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심 자신(自信)2018. 9. 30. 06:50

§(311) (게송)'참선수투조사관~' / 초발심시변정각 / 중생의 번뇌 망상심이 확철대오 할 수 있는 깨달음의 밭. 종자. 참선해서 깨달으면 식(識)이 바로 지(智)로 변하는 것 / (게송) '내여백운래~'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중생의 번뇌 망상심 그것이 바로 우리도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근원입니다. 그것이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 있는 깨달음의 밭입니다. 깨달음의 종자(種子)인 것입니다.

중생심, 그것이 바로 깨닫지 못할 때에는 그것이 식(識)이거든. 전5식(前五識), 제6식, 제7식, 제8식, 이거 식(識)이지만, 참선을 해서 확철대오를 하면은 그 식(識)이 바로 지(智)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식(識)을 여의고 부처님의 지(智)가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식(識)이 깨달으면 바로 부처님의 지(智)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우리 자신이 원래 부처님이었었고, 한 생각 미(迷)해서 우리가 생사윤회는 하고 있지만 탁! 깨달라 버리면 본래 우리가 부처님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가 고해(苦海)라고 우리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에게는 분명 이 세계는 고해입니다. 생노병사가 전부 고해(苦海)입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본래 부처였다고 하는 사실, 우리의 본성(本性)을 깨닫고 보면 고해가 아닙니다. 이 세계가 바로 있는 고대로 극락세계가 되고, 적광토(寂光土) 불세계(佛世界)가 되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고, '중생이다 부처다' 이게 본래 차별이 없는 것이여. 중생이니 부처니 한 것은 이름만 있는 것이지 본래는 똑같은 한 덩어리여.

손바닥과 주먹과의 관계와 마찬가지여. 폈다고 해서 그것이 손이 아니고 무엇이며, 주먹을 쥐었다고 해서 별것이냐? 주먹을 쥐었으나 폈을 때나 본래 손인 것이여.

 

참선을 한 것은 그 중생이거나 부처거나 성현이거나,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거나 천상(天上)에 가 있거나 어디가 있거나 간에 변함없는 자리, 우리의 본성(本性) 자리를 깨닫는 것이 우리 활구참선의 목적이여. 그런데 도(道)를 닦고 견성성불(見性成佛) 하기 가장 좋은 곳이 이 사바세계다.

 

'인간의 생명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하에 믿지 못할 것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육체인 것입니다. 어제 건강했던 사람이 밤새 고인(故人)이 되기도 하고, 오늘 건강했던 사람이 하루 사이에 고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 몸뚱이 있을 때 어쨌든지 열심히, 이유를 붙이지 말고 뒤로 미루지 말고 목숨 바쳐서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송담스님(No.311)—1986년 10월 첫째일요법회 (용311)

 

(1) 약 21분.

(2) 약 19분.

 

(1)------------------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여  대오요궁심로절(大悟要窮心路絶)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전강 조실 스님께서 언제나 읊으시던 게송입니다.

참선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여.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 것이여.

 

우리 본참공안(本參公案), 내가 믿는 스승으로부터 받은 화두, 「이뭣고?」면 「이뭣고?」, 무자(無字)면 무자, 판치생모(板齒生毛)면 판치생모,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면 정전백수자,

어느 화두건 자기가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를 간택을 받았으면 공부가 잘되어 가고, 잘 못되고 한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잘된다고 느껴진다고 해서 공부가 꼭 잘된다고 할 수도 없는 거고, 공부가 잘 안된다고 느껴진다고 해서 그 공부가 잘 못된다고 단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화두가 잘 안 들리고 안정이 잘 안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지를 안 되고 화두가 여일(如一)하지를 않고, 해 갈수록 답답하고 힘이 들고 그런다 해서 그것이 공부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또 뭣한 분은 '화두를 들면 잘되고, 화두를 하면 편안하고 좋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느껴진다고 해서 참으로 그분이 참선이 잘되어 가고 있다고 보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미 스스로 잘되어 간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벌써 그게 잘 못되고 있는 것이고, 해 갈수록 답답하고 알 수가 없고 공부가 잘되는지 못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으나 다못 할려고 애쓰고 있으면 본인은 답답하고 된 것 같지 않지마는 실지는 그 사람이 공부가 옳게 되어가고 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잘되네, 못되네' 그런 생각은 일으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잘된다고 해서 '잘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그게 잘된 것이겠습니까? 벌써 '잘된다'고 하는 망상 속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지.

 

'잘 못된다'고 고민할 것이 없어요. 잘 못된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속에서 윤회를 해 왔으니 그놈을 갖다가 정법(正法)을 믿고 이 활구선(活句禪)을 하려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금방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에 그것이 금방 무엇이 잘될 수가 있겠습니까? 잘 안될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요.

 

그러나 잘 안된 그때에 잘 안된다고 느껴진다고 해서 고민할 것이 없어요.

안되면 또 화두를 들고, 안되면 또 화두를 들고, 화두가 달아나 버리면 또 추켜들고 또 거각(擧却)하고, 그렇게 해 나가면—그렇게 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게 애써서 해 나가다 보면 결국은 되는 때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이 일요법회가 끝난 다음에 화두를 신청하신 분, 또 불명(佛名)을 신청하신 분, 또 오계(五戒)를 신청하신 분이 다 함께 다시 법요식(法要式)이 있겠습니다마는.

 

이 참선을 한번 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그 마음 내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 마음 한번 내서 발심(發心)을 하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했습니다. 처음 마음 발(發)할 때가 문득 정각(正覺)이다. 발심 탁! 할 때가 벌써 바른 깨달음을 얻은 때다 그거거든.

 

우리는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 모든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과 같은 그런 모든 대승보살(大乘菩薩), 역대조사(歷代祖師) 참 수많은 이 깨달음을 얻은 성현들이 계시지마는, 그 성현들이 원래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습니다. 또 우리도 과거 무량겁 전에는 부처님과 똑같은 본래 우리도 부처님이였었어.

 

그래서 한 생각, 처음 한 생각 탓으로 해서 불보살이 되고 성현이 되신 분도 있고, 한 생각 미끄러져 가지고 무량겁을 윤회하는 중생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한 생각 바로 잡으면 우리도 성현의 지위에 들어가게 되고.

 

'이 활구참선이 재미가 없다. 어렵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는 늙었다, 나는 여자다, 나는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하다, 나는 몸이 약하다' 또는 '세속 생활이 바쁘다, 나는 죄가 많은 사람이다' 이리저리 각각 자기 나름대로 그러한 이유를 붙여 가지고 자포자기를 해.

'나는 참선은 못하고, 기도나 하고 염불이나 하고 경이나 읽어서 업장(業障)이나 소멸(消滅)을 해 가지고. 아미타불이 나를, 내가 숨 끊어질 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나를 데리러 오실 것이다. 그때 그 배를 타고 극락(極樂)에 가야지,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참선을 해 가지고 확철대오를 하랴' 이렇게 자포자기를 하면 영겁을 두고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 근기 따라서 여러 가지 방편설(方便說)을 설하셨습니다마는 구경(究竟)에 가서는 그러한 당신께서 설하신 방편법에 떨어지지 말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에 부탁하신 말씀은 그 정말 그 한마디가 우리 중생을 위해서 눈물겹도록 뼈에 사무치는 그 말씀을 남기셨는데, 그 말씀은 귀담아듣지 아니하고 부득이해서 설하신 방편법에만 떨어져 가지고 스스로 이 최상승법에 들어오기를 두려워하고, 저 문전에서 서성대고 맴돌다가 담 밖에서 그리고 기웃기웃하다가 그리고 겁이 나서 돌아가 버리고.

남 따라서 한번 들어와서 요 들어보고는 별로 재미가 없으니까 그만 두고, 여기저기 다른 데로 방황을 하면서 부처님의 참 부득이해서 설하신 방편법에 빠져 가지고 최상승법에 들어오지 못한 그런 안타까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음을 생각할 때 참 가슴 아프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여러분은 최상승법, 일승법, 대승법,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어디에다 근본을 두었냐 하면은 중생심에다가 근본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심(衆生心),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중생의 번뇌(煩惱) 망상심(妄想心).

눈을 떠 있을 때에는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코를 통해서, 입을 통해서, 몸뚱이를 통해서 또는 생각을 통해서 일분일초도 쉴 사이 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졌다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중생의 번뇌 망상심, 그리고 잠잘 때는 몸뚱이는 가만히 누워 있는데 꿈을 통해서 그 잠재의식이 끊임없이 활동을 합니다.

 

그리하면서 한평생을 살다가 또 몸을 바꾸어서 어디엔가 또 태어나 가지고 또 한평생을 살고 이리 지내는데, 그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중생의 번뇌 망상심 그것이 바로 우리도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근원입니다. 그것이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 있는 깨달음의 밭입니다. 깨달음의 종자(種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그 제8식(第八識)을 여래장(如來藏)이라 그러거든. 여래(如來), 여래가 그 속에 소장이 되어 있다. 여래가 그 속에 갈무려 있다. 그래서 여래장이라고 그러거든.

 

중생심, 그것이 바로 깨닫지 못할 때에는 그것이 식(識)이거든. 전5식(前五識), 제6식, 제7식, 제8식, 이거 식(識)이지만, 참선을 해서 확철대오를 하면은 그 식(識)이 바로 지(智)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식(識)을 여의고 부처님의 지(智)가,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식(識)이 깨달라 버리면, 중생의 식(識)이 깨달으면 바로 부처님의 지(智)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동안을 하느님을 믿고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교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유일신이고 절대자이기 때문이고, 우리 중생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여.

하나님이 이렇게 진흙으로 만들어 가지고 이렇게 해서 아담과 헤와를 만들어 가지고 거기다 생명력을 불어 넣어가지고 에덴동산에 놔뒀는데, 금단의 과일을 먹은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가지고 그래 가지고 이 세계로 쫓겨나 가지고 그래서 이 자손이 번식한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 예수교에서는 그렇게 말하는데, 그래서 우리 죄 많은 중생이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직접 하나님이 될 수는 없고, 천당에는 갈 수가 있다 그러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우리 자신이 원래 부처님이었었고, 한 생각 미(迷)해서 우리가 생사윤회는 하고 있지만 탁! 깨달라 버리면 본래 우리가 부처님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가 고해(苦海)라고 우리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에게는 분명 이 세계는 고해입니다. 생노병사가 전부 고해(苦海)입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본래 부처였다고 하는 사실, 우리의 본성(本性)을 깨닫고 보면 고해가 아닙니다. 이 세계가 바로 있는 고대로 극락세계가 되고, 적광토(寂光土) 불세계(佛世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여러 가지 종교가 있습니다. 내가 다른 종교가 나쁘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불교의 진리가 얼마나 높고 얼마나 깊고 얼마나 위대하다고 하는 것을 내가 말하고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우리 불자(佛子)가 우리 불법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확실히 알지 못하면 우리가 불법을 참으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불법의 위대함을 잘 모르고 그 방편에 빠져서 기복(祈福)이나 하고, 중생의 욕구를 충족하는 방편으로 불법을 믿고 이리 하다가 무엇이 뜻대로 잘 안되고 장사가 잘 안되고 하면 그냥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불법이 참으로 위대하고, 그 위대한 불법이 어째서 위대한 것인가를 우리는 잘 알아야 하고, 그것을 안다면 올바르게 믿고 실천하게 되고 퇴태(退怠)할라야 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어디 무슨 개종을 하다니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다른 종교를 믿다가 불교로 돌아오는 것은 그것은 당연한 것이여. 다른 종교는 우리 부처님의 법에 비추어서 보면 천만분의 일도 못되는 그런 아주 옅은 방편법 한두 가지를 교리로 삼고 거기에 의지해서 모다 종교 생활을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 내에는 세계에 모든 종교의 교리가 불교 안에는 다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는 우리의 이 높고 넓고 깊은 이 불교를 표용할 수가 없습니다. 끝없이 넓고, 밑 없이 깊고, 한량없이 높기 때문에 다른 종교는 우리 불교를 표용할 수가 없습니다.

 

산간의 계곡에서 이쪽 계곡에서 저쪽 계곡으로 날아가고, 저쪽 언덕에서 요쪽으로 날아다니는, 산에는 그 시내를 중심으로 해서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이리 파르르르 날으고, 저기서 요리 파르르 날으고 하는 그런 산새들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모다 밤톨만한 산새들이 있는데, 그런 산새는 압록강이나 또는 양자강 또는 황하 같은 그런 큰 강이 있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저런 큰 강에 사는 큰 새들이 있습니다. 오리라든지 두루미라든지 그런 새들이 있는데, 그 뱁새와 두루미나 갈매기 같은 그런 새들이 만나 가지고 뱁새한테 그런 압록강이나 황하나 양자강 같은 그런 넓은 강이 있다고 하는 것을 얘기를 해 주어도 뱁새는 믿지를 않습니다.

믿지 않고 '미친놈, 다리만 기다란한 것이 소가지 없이 그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도대체 그런 키 크고 속없다드니, 어디가 그런 것이 있느냐? 지금 내가 여기 살고 있는 그 시내 계곡보다 더 큰 계곡이 어디가 있느냐?' 도저히 믿지를 않습니다.(20분33초~41분28초)

 

 

 

 

 

(2)------------------

 

양자강이 넓고 황하가 넓다 하지마는 정말 태평양 같은 바다, 이러한 바다가 있는 것을 또 알지를 못합니다. 바다를 건너는 그런 이 새, 바다를 지나보는 새 앞에는 바다 얘기를 해 봤자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 바닷가를 가보지 아니한 사람은 바다가 정말 끝없이 넓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 불법을, 이 대승법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한 사람이 아니면 불법의 위대성은 참으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경이 좋다하니까 경을 부지런히 독송을 하고, 염불이 좋다니까 염불을 열심히 하고, 주문이 좋다니까 주문을 열심히 외우고, 또 '무슨 기도를 열심히 하니까 소원을 성취했다, 병이 나았다, 재수가 대통했다'

이러한 식으로 불법을 믿는 사람은 이 활구참선, 앞도 뒤도 없고 머리도 꼬리도 없고 도대체 어디다 어떻게 손을 내려야 할지 분간할 수 없는 이 활구참선은 그 믿어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정말 믿어지기가 어려운 것이여. 들어도 믿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정말 이 활구참선법이 철저하게 믿어지고 그곳을 향해서 목숨을 바쳐.

내가 금생에 확철대오를 못하면은 마지막 죽는 그 찰나, 숨 딱! 끊어질 그때까지도 '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하면서 숨이 딱! 끊어지도록. 이렇게 되어버려야 하거든.

 

'아! 내가 3년을 해도 이렇게 깨닫지를 못하고 아마 내가 이 참선을 잘못한 게 아니냐? 이거 내가 참선에 인연이 없는 것이 아니냐? 나 같은 죄 많은 것이 공연히 진즉부터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부를 것을 괜히 이거 참선 한 것 아니냐? 지금이라도 이것 그만두고 아미타불을 할까? 내가 죽을 날이 멀지 아니한데 아미타불을 불러놔야 숨 끊어지자마자 아미타불이 반야용선(般若龍船)을 가지고 나를 데리러 오실 텐데' 이렇게 생각이 흔들려.

이거 신심(信心)이 철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투철해 버리면 어디에 가서 마음이 흔들릴 것입니까?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고, '중생이다 부처다' 이게 본래 차별이 없는 것이여. 중생이니 부처니 한 것은 이름만 있는 것이지 본래는 똑같은 한 덩어리여.

손바닥과 주먹과의 관계와 마찬가지여. 폈다고 해서 그것이 손이 아니고 무엇이며, 주먹을 쥐었다고 해서 별것이냐? 주먹을 쥐었으나 폈을 때나 본래 손인 것이여.

 

또 물이 백 도가 되면은 수증기가 되고, 섭씨 영 도가 되면은 고체가 되는데, 고체가 되어서 얼음이 되었을 때나 그놈이 녹아서 물이 되었거나, 또는 그놈이 수증기가 되었거나, 그 물이 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그 습성(濕性)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거여.

다만 그때 상황 되어서 기체가 되기도 하고 또 액체가 되기도 하고, 고체가 되기도 한 것뿐이지 물의 본성은 변함이 없는 것이여.

 

이 참선을 한 것은 그 중생이거나 부처거나 성현이거나,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거나 천상(天上)에 가 있거나 어디가 있거나 간에 변함없는 자리, 우리의 본성(本性) 자리를 깨닫는 것이 우리 활구참선의 목적이여.

그런데 도(道)를 닦고 견성성불(見性成佛) 하기 가장 좋은 곳이 이 사바세계다.

 

천당, 참 좋지요.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다 되고, 일체의 괴로움이 없어. '먹고 싶다'하면 벌써 배가 불러져 있고, '보고 싶다'하면 그것이 눈앞에 와 있고, '가고 싶다'하면 벌써 그 현장에 가서 있는 것입니다.

일부러 걸어가고, 일부러 무엇을 입을 통해 먹고 그런 게 아니에요. 하나에서부터 백 가지가 한 생각 딱! 내면 벌써 그것이 이루어져 갖고 있는 것이여. 전부가 다 내 마음대로여.

 

그렇게 편하고 좋고 그러나 그 낙(樂) 받느라고 도 닦을 필요도 느끼지도 않고 도도 닦을 수가 없어. 그러니 거기에 있으면 참 기가 막히게 좋은 건 사실이나, 영원히 그곳에 있게 된다면 또 별문제인데.

거기는 이 지구보다 대단히 그 시간이 깁니다. 지구의 몇백 년이 거기에 하루 낮이 되기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러서 낙(樂)을 받게는 되겠지만 그것도 끝이 있어서, 한도가 있어서 자기가 지은 복만큼 그 낙을 받아 버리면 또 다시 뚝 떨어져서 인도(人道)에 떨어지기도 하고, 축생에 떨어지기도 하고, 또 아수라나 아귀나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 정법을 믿는 사람,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천당 그렇게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가 봤자 영원성이 없고, 그까짓 좀 편하고 좋으면 뭐하는 거여 그게. 여러분도 편한 생활을 지내보신 분은 알겠지만 별로 재미가 좋지 못합니다.

 

그리고 지옥이나 축생은 너무 고(苦)가 많아요. 지옥은 너무 고가 많아서 거기서는 또 도를 닦을 수가 없고.

축생은 배불리 먹으면 좋고, 또 다 인간과 같이 이성 간에 새끼도 낳고 모다 그럭저럭 그렇게 사는데, 그건 귀가 뚫리지를 못해 가지고 법문을 들을 수가 없어. 축생계는 항상 공포와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은 것이요.

 

인간세계는 고(苦)도 있고 낙(樂)도 있고 그래도 이 귀가 있어서 정법을 들을 수도 있고, 법문을 들어서 우리도 확철대오를 해서 견성성불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불리 먹은 것으로써 행복의 구경(究竟)을 삼고, 좋은 옷 입은 것으로써 낙(樂)을 삼고, 명예나 권리 누린 것으로써 출세를 삼고서 그런 정도의 인간밖에는 안되고, 확철대오를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는 도리를 믿고 실천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뽐낼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짐승이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배불리 먹고, 좋은 옷 입고, 호강하고 부귀공명 그런 것이 인생의 전부인줄 믿고 그것을 목표로 하고 일생을 그렇게 살다 말아 버린다면—개도 주인 잘 만나고, 서양 같은 데 태어나면은 개도 참 호강하고 산다고 그럼니다. 다 주인과 같이 한 침대에서 자고, 다 끼니 찾아서 고급으로 먹고, 미장원에도 다니면서 개도 화장 다 합니다. 그러면 그 개가 사람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배부르고, 등 뜨시고, 옷 잘 입고 큰소리치고 사는 것이 인간의 구경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구태여 이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지 말고 미국의 개로 태어난다면 그 뭐 천당에 따로 갈 것이 없습니다. 다 차도 맘대로 타고 다니고 비행기도 타고 다니고.

 

인간으로 태어나서 무엇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냐?

우리는 진리와 하나가 될 수가 있어. 진리를 깨달아서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 그래서 그것을 사람이라 그러고, 그것이 그래서 만물지영장(萬物之靈長)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선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시고서 내쉬면서 '이뭣고?' 한마디에 생사해탈이 거기에 있고 확철대오 하는 길이 거기에서 열리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시지 말고, 어렵게 생각하시지 말고, 그저 그렇게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 법회가 끝나고 화두 수여식이 있습니다마는. 그렇게 해 나가시면 스스로 「아! 과연 이 법이 정법이고, 이 법이 활구 최상승법이로구나」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지만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지만 이 우주법계가 전부 내 콧구멍으로 다 드나들게 되고, 전부 내 주먹 안에 다 들어오게 되는 것이여. 이 우주법계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여백운래(來與白雲來)여  거수명월거(去隨明月去)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거래일주인(去來一主人)이  필경재하처(畢竟在何處)오

나무~아미타불~

 

내여백운래(來與白雲來)여. 백운(白雲), 흰구름과 더불어, 올 때에는 흰구름과 더불어 오고,

거수명월거(去隨明月去)다. 갈 때에는 밝은 달을 따라서 가더라.

 

거래일주인(去來一主人)이, 이 오고가고 한, 구름 따라서 오고 명월 따라서 간 이 거래(去來)한 이 한 주인이 필경(畢竟)에 재하처(在何處)냐? 필경에 어느 곳에 있는고?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백운처럼 왔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온 곳은 알 수가 없으나 마치 흰구름이 어디서 일어났는지 일어난 곳도 모르지마는 하늘에 한 덩어리 흰구름이 떠오듯이 이 세상에 우리는 왔습니다. 부모의 몸을 빌려서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평생 살다가 결국은 저 밝은 달이 산너머로 넘어가듯이 우리는 이승을 떠나서 갈 것입니다. 어디로 갈는지는 모르지만 한번 온 사람은 반드시 또 가고야만 마는데, 구름처럼 왔다가 달처럼 가는 이 한 물건이 필경에 어느 곳에 있느냐?

 

'인간의 생명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하에 믿지 못할 것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육체인 것입니다. 어제 건강했던 사람이 밤새 고인(故人)이 되기도 하고, 오늘 건강했던 사람이 하루 사이에 고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 몸뚱이 있을 때 어쨌든지 열심히, 이유를 붙이지 말고 뒤로 미루지 말고 목숨 바쳐서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41분33초~60분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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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 ; ‘참선을 하려면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하고, 오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참고] 『무문관(無門關)』 (무문 혜개 스님) 제1칙 ‘조주구자(趙州狗子)’ .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61. *絶=絕(끊을 절).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정직하고 덕(德)이 있는 벗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이. ②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연(佛緣)을 맺게 하는 사람. ③지식(知識)•선우(善友)•친우(親友)•선친우(善親友)•승우(勝友)라고도 함.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〇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초발심(初發心) ; 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인 보리심(菩提心)을 처음으로 일으킴.

*정각(正覺) ; (산스크리트어)sambodhi. 삼보리(三菩提)라 음역. ①깨달음. 부처님의 깨달음. 바른 깨달음. 진리를 깨닫는 것. ②부처님. 여래(如來). 진리를 깨달은 사람. 정등각(正等覺). 등정각(等正覺). 정등보리(正等菩提).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참고] 송담스님(No.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〇‘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 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정법 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④밀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하나하나의 범자(梵字).

*제팔식(第八識) ;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참고] 〇아뢰야식(阿賴耶識) ;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거주지·저장·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〇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여래장(如來藏) ; 산스크리트어 tathāgata-garbha 본래부터 중생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여래가 될 가능성. 중생의 마음 속에 저절로 갈무리되어 있는 여래의 청정한 씨앗. 중생이 모두 갖추고 있으나 번뇌에 가려져 있는 여래의 성품. 모태(母胎)의 태아(胎兒)처럼, 중생의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는 부처의 성품.

*식(識) ; 오온(五蘊) 중 하나.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세 번째 지분으로 지각(知覺), 요별(了別)의 의미를 갖는다. 대상을 알게 하는 정신적 작용이다.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 · 8식설(八識說) · 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모두 채택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6식설은 그 발생 근거에 따라 6가지 식(識)을 열거 한다.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 등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감각기관인 6근(六根)이, 물질[色] · 소리[聲] · 향기[香] · 맛[味] · 감촉[觸] · 법(法)의 6가지 외부적인 대상인 6경(六境)을 대할 때 생겨나는 6가지 인식작용이 6식(六識)이다.

즉, 눈이 물질을 대할 때 보는 안식(眼識)이 있으며, 귀가 소리를 대할 때 듣는 이식(耳識)이 있으며, 코가 냄새를 대할 때 냄새를 맡는 비식(鼻識)이, 혀가 맛을 대할 때 맛을 감지하는 설식(舌識)이, 몸이 감촉을 대할 때 느끼는 신식(身識)이 있으며, 의(意)가 법(法)을 대할 때 '안다'는 의식(意識)이 있다.

이와 같이, 6근 · 6경 · 6식은 서로 연관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意識)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전오근(前五根), 곧 안 · 이 · 비 · 설 · 신(眼耳鼻舌身)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전5식(前五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은 일종의 감각지각이고, 제6의식(意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각과 언어를 매개로 한 인식 등 두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8식설은 앞의 6식설에 제7 말나식(末那識)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한 것이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밑에서 조절하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으로서, 범부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의식이다. 이 말나식은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번뇌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이들을 제거하면 7식이 맑아져서 아공(我空)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제8 아뢰야식은 일반적으로 장식(藏識)이라고 번역된다. 장식이란 곧 여래를 감추고 있는 식이라는 뜻으로, 비록 중생이 생사 속에 있지만 이 감춰져 있는 여래만은 결코 상실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이 올바로 발현될 때 곧 여래(如來)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제8식에 대한 견해는 불교에 여러 학설이 있다.

*'참선을 해서 확철대오를 하면은 그 식(識)이 바로 지(智)로 변하는 것' ; 전식득지(轉識得智). 수행자가 수행이라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자신의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로 변형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식성지(轉識成智)라고도 한다.

식(識)이 지(智)로 변화되는 것을 전의(轉依)라고 하는데, 전의(轉依)의 뜻은 ‘소의(依, basis) 즉 발동근거를 바꾼다(轉)’로 성도(聖道) 즉 수행을 통해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智)로 변형시키는 것, 즉 질적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轉)은 전변(轉變) 또는 능변현(能變現)의 뜻으로 능동적으로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득(得)은 획득(獲得)과 성취(成就)를 말한다.

 

번뇌에 오염된 중생의 유루(有漏:세속)의 마음인 ‘8식’(八識-전오식, 제6의식,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을 질적으로 변혁하여[轉識得智] 얻은 4가지 무루(無漏:열반)의 청정한 지혜—사지(四智)는 다음과 같다.

 

①대원경지(大圓鏡智) ; 인간의식의 심연에 있는 무명(無明)에 오염된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마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내는 크고 맑은 거울처럼, 제8아뢰야식에서 무명(無明)의 오염이 완전히 제거된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므로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지혜[大圓鏡智]’라고 말한다.

②평등성지(平等性智) ; 인간의 자의식(自意識)에 해당하는 오염된 제7말나식(末那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제7식은 원래 나와 남에 대한 구별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식이므로 여러 가지 차별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일체가 한결같고 평등함을 관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자타에 대한 차별적인 견해를 떠나,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바꾸기 때문에 중생교화를 위한 평등한 지혜[平等性智]가 발현된다는 것이다.

③묘관찰지(妙觀察智) ; 오염된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모든 법(法)의 실상을 묘하게 잘 관찰하여 자유 자재로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어 주는 지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④성소작지(成所作智) ; 눈·귀·코·혀·몸의 5관으로 느끼는, 오염된 전5식(前五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5관으로 행하는 일을 올바로 이루도록 하여, 중생을 이익과 구제하기 위해 여러가지 불가사의한 일을 모두 성취하는 지혜[成所作智]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참고] **송담스님(No.366)—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어(88.08.18)에서.

우리 중생은 그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전5식(前五識)과 6식(六識, 意識)과 7식(말나식), 8식(아뢰야식), 이런 식(識)으로 해서 일생을 살아가고, 식(識)으로 해서 업을 짓고, 식(識)으로 해서 일체 생사윤회를 하는데,

그 일어나는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 이 십팔경계에 있어서 염념불망(念念不忘)으로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 화두가 타성일편이 되고, 그 의단이 독로해 가지고 그것이 툭! 터져 버리면 자성을 깨닫게 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데,

 

그 자기 본래면목을 바로 깨닫자마자, 그 깨닫기 전의 중생의 그 육근, 육경, 육식 그 식(識)이 부처님의 지(智)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지(智)가 딴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식(識)이 찰나 간에 변해 가지고 지(智)로 변하는 것이여. 식(識)이 지(智)로 변하는 것이지, 식(識)이 없어지고 지(智)가 어디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리를 잘 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마음을 떠나서 부처님이 없어. 우리의 중생의 마음을 버리고서 그 부처님이 어디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여. 중생의 마음, 그것이 바로 일념무생(一念無生)하는 도리를 요달해 버리면 거기에서 바로 성불을 하는 것입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퇴태(退怠 물러날 퇴/그만둘·물러설 태)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오는 것. 불교를 믿는 마음에서 물러나 다른 데로 옮기는 것. 퇴타(退墮),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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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용선(般若龍船) ;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반야(船若,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 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영장(靈長) ; 영묘(靈妙)한 능력을 가진 우두머리[長]. 인간을 다른 생물과 대비하여 이른다.

*(게송) '내여백운래(來與白雲來)~'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 휴정 著) ‘곡망승(哭亡僧 스님의 죽음에 슬퍼하며 소리 내어 울다)’ 참고.

*생사재호흡지간(生死在呼吸之間) ; ‘생사(生死)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생사라 하는 것은 멀리 잡을 것이 아니라 하루도 멀고, 한끼도 멀고, 한 호흡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 그렇게 무상하고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생사인 것이다.

*호흡지간(呼吸之間) ; 한 번 내쉬고[呼] 들이쉬고[吸] 할 사이[間]라는 뜻으로, 아주 짧은 시간을 이르는 말.

[참고]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8장’

佛問沙門 人命在幾間 對曰數曰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飯食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呼吸間 佛言 善哉子知道矣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밥 먹을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너는 도를 아는구나”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고인(故人 옛 고/사람 인) ; 죽은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17. 4. 8. 05:36

§(031) 이 참선법(參禪法)은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 아는 것은 깨달은 것과는 다른 것 / 무엇이든지 ()하면 터지는 것 / 법회 때의 청법 질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깨달을  있는 요소는 잠시도 자기를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진리, 이치를 아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뭣고?’하는 그놈을 자기가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의심이 더이상 커지지 못하고 더이상 깊어지지 못하고 더이상 간절할 수가 없을 경지에 도달하면 반드시  의심은 타파(打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면 터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른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전강 스님의 법문에 의지해서 열심히 참선을 한다고 하면은 전강 스님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용화선원에 상주해 계시는 것이고, 언제나 여러분이 ‘이뭣고?’ 드는  찰나에 여러분의 가슴속에 전강 조실 스님은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나를 깨달을  우리는 전강 스님과  몸이 아니요,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과  몸이 아닌 것입니다.

 

**송담스님(No.031)—1976 12 관음재일 법문(76.12.24.) (용031)

 

약 20분.

 

 참선법(參禪法)은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염불을 하기를 주장을 하고, 주문을 외우기를 주장을 하고, 경을 읽기를 주장을 하고, 기도를 하기를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은근히 참선을 이렇게 말을 합니다.

참선이 좋기는  좋지마는 그것은 상근기(上根機)라야   있는 것이지 하근기(下根機),  말세(末世)에 태어난 하근기는 죄가 많고 업이 두터워서 해봤자 되지도 않는다. 그러니 자기가 자기 분수를 알아서 염불을 하는 것이 좋다, 경을 읽는 것이 좋다, 죄가 많으니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참선을 해봐라 어디 되더냐? 잠이 퍼오고 글안으면 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고민이 일어나고 해서  되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 그것을 해봤자 시간 낭비고 까딱하면 미친다. 그러니 참선을 하지 말고 기도를 하면 당장 해보면 알텐데

 

그래서 이리저리 꾀수아 가지고  어디 성지(聖地)로 끌고가서 기도를 시키는데,  시간  시간을 목탁을 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하고 나니까,

앞에 있던 촛불이 둘로 보였다, 셋으로 보였다 또는 하나로 보였다,  가지고 나한테 다가왔다, 그러면서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부처님이 떠억 손을 내밀면서 이마를 만져준 것을 느끼기도 하고,  그냥 금방 꺼졌다.

 

이래 가지고는 ! 그러한 것을  번을 맛보고서는 과연 기도가 좋다. 하고 나니까 밥맛도 좋고 잠이  오고 ! 그것  시간씩 큰소리를 치고 났으니 밥맛 있고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니까 자기는 기도해야지 참선은 안되겄다. 기도가 해보니까 정말 기분이 좋고 신심이 나고 좋더라. 참선은 암만 해봐도 이것이 골치만 아프고, 답답하기만 하고, 양다리는 저리고 쑤시고, 어깻죽지는 아프고 도저히 그것은  짓이 아니다. 이래 가지고 미끄러져 버린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참선은 아무리 그것이 쉬웁고 좋다고 해도, 쉽고 좋다고 해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열심히 할라고 하면 할라고  만큼 그것을 가로막는 많은 마장(魔障)을 당하게 됩니다.

 마장은 나를, 겉으로는 나를 해롭게   같지마는 내가 바른 신심(信心)과 용맹심(勇猛心)으로 열심히 정진으로 밀고 나가면은 그러한 장애들은 오히려 나를 해롭게 하기보다는 나로 하여금 보다  빨리 보다  크게 대도(大道)를 성취허겄게 해주는 좋은 밑거름이요 채찍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 하는 것을 막는 남편이나 시부모나 가족이나 그러한 분들은  공부하는 것을 방해를 치면 칠수록 속으로는     그분을 향해서 절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고마운 은혜로써 남편에게는 자기의 모든 성의를 다해서  받들어야 하고, 자식에게는 훌륭한 부모로서  사랑을 해주어야 하고, 가정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서 주부로서 가장으로서 성의를 다하는 가운데 잊어서는 안될 것은 ‘이뭣고?’

어디를 가나 괴롭고 외롭거나 ‘이뭣고?  ‘이뭣고?’ 그놈을 앞세워서 나간다고 하면은 캄캄한 칠야삼경(漆夜三更)에 등불을 가지고 길을 걷는 거와 같을 것이고, 동서남북을 분간 못하는 일엽편주(一葉片舟)로 항해를 하는데 나침반을 얻은 거와 같을 것입니다.

 

 ‘이뭣고?’ 화두를 가지고 일생을 노력을 한다고 하면은 나를 깨닫는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깨달을  있는 요소는 잠시도 자기를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진리, 이치를 아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뭣고?’하는 그놈을 자기가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참선이나 또는 마음이다, 불성이다, 불교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알고는 있지마는, 아는 것은 깨달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깨닫는 것은 이론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안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훌륭한 것을 알았다 하드라도, 아무리 깊은 진리를 알았다 해도 알았다’고 하는 것은 이론을 통해서 알아진 것이요, 아는 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아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을 알았다 해도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의 결과요, 중생심의 결과는 계속 중생의 업(業)만을 더욱 조장한 것에 지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정도(正道) 들어서서 나를 깨달을  있는 시간을 단축할려면은 알라고 하는 생각을 돌이켜서  맥히는 ‘이뭣고?’로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고 하면은 깨달음은 바로 ‘이뭣고?’   순간에도 있는 것입니다.

 

   번을 말씀을 드려도  맥혀서  수가 없는 , 처음에는 재미도 없고 별로 그렇게 의심(疑心)이 깊이 백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계속 생각 생각이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의 의심을 관조(觀照) 하게 되면은 그 의심이 차츰차츰 의심이 돈독(敦篤)해지고 깊어지고  커져서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되어서 자기의 마음속에도 의심으로 가득 차고, 생활 주변에 모든 것에서도  의심뿐이고,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나무를 보나 물을 보나 일체 사물을 대할  다못   의심으로 가득차게  ,

 

의심이 더이상 커지지 못하고 더이상 깊어지지 못하고 더이상 간절할 수가 없을 경지에 도달하면 반드시  의심은 타파(打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면 터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른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열반(涅槃)하신 뒤에, 그때부터서 이미 조실 스님께 화두를 타고 법문을 듣고 참선하신 분은 더욱 신심이 돈독해지시고,  뒤로 많은 신도분들이 여기서 저기서 새로 많이 오신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조실 스님 계실 때부터서 듣지를 못하고 돌아가신 뒤에 녹음 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나마 듣고서 신심을 내신 것에 대해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좋은 도반 좋은 형제자매를 만난 기쁨을 뭐라고 표현할 도리가 없습니다.

 

원래 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백 년, 이백 년 살아 계실  알고 효도 한번 못했다가, 돌아가신 뒤에사 비로소 부모가 그리웁고 간절한 것을 흔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도 우리가 조실 스님의 은혜를 갚을 길은 얼마든지 있고, 효도를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조실 스님의 법문에 의지해서 열심히 참선을 한다고 하면은 조실 스님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용화선원에 상주해 계시는 것이고, 언제나 여러분이 ‘이뭣고?’ 드는  찰나에 여러분의 가슴속에 조실 스님은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나를 깨달을  우리는 조실 스님과  몸이 아니요,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과  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이 무량겁을 두고 얼마나  정법의 인연을, 좋은 인연을 맺었기에 금생에   법당에서 이렇게 최상승(最上乘) 활구법문(活句法門)을 같이 듣고 같이 공부할  있게 되었겠습니까.

이런 좋은 인연을 절대로 헛되이 놓치지 마시고 금생에   받았을 때에 백만사를  발판으로 하고 그놈을 밑거름으로 해서 열심히 도를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부탁해마지 않습니다.

 

 

이 다음에 법회는 앞으로  일주일 뒤에는 정월 초사흗날부터서 초아흐레까지 일주일 동안 신수기도를 봉행하게 되겠습니다.

원래  법보선원에서는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기도니 불공이니 온갖 의식이 다못 조실 스님 법문 듣고 참선하는  속에 전부를 망라(網羅)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가정이 있고 사회가 있고 국가가 있고 하기 때문에 참선은  본마음으로는 참선을 하지마는, 집안일도 잘되어야겠고 남편도 잘되어야겠고 아들딸들도 잘되어야겠고 집안이 화목하게  살아야겠고 국가도 잘되어야겠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에서 그러한 것들이 원만히 잘되는 것을 바래는 뜻으로,  그러한 것들이 잘되어야 우리가 마음놓고 공부도   있기 때문에, 1년에 한번 정초에 신수기도를 조실 스님 계실 때부터서 봉행을 해왔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사부대중께서도  기도에 성의를 다해서 동참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에 용화사에서 거행되는, 1 동안에 거행되는 법회 종류와   법회 일자 그리고 음력과 양력 그리고  법회가 열리는 요일과 시간에 대해서   동안에 열리는  30회에 걸친 법회를 낱낱이 인쇄를 했습니다.

그날을  망각하고  오신 ,  그날이 법회인줄 모르고 다른 부득이한 약속을 하신 그런 일들이 있어서 법회에 참석을 못하신 그런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종이에다 인쇄를 했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다른 약속을 하실 때라도 언제라도  용화사 법회 날짜를 감안해서 하루 밀리기도 하고 댕기기도 하고 해서,   있으면  법회에 빠지시지 말고 다같이 모여서 다시 조실스님의 법문을 듣고 다시 한번 우리 수행해 나가는 데에 채찍을 가하고 그동안에 닦아온 것을 반성을 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가다듬어 나가는 좋은 기회를 갖도록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가지 말씀을 드릴 것은 이렇게 법당이 점점 점점  법회에 참석하신 도반(道伴)들이 이렇게 많아지셔서 법당이 비좁습니다. 그러나 비좁은 대로 우리는 당분간 이렇게 법회를 진행할 수밖에는 없게 되겠습니다. 그래서 비좁은 만큼   있으면은 질서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처음에 오신 분은   있으면  앞으로 앞줄에서부터 차례차례차례 요렇게  나가도록.

그동안에 보니까 먼저 오신 분은 한사코 꽁무니를 뒤로 빼고 저리 뒤로만 자꾸 앉으실랴고 그러고, 나중에 오신 분은 앉을 데가 없으니까 부득이해서 차례차례차례 해서  나중에 오신 분이  복잡한 사이를 뚫고 나가서 앞에  앉으시게 된다 그말이여.

 

이것은 최상승 활구참선을 하는, 법이 없어도   있는 최고의 법을 수행하는 우리 법보선원의 법보제자(法寶弟子)의 청법(聽法) 질서라고는  수가 없겠습니다.

처음에 오신 분은 차례차례 앞에서부터서 질서 있게   채워서 줄을 잡어서 앉으시면은 나중에 오신 분은 오시는 대로 차츰 차츰 차츰 뒤로 이렇게 앉으시도록. 다음에 오실  앉으실 곳을 뒤에다 남겨놓고 앞으로 앉으신  마음가짐이라야 참선을 옳게 하실 수가 있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뒤에만 앉을려고 그러고 앞에를 앉기를 싫어하시느냐? 아마 앞은 이쁘게 생겼어도 뒤에가 조끔  이쁘게 생겨서 뒤통수를 안 보일라고 뒤로 빠지신가 어쩐가 모르겠으나,  참선을 하시는 분은 앞보다도 뒤가  이쁜 법입니다.

 

그리고  법회에 오시면은  30분 일찍 오셨거나,  시간 일찍 오셨거나 들어오시면은 방석을 깔고 떠억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이뭣고?’를 하고 조용히 법회 시작할 때까지 기다릴  아셔야 되겠습니다.

물론   만에 만났으니까 무슨 문안도 해야 되겠고,  오신데 대해서 반가워서 여러 말씀도 하시고 싶고 하실 말씀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각기 그렇게 해서 쑤군덕쑤군덕하게 되면은  법회장의 엄숙한 분위기가 깨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법당에 들어오시면은 떠억 부처님께 절하고  꽂고 절하시고서  자리에 가서 앉으시되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앉으시고, 한번  자리잡고 앉으셨다 하면은 가부좌를 하고 떠억 손을 이렇게 하고서 30분도 좋고 20분도 좋고 1시간도 좋고 정말 조용하니 엄숙히 정진을 하시는,

그렇게 해서 뒤에 오신 분도 자연히  들어오자마자 엄숙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절하고  앉을  있도록, 이만한 질서는 우리 법보제자는 갖추어져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동안은 제가 이런 말씀을   동안 별로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언제라도 법문을 듣고  듣고 하면은 그러한 조그마한 일은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저절로 되어지리라 하고 그날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비교적  모다 엄숙하니 잘하시고 뒤에 오신 분을 서로서로 자리를 비키면서 앉으라고 권고하고 그러한 많은 정겨운 상황을  왔습니다.

 

 구태여 조그만한 얘기로 말씀하신 것까지 막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장소가 벌써 집에서 나오실 때부터서 여기에 오시고, 오셔 가지고 법문 시작할 때까지,  법문 듣고 공양하시고, 공양하시고 집에 돌아가실 때까지 고대로 그날 하루는 특별 수행일로 그렇게 생각을 하시고  차타고 오실 때도 염염(念念)으로 화두를 들고 오시고, 걸어서 오시는 길에도 그러시고, 공양 잡수면서도 그렇게 하시고 해서,

 

처음 오신 분들이 용화사에 오시면 ‘아하!  여기 용화사 신도들은  이상한 분들이로구나  보기만 하고서 대번에 자기도 엄숙해져서 여기가 바로 내가  닦을 곳이로구나 이렇게 신심이 나도록 그렇게들 주의를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종이는 지금 노나 드리기보다는 앞으로  법요식이 끝나고 나가실 때에 양쪽 문에서  장씩을 노나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어서 법요식(法要式) 진행하겠습니다.(3827~5747)()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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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參禪法)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근기(根機 뿌리 /베틀 )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참고] 송담스님(No.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있는 사람이면,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사람은 바로 정법 시대 사람이요,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여러분은 이미 정법 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말세(末世  /세상 )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 세상,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 세상,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성지(聖地 성스러울 / ) ; ①성()스럽게 여기는 []. ②성인(聖人)이나 ()들과 관련된 신성한 지역. ③성인의 지위. 불보살(佛菩薩) 신성한 경지. 범부지(凡夫地) 상대어.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 ; 완전히 잠이 들지도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정신이 어렴풋한 순간.

*마장(魔障 마귀 /장애 )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 [참고]헤살 : 남의 일이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소소영령(昭昭靈靈)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있다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생사도 없고, 버려야  번뇌도 없다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용맹심(勇猛心) ; 두려움 없이 용감하며 기운차고 씩씩한 맹렬한 마음.

*()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한역. ().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방법. ③무상(無上)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근원. 바른 규범.

*이뭣고(是甚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 ,   ()이다. ‘이뭣고?(이뭐꼬)'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뜻은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뭣고·····?” 이렇게 의심을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  우주세계에 가득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나가면   문제 해결함으로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화두 조금  보고, 안되면   화두   보고, 이래서는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화두 철저히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34~7822) [ ‘참선법 A’ 에서]

*칠야삼경(漆夜三更 옻·검다 칠/한밤중 야/석 삼/밤 시각 경) ; 캄캄하게 어두운 한밤중.

*삼경(三更  / 시각 ) ;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셋째 부분.  열한 시에서 새벽   사이이다.

*일엽편주(一葉片舟  / /얇은 조각 / ) ; [] [] 크기의 얇은 조각[] []라는 뜻으로 자그마한  척의 .

*중생심(衆生心) ; 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해   없는 생각  막히는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없는 의단,   없는 의심에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돈독하다(敦篤-- 도타울 /도타울 ) ; (인정이나 마음이)매우 도탑고 믿음성이 있고 진실하다. *도탑다 ; (정이나 사귐이)깊고 많다.

*염념상속(念念相續) ; 생각 생각이 잊지 아니하고 계속 이어 나가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화두(話頭) 대한 의심(疑心) 관조(觀照) 나가는 ,   없는 그리고  맥힌 의심으로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이상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이상 의심이 커질  없고,  이상 깊을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가슴속이 가득 차고,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때에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때에는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항아리를  돌로 내려치면은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전강 조실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 음사. (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상태라는 .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700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있습니다.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釋迦牟尼). 석가(釋迦) 대한 존칭.

여래(如來) 부처님 10(十號) 하나로 범어 Tathagata(다타가타) ()이다. () 진여(眞如) 뜻이니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 .

 여거여래(如去如來)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망라(網羅 그물 /그물 ) ; 물고기나 새를 잡는 그물이라는 뜻으로, 일정한 범위 안에 널려 있는 것들을 모두 모아서 포함시킴을 이르는 .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 수행하는 . 불법(佛法) 닦으면서 사귄 .

*청법(聽法) ; 불보살(佛菩薩)이나 스승이 설법하는 것을 경건하게 경청함.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책상다리할 /앉을 ) ; 결가부좌(結跏趺坐) 줄임말. 좌선할  앉는 방법의 하나. () 발바닥을, ()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 있다.

*법요식(法要式) ; 불사(佛事 : ,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   행하는 의식.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24) 화두드는 법 / 최상승법 /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것이 생사(生死) / 불보살, 선지식 아닌 사람이 없다 / 중생심이 바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체(體).

대혜(大慧) 『서장(書狀)』에 보면 공부하다가 어려운 역경계가 나타나는 것이 마장이 붙어서 그런 게 아니라 한고비 올라가기 위한 아주 중요한 경계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생사입니다. 그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생사의 연속이 바로 일평생(一平生)이 되고, 그것이 바로 육도윤회(六途輪廻)가 되고, 그것이 무량겁(無量劫)이 되는 것입니다.

 

이 끊임없이 거듭되는 이 생사의 물결 속에서 바로 생사해탈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그 생각이 슬픈 생각이건, 기쁜 생각이건, 또는 노여운 생각이건, 과거의 생각이건,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없애려고 하지 말고, 그 생각에서 ‘이뭣고?’하는 것입니다.

 

발심한 사람,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한 사람이라야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불보살을 친견할 수가 있고, 선지식을 바로 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이뭣고?’하면 그것이 공부인데,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공부가 안된다고 왜 그러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냐. ‘안된다’고 생각함으로써 자기로 하여금 ‘공부 안되는 사람’으로 스스로 낙인(烙印)을 찍는 것이 된다.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

 

떠오르는 그 많은 중생심(衆生心), 번뇌 망상심, 생멸심 그것을 꼭 나쁘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성내는 놈, 슬퍼하는 놈, 기뻐하는 놈, 원망하는 놈, 아퍼하는 놈, 괴로워하고 외로워하는 놈, 이것이 전부 다 진여불성으로부터서 일어나는 한 거동이요 모습일진대, 그 거동 그 모습을 버릴려고 할 것이 없어.
바로 그놈을 계기로 해서 ‘이뭣고?’ 이렇게 들어가면 그것이 바로 자기 진여불성을 찾는 가장 가깝고 빠르고 묘하고 간단한 길이다.  중생의 번뇌 망상심 그놈을 버리고 어떠한 진여불성을 찾아서 깨달으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무량겁을 두고 공부를 한다해도 그 사람은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화두 하나만 제대로 들을 줄 알면 그 사람은 갈 곳이 없습니다. 결정코 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 (세등24)

 

(1) 약 18분.  (2) 약 21분.

 

 

 


(1)------------------

오늘 기미년 삼동(三冬) 결제일을 맞이해서 조실 스님의 공안법(公案法)—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있어서 공안법에 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공안법은 이론으로서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천 칠백 공안이 있습니다.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 칠백 공안인데, 문헌에 오르지 아니한 것을 말하자면 우주법계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전체가 공안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 한 공안, 한 화두(話頭)를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그 한 공안에만 철저하게 실참실수(實參實修) 해 가지고, 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천 칠백 공안, 무량무수의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그러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최상승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입니다.

뒤에 있는 문을 좀 잠깐 열어서 차운 공기가 들어오게 좀 하십시오. 다들 열어 주세요. 확 열어 주세요.


오늘부터서 석 달 동안 결제(結制)에 들어갑니다.
결제 동안은 부모의 부고(訃告)가 오더라도 그 부고장(訃告狀)을 본인에게 보여주지 아니하고 사무실에 보관해 놓았다가 내년 정월 15일에 해제한 뒤에사 그 부고를 본인에게 전할 만큼, 결제 동안에는 그렇게 규칙이 엄격하게 출입을 금하고 목숨을 바쳐서 정진을 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일단 방부(房付)를 들이면은 그래 가지고 방(榜)을 딱 짜고 정진에 들어가면 세상의 모든 인연을 다 끊고 인사로 왔다갔다하는 것을 다 끊고, 오직 생사대사(生死大事) 하나만을 위해서 대중의 규칙을 자발적으로 지키면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짜면 짠 대로 먹고,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먹고, 맛이 있으면 있는 대로 먹고, 없으면 없는 대로 먹고, 오직 의식주 문제는 인연에다 맽겨.

그리고서 밤 9시부터서 그 이튿날 새벽 3시까지 여섯 시간을 제외하고는 일체 잠을 스스로 허락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9시부터 3시까지 정식으로 잘 수 있는 시간이지마는 그동안에 보면 한 시간이라도 덜 자고 공부하고, 2시간이라도 덜 자고 공부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자는 체하고 누웠다가 가만히 일어나서 10시까지 11시까지 다시 일어나서 혼자 공부하는 분도 있고,

새벽 3시에 일어나는 것이 원칙이지만 2시나, 1시쯤 미리 일어나서 옆의 사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미리 일어나서 공부하는 이도 있고, 이렇게 해서 ‘어쨌든지 금생에 결정코 대도를 성취하리라’ 이러한 결심을 가지고 정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만 그럴 것이 아니라 선원 밖으로 외출하는 것도 ‘시내의 병원에 간다, 무슨 일이 있어서 나간다’ 외출하는 것도, 일주문 밖에 나가는 것도 철저히 옛날에 다 그것을 단속을 했던 것입니다.
시내에 어떠한 신심 있는 단월(檀越)로부터서 공양(供養) 청장(請狀)을 받어도 결제 중에는 가지를 아니 하고,

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때까지는 대중적으로 특별히 허용될 때를 제외하고는 일체 경전이나 어록(語錄)을 읽고 보고 하는 것도 허락이 되지를 아니했습니다.

9시부터 3시까지 삼경(三更) 외에는 잠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인사로 왕래하는 일체 출입을 금하고, 또 경전 같은 것을 읽고 하는 그런 것도 허락하지 아니하고,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말이 없다시피,
이렇게 철저하게 공부를 해서 3년을 그렇게 해서 만약에 확철대오를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혀를 빼서 쟁기로 가는 발설여경지옥(拔舌犂耕地獄)에 내가 들어가겠다. 이렇게 몽산(蒙山) 도인께서 맹서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3년을 하면 백발백중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견성(見性)을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증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까 조실 스님 말씀 가운데에도 화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느냐?
참선이라 하는 것은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화두를 어떻게 드느냐? 오직 그 한 점에 도업(道業)을 성취하고 하지 못하고 한 관건(關鍵)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화두는 이론으로써 교리적으로 따져서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론으로 따져서는 아무리 따져봤자 결론이 없는 것입니다.

설사 자기 나름대로 어떤 결론이 얻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 분별심으로 얻어진 것이라 아무리 묘한 답이 얻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욱 중생의 번뇌(煩惱) 망상(妄想)만 치성(熾盛)하게 만든 결과일 뿐,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론으로 따져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따져서 알아맞추는 그러한 참선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참선이요, 의리선(義理禪)이요, 그것은 삿된 참선인 것입니다.
차라리 그러한 참선을 할 바에는 관세음보살 또는 아미타불을 열심히 염송(念誦)하는 것만도 못한 것입니다.


‘이 무엇고?’ 아까 조실 스님께서는 판치생모(板齒生毛),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판치생모 화두를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를 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계신 분 가운데에는 조실 스님으로부터 판치생모 화두를 받으신 분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그분은 천하없는 누가 뭐라 해도 끝까지 그 판치생모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하셔야 할 것이고,
또 시삼마(是甚麽) ‘이 무엇고?’ 시삼마 화두를 하신 분은 시삼마 화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신 분은 정전백수자, 조주의 무(無)자 화두를 하신 분은 조주 무자, 어느 화두를 하던 간에 상관이 없습니다.

무자 화두가 더 좋고, 판치생모가 더 좋고, 시삼마가 더 좋고, 그 공안 자체에 있어서 더 좋고 나쁘고 한 것은 없어.

다못 문제는 자기가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만큼 철저히 믿어지는 선지식, 바로 깨달라서 선지식의 인가(印可)를 받은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그 화두를 받기만 했다면 천칠백 화두 가운데의 어느 화두를 타 가지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화두건 처음부터 한결같이 잘 들리는 화두는 없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잘 들린 듯하다가 얼마 안가서 그렇게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애를 먹고 그러다가, 그 고비를 잘 넘기면서 공부를 지어가면 또 한결 수월하게 되다가, 그렇게 수월하게 계속 잘되어 갔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얼마동안 가다가 뚝 변해 가지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고, 몸이 뒤틀리고 시간이 지루하고 도저히 앉어서 참을 수가 없고, 공부가 더 이상 공부를 지속할 수 없을 만큼 그러한 역경계(逆境界)가 나타나는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부에 마장(魔障)이 붙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분이 있지만, 대혜(大慧) 『서장(書狀)』에 보면 이러한 어려운 경계가 마장이 붙어서 그런 게 아니라 한고비 올라가기 위한 아주 중요한 경계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다가 그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머리가 멍하고, 시간이 지루하고, 앉았을 수도 없고 섰을 수도 없고, 화두를 놓을 수도 없고 들 수도 없고, 이렇게 답답하고 어려운 경계에 도달하거든 조금도 걱정을 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자포자기를 하지 말고, 이것이야말로 앞으로 내가 한 걸음 공부가 나아가기 위한 그러한 중대한 지점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하고,

그런 때에는 가만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가지고 20미터나 30미터, 일직선으로 코스를 딱 정해놓고서 왔다갔다 한 5분 내지 10분을 하면 저절로 머리가 시원해지고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들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또 자리에 가만히 와서 앉아가지고 허리를 쭈욱 펴고서 성성하게 그리고 적적(寂寂)하게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잘 그 마음을 써 가지고 지혜롭게 그 고비를 넘기면 그 다음에는 한결 공부가 수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라 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없고, 오직 한 생각—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한—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오직 그 한 가지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생사대사, 생사대사, 생사해탈(生死解脫), 경전에나 조사(祖師) 법문에 생사해탈 문제가 대단히 거론됩니다마는 대관절 그 생사(生死)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한 생각 일어나는 것’ 그것이 생(生)이요, ‘일어났던 그 한 생각이 없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생사. 생멸(生滅).

그래서 우리는 ‘부모한테 몸뚱이를 받아났을 때 그것이 생(生)이고, 한평생 살다 죽은 것이 그것이 사(死)’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이 몸뚱이를 표준 할 때는 그렇지만,

우리는 이 몸뚱이를 표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나’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하는 그놈, 지금 입을 벌리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놈, 이렇게 하는 말을 들을 줄 아는 그놈, 그것에다 기준을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루 동안에도 수없이 많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것이 바로 생사인 것입니다.


고개를 들고 산승(山僧)의 얼굴을 보십시오. 고개를 숙이고 경건하게 듣는 것도 좋지만, 고개를 숙이고 듣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르 잠이 와서, 졸면서 잠을 자면 이것 재미가 없습니다.
눈을 딱 뜨고, 말을 하고 있는 저의 얼굴을 보면서 들어야 훨씬 더 잘 들리는 것입니다. 보기가 싫게 생겼지만 이 시간에는 불가불 좀 봐 주시길 바라겠습니다.(5분17초~23분16초)




(2)------------------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생사입니다.
그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생사의 연속이 바로 일평생(一平生)이 되고, 그것이 바로 육도윤회(六途輪廻)가 되고, 그것이 무량겁(無量劫)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무엇이든지 어떠한 물건이 이루어지면 한동안 머물러 있다가 그것이 파괴가 되어 가지고 나중에는 없어집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해도 그렇고, 달도 그렇고, 별도 그렇고, 이 지구도 그렇고,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것도 영원불멸한 것은 없습니다. 다 성주괴공(成住壞空)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습니다. 어머니한테 태어났다가 한 살 두 살 먹다 보면은 늙고, 늙으면 죽습니다. 죽으면 10분이 못 가서 10분 뒤부터서는 오장육부가 버글버글버글 썩기 시작해 가지고 결국은 화장(火葬)을 하거나, 땅에다 묻는다 하더라도 한줌 흙이 되고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몸뚱이는 생로병사가 있고, 우리의 마음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습니다.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 잠시 그 생각이 머물러 있다가, 다른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그 생각이 꺼져버립니다. 꺼지자마자 또 새로운 딴 생각이 일어났다가, 잠시 머물렀다가, 또 다른 생각으로 발전해 가지고 결국은 또 그 생각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하기를 무량겁을 해 내려왔습니다.

이 몸뚱이 태어나 가지고 오늘날까지도 그 우리의 생각에 생주이멸, 생주이멸, 생주이멸, 생주이멸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사요, 그것이 앞으로 영겁을 두고 육도윤회 할 근원을 장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염기염멸(念起念滅), 바로 그 생사 속에서 생사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은 길이 있습니다.

생사 속에 나를 맡겨버리면 결국은 나도 생사의 물결 속에 무량겁을 두고 윤회하는 떠돌이 신세를 면치를 못할 것이고, 이 끊임없이 거듭되는 이 생사의 물결 속에서 바로 생사해탈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그 생각이 슬픈 생각이건, 기쁜 생각이건, 또는 어떠한 노여운 생각이건, 과거의 생각이건,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없앨려고 하지 말고,
한 생각이 일어났다—여기 앉아서 지금 딸 생각이 났다. 「딸이 지금 잘 있나?」 「애기가 잘 컸나?」 그런 생각이 났다 할 때에—「아! 내가 쓸 데 없는 생각을 했구나」 그런 생각도 하지 말고, 그 생각이 났을 때 ‘이뭣고?’

무엇이 금방 그 딸 생각을 했나? 이거여. 이 딸 생각하는 이놈이 뭣고?

과거에 어떤 친구로부터 배반을 당해서 불현듯 그 생각이 나 가지고 속에서 화가 탁! 치밀어 오를 때, 바로 그 생각을 버리지 말고 그 생각에서 ‘이뭣고?’

이것이 바로 생사 속에서 생사를 해탈하는 아주 묘한 그리고 간단한 방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단속하는 사람은 망상이 일어난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망상(妄想)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바로 화두를 들기 때문에 그 망상은 바로 그것이 선지식의 한 법문이요, 경책(警策)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선지식 또는 부처님 또는 관세음보살 하면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어서 아주 우리가 법당에 모셔진, 탱화(幀畵)에 그려진 그러한 모습으로 계실 줄 생각하지만 마냥 그렇지를 않습니다.

불보살(佛菩薩)은 천백억 화신(千百億化身)을 나투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구의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여자의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장자(長者)의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거지의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강도 도둑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문둥이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철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시어머니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며느리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남편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아내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로 나타나기도 하고, 친구로 나타나서 신의를 지키는 그러한 친구로만 나투는 게 아니라 배반 배신하는 그런 친구로도 나타나고,
아내로 나타나면 아주 현모양처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아주 고약한 악처(惡妻)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수도 있습니다. 좋은 남편으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외도를 일삼는 천하의 색마(色魔)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떻게 내 마음에 꼭 맞는 그러한 선지식으로만 나타난다면 그 참 그런 좋을 수가 없겠지마는, 불보살은 중생을 하루라도 더 빨리 생사해탈을 하게 하기 위해서 너무나도 자비가 크신 까닭으로 해서 천백억 화신으로 역경계(逆境界) 순경계(順境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발심한 사람,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한 사람이라야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불보살을 친견할 수가 있고, 선지식을 바로 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발심을 못한 사람은 선지식을 노상 코앞에 모시고 있으면서, 한 자리에 불보살을 모시고 살면서도 선지식을 알아보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식이 누군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다시 더 분명히 말하자면 『불보살 아닌 사람이 없고, 불보살 아닌 것이 없고, 선지식 아닌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가 발심을 했느냐, 못했느냐? 진발심을 했느냐, 못했느냐? 거기에 달려있는 것이지, 행여나 선지식이 없을까 걱정할 것 없고, 불보살을 만나지 못할까 근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부터서라도 댁에 가시거든 남편이 나한테 잘해 주건 못해 주건, 며느리가 자기한테 효도를 하건 말건, 시어머니가 자기에게 잘해 주시건 안해 주시건, ‘바로 저분이 선지식이다. 저분이 바로 불보살 화현(化現)으로 나타난 분이다’ 이리 생각하고,

오히려 더 시어머니가 자기한테 잘못할수록에 발심을 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잘못할수록에 더욱 발심을 하고, 사돈이 자기한테 섭섭하게 할수록 자기는 더 발심을 해서,
이렇게 마음을 쓰고, 이렇게 말을 하고, 이렇게 행동에 옮긴다면 거기에서 자기의 과거에 어떠한 두터운 업장이라도 거기에서 다 소멸이 될 것이고, 업장소멸(業障消滅)하면 소원성취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소원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업장이 가로막기 때문에 성취를 못하는 것이니까, 업장만 소멸한다고 하면은 소원성취는 바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성취하는 것입니다.

3일 기도를 한다든지 7일 기도를 한다든지 또는 백일기도(百日祈禱)나 천일기도(千日祈禱), 만일기도(萬日祈禱) 이렇게 합니다마는, 어째서 그렇게 사람에 따라서는 3일 기도를 하고도 소원을 성취를 하고, 백일기도를 하고도 성취를 하고, 만일기도를 하고도 성취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째서 빨리하는 사람도 있고, 더디하는 사람도 있냐?’하면은 업장이 얼마만큼 소멸이 되었냐 거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3일 기도만 하고도 마음이 맑아져서 불보살의 마음과 같이만 된다면 3일에도 소원을 성취해.

한번 가서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향 하나를 올리고 절을 하고, 청수(淸水) 한 그릇을 올리고 간절히 절하고 와서 그리고서 소원을 성취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간절히 향 하나 올리고, 물 한 그릇 올리고 소원을 할 때 그 마음, 부처님 마음과 하나가 된다면 절 한 자리 하는 사이에도 소원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우리의 마음이 맑고 깨끗해지는 것은 꼭 오랜 시간만이 걸려야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조주는 무(無)라고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생각생각마다 들고 또 들고, 앉거나 서거나 누웠거나 걸어다니거나 차를 탈 때나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가리지 말고,
속이 상할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일을 할 때나,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 그 사이도, 밥을 먹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소지를 하거나, 밥을 짓거나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 때라고 ‘이뭣고?’

‘하! 공부가 안된다’고, 공부가 안된다고 하는 생각이 그것이 자기로 하여금 공부가 안되게 하는 것이여.

“어째서 안되냐? 무엇을 안된다고 하느냐?”
“망상이 일어나서 안됩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이뭣고?’하면 그것이 공부인데,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공부가 안된다고 왜 그러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냐. ‘안된다’고 생각함으로써 자기로 하여금 ‘공부 안되는 사람’으로 스스로 낙인(烙印)을 찍는 것이 된다.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

화두를 타 가지고 바로 그때부터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공부가 된다면 어찌 일주일을 넘을 필요가 있느냐.

무량겁(無量劫)으로 지어온 자기의 업(業)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기 때문에 번뇌와 망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고, 체질화가 되어 가지고 가만히 있어도 별별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누구를 원망할 것이냐.
떠오르는 그 많은 중생심(衆生心), 번뇌 망상심, 생멸심 그것을 꼭 나쁘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진여불성은 모양도 없고, 냄새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래서 무어라 표현할 수도 없고,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코로 냄새 맡을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지마는, 그놈이 너무나도 신령스럽고 신기하고 묘한 것이라, 때와 인연 따라서 천만 가지 모습으로 천만 가지 빛깔로 그놈이 활동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불보살과 같이 착한 마음을 내기도 하고, 때로는 살인강도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천하의 대학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천하의 역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 얼마나 미묘하고 신령스러운 것이라 그렇게 천만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성내는 놈, 슬퍼하는 놈, 기뻐하는 놈, 원망하는 놈, 아퍼하는 놈, 괴로워하고 외로워하는 놈, 이것이 전부 다 진여불성으로부터서 일어나는 한 거동이요 모습일진대, 그 거동 그 모습을 버릴려고 할 것이 없어.

바로 그놈을 계기로 해서 ‘이뭣고?’ 이렇게 들어가면 그것이 바로 자기 진여불성을 찾는 가장 가깝고 빠르고 묘하고 간단한 길이다.
중생의 번뇌 망상심 그놈을 버리고 어떠한 진여불성을 찾아서 깨달으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무량겁을 두고 공부를 한다해도 그 사람은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생심은 그것이 바로 대승법,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체(體)다. 그 중생심, 번뇌 망상심 그것 때문에 육도(六途)를 윤회한다고 아까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그것 때문에 우리는 성불(成佛)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말이여.

그러니 그 번뇌 망상이 우리에게는 원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큰 은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최상승 활구참선, 이 정법을 믿고 공부한 사람에게는 그 번뇌 망상이 바로 불보살의 손이요, 불보살이 보내주신 반야용선(般若龍船)이지만,
정법을 믿지 않고 활구참선법을 믿지 않는 사람은 중생심, 번뇌 망상심 이것이 큰 원수요, 나를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끌고 가는 원수요 도적놈이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 육적(六賊)이라, 여섯 도적놈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거기에다 두고 하는 말이다.

한 생각 정법을 믿으면 여섯 도적놈이 바로 6대보살(六大菩薩)이여. 나를 극락세계로 불국세계로 인도하기 위해서 반야용선을 가지고 나를 영접하러 온 보살화신이고,
정법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여섯 도적놈이 되어 가지고 눈으로 귀로 코로 귀로 입으로 몸으로 생각으로 여섯 문을 통해서 기회만 있으면 지옥으로 끌고갈려고 엿보고 있다 그말이여.

이러한 최상승법, 활구참선법.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인간으로 태어나가지고 어떻게 해서 이러한 묘한 최상승법을 우리는 만났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 나도 희유하고 감사하고 다행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다행한 마음으로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뭣고?’로 돌려서 슬픔도 그놈으로 이겨내고, 노여움도 이 ‘이뭣고?’로 이겨내고, 괴로움도 이 ‘이뭣고?’로 이겨내고,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물어볼 것도 없이 결정코 금생에 자아를 자각, 대도를 성취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몽산 큰스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렇게 간절히 3년을 해봐라. 결정코 대도를 성취할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해서 성취를 못하면 내가 네 대신 무간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결제일이기 때문에 조실 스님의 법문도 이 화두, 공안에 대한 법문을 추려서 들었고, 또 산승도 이 공안에 대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하는 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두 하나만 제대로 들을 줄 알면 그 사람은 갈 곳이 없습니다. 결정코 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23분17초~44분28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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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

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실참실수(實參實修)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수행하는 것.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화두(話頭)를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 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 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부고(訃告 부고 고,알릴 고) ; 어떤 사람의 죽음을 연고자에게 알림. 또는 그러한 글.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방(榜) ; 용상방(龍象榜)을 말함.
[참고] 용상방(龍象榜) ; 절에서 하안거 동안거 결제 때나, 큰일을 치를 때에 각자 할 일을 정해 붙이는 명단. 행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붙여서 각자가 맡은 일에 충실하도록 한 것이다.
*생사대사(生死大事) ; ①삶과 죽음, 생사(生死)의 큰 일. ②수행을 하여 생사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는 큰 일.
*단월(檀越) ; 시주(施主). dana-pati 의 음역.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공양(供養) 청장(請狀) ; 공양 청첩장. 재가신도가 스님들께 공양(식사)을 드리기 위하여 초청하는 것.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어록(語錄) ; 조사어록(祖師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발설여경지옥(拔舌犂耕地獄) ; 또는 발설이경지옥(拔舌犂耕地獄). 犂(밭 갈 리, 밭 갈 려).
사람의 혀를 길게 빼 늘여 놓고, 그 혓바닥을 소 쟁기로 쟁기질을 하는 지옥.
*몽산(蒙山) ; ‘역대 스님 약력’ 참고.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하열(下劣 아래 하/못할·낮을 렬) ; (행동이나 생각이) 남보다 뒤떨어짐. 수준이 낮음.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관건(關鍵 빗장 관,열쇠 건) ; 어떤 일의 성패나 추이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나 요인.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 함[逼惱, 惱亂] 등의 뜻으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이러한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묶이게 되고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惑-業-苦 三道]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치성(熾盛 성할 치,성할 성) ; 불길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성하게 일어남.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염송(念誦 생각 념,욀 송) ;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불경(佛經)이나 진언(眞言) 등을 외움.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말. [참고]헤살;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대혜(大慧) 스님 ;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대혜서(大慧書)·『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62()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 역설하였다.

*한고비 ; 어떤 일의 진행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거나 어려운 단계나 국면.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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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경책(警策 깨우칠 경,채찍 책) ; 타이르고 채찍질하여 깨우치게 하는 것.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과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먹음은 것,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 등등.
*탱화(幀畵) ; 부처님, 보살, 성현들을 그려서 벽에 거는 그림. '탱(幀)'이라고도 한다.
*화신(化身) ; 화신불(nirmaka-kaya 化身佛). 부처의 삼신(三身:法身•報身•化身)의 하나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불신(佛身). 응화신(應化身)·변화신(變化身)•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장자(長者) ; ①덕망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아 세상일에 익숙한 어른. ②큰 부자를 점잖게 이르는 말.
*악처(惡妻) ; 성품이나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사나운 아내.
*색마(色魔) ; 성행위나 성관계 따위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사람을 마귀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障礙)가 사라져 없어짐.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낙인(烙印 지질 락,도장 인) ; ①다시 씻기 어려운 부끄럽고 욕된 평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불에 달구어 찍는 쇠붙이로 만든 도장.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중생심(衆生心) ; 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 진여(眞如)를 가르켜 말함. 진여의 실체.
진여가 광대하여 모든 것을 포섭한 것을 대(大)라 하고, 일미 평등(一味平等)하여 차별의 모양을 여읜 것을 총상(總相), 수행하는 이의 모범이 되는 것을 법(法), 관하는 지혜가 드나드는 것을 문(門)이라 한다.
*반야용선(般若龍船) ;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반야(船若,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 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고통이 끊임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함.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말. ②법신(法身)은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뜻.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Posted by 닥공닥정
법회(입춘기도)2015. 2. 1. 10:27

§(098) (게송)약야산중봉자기~ / 용화사에서는 활구참선법을 들려 드린다 / 포대화상, 미륵불의 화현 /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부처님 계신 곳, 바로 그 도리 보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 ‘이뭣고?’ / 참회, 이참(理懺)과 사참(事懺) / 업장소멸, 재난을 멀리하는 영원한 효력의 진짜 부작, ‘이뭣고?’ / 부처님 삼불능(三不能) / 무당집에 다니신 발은 깨끗이 씻어라.


**송담스님(No.098)—1979년 입춘 법회(79.02.04) (용098)

(1) 약 20분. (2) 약 17분.

(1)------------------


약야산중봉자기(若也山中逢子期)인대는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냐

나무~아미타불~


만약 산중에서 자기(子期)를 만났다면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리요. 어찌 누런 이파리를 가지고 산아래로 내려갈 것이냐.


자기(子期)라고 하는 사람은 성(姓)은 ‘쇠북 종(鍾)’  종씨인데, 종자기(鍾子期)라고 하는 사람은 저 중국 고대에 요임금 당시 거문고의 이치, 음악의 이치에 달통한 사람입니다.


그때 백아(伯牙)라고 하는 사람이 대단히 거문고를 잘 탔습니다. 백아라고 하는 사람은 아주 거문고를 타기로 아주 통달한 사람인데, 백아라고 하는 사람이 거문고를 떠억 뜯으면 너무 거문고를 잘 뜯고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서 보통 사람은 그 백아의 거문고 타는 것을 능히 감상을 할 줄 모릅니다.

오직 종자기(鍾子期)라고 하는 사람만이 그 백아(伯牙)의 거문고 타는 것을 듣고서, '아! 지금 백아라고 하는 사람이 유유히 흐르는 큰 강물을 생각하면서 거문고를 뜯고 있구나' 또 어쩐 때는 '아! 지금 저 백아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들어보매, 높고 높은 태산준령을 생각하면서 저 거문고를 뜯고 있구나'


그렇게 종자기라고 하는 사람은 백아의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백아의 마음 소리를 능히 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종자기라고 하는 사람이 천명(天命)을 다하여 죽게 되자 백아라고 하는 사람은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아니했다고 그럽니다.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탄생을 하셔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대도를 성취하신 다음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묘법(妙法)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종자기와 같은 그러한 사람을 만났다면 어찌 49년 동안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동안 그러한 많은 방편설(方便說)을 설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자기(子期)와 같은 사람을 산중에서 만약 만났다면 어찌 누른 이파리을 가지고 산아래로 내려갈 것이냐?


누른 잎[黃葉]이라 하는 것은 은행잎이나 단풍잎 같은 그런 아주 예쁘고 고운 그러한 단풍잎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린애들을 달랠 때에 노란 또는 빨간 단풍잎을 주면서 ‘여기 있다. 돈, 여기 있다. 돈’ 이렇게 우리는 어린애들을 곧잘 달래는 것입니다.


방편설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 불가결(不可缺)한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린애를 달랠 때에 사탕 같은 것이 있으면 다디단 사탕을 입에다 넣어 줘서 달래기도 하고, 사탕이 없으면 무슨 노란 이파리나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조그만한 돌멩이라도 집어 줘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슨 장난감 같은 것도 집어 줘서 잠시라도 어린애의 울음을 달래는 경우를 엄마들은 얼마든지 경험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방편, 또 동지 법회, 입춘 법회, 칠성 법회, 사월 초파일 관등(觀燈) 법회, 이런 법회가 노란 이파리를 가지고 어린애 울음을 달래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방편설, 이것이 모두 일맥상통(一脈相通)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노란 이파리만 가지고 달래 봤자 어린애는 잠깐 울음을 그쳤을 뿐, 배가 고픈 허기(虛飢)는 완전히 가시질 않은 것입니다. 다시 또 울음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일양(一樣)으로 노란 이파리만 가지고 여러분의 울음을 달래는데에 그치지를 아니하고, 정말 입에 넣어서 먹으면 배가 부를 수 있는 영양제를 여러분에게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국 각 사암에서는 입춘 불공이라 해 가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특히 입춘이 들은 시간을 기해서 불공(佛供)을 드리고 굉장히 복잡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용화사에서는 입춘에 이렇게 최상승 활구법문(活句法門)을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경청을 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새벽부터 저녁까지 목탁을 치면서 여러분이 일 년 동안 무장무애하시고 복을 많이 받도록 그렇게 간곡히 불공을 드린 것과 이렇게 경건한 자세로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들은 것과 비교를 해보시면, 조금이라도 뜻이 있으신 분은 능히 어느 것이 정말 올바른 불법(佛法)이고, 어느 것이 정말 우리를 영원히 복되게 하고, 행복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인가를 충분히 이해하시고 남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최초에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에 대해서 말씀이 계셨고, 그다음에는 포대화상(布袋和尙)에 법문을 하셨습니다.


포대화상은 중국 당나라 시대에 중국에 출현하신 이름도 성도 모르는 고향이 어딘지 그것도 알 수 없는 그러한 도인(道人)이 계셨습니다. 다못 큰 포대(布袋), 자루를 항시 어깨에다가 메고 다니시면서 사람만 만나면 손을 내밀면서 무엇이고 달라고 그랬습니다.


누가 무엇을 먹고 있으면 ‘나 좀 달라’고 해 가지고, 주면은 한입 뚝 비어 먹고 나무지기는 자루 속에다가 퐁 집어넣고, 그저 고기가 되었건, 과일이 되었건, 떡이 되었건, 닥치는 대로 얻어서 먹고 집어넣고, 얻어서 먹고 집어넣고, 자루 속에서 배고프면 꺼내 먹고, 썩거나 말거나. 누구든지 만나면 ‘나 돈 한푼 달라’고, 돈 한푼 주면 자루 속에다 탕 집어넣고.

‘너! 모레 물가에 가지 말아라’ ‘너! 이달 보름께는 차를 타지 말아라’ ‘너 내일 저녁에 니 마누라하고 싸우지 말아라’ 무엇이고 한마디 딱! 일러줍니다. 그러면 그 점이 백발백중 맞았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려고 하면은 나막신을 신고 줄달음질을 치고, 날씨가 좋은 날은 짚신을 신고 돌아다니고, 그래서 포대화상이 무슨 신을 신었는가 볼라면 일기(日氣)를 미리 알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과학 기구를 사용해서 기상대(氣象臺)에서 일기 예보를 해도 혹 맞기고 하고, 안 맞기도 하고 합니다마는 포대화상 발만 보면 백발백중이었습니다.


포대화상이 생존 시에는 아무도 그이가 도인(道人)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돌아가신 뒤에사 비로소 그분이 56억 7천만 년 뒤에 염부제(閻浮提)에 미륵불(彌勒佛)로 출현하실 부처님의 권화신(權化身)이라고 하는 것을 선지식(善知識)들은 짐작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 미륵불은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미륵보살(彌勒菩薩)로서 지금 머물러 계십니다. 56억 7천만 년 후에 미륵불로 출현하시지마는 그때까지는 너무너무 세월이 많기 때문에 우두커니 거기에 계시지를 아니하고 가끔가끔 보살로서, 보살의 몸으로 화현(化現)해 가지고 인연 따라 중생을 교화하시게 되는데, 그 경우에 한 경우가 바로 포대화상으로 출현하신 것이 되겠습니다.


어째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화현으로 나투시려면 누가 보든지 존경할 수 있고 거룩하고 위대한 그러한 몸가짐과 행실로써 출현을 하시지 아니하고, 몸뚱이는 비대해 가지고 배가 소 배만큼 불러 가지고, 여러분이 사진을 통해서 포대화상의 모습을 짐작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배는 장구통 배아지에다가, 항시 배는 떠억 배꼽까지 다 내놓고 남자이지만 유방이 여자 유방처럼 그렇게 양쪽에 드리워진 채,

자루를 하나 짊어지고 슬슬 거리로 다니면서 걸식을 하시면서 그러니까 어린이들이 항시 뒤를 따라 다니면서 올라타고 옷을 잡아당기고 같이 친구가 되었다가 유시에는 놀려댔다가, 이렇게 하면서 포대화상은 어린애로 더불어 벗 삼아서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세월을 보내시되, 인연 따라서 점도 쳐주고 때로는 역행(逆行)과 순행(順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시면서 중생 교화를 하셨습니다.


그때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이요’ 아까 조실 스님께서 읊으신 ‘밤마다,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또한 같이 일어난다[朝朝還共起]. 밤에 잘 때에는 부처님을 떠억 끌어안고 자다가 아침에는 그 부처님하고 같이 일어난다'


‘욕식불거처(欲識佛去處)인댄’ 네가 지금 그 어젯밤에 끌어안고 자고, 아침에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났던 그 부처님 간 곳을 알고자 할진대는, '지자어성시(只這語聲是)니라. 지금 이 말하는 이놈이니라'

이 게송(偈頌)은 지극히 쉬운 글이지마는 이 쉬운 한마디의 게송을 똑바로 마음에 얻는다면 바로 자기의 부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 견성성불’ 누구나 입에 거는 말이지만. '성품(性品)을 보고 성불(成佛)을 한다' 중생심(衆生心)을 떠나서는 성품을 볼 수가 없는 것이고, 중생심을 떠나서는 성불할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천하 없이도 희노애락(喜怒哀樂) · 탐진치(貪瞋癡) 이것이 모다 오욕락(五欲樂), 전판 다 중생심으로 이루어진 중생심의 표현이지마는 그 중생심 여의고는 견성(見性)할 도리도 없는 것이고, 성불(成佛)할 기약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도, 잠시도 여읠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중생심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말하고, 손으로 글씨 쓰고 일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성냈다, 웃었다, 울었다 하는 이것이 전부 중생심의 발로(發露)인데 그 중생심 떠나서 ‘참나’ 찾을 길은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중생심 버리지 아니하고, 중생심에서 중생심으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견성(見性)입니다.


그 가장 단적이고 가까운 것이 '부처 간 곳을 알고자 할진대는 바로 이 말하는 이놈이니라'

어찌 하필 말하는 놈일 뿐이겠습니까. 귀로 듣는 놈, 눈으로 보는 놈, 손으로 만지는 놈, 발로 차고 걷는 놈, 성내고 웃고 우는 놈,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부처님 계신 곳이요, 바로 그 도리 보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한번 드는 곳에 팔만사천 마구니가 물러가는 곳이요, 소멸하는 곳이요, 일체 재앙(災殃)과 액난(厄難)이 소멸되는 때인 것입니다.(처음~19분4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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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에 무당 절은 말할 것도 없고, 전국 조그마한 썩한 사찰 또는 절에서 신도들의 요청에 의해서 부작(符作)을 노나 드리는 절이 적지 않습니다.

부작을 빨강 물로 찍어 가지고 여러분에게 손바닥만씩 한 것을 노나 드릴 수가 있습니다. 또 노나 드리는 절이 많습니다. 그 종이를 한 장뿐만이 아니라 지금은 인쇄술이 발달해서 몇천 장, 몇만 장이라도 찍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갖다 붙여서 액난(厄難)을 면한다면 아무 걱정이 없겠습니다. 온 집안에 도배를, 안팎으로 부작으로 도배를 하고, 온 몸뚱이에 옷을 부작으로 찍어서 옷을 해 입고 다니는 사람은 일평생 동안 감기 한번 안 들고 교통사고도 없고, 욕 한마디도 무슨 못된 짓을 하고 다녀도 감옥에도 안 가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일체 업(業)은 우리가 지어서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러한 악업(惡業)을 지어 가지고 그러한 죄를 받는 마당에 부작을 차고 다닌다고 해서 그 업이 소멸이 된다고 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자기의 액난을 멀리하고 죄를 닦고자 하면, 첫째 자기의 잘못을 참회(懺悔)하고 앞으로 그러한 죄업을 짓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상책이 될 것입니다.

참회에는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이 있어서 이치로 참회하고 또 사(事) 면, 실천 면으로 참회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참(理懺)이라 하는 것은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라고 하는 것은 원래 자성(自性)이 없어서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죄가, 성불할 수 있는 그 자성, 견성성불하는 그 자성과 달리 죄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이—불성 말고, 죄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체 죄는 우리가 바로 견성성불하는 그 성품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그래서 마음이 비어버리면, 마음 일어나는 생각이 가라앉으면 바로 죄도 또한 없어지는 것이다'

마음이 깨끗하게 무념(無念)으로 돌아가고 죄가 없어지면, 이 두 가지가 한목 없어져 버리면 깨끗해지면[罪滅心亡兩俱空] 이것이 바로 참다운 참회라고 하느니라.[是卽名爲眞懺悔]


이렇게 죄의 성품이 자체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한 마음 돌이켜서 비우게 하면 이것이 참으로 죄를 닦아 없애는 것이다. 이렇게 관해서 마음을 빨리 깨끗하게 만드는 법, 이것이 바로 '이뭣고?'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참선이라 하는 것은 죄를 소멸을 하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아니함으로 해서 빨리 인격을 완성하는 견성성불하는 가장 요긴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사참(事懺)은 자기가 이미 저지른 죄과(罪過), 죄과에 대해서 몸으로써 선행(善行)을 해 가지고 자기의 죄를 참회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앞에 절을 백팔배 내지 삼천배 절을 하는 가운데에 자기의 죄를 참회하는 것, 이것도 사참의 하나가 되겠고 또 적극적으로 자기가 잘못한 이상으로 남에게 봉사하고, 자비행을 함으로 해서 자기의 죄를 참회하는 거, 이것도 사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참과 사참을 참선, '이뭣고?'를 함으로 해서 마음을 비우게 해 가지고 참회하고, 몸으로 실천을 해서 사참을 함으로써 이참 사참을 겸해서 닦으므로 해서 우리의 업장(業障)을 빨리 소멸하고 빨리 견성성불할 수 있는 그러한 수행을 쌓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입춘날에 다른 절에서도 모다 부작을 노나 드리니까, 종이로 만들은 부작을 만들어 드리고 있습니다마는, 다른 절에서.

우리 절에서는 불에다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다 넣어도 망가지지 않는 정말 우리의 업장을 소멸하고 재난을 멀리 할 수 있는 진짜 부작(符作), 영원히 유효한—종이로 만든 것은 내년 입춘 때까지 겨우 일 년 동안 효력이 유지된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우리 용화사에서 지금 노나 드리고자 하는 부작은 영원히 효력이 상실되지 않습니다. 영원히 효력이 상실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해를 거듭해 갈수록 그 영험이 더 뚜렷해지는 그리고 영원히 타지 아니하고 망가지지 아니한 그러한 부작을 노나 드립니다.


작년에 그렇게 노나 드린다고 하고서 부작을 손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여러분에게 부작을 노나 드렸습니다. 작년 입춘에 이 법회에 참석하신 사부대중(四部大衆)은 손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그 부작을 받어 가셨습니다.

'부작을 노나 주었다'하는 말이 그 녹음을 통해서 여러 신도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입춘이 훨씬 지난 뒤에 "저도 부작을 좀 주십시오" 그래가지고 "아, 그 그때 제가 바뻐서 딸이 해산하는 관계로 거기를 가서 제가 못했는데 다른 이들은 모다 부작을 받았다고 하는데 저만 못 받았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셔서 웃음 한번 웃었습니다마는, 정말 올 입춘에 여러분은 좋은 부적을 받으셨을 줄 생각합니다. 이 부적을 주고받는 데는 시간이 필요치 않습니다. 손으로 주고 손으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우리가 지은 대로 받게 됩니다. 받게 되지마는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그 받는 자세가 다릅니다.

자기가 지은 것 받는 것에 대해서는 부처님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부처님 같은 그러한 대성현도 자기가 지은 것을 면할 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세 가지 불능(不能)이 계시는데, 자기가 지은 인(因)을 면할 수가 없는 거, 또 인연 없는 중생을 제도할 수 없는 거. 아무리 육신통(六神通)이 구족하신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인연 없는 사람은 제도할 수가 없다. 또 이 육도법계(六途法界)에 한 사람도 남음이 없이 중생을 다 없애게 하는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랬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연이 다 있다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제도해 마칠 수가 있지만 인연 없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또한 중생계(衆生界)가 끝날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또한 부처님의 힘으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부처님 삼불능(三不能) 가운데에 '내가 지은 업(業)을 면할 것이 없다' 그러는데, 하물며 우리 중생이야 자기가 무량겁 이래로 지어 온, 자기가 지어 놓은 업을 금생에 부작 한두 장 가지고 면하리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치원 학생에게 물어봐도 알 수가 있는 일입니다.

온갖 못된 짓 다하고 부작만 무당한테 가서 사 가지고 다닌다면 강도, 살인강도나 사기꾼들은 이 세상을 횡행천하(橫行天下)할 것입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혹 여러분 가운데에는 '아! 빨리 법회가 끝나서 점심을 먹고 그 무당집에 가서 신수(身數)를 보고 그 부작을 타 와야 할 텐데, 용화사에서는 부작을 입으로만 주고 진짜 부작은 주지도 않는다'고 지금 조바심을 내고 계신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정말 무당집 출입하는 것은 오늘 금년 입춘을 기해서 아주 발을 씻으셔야 합니다. 무당집은 드나들 곳이 못됩니다.


답답하면—약을 써도 안 듣고, 별짓을 해도, 불공을 해도 별수가 없고, 그러니 그 영(靈)하다니까 족집게 점쟁이한테 가서 점을 해 보자 그래 가지고.

그 물에 빠진 사람 아쉬울 때는 지푸락도 잡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무당집에 한번 발 딛어 놨다 하면은 그 사람의 갖은 협박과 공갈 위협을 주어가지고 '당신 남편 금년에 큰 굿 한번 안 하면 직장에서도 떨어지고, 독자 있는 거 그거 키우기 어려울 것이다' 아! 이런 못된 소리를 하면 그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그 무당 말을 순종 아니하고는 못 배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번 두 번 다니다 보면 무당이 진짜 자기의 귀의(歸依) 사찰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절은 다 한 부처님이고, 다 같은 절이라' 이런 말들 하시지마는, 그 옳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가 버릇하면 아주 거기에 꽉 매여 가지고 다시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나를 등지고 나를 배신하면은 안 된다'고 몇 번을 갈 때마다 다짐을 하고 족치는 통에 무서워서 나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당집에는, 그동안에 다니셨던 분, 안 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부처님의 도력(道力) 법력(法力)과 무당의 삿된 힘과는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한테 다니다가 무당한테 가면 벌을 받게 됩니다. 삿된 데에 빠졌으니 재앙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겠죠? 부처님이 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러한 삿된 구렁텅이에 들어간 자체가 이미 벌을 받기 시작한 때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무당 절에 다니다가 절에 오신 것은 벌을 받지 않습니다. 혹 무당이 부리는 잡귀가 쫓아온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지키고 있는 신장(神將)은 잡귀 만 명도 당해내기 때문에 염려 말고 무당집에 다니신 발은 깨끗이 씻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금년 새해부터서는 어쨌든지 법문(法門) 잘 들으시고 '이뭣고?' 참선 공부 열심히 하시므로 해서 금년 내내 무장무애하시고, 묵은 온갖 재앙과 원한도 다 깨끗이 씻어 버리고, 모든 소원을 성취하시도록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더군다나 금년 입춘은 초여드레가 되어서, 초삼일부터 구일까지 우리 절에서 신수기도를 지금 봉행 중에 있는데 그 가운데 입춘이 들어서 더 입춘 법회에 참석하신 분은 다른 해에 입춘보다도 훨씬 더 복을 많이 받으시고 소원을 성취하실 줄 믿습니다.(19분47초~36분22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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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若也山中逢子期 豈將黃葉下山下’ ; 『태고집(太古集)』 (雪栖 편, 김달진 역주 | 세계사) '석가 출산상(釋迦出山相)' p229 참고.

*지음(知音) ; ①음악의 곡조를 잘 앎. ②새나 짐승의 소리를 가려 잘 알아들음. ③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이르는 말.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악상(樂想)을 잘 이해해 준 벗 종자기(鐘子期)가 죽자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여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열자(列子)』에 나오는 말.

*천명(天命) ; ①타고난 수명. ②타고난 운명. ③하늘의 명령.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방편설(方便說 방법·수단 방/편할 편/말씀 설) ; 실상(實相)으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 상대와 조건에 알맞는 방법을 설정하여 말하는 것.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불가결(不可缺) ; 없어서는 안 됨.

*관등(觀燈 볼 관/등 등) ; 등(燈)을 밝히고 봉축(奉祝 공경하는 마음으로 축하함)하는 행사. 연등(燃燈)과 같은 말. 주로 음력 사월 초파일에 행하였으며, 이 날을 관등절, 그 놀이를 관등놀이라고 하였다. 집집마다 등을 달고, 관청, 시장 거리의 가게, 절 등에서 등대를 세워 등을 달아 부처님의 탄생을 봉축하였다.


오늘날에는 이 날을 '부처님 오신날'이라 하여 국가공휴일로 정하고 밤에는 수많은 신도들이 등을 들고 거리를 돌면서 제등행렬(提燈行列)을 한다.

요즈음에는 특별한 사찰의 행사 때에도 때때로 관등을 하며, 천등불사 · 만등불사 등 관등 위주의 행사를 한다. 그 기원은 통일신라 때 행해졌던 팔관회(八關會)이다.

*일맥상통(一脈相通 한 일/줄기·맥 맥/서로 상/통할 통) ; 사고방식이나 성질 등이 두 대상 간에 어느 면에서 한 가지[一脈]로 서로[相] 통(通)하거나 비슷해짐.

*허기(虛飢 빌 허/주릴·굶주림 기) ; 굶어서[飢] 속이 비어[虛] 몹시 배가 고픔.

*일양(一樣) ; ①한결같은 모양. 또는 같은 모양. ②한결같이 그대로. 또는 꼭 그대로.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 · 등(燈) · 꽃 · 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포대화상(布袋和尙) ; 중국 후량(後梁) 때의 스님.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 출신. 자기가 자칭하는 이름은 계차(契此)였다. 체구가 비대하고,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배가 불룩하고, 말이 일정하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자고 누웠다.

항상 지팡이에 베자루 하나를 걸어 메고, 소용되는 물건은 모두 그 속에다 넣었다. 저자나 마을에 들어갔다가 물건을 보면 달라고 하여, 먹을 것은 무엇이나 주기만 하면 받아 먹으면서 조금씩 나누어 그 자루에 넣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별호를 지어 장정자(長汀子) 또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고 불렀다. 혹 사람들에게 무엇을 달라 했다가 돈을 주면 돌려 주었고, 남에게 길흉을 예언해 주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916년 3월에 명주 악림사(嶽林寺) 동쪽 행랑 밑의 반석 위에 단정히 앉아서 게송을 읊었다.


미륵진미륵(彌勒眞彌勒)  분신천백억(分身千百億)  시시시시인(時時示時人)  시인자불식(時人自不識)

미륵 부처님, 참 미륵 부처님이 분신(分身)해서 천백억 부처님이 되었다. 때때로 당시 사람들에게 보이되,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 아지를 못하는구나.


게송을 마치고 편안히 앉아서 떠났는데, 그 뒤에 다른 고을 사람들은 여전히 대사가 포대를 메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에 사람들은 포대화상을 미륵 보살의 화현(化現)이라 하여, 그 모양을 그려서 존경하여 받드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참고] [전등록 3] (제27권) (동국역경원 | 김월운 옮김) p459-463 참고.

*비다 ; '베다(사람이 과일을 입으로 끊거나 자르다)'의 사투리.

*나무지기 ; ‘나머지’의 사투리.

*기상대(氣象臺) ; 기상(氣象 바람, 구름, 비 등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관측, 통보하거나 또는 조사, 연구하기 위한 시설. 또는 그 기관.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염부(閻浮) ; 염부제(閻浮提). 남염부제(南閻浮提). 섬부주(贍部洲). 남섬부주(南贍部洲).

산스크리트어 jambu-dvīpa의 음사. 염부(閻浮), 섬부(贍部)는 jambu의 음역어이며, 제(提)와 주(洲)는 dvipa의 각각 음역어 및 의역어이다. jambu는 나무 이름.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수미산(須彌山)의 사방에 네 대륙(四洲)이 있는데, 염부라는 이름은 여기에 자란다는 점부(jambu)에 유래하며, 남방에 있기 때문에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 한다.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라 하며, 여러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은 사주(四洲) 가운데 이곳뿐이라 함. 불전에서는 인간세계의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권화신(權化身) ; 불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변하여 나타난 몸.

*권화(權化) ; 산스크리트어  avatāra ①불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몸이나 모양으로 변하여 나타나는 것. 권현(權現) · 화현(化現) · 응현(應現)이라고도 한다. ②화신(化身)과 같음.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호명(護明) 보살의 이름으로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임.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전판(全판) ; 하나도 남김이 없는 전부.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발로(發露 드러내다·밝히다 발/드러내다 로) ; 숨은 것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숨은 것을 겉으로 드러냄. 또는 그런 것.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재앙(災殃 재앙 재/재앙 앙) ; 뜻하지 않게 생긴 불행한 변고(變故). 또는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생긴 불행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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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符作) ; ‘부적(符籍)’의 변한 말. 부적(符籍 부적 부/문서 적)—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붉은색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몸에 지니거나 집에 붙이는 종이.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악업(惡業) ; 나쁜 결과의 원인이 되는 나쁜 행위. 또는 전생(前生)의 나쁜 행위.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이참(理懺) ; 진리의 참모습을 관찰하여 참회를 얻는 것. 관찰실상참회(觀察實相懺悔)라고도 한다.

과거와 현재에 지은 죄(罪)라고 하는 것은 자성(自性)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어서, 마음이 본래 공적(空寂)한 것임을 알게 되면 죄도 또한 없어진다(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이 도리를 철저히 믿고 참선을 하면 거기에서 죄가 소멸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업의 실상을 관찰하여 죄를 멸하는 것을 이참(理懺)이라 한다.

*사참(事懺) ; 지은 바 행위를 분별하여 그 행위에 대해서 참회하는 것으로서,

몸(身)으로는 부처님께 무수배례(無數拜禮) 절을 하고, 입(口)으로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偈頌)을 외우며, 마음(意)으로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모습을 그리면서, 과거와 현재에 지은 죄업을 참회한다.

법계(法界)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없는 중생이 부처님의 자비에 의지하여 참회하는 것. 일반적으로 ‘참회한다’하면 이 사참을 뜻한다. ‘수사분별참회(隨事分別懺悔)’라고도 한다.

*무념(無念) ; ①망념이 없는 것. 정념(正念)을 말한다. ②모든 법을 보면서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것.

[참고] 『육조단경(六祖壇經)』 (德異本) ‘제1 오법전의(悟法傳衣, 법을 깨닫고 가사를 전해 받다)’에서.

善知識 智慧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本解脫 若得解脫 卽是般若三昧 卽是無念


선지식들이여, 지혜로 비추어 보면 안팎이 밝게 사무쳐서 자기의 본심을 아나니 만일 본심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며, 만일 해탈을 얻는다면 곧 그것이 반야삼매(般若三昧)며 또는 이것이 무념(無念)이니라.


何名無念 若見一切法 心不染着 是爲無念 用卽徧一切處 亦不著一切處 但淨本心 使六識 出六門 於六塵中 無染無雜 來去自由 通用無滯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行


어찌하여 무념이라 이름하는가? 만일 모든 법을 보더라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이것이 무념이니, 작용을 일으킨 즉 일체처에 두루 하되 일체처에 집착하지 않고, 다만 본심을 깨끗이 하여 육식(六識)으로 하여금 여섯문(六門)을 나오더라도 육진(六塵) 가운데 물들고 뒤섞임이 없어서, 오고 감에 자유롭고 널리 쓰되 걸림이 없으므로 이것이 곧 반야삼매며 자재해탈이고 그 이름이 무념행이니라.


若百物 不思 當令念絶 卽是法縛 卽名邊見 善知識 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法者 至佛地位


그러나 만일 백가지를 다 생각하지 아니하고 아주 생각을 끊는 이것은 법에 얽매인 것이며 한쪽에 치우친 견해[邊見]이라 이름하느니라.

선지식아, 무념(無念)의 법(法)을 깨달은 이는 만법에 걸림없이 통하며,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며, 부처님의 자리에 이르느니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죄과(罪過 허물 죄/허물 과) ; 죄가 될 만한 과실이나 허물.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삼불능(三不能) ; 당나라 숭악(崇嶽)의 원규(元珪 : 644 ~716) 선사가 말씀하신 부처님의 3능(三能)과 3불능(三不能).

(1) 3능(三能) - 부처님의 3가지 능한 것.

①일체 상(相)이 공(空)함을 깨달아서 만법의 지혜를 이루시는 것. ②모든 중생의 성품을 다 아시고, 억겁(億劫)의 모든 일을 다 아시는 것. ③한량없는 중생(무량중생)을 제도하시는 것.


(2) 3불능(三不能) - 부처님의 3가지 능치 못한 것.

①결정된 업[定業]은 즉시 멸하지 못함. ②인연 없는 중생을 제도하지 못함. ③중생계를 다 제도하지 못함.


[참고] 『전등록(傳燈錄)』 제4권. '숭악 원규 선사'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283~284.

佛能空一切相 成萬法智 而不能卽滅定業 佛能知群有性 窮億劫事 而不能化導無緣 佛能度無量有情 而不能盡衆生界 是謂三不能也


부처님께서는 온갖 형상의 공(空)함을 깨달아서 만법의 지혜를 이루셨으나 결정된 업[定業]을 즉시 없애지는 못하고, 부처님께서는 뭇 중생의 성품을 다 아시고 억만 겁의 일을 기억하시나 인연 없는 중생을 제도하지는 못하고,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유정(有情)을 제도하시나 중생 세계를 다하게 하지는 못하나니, 이것을 세 가지 능하지 못함[三不能]이라고 말한다.


定業亦不牢久 無緣亦謂一期 衆生界本無增減 更無一人能主有法 有法無主是謂無法 無法無主是謂無心 如我解佛亦無神通也 但能以無心通達一切法爾


결정된 업[定業]이라도 영원한 것은 아니고, 인연이 없다 함도 일기(一期)를 말한 것이고, 중생 세계도 본래 증감(增減)이 없는 것이라서 한 사람도 유법(有法)을 능히 주재하는 자가 없다. 유법에 주재자가 없는 것을 무법(無法)이라 하고, 무법에 주재자가 없는 것을 무심(無心)이라 한다. 가령 내가 이해하기로는 부처님은 본래 신통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다만 무심으로써 온갖 법을 통달했을 뿐이다.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횡행천하(橫行天下)하다 ; 거리낌없이 제멋대로 세상을 나돌아다니다.

*신수(身數 몸·나·자신 신/운수 수) ; 사람의 운수(運數). 사람의 운명(運命)이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수.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힘.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힘.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法)의 힘. ②가르침의 힘. 불법의 공덕. 불•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을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것.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힘.

*신장(神將) ;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신장. 또는 《화엄경》을 보호하는 신장.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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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생활속 정진(요중선)2013. 11. 19. 21:13

§(140) (게송)야래풍우객문선~ / 불법(佛法) 나의 문제 / 생활속에서  생각 단속이 득력 /  생각 일어날  생각을 돌이켜서 본참화두를 들어야.

 

**송담스님(No.140) - 1981년 3월 첫째일요법회(49분) (용140)

 

(1) 약 10분.

(2) 약 9분.

 

(1)------------------


야래풍우(夜來風雨)로 객문선(客聞先)한데  격령사가전묘연(隔嶺思家轉杳然)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십년세사경백변(十年世事驚百變)한데  춘산의구초당전(春山依舊草堂前)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3월 1일 삼일절(三一節) 날입니다.
기미년(己未年) 3월 1일에 3•1 만세(三一萬歲) 사건이 일어난,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잊지 못할 그러한 뜻깊은 날입니다. 우리 민족이 나라를 외국에게 빼앗겨서 국토도 잃고, 목숨도 살아있는 채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이 짓밟히고 있을 때, 33인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의 겨레가 일어섰던 그날입니다.

이조 5백년 동안 당파(黨派) 싸움으로, 서로 자기의 명예와 권리를 위해서 파당을 지어 가지고 상대 당을 갖다가 쫓아내고 죽이고 모략중상(謀略中傷)해 가지고, 피차 그러는 동안에 나라는 망해 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써 그 치욕적인 그런 임진왜란을 당해 가지고 삼천리강토(三千里疆土)가 피바다가 되었고, 그리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당쟁(黨爭)은 치열해졌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써 경술년 한일 합방(韓日合邦)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보호해 준다는 명목을 뒤집어 씌워 가지고, 결국은 우리나라를 삼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수모를 당하게 된 것도 결국은 당파 싸움의 결과로써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한 나라의 백성들이 통치자를 중심으로 해서 온 백성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가지고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을 위해서 합심이 되지 않는 한에는 그 나라는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나라 백성이 자기의 나라를 모든 것을 우선해서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민족을 항시 염두에 두고 서로 힘을 합해서 지켜나가지 않는 한은, 그 나라와 민족은 처음은 차츰 혼란해가다가 결국은 스스로 망하거나 외부에서 침략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한 회사나 단체도 역시 마찬가지고 모든 단체, 모든 것의 근본은 ‘나’ - 한 사람인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마을이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국가가 되고 그러기 때문에, 차츰차츰 그 근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결국은 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나의 문제인 것입니다.

내가 내 몸을, 내가 나의 인격을, 내가 나의 정신을 생각하지 아니하면, 내 몸도 역시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이 가장(家長)을 비롯한 온 가족이 질서가 있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아랫사람은 웃어른을 존경하면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각기 자기의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면서 그 집을 지켜나갈 때에 그 가정은 행복하고 편안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이 일신상(一身上)의 문제도 내가 내 몸, 내 마음을 가다듬지 않는다면 결국은 이 몸뚱이 건강도 나빠질 것이고, 우리의 정신은 황폐해서 결국은 폐인(廢人)이 되고 말 것이고,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태어날 필요조차도 없는 무가치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참선(參禪), 금방 조실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수행인의 마음가짐, 자세 그리고 참선해 나가는데 구체적인 법문이 계셨지만,
내가 나를 다스려 나가지 않는다면, 아무리 절에 몇십 년을 다니고, 아무리 출가해서 선방을 한 철도 빠짐없이 선방으로 선방으로 다니면서 수좌(首座)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마냥 아무런 진취가 없을 것입니다.(처음~10분8초)

 

 

 

 


(2)------------------

 

죽비(竹篦)를 치고 잠시 입선(入禪)을 하겠습니다. 편안하게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십시오.(10분간 정진)

10분간 입선을 했습니다.

처음 오늘 법회에 나오신 분은, 대관절 가만히 앉아서 무엇을 생각하며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한동안 아무도 아무 말 없이 앉았는가? 앉아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며, 어떻게 앉아야 하며, 모다 그러한 것을 전혀 아시지 못하고 궁금한 가운데에 조용히 앉아서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다음 법회에도 빠지지 말고 계속해서 나오시면 차츰차츰 이 참선(參禪)은 목적이 무엇이며, 그 자세는 어떻게 갖고, 또 호흡은 어떻게 하고,
또 아까부터 화두(話頭)란 말이 자주 나오는데 화두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되 어떻게 하며, 모다 그러한 것에 대해서 차츰차츰 구체적으로 이해를 하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 법회가 끝나서 일어서셔서 신발을 신을 때, 신발을 신고 계단을 내려갈 때, 또 역(驛)으로 가시는 그 걸음 걸음, 또 역에 가서 전철을 타실 때, 타고 가시면서, 다 그 찰나 찰나간에 자기의 한 생각을 방일(放逸)하지 말고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단속(團束)을 해 가지고,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일상생활 속에서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무단히 방치해 두지 않고 그 놈을 단속할 줄 아는 거 이것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앉아서나 서서나 그놈이 단속이 되고 공부가 되어 갈 때에 그 사람이 깨닫게 되는 것이지, 꼭 밤잠만 안 자고 며칠씩 버티고 앉아야만 된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원컨댄 솔바람 불고 칡넝쿨 사이로 달이 비치는 그러한 곳에 들어가서,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다. 길이 샘이 없는(無漏) 영원한 조사선(祖師禪)을 관(觀)하고자 하노라.

‘솔바람 불고 칡넝쿨 우거진, 그러한 고요하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이 조사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영원히 하고 싶다.’

문맥상으로 형식적으로 보면 그렇게 해석할 법 하지만, 활구참선은 꼭 저 심산유곡(深山幽谷)-솔바람이 불고 칡넝쿨 사이로 휘영청 달이 밝은 그러한 속에만 들어가야만 된다고 하는 것은 벌써 최상승적인 생각이 아닌 것입니다.

시중(市中)이건, 들녘이건, 속세(俗世)건, 또는 사찰이건, 시냇가건, 또는 산봉우리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그 외경(外境)에 내가 집착하지 않고, 안으로 쓸데없는 번뇌•망상심에 빠지지도 않고,

다못 한 생각 일어날 때 그 생각을 돌이켜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무조건 하고 그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할 때 그 사람에게는 (그곳이) 바로 솔바람이 부는 곳이요, 칡넝쿨 우거진 사이로 달빛이 비치는 심산유곡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대자연 속에서 언제나 쉴 사이 없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설법(說法)이 계속되고 있는 곳입니다.

아무리 깊은 산중에 들어가도 환경에 내가 집착을 하고 잠시도 쉴 사이 없이 번뇌와 망상이 퍼 일어난다면 어찌 그곳을 심산유곡이라 하겠습니까?

부처님 말씀과 조사의 어귀(語句)는 중생심(衆生心)으로 겉으로 읽어 가지고서는 한 글귀도 바로 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40분11초~48분4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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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三一節) ;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지 정책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을 읽어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우리나라의 민족 독립운동, 삼일 운동(3•1 運動)을 기념하는 국경일.
*당파(黨派) ; 조선 시대,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붕당(朋黨) 내에서 다시 나뉜 파벌. *붕당(朋黨)=黨
*모략중상(謀略中傷) ; 속임수로 남을 해롭게 하는 모략과 근거 없는 말로 남을 헐뜯어 명예나 지위를 손상시키는 중상을 아울러 이르는 말.
*삼천리강토(三千里疆土) ; 남북의 길이가 삼천리라 하여 우리나라의 땅을 이르는 말.
*한일 합방(韓日合邦) ; [역사] 대한 제국 융희 4년(경술년, 1910)에 일제가 강제적으로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삼은 일.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에 독립을 되찾았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수좌(首座)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게송) ‘야래풍우객문선(夜來風雨客聞先)~’ ; [매천집 제3권] (매천 황현의 시문집) ‘復至文星齋’ 참고.
[참고] [매천집(梅泉集)](제3권)-시(詩):신축고(辛丑稿)
〇 다시 문성재에 이르러〔復至文星齋〕 - 한국고전번역원- 박헌순(역)
밤에 부는 비바람 소리 나그네가 먼저 듣고 / 夜來風雨客聞先
고개 너머 고향 집이 더욱 아득히 생각나네 / 隔嶺思家轉杳然
첫 찻잎 딸 시기는 이미 제철 지나갔고 / 已過頭番摘茶候
한 뙈기 인삼 밭은 장차 묵밭이 되어 가리 / 將蕪一畝種蔘田
늙은이 회포를 익숙하게 동갑 벗과 주고받고 / 老懷慣與同庚話
시 짓는 비결은 부지런히 후배에게 전해 주네 / 詩訣勤從後輩傳
세상일은 십 년 동안 백번이나 변했지만 / 世事十年驚百變
봄 산은 예전처럼 초당 앞에 우뚝하네 / 春山依舊草堂前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 ; 전남 광양 출생. 한말의 시인, 문장가, 우국지사. 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의 치욕을 당하자, 절명시(絕命詩) 4편을 남기고 9월10일 음독 자결하였다.

 

 

 

 

 

------------------(2)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반가부좌(半跏趺坐) ;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아무 ; 어떤 사람을 특별히 정하지 않고 가리키는 말.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주로 좌선(坐禪) 수행을 말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방일(放逸 놓을 방,제멋대로 일) ; 거리낌없이 제멋대로 마음 놓고 지냄.
*단속(團束) ; ①주의를 기울여 다그쳐 보살핌. ②규칙, 법령, 명령 등을 어기지 않게 통제함.
*조사선(祖師禪) ; 교외별전(教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조사선이라 한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심산유곡(深山幽谷) ; 깊은 산속의 조용하고 외진 골짜기.
*휘영청 ; 달빛 따위가 몹시 환하게 밝은 모양을 나타내는 말.
*시중(市中) ; 사람들이 많이 오가며 일상적으로 생활하거나 활동하는 곳.
*속세(俗世) ; 불가(佛家)가 아닌 일반 사회를 이르는 말.
*외경(外境) ; 자기 몸 밖의 모든 바깥 세계. 객관적 대상. 자연계. 외부환경(外界).
*거두절미(去頭截尾)하다 ; 어떤 일의 요점만 간단히 말하다.
*의단(疑團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를 의인화한 부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