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16.01.03 §(253) (게송)상풍괄지소고해~ /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무서운 도적 / 자기 마음을 평등하게 가져라 / (게송)신상착의방면한~ / 생사는 호흡지간에 있다.
  2. 2015.12.21 §(010) 태전 선사 이야기 / (게송)십년불하축융봉~ / 업장소멸과 깨달음을 만드는 활구참선법 / 심호흡과 수식관 / 삼요—대신심, 대분심, 대의심.
  3. 2015.08.09 §(560) (게송)사중구의원~ / ‘이 방법으로 하면 반드시 나도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신심 / 선원(禪院)에 모여서 공부하는 까닭.
  4. 2015.07.12 §(527) (게송)여군동보우동행~ / 십법계(十法界) / 내가 본래 부처, 번뇌가 보리 / 정진은 안락지묘문(安樂之妙門) / ‘한 생각’ / (게송)정체종래절색공~ / 결정적인 신심.
  5. 2015.05.14 §(119) 신심, 분심, 의심(삼요) / 참선 공부는 승속(僧俗)이 없다 / 진실한 포교(布敎)란? / (게송)유안석인제하루~.
  6. 2015.03.26 §(118) (게송)법법본래무소주~ / 참마음을 일으켜 공부를 끝장내라 / 조실스님 꿈에 지옥고 광경 / 3가지의 도에 나아가는 첩경(捷徑)과 5가지의 철저한 바른 믿음.
  7. 2015.02.20 §(320) 설산동자의 설화 / 기도는 청정하고 간절하고 일여한 신심으로 소원성취를 하고, 거기에 그치지 말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데 목적을 두고서 해야 한다.
  8. 2014.10.09 •§•(275) 화엄경—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 / 비로자나불은 오케스트라 지휘자 / 신심 / 조실스님의 첫 설법 / 만공선사의 인가, 전법게.
  9. 2014.10.05 §(335) ‘토끼고기’로 인한 왕자비의 노여움 / 부부싸움 법규 / (게송)여군동보우동행~ / 바로 지금 이때를 여의고는 공부할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10. 2014.09.24 §(013) 신심, 분심, 의심 / 참선은 마군이와의 전쟁 /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

 

 

§(253) (게송)상풍괄지소고해~ /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무서운 도적 / 자기 마음을 평등하게 가져라 / (게송)신상착의방면한~ / 생사는 호흡지간에 있다.

 

밖에서 들어온 도적은 아무리 가지고 봤자 별것이 아니고,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도적은 자취도 없이 일어나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해독을 끼친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명심을 해야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모든 차별적인 상황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세상을 평등한 세상,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거든 먼저 자기의 마음을 비워라. 자기의 마음을 평등하게 가져라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생사는 도저히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젊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요, 건강하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닙니다. 남녀와 노소와 빈부귀천과 건강과 병약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생사는 언제나 우리 코앞에 닥쳐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상을 철저하게 느껴야 비로소 발심(發心) 했다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발심한 사람이라야 도를 닦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심(信心) 있는 곳에야사 비로소 불성(佛性) 씨에서 싹이 트고 잎이 피고, 가지 피고 피어서 열매를, 불과(佛果) 맺는 것이다.

 

**송담스님(No.253)—85 1 첫째 일요법회(85.01.06) (용253)

 

(1) 약 20분.

(2) 약 15분.

 

(1)------------------

 

상풍괄지소고해(霜風刮地掃枯)한데  수각동군영이과(誰覺東君令已過)리오

나무~아미타불~

유유영매선누설(唯有嶺梅先漏洩)한데  일지독향설중개(一枝獨向雪中開)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상풍괄지소고해(霜風刮地掃枯)한데, 서릿바람이 땅을 깎고 마른 뿌리를 쓸어. 서릿바람이 서리와 눈바람이 어떻게 매섭고 거칠던지 땅을 깎으며 앙상하게 드러난 마른 뿌리를 갖다가 쓸고 지나가는데,

수각동군영이과(誰覺東君令已過). 누가 동군이—‘동녘 ()’, ‘임금 ()’, 봄을 갖다가 동군(東君)이라고 그러는데, 누가 봄이 이미 지내간 것을 깨달으리오.

서릿바람이 불고 눈바람이 매섭게 부니까 그것이 엄동설한(嚴冬雪寒)인줄 알고 춥다고만 생각을 하지만 매섭고 추운 바람 속에 벌써 봄바람이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유유영매선누설(唯有嶺梅先漏洩)한데, 오직 산말랑이에 매화가 먼저 봄뜻을 갖다가 누설을 했다 말이야.

일지독향설중개(一枝獨向雪中開)로구나. 매화 가지가 속을 향해서 홀로 피었구나.


지금 소한지절(小寒之節) 되어서, 영하로 수은주가 내려가서 매우 날씨가 춥습니다. 그러나 매섭고 춥지만 머지않아서 대한(大寒) 지내면 입춘 시절이 돌아옵니다.

입춘(入春) 되면 벌써 봄이 버린 거고, 입춘이 되기 전에 지금 매서운 추위 속에 이미 봄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산이나 들에 가면 벌써 매화가 잎을 벌리기 시작했고, 매화 말고도 다른 모든 꽃들이 앙상하게 보이지만 벌써 물이 오르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을축년 1985 1 6 첫째 법회날을 맞이했습니다. 자리를 빌어서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 동남동녀(童男童女) 여러 가정에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의 빛이 두루 비추어서 모든 액난과 재난은 소멸이 되시고, 여러분의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이 원만히 성취되시기를 간절히 비는 바입니다.


작년 첫째 일요일에는 작년 동안 우리가 마음에 항시 간직하고 지켜갈 일에 대해서성을 내지 말자. 진심(瞋心) 내지 말자. 진심을 내면 온갖 재앙(災殃) 거기에서 일어난다. 그러니 진심을 내지 말고 기쁨과 자비로서 해를 살아가자이러한 말씀을 드렸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얼마만큼 동안을 명심을 하고 단속을 하시면서 동안을 지내셨는지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보시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생각일어나는 것을 돌이키지 못하고 생각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을 통해서 표현이 되고, 행동으로 옮겨져 버리면 다시는 그것을 쓸어 담지를 못하고,

벌써 생각 진심(瞋心) 일어나는 독기(毒氣) 밖에 퍼져 나가서 사람에게 닿으면 사람에게 해를 주고, 물건에 독기가 닿으면 모든 식물 생물도 () 입게 되고, 가구나 그릇에 독기가 닿으면 그것이 파괴가 되고,

어떠한 일에 성내는 독기가 닿으면 일을 망가뜨리고, 마침내는 생각 뿜어대는 독기가 남만 해롭게 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몸과 자기 자신의 희망과 자기의 운명을 파괴하고 말아 버리는 것입니다.

 

생각이 그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명심을 한다면, 우리는 밖에서 들어오는 도적을 막는 데에는 상당히 신경을 쓰지만 자기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도적을 단속하는 데에는 등한(等閒)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 들어온 도적은 아무리 가지고 봤자 별것이 아니고,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도적은 자취도 없이 일어나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해독을 끼친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명심을 해야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금년에는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 오시는 불자(佛子)로서 어떠한 마음으로 동안을 지낼 것인가? 물론 작년이나 그러께 말씀드린 그것을 완전히 실천을 하고, 앞으로도 훌륭하게 실천을 있도록 노력을 하셔야겠지만 금년에는 좀더 구체적인 것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어떠한 일을 당했을 때에 상대방이 먼저 나에게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주도록내가 상대방에게 요구할 것이 있으면 내가 먼저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는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동안을 지내시도록 노력을 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됩니다.

 

언제나 자기는 상대방에게 어떻게 주기를 바라면서 상대방이 요구한 것을 내가 먼저 하려고 하는 생각은 뒤로 미루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그렇고, 부부간에도 그렇고, 형제 자매간에도 그렇고, 친구 간에도 그렇고, 이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노력을 하신다면 반드시 상대방도 나의 참뜻을 이해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설사 언짢은 일이 있더라도 내가 먼저 오해를 풀고, 내가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고, 내가 먼저 사과를 하고, 내가 먼저 생각을 돌이키려고 노력을 하고, 내가 먼저 상대방을 용서를 하고, 이렇게 됨으로써 빠른 시일 내에 엉어리가 풀리고 사이가 화목하게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중생들은 언제나 저쪽에서 먼저 자기에게 주기를 바라고 그래 가지고저쪽에서 자기한테 주니까 내가 그런다그렇게 피차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좀체 사이가 좋게 화해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나로 인해서 있는 것이지, 없이 상대방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정에 물론 어른이 중심이 되겠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각자 자기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 있어서도 그렇고, 사회에 있어서도 그렇고, 직장에 있어서도 그렇고, 국가에 있어서도 그렇고 언제나 자기가 세계의 중심점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모든 것이 벌어져 있는 것입니다.

 

해도 자기로 인해서 해가 거기 있는 것이고, 자기로 인해서 달이 거기에 있는 것이고, 자기로 인해서 산과 강이 있는 것이고, 자기로 인해서 봄도 있고 가을도 있고 겨울이 있는 것이고, 자기로 인해서 부모도 있고 형제도 있고 자녀도 있고, 자기로 인해서 주변이 있는 것입니다.

 

세계 우주 법계가 가장 중심점은 자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좋다, 나쁘다 것도 사실 전부 자기를 중점으로 해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라 정치를 잘해도, 법률이 좋아도, 자기에게 해로우면나쁘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법이 좋지 해도 자기가 유리하면 좋다 그렇게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현이 되어야,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아니한 사람이라야, 사심(私心) 극복한 사람이라야 자기에게 해로와도 법이 옳으면 옳다. 제도가 옳으면 옳다 말할 수가 있는 것이지,

사욕과 사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좋다그래도 우선 자기에게 해로우면 그걸 좋아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법이 있고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을 좋게는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맞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겨울이 추워서 모다 좋다해도 가운데는 겨울이 되기를 몹시 기다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은 스키 타기를 좋아하고 스케이트를 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 연탄 돈도 없고 방이 추워서 얼어죽거나 말거나 전혀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추워서 얼음이 꽁꽁 얼고 눈이 소복이 내리기만 하면 그것 생각만 하고 어쨌든지 춥고 눈이 많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봄이 오면은 좋아하지만 좀더 스케이트와 스키를 타고자 하는 사람은 봄이 되어서 날씨가 뜨뜻했다 하면은 그렇게 아쉬워서 좀더 겨울이 길기를 바라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근(卑近) 예를 들었지만, 중생은 각기 자기 () 다르고, 자기의 모습이 다르고, 자기의 처지가 낱낱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사물을 보고도 관점이 다르고 기호가 다르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자기의 판단과 행동이 차이가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모든 차별적인 상황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세상을 평등한 세상,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거든 먼저 자기의 마음을 비워라. 자기의 마음을 평등하게 가져라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의 마음, 각자가 마음을 비워서 허공과 같이 한다면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한마음이 것이며 따라서 세계는 평등한 세계로 화하게 되는 것입니다.(처음~1925)

 

 

 

 

 

(2)------------------

 

산을 깎아서 바다를 메움으로 해서 대지를 평평하게 만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산을 깎아서 깊은 데를 메워 가지고 평평하게 만들려는 그러한 것은 설사 일시적으로 평평하게 만든 같지마는 그런 것은 악평등(惡平等)이라 하는 것입니다.

 

산은 높은 데로 높아서 좋고, 바다는 깊어서 거기에 물이 고이니까 거기에는 온갖 해초와 어류가 서식을 해서 바다는 바다대로 좋은 것이지, 산을 깎아서 바다를 메워 가지고 평지를 이루어야만 그것이 평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옳은 제도가 아닌 것입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모든 사람의 재산을 몰수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한다고 하는 그러한 제도는 지금 여러분께서도 잘아시는 바와 같이 그러한 제도를 가지고 사람 사람의 개성은 말살되고 자유는 박탈이 되고,

그래 가지고 모든 사람이 잘사냐 하면 모든 사람이 악법, 악평등에 의해서 쇠사슬에 묶인 사람이면서 기계와 같이, 사람이면서 짐승과 같이, 멀쩡한 사람이 국민이 노예가 되어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무슨 일을 해서 재미가 있으며, 무슨 일이 의욕적으로 되어지겠습니까?

 

그래서 경제는 침체하게 되고, 개개인의 자유는 박탈이 되기 때문에 중공(中共) 같은 데서는 그러한 맑스주의 그런 사상으로부터 차츰차츰 벗어나서, 다시 그전에 그렇게 원수처럼 상대하고 공산주의를 부르짖었던 나라가 서서히 거기서 벗어나 가지고 자유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추라고 생각이 됩니다.

 

북한에도 빨리 그러한 생각을 고쳐서 남북통일이 하루빨리 앞당겨져서 핏줄을 받은 한겨레가 서로 왕래하고 서로 평화롭게 통일이 되어서 세계에 으뜸가는 그러한 민족의 보람을 찾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조그만한 나라에 38(三八線)으로 갈려서 적은 나라지만 남한만 가지고서도세계올림픽이다 또는 지체부자유자의 기능대회 그런데 나가도 많은 금메달을 따오고 그러는데 남북이 합해서 나간다면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남북통일이나 세계 평화도 불법(佛法) 입각해서 보면 우선 나의 마음부터 작업이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2359)

 

 

신상착의방면한(身上着衣方免寒)하되  구변설식종불포(口邊說食終不飽)니라

나무~아미타불~

막괴좌래빈권주(莫怪坐來頻勸酒)하면  자종별후견군희(自從別後見君稀)로다

나무~아미타불~

 

신상착의(身上着衣) 방면한(方免寒)하되, 위에 옷을 걸치는 것은, 옷을 입는 것은 바야흐로 추위를 면할 있거니와,

구변설식(口邊說食) 종불포(終不飽). 입에 밥을 말하는 것은, 입갓으로 하고 얘기만 한다고 해서는 마침내 배가 부르지 않느니라.

 

몸뚱이 위에다가 쉐타를 입고, 자켓를 입고, 오바를 입고, 그렇게 해서 옷을 갖다가 걸치면 충분히 추위를 면할 수가 있지마는 가장자리에다가 입으로만 자꾸 먹을 얘기를 한다고 해서 배가 부르는 것은 아니다.

 

입으로만 조국통일 조국통일, 입으로만 세계평화 세계평화, 입으로만 선진조국 창조, 자꾸 입으로만 부르짖고.

입으로만 참선 참선, 입으로만 최상승법 최상승법, 입으로만 봤자 그걸 가지고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지로 마음속에 그것을 실천을 때에 그러한 목적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막괴좌래빈권주(莫怪坐來頻勸酒)하는 것은, 서로 마주 앉기만 하면 자주자주 술을 권하는 것은이렇게 하라 만나기만 하면 술을 권하고, 자주 술을 권하는 것은,

자종별후견군희(自從別後見君稀). 마지막 이별한 뒤에는 다시 만나기가 어려울 같아서 그래서 이렇게 만나기만 하면은 술을 권한다.


법회 때마다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 들어라. 어쨌든지 참선(參禪) 해라. 밖으로 나가는 마음을 밖으로 쓰지 말고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곳을 관조(觀照)해라. 그래 가지고 참나를 깨달아라

자꾸 앉을 마다, 법회 때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한번 이별하게 되면은 다시는 만나기 어렵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 다음 법회날 아무 날인데 그때 오면은 법문 들을 있고 만날 있을 테지, 저런 말을 하는가?” 하지만, 사람의 목숨은 ! 믿을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심심치 않게 사람이 죽어가고교통사고로 죽고, 암으로 죽고, 뭘로 죽고 가지고, 멀쩡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서 그렇게 만나기가 어려운 것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너무너무 매일같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죽은 것만 알지, 자기가 어떻게 것인가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생사(生死) 언제 있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사람은하루 동안에도 생사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그러니까네가 아직 공부를 못하겠구나

다음 사람에게 물으니까생사는 한끼 먹을 사이에도 있습니다. 일향지간(一餉之間)에도 있습니다그러니까너도 공부를 아직 못하겠구나

사람은 호흡지간(呼吸之間) 있습니다.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는 사이에도 생사가 있습니다” “너는 공부를 있겠다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생사(生死) 하는 것은 멀리 잡을 것이 아니라 하루도 멀고, 한끼도 멀고, 호흡 사이에 있다고 하는 , 그렇게 무상하고 기약할 없는 것이 우리의 생사인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천여 명이 앉아 계시지만, 생사는 도저히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젊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요, 건강하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닙니다. 남녀와 노소와 빈부귀천과 건강과 병약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생사는 언제나 우리 코앞에 닥쳐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상을 철저하게 느껴야 비로소 발심(發心) 했다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발심한 사람이라야 도를 닦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강수정이추월림(江水淨而秋月臨)이요. 강물이 맑아야사 가을달이 거기에 이르러 다다르고, 신심생이제불강(信心生而諸佛降)이다. 신심이 나야 모든 부처님이 강림(降臨) 하신다그랬습니다.

강물이 흙탕물이 된다면 아무리 하늘에 깨끗한 둥근달이 있다 하더라도 강물에 달이 비추지를 못할 것이고, 세상에 모든 부처님이 불보살이 계신다 하더라도 각자 마음에 신심(信心) 없다면 사람은 부처님과 천만 , 백억만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강물만 맑으면은 언제라도 달빛은 강에 비출 것이며사실은 강물이 맑고 더럽고 상관없이 바로 거기에 달빛은 있는 것입니다마는, 더러우면 강물에 거기에 비추지를 못하는 게고,

우리가 아무리 신심이 많고 적고, 악하고 선하고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불성(佛性) 있는 것은 그것은 원리요 사실이지만, 신심이 없으면 불성이 거기에 싹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신심이 있는 곳에야사 비로소 불성의 씨에서 싹이 트고 잎이 피고, 가지 피고 피어서 열매를, 불과(佛果) 맺는 것이지, 신심이 없으면 불종자(佛種子) 속에 있어도 영원히 죽은 종자처럼 싹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1926~3348)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게송) 상풍괄지소고해~’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1 5염화(拈花)’ 남명천(南明泉) 게송 참고.

*서릿바람 ; 서리가 내린 아침에 부는 차가운 바람.

*엄동설한(嚴冬雪寒) ; 내리는 한겨울의 심한 추위.

*봄뜻 ; 봄이 오는 기운.

*누설(漏泄·漏洩 / ) ; ①비밀이 남에게 은밀히 알려짐. ②기체나 액체 따위가 밖으로 새어 나감.

*산말랑이 ; ‘산마루(산의 등줄기의 가장 높은 )’ 사투리.

*소한지절(小寒之節) ; 소한의 절기(節氣). 소한의 . 소한의 계절(季節).

*신남신녀(信男信女) ; 불교에 귀의한 재가의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를 말한다.

*동남동녀(童男童女) ;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아울러 이르는 .

*진심(瞋心) ; 왈칵 성내는 마음.

*재앙(災殃) ; 뜻하지 않게 생긴 불행한 변고. 또는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생긴 불행한 사고.

*등한(等閒,等閒視) ; 무관심하거나 소홀하게 여김.

*불자(佛子) : 부처님의 아들이란 말이다。불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지혜 목숨(慧命) 이어 가고, 법의 집과 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그러께 ; 지난해의 바로 전해. (동의어) 재작년(再昨年), 전전해(前前해), 지지난해, 전전년(前前年), 거거년(去去年).

*엉어리 ; ‘응어리(원한이나 울분 따위로 가슴속에 쌓여 맺힌 감정)’ 사투리.

*() ; (산스크리트어: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비근하다(卑近-- 낮을·가까울·알기 쉬울 /가까울 ) ; 주위에서 흔히 보고 들을 있을 만큼 가깝고 알기 쉽다.

 

 

 

 

 

------------------(2)

 

*악평등(惡平等) ; 옳고 그름이나 잘잘못을 가려 따지지 않고 무엇이든지 무조건 평등하게 하는 .

*38(三八線)2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1945 815 맥아더가 발표한일반명령 1 의해 한반도의 38도선 이북의 일본군의 항복은 소련이, 이남의 일본군의 항복은 미국이 접수한· 양국의 한반도 분할점령 군사분계선.

38선은 1953 6 · 25 전쟁이 끝나고 정전협정에 따라 설정된 현재의 군사분계선과 다르지만, 현재까지도 흔히 군사분계선을 삼팔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게송身上着衣方免寒  口邊說食終不飽 ;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 10황벽(黃檗) : 汝等諸人盡是噇酒糟漢송고(頌古)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10 390주조(酒糟)’ 운문고(雲門, 대혜종고) 게송 참고.

*(게송) 莫怪坐來頻勸酒  自從別後見君稀 ; [선종송고련주통집(禪宗頌古聯珠通集)] 27 불안청원(佛眼淸遠) 게송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10 393형의(形儀)’ 참고.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관조(觀照) ; ①참된 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함. ②지()로써 (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 (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 ()하여 바르게 아는 .

*일향지간(一餉之間  /식경食頃·   먹을 정도의 짧은 시간 /가다·이를 /사이 ) ; ‘  먹을 사이, ‘짧은 시간 동안 뜻한다.

*발심(發心) ; ①불도(佛道=菩提=眞理)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 (원어)發起菩提心 발기보리심, 發菩提心 발보리심.

*(게송) 江水淨而秋月臨  信心生而諸佛降 ;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預修十王生七齋儀纂要) (大愚集述) 8 소청성위편(召請聖位篇) 게송 참고(한국불교전서 11).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있다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근본 성품, 각성(覺性), 자성(自性).

*불과(佛果) ; 불인(佛因, 부처님이 되기 위한 인因. 모든 선근공덕善根功德) 대응어. 불도수행의 결과. 불위(佛位). 부처라고 하는 궁극의 결과. 결과로서 부처로 상태. 깨달음.

 

 

Posted by 닥공닥정
법회(입춘기도)2015. 12. 21. 13:41

 

 

§(010) 태전 선사 이야기 / (게송)십년불하축융봉~ / 업장소멸과 깨달음을 만드는 활구참선법 / 심호흡과 수식관 / 삼요—대신심, 대분심, 대의심.

항시 이 용화선원에서 조실 스님께서 십 년 동안을 그렇게 간절히,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말씀해 주시던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 방법은 무량겁으로 내려오는 그 죄업의 열매를 녹여서 깨달음의 과일을 만드는 방법이고, 거기 그 열매로부터 가지가 뻗어 나와 이 세계에 가득차도록 가지가 번지고 번져서 한량없는 죄의 종자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그놈마저도 눈 한번 감았다 뜬 사이에 그놈을 소멸을 해서, 그놈을 돌려 가지고 깨달음이 되도록 만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큰 신심(信心)이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절에다가 돈 많이 가져오고 부처님 앞에 절 많이 하고 그것이 아니라 ‘나도 아무리 내가 여자고, 아무리 내가 말세에 태어났고, 아무리 내가 몸이 병이 있고 약하다 하더라도 옳은 방법으로 옳게만 공부를 하면은 나도 틀림없이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대정신(大正信)입니다. 바른 믿음입니다.


오직 될 수 있으면 빨리 시간을 단축하고 그리고 바르게 깨달으려면은 무조건(無條件), 무이로(無理路), 무어로(無語路), 무모색(無摸索)—더듬어 들어가지 말 것이며, 따져 들어가지 말 것이며, 이리저리 비교하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해서 지해(知解)와 사리상량(邪理商量)으로 알려고 하지 말 것입니다.
다못 거두절미하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해 갈수록 답답하고 꽉 맥힌 것, 그것이 공부가 가장 잘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암만 해도 답답하기만 하고 아무 것도 안 되니, 이 공부가 잘된 것입니까, 공부가 잘못된 것입니까?’ 이렇게 와서 묻는 분들이 종종 계시는데, 갈수록 알 수가 없고, 꽉 맥히는 그분이야말로 가장 올바르게 공부를 하고 계시는 분이고, 그렇게 해 나가야, 갈수록 그 알 수가 없이 꽉 맥혀야 그분은 깨달을 수 있는 분입니다.
솔솔 따져 들어가고, 무엇이 알아 들어가는 것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어서 재미를 거기다 붙여 가지고 무엇을 들여다보고 앉았고 이런 사람은—그건 참, 도저히 그런 공부는 차라리 공부 안 한 것만 못합니다. 그냥 아들딸 잘되라고 관세음보살 부르는 게 훨씬 낫습니다.


**송담스님(No.010)—76년 입춘법회 법문(76.02.04)(60분) (용010)


(1/3) 약 19분.

 

(2/3) 약 22분.

 

(3/3) 약 21분.


(1/3)----------------

녹음기 사정으로 조실 스님 법문을 계속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충 그전에 조실 스님께 법문 들은 것을 기억나는 대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축융봉(祝融峰)에 태전 선사(太顚禪師)가 떠억 머물러 계시는데, 그때 민가에 소문이 나기를 도술을 부리고 그런 요승(妖僧)이 축융봉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비가 삼 년이나 오지 않아서 농사를 짓지 못하고 이런다.
그래 가지고 소문이 나니까 그때 원님이 그 말을 듣고—유가(儒家)에서는 요승이라고 했지마는 그때 불가(佛家)에서는 큰 도사라고 아주 모든 신도로부터서 신임을 받고 존경을 받고 명망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유가의 입장, 선비의 입장에서는 불교의 도인(道人)이 그렇게 계신 것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해 가지고 ‘무슨 트집을 잡어서라도 이 스님을, 태전 선사를 큰 벌을 내려 가지고 없애서 불교가 흥왕하는 것을 방지를 해야겠다’

이렇게 벼르고 있던 차에 마치 비가 이렇게 오지 아니하고 그러니까, 그것을 조건을 잡기 위해서 홍련(紅蓮)이라고 하는 기생을 시켜서—그 홍련이는 그때 당시 중국 천하에서 제일 미인이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천하일색으로써 아직 한번도 정조(貞操)를 뺏긴 일이 없이 고대로 그 정조를 지키면서 글 잘하고, 시 잘 짓고,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그런데다 천하의 일색이라 그 홍련이를 시켜 가지고,
“너 백일 동안의 말미를 줄 테니, 태전 선사한테 가서 태전 선사를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기어이 파계(破戒)를 시켜라.” 원님한테 그러한 특명을 받고서 비밀리 그 축융봉을 올라갔습니다.

올라갈 때에 처음에는 아주 태전 선사를 신(信)하는 신도로 가장을 해 가지고, 아주 가서 절을 석 자리를 하고, 입으실 것, 잡술 것, 향에다가 과일에다 갖은 정성 들인 음식, 기타 모든 물건을 마련을 해 가지고 가서 갖다 바치고 그야말로 생명이라도 바칠 것 같이 온갖 정성을 다 드렸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그렇게 정성을 들여 가지고는 차츰차츰 그 스님 가까이 해 가지고 ‘법문을 해 주시라’고 이렇게 해 가지고는, 낮에 그러다가 나중에는 밤에도 그 방에 드나들고, 차츰차츰 익혀 가지고 한 달, 두 달, 석 달 해서 백일이 거의 다 차갔습니다.
그래도 조금도 그 태전 선사는 눈 한번 거들떠본 일이 없고, 처음이나 중간이나 백일이 차도록 조금도 다른 기색이 보이지를 안 해.

그래서 이 홍련이라고 하는 기생은 만약에 백일 동안에 태전 선사를 파계를 시키지 못하면은 자기는 원님한테 쥐도 새도 모르게 사형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일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온갖 아양을 떨고 마지막에는 아주 노골적으로 아양을 떨고, 야수를 떨고, 꼬리를 치고 해도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새는 날 밤에는 울면서 “저를 살려 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대관절 그대가 신심으로써 불법을 배울라고 왔다고 해 놓고 무슨 속에 그러한 한이 있어서 살려 달라고 그러느냐?”
“다름이 아니라 저는 기생으로서 원님의 특별 비밀 명령을 받고서 스님을 파계 시킬려고 왔습니다. 만약에 오늘 스님을 파계를 시키지 못하면 저는 이 길로 가서 죽게 됩니다”
“그래, 그렇다면 좋다”

그런데 그 홍련이의 팔에는 앵혈(鶯血)이라고—만약에 살에다가 앵혈이라고 하는 앵무새의 피를 묻혀 가지고 있으면은 정조를 뺏기면은 그 피가 변해 버립니다. 정조를 뺏기지 아니하면 그 피가 빨간 피빛깔이 변하지 않고,
그래서 앵혈을 묻혀 가지고 온 것을 보이면서 “이것을 보십시오. 제가 이대로 가면은 이 핏빛이 변하지 아니함으로 해서 제가 아무리 거짓말로 스님을 파계시켰다고 해도 이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울면서 사정을 하니까, 태전 선사가 “그러면 좋다. 내가 글 한 수(首)를 써줄 테니, 이것을 갖다가 원님한테 보이면은 네 생명은 살 것이다”

‘십년불하축융봉(十年不下祝融峰)’  십 년 동안을 축융봉을 내려가지 아니했는데,
‘관색관공즉색공(觀色觀空卽色空)’이라. 관색관공즉색공—보통 새기기를 ‘색을 보고 공을 관(觀)하니 곧 색(色)이 공(空)했더라’ 이렇게 새기지마는, ‘색(色)을 보는 관(觀)이 공(空)했으니 곧 색(色)이 공(空)했다’ 이렇게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십 년을 축융봉을 내리지 아니하니, 색(色)을 보는 관(觀)이 공(空)했으므로 색(色)이 곧 공(空)했더라.

‘여하조계일적수(如何曹溪一適水)’가, 어찌 조계(曹溪)—육조(六祖) 스님이 조계산에 계셨기 때문에 육조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모든 도인들은 조계 후손입니다.
그래서 어찌 육조 스님의 법통을 이어받은 이 조계(曹溪)의 한방울 물이 ‘긍타홍련일엽중(肯墮紅蓮一葉中)’이냐. 어찌 홍련이의 한 이파리 속에 떨어질까 보냐.

다시 말하자면은 이 육조 스님의, 달마 스님 이래로 내려오는 이 조계의 법통을 가진 나의 한방울 물이 홍련이 너 같은 기생의 몸에 어찌 떨어질 수가 있겠느냐. 어찌 내가 너한테 파계를 할 수가 있겠느냐 그런 뜻이지요.
그러한 글을 써서 홍련이의 옷에다가 그것을 죽죽죽죽 써 가지고, 그것을 네가 갖다가 바쳐라.

그래서 홍련이는 태전 선사를 파계 시킬 그런 목적으로 왔었지마는 백일 동안을 법문을 들으면서 갖은 아양을 떨었지마는 마침내 태전 선사를 극복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태전 선사의 그 덕행과 법력과 도력에 감화를 입어서 정말 안팎이 고대로 진실한 제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백배사죄(百拜謝罪)를 하고 태전 선사가 적어주신 그 글을 갖다가 원님한테 갖다 바쳤습니다.

원님이 그 글을 턱 보고는 그길로 태전 선사한테 와 가지고 사죄를 하고, 태전 선사의 제자가 되어서 철저히 신(信)하고 그 지도하에 공부를 해 가지고 큰 도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에 분명히 전해 내려오고 전등록에 적혀 내려오는 사실입니다.
조실 스님이 이 법문을 하셨으면은 좀 더 실감있게 여러분에게 잘 말씀하셨을 텐데, 제가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입춘을 기해서 마침 정월 신수기도 도중이지마는 우리나라의 모든 불교를 믿는 분이나 불교를 안 믿는 분이나, 입춘을 기해서 입춘 불공(佛供)을 함으로써,
일 년 모든 관재구설(官災口舌)과 사백사병(四百四病), 팔만사천 재앙을 전부 물리치고, 모든 소원을 성취하고, 사대(四大) 강건하고 육근(六根)이 청정(清淨)해서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입춘 불공을 하는 준례가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방방곡곡의 모든 큰 절, 작은 절에서는 입춘 마지(摩旨)라 해 가지고 아주 새벽부터서 시간을 맞춰서 모다 불공을 하고 그래 내려오고 있습니다마는,
우리 절에서는 새벽에 들었거나 또는 저녁에 들었거나 항시 부처님 마지 올리는 사시(巳時)를 기해서 이렇게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으로써 모든 법요식을 거행해 내려오고 있느니 만큼 오늘 사시를 기해서 이렇게 입춘 법회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조실 스님의 태전 선사에 대한 법문 말씀이—불법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 기생을 보내 가지고, 기생으로 하여금 갖은 아양을 떨게 해 가지고, 큰스님을 파계를 시킴으로써 불법을 아주 송두리째 뿌리를 뽑아서 아주 종자를 없앨 양으로 했던 것이,
그 태전 선사의 거룩한 덕행과 법력으로써 오히려 그 기생과 원님을 감화를 시켜 가지고, 그 지방에 불법을 융숭하게 한 그러한 역사를 들어서 말씀을 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서화담, 황진이, 또 박연폭포’해서 이걸 ‘개성삼절(開城三絶)’이라 해 가지고 이 황진이 이야기가 나오면은—황진이가 서화담을 그렇게 파계를 시킬랴고 갔다가 서화담은 종래에 극복을 못하고, 서화담은 끝끝내 황진이한테 넘어가지 않았는데,
불교의 지족 선사한테 가니까 지족 선사가 단박 황진이한테 넘어갔다고 하는 그러한 소설도 내려오고, 또 영화로도 모다 그러한 이야기가 만들어져 갖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고려 때 너무나도 불법을 국교로 모시고 임금으로부터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그렇게 돈독히 신하고,
왕자, 임금님의 아들이나 또는 고관대작, 대신들의 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서민들도 그 가문이 좋고, 삼 형제를 낳으면 그 삼 형제 중에 제일 잘난 아들로 골라서 스님이 되도록 부처님께 바치고, 이렇게 해서 온 나라가 참! 속속들이 불교를 그렇게 깊이 신해 내려오다가,

고려 운이 다 가고 이조가 들어서게 되자, 이조에 있어서는 유교를 국교로 해 가지고 유교를 숭상하는 그러한 정책을 쓰게 되니 만큼,
그러기 위해서는 종래 모든 백성들이 불교를 그렇게 신해 오던 터이라, 고대로 두고 유교를 암만 포교를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불교를 없이하고, 불교를 아주 좋지 못한 걸로 일반 백성들한테 이해를 시키고 납득을 시켜 가지고,

그래 해야만 불교에 대해서는 차츰차츰 신심이 떨어져야 유교 정책을 쓰기에 편리하게 되기 때문에 온갖 못된 이야기를 만들고, 조그만한 일도 굉장히 크게 잘못한 것처럼 모다 악선전(惡宣傳)을 하고 퍼뜨려 가지고, 그렇게 해서 일반 사람들에게 불교에 대한 인식을 아주 좋지 않게 그렇게 퍼뜨렸던 것입니다.

그리해서 신돈(辛旽)이의 역사라든지, 그것도 일양으로 신돈이란 사람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고, 내용은 그분의 공로도 굉장히 컸었지마는 말경(末境)에 가서 조그만한 잘못도 크게 잘못한 것처럼 그렇게 모다 선전을 해서 전해 내려오고,

또 지족 선사에 대한 이야기도 ‘없는 얘기’를 그렇게—유교 선비인 서화담은 그렇게 훌륭한 분으로 내세우고, 불교의 지족 선사는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선전하기 위해서 황진이를 떠억 내세워서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며 가지고 소설도 내놓고, 모다 그래 가지고는 방방곡곡에 그 이야기를 퍼뜨렸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아주 실화처럼 되어 가지고 영화에까지 모다 나오고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없이 모다 그런 얘기들을 알고 계십니다마는,
참으로 이 불교의 도인들이 얼마만큼 그러한 위경(危境)에 처해 있을 때, 그런 유혹에 처했을 때 그런 것을 물리치는데 있어서 어찌 마을의 선비에 질 까닭이 있겠습니까?
혹, 그런 지족 선사니 서화담이니 그런 말씀이 어디서 나오더라도 이것은 정책상 유교 선비들이 불교를 말살하기 위해서 만들어 가지고 그렇게 퍼뜨렸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께서 잘 아시고, 그렇게 대응을 하시기를 바랍니다.(처음~18분18초)

 

 

 



(2/3)----------------

오늘 입춘을 기해서 이 법회를 거행하게 되었습니다마는 우리는 비단 이 입춘뿐만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모든 재앙을 소멸하고, 일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기도로 알고 하루하루를 지내가야 될 줄 압니다.

입춘 하루 불공을 올렸다고 해서 무량겁(無量劫)으로 내려오면서 지은 자기의 죄가 다 소멸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우리는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질 때 벌써 육도윤회(六途輪廻)할 수 있는 종자(種子)를 심고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그 종자를 우리 마음 속에 심으면서 동시에 자기 속에 그동안에 심어 놓았던 싹은 밖으로 터 나오게 됩니다. 그 싹이 터 나오면서 동시에 또 하나의 종자가 우리 마음 속에 심어지게 됩니다.
싹이 한쪽으로 트면서 동시에 종자는 거두면서, 종자 거두면서 또 싹은 터 나오고 해 가지고,

한 생각, 일념지간(一念之間)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습니다마는, 그 일념 속에 구백생멸—그 생멸이라 하는 것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전깃불보다도 더 빠릅니다.
그 구백생멸(九百生滅) 속에 얼마나 많은 종자가 심어지며, 그 종자 심으면서 얼마나 많은 싹이 또 터 나오느냐 그말이여. 그것이 전부 육도윤회할 수 있는 죄업(罪業)이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은 한번 입춘 마지에 불공을 했다고 해서—계속 그 종자를 심고 있고, 그 종자에서는 계속 그 죄의 싹이 터 나오고 있는데—그것으로써 무량겁 죄가 다 녹아졌다고 안심할 수가 없다 이 말씀이여.

그러기 때문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걸어갈 때나 또는 가만히 서 있을 때나, 또는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말하고 있을 때나, 말 안하고 묵묵히 있을 때나 또는 활동을 하고 있을 때나 또는 조용한 상태로 있을 때나—어떠한 시간과 공간을 막론하고 우리는 우리의 죄업을 소멸할 수 있는 그러한 방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비단 꼭 절에 와서 부처님 앞에 불공을 드리고 절 할 때 그때 뿐만이 아니라 어느 때,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의 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심어져 있는, 우리의 팔식(八識)에 보관되어 있는 그 씨가 죄의 싹으로 트지 않고 바로 거기에 깨달음의 과실(果實), 보리과(菩提果)가 여물도록 하는 그러한 방법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이냐?
쉴 새 없이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이나 법화경이나 화엄경 같은 그런 경전을 읽는 그러한 길도 있겠고, 또는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이나 지장보살이나 이러한 불보살의 이름을 부르는 그런 염불 방법도 있겠고, 또는 옴마니반메훔이나 그 밖의 어떠한 준제진언이나, 그런 능엄주나 그런 주문을 외우는 방법도 있겠고,

또는 절에—낙산 홍련암이나, 강화 보문사나, 저기 남해 보리암 같은 그런 성지(聖地)에 가서 기도하는 그러한 방법도 있겠고, 여러 가지 그런 방법이 있겠습니다마는 우리는 1년 내 그런 성지에 가서 있을 수도 없는 것이고, 일 년 내 손에서 경을 떼지 않고 경만 읽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면은 잠깐만 쉬어도 그 쉬는 시간에 죄가 막 퍼일어나고, 퍼일어나면서 또 종자는 계속 우리의 마음에 저장이 되고, 저장되었던 그 종자에서는 계속 싹이 터 나오고,
보고 듣고 느끼는 쪽쪽 그것이 벌써 마음에 저장되어 있는 그 종자에 비가 내리는 것이요, 거기에 태양빛이 비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바로 우리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는 그 종자에 거름 주고, 물 주고, 온도를 가해 주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저장되어 있던 그 종자로부터서는 계속해서 그 싹이 터 나옵니다.
그 싹이 터 나오면서 거기에서는 또 죄업의 열매가 영글어져 가지고 그것은 또 마음에 저장이 되어서, 계속 무량겁을 두고 내려오면서 그 쟁여 놓은, 저장된 그 종자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증험을 해 보시면 당장 이해가 갑니다. 잠깐이라도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으려고 마음을 잡숴 보시란 말이에요.
시간을 보고 10분을 딱 작정을 해 놓고 ‘내가 이 10분 동안에 아무 생각도 안 하고 한번 있어 봐야겠다’ 해 가지고 한번 있어 보란 말이여. 아무 생각도 과연 안 일어나는가?

아마 10분 동안에—오히려 그러한 것을 마음을 먹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으면은 별로 아무 생각도 안 나겠지마는, 일부러 10분이나 30분 시간을 정해 놓고 ‘이 시간만큼은 내가 아무 생각도 안 하리라’ 마음을 먹으면 별 뚱딴지 같은 생각이 더 일어날 거예요.

그것이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의 마음속에 무량겁으로 지어 내려오면서 저장해 놓은 그 죄업의 종자가 가득 쌓아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물질로 된 종자 같으면은 창고가 가득차서 그 이상 더 들어갈 데가 없어서라도 저장을 못하겠지마는 이 업의 종자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이 우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차고도 남을 만한 종자를 갖다 쟁인다 해도 가득차는 법이 없습니다.

다시 바꿔서 얘기하면은 무량겁을 두고 내려오면서 육도윤회하는 그 많은 중생들이 죄를 퍼지어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서 고(苦)를 받고 있는데,
만약에 그 지옥에 이러한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이루어진 육신을 가진 중생이 몸뚱이로 지옥에 가게 된다면 지옥은 벌써 만원(滿員)이 되어 가지고 들어갈 데가 없어서—요새 20세기에 태어난 사람은 지옥이 만원이 되었기 때문에 들어갈 데가 없어서, 그냥 죄 지어도 안 잡아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옥에 가는 것은 육신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볼래야 볼 수 없고, 귀로 들을래야 들을 수도 없고, 만져 볼래야 만져 볼 수도 없는 업(業)으로 된 몸뚱이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중생이 들어가도 지옥이 만원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 말이 곧 우리의 마음속에 죄업의 종자! 종자가 가득찬다 해도 가득차서 들어갈 데 없을 까닭은 없다 이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많은 죄업을 어떻게 해야 소멸을 할 수가 있느냐? 또 어떻게 해야 앞으로 그 죄의 종자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며, 들어간 종자는 싹이 터 나지 않고 거기서 바로 보리(菩提) 종자가 되게 만드느냐?
이 방법은 아까 여러 가지 방법을 말씀드린 가운데에 제일 누구라도 할 수 있고, 어디서라도 할 수 있고, 아파서 죽은 그 찰나에서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간해서 경은 정신 없으면 읽을 수가 없고, 나이가 많아서 늙어지면 눈이 보이지 않아서 읽을 수가 없고, 기운이 없으면 읽을 수가 없고, 바쁘면 읽을 수가 없고, 반드시 경을 읽으려면 그만한 장소와 그만한 시간과 그만한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경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경을 잠시라도 안 읽으면 계속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짬을 타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무서운 죄의 종자가 저장이 되고, 저장된 종자에서는 계속 죄의 가지가 뻗어 나오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가지가 뻗어 나왔다 하면은 또 거기서 죄의 열매가 열려서 또 마음에 저장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항시 이 용화선원에서 조실 스님께서 십 년 동안을 그렇게 간절히, 그렇게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말씀해 주시던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 방법은 무량겁으로 내려오는 그 열매를 녹여서 깨달음의 과일을 만드는 방법이고,
거기 그 열매로 부터서 가지가 뻗어 나와 가지고 이 세계에 가득차도록 가지가 번지고 번져서 한량없는 죄의 종자가 주렁주렁 열려 가지고 있는 그놈마저도 눈 한번 감았다 뜬 사이에 그놈을 소멸을 해서, 그놈을 돌려 가지고 깨달음이 되도록 만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이렇게 간절히, 자세히 일러 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거나 이것을 실천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세세생생에 후회막급일 것이다.
또 어떤 도인은 이렇게 말해 준 것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녹음 끊김)....고마운 말씀인가! 우리가 신심으로써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면은 그렇게 뼈 아프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스님은 ‘내가 만약에 거짓말로 이런 말을 한다면은 나는 세세생생에 너희들을 대신을 해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가겠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해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거나 행하지 아니 한다면 너희들은 세세생생에 호랑이 밥이 될 것이고,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이 추호라도 거짓말이라면은 내가 무간지옥에 갈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호랑이 밥이 된다’는 말을 그렇게 기분 나쁘게만 들을 일이 아닙니다. 호랑이 밥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말을 믿지 않고 행하지 아니한다면은 갈 곳이 어디냐? 이 말씀이어요.
호랑이 밥은 그것은 육체만 물려 간 것이니까 금방 태어나면 그만입니다. 그까짓 놈의 것, 호랑이가 물어 가지 않아도 몇 해 살다가 다 가기 마련이지, 누가 안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건 문제가 아니고,

이 말을 이렇게 간곡히 말씀을 해 드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고, 행하지 아니한 사람은 무량겁을 두고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는 부인(否認)을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고 죄업 퍼지으면은 갈 곳이 무간지옥 밖에 더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 말이 거짓말도 아니고, 공연히 협박하고 무슨 위협을 주는 말도 아니에요, 사실대로 말씀하신 것이지!


‘바빠서 못한다’  ‘시간이 없어 못한다’ 이런 말씀은 발심(發心)을 못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여. 바쁠수록에 할 것은 이것 밖에는 없습니다. 바쁠수록에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입니다. 

바쁘고 시간이 없으면은 경(經)은 혹 못 읽는다 해도 그것은 납득이 가는 얘기고, 다른 어디의 성지에 가서 기도하는 것은 바쁘면 못 가는 것이고, 그것도 납득이 가는 얘기입니다.
또 시간이 없거나 바쁘거나 또는 정신을 차릴 여유가 없으면은 다른 것은—혹 '관세음보살'이나 '옴마니반메훔'이나 '아미타불'이나 그런 것은 혹 못한다고 해도 납득이 갑니다.
그러나 바쁠 때일수록에 할 수 밖에는 없고, 해야만 하고, 또 가능한 것은 활구참선입니다.

가령 누가 나한테 억울한 소리를 해 가지고, 간장이 활딱 뒤집어져 가지고 도저히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고, 막 욕이라도 퍼붓고 무엇이라도 때려 부셔야 하고, 쥐어뜯고, 물어뜯어야만 할 만큼 그렇게 격분을 하고, 성이 났다 하더라도,
‘그 성나는 놈이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  그렇게 한번 생각할 줄 알아야 참! 부처님 제자라고 자부할 수 있고, 또 활구참선을 한다고 자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고, 활구참선 한 사람이 아니면 그것을 억지로 참어지지도 않고, 억지로 참으려고 하면은 그것은 당장 혈압이 오르거나, 위장병이 생기거나, 눈이 껌껌해지거나, 무슨 육체적인 병으로 돌아지고 마는 것입니다.
억지로 속상한 것을 참는 것은 대단히 안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육체적인 병으로 돌아서고만 말아요.

그러기 때문에 성이 나면은 욕도 하고, 때려 부수기도 하고, 물어뜯기도 하시라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렇게 하고 나면은 조금 후련하기는 하지마는 그 뒷수습이 대단히 어렵게 되지 않습니까? 또 다 때려 부수고 나서 생각해 보면 창피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다 이 말씀이에요.
억지로 참으면 병이 나고, 그놈을 부회풀이대로 하면은 잠깐은 시원하지마는 돌아서서 참 아랫사람 보기도 안 되었고, 웃사람 보기도 안 되었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성이 되게 날 때에 심호흡을 하시란 말이에요. 흡~ 들어마셔 가지고 후~.

아마 속이 되게 상하고 가슴이 답답하면 이 참선법이 무엇인 줄도 몰라도, 흡~ 후유~, 흡~ 후유~ 자동으로 그 호흡이 나올 것이다 이 말이에요.
그것은 배우지 않아도 후~ 하고 그 깊은 숨을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함으로써 그 툭 터질라고 하는—그렇지 않으면 중풍이 툭 터지거나, 고혈압이 툭 터지거나 할 것도 그렇게 호흡을 함으로써 그것이 방지가 되는 겁니다.

무의식 중에 배우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한 것을 감안해서 아주 오랜 세월을 두고 연구하고 개발을 한 것이 조실 스님께서 항시 참선할 때에 심호흡을 하라고 가르켜 주신 그 방법입니다.

그 방법이 인도 오천 년 전부터서 내려오고, 중국에 수천 년 전부터서 내려오는 장생불사(長生不死)—이 몸뚱이의 모든 병을 소멸을 하고, 마음속의 온갖 복잡한 번뇌 망상을 깨끗이 쉬게 안정을 시켜서 몸과 마음을 맑게 해서,
그래 가지고 이 몸뚱이를 가지고 오래오래 살려고 하는 그러한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연구 개발되어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방법입니다. 참선하는 데에도 이 방법은 꼭 필요합니다. 

첫째, 참선을 할라면은 몸이 건강해야 하고 정신이 건전해야—건강한 몸, 건전한 정신으로 정진(精進)이 되어 질 때에 비로소 이 공부가 중간에 탈선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딴 좋지 못한 증상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고대로 우리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단축을 시켜주는 것입니다.

몸을 단정히 가지고, 그리고 호흡은 깊이 그리고 조용히 내뿜도록.
이렇게 하는데 맨 처음에는 호흡을 할려고 하면은 요 밑(단전)에까지 기운이 내려가지를 않고 오목가슴까지 밖에는 호흡이 들어가지 안 해 가지고, 답답하고 영 어깨쭉지가 쪄 눌리면서 잘 안된다 이 말씀이에요, 잘되는 분도 있지마는.

그래서 이것을 하면은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가 잘 안되고, 영 애를 먹고 그러한 분도 더러 있는데, 그것은 아직 숙달이 잘 안되어서 그런 것이니까,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이 가운데에는 잘 아시는 분도 있지마는 여기 나오신지 얼마 안 되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까,
잘 아시는 분은 그대로 잘 들으시고, 잘 모르시는 분은 잘 귀담아서 집에 가셔서 당장 아침, 저녁으로 시간을 내어서 10분 내지 30분씩 이렇게 해서 열심히 열심히 해보시라 이 말이여.

(심호흡을) 하시면은 소화 안되는 분은 소화도 잘되고, 또 신경질을 잘 내고 그러한 성미를 가진 분은 그런 신경질을 안 내고서 아주 마음 편히 살 수 있어서 아랫사람한테는 존경을 받고, 웃어른한테는 귀여움을 받고,
남편하고도 사소한 일에 모다 서로 애들 보는 데에서 주거니 받거니 싸움한 것처럼 그래 가지고 집안을 시끄럽게 하고, 위신 떨어지고 그러한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18분19초~39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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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해서 이러한 방법을 열심히—아주 방법은 간단하고 어디서나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이기 때문에 문제는 열심히만 하면 되요.
‘아하! 그런 좋은 방법이 있구나. 그럼 나도 꼭 해야겠다’ 이리 결심을 하고 열심히 하면은 처음에는 잘 안되는 것 같아도 차츰차츰 숙달이 되어서 잘될 때가 꼭 오는 것이니까.

그렇게 되어서 자기 몸 가볍고 건강해지고 마음 편해지고, 온 집안이 화목해지고 그렇게 된다면은 얼마나 참! 불교를 믿게 되어서, 이 활구참선을 배움으로부터서 정말 얼마나 일신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렇게 보람 있고 행복해질 수가 있느냐 이 말씀이에요.

그것이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 말이지마는 열심히 하는 사람은 그만큼 효과가 있어서 보람을 참 느낄 것이고,
듣고 ‘시간이 없다’ ‘바쁘다’ ‘나중에 나이 좀 더 먹거든 천천히 하지’ ‘아들딸 학교 다 보내 놓고, 장가 들여 놓고 그때 하리’ 이러다가 보면은 결국은 종내(終乃) 이러한 좋은 약을 받아 가지고도 먹지 않고 서랍 속에다 넣어 놓고 계속 병을 앓으며 고생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칠십 세까지 살지, 오십 세까지 살지, 팔십 세까지 살지, 그것은 모르지 않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서 하는 사람이라야 앞으로 다가올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대비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뒤로 미루다가 금방 우리 앞에 '섣달 그믐날'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때에 ‘아이고! 내가 그때 그 용화사에서 그때부터 내가 공부를 했으면 내가 이렇게 안 되었을 걸!’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 가지고 ‘아이고! 내가 그때 좀 그때 열심히 했으면 염라대왕이 나한테 이렇게 무섭게 안 할 텐데’ 그때 그래야 그것은 소용 없습니다.


호흡이 잘 안되고, 여기가 막혀 가지고 있을 때에는 누워서 처음에 연습을 좀 해 보세요.
편안하게 누워서 배꼽 밑에 아랫배에다가 두툼한 책 한 권을 딱 얹어 놓고, 숨을 떠억 들어마셔요.
들어마셔 가지고 처음에 가슴에 찬 놈을 다시 쑤욱 아랫배까지 들어마셔서 들어밀면은 아랫배가 불룩하니 이렇게 올라간단 말이에요.
올라가면은 배 위에 올려놓은 그 책도 약 3cm, 한 치 가량이 쑤욱 이렇게 올라가게 되요.

더이상 올라가지 못할 때, 또 조용하니 숨을 내쉬면은 아랫배가 밑으로 이렇게 내려가며 책도 따라서 내려간다 말이에요. 그 책이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때까지 다 호흡을 내뱉은 다음에, 또 스르르~ 하니 호흡을 들어마셔.
들어마셔서 아랫배까지 불룩하니 들이밀으라 말이에요. 밀면은 책이 또 3cm 가량 쑥 올라가요. 다 올라가 가지고 한참 있다가 또 조용하니 또 숨을 내쉬면은 그 책이 차츰차츰 밑으로 내려가서 등어리 가서 딱 붙게 돼.

들어마실 때는 비교적 스르르~ 하니 좀 쉽게 들어마시고, 내뿜을 때는 아주 아껴서 조용하게 내뿜도록.
들어마실 때는 한 3, 4초 걸려서 들어마시고 내뿜을 때는 한 10여초 걸려서 내뿜도록 이렇게 해서 책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것이 바로 숨을 들어마셨다 내뿜었다 한 것과 마찬가지 얘기인데.

눈을 가만히 감고서 책이 한번 올라갔다 다시 쑥 내려오면 ‘하나’
또 한번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책이 올라갔다가 또 책이 조용하니 밑으로 내려오면 ‘둘’
또 들어마셨다가 내뿜으면 ‘셋’ 해서, '열'까지 세어 보시란 말이여.

열까지 세어 갖고는 그 다음에 열하나로 가지 말고, 그 다음에 아홉, 여덟, 일곱, 여섯... 해서 하나까지 내려오고,
또 하나까지 내려왔으면 다시 또 하나, 둘, 셋... 해서 열까지 올라갔다가 또 아홉, 여덟, 일곱... 해서 하나까지 내려오고 해서, 열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고, 올라갔다 내려오고, 몇 번을 해도 계속 딴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중간에 ‘내가 여섯, 다섯까지 했던가? 여섯까지 했던가?’ 그렇게 딴 생각하다가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 때에는 무조건 ‘에이! 그냥 일곱인가 보다’ 해 가지고 일곱, 여덟 하지 말고, 다시 쏴악 씻어 버리고 하나에서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하나, 둘, 셋, 넷 하다가 또 딴 생각이 금방 들어오거든. 몇까지 했던고? 모르면 다시 하나서부터서 다시 해서,
무난히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다섯 번이고, 열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고 무난히 되면은 그 다음에는 하나에서부터 스물까지 올라갔다가 열아홉, 열여덟... 해서 하나까지 내려오고,

또 스물까지 그렇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몇 번을 해도 아주 실수가 없이 잘되면은 그 다음에는 서른까지 하고, 그 다음에는 사십, 오십... 해서 백까지 올라갔다가 아흔아홉, 아흔여덟, 아흔일곱, 아흔여섯... 해서 하나까지 내려오도록.

한 번도 실수 없이 조르르 하니 올라갔다가 하나까지 딱 내려오게 된 사람은, 그 사람은 그렇게 하는 동안에 어지간한 병은 나아 갖고 있고,
그이는 그때 화두를 떠억 들고 한번 해보면은—그전에는 그렇게 번뇌와 망상이 들끓던 사람이 이 백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과정을 수료를 해서 졸업을 한 다음에 하면은—기가 맥히게 공부가 잘된다 그 말이예요.

그렇게 된 사람은 공부하다가 무슨 상기병(上氣病)이 생기고 공부하다가 무슨 딴 병이 생기거나 위장병이 생기거나 그러한 법이 없습니다. 이 방법은 참선을 잘하고, 몸과 정신을 건강하고 건전하게 만드는 데에 아주 요긴한 방법입니다.

제가 삼십 년을 두고 증험을 해 보니까 이 이상 더 요긴한 방법이 없다 이 말씀이에요.

처음부터 화두를 일러 주고—이 호흡에 대한 기초적인 것을 자세히 일러 주지 않고, 화두만 일러 주고 보니까, 상기병이 일어난다는 둥, 뭐 어쨌다는 둥, 아주 말이 많고 중간에 제대로 한 사람이 아주 드물어요.

그런데 이 방법을 먼저 일러 주어서 잘 훈련시킨 다음에—화두는 아직 일러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만 열심히 석 달 이상이 되니까 벌써 그 사람이 성격이 개조가 되고, 벌써 몸 갖는 것이 의젓하고, 어디다 내놓더라도 훤출한 장부의 기상이 보인다 그말이여.

부인들도 이 방법을 한 석 달 이상 지극히 한 사람을 보니까 그 말이 많고, 잠시도 입을 쉴 줄 모르고 지껄이던 그 사람이 말이 없어져 버리게 되고,
말말이 신경질을 부리고 남 험담을 많이 하던 사람도 이것을 하면서 부터서는 차츰차츰 남 험담하는 법도 없어지고, 시시비비에 들지도 않고—벌써 셋만 모이면 그 사람하고 싸움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싸움도 안 하게 되고, 그 조용하고 차분해진 것이 완전히 성격이 개조가 되더라 이 말씀이에요.

그런 다음에 화두를 떠억 일러 주니까 기가 맥히게 정진을 잘하더라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미 이러한 방법을 잘 알아서 이 호흡법과 화두를 겸해서 잘하시는 분은 계속 그렇게 하시고, 아직 화두 공부에 들어가시지 아니한 분, 또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암만 해도 자리가 잡히지 않고 잘 안되시는 분은 이 호흡법부터 좀 관심을 가지시고 열심히 좀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호흡이 잘된 다음에 화두(話頭)를 드시되, 절대로 이 화두는—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단속하느냐?—마음 단속하는 데 가서 인제 이 화두가 필요한 것인데,

화두를 들려면은 첫째, 큰 신심(信心)이 있어야 하고 둘째, 큰 분심(憤心)이 있어야 하고, 셋째에 가서는 큰 의심(疑心)이 있어야 합니다.

큰 신심(信心)이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절에다가 돈 많이 가져오고 부처님 앞에 절 많이 하고 그것이 아니라,
‘나도 아무리 내가 여자고, 아무리 내가 말세에 태어났고, 아무리 내가 몸이 병이 있고 약하다 하더라도 옳은 방법으로 옳게만 공부를 하면은 나도 틀림없이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대정신(大正信)입니다. 바른 믿음입니다.

바른 믿음!
부처님 앞에 절을 많이 하고, 불공을 많이 하고, 돈을 많이 가지고 오시고, 그것도 참 좋은 일이죠. 그것도 큰 공덕이 있고 대단히 좋은 일이고, 이호이 신도라고 하면은 스님네한테 대중공양도 형편 따라서 올리고, 부처님께도 불공을 올리고, 기도도 하시고, 절도 많이 하셔야죠.
당연히 그것도 참 그것은 그것대로 공덕이 대단히 말로 할 수 없이 큰 것이지마는 ‘내가 나를 옳게 닦아서 나도 성불할 수 있다’고 믿는 이 믿음이야말로 온갖 믿음 중에서는 최고 가는 믿음입니다.

‘나도 하면 된다’고 믿고 ‘반드시 할 수 있다’고 믿고서 해야 되는 것이지, ‘난 여자니까, 말세니까, 근기가 약하니까, 나는 바쁘니까, 이리저리 해서 그저 인연이나 맺지’ 이런 생각으로 해 가지고 무슨 효과가 날 까닭이 있습니까? ‘꼭 나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대신심이여.

둘째에 가서 대분심(大憤心)이 있어야 해. 아무리 신심이 있어도 분심이 없으면 안 됩니다.
분심(憤心)이 뭐냐?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님과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일을, 이 일대사 인연(一大事因緣)을 마쳐서 다 생사해탈을 하고 나아가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건만, 무엇 때문에 나는 이 무량겁을 두고 육도윤회를 하면서 이 고생을 받고, 이 해탈을 못하고 있는가?

이것에 대해서 아주 분심이 나야 합니다. 몸을 부르르 떨고 입을 악물고 하는 이러한 분심이 속에서 솟구쳐 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심이 나야 용기가 솟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분심이 없고 용기가 없이 다 늘어져 빠져 가지고 게을러서 하다가 말다가, 남이 하면 좀 하는 척하다가 그렇지 않으면 말다가, 이래 가지고는 이 문제는 해결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솥에 어떤 질기고 딱딱한 것을 고을 때에 불을 화력(火力)을 높여서 계속해서 때야지, 지푸라기 하나 둘 때다가 말다가, 때다가 말다가—지푸라기 같은 것 하나 둘 때다 말다 또 계속 때되 지푸라기 하나씩 하나씩 때 가지고 그 무슨 속에 뼉따구 사각 같은 것이 푹 무를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 공부도 계속 화력을 돋구면서—화력을 돋구어도 솥단지가 떡 갈라지도록 그렇게 무섭게 불을 때면 안 됩니다, 이 공부도. 적당하게 때야지.
때되 최선을 다해서 가장 필요한 열량만큼은 계속 그것이 지속이 되어야 속의 것이 물씬하니 물러서 약이 다 고아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 공부도 조금씩 하다 말다 형식적으로 그래 갖고는 삼십 년, 백 년을 해도 마냥 죽 떠먹은 자리입니다. 한 숟갈 떠먹으나 마나 마냥 그대로 있지요? 어쨌든지 분심, 용맹심을 내 가지고 지속적으로 공부를 지어 나가야 하고.

셋째에 가서 대의심(大疑心).
‘나도 하면 될까 말까?’ 그것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이것이 무엇인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자기에게 주어진 이론으로써는 풀 수도 없고 풀려고 해서도 안 되는, 그 알 수 없는 공안(公案)에 대한 불같은 의심(疑心)!

다른 문제에 관한 의심은 이리저리 따져도 봐야 하고, 이 책 저 책도 떠들어 보고 사전도 펼쳐 보고, 모두 여러 사람한테 물어서도 배우고 모두 다 그렇지마는,
이것은 책을 떠들어 갖고도 소용이 없고, 어떤 경전을 보아 가지고도 소용이 없고, 이리저리 자기가 그 동안에 보고 듣고 한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연구하고 따져 가지고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만 연장을 시키고, 오히려 공부 길만 나쁜 길로 빠질 뿐이지 아무 이익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될 수 있으면 빨리 시간을 단축하고 그리고 바르게 깨달으려면은 무조건(無條件), 무이로(無理路), 무어로(無語路), 무모색(無摸索)—더듬어 들어가지 말 것이며, 따져 들어가지 말 것이며, 이리저리 비교하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해서 지해(知解)와 사리상량(邪理商量)으로 알려고 하지 말 것입니다.

다못 거두절미하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해 갈수록 답답하고 꽉 맥힌 것, 그것이 공부가 가장 잘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5년, 십 년을 해도 아무것도 알아진 것이 없고, 밤에 눈을 감고 있어도 아무 것도 보이는 것도 없고—"뭣한 이는 밤에 떠억 눈을 감고 앉았으면 부처님이 나와서 뭔 이야기도 하고, 훤하니 무엇이 보이기도 하고 그런다는데, 암만 해도 답답하기만 하고 아무 것도 안 되니, 이 공부가 잘된 것입니까, 공부가 잘못된 것입니까?" 이렇게 와서 묻는 분들이 종종 계시는데,
갈수록 알 수가 없고, 꽉 맥히는 그분이야말로 가장 올바르게 공부를 하고 계시는 분이고, 그렇게 해 나가야, 갈수록 그 알 수가 없이 꽉 맥혀야 그분은 깨달을 수 있는 분입니다.

솔솔 따져 들어가고, 무엇이 알아 들어가는 것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어서 재미를 거기다 붙여 가지고 무엇을 들여다보고 앉았고 이런 사람은—그건 참, 도저히 그런 공부는 차라리 공부 안 한 것만 못합니다. 그냥 아들딸 잘되라고 관세음보살 부르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리 아시고요. 

알 수 없는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또 ‘이뭣고?’ 하시는 분은 ‘이! 하는 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성날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집안에 근심 걱정이 있어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이뭣고?’ 하되 그때 호흡은 계속해서 되어져 있어야 합니다.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하니 나오고, 숨을 내쉬면 배가 홀쪽해지고,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거기다가 알 수 없는 화두를 거기다가 놓고 ‘이뭣고?’ 이렇게 공부를 지어 가시라 이 말씀이에요.
이렇게 해서 몸을 단정히 가지고 심호흡을 계속하면서 그 가운데 알 수 없는 화두가 항시 성성(惺惺)하게 드러나도록.
어디를 가거나 무엇을 하거나, 그 알 수 없는 화두가 떠억 우리의 눈 앞에 항시 그놈이 앞서도록, 이렇게 참선을 생활화 할 때에 모든 생활은 바로 부처님과 같이 생활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왜 그러냐? 이 화두를 놓쳐 버리고 온갖 번뇌 망상하고 있을 때에는 마구니들 하고 같이 어울려서 마구니 판에서 살림을 하고 있는 것이 되고,
어떠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때그때 화두를 추켜들고 화두로써 모두 생활이 되어갈 때에는 바로 그 자리는 불보살과 같이 생활하시는 곳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소원대로 이루어질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불보살 계시는 데에 무슨 마구니가 거기에 어리댈 까닭이 있습니까? 극락세계나 또는 천당이나 지옥이 우리가 죽어서만 가는 게 아니라, 우리 살아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고대로 그 지옥과 천당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화두 놓쳐 버리고 그래 가지고 감정에 사로잡혀서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 휩쓸려 넘어갈 때에는 바로 마구니 지옥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분이 나고 성이 나고, 속이 활딱 뒤집어지더라도 그때 턱!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떠억 들어 보시란 말이여. 삽시간에 불같이 일어나던 그 생각이 스르르 꺼지면서 나의 본심으로 돌아가게 되는 만큼, 금방 1초 전의 지옥이 천당으로 변하는 것이요, 극락으로 변하는 도리가 바로 이 활구참선법입니다. 

오늘 입춘을 기해서 무량겁.... (39분36초~60분41초)(끝)

 

 

 



----------------(1/3)

*요승(妖僧) : 정도(正道)를 어지럽히는 요사스러운 승려.
*유가(儒家) : 공자의 학설과 학풍 따위를 신봉하고 연구하는 학자나 학파.
*파계(破戒) ; 계(戒)를 받은 사람이 그 계율을 어김.
*야수 ; ‘여우’의 사투리.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관재구설(官災口舌) ; 관가로부터 재앙을 입는 일(官災)과 남이 나를 비방하거나 헐뜯어서 해를 입는 일(口舌)을 아울러 이르는 말.
*사백사병(四百四病) ; 인체에 일어나는 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사대(四大)—지(地)·수(水)·화(火)·풍(風)의 부조화로 각 요소에 대해서 101가지 병이 있다고 한다.
지(地)와 화(火)에서 일어나는 열병(熱病)이 202가지, 수(水)와 풍(風)에서 일어나는 냉병(冷病)이 202가지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경전에 그들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이 일정하지 않다.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귀(耳根)·코(鼻根)·혀(舌根)·몸(身根)·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마지(摩旨) ; 부처님께 올리는 밥. 부처님께 올리는 밥은 대부분 사시(巳時), 즉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에 올린다. 이것은 생전에 부처님이 하루에 한 번 그 시간에 밥을 먹은 데서 유래한다.
사시에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마지 올린다’고 하는데, 한자를 풀이하면 (摩指, 摩旨, 磨旨) ‘손으로 만들어 올린다 혹은 정성스럽게 만든 공양을 올리오니 제 뜻을 감읍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사시(巳時) ; ①지난날에 쓰던 십이시(十二時)가운데 여섯 번째 시(時). 오전 9시부터 11까지를 말한다. ②지난날에 쓰던 이십사시(二十四時)가운데 열한 번째 시(時). 오전 9시 반부터 10시 반까지를 말한다.

 

 

 



----------------(2/3)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④밀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하나하나의 범자(梵字).
*구백생멸(九百生滅) ; 《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剎那爲一念 一念中一剎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 행위.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고통이 끊임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함.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호랑이 밥 ; [최상승론(最上乘論)] (5조 홍인대사 弘忍大師)에 나오는 구절.
若有人依文行者即在前成佛. 若我誑汝當來墮十八地獄. 指天地爲誓. 若不信我世世被虎狼所食.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글(最上乘論)에 의지해 수행하면 곧 성불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너를 속인다면 다음 세상에 십팔지옥(十八地獄)에 떨어지리라. 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만약 나를 믿지 아니하면 세세생생에 호랑이 밥이 되리라.
*최상승론(最上乘論) ; 1권. 5조 홍인대사(弘忍大師)의 저술.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불성(佛性)을 확인하여 잘 지키는 수심(守心)을 강조한 저술.
돈황 출토본 중에 「기주인화상 도범취성 오해탈종 수심요론(蘄州忍和尙導凡趣聖悟解脫宗修心要論)」이 이것과 같은 것으로, 제목은 다르나 기주 인화상이 곧 홍인대사이며, 「수심요론」이 우리나라에서 「최상승론」이라는 제목으로 전해왔음을 알 수 있다.
*발심(發心) ; ①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 발기보리심, 發菩提心 발보리심.
*장생불사(長生不死 길 장/날 생/아니 불/죽을 사) ; 오래도록(長) 살고(生) 죽지(死) 않음(不).
*정진(精進) ; ①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②잡념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깨우치기 위해 수행에 힘씀.
*오목가슴 ; 복장뼈(가슴의 한복판에 세로로 있는 뼈) 아래 한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곳.

 

 

 



----------------(3/3)

*종내(終乃) ; 끝까지 내내.
*섣달 그믐날 ; 납월삼십일(臘月三十日). 납월(臘月)은 음력 섣달,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마지막 달. 섣달 그믐날은 납월삼십일, 일 년의 마지막 날로 곧 생애의 마지막 날을 뜻한다.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氣)가 머리에 치밀게(上)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훤출하다 ; 훤칠하다. ①(어떤 대상이)길고 미끈하다. ②(모습이)깨끗하고 시원스럽다.
*말말이 ; 한마디 한마디의 말마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 ①깨달음과 중생제도의 중대한 부처님의 임무. ②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인연. ③부처님이 정도, 능력이 다른 사람들을 여러가지 방편으로 이끌어, 모두 구한다고 하는 중대한 인연. 일단인연(一段因緣)이라고도 한다.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間.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 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푸라기 ; ①짚의 부스러기. ②또는 낱개의 짚.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리(邪理) ; 그릇된 이치나 생각.
*상량(商量 헤아릴 상/헤아릴 량) ; ①상인이 물품을 판매할 때, 서로 그 가치를 재서 결정하는 것. ②따지고 헤아리는 알음알이.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살자(殺者)•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64에서.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5. 8. 9. 13:23

§(560) (게송)사중구의원~ / ‘이 방법으로 하면 반드시 나도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신심 / 선원(禪院)에 모여서 공부하는 까닭.

‘내가 할 길은 이것 밖에 없다.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고 하는 철저한 신심, ‘이 방법으로 하면 반드시 나도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신심.


산이 명산(名山)이라 하는 것은 산이 높고 물이 좋아서가 아니라 거기에 도인(道人)이 살아야만 명산이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조그만한 손바닥만한 이 땅이지만 여기에 최상승법이 있고 불법이 살아있으므로 해서, 불법에 의해서 수행하는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이 지구는 결코 멸망을 하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송담스님(No.560)—95년 동안거결제 법회(95.12.07) (용560)

약 11분.



사중구의원(死中求醫員)하고  영아억모심(嬰兒憶母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주공친절처(做工親切處)에  홍일상동령(紅日上東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사중(死中)에 구의원(求醫員)이요  영아억모심(嬰兒憶母心)이다. 환자가 깊은 병이 들어서 죽게 되었다 그말이여.
몸이 쑤시고, 아리고, 아프고, 가슴은 답답하고, 이 약 저 약 먹어봤자 효험은 없고, 어떻게 하면 명의(名醫)를 만나가지고 이 병을 낫을까? 그 좋은 의원을 구하듯이 그러한 간절(懇切)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영아(嬰兒)가 억모심(憶母心)이여. 갓난아기가 그 엄마가 어디를 가서 안 오는데 배가 고파서 울어 싼다 그말이여. 발버둥을 치면서 울어 싸는데 ‘엄마가 언제나 와서 젖을 줄까?’
그 젖 주기를 바래서, 엄마가 오기를 바라는 어린 애기와 같이 그러한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그런 간절한 신심(信心)으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하는데 처음에는 별로 재미도 없고, 별로 맛도 없고, 되다말다 하고, ‘이뭣고?’해도 속으로는 온갖 번뇌 망상이 왔다갔다 하고 그렇지만,
‘내가 할 길은 이것 밖에 없다.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고 하는 철저한 신심, ‘이 방법으로 하면 반드시 나도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신심,

조급한 생각은 갖지 아니하되, 한 걸음 한 걸음 소걸음처럼 걸어가되 착실히 다져나가다 보면 반드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는 때가 와.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하면서도 성성하게,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점심때까지, 점심에 들었던 화두가 저녁때까지,
저녁에 누워서도 화두를 들면서 자는데 언제 잠든 줄 모르고 잠이 들었으되 아침에 눈을 딱 뜨고 보면 어제 들었던 화두가 고대로 있어. 심지어는 꿈에서도 그 화두가 그렇게 성성하게 들어지는 수도 있다 그말이여.

하루를 그렇게 하여, 이틀을 그렇게 하여, 사흘, 나흘, 닷새, 엿새를 그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하게 그렇게 되어가면 어떠한 찰나에 툭! 터질 때가 온다 그말이여.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이 반드시 될 때가 오는 거다 그말이여.

주공진철처(做工親切處)라는 것이 바로 그거여. 공부를 지어서 친절(親切)한 곳에 이르면, 확철대오하면,
홍일(紅日)이 상동(上東)하다. 어제 서쪽에 졌던 그 붉은 해가 그 이튿날 새벽이 되면 동쪽 산너머에서 떠오를 것이다. 반드시 확철대오 할 때가 올 것이다 그거거든.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 행자 또 청신사, 청신녀, 여러 도반들, 오늘부터 내년 정월 보름까지 석 달 동안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말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잘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비록 회룡사나 세등선원이나 또는 위봉사나 그 밖에 크고 작은 절에나 토굴에서 정진하는 도반들도,
‘언제나 한자리에서 우리가 다 같이 도반들이 모이고, 또 조실 스님을 모시고 공부한다’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항상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그렇게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야 정진도 제대로 되고 또 장애도 없는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이 안 계신다고 해서 그럭저럭 지내고, 잡담으로 세월을 보내고 그럭저럭 지내면 반드시 장애가 일어나고, 나도 공부를 못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공부를 못하게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니까,

우리가 부모와 정든 고향을 다 버리고 또 세속의 모든 오욕락(五欲樂)과 인생과 청춘을 다 버리고, 우리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신사(清信士) 청신녀(清信女) 여러분도 모든 것을 다 뒤로 미루고 이렇게 정법을 믿고, 이렇게 정진을 할려고 하는 발심(發心)을 하셨으면 스님네 못지않는 지조와 결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도 청신사나 청신녀들도 얼마든지 도를 이룬 사람들도 역사적으로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이라고 해서 또 우리라고 해서 그렇게 되지 못하라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과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났습니다. 한 사람도 낙오자(落伍者)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낙오자가 되어서 잘못되느냐, 끝까지 목적지까지 우리가 가느냐?’하는 것은 우리의 결심에 달려있는 것이지, 여건이 좋지 못하고 환경이 좋지 못하다고 해서 그만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시끄럽고 복잡할수록에 정법을 믿는 사람은 더욱 채찍을 가해서 정진을 할 그 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해야만 불법도 실낱끈 같이 위태로운 이 법등(法燈)도 이어가는 거고, 불법이 멸하지 아니해야 세상도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산이 명산(名山)이라 하는 것은 산이 높고 물이 좋아서가 아니라 거기에 도인(道人)이 살아야만 명산이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조그만한 손바닥만한 이 땅이지만 여기에 최상승법이 있고 불법이 살아있으므로 해서, 불법에 의해서 수행하는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이 지구는 결코 멸망을 하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만이 아니고 여러 도반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가지고 공부를 한다면,
여기에 불이라 하는 것은 헤쳐 놓으면 꺼져버리고, 숯불이라든지 장작개비라든지 이렇게 모아서 놓으면 불이 붙어서 이 장작에서 난 불은 저 장작에, 저 장작에 난 불은 이 장작에, 해서 거기에서 서로 가열이 되어가지고 불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원(禪院)에 모여서 공부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원에서 지내다 보면 누군가 한 사람은 반드시 정말 불이 붙어가지고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는 도반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상한 눈초리로 보고 비웃을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그런 사람이 있으면 자기도 같이 동참(同參)해서 같이 정진을 하고, 또 다른 사람도 거기에 또 발심을 해서 같이 동참을 해서 한 철동안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서 가행정진을 하도록,

그렇게 해서 한 철이 석 달 동안이 어떻게 지내간 줄 모르게 잘 성취가 되도록 그렇게 정진을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법상(法床)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44분6초~54분57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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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사중구의원~’ ; [청허당집(清虛堂集)] (서산휴정 著,朴敬勛 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p127 ‘벽천선화자(碧泉禪和子)에게’ 게송 참고.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들 거, 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청신사(清信士)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남자 신도, 곧 우바새(優婆塞).
*청신녀(清信女)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자 신도, 곧 우바이(優婆夷).
*발심(發心) ; ①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낙오자(落伍者 떨어질 낙/대오 오/놈 자) ; ①어떤 집단이나 경쟁 상대를 쫓아가지 못하여 뒤로 처진 사람. ②편성된 대열에서 뒤떨어져 처진 사람.
*법등(法燈) ; 부처님의 가르침. 미(迷)한 세계의 캄캄한 마음을 없애는 것을 등불에 비유한 것.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동참(同參) ; ①어떠한 일에 함께 참여함. ②스님와 신도가 한 법회에 같이 참석하여 불도(佛道)를 닦는 일.
③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하는-동문수학하는 '도반(道伴)'과 같은 말. 동학(同學)이라고도 한다.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Posted by 닥공닥정
정진(精進) 수행2015. 7. 12. 15:04

 

 

§(527) (게송)여군동보우동행~ / 십법계(十法界) / 내가 본래 부처, 번뇌가 보리 / 정진은 안락지묘문(安樂之妙門) / ‘한 생각’ / (게송)정체종래절색공~ / 결정적인 신심.

부처를 찾을려고 하지 말고,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 말어. 내가 부처인데, 부처가 다시 또 부처를 찾으니까 부처가 보이지를 않는 거고, 번뇌가 바로 보리인데, 번뇌를 버리고 보리를 찾기 때문에 거기에서 공부가 우리를 괴롭게 하고 마는 것이다.
닦을 것이 없는 곳을 향해서 닦아야 하고, 찾을 것이 없는 곳을 향해서 찾아야 하고, 버릴 것이 없는 곳을 향해서 버릴 줄 알아야 해. 그 방법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이뭣고?’


이 세상에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은 우리가 따질 필요가 없어. ‘불교는 깨닫는 가르침이다’ 그렇지만 원래 내 자신이 부처이기 때문에 올바른 방법으로 단속만 할 줄 알면 그 자체가 바로 부처님인 거여.
‘한 생각’을 좋은 생각을 먹으면 천당으로 가는 거고, 악한 생각을 일으키면은 지옥에 가는 거고, 탐심을 내면 축생이 되는 거고, 진심(瞋心)을 내면 바로 그 찰나에 그 독사도에 들어가는 건데, 일어나자마자 그 생각이 차츰차츰 발전을 해 가지고 결국은 그것이 십법계로 가게 되는데, 일어나자마자 바로 생각을 ‘이뭣고?’로 돌리면 윤회(輪廻)가 바로 거기서 찰나(剎那) 찰나에 끊어지는 거여.


그 ‘한 생각’을 단속할 줄 모르면 평생 동안을 불법(佛法)을 믿어도 헛믿는 거고, 평생 동안을 선방에 와서 앉았어도 참선 헛하는 거여.
우리가 이 공부라 하는 것은 하루 이틀에 후닥닥 해치우고 말 일이 아니거든. 평생을 해야 하는 거고, 영원히 해야 하는 거고. 다맛 자기의 인연 따라서 정진하는 양상이 달라질 수는 있어. 성문(聲聞)은 성문으로서, 연각(緣覺)은 연각으로서, 보살(菩薩)은 보살로서 또 부처님은 부처님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무라고 할까, 주어진 일에 따라서 도 닦아 가는 형태는 다를지언정 우리의 공부는 우리의 정진은 영원히 해야 하는 거다.


**송담스님(No.527)—94년 동안거해제 법회(94.01.15.음)

 

(1) 약 19분.

(2) 약 21분.

 

(1)------------------

여군동보우동행(與君同步又同行)하고  기좌상장세월장(起坐相將歲月長)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갈음기손상대면(渴飮飢飡常對面)인데  불수회수갱사량(不須回首更思量)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여군동보우동행(與君同步又同行)이여. 그대와 더불어 함께 걷고 또 같이 댕기고,
기좌상장세월장(起坐相將歲月長)이다.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고 같이 앉았고, 이렇게 서로 함께 하기를 세월이 길었어. 무량겁 이전부터서 잠시도 떠나지 아니하고 오랜 겁(劫) 동안을 그렇게 같이 살아왔다.

갈음기손상대면(渴飮飢飡常對面), 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항상 서로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살아왔다.
불수회수갱사량(不須回首更思量)이다. 모름지기 머리를 돌이켜서 다시 사량(思量)하지 말아라.

여기서 그대와 같이 걷고, 같이 행하고, 같이 앉고 눕고, 같이 먹고, 같이 마시고 이렇게 수없는 세월 동안을 그렇게 같이 살아왔다. 우리는 소소영령한 무량겁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때로는 하늘 법계에서 그렇게 같이 살았고, 때로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같이 살아왔고, 때로는 수라도에, 때로는 지옥도에, 때로는 아귀도에, 때로는 축생도에, 때로는 성문으로서, 연각으로서, 보살로서, 십법계(十法界)를 그렇게 같이 살아왔다.

자기가 짓고 닦은 바에 따라서 십법계를 그렇게 살아왔어. 여읠라야 여읠 수가 없어. 왜 그렇게 여읠 수가 없느냐?

지금도 이렇게 산승(山僧)이 말을 하고 사부대중이 산승의 말을 듣고 있는데,
같이 듣고 같이 말하고, 본래 내 자신이, 본래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이 각각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그렇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인연 따라서 지은 바에 따라서 법계(法界)를 돌고 돌지만, 딴 것이 아니야.

그러기 때문에 이 최상승법에서는 부처를 찾을라고 하지 말아라.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을라고 하지를 말아라. 번뇌가 본래 번뇌(煩惱)가 보리(菩提)이기 때문에 번뇌를 버릴라고 하지 말아라.

우리가 깨닫지 못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못해 가지고, 견성성불 할려고 하기 때문에 부처를 찾고 번뇌를 버릴려고 하는데 그 생각 때문에 우리는 괴로운 것이고, 답답하고, 공부가 안되는 것이여.

부처를 찾을려고 하지 말고,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 말어.
내가 부처인데, 부처가 다시 또 부처를 찾으니까 부처가 보이지를 않는 거고, 번뇌가 바로 보리인데, 번뇌를 버리고 보리를 찾기 때문에 거기에서 공부가 우리를 괴롭게 하고 마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면 출가해서 계행(戒行)을 지키고 참선을 하는데, 그럴 필요가 뭐 있느냐?
본래 부처인데 부처를 왜 찾으며, 눈만 떴다 하면은 번뇌 망상이 들끓고 그러는데 어떻게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 말아야 하냐?
수행도 할 필요가 없이 그냥 고대로 두라면, 뭐 하러 도를 닦으며 출가를 하며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출세(出世)를 하셨느냐?’

그런 생각이 날 수도 있어. 그러나 닦을 것이 없는 곳을 향해서 닦아야 하고, 찾을 것이 없는 곳을 향해서 찾아야 하고, 버릴 것이 없는 곳을 향해서 버릴 줄 알아야 해. 그 방법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이다. ‘이뭣고?’

물을 마실 때는 물을 마시되 ‘이뭣고?’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되 ‘이뭣고?’ 머리를 돌이켜서 다시 사량분별(思量分別)을 하지 말아라.
누기 짜서 사량분별을 하기 때문에 대면천리(對面千里)여. 그냥 거기에 있는데, 얼굴을 맞대고 있는데 천리만리(千里萬里)로 떨어져 버린 거여.

‘이뭣고?’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빨리 터지기를 바라지도 말고, 확철대오 하기를 바라지도 말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 하는 것뿐인 거여. 절대로 깨달을려고 하지 마라. 절대로 툭 터지기를 바라지도 말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난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그냥 ‘이뭣고?’
‘이뭣고~?’하고 있는 동안에도 별의별 생각이 일어나거든. 일어나거나 말거나 내버려 둬. 귓전에 바람 스쳐가듯이 내버려두고 ‘이뭣고?’만 챙기는 거여.
그렇게 해 나가면 앉아서도 ‘이뭣고?’요, 서서도 ‘이뭣고?’요, 밥을 먹을 때도 ‘이뭣고?’ 걸어갈 때도 ‘이뭣고?’ 소지할 때도 ‘이뭣고?’

‘정진(精進)이라고 하는 것은 안락지묘문(安樂之妙門)이다’ 그랬어. ‘안락의 묘문, 편안하고 즐거운 묘한 문이다’ 그랬어.
이것을 억지로 할라고 하니까 고행이고, 괴롭고 답답하고, 그래가지고 스트레스가 쌓여 가지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삭발일이다, 목욕일이다, 반산림이다 하면은 어디 등산이다, 어디로 왔다갔다 하고 싶고 나가고 싶고,

다못 올바르게 정진 할 줄 알면 자세를 바르게 갖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를 여법하게 불급불완(不急不緩)하게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 줄 알면, 생각이 일어나서 스쳐가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 있어? 그냥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이뭣고?’를 해.

죽비(竹篦) 치면 좌선하고 또 방선(放禪)하면 계속해서 앉았고 싶으면 앉았고, 밖에 나가서 바람 쏘이고 포행을 좀 하다가 또 들어와서 정진하고, 석 달이 하루같이 지나가는 거여.
보름 지나가면 못 견디고, 무슨 반산림이니까 등산을 해야 하고, 그건 공부를 제대로 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제대로 하는 법이 무엇이냐? 앉아서는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번뇌 일어나도 일어나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 그때마다 자꾸 화두를 챙겨서 알 수 없는 의단이 독로하도록만 잡드리 해 나가면,

밥 먹고, 양치질 하고, 화장실에 가고, 시간이 되면 취침을 하되 취침을 해도 가만히 일어나서 또 정진하고 싶으면 하고, 누워서도 잠이 언제 들 줄을 모르니까 (잠이) 들을 때까지는 화두를 들고 해서,
주삼야삼(晝三夜三)에 항상 의단이 독로하도록만 잡두리 해 나가면 그것이 그렇게 정진이란 것이 힘이 들고 애를 먹고 그런 것이 아니여.

이 세상에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은 우리가 따질 필요가 없어.
‘불교는 깨닫는 가르침이다’ 그렇지만 원래 내 자신이 부처이기 때문에 올바른 방법으로 단속만 할 줄 알면 그 자체가 바로 부처님인 거여.

‘확철대오(廓徹大悟)’ 우리는 너무 그 말을 많이 들어와 가지고 확철대오 하기를 항상 우리의 목표로 삼고,
그 10년 20년 되어도 확철대오를 못하면 허송세월을 한 걸로 생각하고, ‘괜히 이거 오평생(誤平生)을 한다’고 이렇게 한탄을 하게 되는데 절대로 확철대오 할라고 할 필요가 없어.
올바른 방법으로 화두를 거각하고 단속해 나가면 깨달을라고 할 필요가 없어.


십법계를 아까 말했지만 십법계가 ‘한 생각’ 일어나는 속에 잉태되어 있는 거여. 처음에 ‘한 생각’ 딱! 일으킬 때 십법계가 거기에 들어 있는 거여.

‘한 생각’을 좋은 생각을 먹으면 천당으로 가는 거고, 악한 생각을 일으키면은 지옥에 가는 거고, 탐심을 내면 축생이 되는 거고, 진심(瞋心)을 내면 바로 그 찰나에 그 독사도에 들어가는 건데,
일어나자마자 그 생각이 차츰차츰 발전을 해 가지고 결국은 그것이 십법계로 가게 되는데, 일어나자마자 바로 생각을 ‘이뭣고?’로 돌리면 윤회(輪廻)가 바로 거기서 찰나(剎那) 찰나에 끊어지는 거여.

참선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무슨 생각이든지 났다 하면은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가지고 거기서 싹이 터 가지고 잎이 피어서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 건데, 일어나자마자 즉각 ‘이뭣고?’로 돌리는 거여.
앉어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밥 먹을 때나, 그러니 그 처음 일어나는 ‘한 생각’이 활구참선을 한 사람과 안 한 사람과는 그렇게 다른 것이다 그말이여.

‘한 생각’이라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렇게 소중하고 그렇게 무서운 것이여.
그 ‘한 생각’을 단속할 줄 모르면 평생 동안을 불법(佛法)을 믿어도 헛믿는 거고, 평생 동안을 선방에 와서 앉았어도 참선 헛하는 거여.

이것이 머리를 돌이켜서 다시 사량을 하지 말아라.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단속을 해 버리면 공부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복잡한 것도 아니여.

일어나는 한 생각을 그걸 단속을 못해 가지고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번뇌 때문에 못한다’ 점점 한 생각 일어나는 놈을 점점 키워 가지고 자기가 그 생각에 구속을 당하고 그 생각에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처음~18분33초)

 

 

 



(2)------------------

정체종래절색공(正體從來絶色空)이라  멱즉지군불견종(覓則知君不見蹤)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묘봉정상일전신(妙峰頂上一轉身)하면  시방무처불봉거(十方無處不逢渠)니라
나무~아미타불~

정체종래절색공(正體從來絶色空)이여, 정체(正體), 바른 진리의 체는 본래로 색(色)과 공(空)이 끊어졌어. 시간과 공간이 끊어졌고 주관과 객관이 끊어진 것이여.
그래서 멱즉지군불견종(覓則知君不見蹤)이여. 시간과 공간이 끊어졌고 주관과 객관이 끊어졌고, 색공이 끊어진 그 자체를 우리가 중생의 사량분별로 찾는다고 하면은 도저히 그 자취도 볼 수가 없다.

색상이 있고, 시간과 공간과 주관과 객관, 그런 것이 있으면 우리가 찾아보면 ‘아!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알 수가 있고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이 끊어진 것을 그것을 분별심으로 찾는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묘봉정상(妙峰頂上)에 일전신(一轉身)하면, 묘고봉(妙高峰), ‘묘(妙)하게 높은 봉우리’라는 것은 수미산(須彌山)을 말하는 것인데,

육욕천(六欲天) 가운데에 사왕천이 있고, 도리천이 있고, 제3 야마천, 제4 도솔천, 제5 낙변화천, 제6 타화자재천이 있는데, 두 번째 천(天)인 도리천(忉利天), 거기가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있는 하늘인데, 그 도리(忉利)란 말은 33이란 말이여. 도리천에는 33천이 있어.
그런데 한 가운데에는 제석천왕이 살고 동서남북 사방에 각기 8천(八天)씩이 있어. 그래서 4x8=32에다가 중앙에 제석천이 있는 것까지 합하면 그래서 33천인데,

그 수미산 중턱에는 사왕천(四王天)이 있고, 수미산 꼭대기에 가서 도리천이 있다 그말이여.
그 수미산, 묘고봉 정상에서 ‘일전신(一轉身)을 해라. 한번 몸을 굴려라’ 그거거든.


우리가 참선을 하면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져.
밥을 먹어도 밥맛을 모르고,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않고, 물을 봐도 물이 보이지 않어. 걸어가도 걸어간 줄 모르고, 일체처 일체시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돼. 알 수 없는 의단만 독로하도록 해 나가.

번뇌 망상도 버릴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일어나지를 않고, 그러한 경지에 결국은 들어가게 되는데 어떻게 편안하고 어떻게 고요하고 어떻게 깨끗하든지 화두를 들 생각까지도 없어져.
오히려 화두를 드는 것이 오히려 그 고요하고 깨끗하고 편안하고 맑은 경계가 흩어질까 봐 화두 들기조차도 아깝게 되는 거여. 이 대목이 정진하는 사람이 가장 주의해야 할 곳이다.

아무리 고요하고 깨끗하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화두에 대한 의단이 있어야지, 화두에 대한 의단이 없으면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져 가지고 공부를 올바르게 해 가는 것이 아니여.
설사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에 정(定)에 들어가 가지고 몇 겁을 지난다 하더라도 바른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어. 설사 오신통(五神通)이 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른 공부가 아니여, 바른 법이 아니다.

그런 경지에서 화두를 드는 것은 억지로 힘을 들이고 용을 써 가지고 드는 것이 아니여.
몸도 지극히 편한 자세로 힘을 다 빼고 긴장을 다 풀고, 앉았거나 섰거나 걸어가거나 일여(一如)한 가운데에 알 수 없는 의단만 성성하고 적적하게 화두만 들어가는 거여.

억지로 좌(坐)에 탐착(貪着)해 가지고 앉아 있을라고만 할 것도 없고, 앉아 있게 되면 앉아 있고, 일어서야 할 때가 되면 일어서고, 화장실에 갈 때는 화장실에 가고, 세수를 할 때는 세수를 하고, 이를 닦을 때는 이를 닦고,
대중이 같이 소지(掃地)를 하고 운력(運力)을 할 때는 운력을 하면서....

남하고 희희낙락(喜喜樂樂) 잡담하는 것은 절대 금물(禁物)이여. 잡담하고 그런데 끼어서는 안 돼.
다못 비질을 하면서도 그 정진이 여법하게 되어가도록 단속을 해 가는 것이여.

‘묘봉상에 몸을 한번 굴린다’하는 것은 공부를 해 나가다가 그러한 경지가 나타났을 때 그러한 것에 탐착을 하면 못쓰는 거여.

쪼끔 공부가 조용히 잘된다고 해서 그걸 탐착을 하고, 어떠한 자기가 정진해 나가는 데 가장 좋은 지경에 이르르면 그런 경지가 오래 흩어지지 않도록, 오래 그러한 경지에 있기를 바래서 거기에 집착을 하게 되거든.
세속에서도 사업이 잘되거나, 어떤 일이 자기 마음대로 되면 그것이 오래오래 그대로 잘되어 가게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거기에 집착을 하거든.

공부를 해 나가다가 보면 그렇게 순일하게 공부가 잘되어 가는 날이 있고, 또 화두가 암만 들어도 잘 들리지를 않고 자꾸 혼침이 오는 날이 있고, 자꾸 복잡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일어나 가지고 잘 안되는 날도 있고 그런데,

잘된다고 거기에 좋아하는 마음을 내는 것도 그것도 집착이고, 잘 안된다고 안절부절하고 짜증을 내고 번뇌심을 내는 것도 그것도 거기에 끄달린 것이라,
좋은 경지에 집착한 것이나, 안 좋은 경지에 집착한 것이나 집착은 매한가지여.

정진이라 하는 것은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날씨가 나쁘면 나쁜 대로, 그런대로 하루를 지내야지,
날씨가 좋다고 그 날은 좋아서 펄펄 뛰고,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고 해서 아침부터 기분이 나뻐 가지고 짜증을 내고, 그렇다면은 어떻게 사람이 제대로 생활을 할 수가 있냐 그말이여.

우리가 이 공부라 하는 것은 하루 이틀에 후닥닥 해치우고 말 일이 아니거든. 평생을 해야 하는 거고, 영원히 해야 하는 거고. 다맛 자기의 인연 따라서 정진하는 양상이 달라질 수는 있어.

성문(聲聞)은 성문으로서, 연각(緣覺)은 연각으로서, 보살(菩薩)은 보살로서 또 부처님은 부처님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무라고 할까, 주어진 일에 따라서 도 닦아 가는 형태는 다를지언정 우리의 공부는 우리의 정진은 영원히 해야 하는 거다 그말이여.

그래서 조금도 조급한 생각을 낼 필요가 없고, 좀 잘 안된다고 해서 짜증을 낼 것도 없고, 잘된다고 해서 그렇게 좋아할 것도 없어. 조급한 생각도 낼 필요가 없지만 잠시도 해태(懈怠)할 수가 없는 일이다.

처음에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지 말아라. 번뇌가 바로 보리이기 때문에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 말아라”하는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수미산 꼭대기에서 한바탕 몸을 뒤치라’고 하는 뜻을 우리는 잘 귀담아 듣고 명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수미산 꼭대기에서 한 번 몸을 굴리면 시방무처불봉거(十方無處不逢渠)다. 시방세계 어디에나 그대를 만나지 아니한 곳이 없으리라.


‘공부가 잘 안된다, 암만 공부를 해도 진보가 없다’ 공부 할려고 애쓴 사람은 다 그러한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 법회 때 조실 스님께서 “공부가 잘 안되는 것은 신심(信心)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말씀하셨는데, 그 신심이라는 게 3가지 신심과 3가지 불신심이 있는데,

첫째 신심이 순일(純一)하지를 못해. ‘신심이 순일하지 못하다’는 것은 있다가 없다가 하는 거여.
한결같아야 하는데, 있다가 없다, 때로는 있다가, 때로는 없다가, 화두를 드는 사람이 때로는 화두를 들다가 어떤 경계를 만나면은 화두가 없어져 버려. ‘있다 없다’하는 것은 그것이 신심이 순일하지 못한 것이여.

둘째는 신심이 불일(不一)이여. 한결같지 않다 그말이여. ‘한결같지 않다’고 하는 것은 결정적인 신심이 없기 때문에 한결같지 못하는 거여.

이렇게 좀 해 볼까, 저렇게 좀 해 볼까?
신도님들도 ‘금강경이 좋다’하니까 금강경 좀 해 보다, ‘옴마니반메훔이 좋다’하면 옴마니반메훔 좀 해 보고, ‘원각경이 좋다’하니까 원각경을 좀 해 볼까? 한결같지를 못하고 이랬다저랬다.
‘이뭣고?’하다가, ‘판치생모’했다가, ‘정전백수자’를 했다가, ‘조주 무자’를 했다가, 이것도 해 보다 안되면 저거 해 보고, 저것도 해 보다 안되면 이거 해 보고.

안될수록에 한결같이, 한번 화두를 탔으면 잘되어도 한결같이 그 화두를 해 가고, 안되더라도 계속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한 화두를 가지고 해 나가다 보면 또 잘되는 것이고,
잘되어 가다가도 뚝 변해 갖고 또 안돼. 안되더라도 짜증을 내지 말고 또 정신을 가다듬고 계속 한결같이 해 가야 하는 거여.

그래서 태산(泰山)과 같은 그런 무거운 묵직한 그러한 신심이라야지, 쪼끔 잘된다고 그저 좋아서 못 견디고, 조금 안된다고 해서 또 번뇌심을 내 가지고 안절부절 하고, 그래서는 안돼.
안된다고 해서 화두를 바꾸고, 무엇이 잘 안된다고 해서 이리저리 변경을 해서는 안된다.

셋째는 신심이 불상속(不相續)이여. 계속해서 해 가야 하는데 이어가지를 못해. 저절로 순일하게 이어지기를 바라지만 무엇이 그렇게 처음부터서 그렇게 될 것이냐 그말이여.
안되지마는, 번뇌가 나고 망상이 일어나고, 때로는 몸이 상태가 안 좋고, 소화가 안되고 머리가 아프고, 이리저리 수없는 크고 작은 문제점이 있을 수가 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그럴수록에 계속... 화두가 없어지면 또 챙기고, 없어지면 또 챙기고, 그렇게 한결같이 그렇게 상속(相續)이 되도록 노력을 하면 신심이 결국은 한결같이 되고, 신심이 순일하게 되는 것이여.

여기서 신심(信心)이라고 하는 말을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의단(疑團)이라고 바꾸어서 생각을 해 보면 대번에 이해가 되는 것이여.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결같지 못하고, 한결같지 못하기 때문에 상속이 안되고,
상속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결같지 못하고, 한결같지 못하기 때문에 순수하지 못하고, 꺼꿀로 붙이나 옳게 붙이나 마찬가지여.
왜 그러냐 하면은 부득이 해서 3가지로 분류를 했지만 원래가 하나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것 밖에는, 이 길 밖에는 내가 할 일은 없다’
‘안되어도 이렇게 해 나가야 하고, 되어도 이렇게 해 나가야 하고, 죽어도 이것을 해야 하고, 죽을 때까지 해야 하고, 죽은 뒤에 다시 몸을 바꿔서라도 나는 이 길 하나 밖에는 없다’고 하는 철두철미(徹頭徹尾)한 신심,
첫째 그것이 있어야 정진이 안되어도 안되는 대로 밀고 나갈 수가 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중단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생각 자체가 결정적인 신심, 최상승법에 대한 결정적인 신심이 없고서는 이 공부는 중도(中途)에 그만 두지 않기가 어려운 일이다.
이 공부는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 것이지만 결정적인 신심, 그것이 철저하지 못하면 안 된다.(18분34초~39분35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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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여군동보우동행~’ ; [금강경오가해]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겁(劫) ; (산) kalpa의 음사. 인도에서의 가장 긴 시간단위. 지극히 긴 시간. 무한히 긴 시간.
[참고] 겁(劫)의 무한히 긴 시간을 개자겁(芥子劫)•반석겁(盤石劫)으로 비유한다.
〇개자겁(芥子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성(城) 안에 겨자 씨를 채워, 100년에 한 알씩 집어내어 겨자 씨가 다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함.
〇반석겁(盤石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큰 반석(盤石)을 부드러운 천으로 100년에 한 번씩 쓸어 반석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함.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십법계(十法界) ; 십계(十界)라고도 한다. 십법계는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불(佛) 10가지로 중생의 미혹과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분류한 것. 중생의 심리적 상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십법계 중 앞의 6계는 삼악도(三惡道-지옥, 아귀, 축생)와 삼선도(三善道-수라, 인간, 천상)로 모두 미혹의 세계인 범부(凡夫)의 세계이다. 뒤의 4계(성문, 연각, 보살, 불)는 깨달음의 정도에 차이가 있지만 모두 깨달음의 세계인 성인(聖人)의 세계이다.
양쪽을 합하여 '6범4성'(六凡四聖)이라 한다. 이를 4취(四趣)·인천(人天)·2승(二乘)·보살·불(佛)로 분류하거나 3악도(三惡道)·3선도·2승·보살·불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앞의 6계는 고통으로 가득 차 업에 의해 윤회전생하는 세계이므로 보통 '육도윤회(六道輪廻)'라 한다.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 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 함[逼惱, 惱亂] 등의 뜻으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이러한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묶이게 되고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惑-業-苦 三道]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대면천리(對面千里) ; 얼굴을 맞대도 천리 같이 매우 멀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 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별의별(別의別) ; 보통과는 다른 갖가지의.
*정진(精進) : [범] Vi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불급불완(不急不緩) ;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죽비(竹篦 대나무 죽, 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주삼야삼(晝三夜三) ; 밤낮. 밤이나 낮이나.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오평생(誤平生 그릇할·잘못 오/평평할 평/살 생) ; 평생을 그르침.
*윤회(輪廻) :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勢力)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오직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서로 연쇄 관계(連鎖關係)를 지어 가면서 변하여 갈 뿐이다.
마치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물•수증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업식(業識)도 육체가 분해될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들은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쉴 새 없이 번민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을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천상 또는 다시 인간으로 수레 바퀴 돌듯 돌아다니게 된다.
그러나 성품을 깨쳐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가 없게 되면 윤회는 끊어지는 것이다.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①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②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과보(果報) ; 인과응보(因果應報,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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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정체종래절색공~’ ; [금강경오가해] 離色離相分 함허득통 설의(說誼) 참고.
*수미산(須彌山) ; 수미(須彌)는 ‘sumeru’의 음역. 묘고산(妙高山)이라 한역함.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산.
*육욕천(六欲天) ; 욕계육천(欲界六天). 육천(六天). 아직 도덕적으로 불완전하며 욕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였으므로 육욕천(六欲天)이라 한다.
삼계(三界, 일체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3가지 세계로 욕계·색계·무색계) 가운데에 욕계(欲界, 식욕食欲·수면욕睡眠欲·음욕淫欲이 있는 세계)에 딸린 여섯 종의 하늘을 말한다.
곧 사왕천(四王天)·도리천(忉利天)·야마천(夜摩天)·도솔천(兜率天)·화락천(化樂天)·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다.
이 6천 가운데에서 사왕천은 수미산(須彌山) 허리에 있고, 도리천은 수미산 정상에 있으므로 지거천(地居天)이라 한다. 야마천·도솔천·화락천·타화자재천은 다 허공(虛空)에 있으므로 공거천(空居天)이라 한다.
욕계(欲界)는 식욕(食欲)·수면욕(睡眠欲)·음욕(淫欲)이 있는 세계로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 등 5가지와 사왕천·도리천·야마천·도솔천·화락천·타화자재천 등 육욕천이 여기에 속한다.

*제석천왕(帝釋天王) ; 불법(佛法) 지키는 수호신. [天神]들의 제왕[] 샤크라〔釋〕라는 . 제석(帝釋), 석제(釋帝), 제석천(帝釋天), 제석왕(帝釋王), 제석태자(帝釋太子), 천주(天主)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샤크라 데바남 인드라(Śakra-devānām Indra).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陀羅) ·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 · 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 ·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 등으로 음역하고 줄여서석제환인(釋提桓因, 釋帝桓因) · 제석천(帝釋天)이라 한다.

『법화현찬(法華玄贊)』에서는 범어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에서 석가 ()씨이며 ()이라 한역하고, ‘제바 ()’이라 한역하며, ‘인달라 ()’ 한역하니  능천제(能天帝)’ 한다 뜻으로 보면 석가(능히) 제바(하늘의) 인달라(제왕)’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수미산이 있는데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의 왕으로, 사천왕(四天王)32() 통솔하면서 불법(佛法) 불제자를 보호한다. 도리천에는 33신이 있는데, 제석은  중앙에 있는 선견성(善見城) 안의 수승전(殊勝殿)이라는 궁전에 살고, 나머지 32신은  () 밖의 궁전에서 각각 산다.

제석천은 본래 인도 성전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천신  벼락을 신격화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신이었으나 불교에수용되어서는 범천(梵天) 함께 호법선신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부처님의 설법 자리에 나타나 법회를수호하고 사바세계 인간의 번뇌와 죄를 다스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에서는 단군의 할아버지를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 하여 하늘의 주인과 제석천을 동일시하여 숭배하였다.

<잡아함경>에는 제석천이 본래 사람이었으나 수행자에게 음식과 재물, 향과 와구(臥具등불을 베푼 인연으로 제석천이 되었다고 한다. 제석천왕은 신중탱화(神衆幀畵)  손에 금강저(金剛杵) 들고 머리에 보관(寶冠) 쓰는 모습으로 많이 등장한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무기공(無記空) ; ①의식이 깨어있지 않고 멍하거나 기억이 없으면서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상태 ②참선중에 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선가귀감](용화선원) p94-95 참조.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탐착(貪着) ; 만족할 줄 모르고 사물에 더욱 집착함.
*운력(運力) ; '함께 힘을 기울인다'는 의미. '많은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서 일을 한다'는 의미로 운력(雲力)이라고도 하며,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하는 일'이란 우리말 '울력'과 같다.
의미와 관계없이 운력(運力)은 사찰에서 대중들이 모여 육체적인 노동을 함께 한다는 뜻.
*소지(掃地) ; ①마당(땅)을 쓸다. ②청소.
*희희낙락(喜喜樂樂) ; 매우 기뻐하고 즐거워함.
*금물(禁物) ; 해서는 안 되는 일.
*매한가지 ; 아주 같은 상태. 또는 완전히 같은 상태.
*성문(聲聞) : 부처님의 음성(聲)을 들은(聞) 사람이라는 뜻. 산스크리트어 śrāvaka, 팔리어 sāvaka.
모든 중생을 널리 다 건지겠다는 큰 원을 세우지 않고, 자기의 공부만을 힘쓰는 가운데 부처님이나 다른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소승의 사제법(四諦法)을 깨쳐서 번뇌 망상을 끊고, 나(我)가 없어져서 열반에 들게는 되지마는, 그 열반은 얕고 작은 ‘나머지 있는 열반(有餘涅槃)’ 곧 '아직 덜된 열반에 들어 있는 이'를 이름이다.
*연각(緣覺) ; 산스크리트어 pratyeka-buddha  팔리어 pacce ka-buddha
①홀로 연기(緣起)의 이치를 관찰하여 깨달은 자.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깨달은 자. 자신의 깨달음만을 위해 홀로 수행하는 자. 독각(獨覺)·벽지불(辟支佛)이라고도 함.
② 연각승(緣覺乘)의 준말.
*보살(菩薩) :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각유정(覺有情) • 개사(開士) • 대사(大士)등으로 번역.
①성불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
②대승교에 귀의, 사홍서원을 발하여 육바라밀을 수행하며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자리 • 이타(自利 • 利他)의 행을 닦으며 51위의 수행계단을 지나 드디어 불과(佛果)를 증득하는 이.
*해태(懈怠 게으를 해, 게으를 태)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태산(泰山 클 태/메 산) ; 퍽 높고 큰 산.
*꺼꿀로 ; ‘거꾸로(차례나 방향 따위가 반대로 바뀌어)’의 사투리.
*철두철미(徹頭徹尾) ;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고 철저하게.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5. 5. 14. 14:42

§(119) 신심, 분심, 의심(삼요) / 참선 공부는 승속(僧俗)이 없다 / 진실한 포교(布敎)란? / (게송)유안석인제하루~.

신심만 철저하다면 반드시 분심이 있을 것이요, 분심(憤心)이 있는 곳에 어찌 대의정이 일어나지 아니 할 수가 있습니까?
참다운 신심은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만 하면 결정코 금생에 이 몸속에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을 가뜩 담아 있는 채 견성성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대신심이요, 참다운 바른 신심인 것입니다.


이 공부는 어떠한 이유, 어떠한 핑계도 여기에는 닿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어떠한 일이라 하더라도 죽음보다는 덜 급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누구도 막아줄 수 없고, 대신(代身)할 수 없고, 자기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한 사람이라도 참되게 정법을 믿고 참되게 내 마음을 닦아감으로 해서,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이 순화가 되고 그 사람의 행동에서 보살도의 향내가 밖으로 풍겨나가서 많은 사람에 무언중 감화를 줄 수 있다면 이러한 포교야말로 진실한 포교요, 진리에 적합한 포교요,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이 되는 포교라고 생각이 됩니다.


**송담스님(No.119)—80년 1월 관음재일 법어(80.01.24) (용119)


약22분.



깨달음은 이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여법(如法)하게 거각(擧却)하고 정진을 함으로써만이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억울할 때나 우리의 마음에서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감정이 일어나건, 그 생각, 그 감정 하나하나를 헛되이 놔 보내지 말고 바로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순박하게, 이렇게 진실하게, 이렇게 바보처럼 한 생각 한 생각을 다져 나간다면 결정코 우리는 생사를 해탈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철저한 믿음이 서야 하고, 철저한 의심이 있는 곳에 큰 분심이 일어나고, 철저한 믿음과 큰 분심이 있는 곳에 타성일편(打成一片) 하는 대의정이 돈발(頓發)하는 것입니다.
대의정(大疑情)은 오직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의 밑바탕 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심만 철저하다면 반드시 분심이 있을 것이요, 분심(憤心)이 있는 곳에 어찌 대의정이 일어나지 아니 할 수가 있습니까?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선방에 살아도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하지 아니 한다면 10년 20년을 선방에 지낸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돈과 쌀을 쌓아 가지고 50년 60년을 절을 왕래하고 선방을 드나든다 하더라도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정(大疑情)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점심밥 싸 가지고 경치 좋은 관광지 왔다갔다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철저한 신심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
말세(末世)에 태어났고, 못나게 태어났고, 무식하게 태어났고, 여자로 태어났을망정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이며,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나도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대신심(大信心)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심이 있다. 신심이 있다’하면 절에 가서 절을 많이 하고, 불공(佛供)을 자주 가고 그러면은 그것을 ‘신심이 있다’하고 혹 생각하실 분이 있을런지 모릅니다마는 그것도 일종의 신심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신심은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만 하면 결정코 금생에 이 몸속에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을 가뜩 담아 있는 채 견성성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대신심이요, 참다운 바른 신심인 것입니다.

이 신심이 있다면 분심(憤心)이 일어날 수밖에는 없습니다.

왜 나와 불보살과 조금도 차등이 없는 똑같은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과거의 성현(聖賢)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하고 진리를 깨달아서 대성현이 되었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오늘날까지 깨닫지를 못하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가? 오늘날까지 왜 깜깜한 칠통(漆桶)으로 몸부림치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대분심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촌이나 일가가 잘되면 거기서는 분(憤)이 나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이 시뻘겋게 시기와 질투를 할 줄 알면서, 어째서 과거의 모든 성현들은 대도를 성취하셨는데 나는 오늘날까지 칠통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육도윤회 속에 개미 쳇바퀴 돌듯이 돌면서 몸부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분심이 일어나지 아니 한다고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대신심과 대분심이 있는 곳에는 저절로 화두가 들지 아니해도 들어질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억울한 욕 한마디를 하면 그 말이 부애가 나고 억울하고 분이 나서 핏대를 세우고, 혈압이 올라서 밥도 먹기 싫고, 잠도 자기 싫고, 당장 쫓아가서 따지고 요절을 낼랴고 펄펄 뛰면서, 하루 이틀이 지나도 그 분이 풀리지 아니하고, 한 달 두 달이 지내도 그 억울한 분이 풀리지를 아니하고, 10년 20년이 되고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소리는 잊지 못하겠다고 치를 떨 줄 알면서, 어째서 자기의 문제, 가장 급하고 요긴하고 중대한 문제, 자기의 생사(生死)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한만(汗漫)히 남의 일처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하루하루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심지어는 듣기는 듣지만 ‘저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저건 스님네나 하고, 늙어서 다 가정일 끝난 다음에 선방에 갔을 때 그때 조금 해 보리라’ 이러한 생각을 하고, ‘남편 때문에 못 한다, 아들딸 때문에 못 한다, 집안 살림 때문에 못 한다’ 이렇게 핑계를 하고 또 ‘몸이 아파서 못 한다’ 이러한 등등 갖은 핑계를 대 가지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냅니다.

이래 가지고 그럭저럭 보내다가 한 해 두 해가 가고, 병이 나고 허리가 꼬부라지고 혈압이 올라가고 그때 가서는 ‘아차!’해 봤자 이미 그때는 때가 늦은 것입니다.

이 공부는 어떠한 이유, 어떠한 핑계도 여기에는 닿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어떠한 일이라 하더라도 죽음보다는 덜 급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누구도 막아줄 수 없고, 대신(代身)할 수 없고, 자기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대사를 앞에 두고 어떠한 이유를 대 가지고 뒤로 미루고 그럭저럭 지낸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하기가 그지없는 사람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물론 출가한 스님네는 오직 이 문제만을 위해서 부모와 형제와 가정과 고향을 버렸고, 청춘을 버렸고, 인생을 뚤뚤 뭉쳐서 오직 이 한 일만을 위해서 다 바쳤습니다.
그래서 물론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정진들을 하고 계시지만 이 문제는 꼭 스님네만 해야 하고 신도는 그럭저럭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차라리 스님들은 부양가족(扶養家族)도 없고, 돈을 벌어야 할 까닭도 없고 해서 자나깨나 ‘이뭣고?’니까 드문드문 한 번씩 해도 공부가 어느 정도 되어 가겠지만, 마을에 계신, 세속에 계신 여러분들은 스님네보다도 몇십 배 정신을 챙기지 아니하면 여간해서 공부에 힘 얻기가 어려울 줄 생각합니다.
위에로는 부모를 모셔야 하고, 남편을 보좌해야 하고,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돌봐야 하고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합니다. 정말 내용을 알고 보면 잠깐 새도 편할 날이 없으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이뭣고?’를 챙기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생각 생각이 ‘이뭣고?’를 하면서 그러한 일들을 해야만 자기의 과거의 빚도 갚으면서 앞으로 자기의 영원한 영혼을 위해서 자기 삶을 영위한 사람이 되겠지만, 참선 공부를 등한히 하고 오직 세속적인 빚만을 갚기 위해서 전전긍긍한다면 완전히 금생의 인생살이라 하는 것은 노예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노예라 하는 것은 희망이 없는 인종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오직 무서운 고된 일 밖에는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불쌍한 신세가 바로 노예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노예라고 하면 혹 분개를 하실른지 모르지만 정법을 믿고 열심히 정진을 하지 아니한다면 여러분은 정말 눈에 보이지 아니한 쇠고랑을 찬 노예와 무엇이 다를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빚을 갚지 아니하고, 자기의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지 아니하고, 전부 거기를 도피를 해라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가 지은 빚은 자기가 갚아야 하고, 빚을 갚으면서도 자기의 장래를 위해서 희망을 가지고 자기의 속 살림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사람다운 사람이고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빚을 갚지 않고 도피해 봤자 이자만 더욱 늘어날 뿐, 자기의 빚은 아무도 갚아주지도 않고 빚이 없어지지도 아니한 것입니다.
일단 아내로서, 자기의 자녀들의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처하게 되었다면 성의를 다해서 남편을 보조하고 부모를 봉양하고 아들딸들을 성심성의껏 잘 길르고 가르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한 생각 한 생각을 가다듬어서 화두를 들고 법문을 듣고 또 공부를 해 가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 고된 일들이 하나도 고된 줄을 모르고,
그러한 정법을 몰랐을 때는 자기의 신세가 분명 노예와 같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정말 고되고 지긋지긋한 그러한 일들이었지만, 정법을 알고 난 뒤부터서는 그러한 일들이 정말 성스러운 불사(佛事)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과 기쁨과 자신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불자(佛子)가 그 집안에 있음으로 해서 온 집안에 향기가 풍기고 온 집안사람들이 그 향기로 인해서 순화되어 갈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한 며느리가 진실한 불자가 되어 가지고 자기의 소임을 완성하고 마음으로 참선 공부를 열심히 할 때에, 그렇게 무섭고 마음에 싫었던 시어머니도 어느새 며느리를 딸처럼 아끼고 귀여워하게 되고, 자기도 그 시부모가 정말 친부모 못지않게 더 다정하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그런 어머니로 되어질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는 연세가 많으신 노보살님도 계십니다마는 열심히 법문을 듣고 참선을 열심히 하시고, 가정에 돌아가셔도 참선에 여념이 없고 언제 며느리나 손자손녀들에게 잔소리 할 겨를이 없어진다면, 평소에 별로 효심이 없다고 여겨졌던 며느리와 아들딸 손자손녀들도 그 달라진 할머니를 위해서 참으로 효심 있는 식구가 되어 줄 것입니다.

한 할머니가 그런 마음으로 정진을 하시고 여생을 마치실 때 그 가족의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들은 저절로 할머니의 뒤를 이어서 정법을 믿는 훌륭한 불제자가 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입으로 법을 설하기보다는 자기의 마음으로 정법을 설해야 하고 행동으로 정법을 설할 때, 정법은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온누리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흔히 예수교는 방방곡곡에 성당 교회당을 짓고 저렇게 신도를 갖다가 많이 포교(布敎)를 하고 굉장한데, ‘불교는 포교가 부족하다. 자꾸 산중에만 절이 있지 도회지에는 절이 없다’ 이렇게 해서 많이 불교의 부진한 포교에 대해서 개탄을 하시고 충고를 주신 분들을 만납니다마는, 형식적인 교회나 사찰을 많이 지어 가지고 종을 울리며 그래 가지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뜻이 있겠지만,

우리 불법(佛法)은 그러한 것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참되게 정법을 믿고 참되게 내 마음을 닦아감으로 해서,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이 순화가 되고 그 사람의 행동에서 보살도의 향내가 밖으로 풍겨나가서 많은 사람에 무언중 감화를 줄 수 있다면 이러한 포교활동이야말로 진실한 포교요, 진리에 적합한 포교요,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이 되는 포교라고 생각이 됩니다.

흔히 ‘선방 스님네들은 포교를 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해탈만을 위해서 철저한 이기주의적인 입장에서 자꾸 은폐적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는 비난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마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 자신의 생사 문제를 위해서 철저한 사람이라야만 남을 건져줄 수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선방에서 바보처럼 묵묵히 정진에 몰두하신 스님네야말로 가장 훌륭하게 포교를 하고 계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봄 석달 동안 춥지도 덥지도 않고 하는 그러한 아주 좋은 계절이 올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계절을 맞이해서 스님네와 신도 여러분들은 어쨌든지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공부에 열중하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헌디  무언동자암차허(無言童子暗嗟噓)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 눈이 있는 돌사람은 가지런히 눈물을 흘리고,
무언동자암차허(無言童子暗嗟噓)라. 말없는 동자는 은근히 한탄을 하더라.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이 도리가 다르냐 틀리냐?” 이렇게 만공 스님께서 조실 스님께 물으셨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29분53초~51분15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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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것을 원칙으로 한다.
*(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칠통(漆桶)을 타파(打破) ; 칠통(漆桶)은 옻칠을 한 통으로, 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이므로 칠통에 비유한 말이다.
‘칠통을 타파한다’는 말은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핏대를 세우다 ;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몹시 화를 내거나 흥분하다.
*한만(汗漫)히 ; 되는대로 내버려두고 소홀하거나 무심하게.
*대신(代身)하다 ;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그것의 역할이나 책임을 떠맡아 하다.
*승속(僧俗) ; 스님과 스님이 아닌 속인(俗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부양가족(扶養家族) ; 자기가 돌보고 있는 가족.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제사,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이 중생을 교화(敎化)하는 일.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식이란 말이다。불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지혜목숨(慧命)을 이어가고, 법의 집과 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요원의 불길 ; ‘매우 빠르게 번지는 벌판의 불길’이라는 뜻으로, 걷잡을 수 없이 무섭게 퍼지는 세력이나 기세를이르는 말. *요원(燎原 화톳불·들불 료/언덕·들 원) ; 불타고 있는 벌판.
*(게송) ‘有眼石人齊下淚  無言童子暗嗟噓’ ; [다비문(茶毗文)] ‘입감(入龕)’편 참고.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5. 3. 26. 13:07

 
§(118) (게송)법법본래무소주~ / 참마음을 일으켜 공부를 끝장내라 / 조실스님 꿈에 지옥고 광경 / 3가지의 도에 나아가는 첩경(徑)과 5가지의 철저한 바른 믿음.
 
중봉(中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철 두 철 또는 10년 20년 참선을 해도 깨닫지를 못하고 공부가 진취가 없는 사람은 그 까닭이 무엇인가? 다른 것이 아니라 ‘참마음’, 참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했기 때문에 공부가 끝장이 나지를 않는다”
 
생사 문제,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한번 듣고서 그 문제에 관해서 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똥을 누거나 길을 가거나 차를 타거나 생각 생각이 염두(頭)에서 떠나지 않게 된다면 이것이 바로 참마음을 발(發)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사 문제, 일대사 문제를 대해서 속으로부터—아무리 의식적으로 일으켜서가 아니라—저절로 솟구쳐 오르는 참마음이 있어야만 우리의 공부의 끝장이 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118) - 80년 동안거해제 법어(80.03.01) (용118)

 

(1) 약 21분.

(2) 약 9분.

 

 

(1)------------------
 

법법본래무소주(法法本來無所住)한데  어무소주절추심(於無所住絶追尋)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양오작야침서령(陽烏昨夜沈西嶺)한데  금일의연상효림(今日依然上曉林)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법법(法法)이 본래무소주(本來無所住)한데, 법법, 일체법(一切法), 온갖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이것이 바로 법법(法法)입니다. 이 온갖 법이 본래 주(住)한 바가 없다.

어무소주절추심(於無所住絶追尋)이라. 주(住)한 바 없는 곳에 추심(追尋)을 끊으라.

 

하늘에는 구름이 날으고, 땅에는 물이 흐르고,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겨울에는 흰눈이 내리고, 농부는 쟁기를 가지고 논으로 들어가고, 나무꾼은 지게를 짊어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이 모든 것이 본래로 주(住)한 바가 없는 법이다. 주(住)한 바 없는 곳에서 무엇을 찾는단 말이냐?

 

양오작야침서령(陽烏昨夜沈西嶺)이니, 양오(陽烏)는 태양입니다. 태양이 어젯밤에 서쪽 산으로 넘어갔는데,

금일의연상효림(今日依然上曉林)이라. 오늘은 예나 다름없이 새벽 숲 위로 떠오르는구나.

 

 

오늘은 삼동결제(三冬結制), 기미년 동안거(冬安居)가 마지막 끝나는 해제일입니다. 동안거 해제일이요, 또 작년 10월 15일부터 시작한 백일기도가 오늘 회향(廻向)을 하는 날이고, 또 우리나라 옛날부터서 전해 내려오는 정월 대보름날로써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영가(靈駕)께 차례를 올리는 천도(薦度) 법요식(法要式)이 있겠습니다.

 

삼동 석 달 동안 참 오랜만에 강추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 스님네와 선방의 보살님네들 모다 정진을 열심히 해주셨고, 그 동안에 여러 차례 열리는 법회에 많은 사부대중들이 참여를 하셔서 법문을 듣고 또 정진들을 하셨습니다.

 

해제(解制)날은 자자(自恣)일이라 해 가지고 한군데 모여서 자기의 잘못을 참회하고 반성하고, 또 대중으로부터 자기의 잘못된 점을 지적을 받아서 고맙게 생각하고 자기의 허물을 고쳐서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精進)하는데 채찍을 삼는 그러한 날인 것입니다.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각자 지나간 석 달 동안 정말 출가(出家) 본질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참되게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정진을 했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고요히 반성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해제라 해서 삼동의 안거가 끝나기는 했지만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공부는 오히려 오늘부터 더욱 채찍을 맹렬히 가하면서 정진을 해야 할 줄 생각합니다.

 

 

중국의 고봉(高峰) 스님, 선요(禪要)의 그 고봉 스님의 사법제자(嗣法弟子)이신 중봉(中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철 두 철 또는 10년 20년 참선을 해도 깨닫지를 못하고 공부가 진취가 없는 사람은 그 까닭이 무엇인가? 다른 것이 아니라 참마음! 참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했기 때문에 공부가 끝장이 나지를 않는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마음’이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어떤 사람이 나한테 도저히 참을라야 참을 수 없고, 잊을라야 잊을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억울하고 분이 날만한 욕을 해왔을 때 참을 수도 없고, 아무리 마음을 돌려서 이해 할려고 해도 이해할 수도 없고, 그 말을 듣자마자 오장육부가 활딱 뒤집어지면서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밥을 먹어도 그 분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잠을 잘려고 자리에 들어가도 잠이 오지 아니하고, 차를 타나, 길을 걸어가나, 일을 하거나 도무지 그렇게 억울하고 분한 욕을 듣고서는 기어코 해명(明)보다도 복수를 하던지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풀리지를 않은 이러한 경우처럼,

 

생사(生死) 문제에 대해서 나의 생사 문제—생사가 눈 한번 감았다 뜨지 못하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주검이요, 한번 죽으면 지옥이나 축생이나 무량겁을 두고 다시 생사의 수레바퀴 속에 괴로움을 받을 일.

"생사 무상, 생사 문제,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한번 듣고서 그 문제에 관해서 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똥을 누거나 길을 가거나 차를 타거나 생각 생각이 염두(頭)에서 떠나지 않게 된다면 이것이 바로 참마음을 발(發)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어렸을 때 해인사에서 도반 소년이 죽는 것을 보시고, 바로 그날 저녁에 저승에를 가셔 가지고 지옥(地獄)에서 지옥고 받는 그 현상을 목격을 하고,

 

그 사람을 맷돌에다 콩나물처럼 여러 사람을 한 다발씩 해서 맷돌 구녁에다 넣으면 큰 집 덩어리만한 아랫 맷돌은 왼쪽으로 돌고, 위짝은 오른쪽으로 돌면서 십여 명씩 사람을 다발로 집어넣으면 칠칠칠칠 갈리면서 시뻘건 피가 피고름으로 갈려서 나오는 그런 현상이며,

사람을 머리꼭대기부터서 톱으로 썰어 내리는 광경이며, 펄펄 끓는 구리쇠 물을 목에다가 따라 붓는 광경이며, 그런 것을 보시고 너무나 무서워서 소스라쳐 깨시고 그 길로 서장(書狀)을 배우시다가 서장을 덮어버리고 선방(禪房)으로 나가셨던 일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사 문제, 일대사 문제를 대해서 속으로부터—아무리 의식적으로 일으켜서가 아니라—저절로 솟구쳐 오르는 참마음이 있어야만 우리의 공부의 끝장이 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우리가 공부를 해나가는 데 첫째는 신심, 둘째는 분심, 셋째는 화두에 대한 의심, 이 세 가지 요긴한 것[三要]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은 그 신심(信心), 대관절 그 첫째 갖추어야 할 신심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첫째는 자기 몸 가운데 있는 주인공, 눈을 통해서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 냄새 맡고, 혀를 가지고 맛을 볼 줄 알고,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예” 하고 대답할 줄 아는 놈,

성도 낼 줄 알고, 슬퍼할 줄도 아는 그 주인공이 삼세제불(三世諸佛)과 더불어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고 하는 사실, 나에게도 부처님과 같은 똑같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첫째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주인공이 무량겁을 두고 내려오면서 오늘날까지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온갖 색상, 우리의 의식으로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미워하고, 오욕락(五欲樂)에 빠지고 그것을 익히면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을 똑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셋째는 고조사(古祖師)들이 남겨 놓으신 한 말씀 한마디가, 공안(公案)에 대한 말씀이라든지 또는 법문답(法問答) 하신 것이라든지, 일언반구(一言半句)가 마치 하늘에 뻗쳐 서 있는 큰 칼과 같아서,

그 고인(古人)의 일언반구에 대해서 등한히 그걸 따진다든지, 알음알이로 그것을 짐작을 해 볼라고 한다든지, 공연히 남의 흉내를 내서 법담(法談)을 한다든지, 이러다가는 그 큰 칼에 나의 목숨이 끊어진다고 하는 엄숙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선방에 한 철, 두 철, 세 철, 다니다 보면 큰스님네 법문도 듣고, 선배들의 법문답 하는 것을 보고, 그래 가지고 조그마한 소견을 그것을 가지고 희롱을 하고, 자기도 한소식 한 것처럼 뽐내고, 이러한 조그만한 것을 득소위족(得少爲足), 조그만한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을 삼는 이러한 태도는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진정한 수행인으로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넷째는 일용공부(日用工夫)에 있어서 다못 자기가 공부를 짓지 아니한 것 그것을 두려워할지언정,

가다듬고 또 다잡이 하고 이렇게 해서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1분 1초라도 등한히 보냄이 없이 계속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가지고 생각 생각이 정미(微)롭게 공부를 지어 나간다면 결정코 확철대오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에 가서, 이 생사 문제—생사가 무상해서 찰나 찰나에 주검의 문을 향해서 우리가 나아가고 있다고 하는 이 생사 문제가 결정코 적은 일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인식을 하고,

만약 내가 큰 분심(憤心)을 내 가지고 결정적인 지조를 가지고서 나의 힘으로 결단코 칠통(桶)을 타파(打破)할 것을 기약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삼도(三途)의 고해(苦海) 속에 빠지는 것을 면할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 말한 이 다섯 가지, 이것이 바로 수행인이 가져야 할 가장 간절(懇切)하고 간절한 명심해야 할 믿음인 것입니다. 이것을 철저히 믿고 그리고서 공부를 지어나간다면 백 명이면 백 명, 천 명이면 천 명,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믿음에 대해서 과연 자기가 그만큼 철저하게 빈틈없이 나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나날이 점검을 하고 반성을 해 나가야 할 줄 압니다.(처음~20분57초)

 

 

 

 

 

 

 

(2)------------------

 

그리고 어떻게 하면 보다 더 빨리 도(道)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도를 닦아 가는 사람은 첫째, 지혜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 어떤 것이 지혜의 눈이냐?

 

이 세간(世間)에 태어난 이 몸과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이 모든 경계(境界)와 일체 시비—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고 한 일체 시비(是非)와 누구는 미웁고 누구는 사랑하고 하는 증애(愛)와,

무엇은 좋고 무엇은 나쁘고 하는 취사심(捨心), 무엇은 나에게 유리하고 무엇은 나에게 손해가 된다고 하는 득실(失)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고 어떻게 하면 빨리 죽는가 하는 수명(命)에 관한 문제, 어떻게 하는 것은 나에게 괴롭고 어떻게 하는 것은 나한테 즐겁다고 하는 고락(苦樂)의 문제,

 

이러한 것들이 다 꿈속의 인연이다고 하는 것을, ‘꿈속에서 꿈꾸는 일이다, 꿈속의 인연이어서 조금도 그러한 것들이 실(實)다운 것이 아니다’ 그렇게 조파(破)하는 것입니다, 간파(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철두철미(尾) 간파를 하고서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탐진치(貪瞋) 삼독(三毒) 가운데에 치(癡)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렇게 봐야 할 것을 그렇게 보지 못하고, 이러한 세간의 신심(身心), 일체 경계라든지, 일체 시비·증애·취사·고락·득실, 그런 문제들이 실(實)다운 것으로 믿고 그것을 향해서 갖은 계략과 몸부림을 치는 것을 갖다가 ‘어리석음[癡]’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꿈속의 인연이다. 그래서 실다운 것이 아니고 꿈같이 허망한 것이고, 부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을 하고 간파를 하면 이것을 바로 ‘지혜의 눈이 밝아졌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종상불조(從上佛祖), 부처님으로부터 역대 조사의 설하신 모든 말씀과 유불선(仙) 삼교(三敎)의 성현의 말씀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수많은 차별법이 다 한 근원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을 이해를 하고 그것에 대해서 다른 소견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이것이 바로 이성(理性)에 통했다 그런 것입니다. 이치 이(理)자, 성품 성(性)자, ‘이치에 통달을 했다. 이성에 통달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오늘부터 지금부터 미래가 다하도록 내가 만약 나를 깨닫지 못한다면,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결정코 이 공부를 중단하지 아니하리라, 쉬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바로 지조(操), 이러한 굳건한 뜻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지혜의 눈, 둘째는 이성에 통달하고, 셋째는 지조가 견고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만 결(缺)해도 우리의 도는 완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지혜의 눈은 얻었지만 이성에 통달하지 못하고 지조가 굳건하지 못한다면,

하나의 무사인(無事人), 일 없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 그 사람은 다못 스스로 일 없는 사람이 되어서 소요(遙)는 할지언정 불법을 자아를 완성을 해서 자리이타(自利利他) 할 수 있는 진정한 부처님 제자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둘째인 이성에는 통달했으되 지혜의 눈을 뜨지 못했거나 지조가 견고하지 못한 사람은 영리하기는 할지언정 진정한 참 불제자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지조는 견고하되 지혜의 눈을 뜨지 못했다든지 이성에 통달하지 못했다면 이 사람은 담판한(擔板漢)이라. 이 사람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을려고 그러고, 맨몸으로 한강을 건너뛸려고 하는 지극히 우직한 사람이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눈을, 또 이성에 통달, 셋째는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죽어도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이런 철저한 뜻을 갖춘다면 불일성지(不日成之)다. 이 사람은 결정코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 오늘 해제 법요식에 참석하신 여러분!

과연 이상의 세 가지의 도에 나아가는 첩경(徑)과 다섯 가지의 철저한 바른 믿음이 자기에게 얼마만큼 갖추어져 있었는가? 현재 얼마만큼 갖추어져 있는가에 대해서 냉정하게 스스로 점검을 해보시고,

 

오늘 이후로 이 세 가지의 첩경과 다섯 가지의 믿음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이 없도록 단속을 하고 채찍을 가해서 결정코 이 몸 있을 때 생사,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요달(了達)해 주셔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20분58초~29분3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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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법법본래무소주~’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 p93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追(추)쫓다,구하다 *尋(심)찾다 *上(상)위,오르다 *曉(효)새벽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양오(陽烏,暘烏 태양 양/까마귀 오) ; 태양(太陽)을 달리 이르는 말. 태양 속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살고 있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동결제(三冬結制)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결제,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 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물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회향(廻向) ; 회전취향(回轉趣向)의 뜻.
①방향을 바꾸어 향하다. ②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이에게 돌려 이익을 주려하거나 그 공덕을 깨달음으로 향하게 함. ③자신이 지은 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베풀어 그 중생과 함께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함.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망자의 넋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법요식(法要式) ; 불사(佛事 - 제사,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를 할 때 행하는 의식.
*자자(自恣 스스로 자/마음대로 자) ; 안거(夏安居)가 끝나는 날에 수행자들이 한곳에 모여 자신의 잘못을 고백(告白)하고 참회(懺悔)하는 의식.
*정진(精進) ; ①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②잡념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깨우치기 위해 수행에 힘씀.
*출가(出家) : [범] Pravrajita 집에서 나온다는 말이다。가정 생활을 떠나서 수도와 포교를 전문으로 하기 위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몸 출가(身出家)보다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등 삼독(三毒)의 불이 늘 붙고 있는 번뇌 망상의 불집에서 뛰어나오는 마음 출가(心出家)를 하여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32~133.
出家爲僧이  豈細事乎아.  非求安逸也며  非求溫飽也며  非求利名也라
爲生死也며  爲斷煩惱也며  爲續佛*慧命也며  爲出*三界度衆生也니라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  몸의 안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고,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니라.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고봉 스님 ; 분류 ‘고봉스님(선요)’ 참고.
*선요(禪要)『선요』는 중국 송대 말기에서 원대 초기의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의 법어집으로 대중과 개인을 위한 법문과 편지글 및 스님 자신의 수행과정을 직접 말씀한 편지글을 포함해 29단락의 법어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참선 수행인이 생사 일대사(生死 一大事)의 해결을 위하여 간절하게 화두 참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사법(嗣法 이을 사/법 법) ; 선가에서 스승으로부터 법(法 깨달음)을 이어받음. 또는 이어받은 사람.
*중봉(中峰) 스님 ; (1263~1323) 중국 원나라 스님. 불명은 명본(明本). 항주 전당 사람. 보응(普應), 환주도인(幻住道人), 환주노인(幻住老人), 중봉보응국사(中峰普應國師)라고도 한다.
15세에 출가하여 금강경, 원각경, 법화경, 전등록 등을 보고, 후에 고봉원묘(高峰原妙)의 사관(死關)을 찾아 심요(心要)를 묻고, 금강경을 읽다 뒤에 샘물이 흘러 나오는 것을 보고 활연히 깨쳤다.
고봉의 법을 받고는 일정하게 있는 곳 없이 배(船)에서 있기도 하고 암자에서 거주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북정자적(北庭慈寂) 스님이 편집한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峰和尙廣錄)』 30권이 있다. 『광록』안에는 「산방야화(山房夜話)」  「동어서화(東語西話)」  「신심명벽의해(信心銘闢義解)」가 포함되어 있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불교]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 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라고 한다.
*염두(頭) ; 마음속. 마음의 속.
*저승 ;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영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 염라국(國, 염라대왕이 가스리는 나라)이라고도 한다.
*지옥(地獄 땅 지, 감옥 옥) ; ①고통이 가득찬 세계. 현세에 악업(惡業)을 행한 자가, 사후 그 보답을 받는 곳. ②아주 괴롭거나 더없이 참담한 환경이나 형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소스라치다두려움이나 놀라움 따위 깜짝 놀라 몸을 갑자기 떠는 듯이 움직이다.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대혜서(大慧書)·『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62()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 역설하였다.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법문답(法問答) ; 법거량(法擧揚). ①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 ②선객(禪客)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禪)에 대한 문답.

*일언반구(一言半句)한마디 말과  구절이라는 으로아주 짧은  이르는 .

*고인(古人) ; 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법담(法談) ; 선사(禪師)들이 서로 법문을 묻고 대답하는 것.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잡이 ;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정미하다(微-- 정미할 정/자세함 미) ; 정밀하고 자세하다.

*분심(憤心)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칠통(漆桶)을 타파(打破) ;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삼도(三途, 三塗) ; 악한 일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는 3가지 미혹한 생존. 지옥•아귀•축생의 생존.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2)

 

*도(道) ; ①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②깨달음. ③가르침. ④궁극적인 진리. ⑤이치. 근원.

*세간(世間) ; (산스크리트어 loka) 세(世)는 파괴·변화, 간(間)은 가운데·간격을 뜻함.

① 변하면서 흘러가는 현상계. ② 생물들의 세계. ③ 생물들이 거주하는 자연 환경, 곧 산하대지. ④ 세상. 이 세상. 세속. ⑤ 산스크리트어 saṃsāra 미혹한 세계. ⑥ 육내입처(六內入處), 또는 십이처(十二處)를 말함.

*조파(破) ; 석가모니가 지혜의 밝고 환한 빛으로 범부(凡夫 번뇌에 휩싸여 진리에 어두운 이)의 무명(無明 근본번뇌, 어리석은 마음)을 비추어 깨우치는 일.

*간파하다(看破--) ; 속내(드러나지 않은 이나 숨겨 마음)를 꿰뚫어 알아차리다.

*철두철미(尾)처음부터 까지 빈틈없고 철저하게.

*유불선(仙)유교 불교 도교 아울러 이르는 .

*제자백가(諸子百家) ; 중국 춘추 전국시대에 활약한 유가·도가·묵가·법가 등 수많은 학자와 학파들의 총칭.

*지조( 뜻 지/절개 조) ; 원칙 신념 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켜 꿋꿋한 의지 기개.

*결하다(缺-- 부족할 결) ; ①(무엇 갖추어야  )갖추지 못하고 빠뜨리다. ②(갖추어졌어야  )빠져 있거나 부족하다.

*소요( 거닐 소/서성거릴 요) ; 마음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

*자리이타(自利利他) ; 자신도 이롭게 하면서 남도 이롭게 하는 것.

*담판한(擔板漢 멜 담/널판지 판/사나이 한) ; 판자를 어깨에 메어 한쪽을 보지 못하는 자, 곧 전체를 보지 못하고 편견을 가진 사람을 말함.

*불일성지(不日成之) ; 어떤 일을 며칠 안 걸려서 이룸.

*첩경( 빠를 첩/지름길 경) ; 지름길. 가깝게 질러서 가는 빠른 길.

*요달(了達 마칠•완전히 료/통달할 달) ; 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혜명(慧命) : 지혜를 생명에 비유한 말.

 

Posted by 닥공닥정
법회(신수기도)2015. 2. 20. 16:10

 

 

§(320) 설산동자의 설화 / 기도는 청정하고 간절하고 일여한 신심으로 소원성취를 하고, 거기에 그치지 말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데 목적을 두고서 해야 한다.

 

기도를 오늘부터서 시작을 하는데 ‘기도하는데 무엇이 가장 으뜸이 되느냐?’하면 신심(信心)입니다. 간절한 신심, 철저한 신심, 깨끗한 신심, 한결같은 신심, 이것이 합해져야 그것을 정성(精誠)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7일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되 기도도 성취하고, 그 기도 성취하는데 그치지 말고 내 자성(自性)을 깨달아서 생사 없는 경지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데 목적을 두고서 이러한 기도 법회도 여는 것이고 이 기도 법회에 동참한 사람은 역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

 

**송담스님(No.320)—87년 정묘년 신수기도 입재(87.01.31) (용320)

 

약 11분.

 

 

정묘년 신수기도 입재를 맞이해서 방금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정말 감동 깊은 최상승(最上乘)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법문 가운데에 설산동자(雪山童子), 부처님께서 인행(因行) 때에 설산에 들어가서 수행하시면서 그 나찰(羅刹) 귀신의 법문을 듣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신 그 설산동자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설산동자가 고행(苦行) 정진을 하고 있을 때에 어디서 게송(偈頌)이 들려오는데,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이다.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고 이것은 나왔다 죽었다 하는 생멸법(生滅法)이다” 이러한 뜻의 게송이 들려왔습니다.

 

그 게송 소리가 너무나 아름답고 엄숙해서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그러한 엄숙하고도 아름다운 목소리를 낼만한 그러한 상대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저만치 살펴보니 뿔이 돋치고 어금니가 튀겨져 나온 사람을 생으로 막 잡아먹는 무서운 나찰 귀신이 보였습니다.

 

설마 저 나찰 귀신의 입에서 저런 소리는 나올 리가 없겠지만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나찰 귀신에게, “방금 그 게송을 그대가 읊었느냐? 그대가 읊었다면 그 다음 구절이 있어야 할 것이니 그 다음 구절을 일러다오” 이렇게 간절히 청했습니다.

 

나찰 귀신은 시치미를 뚝 따면서 “행자(行者)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지금 배가 고파서 죽겠습니다” 전혀 대꾸를 아니 합니다.

“그래, 배가 고프면 내 몸뚱이를 너에게 줄 테니 그 나머지기 게송을 나에게 들려다오”

 

“나는 배가 고파서 우선 먹고 봐야지 배가 고파서 일러줄 수가 없다”

“그러면 내 몸뚱이를 네 입에다 넣고 귀만 남겨놓고 일러다오”

 

그러니까 나찰 귀신이 그 나머지기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니라. 생멸이 다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적멸이 최고의 낙이 되느니라” 이 게송을 일러주었습니다.

 

그 게송의 한마디를 듣고서 설산동자는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그 게송을 자기만 알고 깨닫고서 나찰 귀신에게 먹혀 버리면 다시는 다른 중생들이 어떻게 그 게송을 들을 수가 있을까?

그래서 나무에다가, 바위에다가 닥치는 대로 그것을 긁어서 그 게송을 써 놓고서 나무에서 나찰 귀신을 향해서 몸을 날렸습니다.

 

삽시간에 온 허공에서 아름다운 하늘나라의 장엄한 음악이 울려 퍼지며, 나찰 귀신은 순간에 제석천왕(帝釋天王)의 몸으로 변해 가지고 공경스럽게 그 설산동자를 받들어 모셨습니다.

 

이것이 간략한 설산동자의 설화인데, 위법망구(爲法忘軀)—법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목숨을 바친 가장 대표적인 한 예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를 오늘부터서 시작을 하는데 ‘기도하는데 무엇이 가장 으뜸이 되느냐?’하면 신심(信心)입니다.

간절한 신심, 철저한 신심, 깨끗한 신심, 한결같은 신심, 이것이 합해져야 그것을 정성(精誠)이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정성을 드린다’ ‘치성(誠)을 드린다’ ‘공(功)을 드린다’ 이렇게 말들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몸과 마음의 청정, 그리고 간절(懇切)한,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여(始終一如)한, 최선을 다한, 여지없이 믿어버리는 의심없는 그러한 마음가짐, 이것이 법을 위해서 내 몸과 목숨을 바치는 신심이라 할 것입니다.

 

이 철저한 신심이 아니고서는 기도는 성취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청정하고 간절하고 일여한 그러한 신심으로 기도를 봉행할 때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간절한 신심은 인간의 조그마한 소원—부자가 되는 원이라든지, 아들을 낳기 바라는 원이라든지 또는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원이라든지, 좋은 사위나 좋은 며느리를 얻으려는 원이던지,

무슨 가정에 환자가 병을 낳기를 바라는 원이라든지 여러 가지 종류의 각각 다른 그런 원이 있을 수가 있으나 그러한 원은 말할 것도 없이 성취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 조실 스님의 법문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러한 원을 이루는, 인간의 오욕락(五欲樂)을 성취하는 그러한 데에 그쳐서야 되겠느냐.

 

우리는 7일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되 기도도 성취하고, 그까짓 일 성취하는데 그치지 말고 내 자성(自性)을 깨달아서 생사 없는 경지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데 목적을 두고서 이러한 기도 법회도 여는 것이고 이 기도 법회에 동참한 사람은 역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하는 요지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기도 성취는 몸을 깨끗이 하고 또 마음을 깨끗이 하고 또 간절한 마음, 최선을 다하는 마음 그리고 시종이 일관된 일여한 마음.

‘일여(一如)하다’는 말은 내가 몸과 마음이 깨끗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하면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3일 기도, 7일 기도, 백일기도 여러 날을 두고 간절히 기도를 하다보면,

자기의 마음이 깨끗해져서 그래가지고 부처님의 깨끗한 마음과 하나가 될 때에 자기의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고 의심 없는 일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어쨌든지 7일 동안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기도에 임해 주시기를 바라고, 여러분이 소원한 바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이 하나도 빠짐없이 성취되시기를 바라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처음~10분43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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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설산동자(雪山童子) ; 석가모니(釋迦牟尼)가 과거세에 설산(雪山)에서 도(道)를 닦을 때를 가리켜 부르는 명칭.
《열반경(涅槃經)》 제14권에 기록된 석가모니의 전생담에 나오는 말로, 석가모니는 설산동자로써 도를 닦으면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의 두 글귀를 듣고, 나머지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두 글귀의 가르침을 얻으려고 나찰(羅刹)에게 자신의 몸을 희생하였음.
*인행(因行) ; ①수행. (부처가 되기 위한) 인(因)이 되는 행(行). 깨달음을 여는 근본이 된다.
②수행에 방해가 되는 외부의 요인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롯이 수행정진하는 것. 보살이 인행(因行)을 닦아서 깨달음의 과보(果報)를 얻는 것을 수인감과(修因感果)라고 한다.
*나찰(羅刹) : 신속하게 땅이나 공중으로 다니면서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무서운 악귀(惡鬼). 나중에 불교의 수호신(守護神)이 되었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고행(苦行) ; ①어떤 경지에 이르거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깨달음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며 하는 수행.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시치미를 떼다[따다] ; (사람이) 매를 훔친 사람이 시치미를 떼어 내고 자기 매인 것처럼 행세한다는 뜻으로, 자기가 하고도 짐짓 하지 않은 체하거나 알고도 모르는 체하다.
'시치미'는 매의 주인를 밝히기 위해 주소를 적어서 매의 꽁지 털 속에 매어 둔 네모난 뿔을 이르는 말.
*행자(行者) : ①수행자.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사람 ②계(戒)를 받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절에 있으면서 여러 소임 밑에서 일을 돕고 있는 사람.
*나머지기 ; 나머지.

*제석천왕(帝釋天王) ; 불법(佛法) 지키는 수호신. [天神]들의 제왕[] 샤크라〔釋〕라는 . 제석(帝釋), 석제(釋帝), 제석천(帝釋天), 제석왕(帝釋王), 제석태자(帝釋太子), 천주(天主)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샤크라 데바남 인드라(Śakra-devānām Indra).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陀羅) ·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 · 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 ·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 등으로 음역하고 줄여서석제환인(釋提桓因, 釋帝桓因) · 제석천(帝釋天)이라 한다.

『법화현찬(法華玄贊)』에서는 범어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에서 석가 ()씨이며 ()이라 한역하고, ‘제바 ()’이라 한역하며, ‘인달라 ()’ 한역하니  능천제(能天帝)’ 한다 뜻으로 보면 석가(능히) 제바(하늘의) 인달라(제왕)’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수미산이 있는데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의 왕으로, 사천왕(四天王)32() 통솔하면서 불법(佛法) 불제자를 보호한다. 도리천에는 33신이 있는데, 제석은  중앙에 있는 선견성(善見城) 안의 수승전(殊勝殿)이라는 궁전에 살고, 나머지 32신은  () 밖의 궁전에서 각각 산다.

제석천은 본래 인도 성전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천신  벼락을 신격화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신이었으나 불교에수용되어서는 범천(梵天) 함께 호법선신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부처님의 설법 자리에 나타나 법회를수호하고 사바세계 인간의 번뇌와 죄를 다스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에서는 단군의 할아버지를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 하여 하늘의 주인과 제석천을 동일시하여 숭배하였다.

<잡아함경>에는 제석천이 본래 사람이었으나 수행자에게 음식과 재물, 향과 와구(臥具등불을 베푼 인연으로 제석천이 되었다고 한다. 제석천왕은 신중탱화(神衆幀畵)  손에 금강저(金剛杵) 들고 머리에 보관(寶冠) 쓰는 모습으로 많이 등장한다.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Posted by 닥공닥정

•§•(275) 화엄경—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 / 비로자나불은 오케스트라 지휘자 / 신심 / 조실스님의 첫 설법 / 만공선사의 인가, 전법게.

‘바로 우리 성낼 줄 알고 욕할 줄 알고, 탐심낼 줄 알고 진심낼 줄 아는 그 우리 중생심 가운데에 비로자나불이 있다. 그것을 우리가 선지식의 적절한 지도 아래 그것을 개발을 해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 것. 나도 반드시 바른 지도를 받아서 노력을 헌다면 나도 성불(成佛)헐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신심입니다.


본인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비로자나 전신체(全身體)다


필경에는 내가 나를 깨달지. 부처가 깨달라 주지 못혀. 그걸 비로자나 전신체라. 진대지(盡大地)가 비로자나 전신체여, 그러기 때문에.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여.


견성(見性) 못허면은 할 수가 없어. 잘 보면, 문제가 다른 문제 아무것도 없고 견성 문제여. 우리 모도 모아서 견성 「이뭣고?」 「이뭣고?」 잘해서 같이 생사해탈하자.


**전강선사(No.275)—임자년 동안거결제(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72.10.15) (전275)
**전강선사 법문 중간에 전강선사 명(命)으로 송담스님이 설하신 법문이 있습니다.

 

(1) 약 21분.

 

(2) 약 22분.


(1)------------------

 

이 묵언(默言)스님이 인자 호(號)가 송담(松潭)인데, 송담 스님을 10년 전부터 내가 법상에를 올라다니면서 여러분들 설법 좀 해 주고 교화해라.
법(法)을 알아 가지고 포교를 중생을 교화(敎化) 안 허면은 그 법을 애끼는 것도 그것이 돈 간탐(慳貪)과 부귀 간탐보다도 더헌 것이다.

법을 가지고, 좋은 법을 가지고 여러분 설법을 해드려서 아! 도(道)를 깨게 맨들아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허게 해야지.
일체 중생이 같이 생사없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증(證)해야지. 나 혼자만 해가지고, 안해 쓰겄느냐?

오늘은 내가 송담한테 다가서 ‘내가 인가(印可)해서 법위(法位)를 전해주니 그리 알라’고.
아! 내가 게송(偈頌—傳法偈)까장 잘 지어서 그래줬더니 죽어도 마다하고,

 

『이름은 그대로 가지겄습니다마는 저는 교화 못 허겄습니다.』
『왜 못 허겄느냐?』
『언변도 없고 또 당초에 헐 마음도 없고 못 허겄습니다.』
『그러면 고인(古人)도 대도(大道)를 통해 가지고도 보림(保任)을 헐라면은 포교고 뭣이고 그만 저 무인절도(無人絶島)에 들어가서 보림허는 법이 있으니 보림을 잘해라. 그러면 네 대로 가거라.』

10년을 내 밑에 있다가—10년을 묵언허고 10년만에 너는 바로 ‘마조원상(馬祖圓相)’ 법문에 바로 깨달라 나한테 대답을 했으니...

그래 내가 그것 하나 대답한다고 되아? 이 공안 저 공안, 공안(公案)을 모두 탁마(琢磨)를 해본 즉 아! 주욱 꿴다 그말이여. 세상에 기특헌 일이다.

나는 어찌 이렇게 내가 그 인가하는 무슨 그런 자격이 있으리요마는 그것은 한국의 과거에 6대 도인이 있었으니, 6대 선지식이 있었으니 6대 선지식의 인가가 내게 없으면 내가 어떻게 인가를 해 주리요.

허지마는 과거에 6대 선지식이 인가헌 것은 조르르르 내 설법에도 다 나와있지마는 구참선객(久參禪客)은 다 알고 있으니, 그러고 틀림없이 다 듣고 아는 이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는데, 아무리 해야 안되아. 인자는 나이 80이니 곧 오늘내일이여.
오늘내일이니까, 내가 하도 권허니깐 오늘은 설법헐라고, 저를 설법허라고 허니께 겨우 아무 말도 안해. 『예. 허겄습니다.』허고 나를 가만히 봐.

그만 설법허라고 허니까 그만 얼굴이 이만해 가지고 미안헌 생각만 잔뜩 가지고 있어. 말도 않고.
‘그래도 헐 수 없어’했더니 인자 올라와서 설법을 헐 것입니다.

헌디 나보다 설법을 더 잘 헌다. 그건 믿지 말라 그 말씀이여. 나는 50년 동안 설법했어.
아직 50년은 다 못 되었소마는 아! 인자 처음 설법헌 사람이 무슨 설법을 헐 것이여?

그렇게 확철대오한 보월 스님은 법상에 올라와서 설법허라고 하니까, 젠장 설법을 거꾸로 헌단 말이여. 설법 거꾸로 허는지 안 봤어.
다 설법허고 마지막 내려오면서 하는, 꺼꾸로 그 꽁댕이를 하면서 그나마 설법도 ‘웬굉~’ 운단 말이여. 울어. 설법하면서 울어버렸어.

대중이 그만 그 많은 대중이 ‘아, 그 보월 스님, 대도를 깨달은 스님이 설법을 허니 얼마나 장하랴’ 야단치고 듣는데,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라. 이 노래를 못 하고는.

만공 스님 항상 하는 소리 들었거든.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라 허고 내려오면 그 소리가 구수허게 좋으니까 자기도 올라가면 그렇게 헐 줄 알고,
(몸집은) 이만헌 이가 목은 찌끄만하게 (가는 목소리로) ‘아, 이사람아!  아, 그사람 참 별 사람이네’ 이런다 그말이여.

헌디 ‘웬굉~벱계~제중생~~’ 아! 그러고 운다 그말이여. 세상에 그렇게 우는걸 보고 안 웃는 이가 없네.
다 웃네. 그중 앞에는 조카상좌라고 이만 허니 또 그렇게 뚱뚱헌 사람이 있는데, 고것 쳐다 보고는 ‘아이고! 죽겄다’고 웃는다 그말이여. 웃음판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거 뭔 법문을 잘 헐 것이요? 허지마는 인자 불가불 이 절 원장(院長)이요, 이 절 조실(祖室)이고, 이 절을 어떻게 헐 거여? 아무리 허기 싫어도 나 혼자만 깨닫고 나 혼자만 생사해탈하고 말 것이여?

대전이 아무리 좋고 대전에다 큰 절 하나 지어놓고, 나 가본게 터가 참 우리 절터 보다 좋단 말이여.
허지마는 여그는 아주 내 본사(本寺)고, 여그는 안에 조실이고, 거그도 부속 선원으로 댕기면서 인자 봐주고 이렇게 되았습니다.

그러신 줄 아시고 오늘 설법상에 올라가서 보월 스님처럼 또 그렇게 울런지, 히히 헐란지 알 수 없소마는 잘 허리라 생각은 말란 말이여.

그저 인자 한번 올라가면 차츰차츰 인자 설법이 설통(說通)이 나와. 그렇게 알고 잘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잠깐 허고 내려오면 또 내가 올라가 또 설법을 헐테니 또 잘 들으십시오.

‘올라와. 어서 와. 헐 수 없어.’

 

 



< 송담스님 법문 >

부처님 49년 설(說)을 아함십이방등팔(阿含十二方等八) 아함경을 12년 동안 설하시고 방등경 8년,
그리고 이십일재담반야(二十一載談般若) 21년 동안을 반야경을 설하시고,
종담법화우팔년(終談法華又八年) 마지막에 법화경을 8년 동안을 설허셔서 그걸 합하면은 49년이 됩니다.

그런데 그 49년 동안 설하신 것이 팔만대장경인데 그 49년 동안에 왜 아함경 12년부터서 말을 하고, 맨 처음에 그렇게 많은 법문을 설하신 화엄경(華嚴經)은 그 49년 동안에 빼놓고 얘기를 허게 됩니다.

그것은 아함경 설하시기 전에 21일 동안에 걸쳐서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설하신 법문이기 때문에 49년 속에 계산을 넣지 않고 얘기를 허게 됩니다.

그러면은 이 화엄경은 그 화엄세계의 교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교주(敎主)로 계시는데 그 비로자나불은 입을 열지 않고, 한마디도 비로자나불의 법문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다른 많은 보살들이 각기 자기가 느끼고 깨달고 보는 바를 그렇게 각기 많은 보살들이 번갈라가면서 설해 놓은 것이 모아 놓은 것이 그게 화엄경이예요.

결국은 그 보살들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네들 말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비로자나불의 뒷받침에 의해서 설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로자나불의 법문을 많은 보살들의 입을 통해서 설해졌다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은 그 많은 화엄경을 하나의 큰 교향악(交響樂)으로 비유해서 본다면은 그 많은 위대한 대교향악의 총지휘자는 바로 비로자나불이고,
그 대관혁악의 악단은 그 화엄경에 나타난 많은 불보살들이 전부 그 교향악단의 악사라고 말할 수가 있고,

아울러서 그 화엄경이 우리가 보는 그 책으로 된 그것만이 화엄경이 아니라,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 다시 말해서 삼라만상(森羅萬象) 전부가 그 위대한 화엄경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유정(有情)·무정(無情)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낱낱이 우리도 그 대관현악(大管絃樂)의 한 단원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나서 일생을 살다가 죽어가는 것, 그 가운데에 자기가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눈 한번 깜짝이고 손 한 번 움직이고 발 한 번 움직이고 웃고 울고 헌 그것들이 그 대관현악의 악단으로써 연주하는 음악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그 악단을 지휘하는 비로자나불 바로 그분이 청정법신(淸淨法身)이십니다.

그러면은 이렇게 말허면은 그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떠헌 상호(相好)를 가지고 또 계신 걸로 착각하기가 쉽습니다마는,
사실은 그 비로자나불은 지금 산승이 말허는 말을 듣고 계신 여러분이 낱낱 여러분 가운데 바로 그 비로자나불이 계신 겁니다.

들을 줄 알고, 볼 줄 알고, 배고픈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아는 그 속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계신 것을 그것을 믿는 것이 신심(信心)입니다.

부처님 앞에 돈과 쌀과 모다 그 떡과 그런 것을 많이 차려놓고 절만 많이 허고 그런다고 그것이 신심이 아니라,
‘바로 우리 성낼 줄 알고 욕할 줄 알고, 탐심낼 줄 알고 진심낼 줄 아는 그 우리 중생심 가운데에 비로자나불이 있다. 그것을 우리가 선지식의 적절한 지도 아래 그것을 개발을 해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 것.
나도 반드시 바른 지도를 받아서 노력을 헌다면 나도 성불(成佛)헐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신심입니다.

그렇게 볼 때에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은 외도(外道)들이 말헌 바와 같이 우상 숭배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기어이 났으니 어떻게 살다가 가야 바르게 살았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머지않아서 젊은 사람이나,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이나 한번은 또 가게 됩니다. 갈 때에 어떻게 가야 허느냐? 이러헌 중대 문제가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러헌 중대한 문제를 우리는 탐심(貪心)과 진심(瞋心)과 치심(癡心) 이러헌 삼독심(三毒心)으로 말미암아 그런 데에 눈을 팔다 결국은 그런 중대사를 망각하고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에 하룻날 숨 한 번 내쉬었던 숨을 다시 들어마시지 못하면은 우리는 이 받기 어려운 몸을 버리고 또 어느 곳을 헤매게 되겠습니까?

다행히 우리는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뚱이를 받았고, 사람 몸을 받어 가지고서도 그 많은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들어오기 어려운 불법 문중(佛法門中)에 들어왔습니다.

불법 문중에 들어와서도 그 많은 절이 있고 많은 스님네들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 정법(正法)을 전해 이어받으신 전강 조실스님 문하에 들어와서 '참 불법'을 듣고 수행할 수 있는 이러한 길에 들어섰다고 하는 것은 저나 여러분이 한결같이 다행한 일이요, 희유한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서, 들어오기 어려운 정법 문중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루하루를 형식에 얽매여서 ‘결제니까 절에 가야겠다, 7일 날이니까 절에 가야겠다, 또는 관음재니까 절에 가야겄다’ 이것이 하나의 의식화 되아서 그 의식화된 가운데에 절에 왔다갔다 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믿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 큰스님 법문을 들을 때는 ‘아! 내가 쫌 열심히 화두(話頭)를 듣고 공부를 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불꽃같이 일어나지만,
그것이 벌써 집에 돌아가서 아들 손자 며느리 만나서 살림 걱정하는 소리 듣고 어쩌고 허다 보면은 금방 절에서 그 불꽃같이 일어난 신심은 간 곳 없고 다시 사회의 그 오욕락(五欲樂) 속에 휩쓸려 들어가고 말아버립니다.

비단 보살님들 뿐만 아니라 출가한 스님네도 무상(無常)을 철저히 느껴서 정든 고향과 부모형제 권속을 다 여의고 머리를 깎고 출가해서 철저히 수행할 것을 명심하고 각오한지 한두 번이 아니지마는,

또 하룻밤 자고 이틀밤 자고 사흘 나흘 엿새 가다 보면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그 굳었던 결심이 스르르 녹아지고 그래가지고 또 다시 또 자기를 참회하고 반성하고 해서 또 결심을 해가지고 또 정진을 애쓰고,

이렇게 애는 쓰고 있지마는 10년 20년 30년 이렇게 절에서 정진을 한답시고 함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확철대오를 하지 못한 것은 그 결심이 한 생각이 만년을 가지 못하고, 또 풀어졌다 또 세웠다 이러기 때문에,

물에 잠긴 돌이, 물이 채이면은 물속에 쟁기고, 물이 빠지면 또 돌 꼭대기가 물위로 솟았다, 또 물이 채이면 또 가라앉았다, 밤낮 이래가지고 끝장을 조매 보지 못하고 한 세상을 또 마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올라온 것은 마치 비로자나불이 한 대관현악에 지휘자가 되셔서 그 지휘자의 지휘봉에 의해서 많은 악사들이 느리게 또는 빨리, 뭣헌데는 격하게 또 뭣헌데는 조용허게 이렇게 해서 그 수천 무량수의 그 악사들이 한 분의 지휘봉에 의해서 관혁악을 연주하게 됩니다.

그와 같이 이 중생 교화하는데 있어서도 그 부처님이 하나의 위대한 그 각본을 저술한 작가이시요 또 지휘자이시고 또 감독이시고 연출이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조실스님이 이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 교화하신 것도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면,
청정법신 비로자불의 지휘·감독·연출에 의해서 일생을 스스로 닦아서 견성오도(見性悟道)하시고 나아가서 80 고령에 이르시도록 설법을 해서 많은 제자를 교화하신 것도 하나의 연극, 그 대관현악의 한 부분이라고 말헐 수가 있습니다.

제가 여기 올라온 것은 멀리는 비로자나불의, 가깝게는 조실스님의 지휘에 의해서 하나의 배우로서 또는 악사로서, 다시 비근(卑近)허게 말허면 꼭두각시로서 여기에 올라왔다고 말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출가해서 근 30년이 되었습니다마는 본래 근기(根機)가 우둔하고 발심이 철저허지를 못해서 노상 생각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투철한 공부를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역시 출가할 때의 그 마음가짐으로 전강 조실스님의 지도하에 정진허고 있는 하나의 수행인에 지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해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은
‘조실스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하루 한 시간, 1분1초라도 시간을 애끼고 챙겨서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셔서 조실스님의 철저한 지도 아래 다문 조끔이라도 더 철저히 공부를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와 같이 공부를 하십시다.’
이러한 권고의 말씀을 드릴 이외에는 아무 말씀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처음~21분2초)

 

 

 



(2)------------------

 

그리고 조실스님께서 이 용화사에 주석(駐錫)하신지가 벌써 10여년 입니다마는,
그 동안에 많은 광장설(廣長舌)로써 그 경전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러헌 최상법(最上法)을 여러분의 근기에 맞도록 그 고구정녕(苦口丁寧)하시고 참 훌륭하신 법문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 그늘 잔영(殘影)이 소소영령하게 녹음기에 녹음이 다 되어있고 그것이 낱낱이 조실스님의 시자의 노고에 의해서 원고가 결집이 되어있습니다.
앞으로 그 원고를 정리허고 교정해서 그것이 하나의 설법집으로 간행할 날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러헌 녹음기나 또는 설법집에 의해서 여러분이 공부허는 데에 좋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것 보다는 조실스님 몸이 살아계실 그 동안에 여러분께서 공부를 허셔서, 여러분이 공부허신 만큼 밖에는 조실스님이 어떻게 더 이상 지도를 못 허십니다.

자기가 열 근을 들을 만한 힘이 있는 사람에게 열 근의 무게를 주어지고 짐을 줄 수가 있습니다. 열 근 밖에 들 수 없는 사람에게 스무 근 내지 백 근의 그런 무거운 짐을 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만큼 열심히 공부를 허느냐에 따라서 조실스님의 법문도 여러분의 근기에 설해지게 되고 조실 스님의 지도 방법도 여러분의 근기에 따라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조실스님이 가지고 계신 그 능력을 전부 그리고 철저하게 지도를 받을려면 여러분이 그만큼 철저히 정진을 허심으로써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실스님을 모시고 법문을 들어보면은 청법(聽法) 대중이 모다 구참납자(久參衲子)요, 철저히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정진허는 그런 납자들이 터억 앞에 자리를 잡고 앉어 계시고,
또 신도님들도 철저한 신심있는 분들이 법당에 꽉 들어차서 위법망구적으로 발심헌 마음으로 들어주실 때에 조실스님은 30년을 모시고 있어도 듣지 못한 그런 법문을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토하신 것을 저는 종종 보았습니다.

조실스님께서 아무리 정정허시고 건강하시다 하더라도 사람의 몸은 하나의 기계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기계라고 하는 것은 그 한도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설사 조실스님의 법력과 도력에 의해서 백년 내지 이백년을 사실 수 있는 그런 신통력과 법력이 계시다 하드라도,
부처님께서 그런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요 사생자부(四生慈父)이신 육신통(六神通)을 다 갖추신 무량삼매를 갖추신 그런 부처님도 79세에 열반(涅槃)을 보이셨습니다.

조실스님께서도 언제 어떻게 그 열반을 보이실는지 그것은 우리는 모릅니다.
그날이 반드시 있을 것을 우리는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날이 돌아오기 전에 여기에 모이신 사부대중께서는 정말 이를 악물고 대분발을 해서 철저히 정진을 해주시기를 간곡히 말씀드리고 입을 다물겠습니다.

 

 



< 전강선사 법문 >

주중야문적(舟中夜聞笛)하고  하처숙어옹(何處宿漁翁)고
나무~아미타불~
일출무인견(日出無人見)하니  조제화자홍(鳥啼花自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저 참 망망창해(茫茫滄海) 저 섬 중에서 도를 닦는데, ‘이뭣고?’ 참선을 허고 있는데 어디서 젓대소리가 나. 잘 부는 젓대소리가 처억 난다 그말이여.
그 하처숙어옹(何處宿漁翁)고? 그 어느 곳에서 어옹(漁翁)이 있어서, 고기 잡는 그 어옹이 있어서 이런 젓대를 부는가?
그 젓대가 활연대오(豁然大悟)하는 젓대여. 젓대소리를 듣고 툭 깨 버렸어.

아까 그 송담 스님이 여기 원장(院長) 스님이 또 올라와서 설법할 때,
비로자나가 설법을 했는데 입 하나 뗀 법이 없이 설법했는데 보살들이 백만 천만 억만 보살들이 설했자 설할 수가 없어. 만년을 설했자 역사를 넣을 수 없어. 그러니 49년 설법에 보탤 수가 없다 그말이여.

그 본인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비로자나 전신체(全身體)다 그말이여.
그러니 우리의 본래면목, 그 언제든지 가르쳐 줄 스승은 있지마는, 옳은 스승을 만나야만 깨닫지만은,
오(悟)는 자기가 깨닫지 부처가 깨달아 주지 못해. 그 비로자나 전신체, 생사 없는 몸뚱이.

그러고 화엄경은 그렇게 81권이니, 81권 뿐이여? 81권이 화엄경이여?
일사천하미진수품이 화엄경인데, 미진수품(微塵數品) 화엄경이 그것이 내 본래면목, 비로자나 전신체.

그 비로자나 전신체가 내 마음인데 내 본래면목인데,
그 본래면목이 별별 놈의 소리를 다허고, 별별 놈의 못할 소리가 없고, 뭐 말 한마디를 가지고 천만 가지를 맨들수 있고, 이것이 비로자나불이여.

이 비로자나불이 이렇게도 별말 다하지마는 그 근본 자체, 비로자나불 근본면목 속에 들어가서 사견(邪見)도 없고 상견(相見)도 없고 유(有)도 무(無)도 비유(非有)도 비무(非無)도 없는데,
무엇으로 뭣을 나투어서 거기서 무엇을 만들어놔?
못혀. 입 뿐이지. 입으로만 뿐이지, 하덜 못혀.

필경에는 내가 나를 깨달지. 부처가 깨달라 주지 못혀. 그걸 비로자나 전신체라.
진대지(盡大地)가 비로자나 전신체여, 그러기 때문에.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여.
아까 그 설법이여.

설법을 허되 첫 설법에 올라가서 우세나 하고 보월 스님 울고 내려오데끼 그럴 줄 알았더니 그 대의(大意)가 참 분명허단 말이여. 꼭 그렇지.

그런데 나는 스물세 살 먹어서 세상에 내가 그때 주전도 없지.
허지마는 한번 올라갈 용기가 있어서 첫 설법을 청하길래 좋아서, 아! 대중이 한 7-80명 대중이 직지사 선원에서 모여서 법문 해 달라고 청한다 그말이여.

그때도 그래도 뭔 좀 소견이 났다고 헐 때인데, 그래도 내가 체면상 못 올라갈 텐데,
그때 다 통쾌한 선지식한테 다 내가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한 번 올라간 것인데, 올라가서 첫 설법을 허는데, 내 첫 설법 좀 들어 보시오.

아주 올라가서 얼마나 허고 싶던지 ‘내가 올라가면 한바탕 하리라’고.
올라가 놓으니깐, 법상에 올라가 놓으니깐 떨려. 떨릴 것이 하나도 없는디 속에는 아무 일 없는디.

아따! 그래서 그까짓 것 떨 것도 없다. 모도 그만 모도 개미같이 봐라.
너무 황송한 미안한 말이지만, 개미떼 같이 그냥 속으로 그냥 생각을 해 버렸다 말이여.

내가 그러고는 설법을 허되, ‘주장자를 들었다고 날 봐.’
차사(此事)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여. 입만 열면 그르쳐. 착(錯) 불착(不錯)은 차치(且置)하고 여하시차사(如何是此事)냐?
일러. 일러! 왜 못 일러? 한번 일러 봐?
어디 우리 또 대중도 남녀가 있나? 남녀상(男女相)이 없는게 법인데.
내 첫 설법에 헌거여.

그때도 물었어. 대중에 물었어.
차사(此事)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여. 입만 열면 그르쳐. 착(錯) 불착(不錯)은 차치하고 어떤 게 차사(此事)냐?
아무도 대답이 없어.

〇만공스님의 인가, 전법게.
그래서 만공 큰스님한테—만공 큰스님 십답, 한암 스님과 열 가지 문답(問答)이 있는데—‘열 가지 문답 가운데에 다 물어 주십시오’ 문답을 다 물어서 대답 내가 다했다.

(대답)허고 마지막 나올 때 『저는 스님 하직합니다.』
스님 밑에 있어 뭣 할 것이여? 나도 스님 법 내가 다 탁마해서 내가 다 가졌는데, 나도 인자 가서 중생 교화해야 할 것 아니여.

『갑니다』허고 절을 허니까,
『어이 가소. 저그 저 별이 있는데 저 하늘에 별이 있는데, 저 별—부처님 깨달은 별은 저 별 새벽별인데, 그 부처님은 새벽별을 보고 깼지마는 자네는 깨달은 별이 무슨 별인가? 어떤 별에 깨달았는가?』

(내가) 땅을 허부적 허부적...
『선재(善哉) 선재(善哉)로구나.』
선재란 건, ‘착할 선(善)자’는 ‘착하다’는 말이 아니여. ‘옳다. 옳다’ 그말이여.

불조미증전(佛祖未曾傳)인디  아역무소득(我亦無所得)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차일추색모(此日秋色暮)헌디  원소재후봉(猿嘯在後峰)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아! 내가 그렇게 『자네 별은 어떤 별인가?』 (만공스님 묻는 말에 내가) 왜 땅을 파? 왜?
『선재 선재다. 착하고 착하다.』

불조(佛祖)도 미증전(未曾傳)인디, 불조도 일찍이 전(傳)허들 못했는디,
아역무소득(我亦無所得)일세. 나도 또한 얻은 바가 없네.

차일(此日)에 추색모(秋色暮)인데, 오늘날에 추색(秋色)이 저문데, 이 가을날이여. 가을날이 저물었는데,
원소(猿嘯)는 재후봉(在後峰)일세. 원숭이 휘파람은 뒷봉에서 우네.

그러헌 인가(印可)가 어디 있냐 이말이여.
만공집(滿空集)에도 있어. 만공 큰스님 집(集)에 있는 것도 내가 갖다 내가 고승집에 이리 내놨어.
왜 어찌 거짓말을 허냐 그말이여. 어떻게 거짓말을 해. 거다가 어떻게 뻘 소리를 붙여 놓냐 그말이여.

인가(印可) 없이 '인가 있다'고, 인가 없이 나와서 조실(祖室) 노릇허고 있어?
차라리 지옥 귀신이 되어 가지고 귀신 노릇하면서 ‘아이고 나 죽겠다’ 소리를 허지.
인가 없이 주뎅이를 벌리고 조실 노릇혀? 못허는 법이다 그말이여.


내가 그러고 나왔으니, 직지사에 올라와서 설법 한번 헐 마음이 나지 않나? 불끈 난다 그말이여. 속에서는.

아, 그래 올라가서 설법을 헌 것이 ‘입만 열면 그르치니, 그르치고 그르치지 않는 걸’ 물은 게 아니여?
「차사(此事)는 착(錯) 불착(不錯)이니 이 일은 입만 열면 그르치니, 그르치고 그르치지 않는 건 그만두고 어떤게 차사(此事)냐?」 대답이 없어.

‘촛불이 밝다’ ‘병율이야, 촛불이 밝다.’ 그래.
이놈아! 촛불 밝은 걸 내가 물었어? 차사(此事)를 물었지.

별 것 다했자 소용 없어. 그래 이른 거 아니여.
이른 것은 바로 일러야 이른 것이지. 그깟은 놈의 소리를 불청허고 소용도 없고.

대번 했기 때문에 등단으로 내가 했기 때문에 만공 큰스님한테 내가 법문을,
『소승이 영신(永信)이가 법상에 올라가 설법을 했는데 큰스님한테 불가불 점검을 받어야 허겠습니다.
설법을 법상에 올라가서 주장자를 들어 대중을 보이고, 차사(此事)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니 착(錯) 불착(不錯)은 차치하고 어떤 게 차사(此事)냐? 물었는데, 답이 없어 큰스님께 보내니 답해 줍소사』

그랬더니 만공 큰스님이 답을 해서 보내되,
요만한 종이에다가 그림을 하나 그렸는데, 그림이 요렇게 요렇게 요렇게 그렸어. 요렇게 그려놨어.
아니 그렇게 그린 게 아니라 그림이 요렇게 요렇게 꼬부라게, 요렇게 꼬부라게 그려놨어. 이 위에서 꼬부래. 아니 이놈이 꼬부라졌어, 밑으로.

거 무슨 도리일까? 아시겠어? 그 꼬부랑을 그려놨다 그말이여.
뭐여? 그 무슨 그림이여? 만공 큰스님 답이여, 이게.

알겠어? 견성(見性) 못허면은 할 수가 없어. 잘 보면, 문제가 다른 문제 아무것도 없고 견성 문제여.

우리 모도 모아서 견성 「이뭣고?」 「이뭣고?」 잘해서 같이 생사해탈하자.
너 허고 나는 안 안허고는 어떻게 될 것이냐? 지옥 귀신이 되고 말 것이냐?

우리가 지금 지옥 귀신 면한 줄 아시오? 아이고, 생각해 보면 큰일나.
생각을 못허고 이러고 있으니 그렇지, 역사 없는 우리가 과거에 지옥고를 얼마를 받았어.

포구발심(怖懼發心)이여. 무서운 발심. 무서워서 죄 안 짓고, 무서워서 도 닦는 것이여.
한번 또 들어가면 언제 나와? 지금 우리가 나왔단 말이여.
요까짓 것 나와서 잠깐 나왔지마는 또 죄를 퍼지어 간다 그말이여, 틀림없이.
지옥은 안 가고는 못 견뎌.

참선(參禪)이 아니면 못 견뎌.
과연 우리 이렇게 모아 참선 법문 배우라고, 참선 설법 들으라고, 우리 설판재주(說辦齋主)가 터억 나와 가지고 이 설판을 해서 이리 지어 놓으니깐 이렇게 많이 나왔네.(처음~42분3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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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교화(敎化) ; 가르쳐 이끌다. 사람을 일깨워 고통받는 자를 편안히 하고, 의심하는 자를 믿게 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바른 길로 돌아가게 함. 설교. 교도감화(敎導感化)의 준말.
*간탐하다(慳貪 아낄 간,탐할 탐) ; 몹시 인색하고 욕심이 많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상락아정(常樂我淨 항상 상,즐거울 락,나 아,청정할 정) :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깨달음)의 네가지 덕(德).
열반경(涅槃經)에 의하면, 열반의 경지는 생멸 변천함이 없으므로 상(常)이고, 생사의 고통을 여의어 무위(無爲) 안락하므로 낙(樂)이고, 망집(妄執)의 아(我)를 여의고 대자재(大自在)가 있는 진아(眞我)이므로 아(我)이고, 번뇌의 더러움을 여의어 담연청정(湛然清淨)하므로 정(淨)이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법위(法位) ; 변하지 않는 진리의 세계. 궁극적인 진리의 세계.
*전법게(전강선사가 송담스님에게 내려 주신 전법게)
비법비비법(非法非非法)이다  법(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무법역무심(無法亦無心)이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낙양추색다(洛陽秋色多)하고  낙양(洛陽)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백운비(江松白雲飛)니라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참고] 전강선사(No.046)—조실스님 생신일 법문(송담스님 인가,만공 한암 십대문답)(경술70.11.16)에서.
*보림(保任 보임) ;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 흔히 ‘보림’이라 읽는다.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무인절도(無人絶島) ; 사람이 살지 않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섬.
*마조원상(馬祖圓相) ; [참고] 송담스님(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을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이 공안을 물은데 어떤 스님이 그 안에 들어갔어.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대 후려쳤습니다.

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원상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한 그 공안에 그 스님이 턱 뛰어들어가는 도리는 무슨 도리며,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한 방을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그 방(棒)을 맞고서 하는 말이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또 그 스님이 그렇게 말한 데에 마조 스님이 아무 말없이 저리 가버렸으니...
이러한 공안에 확연(確然)히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라 하는데,
이것이 다 부처님과 조사가 씹다가 버린, 먹다가 버린 찌꺼기에 지나지 못한 것이기는 하나, 이러한 공안이 바로 학자(學者)의 소견(所見)을 가려보는 데에는 좋은 시금석(試金石)이 되는 것입니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탁마(琢磨 쫄 탁,갈 마) ; ①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옥이나 돌 따위를 쪼고 갊. ③옥을 갈고 돌을 닦듯이 한결같이 정성껏 애써 노력하는 것. ④선지식에게 자기의 공부하다가 깨달은 바를 점검 받는 것.
*구참선객(久參禪客) ; 오랫동안 참선한 수행승.
*보월스님, 만공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설통(說通) ; 대중 앞에서 막힘이 없이 유창하고 당당하게 설법을 잘함.
*화엄경(華嚴經) ; 본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이 경은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한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다.
3가지 번역이 있는데, 60권은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 번역이고, 80권은 당(唐)의 실차난타(實叉難陀) 번역, 40권은 당(唐)의 반야(般若) 번역임.
이 가운데 40권은 60권과 80권의 마지막에 있는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며,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만 산스크리트 원전이 남아 있음.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교주(敎主) ; 어떤 종교나 종파를 처음 세운 사람.
*교향악(交響樂) ; 교향곡, 교향시, 교향 모음곡 등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음악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 ; 법장현수(法藏賢首) 스님의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 보면,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용궁(龍宮)에 가서 대부사의경(大不思議經=화엄경)을 보았는데, 상본·중본·하본 3가지 본(本)이 있었다. 그 중에 상본(上本)이 십삼천대천세계미진수(十三千大千世界微塵數)게송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었다 한다.
중본(中本)은 49만 8800게송 1200품(品)이고, 하본(下本)은 10만 게송 38품이었다 한다.
용수보살이 상본과 중본은 사바세계 사람들 마음의 힘으로서 능히 가질 수 없으므로 전하지 않고, 하본(下本)을 외어 세상에 전하였고 또 그것을 간략히 한 약본(略本)이 80권 본, 60권 본이 되었다 한다.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은 ‘미진수(微塵數 셀 수 없는 무한수)’의 품(品)으로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모든 현상—삼라만상(森羅萬象) 전부가 그 화엄경을 이루고 있으며, 곧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로 우리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유정(有情) ;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 살아있는 것. 생(生)이 있는 것. 감정이나 의식을 가진 것.
번뇌에 얽매여 미혹한 모든 존재. 옛날에는 중생(衆生)이라 번역하고, 현장(玄裝)이후의 새로운 해석에서는 유정(有情)이라 한역함. 정(情)은 마음이라는 뜻. 일체 살아있는 것의 총칭.
*무정(無情) ; 감정이 없는 초목·산하·대지 등을 말함.
*관현악(管絃樂) ; 여러 가지의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를 조화시킨 큰 규모의 합주.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 ‘손 한 번 들고 발 한 번 옮긴다’는 뜻으로, 크고 작은 동작 하나하나를 이르는 말.
*청정법신(淸淨法身) ; 더러움이 없는 청정한 법신, 곧 비로자나불을 말함.
*상호(相好) ; 부처님의 몸에 갖추어진 용모와 형상.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을 이른다.
*견성오도(見性悟道) : ‘성품(性)을 보아(見) 진리(道)를 깨친다(悟)’는 뜻이다。자기의 심성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인 당체(當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 견성오도라 한다.
*비근(卑近)하다 ; 주위에서 흔히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깝고 알기 쉽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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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駐錫 머무를 주,석장 석) ; ①스님들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석장(錫杖)이라 하는데, ‘석장(錫杖)을 머무르게 한다(駐)’는 뜻으로, 스님이 한 곳에 머무름을 일컫는 말. ②스님이 한때 어떤 지역에 포교(布敎)를 하기 위하여 머무는 일.
*광장설(廣長舌) ; 장광설(長廣舌). ①길고 줄기차게 잘하는 말솜씨. ②부처님의 설법.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 정•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청법(聽法) ; 불보살(佛菩薩)이나 스승이 설법하는 것을 경건하게 경청함.
*구참납자(久參衲子) ; 오랫동안 참선한 수행승.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진리)를 구하기 위해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사자후(獅子吼) ; ①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 : 삼계(三界)의 중생을 열반(涅槃)로 인도(引導)하는 위대한 사람. 부처님을 말함.
*사생자부(四生慈父) ; 육도윤회(六途輪廻)하는 세계에서 4가지 방식(四生)으로—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태어나는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끄는 대자비(大慈悲)의 아버지. 부처님을 말함.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

·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게송) ‘주중야문적~’ ; [청허당집(清虛堂集)] (서산휴정 著,朴敬勛 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p40 ‘동호야박(東湖夜泊)’ 게송 참고.
*활연대오(豁然大悟) ; 환하게 막힘이 없이 탁 트인 큰 깨달음.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 ; 전신(全身)은 '본질 그대로' '여래진신(如來眞身)'의 뜻으로 ‘비로자나 전신체’는 우리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
*진대지(盡大地) ; 온(盡) 산하대지. 온 세계.
*차치(且置) ; 내버려두고 문제삼지 않음.
*(게송) ‘불조미증전~’ ; 만공선사께서 전강선사에게 내려 주신 전법게(傳法偈).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111 참고.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포구발심(怖懼發心 두려워할 포,두려워할 구,일어날 발,마음 심) : ‘끝없이 되풀이 되는 육도윤회(六途輪廻)에서 받을 생사(生死)가 정말 무섭구나.’ 그 생사의 고통을 매우 두려워(怖懼)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생사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설판재주(說辦齋主) ; 법회나 불사(佛事)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비용을 준비하고 마련하는 스님 또는 신도를 말한다. 설(說)은 '법회, 불사'  판(辦)은 '힘들이다, 주관하다'의 뜻.

Posted by 닥공닥정
인과 인연 비유2014. 10. 5. 08:33

§(335) ‘토끼고기’로 인한 왕자비의 노여움 / 부부싸움 법규 / (게송)여군동보우동행~ / 바로 지금 이때를 여의고는 공부할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공부에 있어서는 승속(僧俗)도, 남녀도, 빈부와 노소와 귀천도 없는 것이기에 이 문제에 있어서는 선의의 경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나 지금, 앉았을 때는 바로 앉은 그 시각, 섰을 때는 서 있는 그 시각,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그 시각, 속이 상할 때는 속이 상한 바로 그 시각을 여의고 따로 내가 도를 닦아서 깨달을 시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시각에 터질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간절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해 나갈 때에 깨닫게 되는 것이지, 화두를 놓쳐 버리고 경계(境界)에 휩싸여서 있다가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에 대한 의단이 독로한 상태에서 보다가 터지고, 듣다가 터지고, 앉다가 터지고, 넘어지다 터지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335)-87년 7월 첫째일요법회(87.07.05)에서. (용335)

 

(1) 약 20분.

 

(2) 약 21분.


(1)------------------

옛날에 대단히 성미가 급한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은 자기 비위에 조금만 틀린 소리만 해도 당장 엄벌을 내리고 귀양을 보내고 때로는 죽이기도 하고 추방도 하고 그랬습니다.
신하나 백성이나 그 앞에만 가면은 벌벌벌 떠느라고 말을 못했습니다. 무슨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은 목숨을 잃어 버리게 되고.

하루는 그 왕자가 있었는데, 왕자가 무슨 왕의 비위를 건드려 가지고 사소한 일에 불같은 호령을 내리고 당장 그 왕자 내외를 국외로 추방을 했습니다.
잡아 죽여 버릴려고 하는 것을 대신들이 말려 가지고 간청을 해서 간신히 국외로 추방을 했습니다.

국외로 추방된 왕자 내외는—추방하면서 그 왕비가 금은 보물을 얼마 정도 그 임금님 몰래 좀 싸 주어 가지고 그놈을 가지고 저 국외로 추방을 당해 갔는데, 처음에는 가지고 간 그 금패물을 조금씩 팔아 가지고 먹고살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는 여러 가지 사정상 살 수가 없어서, 인가가 없는 산중에 들어가서 거기 그렇게 숨어서 아주 검박하게 겨우겨우—그래 추방된 왕자가 사치스럽게 살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 인자 검박하게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렇게 살다 보니 1달·2달이 가고 1년·이태가 가서, 가지고 간 것도 한도가 있어서 다 양식도 떨어져 버리고 금패물도 다 떨어져 버리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사냥을 해 가지고 토끼도 잡고, 노루도 잡고, 새도 잡고 그저 그렇게 먹고사는데,
하루는 간신히 토끼 한 마리밖에는 잡히지를 않아서 그래서 토끼를 갖다가 가죽을 벗겨 가지고 솥에다 넣어서 끓이는데, 어떻게 물은 조금 붓고 불을 너무 과열로 땠던지 물은 다 달아져 버렸는데 탄내가 나서 소댕을 열어보니까 고기는 반도 안 익었다 그말이여.

반도 안 익고 물은 떨어져 버려서 그래서 그 왕자비(王子妃) 보고 ‘저 개천에 가서 물을 좀 떠오라’고.
그래서 물을 뜨러 갔는데 암만 기달려도 안 와. 안 오니까 배는 고프고 그러니 기다릴 수가 없어서 그냥 반도 안 익은 고기를 먹어버렸습니다.
조금 다 익었나, 안 익었나 맛본다는 것이 한 점 띠어먹고 두 번 띠어먹고 하다 본 것이 차츰차츰 배는 고프고 하니까는 피는 조금 덜 익었지만은 그냥 다 먹어버렸어.

그래서 아내가 그 물을 떠 가지고 와서 소댕을 열고 물을 부을려고 하니까 고기가 없어졌습니다.
‘아이! 고기가 어떻게 되었냐? 고기가 없다!’고 그러니까,
‘아! 고기가 그놈이 내가 열어 보니까 훌떡 솥 밖으로 뛰어나오더니 막 뛰어 가지고 저 산으로 도망가 버렸다’고. ‘잡을려고 쫓아갔지만은 어떻게 이놈이 빨리 도망가던지 놓쳐 버렸다’고 그러니까,

‘가죽을 벗겨서 불을 때 가지고 반쯤 익은 놈의 고기가 어떻게 도망가야?’
‘참! 나도 알 수가 없다’고 왕자가 시치미를 뚝 뗐습니다.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논다'고.

그래 아내가 그 왕자를 떠억 보니까 이상하다 그말이여.
사람이 시치미를 아무리 뗀다 해도 거짓말을 어지간히 해야지, 당치도 않는 거짓말을 하면 약간 눈가시라든지 코가 약간 벌심거린다든지 그 눈치를 보면 알 수가 있거든.

그래서 그때부터서 그 왕자비가 매우 괘씸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쫓겨나 가지고, 자기 때문에 상감한테 미움을 사 가지고 나까지 이렇게 산중에 와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토끼고기를 잡아서 삶았으면 익거나 안 익거나 같이 먹을 일이지, 물 떠오라고 보내 놓고 저만 혼자 먹어.

괘씸하게 생각을 하니까 그 동안에 지내온 모든 일들이 새록새록 괘씸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는 그때부터서 ‘이런 작자를 내가 믿고 살 수가 없구나.’
그래 가지고는 그때부터서 웃지도 아니하고, 여간해서 말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걸 버리고 일반 사람처럼 백성들처럼 싫다고 도망가 가지고 개가(改嫁) 할 수도 없는 거고, 그냥 같이는 살되 아무 재미가 없어.

그 동안에는 ‘이렇게 고생을 하고 살다 보면 그 임금이 언젠가는 노여움을 풀면은 다시 자기네들을 왕궁으로 불러들이리라’하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는데,
‘이러한 괘씸한 인간이라!’하고 인간적으로 인격적으로 멸시를 하니까 도저히 사람이 사람같지 않고,

‘저런 것이 나중에 임금이 되어봤자 무슨 나라를 바로 다스릴 것인가?’ ‘이러한 인간을 믿고 어떻게 내가 그 밑에서 왕비 노릇을 하며, 어떻게 정사(政事)를 할 것인가?’
이것저것 생각하니까 생각할수록 왕의 자격이 없어 보이고, 저런 것 사람답지 않게 보이니까 도저히 얘기할 재미도 없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살맛이 전혀 없어졌다.

속에 확! 괘씸한 생각이 뭉쳐 가지고 도저히 풀 길이 없어. 그러한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낸 것이 몇 해를 지냈습니다.
그렇게 지내니까 고생도 막심한데다가, 의식주 문제가 전부가 막심한데다가, 마음까지 그렇게 괘씸한 생각으로 꽉 뭉쳐가지고 그 남편이라고 하는 것이 천하에 몹쓸 놈으로 보이니까 도저히 희망이 없어.
그래도 하루하루 지낸 것이 한 해·두 해가 가고 5년·10년이 갔습니다.

그래 가지고 왕이 승하(昇遐)하자 대신들이 용케 찾아 가지고 그 왕자를 모셔 갔습니다.
가 가지고 새 왕으로 모셨는데, 그래 가지고 이 왕자가 새 왕이 되어 가지고, 좋은 옷에다가 머리에 목에 팔에 그 칠보로 장엄을 해서 왕비를 위해서 다 해 주었습니다.

10여 년간을 산중에서 자기의 잘못으로 해서 고생한 그 죄과(罪過)를 보상하는 뜻으로, 사람으로써 할 수 있는 모든 사치와 호강과 영화를 갖다가 다 시켜 줄라고 마음을 먹고 물심양면으로 다해 주는데, 왕비는 조금도 좋아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산중에서 그렇게 한 그 노여움이 왕비가 되어 가지고서도 풀어지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왕이 ‘대관절 무엇 때문에 그러요? 어디가 아픈 데가 있소? 무슨 근심있소?’
‘아니요. 아무 아픈 데가 없어요’
‘무슨 걱정이 있소?’
‘아무 걱정이 없어요’

’그러면 어째서 그러요. 나는 나의 모든 정성과 사랑을 다해서 당신을 잘해 주고 싶고, 호강을 시켜주고 싶고 기쁘게 해 주고 싶어서 이렇게 성의를 다하는데 어째서 그렇게 그럴 수가 있소’하니까,
‘당신은 저 산중의 움막에서 우리가 고생하고 살 때에, 그때 내가 개천으로 물을 뜨러 갔을 때에 그 반쯤 익은 토끼가 솥 밖으로 뛰어나와 가지고 도망쳐 버린 일을 잊어 버렸습니까?’
그렇게 물으니까 왕이 깜짝 놀랬습니다. 입이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변명 할 수도 없고, 그것에 대해서 벌써 20년이 되었는데 오늘날에 와서 그것을 사과할 수도 없고,
자기는 그때 잠깐 장난끼로 그런 것뿐인데 그 한 사실을 20년간이나 마음속에 간직을 하고 그 노여움을 풀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왜 산승(山僧)이 오늘 이러한 동화같은 설화를 말씀을 드리냐 하면, ‘여자의 그 원한심은 오뉴월에 서리가 친다’ 그러한 속담도 있습니다.

사소한 한 생각으로 해서 그 왕비의 부귀영화도 기쁘지를 않고, 왕을 갖다가 인격적으로 멸시하고, 자기의 왕비로서의 모든 영화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국모로써의 모든 것도 아무 이 부귀영화가 마음에 와서 닿지를 않아.
생각 생각이 토끼가 산으로 도망한 것만을 염두에다 두고 일평생을 남편을 원망하면서 미워하면서 그렇게 살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든지, 인간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서 원한을 산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무서운 일이고,
나는 가볍게 생각하고 한마디 한 것이 상대방에서는 대단히 크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 간에는 500생 내지 1000생의 과거에 숙세의 인연으로 부부 간이 되고 그러는데 그래서 만났는데, 순 남남끼리 만나가지고 일심동체가 되어가지고,
그렇게 한 가정을 이루고 아들딸을 낳고 그렇게 해서 가정을 이뤄 나가고 그 가정이 모여서 사회가 되고, 그 가정이 모여서 국가가 되고, 그 가정이 모여서 또 세계가 됩니다.

그런데 촌수(寸數)가 부모 자식 간에도 1촌 간(間)인데, 부부 간에는 무촌(無寸)입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데 한 생각 어긋나면 완전히 원수가 되고마는 것입니다.
다정할수록에 자주 다투게 되고, 그렇게 사랑하고 잠시도 떨어져서는 못 살만큼 그렇게 애정이 두터워서 결혼을 했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참 많이 싸우는 수가 있습니다.

부부 간에 한번도 싸우지도 않했다면 그것은 아마 사람 탈을 타고났으면서도 사람이 아니라 천상에서 잠시 인간 세상에 유희(遊戱)를 하러 나왔거나, 그렇지 않으면 참 그건 상상이 미치지 못할 그러헌 사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부부 간에 크고 작고 간에 참 싸우지 않기가 어려운데, 그렇게 싸우면서 자식을 낳아서 기르고 살림도 해야 하고 사회생활도 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또 참선도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싸우면서도 참선을 잘하고, 싸우면서도 가정의 화목을 유지해 나가고, 일생동안 같이 살면서도 질리지 아니하고 또 항상 새롭고, 잘 살 수가 있느냐?
싸움을 하되 속전속결(速戰速決), 병아리 싸움하듯이 후닥닥 싸우고 금방 화해를 해 버리는 그런 속전속결하는 싸움을 하는 것이 좋겠다.

싸움을 하되 과거 일을 들춰내지 말아라.
싸움을 하면은 지나간 일을 들춰내 가지고 ‘무슨 소리를 하면 상대방이 오장(五臟)이 뒤집어질까?’ 그것을 용케도 연구를 해 두었다가 싸울 때면 그놈을 끄집어 내 가지고 박박 긁어대거든. 그래서 과거를 들춰내지 말아라.

또 상대방의 약점을 갖다가 들춰내지 말아라.
친정 문제라든지 또는 과거의 문제라든지 그 사람의 약점을 용케 찾아내 가지고는 일침을 가해 가지고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만든다 그말이여. 이러한 일은 대단히 졸렬하고 비열한 전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싸움을 하되 그러한 과거를 들춰내고 또 상대방의 약점을 갖다가 쑤셔서 그래 가지고 헌 싸움은 이것은 신사도에 어긋나는 것이여. 페어 플레이(fair play)가 되지를 못합니다.
싸움하고 나서도 자기 자신이 부끄러운 일이고 인격적으로 상대방으로부터 존경받지를 못합니다.

배가 고파서, 아내가 물을 뜨러 간 사이에 토끼고기를 먹은 것은 그 애교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아! 익지도 않은 것을 자셨구료’ ‘아, 조금만 참았다가 잘 끓여서 자시면 할텐데 그 익지도 않은 것을 그걸 잡숫느라고 애썼구료’하면서 웃어 버렸으면 그것으로 말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속에다가 콱! 넣어 두고서 상대방을 갖다가 괘씸하게 생각하고, 고생을 하면서 그 괘씸한 생각으로 여러 해를 지낼 때 얼마나 마음속으로 괴로웠겠느냐? 그말이여.

또 귀양이 풀려서 다시 왕이 되고 왕비가 되어 가지고서도 그 노여움을 풀지를 못했다니 세상에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그 토끼고기 한 마리 먹어 버렸다고 해서도 10년, 20년을 원한을 품고 괘씸하게 생각하고 노여움을 풀지 안허거든,
하물며 상대방의 약점 또는 과거를 들춰내 가지고 아무리 부애가 난다고 그러한 식으로 싸움을 해서는 참 그것은 용서받기가 어려울 것입니다.(14분3초~34분4초)

 

 



(2)------------------

남자가 아내에 대해서 해도 그렇고, 아내가 남자의 과거를 들춰내고 허물을 들춰낸다 하더라도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속이 상할 때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가지고 한번 싸워 보는 것이 그것 참 재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계속 공격을 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갖고 한바탕 신나게 싸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가지고 싸울려고 마음을 먹은다면, 아무리 주먹을 쥐고 이를 갈아붙인다 해도 싸움이 안 되지 아니 할까? 이리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 앞에서는 싸움을 하지 말아라.
부부싸움이라는 게 둘이 싸워야 그것이 재미가 있는 것이지, 이웃 사람이 그 싸움 구경을 해도 창피한 일이고,
아무리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이라 하더라도 자식 앞에서 싸우는 것은 차라리 이웃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싸우는 것보다도 더 챙피하지 않을까? 이리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람은 싸움 구경을 하고 가서 모두 흉을 보고, 안 보는데 가서 싸움하는 얘기를 하면서 웃고 그러고 말겠지만, 자식이 부모 싸우는 것을 보고는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 앞에서는 싸움을 하지를 말아라.

또 애가 아직 돌이 안 지나갔건, 돌이 지나서 1살·2살·서너 살이 되었건, 그렇더라도 잠이 들었을 때라도 그 애기 있는 데서는 싸우지를 말아라.
잠은 들어서 의식은 잠을 자고 있지만, 잠재의식(潛在意識)은 고대로 다 싸우는 것을 다 듣고 있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보면 귀로 통해서 듣고 눈을 통해서 의식을 하겠지만,
잠이 들었을 때에는 눈도 감고 귀로는 잘 못 알아듣지만, 잠재의식은 우리의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은 고대로 다 듣고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고 잠재의식 속에 다 녹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존경하지 않게 되고, 그 입은 마음의 상처가 일생동안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 앞에서는 눈을 뜨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거나 싸우지를 말고,

이러한 몇 가지의 규칙을 ‘부부싸움 법규’라 제목을 딱 써 놓고 방금 말씀드린 조항을 적어 놓고서, 싸움을 할 때에는 둘이 서로 그 조항을 한번 낭독을 하고 그리고서 한바탕 싸우도록 한다면 대단히 좋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남편의 한 말, 아내가 한 말 한마디를 그렇게 깊이 새겨 가지고 두고두고 일생동안 괘씸하게 생각하고 일생동안을 울거 먹는 그러한 무서운 그 결심과 기억력을 참선하는 데에 이용을 한다면 참선은 그 길 성공을 하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대분심(大憤心), 대신심(大信心), 대의단(大疑團).

대신심(大信心), ‘내가 부처다.’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원래 부처라고 하는 깊은 믿음, 본래 내가 부처이기 때문에 새로 부처를 이룰 것이 없어.
다맛 화두가 독로해서 의단(疑團)만 타파(打破)해 버리면 자기의 불성(佛性)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마음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여.
바로 자기가 부처고, 말하고·옷 입고·밥 먹고·울고·웃고·성내고·근심·걱정하는 바로 이놈을 여의지 않고 바로 거기에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믿어야 하고.

왜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했는데 나는 오늘날까지 무엇을 하느라고 이렇게 캄캄해 가지고 있는가? 도저히 그 분심이 속에서 부터서 끓어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무서운 그 집념, 훨씬 여성이 남성보다도 더 독하고 모질다고 하는 것입니다.
6.25 동란 때 남자들은 도저히 그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고생을 이기지 못할 그런 처지에서도 여성들은 다 그것을 참고 견디고 이겨낸 것입니다.
'남자는 뭐 사흘만 굶어도 죽고 여자는 석달을 굶어도 안 죽는다'는 말도 있습니다만은 그건 왜 그러냐?

자식을 위하는 생각, 남편을 위하는 생각, 그런 무서운 집념이 콱 쩔어 있기 때문에 도저히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이나 부모나 남편이나 재산에 대한 애착도 훨씬 여성이 더 강합니다.

그러한 무서운—쇠심줄보다도 더 강인한—그러한 결심을 가지고 참선하는데 동원을 한다면, 남자보다도 훨씬 더 빨리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본래 남성·여성의 그 성품 자리에 있어서는, 불성(佛性) 자리에 있어서는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가 없고 남녀의 구별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본래부터 남성이 따로 있고 여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업(業)에 따라서 여자의 탈을 뒤집어쓰고 나오면 여자고 또 다음 생에 남자의 탈을 뒤집어쓰고 나오면 남자이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장부(丈夫)의 마음을 가지고 장부의 성격을 쓰고 장부의 행실을 하면은 내생에 장부가 되는 것이고, 여자의 성격을 쓰고 여자의 행위를 하면은 여자의 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금생에는 남자가 되어 버렸고 여자가 되어 버렸으니 껍데기는 어찌할 도리가 없으나,
그 남녀가 구별이 없는 그 본성(本性) 자리에 있어서는, 자기가 여자라고 해서 뒷걸음질 칠 필요도 없고 자포자기 할 필요도 없고, 다 같이 부처님의 제자로써 정법(正法)을 믿는 최상승 학자로써 당당하게 선의(善意)의 경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공부에 있어서는 승속(僧俗)도, 남녀도, 빈부와 노소와 귀천도 없는 것이기에 이 문제에 있어서는 선의의 경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과 남한도 언젠가는 선의의 경쟁을 해 가지고 모든 면에 있어서 우위를 가진 사람이 결국은 그이 쪽으로 통일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치적으로도 또 경제적으로도 모든 문화·예술·교육 일체 면에서 앞장서서 나아가면 그것이 바로 통일을 앞당기고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자분도 그러한 남성보다도 더 크고 무서운 그러한 집념(執念)을 갖다가 발심(發心)하고 도 닦는 데에 돌이킨다면 참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용화사에는 거사님들이 공부할 수 있는 선원이 아직 마련되지 안해서 와서 정진하시는 분들이 없습니다마는 그런 선원이 열리게 된다면 거사님네 선방도 잘 되지 않을까 이리 생각을 합니다.

물론 직장을 가지고 계신 분은 와서 석달 동안을 정진을 하시기에는 어렵겠습니다만은,
이 보살님네들은 금년에도 7~80명, 해마다 100여 명을 넘어서 방부를 들이고 모두 정진을 하시고 그러는데, 다 가정의 일이 바쁘시고 모두 그런데도,

‘어떻게 하면은 금생에 이 불법을 만났을 때 다만 조금이라도, 어쨌든지 이 몸뚱이 받았을 때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 해야겠다’하는 그 신심이 돈독(敦篤)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보살님네들이 와서 정진을 하시게 된다고 그렇게 믿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도 거사님네보단 보살님네들이 이 법을 믿고 공부하시는 면에서 앞장서 가고 계시지 않는가 이리 생각을 합니다.
내생에 몸을 바꿔서 남자로 태어나시면 그러한 보살님네들은 금방 출가해서 큰스님이 되어 가지고 불법을 갖다가 재흥(再興)하는 그러한 역군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군동보우동행(與君同步又同行)하고  기좌상장세월장(起坐相將歲月長)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갈음기손상대면(渴飮飢飡常對面)하고  불수회수갱사량(不須回首更思量)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여군동보우동행(與君同步又同行)이여, 그대와 더불어 함께 걷고 함께 행하며,
기좌상장세월장(起坐相將歲月長)이로구나. 함께 일어나고 함께 앉고 같이 이렇게 지내오기를 세월이 길었다.
몇십 년, 몇백 년, 몇 억겁다생(億劫多生)을 그렇게 같이 걷고, 같이 행하고, 같이 일어나고, 같이 자고, 같이 이렇게 살아왔다 그말이여.

갈음기손상대면(渴飮飢飡常對面), 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으며 그렇게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항상 같이 해 왔다.
불수회수갱사량(不須回首更思量)이니라. 모름지기 머리를 돌이켜서 다시 생각하지를 말어라.

바로 여읠래야 여읠 수 없고, 앉았을 때는 같이 앉았고, 누울 때도 같이 눕고, 섰을 때도 같이 서고, 걸어갈 때도 같이 걸어가고, 일 할 때 같이 일하고, 1분 1초도 여읠래야 여읠 수 없는 그대를,
어디를 머리를 돌이켜서 생각을 해? 머리를 돌이켜서 찾으면 어디가 있을 거여?

오늘 정묘년 7월 첫째 일요일을 맞이해서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전강 조실스님의 그 감동적인 법문, ‘어묵동정(語黙動靜)을 여의고 일러라’한 공안(公案)과,
경허스님의 오도송(悟道頌) ‘야인(野人)이 무사태평가(無事太平歌)’라 한 구절에 대해서 그 전강 조실스님 소년시절에—20여세 된 그 아주 새파란 청년 시대에,
그 만공 대선사와 보월 선사와 그 기라성 같은 여러 구참납자(久參衲子)들 앞에서 그 경허 큰스님의 오도송을 그렇게, 참 멋들어지다고 할까? 상쾌하다고 할까? 참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영원히 우리가 도업을 성취할 때까지 잊지 못할 그런 감동적인 법문을 들었습니다.

앞으로 더위가 본격적으로 닥쳐올 것입니다. 여러 선방에 계신 스님네 또 가정에서 정진하시고 또 직장에 나가시는 여러 청신사·청신녀 여러분 그리고 학생 여러분,
이때, 바로 지금 이때를 여의고는 공부할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지금, 앉았을 때는 바로 앉은 그 시각, 섰을 때는 서 있는 그 시각,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그 시각, 속이 상할 때는 속이 상한 바로 그 시각을 여의고 따로 내가 도를 닦아서 깨달을 시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인(古人)은 장터에서 이 자식, 저 자식하고 싸우는 그 소리를 들은 그 찰나에 확철대오를 한 분도 있고,
복숭아꽃이 활짝 핀 바로 그것을 보고 깨달은 분도 있고,
빗자루로 뜰을 쓸다가 거기서 튀긴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분도 있고,
물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깨닫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고,
여름에 발을 갖다가 이렇게 걷어올리다가 깨달은 분도 있고,
자다가 뚝! 목침(木枕)에서 머리빡이 방바닥으로 떨어지는 찰나에 확철대오하신 분도 있습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시각에 터질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간절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해 나갈 때에 깨닫게 되는 것이지, 화두를 놓쳐 버리고 경계(境界)에 휩싸여서 있다가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에 대한 의단이 독로한 상태에서 보다가 터지고, 듣다가 터지고, 앉다가 터지고, 넘어지다 터지는 것입니다.

더웁다고 한 생각 늦추지 마시고, 더위를 정진으로 이겨 나가도록 간곡히 부탁을 드리고 법상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14분3초~55분4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소댕 : 솥앵. 솥뚜껑.
*승하(昇遐 오를·죽음 승,멀 하) ; 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남을 높여 이르는 말.
*촌수(寸數) ; 친족(親族) 사이의 멀고 가까운 정도를 나타내는 수.
*유희(遊戱 놀 유,놀 희) ; 즐겁게 놀며 장난함.
*속전속결(速戰速決) ; ①싸움을 오래 끌지 않고 되도록 빨리 끝장을 냄. ②어떤 일을 빨리 진행하여 빨리 끝냄.
*오장을 뒤집다 ; ‘오장(五臟)을 긁다’, ‘오장을 건드리다’와 같은 표현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비위를 건드려서 기분 나쁘게 하다’라는 뜻.
*부애 ; 부아(분하고 노여운 마음).

 

 



------------------(2)

*아뢰야식(阿賴耶識) ;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거주지·저장·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의단(疑團)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쇠심줄 ; 소의 힘줄. 주로 드센 성질이나 고집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 쓴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장부(丈夫) ; 다 자란 씩씩한 남자.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집념(執念) ; 한 가지 일에 매달려 마음을 쏟음. 또는 그 마음이나 생각.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돈독(敦篤)하다(도타울 돈,도타울 독) ; (인정이나 마음이)매우 도탑고 신실하다. *도탑다 ; (정이나 사귐이)깊고 많다.
*재흥(再興) ; 쇠(衰)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남. 또는 다시 일으킴.
*(게송) ‘여군동보우동행~’ ; [금강경오가해]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억겁다생(億劫多生) ; 무한히 길고 오랜 세월 동안 윤회하면서 태어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세상).
*‘어묵동정(語黙動靜)을 여의고 일러라’한 공안(公案) ;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전강선사 법어집(용화선원刊) p7~8.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서울 선학원에서 만공 스님과 용성 스님 두 선지식이 서로 법담을 하시게 되었다.
 용성 스님이 만공 스님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여의고 이르시오.” 하시니 만공 스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계셨다.
 그러자 용성 스님은 만공스님에게 “양구(良久)를 하시는 겁니까?” 하고 물으니 만공 스님의 대답이 “아니오.” 라고 하셨다.

 그 후 이 법거량(法擧揚)의 내용을 들은 나는 용성 스님을 뵙고 “두 큰스님께서는 서로 멱살을 쥐고 흙탕에 들어간 격입니다.”하니 용성 스님께서 “그러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스님께서 한번 물어 주십시오.” 하였더니 용성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묵동정을 여의고 일러라.” 하셨다. 내가 대답하기를 “어묵동정을 여의고 무엇을 이르라는 말씀입니까?” 하니 용성 스님은 “옳다, 옳다.” 하시었다.
불법이란 것은 이렇게 한번 방망이를 업고 들어가서 뒤집고 살아가는 것이다.
*오도송(悟道頌) ; 불도(佛道)의 진리를 깨닫고 그 경지 또는 그 기쁨을 나타낸 게송.
*경허스님의 오도송(悟道頌) ‘야인(野人)이 무사태평가(無事太平歌)’라 한 구절에 대해서~ ;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전강선사 법어집(용화선원刊) p8~11.
근세 한국불교에서 선의 중흥조이신 경허 대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을 한번 말하여 보겠다.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하고  돈각삼천시아가(頓覺三千是我家)로다
유월연암산하로(六月燕巖山下路)에  야인무사태평가(野人無事太平歌)로다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문득 삼천세계가 나의 집인 줄 깨달았다.
유월의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이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아무리 부처님이라도 허물이 있으면 한번 방(棒)을 쓰고 들어가는 법이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후, 일곱 걸음을 걸으신 뒤 사방을 돌아보시고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시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하셨는데, 그 후 운문선사(雲門禪師)가 나와서 말하기를 “내가 당시에 만약 보았더라면 한 방망이로 타살하여 개에게 주어 씹혀서 천하를 태평케했으리라.”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운문긱구자(雲門喫拘子)’라고 하는 선문중(禪門中)의 ‘척사현정(斥邪顯正)’ 공안이다.

그런데 나도 경허 큰스님의 오도송에 대하여 일방(一棒)을 쓰고 한마디 하였다.
우리 선가(禪家)에는 참선해서 견성(見性)하는 법을 소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 있는데, 만약 중이 시주의 은혜만 지고 도를 닦아 해탈하지 못하면 필경 죽어서 소밖에 될 것이 없다는 말을 어떤 처사가 듣고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만 되어라.”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경허 큰스님은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하였던 것이다.

유마경의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문수보살은 말로써 이를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유마거사는 묵묵히 말이 없음으로써 이르니 유마거사야말로 불이법문을 가장 잘 설했다고 찬탄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도는 승속에 관계없는 것이다.
단 한마디 ‘소 콧구멍 없다’는 언하(言下)에 대오하였던 것이다. 견성하여 생사해탈법을 얻어 삼천세계가 그대로 나의 집인 줄 깨달았으니 무슨 일이 있으리오.

‘유월의 연암산 아랫길에 야인이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참으로 훌륭하고 거룩한 오도송이라고 여러 큰스님들이 모여서 찬탄하시기에 나는 경허 큰스님의 제자이신 만공 스님과 만공 스님의 제자 보월 스님이 계신 앞에서 직접 말하였다.

“무비공(無鼻孔)에는 없다(無)는 허물이 있고, 돈각시아가(頓覺是我家)에는 깨달았다는 각견(覺見)의 허물이 있으며, 무사태평가(無事太平歌)에도 역시 허물이 있으니, 이런 것이 붙어서 생사묘법(生死妙法)을 못 보고 또 제구 백정식(白淨識)을 못 건너가게 딱 가로막고 있어서 학자가 그 곳에서 넘어지게 되는 것이니 학자를 바로 지시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보월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 참 공연히 말을 제멋대로 하네.”하셨다.

그때 만공 스님께서 “그러면 자네가 한번 일러보소.”하셨다.
“예. 참, 저보고 일러 보라고 하시니 참말로 감사합니다. 천하에 없는 해탈 보배를 바로 주신들 그 위에 더 반갑겠습니까. 그러면 큰스님께서 한번 청하여 주십시오.”하니,
만공 스님께서 물으시기를 “그러면 경허 큰스님의 ‘무비공 도리’나, ‘각견 도리’ 나 ‘무사태평가 도리’ 를 어디 한번 제쳐 버리고 일러 보소.”하시었다.

내가 말하기를 “ ‘유월연암산하로’까지는 경허 큰스님이 송(頌)하신대로 두고, 제가 외람되지만 큰스님 송의 끝구절 ‘야인무사태평가 도리’ 만 이르겠습니다.”하고서 “여여 여여로 상사뒤여.” 내가 농부가를 부르듯이 이렇게 일렀다.
그랬더니 만공 스님이 있다가 “아, 이 사람아 노래를 부르는가? '여여로 상사뒤여'가 노래가 아닌가, 노래를 부르는 일이 무슨 일인가.”하시었다.
그래서 나는 “스님이 재청하시면 다시 한번 이르지요.” 그러고는 보기 좋게 춤을 추면서 곡조를 부쳐서 다시 “여여 여여로 상사뒤여.”하니 “적자농손(嫡子弄孫)일세.”라고 만공 스님은 점검하셨다.
*경허선사, 만공선사, 보월선사, 전강선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구참납자(久參衲子) ; 오랫동안 참선한 수행승.
*고인(古人) ; 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목침(木枕 나무 목,베개 침) ; 나무토막으로 만든 베개.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Posted by 닥공닥정
신심(삼요)2014. 9. 24. 07:22

§(013) 신심, 분심, 의심 / 참선은 마군이와의 전쟁 /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는 불성(佛性)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올바르게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은 다 이 공부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하시는 분은 그렇게 믿어야 됩니다.


참선법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여섯 대문으로 쳐들어오는 팔만사천 마군이를 물리침으로서 무량겁의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해탈(解脫)하는 것이고, 당장 현세에 그러한 도적놈에게 시달리지 않고 대자유·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최고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차라리 깨닫지 못한 중생으로써, 초학자로써 숨을 거두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바로 깨닫지 못하고 부처님과 조사(祖師)와 같이 깨닫지 못하고서는 '알았다'는 생각을 갖지 맙시다.


**송담스님(No.13)(참선법E) - 76년 1월 관음재일 법문(76.01.24.음) (용013)

 

(1) 약 9분.

 

(2) 약 13분.


(1)------------------

참으로 참선(參禪)을 철저히 할라면은 인자 ‘생각을 바르게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생각을 어떻게 해야 바르게 갖느냐? 처음에 몸을 바르게 하는 법 말씀드렸지요? 그 다음에 호흡을 바르게 하는 법을 말씀을 드렸는데, 이번에는 마음, 생각하는 것을 바르게 하는 법을 알아야 됩니다.

이 생각을 바르게 할라면은 바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도 부처님과 같이 또는 달마(達摩) 스님이나 서산대사나 사명당이나 그러한 과거의 도인(道人)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올바르게만 이 공부를 하면은 나도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믿어야 됩니다.

이것을 믿지 않고서는 참선은 성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뭣한 사람들은 “말세는 참선했자 소용없고 아미타불 불러야 좋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말씀은 그 말씀에 해당하는 그 사람에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부처님의 정법에 입각해서 말씀드린다면은 “올바른 신심으로 올바르게 지도를 받아서 올바르게만 하면은 아무리 말세라 할지라도 다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 있다.”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말세도 상관이 없고, 여자도 상관이 없고, 노인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다 부처님과 조금도 차별이 없는 불성(佛性)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올바르게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은 다 이 공부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하시는 분은 그렇게 믿어야 됩니다.
‘나는 나이도 많고, 인제사 불교에 왔기 때문에 도저히 견성성불은 가망 없고 그저 인연이나 맺었다가 내생에나 하자.’ 이런 생각은 용납이 되지를 않습니다. 결단코 금생에 할 수 있다고 믿어야 됩니다.

또 금생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고 해야 이 공부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지, 그 믿음이 없으면 안 됩니다.

전쟁도 아무리 적군이 많고, 아군이 수효가 적고 무력이 좀 떨어진다 하더라도,
죽음으로써 이길 각오를 하고, 만약에 이기지 못하면 죽을 각오를 하고 대들면은 10대 1 밖에는 안 되는, 100대 1 밖에 안 되는 적은 군사력을 가지고도 능히 전쟁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참선도 전쟁입니다.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군(魔軍)이가 눈으로 코로.. 아까 조실스님께서 여섯 가지 도둑놈(六賊)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는, 팔만사천의 도둑놈이 여섯 문(六門)으로 틈만 있으면 침범해 들어옵니다.

우리의 마음을 왕에다 비교합니다. 심왕(心王).
심왕성(心王城)인데, 이 몸뚱이는 심왕의 성(城)인데, 그 성에 여섯 문(六門)이 있습니다.
눈, 코, 귀, 입, 몸뚱이, 의(意) 여섯 가지 문이 있는데, 그 여섯 문을 통해서 팔만사천의 마군이의 군사가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들어와 가지고 이 심왕을 공격해 들어오는 이러한 무서운 전쟁입니다.

그래서 국가와 국가의 전쟁은 군인들이 싸우고, 국민은 그 마음이 단합해 가지고 뒷받침만 하면은 직접 총칼은 안 들어도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마는,
우리의 마음의 왕을 공격해 들어오는 팔만사천의 마군이 군사는 우리가 직접 싸워야 됩니다. 직접 싸우지 않고 남이 우리의 싸움을 막아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놈을 못 막고 그 팔만사천의 마구니 군사에 진 사람은 결국은 지옥에 가는 것이고, 그놈을 싸워서 끝까지 내가 물러서지 않고 싸워서 이겨낸 사람은 극락에도 가고 견성성불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은 무량겁을 두고 육도윤회를 하다가 조금 착한 일 하면 천당에 갔다가,
악한 일 하면 짐승이 되기도 하고, 성을 많이 내면 독사나 구렁이가 되기도 하고, 또 더 사람을 죽이고 못된 죄를 퍼 지으면은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참선법은 이 팔만사천 마군이—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여섯 대문으로 쳐들어오는 팔만사천 마군이를 물리침으로서 무량겁으로 윤회하는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해탈(解脫)하는 것이고,
당장 현세에 그러한 도적놈에게 시달리지 않고 대자유·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최고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됩니다. 첫째, ‘하면 된다’고 믿어야 됩니다.

둘째에 가서는 무엇 때문에 과거의 부처님과 보살님과 도인들은 이 문제를 진즉 해결을 해서 그런 성현이 되어 가지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해탈하시고 대해탈도를 증득을 했는데,
나는 오늘날까지 무엇 하느라고 이렇게 육도윤회를 하면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행복을 얻지 못하고, 앞으로 눈 한번 감으면은 지옥에 떨어질런지 축생이 될런지 모르는 이러한 환경에 놓여져 있는가?

생각해 보면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배불리 먹고 호강하고 살면은 그것이 전부가 될는지 모르지마는,
이 인과의 법칙—이 문제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 육도에 윤회할 그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그 이치를 우리가 알고 믿고 느끼는 사람이라면은,
나는 왜 오늘날까지 이렇게 해탈을 하지 못하고 윤회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속에서 분통이 나지 아니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 분심(憤心)이 나야 합니다.
이를 악물고, ‘다행히 내가 금생에 이 사람 몸 받아 가지고 이 정법(正法)을 만났다. 늦게 만났지마는 그래도 다행한 일이다. 다행한 마음과 아울러서, 그러니 알고서 안 할 수가 있느냐? 나도 해야겠다’고 하는 용맹심이 속에서 북받쳐 올라야 되는 것입니다.

게을러 빠져가지고, 하거나 말거나 육도윤회를 하거나 말거나, 남이 공부를 하거나 말거나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하면은 그러한 사람은 이 공부를 해 봤자 별 수가 없습니다.

용맹심(勇猛心), 분심(憤心), 아까 처음에 신심(信心)이 있는 사람에게는 분심과 용맹심이 없을 수가 없고, 그것이 있어야 그 다음에 이 ‘이뭣고?’ 화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는 의심(疑心)입니다. 의심!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하고 의심하는 거여.(23분30초~31분43초)

 

 

 



(2)------------------

이것은 불교의 팔만대장경을 다 추리고 간추려서 골수만 뽑아서 만들어 놓은 수행 방법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믿고 고대로 하셔야 됩니다.

그렇지 아니한다고 하면은 무엇 때문에 조실스님께서 팔십 고령(高齡)에 이르도록 가만히 당신 공부하시고 조용히 지내시면은 편하실 텐데,
팔십 고령에 혈압은 그렇게 200이 넘나드시면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그 피를 토하는 그러한 간곡한 고구정녕(苦口丁寧)한 그런 법문을 마지막 열반하신 날까지 그렇게 해주실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이 법이 그만큼 중요하고 그렇게 여러분들의 생사해탈하는 데에 유일한 묘방(妙方)이기 때문에 마지막 이 사바세계를 하직하신 그날까지 그렇게 간곡히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큰스님의 법은(法恩)을 갚는 길은 오직 여러분 자신들이 조실스님의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열심히 공부하시는 길 (법문 끊김) ...묘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첫째, 몸을 바르게 가질 것, 둘째 바른 호흡을 할 것, 셋째에 가서 바르게 생각을 가다듬는데,

생각을 바로잡을려면은 첫째 나도 성불할 수 있다고 믿고, 나도 하면은 부처님과 같이 그러한 성현(聖賢)이 될 수 있다고 믿고,
그 다음에, 무엇 때문에 나는 오늘날까지 이러한 좋은 방법을 몰랐던가? 알고서도 왜 그렇게 철저히 공부를 못했던가? 이것에 대해서 분심과 용맹심을 내시고,

마지막에 가서는 화두에 대한 간절(懇切)한 의심(疑心)을 가지셔야 됩니다. 의심이 간절할수록에 의심이 크고 의심이 클수록에 크게 깨닫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방법은 100번을 말씀드리고 1000번을 말씀드리더라도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아주 뼛속에 이것을 새겨야 됩니다.
가슴속 깊이 새겨서 언제, 어디서, 누가 묻더라도 이 참선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으셔야 됩니다.

애매하게 갈팡질팡 이러면 된 것인가? 저러면 된 것인가?
저기 가서 들으면 이렇게 말하고, 여기 와서 말하면 저렇게 말하고 해서, 말하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어느 방법이 옳은가 모르겠다. 이렇게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여기 용화사 전강 조실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그 방법이 가장 옳은 방법이고 그렇게 하면 틀림없다고 믿고,
어디 가서 다른 절이나 다른 스님네 법문을 듣더라도 다 좋은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그 말씀을 정성스런 마음으로 들을지언정,

이 참선해 나가는 방법에 있어서는 여기 와서 듣고 그렇게 조금 해보다가, 또 저기 가면 그대로 해보다가 갈팡질팡 하면 공부가 못쓰게 되는 것이니깐,

공부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여기 조실스님께서 지도하신 대로 아주 딱! 고정을 해서 그렇게만 해 가시고,
다른 법문을 듣거나, 다른 경책(經冊)을 보거나 하는 것은 전부 내 공부해 나가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정성스럽게만 받아들일 뿐이지, 공부하는 방법에 있어서 갈팡질팡 하시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은 공부해 들어가다가 아주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그러한 신기하고도 묘한 그러한 싱그러운 경지가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절대로—그리고서 그 나타난 것을 보고서 ‘아! 이것이로구나!’ ‘참! 좋구나!’ ‘바로 이것이 도통이구나’—이런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부처님이 나타나건, 또는 관세음보살이 나타나건, 또는 꿈속에 비몽사몽간에 별별 신기스런 경지가 나타나도 그것은 ‘헛것’이 보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나타나서 뭐라고 설법을 하셔도 그것은 ‘헛것’입니다.

‘환(幻)’—꼭두각시, 환(幻)으로 나타난 것이지 그것이 실상(實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나타나더라도 눈 하나 까딱하지 말고 더욱 정신 차려서 화두를 들고 나가셔야 됩니다.

만일에 그러헌 신기한 경지가 나타났다고 해서 거기에서 기쁜 마음을 내 가지고 그놈을 따라가다 보면은 여러분은 영영 헤어나지 못할 마군이의 소굴로 흘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떨어졌다 하면은 그 다음에는 부처님이 출현하셔도 그 사람 병은 고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하시다가 다 한 철 내지 두 철, 세 철 열심히 하다 보면은 자기 나름대로 견처(見處)가 생기는 수가 있습니다.
어떠헌 화두·공안을 보아도 자기 나름대로 가늠이 가지고, 어떠한 공안을 보아도 하나도 의심이 안 나고,
다 자기 나름대로 공안에 대한 낙처(落處)를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믿어지는 때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천하 없이도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지는 공부는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요, 중생심으로 중생의 사리(邪理)·상량(商量)으로 알아지는 것은 천하 없는 묘한 것을 알았다 해도 그것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알았다는 생각이 있으면은 언제라도 눈 밝은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서 점검을 받어야 됩니다.

옛날에는 선지식이 “너 아니다. 그거 옳게 본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은 거기에서 분심을 내 가지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기어코 바로 깨달을려고 노력을 했건만,
지금 세상은 선지식이 아니라고 하면은 그때부터서 그 선지식을 돌아서서 비방하고 자기가 아는 척하고 그러한 폐단이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우리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차라리 깨닫지 못한 중생으로써, 초학자로써 숨을 거두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바로 깨닫지 못하고 부처님과 조사(祖師)와 같이 깨닫지 못하고서는 '알았다'는 생각을 갖지 맙시다.

설사 한 공안, 두 공안 보았다 하더라도 자기가 자기 힘을 생각해 보면 압니다.
이러한 소견 가지고 과연 부처님과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역대 조사와 같은 법력(法力)에 있어서 도력(道力)에 있어서 덕행에 있어서 부처님과 역대 조사에 비교해서 손색이 없겠는가를 언제라도 자문자답을 해 보십시오.

해 봐서 이래 가지고 부처님이라고 할 수가 없고, 부처님과 같다고 할 수 없을 때에는 언제라도 자기의 견처(見處), 자기의 얻은 바를 깨끗이 버리고서 초학자(初學者)의 입장에서 간절히 공부해 나가야만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조금 얻은 것을 가지고 족(足)함을 삼으면은 그 공부는 거기에서 중단이 되는 것이고, 얼마 안 가면은 퇴타(退墮)하고 말아 버리는 것입니다.

결단코 이 사상(思想)은,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이 사상 하나는 철저해야 될 줄 압니다. 하물며 설사 바른 소견(所見)이라 하더라고 그렇습니다.
그렇거든 바른 소견이 아닌 공부 중에 환(幻)으로 나타난 그런 걸 가지고, 얻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공부에 차질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그 이상 슬프고 통탄할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부디, 이 공부는 조급한 마음 갖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도 아니 되는 것입니다.
거문고 줄 고르듯이, 기타 줄 고르듯이, 너무 강하게 졸라매도 떨어지면 못 쓰는 것이고, 너무 줄이 늘어지면은 소리가 제 소리가 안 나는 것이고, 가장 적당하게 줄을 골라야만 제 음량이 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 공부도 몸과 호흡과 마음을 가장 이상적이고 지혜스럽게 고르게 하고, 단속함으로써 우리의 공부는 나날이 진취하고 급기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이 공부해 나가는 데 있어서 의심이 나거든 다른 큰스님을 찾아가도 좋고, 또 여기에 오시면은 문의를 하시면은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정성스럽게 말씀을 해 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여기 법회 때마다 참 이렇게 많이 오시는데, 오셔서 이 법당에 들어오시면은 오시는 대로 앞에서부터 차츰차츰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은 오시는 대로 차츰차츰 차츰 뒤로 가시게 되면은 좀 늦게 오신 분이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이 법회장이 소란스러운 일이 없겠습니다.

먼저 오셔서 뒤에 가서 떠억 앉아 계시면은 나중에 오신 분들은 그 사이로 오셔서 앞으로 오시기를 꺼려하시고, 대단히 법회 중에 소란하게 되면은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해서 다른 분들이 법문 듣는데 장애가 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오시는 족족 앞에서부터 차곡차곡 차곡 이렇게 앉으시면은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꼭 그렇게 좀 해주시고.

그리고 이 관음재 법회는 언제라도 10시 반에 딱 시작할 수 있도록 될 수 있으면은 조금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지시면은 제 시간에 참여를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늦어지시겠지마는, 늦게라도 참석하신 것은 안 참석하신 것보다는 낫지마는 기왕 참석하실 바에는 제 시간에 참석을 하셔서 앞자리부터서 차곡차곡 이렇게 앉아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이것으로 끝맺겠습니다. 다음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그 다음에 영단(靈壇)에 간단한 천도식이 있겠습니다.(42분33초~54분58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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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달마 스님, 서산대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군(魔軍) ; 많은 수의 악마의 군세(軍勢)를 뜻함.
*팔만사천(八萬四千) : 법수(法數)에는 이 말이 퍽 많다。그것은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 팔만이라 하기도 한다.
*마군(魔軍) ; 악마의 군세(軍勢).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 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육적(六賊) ; 번뇌를 일으키는 근원이 되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六根)을 도둑에 비유한 말.

 

*육문(六門) ; 육근(六根,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근意根)을 말한다.
육식(六識,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이 육경(六境,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인식하는 경우, 그 입구가 되므로 문(門) 또는 뿌리(根)라 하는 것이다.
*심왕(心王) : 의식 작용의 본체。객관(客觀) 대상에 대하여 그 일반상(一般相)을 인식하는 정신 작용。여기에 육식(六識), 팔식(八識), 구식(九識)의 구별이 있다.
*생사윤회(生死輪廻)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 Vimukta ; mukti  [파] Vimokha ; Vimutta ;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또는 열반(涅槃)의 딴 이름으로도 쓰인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용맹심(勇猛心) ; 용감하고 사나운 마음.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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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 정•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묘방(妙方) ; 신묘하고 효험이 뛰어난 처방(處方).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환(幻) : 또는 눈꽃(空眼花 • 空華)。근본 무명(根本無明)이 언제 일어났는지 그 시초를 알길 없으므로 「본래부터(從本已來)」라기도 하고, 「시작도 없음(無始)」이라고도 한다.
무명이 일어나는 곳도 없고, 또한 그 실상 자체(實相自體)도 없는 것이므로 곡두(환상)같다고도 하고, 눈이 어리어서 허공에서 아물거리는 눈꽃 같다고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허환된 무명에서 나온 바 온갖 것이 또한 모두 환상이며 공화(空華)인 것이다.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견처(見處) ; 자기 나름대로 얻은 어떤 생각이나 입장, 견해.
*사리(邪理) ; 그릇된 이치나 생각.
*상량(商量 헤아릴 상,헤아릴 량) ; ①상인이 물품을 판매할 때, 서로 그 가치를 재서 결정하는 것. ②따지고 헤아리는 알음알이.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용맹정진(勇猛精進) ;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法)의 힘. ②가르침의 힘. 불법의 공덕. 불•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을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것.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힘.
*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힘.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힘.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영단(靈壇) ; 영가의 위패를 두는 단(壇).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