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하면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하리라. 우리의 마음자리를 몰록 깨달라서 우리의 몸 속에 있는 영원히 써도써도 끝이 없는 보물을 계발을 하면, 우리가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생로병사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끝없는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고 있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연화근발어니리(蓮花根發淤泥裏)한데 그 연꽃을 보라. 그 연꽃이 그렇게 이파리도 때가 묻지 않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그 꽃도 그렇게 곱고 아름다운데, 대관절 그 연꽃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차츰차츰 그 밑에로 줄기로 내려가 보면 더러운 흙탕물 흐리 속에다가 뿌리를 박고 있다.
저 높은 산간에 깨끗한 석간수(石間水)에는 연꽃이 살들 못해. 연꽃은 저 들녘으로 내려가서 하수도 물이 내려가고 더러운 시커먼 흐리 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 뿌리를 그렇게 더러운 데다가 박고 있으면서도 그 잎과 꽃은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다.
아까 조실 스님 법문에 ‘참선(參禪)해서 내 마음자리를 깨닫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쉬운 것이다’고 말씀하셨어.
‘아무개야!’ 그러면 ‘예’하고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배고프면 밥먹을 줄 알고, 추우면 더운 옷을 입을 줄 알고, 눈으로 모든 색상을 볼 줄 알고, 귀로 모든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어린애로부터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지식이 있건 없건,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그럴 줄 안다 그거거든.
그놈이 온갖 성도 낼 줄도 알고, 탐심도 낼 줄 알고, 희로애락 모든 의식이 거기서 나오는데, 그럴 줄 아는 그놈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눈으로 꽃을 보고 『저게 곱다』 하는데, 꽃을 보는 놈이 눈이 아니야. 눈으로 보는 것이지. 눈이 보는 것이 아니거든. 눈이 아무리 있어도 다 보는 것이 아니여. 속에서 눈으로 보는 놈이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지. 눈 자체가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으로 다른 일에-몹시 골똘하게 다른 일을 생각하는 데에 골몰하고 있을 때에는, 앞에 사람이 왔다갔다 해도 하나도 안 보이는 거여. 뭐라고 말을 하고 갔어도 그 소리도 잘 안 들리는 거여. 다른 일에 골몰하고 있을 때에는 무엇을 먹어도 맛을 잘 모르는 거여.
대답도 다 해놓고는 나중에 와서 말하면 ‘나 언제 그런 말 했냐?’고 완전히 아주 뚝 잡아떼는데, 들을 때에 듣는 놈이 딴 짓을 하고 있을 때에는 들어도 들리지 않어. 봐도 분명 보는 그놈이 딱 봐야 제대로 보이는 것이지, 생각은 딴 데에 있고 그냥 눈은 뜨고 있어도 하나도 안 보이는 거다 그말이여.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살고 있어도 제대로 살고 있는 게 아니여. 뒤죽박죽으로 하루를 사는 거여. 봐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들어도 제대로 듣는 것이 아니고, 먹어도 제대로 먹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생각을 해도 제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여.
마치 뱀, 여우, 악어, 새.. 그런 여러가지 다섯 마리의 짐승을 묶어서 한 군데에다 묶어 놓은 거와 같아서, 이놈은 이리 갈라고, 저놈은 하늘로 날아갈라고, 한 놈은 땅구녁으로 들어갈라고, 한 놈은 물로 들어갈려고 그러고, 한 놈은 산으로 도망갈려고 하듯이 뒤죽박죽이거든. 우리는 그러한 상태에서 태어나 가지고 오늘날까지 살아가고 있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그것을 인생을 바로 살았다고 할 수가 없고, 한 가지도 제대로 할 수가 없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
물론 그중에는 훌륭한 사람도 많고 훌륭한 인격자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말인데, ‘그 모든 사람들이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그 주인공(主人公)은 부처님이나 우리나 다 똑같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어.
그런데 똑같은 우리의 본래 주인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엉망으로 살아가고 있다. 탐진치 삼독(三毒)으로 살아가고 있어. 오욕락(五慾樂)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깨끗한 꽃이 더러운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고 있어.
그러나 그런 더러운 곳에 때 묻지 않는 연꽃처럼, 우리 자신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 일체처 일체시에서 항상 ‘이뭣고?’를 해. 무엇을 눈으로 볼 때도 ‘이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었어도 그 듣는 소리 쪽으로 따라가지 말고, 듣자마자 즉각 ‘이뭣고?’로 돌아오라.
할려고 마음을 먹어도 경계(境界)가 닥치면은 금방 깜박 잊어버리고 그리 따라가는데, 그런다고 해서 중단을 하지 말고, 그런다고 해서 짜증도 내지 말고 포기를 해서는 안 돼. 또 챙기고 또 챙기고 자꾸 챙기다보면 차츰차츰 그것이 되풀이해서 똑같은 일을 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은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되어질 때가 오는 것이다 그말이여.(32분11초~42분44초)
*(게송)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 ; 無異元來禪師廣錄 第十九 에서 '示余愼爾居士'.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흐리 ; 수렁의 뜻을 가지고 있다. 늘 물이 고여있어 발을 디뎠을 때 푹푹 빠지는 논의 흙이나 방죽의 바닥에 오랫동안 쌓인 무른 흙을 의미하는 전라도 사투리. *석간수(石間水) ; 바위틈에서 나는 샘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골똘하다 ; (사람이 한 가지 일에)온정신을 쏟아 딴생각이 없다. *골몰(汨沒)하다 ; (사람이 한 가지 일에)정신을 다 기울여 다른 생각을 하지 않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성냄, 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 *이뭣고?(이 무엇인고? 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〇교(敎)도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올바르게 공부를 허면 참선을 철저히 할 마음이 날 수 밖에는 없는 것이고,참선(參禪)을 올바르게 허면 교가 하나도 버릴 말씀이 없어.전부가 다 소중하고도 훌륭한 법문(法門)이라 이 말씀이여.
〇‘도를 닦는 수행인은 스승 만나기가 어렵고 또 그런 선지식은 정말 올바른 사상을 가지고 올바르게 수행을 해나갈 만한 그런 좋은 제자를 만나기가 어렵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〇스승을 만났다고 해서 스승한테 무엇을 얻을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스승을 만나지 아니하고서는 올바르게 수행을 해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스승을 먼저 찾아야만 된다고 그렇게 강력히 말씀을 허신 것입니다.
**송담스님(참선법C)(No.184) - 1982년 10월 첫째일요법회(1982.10.03)(77분)에서.(용184)
약 19분.
참선은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꼭 머리를 깎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있건 없건, 나이가 많건 적건, 지식이 있건 없건, 누구라도 일어나는 한 생각을 돌이켜서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 무엇고?」 이렇게 한 생각을 돌이키면, 이것이 바로 무명(無明)을 돌이켜서 보리(菩提)로 돌아오는 길이고, 생사(生死)의 고해(苦海)에서 해탈 언덕으로 건너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 방법이 너무 쉬웁고 너무 평범하고 너무 간단해서, 글 읽기를 좋아하고 무엇을 연구허기를 좋아하고 이론적으로 따지기를 좋아하는 그런 현대 학문을 한 지성인들은, 그 재미도 없고 만날 해봤자 답답허기만 하고, 무엇이 알아진 것도 아니고 그러니, 차라리 그러헌 참선을 허기보다는, 금강경이나 유마경이나 또는 법화경이나 그러헌 부처님 경전을 읽고 그것을 연구하고 해석을 하고, 교리적으로 연구를 허는 것이 훨씬 더 재미가 있고, 알아진 것이 있고, 또 누구 앞에 자신있게 불교에 대해서 이야기헐 수도 있고, 그러니 대부분 이러헌 지성인들이 교리적으로 이렇게 연구허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선은 3년을 허거나 10년을 해도 해 갈수록 가슴이 답답허고 알 수가 없고 알아진 것이 없고 오히려 무엇이 알아지면 못쓴다고 그러고, 그러니 누구 앞에 3년 동안 내지 10년 동안 참선을 했으면서도 ‘참선이 무엇이냐?’ ‘어떻게 허면 깨달을 수가 있느냐?’ ‘깨달으면 대관절 무엇을 깨달으며 어떻게 되는 것이냐?’ 누가 물어봐도 ‘아, 나는 잘 모른다고’ 모른다고 대답허기가 참 창피허지 않느냐?
그러니 경(經)을 공부를 하고 외우고 해석하는 교리적으로 공부를 허면, 자기도 차츰 1시간 공부허면 1시간 공부헌만큼 얻은 바가 있고, 한 달을 공부허면 한 달을 공부헌만큼 무엇이 알아진 것이 있고, 누구 앞에 얘기를 허면 사람들이 모다 발심을 해서 불교가 참 좋다고 이렇게 따라와 주고, 그래서 경(經)을 공부를 허는 것이 좋다.
그래 가지고 참선에 대해서는 등한히 하고 교(敎)만을 갖다가 숭상하는 그러한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면 교(敎)와 참선(參禪)은 다른 것이냐?
교(敎)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法門)이고, 참선(參禪)은 부처님께서 나를 깨닫기 위해서 지도하신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修行法)이다 그말이여. 그러면 그 수행을 바르게 허기 위해서 설하신 부처님 법문이 경전이라.
그러면 ‘경전과 수행해 나가는 수행법인 참선과는 둘이라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여.
둘로 노나서 ‘이것은 교(敎)고 이것은 선(禪)이다’ ‘선이 더 좋고 교가 더 나쁘다’ ‘교가 더 중요하고 선은 맞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를 놓고 분쟁을 하고 비방을 하고 차별을 둔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 말씀이여.
교(敎)도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올바르게 공부를 허면 참선을 철저히 할 마음이 날 수 밖에는 없는 것이고, 참선을 올바르게 허면 교(敎)가 하나도 버릴 말씀이 없어. 전부가 다 소중하고도 훌륭한 법문(法門)이라 이 말씀이여.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때부터서 달마 스님에 이를 때까지 인도(印度)에 있어서는 무엇이 선종(禪宗)이고 누구는 교종(敎宗)이고 그러헌 파당(派黨)이 없었다 이 말씀이여. 가섭존자나 아난존자나 상나화수 해 가지고 28대 달마 스님에 이르기까지 선사(禪師)이면 동시에 교리에도 다 통달했고 그런 것이지.
일부 어떠헌 선(禪)에는, ‘선(禪)은 가섭존자(迦葉尊者)에 의해서 전해졌고 교(敎)는 아난존자(阿難尊者)에 의해서 전해졌다’ 이렇게 말을 헙니다만은,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이고 출가해 가지고 평생 동안 부처님을 시봉을 허면서, 부처님의 법문을 다 듣고서 너무 총력(聰力)이 좋았기 때문에 부처님이 설하신 그 많은 경전을 한 구절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조르르르르 다 외웠습니다.
외울 수가 있었기 때문에 경전을 결집(結集)을 헐 때, 아난존자의 입을 통해서 그 많은 경전이 줄줄줄줄줄... 외웠습니다. 그렇게 아난존자가 한 구절씩 한 구절씩 외우면 5백 명의 아라한(阿羅漢)들이, 대도(大道)를 성취한 성현들-그 아라한들이 ‘과연 틀림이 없이 우리도 그렇게 들었다.’ 이렇게 증명을 험으로써 한 구절씩 한 구절씩 부처님의 그 경전이 결집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것이지 아난존자에 의해서 교종(敎宗)이라 하는 그러헌 파(派)가 별도로 생기는 것이 아닌 것인 것입니다. 아난존자는 교종의 종주(宗主)가 아니고, 내나 부처님의 정법을 이어받은 제2대 조사(祖師)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부처님의 수제자(首弟子)인 가섭존자에게 전해졌고 그 가섭존자는 아난존자에게 그 ‘참나’를 깨닫는 그 정법(正法)의 법등(法燈)을 아난존자에 전했고, 아난존자는 상나화수(商那和修)께 전했고, 이렇게 해서 28대 달마 스님까지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교(敎)는 아난존자에 의해서 전해졌고 선(禪)은 가섭존자에 의해서 전해졌다’는 말은 전혀 그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은 교(敎)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훌륭한 법이라면, 어째서 ‘경을 보는 것보다는 참선을 하는 것이 좋다’고 용화사에서는 법회 때마다 그런 말씀을 허니 왜 그랬느냐? 용화사에서도 금강경 또는 반야경 또는 법화경, 화엄경 이런 경을 갖다가 경 산림(山林)을 해서 경에 대한 해설도 하고 강의도 하고 허면 훨씬 더 좋지 않겠느냐?
이러헌 생각을 허실른지 모르지만, 그 경은 그 분량이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그 팔만대장경이라고 허는 방대한 경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놈을 다 읽고 해설을 헌다해도 다 볼 수가 없는 것이고 더군다나 그것을 낱낱이 다 이해할 수는 더욱 없는 것입니다. 현재 경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경이 한문으로 다 번역이 되어 있어서 한문을 여간 잘하는 사람 아니고서는 읽어도 다 알 수가 없고, 요새 차츰 또 경전이 번역해 나옵니다마는 번역해 놓은 경을 읽어도 또 알 수가 없습니다.
읽어도 알 수 없는 경을, 다 또 읽을 수도 없는데 그것을 읽기만 하다가 우리가 죽어버린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직접 알기 어려운 그 경을 읽고 공부해서 대관절 부처님이 어떠헌 말씀을 했으며, 부처님께서 설하신 그 수행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 것인가를 자기의 힘으로 경전을 읽음으로써 알려고 허다가는 죽을 때까지 읽어도 바른 수행법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경을 보면 이렇게 허라고 말씀을 허셨고, 또 저 경을 보면 저렇게 허라고 말씀을 허셨고, 경마다 보면 그 경이 최고라고 말씀을 허셨으니, 대관절 그 경은 다 볼 수는 없고 어느 경 한 권이나 두 권만 봤으면 좋겠는데 경마다 그 경이 제일 좋다고 써졌으니, 어떻게 우리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 말씀이여.
그래서 우리 자신이 그 경을 읽어 가지고 수행을 해 나갈려고 허기보다는, 이미 그러헌 경을 잘 공부를 했거나 또는 올바른 수행법을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아 가지고 자기도 옳게 수행을 해서 옳은 수행법을 아는 그러헌 선지식(善知識)에게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수행법을 직접 지도받아 가지고 당장 그 날부터서 수행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도 좋은 방법이라 이것입니다.
그 수행법이 책을 봐 가지고서는 해 나갈 수가 없다고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길을 갈 때에도 처음 가는 길은 자꾸 사람에게 물어봐야 하고, 가다가 두 갈래길 세 갈래길 네 갈래길을 만나면은 그 사람한테 물어서 어디로 가는가를 물어서 가야 허는 것인데, 물어보지 않고 간다든지 또는 그 길을 잘 모르는 사람한테 물어봐 가지고 잘 모르는 사람의 지시를 받아 가지고 가다가는 어믄 길로 가게 된다 이 말씀이여.
하물며 마음을 닦는 이 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여. 마음으로 닦아 가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람이 지은 업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긴 모양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기 때문에, 공부를 지어나가되 처음에 시작은 모다 같은 방법으로 같이 해 나가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해 나가다 보면 각기 다른 경계(境界)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책을 아무리 뒤져봐도 어떻게 허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쓰여 있지 않습니다.
천상 믿을 수 있는 자기가 믿어지는 스승이 있어야, 처음에 시작할 때에도 그러한 선지식한테 지도를 받아서 허고, 공부를 해 가는 도중에도 항시 옳게 허는가 잘못해 가는가에 대해서 점검을 받고, 어떠헌 이상한 경계가 나타날 때에도 즉각 가서 그 상황에 대해서 보고를 드리고 이것이 잘못된 것인가 옳은 것인가를 지도 받아서, 많이 못쓰게 되기 전에 즉각적으로 바로잡어 나가야만 허송세월(虛送歲月)을 아니할 뿐만 아니라 삿된 경계에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한번 삿된 경계에 빠져놓으면 나중에 얼마 안 있다가 다른 선지식으로부터 ‘너의 그 경계가 올바르지 못하다’허는 것을 지적을 받아도 그 말을 믿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자기 나름대로의 경계에 맛을 붙여 가지고 깊이 빠져 들어갔기 때문에 그러헌 경계에서 빠져 나오기를 대단히 아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애를 쓰고 공력(功力)을 들여서 얻은 경계인데 또 이 경계가 얼마나 좋은데 어떻게 이 경계를 아니라고 허며 벗어날 수가 있을까? 나는 못 버린다’해 가지고 여간해서는 다른 사람 말을 곧이듣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처님이 출현을 해도 그 사람은 제도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공부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서 바른 스승을 만나서 지도를 받아 가지고 옳게 시작을 해야만 허고, 중간 중간에도 항시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 해서 점검을 받아야 하고 또 어떤 특이한 경계가 나타나거나 또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에도 반드시 선지식의 점검을 받아서 인가(印可)를 받아 가지고, 깨달은 뒤의 보림(保任) 수행 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직접적으로 지도를 받아야만 부처님과 똑같은 또 조사(祖師)와 똑같은 그러헌 완전한 수행의 목적지에 도달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도 그 혈맥론(血脈論)에 말씀 허시기를 ‘이금차도(而今此道)에 난득기인(難得其人)이다’. 이 도법(道法)에 있어서 사람 만나기가 어렵다. ‘도를 닦는 수행인은 스승 만나기가 어렵고 또 그런 선지식은 정말 올바른 사상을 가지고 올바르게 수행을 해나갈 만한 그런 좋은 제자를 만나기가 어렵다’ 이렇게 말씀을 허셨고,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이렇게도 말씀을 허셨습니다.
스승을 만났다고 해서 스승한테 무엇을 얻을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스승을 만나지 아니하고서는 올바르게 수행을 해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스승을 먼저 찾아야만 된다고 그렇게 강력히 말씀을 허신 것입니다.(31분47초~50분15초)
*무명(無明) ; 모든 현상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 근본 번뇌. 사제(四諦)에 대한 무지로서,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 번뇌. 본디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원초적 번뇌. *보리(菩提) ; ‘bodhi’의 음사(音寫). 각(覺)•지(智)•도(道)라고 번역. 모든 집착을 끊은 깨달음의 지혜.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선종(禪宗) ; 문자를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선(禪)을 닦아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체득하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종파. *교종(敎宗) ; 경론(經論)의 문자•어구를 이론적으로 풀이하고 정리하여 체계를 세우는 여러 종파를 통틀어 일컬음. *가섭존자(迦葉尊者), 아난존자(阿難尊者), 달마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파당(派黨) ; 주의(主義)나 주장 또는 이해관계가 같은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인 집단. *시봉(侍奉) ; ①제자 ②스님을 가까이 모시고 시중드는 일. *총력(聰力) ; 보거나 들은 것을 오래 기억하는 힘. *결집(結集) ;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멸 후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함께 외어 기억하는 형식으로 모아서 정리한 것. *아라한(阿羅漢) ;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 응공(應供)•응진(應眞)•무학(無學)이라 번역.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법등(法燈) ; 부처님의 가르침. 미(迷)한 세계의 캄캄한 마음을 없애는 것을 등불에 비유한 것. *산림(山林) ; 절에서 불경(佛經)을 강설(講說)하는 모임. 산림(山林)’의 뜻은 ‘최절인아산(摧折人我山) 장양공덕림(長養功德林)’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너다 나다 잘난체하는 아상과 교만의 산을 허물고, 공덕의 숲을 잘 가꾸라”는 뜻이다. *선지식(善知識) ; 불교의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 *구전심수(口傳心授) ;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을 통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배도록 가르침을 이르는 말. *어믄 ; ‘애먼’의 사투리(전라). 애먼:(일의 결과가 다르게 돌아가)억울하게 느껴지는, 엉뚱하게 느껴지는. *경계(境界) ; ①대상,인식 대상 ②경지 ③상태 ④범위,영역 ⑤일, 사건 *공력(功力) ; 애써서 들이는 정성과 힘.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보림 ; 보임(保任) ;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 흔히 ‘보림’이라 읽는다.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참고] [선문촬요 禪門撮要 上 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〇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184) (게송) 심수만경전~ / 윤회의 근본은 ‘한 생각’ / 참선법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을 단속하는 방법」이다.
〇죄도 없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죄 많은 사람일수록에 업이 두터운 사람일수록에,그런 불보살과 성현은 백 배 더 불쌍한 마음으로 어떠헌 방법으로 이 중생을 제도할까? 그 중생에 알맞는 방편(方便)을 써서 제도허시기 위해서 노력을 허고 계시는 것입니다.
〇불법(佛法)을 비방(誹謗)하면 - 불법을 비방하는 그 과보(果報)로 일단은 지옥에 떨어졌지만, 지옥고 받은 뒤에는 - 부처님을 비방한 그러헌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그 공덕으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헐 수가 있다.
**송담스님(참선법C)(No.184) - 1982년 10월 첫째일요법회(1982.10.03)(77분)에서.(용184)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이요, 마음은 모든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는데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라, 일어나는 곳마다 바로 거기서 능히 그윽해 버린다.
중생은 경계(境界)에 따라서 마음이 일어나는데, 한 생각 일어나면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점점 점점 생각이 벌어져 가지고 가지가 쳐서 그 생각이 점점 발전을 해 가지고, 그 생각이 얼굴에 표현이 되고 나아가서는 행동으로 나타나 가지고 큰일을 저지르게 돼. 그래 가지고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슬픔의 구렁에 빠지기도 하고, 노여움의 불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지옥의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그러는데 물론 우리가 살아있으니까 무슨 소리를 듣던지 무슨 색상을 보던지 어떠헌 경계를 닥치면 그 경계에 따라서 생각이 - 저것이 차 소리라든지, 비행기 소리라든지, 또는 어린애 소리라든지, 저건 꽃이다, 붉다 검다,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러헌 경계에 따라서 그러헌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헌데,
그 일어나는 그 때에 그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능히 경계에 휩싸여 끌려 들어가지 아니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본성(本性)을 인득(認得)해 버린다.일어나는 바로 그 경계를 발판으로 해서 자기의 본성(本性) 자리로 돌아와 버린다. 이것이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이여.
수류인득성! 수류인득성을 해 버리면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라. 기뻐헐 것도 없고 근심헐 것도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이 - 그것이 바로 생사심(生死心)인데, 이 세상에 나왔다가 한평생 살다가 죽어가고, 죽었다가 다시 또 자기의 업(業)에 따라서 어느 곳에 태어나면 또 한평생 살다가 또 죽고 허기를 무량 억천만 겁을 그렇게 윤회를 허면서 금생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육도윤회(六途輪廻)의 근본이 무엇이냐 하면 「한 생각」 때문에 그런 거여. ‘한 생각 일어나는 것’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천당에도 올라가고, 지옥에도 떨어지고, 축생도 되고, 또는 사람도 되고, 귀신도 되고 그런 것이여.
그런데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團束)을 허느냐?
여기에서 지옥으로 떨어질 것을 미연에 방지헐 수도 있고, 축생이 될 것을 미리 방지헐 수도 있고, 그러기 때문에 천당에 가고 싶으면 천당에 가고, 지옥에 가고 싶으면 지옥에 가고, 독사가 되고 싶으면 독사가 되고,육도윤회(六途輪廻)를 자유자재로 헐 수가 있는 그러헌 능력을 우리는 낱낱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여.
그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한 생각을 단속을 못해 가지고 원치도 아니한 지옥에도 떨어지고 독사도 되고 귀신도 되고 수라(修羅)도 되고 이러허지,참으로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헐 방법만을 분명히 알아서 실천을 해 나가면 우리는 지옥에 갈 필요가 없어.
천당에도 가고 싶으면 가고,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좋은 여건 하에 태어나서 자기도 훌륭한 인격을 이루고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을 갖다가 제도헐 수 있는 그러헌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여.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인데, 참선법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을 단속하는 방법」이다.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허느냐? 슬픈 일을 당허든지 또는 속상한 일을 당허든지, 괴로운 일을 당하던지, 또는 기쁜 일을 당하던지, 어디에서 언제 어떠헌 일을 당하더라도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이뭣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擧却)허는 것입니다.
금방 녹음법문을 통해서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활구참선(活句參禪), 활구참선이 바로 가장 빨리 어떠헌 근기(根機)라 하더라도, 남자가 되었건 여자가 되었건, 나이가 많건 적건, 지식이 있고 없건, 또는 성질이 급해서 성을 잘 내건,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부처님과 차등이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그 생각만 두 번째 생각으로 벌어지기 전에, 어떠헌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동시에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자기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헌다면 거기에서 육도윤회는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죄를 많이 지었는데 그 죄 많은 사람이 참선을 헌들 어떻게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허며 그 뭐 「이뭣고?」 좀 했다고 해서 어떻게 내가 그러헌 무서운 많은 죄를 지었는데 지옥에 안 떨어질 수가 있는가? 이러헌 생각을 먹고 미리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도업(道業)을 닦아서 이루는 것을 포기허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불보살(佛菩薩)께서는 그러헌 죄 많은 사람을 위해서, 업(業)이 두터운 중생을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을 하셔서 그 많은 법을 설허셨고,
삼천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현허신 그 부처님만이 아니라 그렇게 정식으로 부처님으로 출현허시는 부처님뿐만이 아니고, 온 법계(法界)에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형형색색으로 부처님과 보살님과 또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한 그러헌 성현들이 수없이 천백 억 화신(化身)을 나투면서 우리의 중생 앞에 출현을 해 계시는 것입니다.
죄도 없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죄 많은 사람일수록에 업이 두터운 사람일수록에,그런 불보살과 성현은 백 배 더 불쌍한 마음으로 어떠헌 방법으로 이 중생을 제도할까? 그 중생에 알맞는 방편(方便)을 써서 제도허시기 위해서 노력을 허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 업이 두터운 우리 보잘 것 없는 중생도 아들과 딸을 많이 두면, 공부 잘하고 착하고 좋은 아들은 마음으로 흐믓허고 기쁘고 그렇지만, 그 공부를 잘 못헌다든지, 몸이 어디가 불구자라 한다든지, 마음이 바르지를 못해서 못된 일을 많이 헌다던지 허는 그러헌 자식에 대해서는 부모는 밤잠을 못 주무시는 것입니다. 몇백 배, 몇천 배 그 자식에게 더 마음이 더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자식을 바로 잡아줄까? 어떻게 이 병신을 갖다가 이 바로 잡아줄 수가 있을까? 자나깨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헌 뜨거운 사랑과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미루어보면 불보살과 성현들께서 우리 중생, 죄 많은 중생들에 대해서 어떻게 허면 이 중생을 제도하고 바른길로 이끌고 생사 없는 해탈도를 증득허게 해 줄 수가 있을까?얼마나 그 생각을 뜨겁게 가지고 계실 것인가를 우리는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떠헌 종교에서는 자기만을 믿어야지 자기를 배반하고 믿지 않는 중생은, 자기를 비방하거나 자기를 배반하는 그러헌 사람은 3대까지 그 벌을 주어서 멸종을 시킨다고 허는 그러헌 외도(外道)의 경을 내가 봤습니다마는 우리 부처님은 중생에 대한 보복이라고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 보고도 보복을 허지 말어라. 보복으로써 원수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보복을 허면 또 다시 다음 기회에 상대방이 나에게 또 보복을 허게 되고, 그 다음에는 내가 또 보복을 허고 해서 점점 점점 미움과 원망과 싸움은 더 커져서 나중에는 온 세계가 싸움의 세계가 되아서 지옥(地獄)으로 변헐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
원수와 싸움을 없앨라면은 보복을 허지 말고, 자비로써 바른 마음으로써 상대방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어떠헌 방법을 쓰면은 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을까? 이렇게 자비심을 가짐으로써 용서함으로써 싸움은 없어진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허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허신 부처님께서 당신을 믿지 아니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안 믿는다고 해서 우리를 지옥의 불구덩이에다 집어넣거나,더군다나 직접 부처님을 비방하고 욕헌 사람을 지옥에다 밀어넣지 아니헐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자손까지 3대까지 멸종을 시킨다고 허는 그러헌 일은 우리 부처님께는 꿈에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비방(誹謗)하면 - 그러면 아무리 불법을 비방허고 삼보(三寶)를 비방해도, 그러면 지옥에도 안 가고 상관이 없구나. 인자는 내가 마음놓고 불법을 좀 비방을 해야겠다. 그러헌 생각을 먹는 사람은 없겠습니다마는, 불법을 비방하면 지옥에 가기는 갑니다.
부처님이 그 불법을 비방하는 중생이 미워서 부처님이 지옥에다 갖다가 밀어넣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지옥에 갈 짓을 했기 때문에 자기의 업(業)에 의해서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쁜 짓을 헌 것이 아니고 ‘부처님을 비방했다’한 그 인연(因緣)으로, 그래도 부처님과 인연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부처님을 비방함으로써도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지옥고(地獄苦)를 받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헌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허셨습니다. 부처님을 비방하는 그 과보(果報)로 일단은 지옥에 떨어졌지만, 지옥고 받은 뒤에는 - 부처님을 비방한 그러헌 형식으로,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그 공덕으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헐 수가 있다.
그러니 부처님과 만약에 좋은 인연, 불법을 믿고 불법을 찬양하고, 많은 사람에게 불법의 인연을 맺어줄라고 노력을 헌, 그러헌 좋은 인연을 맺는 사람이라면,과거에 지은 죄로 지옥에 갈 만한 죄업을 지은 바가 있다 하더라도 지옥고를 면허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이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자기공부를 철저히 해서 ‘금생에 결정코 대도(大道)를 성취허겠다’고 허는 그런 철저한 신심으로 노력을 헌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대도를 성취허게 될 것은 의심헐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처음~20분51초)
*(게송) ‘심수만경전~’ ; [직지(直指)] (白雲和尙 抄錄, 조계종출판사) 63쪽 마나라(摩拏羅) 존자 게송 참고. *경계(境界) ; ①대상,인식 대상 ②경지 ③상태 ④범위,영역 ⑤일, 사건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음역어는 ‘갈마(羯磨)’이다. *구렁 ; ①헤어나기 어려운 나쁜 환경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땅이 움푹하게 팬 곳. *단속(團束) ; ①주의를 기울여 다그쳐 보살핌. ②규칙, 법령, 명령 등을 어기지 않게 통제함. *육도윤회(六途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천당(天堂) ; ①극락세계(極樂世界)인 정토(淨土). ②하늘 위에 있는 궁전. *지옥(地獄 땅 지/감옥 옥) ; ①고통이 가득찬 세계. 현세에 악업(惡業)을 행한 자가, 사후 그 보답을 받는 곳. ②아주 괴롭거나 더없이 참담한 환경이나 형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수라(修羅) ; 아수라(阿修羅)의 준말. 늘 싸움만을 일삼는 귀신들의 무리.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이 무엇고(이뭣고 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 무엇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 무엇고?」(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화두를 든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 보아 깨달아 부처가 됨.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 불도의 수행. 진리의 실천.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사바세계(娑婆世界);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아라한(阿羅漢) ;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 이 경지를 아라한과(阿羅漢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아라한향(阿羅漢向)이라 함. 응공(應供)•응진(應眞)•무학(無學)•이악(離惡)•살적(殺敵)•불생(不生)이라 번역. 마땅히 다른 사람의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응공(應供), 진리에 어울리므로 응진(應眞), 더 닦을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 악을 멀리 떠났으므로 이악(離惡), 번뇌라는 적을 죽였으므로 살적(殺敵), 미혹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불생(不生)이라 함. *화신(化身) ; 부처의 삼신(三身:法身•報身•化身)의 하나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불신(佛身).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십바라밀(十波羅蜜)의 하나. 보살(菩薩)이 중생을 근본적인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쓰는 묘한 수단을 말한다. *해탈도(解脫道) ;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외도(外道바깥 외/길 도) ; 불교 이외의(外) 다른 교(道). *비방(誹謗) ; 남을 해치려고 흠을 들추어내어 비난하여 말함. *삼보(三寶) ; 부처님(佛寶)과 부처님의 가르침(法寶)과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집단(僧寶) 의 3가지를 보배에 비유한 말. 이것은 불교를 구성하는 3가지의 중요한 요소임.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은 불교도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임.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과보(果報) ; 인과응보(因果應報,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 과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 행위.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264) ‘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 / 단전호흡과 의심, 득력(得力) / 경계에 속지 말아야 / (게송)묵조시귀굴~.
〇‘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 - 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
〇이 활구참선법은 캄캄한 밤에 기둥에 이마빡을 부딪친 거와 같은,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다못 꽉 맥혀 가지고, 알 수 없이 ‘이뭣고?’ 그 뿐인 것입니다.
〇어떠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에 현혹되지 말고 집착허지 말고,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두고, 정신만 탁 챙겨 가지고 눈을 뜨고서 화두를 챙겨나가면 그러헌 경계는 금방 저절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264) - 1985년 4월 첫째일요법회(91분)에서. (용264)
약 18분.
그런데 흔히 화두 하면 ‘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이기 때문에 ‘이뭣고?’를 많이 말씀을 허게 됩니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말은 임제(臨濟) 스님 이후로 임제종에서 이 화두라고 하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마는, 임제 스님 이전에 육조(六祖) 스님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사용하지 아니했지만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기둥하고 아래로는 땅을 떠받치며, 밝기로는 해보다 더 밝고 검기로는 옻칠보다도 더 검은데, 항상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허는 가운데에서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터억 앞에 나와서, ‘그것은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이로소이다. 이 하택신회에, 저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육조 스님이 ‘뭐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도 없다고 내가 그랬거늘, 어찌 불성이니 제불의 본원이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공부를 해서 일가(一家)를 이룬다 하드라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 되겠다. 불교 학자밖에는 못 되겠다’
이 불교(佛敎)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공부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참나’를 깨닫는 것이 목적인데, ‘너는, 앞으로 니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가를 이룬다 해도 지해종자(知解種子)밖에는 못 되겄다’ 이렇게 점검을 허셨습니다.
그러자 남악회양(南嶽懷讓)이 왔습니다. 와서 터억 절을 허니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셨습니다.
하! 그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헌 물음에 대해서 꽉! 맥혀서 뭐라고 대답헐 수가 없어 몸을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택신회는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니, 무슨 하택신회의 불성이니 이렇게 즉각 그 대답을 했는데, 남악회양은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허고 묻는데 대해서 앞이 꽉 맥혀 가지고 몸 둘 바를 몰라. 그 뒤로 8년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8년 동안을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앉아서도 그 생각, 서서도 그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그 생각, 일을 허면서도 그 생각, 똥을 누면서도 그 생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이렇게 허기를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그래 가지고 육조 스님 앞에 가서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조 스님이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헐 것이 있느냐?’허니까,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證)헐 것이 없들 않지마는 오렴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이렇게 해서 인가(印可)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참선법, 활구참선법은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더듬어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남악회양 선사처럼 대뜸 처음부터서 꽉! 맥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기둥에 이마빡을 부딪친 거와 같은, 캄캄하니 갑자기 걸어가다가 기둥이나 벼람박에 이마빡을 부딪쳤을 때 그때 상황이 어떻습니까?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다못 꽉 맥혀 가지고, 알 수 없이 ‘이뭣고?’ 그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꽉 맥혀서 앞뒷이 끊어져야 그 공부를 옳게 해 나가는 것이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 이론, 무슨 철학, 불교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 그것을 갖다가 아는 대로 끌어다가 이렇게 분석을 하고, 종합을 하고, 비교를 하고, 적용을 하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허는 것이 아닙니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도 그렇고, 마삼근(麻三斤)도 그렇고, 무자(無字) 화두도 그렇고, 시삼마(是甚麼)도 그렇고, 무슨 화두(話頭)를 어느 큰스님한테 탔든지 간에 한번 탔으면 그 화두,
공부가 잘되거나 못되거나, 못될수록에 그 화두 하나에 전력을 쏟을 것이고, 잘된다 하드라도 기쁘다 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무자 화두를 하는 분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지어갈 따름인 것입니다.
꽉 맥혀서 답답허고 알 수가 없지만 조금도 조급한 생각을 낼 것이 없고, 또 그렇게 해 가다 보면 화두가 순일하게 들려서 의심(疑心)이 순일(純一)하게 들린다 하드라도, 화두가 독로(獨露)한다 하드라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기쁜 마음을 내면 이미 화두는 달아나 버리고, 기쁜 마음의 마구니가 벌써 침입해 들어온 것이고, 안된다고 짜증을 내고 번뇌심을 내면 이미 번뇌의 마구니가 내 마음에 침입해 들어온 것이라. 그래서 이 공부는 잘된다고 해서 기쁜 마음도 내서는 아니되고, 잘 안된다고 해서 짜증낼 일도 아닌 것입니다.
다못 단전호흡을 허면서 숨을 쑤욱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는데, 볼록해지거든 약 3초 동안 딱 정지했다가, 또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허면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러면 숨이 다~ 나가면 배가 홀쪽해지죠. 그러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시면은 아랫배가 볼록해지는데, 볼록해지거든 딱 정지헌 상태에서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또 숨을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고... 허지만,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꼭 숨을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됩니다.
들었던 화두 ‘이뭣고?’헌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냥 화두는 더 들지 않고, 그 있는 의심을 묵묵히 반조(返照)를 허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는 한번 들고서 숨은 3번, 4번, 5번 내지 10번을 쉬어도 그 화두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은 덮치기로 화두를 들지 않다가, 화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지거나 딴 생각이 일어났다허면 그때 가서 또 화두를 떠억 한번씩 챙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해 가면, 처음에는 그렇게 들랴고 해도 깜빡한 사이에 달아나 버리고 들면 또 달아나 버리고 하는데, 나중에는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화두가 항상 들어져 있게 될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을 갖다가 공부가 많이 익숙해진 증거인 것입니다.
힘을 쓰지 아니해도 저절로 공부가 되어가니까 힘을 덜게 된다. ‘힘 덜게 되는 것을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라’ 이렇게 고인(古人)네들은 표현을 했습니다.
이 공부에 제일 주의헐 것은 사량분별로 따지지 말 것이며, 설사 공부가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순일허게 잘 들리고 의단이 독로헌다 해도 좋아하는 마음, 환희심(歡喜心)을 내지 말 것이다.
또 공부가 순일허게 잘되어 갈 때에 ‘빨리 깨달랐으면, 이럴 때 누가 나로 하여금 탁! 깨닫게 해줬으면’ 그러헌 생각도 내지 말 것이다.
또 공부가 그렇게 순일하게 잘되어 가게 되면은 여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떠한 그 신기한 경계(境界)가—혹 환한 빛을 광명을 본다던지, 꿈에 부처님을 친견하고 꿈에 어떤 깨달은 꿈을 꾼다든지, 또는 여러 가지 뭣이 알아진다든지, 그런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드라도 ‘이것은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환상(幻相)이다’ 생각하고. ‘이거 내가 깨달은 것이 아닌가?’ 그러헌 그 외람(猥濫)되고 잘못된 생각을 내지 말고.
어떠한 신기한 불보살이 나타나고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드라도 이것은 허상(虛像)이요, 환상이라 하는 것을 미리부터 잘 이해를 허시고, 그런 데에 현혹되지 말고 집착허지 말고.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두고, 정신만 탁 챙겨 가지고 눈을 뜨고서 화두를 챙겨 나가면 그러헌 경계는 금방 저절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스승을 바로 만나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옳게 해 나가는 것인가’를 잘 모르는 사람은 공부허다가 이런 허상과 환상과 마경(魔境)이 나타나면 이것이 도통(道通)헌 것으로 착각을 하고, 그것에 기쁜 마음을 내고 그것에 집착을 하고 신경을 써 가지고 영영 사도(邪道)에 빠지고, 까딱하면 정신병자가 되고 하는 예도 가끔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시작할 때부터서 바르게 시작을 해야 하고, 중간에도 바르게 해 나가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묵조시귀굴(黙照是鬼窟)이요 문자역조강(文字亦糟糠)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문해하종(若問解何宗)인댄 방행여우적(棒行如雨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묵조(黙照)는 시귀굴(是鬼窟)이요. 묵묵히 앉아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이 귀신의 굴택(窟宅)이요.
문자(文字)는 역조강(亦糟糠)이다. 문자, 이론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은 이것은 다 찌꺼기더라 그말이여.
참선을 허되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허면서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허도록 잡드리를 해 나가야지,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조용헌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그러헌 공부는 이것은 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 해 가지고, 이것은 아무리 평생을 들여다보고 있다 허드라도 이것은 귀신굴(鬼神窟) 속에서 살림살이를 허는 것이라 해서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입니다.
설사 오신통(五神通)이 난다 허드라도 이것은 정법(正法)이 아니고 외도선(外道禪)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經典)이라 하더라도 경전을 우리의 중생 분별심으로 사량분별로 이리저리 따져서 해석을 허고 있다면, 그것은 곡식의 바른 알곡을 먹지를 못하고 그 찌꺼기를 씹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부처님 경전도 그 경전을 바로 읽고 바로 봐서 부처님의 그 참뜻을 옳게 깨달라야지, 그것을 이론적으로 따지고 문자로 그것을 분석해서 그렇게 일생 동안을 경을 읽고 연구를 헌다해도 그것은 찌께기—엿 국 다 뽑아내고 엿기름 찌께기를 그것은 돼지나 주는 것인데 그것을 갖다가—엿 국물은 받아서 구정물 통에 붓어 버리고 그리고 그 엿밥, 찌께기를 먹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약문해하종(若問解何宗)이면, 그렇다면은 묵조(默照)도 아니오, 문자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대가 공부해 나가는 종지(宗旨)가 무엇이냐? 그대가 공부해 나가는 것은 어떠헌 공부를 허느냐? 무슨 목적으로 어떠헌 공부를 허느냐?’허고 묻는다면은,
방(棒)을 내리기를, 방맹이로 몽둥이질을 허기를 비 쏟아지듯이 몽둥이질을 허리라[棒行如雨滴].
‘그 무슨 공부를 허느냐? 그대가 하는 공부의 지취(旨趣)가 무엇이냐?’고 묻다가 뭇매를 맞게 된다 이것입니다.
어째서 ‘그대의 공부허는 종지가 무엇이냐?’하고 묻는데 방맹이를 맞게 되느냐?
여러분이 참선을 열심히 허시게 되면 이 뜻을 스스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61분32초~1시간19분45초)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임제, 육조, 하택신회, 남악회향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임제종(臨濟宗) ; 중국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이다.
임제종은 북방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송대(宋代)에 석상 초원(石霜楚圓) 문하에서 양기 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와 황룡 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가 나와, 양기파는 성행했으나 황룡파는 얼마 안 가 쇠퇴함.
양기파 문하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화두(話頭)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하여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그의 선풍(禪風)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동용(動用) ;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씀[用]. 움직이고 작용함. 활동. 동용(動容)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06) - 86년 8월 화두·불명·수계 법회(86.08.03)에서.
〇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지해종사(知解宗師) ; 참선 공부를 알음알이로 따져서 해석하고 강론하고 공부해 가는 강사나 이론가를 말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벼람박 ; ‘바람벽(--壁, 집의 둘레 또는 방의 칸막이를 하기 위해 만든 벽)’의 사투리.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마삼근 (麻三斤) : 화두의 하나。『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하는 물음에 대하여, 운문종(雲門宗)의 동산(洞山) 수초선사(守初禪師)가 대답하기를 『마 삼근(삼 서근)이니라』하였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〇‘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반조(返照) ; 돌이켜 살펴보는 것.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환상(幻相) ; 실체가 없는 무상한 형상.
*외람되다(猥濫-- 함부로·외람할 외/함부로·넘치다 람) ; (언행이나 생각이)분에 넘치는 데가 있다.
*마경(魔境) ; 마(魔)의 경계(境界).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번뇌를 말한다. 마(魔)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사도(邪道) ; 올바르지 않은 삿된 길.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길.
*(게송) ‘묵조시귀굴(黙照是鬼窟)~’ ; 『청허당집(淸虛堂集)』(동국대학교역경원) p63 ‘일선자(一禪子)에게’ 게송 참고.
*굴택(窟宅) ; 거처, 집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묵조사선(默照邪禪) ;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그러한 공부. 이것은 깜깜한 귀신굴(鬼神窟) 속에서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라 해서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이다.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94-95 참조.(가로판 p99~100)
〇“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안거(安居편안할안/있을거) ; ①인도의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간우기(雨期)때에외출하면풀이나나무,작은곤충을모르고밟아죽일까두려워했고그래서동굴이나사원에들어가서수행에전념했다. 이것을우안거(雨安居)라고한다. ②선종(禪宗)에서는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다음해 1월 15일까지를동안거(冬安居)라고해서각각 90일간사원에서외출을금지하고안주하여오로지좌선을중심으로한수행에전념한다. 처음을결제(結制)라하고끝을해제(解制)라한다.
*결제(結制맺을결/만들•법도제) ; 안거(安居)에들어감. 하안거는음력 4월 15일에들어가며, 동안거는음력 10월 15일에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