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게송)춘래동견방초록~ / 영지(靈知) 진지(眞知) 망지(妄知) / 원장(院長)이라 하는 굴레 / 불법(佛法)은 많은 말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참선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아는 것이 아니다. 사량분별을 통해서 아는 것은 그것은 깨닫는 것이 아니다. 팔만대장경을 다 외우고 해설을 하고 설할 줄 안다 하드라도 그것은 아는 것이지 깨달은 것이 아니다.
중생의 망령된 알음알이로 아무리 공안을 따져서 그럴듯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침내 망지(妄知)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그 자체가 깨달음이 아닐 뿐만 아니라 깨달음과는 점점 멀어져 버려.


말로써 공부를 할 수가 있고, 말로써 가르켜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지금 육도(六道)를 윤회하고 있는 중생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진리는 찾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진리는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여러분에게 그 길을 안내하려고 노력을 해야 하고, 여러분은 또한 그것을 듣기 위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쳐야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204)—83년 6월 첫째 일요법회(83.06.05) (용204)

 

(1) 약 19분.

(2) 약 17분.


(1)------------------

 

춘래동견방초록(春來同見芳草綠)하고  추지동견황엽조(秋至同見黃葉凋)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불지소이이어인(佛之所以異於人)한대  치연작용무기종(熾然作用無其蹤)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봄이 오면 꽃다운 풀이 푸르른 것을 모두가 다 같이 볼 수가 있어.
추지동견황엽조(秋至同見黃葉凋)로구나. 가을이 오면 이파리가 누렇게 단풍이 져서 시들은 것을 누구라도 다 마찬가지로 볼 수가 있다 그말이여.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 눈에도 다 똑같다. 깨달은 사람이 봐도 그렇고 깨닫지 못한 사람이 봐도 그렇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 봐도 그렇고, 지식이 없는 사람이 봐도 그렇고, 누가 봐도 봄에는 파란 풀이 돋아난 것을 볼 수가 있고, 가을이 오면 모든 이파리가 누렇게 단풍이 져서 떨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더라.

불지소이이어인(佛之所以異於人)은, 그런데 부처님은 우리 중생(衆生)과 무엇이 다르냐? 부처님과 우리 중생은 어떠한 점에서 우리 중생과 부처님은 다르냐?

깨달은 부처님은 중생과 무엇이 다르냐 하면 치연작용무기종(熾然作用無其蹤)이여, 치연(熾然)이 작용을 하고 있으되 그 자취가 없어.

중생은 무얼 보면 보는 데에 끄달리고, 무엇을 들으면 듣는 데에 충격을 받고, 무엇을 얻으면 얻는 데에 마음이 흔들리고, 무엇을 잃으면 잃는 데에 실망을 하고, 얻었다고 기뻐하고, 잃었다고 슬퍼하고,

이 세상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잠시도 고대로 있는 것은 없고 끊임없이 변해 가고 생겨났다가 변해져서 또 사라지고, 생겨났다 변해가 가지고 사라지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그러는데,
중생은 그러한 경계(境界)를 당해서, 그 경계를 자기가 주재(主宰)를 하지를 못하고, 그 경계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경계에 따라서 끊임없이 끌려다니고, 얽히고 설켜서 희로애락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취를 남기면서 끌려다닌다 그말이여.

그런데 부처님은 자유자재한 육신통(六神通)으로써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치연하게 치열(熾烈)하게 작용을 해.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시고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설법을 하셔. 그렇게 치열하게 작용을 하고 계시되, 조금도 그 자취가 없는 점이 중생과 다르더라.


아까 조실스님 법문에 ‘참선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아는 것이 아니다. 사량분별을 통해서 아는 것은 그것은 깨닫는 것이 아니다. 팔만대장경을 아무리 육두로 다 외우고 해설을 하고 설할 줄 안다 하드라도 그것은 아는 것이지 깨달은 것이 아니다.
참선을 할라면은 사량분별로 무엇을 알려고 하지를 말고, 다못 말 길도 끊어지고 이치 길도 끊어져서 더듬어 들어가서 아는 그러한 것이 없이, 다맛 대의단(大疑團)으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관조(觀照)해야 한다.’

그러한 요지의 법문이 있었습니다마는 경을 가지고 공부하는 사람은 천상 그 경에 쓰여 있는 말을 분석하고 따져서 대관절 무슨 뜻인가를 해석을 하고 배우고 가르키고 연구하고, 불가불 강원(講院)에 가면 그렇게 공부를 하기 마련이지만, 참선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참선(參禪)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여.
경의 뜻도 참으로 옳게 터득을 하려면 마음을 관조해서 그 말 뒤에 있는 말 없는 뜻을 봐야 하거든, 하물며 참선은 처음부터 말로써 공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깨달은 부처님의 경계에도 ‘알 지(知)’자 '안다'고 할 수가 있고, 이치를 깨달은 선지식도 '안다'고 할 수가 있고, 우리 범부 중생의 번뇌 망념으로 아는 것도 그것도 일종의 '안다'고 할 수가 있는데,

부처님이 아시는 것은 영지(靈知)라 그러거든. 영지(靈知). 신령스럽게 아는 거.
영지는 중생의 분별로써는 그 영지의 경계를 뭐라고 짐작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여. 부처님 경지에 가 봐야 부처님의 그 영지의 뜻을 알 수가 있는 것이지, 그 경계에 이르지 못하고서는 영지의 그 경계를 짐작을 할 수가 없는 것이거든.

부처님 경지는 아무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되, 그 자취가 없는 것이여. 자취가 없이 보시기 때문에 그건 영지(靈知)라 그러거든.

도인(道人)이 깨달은 경지는 어떠냐? 그것은 진지(眞知)라.
‘참 진(眞)’자 진지(眞知)라 그렇게 표현을 할 수가 있는데, 그 진지도 공안(公案)을 타파해서 남이 없는 도리, 무생(無生)의 법을 보아야 그래야 그 진지(眞知)의 뜻을 알 수가 있는 것이여.

중생이 번뇌 망상으로 따져서 짐작하고 느끼고 또 그것을 설명해 줄 수도 있고, 설명하는 것을 듣고 터득을 하고 이러한 것은 모두가 다 망지(妄知)에 속한 것이다 그말이여. 망령(妄靈)된 알음알이에 속한다 그말이여.

화엄경이나 법화경이나 금강경과 같은 그러한 대승경전에 쓰여 있는 부처님 말씀이라 할지라도 중생의 망령된 알음알이로 분석을 하고 해석을 하고 그러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라 할지라도 망지(妄知)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말이여.

그런 경전의 말씀뿐만이 아니라 1700 조사 공안(祖師公案)도—이 조사 공안은 용궁(龍宮)에 있는 장경(藏經)에도 없는 교외별전(敎外別傳) 소식이지만,
그 교외별전의 최상승법, 이 공안도 중생의 알음알이로 따져서 『아! 이것이로구나』 하고 알음알이를 붙이면 알음알이로 따지면 공안이 바로, 최상승법이 찰나 간에 망지(妄知)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말이여.

참선에 있어서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은 알음알이로 공안을 따지는 거.
참선을 하다가 알음알이로 어떠한 결론을 얻는 거—얻으려고 하고 또 얻는 것은 모두가 다 모래를 쪄서 밥을 만들려고 하는 거여. 그건 아무리 삶아 봤자 모래지 그것이 밥으로 변하는 법은 없어.

중생의 망령된 알음알이로 아무리 공안을 따져서 그럴듯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침내 망지(妄知)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깨달음과는 점점 멀어져 버려. 그 자체가 깨달음이 아닐 뿐만 아니라 깨달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버린 거다 그말이여.


공안을 중생의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묻는데, 「마삼근(麻三斤)이다」  「마삼근이니라」 이렇게 조사(祖師)가 대답을 하셨는데.
「어째서 부처님을 마삼근이라 했는고?」 그것을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하다가 탁! 속으로 어떠한 결론을 얻었어.

『육도법계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전부가 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체(法身體)다』 그렇게 경전에 분명히 쓰여 있다 그말이야.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다 비로자나 법신인데 어찌 삼[麻]이라고 해서 부처가 아닐까보냐? 그래서 저 삼[麻]도 바로 부처다.」 이러한 식으로 공안을 따져 가지고 자기도 알았다. 공안을 타파했다.

이렇게 결론을 얻었다면 어찌 그것을 깨달음을 얻었다 할 것이냐 그말이여.

그것은 강사(講師)의 지견(知見)도 못되고, 그러한 식으로 공안을 따진다면 무엇을 처음부터서 ‘하늘 천(天)’ ‘따 지(地)’ 배우듯이 1700 공안을 놓고 다 그런 식으로 해서 배워 버리면 하나도 힘 쓸 것도 없고 간단할 일인데, 뭐하러 그렇게 목숨 바쳐서 고행난행(苦行難行)을 할 필요가 있느냐 그말이여.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뭣고?」 이뭣고 화두를 하는데,
아무리 「이뭣고?」  「이뭣고?」 해 봐도 알 수가 없고, 애를 쓰다 보니까 턱! 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자꾸 하다 보니까, 「이뭣고?」한 놈이 바로 이놈이더라!
그렇게 어떤 사람이 깨달았다 하면, 그거 참 생각해보면 그럴싸하거든. 「이뭣고?」한 놈이 이놈이지, 이놈 말고 무엇이겠느냐 그말이여.

밥 먹고 옷 입은 놈이 바로 이놈이요. 육도윤회를 하는 놈도 바로 지금 「이뭣고?」하고 있는 바로 이놈이요. 성내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놈도 바로 이놈이요. 확철대오해서 깨닫는 놈도 바로 이놈이요. 육도윤회를 하는 놈도 바로 이놈이다. 이놈을 내놓고 무엇이 또 있겠느냐?
그러니 여태 내가 「이뭣고?」「이뭣고?」했는데 바로 「이뭣고?」하는 이놈이더라.

참, 그러한 것을 갖다가 망지(妄知)라 하는 것이여. 망령된 중생의 알음알이다 그거여. 자기 딴은 애써서 했지만 ‘이놈이다’ 할 때는 경전에 있는 말씀과 딱 부합이 되어도, 그것은 벌써 이놈이라 할 때는 그것은 망지(妄知)다 그말이여.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도 '깨달았다'고 하는 소견에 떨어지면 찰나 간에 중생이요, 찰나 간에 윤회에 떨어져버린 것인데, 망령된 소견으로 그러한 결론을 얻었다면 그건 물어 볼 것도 없어. 그것은 참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여.

부처님께서 금강경에 『내가 설(說)한 바가 있느냐? 설한 바가 있다고 하면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 되고 설한 바가 없다 하면은 법을 비방한 것이 된다』 그러한 말씀이 있습니다.(처음~19분9초)

 

 

 



(2)------------------

 

산승(山僧)이 오늘 이렇게 입을 벌려서 영지(靈知)와 진지(眞知)와 망지(妄知)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 부처님은 설한 바 없이 설하시고, 치연(熾然)히 작용을 하시되 자취가 없으시건만,

산승은 영지(靈知)도 얻지 못하고 진지(眞知)도 얻지 못한, 범부 중생으로 아무리 좋은 부처님의 말씀을 설하고, 아무리 조사의 법문을 고대로 설한다 하더라고 나 자신이 망령된 알음알이를 벗어나지를 못했어.

‘어찌 망령된 알음알이로 법을 설해 가지고 뭇 중생의 눈을 멀리고 스스로 구업(口業)을 짓느냐?’ 이렇게 책망을 하신다면 나는 입을 막고 고개를 들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망령된 알음알이로 법을 설하는 것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 ‘눈먼 장님이 훨훨 타는 횃불을 들고 대낮에 길거리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불을 밝혀 줄려고 하는 거와 같다’  이렇게 옛날 조사(祖師) 스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훨훨 타는 횃불을 밤에 가지고 다닌다면 혹 다른 사람들이 그 횃불의 광명을 받아서 그 밝음을 이용해서 구렁텅이에 빠지지 아니하고 바로 길을 찾아가겠지만,
태양이 환히 빛나고 있는 대낮에 횃불을 들고 돌아댕겨봤자 그 밝음은 아무 소용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밝음을 주지를 못하고, 오래오래 그 횃불을 가지고 돌아다니면 결국은 자기의 손과 몸뚱이에 화상을 입고 말 것이다.

그래서 달마스님도 그 혈맥론(血脈論)에 말씀을 하시기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법을 설하면 법 설한 사람도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것이요. 깨닫지 못한 사람의 법을 듣는 사람도 그 깨닫지 못하고 법을 설한 사람과 마찬가지다. 깨닫지 못하고 법을 설하는 사람은 마왕(魔王)이요. 깨닫지 못한 사람의 법을 듣는 것은 바로 마왕의 백성이다」 이렇게 무서운 법문을 하셨습니다.

산승이 깨닫지 못한 범승(凡僧)으로서 감히 입을 벌린다고 하는 것은 내가 마왕이 되고 여러분을 마왕의 백성을 만드는 죄과(罪過)가 될 것이고, 내 손에 쥐었던 횃불이 내 손을 불사르고, 내 몸을 불사르고, 그 불이 잘못해서 여러분에게 번지게 되면 여러분이 또한 큰 화상을 입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산승은 깨닫지 못한 사람이면서 어째서 이렇게 법상에 올라와서 이렇게 다달이 법회를 갖고 있느냐?

산승이 전생에 죄가 많고 업이 두터워서 피할라야 피할 수 없는 굴레를 쓰게 되었어.
출가해 가지고 자신의 생사 문제가 급하고 급하거늘, 어느 겨를에 입을 벌릴 그러한 여유가 없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몸을 뺄라야 뺄 수 없이 되었습니다.

노예가 마치 자기 마음으로는 추호도 하기도 싫은 그러한 중노동을 쇠고랑을 찬 채 가혹한 매질을 당하면서 피를 흘리면서 무서운 노동을 강요 당하듯이 '용화선원 원장(院長)'이라 하는 굴레를 조실 스님의 열반시의 명령에 의해서 피할 수 없이 이러한 굴레를 쓰고 법회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불이 내 몸에 번지기 전에 여러분은—그 조그만한 반딧불만도 못한 그런 조그만 불이지만,
여러분은 그 불이 꺼지기 전에, 또 내 몸을 태우기 전에, 또 그 불이 여러분의 몸에 번지기 전에 그 밝은 것만을 빨리 잘 이용을 해서 바른 길을 찾아 가시기를 바라는 그러한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내 소원은 설사 그 불이 내 몸에 덩거서 내가 화상을 입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에게 그 광명이 비춰져서 여러분의 앞길에 바른 법의 문이 열리기를 바라는 오직 그 한 생각 뿐입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발심을 하고 참으로 정법을 믿고 자비가 있으시다면 그 불이 내 몸에 덩구지 않도록 그것을 잘 보살펴 주시고,
그 불은 오래오래만 가지고 있으면은 횃불이 타다가 결국은 불똥이 나한테 튀길 것은 분명한 것이니까 빨리 여러분이 시간을 아껴서 정말 목숨을 바쳐서 열심히 정진해서 내 손에 있던 횃불을 여러분이 달라들어서 그 불을 빼앗아 가시든지, 그 불을 빼앗아서 위험하지 아니한 곳에 버려 주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피차 이 사바세계에 태어났을 때 숙세(宿世)의 깊은 인연으로 같은 시대에 같은 나라에 태어났고, 같은 종교를 믿게 되었고, 같은 법당에서 이렇게 다달이 만나게 된 것입니다.
숙세의 깊은 인연이 아니면 도저히 한 시대에 태어날 수도 없고, 설사 한 시대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같은 장소에서 만나지들 못하고, 또 한 나라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같은 시대에 태어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같은 시대에 태어나고, 같은 나라에 태어나고, 같은 불법에 만나서 이렇게 서로 생사 없는 진리를 향해서 말을 하고 듣게 된 그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써 표현 할 수가 없는 부모자식 간의 인연보다도 수백만 배의 깊은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내 손으로 들고 있는 횃불에 의해서 타서 죽게 되는 것을 여러분은 강 건너 불을 보듯이 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것이고, 여러분이 어두워서 구렁텅이에 빠지고, 물에 빠지고, 허방에 빠진 것을 나도 또한 보고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진지(眞知)와 영지(靈知)를 조사와 부처님처럼 그런 '참된 지(眞知)'와 '신령스런 지(靈知)'를 얻지 못한 몸이면서 나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가 죽을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이렇게 법상에 올라와서 부처님과 조실 스님을 대신해서 이렇게 여러분을 위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많은 말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알음알이를 조장하는 것이 불법이 아니고, 알음알이를 얻는 데에 불법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래가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말로써 공부를 할 수가 있고, 말로써 가르켜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지금 육도(六道)를 윤회하고 있는 중생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로써는 이 영지(靈知)와 진지(眞知)를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고 사량 분별심으로 들어서 그것을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불보살과 선지식과 모든 스님들이 ‘말로써 설할 수가 없다’해서 입을 다물어 버리고, 우리 같은 그러한 부처님과 같은 확철대오를 얻지 못한 범승이라 해서 법회를 갖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 몸만을 생각하고 입을 다물고 일생을 자기만을 위해서 정진을 하고 있다면,
불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 아직은 불법의 어떠한 점이 좋다고 하는 것에 눈뜨지 못한 사람, 어떤 것이 바른 불법인가에 대해서 분간을 못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누가 말을 할 것이냐 그말이여.

‘원래 '참진리'는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참된 말씀은 입으로 좇아 나오지 않는 것이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마는,
‘부처님은 그 많은 법을 설하셨건만 한 말씀도 설하신 바가 없다’  ‘무량중생을 제도하시되 한 중생도 제도를 받은 사람이 없다’ 이러한 말씀을 우리는 깊이 마음으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말로써 설할 수가 없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가 없지만 그래도 입을 벌려서 부처님은 49년 동안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고, 선문(禪門)에서는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불립문자(不立文字)하고 직지인심(直指人心)하야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문자를 세우지 아니한다 하시면서도 수없는 조사의 어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입으로 설할 수가 없지만 목숨을 바쳐서 설할 수 밖에는 없고, 중생의 사량분별로 귀를 통해서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지만 목숨 바쳐서 법문을 들어야 하고, 들으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자기에게 원만구족(圓滿具足)하게 다 갖춰 있으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찾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와 우리 중생과의 관계입니다.

진리는 찾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진리는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여러분에게 그 길을 안내하려고 노력을 해야 하고, 여러분은 또한 그것을 듣기 위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쳐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출현을 하셔도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부처님도 탄생을 하셨고, 모든 보살님과 모든 조사도 그렇게 해서 탄생을 하셨습니다.

앞으로 우리들도 그만큼 내게 갖춰 있는 것을 보기 위해서 목숨을 바칠 때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19분10초~35분31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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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춘래동견방초록~’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함허득통 설의(說誼) 참고.
*부처님 : [범] Buddha 음을 따라 한자로 불타(佛陀)•부도(浮圖•浮屠)•부타(浮陀)•발타(勃陀)•몰타(沒駄) 등으로 쓰고, 줄여서 불(佛)이라고만 하는데, '깨친다'는 말이다.
'부처님'이라 함은 '깨친 어른(覺者)'이란 뜻이다。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는 이를 말함이니,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함령(含靈)• 함식(含識)• 군생(群生)• 군맹(群萌)•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치연(熾然) ; ①매우 왕성한 상태. ②번뇌의 다른 이름—결(結)·박(縛)·전(纏)·취(取) 등등—가운데 하나이다.
치(熾)는 ‘성하다(盛--, 기운이나 세력이 한창 왕성하다), 맹렬하게 일어남, 횃불이 활활 타오름, 불을 붙여 이글이글 피게 함’의 뜻. 연(然)은 상태를 나타내는 접미사(接尾辭).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주재(主宰 주인 주,다스릴 재) ; ①어떤 일을 중심이 되어 맡아 처리함. ②주재자(主宰者, 어떤 일을 중심이 되어 맡아 처리하는 사람).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용화선원) p94-95 참조.
*치열(熾烈 성할 채,세찰 렬) ; 기세나 세력 등이 불길같이 맹렬함.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무생(無生) ; ①생멸(生滅)을 벗어난 절대의 진리. 생멸(生滅)이 없는 도리. 곧 불생불멸하는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알고 거기 안주하여 움직이지 아니함. 무생법인(無生法忍).
②아라한(阿羅漢) 또는 열반(涅槃)의 번역어. 번뇌를 없앤 경지를 말함.
*망령(妄靈) ;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남. 또는 그런 상태.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
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교외별전(敎外別傳) : 부처님께서 말씀으로써 가르친 바를 모두 교(敎)라 하는데, 교 밖에 따로 말이나 글을 여의고(不立文字) 특별한 방법으로써 똑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대번에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법문이 있으니 그것이 곧 선법(禪法)이다. 교는 말로나 글로 전해 왔지마는 선법은 마음으로써 전하여 왔으므로 이른바 삼처 전심(三處傳心) 같은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8, p34에서.
(5)世尊이  三處傳心者는  爲禪旨요  一代所説者는  爲教門이라. 故로  曰,  禪是佛心이요  教是佛語니라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教門)이 되었다。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教)는 부처님의 말씀이니라.


(6)是故로  若人이  失之於口則拈花微笑가  皆是教迹이요. 得之於心則世間麤言細語가  皆是教外別傳禪旨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빙긋이 웃은 것(拈花微笑)이 모두 교의 자취(教迹)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教外別傳禪旨)가 되리라.
*고행난행(苦行難行) ; 난행고행(難行苦行). 깨달음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며 하는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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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고통이 끊임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함.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살가죽을 벗겨 불 속에 집어넣거나 쇠매〔鐵鷹〕가 눈을 파먹는 따위의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함.
*범승(凡僧) ; 평범한 스님.
*죄과(罪過 허물 죄,허물 과) ; 죄가 될 만한 과실이나 허물.
*덩그다 ; '불이 붙다'의 사투리.
*어피차(於彼此) ; 어차피(於此彼). 이렇거나 저렇거나 귀결되는 바.
*숙세(宿世 지날 숙,세상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선문(禪門) ; 선종(禪宗). 문자를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선(禪)을 닦아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체득하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종파.
*원만구족(圓滿具足)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