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법문2017. 12. 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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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7) (게송)백년지시잠시간~ / 참선을 하면 생로병사, 흥망성쇠가 두려울 것이 없고, 그것들이 전부 내가 참나를 깨닫게 한 좋은 수도장, 법문, 선지식이다 / (게송)백계천방지위신~.

이 세상에 몸을 태어난 사람은 오래 살면 팔구십, 혹 백살 넘은 사람도 있으나 ‘이뭣고?’를 열심히 한 사람은 죽음이 돌아온다 해도 겁날 것이 없고, 염라대왕 앞에 끌려간다고 해봤자 겁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안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면 다행이고, 설사 확철대오를 못했다 하더라도 ‘이뭣고?’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서 자기의 본참공안을 떠억 ‘이뭣고?’ 이 한마디를 열심히 하면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두려울 것도 없고, 흥망성쇠(興亡盛衰)도 두려울 것이 없고, 온 세계가 전쟁이 일어나서 불바다가 된다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어.

어피차 이 세계는 성주괴공을 면틀 못하고, 이 몸뚱이를 가진 사람은 결국은 죽음을 면할 수 없으나,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한 사람은 생로병사, 성주괴공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것들이 전부 내가 참나를 깨닫게 한 좋은 수도장이요, 법문이요, 선지식(善知識)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송담스님(No.787)—2017년 동안거 결제 및 용화선원 중창불사 낙성식(17.12.2) (용787)

(1) 약 21분.
(2) 약 9분.
 

(1)------------------

백년지시잠시간(百年只是暫時間)이요  막파광음당등한(莫把光陰當等閒)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요불경염노안(若要不經閻老案)인댄  직수참투조사관(直須參透祖師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백년지시잠시간(百年只是暫時間)이요  막파광음당등한(莫把光陰當等閒)이다.
인생이 오래 살아봤자 백년인데, 그 백년이라고 한 것이 금방 지나가버리고 잠깐 동안에 지나가 버린다 그말이여.
막파광음(莫把光陰)을 당등한(當等閒)이다. 그러니 시간을 절대로 그럭저럭 등한(等閒)히 지내지 말 것이다.

약요불경염노안(若要不經閻老案)인댄, 만약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서 절절매면서 고문을 받지 않을라거든,
직수참투조사관(直須參透祖師關)이다. 바로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철저히 참(參)하야 뚫을지니다.

인간이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백년 살기가 어려운데 그래봤자 그 백년이라는 세월이 잠깐, 뭐 하는 것 없이 지나가 버린 것이여.

그러니 특히 불법(佛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의지해서 참나를 깨닫는 수행하는 비구 · 비구니 · 청신사 · 청신녀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은 정말 시간이 1분 1초, 하루 이틀, 시간 지내가는 것을 그럭저럭 지내지 말고 철저하게 한 생각, 두 생각으로 벌어지기 전에—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입으로 맛을 보거나, 육체를 통해서 춥고 더운 것을 느낄 때,

그때 그때 바로 거기에서 떠억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 이뭣고를 하는 사람은 ‘이뭣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무자,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는 사람은 판치생모,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1분 1초를, 한 생각 한 생각을 놓치지 말고, 거기에 즉(卽)해서 자기의 본참공안을 들어 가는 사람이 그 사람이야말로 정말 활구참선을 철저하게 해서 결정코 이 몸 이렇게 살아 있을 때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돌이킴으로서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고, 한 달 두 달을 그렇게 살고, 앞으로 석 달 동안 삼동(三冬) 결제를 하는데, 석 달 동안 어찌 보면 긴 시간이지만 금방 내년 정월 보름날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 석 달 동안을 어떻게 지내느냐? 어떻게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본참공안을 돌이켜서 참나를 찾는 수행을 하느냐?

각자 그것을 철저히 단속할 줄 아는 사람은 제대로 발심(發心)한 사람이요, 제대로 정진을 할 줄 아는 사람이요.
1분 1초를 그럭저럭 지내면 하루 이틀이 그럭저럭 지내가게 되고, 하루 이틀이 그럭저럭 지내가는 사람은 한 달, 두 달도 금방 지내가고, 그렇게 그럭저럭 지내면 백년을 산다고 해봤자 금방 죽음의 문에 도달하고마는 것이여.

염라대왕 앞에 가서 문초(問招)를 받고 고문을 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몸을 받아 났을 때, 정법(正法)을 만났을 때 철저하게 한 생각을 단속할 줄 알면 그것이 바로 염라대왕 앞에서 겁날 것이 없을 것이여.
우리는 언젠가는 금방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마는 하루하루를, 1분 1초를,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만 하면 염라대왕 앞에 가서 겁날 것이 없을 것이여.

이 몸뚱이 태어난 사람은 오래 살아봤자 백년 이쪽저쪽에 다 몸을 버리고 죽어 가는데, 죽음을 언젠가는 맞이할 수밖에는 없는데, 죽음을 맞이해서 염라대왕 앞에 가서 끌려가서 그때 가서 후회하고 한탄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 이 호흡할 때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무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이렇게 자기의 본참공안에 철저하게 살면 죽음이 돌아와도 마지막 숨 끊어질 때까지 ‘이뭣고?’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더라도 그 앞에서도 ‘이뭣고?’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 “네가 일생 동안 무엇을 했느냐?” 반드시 질문을 하고 고문을 할텐데,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 “뭣 했느냐?” 물어 보면, 어떤 스님은 “놀고먹지는 안 했습니다” 이렇게 대답한다고 그럽니다.

“놀고먹지 않으면 무엇을 했느냐?”
“‘이뭣고?’ 했습니다”

“지금도 ‘이뭣고?’가 되느냐?”
“지금도 ‘이뭣고?’ 하고 있습니다”

염라대왕 앞에 가서 끌려가봤자 겁이 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몸을 태어난 사람은 오래 살면 팔구십, 혹 백살 넘은 사람도 있으나 ‘이뭣고?’를 열심히 한 사람은 죽음이 돌아온다 해도 겁날 것이 없고, 염라대왕 앞에 끌려간다고 해봤자 겁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안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면 다행이고, 설사 확철대오를 못했다 하더라도 ‘이뭣고?’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서 자기의 본참공안을 떠억 ‘이뭣고?’
이 한마디를 열심히 하면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두려울 것도 없고, 흥망성쇠(興亡盛衰)도 두려울 것이 없고, 온 세계가 전쟁이 일어나서 불바다가 된다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어.

마지막 숨 끊어질 때까지도 ‘이뭣고?’
어피차 이 세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우리의 몸에는 생로병사가 있는데,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열심히 한 사람은 성주괴공이 바로 있는 온 세계가 우리의 도 닦을 수도장(修道場)이고, 이 몸뚱이가 별로 결국 생로병사를 면할 수 없으나 생로병사 그 1초 1초가 참나를 찾는 수행장이요,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 귀로 듣는 모든 소리, 코로 냄새 맡고,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느끼는 이 모든 것이 그 찰라찰라가 참나를 찾는 수행 도량이 되고마는 것이여.

그러니 어피차 온 세계는 성주괴공을 면틀 못하고, 이 몸뚱이를 받아난 사람은 생로병사를 면할 수는 없으나, 성주괴공이 있는 온 세계는 우리가 도 닦을 도장이고, 생로병사가 있는 이 육체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도(修道)해서 참나를 깨닫는 이 중요한 몸뚱이여.

이 도를 안 닦은 사람은 이 몸뚱이를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고 그래봤자 결국은 늙으면은 병나고, 병나면 죽게 되는데, 염라대왕 앞에서 “니가 살아 있을 때 뭣했냐?”
내놓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돈을 벌어놨다고 부자라고 해서 염라대왕이 알아주지도 않고, 높은 벼슬을 했다고 해도 염라대왕 앞에 내놔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염라대왕 앞에 가서 겁없이 떳떳하게 내놓을 것은 ‘이뭣고?’뿐입니다.

염라대왕 앞에 가서도 “니가 살아 생전에 뭣했느냐?”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어피차 이 세계는 성주괴공을 면할 수가 없고, 이 몸뚱이를 타고난 사람은 생로병사를 면할 도리는 없습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한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 몸뚱이를 가진 이상은 경우에 따라서 병이 날 수도 있고, 병이 나면 괴로울 수도 있으나 그 찰나찰나가 내가 ‘이뭣고?’해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좋은 발판이요, 좋은 기회요, 좋은 수도장이요, 법문(法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 비구 · 비구니 · 청신사 · 청신녀, 여러 도반들께 내가 구십 세가 되도록 믿고 의지하고 살아 온 그 요긴한 대목을 여러분께 이렇게 간곡히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피차 이 세계는 성주괴공을 면틀 못하고, 이 몸뚱이를 가진 사람은 결국은 죽음을 면할 수 없으나,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한 사람은 생로병사, 성주괴공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것들이 전부 내가 참나를 깨닫게 한 좋은 수도장이요, 법문이요, 선지식(善知識)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읊은, 인생이 오래 살아봤자 백년 사는데, 잠깐 지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머지않아서 곧 백년 한(限)이 차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을 소중히 알아야 하는 것이여.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상 자기의 본참공안을 놓치지 말고, 잊어버렸다고 해도 금방 돌이켜서 ‘이뭣고?’

이것이 염라대왕 앞에 가서 떳떳하게—“니가 살아 있을 때 뭣을 했느냐?” 염라대왕은 돈 많이 번 사람, 권리가 높은 사람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염라대왕 앞에 떳떳하게 내놓을 것은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이뭣고?’를 항상 챙기고 또 챙기고, 속이 상할 때도 그 속상한 것을 생각하면 점점 속이 상하는 거고, 괴로울 때도 괴로운 것만 생각하면 점점 괴로운 일 면할 길이 없는 것이여.
‘이뭣고?’ 천하 간단한 한마디지마는 ‘이뭣고?’ 한마디는 이것이 주문(呪文)도 아니고, 간단한 한마디 의심(疑心)이지마는 생사해탈(生死解脫)할 수 있는 요긴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판치생모를 하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무자 화두를 하는 분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자기가 받은 본참화두(本參話頭), 본참공안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상 챙기고 또 챙겨서 나중엔 챙기지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천지가 무너진들 걱정할 것도 없고, 설사 일생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겁이 날 것이 없습니다.

활구참선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참나를 찾는 수행을 하는 여러 도반들은 내가 이렇게 간곡히 말씀드린 것을 깊이 명심하고 일체처 일체시에 항상 자기의 본참공안을 놓치지 않도록 열심히 정진을 할 것을 부탁을 하면서 오늘 정유년 동안거 결제일을 맞이해서 이렇게 간곡히 말씀드리니 내가 금년 겨울을 넘길런지, 사주 본 사람은 금년엔 내가 죽으리라고 그러는데, 죽고 사는 것은 내가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고, 죽을 때까지 여러 도반들에게 이런 간곡한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을 나는 대단히 감사하고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간곡히 말씀드린 말씀을 깊이 명심하고 열심히 정진을 하겠다고 마음으로 결심한 분을 손을 한번 들어보세요.(처음~20분29초)

 



(2)------------------

오늘은 불기(佛紀) 2561년 정유년 음력 10월 보름날 결제날인데, 동안거 결제날입니다.
결제날을 의해서 여러분께 간곡히 당부 말씀을 이대로 끝나고, 오늘이 용화사 중창불사(重創佛事) 낙성식(落成式)을 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능파 스님—능파 스님은 전강 조실 스님 상좌(上佐)고, 나와 사형(師兄) 사제지간(師弟之間)인데 일생 동안을 잘 수행을 하고 살아오다가 오늘이 사후 5재날입니다. 능파 스님을 위해서 오늘 5재 법요식을 하니 여러분들도 간곡한 마음으로 5재의 법요식에 경건한 마음으로 5재를 맞이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용화사 중창불사 낙성식이 있으니, 앞으로 사진을 찍게 되니 한 분도 빠지지 말고 사진 다 함께 찍어주시길 부탁을 합니다.


백계천방지위신(百計千方只爲身)이요  부지신시진중진(不知身是塵中塵)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막언백발무언어(莫言白髮無言語)하라  차시황천전어인(此是黃泉傳語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백계천방지위신(百計千方只爲身)이요. 백 가지 계획과 천 가지 방법이 인생이 살아가면서 다못 이 몸뚱이를 위해서 먹고 입고, 돈도 벌고 일도 하고 그런데, 이 몸뚱이를 엄격히 돌이켜보면은 티끌 가운데 티끌이다.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 티끌이 모여가지고 이 몸뚱이가 이루어져 있는데, 분석을 해보면 머리끝에로부터서 발톱 끄터리까지 티끌이 모여가지고 거기에 다맛 혈관이 통해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나 분석을 해보면 티끌이 모인 뭉텅이에 지내지 못해.

막언백발무언어(莫言白髮無言語)여. 머리에는 오십 세, 육십 세가 되면은 흰머리가 나는데, 그 흰머리 아무 말이 없지마는 차시황천전어인(此是黃泉傳語人)이여, 염라대왕이 ‘얼마 안 있으면은 너를 데리러 갈테니 그리 알아라’고 하는 염라대왕이 보내온 소식이다 그말입니다.

이것이 중국의 향엄 선사가 남겨 놓으신 게송(偈頌)인데,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온갖 계획을 세우고 활동을 하고 사업도 하고 일을 하는데, 그래봤자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 네 가지의 그 여러 가지 재료가 모여가지고 이 몸뚱이를 형성하고 있으나,

오십 살, 육십 세 되다보면 귀 위로 뒤로 흰머리가 하나씩 둘씩 나는데, 그 흰머리가 다른 것이 아니고 염라대왕 황천에서 ‘너를 언젠가는 데리러 갈테니 정신을 차려라’하는 황천에서 보내온 소식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명심하고,
흰머리가 나기 전부터 열심히 ‘이뭣고?’를 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상 본참공안을 놓치지 않도록 단속을 잘해 놓으면 흰머리가 나와서 그때 가서 걱정하고 겁낼 필요가 없는 거여.

열심히 ‘이뭣고?’를 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의단이 독로해서 항상 참나를 찾는 이 공부를 등한히 아니한 사람은 흰머리가 나도 걱정할 것 없고, 설사 죽음을 맞이해서 숨이 가빠진다 하더라도 그때도 의단이 독로하도록 화두를 들면 숨이 끊어진들 걱정할 것이 없어.

염라대왕 앞에 가서 끌려가 봐서 “무엇을 하다 왔느냐?” 물어봤을 때 겁날 것이 없어.
“‘이뭣고?’하다 왔습니다”

“이뭣고가 무엇이냐?”
“이 몸뚱이 끌고다니고 오늘 여기 대왕 앞에 왔으나 나는 ‘이뭣고?’를 하니 겁날 것이 없습니다. 염라대왕이 나를 알아서 천당에를 보내던지, 지옥에를 보내던지, 축생으로 보내든,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하도록 보내던지 염라대왕이 알아서 하십시요”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겁이 안 나도록 하려면 이렇게 살아 있을 때 단전호흡 하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해 놓으면 염라대왕 앞에 가더라도 겁날 것이 없습니다.
내가 오늘 이렇게 간곡히 말씀드린 것을 가슴속 깊이 명심하시고 열심히 ‘이뭣고?’를 해 주시길 부탁합니다.

입으로 다하지 못한 말씀을 이 주장자(拄杖子)에게 맡기고 내려가겠습니다.(20분30초~29분18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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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백년지시잠시간~’ ; [한가로운 도인의 길—나옹화상법어집](김달진 역주,세계사) p185에 있는 ‘경세(警世 : 세상을 경계함)’ 참고.
*등한(等閒)히 ; 무관심하거나 소홀하게.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절절매다 ; ①어찌할 줄 몰라서 정신을 못 차리다. ②어떤 사람이나 일 따위에 눌리어 기를 펴지 못하다.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참(參)하다 ; 참구(參究)하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에서]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 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용화선원)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삼동결제(三冬結制)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결제,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문초(問招 물을 문/부를·결박할 초) ; 물어보기[問] 위하여 불러옴[招]. 죄나 잘못을 따져 묻거나 심문(審問 자세히 따져 물음)함.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생로병사(生老病死) ; 중생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4가지 고통. 곧,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
*흥망성쇠(興亡盛衰) ; 흥하고 망함과 성하고 쇠함. 곧 어떤 사물·현상이 생겨나서 소멸하는 전 과정을 이르는 말이다.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찰나(刹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①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②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刹과 剎은 동자(同字).
*수행(修行 닦을 수/행할 행) ; ①궁극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실천하는 것. 행하는 것. ②오로지 한 생각에만 집중하여, 한결같이 그것을 잊지 않고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노력.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읽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수도(修道) ; 불도(佛道)를 수행(修行)함.
*불도(佛道) ; ①불과(佛果).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 무상보리(無上菩提)를 말한다. ②불과(佛果)에 이르는 방법. 불과를 성취하여 성불하기 위한 인행(因行, 깨달음의 원인이 되는 행)을 말한다. ③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는 가르침.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주문(呪文) ; ①어떤 바람이나 원망을 실현시킨다고 믿으며 외는 글귀. ②다라니(陀羅尼)의 글.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사주(四柱) ;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年月日時)의 네 간지(干支). 또는 이에 근거하여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알아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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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佛紀) ; 불가(佛家)에서 쓰는 연기(年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해를 기준으로 한다.
*중창(重創 거듭할 중/만들 창) ;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지음.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낙성식(落成式 준공할 낙/이룰 성/의식 식) ; 건축물이 완성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행하는 의식.
*상좌(上佐 윗 상/도울 좌) ; 윗사람을 도운다는 뜻. 곧, 한 스승의 제자를 일컬음.
*사형(師兄) ; 한 스승 밑에서 자기보다 먼저 그 스승의 제자가 된 스님를 높여 이르는 말. 법형(法兄)이라고도 한다.
*사제(師弟) ; ①한 스승의 제자로서 자기보다 나중에 계(戒)를 받은 스님을 일컫는 말. 법제(法弟), 제제자(弟弟子)라고도 한다. ②스승과 제자. 사자(師資)와 같은 말이다.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사대(四大) ; ①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을 말함. 대(大)란 원소란 뜻. 일체의 물질을 구성하는 네(四) 가지 원소(大).
(1)지대(地大) : 굳고 단단한(堅) 것을 성(性)으로 하고, 만물을 실을 수(負載) 있고, 또 질애(質礙)하는 바탕. 질애(質礙)란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여 다른 존재와 서로 융화하지 못한다는 뜻. (2)수대(水大) : 습윤(濕潤)을 성으로 하고, 모든 물(物)을 포용(包容)하는 바탕. (3)화대(火大) : 난(煖)을 성으로 하고, 물(物)을 성숙(成熟)시키는 바탕. (4)풍대(風大) : 동(動)을 성으로 하고 물(物)을 성장케 하는 바탕.
②신체를 말함. 원래, 신체는 지•수•화•풍의 4대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함.
*황천(黃泉) ; 저승(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로 다시 태어남.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1분32초)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주장자(拄杖子 버틸 주/지팡이 장/접미사 자) ; 수행승들이 좌선(坐禪)할 때나 설법(說法)할 때에 지니는 지팡이.

 

 

Posted by 닥공닥정
천도재(영가천도)2015. 9. 22. 09:03

§ (2)전강 선사 영가천도 법문(생야시 사야시) / 송담 스님 영가천도 법문.(심수만경전~)

 

(1) 전강선사(약 10분)

 

 

(2) 송담스님(약 8분)

 

 

(1)------------------

 

생야시(生也是)  사야시(死也是)니라

두두비로(頭頭毘盧)요  물물화장(物物華藏)이니라

 

그거 그렇게만  놓으면  무슨 도리(道理)인지  수가 있어야지.

영가(靈駕)께서는 뭐라고 말씀을 하던지 내가 ()  가지고 하면은  알아듣지마는, 여기에 모이신 사부대중(四部大衆)들도  알아들어야   아니여.

 

『생야시(生也是)』요  말은, 우리가  몸뚱이 받아 가지고  사대(四大) 육신 몸뚱이를 가지고,

 ()우리 말하는 영가(靈駕), () 몸뚱이 속에서  사대색신(四大色身) 몸뚱이를 끌고 댕기는 그것을 ()이라 하니까.

몸뚱이 하나 어머니 뱃속에서 얻어가지고 나온 것을 ()이라 하니까, 『생() ()다』 그말이여.

 

‘생() ()’라는 것은 당장 이렇게  몸뚱이 얻어 나온 이것도 ().

 ()라는 것은  ()’ 인데, ‘ ()’자는 옳을 ()’ 인데, 옳다는 () 인데, ‘이것이다, 옳다  말은 『본래 생사가 없다』 그말이여. 알아듣겄죠?

 

 

『사야시(死也是)』다.  몸뚱이를 가지고 이렇게 갔다왔다 성숙시위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黙動靜)  송장 몸뚱이 가지고 이런다마는, 그래 가지고 있다  몸뚱이는 죽는다.

그놈 몸뚱이 내던질라면 그놈의 죽는 () 무섭지! 이 죽는 것도 ()니라. ‘ ()’, ‘옳을 ()’.

 

죽는 , 몸뚱이 고녀러 것이 이놈이 죽지,

 몸뚱이 끌고 댕기는 주인공은 거기 죽는 것도 없고, 죽는 때도 묻지 않고, 송장한테  상관도 없이, 그대로 독로(獨露)  () 자리는 그놈이 ()니라.  생사 없다’ 그말이여.

 

() (), () ()니라. 고렇게  말이여.

 

『두두(頭頭) 비로(毘盧). 머리 머리가 비로(毘盧)니라』  말은,  술어가 어려워서 알기 어렵지. 말해 주어서 몰라서야, 뭐여?

 

두두(頭頭) 비로(毘盧)라는 것은 모도(모두) 여러 가지  세상에 모도 물질꽃이던지, 냉기(나무)던지, 무슨  대갈빡(대가리)이던지,

 그저 세상에 두두(頭頭), 머리 머리일체  머리,  머리, 그저 까치, 까마구 대가리 머리, 배암 대가리 머리, 일체 두두 모두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체두(體頭)  () 그말이여.

 

 ()’자여. ‘ ()’.

 옳다.  생사 없는 도리다 그말이여. ‘ 진리니라’ 그말이여. 진리여, 그게 참다운 이치여. 

 

산이다, 물이다, 돌이다, 솔냉기(소나무), 밤냉기(밤나무), 감냉기(감나무),

고런 것이 우리 사람의 분별식(分別識)으로 망상 그걸 때려 붙여서 솔냉기라고 이름을 지어 붙였고, 밤냉기라고 이름을 지어 붙였고, 까마구라고 이름을 지어 붙였고, 뱀이라고 이름을 지어 붙였지,

 

 자체에 들어가서는 뱀이 뱀이라는 것도 없고, 솔냉기가 내가 솔냉기다라는 것도 없고,

솔냉기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푸른 상(相)도 없고, 솔냉기는  크다 적다, 일체 제상(諸相)이 거기 없느니라. 본래  생사(生死) 없는 진리다. 

 

진리(眞理) 영존(永存)이다.  진리라는  영존이여. ‘있다 없다’하는 법이 없어.

일체 물질도 불생불멸(不生不滅)인데, 일체 물질도 원소불변(元素不變)이여. 원소가 변한 법이 없고 항상 그대로여. 진리는 영존하는  자리여.

 

본래 생사가 없고 본래 죄업(罪業) 없건마는,  진리 하나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 하나를 내가 바로 얻지 못했기 때문에,

번뇌 망상 속에 휩싸여서  지었다하면은 죄상(罪相) 휩싸여서, 그만 () 가지고는 죄를 받느니라. 허니  진리영존(眞理永存) 자리로 돌아가자. 

 

() (), () (), 두두(頭頭) (), 일체가  ()  ()했나? 『돌()!   한번  놓고서는,

거그다가서  진리 하나, () 하나,  () 진리. 그놈이 진리영존(眞理永存) 자리다. 거가서  처백힐  같으면은 ! 웬일이여. 『돌()!

 

 

회수간산취류하(回首看山醉流霞)   의수침면일이사(倚樹沈眠日已斜)니라

나무~아미타불~

 

! 그런  모도(모두) 번뇌 망상 깨달지 못하면 인생이라는 것은 처처(處處) ()이니라.

깨닫지 못한 인생이라는 것은 그저 죄에 ()하고, 그저 잘못한 데 착()하고, 그저 일체처(一切處) ()하고, 두두(頭頭) 모도 애착(愛着) () 가지고는 그만  놈의 죄업만 지으니,

 

 진리영존(眞理永存) 자리를 보덜 못허고, 찾덜 못허고,  지경이 되아서,

()() 중생이여, ()하면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기 때문에 그런 생사 때꼽재기가 모두 끼어 있어서 밤낮 그놈으로써 일체다. 

 

중생은 ()  고통으로써 그만 근본 () 되아 가지고는 진리는 꿈에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죄업이 항상 있어서, 본래 없는 죄업이 항상 있어서, 그놈의 죄끼리만 죄만 받으러 따라댕기는 것이 그것이 중생이다.

 

 이러냐? 돼지는 어째서 돼지 몸뚱이 받아 가지고  숭악한 찌께기나 먹고 살쪄 키워 가지고는 몸뚱이로 바칠 , 점점이 포(脯) 떠낼 ,  죽을 지경 당하는 것이  이러냐?

애착고(愛着苦)니라. ()해서 모도 중생업(衆生業) 애착(愛着) 되어 그러하느니라. 

 

! 한번 걷어 버리고,  진리영존(眞理永存) 자리  깨달라 () 번지면은 일체업(一切業) 무슨 구타부득(狗他不得)이다. 일체 죄업이 어디가 붙느냐?

그러니 모도 (), 진리영존(眞理永存) 자리 (), 확철대오 하는  근본 (), 근본 도리. 

 

마침 회수간산취류하(回首看山醉流霞). 머리를 돌이켜 산을 보니 흐르는 안개에 취한다.

 흐르는 안개,  산에 흐르는 안개 츠르르르 내려오는 대자연이로구나. 그것도 대자연이지. 거가 무엇이 붙어 있나? 

 

해가 넘어가는데 냉기(나무) 기대 졸음에 잔다(倚樹沈眠日已斜).

 졸음에 잠깐 들어 조는 거나 마찬가지지 무슨 생사냐 그것이. 죽고 사는 생사가 어디 붙어 있느냐? 그것이 모도 생사 없는 해탈묘용(解脫妙用) 아니냐!  ()

 

 

 

 

 

 

 (2) 송담스님(약 8분)

 

(2)------------------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허고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니라

나무~아미타불~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허면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니라

나무~아미타불~

 

마음은 일만 경계를 따라서 굴러가.(心隨萬境轉)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 굴르는 곳마다 실로 능히 그윽해.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하면,  흐름을 따라서  성품을  버리면,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 기뻐할 것도 없고 또한 슬퍼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근심할 것도 없는 것이다.

 

오늘 49재를 맞이한 그리고 오늘 천도재(薦度齋)에 동참한 여러 영가들의 유족과 친지들 그리고 만년위패에 모신 법보 영가들,  자리에 초청한 우주법계에 모든 유주무주(有主無主) 영가들,

본래 생사 없는 도리, 생사 없는 진리에 계합(契合) 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유족들께서도 영원히 아주 돌아가셨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없이 슬픔이 일어나겠지만, 돌아가신 것이 아니여.

다만 인연 따라서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헌옷을 벗었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옷을 갈아입을려면 누구든지 입고 있던 헌옷은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헌옷을 벗었다고 해서 그것을 아까워  것이야 없고 섭섭해  것이 없어.

헌옷을 벗는 것은  옷을 입기 위해서 헌옷을 벗는 것이라, 그렇다면 무엇이 슬퍼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그리고 진리에 있어서는 생사(生死)가 없는 것이지만 인연 따라서 헌옷을 벗고  옷을 입듯이,

 몸뚱이를  세상에 받아  사람은 인연 따라서 다시   몸뚱이를 벗어버리고  몸을  받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라고 할까, 풍류라고 할까?

 

삼세제불(三世諸佛) 역시 일단 몸뚱이를 받아  이상에는 인연 따라서   몸을 벗고,   몸을 받어.

역대조사(歷代祖師) 역시 그렇고,  우주에 있는 모든 인간 모든 생명체도 또한 그러한 것입니다.

 

봄이 왔다가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뒤에 다시 겨울이 오고, 겨울이 지난 뒤에 다시 봄이 오듯이,

세계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 있고, 우리의 몸뚱이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우리의 마음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 있어.

 

우리의 마음에  생각이 일어났다가, 잠시 머물러 있다가, 다른 생각으로 발전을 했다가,   생각이 없어지면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고,

우리의 마음에 생주이멸(生住異滅) 영원이 계속되는  우리의 몸뚱이의 생로병사도 또한 영원히 끊일 날이 없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몸뚱이에 생로병사,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마음에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생각을 단속을 하는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이여.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상 이뭣고?’ 챙기고, ‘이뭣고?’로서 슬픔도 대처해 나가고, 괴로움도 그놈으로서 극복해 나간다면 결정코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것입니다.

 

그러면 생사 속에서 자유를 얻게 되어.

생로병사 속에서 영원한 열반(涅槃)의 즐거움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부탁하노니, 유족들은 돌아가신 이의 슬픔을 발판으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결정코 금생에 깨닫도록 그것을 목적으로 해서 열심히 정진을 하신다면,

영가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설한 불보살(佛菩薩) 법문(法門)을 몸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것입니다.  ()

 

 

 

 

 

------------------(1)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 ()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사대색신(四大色身) ; 사람의 몸을 이르는 . 사람의 몸이 , , , 바람(,,,) () 원소()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중국에서 () • () • () • () •  () 오행(五行) 말하듯 인도에서는 옛날부터 () • () • () • 바람() 사대(四大)로써 자연계(自然界) 온갖 것에 대한 구성요소(構成要素) 말하였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드러날 ) ; 홀로() 드러나다().

*비로(毘盧) ;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약칭. 비로자나불은 진리  자체인 법신(法身) 의인화하여 형상화한 부처님.

비로자나(毘盧遮那) vairocana 음사(音寫), 해석하면 변일체처(遍一切處), 광명변조(光明遍照),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 모든 곳에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

진리는 어떤 특정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 속에 구현되어 있는 것이므로, 진리가  부처라고 하는 비로자나불의 관점에 서면 일체 모든 것이 부처라고   있다.

따라서 두두(頭頭) 비로(毘盧) 말은 삼라만상 일체가  부처 아님이 없고 진리 아님이 없다는 말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분별식(分別識) ; 팔식(八識) 가운데 6 의식(意識) 말한다.  의식은 차별하여 사유하고 판단하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 ; ①모습, 형태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위() () 생각().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 행위.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돌(咄) ; ①탄식하는 소리. 놀람을 나타내는 소리. 쯧쯧! 어허! ②꾸짖는 소리. 호통치는 소리. 떽! 어흠!

*(게송) ‘회수간산취류하(回首看山醉流霞) 의수침면일이사(倚樹沈眠日已斜)’ ; ‘머리를 돌이켜 산을 보니 흐르는 안개에 취한다. 해가 넘어가는데 나무에 기대 졸음에 잔다’

[참고] 『용성선사어록(龍城禪師語錄)』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 문인(門人) 동산 혜일(東山慧日) 찬집(撰集) | 금천今天 옮김) 제1장 선지식 참문(參問知識章).

還歸海印寺할새 頌曰

伽倻名價高靑丘, 明心道師幾往來. 矗矗奇巖疊鱗高, 密密柏樹相連靑. 無限白雲滿洞鎻, 洪鐘轟轟碧空衝. 回首看山醉流霞, 倚樹沉眠日已斜.

 

해인사로 다시 돌아오셔서,

“가야산의 명성과 평판이 청구靑丘에 높으니 마음 밝힌 도사들이 얼마나 왕래하였던가!

우뚝 솟은 기암은 비늘처럼 포개어져 있고 빽빽한 잣나무는 서로 이어져 푸르구나.

무한한 흰 구름은 골짜기마다 가득하고 크게 울리는 범종 소리는 푸른 하늘에 사무친다.

고개 돌려 산을 보다가 저녁노을에 취해서 나무에 기대어 깊이 졸다 보니 해는 벌써 기울었네!”

라고 게송을 읊으셨다.

 

*(게송) ‘回首看山醉流霞 倚樹沈眠日已斜’ ; 『전당시(全唐詩)』 540권 이상은(李商隱)의 시 ‘화하취(花下醉)’ 참고. ‘尋芳不覺醉流霞 倚樹沈眠日已斜 客散酒醒深夜後 更持紅燭賞殘花’

*때꼽재기 ; 때가 여러 겹으로 엉겨붙은 조각이나 부스러기.

*() : ①중생이 번뇌에 의해 업을 만들어  혹업(惑業, 미혹에 바탕을  행위. 번뇌) 이끌려 사는 . 이를 6종류로 나누어 육취(六趣)라고 한다. (道, 途)라고도 한다. 특히 악취(惡趣), 악도(惡道) 일컬음. ②내세로 향하는 .

*애착(愛着) ; 사랑하여 집착함. 애집(愛執).

*() ; 깨달은 바를 다시 한번 점검하여 확인하는 .

*구타부득(狗他不得) ;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 상태. 평온한 경지.

*묘용(妙用) ; 신묘한 진리의 작용. 뛰어난 작용.

 

 

 

 

 

------------------(2)

 

*(게송) 심수만경전~’ ; [직지(直指)] (白雲和尙) 마나라(摩拏羅) 존자 게송 참고.

*천도재(薦度齋) ;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 해탈의 바른 길로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유주무주(有主無主) ; ①주인(영가를 인도해 줄만한 인연있는 사람) 있거나 없는. ②제주(祭主) 있거나 없는.

*계합(契合 맺을 계, 합할 합) ; (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들어맞음.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부처님[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 받아 계승해  대대의 조사(祖師).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 하는데,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 [불교] 삶과 죽음,  생사(生死)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 인간으로서의 완성.

*참선법(參禪法)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이뭣고(是甚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 1700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우리의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 ,   ()이다.

이뭣고?(이뭐꼬)'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뜻은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뭣고·····?” 이렇게 의심을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안됩니다.

화두(공안)  우주세계에 가득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1700인데,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나가면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1700공안이 일시(一時)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화두 조금  보고, 안되면   화두   보고, 이래서는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화두 철저히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34~7822) [ ‘참선법 A’ 에서]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 음사. 멸(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

·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없이 무엇이나  열반이며 어느 때나  열반이다. 이것이  열반인 것이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 () 불타(佛陀) 준말. 각자(覺者)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 )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 진리에 이르는 .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24) 화두드는 법 / 최상승법 /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것이 생사(生死) / 불보살, 선지식 아닌 사람이 없다 / 중생심이 바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체(體).

대혜(大慧) 『서장(書狀)』에 보면 공부하다가 어려운 역경계가 나타나는 것이 마장이 붙어서 그런 게 아니라 한고비 올라가기 위한 아주 중요한 경계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생사입니다. 그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생사의 연속이 바로 일평생(一平生)이 되고, 그것이 바로 육도윤회(六途輪廻)가 되고, 그것이 무량겁(無量劫)이 되는 것입니다.

 

이 끊임없이 거듭되는 이 생사의 물결 속에서 바로 생사해탈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그 생각이 슬픈 생각이건, 기쁜 생각이건, 또는 노여운 생각이건, 과거의 생각이건,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없애려고 하지 말고, 그 생각에서 ‘이뭣고?’하는 것입니다.

 

발심한 사람,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한 사람이라야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불보살을 친견할 수가 있고, 선지식을 바로 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이뭣고?’하면 그것이 공부인데,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공부가 안된다고 왜 그러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냐. ‘안된다’고 생각함으로써 자기로 하여금 ‘공부 안되는 사람’으로 스스로 낙인(烙印)을 찍는 것이 된다.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

 

떠오르는 그 많은 중생심(衆生心), 번뇌 망상심, 생멸심 그것을 꼭 나쁘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성내는 놈, 슬퍼하는 놈, 기뻐하는 놈, 원망하는 놈, 아퍼하는 놈, 괴로워하고 외로워하는 놈, 이것이 전부 다 진여불성으로부터서 일어나는 한 거동이요 모습일진대, 그 거동 그 모습을 버릴려고 할 것이 없어.
바로 그놈을 계기로 해서 ‘이뭣고?’ 이렇게 들어가면 그것이 바로 자기 진여불성을 찾는 가장 가깝고 빠르고 묘하고 간단한 길이다.  중생의 번뇌 망상심 그놈을 버리고 어떠한 진여불성을 찾아서 깨달으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무량겁을 두고 공부를 한다해도 그 사람은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화두 하나만 제대로 들을 줄 알면 그 사람은 갈 곳이 없습니다. 결정코 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24)—기미년 동안거 결제 법문(79.10.17) (세등24)

 

(1) 약 18분.  (2) 약 21분.

 

 

 


(1)------------------

오늘 기미년 삼동(三冬) 결제일을 맞이해서 조실 스님의 공안법(公案法)—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있어서 공안법에 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공안법은 이론으로서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천 칠백 공안이 있습니다.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 칠백 공안인데, 문헌에 오르지 아니한 것을 말하자면 우주법계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전체가 공안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 한 공안, 한 화두(話頭)를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그 한 공안에만 철저하게 실참실수(實參實修) 해 가지고, 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천 칠백 공안, 무량무수의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그러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최상승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입니다.

뒤에 있는 문을 좀 잠깐 열어서 차운 공기가 들어오게 좀 하십시오. 다들 열어 주세요. 확 열어 주세요.


오늘부터서 석 달 동안 결제(結制)에 들어갑니다.
결제 동안은 부모의 부고(訃告)가 오더라도 그 부고장(訃告狀)을 본인에게 보여주지 아니하고 사무실에 보관해 놓았다가 내년 정월 15일에 해제한 뒤에사 그 부고를 본인에게 전할 만큼, 결제 동안에는 그렇게 규칙이 엄격하게 출입을 금하고 목숨을 바쳐서 정진을 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일단 방부(房付)를 들이면은 그래 가지고 방(榜)을 딱 짜고 정진에 들어가면 세상의 모든 인연을 다 끊고 인사로 왔다갔다하는 것을 다 끊고, 오직 생사대사(生死大事) 하나만을 위해서 대중의 규칙을 자발적으로 지키면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짜면 짠 대로 먹고,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먹고, 맛이 있으면 있는 대로 먹고, 없으면 없는 대로 먹고, 오직 의식주 문제는 인연에다 맽겨.

그리고서 밤 9시부터서 그 이튿날 새벽 3시까지 여섯 시간을 제외하고는 일체 잠을 스스로 허락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9시부터 3시까지 정식으로 잘 수 있는 시간이지마는 그동안에 보면 한 시간이라도 덜 자고 공부하고, 2시간이라도 덜 자고 공부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자는 체하고 누웠다가 가만히 일어나서 10시까지 11시까지 다시 일어나서 혼자 공부하는 분도 있고,

새벽 3시에 일어나는 것이 원칙이지만 2시나, 1시쯤 미리 일어나서 옆의 사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미리 일어나서 공부하는 이도 있고, 이렇게 해서 ‘어쨌든지 금생에 결정코 대도를 성취하리라’ 이러한 결심을 가지고 정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만 그럴 것이 아니라 선원 밖으로 외출하는 것도 ‘시내의 병원에 간다, 무슨 일이 있어서 나간다’ 외출하는 것도, 일주문 밖에 나가는 것도 철저히 옛날에 다 그것을 단속을 했던 것입니다.
시내에 어떠한 신심 있는 단월(檀越)로부터서 공양(供養) 청장(請狀)을 받어도 결제 중에는 가지를 아니 하고,

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때까지는 대중적으로 특별히 허용될 때를 제외하고는 일체 경전이나 어록(語錄)을 읽고 보고 하는 것도 허락이 되지를 아니했습니다.

9시부터 3시까지 삼경(三更) 외에는 잠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인사로 왕래하는 일체 출입을 금하고, 또 경전 같은 것을 읽고 하는 그런 것도 허락하지 아니하고,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말이 없다시피,
이렇게 철저하게 공부를 해서 3년을 그렇게 해서 만약에 확철대오를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혀를 빼서 쟁기로 가는 발설여경지옥(拔舌犂耕地獄)에 내가 들어가겠다. 이렇게 몽산(蒙山) 도인께서 맹서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3년을 하면 백발백중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견성(見性)을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증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까 조실 스님 말씀 가운데에도 화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느냐?
참선이라 하는 것은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화두를 어떻게 드느냐? 오직 그 한 점에 도업(道業)을 성취하고 하지 못하고 한 관건(關鍵)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화두는 이론으로써 교리적으로 따져서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론으로 따져서는 아무리 따져봤자 결론이 없는 것입니다.

설사 자기 나름대로 어떤 결론이 얻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 분별심으로 얻어진 것이라 아무리 묘한 답이 얻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욱 중생의 번뇌(煩惱) 망상(妄想)만 치성(熾盛)하게 만든 결과일 뿐,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론으로 따져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따져서 알아맞추는 그러한 참선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참선이요, 의리선(義理禪)이요, 그것은 삿된 참선인 것입니다.
차라리 그러한 참선을 할 바에는 관세음보살 또는 아미타불을 열심히 염송(念誦)하는 것만도 못한 것입니다.


‘이 무엇고?’ 아까 조실 스님께서는 판치생모(板齒生毛),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판치생모 화두를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를 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계신 분 가운데에는 조실 스님으로부터 판치생모 화두를 받으신 분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그분은 천하없는 누가 뭐라 해도 끝까지 그 판치생모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하셔야 할 것이고,
또 시삼마(是甚麽) ‘이 무엇고?’ 시삼마 화두를 하신 분은 시삼마 화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신 분은 정전백수자, 조주의 무(無)자 화두를 하신 분은 조주 무자, 어느 화두를 하던 간에 상관이 없습니다.

무자 화두가 더 좋고, 판치생모가 더 좋고, 시삼마가 더 좋고, 그 공안 자체에 있어서 더 좋고 나쁘고 한 것은 없어.

다못 문제는 자기가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만큼 철저히 믿어지는 선지식, 바로 깨달라서 선지식의 인가(印可)를 받은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그 화두를 받기만 했다면 천칠백 화두 가운데의 어느 화두를 타 가지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화두건 처음부터 한결같이 잘 들리는 화두는 없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잘 들린 듯하다가 얼마 안가서 그렇게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애를 먹고 그러다가, 그 고비를 잘 넘기면서 공부를 지어가면 또 한결 수월하게 되다가, 그렇게 수월하게 계속 잘되어 갔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얼마동안 가다가 뚝 변해 가지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고, 몸이 뒤틀리고 시간이 지루하고 도저히 앉어서 참을 수가 없고, 공부가 더 이상 공부를 지속할 수 없을 만큼 그러한 역경계(逆境界)가 나타나는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부에 마장(魔障)이 붙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분이 있지만, 대혜(大慧) 『서장(書狀)』에 보면 이러한 어려운 경계가 마장이 붙어서 그런 게 아니라 한고비 올라가기 위한 아주 중요한 경계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다가 그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뒤틀리고, 머리가 멍하고, 시간이 지루하고, 앉았을 수도 없고 섰을 수도 없고, 화두를 놓을 수도 없고 들 수도 없고, 이렇게 답답하고 어려운 경계에 도달하거든 조금도 걱정을 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자포자기를 하지 말고, 이것이야말로 앞으로 내가 한 걸음 공부가 나아가기 위한 그러한 중대한 지점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하고,

그런 때에는 가만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가지고 20미터나 30미터, 일직선으로 코스를 딱 정해놓고서 왔다갔다 한 5분 내지 10분을 하면 저절로 머리가 시원해지고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들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또 자리에 가만히 와서 앉아가지고 허리를 쭈욱 펴고서 성성하게 그리고 적적(寂寂)하게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잘 그 마음을 써 가지고 지혜롭게 그 고비를 넘기면 그 다음에는 한결 공부가 수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라 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없고, 오직 한 생각—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한—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오직 그 한 가지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생사대사, 생사대사, 생사해탈(生死解脫), 경전에나 조사(祖師) 법문에 생사해탈 문제가 대단히 거론됩니다마는 대관절 그 생사(生死)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한 생각 일어나는 것’ 그것이 생(生)이요, ‘일어났던 그 한 생각이 없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생사. 생멸(生滅).

그래서 우리는 ‘부모한테 몸뚱이를 받아났을 때 그것이 생(生)이고, 한평생 살다 죽은 것이 그것이 사(死)’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이 몸뚱이를 표준 할 때는 그렇지만,

우리는 이 몸뚱이를 표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나’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하는 그놈, 지금 입을 벌리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놈, 이렇게 하는 말을 들을 줄 아는 그놈, 그것에다 기준을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루 동안에도 수없이 많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것이 바로 생사인 것입니다.


고개를 들고 산승(山僧)의 얼굴을 보십시오. 고개를 숙이고 경건하게 듣는 것도 좋지만, 고개를 숙이고 듣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르 잠이 와서, 졸면서 잠을 자면 이것 재미가 없습니다.
눈을 딱 뜨고, 말을 하고 있는 저의 얼굴을 보면서 들어야 훨씬 더 잘 들리는 것입니다. 보기가 싫게 생겼지만 이 시간에는 불가불 좀 봐 주시길 바라겠습니다.(5분17초~23분16초)




(2)------------------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생사입니다.
그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생사의 연속이 바로 일평생(一平生)이 되고, 그것이 바로 육도윤회(六途輪廻)가 되고, 그것이 무량겁(無量劫)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무엇이든지 어떠한 물건이 이루어지면 한동안 머물러 있다가 그것이 파괴가 되어 가지고 나중에는 없어집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해도 그렇고, 달도 그렇고, 별도 그렇고, 이 지구도 그렇고,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것도 영원불멸한 것은 없습니다. 다 성주괴공(成住壞空)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습니다. 어머니한테 태어났다가 한 살 두 살 먹다 보면은 늙고, 늙으면 죽습니다. 죽으면 10분이 못 가서 10분 뒤부터서는 오장육부가 버글버글버글 썩기 시작해 가지고 결국은 화장(火葬)을 하거나, 땅에다 묻는다 하더라도 한줌 흙이 되고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몸뚱이는 생로병사가 있고, 우리의 마음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습니다.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 잠시 그 생각이 머물러 있다가, 다른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그 생각이 꺼져버립니다. 꺼지자마자 또 새로운 딴 생각이 일어났다가, 잠시 머물렀다가, 또 다른 생각으로 발전해 가지고 결국은 또 그 생각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하기를 무량겁을 해 내려왔습니다.

이 몸뚱이 태어나 가지고 오늘날까지도 그 우리의 생각에 생주이멸, 생주이멸, 생주이멸, 생주이멸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사요, 그것이 앞으로 영겁을 두고 육도윤회 할 근원을 장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염기염멸(念起念滅), 바로 그 생사 속에서 생사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은 길이 있습니다.

생사 속에 나를 맡겨버리면 결국은 나도 생사의 물결 속에 무량겁을 두고 윤회하는 떠돌이 신세를 면치를 못할 것이고, 이 끊임없이 거듭되는 이 생사의 물결 속에서 바로 생사해탈하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그 생각이 슬픈 생각이건, 기쁜 생각이건, 또는 어떠한 노여운 생각이건, 과거의 생각이건,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없앨려고 하지 말고,
한 생각이 일어났다—여기 앉아서 지금 딸 생각이 났다. 「딸이 지금 잘 있나?」 「애기가 잘 컸나?」 그런 생각이 났다 할 때에—「아! 내가 쓸 데 없는 생각을 했구나」 그런 생각도 하지 말고, 그 생각이 났을 때 ‘이뭣고?’

무엇이 금방 그 딸 생각을 했나? 이거여. 이 딸 생각하는 이놈이 뭣고?

과거에 어떤 친구로부터 배반을 당해서 불현듯 그 생각이 나 가지고 속에서 화가 탁! 치밀어 오를 때, 바로 그 생각을 버리지 말고 그 생각에서 ‘이뭣고?’

이것이 바로 생사 속에서 생사를 해탈하는 아주 묘한 그리고 간단한 방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단속하는 사람은 망상이 일어난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망상(妄想)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바로 화두를 들기 때문에 그 망상은 바로 그것이 선지식의 한 법문이요, 경책(警策)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선지식 또는 부처님 또는 관세음보살 하면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어서 아주 우리가 법당에 모셔진, 탱화(幀畵)에 그려진 그러한 모습으로 계실 줄 생각하지만 마냥 그렇지를 않습니다.

불보살(佛菩薩)은 천백억 화신(千百億化身)을 나투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구의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여자의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장자(長者)의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거지의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강도 도둑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문둥이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철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시어머니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며느리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남편으로 나투기도 하고, 때로는 아내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로 나타나기도 하고, 친구로 나타나서 신의를 지키는 그러한 친구로만 나투는 게 아니라 배반 배신하는 그런 친구로도 나타나고,
아내로 나타나면 아주 현모양처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아주 고약한 악처(惡妻)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수도 있습니다. 좋은 남편으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외도를 일삼는 천하의 색마(色魔)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떻게 내 마음에 꼭 맞는 그러한 선지식으로만 나타난다면 그 참 그런 좋을 수가 없겠지마는, 불보살은 중생을 하루라도 더 빨리 생사해탈을 하게 하기 위해서 너무나도 자비가 크신 까닭으로 해서 천백억 화신으로 역경계(逆境界) 순경계(順境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발심한 사람,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한 사람이라야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불보살을 친견할 수가 있고, 선지식을 바로 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발심을 못한 사람은 선지식을 노상 코앞에 모시고 있으면서, 한 자리에 불보살을 모시고 살면서도 선지식을 알아보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식이 누군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다시 더 분명히 말하자면 『불보살 아닌 사람이 없고, 불보살 아닌 것이 없고, 선지식 아닌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가 발심을 했느냐, 못했느냐? 진발심을 했느냐, 못했느냐? 거기에 달려있는 것이지, 행여나 선지식이 없을까 걱정할 것 없고, 불보살을 만나지 못할까 근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부터서라도 댁에 가시거든 남편이 나한테 잘해 주건 못해 주건, 며느리가 자기한테 효도를 하건 말건, 시어머니가 자기에게 잘해 주시건 안해 주시건, ‘바로 저분이 선지식이다. 저분이 바로 불보살 화현(化現)으로 나타난 분이다’ 이리 생각하고,

오히려 더 시어머니가 자기한테 잘못할수록에 발심을 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잘못할수록에 더욱 발심을 하고, 사돈이 자기한테 섭섭하게 할수록 자기는 더 발심을 해서,
이렇게 마음을 쓰고, 이렇게 말을 하고, 이렇게 행동에 옮긴다면 거기에서 자기의 과거에 어떠한 두터운 업장이라도 거기에서 다 소멸이 될 것이고, 업장소멸(業障消滅)하면 소원성취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소원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업장이 가로막기 때문에 성취를 못하는 것이니까, 업장만 소멸한다고 하면은 소원성취는 바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성취하는 것입니다.

3일 기도를 한다든지 7일 기도를 한다든지 또는 백일기도(百日祈禱)나 천일기도(千日祈禱), 만일기도(萬日祈禱) 이렇게 합니다마는, 어째서 그렇게 사람에 따라서는 3일 기도를 하고도 소원을 성취를 하고, 백일기도를 하고도 성취를 하고, 만일기도를 하고도 성취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째서 빨리하는 사람도 있고, 더디하는 사람도 있냐?’하면은 업장이 얼마만큼 소멸이 되었냐 거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3일 기도만 하고도 마음이 맑아져서 불보살의 마음과 같이만 된다면 3일에도 소원을 성취해.

한번 가서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향 하나를 올리고 절을 하고, 청수(淸水) 한 그릇을 올리고 간절히 절하고 와서 그리고서 소원을 성취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간절히 향 하나 올리고, 물 한 그릇 올리고 소원을 할 때 그 마음, 부처님 마음과 하나가 된다면 절 한 자리 하는 사이에도 소원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우리의 마음이 맑고 깨끗해지는 것은 꼭 오랜 시간만이 걸려야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조주는 무(無)라고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생각생각마다 들고 또 들고, 앉거나 서거나 누웠거나 걸어다니거나 차를 탈 때나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가리지 말고,
속이 상할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일을 할 때나,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 그 사이도, 밥을 먹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소지를 하거나, 밥을 짓거나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 때라고 ‘이뭣고?’

‘하! 공부가 안된다’고, 공부가 안된다고 하는 생각이 그것이 자기로 하여금 공부가 안되게 하는 것이여.

“어째서 안되냐? 무엇을 안된다고 하느냐?”
“망상이 일어나서 안됩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이뭣고?’하면 그것이 공부인데,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공부가 안된다고 왜 그러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냐. ‘안된다’고 생각함으로써 자기로 하여금 ‘공부 안되는 사람’으로 스스로 낙인(烙印)을 찍는 것이 된다.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

화두를 타 가지고 바로 그때부터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공부가 된다면 어찌 일주일을 넘을 필요가 있느냐.

무량겁(無量劫)으로 지어온 자기의 업(業)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기 때문에 번뇌와 망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고, 체질화가 되어 가지고 가만히 있어도 별별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누구를 원망할 것이냐.
떠오르는 그 많은 중생심(衆生心), 번뇌 망상심, 생멸심 그것을 꼭 나쁘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진여불성은 모양도 없고, 냄새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래서 무어라 표현할 수도 없고,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코로 냄새 맡을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지마는, 그놈이 너무나도 신령스럽고 신기하고 묘한 것이라, 때와 인연 따라서 천만 가지 모습으로 천만 가지 빛깔로 그놈이 활동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불보살과 같이 착한 마음을 내기도 하고, 때로는 살인강도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천하의 대학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천하의 역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 얼마나 미묘하고 신령스러운 것이라 그렇게 천만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성내는 놈, 슬퍼하는 놈, 기뻐하는 놈, 원망하는 놈, 아퍼하는 놈, 괴로워하고 외로워하는 놈, 이것이 전부 다 진여불성으로부터서 일어나는 한 거동이요 모습일진대, 그 거동 그 모습을 버릴려고 할 것이 없어.

바로 그놈을 계기로 해서 ‘이뭣고?’ 이렇게 들어가면 그것이 바로 자기 진여불성을 찾는 가장 가깝고 빠르고 묘하고 간단한 길이다.
중생의 번뇌 망상심 그놈을 버리고 어떠한 진여불성을 찾아서 깨달으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무량겁을 두고 공부를 한다해도 그 사람은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생심은 그것이 바로 대승법,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체(體)다. 그 중생심, 번뇌 망상심 그것 때문에 육도(六途)를 윤회한다고 아까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그것 때문에 우리는 성불(成佛)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말이여.

그러니 그 번뇌 망상이 우리에게는 원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큰 은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최상승 활구참선, 이 정법을 믿고 공부한 사람에게는 그 번뇌 망상이 바로 불보살의 손이요, 불보살이 보내주신 반야용선(般若龍船)이지만,
정법을 믿지 않고 활구참선법을 믿지 않는 사람은 중생심, 번뇌 망상심 이것이 큰 원수요, 나를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끌고 가는 원수요 도적놈이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 육적(六賊)이라, 여섯 도적놈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거기에다 두고 하는 말이다.

한 생각 정법을 믿으면 여섯 도적놈이 바로 6대보살(六大菩薩)이여. 나를 극락세계로 불국세계로 인도하기 위해서 반야용선을 가지고 나를 영접하러 온 보살화신이고,
정법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여섯 도적놈이 되어 가지고 눈으로 귀로 코로 귀로 입으로 몸으로 생각으로 여섯 문을 통해서 기회만 있으면 지옥으로 끌고갈려고 엿보고 있다 그말이여.

이러한 최상승법, 활구참선법.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인간으로 태어나가지고 어떻게 해서 이러한 묘한 최상승법을 우리는 만났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 나도 희유하고 감사하고 다행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다행한 마음으로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뭣고?’로 돌려서 슬픔도 그놈으로 이겨내고, 노여움도 이 ‘이뭣고?’로 이겨내고, 괴로움도 이 ‘이뭣고?’로 이겨내고,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물어볼 것도 없이 결정코 금생에 자아를 자각, 대도를 성취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몽산 큰스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렇게 간절히 3년을 해봐라. 결정코 대도를 성취할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해서 성취를 못하면 내가 네 대신 무간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결제일이기 때문에 조실 스님의 법문도 이 화두, 공안에 대한 법문을 추려서 들었고, 또 산승도 이 공안에 대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하는 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두 하나만 제대로 들을 줄 알면 그 사람은 갈 곳이 없습니다. 결정코 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23분17초~44분2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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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

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실참실수(實參實修) ;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수행하는 것.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화두(話頭)를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 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 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부고(訃告 부고 고,알릴 고) ; 어떤 사람의 죽음을 연고자에게 알림. 또는 그러한 글.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방(榜) ; 용상방(龍象榜)을 말함.
[참고] 용상방(龍象榜) ; 절에서 하안거 동안거 결제 때나, 큰일을 치를 때에 각자 할 일을 정해 붙이는 명단. 행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붙여서 각자가 맡은 일에 충실하도록 한 것이다.
*생사대사(生死大事) ; ①삶과 죽음, 생사(生死)의 큰 일. ②수행을 하여 생사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는 큰 일.
*단월(檀越) ; 시주(施主). dana-pati 의 음역.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공양(供養) 청장(請狀) ; 공양 청첩장. 재가신도가 스님들께 공양(식사)을 드리기 위하여 초청하는 것.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어록(語錄) ; 조사어록(祖師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발설여경지옥(拔舌犂耕地獄) ; 또는 발설이경지옥(拔舌犂耕地獄). 犂(밭 갈 리, 밭 갈 려).
사람의 혀를 길게 빼 늘여 놓고, 그 혓바닥을 소 쟁기로 쟁기질을 하는 지옥.
*몽산(蒙山) ; ‘역대 스님 약력’ 참고.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하열(下劣 아래 하/못할·낮을 렬) ; (행동이나 생각이) 남보다 뒤떨어짐. 수준이 낮음.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관건(關鍵 빗장 관,열쇠 건) ; 어떤 일의 성패나 추이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나 요인.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 함[逼惱, 惱亂] 등의 뜻으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이러한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묶이게 되고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惑-業-苦 三道]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치성(熾盛 성할 치,성할 성) ; 불길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성하게 일어남.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염송(念誦 생각 념,욀 송) ;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불경(佛經)이나 진언(眞言) 등을 외움.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말. [참고]헤살;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대혜(大慧) 스님 ;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대혜서(大慧書)·『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62()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 역설하였다.

*한고비 ; 어떤 일의 진행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거나 어려운 단계나 국면.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깨달음.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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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경책(警策 깨우칠 경,채찍 책) ; 타이르고 채찍질하여 깨우치게 하는 것.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과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먹음은 것,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 등등.
*탱화(幀畵) ; 부처님, 보살, 성현들을 그려서 벽에 거는 그림. '탱(幀)'이라고도 한다.
*화신(化身) ; 화신불(nirmaka-kaya 化身佛). 부처의 삼신(三身:法身•報身•化身)의 하나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불신(佛身). 응화신(應化身)·변화신(變化身)•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장자(長者) ; ①덕망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아 세상일에 익숙한 어른. ②큰 부자를 점잖게 이르는 말.
*악처(惡妻) ; 성품이나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사나운 아내.
*색마(色魔) ; 성행위나 성관계 따위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사람을 마귀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障礙)가 사라져 없어짐.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낙인(烙印 지질 락,도장 인) ; ①다시 씻기 어려운 부끄럽고 욕된 평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불에 달구어 찍는 쇠붙이로 만든 도장.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중생심(衆生心) ; 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 진여(眞如)를 가르켜 말함. 진여의 실체.
진여가 광대하여 모든 것을 포섭한 것을 대(大)라 하고, 일미 평등(一味平等)하여 차별의 모양을 여읜 것을 총상(總相), 수행하는 이의 모범이 되는 것을 법(法), 관하는 지혜가 드나드는 것을 문(門)이라 한다.
*반야용선(般若龍船) ;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반야(船若,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 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고통이 끊임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함.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말. ②법신(法身)은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뜻.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Posted by 닥공닥정
분류없음...2014. 11. 15. 14:48

§ 암이 말기에 든 한 수좌스님의 간절한 참회와 병중 공부 질문.

**송담스님 말씀—2014년 5월 13일 화요일 (갑오년 하안거 결제일에)


약 7분.


질문


스님, 저기... 이 어리석은 제자한테 법명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감사드리구요, 스님. 그리고 오늘 친견을 청한 이유는요. 스님, 두 가지인데요.

첫째는 제가 다겁생래로 지어온 업장(業障)을 참회(懺悔)드리구요, 또 출가해서도 공부한다고 선방에 있으면서도 알게 모르게 지은 업장과 열 가지 죄를 큰스님 전에 참회 드리고 싶어서였구요.

두번째는 스님, 종전에도 말씀드렸지만은 그 삼독심이 너무 심해서 그런지 병중(病中)에-지금 제가 병중인데, 병중에 공부 지어 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스님.
그거에 대해서 한 말씀 내려주실 것을 청할려고 이렇게 친견을 청했습니다.

 



송담스님 말씀


생로병사(生老病死)는 모든 사람이,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 생로병사 과정을 겪어서 일생을 사는데 사람에 따라서 연조(年祚)가 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그럴 뿐이지, 아무도 생로병사는 못 면하고.

그러나 그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으면서 일반 사람들은 다 오욕락 속에 빠져서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다가 마음대로 이루는 사람도 있고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이루는 듯 하다가 안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일생을 마쳐 가는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에 출가해서 머리를 깎고 수행의 길로 접어드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는데, 그렇게만 된 것만으로도 참 다행한 일이고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행복하게 생각하고 금생에 성의를 다해서 수행을 하고.

그렇다고 해서 안 죽는 것은 아니여.
죽기는 죽으나,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은 몸부림치다 죽는데, 수행을 하는 사람은 죽는 것 그 자체도 하나의 수행의 한 과정인 거여.

지금 의사는 뭐라고 진단을 나름대로 하겠으나 전적으로 거기에 매달릴 필요는 없어.

숨쉬는 동안, 육체가 있는 동안에는 먹어야 하고, 먹으면서 항상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가지고 수행을 하고,
앞으로 1년을 살거나 2년을 살거나 앞으로 5년을 살거나 그것은 사는 날까지 사는 거여, 누구던지.
그것이 맘대로 안되는 거여.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건강이 의사 말하는대로 꼭 되는 것은 아니고, 자기가 어떻게 지혜롭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의사가 말한 것보다도 더 오래 살 수도 있는거고.

죽음은 기다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오는데 두려워할 것이 없어.
우리가 정법을 믿고 정진하는 사람은 죽음을 그렇게 무서워 할 필요가 없어.

열심히 먹고, 열심히 자고, 열심히 정진을 하다 보면은 언젠가는 (죽음이) 올 때가 되면 가는 거고.

가도 어디로 가느냐는 우리는 알 수가 없어. 천당에 갈런지,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할런지.
되어지는대로 사는 거지, 맘대로 천당에 가고 싶다고 천당에 가고 맘대로 안되지마는 정진을 하는 사람은 되야지는대로 사는 거여.

건강을 위해서 지혜롭게 관리는 할지언정 너무 집착하지마.

(네, 스님.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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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신 수좌스님께서는 2014년 8월 1일 입적하셨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법회(법보재)2014. 10. 29. 14:12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758) (게송)올올불수선~ /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에게 원하시는 것 /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는 것이 생사 / (게송)야야포불면~.

영가를 여기다 모셨기 때문에 명절이나 제삿날을 기해서 여기 와서 부처님께 공양도 올리고, 영가를 위해서 제사도 모시게 되고 그러면서 또 조실스님 법문을 듣고 또 정법에 의해서 참선을 하시게 되니, 영가 때문에 영가만 좋을 뿐만 아니라 온 가정, 일가친척이 정법을 믿고 ‘참나’를 닦는 참선을 하시게 되니 어찌 그 영가가 편안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불공도 드리고 부처님께 와서 절도 하지마는 부처님께서는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깨달아서 생로병사(生老病死)에서부터서 해탈해 가지고 여러 중생들이 다 부처가 되기를 제일 좋아하시고 바라시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758)— 2013(계사년) 법보재(04.25)-30분 (용758)

 

(1) 약 22분.

 

(2) 약 9분.

 


(1)------------------

올올불수선(兀兀不修善)이요  등등부조악(騰騰不造惡)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적적단견문(寂寂斷見聞)이요  탕탕심무착(蕩蕩心無着)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올올불수선(兀兀不修善)이요, 올올하야 선(善)도 닦지 아니하고 등등(騰騰)하야 악(惡)도 짓지 않는다.
적적(寂寂)하야 보고 듣는 것이 끊고, 탕탕(蕩蕩)하야 마음이 착(着)함이 없다.

이 게송은 육조(六祖) 혜능(慧能)스님께서 임종하실 때 마지막에 이 게송을 읊으시고 열반을 하셨습니다.

올올(兀兀)하야 선(善)도 닦지 않는다.
‘올올하다’고 한 것은 태산처럼 동함이 없고 따악 정(靜)해져 갖고 있는 모습입니다.
등등(騰騰)하야 악도 짓지 않는다.
등등한 것도 태산처럼 움직이지 않고 따악 부동한 모습! 그러니 무슨 악을 지을 것이 있으며.

적적(寂寂)하야 견문(見聞)이 다 끊어졌다. 적적한 것은 말 그대로 고요하고 고요해서 보고 듣는 것이 다 끊어졌다 그말이여.
마지막에 탕탕(蕩蕩)하야 마음이 착(着)함이 없다. ‘탕탕하다’는 것은 넓고 넓은 모양을 표현한 것입니다.

올올하고, 등등하고, 적적하고, 탕탕한 모습은 육조스님께서 열반하실 그 장면을 — 그 몸가짐과 마음 상태를 고대로 읊으신 게송인 것입니다.

이 게송 안에는 생사(生死) 없는 모습,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으신 보살 화현(化現)으로서의 마지막 읊으시고 열반에 드신 그 게송인 것입니다.

이 게송을 오늘 계사(癸巳)년 3월 16일 법보재(法寶齋) 날에 읊은 것은, 이 법당에는 수많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원근 친척과 인연있는 분의 영가(靈駕)가 봉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 영가는 법당앞 전후좌우 사방에 다 모셔져 있는데 — 이 영가는 항상 앞에 부처님을 모시고, 조실스님을 모시고, 우주법계의 모든 불보살과 제석천왕과 신장들이 옹호를 하고 계신 이 법당 안입니다.

이 법당 안에 모셔져 있는 우리의 선망부모, 원근 친척의 영가들은 그러한 장엄한 외호 속에 편안하게 봉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영가들의 마음 상태는 불보살과 모든 신장(神將)의 가호(加護) 속에 아까 읊은,
‘올올하야 선도 닦지 않고, 등등하야 악도 짓지 아니하며, 적적하야 모든 견문이 다 끊어졌으며, 탕탕하야 마음이 착(着)한 바가 없다’고 하는 그러한 상태에 영가들도—육조스님이 열반하실 때의 그 마음과 그 모습 속에 영가들도 그렇게 편안하게 봉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많은 영가들은 성(姓)도 각각이요, 평생 동안 지은 업(業)도 각각이요, 평생 살아온 것도 다 다르지만 일단, 이 법보전(法寶殿) 안에 법보영가로 봉안된 뒤에는 지나간 과거는 하나의 꿈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고,

그 꿈속에서 희로애락과 성주괴공(成住壞空)과 생주이멸(生住異滅) 속에 많은 고통, 슬픔,외로움 모다 그런 한(恨)이 맺힌 영가도 계실 것이고, 비교적 편안하게 잘 사시던 영가도 계실 것입니다마는,
일단 이 법보전에 모시게 되면 그런 것은 다 없어지고 오직 이 육조스님께서 열반하실 때 읊으신 게송과 똑같은 상황 속에서 영원을 사실 것입니다.

이 영가분 가운데에는 이미 극락세계나 도솔천 내원궁이나 또는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마는 아직 인연이 있어서 이 법당 안에 고대로 안주하고 계시면서 극락세계나 도솔천 내원궁에 가실 날을 기다리고 계실런지도 모르고,

또는 이 법당 안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조실스님을 모시고 대중들이 조석으로 예불하고 축원하는 이러한 분위기가 너무너무 좋아서 딴데로 갈 생각이 없이 여기서 편안하게 계신 그런 영가도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은 일단 각 가정마다 비명에 간 영가도 있고, 일생을 참 괴로움과 슬픔 속에 사시던 영가도 있고, 또 돌아가실 때 병으로 앓다가 돌아가신 분, 전쟁에 나가서 전사한 그런 영가분,
또는 악연이 있어서 다른 사람한테 죽음을 당한 그런 영가도 있을런지 모릅니다만은 일단 여기에 모시게 되면 그 영가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모셔지지 않은 영가는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하고 원한을 품고 세상에 있게 되면 그 영가가 갈 곳이 없어서 자기가 살던 집, 자기가 아는 형제간, 부모, 일가친척,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여가 붙었다 저가 붙었다,
그러면서 고혼(孤魂)으로서 정처가 없는 불쌍한 영가로서 떠돌던 그런 영가들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런 영가들이 집안에 여가 붙었다 저가 붙었다 하고, 이 사람한테 붙었다 저 사람한테 붙었다 하면 집안에 병고액난(病苦厄難)이 끊어지지 않고 일체 관재구설(官災口舌)과 온갖 재난이 끊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실스님께서는 그러한 많은 인연 있는 신도와 그런 불쌍한 영가를 위해서 법보전 안에 법보 영가를 모시는 제도를 마련을 하셨습니다.

일단 여기에 모시게 되면은 영가도 편안할 뿐만 아니라 그 영가를 모신 가정과 가족들도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많은 그 동안에 겪었던 병고액난과 관재구설과 모든 불화가 다 녹아 없어지고, 그 인연으로 결국은 정법(正法)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영가를 여기다 모셨기 때문에 명절이나 제삿날을 기해서 여기 와서 부처님께 공양도 올리고, 영가를 위해서 제사도 모시게 되고 그러면서 또 조실스님 법문을 듣고 또 정법에 의해서 참선을 하시게 되니,
영가 때문에 영가만 좋을 뿐만 아니라 온 가정, 일가친척이 정법을 믿고 ‘참나’를 닦는 참선을 하시게 되니 어찌 그 영가가 편안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부탁할 것은 일단 영가를 모신 분은 항상 여기 와서 법회에도 참석하시고, 제삿날을 잊지 않고 꼭 와서 부처님께 공양도 올리고, 대중공양도 하고 , 또 조실스님 법문도 듣고 이렇게 함으로써,
영가는 ‘아, 내 식구가 와서 오늘 불공(佛供)을 하는구나’ ‘내 죽은 날을 기해서 제사를 지내는구나’ 영가는 환히 다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다 영가를 모신 분은 절에를 자주 오셔야 하고, 명절에는 꼭 잊지 않고 참여해서 불공을 올리고, 제사를 올리는 의식에 정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영가로 인한 인연으로 많은 신도들이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은 육도윤회에서 해탈을 해 가지고 ‘참나’를 깨달아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게 되는,
그러한 목적으로 이 법당을 창건을 해서 영가를 모시게 해 주신 전강영신(田岡永信) 대종사(大宗師).

여러분이 보시고 계신 이 사진을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만은 이러한 제도가 없으면 ‘불교를 믿는다’고 믿어도 무엇이 불법(佛法)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불법은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거다’ 막연히 그렇게 알고 절로 왔다갔다 하고, 불공이나 드리고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불(佛) 자가 ‘부처 불(佛)’ 그러지만, ‘부처’라는 게 무엇입니까? ‘깨달은 분’이란 말인 것입니다.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 깨달으셨으니까 부처님인데, 그 부처님을 믿는 것은 당연히 우리의 교주이시고 그러니까 당연히 존경하고 믿어야 하지마는 부처님은 당신을 믿고 존경하라고 그것만을 바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든 중생들이 정법을 의지해서 자기가 자기를 닦아서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원하신 것입니다.

불교를 믿으면 부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데 부처님은 절에 많는 돈과 쌀을 갖다 주신 것, 그것을 그렇게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스님네는 혹 좋아할런가 모르나 부처님은 그것을 좋아하시지 않고,
불공도 드리고 부처님께 와서 절도 하지마는 자기가 자기의 부처를 깨닫는 — 자기의 마음을 깨달아서 생로병사(生老病死)에서부터서 해탈해 가지고 여러 중생들이 다 부처가 되기를 제일 좋아하시고 바라시는 것입니다.

용화사 이 법보전은 그러한 의미에서 비록 부처님 열반하신 뒤로 삼천 년이 되어서 말세가 되었다 하지마는 법보 제자들은 말법(末法) 속에 다시 정법(正法) 시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자리에 모이신 비구·비구니·사미·행자·청신사·청신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기가 자기를 깨닫는 것은 남이 대신 깨달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깨닫는데, 깨닫는 것이 무슨 팔만대장경 어려운 경전을 읽고 외우고 해석하고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경도 공부하고, 외울 경(經)도 있곤하나 그것이 경이라고 하는 것은 다 알고보면 팔만대장경이 다 ‘자기가 자기를 깨달으라’고 하는 말씀을 이러한 각도에서도 말씀하시고 저런 각도에서도 말씀하신 것이라,

경전을 옳게 본 사람은 자기 마음을 깨닫는 공부를 해야만 되는 건데, 중생은 길이 잘못 들었거나 근기(根機)가 약해 가지고 자기 깨닫는 것은 뒷전으로 두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 소원을 성취한다, 복을 많이 짓는다’ 이러한 정도로 해서 불교를 믿으면서, 일생을 나름대로 ‘나는 불교 신자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분이 참 많습니다마는,

정말 ‘나를 깨닫는 공부’는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무엇을 볼 때 보는 데로 따라가지 말고, 보는 바로 ‘나’ — ‘이놈이 무엇인가?’
귀로 무엇을 들을 때는 듣는 그리 쫓아가지 말고, 바로 ‘이뭣고?’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기 조실스님 영정(影幀) 옆에
생야시(生也是)  사야시(死也是)  두두비로(頭頭毘盧)  물물화장(物物華藏)

나는 것도 이놈이요, 죽은 것도 이놈이다.
생사(生死)는 보통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이 몸뚱이가 태어나면 생(生)이라 그러고, 살다가 죽으면 그것을 사(死)라고 그러는데,

이 불법 문중에서는 생사는 육체를 기준으로 두기 보다는 우리의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루에도 수백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 생각 일어나는 것이 바로 생(生)이고, 그 생각이 이리저리 하다가 또 꺼지면 그것이 죽음(死)인 것입니다.

생사(生死), 하루 동안에도 생각을 기준으로 해서 생사를 삼는다면은 우리는 하루에도 몇백만 번을 태어났다 죽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의 ‘죽었다 살았다’ ‘생겨났다 죽었다’하는 것이,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온갖 업(業)을 짓게 되고,
결국은 업 속에서 육체가 죽을 때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이고, 죽은 뒤에는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다행히 착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한 사람은 천당에 갈 것이고, 염불도 많이 하고 그런 사람은 또 극락에도 갈런지 모르나,
대부분 살다가 보면 알게 모르게 많은 업을 지어 가지고 지옥에도 안 간다고 아무도 보증을 할 수가 없고, 축생이 될런지 다시 또 인도환생할런지 모릅니다마는,

결정코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한 생각을 단속을 잘하면 지옥에 갈까 걱정할 것도 없고, 축생이 될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뭔 말을 듣거나, 생각에 무슨 생각이 떠오르거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내가 나를 챙길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누가 나한테 오장(五臟) 뒤집어지는 억울하고 그런 고약한 말을 하더라도, 그 말로 따라가면은 울화(鬱火)가 치밀어져 가지고 눈에 독이 오르고 얼굴이 변하고 당장 그 사람과 싸움을 하게 되는데,

정법을 믿고 참선하는 사람은 그 말을 듣자마자 숨을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이뭣고~?’
또 ‘이뭣고~?’ 이렇게 자기를 단속하는 참선으로 돌아오게 되면 상대할 아무 원수도 없고 미운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처음~21분28초)

 

 

 



(2)------------------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우리가 태어났지만은 이 정법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과 정법을 믿지 않고 빈부귀천, 성주괴공, 생로병사 속에서 사는 사람과는 세계가 다른 것입니다.

정법을 믿을 줄 모르고 ‘참나’를 찾는 참선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태어나 가지고 이 몸뚱이를 가지고 지옥에 가서 지옥고를 받는 중생과 별로 다를 것이 없고,
소나 돼지나 개처럼 겉은 분명히 사람인데 축생처럼 일생을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도반 여러분, 법보 가족 여러분!
정말 우리는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서 태어났습니다. 만나기 어려운 또 불법을 만났습니다.

불법 가운데에서도 이 법보전에 영가를 모신 법보 가족,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은 정말 이 세상에서 극락세계에 태어난 것보다도 천당에 태어난 것보다도 훨씬 더 다행하고 행복한 삶을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이요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로다
나~무~아~미~타~불~
욕식불거처(欲識佛去處)인댄  지자어성시(只這語聲是)니라
나~무~아~미~타~불~

이 게송은 포대화상(布袋和尚)이 읊으신 게송입니다.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이요, 밤이면 밤마다 부처님을 안고 자고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그 부처님과 함께 일어난다
욕식불거처(欲識佛去處)인댄, 부처님 간 곳을 알고자 할진댄
지자어성시(只這語聲是)다. 다못 이 말소리 이놈이다, 이것이다.

우리는 밤마다 부처님을 안고 자는데 자면서도 부처님을 안고 자는 줄을 모르고, 하루 지나간 일을 이 생각 저 생각 걱정하다가 잠든 줄 모르게 잠이 들고 밤에 꿈도 꾸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부처님과 함께 일어난 줄을 인식을 못하고 그냥 자고 일어나는 것 뿐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안에 반드시 자성불(自性佛)이 계신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하고 인식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자리! 우리의 본성(本性)자리는 얼굴이 잘생겼거나 못 생겼거나, 지식이 있거나 없거나, 늙었거나 젊었거나 일단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 몸안에는 자성(自性)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 자성이라는 것이 그것이 자기의 마음자리고, 그것이 자기를 지켜주고 살아가는 자기의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 부처님을, 잘 때 따악 부처님과 함께 잠에 드는 거고, 아침에 일어날 때는—이 육체는 송장인데 육체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이 육체 속에 있는 부처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어나는데 부처님이 어디 계시냐?
눈으로 볼래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 볼래야 만져 볼 수 없습니다.

그 부처님은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것이 나의 부처님이고, 이 말을 듣고 있는 그것이 바로 여러분 자신의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항상 보다가 놓쳐버리고, 듣다가 놓쳐버리고, 골을 내다가 놓쳐버리고, 걸어가다가 잊어버리고.

그런데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항상 ‘이뭣고~?’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가?’

생하는 놈도 이놈이요, 죽은 놈도 이놈이다.
이놈이라는게 우리는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아무리 우리의 마음으로 찾아봤자 그것은 ‘아,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알기는 어려운 것이고,

항상 ‘이뭣고~?’
자꾸 그렇게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하다보면 나중에는 챙기지 안 해도 항상 알 수 없는 ‘이뭣고~?’한 의문이 마음속에 끊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열심히 한 사람에게는 언제 오더라도 그 경계(境界)가 오는 것이고,
그 경계가 와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의심이 끊어지지 않고, 그 의단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유지가 되어가면 반드시 그 사람은 자기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불법을 믿는 것은 이러기 위해서 불법을 믿는 것이고, 부처님께서 나오셔서 49년 동안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신 것은 오직 이 하나를, 이 한마디를 우리 중생들에게 일러주시기 위해서 탄생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법보재를 맞이해서 우리의 법보 영가의 재사를 모시면서 우리는 다같은 한 가족으로서 일생 동안을 이러한 마음으로 같이 살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또 이러한 정법 문중에서 다시 만나서 또 이 정법에 의해서 ‘참나’를 깨닫고, 이 깨닫는 법을 일체 중생에게 전달을 하고,
그래서 온 우주법계가 깨달은 부처님으로 가득 찰 때까지 우리는 한 형제요, 가족으로 이렇게 살게 되기를 바라면서 법상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박수)(처음~30분33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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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올올불수선~’ ; [육조단경(六祖壇經)] 육조(六祖) 혜능(慧能)대사 임종게(臨終偈).
*육조(六祖) 혜능(慧能)대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법보재(法寶齋) ; 매년 음력 3월 16일에 용화사 법보재자(法寶齋者)와 법보전 만년위패에 모신 선망부모 영가들과 인연 있는 영가들의 무량겁으로부터 지은 업장을 참회 소멸하고,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고, 재자와 영가 모두 진리의 세계에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전강 조실스님께서 개설(1963년)하신 합동 천도재(薦度齋).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신장(神將) ;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신장. 또는 《화엄경》을 보호하는 신장.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법보전(法寶殿) ; 법보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생주이멸(生住異滅) ; 모든 사물이 생기고(生), 머물고(住), 변화하고(異), 소멸함(滅). 또는 그런 현상.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안락국(安樂國)•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무량청정토(無量清淨土)라고도 함.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로 다시 태어남.
*고혼(孤魂) ;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넋.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전강영신(田岡永信)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말법(末法) : 부처님의 교법이 세상에 전하여 가면서 중생을 교화하는데 대하여 부처님께서 예언한 바가 있다.
처음 오백 년 동안은 정법(正法) 시기가 되어, 교법이 온전히 있음은 물론 닦아 가는 사람도 많고, 닦는 사람은 대개 깨쳐서 성과(聖果)를 얻게 되지마는,
그 다음 천 년 동안은 상법(像法) 곧 정법에 비슷한 시기가 되어, 교법도 있고 수행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깨치는 사람은 적게 되고, 그 다음 만 년 동안은 말법 곧 쇠잔하고 미약한 교법이 남아 있는 시기가 되어, 수행하는 사람도 별로 없으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 때 인도만을 표준한 말인 듯하다。인도의 불교사는 과연 그대로 되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대답하여 예언하기를, 불교가 중인도에서는 차츰 쇠미하게 되겠으나, 변지(邊地)와 외국에 널리 전파되어 점점 융성하게 되리라고 하였다。과연 불교의 중심이 중인도로부터 북부인도와 세일론으로 옮기었고, 다시 중앙아시아로, 북부아시아로 옮겨가게 되었다.
중국 • 한국 • 일본에 불교가 왕성하고 많은 도인(道人)이 난 것도 다 부처님이 열반한 지 1500년 이후의 일이었다。다시 말하면, 말법이라는 시기가 시작된 뒤의 일이다.
그러므로 세계적으로 불교 교단 전체를 통하여 볼 때에는 말법시기가 일정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파리어(巴利語)로 된 <잡아함경(雜阿含經)>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지런히 신(身) • 수(受) •심(心) • 법(法)의 사염주(四念住)를 닦아서 탐욕과 분심을 끊으면 정법은 영원토록 세상에 머물러 빛나게 될 것이나, 수행하지 않게 되면 정법은 곧 소멸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여러 경전에도 『누구나 부처님 말씀대로 닦으면(如説修行) 다 반드시 견성 성불한다』하였고 조사들의 말씀에는 『참선하는 이가 견성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처럼 아주 쉽고 당연한 일이다』하였으므로, 누구나 공부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사학(邪學)과 외도(外道)가 번성한 이 시대에 났으므로, 망녕된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줄기차게 정진한다면, 하나도 실패함이 없을(萬無一失)뿐 아니라 정법은 영원히 나아갈 것이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울화(鬱火 답답할 울,불 화) ;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여 일어나는 화(火 못마땅하거나 언짢아서 생기는 노엽고 답답한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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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게송) ‘야야포불면~’ ; 만신찬속장경(卍新纂續藏經) 제88책 <거사전(居士傳) 7> 부대사전(傅大士傳) 참고.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경계(境界) ; ①어떤 영역끼리의 한계. 또는 영역끼리의 사이, 접점. ②인식 또는 어떤 세력이 미치는 범위.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