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精進) 수행2014. 11. 1. 17:01

§(251) (게송)사중구의원~ / 지금 이 찰나!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 인생은 나그네, 세상만사 뜬구름 / 중생이 본래 부처다 / 최상승법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다.

조실스님 법문 가운데도 들으셨겠지만은 공부가 잘 안 된다고 짜증하거나 번민을 해서는 아니되고, 또 잘된다고 해서 기뻐하는 마음도 내지 말어라.
『일어나는 망상과 번뇌를 버릴려고 그러고, 쫓을려고 그러고, 억누를려고 하지를 말고, 그냥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화두만을 턱 추켜 들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지혜롭게 번뇌와 망상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오늘 법문을 들었으니까 오늘은 그럭저럭하고 내일 아침부터 하리라’ 그런 생각을 가지셨다면 그분은 벌써 틀려 버린 것입니다. 지금 이 법당에 앉어 있는 이 찰나! 이 찰나에 생각을 돌이켜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 1찰나, 1찰나를 단속할 때에 자기 생사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이지, 왜 그러냐 하면, 생사는 다른 데에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생각’에서 생사(生死)가 생겨난 것입니다. ‘탐진치(貪瞋癡)’하지마는, 딱! 꼬집어서 말하면 생각이거든, ‘한 생각’이거든.  ‘오욕락(五欲樂)’해도 더 다그쳐 생각해 보면, 그것도 ‘한 생각’이여.  ‘천당’ 그것도 ‘한 생각’에서, 지옥도 ‘한 생각’에서.


‘이뭣고~?’하면, 그 속에 화엄경이 다 들었고, 팔만대장경이 다 들었고, 삼세제불을 친견하는 도리도 그 속에 다 들어있고, 육도윤회를 갖다가 끊어 버리는 도리도 바로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가사불사(袈裟佛事)를 하는 목적은 꼭 가사가 없어서 가사를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가사불사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최상승법을 설해서 믿고 실천하게 해 드리는 데에 궁극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가난해도 불행하지 아니하고, 부자가 된다고 해서 그렇게 꺼떡댈 것도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여유있고 느긋하고 멋지게—하나의 그 인생살이를 연극처럼 생각하고,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생각하고 살 수 있는 길이 이 참선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251)—84년 12월 첫째일요법회(84.12.02) (용251)

 

(1) 약 20분.

(2) 약 18분.


(1)------------------

사중구의원(死中求醫員)하고  영해억모심(嬰孩憶母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주공친절처(做工親切處)에  홍일상동령(紅日上東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사중구의원(死中求醫員)하고  영해억모심(嬰孩憶母心)이다.
죽을병든 사람이 의원(醫員)을 구하듯 그렇게 간절하게 하고, 어린 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듯 하라. 이 참선(參禪)은 그만큼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做工親切處)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탐진치 삼독에 빠져 가지고, 오직 익히느니 그것만을 익혀 왔는데—탐진치 삼독(三毒)과 오욕락(五欲樂)만 익혀 왔는데,
금생에 그 속에서 그러한 집착과 애착으로부터 벗어나서 ‘참나’를 찾을려고 하니, 탐진치 삼독과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이 오욕락은 무량겁을 익혀 왔기 때문에 안 할려고 해도 그것은 저절로 되어져 버리고,


내가 나를 찾는 이 참선은 할려고 해도, 화두를 아무리 들어도, 들으면서도 금방 딴 생각이 동시에 침범을 해 들어오고 들을 때 뿐이지 금방 없어져 버리고, 한두 번 해본 것도 금방 습관이 드는데 하물며 무량겁을 해온 그 습성이 일조일석(一朝一夕)에 그것이 없어질 수가 없습니다.

글씨를 쓰면, 벼루를 오른쪽에다 놓고 글씨를 쓰다가 한 서너 번 먹을 찍어다 쓰고서 그쪽이 불편하니까 그 벼루를 왼쪽에다 갖다 놓고는 인자 쓰기 시작하면은 글씨 쓰다가 먹을 찍으러 가는데, 자기 손으로 오른쪽에 놨던 벼루를 왼쪽에다 놨는데 금방 먹을 찍으러 가기를 오른쪽으로 가게 됩니다.
아까 몇 번 오른쪽에서 찍어다 썼기 때문에 벌써 그것이 습관이 되어 가지고, 분명 자기 손으로 왼쪽에다 옮겨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 중에 오른쪽으로 먹을 찍으러 간다 그말이어. 밥상에서 밥을 먹을 때에도 그렇고.

평상시에 자기집을 다니던 사람은 이사를 해서 동쪽에 살다가 서쪽으로 이사를 갔는데도 무의식 중에 간다는 것이 이사 간 줄을 깜박 잊어 버리고 동쪽으로 얼마 동안 가다가 ‘아! 내가 서쪽으로 이사를 갔는데, 내가 어먼 데로 가는구나’ 그런 예를 얼마든지 경험할 수가 있고.

술을 잔뜩 먹어서 완전히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었는데도 그 취중에도 자기집을 찾아 오는 것입니다. 자기집인 줄 알고 남의 집의 침실에 들어가서 실수를 하는 예도 있다고 그럽니다마는, 무의식 중에도 평소에 익혀 놓으면 그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만큼 똑같은 일을 거듭해서, ‘거듭한다’고 하는 것은 나중에 그것이 습관이 체질화가 되고, 체질화가 되면은 무의식 중에 되게 되는 것입니다.
나쁜 업도 익히면 그것이 몸에 젖어서 체질화가 되고, 좋은 것도 자꾸 되풀이 해서 하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체질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話頭)도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동 잠이 안 오고 초롱초롱 하다가도 화두만 들고 할려고 하면 혼침(昏沈)이 오고, 아무 생각도 없이 괜찮다가도 화두만 들고 할라면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퍼 일어나고 그러거든.

참선을 해본 분이면 누구나 다 경험한 바시겠지마는 이 번뇌와 망상 그리고 혼침, 이것이 참선하는데 있어서 제일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인데,
이 잠이 오는 것과 망상이 일어나는 것만 없으면은, 그냥 화두를 한번 떠억 들면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다면은 공부하기가 하나도 괴로울 것이 없을 것 같은데,

그것이 처음에는 잘된 듯 하다가 얼마 지나면은 뚝 변해 가지고 영 안 되고, 또 안 되지마는 계속하다 보면 또 잘되고, 잘되었다 안 되었다, 잘되었다 안 되었다 그러면서 수없는 고비를 넘다 보면,

나중에는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지고, 망상을 안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끊어지면서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고 순수해 가지고 앉어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거나, 옆에서 떠들고 시끄럽게 하거나 말거나, 고대로 화두가 성성하게 들려진 때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몸이 괴로운 줄도 모르고, 밤새 정진을 해도 괴롭고 피곤한 줄을 모르고 그렇다 그말이어.

그래도 ‘아! 인제 되었다. 참 좋다! 이러다가 빨리 툭 터졌으면’ 그런 생각을 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요. 오히려 공부를 갖다가 지지리 아홉 질 탑을 쌓는데, 여덟 질까지 쌓아 놓고 마지막 한 자 남겨 놓고 스스로 자기가 허물어뜨리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정진이 잘되어도 ‘잘된다’는 생각, ‘좋다’는 생각, ‘빨리 깨달았으면’하는 그러한 생각을 일으켜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에 바다와 같이 깊고 태산과 같이 무거운 마음으로 한결같이 정진을 단속을 해 나가야 하는 게고.

또 공부가 영 잘 안 되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혼침이 퍼 일어나고, 몸이 뒤틀리고, 시간이 5분이 1시간보다 더 지루하게 지내간다 하드라도 짜증내는 마음을 내지 말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도 들으셨겠지마는 잘 안 된다고 짜증하거나 번민을 해서는 아니되고, 또 잘된다고 해서 기뻐하는 마음도 내지 말어라.


그러면 망상이 퍼 일어날 때는 어떻게 하느냐?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 망상을 물리치거나 억지로 누를라고 허거나 쫒아낼려고 하지 말고, 그냥 일어나는 대로 고대로 놔둔 채 나는 ‘이뭣고?~’ 이렇게 자기의 화두만을 탁!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놈을 쫓아 버릴려고 그러고, 억지로 누를려고 하면은 화두가 잘 들리기커녕은 ‘누를라고 하는 그 망상’이 하나 더 일어나게 되는 게고,
일어나는 파도를 없애기 위해서 그 파도를 없앨려고 손으로 누르거나 손으로 갖다가 없앨려고 하면은 새로운 파도가 일어나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것이 공부해 나가는데 아주 간단하고도 묘한 방법인 것입니다.
『일어나는 망상과 번뇌를 버릴려고 그러고, 쫓을려고 그러고, 억누를려고 하지를 말고, 그냥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화두만을 턱! 추켜 들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지혜롭게 번뇌와 망상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하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셔야 하고.

혼침(昏沈)이 올 때는 어떻게 하냐?
눈을 힘을 주어서 눈을 부릅떠도 눈텡이가, 눈 위에 껍데기가 천 근이나 되게 무겁게 덮어 누르고, 아무리 손으로 허벅지를 꼬집어 뜯어도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집어 뜯어도 소용이 없다 그말이어.

옛날 도인(道人)들은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자명초원(慈明楚圓) 선사 같은 이, 경허(鏡虛) 선사 같은 그런 도인들도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밤잠을 안 자면서 정진을 하는 말씀도 전해 내려오고 있읍니다마는,

그러한 송곳으로 찌르면서 졸음을 쫓을 만한 그러한 각오가 있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부터서 낱낱이 다 송곳부터 사러 가시지 말고, 졸음이 올 때에는 살며시 일어나서 밖에 가서 포행(布行)을 하시고 세수도 하시고 그러면서, 포행을 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왔다갔다 포행을 일직선으로 정해 놓고 왔다갔다 한 5분 하면, 졸음이 나가면 또 자리에 와서 또 앉고 이렇게 하면서 혼침을 이기도록. 그래도 안 들으면 송곳으로 한번 찔러서라도 한번 해봄즉 한 일이지요. 그러다 잘못하면 또 피가 많이 나면 안 되니까 조심을 하시고.


이 세상에 사람이 태어나서 모양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또 직업도 다르고 다 다릅니다. 각기 다 자기의 소질 따라서 능력 따라서 서로 남녀 간에 결혼을 하고 직업을 가지고 살게 되는데, 다 이것이 일장춘몽(一場春夢)입니다.

과거에 지은 업(業)으로 서로 만나서 부부간이 되고, 부모 자식 간이 되고, 며느리가 되고, 시어머니가 되고, 친구 간이 되고, 형제간이 되어서 이렇게 만나서 사는데, 이건 참! 어찌해 볼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업으로 만나졌기 때문에 인연(因緣)이 다하면 또 헤어지게 됩니다. 생이별(生離別)도 하고 사이별(死離別)도 해서 헤어지는데, 지내 놓고 보면 이것은 분명히 꿈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마치 꿈꾸고 있는 동안에는 호랑이를 보면 진짜 무섭고, 뱀이 달라들면 진짜 무섭고, 어디서 좋은 보물을 얻으면 진짜 기쁘고, 깨어 놓고 보면 허망하기가 그지할 수가 없고, 하나도 무서울 것도 없고, 좋아할 것도 없지만, 실지 그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조금도 틀림이 없는 현실입니다.

그와 같이 인생살이도 깨닫기 전에는 분명히 현실입니다. 또 버릴 수도 없습니다. 피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충실히 최선을 또 다해야 합니다.
‘꿈이니까, 에이! 그까짓 것 소용없다. 가정도 버려 버리고, 재산도 버려 버리고, 직장도 버려 버리고, 사업도 다 팽개쳐라’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특수한 사람에 한해서는, 목숨을 바치고 오직 이 한 일만을 할 각오가 선 사람은 그걸 버리고 출가하실 수가 있지만,
일반 청신사 청신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또는 관리로서 농사짓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충실히 하면서 그 가운데에 자기 마음 닦는 공부를 해라’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부애나면 ‘절로 가서 중이나 되어 버릴까’ 몇 번을 생각하다가, 또 부애가 풀어지면 언제 절 생각은 잊어 버리고 ‘여보, 어쩌고...’

 

도(道)는 꼭 머리를 깎고 출가 해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속가에 있어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속가에 있으면 있는 대로 할 길이 있고, 출가한 스님은 출가한 스님대로의 수행해 나가는 법이 있어서 각자 자기 있는 자리, 제일 이 도 닦아 나가는데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고 하는 이 찰나(刹那)인 것입니다.

내년에 어떻게 하고, 앞으로 3년 더 있다 어떻게 하고, 내일 어떻게 하고, 한 시간 뒤에 어떻게 하고, 오늘 저녁부터 어떻게 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지금! 지금이라고 하는 이 찰나가 이 참선에 있어서는 제일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 법문을 들었으니까 오늘은 그럭저럭하고 내일 아침부터 하리라’ 그런 생각을 가지셨다면 그분은 벌써 틀려 버린 것입니다. 지금 이 법당에 앉어 있는 이 찰나! 이 찰나에 생각을 돌이켜야 합니다. ‘이뭣고?~’

 

한 시간도 멀고, 일 분도 멀어요. '지금' 이 찰나, 지금이라고 하는 이 찰나는 우리가 시간으로 딱 찍을 수가 없습니다. 탁! 찍어도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인 것입니다.
번갯불을 갖다가 우리가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잡을려고 해도 번갯불은 지나가 버리고 없는 것처럼, ‘지금’이라고 하는 이 시간도 우리는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잡을 수 없는 그 찰나에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가면,
일어서면서 하고, 걸어가면서 하고, 일하면서 하고, 밥 먹으면서 하고, 차 타면서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하고, 세수하면서 하고, 발 씻으면서 하고, 옷 갈아 입으면서 하고 이런 것이지, 언제 뒤로 미루고... 그 사람은 안되는 거여.

이 한 생각 한 생각, 그 찰나 찰나, 좋은 생각이 일어나거나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속이 상하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그때 그때, 그 찰나 찰나를 단속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로소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휴! 너무너무 바빠서 못한다.’  ‘아들 대학 입시 준비 때문에 못한다’  ‘대학만 들어가 놓으면 인제 조금씩 해볼라고 그럽니다’  ‘딸 시집보내 놓고 할랍니다’ 그것 다 틀어져 버리고,  ‘김장이나 해 놓고 할랍니다’ 그것도 틀어져 버리는 거여. 다 틀어져 버리는 거여.

이건 자기가 자기 1찰나, 1찰나를 단속할 때에 자기 생사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이지, 왜 그러냐 하면, 생사(生死)는 다른 데에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생각’에서 생사가 생겨난 것입니다.


‘탐진치(貪瞋癡)’하지마는, 딱! 꼬집어서 말하면 생각이거든, ‘한 생각’이거든. ‘오욕락(五欲樂)’해도 더 다그쳐 생각해 보면, 그것도 ‘한 생각’이여. ‘천당’ 그것도 ‘한 생각’에서, 지옥도 ‘한 생각’에서,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가만 놔두면 그놈이 차츰차츰 커 가지고 행동으로 나타나 가지고, 살생도 하고, 도둑질도 하고, 사음도 하고, 거짓말도 하게 되는데,
‘한 생각’ 딱! 일어나서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에 그때 탁! 돌이켜서 ‘이뭣고?~’해 버리면, 살생도 안 하고 끝나고, 도둑질도 안 하고 끝나고, 사음도 안 하고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 천당을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미연(未然)에 부셔 버리는 것입니다.(40분43초~60분29초)

 

 

 



(2)------------------

그래서 여러분이 법성게(法性偈)도 보시면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요,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다’
이 법성게는 그 80권 화엄경을 갖다가 간단한 몇 줄의 글로써 의상대사께서 지어 놓으신 것인데, 그 법성게의 뜻만 알면 화엄경의 진리가 그 속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무엇이냐 하면은 ‘한 생각’이여, 한 생각.

이 한 생각, 이 찰나 속에 십세(十世) 고금(古今)과 시방(十方) 모든 세계와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속에 다 들어있고, 육도윤회(六道輪廻)도 그 속에 들어있고, 천당·지옥도 그 속에 다 들어있는 것이다 그말이어.

그러니 ‘이뭣고?’ 한마디, ‘이뭣고~?’하면, 그 속에 화엄경이 다 들었고, 팔만대장경이 다 들었고, 삼세제불을 친견하는 도리도 그 속에 다 들어있고, 육도윤회를 갖다가 끊어 버리는 도리도 바로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갖다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시고.

이 ‘이뭣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이 화두법 이것은 용궁(龍宮)에 있는 대장경 속에도 안 들어있다.

이 사바세계에 있는 경전은 많이 불타서 없어지기도 하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이 일부만이 전해 내려오지, 전부가 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간에 설사 결집(結集)을 해놓았다 하더라도, 외도들에 의해서 많이 소각을 당해 버리고, 전해 내려오는 것은 극 일부에 지내지 못하는데, 용궁에는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법문이 다 거기에는 수장(收藏)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용궁에 있는 장경(藏經) 속에도 ‘정전백수자’ ‘판치생모(版齒生毛)’ 이런 화두법, 최상승법인 화두법은 없다 이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최상승법, 이 참선법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여. 교(敎) 밖에 특별히 전하신,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부처님께서 가섭존자(迦葉尊者)에게 전하신 특별한 최고의 법이여.

그래서 ’이뭣고?‘ 이 한마디 속에는 염불 공덕도 그 속에 다 들어있고, 주력하는 공덕도 그 속에 다 들어있고, 기도하는 공덕도 그 속에 다 들어있고,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서 독송하는 공덕도 그 속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가사불사 회향에 동참하시고 또 일요법회에 참석하신 공덕으로 이러헌 최상승법을 이렇게 듣게 된 것입니다.
가사불사(袈裟佛事)를 하는 목적은 꼭 가사가 없어서 가사를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가사불사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최상승법을 설해서 믿고 실천하게 해 드리는 데에 궁극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가사불사 동참했고, 그 얻기 어려운 쪼가리도 가사불사할 때 틈틈이 훔쳐 담고 또 그런데다 오늘 또 이렇게 얻었으니까, ‘나는 이거 딸 줄 것도 있고, 아들 줄 것도 있고, 며느리 줄 것도 있으니까, 인제 아무 걱정이 없다’고 아주 흐믓해 하시겠지만,
정말 ‘이뭣고?’ 한마디 한 것에다 댄다면, 가사불사 해 가지고 쪼가리 가지고 있는 것에다 대겠습니까?

물론 그 쪼가리 가진 공덕도 대단한 것이어서 말로써 다 할 수가 없읍니다마는, ‘이뭣고?’ 한마디를 하시면 천(千) 쪼가리 만(萬) 쪼가리를 몸에다가 열 거듭 백 거듭을 감은 것보다도 더 훌륭하고 더 안전하고 더 편안한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일신진역려(一身眞逆旅)요  만사개부운(萬事皆浮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금조상별후(今朝相別後)에  사군불견군(思君不見君)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신진역려(一身眞逆旅)요, 이 한 몸뚱이, 인간, 이 세상이라는 것은 정말 이 한 나그네 손님이다 그말이어. 잠시 이 사바세계에 나그네로 왔어.
만사개부운(萬事皆浮雲)이여. 만사(萬事)는 다 하늘에 떠있는 흰구름 한 덩어리와 같은 것이다 그말이어.

나그네는 오늘은 이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또 그 이튿날 떠나면 또 어느 다른 지방에서 한잠을 자고 해서, 평생 동안을 나그네로 사는 거와 같애.

정말 여자의 몸을 받은 사람은 성년(成年)할 때까지는 그 어머니, 아버지 품안에서 그렇게 자라서 공부하고 그래 가지고 시집가면은 딴 타성바지 집에 들어가서 아내 노릇을 하고 며느리 노릇을 하고 그러는데. 그래 가지고 자기도 또 아들딸을 낳게 되면, 그 아들딸들도 또 장성을 해서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가고 하는데.

일평생 동안 그러고 사는 거처도 충청도 살다가 서울로 이사 오기도 하고, 서울 살다가 저 부산으로 이사 가기도 하고, 우리나라 살다가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도 하고 그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은 나그네라고 하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또 금생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김 아무개, 박 아무개로 태어난 것 자체가 또 그것도 나그네인 것입니다.
전생에 사바세계에 살다가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한 사람도 있겠고, 전생에는 천당에서 살다가 금생에 인도환생을 해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전생에 개나 돼지나 소로 있다가 금생에 그 탈을 벗어 버리고 사람이 되는 수도 있고, 그러니 이것이 분명히 나그네인 것입니다.

그러면 금생에 왔으면 천년만년(千年萬年) 사느냐 하면, 많이 살아 봤자 백 년이요, 그렇지 않으면 팔십·칠십·육십·오십·사십·삼십, 10살에도 죽고 5살에도 죽고, 낳다가도 죽고, 배안에서 생기다 만 것이 죽기도 하고 그러는데, 이것도 나그네가 분명합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비 맞기도 하고 눈을 맞기도 하고, 차 타기도 하고 걸어가기도 하고, 차가 뒤집어져서 다치기도 하고 배 타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참! '인생살이라는 것이 나그네'라고 하는 말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세상 만사는 뜬구름과 같다’한 말도 참 적절합니다.
가난하던 사람이 부자가 되고, 부자가 가난해지기도 하고, 엊그제 장관을 하다가 그만두고 평민이 되기도 하고, 천하를 호령하던 그러한 권리를 가지던 사람이 참 하룻밤 새 죽기도 하고 또 감옥에 가기도 하고 동서고금의 역사가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나그네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면 하룻밤 여관에 방이 좀 춥기도 하고 더웁기도 한데, 그렇다고 해서 골낼 것도 없고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집에서는 편안하게 살다가 여행을 떠나면 고생이 되는데, 그 고생하는 재미로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바세계의 인생살이를 나그네라고 생각한다면, 고생도 능히 재미로 참을 수가 있고 또 좀 잘 먹고 편안히 잔다고 해서 자기가 금방 뭐 크게 팔자가 핀 것도 아니거든.
사람으로 태어나서 부자로 살고 높은 벼슬을 하고 뭣 좀 권리 좀 있다고 해서 그것을 너무 으시대고 꺼떡거리고 남을 업신여기고 그걸 것도 없는 것입니다.


잘살면 잘사는 대로, 못살면 못사는 대로 좀더 느긋한 마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재미스럽게 멋지게 인생을 살아가는 길이 바로 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가난해도 불행하지 아니하고, 부자가 된다고 해서 그렇게 꺼떡댈 것도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여유있고 느긋하고 멋지게—하나의 그 인생살이를 연극처럼 생각하고,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생각하고 살 수 있는 길이 이 참선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산다면 불행이라고 하는 것도 있을 수가 없고, 온 세계도 싸움이라고 하는 것이 없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이 집안에도 그런 마음으로 온 식구가 산다면, 집안은 온통 화기(和氣)가 애애(靄靄)하고 모든 일이 참 재미있고 흐뭇하고 여유있게 살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최초의 근본은 ‘한 생각 단속하는 일’이 자기의 일생을 행복하게 하고, 자기의 온 가정을 행복하게 하고, 온 사회·국가를 행복하게 하고, 인류를 행복하게 하고, 그래 가지고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이 서로 만나서 살 수 있는 길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불법(佛法)은 그래서 위대하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 불법을 위해서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가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시고, 그리고 거기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세세생생에 수없는 목숨을 바치면서 중생을 이 진리의 세계로 이끌으시는 데에 여념이 없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왕궁의 부귀를 헌신짝 같이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셔서 이 도를 이루신 다음에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앉은 자리 더울 겨를이 없이 일평생 동안을 인도 오천축(五天竺)을 갖다가 유행(游行)을 하시면서 중생 교화를 하신 것도 바로 이 도리를 위해서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濟度)하신다’ 그러는데, 뭐 물에 빠진 걸 갖다가 건져내는 것처럼 그런 것이 아니라, ‘중생도 깨달을 수 있다’, ‘중생이 본래 부처다.’

‘부처니 중생이니, 선이니 악이니’하는, 중생은 그러헌 생각의 쇠사슬에 얽혀 가지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래 중생과 부처가 다른 것이 아니고, 깨달음과 미(迷)한 것이 둘이 아니라고 하는 그 도리를 깨우쳐 준다면, 거기에서 해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그러헌 소견을 씻어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거 씻어준 것이 바로 그것이 중생 교화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은 언제나 우리와 가까이 있다’고 하는 것.
책도 펴기도 전에 이미 우리 앞에 부처님의 법이 설해져 있는 것입니다. 입을 벌리기 전에 이미 염불이 그 속에 되어져 있는 것이고, 경을 읽고 있는 것이며, 설법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을 감으나 뜨나, 언제나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 법문을 듣고, 또 자기 자신도 불법을 설하는 도리가 바로 이 최상승법이라.
이상으로써 일요 법회와 또 가사불사 회향 법어를 마칩니다.


산중하사기(山中何事奇)인고  청산백운다(靑山白雲多)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취적기우자(吹笛騎牛子)여  동서임자재(東西任自在)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산중(山中)에 하사기(何事奇)인고  청산(靑山)에 백운다(白雲多)다.
청산에 무슨 일이 기특한고? 무슨 일이 볼 만한 것이 있느냐? 특별히 볼 만한 것이 무엇이냐?

청산(靑山)에 백운다(白雲多)다. 푸른 산에 흰구름이 많느니라.

취적기우자(吹笛騎牛子)여  동서임자재(東西任自在)다.
젓대를 불고 소를 타고 가는 자여. 동서임자재(東西任自在)여. 동쪽으로 가고 싶으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고 싶으면 서쪽으로 가고, 동서에 자기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왔다갔다 하더라.(40분43초~77분46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게송) ‘사중구의원~’ ; [청허당집(清虛堂集)] (서산휴정 著,朴敬勛 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p127 ‘벽천선화자(碧泉禪和子)에게’ 게송 참고.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색사(色事)·음식(飮食)·명예(名譽)·수면(睡眠).
*일조일석(一朝一夕) ; 하루아침이나 하루 저녁이라는 뜻으로, 짧은 시일을 이르는 말.
*어먼 : ‘애먼’의 사투리. 애먼:(일의 결과가 다르게 돌아가)억울하게 느껴지는, 엉뚱하게 느껴지는.
*인사불성(人事不省) ; 제 몸에 벌어지는 일을 모를 정도로 정신이 흐리멍덩한 상태.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내동 ; '일껏(모처럼 애써서)'의 사투리.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마음이 시달려서(煩) 괴로워함(惱). 나쁜 마음의 작용.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는 정신작용.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 ; '길(길이의 단위. 한 길은 여덟 자 또는 열 자로 약 2.4미터 또는 3미터에 해당 또는 사람의 키 정도의 길이)'의 사투리.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자명 초원(慈明楚圓) : (987 – 1040) 속성은 이(李)씨。광서성(廣西省) 계림부(桂林府) 전주(全州)에서 났다.
22세에 출가하여 멀리 분양 선소(汾陽善昭)선사의 회상에 갔었다. 분양은 욕설과 세속의 더러운 말만 할 뿐이므로 하루는 정성을 다하여 간 하였더니, 크게 성내어 『네가 나를 비방하느냐?』하고 내쫓았다。초원이 무엇이라고 변명하려는데, 분양이 손으로 그 입을 틀어막았다。그 바람에 크게 깨쳤다.
뒤에 석상산 숭승사(石霜山崇勝寺)와 담주 흥화사(潭州興化寺) 같은 여러 곳에서 교화하니, 법을 이은 제자가 50인이나 되었다。자명(慈明)은 54세로써 입적한 뒤의 시호(諡號)이고, 석상화상(石霜和尙)이라고도 한다.
*경허선사(鏡虛禪師)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포행(布行) ; 스님들이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한가로이 뜰을 걷는 일.
*일장춘몽(一場春夢) ; 한바탕의 봄꿈이라는 뜻으로, 헛된 영화나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①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②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이뭣고(是甚麼) : 「이 무엇고, 이뭣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이것이 무엇인가?)」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찾는 것이다.

 

 

 



------------------(2)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 통일 신라 시대에,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화엄경을 연구하고 그 경의 핵심을 추려서 7언 30구(210자)의 게송으로 지은 <화엄일승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 또는 <법성게 法性偈>에 나오는 구절.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한량없는 오랜세월이 한 생각 찰나요, 찰나의 한 생각이 무량한 시간이네.
*십세(十世) ; 화엄종의 교학에 있어서 시간 구분. 과거 현재 미래의 3세(三世)의 각각에 그 위에 과거·현재·미래가 있다고 하고, 이러한 9세(九世)를 포용하는 1세(1념)를 더하여 10세(十世)라고 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결집(結集) ;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멸 후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함께 외어 기억하는 형식으로 모아서 정리한 것.
*수장(收藏) ; 거두어서 깊이 간직함.
*교외별전(敎外別傳) : 부처님께서 말씀으로써 가르친 바를 모두 교(敎)라 하는데, 교 밖에 따로 말이나 글을 여의고(不立文字) 특별한 방법으로써 똑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대번에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법문이 있으니 그것이 곧 선법(禪法)이다.
교는 말로나 글로 전해 왔지마는 선법은 마음으로써 전하여 왔으므로 이른바 삼처 전심(三處傳心) 같은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8, p34에서.
(5)世尊이  三處傳心者는  爲禪旨요  一代所説者는  爲教門이라. 故로  曰,  禪是佛心이요  教是佛語니라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教門)이 되었다。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教)는 부처님의 말씀이니라.


(6)是故로  若人이  失之於口則拈花微笑가  皆是教迹이요. 得之於心則世間麤言細語가  皆是教外別傳禪旨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빙긋이 웃은 것(拈花微笑)이 모두 교의 자취(教迹)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教外別傳禪旨)가 되리라."
*이심전심(以心傳心) ; 진리는 말이나 글이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
*가섭존자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가사불사(袈裟佛事) ; 절에서 가사를 짓는 일.
*(게송) ‘일신진역려~’ ; [청허당집(清虛堂集)] (서산휴정 著,朴敬勛 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p116 ‘산을 나가는 영암주(英庵主)를 보내며’, p115 ‘지사(芝師)를 보내며’ 게송 참고.
*역려(逆旅 맞이할 역,나그네 려) ; '나그네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여관(旅館 일정한 돈을 지불하고 손님이 묵는 집)'을 이르는 말.
*타성바지(他姓바지) ; 자기와 성(姓)이 다른 사람.
*사바세계(娑婆世界);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로 다시 태어남.
*화기애애(和氣靄靄)하다(화목할 화,기운 기,아지랭이 애) ; (분위기가)서로 뜻이 맞고 정다운 기운이 넘쳐흐르는 듯하다.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오천축(五天竺) ; 고대 인도에 있던 다섯 개의 정치적 구획. 동천축, 서천축, 남천축, 북천축, 중천축을 이른다.
*유행(遊行) ;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수행함. 행각(行脚).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참고]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게송) ‘산중하사기~’ ; [청허당집(清虛堂集)] (서산휴정 著,朴敬勛 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p66 ‘고운(孤雲)의 글자를 모음’, ‘목암(牧庵)’ 게송 참고.

Posted by 닥공닥정

§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비약적인 것입니다. / 똑같은 일을 계속 되풀이하면 습관화, 체질화가 되어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되어진다

 

**송담스님(No.099) - 1979년(기미년) 신수기도회향(79.1.9.음)(77분)에서. (용099)

 

약 11분.


부처님은 대도(大道)를 성취하시고 육신통을 구족(具足)하셔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갖추신 그리고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신 그러한 대성인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은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 계셔도 다 된다. 더 닦을 것도 없으시겠다.’ 이리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만, 부처님께서는 우리보다 몇천 배 몇만 배의 정진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가끔 한눈을 팔 수도 있고, 해태를 게으름을 부릴 수도 있고 그렇지만, 부처님은 단 1초 동안 한 눈을 파시는 법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단 1분 동안의 게으름도 부리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언제나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고 계신 증거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그러시거든 하물며 우리의 범부 중생들은 이를 갈아붙이고 이를 악물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의 목표를 향해서 꾸준히 닦아가야 할 줄 생각합니다.
그렇게하심으로 해서 재송도인(栽松道人)과 같이 생사에 자유자재 하실 수도 있는 그러헌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헌 위대한 일, 어려운 일이 그렇게 간단하게 성취가 될 것인가? 죄 많은 중생이, 말세(末世)에 태어난 우리가 어찌 그러헌 대도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가망없는 일이다. 다못 인연이나 맺게 그저 법문 듣고 기도나 해보자.

이러헌 생각을 가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헌 생각은 이미 잘못된 선입관이 우리에게 박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회의 모든 학문은 점진적이어서 기초부터 차츰차츰 배워서 알아 들어가는 공부요, 외우는 공부요, 속에다 쌓아 올리는 공부는 그것은 점진적인 공부라 하는 것인데, 그러헌 공부는 물론 많은 세월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 내가 나를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이 참선법은 점진적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까 조실스님 법문 속에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번 뛰어서 곧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간다’ ‘한 번 뛰어가지고 성불(成佛)을 한다’ 이런 말씀입니다.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비약적인 것입니다.
엊그제까지 꽉 맥혔던 중생이 찰나(剎那) 간에 툭 터지면은 견성(見性)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깨달음은 차츰차츰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하고 해서 따져가지고 ‘오, 그렇구나!’ 이렇게 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꽉 맥힌 상태에서 ‘이 뭣고?’, ‘이 뭣고~~?’

아침부터 낮에까지 낮부터 저녁까지, 밥을 먹을 때나, 세수를 할 때나, 소제를 할 때나, 빨래를 할 때나, 설거지를 헐 때나, 차를 탈 때나, 이야기를 할 때나, 어느 때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겉으로 하는 일은 다 허면서도 생각은 ‘이 뭣고?’ 이렇게 단속해나가는 것입니다.

일 헐 때는 그 일에 대해서 정신을 쏟고, 밥을 먹을 때는 밥에 대해서 정신을 쏟고, 말을 할 때는 말에 대해서 정신을 쏟고 그래야지,
일 헐 때 일에는 정신을 쏟지 않고 ‘이뭣고?’를 한다면 그 일이 어떻게 되며,

반찬을 만들 때 그 반찬에 여러 가지 재료•분량과 양념의 종류 이런 것을 고루고루 모두 따지고 영양가도 따지면서 조리를 해야지,
‘이뭣고?’만 허면서 이것저것 함부로 집어넣으면-간장을 잔뜩 붓거나 고추장을 듬뿍 집어넣거나 하면-반찬이 다 못쓰게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걱정을 하시겠지만, 절대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적은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특수한 경우는 너무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해서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되어 가면, 채소밭에 잡초를 매면서 잡초는 놔두고, 아껴서 세워두어야 할 채소를 다 호미로 매버리는 경우가 과거에 고인네들에 있어서 가끔 있었다고 전해옵니다.

그런 경우가 더러는 있지마는 그건 특수한 경우고, 화두를 들고서 모든 일을 해 나가면은 처음에는 화두 들라고 하면은 일이 제대로 안 되고, 일에 정신을 쏟으면은 화두가 잘 안 들리고 해서, 두 갈래 길에서 갈팡질팡 잘 안 되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자꾸 익히는 것입니다.

자꾸, 세수허면서 ‘이뭣고?’헌 그 화두를 놓치지 아니하고 세수를 한번 해보세요.
세수를 허러 세숫대야 있는 데까지는 갔고, 세숫대야에다 물을 퍼붓을 때까지도 화두가 있었고, 그런데 손으로 물을 움켜서 얼굴에다 대고 문지를 때 깜박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꾸 그럴 때에 잊어버리지 않도록 화두를 단속(團束)을 해 보십시오. 그럴 때 한번 단속을 해봐서 세수를 끝내고 다시 수건으로 닦을 때에도 화두가 들어져 있도록,

그렇게 그때그때 잠깐잠깐의 생활 속에서 화두를 단속헌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정진을 빨리 이러한 경지-타성일편(打成一片) 경지에 몰아가는데 대단히 효과적인 것입니다.

발우(鉢盂)를 떠억 필 때까지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밥을 다 넣어두고 진지를 할 때도 (화두가) 있는데, 죽비를 딱딱 세 번 딱 치고 숟가락을 들어서 입에다 넣고 씹으면서 화두가 달아나 버리고,

그래 가지고 옆의 사람을 힐긋힐긋 쳐다보면서 행여 나보다 먼저 먹을까 싶어서 막 잘 씹지도 아니하고, 침도 바른 둥 만 둥 하고 막 삼켜가지고 그런 동안에 단 한 번도 화두를 들어보지 못하고 공양이 끝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선방에 계신 스님네나 보살님네는 물론이고 가정에서 계실 때에도 공양은 언제나 천천히 잡숫고 잘 씹어서 잡숫고, 그럴려면은 화두를 놓치지 않을려고 노력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서 그 드는 상태에서 공양을 잡숫도록 하시면,

저절로 잘 씹게 되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공양을 허시게 되기 때문에 소화도 잘되고 영양흡수도 잘되고 따라서 가장 맛있게 공양을 잡숫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는 공양 잡술 때에 한해서 만이 아니라 모든 일 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화두를 들고 모든 일을 해야 그 일이 제대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일만 제대로 될 뿐만 아니라 피로를 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종일 일을 허되 일하는 데에 나의 정신을 빼앗기지 아니했기 때문에 정신적인 피로를 느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잘 명심을 허시고, 생활 속에 이 참선을 잘 해 나가시도록 정성들여서 단속을 해나가시면은 차츰차츰 이것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계속해서 되풀이허게 되면은 거기에서 습관성이라고 하는 것이 생깁니다. 계속 그것이 습관화가 되면 나중에 체질화가 되는 것입니다.

헐려고 안 해도 저절로 되어지는 단계에 도달해서 조금도 무리가 없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과 몸은 혼연(渾然)히 일체가 되는 것이고, 우리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도 바로 나의 살림살이가 되는 것이고, 나의 수중으로 다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요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확철대오 할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 공부만이 생사해탈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43분26초~55분1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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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빠짐없이 두루 갖춤.
*삼명(三明) ;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갖추고 있는 3가지 자유 자재한 지혜.
①숙명지증명(宿命智證明) 나와 남의 전생을 환히 아는 지혜.
②생사지증명(生死智證明) 중생의 미래의 생사와 과보를 환히 아는 지혜.
③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지혜.
*육통(六通) ; 육신통(六神通)의 준말.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94~95.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과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먹음은 것,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 등등.
*한눈을 팔다 ; 해야 할 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정신을 딴 데로 돌리다
*재송도인(栽松道人) ; 중국 선종(禪宗)의 제4조 도신대사(道信大師 580~651)가 제자를 맞아 인증을 하였지만, 제자가 너무 늙어 스승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법을 이을 사람이 없으니 몸을 바꾸어 오도록 하였다. 이에 몸을 바꾸어 후에 다시 만날 때 증거로 삼기 위해 황매산에 소나무를 심었다. ‘소나무를 심었다’는 뜻에서 ‘재송도인(栽松道人,栽松道者)’이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 5조 홍인대사(弘仁大師 602~675)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여래(如來) ; 여래 십호(如來十號)의 하나. 진여(眞如)의 세계, 곧 열반에 다다른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다타가타(tathāgata)의 번역어이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깨달음을 여는 것. 각자가 스스로 무상의 깨달음을 열고, 부처가 되는 것. ④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독로(獨露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단속(團束) ; ①주의를 기울여 다그쳐 보살핌. ②규칙, 법령, 명령 등을 어기지 않게 통제함.
*타성일편(打成一片) : 좌선할 때 자타(自他)의 대립이 끊어져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경계.
*발우(鉢盂) ; 발(鉢)은 (산)patra의  음역어인 발다라(鉢多羅)의 준말로 식기, 우(盂)는 그릇을 뜻함. 음역어와 번역어의 합성어로, 수행승들의 식기를 일컬음.
*혼연(渾然 가지런할•모두 혼,그러할 연) ; 다른 것이 조금도 섞이지 않고 고르게.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