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자세 호흡)2018. 5. 10. 14:23

§(578) 참선의 자세. 호흡(단전호흡) / 부정관, 수식관 / 화두를 단전에다 두고 관(觀)하라 / 반복-습관-체질화-본능 /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몸과 목숨을 바쳐야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화두를 불급불완(不急不緩)하게—너무 용을 써서 되게 몰아붙인 것도 못쓰고, 그렇다고 해서 매카리 없이 멍하니 그렇게 해서도 안 되지마는. 그래서 그런 상기병과 같은 무서운 병에 걸리지 아니하면서 정진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단전호흡을 설하시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단전호흡을 전강 조실 스님께서 처음으로 그것을 창안하신 것이 아니고, 임제종 종사(宗師)들은 단전호흡에 대한 언급을 별로 안 하셨지만, 육조 스님 밑에 조동종에서는 단전호흡을 정식으로 다 수좌(首座)들에게 권장을 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화두를 드는 것은 간절한 의심이라고 하니까 '이뭣고?'하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머리로 화두를 해서는 안된다 그말이여. 알 수 없는 의심을 갖되, 그 화두가 배꼽 밑에 단전에다 두고 화두를 관(觀)하는 거야. 이건 말로써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문제나 자꾸 스스로 해 보면 그 말을 알아들을 때가 오는 것입니다.

단전에 가 있게 하는 방법이 숨을 들어마실 때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이렇게 불어 나오는 것을 느끼면서 하니까 거기가 생각이 있게 되고, 차츰차츰차츰 내쉴 때는 배가 홀쪽한 것을 느끼면서 하니까 우리의 생각이 단전에 가서 머물게 된다 그말이여. 그 머무는 거기에서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렇게 해서 하면 단전에다가 화두를 두고 관하는 뜻이 거기서 스스로 계합을 하게 된다 그말이여.

 

**송담스님(No.578)—96년(병자년) 동안거결제 법어(96.10.15) (용578)

 

(1) 약 21분.

(2) 약 20분.

 

(1)------------------

 

초학자는 첫째, 앉는 자세—몸을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해서, 될 수 있으면 가부좌를 하면 몸을 단정히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단정하게 된다 그말이여.

한국 사람은 다리가 좀 짧아서 가부좌를 처음에 할 때에는 발목이 아프고 좀 힘이 들지만 자꾸 해 버릇하면, 처음에는 한 5분씩 하다가 나중에는 한 10분씩 하다가 15분, 차츰차츰 여러 달을 두고 익혀 나가면 그것도 인자 길이 들어서 가부좌를 할 수가 있게 됩니다마는. 그것이 가능하면 그렇게 하고.

 

도저히 가부좌를 해 가지고는 발목이 부러질 것처럼 아파서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억지로 그것을 끝까지 할려고 할 것은 없습니다. 서서히 연습을 해서 되는 방향으로 노력을 해 보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고.

정 가부좌가 안 되면 반가부좌만 해도 정진하는데 조금도 상관이 없는 일인 것입니다. 오른발을 구부려서 딱 잡아당겨서 놓고, 오른발 위에다가 왼발을 딱 올려놓거나 그렇게 해서 얼마쯤 하다가 정 다리가 저리면 다리를 또 바꾸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 허리는 쭉 등뼈를 펴되, 너무 힘을 주어 가지고 뒤로 자지바지 하니 그렇게 할 필요는 없고, 단정하되 앞으로 기울지도 말고 뒤로 너무 자지바지 하지도 말고,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단정하면서도 어깨나 목에 힘을 빼고서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자세를 갖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떠.

너무 뚝! 부릅뜨지도 말고 너무 감지도 말고 평상으로 딱 떠서 평지에서 앉았을 때 눈앞에 2m 지점이 보일 정도로 이렇게 눈을 뜨되, 2m 지점 특수한 어떤 점을 지정해 놓고 거기를 응시(凝視)해서는 안 돼.

 

어떤 사람은 '2m 지점을 보이도록 하라'는 말을 잘못 알아듣고 그 지점에다가 콩 같은 것을 하나 놓고 종일 그 콩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런 사람을 봤는데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어.

볼려면 2m 지점이 보이게 하라는 것이지, 그 지점을 응시하고 주시(注視)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고.

 

이는 지그시 물되, 너무 꽉! 물거나 위 아랫니가 떠서는 안돼. 지그시 이렇게 힘을 들이지 않고 이를 다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저 입천장 안에다 혀끝을 갖다 대도록. 그러면 혀 밑에서 침이 인자 요렇게 솟아오르는데, 쪼끔 나오면 꼴딱 생키고 쪼끔 올라오면 꼴딱 생키고 자주자주 삼키지 말고, 입안에 가뜩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뜩차거든 가만히 삼키는 거야.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법이고.

 

 

호흡을 단전호흡을 하는데, 부처님 당시부터 수식관(數息觀)이라고 하는, 참선 수행자가 그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행에 들어가는데 수식관이 대단히 요긴한 것인데.

 

어떻게 해서 부처님께서 수식관을 설하시게 되었느냐 하면은 비파사나(vipassanā)라고 신(身) · 수(受) · 심(心) · 법(法),

'이 몸뚱이[身]는 더러운 것이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그 몸에 아홉 구멍으로부터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나오고 몸안은 피와 오줌과 고름과 똥이 가득차 있고, 머지않아서 인연이 다하면은 죽어서 썩어 문드러진다. 그런 이 몸뚱이는 하여간 더러운 똥 주머니다' 이러한 생각을 항상 그렇게 관(觀)하며.

 

밖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수(受), 받아들이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눈으로 무엇을 받아들이거나, 귀로 받아들이거나, 코나 혀로 받아들이거나, 몸뚱이로 받아들이거나, 생각으로 받아들이거나 밖에서 무엇만 받아들였다 하면은 그것이 결국은 차츰차츰 변해 가지고 고통으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이다.

 

셋째에 가서는 우리의 마음[心]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하루에면 수천수만....  일(一) 호흡지간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것이 모두 무상하다 그말이여.

아침에 먹었던 생각이 벌써 밤에는 딴 생각,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할려고 마음을 먹어도 금방 그 생각이 변해 버리고. 이것을 누구를 줄려고 마음먹었다 해도 돌아서면서 마음이 변해 가지고 줄 생각이 없어지고. 우리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시시때때로 변해서 무상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내 몸[身]과 받아들이는 것[受]과 우리의 마음[心]을 제외한 것, 모든 것이 바로 법(法)인데 그것을 '제법(諸法)이라, 모든 법이다' 그러거든.

모든 법은 무아(無我)다. '내'라고 하는 자성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몸은 더러운 것이요, 받아들이는 것은 괴로운 것이요, 우리의 마음은 무상한 것이요, 그 밖에 모든 법은 다 무아 한 것이다.

 

그것을 제자들한테 설한 가운데에 유독(唯獨) 육체에 대한 집착심을 갖고 또 이성 간에 이쁘게 생긴 사람, 마음에 든 사람에 애착심을 가지고 그러니까,

일단은 '이 몸뚱이라 하는 것은 내 몸이나 다른 사람 몸이나 할 것 없이 다 똥 주머니요, 피고름 주머니요, 다 더러운 것이다'하는 부정관(不淨觀)을 가리켜서 그것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이 몸뚱이가 정말 싫어지고.

 

이 몸뚱이를 끌고다니는 자체가 이 몸뚱이를 먹여야 하고, 입혀야 하고, 이 몸뚱이를 편안하게 해 주어야 하고 그래 봤자 결국은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밖에는 안되고. 이 몸뚱이가 싫어지고 아주 원수같이 느껴져서 이를 마치 뱀을 목에다가 칭칭 감고 다니는 것처럼 이 몸뚱이가 싫어지게 되었다 그말이여.

 

그래서 녹장외도(鹿杖外道)한테 가 가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바리때하고, 요 입는 가사(袈裟)하고 밖에 없는데 이것을 당신한테 줄 테니 제발 자비로써 나를 좀 죽여 달라"고,

이래가지고 몽둥이로 쳐서, 맞아서 죽은 사람 또 목 매달아서 자살한 사람, 물에 빠져서 죽은 사람, 그래서 60명 가량이 한 여름에 죽었습니다.

 

포살(布薩) 날을 기해서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기 위해서 대중 종을 쳐서 모여 놓고 보니 60명이 비었으니 "어떻게 대중이 이렇게 많이 줄었느냐?" 아란존자 보고 물으니까,

"그렇게 해서 부정관(不淨觀)을 하다가 이렇게 60명이 자살하고 녹장 비구한테 자원을 해 가지고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 얘기를 여쭈니까, 부처님께서는 "그렇다면은 수식관(數息觀)을 해라"

 

수식관이 차츰 발달한 것이 지금의 단전호흡(丹田呼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수식관은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조용하니 내쉬고 '하나',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또 조용하니 내쉬고 '둘',

이렇게 해서 열까지 세어 올라갔다가 열에서 그 다음에는 열하나로 가지 말고 아홉, 여덟, 일곱... 해서 까꾸로 해서 하나로 내려오고 해서 하루 종일 호흡을 세는 거여.

 

그것이 잘되면은 하나에서 스물까지 올라갔다가 열아홉, 열여덟 내려오고 그것이 잘되면 서른, 마흔 해서 백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도록,

그런 동안에 중간에 망상이 일어나 가지고 '몇까지 세었는가?' 잊어버리면 다시 다 없었던 걸로 하고 다시 하나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이렇게 하기를 몇 날 며칠을—한 달, 두 달, 한철 내 하다보면 그것이 차츰차츰 되어간다 그말이여.

 

사실 여러분도 한번 해 보실 만한 일인데, 초학자들은 해 볼 만한 일인데,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것이 수식관인데, 지금 용화사에서 초학자에게 수식관부터 하라고 그렇게 간곡히 권(勸)은 하고 있지 않으나,

워낙 망상이 심하고 정진이 잘 안되고 건강도 안 좋고 그러면 수식관을 한번 자기가 몇까지 세었다가 또 내려올 수가 있는가. 그것을 자기가 얼마만큼 정신 집중력이 있고 되어가는 것을 시험 삼아 한번 해 보시길 바라는데.

 

전강 조실 스님 때부터서 단전호흡을 권하게 된 동기는 여러분께서도 조실 스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들으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첫 철에 너무 용을 쓰고 용기를 내서 의심을 하다가 결국은 상기(上氣)가 복받쳐 올라서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고 뒤통수가 툭 툭 터져서 곪아터지고, 목구멍으로부터서는 선지피가 막 쿨쿨 넘어오고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공부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니까, 직지사에서 제산 스님께서 "그렇게 내가 시킨 대로 안 하고 네 멋대로 해 가지고 병이 나면 다 내가 너를 공부를 잘못 가르켜 가지고 그랬다고 할 것 아니냐"

 

제산 스님께서는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을 관(觀)하라.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관(觀)해라' 그렇게 참선하는 법을 일러 주셨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조실 스님께서 『서장(書狀)』을 보나, 『선요(禪要)』를 보나 보면 그렇게 공부하라는 법은 없고.

 

조주 무자(無字)를 관하시는데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라는 것을 너무 용을 쓰고 하시다가 결국은 상기병(上氣病)이 나 가지고 그렇게 하시다, 결국은 그러한 병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계속해 가지고 깨달음을 얻으시긴 얻었지만,

그 상기병으로 해서 피가 거꾸로 넘어온 그걸로 해서 참 여러 해 동안을 고생을 하시고, 만행을 하신 그런 과거를 생각하셔서 우리 후학(後學)들에게는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용을 쓰고 그렇게 하지 말고 급(急)하고 완(緩)한 것을 득기중(得其中)이여. 그 중(中)을 얻어야 한다.

 

불급불완(不急不緩)하게—너무 용을 써서 되게 몰아붙인 것도, 과도하게 몰아진 것도 못쓰고, 그렇다고 해서 매카리 없이 멍하니 그렇게 해서도 안 되지마는.

그래서 그러한 병을 미연에 방지하고 그런 상기병과 같은 무서운 병에 걸리지 아니하면서 정진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단전호흡을 설하시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단전호흡을 전강 조실 스님께서 처음으로 그것을 창안하신 것이 아니고, 임제종(臨濟宗) 종사(宗師)들은 단전호흡에 대한 언급을 별로 안 하셨지만, 육조 스님 밑에 청원행사(靑原行思) 선사라고 조동종(曹洞宗)의 개종이신, 그 조동종에서는 단전호흡을 정식으로 다 수좌(首座)들에게 권장을 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그래서 특히 이 간화선(看話禪)을 하는,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해서 수행해 나가는 간화선에 있어서 폐단이 너무 간절하게 한답시고 용을 쓰고 의심을 일으키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와 같은, 약으로는 낫을 수 없는 그런 무서운 장애에 부닥치게 되기 때문에 초학자일 때부터 단전호흡을 잘 기본으로 익혀 나가는데,

 

처음에는 준비 호흡.

준비 호흡은 가뜩 가슴으로 들어마셨다가 잠시 머꾸었다가 입으로 '후-'하고 다 내뿜어. 또 가뜩 들어마셨다가 잠시 머물렀다 내쉬고 하기를 두서너 번 그렇게 해 가지고 허파 안에 있는 묵은 공기를 다 쓸어버리고.

 

그리고서 인자 본 호흡으로 들어가는데, 조용히 들어마시되 가슴으로 들어마시는 게 아니라 아랫배 단전(丹田)이 약간 볼록하도록 들어마셨다가 잠시 쉬었다가 조용하니 코로 내쉬되, 볼록해졌던 배가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이렇게 해 나가는데.

 

그 호흡을 수식관처럼 '하나, 둘' 셀 필요는 없고, 계속 그렇게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드는데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길게 이렇게.

다 내쉬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그러는데,

 

이것도 잘못하면 내쉬는 숨만 있고 들어마시지를 못해. 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콱! 맥혀 가지고 영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그런 사람이 있다 그말이여.

그게, 이 단전호흡을 하는데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다 잘되는 게 아니라 어쩌다 하나씩은 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호흡이 잘되지를 않고, 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굉장히 그것 때문에 고민을 호소하는 사람을 가끔 보게 되는데, 그러헐 때는 어떻게 허느냐?

 

숨을 들어마실 때는 아랫배를 볼록이 하고 내쉴 때는 배를 홀쪽이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나, 가슴이 답답해 가지고, 체해 가지고 할 때는 그 반대로 하는 거여.

숨을 들어마실 때는 배를 홀쪽이 하고, 숨을 내쉴 때는 배를 볼록하게 만들어. 반대로 하는 거여. 그렇게 하다 보면 이 가슴 답답한 것이 차츰차츰 없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가슴 답답한 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는 호흡법과 배가 볼록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것을 반대로 얼마 동안 해도 상관이 없고, 그렇게 해서 편안하면 상당히 오래까지도 그렇게 해도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16분32초~37분22초)

 

 

 

 

(2)------------------

 

그러나 답답한 것이 없는 사람은 들어마실 때는 아랫배가 볼록하게 하되 너무 가뜩 들어마셔 가지고 배가 터질 때까지 그렇게 잔뜩 들어마셔 가지고 얼굴이 벌게지도록 참고 그렇게 무리하게 해서는 안 돼.

들어마시되, 준비 호흡 3번 할 때에는 가뜩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다가 완전히 내뿜도록 다 내뿜고, 3번을 준비 호흡은 그렇게 하지만, 본 호흡으로 들어가서는 팔부(八部)쯤만 들어마시는 거야.

 

팔부쯤만 들어마셨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는 게 아니고, 한 3~4초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내쉬되 또 완전히 다 내뿜으려 하질 말고 편안할 만큼만 내쉬는 거여.

10분 20분 30분을 해도 숨이 가쁘거나 힘들게 하는 것은 그건 잘못한 거고, 한 시간 두 시간을 해도 조금도 무리가 없도록 자연스럽게 해야 해.

 

자기의 호흡량에 맞추어서, 자기 체질에 맞추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해야 되지 그것을 무리하게 하니까 꽉 체해 가지고, 막혀 가지고 숨도 못 쉬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거야.

단전호흡을 하기는 하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해야지, 무리하게 하면 그런 부작용이 일어나서 고생을 하는 수가 있으니까 그 점을 유의를 하기를 바라고.

 

 

화두를 드는 것은 간절한 의심이라고 하니까 '이뭣고?'하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머리로 화두를 해서는 안된다 그말이여.

알 수 없는 의심을 갖되, 그 화두가 배꼽 밑에 단전에다 두고 화두를 관(觀)하는 거야. 이건 말로써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문제나 자꾸 스스로 해 보면 그 말을 알아들을 때가 오는 것입니다.

 

들어마실 때는 배가 볼록하게 하고, 내쉴 때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한 것을 느끼면서 하니까 우리의 생각이 단전에 가서 자연히 거기에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하는 그 의심이 단전에 가 있게 된다 그말이여.

 

단전에 가 있게 하는 방법이 숨을 들어마실 때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이렇게 불어 나오는 것을 느끼면서 하니까 거기가 생각이 있게 되고, 차츰차츰차츰 내쉴 때는 배가 홀쪽한 것을 느끼면서 하니까 우리의 생각이 단전에 가서 머물게 된다 그말이여.

 

그 머무는 거기에서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렇게 해서 하면 단전에다가 화두를 두고 관하는 뜻이 거기서 스스로 계합(契合)을 하게 된다 그말이여.

 

그렇게 해 나가면 상기병(上氣病)이 일어날라야 일어날 수가 없어.

단전호흡을 안 하고 이 머리로만 '이뭣고? 이뭣고?'하니까 자연히 우리의 기운이 머리로 올라가 가지고 나중에는 머리가 뽀개지려고 그러고, 뒤통수가 뜨끈뜨끈하니 열이 오르고 나중에는 그렇게 해서 상기병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이 화두는 그렇게 초학자는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시작은 하되, 차츰차츰 화두를 드는 요령을 터득을 하게 되면 숨 쉴 때마다 화두를 새로 들 필요는 없어.

화두는 딱 단전에다 두고 알 수 없는 의심을 관하되, 숨이 다 나가면 제절로 숨을 쉬고 숨은 몇번을 쉬어도 상관이 없으되, 화두가 없어지거나 딴 생각[別念]이 들어왔을 때는 그때 화두를 한 번씩 챙기는 거여.

 

사람에 따라서는 처음에는 숨을 내쉴 때마다 들어야 하겠지만 나중에는 서너 번 할 때까지도 화두가 고대로 있으면 새로 들을 필요가 없고, 한 시간 동안에도 화두가 고대로 있으면 새로 화두를 들을 필요가 없어.

 

물론 누구를 막론하고 화두를 들고 '이뭣고?'하고 있는 동안에도 수없는 생각이 들랑날랑하지마는, 귓전에 봄바람 스쳐가듯이 스쳐가거나 말거나 내비둬 버리고 자기 할 일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가벼운 생각들이 왔다갔다한 것은 그건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내버려둬 버리고는 자기는 가끔 한 번씩 화두를 챙기고 자꾸 하다보면, 그것을 반복해서 하면은 습관이 되고, 습관이 나중에는 체질화가 되어 가지고,

일구월심(日久月深)해서, 날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오래오래 하다보면 그것이 순숙(純熟)이 되어 가지고 화두를 일부러 들지 않아도 항상 들어져 갖고 있고, 놓쳤다가도 금방 척! 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우리는 본능(本能)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식(食) 본능이니, 색(色) 본능이니, 귀소(歸巢) 본능이니 그 본능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본능이 어디서 생기냐 하면은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반복해서 하는 데에서 본능이 생기는 것입니다.

 

미충(微蟲), 곤충, 동물, 사람 할 것 없이 남녀 간에 성(性) 문제는 누구한테 배우지 않아도 불구자나 되면 몰라도 성한 사람이면 배우지 안 해도 다 알고 있는 거고.

애기가 막 태어나면 젖 빠는 법을 가르키지 않아도 눈도 뜨지 않은 상태에서 젖꼭지를 찾고, 대주면 쭉쭉쭉쭉 빠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량겁으로부터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그래서 화두도 자꾸 반복해서 하면은 나중에는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져. 뭘 봐도 화두요, 들어도 화두요, 잠깐 놓쳤다가도 금방 탁! 들어지게 된다 그말이여.

들지 안 해도 제절로 들어지고, 수없는 망상(妄想)이 드나들지마는 드나들거나 말거나 그것 억지로 떼어낼라 하지도 말고, 망상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성화를 내고 진심(瞋心)을 내고 번뇌심을 낼 필요도 없어.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화두만 떡떡 챙겨 나간다 그말이여.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점심 먹을 때까지, 점심 먹으면서도 떠억 화두를 들고 한 숟가락 한 숟가락을 넣고는 오십 번, 백 번 요렇게 씹으면서도 화두가 고대로 있도록 훈련을 쌓아나가라 그말이여.

양치질 할 때도 화두를 들고, 화장실에 가서도 화두를 하고, 목욕탕에 가서도 화두를 하고, 빨래를 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오고가면서도 화두를 하고.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이것뿐이여.

 

그밖의 모든 일은 오직 이 한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고, 한 일을 위해서 그런 것이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지, 이 한 일 말고는 우리는 할 일이 없어.

이 한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청춘도 버렸고, 고향도 버렸고, 부모형제도 다 버리고, 세상의 모든 명예와 권리와 지위 부귀도 다 버린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니 출가 아니한 세속에서 몸을 담고 사는 거사님들이나 보살님네들도 세속일 하면서도 이것을 할려고 그 애를 쓴 분들도 많이 계시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떠한 동기에서건 간에 출가한 비구 · 비구니 · 사미 · 사미니가 됐다 그말이여.

그렇다면은 정말 이 법이 있는 줄을 몰랐을 때는 몰라도 이 정법(正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있는 줄을 안 이상에는 정말 이 한 일을 위해서 전력투구를 한번 해봐야 할 일이다 그말이여.

 

우리가 밥이 없어서 먹을려고 돈을 벌 필요가 있습니까? 얼어 죽을까봐서 옷을, 좋은 옷을 해 입기 위해서 돈을 벌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기 위해서 명예와 권리와 지위 부귀를, 그런 데에 눈을 뜰 리가 있느냐 그말이여.

 

출가한 스님네로서 특히 선방(禪房)에 나와 걸망 지고 나온 수좌 스님네로서 선배, 후배를 눈여겨봐야 합니다. 정말 저 스님네는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정말 몸과 목숨을 거기에다가 바치고 계신가?

 

그리고 어느 선방에 가든지 어느 스님이 과연 이 일대사를 위해서 몸과 목숨을 걸고 정진하고 계신 분이 누군가를 한번 찾아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 회중(會中) 가운데 그런 분이 한 분 또는 두 분이 계시면은 그분을 보고 자기의 거울을 삼고 자기를 한번 돌아봐야 합니다. '나도 과연 저렇게 할 수가 있는가? 저렇게 하고 있는가?'

 

그렇게 하고 있지 아니하면 당장 그때부터서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에 채찍을 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해야 선배들도 정신을 차리게 되고, 후배들을 위해서 말과 행동과 마음가짐을 단속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선배들은 후배들을 위해서 자기를 단속하고, 후배들은 선배들을 보고 거울삼아서 자기를 반성하고, 이렇게 해서 그래서 선방이란 데가 연세가 많고 법납(法臘)이 높은 선배 스님과 금방 출가한 후배들이 함께 모여서 정진하는 데에 큰 뜻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병자년 동안거를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을 믿고, 정진하려고 하는 도반(道伴)들이 이렇게 많이 운집(雲集)을 하셨습니다.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이런 말을 들을 필요가 없을 만큼 철저하게 수행하시는 여러 도반들이 많이 계신 줄 알지마는, 노바심절(老婆心切) 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다시 말씀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백일기도 입재식도 겸한 그런 법요식이니,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신남신녀 여러분들 또 용화선원이나 다른 선원에 방부를 들인 거사님이나 보살님네들은 정진에 있어서는 비록 속가에 몸을 담아 있지마는, 정법을 믿고 정진하는 마당에서는 꼭 스님네만 못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더 백배(百倍), 천배 더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해 가지고 더 열심히 하셔서 정진력을 얻고, 대도(大道)를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백일기도 동참하시고 결제에 참석을 못 하신 분은 댁에서 일하면서 앉아서나 서서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상, 그리고 조실 스님 녹음 테이프(tape)를 구해서 시간 나는 대로 틀고 듣고, 들으면서 정진하고 일도 하고 하신다면 바로 가정이 선방이 될 것입니다.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생사 진로(塵勞)를 멀리 벗어나는 일이 이 보통 일이 아니어.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꽉! 승두(繩頭)를 잡아서, 승두는 우리의 입지요. 우리의 본참 화두(本參話頭)라고 해석을 해도 좋을 것입니다. 화두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어나가라.

 

왜 꽉 잡아야 하냐 하면은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열때(열쇠)가 바로 이 화두 공안이기 때문에 그놈을 놓치지 않도록 잡드리를 잘해야 한다 그말이거든.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번 뒤쳐서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을까 보냐.

 

이 말은 겨울에 되게 강추위를 한 뒤에 매화가 피어야 그 향취가 진동하고, 겨울에 이상난동(異常暖冬)으로 겨울이 춥지를 못하고 뜨뜻하면 논과 밭두렁에 벌레만 안 죽을 뿐만 아니라 매화꽃 향기도, 피기는 일찌감치 근사하게 피지만 향내가 하나도 없는 거여.

 

정진도 아까 상기병을 조심하고 몸에 건강을 유지하면서 단전호흡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기는 했지만 행여나 상기병 올까봐, 행여나 병 날까봐 미리 겁을 내가지고 공부를 하는 건지, 마는 건지 그저 방일(放逸) 속에서 그럭저럭 해 가지고는 정말 이 문제는 해결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게 용을 쓰지 말라는 것이지, 얼마든지 가행정진(加行精進)도 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바탕 뒤쳐서 뼛골에 사무치지 않을 것 같으면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오.

 

이 게송(偈頌)은 황벽 선사(黃檗禪師)가 우리 후학들을 위해서 날마다 이것을 좌우명(座右銘)을 삼아서 정진하도록 이 게송을 남겨 주신 것입니다.(37분22초~57분34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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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응시(凝視 엉길 응/보일 시) ; ①시선을 한곳으로 모아 집중해서 뚫어지게 바라봄. ②어떤 일이나 현상에 대하여 깊이 살핌.

*주시(注視 물을 대다·마음을 쏟음 주/볼 시) ; ①어떤 일에 정신을 모아 자세히 살핌. ②어떤 목표물을 주의깊게 잘 살펴봄.

*수식관(數息觀) ; 출입하는 숨을 세어서 마음을 통일하는 것. 그것에 의해 마음의 산란을 막음. 호흡을 세어서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행법.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부정관(不淨觀) ; 몸이 청정하지 못한 것을 관찰하는 것. 초기불교에서부터 강조되어 온 수행법으로, 특히 탐욕이라는 번뇌를 물리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몸의 더러움을 관찰하여 몸에 대한 싫어하는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탐욕을 없에게 한다. 부정상(不淨想)이라고도 한다.

번뇌를 제거하기 위한 다섯 가지 수행법[五停心觀] 중 하나로 첫 번째인 부정관은 탐욕, 두 번째인 자비관(慈悲觀)은 분노, 세 번째인 연기관(緣起觀)은 어리석음, 네 번째인 계분별관(界分別觀)은 아집(我執), 다섯 번째인 수식관(數息觀)은 산란한 마음을 대치하기 위해 닦는다. 또한 사념처(四念處) 중 신념처(身念處)의 여러 가지 수행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녹장외도(鹿杖外道) ; 녹장(鹿杖) · 녹장사문(鹿杖沙門) · 녹장범지(鹿杖梵志) · 물력가난제(勿力伽難提) · 미린전타라(彌隣陀羅) · 녹난제(鹿難提)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교설한 부정관(不淨觀)을 잘못 이해한 비구들이 세상에 대해 싫어하고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내어 녹장에게 찾아와서 목숨을 끊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그 대가로 의발(衣鉢, 가사와 발우)을 주겠다고 하는 말에 욕심이 난 녹장이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살해하였다. 비구를 죽인 칼을 씻으러 강에 갔던 녹장은 천마(天魔)로부터 해탈하지 못한 이를 해탈하게 한 훌륭한 일을 해냈다고 하는 칭찬을 받자 더 큰 공덕을 얻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비구들을 찾아다니며 해탈시켜 주겠다고 하였고, 많은 비구들이 그에게 요청하여 모두 60여 명을 살해하였다.

부처님께서 이 사실을 들어서 아시고 대중을 모아 놓은 후,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 入出息念 : 數息觀)을 설법하였다. 그리고 살생은 어떠한 경우에도 죄가 된다는 것을 교설하고 4바라이(四波羅夷)의 제3에 해당하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제정하였다.

*바리때 ; 절에서 쓰는 스님의 공양(식사) 그릇. 나무나 놋쇠 따위로 대접처럼 만드는데, 나무에는 안팎에 칠(漆)을 한다. 발우(鉢盂)ㆍ발우대ㆍ응기(應器)ㆍ응량기(應量器)라고도 한다.

응량기(應量器)란 법에 응하는 또는 1명의 식량에 마땅한 그릇이니 먹을 만큼의 분량을 담는 그릇이고, 또 남의 공양을 받기에 마땅한 수행과 덕을 갖춘 성현(聖賢)이 사용하는 그릇이란 뜻이다.

*가사(袈裟) : 잡색(雜色) • 염색(染色) 곧 순색이 아닌 옷을 말한다。인도는 더운 곳이므로 속인(俗人)들은 모두 흰 옷을 입는데, 출가한 이는 그 옷을 달리하기 위하여 염색하되 검박한 빛으로 하게 되었다.

또한 품질이 좋은 새 옷감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이것 저것을 주워 모아서 누더기같이 만들었는데, 크고 작은 세 가지(三衣)가 있어서, 다섯 폭으로 된 것(五條)은 일할 때에 입고, 일곱 폭으로 된 것(七條)은 보통 때에 입고, 아홉 폭(九條)으로부터 스물 다섯 폭(二十五條)까지는 법회와 예식에 입게 된다. 그러므로 인도의 승려들은 이 세 가지밖에 다른 옷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가 기후 풍토와 인정 풍속이 같지 아니한 여러 지방에 전파되면서, 가사의 빛도 황색 또는 적색의 보기 좋은 빛으로 변하게 되고, 바탕도 비단으로 하게까지 되었다。그 모양도 온갖 복덕이 이 법복(法服)으로 말미암아 심어지고 성숙(成熟)되는 것이라 하여, 복을 심는 밭(福田)을 상징(象徵)해서 규모가 반듯하고 법다운 밭두렁과 같은 것으로 하게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불교를 신앙하는 여러 나라와 그 종파에 따라 모양도 달리 한다.

또한 북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추운 곳이기 때문에, 보통 입는 의복 위에 장삼(長衫)을 입고, 그 위에 다시 가사를 입게 되므로, 가사와 장삼이 함께 법복이 된다.

*포살(布薩) ; 산스크리트어 poṣadha, 산스크리트어 upavāsa, 산스크리트어 upavasatha, 팔리어 uposatha의 음사. 단식(斷食)·정주(淨住)·선숙(善宿)·근주(近住)·장정(長淨)이라 번역.

출가자들은 음력 매월 15일과 29일(또는 30일)에 한곳에 모여 계율의 조목을 독송하면서 그 동안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고,

재가(在家)의 신도는 육재일(六齋日) 곧 음력 매월 8·14·15·23·29·30일에 하루 낮 하룻밤 동안 팔재계(八齋戒)를 지키는 일.  포사타(布沙陀,哺沙陀), 포쇄타(褒灑陀)라고도 쓴다.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대혜서(大慧書)』·『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총 62장(狀)의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글).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할 때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주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을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역설하였다.

*선요(禪要) ; 『선요』는 중국 송대 말기에서 원대 초기의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의 법어집으로 대중과 개인을 위한 법문과 편지글 및 스님 자신의 수행과정을 직접 말씀한 편지글을 포함해 29단락의 법어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참선 수행인이 생사 일대사(生死 一大事)의 해결을 위하여 간절하게 화두 참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熱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매카리 ; 매가리. 맥아리. 맥(脈 기운이나 힘)을 속되게 이르는 말.

*임제종(臨濟宗) ; 중국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이다.

임제종은 북방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송대(宋代)에 석상 초원(石霜楚圓) 문하에서 양기 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와 황룡 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가 나와, 양기파는 성행했으나 황룡파는 얼마 안 가 쇠퇴함.

양기파 문하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화두(話頭)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하여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그의 선풍(禪風)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육조, 청원행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조동종(曹洞宗) ; 중국의 선종은 달마(達磨)로부터 시작하여 당나라 때의 6조(六祖) 혜능(慧能)에 이르러 크게 성했다. 조동종은 이 혜능 문하인 청원행사(靑原行思)의 계통으로부터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와 그의 제자 조산 본적(曹山本寂, 839-901)에 의해 형성된 종파이다.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은 자신이 본래 부처의 청정한 성품을 갖추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묵묵히 좌선만 하면 저절로 그 청정한 성품이 드러난다는 묵조선(默照禪)을 선양하였다.

 

이 이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자세하지 않으나, 법안 문익(法眼文益)선사의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에 있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일 것이다.

「동」은 동산양개(洞山良价)의 동이겠지만, 「조」는 동산의 제자 조산 본적(曹山本寂)이 그 종지를 크게 밝혀서 완성한 때문이라 하는 말도 있다. 중국의 문법에 선후와 시종을 거꾸로 붙이는 전례가 아주 없는 바도 아니지만 제자의 이름을 스승의 이름 위에 놓은 것이 당연한 경우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송나라 이후에는 조계산(曹溪山)의 「조」로써 육조의 바른 갈래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왔다. 또한 조산 본적의 조산도 조계산을 사모하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 것이다. 그 가풍은 정편 오위(正偏五位)를 세워서 아주 세밀하고 말과 행실이 서로 일치하고, 이치와 일이 무르녹게 합하여, 본래면목으로써 종지(宗旨)를 삼는다.

일본의 조동종은 도원(道元, 1200-1253)이 1223년 송나라에 들어가 중국 조동종의 선승인 여정(如淨)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계승하였다. 도원 선사는 1227년 귀국하여 일본에 조동종을 전파하였다.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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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부(八部)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5분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5분57초)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딴 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순숙(純熟 순수할·온전할 순/익을 숙) ; 완전히 익음.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걸망(乞網 빌다·구걸하다 걸/그물·싸다 망) ; 망태기처럼 물건을 담아서 등에 질 수 있도록 만든 자루 모양의 큰 주머니(바랑). 또는 동냥할 때 매고 다니는 베낭(배낭背囊)을 말한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회중(會中) ; 설법의 자리에 모인 사람들. 수행자의 집단.

*법납(法臘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스님의 나이·승납 납) ; 법세(法歲), 계랍(戒臘), 하랍(夏臘)이라고도 한다.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비구, 비구니가 되고 부터의 햇수를 말한다.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노바심절(老婆心切) ; 노파(老婆)가 자식·손자를 애지중지 하듯이, 스승이 수행자에게 나타내는 자비심으로 지극히 친절(親切)하다는 뜻.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녹음 테이프(tape) ; 카세트(cassette)라고 하는 녹음기에 간편하게 장착하여 녹음을 하거나 녹음된 것을 재생하는 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 : 전용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 있는 자기 테이프)를 말한다.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번뇌(煩惱). 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승두(繩頭) : 승(繩)은 목수가 쓰는 직선을 긋는 노끈이고 두(頭)는 어조사다。 불조의 계법(戒法) 규칙. 화두.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방일(放逸 놓을 방/제멋대로 일) ; 거리낌없이 제멋대로 마음 놓고 지냄.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황벽선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좌우명(座右銘) ; 늘 자리 옆에 갖추어 두고 생활의 지침으로 삼는 말이나 문구.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