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삼요)2015. 5. 22. 14:39

§(336) 삼요(三要)—신심,분심,의심 / (게송)약인투득상두관~ / 화두순숙 의단독로 확철대오, 공안을 아는 것이 아니라 확 봐 버린다 / 의심관(疑心觀)을 터득해야 한다.

깨달을 수 있다고 믿어야 깨닫게 되는 것이지, 해보지도 않고 ‘나는 깨달을 수가 없다’ ‘나는 중생이기 때문에 나는 지옥 밖에는 못 간다’ 자꾸 스스로를 자포자기하고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는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른 중생을 위해서, 형제·친구를 위해서 다 양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부에 대한 욕심, ‘왜 나는 여태까지 깨닫지 못했는가?’한 이 공부에 대한 분심은 천하 없이도 양보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의심을 할려고 해도 자꾸 화두가 잘 잊어버린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그분은 신심이 철저하지 못하고, 분심이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이 안 나는 것이다. 참으로 신심이 돈독하고 분심이 있다면 의심을 안 할라야 안 할 수가 없어! 일부러 의심을 안 하고 딴 생각을 좀 해볼려고 해도 안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그 의심을 스스로 이렇게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속으로 하면서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관하는 것입니다. 이 ‘관(觀)한다’고 하는 것.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데, 이건 말로는 이렇게 하지만 실지로 자꾸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뭣고?’ 해보면 처음에는 그 의심관을 잘 터득을 못하지만, 일구월심(日久月深) 자꾸 이 호흡과 맞춰서 해 나가다 보면 그 알 수 없는 묘한 그 의심관을 스스로 터득하게 돼.


**송담스님(No.336)—87년 8월 첫째일요법회(87.08.02) (용336)

 

(1) 약 15분.

(2) 약 16분.

 

(1)------------------

이 참선을 하려면 그래서 대신심(大信心)이 있어야 돼. 대신심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대분심(大憤心)이 있어야 하고, 대의심(大疑心)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세 가지를 삼요(三要)라 그러는데,

대신심이란 것이 무엇이냐? 부처님께 절을 많이 하고, 부처님께 공양을 많이 올리고, 그런 것도 신심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만,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있어서 대신(大信)이라 하는 것은 ‘내가 부처다’하고 믿는 거여.
내 자신이 본래 부처라고 하는 것,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내가 부처인 것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지, 본래 내가 원만한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 깨달으면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가 있다』고 하는 자신감을 가져야 이것이 바로 대신심이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중생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 실지 내용에 있어서는 부처님과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밥 먹고 옷 입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성내고 괴로워하고 하는 이러한 작용이 우리의 마음, 우리의 몸뚱이 속에 살아있는 부처님의 작용인 것입니다.

우리가 한 생각을 미(迷)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마음도 내고, 탐심도 내고, 진심(瞋心)도 내고 그렇지만, 그 자체는 다른 데에서 그러한 작용이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부처님한테서 나오는 작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면 자기의 몸뚱이 속에 살아계신 부처님이 분명히 계신 증거이기 때문에 자기도 깨달을 수 있다고 깊이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고서는 아무리 참선을 해봤자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깨달을 수 있다고 믿어야 깨닫게 되는 것이지, 해보지도 않고 ‘나는 깨달을 수가 없다’ ‘나는 중생이기 때문에 나는 지옥 밖에는 못 간다’ 자꾸 스스로를 자포자기하고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는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한 그런 큰 신심을 가져야 한다.


둘째는 대분심을 일으켜야 한다. 그런 신심이 있어도 분심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공부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분심은 바로 용기인 것입니다.
용기를 내서 분심을 내야 공부를 계속해서 해 나갈 수가 있고 깨달음에 나아갈 수가 있지, 분심이 죽어버리고 용기가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과 모든 조사, 선지식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을 해서 생사해탈을 해 가지고 중생교화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이렇게 육도(六途)를 윤회하고 있는가?
그러한 생각으로 분심을 일으켜야 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명예나 권리나 또는 재산 모다 그런 것에 관해서는 시기를 내고 질투를 내고,
그래 가지고 피투성이가 되어가지고 싸우면서 심지어는 동포끼리 싸우고, 심지어는 형제 친구끼리 싸우고, 심지어는 재산 때문에 형제간에도 싸우면서,
어째서 영원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한 이 깨달음을 위해서는 왜 그러한 분심을 낼 수가 없느냐?

정말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부모한테도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이 분심을 내고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의 이 욕심은 아무한테도 양보해서는 아니됩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른 중생을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다 양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부에 대한 욕심, ‘왜 나는 여태까지 깨닫지 못했는가?’한 이 공부에 대한 분심은 천하 없이도 양보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밤을 패서 공부하고, 시간을 아껴서 공부하고, 다른 사람은 앉아서 하더라도 자기는 앉을 시간이 없으면은 서서 하고, 차를 타면서 하고,
방부(房付)를 들이고—금년에도 88명이나 방부를 들이고 보살님네들이 정진을 하고 계십니다마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선방(禪房)에 와서 공부는 못하신다 하더라도,
‘내가 어찌 질 수가 있겠느냐! ’ 집에서 살림하고, 빨래하고, 소지하고, 밥 짓고 또는 직장에서 이를 갈아붙이고 한 생각 한 생각을 무섭게 돌이켜 가며 다잡이를 해 간다면 그분이 먼저 대도를 성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신심을 가지고 그 다음에 대분심을 가져야 한다.


세 번째 가서 큰 의심(疑心)을 가져야 한다. 아까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을 통해서 화두를 일러 주셨습니다.
‘판치생모(板齒生毛)’와 ‘이뭣고?’ 두 가지를 말씀을 하셨는데, 이미 조실 스님으로부터 ‘판치생모’ 화두를 타신 분은 계속해서 ‘판치생모’를 하셔야 하고,

조실 스님께 ‘이뭣고?’를 타셨거나 또는 산승으로부터 탔거나, 오늘 화두를 타시려는 분, ‘이뭣고?’
‘이뭣고?’ 그 말은 한문으로는 ‘시심마(是甚麼)’ 그러는데, 우리말로는 번역하면 ‘이것이 무엇인고?’ 그말이거든.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을 경상도 말로는 ‘이뭣고?’ 그러거든. ‘이, 것, 이, 무, 엇, 인, 고’하면 일곱 자인데 ‘이, 뭣, 고’하면 석 자란 말이여. 그래서 간단하면서도 의심이 잘 나.
그래서 옛날부터 ‘이뭣고?’ 화두를 들 때에는 경상도 말로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이냐?’에서 ‘이것’을 무엇을 지칭해서 ‘이것’이라 하냐 하면은,
『지금 말하는 바로 이놈』 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듣고 계시는데 ‘무엇이 듣고 있느냐?’ 그말이거든. 『듣는 그놈』

그놈이 바로 욕도 할 줄도 알고, 칭찬할 줄도 알고 또 정든 사람이 죽으면 슬퍼할 줄도 알고,
그놈이 한 번 삐뚤어지면 찰나 간에 악마가 되기도 하고, 그놈이 한 생각 탁! 돌이켜서 착하게 쓰면은 천사가 되기도 한다 그말이여.

그놈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될 수도 있고, 비로자나 부처님이 될 수도 있고, 관세음보살이 될 수도 있고,
그놈이 나찰 귀신도 될 수도 있고, 독사도 될 수도 있고, 아귀도 될 수도 있고, 지옥찌꺼기가 될 수가 있다 그말이여.

어떻게 해서 그놈이 그렇게 찰나간에 천당에 올라갔다가, 찰나간에 지옥에 떨어졌다가, 찰나간에 독사 배때기로 들어갔다가, 찰나간에 돼지가 되었다가, 찰나간에 사람이 되었다 하는 것이냐 그말이여.

신기하고 묘하기가 어디다가 비유할 데가 없어. 그래서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이거거든. ‘이뭣고?’

의심을 안 할 라야 안 할 수가 없어!

‘의심을 할려고 해도 자꾸 화두가 잘 잊어버린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그분은 신심이 철저하지 못하고, 분심이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이 안 나는 것이다.
참으로 신심이 돈독하고 분심이 있다면 의심을 안 할라야 안 할 수가 없어! 일부러 의심을 안 하고 딴 생각을 좀 해볼려고 해도 안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눈을 감으나 뜨나, 앉으나 서나, 그냥 제절로, 자동으로 그냥 ‘이뭣고?’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누워서도 ‘이뭣고?’ 밥 먹으면서도 ‘이뭣고?’ 똥을 누면서도 ‘이뭣고?’

누가 나한테 욕을 하고 억울한 소리를 해도 ‘이뭣고?’ 옛날부터서 해 내온 그 습기(習氣)가 있어서 잠깐 부애가 날 듯 하다가도 냉큼 ‘이뭣고?’ 탁! 챙겨 버리면 ‘이뭣고?’거든.
언제 속상할 겨를도 없고, 언제 억울하게 생각할 겨를도 없고, 미워할 생각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뭣고?’ 하나 탁! 챙길 줄 알면 그냥 이 몸뚱이 요대로 바로 천사가 되고 싶으면 천사가 되고, 관세음보살이 되고 싶으면 관세음보살이 되고,
자기가 일부러 독사가 되고 싶으면 독사도 되고, 호랑이가 되고 싶으면 호랑이가 되고, 지옥에도 한번 가보고 싶으면 가 볼 수가 있다 그말이여.

쏜살같이 지옥에 떨어지다가도 탁! 한 생각 돌이켜 버리면 금방 천상에 올라간다 그말이여.
죽어서 지옥에 가고, 죽어서 천당에 가는 그렇게도 믿어야 하고 사실 그렇기도 하지만, 이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죽어서 가는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 찰나간에 생사 문제가 더 소중하고 더 무서운 것입니다.

지금 이 몸뚱이 살아서 이렇게 숨 쉬고, 밥 먹고, 옷 입고 할 때에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화두에 의단이 독로하도록 잡두리를 해서 공안을 타파하도록 노력한 사람은 죽어서 어디에 갈 것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인연 따라서 천당에 가게 되면 가는 거고, 인연 따라서 지옥에 가게 되면 가는 것이지, 지금부터 걱정할 필요도 없고, 참으로 죽어서 지옥에 가기 싫고, 축생에 가기 싫거든 지금 ‘이뭣고?’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지금 한 생각 등한히 해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이지, 지옥에 갈 사람이 미리부터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한 생각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따라서 지옥에도 가고, 천당에도 가고, 극락에도 가고, 인도환생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과를 믿어도 그렇게 믿어야 옳게 믿는 것이고, 그렇게 믿어야 최상승 학자의 믿음인 것입니다.(26분5초~40분33초)

 

 

 



(2)------------------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하면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다.
만약 사람이 상두관(上頭關)을 투득(透得)해 버리면, 공안을 타파(打破)해서 생사관(生死關)을 뚫어 버리면 비로소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너그러운 것을 깨닫게 되더라.

공안을 타파하지 못하고 우리의 생사관을 타파하지를 못하면 이 우주 법계와 산하대지가 이렇게 넓건마는 갈 곳이 없습니다. 어디를 향해서 가겠습니까?

마치 파리란 놈을, 방안에서 문을 닫고 방바닥에 앉은 파리를 내키면 천장에 붙고, 천장에 앉은 파리를 내키면 동쪽 벽에 가 붙고, 동쪽 벽에 붙은 파리를 내키면 서쪽에 와 붙고, 어디가 붙든지 자기가 사방과 상하에 붙지.
지가 붙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이냐? 어디를 갈 것이냐?

공안을 타파하지 못하고, 생사관을 투득을 하지 못하면 갈 곳이 어디입니까?
죽어서 지옥에 가고, 축생이 되고, 아귀 나찰이 되고, 중음신(中陰身)이 되어가지고 허공계를 헤매면서 배고프고 목마르고 영원토록 육도윤회를 벗어나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화두를 열심히 참구(參究)를 해서 그 공안을 타파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고 보면 산하대지가 정말 걸림이 없어.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여. 인간의 분별계(分別界)에 떨어지지 아니해. 인간의 분별계란 게 무엇이냐?
탐진치 삼독이 인간의 분별계요. 오욕락이 인간의 분별계요. 희로애락이 인간의 분별계요. 생로병사가 인간의 분별계요. 빈부귀천이 인간의 분별계여.
어디에 떨어지거나 인간의 분별계에 떨어졌다 하면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인간 분별계에 떨어지지 아니하면,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이냐. 푸른 물, 푸른 산 무엇에 걸릴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이북은 여행도 마음대로 못하고, 이사도 마음대로 못하고, 가고 싶은 데로 마음대로 가지를 못한다고 그럼니다. 우리야 설악산에 가고 싶으면 설악산에 가고, 오대산에 가고 싶으면 가고, 지리산에 가고 싶으면... 어느 좋은 산이 있다면 누가 못 가게 할 사람 하나 없습니다.
어느 강, 어느 바다가 좋아서 갈라고 하면 어디라도 가지 우리가 못 갈 것이 없습니다.
어디로—부산 살다가 서울에 오든지, 서울 살다 부산을 가든지, 팔도에 제주도가 되었건, 강원도가 되었건, 이사가고 싶은 데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분별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화두를 참구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수무잡하게 되면 밥을 먹으나, 옷을 입으나, 똥을 누나, 차를 타나, 빨래를 하거나, 밥을 짓거나 거기에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다맛 의단이 독로하도록 단속을 해 나가면 화두를 들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게 돼. 순수무잡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돼. 시간가는 중도 모르고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조차도 모릅니다.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생각도 없고, 누가 와서 나를 깨닫게 해 주기를 바라는 생각도 없습니다.
다맛 순수하고 깨끗하고 맑은 의단만이 독로하도록 그렇게 지혜롭게, 급한 생각도 없고, 늘어진 생각도 없이 다못 묘한 의심관(疑心觀)만이 독로하도록 해 가는 것입니다. 억지로 힘을 쓸 것도 없고.

그렇게 해서 그 순수무잡한 의단이 독로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아! 좋다’는 생각도 내지를 말며, ‘이러한 경계가 영원히 갔으면’ 그런 생각도 내면 못쓰는 것입니다. 벌써 그 생각 내면 한 생각에 아주 그 경계가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해 나가는데 있어서 안되면 안된다고 번민을 하고, 공부가 화두가 순일하게 되어가면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을 내고 기쁜 생각을 내. 이것이 다 공부를 바르게 할 줄 모르는 사람의 하는 짓인 것입니다.


잘 잡드리를 해서 그 경계가 깨지지 않도록 의단을 잡드리 해가면 어떠한 경계에 그 풍선이 터지듯이,
풍선을 부는 사람이 풍선을 계속해서 불다가 중단해 버리면 다시 바람이 피식 새 버리고, 그래서 잘 조심스럽게 불어야지 대번에 처음에 느닷없이 되게 불면 커지기도 전에 툭 찢어져 버리는 거고,

풍선을 불 때 요령 있게 잘 불면 점점점점 점점점점 커져 가지고, 커지다 커지다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지경에까지 가서 계속해서 잘 불어 나가면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은 팡! 최고로 커질 때 팡! 터지도록.

우리가 화두를 의심해 나갈 때 처음에는 화두를 들면 잠깐 들 때만 의심이 있다가 금방 딴 생각이 들어오고 또 들면 또 그렇고, 그래도 계속해서 들면 나중에는 한 번 들어서 5분도 가고, 10분도 가고,

아침에 일어나서 들던 화두가 아침 먹을 때 까지 있고, 아침 식사 중에도 화두가 흩어지지 않고 식사가 다 끝나고도 그 화두가 고대로 있고, 그 화두가 점심 때까지 되도록 그 화두가 흩어지지 않고, 그 화두가 저녁 먹을 때 까지 잠자리에 들 때에도 화두가 고대로 있다 그말이여.

화두를 든 채 자리에 누웠는데 언제 잠이 든 중 모르게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새로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엊저녁에 잘 때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어있고,

이래서 순일무잡하고 그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고 그 경계,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경계가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펑! 터지는 것입니다.

분별로 따지지 안해도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이 확연(確然)하고, 천칠백 공안에 확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여 버린다 그말이여. 따져서 ‘아, 이런 것이다’하고 아는 것이 아냐. 그냥 확 그 공안을 봐 버린 거여.

이것은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이렇게 다 실증(實證) 실오(實悟)를 해서 우리에게 그 조사의 어록(語錄)과 법어(法語)를 통해서 소연(昭然)하게 그 증거를 다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화두를 타신 분은 그전에는 이 법회가 끝난 다음에 별도로 그 화두와 불명과 오계를 설하는 법회를 가졌었는데 이번에는 바로 이 법회 시간에 화두를 바로 일러 드립니다.
아까 조실스님께서도 일러 주셨지만 다시 한번 화두를 일러 드립니다.

‘이뭣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화두를 한번 따라서 해 보십시오. ‘이뭣고?’ 해 보세요. (신도분들)‘이뭣고?’

실지로 여러분이 참선하실 때에는 그렇게 소리를 내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약 3초 동안 정지했다가, 숨을 내쉬면서 ‘이뭣고.... ?’
‘이뭣고?’를 길게, ‘이뭣고......?’ '고'를 길게 빼는 것입니다. 숨이 다할 때까지 ‘이뭣고?’
숨이 다 나갔으면 또 스르르르 숨을 들어마셔.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그 의심을 스스로 이렇게 관(觀)하는 것입니다.
‘관(觀)한다’하는 것은—관도 역시 하나의 생각인데,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이뭣고?’ 속으로 하면서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관하는 것입니다.

이 ‘관(觀)한다’고 하는 것.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데, 이건 말로는 이렇게 하지만 실지로 자꾸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뭣고?’ 해보면 스스로 그 의심관(疑心觀)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의심관을 잘 터득을 못하지만, 일구월심(日久月深) 자꾸 이 호흡과 맞춰서 해 나가다 보면 그 알 수 없는 의심관, 그 묘한 그 의심관을 스스로 터득하게 돼.
그 의심관을 터득을 해야 참선의 맛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어. 알 수 없는 그 의심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가야 망상을 끊으려고 안 해도 저절로 끊어지고, 망상을 일으키지 아니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거기서 의심이 끊어져.

속이 상하고 분심이 나고 할 때에도 숨을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이뭣고?’
자꾸 몇 번 하면 치밀어 오른 놈이 스르르르 가라앉아 버리거든, 이거 해보신 분은 다 아는 것입니다.

큰 의심을 가진 사람은 결국 크게 깨닫는 거고, 의심이 적은 사람은 깨달아도 적게 깨닫고, 의심이 없는 사람은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40분34초~56분29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석가모니(釋迦牟尼) : sakya-muni의 음역. 샤카족의 성자(聖者)•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다잡이 ;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습기(習氣) ; 과거의 인식•행위•경험•학습 등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부애 ; 부아. 분하고 노여운 마음.

 

 

 



------------------(2)

*(게송) ‘약인투득상두관~’ ; ①『석문의범(釋門儀範)』 다비문(茶毘文)—쇄골편(碎骨篇) 참고. ②卍新纂續藏經 제65책 《高峰龍泉院因師集賢語錄》 제13권 ‘涅槃法語門—散灰’ 참고.
*상두관(上頭關) ; 조사관(祖師關).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투득하다(透得-- 통할 투,얻을 득) ; (사람이 무엇을)막힘이 없이 환하게 깨닫다.
*화두(공안)를 타파(打破) ;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생사관(生死關) ; 생사의 관문.
*중음신(中陰身) ; 이 생(生)을 끝내고 다음 생(生)을 받을 때까지의 중간 존재 상태.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분별계(分別界) ; 분별 경계(分別境界).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확연(確然)하다 ; (어떤 사실이나 증거가)아주 분명하고 확실하다.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실증(實證) ; 실제로 수행해서 깨닫는 것. 실증의 반대는 비증(比證 추론에 의해 깨닫는 것).
*실오(實悟) ; 진실의 깨달음.
*어록(語錄) ; 조사어록(祖師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소연(昭然)하다 ; (일이나 이치가)밝고 뚜렷하다.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