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精進)2015.04.02 16:18
§(280) (게송)약인투득상두관~/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법문 / 용화선원의 가풍 / 선재동자의 진실함 / (게송)역력이빈주~ / 대의지하 필유대오.

온 세계는 그 자체가 낱낱이 자성(自性)이 있어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나의 ‘한 생각’이 발로(發露)해서 그렇게 이루어진 것들인 것입니다.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둥글다, 밝다’ 모두 이리 분별을 내서,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구속을 당하고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서 울었다 웃었다 하는 것입니다.
몽산 스님께서는 ‘오직 이 한 생각 화두에 대한 의심, 그 한 생각 돈독함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렇게 간절히 알뜰히 그렇게 해서 3년을 한다면 반드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증을 하신 것입니다.
용화선원 가풍—「누구를 막론하고 이 도량에 일단 방부(房付)를 들이고 같이 정진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러한 사상으로 정진을 하자」
선재동자가 그러한 무량공덕을 성취한 것은 오직 한 생각 진실한 그것 때문에 그러한 대도를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의심이 독로해서 의심이 크면 큰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없으면 아주 깨달을 수가 없다” 고인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송담스님(No.280)—85년(을축년) 동안거 결제 법어(8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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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데는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고
나무~아미타불~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다.

만약 사람이 상두관(上頭關)을 투득(透得)해 버리면 산하대지가 넓음을 비로소 깨달을 것이다.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인댄, 인간의 분별 경계(分別境界)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 같으면,

녹수와 청산에 어찌 구애(礙)를 받을 것인가.(何拘綠水與靑山)


중생은 자기 본마음 자리를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에—이 넓고 넓은 산하대지, 삼라만상(森羅萬象)과 두두물물(頭頭物物) 육도법계(六道法界)가 온통 다 자기의 집이요 한 마당이건만,

자기 본 마당, 본 마음자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자기의 분별 경계에 떨어져 가지고 거기에 취사(取捨)와 집착(執着)이 있어서 발 디딜 곳이 없어. 어디를 가나 편안치를 못하고, 어디를 가나 걸리고 몸 둘 곳이 없어.


한바탕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확연히 깨달아버리면 천당과 지옥도 걸릴 것이 없고, 인간의 부귀와 영화와 시시비비(是是非非)에도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금년 을축년 시월 십오일 동안거 결제일을 맞이했습니다.

청풍납자(清風衲子)가 사방에서 모여서 한철을 한 지붕 밑에서, 한 도량에서 정진을 하게 되었고 또 보살선원에도 경향 각지에서 백 명이 방부를 들이고 고락(苦樂)을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실답게 발심(發心)을 해서 실다웁게 정진을 해 가면 공기가 탁하고, 공장과 자동차에 모든 소음이 이렇게 심하고, 수용이 박하고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다 할지라도 ‘한 생각’ 철저해 버리면 그런 것이 도무지 걸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생각 돈독(敦篤)하고 철저하지 못하면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사사건건 걸리게 되고 내가 거기에 끌려 나가고, 사소한 일에도 성질을 내게 되고, 아무 일도 아닌 일에 마음이 동요가 될 것입니다.


온 세계는 그 자체가 낱낱이 자성(自性)이 있어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나의 ‘한 생각’이 발로(發露)해서 그렇게 이루어진 것들인 것입니다.


하늘에 달이 떴으되 달 자체가 ‘내가 달이다’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고, 하물며 ‘나는 밝다. 밝지 못하다’ ‘나는 슬프다. 나는 기쁘다’ 그러한 생각은 더욱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달 자체는 때에 따라서 둥글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 초승달이 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아주 캄캄하게 안보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는 전혀 그런 상(相)이 없습니다.


사람이 들어서, 내가 들어서 온갖 분별심을 일으켜 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 대해서 온갖 분별심을 내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둥글다, 밝다’ 모두 이리 분별을 내서,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구속을 당하고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서 울었다 웃었다 하는 것입니다.



백 명 대중이 한 방에 모여서 석 달 동안을 지낼 때에 한 생각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철저히 단속하지 못한다면 그 백 명 대중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중에 누군가는 마음이 동요가 되고, 한 사람 동요됨으로 해서 그 방에 여러 사람이 속이 불편해 질 것이고 이리해서 바람 잘 날이 없어.


그래서 몽산(蒙山) 스님께서 결제 법문에 말씀을 하시기를,

‘만약 이 도량에 와 가지고 함께 이 고요함을 함께 하고자 할진댄, 참선정진을 하고자 할진대는,

세상에 인연을 다 끊어 버리고, 집착과 거꾸러진 그런 생각을 다 제거해 버리고, 진실로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위해서, 생사대사만을 위해서 선원에 규칙을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인사(人事)로 왕래하는 거, 인사로 왕래하는 그 인사를 끊어버리고, 모든 수용은 인연 따라서 해. 밥이면 밥, 죽이면 죽, 반찬이 좋으면 좋은 대로, 짜면 짠 대로, 인연 따라서 수용을 하되,

아홉시부터서 세시까지, 삼경(三更) 동안을 제외하고는 수면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문밖에 거리에 나가지를 말 것이며, 밖에서 어떤 신도가 공양을 청(請)한다하더라도 나가지 말 것이며,


확철대오(廓徹大悟)하기 전에는 경(經)도 보지 말 것이며, 대중적인 행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경도 보지를 말아라.

이와 같이 여법(如法)하게 3년을 정진을 하되 견성(見性)을 하지 못하면 산승이 여러 대중을 대신해서 지옥을 가겠다’ 이렇게 법문을 하셨습니다.


3년, 10년 내지 30년을 정진을 하되 확철대오를 못하는 것은...


이와 같이 여법하게 정말 생사대사를 위해서 잠깐 동안도 한눈 팔 겨를이 없고, 잠깐 동안도 딴 생각할 겨를이 없어.

오직 이 한 생각 화두에 대한 의심, 그 한 생각 돈독함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렇게 간절히 알뜰히 그렇게 해서 3년을 한다면 반드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증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3년을 해서 깨닫지 못하면 내가 너희들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한 말씀이 얼마나 목숨을 걸고 보증하신 그러한 표현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용화선원(龍華禪院), 물론 어느 선원이나 다 마찬가지지만, 용화선원의 특이한 노선(線)이라고 할까? 가풍(家風)이라고 할까? 용화선원에서 바라는 용화선원의 특성을 구태여 말을 하자면,

‘불조(佛祖)와 같이, 불조가 깨달으신 바와 같이 그러한 철저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설사 조그마한 견처(見處)가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런 것을 인정을 하지 말아라.


알았다고 하는 소견(所見), 깨달았다고 하는 소견, 한철 두 철 하다보면 어떤 지견(知見)이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마는 불조(佛祖)의 친증처(親證處)에 바로 이르르지 못하면 자기가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아라.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말지언정 깨달았다 하면은 불조와 같이 불조 친증처에 이르러야 한다’ 이러한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체중현(體中玄) 도리, 여래선(如來禪) 도리, 공견(空見)을 봤다 하더라도,

그러한 ‘보았다’고 하는 소견을 속에 가지고 있으면, 그러한 지견을 속에 지니고 있으면 공부는 아무리 정진을 한다고 해도 그 이상 진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완전히 백지(紙) 상태—10년, 20년을 정진을 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초학자(初學者)의 마음, 순수한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자」 이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 도량에 일단 방부(房付)를 들이고 같이 정진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러한 사상으로 정진을 하자」 이것입니다.(처음~17분4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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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고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그 문수보살의 지시에 따라서 남쪽으로 일백십성(一百十城)을 향해 가면서 차례차례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친견했습니다.


한 선지식 친견하고 거기서 법문을 듣고 그리고 또 거기서 마음에 얻은 바가 있어.

그 다음에 그 선지식이 또 그 다음 선지식을 소개를 하면 또 그 선지식을 찾아가서 그 선지식 밑에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승사(承嗣)를 해서 그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거기서 또 얻은 바가 있어.


이렇게 해서 차례차례 53선지식을 친견해 나가는 데 그 53선지식 가운데에는 비구 스님도 있고, 신(神)들도 있고, 외도도 있고, 창녀도 있고, 보살도 있고, 동자도 있고, 온갖 종류의 선지식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의심 없이 위법망구적으로 친견하고 승사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53선지식한테 깨달은 법문을 한마디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가슴에 간직을 하고 마지막에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미륵보살을 친견해서 미륵보살이 손 한번 탁! 튕기는 바람에 53선지식한테 들은 모든 법문을 일시에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서 “다시 문수보살을 친견을 해라. 맨 처음에 친견했던 문수보살을 다시 친견해라”한 말씀을 듣고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리라’하고 마음을 먹자마자,

문수보살이 저 먼 일백십성이나 멀리 떨어진 그 문수보살이 오른손을 터억 뻗쳐 가지고 선재동자의 이마를 만져주셨습니다.


만지시면서 “선재선재(善哉善哉)라, 착하고 착하구나! 네가 철저한 신근(信根)이 없었다면, 53선지식을 그렇게 아무 딴 퇴타심(退墮心)이 없이 그렇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친견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조금 얻은 것을 가지고—그렇지 못했으면 조금 얻은 것으로 해서 만족을 삼아 가지고 중단을 했을 것이며, 조금 얻은 것으로서 거기에 집착을 했을 것이며, 오늘날과 같이 해탈과 선지식의 섭호(護)한 바가 되지를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선재동자는 확철대오를 해서 문수보살과 같이 보현보살(普賢菩薩)과 같이 모든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이르르게 된 것입니다.

삼독(三毒)이 삼취정계(三聚淨戒)로 변했으며, 육식(六識)이 육신통(六神通)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 선재동자가 그러한 무량공덕을 성취한 것은 오직 한 생각 진실한 그것 때문에 그러한 대도를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하고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목전분명취(目前分明取)하라  산입백운중(山立白雲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 역력(歷歷), 또록또록하고 분명하다 그말이여.

역력해서 빈주(賓主)를 여의었어. ‘주관 객관, 너다 내다’하는 그러한 마음이 뚝 떨어져 버렸다 그말이여.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여. 적적요요(寂寂寥寥)해서, 고요하고 고요해서 모든 ‘색상(色相)이다, 이것은 진공(眞空)이다’ 그런 색공의 견해도 다 끊어져 버렸다 그말이여.


목전(目前)에 분명취(分明取)하라. 우리 눈앞에 형단(形段)이 없으되—볼라야 볼 수도 없고, 만질라야 만질 수도 없고, 알라야 알 수 없는—이놈이 분명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이 알라야 알 수 없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해.


“의심이 독로해서 의심이 크면 큰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없으면 아주 깨달을 수가 없다” 고인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그 의심이 간절하고 크고 깊어서, 나의 마음과 밖과 온 허공계가 온통 이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꽉 찰 때,

우주 법계를 다 삼키고 남을 만한—눈으로 온 세계를 다 삼키고, 온 세계를 콧구멍으로 들어마셨다 뱉을 수 있는 그러한 큰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산입백운중(山立白雲中)이다. 산은 우뚝 백운(白雲) 가운데 섰느니라.(17분48초~27분4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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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약인투득상두관~’ ; ①『석문의범(釋門儀範)』 다비문(茶毘文)—쇄골편(碎骨篇) 참고. ②卍新纂續藏經 제65책 《高峰龍泉院因師集賢語錄》 제13권 ‘涅槃法語門—散灰’ 참고.

*상두관(上頭關) ; 조사관(祖師關).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투득하다(透得-- 통할 투,얻을 득) ; (사람 무엇)막힘 없이 환하게 깨닫다.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청풍납자(清風衲子 맑을 청,바람 풍,옷을 꿰맴 납,자식 자) ; 수행을 하여 맑은 기운을 지닌 스님을 청풍(清風)-맑은 바람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참고] 운수납자(雲水衲子) ; 여러 곳으로 스승을 찾아 도(道)를 묻거나 수행을 하러 여러 곳으로 다니는 스님을 머무름이 없는 구름(雲)과 물(水)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돈독(敦篤)하다(도타울 돈,도타울 독) ; (인정이나 마음이)매우 도탑고 신실하다. *도탑다 ; (정이나 사귐이)깊고 많다.

*발로(發露) ; 숨은 것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숨은 것을 겉으로 드러냄. 또는 그런 것.

*상(相) ; ①모습, 형태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몽산(蒙山)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인사(人事)사람 사이 지켜야  예의 간주되는 또는 그러 예의 키기 위한 행동.

*삼경(三更) : 二경~四경 (밤 9시~새벽 3시)으로 불가(佛家)의 지정된 취침시간.

*공양(供養)을 청(請)하다 ; 재가신도가 스님들께 공양(식사)을 드리기 위하여 초청하는 것.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경(經) ;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문헌.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견성(見性) : '성품(性)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자기의 심성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인 당체(當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 성불이라 한다.

*노선(線)개인이나 조직단체 따위 일정한 목표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따르는 활동 방침.

*가풍(家風) ; 한집안에서 오래 지켜 온 생활 습관이나 규범.

*불조(佛祖) : 부처님과 조사(祖師), 불(佛)은 삼세제불(三世諸佛), 조(祖)는 역대(歷代)의 조사를 말함.

*견처(見處) ; 자기 나름대로 얻은 어떤 생각이나 입장, 견해.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지견(知見) ; 배워서 얻은 지식과 보고 들어 쌓은 분별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

*친증처(親證處) ; 친히 증(證,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하다)한 곳.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래선(如來禪)생각과 알음알이가 아주 끊어지지 않아서 말의 자취가 있고 이치의 길이 남아 있는 선.

*공견(空見) ; 공(空)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그릇된 견해. 공(空)을 허무론적인 견해로 이해하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인과(因果)의 도리를 비롯한 모든 것의 존재가 부정된다.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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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華嚴經) ; 본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이 경은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한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다.

3가지 번역이 있는데, 60권은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 번역이고, 80권은 당(唐)의 실차난타(實叉難陀) 번역, 40권은 당(唐)의 반야(般若) 번역임.

이 가운데 40권은 60권과 80권의 마지막에 있는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며,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만 산스크리트 원전이 남아 있다.

*선재동자(善財童子) ; 화엄경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구도자(求道者). 문수보살의 법문을 듣고 발심(發心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하여 그 보살의 가르침대로 오십삼 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로 만나 보살도(菩薩道)를 배우고, 보현보살의 행원(行願 서원을 세우고 수행함)을 실천하여 진리의 세계로 들어감.

*문수보살(文殊菩薩) ;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부처의 완전한 지혜를 상징함.

문수사리는 산스크리트어 만주슈리(mañjuśrī)의 음사. 문수시리(文殊尸利),만수실리(蔓殊室利)라고도 쓴다.

‘문수’는 묘(妙, 신묘하다, 훌륭하다), ‘사리’는 길상(吉祥, 상서로움)의 뜻이다. 묘길상(妙吉祥)·묘덕(妙德)·유수(濡首)라 번역.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보좌하는 보살.

문수보살은 일반적으로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기도 하고, 경권(經卷)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化身).

≪화엄경≫ 속에서도 문수 보살은 보현보살(普賢菩薩)과 함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양쪽 협시 보살(挾侍菩薩)을 이룸.

*선지식(善知識) ; ①정직하고 덕(德)이 있는 벗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이. ②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연(佛緣)을 맺게 하는 사람. ③지식(知識)•선우(善友)•친우(親友)•선친우(善親友)•승우(勝友)라고도 함.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승사(承嗣 받들 승,이을 사) ; 후임자나 후대가 선임자나 선대의 권리나 의무를 뒤이어 물려받음.

*미륵보살(彌勒菩薩) ; Maitreya. 번역하여 자씨(慈氏).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출신으로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세존의 교화에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석가모니세존의 업적을 돕는다는 뜻으로 보처(補悽)의 미륵이라 한다.

*신근(信根) ; 신(信, 진리에 대한 확신)의 뿌리. 신념(信念,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굳게 믿으며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의 기초. 신근의 근(根)은, 나무뿌리와 같이 능히 유지시키는 것과 생기게 하는 것을 뜻함.

[참고] 신(信) : ①진리에 대한 확신。 ②신은 마음을 맑게 하고 해태를 막는 정신작용이다。 마치 수정주(水精珠)가 능히 탁한 물을 맑게 하듯이 마음에 신(信)이 있으면 마음으로 하여금 맑게 하는 것이다.

보살본업경(菩薩本業經)에 「만약 일체중생이 처음에 삼보의 바다에 들어오매 신(信)으로써 근본을 삼고 불가에 머무르거든 계(戒)로써 근본을 삼으라」하시고,

지도론(智度論)에 「불법대해(佛法大海)에는 신(信)으로 능입(能入)을 삼고 지(智)로 능도(能度)를 삼는다」하시며, 화엄경에 「신(信)은 도(道)의 으뜸이 되고 공덕의 어머니가 된다(信爲道元 功德母)」하신 것이다.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섭호하다(護-- 도울 섭,보호할 호) ; (부처님이 중생을) 받아들여 보살피다.

*보현보살(普賢菩薩) ; 불교의 진리와 수행의 덕을 맡은 보살. 한량없는 행원(行願)을 상징함.

산스크리트어 사만타바드라(Samantabhadra). 삼만다발타라(三曼多跋陀羅)라고 표기. 보현(普賢), 편길(遍吉)이라 한역. 경전을 수호하고 널리 퍼뜨리며, 불법을 펴는 보살.

연화대에 앉거나 여섯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오른쪽에서 보좌하는 보살.

보현보살은 또 중생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졌으므로 연명보살(延命菩薩)이라고도 한다.

모든 보살들은 다 각각 부처님 공덕의 어느 한 부분만을 나타내어 그것이 그의 특징이 된다.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삼취정계(三聚淨戒) ; 대승불교 보살(菩薩)이 지녀야 할 계법(戒法, 부처님이 정한 계율의 법)에 대한 총칭. 삼취청정계, 삼취계라고도 한다. 섭률의계(攝律儀戒)·섭선법계(攝善法戒섭중생계(攝衆生戒)로 나뉜다.


①섭률의계는 5계·10계·250계 등 일정하게 제정된 여러 규율위의(規律威儀) 등을 지켜 일체의 허물과 악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지악문(止惡門)이라고도 한다.

②섭선법계는 적극적으로 일체의 선을 지혜롭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수선문(修善門)이라고도 한다.

③섭중생계는 자비심으로 일체의 중생을 제도하는 일체의 이타행위를 말한다. 권선문(勸善門)이라고도 한다.


①섭률의계 ②섭선법계는 자리(自利)이며, ③섭중생계는 이타(利他)행위이다. 모든 계법은 그 어느 것이라도 이 3가지에 포함되는데, 청정하기 때문에 정계(淨戒)라고 한다. 취(聚)는 집적(集積)의 뜻.


원효대사는 삼취정계 가운데 ①섭률의계는 단()의 덕목(德目)이고, ②섭선법계는 지()의 덕목이며, ③섭중생계는 은()의 덕목이기 때문에, 이 삼덕의 과()를 얻으면 그것이 곧 정각(正覺)을 이루는 길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 삼취정계를 간직함에 따라 중생과 자기의 내심에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여래장(如來藏)·본각(本覺)·불과(佛果)를 볼 수 있게 됨을 강조하였다.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선가귀감](용화선원) p94-95 참조.

*(게송) ‘역력이빈주~’ ; 『청허집(淸虛集)』 ‘贈道能禪子’ 참고.

*역력(歷歷) ; 훤히 알 수 있게 분명하고 또렷함.

*빈주(賓主 손님 빈,주인 주) ; ①손님과 주인. 객관(客觀)과 주관(主觀). 현상세계와 절대의 진여(眞如). ②수행자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음. 제자(賓)와 스승(主).

*형단(形段 모양 형,구분 단) ; ①형태. 형태로 나타나서 보이는 것. ②모양. 외양.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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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싼또샤
용화선원2015.03.15 14:06
§(280) 용화선원의 가풍—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자.

**송담스님(No.280)—85년(을축년) 동안거 결제 법어(85.11.26)

 약 4분.



이 용화선원(龍華禪院), 물론 어느 선원이나 다 마찬가지지만, 용화선원의 특이한 노선(線)이라고 할까? 가풍(家風)이라고 할까? 용화선원에서 바라는 용화선원의 특성을 구태여 말을 하자면,


‘불조(佛祖)와 같이, 불조가 깨달으신 바와 같이 그러한 철저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설사 조그마한 견처(見處)가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런 것을 인정을 하지 말아라.


'알았다'고 하는 소견(所見), '깨달았다'고 하는 소견, 한철 두 철 하다보면 어떤 지견(知見)이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마는 불조(佛祖)의 친증처(親證處)에 바로 이르르지 못하면 자기가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아라.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말지언정 깨달았다 하면은 불조와 같이 불조의 친증처에 이르러야 한다’ 이러한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체중현(體中玄) 도리, 여래선(如來禪) 도리, 공견(空見)을 봤다 하더라도,

그러한 ‘보았다’고 하는 소견을 속에 가지고 있으면, 그러한 지견을 속에 지니고 있으면 공부는 아무리 정진을 한다고 해도 그 이상 진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완전히 백지(紙) 상태—10년, 20년을 정진을 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초학자(初學者)의 마음, 순수한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자」 이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 도량에 일단 방부(房付)를 들이고 같이 정진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러한 사상으로 정진을 하자」 이것입니다.(14분14초~17분4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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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선(線)개인이나 조직단체 따위 일정한 목표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따르는 활동 방침.

*가풍(家風) ; 한집안에서 오래 지켜 온 생활 습관이나 규범.

*불조(佛祖) : 부처님과 조사(祖師), 불(佛)은 삼세제불(三世諸佛), 조(祖)는 역대(歷代)의 조사를 말함.

*견처(見處) ; 자기 나름대로 얻은 어떤 생각이나 입장, 견해.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지견(知見) ; 배워서 얻은 지식과 보고 들어 쌓은 분별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

*친증처(親證處) ; 친히 증(證,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하다)한 곳.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래선(如來禪)생각과 알음알이가 아주 끊어지지 않아서 말의 자취가 있고 이치의 길이 남아 있는 선.

*공견(空見) ; 공(空)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그릇된 견해. 공(空)을 허무론적인 견해로 이해하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인과(因果)의 도리를 비롯한 모든 것의 존재가 부정된다.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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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싼또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