙기고 또 챙김으로 해서 번뇌와 망상에서 벗어나서 이 무상한 육체를 가지고 영원을 살아가는 길, 생사해탈 하는 길이 ‘이뭣고?’뿐인 것입니다.

산승이 지금은 90세가 넘었으나 언제 죽을런지 모릅니다. 그러니 이만큼 살아 있을 때 이런 말씀드리는 것을 깊이 명심해 주시고 ‘이뭣고?’를 열심히 하실 것을 믿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송담스님(No.797)—2019(기해)년 법보재 법회. (용797)

 

(1) 약 15분.

 

(2) 약 18분.

 

(1)------------------

 

약인정좌일수유(若人靜坐一須臾)하면  승조항사칠보탑(勝造恒沙七寶塔)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보탑필경쇄위진(寶塔畢竟碎爲塵)이나  일념정진성정각(一念精進成正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인정좌일수유(若人靜坐一須臾)하면  승조항사칠보탑(勝造恒沙七寶塔)이다.

만약 사람이 잠깐 동안 떠억 정좌(靜坐)를 하면 항하사(恒河沙)와 같은 칠보탑을 조성해서 모신 것보다도 더 공덕이 장하다. 왜 그러냐?

 

보탑(寶塔)은 필경쇄위진(畢竟碎爲塵)이나, 칠보탑을 쌓은 그 탑은 언젠가는 부서져서 티끌이 될 때가 있으나,

일념정진(一念精進)은 성정각(成正覺)이다. 한 생각 떠억 돌이켜서 ‘이뭣고?’ 정진을 하면 그것이 깨달음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고인(古人)의 시(詩)입니다마는 우리가 한 생각, 한 생각 눈으로 무엇을 볼 때 보는 것에 끄달리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으면은 듣는 데에 끌려가는데.

무엇을 보는 그 찰나에 ‘이뭣고?’를 챙기고, 귀로 무슨 말을 들을 때 좋은 말을 듣거나 나쁜 말을 듣거나, 좋아하거나 슬퍼하거나 속상하거나 그러지 말고, 바로 그 찰나에 ‘이뭣고?’를 떠억 챙기면 깨달음으로 가는 첩경(捷徑)이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서 불법을 만나 가지고 이렇게 오늘 이 자리에 모여서 참나를 깨닫는 최상승법(最上乘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여러분은 그걸 듣고 계십니다마는.

이 조그만한 인연이 우리가 육도윤회(六途輪廻)로부터 벗어나서 참나를 깨닫는 그런 인연이 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만나서 이 법당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듣는 인연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일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님 덕으로 이 육체를 받아나 가지고 이렇게 불법을 믿고, 이렇게 이 자리에 만나게 되었습니다마는.

이 사바세계는 모든 것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우리의 육체도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우리의 감정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습니다마는,

성주괴공과 희로애락과 생로병사가 허망하고 믿을 것이 못되나 우리가 정법(正法)을 믿고 참나를 찾는 참선(參禪)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이 허망하고 무상한 이 세계 그대로 깨달음으로 가는 발판이요, 깨달음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60억 인구가 있지마는 이 정법을 믿는 사람, 참나를 깨닫는 참선을 하는 사람은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안 됩니다.

 

이 세상은 온통 빈부귀천과 그런 것에 얽매여서 서로 돈을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갈라고 모두 발버둥을 치고 있으나 그것 뜻대로 이루기도 어렵지마는 이루어 봤자 별것도 아닌 것입니다.

전부 그런 것들이 육도윤회의 근본밖에는 아닌데,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위해서 일생 동안을 발버둥을 치고 사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은 그 속에서 우리는 참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여러분은 그것을 듣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법회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마음을 어떻게 먹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따라서 이 법당이 참나를 깨닫는 법당이요, 이 자리에 모이신 분은 참나를 깨닫기 위한 거룩한, 갸륵한 수행인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육도윤회를 하는 평범한 중생일 수도 있고,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60억 인구 가운데에 선택된 참나를 찾는 소중한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거나 그래 봤자 많이 살아 봐야 백년 이쪽저쪽인데, 열심히 노력해서 백만장자가 되어도 그 재산을 저승에 가지고 갈 수도 없는 거고, 자손한테 물려줘 봤자 그 재산으로 인해서 꼭 행복하게 사느냐, 안 사느냐는 두고 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런 무상한 믿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이 소중한 몸과 목숨을 거기다가 쏟아붓을 것이 아니라, 우리는 정말 이 말씀을 뼛속 깊이 새겨듣고 일 초 일 초를 헛되이 보내지 말고, 참나를 찾아서 생사해탈하는 ‘이뭣고?’를 열심히 하는 것만이 후회를 남기지 않는 뜻깊은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무엇을 볼 때 바로 거기에서 ‘저것이 뭐다. 꽃이다. 나무다. 이쁘다’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 한 생각, 눈으로 볼 때 일어날 때 그 찰나가 참나를 찾는 길로 가는 수행인이 되느냐, 눈으로 보는 찰나에 그리 끄달려 가 가지고 '좋다, 나쁘다' 잡념으로 망상으로 끌려가느냐는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우리가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자가 될 수도 있고, 그 찰나 마음먹기에 따라서 육도윤회로 가는 불쌍한 범부(凡夫) 중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소중한 육체에, 따지고 보면은 속에는 똥과 오줌과 그런 것이 육부(六腑)에, 창자 속에 가득차 있고, 일 초 일 초 살아가는 것이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신세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정법을 믿고 참선법을 하는 사람은 이 육체가 그런 허망하고 보잘것없는 일개 불쌍한 중생이 아니라, 참나를 깨닫는 정말 소중하고도 소중한 부처님의 제자요, 수행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은 다 가정에서 일도 바쁘고 세상에서 할 일도 많고 그러겠으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다행히 불법을 믿고, 무상을 깨닫고, 참나를 깨닫는 소중한 수행자라고 산승(山僧)은 생각해서 여러분에게 감사한 마음과 이 무상한 세계에서 참나를 깨닫는 수행을 하는 소중한 도반(道伴)이요, 불제자(佛弟子)라고 생각해서 내가 백살이 가까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참석해서 이런 말씀을 하게 됩니다.

 

이 인연으로... (박수)

이 인연으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불법문중(佛法門中)에서,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또 만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박수) (처음~14분21초)

 

 

 

 

 

(2)------------------

 

안비천말적유사(雁飛天末迹留沙)하고  인거황천명재가(人去黃泉名在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채득백화성밀후(採得百花成蜜後)에  부지신고위수감(不知辛苦爲誰甘)고

나무~아미타불~

 

안비천말적유사(雁飛天末迹留沙)요  인거황천명재가(人去黃泉名在家)로다.

기러기는 저 하늘갓으로 날아가 버렸는데 기러기 발자국만 모래에 남아 있으며, 사람은 죽어서 황천(黃泉)으로 갔는데 그 이름만 집에 남아 있구나.

 

벌들이 백 가지 꽃에서 꽃을 따다가 꿀을 쳤는데, 그 벌이 갖은 고생을 해서 꿀을 따다가 꿀통에다 딱 꿀을 채워 놨는데, 그 벌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 꽃 저 꽃에서 똑 쪼금씩 쪼금씩 꿀을 따다가 벌통에다가 채워 놨는데, 그 벌이 죽음을 무릅쓰고 꿀을 따다가 놨는데 그 벌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꿀을 따먹고 있다 그 말입니다.

 

인생이 나와서 참 부모덕(父母德)에 이 몸을 받아났지마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당연히 돈도 벌어야 하고 취직도 해야 하고, 갖은 노력을 해서 재산도 이루고 명예도 이루고 모다 애를 써서 성공한 사람은 큰 부자가 되기도 하고 또 큰 학자가 되기도 하고, 자손을 가리켜서 성공을 시켜서 훌륭한 인생을 살도록 모든 부모들이 자손을 위해서 그렇게 애를 써서 인생을 그렇게 사는데.

 

자손들은 부모가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애를 썼는가를 그런 것은 아지 못하고, 부모가 모아 놓은 재산을 가지고 흥청망청 쓰고, 먹고 쓰고 심지어는 노름도 하고 나쁜 길로 빠진 아들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모냥이 나름대로 인생을 온갖 고통을 무릅쓰고 자손을 위해서 모든 부모들은 애를 써서 재산도 모이고 좋은 집도 마련하고 해서 아들과 딸을 좋은 배필을 만나서 결혼을 시키고 애를 쓰지마는, 그 자녀들은 부모가 그렇게 애를 써서 모은 재산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함부로 덤부러 낭비를 하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부모가 아들과 딸을 났으니 애써서 돈을 벌고 해 가지고 자손을 잘 가리키고 잘 먹이고 잘 입혀서 잘살게 하도록 해 줄라고 하는 그 부모는 동서고금에 모든 부모님이 다 그렇습니다.

정말 그런 부모의 애쓰시는 것을 이해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면서 열심히 사는 사람이 몇분의 일이나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부모가 낳아서 키워서 가리켜서 해 놓으니까 자기도 건강하게 자라고 대통령도 되고, 장관도 되고, 학자도 되고, 예술가도 되고.

그렇게 생각할 때에 부모님의 은혜는 평생 동안 잊어서는 안 되고, 부모가 살아계실 때 효성(孝誠)을 다해서 부모를 잘 모시고 받들어야 하고.

연세가 많아져서 병환이 나더라도 성의를 다해서 잘 보양을 해서 모든 정성을 다해서 부모를 잘 받들어 모셔야 하고.

 

부모의 육체와 음식이 중요하지마는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기쁘게 해 드리냐?

 

첫째, 지혜롭게 건강 관리를 하고, 학교를 다닐 때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고, 학교를 나와서 자라게 되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부모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부모치고 자식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부모덕에 이 몸을 받아났고, 부모덕에 학교도 다니고, 부모덕에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잠시도 잊지 않고 부모에게 효심을 가지고 부모를 잘 받들어 모시고,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인생을 바르게 사느냐? 여러분이 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첫째에 건강 관리를 지혜롭게 하고, 학생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열심히 인생을 바르게 살아가서 사회에 존경 받는 그런 사람이 되고,

자기도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을 바르게 사느냐 하는 것은 사람 생각하기에 달려 있지마는.

 

여기서 산승이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참나를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하는,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서 사회에 살 때는 돈을 벌어야 할 사람은 돈도 벌어야 하고, 직장을 가지고 있을 때는 그 직장에 충실하고 그러는데, 그러면서도 참나를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은 산승이 이렇게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늙은 몸으로 여러분에게 정말 당부하고 싶은 것은 “앉아서나 서서나 걸어갈 때나 직장에 가서나 일체처 일체시에 항상 참나를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하십시요” 하는 이 말이 산승이 여러분께 간곡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산승이 말씀드리는 것을... (박수) 이 말씀을 정말 뼛속 깊이 새기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리라고 믿습니다.

 

인생이 살아가는데 많이 살아 봤자 백년 이쪽저쪽인데,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천당에도 가고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할 수도 있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이거 말씀드리기가 어려우나 축생이 될 수도 있고, 아귀가 될 수도 있고, 지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은 지옥에 가실 분은 한 분도 안 계시리라고 믿습니다마는,

어떻게 사느냐에—심성을 어떻게 쓰느냐, 말을 어떻게 하느냐—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천 가지 만 가지 사는 방법이 다릅니다마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나를 찾는 ‘이뭣고?’밖에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누구도 반드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성불(成佛)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권리가 높고 재산이 많고 그래 봤자 그것 때문에 참나를 깨닫지는 못합니다.

돈이 많거나 권리가 높거나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하면서도 항상 ‘이뭣고?’를 챙기면 되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챙기는데 꼭 힘이 든 것도 아니고, 꼭 지식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꼭 재산이 많아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이뭣고?'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그런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기분이 나쁠 때도 그 기분 나쁜 일만 자꾸 생각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 바로 ‘이뭣고?’를 챙기는 것이니,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께 백살이 가까워 온 이 늙은이가 간곡히 부탁을 드리는 말씀은 이것밖에는 없습니다.

 

제 말씀을 믿고 실천하겠다고 하신 분은 박수를..... (박수)

 

많이 살아 봤자 백살이고, 꼭 모든 사람이 다 백살을 산다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사(生死)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한 제자는 “백년도 살 수도 있습니다” 또 한 제자는 “생사는 십년 안에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하루 동안에도 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너희들은 도 닦기가 어렵게 되었구나”

 

한 제자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음, 너는 공부하겠구나”

 

이런 말씀이 경전에 나옵니다마는.

 

여러분도 생사가 백년, 십년, 하루, 그렇게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호흡지간에 생사가 있다, 죽음이 있을 수가 있다'고 믿어야 그렇게 그 사람은 참나를 찾는 참선을 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계는 성주괴공이 있어서 믿을 것이 못되고, 이 육체도 오늘은 이렇게 밥 먹고, 이렇게 말하고 듣고 있습니다마는 그 믿을 것이 못됩니다.

 

「생사는 호흡지간에 있다」고 철저히 믿고, 한 숨 내쉴 때 ‘이뭣고?’ 들어마실 때 ‘이뭣고?’ 앉아서 ‘이뭣고?’ 서서 ‘이뭣고?’ ‘이뭣고?’를 항상 챙기고 또 챙김으로 해서 번뇌와 망상에서 벗어나서 이 무상한 육체를 가지고 영원을 살아가는 길, 생사해탈 하는 길이 ‘이뭣고?’뿐인 것입니다.

 

산승이 지금은 90세가 넘었으나 언제 죽을런지 모릅니다.

그러니 이만큼 살아 있을 때 이런 말씀드리는 것을 깊이 명심해 주시고 ‘이뭣고?’를 열심히 하실 것을 믿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14분27초~32분19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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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약인정좌일수유~’ ; 보조 지눌(普照知訥) 스님의 『진심직설(眞心直說)』 진심공덕(眞心功德) 장(章)에서 ‘古頌’으로 인용한 게송 참고.

*항하사(恒河沙) ; [불교] 갠지스 강(Ganges江)의 모래[沙]라는 뜻으로, 무수히 많은 수량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항하(恒河) ; 갠지스 강(Ganges江, 히말라야 산맥에서 시작하여 인도 북부를 가로질러 벵골 만(灣)으로 흘러들어 가는 인도 최대의 강. 길이는 2,510킬로미터)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첩경(捷徑 빠를 첩/지름길 경) ; 지름길. 가깝게 질러서 가는 빠른 길.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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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雁飛天末迹留沙  人去黃泉名在家’ ;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36(가로판 p142) 게송 참고.

*(게송) ‘採得百花成蜜後  不知辛苦爲誰甘’ ;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36(가로판 p142) 게송 참고. 당대시인(唐代詩人) 나은(羅隱 833~909)의 시 《봉(蜂)》 참고.

*황천(黃泉) ; 저승(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

*부모덕(父母德) ; 부모의 은덕(恩德 은혜와 덕. 또는 은혜로운 덕).

*덤부다 ; '덤비다(마구 대들거나 달려들다)'의 사투리.

*효성(孝誠 효도 효/정성 성) ; 마음을 다하여 부모를 섬기는 정성.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人道]로 다시[還] 태어남[生].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노는 입에 염불한다' ; 가만히 있거나 노느니 뭐라도 하는 것이 낫다는 말. 나옹화상의 「승원가」에는 몸으로 농사일을 하거나 직물을 짜면서도 입으로는 일념으로 염불하라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지 염불 수행할 것을 강조한 말.

 

한자의 음과 훈(訓 : 새김)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의 하나인 이두(吏讀)로 쓰인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승원가(僧元歌)」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참고] 『불교가사 원전연구』 (임기중 | 동국대학교출판부) p658. 『나옹록』 (선림고경총서 22 | 장경각) p358~359.

阿彌陀佛 念佛法隱 溫可事厓 碍臨業西 僧俗男女 勿論何古 有識無識 貴賤間厓 所業乙 弊治末古 農夫去加隱 農事何面 遊難口厓 阿彌陀佛 織女去加隱 績三何面 遊難口厓 阿彌陀佛 今生厓 利他何古 行住座臥 耳於何面 後生極樂 難乙可

 

아미타불 염불법은 온갖일애 걸림없어 승속남녀 물론하고 유식무식 귀천간애 소업을 폐치말고 농부거던 농사하며 노난입애 아미타불 직녀거던 길삼하며 노난입애 아미타불 금생애 이타하고 행주좌와 이어하면 후생극락 어려울까

 

多隱則 六字念佛 小隱則 四字念佛 行住坐臥 語默間厓 高聲以那 隱念以那 大小間 六字四字念佛乙 懃力大奴 念佛何刀 悲感去隱 阿彌陀佛 好隱耳刀 阿彌陀佛 遊難口厓 雜談末古 阿彌陀佛 言友三我 念念厓 阿彌陀佛 時時厓 阿彌陀佛 處處厓 阿彌陀佛 事事厓 阿彌陀佛 壹生厓 壹於何面 極樂去其 難奴溫可

 

많은즉 육자염불 적은즉 사자염불 행주좌와 어묵간애 고성이나 은념이나 대소간 육자사자염불을 근력대로 염불해도 슬픈것은 아미타불 좋은이도 아미타불 노난입애 잡담말고 아미타불 말벗삼아 염염애 아미타불 시시애 아미타불 처처애 아미타불 사사애 아미타불 일생애 이러하면 극락가기 어려온가

 

*생사재호흡지간(生死在呼吸之間) ; ‘생사(生死)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생사라 하는 것은 멀리 잡을 것이 아니라 하루도 멀고, 한끼도 멀고, 한 호흡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 그렇게 무상하고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생사인 것이다.

*호흡지간(呼吸之間) ; 한 번 내쉬고[呼] 들이쉬고[吸] 할 사이[間]라는 뜻으로, 아주 짧은 시간을 이르는 말.

[참고]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8장’

佛問沙門 人命在幾間 對曰數曰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飯食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呼吸間 佛言 善哉子知道矣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밥 먹을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너는 도를 아는구나”

 

Posted by 닥공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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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담화상법어(古潭和尙法語) (1/4) 고담화상 법어.

 

**전강선사(No.249) - 고담화상법어 1 (72.06.02.새벽)[몽산법어 부록 05]

 

(1) 약 20분.

 

(2) 약 17분.

 

(1)------------------

 

만리경년별(萬里經年別)이요  고등차야심(孤燈此夜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하시(何時)에 봉견안(逢見顔)고  산색의구청(山色依舊靑)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만리경년별(萬里經年別)이다. 만리나, 그만 서로 살다가 이별(離別)을 해.

부부간이든지 부모 간이든지 친척 간이든지, 그저 내 몸뚱이던지 뭐든지 그만 만리경년별이여. 만리나 그만 격(隔)해 버려. 콱 맥혀 버리고 이별해 버린다 그말이여. 한번 이별하면 그만이야.

 

그 낯빤대기, 그 얼굴, 그 모양 그대로는 도저히 만날 수가 없어.

금생(今生) 부모가 후생(後生)에 만난들 얼굴이 똑같을 수가 있나. 얼굴 다 달라 버리고, 뭐 전체가 변해 버리고,

 

뭐 모두 그저 그만 참, 뿔따구를 뒤집어 쓰고 나올런지, 꼬리를 달고 나올런지, 기다란한 무슨 그런 놈의 배암 같은 게 되어 나올런지, 원 당최 뭐 거.

 

얼굴 그 얼굴 다시는 못 보지. 만리나 경년, 그 이별해 버리고 만다.

 

고등차야심(孤燈此夜心)이로구나. 외로운 등(燈)에, 턱! 그만 이별허면 등불만 훤허니 써 놓고 앉아서 이 마음이다. 이 슬픈 마음. 얼마나 슬퍼.

 

내 몸뚱이도 내버릴 때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무서우며, 이 가진 몸뚱이지마는 이별을 꼭! 하고 말 때가 있으니 그때를 생각해 봐라.

 

내 몸뚱이 밖, 부모니 처자니 뭐 친척이니 뭐 재산이니 뭐든지 그거 다 내버리는 거 그거 한번 생각해 봐.

 

하시(何時)에 봉견안(逢見顔)이냐. 어느 때에 다시 이별하면 만날 때가 있으리오.

도저히 이 몸 내버린 뒤에 무엇을, 이 몸도 다시는 못 만나. 요렇게 생긴 몸뚱이는 못 만나. 어떻게 생겨 나올런지.

 

산색(山色)은 의구청(依舊靑)이니라. 산빛은 예를 의지해 항상 푸르다.

산색의구청(山色依舊靑)이여. 산색의구청이라는 것은 내 본래가풍(本來家風), 내 본래면목(本來面目). 변태없는, 산색이 그놈이 어디 변태가 있나. 어느 때던지 산은 퍼렇지.

 

그저, 내가 나 하나 깨달라서 생사 없는 해탈대도(解脫大道)에 거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게송.

 

 

고담화상(高潭和尙) 법어(法語)다. 고담선사(高潭禪師)라고 참 유명한 도사인데. 선사의 법어라.

 

약욕참선(若欲參禪)인댄, 참선을 허고저 헐진댄,

참선 밖에 없는디 허고저 혀? 참선 해야지! 꼭 해야지! 안 혀?

참선 안 할 바에는 무슨 중노릇해서 뭣 혀? 중노릇해야 그 뭣 할 거여?

 

이번에 미국 중도 왔다 갔지마는 그 미국.. 영국 중인가? 영국 사람인가? 영국 중이란가? 미국 중이란가? 그런 중이지마는 태국에 와서 중이 되었어.

 

중이 되어 가지고는 오후불식(午後不食) 허는 거, 그것 딱! 그놈 죽어도 오후불식 밖에 몰라. 때만 지나가면 안 먹어. 열두 시만 치면 안 먹어.

그러고는 계행(戒行) 지키는 거, 그저 살생 않고, 도둑질 않고, 모도 사음질 같은 거 않고, 딱! 독신으로.

 

그러지마는 고기는 또 먹는다 하든구만.

한국에 와서는 안 먹는대. 한국에는 고기를 안 먹으니까 또 한국에 와서는 안 먹는다 하드구만. 즈그 나라에 가면 먹는데. 산 놈을 잡아서 먹든 않지마는 죽여서 모도 이리저리 매육(賣肉)은 먹는 모냥이지?

 

그것이 불법(佛法)이라고. 그 그런 계행 지키고, 오후불식 허는 거, 그 이외에는 몰라. 나를 찾는 법, 생사해탈 하는 법은 몰라.

거, 우리 부처님의 정법(正法)이 생사해탈법이건만, 어찌 똑 동토(東土)로만 건너오고는 그런 나라에는 그렇게도 안 갔는고. 그저 무슨 주문 외우는 것뿐이고. 그것 참.

 

그것이, 그 오후불식도 허며, 계행도 가지니 얼마나 일등인인가? 참, 사람으로써 훌륭한 사람이지마는.

그것만 가지고 아무리 닦아 봤던들 복진타락(福盡墮落), 그놈 그렇게 닦아서 그 복 받고 나서 마지막에는 타락(墮落)을 허니, 타락할 때 생각해 보면, 뭐 본래 안 닦고 안 받은 때나, 타락할 때 그때 다 받고 타락할 때나, 다를 게 뭐가 있나.

 

그러니 그 윤회를 면치 못허니, 닦아 가지고 받아 가지고는 나중에 타락하면은 도로 그만 지옥에서—와서 잘 닦아 가지고 낙(樂) 받다가 도로 또 복 다 받고 나면, 도로 지옥으로 풍 빠져 버리니 그거 뭐 마찬가지지. 뭐 좀 어느 때 좀 혹고혹영(或苦或榮)이지.

혹 영화스러울 때가 있다고 하지마는 그 고(苦)가 닥쳐오면은 마찬가지 아닌가. 윤회고(輪廻苦)라는 것이 그렇다 그말이여.

 

그러니 윤회를 면치 못허는 그것이 어디 참말로 우리 부처님의 정법(正法)인가?

꼭 윤회를 면하는 법이래야, 이 도는 물레바퀴처럼 돌아가는 그 윤회를 면하는 법이래야 참으로 법 아닌가.

척 한번 응, 참선을 해서 자아를 발견허는 것이 그것이 참 법(法)이고 도(道)지.

 

이러헌 일등 참선객(參禪客)이 되어서 참선을 할 자인대는, 참선을 허는 선객일진대는 행동부텀 무엇을 첫째 가져야 하냐 하면 불용다언(不用多言)이다. 다언(多言)이 없어야 할 것이다.

꼭 할 말이야 안 할 수가 있나. 꼭 헐 말은 허지마는 헐 말 밖에는 쓸데없는 말 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언(多言)을 말어라.

 

항상 공안(公案)을, 조주(趙州) 공안을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인고'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때기 이빨에 털났느니라'

 

무슨 도리(道理)냐 말이여. 따져 가지고는 되지 않는 도리여. 아무리 이놈을 수수께끼처럼 별 생각을 다 붙여 봐도 고것은 안되거든, 선(禪)이라는 것은. 그러니 그걸 주의하라는 것이여.

 

그러헌 의리선(義理禪), 해석선(解釋禪), 따지고 붙이는 선(禪), 그것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그런 종자는 여지없이 쫓아내 버리고 그것은 기르지 않아야 돼. 그래야 활구학자(活句學者) 활구선(活句禪)이지. 그런 것이 생겨 나오면 못쓰거든.

 

다언(多言)하나, 다언 말을 하지 말고 공안선(公案禪)을 해라.

공안을 떠억 염념상련(念念相連)해라. 생각생각에 그 의심(疑心)을 연(連)해라. 의심(疑心), 알 수 없는 놈을 연속해라.

 

시심마(是甚麼)면, ‘이뭣고?’ ‘이-뭣고?’

 

‘이-’ 아! ‘이-’한 놈이 있다 말이여, 분명히.

‘이-’해 놓고 보니 뭐냔 말이다. 도대체 뭐냔 말이다.

 

별놈의 이치를 다 때려 붙여 봐라. 별 모양 있는 지견을, 모양 있는 무슨 모양을 다 때려 붙여 봐라. 오색을 다 갖다 붙여 보고 오색 없는 지경을 또 다 붙여 봐라. 그런 건 공안참선(公案參禪)이 아니여.

 

‘이뭣고?’ 알 수 없는 하나가 떠억 나와 가지고는 그만 그놈 하나뿐이다. 전체가 그놈 하나뿐이여.

가나오나 그놈 하나뿐이여. 일체처(一切處)에 그놈 하나뿐이여.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그놈 하나뿐이여. 똥 눌 때라도 오줌 눌 때라도 밥 먹을 때라도 그놈 하나뿐이여.

 

아, 그놈 하나 다뤄 나가는데 뭐가 그리 어렵냐 그말이여. 천하에 쉬운 것이 그뿐인데.

 

이놈을 생각생각이 연(連)해라.

전념(前念)이 끊어지기 전에 곧 후각(後覺)이, 뒤에 깨달은 그 알 수 없는 놈이 항상 꼬리를 연(連)해.

 

염념상련(念念相連)을 해라.

좋지, 참 재미나지.

 

그 일념(一念)이, 알 수 없는 일념이 독로(獨露) 된 데 가서 일체 중생고(衆生苦)가 거기 없다.

중생이라는 고가 뭐냐 하면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중생고인데, 그저 그 분별식이 들이 일어나 가지고는 못 견디지.

 

그 분별식 가운데 얻지 못한 것이 있고, 되지 않은 일이 있고, 무슨 애가 탄 일이 있고, 뭐 별놈의 중생고가 다 거기서 일어난다.

중생고 퍼일어나는 것이 망상번뇌(妄想煩惱)에서 일어나는 건데, 망상번뇌가 거기 붙덜 못혀. ‘이뭣고?’에는. ‘이뭣고?’

 

또 하나, ‘이뭣고?’ 그놈이 또 ‘이뭣고?’

찾는 놈 또 찾는구나 ‘이뭣고?'

‘이뭣고?’한 놈을 또 ‘이뭣고?'한다.

 

아, 이렇게 법상에 올라와서 아침마다 일러주는데 무엇을 물어 사석(私席)으로. 왜 사석으로 물을 게 뭐여? 물을 게 있어야 묻지.

 

‘이뭣고~?’

그 ‘이뭣고?’해 놓고는, 알 수 없는 ‘이뭣고?’ 그 의심 그놈의 덤뱅이가 그놈이 참, 그것 ‘이뭣고?’라도 깰래야 깰 수 없고 흩을래야 흩을 수 없고 그놈 뭐.

 

잘~ 그놈 해 보지. 당장에 거가서 직하(直下)에 거가서 무변리(無變理) 거가 있고, 변함이 없는 도리가 있고.

 

그대로가 독로(獨露)인데, 의단독로(疑團獨露) 그것이 바로가 그대로가 그놈 연속(連續)해 나가는 것이 그것이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인데,

언제나 언제나 오래오래 몇 철 몇 해 해 가지고사 타성일편이 올라는가, 그때 올라는가?

 

요런 놈의 소견(所見) 봐라.

직하에 그만 타성일편도 오는 것이고, 지금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도 거기서 오는 것이고.

 

항상 상련(相連)해라. 그 상련(相連) 참 묘(妙)하다.

 

'이뭣고~?' 이뭣고? 그놈을 야물딱지게 다잡이해서, 그 거각(擧却)해서 해 나가 봐. 잠이 어디서 들어오며, 번뇌 망상이 어디서 올 것인가? 오는 곳이 있어야 오지.

'이뭣고?' 그놈 일어난 놈이 다 차지해 버렸는데, 어디서 그놈이 틈을 타서 들어올 것인가.

 

생각생각이 상련(相連)을 해라.

 

비단 행주좌와(行住坐臥)에도 해라.

행주좌와에는 왜 안 하나? 갈 때에 왜 그냥 가나? 그대로 왜 어디를 그냥 허행(虛行)으로 가냐. 허행을 허냐 그말이여. 아! 갈 때 왜 못해?

 

'이뭣고?' 걸음걸음이 '이뭣고?'

걸음 내딛는 것도 모른다. 이뭣고? 때문에. 그걸 갖다 행부지행(行不知行)이라 햐. 행해도 행을 몰라.

 

왜 앉을 때는 왜 안 해? 앉을 때 왜 못혀? 앉으면서 왜 못허며 서면서 왜 못혀?

앉을 때 터억 그놈, 참 앉을 때 더 조심해서 이뭣고?를 거각하고 척 앉어 보아라.

 

뭐 행할 때나, 좀 어디 가서 주(住)할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나 왜 못혀?

그렇게 좀 다잡이를 좀 해 보아라. 살림살이를 좀 그렇게 좀 알뜰히 좀 해 보아라.

 

이걸 않고는 안되아. 될 수가 없어.

인생 문제를 어떻게 헐 테여? 이놈의 인생의 문제, 깨닫지 못허고 밤낮 이렇게 칠통(漆桶)이 되어 가지고야 뭣혀?

 

어디서 하생(何生)했으며, 하사(何死)오? 어디서 뭣하다가 나왔으며, 어떻게 또 죽어서 뭣 될 것인가? 좀 생각해 봐. 하생(何生)이며 하사(何死)오? 이게 무슨 생이며 이게 무슨 죽음이냐 말이여.

 

죽지 않는 놈, 그놈 뭐 그대로가 딱 갖춰져 있는데. '이뭣고?'가 죽나?

 

‘이뭣고?’ 하나 득력(得力)해서 그만 타성일편(打成一片) 되어보지.

깨닫지 못하고 죽더라도 그 일편(一片)이 그대로 가서 그만 정법신심가(正法信心家)에 가서 그대로 몸뚱이 턱 받아 가지고 나와서 또 ‘이뭣고?’하는 것이여.(처음~20분24초)

 

 

 

 

 

(2)------------------

 

상대목전(相對目前)해라. 목전(目前)에 탁! 드러나야 한다. 독로. 독로(獨露)가 그거여.

눈앞에, 이 내 눈 뜬, 이 눈깔 눈앞에도 나타나지마는 심안(心眼)에, 내 마음 눈이 있지 않은가. 이 눈 보다도 눈 감아도 보이는 눈이 있지 않은가. 눈 감아도 보이는 눈앞에 탁! 나타날 것이다.

 

분금강지(奮金剛志)해라. 금강 같은 뜻을 가지고 분(奮)을 한번 내라.

스르르르 풀어지는 고런 놈의 그, 금방 났다가 금방 없어진 놈의 고런 놈의 마음, 거 뭣 할거냐. 그게 도심(道心)이냐? 도 닦는 마음이 그러하냐?

 

금강(金剛) 같은 마음을 분(奮)을 내라!

 

분심(奮心)이 제일이다.

왜 내가 나를 모르다니? 왜 내가 내 면목(面目)을 내 낯빤대기를 내가 몰라? 내 콧배기를 내가 몰라?

우째서 모르냐 말이여, 무슨 까닭으로 몰라? 왜 못 봐?

 

 

그런 뜻을 한번 가지고 일념만년(一念萬年)이다. 그 생각이, 그 깨짐이 없는 그 철저한 마음 그 뭉태기는 만년(萬年)이다.

만년이면 만년 지낸 뒤에는 없어지나? 벌써 만년인데. 만년이면은 또 만년이지. 또 만년이면 또 만년이지. 억만년(億萬年)이지.

 

그 염(念)이, 그 도렴(道念)이 ‘이뭣고?’ 마음이 이처럼 견고하고 이처럼 맺어져 한덩어리로 풀려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는 화두(話頭)가 그 민첩하게 아름답게 틈없이 온당한 한덩어리 떠억 될 때 회광자간(廻光自看)해라.

 

회광자간(廻光自看)이라는 건, 다시 더 맹렬하게 ‘이뭣고?’를 한번 봐라. 관(觀)해라.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 판치생모 의지(意旨)를, 조주(趙州)가 ‘판때기 이빨에 털 났다’고 했으니, ‘어째 판치생모라고 했는고?’ 그놈을 한번 심안(心眼)으로 회광(廻光)해라.

 

가만~히 관(觀)을 해라. 관(觀)이 고 의단(疑團)뿐이거든. 알 수 없는 놈뿐이다 그말이여.

알 수 없는 놈 딱! 틀림없이 나온 놈이 그놈이, 그것이 반조(返照)여. 회광반조(廻光返照)를 달리 했다가는 큰일나. 여기 다 그렇게 해 놨으니.

 

그놈을 찰이(察而)하고 부관(復觀)해라. '살피고 또 다시 관(觀)하라'하는 건, 의심(疑心)을 더 맹렬히 하고 후렴(後念)을 더 알 수 없는 의심을 자꾸.

 

의단뿐이니까, 의단독로(疑團獨露)니까.

관(觀)이나, 부관(復觀)이나, 찰(察)이나 전부가 의단(疑團)이라는 거여. 의심 하나뿐이여.

 

의심을 가만~히.

어디 꼭 ‘어째서 판치생모~’ 그 해서 되나? 나중에는 그만 판치생모가 그대로 의심 하나뿐인데, 이뭣고가 그대로 의심 하나뿐인데.

 

살피고 다시 관하는[察而復觀] 것이, 그것이 거기에 가서 용맹도 더하고 신심도 더하고 분심도 더하고 못된 중생념이 붙지 못하게, 거기서 뭐 그러헌 무슨 별념(別念)이 생겨 나올 것이 뭣이 있나?

 

그렇게 되어 나가는데 가서 혼침(昏沈) 산란(散亂)이 어디가 붙어 있어? 혼침(昏沈)이, 잠이 어디서 오며 산란심(散亂心)이 어디서 들어와?

진력가편(盡力加鞭)해라. 그래서 그 혼침 산란도 못 들어오고 화두(話頭) 독로(獨露)에 힘을 더하고 채찍을 더해라. 행여라도 거기 뭐가 붙을라.

 

거다가서 사렴(邪念) 사의상량(邪意商量)이 붙어?

그래 가지고 고인(古人) 공안을 천착(穿鑿)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알았다'고. 아! 이걸 붙이고 저걸 붙이고, 이런 것이요 저런 것이요. 아! 요런 놈의 짓을.

아무리 가르켜 주어도 안 듣네. 고런 것은 참 큰일나지.

 

작년에 거년에 혜우가 어쨌어? 혜우가 여기서 입 한번 벌릴 때, 내 다시 한번 물으니 거기서 그만 입 딱.. 주먹으로 볼태기를 두 번을 내가 쳐부숴 가지고 안 쫓아내 버렸어?

 

그런 것이 큰일나는 것이여. 그러기 땀세 방(棒)이 여우적(如雨滴)이라, 방할(棒喝)이 여우적(如雨滴)이여. 방할(棒喝)이라는 게 뭣이여? 방맹이(棒)와 할(喝)인데.

 

임제 스님 가풍도 보란 말이여. 적수단도(赤手單刀)로 살불살조(殺佛殺祖)다. 붉은 손 홑칼로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느니라. 뭐 이사(理事)가 다 막 들어가는 것이지.

 

그러니 그 활구참선 화두에는 분석, 그 해석, 될 것이여?

 

아! 그 조그만한 그 어린 녀석, 인자 들어온 어린 거, 그저께 벌써 따지고 들어서 헌 풍을 보니, 벌써 알거든. 아! 이놈이 그만 그 무슨 염화미소(拈花微笑)니 뭐니 다 해석을 혀. 아! 이것 보소.

그래 가지고는 그 모도 그렇게 종류가 있어. 그렇게 모도 가르키고 '옳다!' 해 놓고 요런 놈의 것, 선지식이라는 게 그러고 앉었는 게 있어. 거가서 지내고 나온 사람 다 그 모냥이여. 이것 참 큰일이지.

 

스승 만나지 못하면은 다 도깨비 되고 마는 거여. 될 거여? 그 뭣혀?

아! 제 경계(境界)를 제가 생각해 봐도 알 것이고. 참 부끄러울 일이지.

 

깨달지도 못한 것이 깨달은 체 해 가지고 그만 주뎅이만 모도 논하(論下)를 하고 논상(論上)을 하고, 고인(古人)의 공안을 천착(穿鑿)하고. 미득위득(未得謂得)허고 미증위증(未證謂證)해서, 그 죄 보다 더 큰 죄는 없네.

 

뒷 후인(後人)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쫓아내야 하는 것이고, 여지없이 때려 멸망시켜 버려야 하는 거여. 고런 종들이 모도 일어나 가지고 불법 망해 버리고 그 되겄는가 말이여?

 

 

천마만련(千磨萬鍊)해라. 천 번이나 화두를 의심을 하고 만 번이나 화두를 단련해라.

 

화두 하나 밖에 없으니, 깨달기 전에는—깨달을라면 언하(言下)에도 있고 그저 그만 일념지간(一念之間)에도 있고 중생성불(衆生成佛) 찰나간(刹那間)에도 있다마는, 그놈이 잘 못 깨달을라고 할 것 같으면 참 누년(累年)도 가고 일생(一生)도 가고 삼생(三生)도 가고 이런 것이다.

 

깨달기 전에는 네 실력이 그뿐인데, 네가 원래 깨달지 못할 만한 업력(業力)이 그만큼 눌은밥 눌데끼 퍼눌러 있으니 그런 건데 한탄(恨歎)하면 뭣할 것이냐, 한탄도 그만두고 그저 해라.

 

아무리 업력이 태산(泰山)같이 눌은밥 같이 눌러 붙었더라도 그까짓것 돌아보지 말고 그저 하면은 화신투입(和身透入)한다. 네 온전한 몸뚱이, 네 전체 몸뚱이 한번 푹! 들어갈 때가 있다.

 

안된 법이 없는 것이 화두(話頭)니라.

천 번이나 만 번이나 퇴타(退墮)없이 금강(金剛) 철석 같은 마음을 가다듬어서 이렇게 닦아 나가라.

 

전전신선(轉轉新鮮)이다. 그렇게만 신심이 철저히 닦아 화두만 해 나갈 것 같으면 신심이 점점 더 난다.

신심도 한량이 없으니까 바다와 같애서 전입전심(轉入轉深)이다. 들어갈수록 더 깊다. 신심도 해 들어갈수록 더 난다. 전전신선(轉轉新鮮)이다.

 

일구월심(日久月深) 해 봐라.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봐라. 그렇게 잘 해 나가면서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봐라. 밀밀면면(密密綿綿)하야, 그 화두가 은밀허고 은밀허고 면면허다.

 

은밀(隱密)이라는 것은 아주 조그만한 티끌만큼도 망상이 섞이지 않는 것을 밀밀(密密)이라고 해햐. 다른 마음이 조금도 섞이지 않고 의심만 따악 독로(獨露)헌 것이 그것이 밀밀이여.

 

면면(綿綿)이라는 것은 솜이 한덩거리가 되아, 솜 그놈이 모도 한덤벵이 되아 가지고, 그 먼지 같은 것이 그것이 면(綿)인디 면(綿) 털인디, 털 같은 것이 모도 그놈이 한데 합해져서 덩어리가 되어 가지고 떨어지지 않고 뭉쳐져 있는 것을 면면(綿綿)이라 해야.

 

화두가 그렇게 되었다 그말이여. 조금도 떨어짐이 없이 조금도 흩어짐이 없이 고대로 탁! 몽쳐져 있는 것을 면면(綿綿)이라 해야. 밀밀(密密)과 면면(綿綿)이 똑같은 거여.

 

화두 한덩이가 그렇게 철저허게 들어붙으면은 그만 내외(內外)가 지시일개의단(只是一箇疑團)이다. 바깥 경계나 내 안 마음 경계나 의단 하나뿐이여. 아무것도 없어.

 

허! 이런 경계가 닥쳐오면은 화두낙(話頭樂)도 기맥히네.

 

못된 것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 잠 같은 것이 모도 들어와서 무기(無記)가 모도 거기에 섞여졌기 때문에 그만 고롭고, 그만 이놈의 잠을 억지로 뗄라고 해도 들어붙고 잠이 오고, 자꾸 망상이 또 들어붙고 이놈이 야단치고 헌게, 화두 해 나가는디 고로와 죽겄다 그말이여.

'아이고! 이놈의 화두 내 던져버리고 좀 누웠으면' '아이고! 편안히 잠 좀 자 봤으면' 맨 요따구로 되어 버린다 그말이여.

 

고놈이 깨끗 깨끗해서 무기와 망념이 들어오지 못하고 화두가 밀밀면면만 되아 번진다면은 그 화두낙이라는 게 기맥히네. 거다가 그 또 너무 낙관해도 못쓰지마는, 화두의 낙이라는 거 기가 맥혀.

 

 

불거자거(不擧自擧)가 된다. 화두 들라고 할 것이 없다 그때는. 화두 챙길 것이 없어. ‘이뭣고?’ 헐 것이 없어. ‘판치생모?’ 헐 것이 없어.

그대로 ‘이뭣고?’뿐인디 뭘 ‘이뭣고’를 또 추켜들어? 뭐 ‘판치생모’를 다시 헐 게 뭐 있나?

 

이러헌 지경이 꼭 오고 마는 것이고, 공부허는 지경이 이러헌 지경인 것인디.

그 뭐여, 참선헌다고 앉으면 자고. 잠 그놈 깨면은 별 망상(妄想) 더하고. 별 망상 더혀. 선방에 들어와서 더혀.

 

허! 그 망상도 또 이상하지. 망상도 재미난 망상이 있네.

'돈이나 많이 벌어 놓고, 돈 그놈 내년에는 지르면 얼매고, 내년에 지뤄서 얼매가 되면 그놈 논 사고, 그놈 밭 사 놓고' 요런 같은 망상하면 좋네. 부자 될 것인께. 서호당마냥으로.

 

그런 것 생각하다 보니 한 시간이 버떡 가 버리고, 두 시간이 버쩍 가 버리고.

자기는 고런 것 생각하니 잠 안 자면서 남 존 것은 숭보고. 요러고 앉은 참선이 있네. 고약한 참선이지.

 

불거자거(不擧自擧)가 된다. 화두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가 없는 지경이 온다.

그러헌 지경이 그게 참으로 응, 일진(日進) 지경이다, 날로 참된 지경이다.

일용 거각을, 날마다 참선 거각(擧却)을 이와 같이 해야겄다.

 

역여유천(亦如流泉)이니라. 비유컨댄 항상 새암물 흐르는 것 같다.

어디 더 흐르고 덜 흐르나? 고 구녁에서 나온 그 물이. 고대로 항상 흐르는 물같이 그렇게 화두가 처억 될 때가 와.

 

 

만리경년별(萬里經年別)이요  고등차야심(孤燈此夜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이 몸뚱이 얻어서, 이 몸뚱이를 터억 가지고 불문(佛門)에 들어와서 도학자가 되었구나.

자, 이 몸뚱이, 이 도 닦는 몸뚱이, 도학자의 이 참 만나기 어려운 이 몸 이별해 버리면 만리경년별(萬里經年別) 되어 버려 다시 또 얻기 어렵다. 과연 어렵다.

 

고등차야심(孤燈此夜心)이여. 이 원통(寃痛)헌 마음, 이 외로운 등(燈)에 이 원통헌 마음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이 몸 만나서 이렇게 만났으니 금생에 결정코 속성대각(速成大覺)하야 광도중생(廣度衆生)이니라.(20분27초~37분28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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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만리경년별~ ; 『청허당집(淸虛堂集)』 - 서산 휴정(西山休靜) (박경훈 역,동국대학교 역경원) p70 ‘행선자(行禪子)에게 답함’ 게송 참고

*‘등불만 훤허니 써 놓고~’ ; 쓰다 —> ‘켜다’의 사투리(경기,강원,경상,전라,충청,함경)

*본래가풍(本來家風) ; 본가풍(本家風). 본래의 가르침. 천연 그대로의 가르침.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오후불식(午後不食) ; 정오(正午), 낮 열두 시가 지나면 먹지 않는 것.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계율에 정해진 규칙을 성실하게 실천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윤회고(輪廻苦)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며 받는 고통.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공안선(公案禪) = 활구선=활구참선(活句參禪)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다잡이 ;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무시(無始) 이래 쌓인 번뇌가 불성(佛性)을 덮고 있는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2)

 

*일념만년(一念萬年) : ‘한 생각이 만년(萬年) 가도록’의 뜻으로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낸 말.

*회광자간(廻光自看) :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는 뜻이다.

*회광반조(廻光返照) :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참고] 송담스님(No.524)—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오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 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 - 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별념(別念) ; '딴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천착(穿鑿 뚫을•궁구할 천/뚫을 착) ; ①깊이 살펴 연구함 ②공연히 이치에 맞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함.

*‘방할(棒喝)이 여우적(如雨滴)’ ; 방할(棒喝)을 비가 내리듯 주라. 태고 보우(太古普愚) 스님의 참선명(參禪銘) 참고.

*방할(棒喝) ; 선가(禪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접 체험의 경지를 나타날 때, 또는 수행자를 점검하며 꾸짖거나 호통칠 때, 방망이나 주장자(拄杖子)를 세우거나 그것으로 수행자를 몽둥이질하는 것을 방(棒)이라 하고, 그러한 때 크게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할(喝)이라 한다.

덕산선감(德山宣鑑)은 방으로 가풍(家風)을 삼았으며, 임제의현(臨濟義玄)은 할로써 지도방법을 삼았다. 이것을 두고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이라 한다.

*‘적수단도(赤手單刀)로 살불살조(殺佛殺祖)’ ; ‘맨손에 한 칼 들고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임이로다’. 『선가귀감』(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201 임제가풍(臨濟家風) 참고.

*염화미소(拈花微笑) ;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 범어의 Grdhrakuta를 음대로 써서 기사굴산(耆闍崛山)이라 하고, 뜻으로 번역하여 영취산(靈鷲山) • 취봉(鷲峰) 또는 영산(靈山)이라고만 한다。그 산 모양이 독수리 같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그 산 위에 독수리가 많았던 탓이라고도 한다。이 산은 중인도 마갈타(摩竭陀 Magadha)의 서울 왕사성(王舍城 Raja-grha) 동북쪽 십 리에 있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이 곳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부처님은 그 꽃송이 하나를 들어 보이니, 백만 대중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는데,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었다。이에 부처님은 『바른 법 열반의 묘한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다』고 선언하셨다 한다.

*경계(境界) ; ①대상,인식 대상 ②경지 ③상태 ④범위,영역 ⑤일, 사건.

*미득위득(未得謂得) 미증위증(未證謂證) ; 얻음[得]이 없는데 얻었다고 말하고, 증(證)한 것이 아닌데 증했다 말하는 것.

*업력(業力) ; 과거에 한 행위가 결과를 낳는 힘. 업(業)이 원인이 되어 과보를 일으키는 힘.

*화신투입(和身透入) ;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60~61 

此事는  如蚊子가  上鐵牛하야  更不問如何若何하고  下嘴不得處에  棄命一攅하야  和身透入이니라.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된 소에게 덤벼들듯이, 다시 여하약하를 묻지 말고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떼어 놓고 한 번 뚫어 보면, 몸뚱이째 들어갈 때가 있으리라.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면면밀밀(綿綿密密) ; 면면(綿綿)하고 밀밀(密密)하게. 면밀(綿密)이란 말을 거듭하여 뜻을 강조한 것으로 '끊어지지 않고 아주 빈틈없이 빽빽하게 죽 잇따라 들어차 있다'는 말. 끊이지 않고 빈틈없이 행하는 것을 말한다.

*면면(綿綿 솜·이어질·연속할 면) ; 끊어지지 않고 죽 잇따라 계속 이어지는 것.

*밀밀(密密 빽빽할·촘촘할 밀) ; 빈틈없이 빽빽히 들어찬 것.

*무기(無記) : [범] Avyaksita 선(善)•악(惡)•무기(無記) 3성의 하나。 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고롭고 ; 고롭다—> ‘괴롭다’의 사투리(경상).

* ; 다른 것은 섞이지 않고 온통.

*요따구 ; ‘요따위’의 사투리(전남).

*요따위 ; 요러한 부류의,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기맥히네 ; 기막히다—> (무엇이)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

*지르면 ; 지르다—> ‘기르다’의 사투리(강원,전라,충남)

* ; ‘흉’의 사투리(강원,경상,전남,함경)

*원통하다(寃痛--) ; 몹시 억울하여 가슴이 아프다.

 

Posted by 닥공닥정

§(513) 참선을 하려면 화두를 자기기 믿는, 믿어지는 스님으로부터 지정을 받는 것이 좋다 / 가장 최초에 생긴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가 '이뭣고?' / 이미 자기가 지은 빚은 갚아야 해.

 

천칠백 화두가 있지마는 가장 최초에 생긴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 설사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어떠한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한다 해도 궁극에 가서 깨닫는 것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이여.

그것이 바로 자성불(自性佛)이기 때문에 그놈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보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시삼마(是甚麽)화두여. “시삼마”를 우리말로는 '이 · 뭣 · 고?'거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뭣고?'

 

**송담스님(No.513)—93년 9월 첫째일요법회(93.09.06) (용513)

 

약 14분.

 

화두를, 개별적으로 화두(話頭)를 신청하는 분이 있어서 시간 관계로 개별적으로 화두를 설해 주지 못하고 이 법상에 올라온 기회를 타서 간단하게 화두 드는 법을 일러드리겠습니다.

이미 화두를 타신 분은 화두를 들고서 떠억 들으시고, 화두를 안 타신 분은 이럴 때에 정식으로 화두 드는 법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화두는 참선해 나가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과제여. 과제라고 하면 좀 어폐(語弊)가 있지만.

자세를 바르게 하고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고 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그냥 처음에 화두를 타기 전에는 다만 그렇게만 주욱 해 나가지만 본격적으로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참선을 하려면 화두를 자기기 믿는, 믿어지는 선배로부터 딱 지정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책에는 화두 드는 법이 얼마든지 있어서 책을 보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책을 보고 자기가 화두를 간택을 하면 문제가 무슨 문제가 일어나는고 하니 조금 하다 잘 안되면은 이거 화두가 자기한테 안 맞아서 그런가보다. 다른 화두를 또 가지고 하고. 이 화두 저 화두, 세 개, 네 개, 다섯 개, 몇 개를 자꾸 바꿔간다 그말이여.

 

그리고 공부가 잘 안될 때 자기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화두를 잘못 드는지 스스로 자꾸 그런 것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서 공부를 순일하게 할 수가 없어.

그래서 화두는 자기가 스스로 간택하기보다는, 물론 스스로 간택해서도 잘하는 사람도 있을 수가 있어요. 있을 수가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러기보다는 믿는 선배한테 탁! 지적을 받아서 해야 공부가 잘되건 못되건 간에 그 화두를 자꾸 바꾸려고 하는 그런 가벼운 생각이 안 나는 거다 그말이여.

 

화두를 들고 공부를 하면 누구나 처음부터 잘된 사람은 없어.

처음에는 곧잘 잘된 것 같은데 한 며칠 지나가나 몇 달 지나면 뚝 변해 갔고 영 안되고, 한 일 년 지나면 또 되다가 안되다가 자꾸 그런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법문을 자주 듣고 좋은 도반들과 같이 애를 써야 흔들림을 받지 않고 서로서로 울타리가 되어서 중단하거나 퇴태(退怠)하지 않게 되는 것이여.

 

 

천칠백 화두가 있지마는 가장 최초에 생긴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 설사 어떠한 공안을 가지고 어떠한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한다 해도 궁극에 가서 깨닫는 것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이여.

그것이 바로 자성불(自性佛)이기 때문에 그놈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보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시삼마(是甚麽)화두여. “시삼마”

 

“시삼마”를 우리말로는 '이 · 뭣 · 고?'거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뭣고?'

 

'이것이 무엇인고?'인데, 그것을 경상도 말로는 '이 뭣 고'거든.

'이 것 이 무 엇 인 고' 일곱 자인데,  '이 뭣 고'하면 석 자로 간단해서 옛날부터 화두를 들 때에는 '이것이 무엇인고?' 그래서 나쁠 것은 없으나 다 옛날부터 '이뭣고?' 선지식들이 다 그렇게 가르치셨어.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뭣고?' 그래도 괜찮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뭣고?' 그래도 되고.

 

그렇게 자꾸 하다 보면 나중에는 이 몸뚱이고 저 몸뚱이 따질 것 없고 그냥 '이뭣고?' 그렇게만 해도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뭣고?' 그 뜻이 그 속에 다 들어 있는 거여. 그동안에 많이 했기 때문에.

 

'이뭣고?'

 

'이뭣고?'하는, 나중에 가서 또 한 걸음 더 다그쳐 들어가려면 지금 '이뭣고?'해 놓고 '지금 이뭣고?하는 바로 이놈이 뭣고?' 이렇게도 다그쳐 들어가고.

 

'이뭣고?'할 때 「‘이’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런 뜻으로 '이뭣고?~' 이렇게만 하는 거야.

 

처음에는 화두를 '이뭣고?'해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을 동안에는 거기다 대고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고.

'이뭣고?'해서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화두를 새로 안 들어도 되어요. 알 수 없는 의심을 따악 이렇게 관(觀)하거든.

 

그러다가 뭔 소리가 들리거나, 무엇이 눈에 띄거나, 무슨 생각이 일어남으로 인해서 그 의심이 없어져 버리면 그때 다시 '이뭣고?~' 이렇게 챙기는 거여. 자꾸 챙기고 놓치면 챙기고, 놓치면 챙기고.

하도 잊어버려 싸니까, 이놈이 안 잊어버리게 하기 위해서 이놈을 잠시 일초 동안도 틈을 안 주기 위해서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런 게 아니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어.

 

따악 반가부좌를 하고서 허리를 쭈욱 펴고, 허리를 펴라니까 너무 또 뒤에로 자지바지해서 이렇게 하면 못쓰는 거여. 단정하면서도 어깨의 힘을 빼고, 목의 힘도 빼고 그리고서 눈은 평상(平常)으로 떠.

 

눈을 너무 잠이 오니까 눈을 뒤집어 까고 그래 못쓰는 거고. 또 눈을 뜨고 이것저것이 보여 싸니까 '아이,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 편하겠다' 해 가지고 눈을 감고 하면 안 돼.

눈을 감으면 좀 조용한 것 같이 느껴지기는 하는데, 눈을 감고 하면은 나중에 차츰차츰 생각이 조용해 지다 보면 혼침(昏沈)에 떨어지고, 혼침에 떨어진 줄 모르게 혼침에 빠져 갔고 자기 딴에는 '삼매(三昧)에 들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데 삼매하고 혼침하고는 다른 거여.

 

그래서 눈은 평상으로 뜨고서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이 항상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게 이놈을 다루어 나가야 하는 거여.

 

참선을 하려면, '집에서 참선을 하려면 뭔 전화가 오고 애들이 뭐라고 하니까 못한다'고 하는데 그러지 말고. 얼마든지 전화 오면 전화도 받고, 애들이 와서 응석을 하면 투덕투덕 하면서 그러면서도 자기가 흔들리지만 않으면 상관이 없는 거여.

 

봄에 시원할 때는 바람이 시원한 바람이 들어가면 아 바람 분다고 공부를 못하며, 산중에서 하다 보면 시냇물이 줄줄줄 흘러가는데 그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공부 못한다고 그건 말이 안 돼.

시냇물 소리는 시냇물 소리대로 그것이 다 법문(法門)이고, 새 우는 소리는 새 우는 소리 고대로 그냥 법문으로 들어. 그 소리 들으면서 터억 화두를 챙겨보라 말이여.

 

그렇게 하다가 자동차 소리는 또 뭐냐 그말이여. 자동차 소리가 붕붕 뻥~ 하니, 붕붕 뻥~ '이뭣고?' 딱 하면 그만인 거란 말이여. 그것 때문에 공부 못한다 소리는 그거 참선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거여.

 

이제부터서는 자동차 소리는 자동차 소리대로 놔 둬. 기차 소리는 기차 소리대로 놔 둬. 비행기는 비행기, 연전에 용주사에서 들었는데 입선 시간에 그 젯트기가 무엇이 어떻게 머리 위로 지나가면서 부르릉~ 정말 그건 안 좋드만 안 좋아.

안 좋아도 그 처음에는 대단히 귀에 거슬리고 안 좋더니 그러거나 말거나 졸다가 그 소리 나서 깨니까 아주 그 소리가 고맙더라 그말이여.

 

그래서 가정에서 살라면은 가정에도 여러 가지 식구끼리 모다 마찰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러나 '이뭣고?'를 한 사람은 그런 소리를 무던히 그냥 적당히 받아들이고, '예, 예, 알았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탁 '이뭣고?'

 

시천장 뭔 말하면 요리 돌아서 가지고 그러면 그건 골낸 것이 당장 드러나니 '저것이 배 째라고 저런다'고 그럴 거 아니냐 그말이여.

그러지 말고 뭔 말하면 그 사람을 쳐다보면서 화평한 얼굴로 속으로는 따악 '이뭣고?'하면서 '예, 알았어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되는 것을 왜 요리 둘러서고 모른 척하냐 그말이여.

 

'이뭣고?'라 하는 것은 참 최상승법(最上乘法)이기 때문에 보살의 육바라밀(六波羅蜜), 십바라밀, 팔만사천 묘방편(妙方便)이 다 '이뭣고?'하는데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다 활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이뭣고?' 하나만 법문을 들으면서 열심히 하고, 법회에 한 달에 한두 번 갖고 안되면은 전강 조실 스님 녹음 테이프를 구해 가지고 가서 항상 틀어놓고 들으면서 공부를 해라 말이여. 잠도 안 오고 공부하는데 좋은 채찍질이 될 것이다.

 

앞으로 석 달, 또 산철 결제가 있으니까 산철에 방부(房付) 들이고 공부하실 분은 하고 또 가정에서 계실 분은 가정에서, 가정에서 자기가 떠억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해 보시면 참 좋을 것이다 그말이여.

직장에서 한 분은 직장에서 죽비는 못 치고 마음의 죽비를 딱! 치고, 쉬는 시간에도 떠억 일하면서도 '이뭣고?' 이렇게 해서 산다면은 세상이 살기가 힘이 드는 세상도 그런대로 살 만하는 거고.

 

세상이 살기가 어렵더라도 어려운 대로—보살이 수행해 나가는 데에 많은 어려운 지경에 일부러 들어가서 그 어려운 것을 이겨내면서 공부하려고 들어가기도 하는데,

자동으로 세속에서 이 일 저 일이 일어난다면야 아 그런대로 그놈을 잘 적응을 해서 살아간다면 신심이 저절로 솟구치고 환희심이 일어나고, 자기를 와서 예쁘다고 해 준 사람이나, 자기를 와서 몽둥이로 때린 사람이나, 얼굴에다 더러운 것을 발라 주거나 향수를 쳐 주거나 다 똑같은 거여, 그게.

 

받아들이는 마음에 달려서는 좋게 해 줘도 진심(瞋心)을 낼 수도 있고, 자기를 해롭게 해 주는 사람을 만나도 오히려 합장배례(合掌拜禮)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전부가 자기 마음 하나에 달려 있는 거여.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정치를 원망하기보다는 그런 여러 가지 상황 속에 자기가 적응할 수 있도록 자기를 단련을 하고 그러한 경험에서 더 신심(信心)을 내고 분심(憤心)을 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라.

 

그러면서도 이미 자기가 지은 빚은 갚아야 해.

남편에 대한 빚, 아내에 대한 빚, 자식에 대한 빚, 부모에 대한 빚, 사회에 대한 빚, 국가에 대한 빚, 모든 중생에 대한 빚, 불보살에 대한 은혜는 다 갚으면서 한평생을 이 짧은—얼마 안 남았습니다, 우리도.

인자 내일 모레 죽게 될는지 언젠지 모르지만 다 마찬가지입니다. 늙고 젊고가 없는 것이니까 어쨌든지 이 서늘한 가을을 정말 알뜰하게 잘 지내시기를 다짐하면서 법상에서 내려가겠습니다.(49분13초~63분8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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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천칠백 화두.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대정장47, p.502a)에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으며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이름을 지은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지 않는다. 다름 아닌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이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爾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9. 4. 8. 23:22

§(513) 도를 배우려면 모름지기 다섯 가지 올바른 믿음을 갖추어야 한다.[五種正信]

 

**송담스님(No.513)—93년 9월 첫째일요법회(93.09.06) (용513)

 

약 15분.

 

(첫째는) 신심(信心), 자기 몸 가운데 주인공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조금도 손색이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고, 자기 마음속에 진짜 부처님이 들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거야.

부처님은 십 생을 온갖 행하기 어려운 것을 다 행하셨다 그말이여.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을 행하기 어려운 것 당하기 어려운 것을 다 행하고 최선을 다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치면서 끝없는 진리를 위해서 바쳐 왔다 그말이여. 그래서 손바닥만한 땅도 불보살이 중생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는 곳이 없다.

 

우리가 평범한 범부(凡夫)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고, 풀끝에 이슬과 같은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서글프고 비참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몸 가운데에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이 주인공(主人公)은 삼세제불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조금도 손색이 없는 존재라고 믿을 때 우리는 얼마나 든든하고 보람이 있고 자신감이 생기는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세상의 흥망성쇠가 하나도 마음에 걸릴 것이 없어.

바람이 좀 거센 바람이 지나갈 수도 있고, 시원한 바람이 지나갈 수도 있고, 조금 더운 바람이 지나갈 수도 있고, 차운 바람이 들어갈 수가 있어서 바람 부는데 따라서 더우면 시원한 옷을 입고 추우면 두터운 옷을 입는 거와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말이여.

 

 

둘째는 무량겁래(無量劫來)로 오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모든 일들과,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일과, 누구를 미워하고 미움을 받는 일과, 우리가 익힌 모든 습성과 그런 것들이 전부가 다 한 생각 생사심(生死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들이라, 그 원인이 전혀 다른 사람한테 원인이 없어.

 

다 자기 자신이 지은 업(業)으로 그렇게 된 것이고, 자기의 한 생각으로 인해서 벌어진 모든 것들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아무도 미워할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어. 한탄할 것도 없고.

다맛 당장 이 시간부터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만을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세속에서 살라면은 돈도 벌어야 하고, 명예도 얻어야 하고, 권리도 있어야 하고, 예쁜 마누라도 있어야 하고, 자식도 있어야 하고, 별의 별별 호강도 해야 하고, 좋은 차도 좋은 집도 있어야 하고, 너무너무 근심 걱정이 많고 해야 할 일이 너무너무 많은데,

출가해서 떠억 계(戒)를 받고 중이 되면 아무것도 걱정이 없고, 비가 오면은 신발에 물 들어가나 고거 하나만 걱정하면 된다 이거여.

 

끼니때 되면 밥 지어주고, 아무것도 걱..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듣고 다 가정을 버리고 '에잇! 나도 중이 되어 버려야겠다' 그러면 안 되고.

여러분도 세속에 살면서 기왕 아버지면 아버지 책임을 해야 되아. 자기가 그렇게 업을 지었기 때문에. 어머니로 있다면은 어머니 책임을 해야 하고, 며느리면 며느리 책임을 해야 하고, 아들이면 아들 책임을 해야 하고, 학생이면 학생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거여. 그러면서 '이뭣고?'만 하면 되어.

 

그러면 세속에서 사는 동안에는 어쩔 수가 피할 길이 없어. 그것이 전부 자기가 과거에 지어 놓은 인연으로 만난 사람이요, 만난 일이기 때문에 다 해야 하는 거여.

그것만 열심히 하면 다 되냐 하면 그게 아니어. 살 수가 없어. 할려고 해도 마음대로 안되기 때문에 살 수가 없는 거여.

 

그걸 이겨내는 힘을 얻어야 하는데 그 힘이 '이뭣고?'에서 나오는 거다 그말이여.

 

'이뭣고?'를 안 하고는 세속에서 아무리 잘살라고 마음을 먹고, 잘할라고 마음을 먹고, 아 미워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이를 악물고 결심을 해도 일에 딱! 부딪치면 안 되는 거여. 속에서 일어나서 안 되는 거여.

'이뭣고?'를 해야 자연히 봄이 돌아오면 반드시 눈이 녹고 얼음이 녹고 뜨뜻해서 파릇파릇한 싹이 돋아나듯이, '이뭣고?'를 해야 맺힌 덩어리가 녹는 거고, '이뭣고?'를 해야 모든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이 생겨. 마구니를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말이여.

 

 

세 번째는, 고인(古人)의, 고불(古佛)과 고조사(古祖師)의 일언반구(一言半句)의 법문이라 하는 것이 마치 긴 칼과 같아서 잘 갈아 논 칼과 같아서 함부로 만지고, 함부로 그놈을 가지고 장난을 하고, 함부로 접근하다가는 손을 베고 몸을 베고 다치는 거다 그말이여. 함부로 그것을 내두르다 멋도 모르고 그놈을 내두르다 보면 여러 사람을 다치게 만들어.

 

그래서 이 참선을 하는 사람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 가운데에,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가 어떻게 지혜가 있고 혜(慧)가 빠르던지 천칠백 공안을 맥힘이 없이 다 통달을 해 가지고 어느 선지식하고 가서 법담(法談)을 해도 다 인가(印可)를 받았다 그말이여. 오직 원오극근(圜悟克勤) 선사 앞에 가서, 그런데 인가를 받지 못했어.

 

"내가 무슨 공안에 맥혔길래 인가를 안 하십니까?"

"공안에 맥히지 않았다. 네가 깨달은 것이 아니라 공안을 알았기 때문에 너는 인가를 할 수가 없다. 너는 안광낙지시(眼光落地時)에 증험(證驗)을 해 봐라"

 

공안을 가지고 의리(義理)로 따져서 이렇다 저렇다 무슨 문제, 수학 문제 풀듯이 공안을 가지고 이리저리 사량분별로 따져 가지고 알아 봤자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일본에서 나오는 선(禪)에 관한 많은 책들이 한국에도 많이 나오고 번역된 책도 있고 그런데, 행여나 그런 걸 보고 공안에 대해서—자기가 자기의 본참공안에 철저하게 참(參)해 가지고 확철대오를 해서 선지식의 인가를 받았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분상에서 그러한 책 나부랭이 봐 가지고 공안을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려고 하지 말아라 그말이여.

 

천칠백 공안을 다 알았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생사 문제 해결하는 데는 조금도 도움이 안 되고, 그러헌 것을 자기가 깨달랐다고 착각을 하면 자기 신세도 망치고, 자기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도 그르치게 되고, 나아가서는 불법까지 망하게 될 것이다 그말이여.

 

여러분들이 지금은 잘 못 보지만 옛날에 홍콩 영화에 이소룡이란 사람은 십팔계인가? 태권도인가? 뭘 해 가지고 어떻게 잘해 가지고 풀풀 나는 영화를 많이 찍어 내 가지고 엄청나게 흥행을 했다 그말이여.

영화를 찍을 때에 하는 그것 가지고 실지로 자기에게 그런 태권도 실력이 있는 걸로 착각해 가지고 진짜 태권도 잘하는 깡패하고 대결해 가지고는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사실이 있었는데, 영화는 얼마든지 풀풀 날으는 영화를 찍을 수가 있고 백 번 죽은 사람도 다시 살아나게 찍을려면 찍는 거다 그말이여.

 

공안이라는 것을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라고 하지 말아라. 아무 소용없는 거야!

10년, 20년, 30년 내지 평생을 참선을 했어도 한 공안도 짐작이 안 가고 꽉 맥혔다 하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확! 은산철벽(銀山鐵壁)으로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나간다면 설사 언젠가는 깨닫게 되고 설사 금생에 깨닫지 못하더라도 내생에라도 그 사람은 결정코 확철대오하고만 마는 거여.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한 것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지, 이리저리 엉터리로 사량분별로 따져서 공안을 열 개, 아니 백 개를 알면 뭐 하는 거냐 말이여.

일본 선원에서는 백 개를 통달하면 조실 자격을 준다나 어쩐다나. 백 개 아니라 천칠백 개를 다 통달해서 조실 노릇하면 뭐 하는 거냐 그말이여.

 

그래서 고인의 일언반구를 마치 큰 칼과 같이 생각하라 이거여. 등한히 그것을 가까이하고 만지고 가지고 흔들다가는 자기 목숨 잃고 남 죽이고 불법을 망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일상생활 속에 항시 간단없이 화두를 챙겨라.

공부를 하되, 하다 보면 앉아서 하다 서면서 잊어버리고, 하다가 눈으로 무엇을 보면 잃어버리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으면 놓쳐 버리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놓쳐 버리는데,

'놓쳤다 아휴! 이놈의 공부가 왜 안되냐, 좀 할라고 하면 시끄러워서 못 하겠다. 뭣 좀 할라고 하면 전화가 와서 못하겠다' 그러지 말고.

 

귀로 무슨 소리가 나면 오히려 거기서 화두를 한번 더 챙기고, 눈으로 무슨 경계가 나타나면 그때 한번 다시 또 챙기고, 전화가 따르르릉 오면은 거기서 다시 정신을 챙기고, 아들 손자가 "어머니, 할머니"하고 달려들면 "오냐, 오냐"하면서 생각은 탁! 챙기고.

 

일체 경계가 바로 나의 공부를 방해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일체 경계가 바로 나로 하여금 정신차리게 하고, 화두를 들게 하고, 공부 단속하게 하는 채찍으로 생각하라 그거거든.

그렇게 해서 또 들고 또 들고 해서 중단하지 말고 생각 생각이 알뜰히 단속을 해 가시라 이거거든.

 

지금 해제, 가을 산철인데, 더운 여름도 참 정진할려면 힘드는 계절이고, 그런데 그 여름이 지나가서 인자 앞으로 서늘한 때가 되었으니 이러한 좋은 때를 잘 이용을 해서 열심히 정진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 번째, 우리의 생각이 생사심이 끝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생사도 또한 끝이 없어. 이 끝이 없는 이 생사가 적은 일이 아니다 그말이여.

다행히 금생에는 사람 몸을 받아서 불법을 만나 가지고 이만하기 천만다행이지만, 금생에 이 몸뚱이 놓쳐 버리면 내생에 어디 가서 무엇으로 태어날는지 모른다 그말이여.

 

비록 금생에 나쁜 일 안 했다고 해서 내생에 꼭 좋은 곳으로 태어나라는 보장은 없어.

금생 말고 전생, 저 전생에, 무량억겁에 무슨 짓을 했는가 한량이 없기 때문에 내생에 무엇으로 또 태어날란가, 어느 삼악도(三惡途)에 태어날란가 알 수가 없거든.

 

그래서 정말 분심을 내고 결정신(決定信)을 가져야 해. 금생에 이만한 환경 속에 태어나고, 이만한 여건 속에 태어난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고 정법에, 활구참선에 철저한 뜻을 거기다 세워라 그거거든.

그래가지고 그렇지 아니하면 무서운 삼악도의 고통을 면하기 어렵다고 하는 철저한 신심을 가져야 한다 그거거든.(29분42초~44분3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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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峯和尙廣錄)』 (제20권) ‘동어서화속집하(東語西話續集下)’에서. 『동어서화(東語西話)』 (장경각) p129~131.

 

學道須具足五種正信 第一要信自己方寸心中一箇喜怒哀樂底主人翁覿體與三世諸佛不欠一毫髮

도를 배우려면 모름지기 다섯 가지 올바른 믿음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마음속에서 희로애락(喜怒哀樂)하는 주인옹(主人翁)의 본 모습은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과 더불어 한 털끝만큼도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第二要信從無量劫來與聲色愛憎 染習流注結成一種生死無常 於四大身中念念遷流新新不住

둘째는 무량겁을 두고 내려오면서 바깥 세계[聲色]와 애증에 물들여져서 이루어진 생사(生死)는 무상(無常)해서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몸 가운데 생각 생각 떠돌아 다니느라 한 순간도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第三要信古人垂慈留下一言半句如倚天長劍 等閑拶透端的會斷人命根

셋째는 고조사(古祖師)들이 남겨 놓으신 일언반구(一言半句)가 마치 하늘에 뻗쳐 서 있는 큰 칼과 같아서, 그 고인(古人)의 일언반구에 대해서 등한히 그걸 따진다든지, 알음알이로 그것을 짐작을 해 볼라고 한다든지 이러다가는 그 큰 칼에 나의 목숨이 끊어진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한다.

 

第四要信日用工夫但恐不做做之不己 念念精專決有透脫之期

넷째는 일용공부(日用工夫)에 있어서 다못 자기가 공부를 짓지 아니한 것 그것을 두려워할지언정, 생각 생각이 정미(精微)롭게 한결같이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면 결정코 생사에서 투철하게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第五要信生死無常不是小事 若不奮決定志以期獨脫 其三途苦趣曾無自免之方也

다섯째는 생사무상(生死無常), 이 생사 문제가 결정코 적은 일이 아니니, 만약 큰 분심(憤心)을 내 가지고 결정적인 지조를 가지고서 나의 힘으로 칠통(漆桶)을 타파(打破)할 것을 기약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삼도(三途)의 고해(苦海)에서 진실로 벗어날 방도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믿어야 한다.

 

有三法爲進道之捷徑 一智眼明 二理性通 三志堅固

한편 도에 나아가는 첩경(捷徑)이 될만한 세 가지 법이 있다. 첫째는 지혜의 눈이 밝아야 하며, 둘째는 이성에 통달해야 하며, 셋째는 뜻이 견고해야 한다.

 

智眼明則照破世間身心現量境界一切是非憎愛取舍得失貧富壽夭苦樂等法皆是夢緣了無實義 而不起分別 

‘지혜의 눈이 밝다’는 것은 이 세간(世間)에 태어난 이 몸과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이 모든 경계(境界)와 일체 시비(是非)와 증애(憎愛)와 취사심(取捨心), 득실(得失), 빈부(貧富), 수명(壽命), 고락(苦樂) 등이 모두 꿈속의 인연이어서 조금도 그러한 것들이 실(實)다운 것이 아니다. 그렇게 간파(看破)하는 것이다. 그렇게 간파를 하고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理性通則於從上佛祖所說語言名相 至於三敎聖賢諸子百家差別法要 會歸一源不生異見

‘이성에 통달했다’는 것은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의 설하신 모든 말씀과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의 성현의 말씀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수많은 차별법이 다 한 근원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을 알고 그것에 대해서 다른 소견을 일으키지 않는다.

 

志堅固則從今日至未來際不問近遠 若不徹證決定不休

‘뜻이 견고하다’는 것은 지금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멀고 가까움을 묻지 않고 철저하게 깨닫지 않고서는 결정코 이 공부를 그만두지 않는다.

 

此三法具一而缺二三 只成箇無事漢 具二而缺一三 只成箇伶俐漢 具三而缺一二 只成箇擔板漢

이 세 법 중에서 첫째만 갖추고 둘째와 셋째를 빠뜨리면 한갓 ‘일 없는 사람[無事漢]’이 되며, 둘째만 갖추고 첫째와 셋째를 빠뜨리면 그저 ‘영리한 사람(伶俐漢)’이 될 것이며, 셋째만 갖추고 첫째와 둘째를 빠뜨리면 단지 한쪽으로 치우쳐 전체에 대한 안목이 없는 지극히 우직한 ‘담판한(擔板漢)’이 된다.

 

當知此道如涉千里之脩途 若具一二而缺三 是由九百里而止者 具一三而缺二 終不免其岐泣 具二三而缺一  吾知其觸途成滯必矣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도는 천리(千里)나 되는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첫째, 둘째만 갖추고 셋째를 빠뜨린다면 9백리 정도 가다가 중지하는 자이며, 첫째와 셋째만 갖추고 둘째를 빠뜨린다면 갈림길에서 어찌할 줄 몰라 우는 신세를 끝내 면하지 못하며, 둘째와 셋째는 갖추었으나 첫째를 빠뜨린다면 그는 가는 길마다 반드시 막히리라는 사실은 나는 분명히 알 수 있다.

 

三法全具雖未動足 敢保其與已到家者不相異也 豈待其重問迷津而再搖鞭影乎

이 세 가지 법을 모두 갖추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서도 이미 깨달음의 집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 없으리라는 사실을 내가 보증할 수 있다. 어찌 또다시 미진(迷津)을 묻고, 재차 말채찍의 그림자를 흔들 필요가 있겠는가?

 

*미진(迷津) ; 미혹(迷惑)이라는 나루터[津]. 열반의 피안(彼岸)에 대하여 차안(此岸)과 같은 말이다. 미혹의 경계. 삼계(三界) · 육도(六途)를 말함.

 

Posted by 닥공닥정

§(124) 공부하는 사람은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어서 올바르게 닦아야만 바른 깨달음에 도달한다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이 공부는 이론, 지식, 상식, 이러한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알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이 참선하는 데는 동원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건 고대로 놔둬 버리고 다못 바보가 되어 가지고 「이뭣고?」 그 생각밖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많이 읽은 책, 많이 들은 법문이 하나도 필요가 없고 다못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처음 시작할 때 바른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를 받어서 하고, 해 갈 때에도 자주자주 법문(法門)을 듣고서 그 법문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하면서 또 법문을 들어야 빗나가지 아니하고 올바르게 닦을 수가 있고 올바르게 닦아야만 바른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24)—1980년(경신년) 하안거 결제 법어(80.05.28) (용124)

 

약 16분.

 

공부는 다른 게 아니고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오직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도업(道業)을 성취하고 못하고 하는 것이,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언제까지 하냐, 안 하느냐'가 오직 우리의 한 생각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생각 단속할 줄 아는 사람은 마침내 생사해탈(生死解脫) 하는 것이고, 한 생각을 섣불리 방치한 채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는 사람은 무량겁 생사윤회를 벗어날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그렇게 단속을 하신다면 금년 한 철에 결정코 득력(得力)을 하실 것을 저는 보장을 합니다.

'그렇게 알뜰히 공부를 해서 득력을 못한다면 내가 대신해서 지옥에 떨어지겠다' 이렇게 과거에 모든 도인(道人)들이 자신 있게 보증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금년 여름에 방부(房付)를 들인 분은 그렇게 공부하시려니와 사정에 의해서 직접 방부를 들이고 와서 공부를 못하시고 가정에서 하신 분들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가정에서 생활하신 그 가운데—손자가 떠들거나 아들이 떠들거나, 무슨 집안에 근심 걱정이 있거나 기쁜 일이 있거나 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것 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손으로 만질 때, 앉고 서고 눕고 할 때, 무슨 기쁨 · 슬픔 · 괴로움이 있을 때 그때그때를 잘 돌이켜서, 퍼뜩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도 퍼뜩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특히 속이 상하고 도저히 그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어려울 때, 긴장하고 당황하고 그럴 때, 그럴 때는 심호흡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셔. 들어마실 때는 배꼽 밑에 단전(丹田), 하복부 아랫배가 약간 볼록하도록 그렇게 느끼면서 숨을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들어마시되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아랫배) 뒤에서 직선으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들어마심에 따라서 아랫배가 약간 볼록해지도록, 그때 가슴은 신경을 쓰지를 말고 배만 아랫배만 약간 볼록해지도록 느끼면 되는 것입니다.

볼록해졌으면 그 상태로 딱 정지해 가지고 3초 동안, 약 3초 동안 지난 다음에 또 조용하니 숨을 내쉬되, '코로 내쉰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로, 쑤욱 배를 당기면서 뒤에로 내 보낸다' 이리 생각을 하세요. 내쉬면은 배는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고.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떠한 초학자라도 그렇게 공부를 다져 들어가면 머지않아서 호흡과 화두(話頭)가 동시에 들어지게 되고 차츰차츰 잊어버리는 시간은 줄어지고 화두를 드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는 그 편안하고 맑고 깨끗하고 저절로 신심과 분심이 나면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도(道)의 기쁨이 느껴질 것입니다마는 그럴 때에도 조금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서는 아니됩니다.

기뻐하는 마음 내면 기쁨의 마구니에 이미 끌려가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럴 때에도 '아! 좋다. 참 이런 상태로 영원히 있었으면' 이러한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됩니다.

 

조금도 잘된다는 생각, 기쁘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갖지 말고 그러한 가운데에도 계속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화두만을 역력(歷歷)히 들어 갈 따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가다가도 뚝 변해 가지고 영 화두가 잘 안 들리고, 의심이 잘 되지를 않고,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영 상태가 안되고, 그렇게 그러한 또 상태가 오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더라도 조금도 짜증을 내지 말고, 번뇌심도 내지 말고, 심호흡을 계속하되 그래도 여의치 못하면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지고 밖으로 나가서 일직선으로 길을 정해 놓고 한 5분 내지 10분 왔다갔다하면서 화두를 들어 보십시오.

자연히 가슴속이 후련해지고 머리가 청쾌해지면 그때 또 다시 자기 자리에 가서 딱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으십시오. 그렇게 해서 그 고비를 넘기면 또 수월하게 또 공부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공부는 스스로 '아, 공부가 잘된다' 생각할 때 그때 보다도 영 공부가 시간이 지루하기가 말로 할 수 없고 몸도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그렇게 그 애를 먹을 때, 그때가 참으로 공부에 있어서 중요한 때인 것입니다.

그때 짜증을 낸다든지 번뇌심을 낸다든지 에이! 공부를 못할거라고 해서 중단한다든지 하면 그건 안되는 것이고, 그럴 때에 아까 말하는 바와 같이 포행(布行)을 하고 심호흡을 해서 잘 고비를 넘기면서 화두를 밀밀(密密)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해서 그 고비를 넘기면 그때 공부가 한 걸음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가면 반드시 득력을 하고 도업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누차에 걸쳐서 말씀을 한 바지만 이 공부는 이론, 지식, 상식, 이러한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알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이 참선하는 데는 동원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건 고대로 놔둬 버리고 다못 바보가 되어 가지고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 생각밖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많이 읽은 책, 많이 들은 법문이 하나도 필요가 없고 다못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분별심으로 따져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거듭 말씀을 드리고.

공부를 하다가 어떠한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어떤 경지가 나타나면 설사 그런 경계가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던지, 부처님이 나타나서 무엇을 경책을 주시고, 무슨 손으로 이마를 만져 주시고, 또는 무슨 약을 주시고, 이런 것들이 그런 경계가 나타났다 하드라도 그것은 공부를 해 나가는데 있어서 환상(幻相)으로 나타나는 것이여.

 

환각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참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눈을 뜨고 성성(惺惺)한 마음으로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거각(擧却)해 나갈 따름이어야지 '하! 이런 것이 나타난 것 보니까 내가 무슨 큰 도를 통할란가보다. 어디 또 헌가 한번 눈을 감고 한번 찾어보자' 이래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가 나타나면 그것이 신기하고 묘해서 누구한테 자랑을 하고 싶고 그렇게 해 가지고 자기가 아주 공부를 잘한 증거로 그런 것이 나타난 것처럼 새로 들어온 사람한테 자랑을 해 가지고 한목 으시댈라고 그러한 짓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참으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옳게 공부를 해 나가면 그런 것이 나타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평소에 그러한 것이 나타나기를 바래는 마음이 잠깐이라도 있으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가지고 그러한 현상이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벽에다 던진 고무공이 다시 자기에게 튀겨져 오듯이 자기가 그러한 마음속에, 그러한 잠재의식 속에 그러한 것이 조금이라도 그런 그림자가 있을 때 그러한 것이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든지, 주력을 한다던지, 또는 염불한다든지, 참선 한다든지 해서 그런 경지가 나타난 것이 다 그러한 원인으로 해서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은 정신을 깨끗이 성성(惺惺)한 정신으로 해 나가고 눈을 절대로 감지 말고 뜨고 하고 그러면은 그런 것이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런 경지는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나타나는 것이어서 언제나 성성한 마음으로 공부를 다져 나가고 눈을 뜨고 하면 그런 것이 여간해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혹 본의 아니게 나타났다 하드라도 그것이 참 경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두시고 그런 것에 대해서 두 번 다시 신경을 쓰지 말고, 없는 것으로 취급해 버리고 다못 화두만을 성성히 들어 나가십시오.

그러한 신기한 경지가 나타나되 신경을 쓰지 아니하고 관심을 거기에 기울이지 아니하면 해로울 것도 말 것도 없지만,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자꾸 그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그런 것을 이리저리 남에게 말해 가지고 쓰여 먹고 하면 결국은 거기에서 외도(外道)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한번 삿된 경지에 떨어져 놓으면 여간해서는 바로 잡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나무나 판때기에 못을 박을 때 처음에 박을 때 정확하게 박어야지, 그 조끔 찌그러지게 박아 놓으면 빼서 다시 그 옆에다 박을라고 박아 봤자 다시 아까 그 구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처음에 올바르게 해 가야지, 한번 잘못 들어가 놓으면 잘못인 줄 알고 할려고 해도 하다 보면 다시 그 경지가 딱 나타나 버린다 그말이여.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은 처음 시작할 때 바른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를 받어서 하고, 해 갈 때에도 자주자주 법문(法門)을 듣고서 그 법문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하면서 또 법문을 들어야 빗나가지 아니하고 올바르게 닦을 수가 있고 올바르게 닦아야만 바른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다. 생사해탈이 사비상(事非常)이다. 진로형탈, 생사해탈이 이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라. 긴히 화두를 잡어서 한바탕 공부를 지을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번 그 추위가 뼛속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매화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오.

 

삼동(三冬)에 되게 강추위를 해야만 그 강추위 끝에 핀 매화꽃에서 그 코를 치는, 진동하는 향내가 나는 것입니다. 겨울 날씨가 뜨뜻하면 그러한 뜨뜻한 기후 끝에 매화가 피면 매화꽃이 피기는 피었지만 아무 향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진을 하되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 이 삼요소(三要素)가 돈발(頓發)해서 그 알뜰히 정진을 해야만 그 정진 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는 것입니다.

어제도 그럭저럭 오늘도 그럭저럭, 할 시비(是非) 다 참견하고, 잘 잠 다 자고, 먹을 것 다 먹고, 할 짓 다 하고, 그래 가지고 도업을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기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39분56초~56분7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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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그렇게 알뜰히 공부를 해서 득력을 못한다면 내가 대신해서 지옥에 떨어지겠다'

[참고 ①] 「최상승론(最上乘論)」 (5조 홍인대사 弘忍大師 六O二 ~ 六七五)

若有人依文行者即在前成佛. 若我誑汝當來墮十八地獄. 指天地爲誓. 若不信我世世被虎狼所食.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글(最上乘論)에 의지해 수행하면 곧 성불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너를 속인다면 다음 세상에 십팔지옥(十八地獄)에 떨어지리라. 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만약 나를 믿지 아니하면 세세생생에 호랑이 밥이 되리라.

 

[참고 ②]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하권 (백운화상초록 白雲和尙抄錄) ‘승고선사(承古禪師 ? ~ 一O四五)’

承古禪師 常勸諸人 莫學佛法 但自無心去 利根人晝時解脫 鈍根人或三五年 遠不過十年 若不悟去 老僧 替你入拔舌

 

승고선사께서 항상 여러 사람에게 권하되 “불법을 배우지 말고 다만 스스로 무심하여라. 영리한 근기의 사람은 한나절에 해탈하고, 둔한 근기의 사람은 혹은 3년 · 5년이며 멀어도 10년을 지나지 않는다. 만약 깨닫지 못하면 노승이 너를 대신해서 혀를 뽑는 발설지옥(拔舌地獄)에 들어가리라”

 

[참고 ③]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 『몽산법어』 (몽산화상 一二三一 ~ 一二九八 또는 一三O八) (용화선원刊) p97-99.

若有來此(약유내차)하야  同甘寂寥者(동감적료자)인댄  捨此世緣(사차세연)하며  除去執着顚倒(제거집착전도)하고  眞實爲生死大事(진실위생사대사)하야  肯順菴中規矩(긍순암중규구)하야 截斷人事(절단인사)하고  隨緣受用(수연수용)호대  除三更外(제삼경외)에  不許睡眠(불허수면)하며 不許出街(불허출가)하며  不許赴請(불허부청)하며  未有發明(미유발명)이어든 不許看讀(불허간독)하며  非公界請(비공계청)이어든  不許閱經(불허열경)이니

 

만약 이에 와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이 세상 인연을 다 여의며 제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다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잘 지키고 인사(人事)를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밤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如法下三年工夫(여법하삼년공부)호대  若不見性通宗(약불견성통종)인댄 山僧(산승)이  替爾(체이)하야  入地獄(입지옥)호리라

법다이 삼 년 동안 공부해 만약 견성하여 종지(宗旨)를 통달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너희들을 대신하여 지옥에 들어가리라.

 

[참고 ④] 「고봉화상선요·어록(高峰和尙禪要·語錄)」 ‘立限示衆(其九)—9. 기한을 정하고 대중에게 보임’ (고봉원묘 高峰原妙 一二三八 ~ 一二九五)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p85, p88 참고.

參禪 若要剋日成功 如墮千尺井底相似 從朝至暮 從暮至朝 千思想萬思量 單單只是箇求出之心 究竟決無二念 誠能如是施工 或三日 或五日 或七日 若不徹去 西峰今日 犯大妄語 永墮拔舌犁耕

 

참선하는데 만일 한정된 날짜에 공(功)을 이루려면 마치 천척이나 되는 우물에 빠졌을 경우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밤이나 낮이나 천 생각 만 생각이 오로지 다만 우물에서 나오려는 마음뿐이고 끝끝내 결코 다른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이 하여라.

진실로 이렇게 공부하기를 혹은 3일, 혹은 5일, 혹은 7일 하고도 깨치지 못한다면 서봉은 오늘 대망어죄(大妄語罪)를 범했으므로 영원히 혀를 뽑아 밭을 가는 지옥[拔舌犁耕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 (1분 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역력(歷歷 겪을·지낼·수를 셀·가릴 력) ; ①뚜렷한 모양. 분명한 모양. 똑똑한 모양. ②사물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모양.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밀밀(密密 빽빽할·촘촘할 밀) ; 빈틈없이 빽빽히 들어찬 것.

*회광반조(廻光返照) :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참고] 송담스님(No.524)—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오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 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분별(分別) ;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6 에서. (가로판 p149)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 ; 완전히 잠이 들지도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정신이 어렴풋한 순간.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승두(繩頭) : 승(繩)은 목수가 쓰는 직선을 긋는 노끈이고 두(頭)는 어조사다。 불조의 계법(戒法) 규칙. 화두.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삼동(三冬) ; 겨울철의 석 달.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시비(是非) ; ①옳음과 그름. ②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 또는 옳고 그름을 따지며 하는 말다툼.

 

Posted by 닥공닥정
대중 생활2019. 4. 2. 06:41

§(124) 절 생활 전부가 바로 수행이다 / 남 공부 피해 주지 말고 오직 묵묵히 정진하라 / 전강 조실스님의 말이많거나, 시비 · 잡담한 사람에게 관(冠)을 씌운 방편.

 

좋으면 좋은 대로 하고, 조금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그 불편한 것을 자기의 정진력으로 극복하면서 정진을 해 나갈 때에 그 사람이 도업(道業)을 성취할 것이고, 불보살(佛菩薩)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이마를 만져 주실 것입니다.

 

**송담스님(No.124)—1980년(경신년) 하안거 결제 법어(80.05.28) (용124)

 

약 12분.

 

금년 여름 안거[夏安居]가 오늘부터 시작이 됩니다.

보살님네들 결제 들으시면 오래하신 분이나 새로 오신 분이나, 서로 부처님의 제자로서 도반으로서 겸손하고 조용하고, 맑고 깨끗하고 인자로운 마음으로써 오직 '생사 무상(無常)하다'고 하는 그 생각으로 일분일초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입선(入禪)할 때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방선(放禪)을 하고서도 이 방 저 방에서 잡담으로 세월을 보내고 무슨 '며느리가 어떻고, 아들이 어떻고, 손자가 어떻고, 뭐 미국을 가고 어디를 가고' 그 쓸데없는 소리를 주거니 받거니 주거니 받거니 해 가지고 옆 다른 사람 공부 좀 할려고 하는 사람까지 못하게 해서 큰 죄를 지을 것이 아니라.

 

입방선(入放禪) 죽비(竹篦)는 사실은 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 오셔서 아침에 일어나서 예불(禮佛)을 하고 십악참회(十惡懺悔)를 하고, 그리고 들어가서 입선을 하고 방선을 하고 아침 공양을 하고 그러한 여기 생활 자체가 전부가 바로 수행인 것입니다.

 

죽비 치고 앉은 그 시간만이 수행이 아니고, 세수할 때 그때도 그 화두(話頭)가 역력(歷歷)한가?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할 때 그때도 화두가 역력한가?

숟갈을 들고 젓갈을 들고 밥을 떠 놓고 찬을 뜨는 그때도 화두가 역력한가?

일분일초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아니하고 그렇게 알뜰히 단속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편안한 집안을 놔 두고 무엇 하러 이 좁은 방에 이렇게 며느리 아들딸들이 효성으로 받드는 것을 버리고서 여기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저 백 리 밖에, 몇만 리 미국에서까지 이 용화사로 공부를 하러 오신 보살님이 계십니다.

그런 보살님은 미국이라고 해서 거기도 절도 있고 거기서도 뭐 편히 지내실라면 얼마든지 지낼 수 있지만 여기에 와서 첫째,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또 조실 스님이 계시던 그 도량에 와서 조실 스님을 믿는 여러 불자(佛子)들과 같이 공부를 하고 싶어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그러한 신심을 가지고 큰 사업을 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걸 문을 닫어 놓고 여기를 오셨습니다. 우리는 설사 국내에서 오신 분도 그만한 신심으로 모다 오신 것입니다.

그랬을진대는 그 최초의 그 신심, 그 마음이 석 달 동안 한결같이 중단함이 없이 그 생각으로 한 생각 한 생각, 일분 일분, 하루 하루가 이어져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공부한다면 어느 누구라서 득력(得力)을 못할 것입니까? 어느 누구라서 깨닫지 못할 것입니까?

 

죽비 치면 형식적으로 앉었고, 방선하면 잡담으로 세월을 보내고, '자리가 이 자리가 내 자리다, 내가 더 나이가 많고 내가 먼저 절에 들어왔으니까 여기가 내 자리다' 세상에 그러한 철이 안 든 부끄럽기 그지없는 그러한 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용화사에 오신 보살님네 가운데는 그런 분이 한 분도 안 계실 줄 생각하지만, 비단 용화사에서 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시드라도 자리를 가지고 문제가 될 것이 없고, 무슨 앉은 순서가 문제가 될 것이 없고,

아무데라도 그때 형편 따라서 앞에 앉게 되면 앞에 앉고, 옆에 앉게 되면 옆에 앉고, 뒤에 앉게 되면 뒤에 앉고, 인연 따라서.

 

나만 좋은 자리에 앉고 다른 사람은 나쁜 데에 몰아넣을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거기에서 하고, 조금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그 불편한 것을 자기의 정진력으로 극복하면서 정진을 해 나갈 때에 그 사람이 도업(道業)을 성취할 것이고, 불보살(佛菩薩)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이마를 만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불보살이 우리를 눈여겨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으음, 네가 정말 발심(發心)을 했나, 못했나. 네가 진실한 마음으로 공부를 하고 있냐, 못하고 있느냐'

속으로는 진실하게 공부를 못하면서 겉으로 남 보기에 진실하게 한 척 아주 그렇게 뽐내는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중생도 그러한 모습을 보면 대번에 아는 것입니다.

 

하물며 불보살이 그것을 모르실 까닭이 없습니다. 제석천왕(帝釋天王)과 도량 신장(神將)이 그것을 모르실 까닭이 없습니다.

자기도 참되게 공부를 못하면서 남까지 공부를 못하게 방해를 친 사람이 어찌 성현의 귀여움을 받으며, 신장의 벌을 받지 않고 베기겠습니까?

 

그동안에 선방에 여러 철을 다니시면서 행여나 그러한 문제로 해서 자기도 신경을 쓰고 남에게 폐를 끼친 일이 있으신 분은 금년부터서는 아주 깨끗하게 그런 것을 청산하고 석 달 동안 거의 말 한마디도 한 바가 없을 정도로 묵묵히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억지로 묵언표를 목에다 걸고 벙어리 흉내를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꼭 필요할 때는 간단히 한마디해 버리고, 한마디 끝났으면 당장 '이뭣고?' 이렇게 닦아 가는 것입니다. 묵언을 안 해도 저절로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저절로 묵언이 되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용화사에 초창기 그때 전강 조실 스님께서 하도 보살님네들이 말을 많이 하고, 시비를 많이 하고, 잡담을 많이 하고 해서 종이로 관(冠)을 만들어 가지고 누구라도 입만 뻥끗했다 하면 그 사람 머리에다가 그 종이로 만든 관을 씌웠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걸 보고는 주춤해 가지고 입을 다물고 한 30분이고 한 시간 말을 안 합니다. 그 사람은 계속 그 관을 쓰고 입선도 하고, 관을 쓰고 밥도 먹고 그러다가 누가 뭐라고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풀쑥 한마디하면 그 사람에게 그 종이로 맨든 관(冠)이 이양이 됩니다.

 

또 그 사람이 또 그 관(冠)을 쓰고 또 다음에 누가 말을 한 사람이 나올 때까지 잘 머리에다가 보관을 하고 있다가 또 누가 다른 사람이 말을 하면 또 관(冠)을 그렇게 하고, 그런 식으로 해서 그런 방편(方便)으로 잡담 시비를 못하게 하신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고.

그때 계시던 정광명 보살님이라든지 몇몇 보살님네들은 아마 그 관을 써 본 경험도 있으실 것이고 알고 계실 줄 생각합니다.

 

이건 참 전강 조실 스님의 우리 그 사부대중(四部大衆)을 친손자나 어린 자식처럼 생각하신, 귀엽고 귀여워서 그런 방편을 쓰신 줄 생각을 합니다마는.

 

금년 여름에도 가만히 내가 밖으로 둘러보고 혹 내가 정진하는 데 들어가 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공부를 정말 알뜰히 하신가, 안 하신가를 살펴봐 가지고 정 잡담하는 사람이 많으면 또 그런 종이로 만든 관을 한번 시험해 보기도 하고.

그래도 효과가 없으면 조실 스님께서 맨들어 놓으신 법칙 제 1호, 시비(是非)를 일바시거나 싸움하거나 자기도 공부 아니하면서 남 공부를 방해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보따리를 쌓여서 추방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금년 여름에 한쪽에서는 불사(佛事)에 여념이 없고 또 법당은 또 금년 철 가운데에 혹 언제 또 철거가 될는지 안 될는지도 알 수가 없고, 설사 철거가 안 된다 하드라도 조실 스님께서 지으신 이 선방에서 공부하는 것은 금년 여름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조실 스님의 법력(法力)과 도력(道力)과 조실 스님의 자비가 지금도 도량에 훈훈히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정말 알뜰히 공부를 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28분30초~39분5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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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 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무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예불(禮佛) ; ①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절함. ②절에서 아침·저녁 두 차례에 걸쳐 불·보살(佛·菩薩)에게 예배하는 의식.

*십악참회(十惡懺悔) ; 몸[身]과 입[口]과 마음[意]으로 짓는 10가지 죄—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婬), 망어(妄語), 기어(綺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탐욕(貪慾), 진에(瞋恚), 사견(邪見)—를 지은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역력(歷歷 겪을·지낼·수를 셀·가릴 력) ; ①뚜렷한 모양. 분명한 모양. 똑똑한 모양. ②사물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모양.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불보살(佛菩薩)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이마를 만져 주실 것입니다' ; 마정수기(摩頂授記 문지를·쓰다듬을 마/정수리·이마 정/줄 수/기록함·기억함 기), 마정기(摩頂記), 마정수기별(摩頂授記莂)이라고도 한다. 손으로 정수리(이마)를 만져주면서 기별을 주는 것.

어떤 사람이 수행을 철저히 하거나, 염불 또는 기도를 정성스럽게 봉행하거나, 남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인간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일을 하였을 때, 불보살(佛菩薩) 또는 천지신명이 그의 앞에 나타나 그의 정수리(이마)를 만져 주면서 ‘훌륭한 일을 하였다. 그대는 이 공덕으로 성불을 성취하리니, 그때 얻은 결과는 이러이러 하리라’고 예언해 주는 것을 말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제석천왕(帝釋天王) ; 불법(佛法)을 지키는 수호신. 신[天神]들의 제왕[帝]인 샤크라〔釋〕라는 뜻. 제석(帝釋), 석제(釋帝), 제석천(帝釋天), 제석왕(帝釋王), 제석태자(帝釋太子), 천주(天主)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샤크라 데바남 인드라(Śakra-devānām Indra).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陀羅) ·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 · 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 ·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 등으로 음역하고 줄여서 석제환인(釋提桓因, 釋帝桓因) · 제석천(帝釋天)이라 한다.

『법화현찬(法華玄贊)』에서는 “범어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에서 ‘석가’는 성(姓)씨이며 ‘능(能)이라 한역하고, ‘제바’는 ‘천(天)’이라 한역하며, ‘인달라’는 ‘제(帝)’라 한역하니 곧 ‘능천제(能天帝)’라 한다” 뜻으로 보면 ‘석가(능히) 제바(하늘의) 인달라(제왕)’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수미산이 있는데 그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의 왕으로, 사천왕(四天王)과 32신(神)을 통솔하면서 불법(佛法)과 불제자를 보호한다. 도리천에는 33신이 있는데, 제석은 그 중앙에 있는 선견성(善見城) 안의 수승전(殊勝殿)이라는 궁전에 살고, 나머지 32신은 그 성(城) 밖의 궁전에서 각각 산다.

제석천은 본래 인도 성전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천신 중 벼락을 신격화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신이었으나 불교에 수용되어서는 범천(梵天)과 함께 호법선신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부처님의 설법 자리에 나타나 법회를 수호하고 사바세계 인간의 번뇌와 죄를 다스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에서는 단군의 할아버지를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 하여 하늘의 주인과 제석천을 동일시하여 숭배하였다.

<잡아함경>에는 제석천이 본래 사람이었으나 수행자에게 음식과 재물, 향과 와구(臥具)·등불을 베푼 인연으로 제석천이 되었다고 한다. 제석천왕은 신중탱화(神衆幀畵)에 한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는 모습으로 많이 등장한다.

*신장(神將) ;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신장. 또는 《화엄경》을 보호하는 신장.

*관(冠 갓 관) ; (검은 머리카락이나 말총으로 엮어 만든) 머리에 쓰는 쓰개의 종류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시비(是非) ; ①옳음과 그름. ②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 또는 옳고 그름을 따지며 하는 말다툼.

*일바시다 ; '일으키다'의 사투리.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法)의 힘. ②가르침의 힘. 불법의 공덕. 불•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을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것.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힘. *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힘.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힘.

 

Posted by 닥공닥정
아는 것과 깨달음2019. 4. 1. 06:57

 

 

§(124) 최상승법은 생사 화택(火宅) 속에서 화택을 면하는 길 / 극한 상황 그 자체가 훌륭한 선불장, 선방 / 분별지로 아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분별지는 생사를 윤회하게 하는 원인.

 

이 도리는 가르켜 줄래야 가르켜 줄 수가 없는 것이지만 자기의 모든 정성을 다해서 가르켜 줄려고 노력을 해야 그것이 바로 자비심(慈悲心)이고, 이 도리는 배울 수가 없는 것이지만 목숨을 바쳐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 버릴 정도의 그러한 철저한 신심으로 배울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을 바로 믿고 바로 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도업(道業)을 성취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24)—1980년(경신년) 하안거 결제 법어(80.05.28) (용124)

 

(1) 약 19분.

 

(2) 약 10분.

 

(1)------------------

 

오늘은 경신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날입니다. 동시에 백일기도 입재일입니다.

해마다 4월 15일이면 결제를 해 가지고 석 달 동안 그 더운 여름철 더위를 모르고 정진을 해서 7월 보름날, 백중날 해제를 해 왔습니다.

 

금년 여름에는 법당 신축 관계도 있고 또 저 밑에 두 선방과 후원, 창고 해서 대소 건물 일곱 채가 철거가 되게 되어서 결제(結制)를 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를 했었는데, 다행히 이렇게 오늘 결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헐릴 때 헐리드라도 그때까지는 우리가 서로 결제를 해 가지고 열심히 정진을 하는 것이 도리에도 합당하고 우리 불사(佛事)를 위해서도 좋으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위태로운 그러한 지경에 놓여 있고 우리나라도 대단히 걱정된 그러한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 말세에 우리의 생명과 가정과 사회 국가 민족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위태로운 지경에서 우리는 살 수밖에는 없게 되었는가?

 

이것은 이웃나라가 나뻐서 그런 것도 아니고, 저 소련이나 무슨 공산국가가 나뻐서 그렇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 인과(因果)의 법칙에서 보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한때 태어날 수밖에는 없도록 동업(同業)을 지어 놓은 것이 있어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이렇게 함께 같은 시대에 하늘을 머리에 이고 그 괴로움과 근심을 함께 하면서 살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나의 몸을 단속하고, 나의 입을 단속하고, 나의 마음을 단속해야 할 것인가?

물어 볼 것도 없이 최상승법(最上乘法), 불법(佛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 이외에는 우리의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단속해서 이 생사고락(生死苦樂)의 구덩이 속에서, 이 생사 화택(火宅) 속에서 화택을 면하는 길은 오직 최상승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지어 가지고 받는 것을 누구를 원망해 본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지어 가지고 이러한 시대를 만났고 이러한 일을 당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진댄 내가 지은 그 업(業)에 근원을 해결을 해야만 당장 자기의 앞길이 트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빚을 자기가 갚어야 그 부채로부터 자기는 해방이 될 것입니다. 빚을 갚지 않고 아무리 이리저리 피해 다닌다고 해서 그 빚이 없어질 까닭이 없고, 피해 다닐수록 더욱 불안하고 더욱 공포에 싸여서 그러는 동안에 죄는 더욱 가증(加增)해 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지은 빚 갚고 빚을 다 갚아 버리면 그때는 다리를 쭉 뻗고 잘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에 태어난 사람들이 살아갈 오직 한 길이요, 분명한 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자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최상승법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렇게 산승(山僧)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들이 듣고 계십니다. 듣고 있을 때는 그 듣고 있는 그놈, 그놈을 여의고 우리는 자성(自性)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하는 동안에는 영겁을 두고 찾어도 그 사람은 찾을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장소가 따로 없고, 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물론 적당한 시간과 적당한 장소가 있으면 앉아서 기본자세,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그리고 공부를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가 언제 어디서라도 그러한 시간과 공간이 꼭 나에 알맞게 마련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알맞게 마련되지 아니했다 해서 밤낮 그러한 장소와 시간만 찾아다니다가는 결국은 금생에 그 사람은 공부를 못할 사람인 것입니다.

 

섰을 때도 「이뭣고?」

앉았을 때도 「이뭣고?」

밥을 먹을 때도 「이뭣고?」

걸어 다닐 때도 「이뭣고?」

일을 할 때도 「이뭣고?」

 

성이 날 때 오히려 더 정신을 차려서 「이뭣고?」

속이 상할 때 「이뭣고?」

괴롭고 슬플 때 「이뭣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 「이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을 해 나갈 때 그 사람에게는 가장 정진하기에 알맞은 시간이 제공이 되는 것이며, 가장 정진하기에 알맞는 장소가 제공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시간과 장소를 찾아다니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시간과 공간이 만나지지 않지만, 시간과 공간을 따로 찾지 아니하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바로 그때 그 찰나 찰나를 놓치지 아니하고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어 나간다면은 그 사람은 어떠한 극한 상황 속에 놓여 진다하더라도 바로 그 극한 상황 그 자체가 훌륭한 선불장(選佛場)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뜻있는 좋은 선방(禪房)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승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한 시간 한 시간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온통 세계가 불바다가 되고 온통 나라가 난리가 일어나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진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오히려 발심(發心)하고 오히려 분심(憤心)을 내고 철저한 부처님 제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서 공부를 못한다. 화두가 잘 들리지 아니한다. 의심이 잘 나지를 않는다. 몸이 아퍼서 공부를 잘 못한다' 이러한 말들은 그와 같이 공부한 사람에게는 그러한 말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꽃 피고 잎이 피고, 새가 울고 물이 흐르고 구름이 나르고 있는 고대로 열반(涅槃)의 세계요, 극락세계요, 고대로 가 전부 불세계(佛世界)인데 무엇을 깨닫느냐? 무엇을 찾으며 깨달을 것이 무엇이 있느냐?' 아까 어떤 학인(學人)이 와서 그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열반경』에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라고 하는 게송(偈頌)이 있습니다. 바로 그 학인은 그 게송의 뜻을 그렇게 물어 온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비단 그 게송뿐만이 아니라 열반경이나 원각경이나 경을 보면은 그러한 내용의 뜻이 전편의 경전에 다 그러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경을 읽고, 그러한 경에 대한 법문을 듣고서 그런 줄로 알면 그 사람에게는 도 닦을 필요도 없고 참선(參禪)도 할 필요가 없느냐? 그렇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전부가 부처님의 몸뚱이요,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는 부처님의 참 설법이다' 이렇게 믿고.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고, 우리 몸 이대로 고대로 성불(成佛)이고 그대로 열반이다. 따로 버려야 할 생사도 없고 증득해야 할 열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고서 그리고서 참선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내용을 경(經)을 통해서 알았다고 해서, 그렇게 믿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우리가 참선이 할 필요도 없고 깨달을 필요도 없고, 무슨 뭐 법문을 들을 필요도 없고 법을 설할 필요도 없고, 중생을 제도할 필요도 없고 제도 받을 필요도 없다. 뭐 있는 그대로가 바로 열반인데 무슨 해탈을 생사해탈 하냐' 그래 가지고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자고.

 

참으로 이 도리를 요달(了達)한 사람은 할 일이라고는 없어서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한숨 자고 그뿐인 것입니다마는.

요달하지 못한 분상에는, 아까 '이대로가 곧 전부가 열반이요, 열반이기 때문에 벗어야 할 생사도 없다'고 하는 내용을 알기만 알았지, 실지 그러한 경계에 자기가 계합(契合)하지 못하고 투철하지 못한 분상에는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하고,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목숨 바쳐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그것이, 아는 것 그것 가지고 생사(生死)에 자유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에 아는 것이 그것이 도(道)고, 아는 것으로써 구경(究竟)의 경지라고 한다면 가르켜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라면 가르켜 줄 수가 있어요.

 

그러나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의 뜻을 아무리 알아듣기 쉽게 납득이 되도록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그럴싸하게 설명을 해 주면 '아하, 그런 뜻이로구나' 이렇게 우리는 그런 경전에 있는 어려운 말씀을 어느 정도 납득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별지(分別智)로써, 중생의 분별지로써 이해를 한 것은 어디까지나 아는 것이지 그것이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분별지로 아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그럴싸하게 알았다 하드라도 깨달음이 아니라 바로 그것은 중생의 분별지요, 분별지는 생사를 윤회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生死輪廻)가 다른 데에서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분별심이 끊어지지 아니하면 천하 없이 그 생각이 옳은 생각이요, 경전에 쓰여 있는 말씀 고대로를 외우고 이해하고 있다 하더라도 분별심으로 따지고 있는 동안에는 어디까지나 부처님 말씀이라 하드라도 그것은 분별지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분별지로 무엇을 알고 분별지가 끊어지지 않는 동안에는 계속 생사윤회의 원인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경전에 있는 말씀을 올바르게 배우고 알았다면 목숨 바쳐서—정말 생사가 무상(無常)하다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 이튿날로 미룰 것도 아니요, 그날 저녁으로 미룰 것도 아니고 당장 그 자리에서부터 바른 선지식을 찾아서 선지식의 지도하에 참선을 하는 그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도리는 가르켜 줄래야 가르켜 줄 수가 없는 것이지만 자기의 모든 정성을 다해서 가르켜 줄려고 노력을 해야 그것이 바로 자비심(慈悲心)이고, 이 도리는 배울 수가 없는 것이지만 목숨을 바쳐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 버릴 정도의 그러한 철저한 신심으로 배울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을 바로 믿고 바로 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도업(道業)을 성취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처음~19분13초)

 

 

 

(2)------------------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몽산(蒙山) 스님이 마을에 학자로서 불법(佛法)을 심히 비방을 하든 사람이 강아지 꿈을 꾸고서 자기가 자칫했으면 강아지로 태어날 뻔 봤다고 하는 것을 확인을 하고 거기에 발심을 해 가지고 출가해서 대도인이 된 인연 설화를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경전 가운데에도 수없이 많은 비유의 설화와 인연의 법문이 많지만 그러한 한 토막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와 같은 그러한 비유 인과설 속에서 신심과 분심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면 그야말로 부처님의 살아 있는 법문을 바로 알아들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약이 꼭 인삼, 녹용과 같은 그러한 값비싼 약만이 우리의 병을 나수는 것이 아니고 값이 헐어디 헐은 들과 산에 나 있는 야생초 몇 뿌리를 삶아서 먹어도 병을 신효(神效)하게 낫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 하면 어려운 법문, 암만 듣고 또 읽어도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그런 어려운 경전의 말씀만이 정말 높고 깊은 진리다. 그러한 어려운 경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혹 그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시는지.

 

'나는 아직 경도 한 권도 읽지 못했고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천수(千手)도 아직 못 욉니다. 그러니 불명(佛名)도 아직 탈 수가 없고 더군다나 참선은 할 생각조차도 못 냅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신 분을 가끔 만납니다마는,

무슨 천수(千手)를 달달 외우고, 무슨 경전을 많이 보고, 어려운 한문으로 된 경전을 해석할 줄 알고 그러한 것은 활구참선을 하는데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경전을 많이 보고 그래 가지고 알아 가지고 자기가 '참, 나는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 누가 뭐 어떠한 승려라 하더라도 감히 내 앞에 무슨 법문을 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법화경이고 화엄경이고 금강경이고 닥치는 대로 다 외우고 읽고 해석할 줄 안다. 나를 덮을 사람이 누가 있느냐?'

이러한 거사나 신도가 계신다고 하면 참 그렇게 딱하고 안될 수가 없습니다. 불법을 무슨 그런 지식으로 생각하고, 이론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불법은 많이 아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많이 외우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그러면 경은 뭐하러 부처님이 설하셨으며, 경은 뭐하러 해인사에 그렇게 경판을 오래 보관하면서 인쇄를 해서 내놓을 필요가 있느냐? 뭐 많이 봐도 소용이 없다면 한 권도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이렇게 또 생각을 하실는지 모르지만.

 

보되 한 글자도 남은 바가 없어야 하고, 글자로 된 경전을 읽으므로 해서 그 글자로 된 경전은 완전히 소화가 되어서 그것이 없어지고서 부처님께서 입을 통해서 설할 수 없는 참 진리를 자기의 마음에서 깨달라야만 그 사람은 경전을 옳게 보았다고 할 것입니다.

 

'닭똥이 거름이 된다. 또는 사람 똥이 거름이 된다. 또는 풀을 참 많이 비어서 그래 가지고 퇴비를 하면 좋다' 그러지만 닭똥을 썩히지 아니하고 푹 띄워서 완전히 발효를 시킨 거름이라야 그것을 밭에다 주고 식물에다 주어도 거기서 그 참으로 비료가 되는 것이지,

푹 썩지 아니한 발효하지 아니한 쌩똥을 갔다가 과실 과목(果木)이나 채소나 곡식에 주면 거기서 열이 나 가지고 과일 나무 뿌리가 참으로 썩어 버리고 채소고 곡식이고 하나도 건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말씀도 그 경전을 읽고서 완전히 그놈이 삭아서 한 글자도 남음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거기에서 참나를 깨닫게 되아야 그 경전을 옳게 보는 것입니다.

 

태권도나 유도나 검도 그런 걸 처음에 배우면 그 주먹이 근실근실해 가지고 누구하고 한번 싸워 보고 싶고, 벽도 한번 차 보고 싶고, 조그만한 일에 누가 있으면 싸움하는 데만 있으면 자기가 탁! 가로막고 나서서 한번 그놈을 뽐내 보고 싶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 삼단 사단 오단 육단 올라가면 여간해서 어디 가서 주먹을 내놓지도 않고 자기가 그러한 무술을 가지고 있는 척을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푹 썩어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썩어서 아주 흔적이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도 해 갈수록—'내노라'하는 생각, '나는 이렇게 참선을 잘했다 잘하고 있다'는 생각, '나는 참선을 해서 한 소식을 했다' 그래 가지고 그런 것을 그러한 얻었다고 하는 생각, '깨달랐다'고 하는 생각,

'나는 참선을 깨닫지는 못했어도 30년을 했다'고 하는 그러한 밥그릇 수를 따져서 자기가 으시대고 새로 공부하는 사람을 갖다가 자기가 오래했다고 하는 그것으로써 짓이기고 욱박지르고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참선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오래할수록 참으로 바르게 한 사람이라면 아무 냄새가 나지를 아니하고 더욱 겸손하고 그 마음은 허공과 같이 맑고 깨끗하고 조용할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지어 나가는 사람은 30년을 했건 10년을 했건 또는 공부를 시작한지가 불과 1년 밖에 안 되었다 하드라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진실하게 참되게 닦아 간 사람은 그 사람이 참으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닦아 가야만 도업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깨닫고서도 깨달랐다고 하는 각견(覺見)이 없어져야 그 사람은 바로 깨달은 사람인 것입니다.

하물며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깨달은 척하고 으시대고 뽐낸다고 해서 그것이 어디다 쓸 것이여.(19분14초~28분2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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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

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동업(同業) ; 동일한 부류의 업(業). 동일한 과보를 받는 원인이 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삼업(三業) : trini karmani  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동 전체를 말한다.

몸으로 짓는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세 가지와, 입으로 짓는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네 가지와, 뜻으로 짓는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의 세 가지가 있다。이것이 삼업이다.

*생사고락(生死苦樂) ; 삶과 죽음, 괴로움과 즐거움을 통틀어 이르는 말.

*화택(火宅) ; 번뇌와 괴로움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불[火]에 타고 있는 집[宅]에 비유한 말. 불길에 휩싸인 무서운 세계. 법화경에 나오는 「三界無安猶如火宅」라는 구절에 근거.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과거시험(科擧試驗 예전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리 채용 시험 제도로서 보는 시험)을 보는 장소에서 유추된 말이다.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선당(禪堂) · 승당(僧堂) · 선방(禪房) 등을 가리킨다. 수행자들이 선방에서 좌선하여 도를 깨달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참고]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4권 「단하천연전(丹霞天然傳)」

鄧州 丹霞天然禪師不知何許人也 初習儒學 將入長安應擧 方宿於逆旅 忽夢白光滿室 占者曰 解空之祥也 偶一禪客 問曰 仁者何往 曰 選官去 禪客曰 選官何如選佛 曰 選佛當往何所 禪客曰 今江西馬大師出世 是選佛之場 仁者可往 遂直造江西

 

등주 단하천연선사는 어느 곳의 사람인지 모른다. 처음에 유교를 배워서 장안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길에 여관에서 자다가 홀연히 밝은 빛이 방에 가득차는 꿈을 꾸었다. 이에 점치는 자가 '공을 터득할[解空] 상서로운 조짐이다'라고 풀었다.

 

우연히 어떤 선객(禪客)이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 '관리 뽑는 시험을 보러 갑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선객이 '관리 뽑는 시험이 어찌 부처 뽑는 시험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단하가 '부처 뽑는 시험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선객이 '지금 강서(江西)에서 마조대사가 출세 했습니다. 그곳이 부처를 뽑는 시험장[選佛之場]이니 그곳에 가보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말을 듣고 그길로 강서로 갔다.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4분 48초)

[참고 ❸] 송담스님(No.401)—1989년 11월 첫째일요법회.

이제 가을도 가고 겨울철에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음력 10월 보름에 겨울철 안거(安居)가 시작이 됩니다. 보살님네는 뒤로 미루지 말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다 보면 한량이 없습니다. 탁! 큰 마음을 내서 결단심을 내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또 이 한 철을 열심히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에 새로 선방(禪房)을 확장을 했으니 어찌던지 와서 정진을 잘 하시길 바라고,

부득이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접 나와서 공부를 못하신 보살님네, 거사님네들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 속에서 항상 '바로 있는—발 디디고 서 있는 그 자리, 앉어 있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뭣고?」만 탁 들면 벌써 용화사 선원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용화사에 방부를 들이고, 와서 큰방에 앉어 계셔도 밤낮 여기 앉어서 집안 생각, 아들 생각, 딸 생각 그러고 있으면은 그건 방부 들이나마나 하는 거고.

댁에 계시더라도 항상 「이뭣고?」를 들고 일 하다가도 퍼뜩 챙기고, 앉어서 챙기고, 서서 챙기고, 밥 먹으면서 챙기고, 똥 누면서 챙기면은 바로 집이 용화사 선원이거든.

 

시간도 공간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척지간(咫尺之間)이 수천 리, 수천 리가 지척이 되는 것입니다. 백년 천년 하면 긴 것 같지마는 일 찰나간이고, 일 찰나간이 잠깐인 것 같지마는 이것이 바로 무량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법성게(法性偈)」를 외우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거든. 이것은 진리에 입각해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래.

 

둘이 나란히 한집에서 한 이불 속에서 자도 벌써 생각이 틀어져 버리면은 천리(千里)거든. 부부간도 천리 웬수여. 저 천리 밖에 떨어졌어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고 있으면은 벌써 부부일신(夫婦一身)이거든.

 

시간과 공간을 그것이 또 다른 것이 아니야. 시간이고 곧 공간이고, 공간이 시간이거든.

공간 없는 시간이 없고 시간 없는 공간이 없어. 시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공간이고 시간과 공간은 베의 날과 씨가 서로 이렇게 짜여져서 베를 짜듯이 시간과 공간도 역시 마찬가지여.

 

그래서 어느 때, 어느 시간 무엇을 하실 때라도 항상 화두를 들고, 화두 하나만을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저 딱 화두를 거각(擧却)하면 그 자리에는 부처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는 모든 조사(祖師)가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입승(立繩) 스님이 탁! 죽비를 들고 앉아 있는 자리다 그말이거든.

 

그러니 입승 스님이 죽비를 들고 앉아 있고, 조실 스님이 탁! 지켜보고 계시고, 모든 조사 스님이 그 자리에 계시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자리에 계시는데 어느 곳이 선불장(選佛場)이 아니겠습니까?(54분57초~59분45초)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학인(學人) ;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요달(了達 마칠·완전히·밝을 료/통달할·이룰 달) ; ①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밝게 통달함. ②깨달음에 도달하다.

*분상(分上 분수 분/윗 상)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참고] 분(分) : 분수(分數 -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상(上) : ①‘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②‘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예) 정진하는 분상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분별지(分別智) ; 생멸 변화하는 물심(物心)의 모든 현상을 분별하는 지혜.

범부(凡夫)의 지위에서는 허망하게 헤아리며 분별하는 망상이며, 불지(佛地)에서는 방편을 발휘하는 후득지(後得智)이다. 범부의 허망한 분별을 떠나면 무분별지(無分別智, 근본지根本智)와 상응하게 되는데, 이것이 근본적인 진실한 지혜이다.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후득지(後得智) ; 근본지(根本智)에 이른 후(後)에 얻는[得] 지혜(智慧)라는 뜻.

모든 분별이 끊어진 경지에 이른 후에 다시 차별 현상을 있는 그대로 확연히 아는 지혜. 모든 번뇌와 망상이 끊어진 깨달음을 이른 후에 다시 온갖 차별을 명명백백하게 아는 지혜.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혜명(慧命) : 지혜를 생명에 비유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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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千手) ; 천수경(千手經). 관음신앙을 구체화하기 위해 엮어진 경으로, 현재 사찰에서 독송하고 있는 천수경의 구성은 천구백년 이후에 갖추어진 것이다.

천수경은 한국불교 신앙의례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경전으로, 천수관음(千手觀音)의 공덕을 찬탄하고 그에게 귀의하여 참회하고 발원하는 글과 진언(眞言)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근실근실하다 ; 가려운 느낌이 자꾸 나다.

*각견(覺見) ; 깨달음[覺]에 집착하는 견해. 불법은 모든 속박을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인데, 그 깨달음[覺]에 집착하여 반대로 또 하나의 속박을 초래하는 것을 경계하는 용어. 모든 견해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는 선종의 입장을 반영한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