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선방 법문2014. 11. 8. 15:12

 

 

§(466)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 /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지 말고 본참공안을 향해서 정진해야 / 스스로 집착 안 하면 병이 아니여.

금생에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수행을 해 놓지 아니하면—편안한 것만 취하고, 맛있는 것만 취하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고 그럭저럭 지내다가 염라대왕 앞에 가면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힘이 들고 어렵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수행을 해 놓은 사람만이 세세생생에 영원토록 참다운 편안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은 참 '처옥자쇄(妻獄子鎖)'라고, 장가를 가면은 ‘마누라는 감옥이고, 자식을 나면은 그 감옥의 자물쇠통이다’

 

그렇지마는 자기가 지어서 받는 업(業)으로 얽혀진 것이니—전생에 지은 빚으로 만난 것이니 그래도 어쩔 수가 없죠.


그걸 피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지어논 빚이기 때문에 갚아야 되는 거고. 그놈을 갚으면서도 참선을 해야지, 참선 안 하고 그냥 거기에 빠지면 업으로 인해서 생사해탈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런 속에서도 열심히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시고, 정진하면서도 엄마 노릇도 해야 하고, 아내 노릇도 해야 하고, 할머니 노릇도 해야 하죠.


**송담스님(No.466)—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 (용466)

 

(1) 약 20분.

(2) 약 22분.


(1)------------------

큰 추위는 없었던 걸로 생각이 됩니다. 겨울은 좀 춥고 여름은 덥고 그런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좋다고 모다 그렇게 생각되어 왔는데, 여기는 해변가가 되어서 해마다 겨울에는 강한 추운 바람이 불고 그래서 새벽에 모다 일어나서 세수하고 예불 젓숫고 하는데 노보살님들이 감기에도 많이 걸리시고 모다 그랬었는데 그런 면에서는 겨울이 그렇게 춥지 않은 것이 좋은 점도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어피차 편안하고 자유롭고 따뜻한 가정을 떠나서 이렇게 선원에 오셔서 정진하시게 되면, 아무리 고단하고 춥고 힘이 들어도 새벽에는 일어나야 하고 또 잠자리가 편틀 못하고, 눕고 싶을 때 눕지 못하고, 먹고 싶을 때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여러 가지 참 불편한 점이 있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이렇게 와서 서로 다투어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또 심지어는 인원이 차서 방부를 못 드리고 또 울고 돌아가신 분도 많이 계신 줄 알고 있습니다.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렇게 고행을 무릅쓰고 그렇게 정진하라고 하신 여러 신도님네들 또 거사님 보살님, 참 갸륵하고 그 고마움을 원장으로서는 참 가슴깊이 느끼는 바입니다.

금생에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수행을 해 놓지 아니하면—편안한 것만 취하고, 맛있는 것만 취하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고 그럭저럭 지내다가 염라대왕 앞에 가면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힘이 들고 어렵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수행을 해 놓은 사람만이 세세생생에 영원토록 참다운 편안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진을 해 나가는데 처음부터 흡족하게 그렇게 수월하게 정진이 되어가면 좋겠지만 그렇지를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첫째는 무량겁으로부터 오면서 자기가 지어놓은 업(業)이 있기 때문에, 그 업이 천차만별이어서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같은 방법으로 정진을 해도 육체적으로 오는 것, 정신적으로 오는 거, 그 나타나는 경계라고 할까 그런 것이 다 다른 것입니다.

능엄경(楞嚴經)에 50상(相) 변마장(辨魔障)에 보면 자기가 지은 업과 현재 정진해 나가는데 있어서 자기의 생각들 그런 차이로 해서 여러 가지 경계(境界)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입승(立繩) 스님이 적어 온 걸로 보면 사람 따라서 나타나는 경계가 여러 가지로 있는데, 어떠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좋은 경계라고 느껴지건, 안 좋은 경계라고 느껴지건 그런 경계에 집착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법회 때마다 말씀을 했지만은 그런 경계는 집착(執着)을 하면은—환한 경계가 나타난다던지, 껌껌한 이불 속에서도 환히 머리카락이 다 보일 정도로 환하다든지, 머리가 시원하고 개운함을 느낀다든지, 미래 일이 나타난다든지, 꿈속에 뭘 느꼈다든지, 꿈속에 어떤 분이 나와서 뭐라고 일러줬다든지, 사람 몸을 보면 환히 오장육부가 다 보이고 어디가 병이 들었는지 그것도 다 알 수가 있고,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전생이 어떻다는 것도 알게 되고 또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될 거다 하는 것을 알게 된다든지, 자기 몸이 풍선처럼 가벼움을 느꼈다든지, 어떠헌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구경(究竟)의 깨달음에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에 집착하면 공부가 삐뚤어져 나가는 거고, 그런 것에 전혀 생각을 두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좋다 나쁘다’ 생각을 갖지 말고 그냥 고대로 놔 둔 채 자꾸 바른 자세로 화두(話頭)를 들고, 화두를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잡도리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고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런 경계가 나타났으니 내가 이거 깨달음에 이르른 것이 아닌가?’ 그렇게 그것에 대해서 밤낮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집착심을 갖고, 다른 사람에게 그런 것을 자랑하고, 그래 가지고 자기가 지금 공부가 상당한 지경에 이른 것처럼 스스로 착각하고 남에게 그것을 인정받으려고 자랑을 하고 이런 것은 진실한 수행자에게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계가 나타나면 보통 이러헌 철저한 신심과 법문을 들은 사람이 아니면, 그런 경계가 나타나면 스스로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하도 신기하니까.

그러나 그런 법문(法門)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런 것에 하도 신기하고 이상하고 묘하고 그러니까 관심을 가질 수가 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미 그런 법문을 수없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데에 혼탁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그런 것에 집착하면 벌써 사견(邪見)에 떨어진 것이고 공부가 삿된 대로 빠져서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 할 뿐만 아니라, 점쟁이 같은 거, 이상한 모다 신기(神氣)가 있는 그러헌 존재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니까 탁! 놔 버려야 하거든.


그리고 정진해 나가는데 있어서는 몸을 단정히 갖되 몸의 어느 부분에도 힘을 주어서는 안 돼.

허리를 쭈욱 펴고 단정히 앉되 손을 이렇게 수계(手契)를 하는데,
여기도 너무 엄지손에 힘을 준다든지, 또는 엄지손과 엄지손이 떨어진다든지 비뚤어진다든지,
엄지손을 이렇게 손장난을 한다든지 그래서는 안 되고, (양 엄지손을) 대되 전혀 힘을 주지 말고 가볍게 대야 돼.

어떤 분은 힘을 꼭 줘야 화두가 잘된 것 같이 느껴진다는 그런 분도 있는데 그러더라도 (힘을) 꽉 주지 말고 가볍게 대야 돼요.
(힘을) 꽉 주면은 나중에는 몸 전체가 힘이 그리 주어지기 때문에 공부해 나가는데 지장이 있을 수가 있으니까, 우선 힘을 주면 된 것 같이 느껴진다 하더라도 (힘을) 주지 말고 가볍게 대기만 하고.

또 눈에다가 힘을 주고—간절히 의심을 할라고 하면은 미간(眉間)에 ‘내 천(川)자’가 쓰여질라고 하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도 거기다 힘을 주어서는 안 돼.
힘을 주지 말고, 단정하면서도 어깨에도 힘을 주지 말고, 목에도 힘을 주지 말고, 또 미간에도 힘을 주지 말고, 힘을 어디다가 주었다 하면 정진해 나가는데 장애요소가 거기서 생길 수가 있다 그거거든.

그러면 단전(丹田)에다 힘을 준 것은 어떠냐?
단전은 숨을 들어마실 때는 약간 볼록하게 하고, 숨을 내쉴 때는 차츰차츰 홀쭉하게 하니까 거기에는 약간 힘이 들어가질 수가 있는데 그것도 너무 힘을 많이 주어서는 안돼.
기분 상으로만 가볍게 그렇게 하는 것이지 너무 힘을 주어서는 그것도 좋은 것이 아니다. 그걸 말씀을 드리고.


그 화두를—이 화두를 하니까 잘 안 되어서 저 화두를 하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했다가 ‘무자(無字)’로 했다가 또는 ‘시삼마(是甚麽) 이뭣고’를 했다 이러는데, 안 된다고 해서 화두를 자꾸 바꿔 싸면, 새로 바꾸면은 된 것 같다가 나중에 얼마 지내면은 옛날 것이 또 생각이 나 가지고 그것을 들어보면 또 잘되고,

그래서 화두는 아무리 안 되어도 한 화두를 가지고 자꾸 여법(如法)하게 단속을 해 나가면 나중에 언젠가는 된 때가 오는 것이지, 안 된다고 해서 또 바꾸고, 또 해 봐서 안 된다고 또 바꾸고, 자꾸 바꿔 버릇하면은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니까 ‘여러분들 절대로 화두를 안 된다고 해서 바꾸지를 말아라’ 그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고.

이미 바꿔 가지고 현재 잘 되어간다면 그분은 그냥 그것으로 해 나가십시오.
그 동안에 자꾸 바꾼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지만 이미 바꾼 지가 오래되어 가지고 그대로 쭉 잘 되어가면 그분은 고대로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자기 마음대로 화두를 바꾸면 정진하다가, 쭉 해 나가다가 중요한 고비가 닥쳤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여.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화두를 바꾸는 것은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니까 그것을 조심을 하시고.


공부를 하다보면 확 트인 것처럼 시원하고 개운하고 그런 경계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일시적인 경계니까 ‘이것이 좋으네 나쁘네’ 그런 생각도 할 필요가 없어요.
좋다 나쁘다 생각하지 말고, 확 트인 것처럼 느끼거나 뭐 성성하거나 적적하거나 어떠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그런 데에 집착하지 말고, 그런 데에 좋냐 나쁘냐? 자꾸 그걸 가지고 실갱이를 하지 말고 그냥 고대로 놔 둬.

좋으면 좋은 대로, 시원하면 시원한 대로, 환하면 환한 대로, 껌껌하면 껌껌한 대로 그냥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아! 사람 건강도 소화가 잘 되다 안 되다, 뱃속이 거북하다 설사하다가 그렇지만, 그때 그때마다 그것을 어떻게 할 거냐 말이여. 그러면 그런가보다 하고 놔두고 살아가는 거지.

그것이 무슨 큰 괴변(怪變)이나 일어난 것처럼 무슨 큰 일로 취급을 하지 말고, 하다보면 그런 것도 있으려니 하고 그냥 고대로 놔두고 여법하게 정진만 주욱 해나가면 상관이 없는 것이니까.

가끔 말씀을 드렸지만은 어떠한 뭐 밥을 먹다가 한다든지, 차를 마시다가 한다든지, 목욕을 하다가 한다든지, 무슨 소리를 들은 찰나에 그냥 막힘이 확 트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무슨 시(詩)가 나오기도 하고, 다른 공안에 대해서 그냥 의심이 하나도 막히지를 않고 그런 것을 느끼는 수가 있습니다. 여러 해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그런데 정말 바로 깨달았는가? ‘바른 깨달음을 얻었냐, 안 얻었냐’하는 것은 자기 혼자로서는 결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선지식으로부터 점검을 받아야 하는데, 그래서 선지식이 필요한 것이고 선지식으로부터 점검을 받아야지 혼자로서는 좋다 나쁘다 할 수가 없고.

또 아무한테나 물어보아 가지고 옳다고 인정을 받았다고 해서—그것도 참 정말 바른 지혜를 갖춘 선지식의 인가(印可)를 받아야지, 아무한테라도 가서 받아가지고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그렇게...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닌데 공부하다가 그런 소견이 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 경계가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인데, 구경의 경지에 이르러지지 않았다면 그러한 소견도 그러한 경계도 깨끗이 놔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점을 거듭 말씀을 드린 것은 누구나 정진하다 보면 텅 빈 경계에 들어가기도 하고, 공안에 대해서 아무 의심도 다 없어져 버리고 너무너무 머리가 개운하고 그런 경계를 맛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구경의 깨달음—구경각(究竟覺), 확철대오해서 조사(祖師)와 같은 그런 경지가 아니라면, 스스로 ‘이것이 참 깨달음이 아니다’한 것을 스스로 그것을 버려버리고, 부정해 버리고 여법하게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향해서 정진을 해 나가야 합니다.(처음~18분28초)

 

 

 



(2)------------------

그리고 어떤 분은 항상 자기에 영가(靈駕)가 붙어갖고 있는데, 절 문안으로만 들어오면 영가는 거기서 떨어져서 절에서는 떨어져 버리고 또 절에서 일 다 보고 나가면은 딱 또 들어붙고 그런다는 분도 제가 알고 있습니다마는, 영가가 그렇게 붙고 떨어지고 하는 거.

또 항상 영가가 눈에 보여. 남 49재 하는 데도 가서 보면 그 49재 하는 그 영가가 눈에 다 보인다 그말이여.
생전시 무슨 옷을 입고 얼굴이 어떻게 생긴 것을 환히 다 알고, 그래가지고 재자(齋者) 보고 ‘지금 오늘 49재 지낸 분이 얼굴이 이렇게 생겼고 무슨 옷을 입고 그랬냐’하면, ‘그렇다’고.

그런 것이 보인 사람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런 것은 깨달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고, 특수한 사람에게는 영가가 보일 수도 있고 또 영가가 붙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道)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여.

영가란 것은 내나 우리는 ‘몸뚱이가 있는 영가(靈駕)’고, 영가는 ‘몸이 없는 사람’이니까, 혹 지금 이 방에도 영가가 있을 수가 있고, 법당에도 법문할 때는 우주법계의 영가를 다 초청을 하니까 다 영가가 들어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우리 이 사바세계에 사는 우리 일반 사람에게는 그런 영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그것이 정상적이죠. 보인다고 해서 좋을 것도 없고.

그런데 영가는 사람이 죽어서 49재에 딴 데로 다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서 떠날 수도 있고, 100일에 떠날 수도 있고, 소상(小祥)에 떠날 수도 있고, 대상(大祥)을 지내고 떠날 수도 있고, 소상·대상 다 지내고도 떠나지 않고 자기집에서 그냥 또 그렇게 영가가 머물러 있는 수도 있고, 50년 내지 100년간도 안 떠나고 그 집에서 머물러 있는 수도 있다고 그럼니다마는.

이 영가는 내 눈으로는 아직 영가를 보지 못했고, ‘몸뚱이 있는 영가’는 많이 보지마는 ‘몸뚱이 없는 영가’는 내 눈에는 잘 안 보여요.

그래도 본인이 영가가 자기에게 보이고 자기 몸에 항상 붙어있고 꿈에도 많이 나타나기도 하고 모다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니, 그런 분은 내 생각에는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서 또 금생에 와서 지은 업에 따라서 특수한 그런 체질이라고 할까, 특수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영가가 보이고 나타나고 또 몸에 항상 따라다니고 하면은 본인이 아무렇지도 않으면 상관이 없는 거고, 인연이 다하면 떠나게 될 테니까,
그때까지 그냥 그런 분은 항상 계행을 잘 지켜야 하고 심성을 착하게 곱게 써야 하고 또 백중이라든지 법보재라든지 모다 그런 때는 항상 그런 영가들을 위해서 천도(薦度)를 잘 해 줘야 하고 그렇죠.

대부분 그런 분에게 또 그런 영가가 많이 따르고 꿈에도 나타나고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우주 법계에는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그런 참 외로운 영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천도를 잘 해 주고 또 그분한테 가까이 가야만 천도를 해 줄 수 있는 계기가 마련이 될 경우 그런 분한테 인연 있는 영가가 따른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배고픈 사람 밥을 잘 준다’고 소문이 나면은 팔도의 모다 걸인들이 그 집을 찾아가기 마련인 것입니다. 옛날부터.

그와 마찬가지로 영가 천도를 잘 해 주고 자꾸 그런 분에게는 그런 영가들이 꿈에 와서 현몽을 대기도 하고 그래가지고 천도받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까 힘닿는 대로 잘 천도를 해 주신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밥 없는 사람 밥을 주고, 옷 없는 사람 옷을 주고, 직장이 없는 사람 직장을 알선을 해주고, 병든 사람을 병을 치료해 주고 그러면은, 그런 사람들이 모여와서 잘 봐 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고. 또 영가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영가 천도를 그런 인연이 닿으면 또 해 주시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또 어떤 분은 염라대왕이 자기를 끌고 갈라고 하는 그런 것을 느낀다고 그러는데, 염라대왕이 일부러 와서 자기를 끌고 간가 어쩐가 그것은 그 사람이 그렇게 느낀다면, 끌려가기 싫어서 안 끌려간다면 그건 잘된 일이고, 그러나 언젠가는 가게 될 테니까 너무 그것을 미리서부터 걱정하실 것은 없고.

염라대왕이 끌고 갈라고 하거나 염라대왕이 보낸 사자(使者)가 와서 끌고 갈라고 하거나, 참선한 사람은 그럴 때 일수록 정신을 가다듬고 ‘이뭣고?’를 딱 챙기시면 비명(非命)에 끌려가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꼭 가게 될 인연이 되면은 조금도 두려운 생각하지 말고 ‘이뭣고?’를 하면서 갈 때 되면 가는 것이지 뭐,
이 세상에 한번 왔다가 안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니까, 가게 될 때는 가더라도 ‘이뭣고?’하는 마음으로 가면 그 상관이 없다 그말이여.


그리고 한 가지 가끔 내가 듣는 소린데,
본인은 아직 시집을 안 가고 나이가 30을 넘고 그래도 그냥 처녀로 부처님 불법을 믿고 이렇게 정진하면서 이렇게 살아가는데, 본인이 꼭 안 갈라 한 것은 아닐런지도 모르고 또 좋은 인연이 있으면 갈라고 하는 생각도 있을 수도 있고, 또 그냥 이대로 보살로써 정진하다가 시절이 돌아오면 출가해서 스님이 될려고 하는 생각도 있는 분도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생각으로 여기 선방에 와서 방부를 드리고 정진을 하고 그러는데, 자꾸 좌우에서 “시집을 안가고 죽으면 몽달귀신이 되니까 시집을 가라”고 자꾸 권고를 하신 분이 있다 이것입니다.

시집을 가라고 권고한 것은 절대로 나쁜 마음으로 그러신 것은 아니고, 그래도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났으면 시집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것이 뭐 당연한 것이고, 시집가서 남편과 해로하고 자녀도 낳고 그래야 나중에 늙으면 외롭지 않고 그럴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그것도 때가 있으니까 좋은 인연있을 때 가라고 권고한 것은 좋은 마음에서 하신 것이지 절대로 뭐 해코자 해서 그러신 것은 아닐 테지마는.

억지로 팔자에 시집 갈 팔자를 타고났는데 안 가는 것도 아니고, 갈라고 하는 생각은 있어도 적당한 인연을 만나지 못해서 사주팔자가 되었건, 전생에 지은 인연이 되었건 간에 그런 인연이 닿지 않아서 안 가게 되고, 또 불법에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불자로서 참선을 하고, 별로 그렇게 큰 고통이나 불편이 없이 이렇게 살아가는데 자꾸 몽달귀신으로 협박을 하면서 자꾸 가라고 그러실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노처녀로 있다가 계를 받고 스님이 되어서 도를 잘 닦는다면 그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여러분들 다 시집가서 결혼해 가지고 이렇게 50년, 60년, 70년 이렇게 살아보셔서 ‘정말 나는 결혼을 해서 참 행복했다’고 그렇게 생각하신 분도 이 가운데는 계시겠지만, 겪어보시면 결혼 생활이라 하는 것이 아마 출가해서 도 닦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 스님이 되라’고 내가 한 말은 아니고, 본인이 결혼 안 하고 출가할 수 있는 사람을 몽달귀신 얘기를 해 갖고 공포심을 느껴서 가기 싫은 시집을 억지로 가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공부하러 오신 이 마당에는 공부에 관한 공부 생각만 해야지 다른 생각은 안 하신 것이 좋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 또 공부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좋고 그러니까,

절대로 자꾸 시집가라, 시집가라—막 좀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 좀 할라고 하면—자꾸 시집가라고 그래 싸면 마음이 헷갈리거든. 내가 시집을 가야 옳은가? 안 가야 옳은가?
그 소리가 듣기 싫으니까 한철 나왔다가 안 나와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말이여.

혹 집안에 홀아비가 있어서 저 여자하고 짝을 맞춰줬으면 참 좋겠다 싶어서 자꾸 그러실 수도 있지 않은가 싶은데, 결혼은 참 '처옥자쇄'라고, 인자 장가를 가면은 ‘마누라는 감옥이고, 자식을 나면은 그 감옥의 자물쇠통이다’ 그래서 '처옥자쇄(妻獄子鎖)'라 그러는데.

참, 결혼생활은 여러분도 다 겪어보셨지만 어쩔 수 없이 다 결혼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하긴 했지만 결혼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습니까.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제가 보기에는 솔직히 말해서 대단히 힘든,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공부해 나가는 데에는 대보살(大菩薩)이 아니고서는 많은 지장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지마는 자기가 지어서 받는 업(業)으로 얽혀진 것이니—전생에 지은 빚으로 만난 것이니 그래도 어쩔 수가 없죠.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 해야 하고.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 하면서 참선을 해야 하니까 굉장히 힘이 드시겠죠.

그걸 피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지어논 빚이기 때문에 갚아야 되는 거고. 그놈을 갚으면서도 참선을 해야지, 참선 안 하고 그냥 거기에 빠지면 업으로 인해서 생사해탈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런 속에서도 열심히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시고, 정진하면서도 엄마 노릇도 해야 하고, 아내 노릇도 해야 하고, 할머니 노릇도 해야 하죠. 그런 의미에서 여러 보살님네들은 참 너무너무 갸륵하고 훌륭하고, 참 그렇다고 생각이 됩니다.


끝으로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한 보름 남았는데, 또 이틀 후에 정월 초하루가 돌아와서 또 차례(茶禮) 행사도 있고 어수선하겠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항상 마음을 가다듬고 화두를 놓치지 알고 정진하시도록 당부를 드리고, 남은 보름 동안을 정말 알뜰하게 잘 정진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기록되지 아니하고 또 제가 말씀을 안 드린 그런 내용에 어떤 당신 나름대로 느낀 바도 있을 것이고, 물어보고자 한 그런 점을 속으로 가지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마는 낱낱이 여기서 다 말씀을 드릴 수도 없고,

어떠한 경계, 어떠한 느낌, 어떠한 소견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경각(究竟覺)이 아닌 확철대오(廓徹大悟)한 조사(祖師)의 경지가 아니면 그냥 스스로 탁! 치워버리면 그만이여.
없었던 걸로 탁! 놔 버리고 깨끗한 초학자의 마음으로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조금 어디 아프다고 해서 낱낱이 병원에 쫓아다니면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어지간한 것은 자기가 스스로 낫어야 하거든.

마을에서는 병원에 자주 간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런데, 그 병원이라 한 것은 물론 호미로 막아야 할 때 병원에 안 갔다가 가래로 막게 되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이 공부는 스스로 집착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딱 놔 버리고 화두만 들면 낱낱이 병원에 안 가도 돼어. 그것이 기다(그렇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면 거기서부터 병이 생기는 것이니까,
그 요점만을 내가 말씀을 드리면 요점만을 잊지 않고 고대로 해 나가시면 어떠한 병도 스스로 고칠 수가 있는 것이여.

병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자기가 집착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여.

심지어는 확철대오 해 가지고도 ‘나는 깨달았다’하는 생각을 가져도 벌써 그것이 잘못인데, 깨닫지도 못한 것을 깨달은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거든. 그걸 스스로 집착 안 하면 병이 아니여.

뭐 사람 몸뚱이가 환히 보이거나, 내일이나 모레가 어떻게 되고, 사람을 척 보면 전생에 무엇이다 하는 것도 안다 하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그런 소견에 떨어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아무 상관이 없어, 병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을 속으로 딱 간직하고, 그걸 자꾸 써먹고, 남에게 자랑하고, 자기가 무슨 도통이나 한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런데에서 병이 되고 결국은 사도(邪道)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니까, 안 떨어지려면 집착하지 않고 없었던 걸로 해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뭣고?’만 해 가면 그건 괜찮다 그말이죠.
되었습니다.(18분29초~40분)(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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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영역.
*능엄경(楞嚴經) 변마장(辨魔障) ; 능엄경 조도분(助道分)에 있는, 수행도상에 있어 나타날 수 있는, 오음(五陰-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이 녹아 없어질 때에 나타나는 갖가지 마장(魔障)을 밝혀, 수행자들이 사특한 길에 떨어지지 않게 한 부처님 가르침.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집착(執着) ; 허망한 분별로써 어떤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 그릇된 분별로써 어떤 것을 탐내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함.
*구경(究竟 궁구할 구, 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잡도리 ;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수계(手契) ; 수인(手印)·인(印)·인계(印契)·밀인(密印)·인상(印相)이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 mudrā
불보살(佛菩薩)의 내증(內證 깨달은 진리)·본서(本誓 근본서원) 등의 덕(德)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손 모양.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여법(如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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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사십구재(49재, 四十九齋) ; 사십구일재(49일재, 四十九日齋) 또는 칠칠재(7 · 7재, 七七齋).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면서 또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천수경, 무상계, 반야심경, 장엄염불, 금강경 등), 한 생각 돌려 무상을 깨달아 윤회를 벗어나 해탈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 죽은 날로부터 7일마다 7회에 걸쳐 행하는 영가를 위해 베푸는 법회의식.
불교의 내세관(來世觀)에서는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이 죽어서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49일 동안을 중음(中陰)이라 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과보를 받을 다음 생이 결정되므로, 이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 영가가 죄업을 참회하고 지혜의 눈을 밝혀 해탈의 길을 가도록 이 재(齋)을 지냄.
특히,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날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이라고 하여 7회째의 재(齋)를 중요시함.

불경(佛經)에서 설한 바에 의하면 사람의 존재 상태를 4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①생유(生有: 태어나는 순간) ②본유(本有: 生에서 死까지 생애) ③사유(死有: 죽는 그 순간) ④중유(中有: 이생에 죽어서 다음 生까지를 말함)이다.
이들 중 네 번째의 중유(中有)의 상태의 정상적인 기간이 49일이다. 즉 사람이 죽은 뒤에는 일반적인 경우 49일이면 중유(中有)가 끝나고 다음 생(生)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전인 48일째에 정성을 다하여 영혼의 명복을 비는 것이 49일재이다.
*소상(小祥 작을 소,제사 상) ; 사람이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
*대상(大祥 큰 대, 제사 상) ; 사람이 죽은 지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망자의 넋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염라대왕(閻羅大王) :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사자(使者 사신 사,놈 자) : 죽은 사람의 혼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일을 한다는 저승의 귀신.
*처옥자쇄(妻獄子鎖 아내 처,감옥 옥,자식 자,자물쇠 쇄) ; ‘마누라는 감옥이고, 자식은 그 감옥의 자물쇠통’이라는 말로 결혼생활의 구속을 비유한 말.
*보살(菩薩) :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각유정(覺有情) • 개사(開士) • 대사(大士)등으로 번역.
①성불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
②대승교에 귀의, 사홍서원을 발하여 육바라밀을 수행하며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자리 • 이타(自利 • 利他)의 행을 닦으며 51위의 수행계단을 지나 드디어 불과(佛果)를 증득하는 이.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차례(茶禮) ;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의 낮에 지내는 제사.
*구경각(究竟覺) ; 깨달음의 극치. 무명(無眀)이 사라지고 깨달음의 본체가 나타나는 경지.
마음의 본원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단계에서는 결코 구경각(究竟覺)이라고 말할 수 없다. 구경각(究竟覺)은 여래지(如來地) 또는 불지(佛地)를 가리킨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