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과 의심2013.12.24 08:07

§(287) 쥐 법문(法門) /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심관(疑心觀)이거든.
다른 어떠한 문제를 하나만을 생각해 가지고, 그 하나에다가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른 것입니다.
‘이뭣고?’를 하되 의심이 없이 그냥 ‘이뭣고’‘이뭣고’‘이뭣고’‘이뭣고’ 밤낮 ‘이뭣고’ 고것만 생각하고 있으면 ‘이뭣고’를 해도 그것은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의심이 아니기 때문에.
**송담스님(No.287) - 1986년 2월 첫째일요법회(86.02.02)(63분)에서.

약 12분.


어떤 사람이 그 집안에 어떻게 쥐가 들끓든지, 그 쥐를 갖다가 없애기 위해서 별별 약을 다 놓기도 하고, 고양이를 다 갖다 놓기도 하고 그랬는데,
오히려 약을 놓아 가지고 몇십 마리 잡아봤자 며칠 안 있으면은 더 쥐가 성해 가지고 더 야단을 치고 더 번성을 하고 하는 것을 보았고, 고양이를 갖다 놔봤자 몇 마리 잡아서 찢어발겨 놓기는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렇게 쥐가 없어지지를 않고,
오히려 더 부엌이나 창고나 다락이나 천정이나 수채구녁 할 것 없이 뭐 집안에 있는 걸 잡아도, 이웃집에서 오고 또 산중에서 내려오고 들에서 오고 이렇게 해서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연구한 끝에,

쥐를 잡아서-새끼 때 그 쥐구녁을 파 가지고 새끼를 잡아서, 살살 그 쥐를 꽁댕이를 잘라버리고서 쥐를 키웠는데, 주로 무엇을 먹여서 키우냐 하면은, 쥐를 덫을 놓아서 잡아 쥐고기를 썰어 가지고 새끼 때부터 먹였던 것입니다.
쥐의 고기를 먹여서 차츰차츰 크면서, 쥐를 잡아서 큰 쥐도 넣어주면 배가 고프니까 그 쥐를 막 깨물라 먹고 해서, 그 육식을 하니까 쥐가 굉장히 빨리 잘 컸습니다. 그래 가지고 쥐가 쥐고기를 참 잘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 쥐를 풀어놓으니까, 쥐란 놈이 천장이고 부엌이고 쥐구녕이고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쥐란 쥐는 다 잡아 먹었습니다.
고양이를 시켜봤자 쥐구녕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한나절씩 쥐구녁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오면 잡아먹을지언정, 쥐구녕에 딱 들어가 갖고는 안 나오면 잡아먹지는 못하는데, 이 쥐를 훈련을 시켜서 내 놓으니까 구녁구녁이 다 드나들면서 싹 다 잡아먹어.

그런 다음에 마지막에 그 쥐는 사람에게 잘 길이 들어져서 마지막에 그놈을 잡어가지고, 니가 그동안에 모든 쥐를 잘 잡은 공로를 크게 치하를 하고, 그러나 미안하지만은 너도 너 갈 데를 가거라. 이렇게 해서 처단을 했다 그런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쥐 때문에 곡식을 많이 먹고 모든 물건을 다 쏠고, 그렇게 쥐 때문에 미국이나 서양이나 한국이나 쥐가 1년에 먹는 양곡이 수십만 수백만 석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이 ‘쥐를 훈련을 시켜서 쥐를 잡게 하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도 드는데 여러분은 그러한 일은 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런 얘기를 한 것은 이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것이, 그 이론상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분석하고 해 가지고 어떠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라 하는 것은.
아까 조실 스님께서 법문 하신 바와 같이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하는 바로 이놈이 뭣고~?’
다맛 그렇게만 참구하는 것이지.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경에 있는 부처님 말씀과도 비교해서 ‘하!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따진다든지, 조사의 어록이나 다른 공안을 가지고 따져서 비교해 보고 이렇게 해서 어떠한 해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도 꽉 막히고 뒤도 막히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관(疑心觀), ‘이뭣고~?’
또 판치생모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심관(疑心觀)이거든.

다른 어떠한 문제를 하나만을 생각해 가지고, 그 하나에다가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른 것입니다.

어떠한 글귀나, 어떠한 물건이나, 어떠한 일을 갖다가, 그것만 밤낮 생각해 가지고 생각이 다른 데에 가지 못하고 그 생각만 하도록, 그러면은 애인을 이별한 사람이 밤낮 애인 사진만 놓고 애인만 들여다보고 애인 생각만 하면 그것이 참선이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죽은 자식을 생각해 가지고 밤낮 죽은 자식만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나깨나 생각 안할라고 아무리 떨쳐 버릴려고 해도 그 자식 얼굴이 환히 나타나면서 자식 생각만 한다면, 그러면 꿈에서도 자식 꿈을 꾸고, 눈을 떠도 자식 생각, 누구 청년 학생들을 봐도 자식 생각하면 그 사람이 그러면 참선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왜 아니냐 하면, 그 한 일에 생각이 집중된다고 한 점에서는 그 점 하나는 혹 공통점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참선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런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는 것이고, 생사해탈을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화두, 화두를 참구해 가지고 하는 이 참선은 ‘알 수 없는 의심’, 의심으로 그것을 관(觀)하기 때문에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뭣고?’를 하되 의심이 없이 그냥 ‘이뭣고’‘이뭣고’‘이뭣고’‘이뭣고’ 밤낮 ‘이뭣고’ 고것만 생각하고 있으면 ‘이뭣고’를 해도 그것은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의심이 아니기 때문에.

의심관이라야 하는데, 의심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이뭣고’‘이뭣고’‘이뭣고’‘이뭣고’‘이뭣고’ 하면 (그것은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뭣고’를 하라니까 ‘이뭣고?’ 소리를 잊어버리고서, ‘이웃집 영감’‘이웃집 영감’ 며칠을 하다가 와서 ‘이웃집 영감’을 많이 찾아도 잘 안 된다고 그런 소리를 하고,

또 어떤 노인은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화두를 타고 법문을 듣고 집에 가서는, 자나깨나 큰소리를 지르면서 ‘전강 스님! 전강 스님!’ 자꾸 전강 스님을 불러싸서 그 며느님과 손녀가 그 할머니를 모시고 와가지고 ‘원장 스님이 전강 스님을 자꾸 부르라고 했다.’고, 그래서 밤낮으로 전강 스님을 불러싸니 ‘정말 원장 스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느냐?’

나는 ‘이뭣고?’ 이렇게 하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그 할머니가 잘못 알아듣고 가서 밤새도록 전강 스님만 불러싼다고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잘 타일러 드려가지고 얼마동안을 그 노보살님이 잘 하시다가 지금은 저승으로 가셔서 극락세계를 가셨거나 다시 몸 바꿔 나셨지 않는가 그리 생각이 됩니다만은.

이 한 자리에 같이 들어도 듣는 사람마다 다 각기 달리 듣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엉뚱하게 이해를 해 가지고 그러기 때문에 법회 때마다 이 참선하는 법,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새로 오신 분도 있고 또 오신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정말 가끔 한번씩 ‘이뭣고?’소리는 듣지만, 대관절 ‘이뭣고?’라는 것이 무엇이냐? 전혀 감을 잡지 못한 그러한 분들도 있고, 또 자기 나름대로 여러 해를 다니면서 한다는 것이 결국은 전강 스님을 불러쌓고,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법회 때마다 말씀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잘 올바르게 하면서, 화두를 올바르게 참구할 줄만 알면 공부는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세도 바라지고, 또 단전호흡을 함으로써 피로회복도 되고, 또 좋지 못한 성격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 잘 골라지고, 그러면서 이 참선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체 생활 속에서 자꾸 단속을 해 나가면 언젠가는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입니다.

걸어갈 때나, 차를 찰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세수를 할 때나, 직장에서나 언제라도 그 의단이 독로해서, 일이 있을 때에는 일 하는 가운데에도 화두가 떠나지를 않고, 화두 드는 가운데에 모든 사람을 접견할 수도 있고, 일도 할 수가 있고,
그렇게 해서 주변이 시끄러워도 상관이 없고, 조용하거나 시끄럽거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 때가 기어코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20분18초~32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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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이 무엇고(이뭣고 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 무엇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 무엇고?」(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언하대오(言下大悟)] (용화선원) p53 에서.
*의단(疑團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참선할 때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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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