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는 ‘이뭣고?’ 라고 합니다.
표준말로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정확히 쓰면 일곱 자인데, 경상도 말로는 ‘이뭣고’ 석자입니다. 그래서 참선 해나가는 데에는 ‘이뭣고?’ 이렇게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해 왔습니다.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뿐이어야 합니다.
참선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슬플 때는 슬픔에 빠져 가지고, 점점 슬픈 생각이 더 일어나도록 이 생각 • 저 생각 • 점점 묵은 생각을 일으켜 내 가지고 점점 더 슬픔에 빠집니다. 어떤 괴로운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 근심 걱정을 없앨려고 하지를 않고, 점점 근심이 더 치성하게 일어나도록 근심이 될 만한 사건을 더욱 더 연상을 해내서 더 근심에 빠집니다.
성이 날 때에는 빨리 그 생각을 돌이켜서 성나는 생각이 가라앉도록 해야 자기에게 유익할 텐데, 점점 성이 더 일어나도록 이 생각 • 저 생각 • 고약한 그 지나간 생각을 되살려 내 가지고 더 깊이 그 성나는 생각에 빠져 들어가서 자기가 자기를 괴롭혀 들어갑니다. 이래 가지고 중생은 불붙은 데다가 스스로 석유와 휘발유를 끼얹어 가지고 점점 더 불을 치성하게 만들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픈 생각이 나도 바로 ‘이뭣고?’, 기분 나쁜 생각이 일어나도 바로 ‘이뭣고?’, 괴로운 생각이 나도 그 괴로운 생각이 다음 두 번째 생각으로 번져나기 이전에 바로 ‘이뭣고?’ 로 돌아와 버리는 것입니다.
도인이라고 해서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되, 그 일어나는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바로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면 그 생각으로 인해서 점점 괴로움에 빠져 들어가서 나중에는 그 한 생각이 원인이 돼 가지고 건강을 상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한테 그 좋지 않은 생각을 터뜨려 가지고 다른 사람 마음까지 괴롭히고 일까지 그르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생을 살아가니 생사윤회에 안 떨어지고 배기겠습니까?
참선은 일어나는 한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 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백 번 일어난다 허드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이 좋은 생각이건 나쁜 생각이건, 슬픈 생각이건 괴로운 생각이건 성나는 생각이건, 과거 생각이건 현재 생각이건,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이···뭣고······?” 호흡을 깊이 들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합니다.
무슨 기분 나쁜 소리를 들어서 성이 푹 솟구치더라도, 심호흡을 깊이 들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나가는 것입니다.(68분47초~73분24초)
그러면 그 활구참선법이란 어떠한 것이냐?이론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참선이 아니라, 일체 이론을 배제하고 오직 꽉 맥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하나의 화두를 참구하여 일체 공안을 타파하고 확철대오하는 참선법입니다.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둘째 호흡을 바르게 한 다음, 셋째는 화두를 의심해 나가는데,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심, 깨달음>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剎那)에 확철대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 깨달음>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참선을 해 나가는데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할 화두를 지금부터 말씀을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여기에 참선법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여러분을 이끌고 계시는 만덕장보살이 가자고 해서 왔다고 혹 생각헐런지 모르지마는, 그것은 표면에 나타나는 한 조건에 지나지 못하고,여기에 여러분이 온 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발이 여기를 온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몸뚱이가 제멋대로 온 것이 아니고, 남이 오자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 지금 편의상 ‘자신’이라는 말을 썼지마는 - ‘알 수 없는 놈’이 여기를 오기로 결정을 해서 그놈이 명령을 했기 때문에, 그 명령에 의해서 여러분의 몸이 움직여져 가지고 발로 걷기도 하고, 차를 타기도 해서 여러분은 여기에 와 진 것입니다.
그러면은 무엇이 여기를 ‘가자!’ 하고 이렇게 명령을 했겠느냐? 그놈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그놈’인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이 편의상 지어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이다 • 성품이다 • 주인공(主人公)이다 • 뭐 얼마든지.... 우리 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놨을 것입니다 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風月)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그만두고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에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그놈이 지옥에도 가 봤을 것이고, 천당에도 가 봤을 것이고, 귀신으로도 떠돌아댕겨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온 그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눈을 통해서 보기도 하고, 귀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고, 입을 통해서는 맛도 보고 말도 하고, 몸뚱이를 가지고는 차웁고 • 덥고 • 부드럽고 • 까끄러운 것도 알고, 여기 앉아서 백 리 •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맘대로 왔다갔다하고,또 10년 전 • 20년 전 • 30년 전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합니다.
그렇게 신통이 자재하고, 시간 • 공간에 걸림이 없는 묘한 물건을 우리 모두 낱낱이 다 지니고 있고, 그놈에 의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자체를 깨닫지를 못하고 계속 생사윤회를 할 수밖에는 없느냐?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 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에 자유자재하고, 그놈을 마음껏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삼천 년이 된 이 말세(末世)에 겨우 이 문제를 이제사 알고,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는 그러한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후회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금생에라도 알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약에 금생에마저도 그것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면, 무량겁 미래 언제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이 법을 알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다면은 한없는 생사윤회를 거듭할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몸은 금생에 언젠가는 버리게 됩니다. 버리고 난 다음에 다시 또 육도(六道)의 어느 곳에 몸을 받아나게 됩니다마는, 금생에 일생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마지막에 숨 딱 거둘 때에도 참선하는 그 마음가짐, 그 화두 일념으로 딱 숨을 거두게 되면 내생에 금방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좀더 일찍 좀더 공부하기 좋은 여건 하에 태어나게 되기 때문에 내생에는 훨씬 빨리 공부를 하여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도인들, 모든 성현(聖賢)들도 일 생, 이 생 닦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생을 공부해 가지고 금생에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을 받아 태어나 가지고 일찍 공부를 성취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입니다.차츰차츰 알아 들어가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자리 걸음만을 하는 것 같지마는 결국 깨달을 때에는 중생의 상태에서 성현의 상태로, 비약적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러나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해놓으면 설사 금생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드라도 그 공부가 허사가 아니기 때문에, 올바르게 해 놓은 공부는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점진적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지 못한다고 조급한 생각을 낼 것도 없고, 금생에 나이가 먹도록 죽음에 이르도록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下直)할 때까지,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 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물 - 우리 밖의 모든 사물 - 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있고, 그놈의 부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삼라만상, 우주법계를 내가 운전하고, 내가 요리하고,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밖의 물건에 의해서 내가 구속을 당하고 있고, 그 조종을 받고 있고, 그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나인데... 주인이 시원찮고 정신을 못 채리니까...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 내가 소유하고 있는 종들에게 주인이 멸시를 당하고, 주인이 종노릇을 하고, 종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들입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하! 그 공부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대단히 어렵겠구나!” 이렇게 생각허실런지 모르지마는 절대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내게 있는 것.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놈. 여러분이 듣고 있는 놈. 밥을 먹을 때는 먹고 있는 놈. 길을 걸어갈 때는 바로 그 걸어가는 놈. 성날 때는 바로 그 성내는 놈. 그놈을 돌이켜 살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날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괴로울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기쁠 때도 • 슬플 때도 • 밥을 먹을 때도 • 차를 탈 때도 • 앉었을 때도 • 누웠을 때도, 바로 <그때그때, 그 자리 그 자리>가 나를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는 것입니다.
책을 통해서 하는 공부는 장소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분위기가 필요하지마는, 이 공부는 때도 장소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한 생각 퍼뜩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51분28초~68분48초)
回 이 법어는 송담(松潭)스님께서 1978년 10월 1일, 「법련사 불일 청년회」의 청법으로 설하신 내용이며, 스님께서 직접 편집하신 것을 『불일회보』(1988년 6. 7. 8월)에 게재했었던 원고임.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풍월(風月) ; 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어깨너머로 배운 짧은 지식.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사바세계(娑婆世界);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생사윤회(生死輪廻)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여래(如來) ; 여래 십호(如來十號)의 하나. 진여(眞如)의 세계, 곧 열반에 다다른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다타가타(tathāgata)의 번역어이다. *하직(下直) ;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
<뾰족한 산봉우리에 달 뜨는 것을 보고, 두견새 소리 속에 나귀를 먹인다.> ‘파수오경’의 오경은 ‘낮 오(午)’자 오경입니다. 달은 밤에 뜨는 것인데 어떻게 해서 낮 오경에 달 뜨는 것을 보느냐?
이 ‘파수오경간월출’은 볼래야 볼 수 없고 들을래야 들을 수 없고 만져볼래야 만져볼 수도 없는 한 물건을 깨닫는 도리를 표현한 것이고, ‘두견새 소리 속에 나귀를 먹인다’하는 것은 내가 나를 깨닫는 그 도리에 입각해서 깨달은 뒤에 수행해 나가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원앙새 수놓은 것은 보여 주거니와 수놓는 금침은 사람에게 건네 줄 수가 없느니라.>
§ 참선
참선은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며, 그 길을 통해서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바른 길을 알고, 또 열심히 행해 가야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깨달아서 생사해탈을 하고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이어 받음으로써, 나도 영원히 행복하고 모든 중생도 영원히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소원이 있다 하더라도, 바른 수행 방법을 알지 못하면 그 소원을 이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바른 길을 알았다 하더라도, 쉬지 아니하고 중단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가지 아니한다면 도를 성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천 년 전에 부처님이 출현하셔서 불교를 펴시기 이전부터, 이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참나’는 있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참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어려서부터, 대관절 이 인생이란 게 무엇이냐? ‘나’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어디에서부터 와 가지고 한 평생을 희로애락의 많은 고비 고비를 겪으면서 마침내는 일생을 하직하고 어느 곳으로 또 가느냐?
생각하면 생각해 볼수록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성현들도 이 문제를 위해서 많은 힘을 거기에 쏟았던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말로써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고, 귀를 통해서 들어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이론으로 따져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일생의 힘을 다 소비한다 하더라도 이론으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참선법’을 통해서 ‘깨달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론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론은 ‘아는 것’에 불과한 것이고, 참선을 통해서 도달하는 것, 그것은 ‘깨달음’인 것입니다.
깨달음과 아는 것과는 전연 질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론을 통해서 불법을 연구하는 사람은 마침내 중생의 사량 분별심(思量分別心)을 조장하는 결과밖에는 안 되는 것이라, 그걸 가지고는 생사해탈이 아니 되는 것입니다.
§ 활구선, 사구선
요새 우리 나라뿐만이 아니라 서양에까지도 널리 보급이 되고, 붐이 일어나서 너도나도 참선을 하려고 하고 또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마는, 참선은 두 가지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살 활자 글귀 구자 → 활구참선(活句參禪)이고, 또 하나는 죽을 사자 글귀 구자 → 사구참선(死句參禪)입니다.
사구참선은 무엇이냐?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 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 그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활구참선은 선지식으로부터 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은 당장 처음 시작할 때부터 꽉 막혔고, 뒤를 돌아봐도 꽉 맥혔고, 왼쪽•오른쪽을 둘러봐도 콱 맥혀서 한 걸음도 나아갈라야 나아갈 수 없는 상태로 지어가되,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참나’를 깨닫는 길인 것입니다.
물질 문명이 차츰 발달해감에 따라서 사람들은 점점 약아져서 힘은 적게 들이고 쉽게 목적한 바에 도달하려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참선은 어떤 사람이라도 그런 약은 생각을 가지고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바보가 돼 가지고 다못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기의 온갖 지식, 상식을 다 내버리고 백지 상태로부터 공부를 지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공부는 보고 듣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해서 차츰차츰 해감에 따라서 무엇인가 얻어진 바가 있어야만 되지만, 이 참선 공부는 이미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놓아 버리고 하는 것입니다.
일시에 다 버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공부에 빨리 힘을 얻게 되는 것이고, 미련 때문에 버리지를 못하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는 사람은 그만큼 늦어지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을 하려면 그 동안에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불교에 관한 것이건 부처님의 말씀이나 조사의 말씀까지도, 전부를 다 놓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다못 바보가 돼서 하라는 대로만 그대로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처음~17분16초)
回 이 법어는 송담(松潭)스님께서 1978년 10월 1일, 「법련사 불일 청년회」의 청법으로 설하신 내용이며, 스님께서 직접 편집하신 것을 『불일회보』(1988년 6. 7. 8월)에 게재했었던 원고임.
*불조(佛祖) ; 부처와 조사(祖師).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말. 대도정법(大道正法)의 명맥(命脈). ②법신(法身)은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뜻.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