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바른 스승이란? / 전강 스님의 용맹정진, 만공 스님과의 법거량, 인가 / 추호도 의심없이 공안을 바로 봐야 / 진실로 시간을 아껴서 정진해라.

 

참선을 나가는 데에는 바른 스승을 구해야 한다. 어떠한 것이 바른 스승이냐? 실오실참(實悟實參), 실답게 닦아 가지고, 실다웁게 깨달라서 바른 선지식의 인가(印可) 맞아야 한다.

어떻게 발심(發心) 하고 () 나서 밤이나 낮이나 철봉대를 붙잡고 정진을 하신 가운데(상기병으로 피를 너무 쏟아서 힘이 없어서 앉으면 잠이 오고 정진할 수가 없어서, 안 잘려고 철봉을 붙잡고 정진을 하심),

개천에서무무(無無) 역무(亦無)어떤 도반들이 그런 소리를 지르면서, 가재를 잡으면서 모다 그런 소리가 들려온 것을 보고서 그때 확철대오를 하셨다.

 

우리가 근기(根機) 수승하지를 못해서 중근기, 하근기라 하더라도 바른 스승을 만나 가지고 올바르게 지도를 받고, 그래서 올바르게 수행을 한다고 하면은 누구나 자기에게 있는참나 깨달라서 생사해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의 몸을 받어 가지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 가지고, 만나기 어려운 선지식을 만나 가지고도 바로 믿지 못하고 갈팡질팡, 그렁저렁 하다가 아까운 세월 보내고, 마지막 죽어 때에 천만 가슴을 쥐어뜯고, 눈물을 흘리면서 후회를 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공안에 대해서 낱낱이 추호도 의심없이 공안을 바로 봐야 자기의 생사(生死) 면하는 것이며, 불조의 면목(面目) 보는 것이며, 우주의 근본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생사해탈을 해서 불조(佛祖) 지혜목숨, 혜명(慧命) 잇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은 잠시도 머물러지 아니하고 1, 1 이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바로 우리가 사형집행 시간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잠시도 망각을 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진실로 1, 1 시간을 아끼는 사람이라야 영원한 생사해탈을 기약할 수가 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송담스님(No.026)—76 동지법문 (76.12.22) (용026)

 

(1) 약 21분.

(2) 약 4분.

 

(1)------------------

 

참선을 나가는 데에는 바른 스승을 구해야 한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떠한 것이 바른 스승이냐? 실오실참(實悟實參), 실답게 닦아 가지고 실다웁게 깨달라서 바른 선지식(善知識) 인가(印可) 맞아야 한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목구녕에서 선지피가 덩어리 덩어리 맺혀서 쏟아지도록, 그렇게 말로써 형언할 없는 그러한 고행정진을 하셔 가지고, 급기야 확철대오를 가지고서 한국의 6대선지식으로부터서 법문답(法問答) 가지고 인가를 받으셨습니다.

 

조실 스님께서 받으신 인가는오냐, 옳게 알았다. 니가 견성을 했다이렇게 인가를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선지식과 법문답을 가지고 선지식이 조실 스님의 깨달은 증득한 힘과 역량이 너무나도 투철하시고 확철대오를 하셨기 때문에 어떠한 선지식도 조실 스님의 밝고 투철한 깨달은 경지에 대해서 무릎을 꿇지 않코서는 배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옳다, 니가 옳다하고 말씀하실 겨를 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러한 다섯 분의 선지식의 인가를 받어 가지고 마지막에 만공 큰스님한테 가지고 만공 큰스님과 법거량(法擧揚) 하셨는데, 만공 스님께서는 중요한 꼬타리를 ! 붙잡으셔 가지고 조실 스님을 인정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 처음에는 조실 스님께서는 만공 스님께서나를 떠볼라고, 시험해 볼라고 이러시지 않나?’하고 처음에는 범연(泛然) 그렇게 생각하셨다가 두고 두고 인정(認定) 하시고, 놀리시고, 무시를 하시고, 그러시기 때문에,

선지식이 학인(學人) 그러실 수는 없다.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기 때문에 저러신 것이지, 어찌 선지식으로서 깨달은 학인이 온다면 분명히 깨달은 사람을 깨달았다고 하실 일이지, 절대로 거짓말하시거나, 후배를 농락하실 리는 없다

 

그래 가지고 거기서 생각을 돌이켜 가지고, 철봉대(鐵棒臺) 붙잡고 날새기 공부를 하시면서 그때 하신 화두가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였습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화두를 철봉을 붙잡고 밤이슬을 맞으면서 며칠을 두고 용맹정진을 끝에 확철대오를 하셨던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철봉을 잡고, 남이야 개천가에서 히히닥거리고 장난을 하거나, 잡담을 하거나 그런 것도 불구하고, 어떻게 발심(發心) 하고 () 나서 철봉대를 붙잡고 정진을 하신 가운데,

개천에서무무(無無) 역무(亦無)어떤 도반들이 그런 소리를 지르면서, 가재를 잡으면서 모다 그런 소리가 들려온 것을 보고서 그때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즉시에 무슨 공안(公案) 도리가 나타났냐 하면은 마조(馬祖) 원상(圓相),

마조 스님이 둥그러미를 땅에다가 그려 놓고서 안에 들어가도 치고,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친다이렇게 어떠한 스님에게 법을 물었습니다. 스님이 둥그러미 안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마조 스님은 가지고 계시던 주장자로 스님을 방맹이 쳤습니다.

맞은 스님이 말이, 조주 스님을 ! 쳐다보면서스님은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조주 스님은 아무 말씀도 하시고,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공안에 대해서 조실 스님께서는 여지없이 간파(看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분이 솟구쳐 나고, 어떻게 말로써 표현할 없는 분이 나던지,

그길로조실로 계시는 만공 스님께서는 이미 보월 스님에게 조실 자리를 물려주시고 당신께서는 금선대(金仙臺) 은퇴하고 계실 때입니다. 증사(證師) 그렇게 금선대에 계시고, 조실에는 만공 스님의 수제자이신 보월 스님께서 조실로 계실 ,

 

조실방에 뛰어 들어가서 보월 조실 스님 앞에다가 원상 떠억 그려 놓고 안에 들어가도 치고, 안에 들어가지 해도 친다고 하셨으니, 말씀 일러주십시오보월 스님께서 원상을 손으로 이리 뭉개버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천하 선지식으로서 학자를, 이렇게 천하 학자를 죽일 수가 있습니까. 이래 가지고 조실에 앉어 계실 수가 있습니까?” 고함을 지르면서 그러니까, 사람 보소, 사람 !” 그리고 어리둥절하실 ,

 

그길로 금선대에 쫓아 내려가서 만공 스님 앞에 가서제가 조실 스님을 매장(埋葬) 하고 왔습니다! 세상에 조실에 앉아서 천하 학인의 눈을 그렇게 멀릴 수가 있습니까?” 이래 가지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셨죠.

 

그렇게 해서 전강 조실 스님은 만공 스님께 정식으로 다시 그렇게 해서어디 안에 일러봐라그러니까큰스님께는 이르겠습니다.”

 

옆에 용담 스님이라고 하는, 여러분이 지금 선가귀감(禪家龜鑑) 번역한 것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처음에 용담 스님께서 선가귀감을 번역을 하신 것입니다. 그걸 번역을 했던 것을 근본으로 해서 법정 스님이 새로 교정을 가지고 내놓은 것이 요새 발간해 나오는 선가귀감입니다.

처음에 번역했던 용담 스님이 전강 조실 스님과는 아주 다정한 도반이었습니다.

 

마치 용담 스님이 옆에 계시는데, 그러면용담, 자네가 묻소그래서 용담 스님이 원상을 떠억 그려 놓고서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치노라.” 그러니까는 조실 스님께서 거기서 터억 일르셨습니다. 이것은 설파(說破) 되기 때문에 조실 스님께서는 말씀을 하시지 했습니다.

 

그리고 밖에 처음에 만공 스님한테 가서 절을 하니까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전강 스님께서)주먹을 터억 내미니까는허어, 습기를 면치 못했구나. 아니다! 견성이 아니다. 견성이 아니다이렇게 부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스님, 그때 법을 다시 물어 주십시요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허허허, 보게.”

 

이렇게 해서 그날부터서는 모든 공안에 대해서 정식으로 탁마(琢磨) 허락을 하셔 가지고, 천칠백 공안 낱낱이 만공 스님과 서로 탁마를 가지고,

결국은 만공 스님께서허허, 학자(學者) 선지식 똥구녁에 들어가기도 하고, 선지식이 학자 똥구녁에도 들어간 것일세이렇게 해서 모든 탁마를 마치시고,

 

그래 가지고 조실 스님을 하직을 하고 팔도에 자유자재로 다니시면서 오후보림(悟後保任) 가지고, 말년에 이르러서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말년 회향을 우리를 지도하시면서 마지막 열반하신 그날까지 법상에 올라가셔서 설법을 주시고 열반(涅槃) 드셨던 것입니다.


그러한실오실참(實悟實參) 가지고 바른 선지식의 인가를 맞아야, 선지식이라야 비로소 우리가 목숨 바쳐 의지해서 공부에, 참선에 지도를 받을 있는 바른 스승이다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지식은, 우리의 도를 지도해 주실 선지식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은 목수(木手)에다가 비교할 수가 있고, 도를 배우는 학자는 재목(材木)에다가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재목도 좋은데다가 좋은 훌륭한 목수를 만나야 훌륭한 집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어떠한 물건을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목이 좋고 훌륭한 재목이라 하더라도 목수를서투르고, 경솔하고, 지혜롭지 못한 서투른 목수를 만나 놓으면은 아까운 재목을 버리고 말아 버리는 것입니다. 설사 재목이 조금 좋은 재목이라 하더라도 훌륭한 목수를 만나 놓으며는 상당한 효과를 나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기(根機) 수승하지를 못해서 중근기, 하근기라 하더라도 바른 스승을 만나 가지고 올바르게 지도를 받고, 그래서 올바르게 수행을 한다고 하면은 누구나 자기에게 있는참나 깨달라서 생사해탈을 수가 있는 것이지마는,

우리 근기가 비교적 순수하고, 근기가 수승하다 하더라도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자기는 영원히 깨닫기커녕은 삿된 도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바른 스승은 깨달은 바가 분명하면 되는 것입니다.

 

공자님 말씀에소인(小人) 유재자다(有才者多)이라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인놈 가운데 재주있는 놈이 많느니라이런 말씀을 공자님이 하셨습니다.

재주가 있어 가지고, 잘하고 똑똑하고, 영리하고 수단 좋고, 이러한 사람이 소인놈 가운데에소인(小人) 유교에서는 군자(君子) 상대말로 사용합니다. ‘군자가 아닌 소인 속에 재주있는 사람이 많다이렇게 공자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불가(佛家)에도세지총명(世智聰明),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가 있고, 총명한 사람은 도에 들어오기가 어렵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바른 선지식을 만나냐, 만나느냐, 만나 가지고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서 내가 나를 깨달라서 생사해탈하는 바른 길에 들어갈 있느냐, 없느냐의 판가름이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의 몸을 받어 가지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 가지고, 만나기 어려운 선지식을 만나 가지고도 바로 믿지 못하고 갈팡질팡, 그렁저렁 하다가 아까운 세월 보내고, 마지막 죽어 때에 천만 가슴을 쥐어뜯고, 눈물을 흘리면서 후회를 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남전 스님이 고양이를 칼로 버리는남전참묘(南泉斬猫)’라고 하는 공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고,

다음에는 부처님께서 열반 하실 때에 제자들을 향해서내가 열반을 했다고 해도 나의 제자가 아니요, 내가 열반을 하지 아니했다고 해도 나의 제자가 아니니, 일러라 하신 가지 공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째서 남전 스님이 고양이를 죽였냐? 남전 스님 회상에 동당(東堂) 대중과 서당(西堂)—지금 용화사에도 선방에서는 비구 스님네들이 참선을 하시고, 저쪽 작은 선방에서는 보살님네들이 거기서 참선을 하고 계십니다마는 그리고 여기 웃절에도 분이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계십니다마는,

 

남전 스님 회상에서도 동당, 서당 노나서 정진을 하셔서 고양이 마리가 있었는데, 동당에서는 고양이가 동당 고양이다 서당 대중들은그것은 서당의 고양이다 가지고, 고양이 마리를 가지고 서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조실 스님으로 계시는 남전 스님께서고양이를 이리 가져오너라 가지고 고양이 목을 처억 추켜들고일러라! 이르지 못하면은, 한마디 바로 이르지 못하면은 고양이를 죽일 것이다

 

동당 대중, 서당 대중이 전부 고양이를 가지고 싸우다가, 덩둘허니 그걸 쳐다보고는 입이 붙어 버렸습니다. 아무도 한마디도 이르지를 못했습니다. 남전 스님은 고양이 목을 !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자 남전 스님의 제자이신 조주(趙州) 스님우리가 화두로 공부하고 있는 무자(無字) 판치생모가 전부 조주 스님으로부터 나온 화두입니다. 조주 스님이 떠억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니까 남전 스님께서아까 약허약허 해서 고양이를 들고 일르라고 하자, 대중이 아무도 일르지 못했다. 그래서 고양이를 죽였는데, ! 한마디 일러라그러니까 조주 스님이 신고 있던 신을 벗어서 머리에다가 이고서 나갔습니다.

나가니깐 남전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어허, 네가 있었으면 고양이를 살릴 했구나이렇게 내용의 법문을 조실 스님께서는 대중을 향해서 물으셨고,

 

다음에 부처님 열반 시에 부처님이 열반하실라고 하니까, 대중들이 땅을 치고 우는 사람, 땅에다 머리를 짖쳐서 피를 흘리면서 통곡을 하는 사람, 몸부림을 사람,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라 거기에 모였던 코끼리, 짐승까지라도 슬픔에 잠기지 아니한 것이 없었고,

거기에 사라쌍수(沙羅雙樹), 부처님께서는 사라수라고 하는 나무가 나란히 있는 사이에 자리를 펴시고 거기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나무를 비롯한 근처의 , 파란 이파리가 일시에 백색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학수(鶴樹), 학같이 하얀 나무라, 학수쌍존(鶴樹雙尊)이라고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마는 하늘의 해가 무색해지고, 산에 나무 이파리 흰빛으로 변했고 짐승, 사람 모든 것이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때에내가 죽는다고, 열반에 든다고 해도 나의 제자가 아니요, 내가 열반에 들지 아니했다 해도 제자가 아니니, 일러라 공안을 조실 스님께서는 대중을 향해서 물으셨습니다.

 

이러한 공안에 대해서 낱낱이 추호도 의심없이 공안을 바로 봐야 자기의 생사(生死) 면하는 것이며, 불조의 면목(面目) 보는 것이며, 우주의 근본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생사해탈(生死解脫) 해서 불조(佛祖) 지혜목숨, 혜명(慧命) 잇게 되는 것입니다.(153~3552)

 

 

 

 

(2)------------------


오늘 조실 스님께서 주신 법문(法門) 너무나도 위대하고, 깊고, 기가 맥힌 그러헌 법문을 고루고루 주셨습니다.

동짓날을 기해서 오늘부터서 하루에 1분씩 낮의 시간이 길어지고, 밤의 시간이 짧아지는 것입니다. 내년에 춘분이 돌아올 때까지 그때 가서 비로서 밤과 낮이 가지런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은 잠시도 머물러지 아니하고 1, 1 이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도달을 해야 마지막 죽음의 시간이우리의 목구녁에서 숨이 ! 끊어질 시간이 1, 1 다가오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을 하고 1, 1 지내가는 시간을 어찌 등한히 지낼 수가 있느냐 말씀입니다.

시간이 바로 우리가 사형집행 시간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잠시도 망각을 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진실로 1, 1 시간을 아끼는 사람이라야 영원한 생사해탈을 기약할 수가 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지금은 백일기도 중간이요, 동안거 결제 기간입니다.

결제에 참여하신 보살님은 말할 것도 없고,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모든 신남신녀 여러분들께서도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오고가는 길거리에서, 언제 어데서 생각, 생각을 돌이켜서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간절히, 간절히 화두를 들고, 참나를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정진을 계속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돌아오는 16 날은 우리에게 그렇게 간곡히 정법을 설해 주시던 조실 스님의 생신일입니다. 조촐히 그날을 추모하는 법회를 갖고저 합니다. 있으면 참여하셔서, 그때 조실 스님의 법문 한편을 듣도록... 음력 16일입니다. 이달이죠!

그러면 오늘은 이만 말씀을 드리고 다음 법요식을 진행하겠습니다.(3553~3916)(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

*인가(印可 도장 , 옳을·인정할 )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선지피 ; ①선지. 짐승을 잡아 죽여서 받은 . 식어서 굳어 덩어리진 피를 말한다. ②다쳐서 선지처럼 쏟아져 나오는 .

*법문답(法問答) ; 법거량(法擧揚). ①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 ②선객(禪客) 사이에 주고받는 () 대한 문답.

*꼬타리 ; ‘꼬투리(어떤 이야기나 사건의 실마리)’ 사투리.

*범연(泛然) ; ①두드러진 데가 없이 평범하게. ②특별한 관심이 없어 데면데면하게.

*학인(學人) ;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 성자. 수행승. () 닦는 수행승.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철봉대(鐵棒臺) ; 체육 도구의 하나. 기둥 사이에 일정한 높이로 쇠막대를 평행하게 걸쳐 놓은 기구.

*날새기 ; 저녁, 밤을 지나 날이 밝아 때까지 자지 않는 .

*발심(發心) ; ①불도(佛道=菩提=眞理)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 (원어) 發起菩提心 발기보리심, 發菩提心 발보리심.

*(/忿)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것。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 푸른 ,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 참의(叅意)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5 165원상(圓相)’ 공안.

馬祖因見僧參  畫一圓相云  入也打不入也打  僧便入  師便打  僧云和尙打某甲不得  靠却拄杖  休去.

마조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와서 뵙자,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하고 물으시니, 스님이 원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스님을 후려치니까, 스님이 말하기를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 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셨습니다.

 

[참고] 송담스님(No.282)-86 1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 그려 놓고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공안을 물은데 어떤 스님이 안에 들어갔어.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스님을 한대 후려쳤습니다. 치니까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 했습니다. 아무 없이 그냥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원상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공안에 스님이 뛰어들어가는 도리는 무슨 도리며,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방을 후려치니까 스님이 () 맞고서 하는 말이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스님이 그렇게 말한 데에 마조 스님이 아무 말없이 저리 가버렸으니...

이러한 공안에 확연(確然)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라 하는데, 이것이 부처님과 조사가 씹다가 버린, 먹다가 버린 찌꺼기에 지나지 못한 것이기는 하나, 이러한 공안이 바로 학자(學者) 소견(所見) 가려보는 데에는 좋은 시금석(試金石) 되는 것입니다.

*마조(馬祖) 스님, 만공 스님, 보월 스님 ; 분류역대 스님 약력참고.

*간파하다(看破--) ; 속내(드러나지 않은 일이나 숨겨진 마음) 꿰뚫어 알아차리다.

*용담(龍潭) 스님 ; 생몰년 미상. 성은 (), 법명은 초안(初眼)이며, 용담은 법호이다.

한용운(韓龍雲) 스님의 수제자로, 덕숭산 만공(滿空) 선사의 회상에서 지도를 받아 득의처(得意處) 인증(認證)받았다. 《선가구감》 연구에 골몰하여 완벽한 번역과 풀이를 위해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여러 고승들과 함께 「불교혁신총동맹」을 결성하여 불교혁신운동을 전개하였고, 「선학원」 부이사장, 「해동역경원」 부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 419, 신의주에서 병원을 하고 있던 동생을 만나겠다며 김구 선생과 함께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하러 월북하였으나, 소식이 단절되었다.

—[선가구감] (용담 스님 역주 | 효림) 편역자 소개에서.

*선가귀감(禪家龜鑑) ; 조선 서산대사가 경전과 어록 중에서 수행의 지침이 선종(禪宗) 중심으로가장 요긴하고도 절실한 부분을 가려 뽑은 불교 개론서. 용화선원에서 번역 간행한선가귀감 있다.

*설파(說破) ; 어떤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함.

*탁마(琢磨 , ) ; ①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 ②옥이나 따위를 쪼고 . ③옥을 갈고 돌을 닦듯이 한결같이 정성껏 애써 노력하는 . ④선지식에게 자기의 공부하다가 깨달은 바를 점검 받는 .

*오후보림(悟後保任) ;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 습기(習氣) 제하고 ()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공부. 장양성태(長養聖胎).

[참고] 보조국사 지눌(1158~1210) <수심결修心訣>에서.

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原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 범부(凡夫) 미혹했을 사대(四大) 몸이라 하고 망상(妄想)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自性) 법신(法身)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靈知) ()부처인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善知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생각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성품(性品)자리에는 원래(原來) 번뇌(煩惱) 없고, 무루(無漏) 지혜 성품이 본래(本來) 스스로 구족(具足)하여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라고 한다.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云漸修也 比如孩子初生之日  諸根具足  與他無異    其力未充  頗經歲月  方始成人

 

점수(漸修, 차츰 닦음), 비록 본래 성품(本性)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習氣) 갑자기 모두 없애기는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 () 이루어 성인(聖人) () 길러 양성하면,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聖人) 이루게 되므로,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라고 한다.

비유(比喩)하면,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모든 기관(諸根) 갖추어 있음은 남과 다르지 않지만,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므로 제법 세월(歲月)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成人) 되는 것과 같다.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 집착(執着)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

*근기(根機 뿌리 /베틀 )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덩둘하다 ; ①매우 둔하고 어리석다. ②어리둥절하여 멍하다.

*약허약허 ; 약하(若何)하다여하(如何)하다의 높임 . 여하(如何)하다 : 어떠하다(어떻다, 의견·성질·형편·상태 따위가 어찌 되어 있다).

*사라쌍수(沙羅雙樹) : 북부 인도의 구시성(拘尸城 kuśinagara) 서북쪽으로 흐르는 발제하(跋提河 Ajitavati) 물가, 사라수 여덟 대가 둘씩 마주 있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사라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고 오른쪽 겨드랑이를 밑으로 해서 입멸하시니, 숲이 하얗게 변하였다. 그리하여 학의 (鶴林, 鶴樹)이라고도 하게 되었다.

*면목(面目 , ) :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 정법(正法) 명맥(命脈). ②법신(法身)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

 

 

 

------------------(2)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 )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 진리에 이르는 .

 

 

Posted by 닥공닥정

•§•(275) 화엄경—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 / 비로자나불은 오케스트라 지휘자 / 신심 / 조실스님의 첫 설법 / 만공선사의 인가, 전법게.

‘바로 우리 성낼 줄 알고 욕할 줄 알고, 탐심낼 줄 알고 진심낼 줄 아는 그 우리 중생심 가운데에 비로자나불이 있다. 그것을 우리가 선지식의 적절한 지도 아래 그것을 개발을 해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 것. 나도 반드시 바른 지도를 받아서 노력을 헌다면 나도 성불(成佛)헐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신심입니다.


본인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비로자나 전신체(全身體)다


필경에는 내가 나를 깨달지. 부처가 깨달라 주지 못혀. 그걸 비로자나 전신체라. 진대지(盡大地)가 비로자나 전신체여, 그러기 때문에.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여.


견성(見性) 못허면은 할 수가 없어. 잘 보면, 문제가 다른 문제 아무것도 없고 견성 문제여. 우리 모도 모아서 견성 「이뭣고?」 「이뭣고?」 잘해서 같이 생사해탈하자.


**전강선사(No.275)—임자년 동안거결제(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72.10.15) (전275)
**전강선사 법문 중간에 전강선사 명(命)으로 송담스님이 설하신 법문이 있습니다.

 

(1) 약 21분.

 

(2) 약 22분.


(1)------------------

 

이 묵언(默言)스님이 인자 호(號)가 송담(松潭)인데, 송담 스님을 10년 전부터 내가 법상에를 올라다니면서 여러분들 설법 좀 해 주고 교화해라.
법(法)을 알아 가지고 포교를 중생을 교화(敎化) 안 허면은 그 법을 애끼는 것도 그것이 돈 간탐(慳貪)과 부귀 간탐보다도 더헌 것이다.

법을 가지고, 좋은 법을 가지고 여러분 설법을 해드려서 아! 도(道)를 깨게 맨들아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허게 해야지.
일체 중생이 같이 생사없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증(證)해야지. 나 혼자만 해가지고, 안해 쓰겄느냐?

오늘은 내가 송담한테 다가서 ‘내가 인가(印可)해서 법위(法位)를 전해주니 그리 알라’고.
아! 내가 게송(偈頌—傳法偈)까장 잘 지어서 그래줬더니 죽어도 마다하고,

 

『이름은 그대로 가지겄습니다마는 저는 교화 못 허겄습니다.』
『왜 못 허겄느냐?』
『언변도 없고 또 당초에 헐 마음도 없고 못 허겄습니다.』
『그러면 고인(古人)도 대도(大道)를 통해 가지고도 보림(保任)을 헐라면은 포교고 뭣이고 그만 저 무인절도(無人絶島)에 들어가서 보림허는 법이 있으니 보림을 잘해라. 그러면 네 대로 가거라.』

10년을 내 밑에 있다가—10년을 묵언허고 10년만에 너는 바로 ‘마조원상(馬祖圓相)’ 법문에 바로 깨달라 나한테 대답을 했으니...

그래 내가 그것 하나 대답한다고 되아? 이 공안 저 공안, 공안(公案)을 모두 탁마(琢磨)를 해본 즉 아! 주욱 꿴다 그말이여. 세상에 기특헌 일이다.

나는 어찌 이렇게 내가 그 인가하는 무슨 그런 자격이 있으리요마는 그것은 한국의 과거에 6대 도인이 있었으니, 6대 선지식이 있었으니 6대 선지식의 인가가 내게 없으면 내가 어떻게 인가를 해 주리요.

허지마는 과거에 6대 선지식이 인가헌 것은 조르르르 내 설법에도 다 나와있지마는 구참선객(久參禪客)은 다 알고 있으니, 그러고 틀림없이 다 듣고 아는 이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는데, 아무리 해야 안되아. 인자는 나이 80이니 곧 오늘내일이여.
오늘내일이니까, 내가 하도 권허니깐 오늘은 설법헐라고, 저를 설법허라고 허니께 겨우 아무 말도 안해. 『예. 허겄습니다.』허고 나를 가만히 봐.

그만 설법허라고 허니까 그만 얼굴이 이만해 가지고 미안헌 생각만 잔뜩 가지고 있어. 말도 않고.
‘그래도 헐 수 없어’했더니 인자 올라와서 설법을 헐 것입니다.

헌디 나보다 설법을 더 잘 헌다. 그건 믿지 말라 그 말씀이여. 나는 50년 동안 설법했어.
아직 50년은 다 못 되었소마는 아! 인자 처음 설법헌 사람이 무슨 설법을 헐 것이여?

그렇게 확철대오한 보월 스님은 법상에 올라와서 설법허라고 하니까, 젠장 설법을 거꾸로 헌단 말이여. 설법 거꾸로 허는지 안 봤어.
다 설법허고 마지막 내려오면서 하는, 꺼꾸로 그 꽁댕이를 하면서 그나마 설법도 ‘웬굉~’ 운단 말이여. 울어. 설법하면서 울어버렸어.

대중이 그만 그 많은 대중이 ‘아, 그 보월 스님, 대도를 깨달은 스님이 설법을 허니 얼마나 장하랴’ 야단치고 듣는데,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라. 이 노래를 못 하고는.

만공 스님 항상 하는 소리 들었거든.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라 허고 내려오면 그 소리가 구수허게 좋으니까 자기도 올라가면 그렇게 헐 줄 알고,
(몸집은) 이만헌 이가 목은 찌끄만하게 (가는 목소리로) ‘아, 이사람아!  아, 그사람 참 별 사람이네’ 이런다 그말이여.

헌디 ‘웬굉~벱계~제중생~~’ 아! 그러고 운다 그말이여. 세상에 그렇게 우는걸 보고 안 웃는 이가 없네.
다 웃네. 그중 앞에는 조카상좌라고 이만 허니 또 그렇게 뚱뚱헌 사람이 있는데, 고것 쳐다 보고는 ‘아이고! 죽겄다’고 웃는다 그말이여. 웃음판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거 뭔 법문을 잘 헐 것이요? 허지마는 인자 불가불 이 절 원장(院長)이요, 이 절 조실(祖室)이고, 이 절을 어떻게 헐 거여? 아무리 허기 싫어도 나 혼자만 깨닫고 나 혼자만 생사해탈하고 말 것이여?

대전이 아무리 좋고 대전에다 큰 절 하나 지어놓고, 나 가본게 터가 참 우리 절터 보다 좋단 말이여.
허지마는 여그는 아주 내 본사(本寺)고, 여그는 안에 조실이고, 거그도 부속 선원으로 댕기면서 인자 봐주고 이렇게 되았습니다.

그러신 줄 아시고 오늘 설법상에 올라가서 보월 스님처럼 또 그렇게 울런지, 히히 헐란지 알 수 없소마는 잘 허리라 생각은 말란 말이여.

그저 인자 한번 올라가면 차츰차츰 인자 설법이 설통(說通)이 나와. 그렇게 알고 잘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잠깐 허고 내려오면 또 내가 올라가 또 설법을 헐테니 또 잘 들으십시오.

‘올라와. 어서 와. 헐 수 없어.’

 

 



< 송담스님 법문 >

부처님 49년 설(說)을 아함십이방등팔(阿含十二方等八) 아함경을 12년 동안 설하시고 방등경 8년,
그리고 이십일재담반야(二十一載談般若) 21년 동안을 반야경을 설하시고,
종담법화우팔년(終談法華又八年) 마지막에 법화경을 8년 동안을 설허셔서 그걸 합하면은 49년이 됩니다.

그런데 그 49년 동안 설하신 것이 팔만대장경인데 그 49년 동안에 왜 아함경 12년부터서 말을 하고, 맨 처음에 그렇게 많은 법문을 설하신 화엄경(華嚴經)은 그 49년 동안에 빼놓고 얘기를 허게 됩니다.

그것은 아함경 설하시기 전에 21일 동안에 걸쳐서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설하신 법문이기 때문에 49년 속에 계산을 넣지 않고 얘기를 허게 됩니다.

그러면은 이 화엄경은 그 화엄세계의 교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교주(敎主)로 계시는데 그 비로자나불은 입을 열지 않고, 한마디도 비로자나불의 법문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다른 많은 보살들이 각기 자기가 느끼고 깨달고 보는 바를 그렇게 각기 많은 보살들이 번갈라가면서 설해 놓은 것이 모아 놓은 것이 그게 화엄경이예요.

결국은 그 보살들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네들 말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비로자나불의 뒷받침에 의해서 설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로자나불의 법문을 많은 보살들의 입을 통해서 설해졌다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은 그 많은 화엄경을 하나의 큰 교향악(交響樂)으로 비유해서 본다면은 그 많은 위대한 대교향악의 총지휘자는 바로 비로자나불이고,
그 대관혁악의 악단은 그 화엄경에 나타난 많은 불보살들이 전부 그 교향악단의 악사라고 말할 수가 있고,

아울러서 그 화엄경이 우리가 보는 그 책으로 된 그것만이 화엄경이 아니라,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 다시 말해서 삼라만상(森羅萬象) 전부가 그 위대한 화엄경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유정(有情)·무정(無情)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낱낱이 우리도 그 대관현악(大管絃樂)의 한 단원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나서 일생을 살다가 죽어가는 것, 그 가운데에 자기가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눈 한번 깜짝이고 손 한 번 움직이고 발 한 번 움직이고 웃고 울고 헌 그것들이 그 대관현악의 악단으로써 연주하는 음악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그 악단을 지휘하는 비로자나불 바로 그분이 청정법신(淸淨法身)이십니다.

그러면은 이렇게 말허면은 그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떠헌 상호(相好)를 가지고 또 계신 걸로 착각하기가 쉽습니다마는,
사실은 그 비로자나불은 지금 산승이 말허는 말을 듣고 계신 여러분이 낱낱 여러분 가운데 바로 그 비로자나불이 계신 겁니다.

들을 줄 알고, 볼 줄 알고, 배고픈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아는 그 속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계신 것을 그것을 믿는 것이 신심(信心)입니다.

부처님 앞에 돈과 쌀과 모다 그 떡과 그런 것을 많이 차려놓고 절만 많이 허고 그런다고 그것이 신심이 아니라,
‘바로 우리 성낼 줄 알고 욕할 줄 알고, 탐심낼 줄 알고 진심낼 줄 아는 그 우리 중생심 가운데에 비로자나불이 있다. 그것을 우리가 선지식의 적절한 지도 아래 그것을 개발을 해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 것.
나도 반드시 바른 지도를 받아서 노력을 헌다면 나도 성불(成佛)헐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신심입니다.

그렇게 볼 때에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외도(外道)들이 말헌 바와 같이 우상 숭배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기어이 났으니 어떻게 살다가 가야 바르게 살았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머지않아서 젊은 사람이나,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이나 한번은 또 가게 됩니다. 갈 때에 어떻게 가야 허느냐? 이러헌 중대 문제가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러헌 중대한 문제를 우리는 탐심(貪心)과 진심(瞋心)과 치심(癡心) 이러헌 삼독심(三毒心)으로 말미암아 그런 데에 눈을 팔다 결국은 그런 중대사를 망각하고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에 하룻날 숨 한 번 내쉬었던 숨을 다시 들어마시지 못하면은 우리는 이 받기 어려운 몸을 버리고 또 어느 곳을 헤매게 되겠습니까?

다행히 우리는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뚱이를 받았고, 사람 몸을 받어 가지고서도 그 많은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들어오기 어려운 불법 문중(佛法門中)에 들어왔습니다.

불법 문중에 들어와서도 그 많은 절이 있고 많은 스님네들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 정법(正法)을 전해 이어받으신 전강 조실스님 문하에 들어와서 '참 불법'을 듣고 수행할 수 있는 이러한 길에 들어섰다고 하는 것은 저나 여러분이 한결같이 다행한 일이요, 희유한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서, 들어오기 어려운 정법 문중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루하루를 형식에 얽매여서 ‘결제니까 절에 가야겠다, 7일 날이니까 절에 가야겠다, 또는 관음재니까 절에 가야겄다’ 이것이 하나의 의식화 되아서 그 의식화된 가운데에 절에 왔다갔다 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믿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 큰스님 법문을 들을 때는 ‘아! 내가 쫌 열심히 화두(話頭)를 듣고 공부를 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불꽃같이 일어나지만,
그것이 벌써 집에 돌아가서 아들 손자 며느리 만나서 살림 걱정하는 소리 듣고 어쩌고 허다 보면은 금방 절에서 그 불꽃같이 일어난 신심은 간 곳 없고 다시 사회의 그 오욕락(五欲樂) 속에 휩쓸려 들어가고 말아버립니다.

비단 보살님들 뿐만 아니라 출가한 스님네도 무상(無常)을 철저히 느껴서 정든 고향과 부모형제 권속을 다 여의고 머리를 깎고 출가해서 철저히 수행할 것을 명심하고 각오한지 한두 번이 아니지마는,

또 하룻밤 자고 이틀밤 자고 사흘 나흘 엿새 가다 보면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그 굳었던 결심이 스르르 녹아지고 그래가지고 또 다시 또 자기를 참회하고 반성하고 해서 또 결심을 해가지고 또 정진을 애쓰고,

이렇게 애는 쓰고 있지마는 10년 20년 30년 이렇게 절에서 정진을 한답시고 함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확철대오를 하지 못한 것은 그 결심이 한 생각이 만년을 가지 못하고, 또 풀어졌다 또 세웠다 이러기 때문에,

물에 잠긴 돌이, 물이 채이면은 물속에 쟁기고, 물이 빠지면 또 돌 꼭대기가 물위로 솟았다, 또 물이 채이면 또 가라앉았다, 밤낮 이래가지고 끝장을 조매 보지 못하고 한 세상을 또 마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올라온 것은 마치 비로자나불이 한 대관현악에 지휘자가 되셔서 그 지휘자의 지휘봉에 의해서 많은 악사들이 느리게 또는 빨리, 뭣헌데는 격하게 또 뭣헌데는 조용허게 이렇게 해서 그 수천 무량수의 그 악사들이 한 분의 지휘봉에 의해서 관혁악을 연주하게 됩니다.

그와 같이 이 중생 교화하는데 있어서도 그 부처님이 하나의 위대한 그 각본을 저술한 작가이시요 또 지휘자이시고 또 감독이시고 연출이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조실스님이 이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 교화하신 것도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면,
청정법신 비로자불의 지휘·감독·연출에 의해서 일생을 스스로 닦아서 견성오도(見性悟道)하시고 나아가서 80 고령에 이르시도록 설법을 해서 많은 제자를 교화하신 것도 하나의 연극, 그 대관현악의 한 부분이라고 말헐 수가 있습니다.

제가 여기 올라온 것은 멀리는 비로자나불의, 가깝게는 조실스님의 지휘에 의해서 하나의 배우로서 또는 악사로서, 다시 비근(卑近)허게 말허면 꼭두각시로서 여기에 올라왔다고 말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출가해서 근 30년이 되었습니다마는 본래 근기(根機)가 우둔하고 발심이 철저허지를 못해서 노상 생각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투철한 공부를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역시 출가할 때의 그 마음가짐으로 전강 조실스님의 지도하에 정진허고 있는 하나의 수행인에 지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해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은
‘조실스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하루 한 시간, 1분1초라도 시간을 애끼고 챙겨서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셔서 조실스님의 철저한 지도 아래 다문 조끔이라도 더 철저히 공부를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와 같이 공부를 하십시다.’
이러한 권고의 말씀을 드릴 이외에는 아무 말씀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처음~21분2초)

 

 

 



(2)------------------

 

그리고 조실스님께서 이 용화사에 주석(駐錫)하신지가 벌써 10여년 입니다마는,
그 동안에 많은 광장설(廣長舌)로써 그 경전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러헌 최상법(最上法)을 여러분의 근기에 맞도록 그 고구정녕(苦口丁寧)하시고 참 훌륭하신 법문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 그늘 잔영(殘影)이 소소영령하게 녹음기에 녹음이 다 되어있고 그것이 낱낱이 조실스님의 시자의 노고에 의해서 원고가 결집이 되어있습니다.
앞으로 그 원고를 정리허고 교정해서 그것이 하나의 설법집으로 간행할 날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러헌 녹음기나 또는 설법집에 의해서 여러분이 공부허는 데에 좋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것 보다는 조실스님 몸이 살아계실 그 동안에 여러분께서 공부를 허셔서, 여러분이 공부허신 만큼 밖에는 조실스님이 어떻게 더 이상 지도를 못 허십니다.

자기가 열 근을 들을 만한 힘이 있는 사람에게 열 근의 무게를 주어지고 짐을 줄 수가 있습니다. 열 근 밖에 들 수 없는 사람에게 스무 근 내지 백 근의 그런 무거운 짐을 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만큼 열심히 공부를 허느냐에 따라서 조실스님의 법문도 여러분의 근기에 설해지게 되고 조실 스님의 지도 방법도 여러분의 근기에 따라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조실스님이 가지고 계신 그 능력을 전부 그리고 철저하게 지도를 받을려면 여러분이 그만큼 철저히 정진을 허심으로써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실스님을 모시고 법문을 들어보면은 청법(聽法) 대중이 모다 구참납자(久參衲子)요, 철저히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정진허는 그런 납자들이 터억 앞에 자리를 잡고 앉어 계시고,
또 신도님들도 철저한 신심있는 분들이 법당에 꽉 들어차서 위법망구적으로 발심헌 마음으로 들어주실 때에 조실스님은 30년을 모시고 있어도 듣지 못한 그런 법문을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토하신 것을 저는 종종 보았습니다.

조실스님께서 아무리 정정허시고 건강하시다 하더라도 사람의 몸은 하나의 기계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기계라고 하는 것은 그 한도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설사 조실스님의 법력과 도력에 의해서 백년 내지 이백년을 사실 수 있는 그런 신통력과 법력이 계시다 하드라도,
부처님께서 그런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요 사생자부(四生慈父)이신 육신통(六神通)을 다 갖추신 무량삼매를 갖추신 그런 부처님도 79세에 열반(涅槃)을 보이셨습니다.

조실스님께서도 언제 어떻게 그 열반을 보이실는지 그것은 우리는 모릅니다.
그날이 반드시 있을 것을 우리는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날이 돌아오기 전에 여기에 모이신 사부대중께서는 정말 이를 악물고 대분발을 해서 철저히 정진을 해주시기를 간곡히 말씀드리고 입을 다물겠습니다.

 

 



< 전강선사 법문 >

주중야문적(舟中夜聞笛)하고  하처숙어옹(何處宿漁翁)고
나무~아미타불~
일출무인견(日出無人見)하니  조제화자홍(鳥啼花自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저 참 망망창해(茫茫滄海) 저 섬 중에서 도를 닦는데, ‘이뭣고?’ 참선을 허고 있는데 어디서 젓대소리가 나. 잘 부는 젓대소리가 처억 난다 그말이여.
그 하처숙어옹(何處宿漁翁)고? 그 어느 곳에서 어옹(漁翁)이 있어서, 고기 잡는 그 어옹이 있어서 이런 젓대를 부는가?
그 젓대가 활연대오(豁然大悟)하는 젓대여. 젓대소리를 듣고 툭 깨 버렸어.

아까 그 송담 스님이 여기 원장(院長) 스님이 또 올라와서 설법할 때,
비로자나가 설법을 했는데 입 하나 뗀 법이 없이 설법했는데 보살들이 백만 천만 억만 보살들이 설했자 설할 수가 없어. 만년을 설했자 역사를 넣을 수 없어. 그러니 49년 설법에 보탤 수가 없다 그말이여.

그 본인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비로자나 전신체(全身體)다 그말이여.
그러니 우리의 본래면목, 그 언제든지 가르쳐 줄 스승은 있지마는, 옳은 스승을 만나야만 깨닫지만은,
오(悟)는 자기가 깨닫지 부처가 깨달아 주지 못해. 그 비로자나 전신체, 생사 없는 몸뚱이.

그러고 화엄경은 그렇게 81권이니, 81권 뿐이여? 81권이 화엄경이여?
일사천하미진수품이 화엄경인데, 미진수품(微塵數品) 화엄경이 그것이 내 본래면목, 비로자나 전신체.

그 비로자나 전신체가 내 마음인데 내 본래면목인데,
그 본래면목이 별별 놈의 소리를 다허고, 별별 놈의 못할 소리가 없고, 뭐 말 한마디를 가지고 천만 가지를 맨들수 있고, 이것이 비로자나불이여.

이 비로자나불이 이렇게도 별말 다하지마는 그 근본 자체, 비로자나불 근본면목 속에 들어가서 사견(邪見)도 없고 상견(相見)도 없고 유(有)도 무(無)도 비유(非有)도 비무(非無)도 없는데,
무엇으로 뭣을 나투어서 거기서 무엇을 만들어놔?
못혀. 입 뿐이지. 입으로만 뿐이지, 하덜 못혀.

필경에는 내가 나를 깨달지. 부처가 깨달라 주지 못혀. 그걸 비로자나 전신체라.
진대지(盡大地)가 비로자나 전신체여, 그러기 때문에.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여.
아까 그 설법이여.

설법을 허되 첫 설법에 올라가서 우세나 하고 보월 스님 울고 내려오데끼 그럴 줄 알았더니 그 대의(大意)가 참 분명허단 말이여. 꼭 그렇지.

그런데 나는 스물세 살 먹어서 세상에 내가 그때 주전도 없지.
허지마는 한번 올라갈 용기가 있어서 첫 설법을 청하길래 좋아서, 아! 대중이 한 7-80명 대중이 직지사 선원에서 모여서 법문 해 달라고 청한다 그말이여.

그때도 그래도 뭔 좀 소견이 났다고 헐 때인데, 그래도 내가 체면상 못 올라갈 텐데,
그때 다 통쾌한 선지식한테 다 내가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한 번 올라간 것인데, 올라가서 첫 설법을 허는데, 내 첫 설법 좀 들어 보시오.

아주 올라가서 얼마나 허고 싶던지 ‘내가 올라가면 한바탕 하리라’고.
올라가 놓으니깐, 법상에 올라가 놓으니깐 떨려. 떨릴 것이 하나도 없는디 속에는 아무 일 없는디.

아따! 그래서 그까짓 것 떨 것도 없다. 모도 그만 모도 개미같이 봐라.
너무 황송한 미안한 말이지만, 개미떼 같이 그냥 속으로 그냥 생각을 해 버렸다 말이여.

내가 그러고는 설법을 허되, ‘주장자를 들었다고 날 봐.’
차사(此事)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여. 입만 열면 그르쳐. 착(錯) 불착(不錯)은 차치(且置)하고 여하시차사(如何是此事)냐?
일러. 일러! 왜 못 일러? 한번 일러 봐?
어디 우리 또 대중도 남녀가 있나? 남녀상(男女相)이 없는게 법인데.
내 첫 설법에 헌거여.

그때도 물었어. 대중에 물었어.
차사(此事)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여. 입만 열면 그르쳐. 착(錯) 불착(不錯)은 차치하고 어떤 게 차사(此事)냐?
아무도 대답이 없어.

〇만공스님의 인가, 전법게.
그래서 만공 큰스님한테—만공 큰스님 십답, 한암 스님과 열 가지 문답(問答)이 있는데—‘열 가지 문답 가운데에 다 물어 주십시오’ 문답을 다 물어서 대답 내가 다했다.

(대답)허고 마지막 나올 때 『저는 스님 하직합니다.』
스님 밑에 있어 뭣 할 것이여? 나도 스님 법 내가 다 탁마해서 내가 다 가졌는데, 나도 인자 가서 중생 교화해야 할 것 아니여.

『갑니다』허고 절을 허니까,
『어이 가소. 저그 저 별이 있는데 저 하늘에 별이 있는데, 저 별—부처님 깨달은 별은 저 별 새벽별인데, 그 부처님은 새벽별을 보고 깼지마는 자네는 깨달은 별이 무슨 별인가? 어떤 별에 깨달았는가?』

(내가) 땅을 허부적 허부적...
『선재(善哉) 선재(善哉)로구나.』
선재란 건, ‘착할 선(善)자’는 ‘착하다’는 말이 아니여. ‘옳다. 옳다’ 그말이여.

불조미증전(佛祖未曾傳)인디  아역무소득(我亦無所得)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차일추색모(此日秋色暮)헌디  원소재후봉(猿嘯在後峰)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아! 내가 그렇게 『자네 별은 어떤 별인가?』 (만공스님 묻는 말에 내가) 왜 땅을 파? 왜?
『선재 선재다. 착하고 착하다.』

불조(佛祖)도 미증전(未曾傳)인디, 불조도 일찍이 전(傳)허들 못했는디,
아역무소득(我亦無所得)일세. 나도 또한 얻은 바가 없네.

차일(此日)에 추색모(秋色暮)인데, 오늘날에 추색(秋色)이 저문데, 이 가을날이여. 가을날이 저물었는데,
원소(猿嘯)는 재후봉(在後峰)일세. 원숭이 휘파람은 뒷봉에서 우네.

그러헌 인가(印可)가 어디 있냐 이말이여.
만공집(滿空集)에도 있어. 만공 큰스님 집(集)에 있는 것도 내가 갖다 내가 고승집에 이리 내놨어.
왜 어찌 거짓말을 허냐 그말이여. 어떻게 거짓말을 해. 거다가 어떻게 뻘 소리를 붙여 놓냐 그말이여.

인가(印可) 없이 '인가 있다'고, 인가 없이 나와서 조실(祖室) 노릇허고 있어?
차라리 지옥 귀신이 되어 가지고 귀신 노릇하면서 ‘아이고 나 죽겠다’ 소리를 허지.
인가 없이 주뎅이를 벌리고 조실 노릇혀? 못허는 법이다 그말이여.


내가 그러고 나왔으니, 직지사에 올라와서 설법 한번 헐 마음이 나지 않나? 불끈 난다 그말이여. 속에서는.

아, 그래 올라가서 설법을 헌 것이 ‘입만 열면 그르치니, 그르치고 그르치지 않는 걸’ 물은 게 아니여?
「차사(此事)는 착(錯) 불착(不錯)이니 이 일은 입만 열면 그르치니, 그르치고 그르치지 않는 건 그만두고 어떤게 차사(此事)냐?」 대답이 없어.

‘촛불이 밝다’ ‘병율이야, 촛불이 밝다.’ 그래.
이놈아! 촛불 밝은 걸 내가 물었어? 차사(此事)를 물었지.

별 것 다했자 소용 없어. 그래 이른 거 아니여.
이른 것은 바로 일러야 이른 것이지. 그깟은 놈의 소리를 불청허고 소용도 없고.

대번 했기 때문에 등단으로 내가 했기 때문에 만공 큰스님한테 내가 법문을,
『소승이 영신(永信)이가 법상에 올라가 설법을 했는데 큰스님한테 불가불 점검을 받어야 허겠습니다.
설법을 법상에 올라가서 주장자를 들어 대중을 보이고, 차사(此事)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니 착(錯) 불착(不錯)은 차치하고 어떤 게 차사(此事)냐? 물었는데, 답이 없어 큰스님께 보내니 답해 줍소사』

그랬더니 만공 큰스님이 답을 해서 보내되,
요만한 종이에다가 그림을 하나 그렸는데, 그림이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그렸어. 요렇게 그려놨어.
아니 그렇게 그린 게 아니라 그림이 요렇게 요렇게 꼬부라게, 요렇게 꼬부라게 그려놨어. 이 위에서 꼬부래. 아니 이놈이 꼬부라졌어, 밑으로.

거 무슨 도리일까? 아시겠어? 그 꼬부랑을 그려놨다 그말이여.
뭐여? 그 무슨 그림이여? 만공 큰스님 답이여, 이게.

알겠어? 견성(見性) 못허면은 할 수가 없어. 잘 보면, 문제가 다른 문제 아무것도 없고 견성 문제여.

우리 모도 모아서 견성 「이뭣고?」 「이뭣고?」 잘해서 같이 생사해탈하자.
너 허고 나는 안 안허고는 어떻게 될 것이냐? 지옥 귀신이 되고 말 것이냐?

우리가 지금 지옥 귀신 면한 줄 아시오? 아이고, 생각해 보면 큰일나.
생각을 못허고 이러고 있으니 그렇지, 역사 없는 우리가 과거에 지옥고를 얼마를 받았어.

포구발심(怖懼發心)이여. 무서운 발심. 무서워서 죄 안 짓고, 무서워서 도 닦는 것이여.
한번 또 들어가면 언제 나와? 지금 우리가 나왔단 말이여.
요까짓 것 나와서 잠깐 나왔지마는 또 죄를 퍼지어 간다 그말이여, 틀림없이.
지옥은 안 가고는 못 견뎌.

참선(參禪)이 아니면 못 견뎌.
과연 우리 이렇게 모아 참선 법문 배우라고, 참선 설법 들으라고, 우리 설판재주(說辦齋主)가 터억 나와 가지고 이 설판을 해서 이리 지어 놓으니깐 이렇게 많이 나왔네.(처음~42분3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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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교화(敎化) ; 가르쳐 이끌다. 사람을 일깨워 고통받는 자를 편안히 하고, 의심하는 자를 믿게 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바른 길로 돌아가게 함. 설교. 교도감화(敎導感化)의 준말.
*간탐하다(慳貪 아낄 간,탐할 탐) ; 몹시 인색하고 욕심이 많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상락아정(常樂我淨 항상 상,즐거울 락,나 아,청정할 정) :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깨달음)의 네가지 덕(德).
열반경(涅槃經)에 의하면, 열반의 경지는 생멸 변천함이 없으므로 상(常)이고, 생사의 고통을 여의어 무위(無爲) 안락하므로 낙(樂)이고, 망집(妄執)의 아(我)를 여의고 대자재(大自在)가 있는 진아(眞我)이므로 아(我)이고, 번뇌의 더러움을 여의어 담연청정(湛然清淨)하므로 정(淨)이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법위(法位) ; 변하지 않는 진리의 세계. 궁극적인 진리의 세계.
*전법게(전강선사가 송담스님에게 내려 주신 전법게)
비법비비법(非法非非法)이다  법(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무법역무심(無法亦無心)이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낙양추색다(洛陽秋色多)하고  낙양(洛陽)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백운비(江松白雲飛)니라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참고] 전강선사(No.046)—조실스님 생신일 법문(송담스님 인가,만공 한암 십대문답)(경술70.11.16)에서.
*보림(保任 보임) ;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 흔히 ‘보림’이라 읽는다.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무인절도(無人絶島) ; 사람이 살지 않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섬.
*마조원상(馬祖圓相) ; [참고] 송담스님(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을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이 공안을 물은데 어떤 스님이 그 안에 들어갔어.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대 후려쳤습니다.

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원상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한 그 공안에 그 스님이 턱 뛰어들어가는 도리는 무슨 도리며,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한 방을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그 방(棒)을 맞고서 하는 말이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또 그 스님이 그렇게 말한 데에 마조 스님이 아무 말없이 저리 가버렸으니...
이러한 공안에 확연(確然)히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라 하는데,
이것이 다 부처님과 조사가 씹다가 버린, 먹다가 버린 찌꺼기에 지나지 못한 것이기는 하나, 이러한 공안이 바로 학자(學者)의 소견(所見)을 가려보는 데에는 좋은 시금석(試金石)이 되는 것입니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탁마(琢磨 쫄 탁,갈 마) ; ①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옥이나 돌 따위를 쪼고 갊. ③옥을 갈고 돌을 닦듯이 한결같이 정성껏 애써 노력하는 것. ④선지식에게 자기의 공부하다가 깨달은 바를 점검 받는 것.
*구참선객(久參禪客) ; 오랫동안 참선한 수행승.
*보월스님, 만공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설통(說通) ; 대중 앞에서 막힘이 없이 유창하고 당당하게 설법을 잘함.
*화엄경(華嚴經) ; 본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이 경은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한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다.
3가지 번역이 있는데, 60권은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 번역이고, 80권은 당(唐)의 실차난타(實叉難陀) 번역, 40권은 당(唐)의 반야(般若) 번역임.
이 가운데 40권은 60권과 80권의 마지막에 있는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며,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만 산스크리트 원전이 남아 있음.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교주(敎主) ; 어떤 종교나 종파를 처음 세운 사람.
*교향악(交響樂) ; 교향곡, 교향시, 교향 모음곡 등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음악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 ; 법장현수(法藏賢首) 스님의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 보면,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용궁(龍宮)에 가서 대부사의경(大不思議經=화엄경)을 보았는데, 상본·중본·하본 3가지 본(本)이 있었다. 그 중에 상본(上本)이 십삼천대천세계미진수(十三千大千世界微塵數)게송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었다 한다.
중본(中本)은 49만 8800게송 1200품(品)이고, 하본(下本)은 10만 게송 38품이었다 한다.
용수보살이 상본과 중본은 사바세계 사람들 마음의 힘으로서 능히 가질 수 없으므로 전하지 않고, 하본(下本)을 외어 세상에 전하였고 또 그것을 간략히 한 약본(略本)이 80권 본, 60권 본이 되었다 한다.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은 ‘미진수(微塵數 셀 수 없는 무한수)’의 품(品)으로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모든 현상—삼라만상(森羅萬象) 전부가 그 화엄경을 이루고 있으며, 곧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로 우리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유정(有情) ;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 살아있는 것. 생(生)이 있는 것. 감정이나 의식을 가진 것.
번뇌에 얽매여 미혹한 모든 존재. 옛날에는 중생(衆生)이라 번역하고, 현장(玄裝)이후의 새로운 해석에서는 유정(有情)이라 한역함. 정(情)은 마음이라는 뜻. 일체 살아있는 것의 총칭.
*무정(無情) ; 감정이 없는 초목·산하·대지 등을 말함.
*관현악(管絃樂) ; 여러 가지의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를 조화시킨 큰 규모의 합주.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 ‘손 한 번 들고 발 한 번 옮긴다’는 뜻으로, 크고 작은 동작 하나하나를 이르는 말.
*청정법신(淸淨法身) ; 더러움이 없는 청정한 법신, 곧 비로자나불을 말함.
*상호(相好) ; 부처님의 몸에 갖추어진 용모와 형상.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을 이른다.
*견성오도(見性悟道) : ‘성품(性)을 보아(見) 진리(道)를 깨친다(悟)’는 뜻이다。자기의 심성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인 당체(當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 견성오도라 한다.
*비근(卑近)하다 ; 주위에서 흔히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깝고 알기 쉽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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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駐錫 머무를 주,석장 석) ; ①스님들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석장(錫杖)이라 하는데, ‘석장(錫杖)을 머무르게 한다(駐)’는 뜻으로, 스님이 한 곳에 머무름을 일컫는 말. ②스님이 한때 어떤 지역에 포교(布敎)를 하기 위하여 머무는 일.
*광장설(廣長舌) ; 장광설(長廣舌). ①길고 줄기차게 잘하는 말솜씨. ②부처님의 설법.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 정•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청법(聽法) ; 불보살(佛菩薩)이나 스승이 설법하는 것을 경건하게 경청함.
*구참납자(久參衲子) ; 오랫동안 참선한 수행승.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진리)를 구하기 위해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사자후(獅子吼) ; ①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 : 삼계(三界)의 중생을 열반(涅槃)로 인도(引導)하는 위대한 사람. 부처님을 말함.
*사생자부(四生慈父) ; 육도윤회(六途輪廻)하는 세계에서 4가지 방식(四生)으로—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태어나는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대자비(大慈悲)의 아버지. 부처님을 말함.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

·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게송) ‘주중야문적~’ ; [청허당집(清虛堂集)] (서산휴정 著,朴敬勛 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p40 ‘동호야박(東湖夜泊)’ 게송 참고.
*활연대오(豁然大悟) ; 환하게 막힘이 없이 탁 트인 큰 깨달음.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 ; 전신(全身)은 '본질 그대로' '여래진신(如來眞身)'의 뜻으로 ‘비로자나 전신체’는 우리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
*진대지(盡大地) ; 온(盡) 산하대지. 온 세계.
*차치(且置) ; 내버려두고 문제삼지 않음.
*(게송) ‘불조미증전~’ ; 만공선사께서 전강선사에게 내려 주신 전법게(傳法偈).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111 참고.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포구발심(怖懼發心 두려워할 포,두려워할 구,일어날 발,마음 심) : ‘끝없이 되풀이 되는 육도윤회(六途輪廻)에서 받을 생사(生死)가 정말 무섭구나.’ 그 생사의 고통을 매우 두려워(怖懼)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생사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설판재주(說辦齋主) ; 법회나 불사(佛事)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비용을 준비하고 마련하는 스님 또는 신도를 말한다. 설(說)은 '법회, 불사'  판(辦)은 '힘들이다, 주관하다'의 뜻.

Posted by 닥공닥정
상(相)없이2013. 11. 18. 10:10

§(099) () 집착없이. 척사현정(斥邪顯正) / 재송도인 / 만공스님, 보월스님 / ()없이 베풀어야 / 본참화두를 들고 행동하면 자연히 상에  떨어져.

 

**송담스님(No.099) - 1979년(기미년) 신수기도회향(79.1.9.음)(77분)에서. (용099)

 

(1) 약 8분.

(2) 약 17분.

 

(1)------------------


금방 조실스님께서는 재송도인(栽松道人)의 법문을 허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조실스님이 아주 재미있게 해주신 법문이라 잘 들으셨을 줄 생각합니다.

참선을 해서 생사(生死)없는 이치를 깨닫고 그리고 보림(保任)을 잘하면, 생사에 그렇게 자유자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에 자유자재하다’고 하는 것은, 앉아서 죽고 서서 죽고, 오늘 가고 싶으면 오늘 가고, 며칠 더 있다 갈라면 가고. 옛날 도인들은 떠억 편안히 앉아서 가신 분, 또 걸망을 떠억 지고 지팽이를 집고 어디 행각(行脚)을 떠나는 그런 행색(行色)을 해 가지고, 마당에 나가서 못가에 서서 선 채 딱 열반(涅槃)하신 그런 분도 계시고,

또 등(鄧隱) 조사 같은 이는 열반하실 때 옆에 시자(侍者)보고, “제방(諸方)에 앉아서 돌아가신 분이 계시냐?”

“그런 분은 많이 계십니다.”


“서서 돌아가신 분도 계시냐?”
“그런 분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면 까꾸로 서서 돌아가신 분도 있느냐?”
“그런 분은 아직 없습니다.”
당신은 까꾸로 서서, 선 채 열반에 드셨습니다.

전등록에 보면 까꾸로 선 채 열반에 드셨는데 옷자락, 옷고름, 옷소매까지도 밑으로 처지지 아니하고, 몸 따라서 딱 붙은 채 열반에 드셨습니다. 옆에 대중들이 전부 그분을, 열반하신 뒤에 편안하게 뉘어 드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까딱을 안했습니다. 마치 큰 나무가 우뚝 선 것처럼 아무리 밀어도 넘어지지를 안했습니다.

그래서 애를 먹고 있던 차에, 마치 등 조사의 누이동생이 여승(女僧)인데, 여승이 오빠이신 등 조사가 열반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와서는 “이 노장(老長)이 평생에 추한 짓을 하더니 죽을 때에도 이런 추한 짓을 하는구나.” 하고  손가락으로 툭 밀뜨려 버리니까 툭 쓰러졌습니다.

과거 인도나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 일본에-이 동양에 걸쳐서 많은 도인들이 이렇게 생사에 자유자재 허셨습니다. 그런 분이 참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참으로 그 분이 올바르게 깨닫고 못 깨닫고 허는 그 구분을, 돌아가실 때 서서 돌아가셨느냐 또는 앉아서 돌아가셨느냐 또는 누워서 돌아가셨느냐, 돌아가신 뒤에 방광(放光)을 했냐 안했느냐 이러헌 것으로써 그 분의 도(道)가 높고, 높지 아니한 것을 분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공 스님-조실스님의 법사(法師)스님이신 만공 스님에, 맨 처음에 법(法)을 전해 받으신 보월 스님께서 열반하셨을 때에 오색(五色)이 찬란한 방광을 하셨습니다.
그때에 만공 스님께서 보월 스님의 열반에, 그 상서(祥瑞)에 대한 점검을 하시기를 “추한 이 더러운 놈이 죽을 때 추한 짓을 면하덜 못하는구나.” 이렇게 말씀을 허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모다, 아까 등 조사의 까꾸로 서서 움직이지 아니한 것에 누이동생이 와 가지고 그 점검을 하는 말씀이나, 만공 큰스님께서 당신의 수법제자(受法弟子)이신 보월스님의 열반서상(涅槃瑞相)을 점검하신 말씀이, 다 척사현정(斥邪顯正)의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행여나 중생들이 상(相)에 집착해서 바른 법을 보지를 못하고 삿된 소견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셔서 추상(秋霜)같은 점검을 내리신 것입니다.

근자(近者)에 스님네나 또는 보살님네들이 돌아가셨을 때 화장(火葬)을 한 결과 많은 사리(舍利)들이 여기서 저기서 나오고 있습니다. 불교신문에 자주자주 보도가 됩니다마는, 물론 계행을 잘 지키고 수행을 착실히 하고 마음씨를 착하게 먹고 일생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온다면 사리가 나올 수가 있습니다. 또는 나오지 아니할 수도 있습니다.
나온 것을 꼭 나쁘다고 헐 것도 없습니다마는, 사리 나온 것을 가지고 ‘사리가 나왔기 때문에 그 분이 도인(道人)이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고 허는 것을 우리 법보제자 여러분들께서는 잘 알고 계서야 할 줄 생각합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리가 나오고 방광을 헌 것에 대해서 그것을 착각을 해가지고,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이 참 도인이다’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정법(正法)을 배우는 불제자(佛弟子)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5분58초~13분28초)

 

 

 

 

(2)------------------

 

재송도인(栽松道人)이 팔십 노인의 몸으로 인가(印可)를 받으러 갔다가 법담을 해서, 법담(法談)은 훌륭하게 해서 분명 견성(見性)헌 것을 인증을 받았지마는 늙은 탓으로 해서, 늙은 사람에게 법(法)을 전해봤자 법을 전하신 스승보다도 먼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법을 그 다음에 누가 있어서 대(代)를 이을 것인가?
그래서 몸을 바꿔 오도록 말씀을 허셨던 것입니다.

몸을 바꾸는데, 처녀의 뱃속에 들어가, 그래가지고 몸을 새로 바꿔 나와서, 어려서 출가를 해 가지고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출가하신 재송도인을 떠나보내고 그 어머니-처녀로 애기를 난, 그 재송도인의 어머니-께서는 아들을 찾고 찾아서, 늙발에 아들 있는 곳을 알아가지고 찾아갔습니다. 얼마동안 별당에서 밥을 얻어 자시면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돌아가실 때에, 별당에다가 가둬서 계시게 하고 밥을 갖다 드리지 아니해서 굶어서 돌아가셨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그때 수백 명의 제자들이 ‘어째서 처녀의 몸으로 당신을 고생 끝에 낳아가지고 길러서 출가를 시켜준 그 어머니를 굶겨서 돌아가시게 헐 수가 있겠습니까? 결단코 도인(道人)이라 헐 수가 없다. 이러한 불효한 사람이 도인일 수는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한테 도를 배우느니 차라리 여기를 떠나자’ 이리 해 가지고 대중이 전부 걸망을 싸 짊어지고 그 절을 떠날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그 돌아가신, 재송도인의 어머니 말씀이 들렸습니다. “여러 대중 스님네, 제 말씀을 들으시오. 나는 아들 하나를 잘 둔 공덕으로 지금 나는 천상으로 올라가는 길이오. 그러니 내 아들이야말로 불보살(佛菩薩)의 화신(化身)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도인이고, 나에게 가장 효도를 해준 아들이니, 내 아들을 그릇 오해하지 말고 어서 걸망 짐을 풀어놓고 열심히 도를 배우시오.” 이렇게 소리가 울려나왔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대중 스님네들은 다시 걸망을 풀고 그전에 보다도 훨씬 더 목숨 바쳐 공부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시겠지마는, 이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인정(人情)을 써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인정(人情)과 자비(慈悲)는 그 질(質)에 있어서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인정은 우선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좋지마는 결국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이고, 자비는 겉으로 보기에는 인정과 너무나도 흡사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인정이라 하는 것은, 주는 것이 있고 또 받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주면서 또 받을 것을 또 기약을 헙니다.

그러나 불보살의 무연자비(無緣慈悲), 정말 참된 자비라고 하는 것은 주되 주는 바가 없고, 따라서 상(相)이 없는 것이며, 받을 것을 전혀 생각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 보답을 받기를 바래면서 주는 것은 ‘참보시’가 아니고 ‘참자비’가 아니고, 은혜를 베풀어서 덕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원망과 웬수 빚으로 돌아오는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6.25 동란 때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마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를 베푼 자’에게, 은혜로 보답하지 아니하고 죽음을 갖다 안겨준 그러헌 사례가 방방곡곡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과거•현재•미래에 걸쳐서 언제라도 은혜를 베푸는 것에 덕(德)이 돌아오지를 못하고 그러헌 웬수 빚으로써 보답 받은 예는 너무나 흔한 것입니다.
그 원인이 뭣이냐 하면, 그 배은망덕(背恩忘德)한 그 사람을 다 나쁘다고 합니다마는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되 상(相)이 없이 주라.’ 주되 보답을 바래지 말고 주어야지, 보답을 바래고 주면은 결과적으로는 좋지를 못한 것입니다.(20분29초)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가르키고, 자식을 키우고, 자식을 결혼을 시켜서 자유롭게 해준 그 일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그 아들과 딸을 고생고생 하면서 포태(胞胎)를 해 가지고 낳아서 길러 가지고 맛있는 것은 아이의 입에 넣고, 따뜻하고 마른자리는 아이에게 주고 춥고 젖은 자리는 엄마가 눕고, 이러면서 키운 그 자식, 못 먹고 못 입으면서 키운 그 자식이 커서 장가가서 자식 낳고 살면은 부모의 은혜를 거의 망각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너무나도 지나친 불효자식(不孝子息)이 되고, 나중에는 지집 말만 듣고 부모를 웬수같이 생각하고 부모를 내쫓고 부모를 죽게까지 하는 예는 신문에 가끔 보도됩니다.

이건 특수한 예라고 생각허실런지 모르지마는, 자식은 과거의 업(業)으로 인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혹 은혜를 갚기 위해서 태어난 그런 효자도 더러는 있지만, 대다수 자식이 웬수를 갚기 위해서 태어난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고 하는 것을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웬수의 자식이 태어날수록에 부모는 더욱 그 자식이 사랑스럽고 불쌍하고 피라도 빼서 그 놈을 살릴라고 허고 잘 살게 헐려고 하지마는, 그 자식은 점점 부모의 속에다가 불을 묻고 송곳으로 찌르고 고춧가루를 뿌리는 그러헌 짓을 가려가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웬수가 태어나서 자식노릇을 하고 있는 경우인 것입니다. 그러헌 자식은 태어나지 아니한만 못하건마는 자기가 지어 놓은 업이라 그것을 달게 받을 수 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세계에 42억이라고 하는 인구가 있지마는, 그 많은 인구가 부모의 몸을 빌리지 않고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많은 수가 얼마만큼 그 부모의 은혜를 알고 부모에 효도를 허는 사람이 있는지, 우리 자신부터 우리들의 주변 사람 가까운데부터서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웬수를 맺지 말아야 할 것을 다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웬수를 맺지 아니헐라면 남에게 악(惡)하게 하지 아니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착하게 허되 보답을 바래지 아니하고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어떤 재산을 베풀고서, “내가 너를 살려주느니, 너는 일생동안 백골(白骨)이 되도록 잊지를 말아라. 그리고 목숨 바쳐서 그 은혜를 나한테 갚아야 하느니라.” 그러헌 말을 입으로도 할 필요도 없고, 그러헌 생각을 마음으로도 가져서는 아니 되것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받은 사람이 당장 부담을 느끼게 되고,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주는 사람 앞에서는 고개를 잘 들지를 못하고 항시 불안을 느끼게 되고, 그 생각이 속에서 쌓이고 쌓여 가지고 준 사람을 싫어하게 되고 꺼리게 되고, 언젠가는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담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지 말어라’ ‘은혜 베풀어 가지고 좋은 꼴 보지 못한다’ 막말로 말하면 그런 말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뼈저린 가슴 아픈 그런 경험을 통해서 나오는 말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의 힘닿는 데까지 물심양면으로 은혜를 베풀어야 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됩니다. 단,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말고 베풀고, 베풀되 상(相)이 없이 베풀어야 한다’ 이것입니다.

배은망덕한 꼴을 보고, ‘나는 다시는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나는 밥 한술 못 주겠다’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물에 빠진 놈 건져주니까 보따리까지 내놓으라’, 그 보따리 내놓으라고 할까봐서, 물에 빠져서 곧 죽게 되는데 그것을 건져줄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져주지 않는다고 허는 것은 이건 말이 되질 않습니다.
한 번 속고 두 번 속고 몇 번을 배은망덕을 당한다 하드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른 일, 착한 일을 내놓고는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허면 보답을 바래지 아니허고, 어떻게 허면 상(相)이 없이 착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뭣고~?’ ‘이 뭣고?’하면서, ‘이 뭣고?‘허는 마음으로 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뭣고?’를 놓치면 중생심(衆生心)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중생심으로 허는 일은 모두가 다 인연(因緣)의 인과(因果)의 올개미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어떠한 어려운 처지에서도 우리는 본참화두(本參話頭)인 ‘이 뭣고?’, 본참화두를 놓치지 아니허고 행동을 허게 되면, 자연히 상(相)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착한 일을 할 수가 있고,
웬수가 나를 해코지 하러 오드라도 ‘이 무엇고?’로써 상대를 허게 되면은 웬수도 굴복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속을 살아가다보면, 나에게 자비롭게 해 주고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도 많이 만납니다마는, 까닭 없이 나에게 해롭게 하고 까닭 없이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그런 일을 더러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이렇게 규정을 내리고 미워하고, 그 놈을 언젠가는 혼을 내줄려고 이를 갈아붙입니다마는, 사실은 까닭 없이 나를 해롭게 하는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해 준 것도, 그것도 언젠가 내가 그 사람에게 잘해 준 일이 있어서 내게 잘해 주게 되는 것이고, 나에게 해(害)를 끼치는 사람도, 해를 끼칠 수밖에 없도록 자기가 그 원인을 진즉(趁卽) 다 심어 놓았기 때문에 그러헌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의 허물은 바로 내 허물이다’, ‘내 허물이 저 사람에게 부딪쳐서 되돌아오는 현상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13분30초~30분3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재송도인(栽松道人) ; 중국 선종(禪宗)의 제4조 도신대사(道信大師 580~651)가 제자를 맞아 인증을 하였지만, 제자가 너무 늙어 스승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법을 이을 사람이 없으니 몸을 바꾸어 오도록 하였다. 이에 몸을 바꾸어 후에 다시 만날 때 증거로 삼기 위해 황매산에 소나무를 심었다. ‘소나무를 심었다’는 뜻에서 ‘재송도인(栽松道人)’이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 5조 홍인대사(弘仁大師 602~675)이다.
*보림(保任 보임) ;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 흔히 ‘보림’이라 읽는다.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걸망 ; 물건을 담아서 등에 질 수 있도록 만든 자루 모양의 큰 주머니.
*행각(行脚) ; 스님이 일정한 거처를 가지지 않고, 스승의 밑을 떠나 참선의 수행을 위해 훌륭한 선지식이나 좋은 벗을 구해 마치 떠도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처럼 여러곳을 편력하는 것. 운수(雲水)와 같은 의미.
*행색(行色) ; 길을 떠나기 위하여 차리고 나선 모양.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등은(鄧隱) 조사 ; ‘등은봉(鄧隱峰) 선사’를 말함. 복건(福建)의 소무(邵武) 사람. 성은 등(鄧)씨.
어릴 때에는 지혜롭지 못한 듯 했다. 부모가 출가를 허락하자, 처음에는 마조(馬祖)의 문하에서 수행했으나 오묘한 진리를 보지 못하고는 석두희천(石頭希遷)에게로 갔다. 이렇게 왕래하기를 두세 번 거듭하다가, 끝내 마조의 가르침 아래서 계합(契合)하였다.

*제방(諸方) ; ①모든 지방 ②모든 종파의 스님.
*노장(老長) ; 나이가 많고 덕행이 높은 스님.
*방광(放光) ; 광명을 발하는 것.
*법사(法師) ; ①심법(心法)을 전하여 준 스님. ②불법(佛法)에 통달하고 언제나 청정한 수행을 닦아 남의 스승이 되어 사람을 교화하는 스님. ③설법하는 스님.
*상서(祥瑞) ; 복되고 좋은 일이 일어날 조짐.
*척사현정(斥邪顯正) ; 삿된 것을 거부하여 물리쳐, 불법(佛法)의 진리를 올바르게 나타내 보임.
*상(相) ; ①모습, 형태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사리(舍利) ; sarira의 음사(音寫). 신골(身骨)•유신(遺身)이라 번역. 시체나 유골을 뜻함. 그러나 오늘날에는 화장한 뒤에 나오는 작은 구슬 모양의 물질을 가리킴.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2)


*늙발 ; 늙어 노인이 된 처지.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법담(法談) ; 선사(禪師)들이 서로 법문을 묻고 대답하는 것.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 보아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화신(化身) ; 부처의 삼신(三身:法身•報身•化身))의 하나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불신(佛身).
*무연자비(無緣慈悲) ; 무조건의 자비(慈悲). 상대의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일체 평등으로 구제하는 자비심. 일체 평등의 이치를 깨달아 상대의 상(相:모습)을 가리지 않고 행하는 자비. 무연(無緣)이란 진여평등(眞如平等)의 이치를 깨달아 중생의 본체(本體)가 허망하다는 것을 알고 일으키는 자비.
*참- ;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올바르고 진실된’의 뜻을 더하는 말.
*배은망덕(背恩忘德) ; 남에게 입은 은혜를 잊고 배반함.
*상(相) ; ①모습, 형태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지집 ; ‘계집’의 사투리. *계집 ; ‘여자’나 ‘아내’를 얕잡아 이르는 말.
*웬수 ; ‘원수(怨讐)’의 사투리. *원수(怨讐) ; 자기나 자기집에 해를 입혀 원한이 맺히게 된 사람이나 집단.
*백골(白骨) ; 죽은 사람의 살이 썩고 남은 뼈.
*한술 ; 얼마 되지 않는 적은 음식이나 그 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숟가락으로 하나의 양.
*올개미 ; ‘올가미’의 사투리. *올가미 ; 노끈이나 철선 따위로, 잡아당겨도 매듭이 풀어지지 않도록 한 가닥을 고리처럼 만들어 짐승을 잡는 기구.
*이 무엇고(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 무엇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 무엇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찾는 것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열가지 병이 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해코지 ; 남을 해치고자 하는 짓.
*혼을 내줄려고 —> 혼내다 ;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매우 심하게 꾸지람을 하거나 벌을 주다.
*갈아붙이다 ; 분함을 억제하지 못할 때나 결심을 굳게 할 때, 독한 마음으로 이를 바짝 갈다.
*진즉(趁卽 좇을 진,곧 즉) ; 과거의 어느 때에 이미.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