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에서는, 아래 법문이 위 유튜브에서 19분 23초부터 시작됩니다>

 

§(364) ‘이뭣고?’했을 때 그 남는, 알 수 없는 그 의심을 관조해야 / 머리털에 붙은 불 끄듯이 화두를 들어라 / 사량분별로 따져 갖고 알아지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도학자(道學者)는 사량복탁 하는, 사량분별심으로 공안을 따지는 것을 부모를 죽인 웬수처럼 알아 여겨야 헌다. 사량복탁을 아주 부모 죽이는 웬수처럼 생각하고 잠깐 동안도 사량복탁을 허지를 말어라. ‘이뭣고?’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 꽉 맥힌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

 

**송담스님(No.364)—88년 8월 첫째일요법회(88.08.07) (용364)

 

약 15분.

 

‘참선, 참선’ 다 좋은 줄 다 알고 참선(參禪)이야말로 우리 불법 가운데에 최고의 수행 방법이고, 참선만 옳게 그리고 열심히 하면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가 있다. 이거 다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것을 다 인증을 하지마는, 견성성불한 사람이 그렇게 우리 눈 앞에 흔치 않은 것은 무엇이냐?

 

그 번뇌(煩惱) 망상(妄想), 그놈을 어떻게 다스리고 그놈을 어떻게 그놈을 타고 넘어서 그 속에 있는 무진장(無盡藏)의 보배를 캘 수가 있느냐?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

 

번뇌 망상,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그 번뇌 망상 그걸 버릴려고 해서는 도저히 안 돼. 그놈을 없앨랴고 해도 안 돼. 그렇다고 해서 그놈에 마냥 그놈에 빠져 가지고 있어도 안 돼.

그 일어나는 번뇌 망상의 끊임없는 그 파도를 잘 타고 넘으면서 거기에서 그 번뇌의 바다 속을 헤쳐 가지고 결국은 거기에서 지혜의 보배를 얻는 것이여.

 

일어나는 대로 나둬. 어떻게 바다에 가서 그 파도를 없앨라고 해봤자 그 없어지겠습니까?

파도를 없애기 위해서 아무리 몽둥이로 팬들 그 파도가 없어질 리가 없어. 오히려 더 파도가 일어날지언정 없어질 리는 없어.

 

일어나는 파도를 고대로 놔두고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 탁!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알 수 없는 대의단(大疑團)을 관조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화두를 이 생각을 ‘이뭣고’—화두를 생각하는 것과 화두를 거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러요.

‘이뭣고’ 자꾸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허듯이 ‘이뭣고, 이뭣고’ 자나깨나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하면서도 ‘이뭣고’ 밤낮 그렇게 허라고 권고는 합니다마는 그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하거든.

 

화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뭣고, 이뭣고’ 아무 의심도 없이 그냥 막연하게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만 밤낮 생각해봤자, 그것이 백천만 겁을 무량겁을 그놈을 생각허고 있어 봤자, 그것이 어떻게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냐 그말이여.

 

‘이뭣고?’ 알 수 없는 간절한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그 알 수 없는—‘이뭣고?’했을 때 그 남는, 알 수 없는 그 의심을 관조해야 하거든.

 

그 의심을, 간절한 의심을 관조허는 데에서, 거기에서 그 의심이 점점 간절해지고 점점 의심이 더 깊어지고 그 의심이 점점 커져서 더이상 의심이 커질래야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래야 간절할 수가 없이, 그래 가지고 화두를 들면 있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은 간 곳이 없어져 버리고 이런 것이 아니라,

자꾸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해서 자꾸 하다보면, 간절히 일구월심(日久月深) 하다보면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생각을 내서 들라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된 때가 온다 그말이여.

 

그때는 화두를 안 들어도 의단이 턱! 앉으나, 서나, 누웠으나, 일을 할 때나, 차를 탈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의단이 독로허게 되거든. 좀 잊어버리고 딴 생각을 좀 헐려고 해도 안 되는 것여.

이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어떠한 경계에 가서 그놈이 툭! 터지게 되는 것이거든.

 

 

‘도불가수유리(道不可須臾離)니, 도(道)라고 하는 것은 잠깐 동안도 여의지 못할 것이니, 가히 여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니라’ 고인이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도라고 허는 것은 잠깐도 여읠 수가 없는 것이여. 여읜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여.

화두도 의심이 잠깐 있다가 없다가 밤낮 그러면은 그것은 참다운 의심이 아니여. 진의(眞疑)가 아니여. 그것은 주작(做作)이여. 억지로 지어서 들 때는 잠시 있고 금방 의심이 없어져 버리고 이런 것은 그것은 참의심[眞疑]이 아니여.

 

어떻게 허면 참의심[眞疑]이 돈발(頓發)허냐? 신심. 신심(信心)과 분심(憤心). 분심이 밑바탕이 되어야 거기에서 참다운 큰 의심이 거기서 나는 것이여.

 

그래서 어떻게 허면은 그 신심과 분심이 일어나냐 하면은, 마치 이 눈썹에 불이 붙은 것처럼 또 머리털에 불이 붙어서 타고 있을 때처럼.

눈썹에 불이 타고, 불이 머리에 붙어 덩겨 가지고 불이 훨훨훨 타고 있는데, 그런 경우를 만나서 어떤 사람이 그 머리와 눈썹이 타고 있는 것을 놔두고 다른 급한 일을 있다 해 가지고 다른 데에다 생각을 쓸 겨를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자녀가 있다 하더라도 곧 죽는다 해도, 지금 곧 저 방에서 죽어가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 머리에 붙은 불버텀 훽 꺼버리고 끄고서 그리 쫓아가지, 자기 불이 훨훨 타는 것을 놔두고 ‘아들 죽을라고 하는 데 먼저 가보자’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있을 수가 없어.

 

도를 닦는 것이, 우리가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할 때에 있어서 마치 눈썹에 불이 덩기고 머리털에 불이 덩근 것처럼 그것을 끄듯이 화두를 들어라.

 

언제 어디서라도 화두를 들어! 화두를 들고서, 간절한 의심으로 화두를 들고서 남편도 생각하고 아들도 생각하고 살림도 생각하고 사업도 생각을 해야 해. 일차적으로 자기 머리털에 불부텀 끄듯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허드라도 화두부터 들고 따져라 이거거든.

이렇게 허지 않고서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자기를 이 생사(生死)의 불구덩이에서 구제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부허는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해태(懈怠)허지 말 것이니, 중국에 자명초원(慈明楚圓) 선사는 저녁에 잠이 오면은 송곳으로써 무릎을 찌르면서 잠을 깨와 정진을 하고, ‘고인(古人)네는 도를 위해서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대관절 나는 이 무슨 사람이냐?’

‘과거에 모든 선지식(善知識)과 불보살은 진즉 이 생사 문제를 요달해 가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 해서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나는 대관절 어떠한 인간이기에 무엇이길래 오늘날까지도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지 못하고 이렇게 그럭저럭 지낼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자기를 꾸짖고 고인에 견주어서 용맹심을 내면서 정진을 했어.

 

이러헌 마음가짐으로 하루 하루를 단속해 나가고 1시간 1시간을 단속해 나간다면 어찌 신심이 돈발하지 아니하며, 어찌 분심이 돈발하지 아니하며, 어찌 대의정(大疑情)이 돈발허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매우 더워서, 여러분은—모두 다 바다로도 가고 산으로도 가고 강으로도 가는데—이 더위에 이렇게 일요법회에 이렇게 많이 법회에 참석을 해주셨습니다.

구태여 이러헌 경책의 말씀을 누누이 해 드릴 필요도 없이 진정 여러분은 이 법당 안에 더운 속에서 더운 줄도 모르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 보잘것없는 사람으로부터 들을 것도 없는 소리를 그래도 열심히 듣고 계십니다. 그러헌 신심이면 반드시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공부를 지어 가는 데 있어서 의근하복탁사유(意根下卜度思惟), 사량 분별심으로 이리저리 공안을 따지고 이치를 따지고 이러헌 것을 허지 말어라.

중생심으로 아무리 이리저리 따져 봤자 그래 가지고 따져 가지고 아무리 그럴싸한 어떠헌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침내 중생의 소견(所見)이지 참다운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량복탁(思量卜度), 공안을 따져.

자꾸 이 선지식이 “일러라!" 어떤 공안을 내놓고 “한마디 일러라! 당장 앉은자리에서 해결을 해야 해. 바로 일러야지, 이르기 전에는 잠도 자지 말어라” 이렇게 막 다그치니까, ‘이걸 한번 이것을 내가 한마디 이르고야 말겠다!’해 가지고 밤새 잠을 안 자면서 사량분별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따져보고.

 

그렇게 사량분별로 따져 갖고 되는 것이 아니야! 절대로 따져서 알아지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알아질 수는 있을런가 몰라도, 알아진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생 소견이지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이 생사 문제가 급허고 이 공안 타파가 급하다 하드라도 급할수록에 바른 방법으로 참구(參究)를 해나가야지, 중생의 사량분별 사량복탁으로써 이것을 따져 가지고 무슨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따져 가지고서는 공부가 조끔도 나아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또 참다운 의정도 거기서는 나지도 아니한 것이여. 참다운 의정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깨달음은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유복탁(思惟卜度)하는 이 네 글자는 바른 신심을 막아버리고, 바른 수행을 막아버리고 겸해서 도(道)의 눈[眼]까지도 가리워 버리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도학자(道學者)는 사량복탁 하는, 사량분별심으로 공안을 따지는 것을 부모를 죽인 웬수처럼 알아 여겨야 헌다 그거거든. 사량복탁을 아주 부모 죽이는 웬수처럼 생각하고 잠깐 동안도 사량복탁을 허지를 말어라. 탁!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 꽉 맥힌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 ‘이뭣고?’ ‘이뭣고?’(18분19초~33분3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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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무진장(無盡藏 없을 무/다할 진/감출·곳집 장) ; ①다함이 없는[無盡] 창고[藏]라는 뜻으로 양적 질적으로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 불교에서는 덕(德)이 광대하여 쓰고 또 써도 다함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②배우고 배워도 다함이 없는 무궁무진한 진리. ③무한량으로 많은 재물.

*‘번뇌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그 번뇌 망상 그걸 버릴려고 해서는 도저히 안 돼. 그놈을 없앨랴고 해도 안 돼. 그렇다고 해서 그놈에 마냥 그놈에 빠져 가지고 있어도 안 돼. 그 일어나는 번뇌 망상의 끊임없는 그 파도를 잘 타고 넘으면서 거기에서 그 번뇌의 바다 속을 헤쳐 가지고 결국은 거기에서 지혜의 보배를 얻는 것이여 ;

[참고]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구마라집鳩摩羅什 역) 제8 불도품(佛道品)

是故當知  一切煩惱爲如來種  譬如  不下巨海  不能得無價寶珠  如是不入煩惱大海  則不能得一切智寶

이와 같이 모든 번뇌야말로 여래가 되는 씨앗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유컨대 넓은 바다 밑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무가(無價)의 보주(寶珠)를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번뇌의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곧 일체지의 보배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현장玄奘 역) 제8 보리분품(菩提分品)

又善男子  譬如有人  不入大海  終不能得  吠琉璃等無價珍寶  不入生死煩惱大海  終不能發無價珍寶一切智心  是故當知  一切生死煩惱種性  是如來種性

또 선남자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폐유리 등의 무가(無價)의 진보(珍寶)를 끝내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생사(生死)의 번뇌라는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끝내 무가의 진보인 일체지에 대한 마음을 일으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생사 번뇌의 종성(種性)이 여래의 종성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 ·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도불가수유리(道不可須臾離)니, 도(道)라고 하는 것은 잠깐 동안도 여의지 못할 것이니, 가히 여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니라’ 고인이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74~175.

道不可須臾離(도불가수유리)니  可離(가리)면  非道也(비도야)요  工夫(공부)를  不可須臾間斷(불가수유간단)이니  可間斷(가간단)이면  非工夫也(비공부야)니라  眞正叅究人(진정참구인)은  如火燒眉毛上(여화소미모상)하며  又如救頭然(우여구두연)하나니  何暇(하가)에  爲他事動念耶(위타사동념야)리요

古德(고덕)이  云(운)호대  如一人(여일인)이  與萬人敵(여만인적)하야  覿面(적면)에  那容眨眼看(나용잡안간)이리요하니  此語(차어)가  做工夫(주공부)에  最要(최요)라  不可不知(불가부지)니라

 

도는 잠시도 여의지 못할지니, 가히 여의면 도가 아니요。 공부를 잠시라도 끊이지 못할지니, 끊이면 공부가 아니니라。 진정 참구하는 사람은 마치 불이 눈썹을 태우는 듯하며, 또한 머리에 붙은 불끄듯 할지니, 어느 겨를에 딴 일을 위해서 마음을 움직이리오?

옛 어른이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만 사람으로 더불어 싸운다면 마주 보고 어찌 눈인들 깜짝임을 용납하리요」하니, 이 말이 공부 지어 가는 데 가장 요긴한지라 몰라서는 안되느니라.

*진의(眞疑) ; 화두에 의심이 끊어지지 아니한 것을 말한다.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몽산화상시고원상인(蒙山和尙示古原上人)’에서.

話頭上(화두상)에  有疑不斷(유의부단)하면  是名眞疑(시명진의)니  若疑一上少時(약의일상소시)하고  又無疑者(우무의자)이면  非眞心發疑(비진심발의)라  屬做作(속주작)하니라  是故(시고)로  昏沈掉舉(혼침도거)가  皆入作得(개입작득)하리라

화두에 의심이 끊이지 아니하면 이 이름이 참의심[眞疑]이니, 만약 의심을 한 번 잠깐하고 또 의심함이 없으면 진심(眞心)으로 의심을 발한 것이 아니라 주작(做作)에 속하느니라。이런 연고로 혼침과 잡념이 다 마음에 들게 되느니라.

*주작(做作 지을 주/지을 작) ;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

화두를 들 때 무상(無常)을 느껴 발심(發心)을 해서 의심이 끊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지 아니하고 의심을 한 번 잠깐하고 또 의심함이 없으면 진심(眞心)으로 의심을 발한 것이 아니고 억지로 한 것이어서 주작이라고 한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버텀 ; ‘부터’의 사투리.

*덩그다 ; '불이 붙다'의 사투리.

*승속(僧俗) ; 스님과 스님이 아닌 속인(俗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해태(懈怠 게으를 해/게으를 태)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

*자명초원(慈明楚圓) : (九八七 – 一0四0) 속성은 이(李)씨。광서성(廣西省) 계림부(桂林府) 전주(全州)에서 났다。22세에 출가하여 멀리 분양 선소(汾陽善昭)선사의 회상에 갔었다。분양은 욕설과 세속의 더러운 말만 할 뿐이므로 하루는 정성을 다하여 간 하였더니, 크게 성내어 『네가 나를 비방하느냐?』하고 내쫓았다。초원이 무엇이라고 변명하려는데, 분양이 손으로 그 입을 틀어막았다。그 바람에 크게 깨쳤다.

뒤에 석상산 숭승사(石霜山崇勝寺)와 담주 흥화사(潭州興化寺) 같은 여러 곳에서 교화하니, 법을 이은 제자가 50인이나 되었다。자명(慈明)은 54세로써 입적한 뒤의 시호(諡號)이고, 석상화상(石霜和尙)이라고도 한다.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생사대사(生死大事) ; ①삶과 죽음, 생사(生死)의 큰 일. ②수행을 하여 생사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는 큰 일.

*의정(疑情) ; 의심(疑心).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공부를 지어 가는 데 있어서 의근하복탁사유(意根下卜度思惟), 사량 분별심으로 이리저리 공안을 따지고 이치를 따지고 이러헌 것을 허지 말어라’ ;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77.

做工夫(주공부)호대  不得向意根下卜度思惟(부득향의근하복탁사유)니  使工夫(사공부)로  不得成片(부득성편)하며  不能發得起疑情(불능발득기의정)이니  思惟卜度四字(사유복탁사자)는  障正信(장정신)하며  障正行(장정행)하며  兼障道眼(겸장도안)이니  學者(학자)가  於彼(어피)에  如生寃家相似(여생원가상사)하야사  乃可耳(내가이)니라

 

공부를 짓되 의근(意根)을 향하야 헤아리고 따지지 말 것이니, 공부로 하여금 한 조각을 이루지 못하게 할 것이며 의정(疑情)이 일어날 수 없게 하나니, 사유복탁(思惟卜度) 네 자는 바른 믿음을 막고 바른 행을 막는 것이며 겸하야 도의 눈을 가리우는 것이니, 공부하는 이는 이것을 마치 원수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