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심 팔풍 경계대처2014. 3. 30. 14:19

§(521) (게송) 돈오심원개보장~ / 조실 스님 법문에 ‘참선(參禪)해서 내 마음자리를 깨닫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쉬운 것이다.’

 

‘그 모든 사람들이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그 주인공(主人公)은 부처님이나 우리나 다 똑같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어.


**송담스님(No.521)-1994년 1월 첫째일요법회(94.01.02)에서.(용521)


약 11분.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하면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하리라
나무~아미타불~
연화근발어니리(蓮花根發淤泥裏)하니  각소거진불염진(卻笑居塵不染塵)하리라
나무~아미타불~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하면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하리라.
우리의 마음자리를 몰록 깨달라서 우리의 몸 속에 있는 영원히 써도써도 끝이 없는 보물을 계발을 하면,
우리가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생로병사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끝없는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고 있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연화근발어니리(蓮花根發淤泥裏)한데 그 연꽃을 보라. 그 연꽃이 그렇게 이파리도 때가 묻지 않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그 꽃도 그렇게 곱고 아름다운데, 대관절 그 연꽃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차츰차츰 그 밑에로 줄기로 내려가 보면 더러운 흙탕물 흐리 속에다가 뿌리를 박고 있다.

저 높은 산간에 깨끗한 석간수(石間水)에는 연꽃이 살들 못해.
연꽃은 저 들녘으로 내려가서 하수도 물이 내려가고 더러운 시커먼 흐리 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 뿌리를 그렇게 더러운 데다가 박고 있으면서도 그 잎과 꽃은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다.

아까 조실 스님 법문에 ‘참선(參禪)해서 내 마음자리를 깨닫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쉬운 것이다’고 말씀하셨어.

‘아무개야!’ 그러면 ‘예’하고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배고프면 밥먹을 줄 알고, 추우면 더운 옷을 입을 줄 알고, 눈으로 모든 색상을 볼 줄 알고, 귀로 모든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어린애로부터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지식이 있건 없건,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그럴 줄 안다 그거거든.

그놈이 온갖 성도 낼 줄도 알고, 탐심도 낼 줄 알고, 희로애락 모든 의식이 거기서 나오는데, 그럴 줄 아는 그놈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눈으로 꽃을 보고 『저게 곱다』 하는데, 꽃을 보는 놈이 눈이 아니야.
눈으로 보는 것이지. 눈이 보는 것이 아니거든. 눈이 아무리 있어도 다 보는 것이 아니여.
속에서 눈으로 보는 놈이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지. 눈 자체가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으로 다른 일에-몹시 골똘하게 다른 일을 생각하는 데에 골몰하고 있을 때에는, 앞에 사람이 왔다갔다 해도 하나도 안 보이는 거여. 뭐라고 말을 하고 갔어도 그 소리도 잘 안 들리는 거여.
다른 일에 골몰하고 있을 때에는 무엇을 먹어도 맛을 잘 모르는 거여.

대답도 다 해놓고는 나중에 와서 말하면 ‘나 언제 그런 말 했냐?’고 완전히 아주 뚝 잡아떼는데, 들을 때에 듣는 놈이 딴 짓을 하고 있을 때에는 들어도 들리지 않어.
봐도 분명 보는 그놈이 딱 봐야 제대로 보이는 것이지, 생각은 딴 데에 있고 그냥 눈은 뜨고 있어도 하나도 안 보이는 거다 그말이여.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살고 있어도 제대로 살고 있는 게 아니여. 뒤죽박죽으로 하루를 사는 거여.
봐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들어도 제대로 듣는 것이 아니고, 먹어도 제대로 먹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생각을 해도 제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여.

마치 뱀, 여우, 악어, 새.. 그런 여러가지 다섯 마리의 짐승을 묶어서 한 군데에다 묶어 놓은 거와 같아서,
이놈은 이리 갈라고, 저놈은 하늘로 날아갈라고, 한 놈은 땅구녁으로 들어갈라고, 한 놈은 물로 들어갈려고 그러고, 한 놈은 산으로 도망갈려고 하듯이 뒤죽박죽이거든.
우리는 그러한 상태에서 태어나 가지고 오늘날까지 살아가고 있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그것을 인생을 바로 살았다고 할 수가 없고, 한 가지도 제대로 할 수가 없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

물론 그중에는 훌륭한 사람도 많고 훌륭한 인격자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말인데,
‘그 모든 사람들이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그 주인공(主人公)은 부처님이나 우리나 다 똑같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어.

그런데 똑같은 우리의 본래 주인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엉망으로 살아가고 있다.
탐진치 삼독(三毒)으로 살아가고 있어. 오욕락(五慾樂)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깨끗한 꽃이 더러운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고 있어.

그러나 그런 더러운 곳에 때 묻지 않는 연꽃처럼, 우리 자신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 일체처 일체시에서 항상 ‘이뭣고?’를 해.
무엇을 눈으로 볼 때도 ‘이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었어도 그 듣는 소리 쪽으로 따라가지 말고, 듣자마자 즉각 ‘이뭣고?’로 돌아오라.

할려고 마음을 먹어도 경계(境界)가 닥치면은 금방 깜박 잊어버리고 그리 따라가는데, 그런다고 해서 중단을 하지 말고, 그런다고 해서 짜증도 내지 말고 포기를 해서는 안 돼.
또 챙기고 또 챙기고 자꾸 챙기다보면 차츰차츰 그것이 되풀이해서 똑같은 일을 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은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되어질 때가 오는 것이다 그말이여.(32분11초~42분4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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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 ; 無異元來禪師廣錄 第十九 에서 '示余愼爾居士'.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흐리 ; 수렁의 뜻을 가지고 있다. 늘 물이 고여있어 발을 디뎠을 때 푹푹 빠지는 논의 흙이나 방죽의 바닥에 오랫동안 쌓인 무른 흙을 의미하는 전라도 사투리.
*석간수(石間水) ; 바위틈에서 나는 샘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골똘하다 ; (사람이 한 가지 일에)온정신을 쏟아 딴생각이 없다.
*골몰(汨沒)하다 ; (사람이 한 가지 일에)정신을 다 기울여 다른 생각을 하지 않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성냄, 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
*이뭣고?(이 무엇인고? 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14. 3. 26. 11:23

§(445)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 되면 설사 확철대오를 못해도 악업(惡業) 끌려가지 않는다 / ‘한 생각’ 단속하는 것이 기가 막히게 중요하다.

 

활구참선에 의해서 수행을 해가는 사람은 부처님과 같은, 고조사(古祖師) 같은 그러한 견지(見地)에 이르기 전에는 어떤 소견(所見)  나고 공안에 대해서 무슨 소견이  난 거, 그러한 것에 착각을  가지고 방황하고 그런 것이 아니여. 그것이 구경(究竟) 깨달음이 아니면 스스로 그까짓 것을 없는 것으로  버려야 되거든.

 

우리 불법(佛法) 믿는  참선을 하는 수행인은  ‘한 생각 단속하는 것이 기가 막히게 중요한 것이다.   생각을 어떻게 단속을  나가느냐 가행정진을 하느냐, 용맹정진을 하느냐 또는 해태굴(懈怠窟) 빠지냐가 판별이 나는 것이다. 지옥으로 가느냐, 천당에 가느냐의 바로 기로(岐路),  마군이의 올가미에 걸려들고  걸려드느냐의  판가름이  생각 단속하는 데에 달려있다.

 

**송담스님(No.445)—1991 5 첫째 일요법회. (용445)

 

약 11분.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 되면 설사 확철대오(廓徹大悟) 못해도 악업(惡業) 끌려가지 않는다

 

 그러냐?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법(參禪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이기 때문에 최상승법에 의해서 타성일편이  사람은 부처를 구하지도 않고, 깨달음을 구하지도 않고, 누가 나를 깨닫게  주기를 바래지도 않아. 천당도 갈려고 하지 않고, 지옥도 피할려고 하지를 안 해.

천당 지옥이며 일체 그러한 바깥 경계나  경계에 대해서 끄달리지를 않기 때문에 두려워 지옥도 없는 것이고,  현혹될 천당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거든.

 

마지막 숨이 ! 끊어질 때까지도 떠억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 하는 것이 그것이 활구 참선객이요,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의 지조(志操) 마땅히 그래야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한 지조와 그러한 요지부동(搖之不動) 수행력이 쌓인 사람이 지옥에  까닭도 없고,  사람은 이미 확철대오 안 했어도, 확철대오를 바래지 않아도, 확철대오   밖에는 없는 사람이여, 사람은.

 

 거둘  부처님이 나타나신다 해도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것이며, 숨을 거둘 때에 염라대왕(閻羅大王) 사자(使者) 온다해도 두려워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말이거든.

 세상에 흥망성쇠에 동요가 되지도 않고, 화두에 대한 의단이 독로함으로 해서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도  물리쳐 버렸고, 오욕락(五欲樂)도  물리쳐 버린 상태에서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현혹하고 좋아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거든.

 

그래서  활구참선(活句參禪) 의해서 수행을 해가는 사람은 부처님과 같은, 고조사(古祖師) 같은 그러한 견지(見地)에 이르기 전에는 어떤 소견(所見)  나고 공안에 대해서 무슨 소견이  난 거, 그러한 것에 착각을  가지고 방황하고 그런 것이 아니여. 그것이 구경(究竟) 깨달음이 아니면 스스로 그까짓 것을 없는 것으로  버려야 되거든.

 

 그러한 공안이나 불법(佛法) 대해서 어떤 소견 난  그런 것도 그렇지만, 계행(戒行) 철저히 지키면서 여법(如法)하게 수행을 하다보면 사람에 따라서는 () 맑아져 가지고 무엇이 보이는 수가 있거든.

사람을 보면 전생(前生)  사람이 소가 사람이 되었다’ ‘전생에  사람이 개가 사람이 되었다’ ‘ 사람은 전생에 천상에서 왔다 그런 것이 볼라고  해도 이렇게 보이는 사람이 더러 있어.

 

그거 좋은 것도 아니고 그런 경계가 나타나면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이지마는 자기가 알라고 해서 아는 게 아니라 우연히 () 맑아지니까 그런 것이 보인 것이라,

바른 법문을 듣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무슨 숙명통(宿命通) 열리고, 그것이 무슨 도인(道人)이나   것처럼 착각을  가지고 어디가서 그런 아는 소리나 풀풀하고.

 

그래 가지고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  스님이 뭣을 훤히  아는 스님이다’ ‘ 스님은 도통했다’ ‘ 스님은 도인이다  가지고 여기서 저기서 떠받들고  갖다가 도인으로 대접을 하고 그러니까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도인인  하고 아주, 그래 가지고 외도(外道)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이 가끔 있거든.

 

그건 자기 신세 망치고 불법 망해 먹고, 그래 가지고  점쳐 주고  가지고 그거 어디다  것이냐 그말이여. 우리 수행하는  최상승법을 믿는 학자는 ! 그런 데에 떨어져서는 아니된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이 . 그렇게 되면 식이 맑아진 것은 사실이여. 그럴 때에 반드시 팔만사천 마군(魔軍)이가 육근문두(六根門頭)에서 엿보고 있어.

어떠한 틈만 있으면  틈을 타서 들어와 가지고 아주 도를 이루지 못하게 하리라 아주  팔만사천 마군이가 육근문두에 기다리고 있는 것인데, 그걸 모르거든.

 

어떠한 경우에도 단속을 철저히 해서 화두 의단독로하도록만 거기에다가만  정성과 신경을 거기다가 두고  나가면 팔만사천 마군이가 이중 삼중으로 둘러싸고 엿보고 있은들, 지가 어떻게  것이냐 그말이여.

내가  생각 삐끗  생각[別念]을   좀을 타서 들어온 것이지,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야 지가 어떻게  것이냐 그말이거든.

 

옛날에 어떤 선원에 조실(祖室) 스님이 계셨는데 후원에 나가보니까 수챗구녁에, 공양주(供養主) 솥을 씻어 가지고  구정물을 붓다가 그냥 구정물에 밥알이 떠내려 가지고 수챗구녁에 있는 것을 조실 스님이 보셨습니다.

   톨에 시주(施主) 은혜가 일곱근 반인데  쌀을 이렇게 함부로  가지고 수챗구녁에다가 버리다니 스님이 아주 화를 내셨어.

 

그러니까 도량신(道場神) 나타나 가지고 여러  동안을 내가  도량(道場) 있으면서 스님을 뵙지를 못했는데 오늘에사 스님을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거든.

 

 스님은 평소에 항상  깨달은 경지가 낭연독존(朗然獨存)하도록 그렇게 일체처 일체시에 그렇게 지내시니까 도량신도  스님을 볼라야  수가 없었거든. 그러다가  생각 화를 내니까  좀을 타서 도량신이  스님을 보게 되었다 그말이여.

이것은 우리가  생각 냄으로 해서 도량신뿐만이 아니라 팔만사천 마군이의 올가미에 걸려들  있다고 하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일화(逸話)지마는.

 

우리 불법(佛法) 믿는  참선을 하는 수행인은  ‘한 생각 단속하는 것이 기가 막히게 중요한 것이다 그말이여.

 

  생각을 어떻게 단속을  나가느냐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느냐,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느냐 또는 해태굴(懈怠窟) 빠지냐가 판별이 나는 것이다 그말이여.

지옥으로 가느냐, 천당에 가느냐의 바로 기로(岐路),  마군이의 올가미에 걸려들고  걸려드느냐의  판가름이  생각 단속하는 데에 달려있다 그거거든.(4247~536)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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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성일편(打成一片) : 좌선할  자타(自他) 대립이 끊어져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 경계.

*악업(惡業) ; 나쁜 결과의 원인이 되는 나쁜 행위. 또는 전생(前生) 나쁜 행위.

*참선법(參禪法)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덩어리 /홀로·오로지 /드러날 ) ; 공안(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疑心) 덩어리() 홀로() 드러나다().

*지조(志操 /절개 ) : 원칙과 신념을 지켜 끝까지 굽히지 않는 꿋꿋한 의지나 기개.

*요지부동(搖之不動) ; 흔들어도 꼼짝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떠한 자극에도 움직이지 않거나 태도의 변화가 없음을 이르는 .

*염라대왕(閻羅大王) :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 심판하여 벌은 주는 .

*사자(使者 사신 / ) : 죽은 사람의 혼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일을 한다는 저승의 귀신.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 해치는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오욕락(五欲樂,五慾,五欲)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소리,향기,,감촉(色聲香味觸)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견지(見地)견처(見處). 안목(眼目). 사물현상 따위를 관찰하거나 판단하는 입장.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구경(究竟 궁구할 /마칠·다할 )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위에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계행(戒行) ; ①계() 지켜 수행하는 . ②계율과 도덕.

*여법(如法 같을·같게 ·따를·좇을 /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 : 오온(五蘊) 하나. 식별하고 판단하는 마음 작용. 인식 작용. 인식 주관.

*숙명통(宿命通) :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여섯 가지의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인 육신통(六神通) 하나로,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자유 자재한 능력.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외도(外道) ; 불교 이외의 다른 가르침. 또는  신봉자.

*마군(魔軍) ; 악마의 군세(軍勢). ()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육근문두(六根門頭) ; 육근(六根 : 眼耳鼻舌身意)  . 육근과의 경계.

*육근(六根) ; 육식(六識) 경계[六境] 인식하는 경우  소의(所依)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眼根(耳根(鼻根(舌根(身根(意根)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 기관·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 : 시간적으로 짧은 동안에.

*별념(別念) ; ‘ 생각[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생각[別念]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생각[別念] 있으면 고인이 말한  「잡독(雜毒)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없느니라.”

 

余云別念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생각[別念]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외에는, 불법(佛法) 온갖 좋은 일이라도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 취하거나[], 버리거나[], 집착하거나[], 변화하는[] 것이 모두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것이요,  묻는 사람이 친히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수챗구녁 ; ‘수챗구멍(허드렛물이나 빗물 따위가 빠져나가는 구멍)’ 사투리.

*공양주(供養主) ; 절에서 밥을 짓는 소임, 또는  일을 맡은 스님.

*시주(施主) : ①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②절이나 스님에게 재물을 바침, 또는  사람.

*일미칠근(一米七斤) ; ‘  톨을 생산하기 위해 농부가 흘리는 땀의 무게가 일곱 근이다라는 말로, 쌀을 비롯한 모든 생산물이 매우 소중하고 귀한 정성이 들어간 것임을 알고,  그럼으로써 그것들에 감사하고 아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도량신(道場神) : 도량(道場) 수호신.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읽 않고 도량으로 읽음.

*원각대지(圓覺大智) 낭연독존(朗然獨存) ; 원각(圓覺) 대지(大智) 밝게 홀로 드러나다. *원각(圓覺) : 석가여래의 원만(圓滿) 깨달음. 진여(眞如) 체득. 부처님의 지혜.

[참고] 보조국사 지눌(1158~1210) <수심결修心訣>에서.

若微細流注永斷 圓覺大智 朗然獨存 卽現千百億化身 於十方國中 赴感應機 似月現九 影分萬水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快樂無憂 名之爲大覺世尊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응용이 무궁하고 인연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쾌락하고 근심이 없으니 크게 깨친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마음 닦는 (수심결 강의) (지눌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214.  『땅에서 넘어진 , 땅을 짚고 일어나라 - 보조국사어록』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p87, 102 참고.

*올가미 ; 노끈이나 철선 따위로, 잡아당겨도 매듭이 풀어지지 않도록  가닥을 고리처럼 만들어 짐승을 잡는 기구.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해태(懈怠 게으를 /게으를 )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

*기로(岐路 갈림길 / ) :  방향이 서로 다르게 나누어지는 지점.

Posted by 닥공닥정
선(禪)과 교(敎)2014. 3. 16. 13:24

§(184) 선(禪)과 교(敎) /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교(敎)도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올바르게 공부를 허면 참선을 철저히 할 마음이 날 수 밖에는 없는 것이고, 참선(參禪)을 올바르게 허면 교가 하나도 버릴 말씀이 없어. 전부가 다 소중하고도 훌륭한 법문(法門)이라 이 말씀이여.

 

‘도를 닦는 수행인은 스승 만나기가 어렵고 또 그런 선지식은 정말 올바른 사상을 가지고 올바르게 수행을 해나갈 만한 그런 좋은 제자를 만나기가 어렵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스승을 만났다고 해서 스승한테 무엇을 얻을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스승을 만나지 아니하고서는 올바르게 수행을 해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스승을 먼저 찾아야만 된다고 그렇게 강력히 말씀을 허신 것입니다.

 

**송담스님(참선법C)(No.184) - 1982년 10월 첫째일요법회(1982.10.03)(77분)에서.(용184)

 

약 19분.

 


참선은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꼭 머리를 깎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있건 없건, 나이가 많건 적건, 지식이 있건 없건,
누구라도 일어나는 한 생각을 돌이켜서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 무엇고?」 이렇게 한 생각을 돌이키면,
이것이 바로 무명(無明)을 돌이켜서 보리(菩提)로 돌아오는 길이고, 생사(生死)의 고해(苦海)에서 해탈 언덕으로 건너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 방법이 너무 쉬웁고 너무 평범하고 너무 간단해서, 글 읽기를 좋아하고 무엇을 연구허기를 좋아하고 이론적으로 따지기를 좋아하는 그런 현대 학문을 한 지성인들은, 그 재미도 없고 만날 해봤자 답답허기만 하고, 무엇이 알아진 것도 아니고 그러니,
차라리 그러헌 참선을 허기보다는, 금강경이나 유마경이나 또는 법화경이나 그러헌 부처님 경전을 읽고 그것을 연구하고 해석을 하고, 교리적으로 연구를 허는 것이 훨씬 더 재미가 있고, 알아진 것이 있고, 또 누구 앞에 자신있게 불교에 대해서 이야기헐 수도 있고,
그러니 대부분 이러헌 지성인들이 교리적으로 이렇게 연구허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선은 3년을 허거나 10년을 해도 해 갈수록 가슴이 답답허고 알 수가 없고 알아진 것이 없고 오히려 무엇이 알아지면 못쓴다고 그러고,
그러니 누구 앞에 3년 동안 내지 10년 동안 참선을 했으면서도 ‘참선이 무엇이냐?’ ‘어떻게 허면 깨달을 수가 있느냐?’ ‘깨달으면 대관절 무엇을 깨달으며 어떻게 되는 것이냐?’ 누가 물어봐도 ‘아, 나는 잘 모른다고’ 모른다고 대답허기가 참 창피허지 않느냐?

그러니 경(經)을 공부를 하고 외우고 해석하는 교리적으로 공부를 허면, 자기도 차츰 1시간 공부허면 1시간 공부헌만큼 얻은 바가 있고, 한 달을 공부허면 한 달을 공부헌만큼 무엇이 알아진 것이 있고,
누구 앞에 얘기를 허면 사람들이 모다 발심을 해서 불교가 참 좋다고 이렇게 따라와 주고, 그래서 경(經)을 공부를 허는 것이 좋다.

그래 가지고 참선에 대해서는 등한히 하고 교(敎)만을 갖다가 숭상하는 그러한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면 교(敎)와 참선(參禪)은 다른 것이냐?

 교(敎)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法門)이고, 참선(參禪)은 부처님께서 나를 깨닫기 위해서 지도하신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修行法)이다 그말이여.
그러면 그 수행을 바르게 허기 위해서 설하신 부처님 법문이 경전이라.

그러면 ‘경전과 수행해 나가는 수행법인 참선과는 둘이라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여.

둘로 노나서 ‘이것은 교(敎)고 이것은 선(禪)이다’ ‘선이 더 좋고 교가 더 나쁘다’ ‘교가 더 중요하고 선은 맞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를 놓고 분쟁을 하고 비방을 하고 차별을 둔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 말씀이여.

교(敎)도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올바르게 공부를 허면 참선을 철저히 할 마음이 날 수 밖에는 없는 것이고,
참선을 올바르게 허면 교(敎)가 하나도 버릴 말씀이 없어.
전부가 다 소중하고도 훌륭한 법문(法門)이라 이 말씀이여.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때부터서 달마 스님에 이를 때까지 인도(印度)에 있어서는 무엇이 선종(禪宗)이고 누구는 교종(敎宗)이고 그러헌 파당(派黨)이 없었다 이 말씀이여.
가섭존자나 아난존자나 상나화수 해 가지고 28대 달마 스님에 이르기까지 선사(禪師)이면 동시에 교리에도 다 통달했고 그런 것이지.

일부 어떠헌 선(禪)에는, ‘선(禪)은 가섭존자(迦葉尊者)에 의해서 전해졌고 교(敎)는 아난존자(阿難尊者)에 의해서 전해졌다’ 이렇게 말을 헙니다만은,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이고 출가해 가지고 평생 동안 부처님을 시봉을 허면서, 부처님의 법문을 다 듣고서 너무 총력(聰力)이 좋았기 때문에 부처님이 설하신 그 많은 경전을 한 구절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조르르르르 다 외웠습니다.

외울 수가 있었기 때문에 경전을 결집(結集)을 헐 때, 아난존자의 입을 통해서 그 많은 경전이 줄줄줄줄줄... 외웠습니다.
그렇게 아난존자가 한 구절씩 한 구절씩 외우면 5백 명의 아라한(阿羅漢)들이, 대도(大道)를 성취한 성현들-그 아라한들이 ‘과연 틀림이 없이 우리도 그렇게 들었다.’ 이렇게 증명을 험으로써 한 구절씩 한 구절씩 부처님의 그 경전이 결집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것이지 아난존자에 의해서 교종(敎宗)이라 하는 그러헌 파(派)가 별도로 생기는 것이 아닌 것인 것입니다.
아난존자는 교종의 종주(宗主)가 아니고, 내나 부처님의 정법을 이어받은 제2대 조사(祖師)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부처님의 수제자(首弟子)인 가섭존자에게 전해졌고 그 가섭존자는 아난존자에게 그 ‘참나’를 깨닫는 그 정법(正法)의 법등(法燈)을 아난존자에 전했고, 아난존자는 상나화수(商那和修)께 전했고, 이렇게 해서 28대 달마 스님까지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교(敎)는 아난존자에 의해서 전해졌고 선(禪)은 가섭존자에 의해서 전해졌다’는 말은 전혀 그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은 교(敎)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훌륭한 법이라면, 어째서 ‘경을 보는 것보다는 참선을 하는 것이 좋다’고 용화사에서는 법회 때마다 그런 말씀을 허니 왜 그랬느냐?
용화사에서도 금강경 또는 반야경 또는 법화경, 화엄경 이런 경을 갖다가 경 산림(山林)을 해서 경에 대한 해설도 하고 강의도 하고 허면 훨씬 더 좋지 않겠느냐?

이러헌 생각을 허실른지 모르지만, 그 경은 그 분량이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그 팔만대장경이라고 허는 방대한 경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놈을 다 읽고 해설을 헌다해도 다 볼 수가 없는 것이고 더군다나 그것을 낱낱이 다 이해할 수는 더욱 없는 것입니다.
현재 경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경이 한문으로 다 번역이 되어 있어서 한문을 여간 잘하는 사람 아니고서는 읽어도 다 알 수가 없고, 요새 차츰 또 경전이 번역해 나옵니다마는 번역해 놓은 경을 읽어도 또 알 수가 없습니다.

읽어도 알 수 없는 경을, 다 또 읽을 수도 없는데 그것을 읽기만 하다가 우리가 죽어버린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직접 알기 어려운 그 경을 읽고 공부해서 대관절 부처님이 어떠헌 말씀을 했으며, 부처님께서 설하신 그 수행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 것인가를 자기의 힘으로 경전을 읽음으로써 알려고 허다가는 죽을 때까지 읽어도 바른 수행법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경을 보면 이렇게 허라고 말씀을 허셨고, 또 저 경을 보면 저렇게 허라고 말씀을 허셨고, 경마다 보면 그 경이 최고라고 말씀을 허셨으니,
대관절 그 경은 다 볼 수는 없고 어느 경 한 권이나 두 권만 봤으면 좋겠는데 경마다 그 경이 제일 좋다고 써졌으니, 어떻게 우리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 말씀이여.

 그래서 우리 자신이 그 경을 읽어 가지고 수행을 해 나갈려고 허기보다는,
이미 그러헌 경을 잘 공부를 했거나 또는 올바른 수행법을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아 가지고 자기도 옳게 수행을 해서 옳은 수행법을 아는 그러헌 선지식(善知識)에게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수행법을 직접 지도받아 가지고 당장 그 날부터서 수행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도 좋은 방법이라 이것입니다.

그 수행법이 책을 봐 가지고서는 해 나갈 수가 없다고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길을 갈 때에도 처음 가는 길은 자꾸 사람에게 물어봐야 하고, 가다가 두 갈래길 세 갈래길 네 갈래길을 만나면은 그 사람한테 물어서 어디로 가는가를 물어서 가야 허는 것인데,
물어보지 않고 간다든지 또는 그 길을 잘 모르는 사람한테 물어봐 가지고 잘 모르는 사람의 지시를 받아 가지고 가다가는 어믄 길로 가게 된다 이 말씀이여.

 하물며 마음을 닦는 이 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여.
마음으로 닦아 가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람이 지은 업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긴 모양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기 때문에,
공부를 지어나가되 처음에 시작은 모다 같은 방법으로 같이 해 나가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해 나가다 보면 각기 다른 경계(境界)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책을 아무리 뒤져봐도 어떻게 허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쓰여 있지 않습니다.

천상 믿을 수 있는 자기가 믿어지는 스승이 있어야, 처음에 시작할 때에도 그러한 선지식한테 지도를 받아서 허고, 공부를 해 가는 도중에도 항시 옳게 허는가 잘못해 가는가에 대해서 점검을 받고,
어떠헌 이상한 경계가 나타날 때에도 즉각 가서 그 상황에 대해서 보고를 드리고 이것이 잘못된 것인가 옳은 것인가를 지도 받아서, 많이 못쓰게 되기 전에 즉각적으로 바로잡어 나가야만 허송세월(虛送歲月)을 아니할 뿐만 아니라 삿된 경계에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한번 삿된 경계에 빠져놓으면 나중에 얼마 안 있다가 다른 선지식으로부터 ‘너의 그 경계가 올바르지 못하다’허는 것을 지적을 받아도 그 말을 믿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자기 나름대로의 경계에 맛을 붙여 가지고 깊이 빠져 들어갔기 때문에 그러헌 경계에서 빠져 나오기를 대단히 아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애를 쓰고 공력(功力)을 들여서 얻은 경계인데 또 이 경계가 얼마나 좋은데 어떻게 이 경계를 아니라고 허며 벗어날 수가 있을까? 나는 못 버린다’해 가지고 여간해서는 다른 사람 말을 곧이듣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처님이 출현을 해도 그 사람은 제도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공부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서 바른 스승을 만나서 지도를 받아 가지고 옳게 시작을 해야만 허고, 중간 중간에도 항시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 해서 점검을 받아야 하고 또 어떤 특이한 경계가 나타나거나 또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에도 반드시 선지식의 점검을 받아서 인가(印可)를 받아 가지고,
깨달은 뒤의 보림(保任) 수행 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직접적으로 지도를 받아야만 부처님과 똑같은 또 조사(祖師)와 똑같은 그러헌 완전한 수행의 목적지에 도달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도 그 혈맥론(血脈論)에 말씀 허시기를 ‘이금차도(而今此道)에 난득기인(難得其人)이다’. 이 도법(道法)에 있어서 사람 만나기가 어렵다.
‘도를 닦는 수행인은 스승 만나기가 어렵고 또 그런 선지식은 정말 올바른 사상을 가지고 올바르게 수행을 해나갈 만한 그런 좋은 제자를 만나기가 어렵다’ 이렇게 말씀을 허셨고,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이렇게도 말씀을 허셨습니다.

스승을 만났다고 해서 스승한테 무엇을 얻을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스승을 만나지 아니하고서는 올바르게 수행을 해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스승을 먼저 찾아야만 된다고 그렇게 강력히 말씀을 허신 것입니다.(31분47초~50분1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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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無明) ; 모든 현상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 근본 번뇌. 사제(四諦)에 대한 무지로서,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 번뇌. 본디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원초적 번뇌.
*보리(菩提) ; ‘bodhi’의 음사(音寫). 각(覺)•지(智)•도(道)라고 번역. 모든 집착을 끊은 깨달음의 지혜.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선종(禪宗) ; 문자를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선(禪)을 닦아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체득하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종파.
*교종(敎宗) ; 경론(經論)의 문자•어구를 이론적으로 풀이하고 정리하여 체계를 세우는 여러 종파를 통틀어 일컬음.
*가섭존자(迦葉尊者), 아난존자(阿難尊者), 달마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파당(派黨) ; 주의(主義)나 주장 또는 이해관계가 같은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인 집단.
*시봉(侍奉) ; ①제자 ②스님을 가까이 모시고 시중드는 일.
*총력(聰力) ; 보거나 들은 것을 오래 기억하는 힘.
*결집(結集) ;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멸 후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함께 외어 기억하는 형식으로 모아서 정리한 것.
*아라한(阿羅漢) ;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 응공(應供)•응진(應眞)•무학(無學)이라 번역.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법등(法燈) ; 부처님의 가르침. 미(迷)한 세계의 캄캄한 마음을 없애는 것을 등불에 비유한 것.
*산림(山林) ; 절에서 불경(佛經)을 강설(講說)하는 모임. 산림(山林)’의 뜻은 ‘최절인아산(摧折人我山) 장양공덕림(長養功德林)’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너다 나다 잘난체하는 아상과 교만의 산을 허물고, 공덕의 숲을 잘 가꾸라”는 뜻이다.
*선지식(善知識) ; 불교의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
*구전심수(口傳心授) ;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을 통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배도록 가르침을 이르는 말.
*어믄 ; ‘애먼’의 사투리(전라). 애먼:(일의 결과가 다르게 돌아가)억울하게 느껴지는, 엉뚱하게 느껴지는.
*경계(境界) ; ①대상,인식 대상 ②경지 ③상태 ④범위,영역 ⑤일, 사건
*공력(功力) ; 애써서 들이는 정성과 힘.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보림 ; 보임(保任) ;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 흔히 ‘보림’이라 읽는다.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참고] [선문촬요 禪門撮要 上 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〇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Posted by 닥공닥정
활구참선 최상승법2014. 3. 14. 10:40

 

 

§(184) (게송) 심수만경전~ / 윤회의 근본은 ‘한 생각’ / 참선법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을 단속하는 방법」이다.

 

죄도 없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죄 많은 사람일수록에 업이 두터운 사람일수록에, 그런 불보살과 성현은 백 배 더 불쌍한 마음으로 어떠헌 방법으로 이 중생을 제도할까? 그 중생에 알맞는 방편(方便)을 써서 제도허시기 위해서 노력을 허고 계시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비방(誹謗)하면 - 불법을 비방하는 그 과보(果報)로 일단은 지옥에 떨어졌지만, 지옥고 받은 뒤에는 - 부처님을 비방한 그러헌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그 공덕으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헐 수가 있다.

 

**송담스님(참선법C)(No.184) - 1982년 10월 첫째일요법회(1982.10.03)(77분)에서.(용184)

 

약 21분.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헌데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하면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니라
나무~아미타불~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이요, 마음은 모든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는데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라, 일어나는 곳마다 바로 거기서 능히 그윽해 버린다.

중생은 경계(境界)에 따라서 마음이 일어나는데, 한 생각 일어나면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점점 점점 생각이 벌어져 가지고 가지가 쳐서 그 생각이 점점 발전을 해 가지고, 그 생각이 얼굴에 표현이 되고 나아가서는 행동으로 나타나 가지고 큰일을 저지르게 돼.
그래 가지고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슬픔의 구렁에 빠지기도 하고, 노여움의 불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지옥의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그러는데 물론 우리가 살아있으니까 무슨 소리를 듣던지 무슨 색상을 보던지 어떠헌 경계를 닥치면 그 경계에 따라서 생각이 - 저것이 차 소리라든지, 비행기 소리라든지, 또는 어린애 소리라든지, 저건 꽃이다, 붉다 검다,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러헌 경계에 따라서 그러헌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헌데,

그 일어나는 그 때에 그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능히 경계에 휩싸여 끌려 들어가지 아니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본성(本性)을 인득(認得)해 버린다. 일어나는 바로 그 경계를 발판으로 해서 자기의 본성(本性) 자리로 돌아와 버린다. 이것이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이여.

수류인득성! 수류인득성을 해 버리면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라. 기뻐헐 것도 없고 근심헐 것도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이 - 그것이 바로 생사심(生死心)인데,
이 세상에 나왔다가 한평생 살다가 죽어가고, 죽었다가 다시 또 자기의 업(業)에 따라서 어느 곳에 태어나면 또 한평생 살다가 또 죽고 허기를 무량 억천만 겁을 그렇게 윤회를 허면서 금생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육도윤회(六途輪廻)의 근본이 무엇이냐 하면 「한 생각」 때문에 그런 거여.
‘한 생각 일어나는 것’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천당에도 올라가고, 지옥에도 떨어지고, 축생도 되고, 또는 사람도 되고, 귀신도 되고 그런 것이여.

그런데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團束)을 허느냐?

여기에서 지옥으로 떨어질 것을 미연에 방지헐 수도 있고, 축생이 될 것을 미리 방지헐 수도 있고,
그러기 때문에 천당에 가고 싶으면 천당에 가고, 지옥에 가고 싶으면 지옥에 가고, 독사가 되고 싶으면 독사가 되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자유자재로 헐 수가 있는 그러헌 능력을 우리는 낱낱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여.

그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한 생각을 단속을 못해 가지고 원치도 아니한 지옥에도 떨어지고 독사도 되고 귀신도 되고 수라(修羅)도 되고 이러허지, 참으로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헐 방법만을 분명히 알아서 실천을 해 나가면 우리는 지옥에 갈 필요가 없어.

천당에도 가고 싶으면 가고,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좋은 여건 하에 태어나서 자기도 훌륭한 인격을 이루고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을 갖다가 제도헐 수 있는 그러헌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여.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인데, 참선법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을 단속하는 방법」이다.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허느냐?
슬픈 일을 당허든지 또는 속상한 일을 당허든지, 괴로운 일을 당하던지, 또는 기쁜 일을 당하던지, 어디에서 언제 어떠헌 일을 당하더라도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이뭣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擧却)허는 것입니다.

금방 녹음법문을 통해서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활구참선(活句參禪), 활구참선이 바로 가장 빨리 어떠헌 근기(根機)라 하더라도,
남자가 되었건 여자가 되었건, 나이가 많건 적건, 지식이 있고 없건, 또는 성질이 급해서 성을 잘 내건,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부처님과 차등이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그 생각만 두 번째 생각으로 벌어지기 전에, 어떠헌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동시에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자기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헌다면 거기에서 육도윤회는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죄를 많이 지었는데 그 죄 많은 사람이 참선을 헌들 어떻게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허며 그 뭐 「이뭣고?」 좀 했다고 해서 어떻게 내가 그러헌 무서운 많은 죄를 지었는데 지옥에 안 떨어질 수가 있는가?
이러헌 생각을 먹고 미리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도업(道業)을 닦아서 이루는 것을 포기허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불보살(佛菩薩)께서는 그러헌 죄 많은 사람을 위해서, 업(業)이 두터운 중생을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을 하셔서 그 많은 법을 설허셨고,

삼천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현허신 그 부처님만이 아니라 그렇게 정식으로 부처님으로 출현허시는 부처님뿐만이 아니고,
온 법계(法界)에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형형색색으로 부처님과 보살님과 또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한 그러헌 성현들이 수없이 천백 억 화신(化身)을 나투면서 우리의 중생 앞에 출현을 해 계시는 것입니다.

죄도 없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죄 많은 사람일수록에 업이 두터운 사람일수록에, 그런 불보살과 성현은 백 배 더 불쌍한 마음으로 어떠헌 방법으로 이 중생을 제도할까? 그 중생에 알맞는 방편(方便)을 써서 제도허시기 위해서 노력을 허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 업이 두터운 우리 보잘 것 없는 중생도 아들과 딸을 많이 두면, 공부 잘하고 착하고 좋은 아들은 마음으로 흐믓허고 기쁘고 그렇지만,
그 공부를 잘 못헌다든지, 몸이 어디가 불구자라 한다든지, 마음이 바르지를 못해서 못된 일을 많이 헌다던지 허는 그러헌 자식에 대해서는 부모는 밤잠을 못 주무시는 것입니다. 몇백 배, 몇천 배 그 자식에게 더 마음이 더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자식을 바로 잡아줄까? 어떻게 이 병신을 갖다가 이 바로 잡아줄 수가 있을까? 자나깨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헌 뜨거운 사랑과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미루어보면 불보살과 성현들께서 우리 중생, 죄 많은 중생들에 대해서 어떻게 허면 이 중생을 제도하고 바른길로 이끌고 생사 없는 해탈도를 증득허게 해 줄 수가 있을까? 얼마나 그 생각을 뜨겁게 가지고 계실 것인가를 우리는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떠헌 종교에서는 자기만을 믿어야지 자기를 배반하고 믿지 않는 중생은, 자기를 비방하거나 자기를 배반하는 그러헌 사람은 3대까지 그 벌을 주어서 멸종을 시킨다고 허는 그러헌 외도(外道)의 경을 내가 봤습니다마는 우리 부처님은 중생에 대한 보복이라고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 보고도 보복을 허지 말어라.
보복으로써 원수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보복을 허면 또 다시 다음 기회에 상대방이 나에게 또 보복을 허게 되고, 그 다음에는 내가 또 보복을 허고 해서 점점 점점 미움과 원망과 싸움은 더 커져서 나중에는 온 세계가 싸움의 세계가 되아서 지옥(地獄)으로 변헐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

원수와 싸움을 없앨라면은 보복을 허지 말고, 자비로써 바른 마음으로써 상대방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어떠헌 방법을 쓰면은 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을까? 이렇게 자비심을 가짐으로써 용서함으로써 싸움은 없어진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허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허신 부처님께서 당신을 믿지 아니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안 믿는다고 해서 우리를 지옥의 불구덩이에다 집어넣거나, 더군다나 직접 부처님을 비방하고 욕헌 사람을 지옥에다 밀어넣지 아니헐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자손까지 3대까지 멸종을 시킨다고 허는 그러헌 일은 우리 부처님께는 꿈에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비방(誹謗)하면 - 그러면 아무리 불법을 비방허고 삼보(三寶)를 비방해도, 그러면 지옥에도 안 가고 상관이 없구나. 인자는 내가 마음놓고 불법을 좀 비방을 해야겠다. 그러헌 생각을 먹는 사람은 없겠습니다마는, 불법을 비방하면 지옥에 가기는 갑니다.

부처님이 그 불법을 비방하는 중생이 미워서 부처님이 지옥에다 갖다가 밀어넣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지옥에 갈 짓을 했기 때문에 자기의 업(業)에 의해서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쁜 짓을 헌 것이 아니고 ‘부처님을 비방했다’한 그 인연(因緣)으로, 그래도 부처님과 인연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부처님을 비방함으로써도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지옥고(地獄苦)를 받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헌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허셨습니다.
부처님을 비방하는 그 과보(果報)로 일단은 지옥에 떨어졌지만, 지옥고 받은 뒤에는 - 부처님을 비방한 그러헌 형식으로,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그 공덕으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헐 수가 있다.

그러니 부처님과 만약에 좋은 인연, 불법을 믿고 불법을 찬양하고, 많은 사람에게 불법의 인연을 맺어줄라고 노력을 헌, 그러헌 좋은 인연을 맺는 사람이라면, 과거에 지은 죄로 지옥에 갈 만한 죄업을 지은 바가 있다 하더라도 지옥고를 면허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이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자기공부를 철저히 해서 ‘금생에 결정코 대도(大道)를 성취허겠다’고 허는 그런 철저한 신심으로 노력을 헌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대도를 성취허게 될 것은 의심헐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처음~20분5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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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심수만경전~’ ; [직지(直指)] (白雲和尙 抄錄, 조계종출판사) 63쪽 마나라(摩拏羅) 존자 게송 참고.
*경계(境界) ; ①대상,인식 대상 ②경지 ③상태 ④범위,영역 ⑤일, 사건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음역어는 ‘갈마(羯磨)’이다.
*구렁 ; ①헤어나기 어려운 나쁜 환경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땅이 움푹하게 팬 곳.
*단속(團束) ; ①주의를 기울여 다그쳐 보살핌. ②규칙, 법령, 명령 등을 어기지 않게 통제함.
*육도윤회(六途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천당(天堂) ; ①극락세계(極樂世界)인 정토(淨土). ②하늘 위에 있는 궁전.
*지옥(地獄 땅 지/감옥 옥) ; ①고통이 가득찬 세계. 현세에 악업(惡業)을 행한 자가, 사후 그 보답을 받는 곳. ②아주 괴롭거나 더없이 참담한 환경이나 형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수라(修羅) ; 아수라(阿修羅)의 준말. 늘 싸움만을 일삼는 귀신들의 무리.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이 무엇고(이뭣고 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 무엇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 무엇고?」(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화두를 든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 보아 깨달아 부처가 됨.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 불도의 수행. 진리의 실천.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사바세계(娑婆世界);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아라한(阿羅漢) ;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 이 경지를 아라한과(阿羅漢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아라한향(阿羅漢向)이라 함. 응공(應供)•응진(應眞)•무학(無學)•이악(離惡)살적(殺敵)•불생(不生)이라 번역.
마땅히 다른 사람의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응공(應供), 진리에 어울리므로 응진(應眞), 더 닦을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 악을 멀리 떠났으므로 이악(離惡), 번뇌라는 적을 죽였으므로 살적(殺敵), 미혹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불생(不生)이라 함.
*화신(化身) ; 부처의 삼신(三身:法身•報身•化身)의 하나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불신(佛身).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십바라밀(十波羅蜜)의 하나. 보살(菩薩)이 중생을 근본적인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쓰는 묘한 수단을 말한다.
*해탈도(解脫道) ;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외도(外道바깥 외/길 도) ; 불교 이외의(外) 다른 교(道).
*비방(誹謗) ; 남을 해치려고 흠을 들추어내어 비난하여 말함.
*삼보(三寶) ; 부처님(佛寶)과 부처님의 가르침(法寶)과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집단(僧寶) 의 3가지를 보배에 비유한 말. 이것은 불교를 구성하는 3가지의 중요한 요소임.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은 불교도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임.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과보(果報) ; 인과응보(因果應報,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 과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 행위.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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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뭣고 화두2013. 12. 12. 09:33

§(264) ‘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 / 단전호흡과 의심, 득력(得力) / 경계에 속지 말아야 / (게송)묵조시귀굴~.

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 - 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

이 활구참선법은 캄캄한 밤에 기둥에 이마빡을 부딪친 거와 같은,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다못 꽉 맥혀 가지고, 알 수 없이 ‘이뭣고?’ 그 뿐인 것입니다.

어떠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에 현혹되지 말고 집착허지 말고,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두고, 정신만 탁 챙겨 가지고 눈을 뜨고서 화두를 챙겨나가면 그러헌 경계는 금방 저절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264) - 1985년 4월 첫째일요법회(91분)에서. (용264)

 

약 18분.

 

 

그런데 흔히 화두 하면 ‘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이기 때문에 ‘이뭣고?’를 많이 말씀을 허게 됩니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말은 임제(臨濟) 스님 이후로 임제종에서 이 화두라고 하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마는, 임제 스님 이전에 육조(六祖) 스님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사용하지 아니했지만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기둥하고 아래로는 땅을 떠받치며, 밝기로는 해보다 더 밝고 검기로는 옻칠보다도 더 검은데, 항상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허는 가운데에서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터억 앞에 나와서, ‘그것은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이로소이다. 이 하택신회에, 저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육조 스님이 ‘뭐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도 없다고 내가 그랬거늘, 어찌 불성이니 제불의 본원이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공부를 해서 일가(一家)를 이룬다 하드라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 되겠다. 불교 학자밖에는 못 되겠다’

 

이 불교(佛敎)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공부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참나’를 깨닫는 것이 목적인데, ‘너는, 앞으로 니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가를 이룬다 해도 지해종자(知解種子)밖에는 못 되겄다’ 이렇게 점검을 허셨습니다.

 

그러자 남악회양(南嶽懷讓)이 왔습니다. 와서 터억 절을 허니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셨습니다.

하! 그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헌 물음에 대해서 꽉! 맥혀서 뭐라고 대답헐 수가 없어 몸을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택신회는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니, 무슨 하택신회의 불성이니 이렇게 즉각 그 대답을 했는데, 남악회양은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허고 묻는데 대해서 앞이 꽉 맥혀 가지고 몸 둘 바를 몰라. 그 뒤로 8년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8년 동안을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앉아서도 그 생각, 서서도 그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그 생각, 일을 허면서도 그 생각, 똥을 누면서도 그 생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이렇게 허기를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그래 가지고 육조 스님 앞에 가서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조 스님이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헐 것이 있느냐?’허니까,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證)헐 것이 없들 않지마는 오렴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이렇게 해서 인가(印可)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참선법, 활구참선법은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더듬어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남악회양 선사처럼 대뜸 처음부터서 꽉! 맥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기둥에 이마빡을 부딪친 거와 같은, 캄캄하니 갑자기 걸어가다가 기둥이나 벼람박에 이마빡을 부딪쳤을 때 그때 상황이 어떻습니까?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다못 꽉 맥혀 가지고, 알 수 없이 ‘이뭣고?’ 그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꽉 맥혀서 앞뒷이 끊어져야 그 공부를 옳게 해 나가는 것이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 이론, 무슨 철학, 불교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 그것을 갖다가 아는 대로 끌어다가 이렇게 분석을 하고, 종합을 하고, 비교를 하고, 적용을 하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허는 것이 아닙니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도 그렇고, 마삼근(麻三斤)도 그렇고, 무자(無字) 화두도 그렇고, 시삼마(是甚麼)도 그렇고, 무슨 화두(話頭)를 어느 큰스님한테 탔든지 간에 한번 탔으면 그 화두,

공부가 잘되거나 못되거나, 못될수록에 그 화두 하나에 전력을 쏟을 것이고, 잘된다 하드라도 기쁘다 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무자 화두를 하는 분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지어갈 따름인 것입니다.

 

꽉 맥혀서 답답허고 알 수가 없지만 조금도 조급한 생각을 낼 것이 없고, 또 그렇게 해 가다 보면 화두가 순일하게 들려서 의심(疑心)이 순일(純一)하게 들린다 하드라도, 화두가 독로(獨露)한다 하드라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기쁜 마음을 내면 이미 화두는 달아나 버리고, 기쁜 마음의 마구니가 벌써 침입해 들어온 것이고, 안된다고 짜증을 내고 번뇌심을 내면 이미 번뇌의 마구니가 내 마음에 침입해 들어온 것이라. 그래서 이 공부는 잘된다고 해서 기쁜 마음도 내서는 아니되고, 잘 안된다고 해서 짜증낼 일도 아닌 것입니다.

 

다못 단전호흡을 허면서 숨을 쑤욱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는데, 볼록해지거든 약 3초 동안 딱 정지했다가, 또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허면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러면 숨이 다~ 나가면 배가 홀쪽해지죠. 그러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시면은 아랫배가 볼록해지는데, 볼록해지거든 딱 정지헌 상태에서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또 숨을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고... 허지만,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꼭 숨을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됩니다.

들었던 화두 ‘이뭣고?’헌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냥 화두는 더 들지 않고, 그 있는 의심을 묵묵히 반조(返照)를 허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는 한번 들고서 숨은 3번, 4번, 5번 내지 10번을 쉬어도 그 화두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은 덮치기로 화두를 들지 않다가, 화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지거나 딴 생각이 일어났다허면 그때 가서 또 화두를 떠억 한번씩 챙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해 가면, 처음에는 그렇게 들랴고 해도 깜빡한 사이에 달아나 버리고 들면 또 달아나 버리고 하는데, 나중에는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화두가 항상 들어져 있게 될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을 갖다가 공부가 많이 익숙해진 증거인 것입니다.

 

힘을 쓰지 아니해도 저절로 공부가 되어가니까 힘을 덜게 된다. ‘힘 덜게 되는 것을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라’ 이렇게 고인(古人)네들은 표현을 했습니다.

 

이 공부에 제일 주의헐 것은 사량분별로 따지지 말 것이며, 설사 공부가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순일허게 잘 들리고 의단이 독로헌다 해도 좋아하는 마음, 환희심(歡喜心)을 내지 말 것이다.

 

또 공부가 순일허게 잘되어 갈 때에 ‘빨리 깨달랐으면, 이럴 때 누가 나로 하여금 탁! 깨닫게 해줬으면’ 그러헌 생각도 내지 말 것이다.

 

또 공부가 그렇게 순일하게 잘되어 가게 되면은 여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떠한 그 신기한 경계(境界)가—혹 환한 빛을 광명을 본다던지, 꿈에 부처님을 친견하고 꿈에 어떤 깨달은 꿈을 꾼다든지, 또는 여러 가지 뭣이 알아진다든지, 그런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드라도 ‘이것은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환상(幻相)이다’ 생각하고. ‘이거 내가 깨달은 것이 아닌가?’ 그러헌 그 외람(猥濫)되고 잘못된 생각을 내지 말고.

 

어떠한 신기한 불보살이 나타나고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드라도 이것은 허상(虛像)이요, 환상이라 하는 것을 미리부터 잘 이해를 허시고, 그런 데에 현혹되지 말고 집착허지 말고.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두고, 정신만 탁 챙겨 가지고 눈을 뜨고서 화두를 챙겨 나가면 그러헌 경계는 금방 저절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스승을 바로 만나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옳게 해 나가는 것인가’를 잘 모르는 사람은 공부허다가 이런 허상과 환상과 마경(魔境)이 나타나면 이것이 도통(道通)헌 것으로 착각을 하고, 그것에 기쁜 마음을 내고 그것에 집착을 하고 신경을 써 가지고 영영 사도(邪道)에 빠지고, 까딱하면 정신병자가 되고 하는 예도 가끔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시작할 때부터서 바르게 시작을 해야 하고, 중간에도 바르게 해 나가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묵조시귀굴(黙照是鬼窟)이요  문자역조강(文字亦糟糠)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문해하종(若問解何宗)인댄   방행여우적(棒行如雨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묵조(黙照)는 시귀굴(是鬼窟)이요. 묵묵히 앉아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이 귀신의 굴택(窟宅)이요.

문자(文字)는 역조강(亦糟糠)이다. 문자, 이론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은 이것은 다 찌꺼기더라 그말이여.

 

참선을 허되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허면서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허도록 잡드리를 해 나가야지,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조용헌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그러헌 공부는 이것은 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 해 가지고, 이것은 아무리 평생을 들여다보고 있다 허드라도 이것은 귀신굴(鬼神窟) 속에서 살림살이를 허는 것이라 해서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입니다.

설사 오신통(五神通)이 난다 허드라도 이것은 정법(正法)이 아니고 외도선(外道禪)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經典)이라 하더라도 경전을 우리의 중생 분별심으로 사량분별로 이리저리 따져서 해석을 허고 있다면, 그것은 곡식의 바른 알곡을 먹지를 못하고 그 찌꺼기를 씹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부처님 경전도 그 경전을 바로 읽고 바로 봐서 부처님의 그 참뜻을 옳게 깨달라야지, 그것을 이론적으로 따지고 문자로 그것을 분석해서 그렇게 일생 동안을 경을 읽고 연구를 헌다해도 그것은 찌께기—엿 국 다 뽑아내고 엿기름 찌께기를 그것은 돼지나 주는 것인데 그것을 갖다가—엿 국물은 받아서 구정물 통에 붓어 버리고 그리고 그 엿밥, 찌께기를 먹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약문해하종(若問解何宗)이면, 그렇다면은 묵조(默照)도 아니오, 문자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대가 공부해 나가는 종지(宗旨)가 무엇이냐? 그대가 공부해 나가는 것은 어떠헌 공부를 허느냐? 무슨 목적으로 어떠헌 공부를 허느냐?’허고 묻는다면은,

 

방(棒)을 내리기를, 방맹이로 몽둥이질을 허기를 비 쏟아지듯이 몽둥이질을 허리라[棒行如雨滴].

‘그 무슨 공부를 허느냐? 그대가 하는 공부의 지취(旨趣)가 무엇이냐?’고 묻다가 뭇매를 맞게 된다 이것입니다.

 

어째서 ‘그대의 공부허는 종지가 무엇이냐?’하고 묻는데 방맹이를 맞게 되느냐?

여러분이 참선을 열심히 허시게 되면 이 뜻을 스스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61분32초~1시간19분4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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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임제, 육조, 하택신회, 남악회향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임제종(臨濟宗) ; 중국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이다.

임제종은 북방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송대(宋代)에 석상 초원(石霜楚圓) 문하에서 양기 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와 황룡 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가 나와, 양기파는 성행했으나 황룡파는 얼마 안 가 쇠퇴함.

양기파 문하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화두(話頭)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하여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그의 선풍(禪風)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동용(動用) ;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씀[用]. 움직이고 작용함. 활동. 동용(動容)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06) - 86년 8월 화두·불명·수계 법회(86.08.03)에서.

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33분18초~35분)

*지해종사(知解宗師) ; 참선 공부를 알음알이로 따져서 해석하고 강론하고 공부해 가는 강사나 이론가를 말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벼람박 ; ‘바람벽(--壁, 집의 둘레 또는 방의 칸막이를 하기 위해 만든 벽)’의 사투리.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마삼근 (麻三斤) : 화두의 하나。『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하는 물음에 대하여, 운문종(雲門宗)의 동산(洞山) 수초선사(守初禪師)가 대답하기를 『마 삼근(삼 서근)이니라』하였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반조(返照) ; 돌이켜 살펴보는 것.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환상(幻相) ; 실체가 없는 무상한 형상.

*외람되다(猥濫-- 함부로·외람할 외/함부로·넘치다 람) ; (언행이나 생각이)분에 넘치는 데가 있다.

*마경(魔境) ; 마(魔)의 경계(境界).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번뇌를 말한다. 마(魔)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사도(邪道) ; 올바르지 않은 삿된 길.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길.

*(게송) ‘묵조시귀굴(黙照是鬼窟)~’ ; 『청허당집(淸虛堂集)』(동국대학교역경원) p63 ‘일선자(一禪子)에게’ 게송 참고.

*굴택(窟宅) ; 거처, 집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묵조사선(默照邪禪) ;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그러한 공부. 이것은 깜깜한 귀신굴(鬼神窟) 속에서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라 해서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이다.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94-95 참조.(가로판 p99~100)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정법(正法 바르다·올바르다 정/부처님의 가르침 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정법시대(正法時代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엿 국물(엿물) ; 곡식을 엿기름으로 삭힌 뒤에 자루에 넣어 짜낸 국물. 맛이 달고 끈적끈적하다. 엿 국물을 고아 굳힌 것이 우리가 보통 먹는 ‘엿’이다.

*엿밥 ; 엿을 만들 때 엿물을 짜내고 남은 밥찌끼.

*종지(宗旨 근원 종/뜻 지) ; ①종문(宗門, 종파宗派)의 교의(敎義 어떤 종교의 진리로서 공인된 가르침)의 취지(趣旨 긴요한 뜻). ②주장이 되는 요지나 근본이 되는 중요한 뜻.

*지취(旨趣 뜻 지/뜻 취) ; ①어떤 일에 대한 깊은 맛. 또는 그 일에 깃들여 있는 묘한 뜻. ②취지(趣旨 어떤 일에 대한 기본적인 목적이나 의도).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13. 10. 20. 15:23

§(세등46) ()없이 정진을 해야 / 다른 종교를 비방 말라 / 관심일법총섭제행 / (게송)청군앙면간허공~ / 여의고 찾지 않고 바로 그놈에 즉해서 화두 들어야.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정진을 하되 자기가 정진을 잘한 하고, 아주 의식적으로 자기 정진 잘하는 () 가지고 그러지를 말아라.’ ‘여법(如法) 정진을 하되 () 없이 정진을 해야 것이다.’ 이런 말씀도 계셨습니다.

 

해제를 하면 인연 따라서 걸망을 지고 어느 산천, 어느 계곡, 어느 모퉁이를 가더라도 걸음 걸음 옮길 때마다 염염불망(念念不忘)으로 화두를 거각해 나간다면, () 속이 바로 입선(入禪) 시간이 것이고, 걸음걸음이 바로 선방(禪房) 것입니다.

 

신도 여러분들이야말로 출가한 스님네 보단 () 노력을 더해야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바로 오욕락 속에서 자칫하면 죄를 의식적으로 짓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짓게 되기 때문에 배의 신심을 돈독히 갖지 아니하면 후회막급(後悔莫及) 일을 당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1 1초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상살귀(無常殺鬼) 생각 생각에 우리의 뒤를 쫓아오고 있기 때문에, 생각 늦추면 바로 무상살귀에 따라잡음을 당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46)—계해년 하안거해제 법어(1983.07.17) (세등46)

 

(1) 약 17분.

 

(2) 약 15분.

 

(1)------------------

 

옛날에 공자님이 사서삼경 가운데에논어(論語)’라는 () 있는데, 경의 첫머리에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하냐.

유붕(有朋) 자원방래(自遠方來) 불역낙호(不亦樂乎).’ 벗이 있어서 데로부터 나를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되내가 이렇게 공부를 잘하고 도가 있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아니하되 성내지 아니하면 그것이 군자가 아니냐. 이러한 내용의 말씀이 있습니다.

 

배워서 때때로 익힌다 하는 것은글을 배워 가지고 열심히 읽는다그러한 뜻이 아니라,

마음 닦는 공부를 배워 가지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법희선열(法喜禪悅)! 정진을 가면은 거기에서 말로서 표현할 없는 기쁨이 있어. 그건 유교나 불교나 밖에 모든 예술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공부를 잘하면 물론 깨달음을 얻었으면 말할 것도 없고, 설사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하드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여법(如法)하게 수행을 하면, 자연히 데서! 그분이 그렇게 정진을 잘한다니 우리도 그분하고 같이 정진을 하자’ ‘그분이 정진을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니 우리도 그분한테 가서 지도를 받고 공부를 하자이래가지고 데로부터서 많은 도반(道伴)들이 찾아오면 그것이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 이건 유교나 우리 불교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즈막에 가서,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되 성내지 아니하면 이것이 또한 군자가 아니냐. 유교에 있어서 군자(君子) 하는 말은 불교에 있어서 보살(菩薩)이라고 하는 말로 대치를 해도 좋을 것입니다.

 

내가 정진을 잘하고, 내가 법력(法力) 있고 도력(道力) 있으되,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해.

요새 무엇을 잘하면 알아주기를 바래서 신문에 내고, 무슨 책에다가 발표를 하고, 라디오나 TV 방송을 하고 해서, 자꾸 요새는 자기의 잘하는 것을 만천하에 널리 널리 알려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알아주기를, 알아주도록 이렇게 온갖 수단과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마는,

옛날 성현들은 구태여 자기를 알아 달라고 선전을 하지를 했습니다. 남이 알아주지 해도 조금도 부족함을 느끼지를 했습니다.

 

성현들이 자기가 깨달은 진리법을 자꾸 설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양(宣揚) 하는 것은 자기를 알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바른 길을 사람이라도 알려서 지혜의 눈을 떠서 생사해탈(生死解脫) 하기 위해서 중생들을 제도(濟度)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자기 자신을 알아 달라고 그러시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번을 청해야 법을 설하되, 법을 설해 가지고 사람이 알아듣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기뻐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깨닫지를 못한다고 해서 언짢게 생각하지를 말어라' 하셨습니다.

그러냐 하면() 없이 ()하기때문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이 마음을 내기때문에, 자기의 () 들은 사람이 알아듣고 깨달았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알아듣고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또한 언짢이 생각할 것도 없다 그말이여.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되 성내지 아니한다 말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말이 것입니다.(3533)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정진을 하되 자기가 정진을 잘한 하고, 아주 의식적으로 자기 정진 잘하는 () 가지고 그러지를 말아라.’ ‘여법(如法) 정진을 하되 () 없이 정진을 해야 것이다.’ 이런 말씀도 계셨습니다마는, 계행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계행(戒行) 청정하게 지키되지킨다 () 없어야 참으로 사람이 율사(律師) 것이고, 정진을 하되 정진하는 () 없이 다못 여법하게 정진을 하되내가 정진을 잘한다 아주 거만을 빼고 그래서는 그것이 실다웁게 정진을 한다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유교나 불교나 도교나 또는 밖에 어떠한 ()라도 그것이 참다운 길일진댄, 중요한 점에 있어서는 우리는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다른 종교를 비방하고 헐뜯고 그러지를 않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외도(外道) 지은 어떠한 신당이나 무슨 탑이나 그런 것을, 불자(佛子) 그것을 헐거나 파괴를 하지 말아라그러셨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비방하고 헐고 뜯고 싸우고 그러지를 말아라하신 까닭은, 눈으로 보면 세계의 모든 법이 속에 포함이 되어 버린 것이며,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법신불(法身佛) 표현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구태여 그것을 때려부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맛 정법(正法) 우리가 믿고, 정법을 실천하고, 정법을 깨달라서, 정법을 선양(宣揚)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얼음을 깨고 부시고 그래 가지고 그것을 없앨랴고 것이 아니라, 봄이 돌아와서 태양이 빛나서 날씨가 화창하면 얼음을 뿌시고 칼로 쫒고 불을 피워서 녹일라고 하지 않아도, 제절로 얼음과 눈이 녹아 가지고 물이 되며 그것이 증발을 해서 천하에 잎이 피고 꽃이 피게 것입니다.

 

번뇌와 망상 일어나는 것을 그놈을 물리칠랴고 몸부림을 치고, 그놈을 없앨랴고 이를 악물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터억 화두만을 거각해 버리면은 번뇌와 망상은 자취가 없이 없어지는 것입니다.(3937)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하는 말씀이 달마혈맥론(達磨血脈論) 있습니다마는, ‘마음 관하는 법이 모든 행을 섭화한다. 포섭해 버린다.’ 바로 이러한 뜻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 믿고 행하는 사람은 이렇게 뿌리를 해결지음으로서 가지와 이파리는 제절로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나무를 가꿀 때에 뿌리 닿는 곳에 좋은 흙이 닿도록 주고, 거기에 적당한 수분과 적당한 영양을 공급을 주면 제절로 줄기가 크고 가지가 번성을 하고, 거기에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훌륭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뿌리에는 좋은 흙이 닿지를 못하고 뿌리에는 수분과 비료를 공급해 주지 아니하고, 이파리에만 매달리고 가지에만 매달려 가지고 아무리 그것을 키우고 헐랴고 한들, 뿌리가 썩어들어 간다든지 아무 영양이 없고 수분이 없다면은 잎에다가 아무리 약을 풍기고 손질을 한다 해도, 나무는 결국은 시들어 죽고 좋은 꽃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좋은 열매도 얻지를 못할 것입니다.

 

우리 최상승법참선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달마 스님이 천삼백여년 전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오시기 전에, 이미 수백 전에 불교가 중국에 들어왔습니다. 모든 경전이 들어오고 불상도 들어오고, 스님네도 들어오고, 그래서 중국에 많은 절도 세워졌고, 많은 강사도 나와서 활발하게 경을 연구하고 했습니다마는, 달마 스님이 백사십 세의 고령으로 중국에 건너오신 것은 바로내가 나를 깨닫는 최상승법을 위해서 들어오신 것입니다.

 

최상승법이 오늘 우리 한국에 면면히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한국에 모든 불자, 모든 한국 사람들에게 최상승법으로 지혜의 눈을 뜨게 하고, 나아가서는 세계에 최상승법을 선양을 해서 부처님의 본뜻이 온누리에 가득차게 되도록 우리는 해야 것입니다.(4319)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지 천육백 , 동안에 신라·고구려·백제·고려를 통해서 불교가 국교로서 숭앙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많은 불교문화재를 남기고 오다가, 이조 오백년 동안에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하는 관계로 불교가 침체를 해서 내려오다가,

해방된 차츰차츰 불교를 믿는 사람이 불어나고, 지금 천삼백만을 헤아리고 있습니다마는,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가운데 불과 몇백 명을 넘지를 못하리라 생각이 됩니다. 참선을 하되 참으로 올바르게 참선을 하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은 같습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드라도 올바르게 하지 아니하면, 차라리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한 것입니다. ‘호리지차(毫釐之差)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털끝만큼의 차이로 하늘과 땅으로 차이가 벌어져 버린다하는 것입니다.

 

지지리 옳게 가다가 마지막 중요한 고비에 가서 생각 삐끗 잘못하면제호상미(醐上味) 번성독약(翻成毒藥)이요.’

우유로 맨든 음식 가운데에 가장 맛있고 좋은 것이 제호()라는 약인데, 제호상미가 잘못 관리를 가지고 변해 버리면은 사람이 먹고 중독을 일으켜 가지고 죽게 된다 그말이여. 그래서 제호의 상미(上味) 독약(毒藥)으로 변한 거와 마찬가지여.

 

이렇게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 만나서 실천하기 어려운 최상승법을 만나 가지고 실천을 하되, 생각 삐끗하면 사마외도(邪魔外道) 변해 버린 것이다 그말이여.

 

공부를 가지고 화두가 순일(純一)해져 가지고 그럴 때에 생각 더디 의심하면,

거기서누가 나를 깨닫게 주었으면, 이럴 누가 나를 깨닫게 주었으면, 어서 깨달랐으면, 또는 이러한 상태로 영원히 갔으면이러한 생각으로..... (녹음이 끊김)(2954~4633)

 

 

 

 

(2)------------------

 

(게송 처음 구절 녹음이 끊김)

청군앙면간허공(請君仰面看虛空확락무변불견종(廓落無邊不見)

나무~아미타불~

약해전신사자력(若解轉身些子力)하면  두두물물총가옹(頭頭物物總家翁)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면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몸을 돌이켜서 아래를 쳐다보면 거기에는 산도 있고 물도 있고, 나무도 있고 바위도 있고, 사람도 있고 짐승도 있고 벌레도 있고, 집도 있고 삼라만상(森羅萬象) 없는 것이 없이 벌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달은 하나지만, 땅에 있는 모든 강과 호수와 모든 물에는 달이 수억만 개로 있습니다. 그릇에 있는 달은, 수억만 개의 달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거든. 하늘에 있는 달은 고대로 있으면서 지상에 있는 모든 강물과 호수와 모든 물에 달이 떠있다 그말이여.

 

달을 보고서 우리는 하늘에 있는 달을 수가 있듯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있는 온갖 경계를 통해서 우리는 볼래야 없고, 알래야 없고, 잡을래야 잡을 없는, 그놈을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 귀로 듣는 , 코로 냄새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뜻으로 있는, 온갖 희로애락과 행주좌와와 생로병사를심소(心所) 통한 백법(百法), 그놈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윤회(輪廻) 하고 있지만, 그놈을 여의고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학자는 여의고 찾지를 말아라. 여의고 찾을라고 데에서 길은 점점 멀어져 버리고, 짜증이 나고 시간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여의고 찾지 않고 바로 그놈에 즉해서 화두를 돌이킨다면 오늘 해제를 했다고 해서 조금도 마음 해이해지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해제를 하면 인연 따라서 걸망을 지고 어느 산천, 어느 계곡, 어느 모퉁이를 가더라도 걸음 걸음 옮길 때마다 염염불망(念念不忘)으로 화두를 거각해 나간다면, () 속이 바로 입선(入禪) 시간이 것이고, 걸음걸음이 바로 선방(禪房) 것입니다.

 

앞으로 돌아오는 석달 동안, 지난 석달 동안보다도 훨씬 알뜰하게 단속(團束) 하고 화두를 거각해 나간다면, 지난 여름 동안 무더웠던 더위 속에서 닦고 닦은 힘이, 돌아오는 석달 동안에 정말 발휘가 되야서 반드시 지혜의 눈을 뜨게 납자(衲子) 생겨날 것입니다.(531

 

여름은 다른 해에 비교해서 후반에 상당히 더웠던 걸로 생각이 됩니다. 더위를 무릅쓰고 그렇게 모다 알뜰히 정진들을 하고, 그렇게 해서 이렇게 한자리에 다시 모다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무엇인가 깊은 뜻이 있음직한 그러한 얼굴로 자리에 다시 만나게 되니 기쁜 마음을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여기저기서 우절기에 결제(結制) 하고 안거(安居) 하고 해제(解制) 하면 한자리에 모여서 자자(自恣)회를 거행을 하고, 동안에 공부한 과정에 있어서 여러 가지를 반성을 허고, 서로 충고를 하고, 마음에 깨달은 바를 점검을 하고 이러한 의식이 엄숙히 거행되었던 것입니다.

삼천년 전에 부처님은 열반하셨지만은 거룩한 법은 오늘도 여전히 이렇게 전해 내려와서, 이렇게 한자리에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 만나서 최상승법을 설하고 듣고 이런 법요식을 거행하게 것은 이러한 다행스럽고 경행(慶幸)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법이 오늘도 면면히 흘러 내려오는 증거며, 부처님의 법신(法身) 오늘도 살아계신 우리의 마음과 법계에 가득차 계신 것을 우리는 확인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한 마음으로항시 살아계신 부처님과 조사를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코앞에 항시 모시고 살고 있다 그러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바로 정법시대(正法時代) 것입니다.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들도 가정에서 공부를 하시되 그러한 마음으로 공부를 가시고 생활을 나가신다면, () 있어서는 승속(僧俗) 없는 법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은 세속에 오욕락(五欲樂) 속에 몸을 담아 있으면서 바로 오욕락을 초월해서 공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요구하는 수행법이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출가한 스님네 보단 () 노력을 더해야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바로 오욕락 속에서 자칫하면 죄를 의식적으로 짓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짓게 되기 때문에 배의 신심을 돈독히 갖지 아니하면 후회막급(後悔莫及) 일을 당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동안에 공부하는 스님네를 위해서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공양(供養) 올리고 신심으로 받들어 모시고, 그러면서 여러분은 가정 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해야 하시니 어깨에 , 내지 짐의 짐을 지고 정진을 하시느라고, 수고를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1 1초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상살귀(無常殺鬼) 생각 생각에 우리의 뒤를 쫓아오고 있기 때문에, 생각 늦추면 바로 무상살귀에 따라잡음을 당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을 것이 없습니다.

최상승법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불쌍할 것입니다마는, 우리는 다생(多生) 숙연(宿緣) 있어서 최상승법을 만났으므로 다못 생각 생각을 그렇게 알뜰히 단속만 가면 지옥에 떨어져도 겁날 것이 없고, 불구덩이에 빠져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불이 훨훨 타는 가운데에서도이뭣고?’ 것이며, 지옥에 끌려가서도이뭣고?’ 든다면 마침내 최상승법은 모든 마귀(魔鬼) 이겨내고야만말 불가사의(不可思議) 힘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지기량(汝之伎倆) 유진(有盡)이어니와  아지불채시무궁(我之不采是無窮)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여지기량(汝之伎倆) 유진(有盡)이어니와, 너의 기량(伎倆)—너의 온갖 수단과 재주는 끝이 있거니와,

아지불채(我之不采) 시무궁(是無窮)이다, 내가 취하지 아니한 것은내가 너한테 끌려들어 가지 . 너한테 말려들어 가지 아니한 것은 시무궁(是無窮)이다, 영원이다 그말이여.

 

멋대로 한번 나를 유혹할라면 보고, 나를 갖다가 막을라면 막아 보고, 멋대로 해봐라 그말이여.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군(魔軍)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팔만사천 모든 경계(境界)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나는 상관이 없다 그말이여. 니가 그럴수록에 나는 오히려 화두를 거각할 따름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해제 이후에 정진을 가다듬고 정진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수원 백씨 복순 영가(靈駕) 자리에 초청된 법계(法界) 모든 유주무주(有主無主) 고혼(孤魂)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 오늘 법회의 법문을 듣고 이고득락(離苦得樂)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4634~6132)()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여법(如法 같을·같게 ·따를·좇을 /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마즈막 ; ‘마지막(시간상이나 순서상의 )’ 사투리.

*보살(菩薩) : 보리살타(菩提薩) 준말。각유정(覺有情) • 개사(開士) • 대사(大士)등으로 번역。①성불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②대승교에 귀의, 사홍서원을 발하여 육바라밀을 수행하며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자리이타(自利利他) 행을 닦으며 51위의 수행계단을 지나 드디어 불과(佛果) 증득하는 .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 . ②가르침의 . 불법의 공덕. 보살의 위신력(威神力)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

*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

*선양( 베풀널리 알릴 /오를나타낼 ) ; 명성이나 권위 따위를 널리 떨치게 .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

*제도(濟度 건널 /건널 ) ; 중생을 미혹의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 생사없는 피안(彼岸,깨달음의 언덕) 이르게 하는[] . () 구제(救濟). () 도탈(度脫).

[참고] 구제(救濟 건질 ,건널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 도탈(度脫 건널 ,벗을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일맥상통(一脈相通)사고방식이나 성질 등이  대상 간에 서로 통하거나 비슷해짐.

*() ; ①모습, 형태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계행(戒行) ; ①계() 지켜 수행하는 . ②계율과 도덕.

*율사(律師) ; () () 능통한 스님. 일반적으로 계행이 청정한 수행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외도(外道) ;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의 가르침. 또는 신봉자.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법신불(dharma-kaya 法身佛)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진리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

*달마혈맥론(達磨血脈論) ; 중국 선종의 초조인 달마대사의 법문을 기록한 선어록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공안)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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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청군앙면간허공~’ ; [금강경오가해] 離色離相分 야부 게송 참고. *(넓을 ) *확락(廓落) ; 기개(氣槪) 크고 넓음. *(자취 ) *(적을 )

*가옹(家翁) ; 집안의 주인(主人). 주인공. 진리.

*심소(心所) ; 심작용. 마음의 움직임. 정신작용.

*백법(百法) ; 모든 현상을 가지 요소로 분류한 .

*단속(團束) ; 주의를 기울여 다그쳐 보살핌.

*납자(衲子 옷을 꿰맴 /사람 ) ; 남이 버린 옷이나 조각들을 기워서 만든 옷을 입은 수행승. 흔히 참선을 하는 스님(禪僧) 자신을 가리킬 사용.

*안거(安居 편안할 /있을 ) ; 인도의 불교도들은 4 15(또는 5 15)부터 3개월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 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 15일부터 7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 15일부터 다음해 1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서 외출을 금지하고 안주하여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수행에 전념한다. 처음을 결제(結制) 하고 끝을 해제(解制) 한다.

*결제(結制 맺을 /만들법도 ) ; 안거(安居)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 15일에 들어가며, 동안거는 음력 10 15일에 들어간다.

*해제(解制 /만들법도 ) ; (안거)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

*자자(自恣 스스로 /마음대로 ) ; 여름 안거(夏安居) 끝나는 날에 수행자들이 한곳에 모여 자신의 잘못을 고백(告白)하고 참회(懺悔)하는 의식.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 있는 가지 제자.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참고] 우바새-upasaka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남자.(같은 =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수행자를 모시고, 신세를 지므로 이렇게 말한다. 우바이-upasika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여자. (같은 =靑信女,近事女,近善女,近宿女)

*경행(慶幸 경사 /다행할 ) ; 경사스럽고 다행한 .

*정법시대(正法時代) ; 불법이 바르게 행해져 가르침과 수행자와 깨달음을 이루는 자가 있는 시기.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소리,향기,,감촉(色聲香味觸)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후회막급(後悔莫及) ; 이미 잘못된 것을 뒤늦게 뉘우쳐도 다시 어찌할 수가 없음.

*공양(供養) ; ①불()•()•() 삼보(三寶) 음식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

*무상살귀(無常殺鬼) ; ‘무상(無常)’이라고 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귀신(鬼神)이라는 . ‘인간존재가 무상하다 것의 무서움을 비유한 .

*숙연(宿緣) ; 전생(前生) 인연.

*이뭣고(是甚 시심마,시삼마) : ‘ 무엇고? 화두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무엇고?(이뭣고?)하고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찾는 것이다.

*불가사의(不可思議) ; 말로 나타낼 수도 없고 마음으로 헤아릴 수도 없음. 생각이 미치지 못함. 생각할 수도 없는 놀라운 .

*여지기량(汝之伎倆)~’ ; 고봉 스님 [선요(禪要)] 示衆(其二) 천태(天台) 스님의 글로 인용됨.

*팔만사천(八萬四千) : 법수(法數)에는 말이 많다. 그것은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마군(魔軍) ; 악마의 군세(軍勢). ()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 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경계(境界) ;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 ③상태 ④범위,영역.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 ()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법계(法界) ; 전세계. 전우주. 모든 장소.

*유주무주(有主無主) ; ①주인(영가를 인도해 줄만한 인연있는 사람) 있거나 없는. ②제주(祭主) 있거나 없는.

*고혼(孤魂)문상(問喪) 사람이 없는 외로운 .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사람의 선망부모가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 수천만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부모가 바로 사람의 부모고, 사람의 부모가 부모여서,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 하는 것입니다.

 

*이고득락(離苦得樂) ; 괴로움을 벗어나서 즐거움을 누림.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