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딴 생각[別念]’ 안됨 / 공부가 순일하게 된 때에 잘 다잡이 해야 / 참선은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 / 새옹지마 / 밝아지면 어두운 것은 찰나에 없어진다.


조금도 ‘딴 생각[別念]’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겁을 내지도 말고, 걱정도 내지도 말고, 좋아하지도 말고, 다못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생각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뿐인 것입니다.

참선을 하게 되면 첫째, 지혜의 눈을 뜨게 되거든. 지혜의 눈을 떠서 깨닫기 이전에 참선을 시작할 때부터서 벌써 지혜인이 되는 것이여.

참선을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감정적인 그러한 생각이 자연히 쉬어지기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이 쉬어지면 그것이 지혜로운 거여. 꾸정물이 따로 있고, 말간 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 찌꺼기가 가라앉으면 맑아지거든.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밝아졌다 하면은 어두운 것은 찰나에 그냥 없어지는 것이지, 밝은 것이 오니까 어두운 것이 그냥 꼼짝을 못하고 저 마루 밑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송담스님(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


(1) 약 19분.  (2) 약 18분.


(1)------------------


여러 가지 공안이 있지만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도 받은 한 공안에 일여(一如)하게 참구(參究)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곧 잘되어 갑니다. ‘이대로 해 가면 얼마 안 가면은 득력(得力)을 할 수 있겠거니’ 이리 생각하고,

한 철, 두 철을 지내다보면 영 옛날보다도 훨씬 더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번뇌 망상이 더 잘 퍼일어나고 영 자리가 잡히지를 않고 이렇게 해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러한 경우라 하더라도 조금도 번뇌심을 내지 말고 심호흡을 하면서 착실히, 착실히 공부를 다져나가면 그렇게 해서 한 고비를 넘기면은 다시 또 수월하게 공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수월하게 공부가 화두가 잘 일여하게 들리고 잘되어간다 하더라도 조금도 기뻐하는 생각을 내지 말 것입니다.

기뻐하는 생각 내면 벌써 그것은 이미 화두가 아니기 때문에, 기뻐하는 그러한 번뇌심에 끌려들어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기뻐하지도 말고 또 잘 안된다고 해서 번뇌심(煩惱心)도 내지 말 것입니다. 이것이 공부를 지어나가는데 있어서 아주 요긴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 애를 써서 밀밀면면(密密綿綿)하게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공부를 다잽이를 해나가면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들려고 해도 금방 도망가고, 금방 딴 생각이 들어오고 그랬던 것이,

자꾸자꾸 해가면은 나중에는 헐려고 안 해도 화두가 떠억 들어지게 되면서 시간이 한 시간, 두 시간이 언제 지내간지 모르게 시간이 지내가고,


그때는 다리가 저린 것도 없고, 몸이 괴로운 것도 없고, 가슴이 답답한 것도 없고, 정신도 깨끗하고 자기가 지금 어디에 앉아있다고 하는 그것마저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뚱이마저도 의식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이 깨끗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싱그럽고 이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화두는 그런 가운데 너무 조용하고, 너무 깨끗하고, 너무 편안해서, 까딱하면 화두를 그때 망각(却)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절대로 그러한 경지에서 화두를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한 그 가운데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깨끗하게 독로(獨露)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서 잠깐이라도 화두를 놓쳐버리고 ‘아! 좋구나. 이러한 경지로서 계속해서 나갔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툭 깨닫게 해주셨으면, 이러다가 빨리 깨달았으면’ 이러한 생각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이러다가 내가 까딱하면 미치면 어찌할고’ 별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고비에서 그 천길만길 되는 길을 간신히 간신히 올라가 가지고, 발 한번 삐끗해 가지고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조금도 ‘딴 생각[別念]’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겁을 내지도 말고, 걱정도 내지도 말고, 좋아하지도 말고,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에서 정진을 하면은 옆에 사람들도 다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하! 저이가 지금 공부가 순일(純一)하게 되어가는구나’ 알게 되기 때문에 대중 가운데에 그렇게 공부가 되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입승(立繩) 스님을 비롯해서 좌우에서 서로서로 잘 보호를 해줘야 합니다.


대중 가운데에는 혹 ‘지가 공부한 척 하고 그런다’고 아주 뒤에서 수근수근하고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만은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언제 그렇게 공부가 또 순일하게 되어 갈 때가 있을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가 순일하게 되어 갈 때 주위에서 잘 보호를 해주고, 자기도 그럴 때에 아주 조심스럽게 그 공부를 잘 보호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렇게 나가면 나중에는 일어서도 화두가 고대로 있고,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고대로 있고, 똥을 눌 때도 고대로 있고,

천만 명이 우글거리는 시장 속에 들어가도 조금도 화두가 흐트러지지를 아니하고, 딴 생각을 일부러 좀 할려고 해도 딴 생각이 되지를 않고 이러한 경지에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머지않아서 칠통(桶)을 타파(打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그렇게 순일하게 된 때에 잘 다잡이를 해야지,

그때에 조심성 없이 또 좌우에서 방해를 친다든지 보호를 안 해가지고 그러한 경지(地)가 깨져버리면 나중에는 1년, 2년, 3년을 애를 써도 여간해서 다시 또 그러한 경지가 돌아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여법(如法)하게 알뜰히 정진을 하면 누구라도 반드시 그러한 경지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가 오면 사람에 따라서는 가만히 앉았어도 ‘아, 지금 조계사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구나. 선학원에 어떤 큰스님이 왔구나. 아, 어디 절에서는 누가 죽었구나’ 이런 것이 환히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내일, 아하 누가 오겠구나’ 그런 것도 환히 알아지기도 하고.


그러나 이것이 설사 무엇이 알아지고, 무엇이 여기 앉아서 몇백 리 밖에 것이 환히 보이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공부가 잘되어 간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이건 너무 식(識)이 맑아지고 깨끗해지니까 그런 것이 혹 보이는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능엄경(楞嚴經)에 부처님께서는 오십 가지에 대한 그런 경지를 낱낱이 자상하게 설명을 해 놓으셨습니다.


그러한 경지가 자기에게 나타났을 때에 그거 나타난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닌 것이고 또 꼭 그것을 나쁘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나타남으로써 ‘아! 그이가 공부가 잘한다’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또 그러한 신기한 경지가 나타나지 아니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또 공부를 잘못한 것도 아닙니다.


요(要)는 사람에 따라서 혹 나타나기도 하고, 안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그런 것이 나타나느냐? 능엄경에 말씀하시기를 평소에 공부할 때 ‘그런 것이 좀 나타났으면’하고 바램을 가졌던 사람은 그런 것이 혹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것이 이미 나타났을 때에는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

‘조금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싫어하지도 말고, 좋아하지도 말고, 그냥 고대로 놔 버리고서 자기의 본참 수행을 여법하게만 해가면 그것이 조금도 해로울 것도 말 것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사람은 혹 그런 것이 보이거나 나타나거나 하더라도 조금도 좋아하거나, 겁을 내거나, 그것을 물리치려고 하지를 말고 그냥 고대로 나둬 버려.

전혀 대꾸를 말고 다못 심호흡을 하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또는 이뭣고를 하신 분은 ‘이뭣고?’ 무(無)자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이렇게만 나아가면 그런 것이 아무 병이 될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그런 나타나는 것을 보고 신기하고 기뻐서 자꾸 거기에다 관심을 쏟고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사람은 벌써 마구니[魔]에 끌려가게 되어가지고, 잘되어봤자 점쟁이나 무당 밖에는 아니된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누구를 만나면 ‘아, 너 석 달 후에 죽겠다. 석 달 후에 니 남편이 죽겠다’ 이런 겁나는 소리를 푹푹 합니다. 해가지고 아! 정말 석 달 뒤에 보면, 딱 딱 들어맞거든.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큰 도인이요, 도사라고 그 사람 앞에 벌벌 메고,

‘돈을 내라’하면 돈을 내고, ‘쌀을 내라’하면 쌀을 내고, ‘절을 지으라’하면 절을 지고, ‘큰 대종을 시주해라’하면 시주하고, 아주 그 사람 앞에는 벌벌 멥니다, 아주. ‘목숨까지 바치라’고 하면 바칠 정도로 그럽니다.


그래 가지고 그 사람은 자기 생각에도 그런 것을 잘 알고, 신도들이나 사람들이 그 사람 앞에는 장관도 무릎을 꿇고 벌벌 떨고, 장군들도 그 사람 앞에는 아주 벌벌 떱니다.

그래 가지고 톡톡히 도인(道人) 노릇을 하고, 많은 사람을 모다 제자로 삼아가지고 모다 그런 사람 가끔 있습니다, 있는데.


그래 가지고 그 사람이 끝까지 명예도 탐하지 아니하고, 재산도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이 계율을 지키면서 그리 지내는 사람은, 그리고 그 사람 자신도 불법을 믿고 많은 사람에게 보시를 하게 하고 착한 일을 하도록 이렇게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별것이 없지만은, 거기서 처음에는 그렇게 지내다가 차츰차츰 욕심이 생기고, 삿된 생각에 불이 붙어가지고 못된 짓을 계속하게 되면 머지않아서 깜깜해져가지고 그전에는 그렇게 환히 다 보이고 알았던 것이 전혀 몰라지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혹 맞기도 하고, 혹 안 맞기도 하고 이렇게 됩니다.


그래도 계속 사람들이 자기를 따라다니고 묻고 그러는데, 인자 ‘내가 몰라졌다’고 하기가 챙피하니까,

계속 아는 척을 하고 큰소리를 치다가 영 안 맞는 소리를 해가지고 망신(身)을 하고, 남을 갖다가 망하게 만들고, 나중에는 남한테 맞아 죽거나, 쇠고랑을 차게 됩니다.


그이가 도인인 줄 알고 따라다니는 제자들도 같이 망신을 하고, 같이 쇠고랑을 차고 그렇게 되고, 죽어서는 물어 볼 것도 없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쏜살같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 그런 사람들이 염불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또는 주력을 하거나 때로는 참선을 자기 나름대로는 목숨을 바쳐서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많습니다.

그러다가 한 생각 잘못해 가지고 그러한 외도 마구니가 되어가지고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고, 불법까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은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고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가는 길도 처음 가는 길은 가다가 보면 두 갈래, 세 갈래, 네 갈래 길이 나오는데 어느 길로 가야 할것인지 어떻게 알 것이냐?


그럴 때 길을 잘 아는 사람한테 물어서 가야 하는데, 가다가 길을 물어보면 요새는 자기도 잘 모르면서 ‘이리 가시오. 저리 가시오’ 대고 일러줘 버린다 그말이여.

‘나는 잘 모릅니다’ 이러면 될 텐데 ‘모른다’고 하기가 창피하거든. 그러니까 알지도 못하면서 ‘이리 가시오. 저리 가시오’  그 사람은 뭣도 모르고 한참 가다보면 얼토당토않는 데에 도착을 하게 된다.


눈으로 보고 가는 길도 그렇거든, 눈으로 보이지 아니한 마음으로 닦아가는 이 참선법에 있어서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피차 모르는 길을 가는데 바른 스승의 지도 없이 어떻게 바르게 해 갈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해 가다가, 옛날에 맛보지 못한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싱그러운 그런 경지가 나타나면 천하없이도 ‘아! 참 좋구나. 바로 이것이 바로 그 경지인가 보다.’


그러다가 무엇이 이상한 신기한 경지가 나타나서 방안에 앉아서도 벽 밖에가 환히 보이고, 큰 산이 막혀 있어도 산너머 일이 환히 보이고, 이백 리 삼백 리 떨어진 서울이나 부산의 일이 환히 보이고 하면 누가 거기에서 안 미칠 사람이 누가 있느냐. ‘야! 내가 이제 도통(道通)을 했나보다’


세상 사람들은 아는 사람한테는 기가 맥히거든, 훤히 아는 사람한테는.

20년 30년 불법을 믿고 다녔던 사람도 답답하면 무당 점쟁이한테 쫓아가서 여지없이 한마디만 탁 맞혔다하면,

그때부터서는 불법(佛法)은 저 꽁무니로 돌려 버리고 이제부터서는 무당을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무당 말이라고 하면 천하없이도 절대 복종을 하고.


알아맞혀 가지고 설사 무당 말대로 무엇이 잘되고, 못되고 그렇게 해서 자기의 팔자(八字)가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자기가 지은 업(業)이 있으면 잘되기도 하고, 못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미리 석 달 전이나, 넉 달 전에 미리 알았다고 해서 자기의 업이 면(免)해지지를 않습니다.(9분50초~28분8초)



(2)------------------


어떤 사람이 그 관상(相)을 보니까 호랭이한테 호식(食)을 당할 그런 팔자다 그말이여.

그러면은 언제쯤 호랭이한테 물려가겠느냐? 자세히 사주(四柱)를 봐가지고 뽑아보니까 몇살 때 아무 날 아무 시에 호랭이에 물어가겠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방안에다가 큰 항아리를 갖다놓고 그 항아리 안에 탁 들어앉았고, 온 마을 사람들을 갖다가 수백 명을 초청을 해서 몇 겹으로 싸고 장사(士)를 시켜서 그 밖으로 하고,

또 온 마을에 있는 소를 갖다가 빙 둘러서 다 소로 갖다가 담을 치고 이리해가지고는 모닥불을 피면서 호랑이 범접(接)을 못하게 밤새 지켰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렇게 하고서 날이 샌 다음에 항아리 뚜껑을 열어보니까 아! 처녀가 죽어갔고 있다 그말이여.


그 이상하거든. 그래서 보니까 귀에다가 귀 파는 귀후지개를 갖다가 귀에다 꽂고는 죽었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 귀후지개를 가만히 보니까 호랭이 뼉다구로 깎아서 만든 귀후지개였다 그말이여.

그래서 귀를 파다가 잘못해 가지고 귀창이 터져서 죽었는데, 호랭이 뼉다구에 찔려서 죽었다.


호랭이한테 물려갈 업을 지은 사람은 아무리 몇백 명을 동원을 해서 막고, 항아리 속에다 담아 놔도 결국은 호랭이 뼉다구에 찔려서 죽는다.

이건 하나의 일화에 지나지 못하지만 그래서 ‘독안에 들어가도 자기의 업은 면하지를 못한다’ 이런 속담도 있습니다.



점쟁이한테 가서 아무리 미리 합격을 할 것이... (녹음 끊김)

실력을 양성을 하고 자기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마음을 안정하는 법을 알아가지고,

시험장에 나가서 따악 긴장을 풀고서 초조한 마음, 불안한 마음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을 볼 수 있는 그러한 방법을 어디 가서 묻는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중요하거든. 시험을 보러가기 전에 너무 전날 한 장이라도 더 본다고 잠을 설치지 말 것이며,

시험 볼라면은 원기를 회복해야 한다고 잔뜩 고기를 갖다가 삶아 먹여가지고는 배탈이 나가지고 그런 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음식 조심해야 하고 또 ‘잘 봐야 한다. 잘 봐야 한다’고 자꾸 족치면 아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못쓰는 것입니다


인자 니가 그동안 열심히 공부를 했으니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부담없이 가서 시험을 보도록 해야지,

‘이제 너는 떨어지면 너는 인자 그만이여, 인자’ 자꾸 족치거든 귀에다 대고. 그러면 더 시험을 못 볼 것이 아니냐 그말이여.


그리고 일러줄 것은 「심호흡을 하는 법」을 알아야 됩니다, 학생이.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에 부터서 계속 단전호흡을 하다가, 시험장에 들어가서 책상에 앉아서도 계속 허리를 쭉 펴고 심호흡을 계속하면서 해야 합니다.


그러면은 그 가슴이 두근두근 두근두근하고 그냥 그 초조하고 불안하고 손이 떨리고 한 거—이거 시험을 봐본 사람은 다 아실 것입니다만은 심호흡을 해야 그 불안한 생각이 이렇게 안정이 되는 것이여.


마음만 차분하고 안정이 되고 평탄한 마음으로 시험을 보게 되면 자기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죽죽죽죽.. 써나가거든. 이 마음이 긴장을 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하면 아는 것도 못쓰게 되거든.


무당한테 가봤자 그것은 없애주들 못한다 그말이여. 그러헌 것을 알아가지고, 자기의 실력을 발휘를 하고 자기가 있는 실력껏 쓰면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시험에 우선 봐서는 꼭 합격하는 것이 좋지만은 일생을 두고 볼 때에는 그 시험에 꼭 합격했다고 해서만이 좋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거기에 합격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안 좋게 되는 수도 있는 것이고, 그때는 그 시험에 떨어져서 모다 섭섭해 했지만은 나중에 두고 보니까 그때 떨어진 것이 차라리 무방(無妨)하게 된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에 새옹(翁)이라고 하는 노인이 있었는데, 하루는 어디서 말 한 마리가 좋은 말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온 마을 사람들이 ‘하! 재수가 있어서 좋은 말이 들어왔다’고 그렇게 모다 부러워하고 모다 치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새옹이라는 사람이 ‘두고 봐야 알지 뭐.’ 그랬거든.


그런데 그 집 아들이 그 말을 타고 계속 좋아서 경마(馬)를 하고, 말을 달리고 하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대깍 부러졌어. 온 마을 사람들이 ‘아휴, 다리를 다쳐서 참 안되었다’고 모다 걱정들을 하는데, ‘두고 봐야 알지’


얼마 안 있다가 큰 난리가 났는데 마을에 모다 남자들은 전부다 그 전쟁에 끌려가 가지고 다 죽었는데, 그 집은 다리가 부러진 병신이라 끌려가지를 않고, 그 집안의 대를 이어갔다.


그래서 얻었다고 해서 좋아하지 말고, 잃었다고 해서 슬퍼하지 말아라. 이것을 새옹지마(翁之馬)라. 새옹의 성(姓)이 새(塞) 씨에요. 「새(塞) 씨라고 하는 할아버지[翁]의 말[馬]」이라 하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저 광주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아들을 독자(子)를 하나 낳았습니다. 그놈을 하나 잘 가르켜서 출세를 시키기 위해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아들이 하여간 어릴 때부터서 영특(英特)해 가지고 ‘일고(光州一高)에만 합격을 꼭 시켜야만 되겠다’ 이겁니다.

일고에 합격하기 그것만 하기 위해서 참 모든 물심양면으로 애를 써가지고 거기를 목표로 해서 공부를 시키는데.


장님 점쟁이가 있습니다. 그 장님한테 가서—그이는 쪽집게 점쟁이라고, 가서 물어봤다 하면 백발백중입니다. 가서 ‘합격을 하겠습니까? 못하겠으니까?’ 사주를 딱 넣으니까, 한참 괘(卦)를 뽑아 보더니 ‘되기는 꼭 되는데, 되면! 당신 집안은 망해요.’


‘그 무슨 말씀이오. 나는 죽어도 좋으니까 얘는 일고에다 기어이 넣어야만 되겠소. 되면 좋지, 왜 되면 집안이 망한다 말이 뭔 말이요.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요.’

그래가지고 ‘그런데 안되야만 당신 집안이 잘되지, 이 애가 만약 일고에 합격만 했다하면 당신 집안은 망하는데,  큰일이오!’


아! 말이 통하질 안해서, 계속해서 그냥 장님 말은 무시해 버리고 일고를 시험을 보였는데, 얘가 발표하는 날 가서 보니까 딱 자기가 들어있거든.

그래서 이 소식을 아버지한테 알려드려야겠다고 그냥 그 자리에서 주먹을 쥐고 자기 아버지 있는 데로 뛰어갔습니다. 뛰어가다가 교통신호도 무시하고 그냥 막 뛰어가다가 탁 교통사고가 나가지고 직사(直死)를 했거든.


그 소식이 자기 아버지한테 가 가지고 아버지가 와서 그 현장을 보고 미쳤습니다. 미쳐가지고는 그냥 펄펄뛰고 그냥 돌아다니다가 그 아버지도 죽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걸 보고 할머니가 ‘자식 죽고, 영감 죽고, 내가 무슨 재미로 사느냐’ 약을 먹고 죽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웃을 일이 아니고 실화(實話)입니다. 이것은 실화로서 이러한 예(例)가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그 일고에 들어가도, 그 사람이 참선을 한 사람이었다면 들어가면 들어가는대로 담담히 ‘이뭣고?’를 하고,

또 떨어졌으면 떨어진대로 담담한 마음으로—그럼 그 다음으로 떨어진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 길이 반드시 또 이차적으로 있는 것이니까.


이차적으로 또 후기를 본다든지, 재수를 한다든지, 학교를 좀 낮추어서 한다든지, 대학보다는 차라리 전문학교에 가서 기술을 익혀가지고 한다든지.


꼭 명문대학만 들어가야만 한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 유명학교, 명문대학, 명문대학 해가지고 얼마나 많은 아들과 딸들의 신세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집안까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러한 생각을 말고 그 학생의 성적과 또 소질과 가정 형편과 그런 것을 두루두루 감안해서 담임선생과 잘 본인과 부모가 의논을 해가지고 여러 가지를 고려해가지고 적당한 데에 보낸다면,

다 자기의 적성에 맞추어서, 형편에 맞추어서 가 가지고 다 무난하게 공부도 잘하고 성공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무리해가지고 공부도 잘 못하는 놈을 일류에만 넣는다고 가정교사를 대가지고 족쳐 가지고는 얘가 정신 노이로제에 걸려가지고 공부고 뭣이고 다 소용없고 그래가지고 탈선을 하게 되고,


한번 떨어지면 그 다음엔 조금 잘 알아서 해야 할 텐데, 두 번째 또 거기를 기어이 넣으려고 하다가 또 떨어지고,

두 번 세 번 떨어지다 보면 시간 다 가버리고 애는 학교도 가기도 전에, 해보기도 전에 벌써 못쓰게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출세한 것도 아니고 또 학교에서 성적이 꼭 좋다고만 해서 그 사람이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왕왕이 학교에서는 1등을 해가지고 일등으로 졸업을 해가지고 수재라고 이름났던 사람이 사회에 나가서 별로 볼 일 없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좀 어리석고 좀 티미하고 그러던 사람이 사회에 나가서 굉장히 성공을 하고 참 그런 사람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니까,

공부를, 학교에서 모다 영어나 수학은 잘 못해도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하게끔 해주고 또 음악을 잘하는 사람은 음악을 하게 해주고,


또 무슨 자기의 소질 따라서 그것을 살려나가면 그것이 부모도 좋고, 자식도 좋고, 학교 선생님도 좋고 다 두루두루 좋은 것입니다.


이런 말을 왜 말씀을 드리는고 하면은 지금 한참 학교의 합격 관계로 해서 부모님이나 학생 다 그저 마음을 놓지를 못하고 불안하고 초조해 계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참고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 말씀을 잘 듣고 지혜있게 처리를 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삼도고본인하기(三途苦本因何起)요  지시다생탐애정(只是多生貪愛情)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삼도(三途)—지옥, 아귀, 축생 그 삼도의 고(苦)를 받는 근본원인이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이냐?(三途苦本因何起)


지시다생탐애정(只是多生貪愛情)이다. 다못 이 다생(多生)에 탐심과 애정 때문에 삼도의 고를 받게 되는 것이다. 탐심, 애정, 이것이야말로 자기를 갖다가 지옥 구덩이로 몰아넣는 낚수밥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라고 해서 덮어 놓고 성적도 생각지 않고 좋은 학교에다가 넣으려고 하는 것도 탐심입니다.


그러한 어리석은 그 탐심과 애정은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하면 어리석은 데에서 일어나거든.

지혜롭게 관찰을 하고, 지혜롭게 판단을 하고, 지혜롭게 처리를 한다면 그러한 괴로움을 미연에 방지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지혜롭게 되는 길이 바로 이 참선(參禪)입니다.


참선을 하게 되면 첫째, 지혜의 눈을 뜨게 되거든. 지혜의 눈을 떠서 깨닫기 이전에 참선을 시작할 때부터서 벌써 지혜인이 되는 것이여.


참선을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감정적인 그러한 생각이 자연히 쉬어지기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이 쉬어지면 그것이 지혜로운 거여.


꾸정물이 따로 있고, 말간 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 찌꺼기가 가라앉으면 맑아지거든.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밤이 따로 있고, 낮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밝아지면 어두운 것은 없어지는 것이여.


불 켜버리면 방안이, 캄캄했던 방이 환해지거든. 그러면 어두운 것이 어디 병속으로 들어가거나, 두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어디로 가고 오는 것이 없는 것이여.


밝아졌다 하면은 어두운 것은 찰나에 그냥 없어지는 것이지, 밝은 것이 오니까 어두운 것이 그냥 꼼짝을 못하고 저 마루 밑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참선을 하면 바로 그 어리석은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여, 그 지혜이거든.(28분9초~45분37초)



------------------(1)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득력(得力) ; ①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 ②수행이나 어떤 기술•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번뇌(煩惱) : 망념(妄念)이라고도 하는데,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는 정신작용의 총칭이나, 이곳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 이외의 모든 생각을 말함.
*밀밀면면(密密綿綿) : 면밀(綿密)이란 말을 거듭하여 뜻을 강조한 것으로 길게 계속해서 끊어지지 않는 것。 정밀하게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는 모습.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다잽이 ; 다잡이.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딴 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칠통(桶)을 타파(打破) ;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식(識) ; 오온(五蘊)의 하나. 식별하고 판단하는 마음 작용. 인식 작용. 인식 주관.
*능엄경(楞嚴經) 변마장(辨魔障) ; 능엄경 조도분(助道分)에 있는, 수행도상에 있어 나타날 수 있는, 오음(五陰-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이 녹아 없어질 때에 나타나는 50가지 마장(魔障)을 밝혀, 수행자들이 사특한 길에 떨어지지 않게 한 부처님 가르침.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살자(殺者)•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선가귀감(용화선원刊) p64.
*도인(道人) ; 깨달은 사람.
*망신(亡身) ; 말이나 행동 잘못하여 자기 지위, 명예, 체면 따위 손상함.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 ‘비’는 구()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고통이 끊임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함.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천하없이(天下없이) 세상에 그런 예가 다시없을 정도.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팔자(八字) ; 사람의 한평생의 운수. 사주팔자에서 유래한 말로, 사람이 태어난 해와 달과 날과 시간을 간지(干支)로 나타내면 여덟 글자가 되는데, 이 속에 일생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본다.
*업(業)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2)

*관상(觀相)수명이나 운명 따위와 관련이 있다고 믿는 사람의 김새얼굴 모습또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의 운명성격수명 따위를 판단하는 .
*호식(食)사람 에게 잡아먹힘.
*사주(四柱) ;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의 네 간지(干支). 또는 이에 근거하여 사람의 길흉화복을 알아보는 방법.

*장사(壯士)기개  아주  사람.

*범접( 범할 범,접할 접) ; 가까이 다가가 함부로 건드리거나 접촉함.

*귀후지개 ; ‘귀이개(귓구멍   때, 귀지를 파내는 도구)’의 사투리.

*뼉다구 ; ‘뼈다귀’의 사투리.

*귀창 ; ‘귀청(귓구멍 안쪽에 있는 타원형의 반투명한 로, 공기의 진동을 속귀 쪽으로 전달하여 들을 수 있게 하여 준다)’의 사투리.

*족치다 ; (어떤 사람 다른 사람) 견딜 정도 몹시 괴롭히거나 다그치다.

*인자 ; ‘이제(바로 이때, 지금부터—지나간 와 단절된 느낌을 준다)’의 사투리.

*무방(無妨)하다[연결 어미 ‘-어도 함께 쓰여](사람 어찌하여도)거리낄  없이 괜찮다.

*독자(子) ; ①다른 자식 없이  하나 아들. ②형제자매 없는 사람.

*영특(英特)하다 ; (사람)남달리 똑똑하고 영리하다.

*일고(一高) ; 광주제일고등학교(光州第一高等學校). 광주일고(光州一高)로도 불리우는 호남 지역의 전통 명문 고등학교.

*쪽집게 ; ‘족집게(어떤 사실 정확하게 지적하여 내거나  알아맞히는 능력 가진 사람)’의 사투리.

*괘(卦) ; 점괘(占卦, 을 쳐서 나오는  를 풀이하여 길흉을 판단한다).

*직사(直死) ; 즉사(卽死,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음).

*실화(實話)실제로 있었던  대한 이야기.

*(게송) ‘三途苦本因何起  只是多生貪愛情’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낚수 ; ‘낚시’의 사투리.

*낚수밥 ; 낚시 미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꾸정물 ; 구정물(무엇 빨거나 씻거나 하여 더러워진 물).

*말갛다 ; ①(무엇)산뜻하게 맑고 깨끗하다. ②()맑고 생기 있다. ③(액체)진하지 않고 매우 묽다. ④(정신이나 의식)분명하고 또렷하다.

*두지 ; ‘뒤주’의 사투리.  따위의 곡식 담아 두는 세간(집안 살림 쓰는 온갖 물건) 하나. 나무 궤짝같이 만드는데,  기둥 짧은  있으며 뚜껑 절반 앞쪽  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싼또샤
법문 듣는 법2015.01.10 11:34

§(112) 법문을 옳게 듣는 길 /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 / ‘딴 생각[別念]’해서는 안됨 / 공부가 순일하게 된 때에 잘 다잡이 해야 / 칠통(漆桶) 타파(打破).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은 조사(祖師) 공안상에 절대로 따져서 알려고 한다든지, 분별심으로 짐작을 한다든지, 더듬어 들어가는 그러한 식의 참선은 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조금도 ‘딴 생각[別念]’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겁을 내지도 말고, 걱정도 내지도 말고, 좋아하지도 말고, 다못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생각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뿐인 것입니다.
**송담스님(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


 약 18분.



조실 스님의 법문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우렁찬 음성으로 최상승 법문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따지고 분별(分別)하고 그렇게 해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아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장님이 코끼리 구경한 것 같고 또 귀머거리가 음악을 감상한 것 같아서,
한 시간을 통해서 들어도 대관절 내가 무슨 얘기를 들었는가? 무슨 법문을 들었는가? 주욱 종합을 해 보아도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그러한 느낌이 들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그 뜻은 이해를 못한다 하더라도, 그 법문을 들어서 귀에만 지내가더라도 그 인연으로 해서 무량겁 업장(業障)이 소멸이 되고,

그 법문을 당장은 이해가 안 가지만 그 법문을 정성스럽게 듣고, 듣는 가운데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이뭣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자기의 본참화두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 화두를 생각 생각이 간절한 의심으로 관조해 나간다고 하면은,

오히려 그 법문 내용을 소상하게 잘 이해를 해서 ‘아하! 이런 말씀이로구나. 이런 말씀이로구나’ 이렇게 이해를 하면서 들은 사람보다도,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그 뜻을 알 수 없는 그 마음으로 화두(話頭)를 들어가는 사람이 훨씬 더 법문을 잘 들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최상승 법문을 옳게 듣는 길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떠억 들어 보임으로서 법을 전하신 ‘영산회상(靈山會上)의 거렴화(擧拈花)’
또 다자탑전에서 자리를, 누더기를 입은 제자 가섭존자에게 자리를 노나서 앉히시는 ‘다자탑전(多子塔前)의 분반좌(分半座), 또 열반(涅槃)하셔서 곽 밖으로 두 다리를 써억 내미시는 ’곽시쌍부(槨示雙趺)‘
이렇게 해서 3차례에 걸쳐서 법(法)을 전(傳)하신 법문을 하셨습니다.

영산회상에 꽃을 드는 도리나, 다자탑에서 자리를 노나 앉으신 것이나, 또 열반회상에서 곽(槨) 밖에 두 다리를 내보이시는 도리가 아무리 이론적으로 따져서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 도리'가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따져서 ‘아! 이것은 이러한 뜻이로구나’
‘영산회상에서 꽃을 드신 뜻은 이것은 바로 불교의 진여(眞如)의 체(體)를 전하시고 또 분반좌 하신 것은 용(用)을 전하시고, 곽시쌍부 하신 것은, 체와 용을 한목 전하신 것이다.’

이런 등속(等屬)으로 아무리 따져서 수긍(首肯)을 해봤자 그것은 중생의 사량심으로, 오히려 자기 자신의 깨끗한 마음을 더럽히게 하는 결과 밖에는 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물며 그것이 참다운 진리가 될 까닭은 더군다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은 조사(祖師) 공안상에 절대로 따져서 알려고 한다든지, 분별심으로 짐작을 한다든지, 더듬어 들어가는 그러한 식의 참선은 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공부를 해 나가는데 있어서 어서 깨닫기를 바란다든지, 이래가지고서는 공부를 기껏 잘해 나가다 중요한 고비에 있어서 자기의 공부를 그르치는 게 되는 것입니다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여러 가지 공안이 있지만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도 받은 한 공안에 일여(一如)하게 참구(參究)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곧 잘되어갑니다. ‘이대로 해가면 얼마 안가면은 득력(得力)을 할 수 있겠거니’ 이리 생각하고,
한 철, 두 철을 지내다보면 영 옛날보다도 훨씬 더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번뇌 망상이 더 잘 퍼일어나고 영 자리가 잡히지를 않고 이렇게 해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러한 경우라 하더라도 조금도 번뇌심을 내지 말고 심호흡을 하면서 착실히, 착실히 공부를 다져나가면 그렇게 해서 한 고비를 넘기면은 다시 또 수월하게 공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수월하게 공부가 화두가 잘 일여하게 들리고 잘되어간다 하더라도 조금도 기뻐하는 생각을 내지 말 것입니다.
기뻐하는 생각 내면 벌써 그것은 이미 화두가 아니기 때문에, 기뻐하는 그러한 번뇌심에 끌려들어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기뻐하지도 말고 또 잘 안된다고 해서 번뇌심(煩惱心)도 내지 말 것입니다. 이것이 공부를 지어나가는데 있어서 아주 요긴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 애를 써서 밀밀면면(密密綿綿)하게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공부를 다잽이를 해나가면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들려고 해도 금방 도망가고, 금방 딴 생각이 들어오고 그랬던 것이,
자꾸자꾸 해가면은 나중에는 헐려고 안 해도 화두가 떠억 들어지게 되면서 시간이 한 시간, 두 시간이 언제 지내간지 모르게 시간이 지내가고,

그때는 다리가 저린 것도 없고, 몸이 괴로운 것도 없고, 가슴이 답답한 것도 없고, 정신도 깨끗하고 자기가 지금 어디에 앉아있다고 하는 그것마저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뚱이마저도 의식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이 깨끗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싱그럽고 이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화두는 그런 가운데 너무 조용하고, 너무 깨끗하고, 너무 편안해서, 까딱하면 화두를 그때 망각(忘却)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절대로 그러한 경지에서 화두를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한 그 가운데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깨끗하게 독로(獨露)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서 잠깐이라도 화두를 놓쳐버리고 ‘아! 좋구나. 이러한 경지로서 계속해서 나갔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툭 깨닫게 해주셨으면, 이러다가 빨리 깨달았으면’ 이러한 생각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이러다가 내가 까딱하면 미치면 어찌할고’ 별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고비에서 그 천길만길 되는 길를 간신히 간신히 올라가 가지고, 발 한번 삐끗해 가지고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조금도 ‘딴 생각[別念]’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겁을 내지도 말고, 걱정도 내지도 말고, 좋아하지도 말고,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에서 정진을 하면은 옆에 사람들도 다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하! 저이가 지금 공부가 순일(純一)하게 되어가는구나’ 알게 되기 때문에 대중 가운데에 그렇게 공부가 되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입승(立繩) 스님을 비롯해서 좌우에서 서로서로 잘 보호를 해줘야 합니다.

대중 가운데에는 혹 ‘지가 공부한 척 하고 그런다’고 아주 뒤에서 수근수근하고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만은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언제 그렇게 공부가 또 순일하게 되어 갈 때가 있을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가 순일하게 되어 갈 때 주위에서 잘 보호를 해주고, 자기도 그럴 때에 아주 조심스럽게 그 공부를 잘 보호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렇게 나가면 나중에는 일어서도 화두가 고대로 있고,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고대로 있고, 똥을 눌 때도 고대로 있고,
천만 명이 우글거리는 시장 속에 들어가도 조금도 화두가 흐트러지지를 아니하고, 딴 생각을 일부러 좀 할려고 해도 딴 생각이 되지를 않고 이러한 경지에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머지않아서 칠통(漆桶)을 타파(打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그렇게 순일하게 된 때에 잘 다잡이를 해야지,
그때에 조심성 없이 또 좌우에서 방해를 친다든지 보호를 안 해가지고 그러한 경지(境地)가 깨져버리면 나중에는 1년, 2년, 3년을 애를 써도 여간해서 다시 또 그러한 경지가 돌아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여법(如法)하게 알뜰히 정진을 하면 누구라도 반드시 그러한 경지가 오는 것입니다.(처음~17분37초)


---------------------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지내가다 ; '지나가다'의 사투리.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삼처전심(三處傳心) ; 세존이 가섭(迦葉)존자에게 마음-선(禪)의 등불을 따로 전했다는 세 곳.
세 곳이란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다자탑전분반좌 多子塔前分半座)이 첫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영산회상거염화 靈山會上擧拈花)이 둘째요,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심(사라쌍수하곽시쌍부 沙羅雙樹下槨示雙趺)이 세째이다.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절반 나누어 앉으심.
다자탑(pahuputraka)은 중인도 비사리(毘舍離Vaisali)성 서북쪽에 있다。이 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어떤 장자(長者)가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아 이룬 뒤에, 그 아들 딸 육십 명이 아버지가 공부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탑을 쌓았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그 곳에서 설법하실 때에 가섭존자가 누더기를 걸치고 뒤늦게 참석하자, 여러 제자들이 그를 낮보았다。이에 부처님께서 앉으셨던 자리를 나누어 두 분이 함께 앉으셨다 한다.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심.
범어의  Grdhrakuta를 음대로 써서 기사굴산(耆闍崛山)이라 하고, 뜻으로 번역하여 영취산(靈鷲山) • 취봉(鷲峰) 또는 영산(靈山)이라고만 한다。그 산 모양이 독수리 같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그 산 위에 독수리가 많았던 탓이라고도 한다.
이 산은 중인도 마갈타(摩竭陀 Magadha)의 서울 왕사성(王舍城 Raja-grha) 동북쪽 십 리에 있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이 곳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부처님은 그 꽃송이 하나를 들어 보이니, 백만 대중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는데,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었다.
이에 부처님은 『바른 법 열반의 묘한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다』고 선언하셨다 한다.
*사라쌍수하곽시쌍부(沙羅雙樹下槨示雙趺) :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심.
부처님께서 북부 인도의 구시라(拘尸羅 Kusinagara)성 서북쪽으로 흐르는 발제하(跋提河 Ajitavati) 물가, 사라수 여덟 대가 둘씩 마주 서 있는 사이에 침대를 놓게 하고 열반에 드시니, 그 숲이 하얗게 변하였다。그리하여 학의 숲(鶴林, 鶴樹)이라고도 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몸은 금으로 만든 관에 모시고 다시 구리로 지은 덧곽에 모셔 두었는데, 먼 곳에 갔다가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7일 만에 당도한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관을 3번 돌고 3번 절하매, 관곽 속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셨다 한다.
*노나다 ; ‘나누다’의 사투리.
*등속(等屬) ; 나열한 사물과 같은 종류의 것들을 몰아서 이르는 말.
*수긍(首肯) ; 옳다고 인정함. 옳게 여김.
*조리(條理) ;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서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득소위족(得少爲足) ;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을 삼는다.
*공견(空見) ; 공(空)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그릇된 견해. 공(空)을 허무론적인 견해로 이해하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인과(因果)의 도리를 비롯한 모든 것의 존재가 부정된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득력(得力) ; ①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 ②수행이나 어떤 기술•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번뇌(煩惱) : 망념(妄念)이라고도 하는데,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는 정신작용의 총칭이나, 이곳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 이외의 모든 생각을 말함.
*밀밀면면(密密綿綿) : 면밀(綿密)이란 말을 거듭하여 뜻을 강조한 것으로 길게 계속해서 끊어지지 않는 것。 정밀하게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는 모습.
*성성적적(惺惺寂寂) ; 정신이 고요하면서도 깨끗하고 또록또록 한 상태.
*다잽이 ; 다잡이.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죔.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딴 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칠통(漆桶)을 타파(打破) ;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싼또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