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뭣고 화두2013. 12. 7. 09:53

§ 이뭣고 (화두 드는 법)

**송담스님(No.88) - (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용088)

 

약 5분.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는 ‘이뭣고?’ 라고 합니다.

표준말로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정확히 쓰면 일곱 자인데, 경상도 말로는 ‘이뭣고’ 석자입니다. 그래서 참선 해나가는 데에는 ‘이뭣고?’ 이렇게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해 왔습니다.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뿐이어야 합니다.

참선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슬플 때는 슬픔에 빠져 가지고, 점점 슬픈 생각이 더 일어나도록 이 생각 • 저 생각 • 점점 묵은 생각을 일으켜 내 가지고 점점 더 슬픔에 빠집니다.
어떤 괴로운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 근심 걱정을 없앨려고 하지를 않고, 점점 근심이 더 치성하게 일어나도록 근심이 될 만한 사건을 더욱 더 연상을 해내서 더 근심에 빠집니다.

성이 날 때에는 빨리 그 생각을 돌이켜서 성나는 생각이 가라앉도록 해야 자기에게 유익할 텐데, 점점 성이 더 일어나도록 이 생각 • 저 생각 • 고약한 그 지나간 생각을 되살려 내 가지고 더 깊이 그 성나는 생각에 빠져 들어가서 자기가 자기를 괴롭혀 들어갑니다.
이래 가지고 중생은 불붙은 데다가 스스로 석유와 휘발유를 끼얹어 가지고 점점 더 불을 치성하게 만들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픈 생각이 나도 바로 ‘이뭣고?’, 기분 나쁜 생각이 일어나도 바로 ‘이뭣고?’, 괴로운 생각이 나도 그 괴로운 생각이 다음 두 번째 생각으로 번져나기 이전에 바로 ‘이뭣고?’ 로 돌아와 버리는 것입니다.

도인이라고 해서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되, 그 일어나는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바로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면 그 생각으로 인해서 점점 괴로움에 빠져 들어가서 나중에는 그 한 생각이 원인이 돼 가지고 건강을 상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한테 그 좋지 않은 생각을 터뜨려 가지고 다른 사람 마음까지 괴롭히고 일까지 그르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생을 살아가니 생사윤회에 안 떨어지고 배기겠습니까?

참선은 일어나는 한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 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백 번 일어난다 허드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이 좋은 생각이건 나쁜 생각이건, 슬픈 생각이건 괴로운 생각이건 성나는 생각이건, 과거 생각이건 현재 생각이건,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이···뭣고······?” 호흡을 깊이 들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합니다.

무슨 기분 나쁜 소리를 들어서 성이 푹 솟구치더라도, 심호흡을 깊이 들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나가는 것입니다.(68분47초~73분2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

 

回 이 법어는 송담(松潭)스님께서 1978년 10월 1일, 「법련사 불일 청년회」의 청법으로 설하신 내용이며, 스님께서 직접 편집하신 것을 『불일회보』(1988년 6. 7. 8월)에 게재했었던 원고임.

Posted by 닥공닥정

•§•(249) 생각생각에 공안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염념상연(念念相連)해라. 의단독로  그놈 연속해 나가는 것이 타성일편(打成一片)지경 / 회광자간, 회광반조.

 

**전강선사(No.249) - 고담화상법어1(임자.72.6.2)(37분)법문에서. (전249)

 

(1) 약 6분.

(2) 약 5분.

 

(1)------------------

 

항상 공안(公案)을 조주(趙州) 공안을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인고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때기 이빨에 털났느니라.

무슨 도리(道理)냐 말이여. 따져가지고는 되지 않는 도리여. 아무리 이놈을 수수께끼처럼 별 생각을 다 붙여봐도 고것은 안되거든, 선(禪)이라는 것은. 그러니 그걸 주의하라는 것이여.

그러헌 의리선(義理禪), 해석선(解釋禪), 따지고 붙이는 선(禪) 그것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그런 종자(種子)는 여지없이 쫓아내 버리고 그것은 기르지 않아야 돼. 그래야 활구학자(活句學者) 활구선(活句禪)이지. 그런 것이 생겨 나오면 못 쓰거든.

다언(多言) 말을 하지 말고 공안선(公案禪)을 해라. 공안을 떠-억 염념상연(念念相連)해라. 생각생각에 그 의심(疑心)을 연(連)해라. 의심(疑心), 알 수 없는 놈을 연속해라. 시심마(是甚麼)면, ‘이뭣고?’ ‘이-뭣고?’

‘이-’ 아! ‘이-’한 놈이 있다 말이여 분명히. ‘이-’해 놓고 보니 뭐냔 말이다. 도대체 뭐냔 말이다. 별 놈의 이치를 다 때려 붙여 봐라. 모양있는 지견을, 모양있는 무슨 모양을 다 때려 붙여 봐라. 오색을 다 갖다 붙여보고 오색없는 지경을 다 붙여봐라. 그런건 공안참선(公案參禪)이 아니야.

‘이뭣고?’ 알 수 없는 하나가 떠억 나와 가지고는 그만 그놈 하나 뿐이다. 전체가 그놈 하나 뿐이여. 가나 오나 그놈 하나 뿐이여. 일체처(一切處)에 그놈 하나 뿐이여.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그놈 하나 뿐이여. 똥 눌 때라도 오줌 눌 때라도 밥 먹을 때라도 그놈 하나 뿐이야.

그놈 하나 다뤄 나가는데 뭐가 그리 어렵냐 그말이여. 천하에 쉬운 것이 그뿐인데.

이놈을 생각생각이 연(連)해라. 전념(前念)이 끊어지기 전에 곧 후각(後覺)이, 뒤에 깨달은 그 알 수 없는 놈이 항상 꼬리를 연(連)해. 염념상연(念念相連)을 해라.

좋지, 참 재미나지.

그 일념(一念)이, 알 수 없는 일념이 독로(獨露)된데 가서 일체 중생고(衆生苦)가 거기 없다. 중생고가 뭐냐하면,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중생고인데 그저 그 분별식이 일어나 가지고는 못 견디지.

그 분별식 가운데 얻지 못한 것이 있고, 되지 않은 일이 있고, 무슨 애가 탄 일이 있고, 뭐 별 놈의 중생고가 다 거기서 일어난다. 중생고 퍼 일어나는 것이 망상번뇌(妄想煩惱)에서 일어나는건데,
망상번뇌가 붙덜 못혀. ‘이뭣고?’에는.

‘이뭣고?’.
‘이뭣고?’ 그놈이 또 ‘이뭣고?’. 찾는 놈 또 찾는구나 ‘이뭣고?'
‘이뭣고?’한 놈을 또 ‘이뭣고?'한다.

아, 이렇게 법상에 올라와서 아침마다 일러주는데 무엇을 물어 사석(私席)으로, 사석으로 물을게 뭐여. 물을게 있어야 묻지.

‘이뭣고---?’
‘이뭣고?’해 놓고는 알 수 없는 ‘이뭣고?’ 그 의심 그놈의 덤뱅이가 그놈이 참, 그것 ‘이뭣고?’라도 깰래야 깰 수 없고 흩을래야 흩을 수 없고 그놈 뭐.
잘~ 그놈 해보지. 당장에 거가서 직하(直下)에 거가서 무변리(無變理)거가 있고 변함이 없는 도리가 있고.

그대로가 독로(獨露)인대, 의단독로(疑團獨露) 그것이 바로가 그대로가 그놈 연속(連續)해 나가는 것이 그것이 타성일편(打成一片)지경인대, 언제나 언제나 오래오래 몇 철 몇 해 해가지고사 타성일편이 올라는가 그때 올라는가. 요런 놈의 소견(所見)봐라.

직하에 그만, 타성일편도 오는 것이고, 지금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도 거기서 오는 것이고.

항상 상연(相連)해라. 그 상연(相連) 참 묘(妙)하다.(11분29초~17분24초)

 

 

 

 


(2)------------------

 

‘이뭣고?’ 하나 득력(得力)해서 그만 타성일편(打成一片) 되어보지. 깨닫지 못하고 죽더라도 그 일편(一片)이 그대로 가서 그만 정법신심가(正法信心家)에 가서 그대로 몸뚱이 턱 받아 가지고 나와서 또 ‘이뭣고?’하는 것이여.

상대목전(相對目前)해라. 목전(目前)에 탁 드러나야 한다. 독로, 독로(獨露)가 그거야. 눈 앞에, 이 내 눈 뜬, 이 눈깔 눈 앞에도 나타나지마는 심안(心眼)에, 내 마음 눈이 있지 않은가. 이 눈 보다도, 눈 감아도 보이는 눈이 있지 않은가. 눈 감아도 보이는 눈 앞에 탁 나타날 것이다.

분금강지(奮金剛志)해라. 금강같은 뜻을 가지고 분(奮)을 한번 내라. 스르르르 풀어지는 고런놈의, 그 금방 났다가 금방 없어진 놈의 고런놈의 마음, 거 뭣 할거냐. 그게 도심(道心)이냐. 도 닦는 마음이 그러하냐. 금강(金剛)같은 마음을, 분(奮)을 내라.

분심(奮心)이 제일이다. 왜 내가 나를 모르다니. 왜 내가 내 면목(面目)을 내 낯빤대기를 내가 몰라. 내 콧배기를 내가 몰라. 우째서 모르냐 말이여. 무슨 까닭으로 몰라? 왜 못 봐.

그런 뜻을 한번 가지고 일념만년(一念萬年)이다. 그 생각이, 그 깨짐이 없는 그 철저한 마음, 그 뭉태기는 만년(萬年)이다. 만년이면 만년 지낸들 없어지나, 벌써 만년인대. 만년이면 또 만년이지. 또 만년이면 또 만년이지. 억만년(億萬年)이지.

그 염(念)이 도렴(道念)이 ‘이뭣고?’마음이, 이처럼 견고하고 이처럼 맺어져 한 덩어리로, 풀려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는 화두(話頭)가 자꾸 민첩하게 아름답게 틈없이 온당한 한 덩어리 떠억 될때 회광자간(廻光自看)해라

회광자간(廻光自看)이라는 건, 다시 더 맹렬하게 ‘이뭣고?’를 한번 봐라. 관(觀)해라.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판치생모 그 의지(意旨)를, 조주(趙州)가 ‘판때기 이빨에 털 났다’고 했으니, ‘어째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놈을 한번 심안(心眼)으로 회광(廻光)해라.

가만~히 관(觀)을 해라. 관(觀)이 의단(疑團)뿐이거든.
알 수 없는 놈 뿐이다 그말이여.
알 수 없는 놈 딱 틀림없이 나온 놈이 그놈이, 그것이 반조(返照)여.
회광반조(廻光返照)를 달리 했다가는 큰일나.
여기 다 그렇게 해 놨으니.

그놈을 찰이(察而)하고 부관(復觀)해라. 살피고 또 다시 관(觀)하라 하는건, 의심(疑心)을 더 맹렬히 하고 후렴(後念)을 더 알 수 없는 의심을 자꾸.

의단 뿐이니까, 의단독로(疑團獨露)니까.
관(觀)이나 부관(復觀)이나 찰(察)이나 전부가 의단(疑團)이라는 거여. 의심 하나 뿐이여.

의심을 가만~히, 꼭 ‘어째서 판치생모~’해서 되나.
나중에는 그만 판치생모가 그대로 의심 하나 뿐인데, 이뭣고가 그대로 의심 하나 뿐인데.

살피고 다시 관하는(察而復觀) 것이 그것이 거기에 가서, 용맹도 더하고 신심도 더하고 분심도 더하고 못된 중생념이 붙지 못하게, 거기서 뭐 그러헌 무슨 별념(別念)이 생겨 나올 것이 뭣이 있나.(20분4초~24분53초)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