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삼요)2015.05.14 14:42

§(119) 신심, 분심, 의심(삼요) / 참선 공부는 승속(僧俗)이 없다 / 진실한 포교(布敎)란? / (게송)유안석인제하루~.

신심만 철저하다면 반드시 분심이 있을 것이요, 분심(憤心)이 있는 곳에 어찌 대의정이 일어나지 아니 할 수가 있습니까?
참다운 신심은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만 하면 결정코 금생에 이 몸속에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을 가뜩 담아 있는 채 견성성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대신심이요, 참다운 바른 신심인 것입니다.
이 공부는 어떠한 이유, 어떠한 핑계도 여기에는 닿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어떠한 일이라 하더라도 죽음보다는 덜 급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누구도 막아줄 수 없고, 대신(代身)할 수 없고, 자기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한 사람이라도 참되게 정법을 믿고 참되게 내 마음을 닦아감으로 해서,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이 순화가 되고 그 사람의 행동에서 보살도의 향내가 밖으로 풍겨나가서 많은 사람에 무언중 감화를 줄 수 있다면 이러한 포교야말로 진실한 포교요, 진리에 적합한 포교요,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이 되는 포교라고 생각이 됩니다.
**송담스님(No.119)—80년 1월 관음재일 법어(80.01.24)


약22분.



깨달음은 이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여법(如法)하게 거각(擧却)하고 정진을 함으로써만이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억울할 때나 우리의 마음에서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감정이 일어나건,
그 생각, 그 감정 하나하나를 헛되이 놔 보내지 말고 바로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순박하게, 이렇게 진실하게, 이렇게 바보처럼 한 생각 한 생각을 다져 나간다면 결정코 우리는 생사를 해탈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철저한 믿음이 서야 하고, 철저한 의심이 있는 곳에 큰 분심이 일어나고, 철저한 믿음과 큰 분심이 있는 곳에 타성일편(打成一片) 하는 대의정이 돈발(頓發)하는 것입니다.
대의정(大疑情)은 오직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의 밑바탕 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심만 철저하다면 반드시 분심이 있을 것이요, 분심(憤心)이 있는 곳에 어찌 대의정이 일어나지 아니 할 수가 있습니까?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선방에 살아도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하지 아니 한다면 10년 20년을 선방에 지낸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돈과 쌀을 쌓아 가지고 50년 60년을 절을 왕래하고 선방을 드나든다 하더라도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정(大疑情)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점심밥 싸 가지고 경치 좋은 관광지 왔다갔다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철저한 신심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
말세(末世)에 태어났고, 못나게 태어났고, 무식하게 태어났고, 여자로 태어났을망정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이며,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나도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대신심(大信心)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심이 있다. 신심이 있다’하면 절에 가서 절을 많이 하고, 불공(佛供)을 자주 가고 그러면은 그것을 ‘신심이 있다’하고 혹 생각하실 분이 있을런지 모릅니다마는 그것도 일종의 신심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신심은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만 하면 결정코 금생에 이 몸속에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을 가뜩 담아 있는 채 견성성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대신심이요, 참다운 바른 신심인 것입니다.

이 신심이 있다면 분심(憤心)이 일어날 수밖에는 없습니다.

왜 나와 불보살과 조금도 차등이 없는 똑같은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과거의 성현(聖賢)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하고 진리를 깨달아서 대성현이 되었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오늘날까지 깨닫지를 못하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가? 오늘날까지 왜 깜깜한 칠통(漆桶)으로 몸부림치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대분심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촌이나 일가가 잘되면 거기서는 분(憤)이 나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이 시뻘겋게 시기와 질투를 할 줄 알면서,
어째서 과거의 모든 성현들은 대도를 성취하셨는데 나는 오늘날까지 칠통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육도윤회 속에 개미 쳇바퀴 돌듯이 돌면서 몸부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분심이 일어나지 아니 한다고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대신심과 대분심이 있는 곳에는 저절로 화두가 들지 아니해도 들어질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억울한 욕 한마디를 하면 그 말이 부애가 나고 억울하고 분이 나서 핏대를 세우고, 혈압이 올라서 밥도 먹기 싫고, 잠도 자기 싫고, 당장 쫓아가서 따지고 요절을 낼랴고 펄펄 뛰면서,
하루 이틀이 지나도 그 분이 풀리지 아니하고, 한 달 두 달이 지내도 그 억울한 분이 풀리지를 아니하고, 10년 20년이 되고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소리는 잊지 못하겠다고 치를 떨 줄 알면서,

어째서 자기의 문제, 가장 급하고 요긴하고 중대한 문제, 자기의 생사(生死)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한만(汗漫)히 남의 일처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하루하루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심지어는 듣기는 듣지만 ‘저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저건 스님네나 하고, 늙어서 다 가정일 끝난 다음에 선방에 갔을 때 그때 조금 해 보리라’ 이러한 생각을 하고,
‘남편 때문에 못 한다, 아들딸 때문에 못 한다, 집안 살림 때문에 못 한다’ 이렇게 핑계를 하고 또 ‘몸이 아파서 못 한다’ 이러한 등등 갖은 핑계를 대 가지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냅니다.

이래 가지고 그럭저럭 보내다가 한 해 두 해가 가고, 병이 나고 허리가 꼬부라지고 혈압이 올라가고 그때 가서는 ‘아차!’해 봤자 이미 그때는 때가 늦은 것입니다.

이 공부는 어떠한 이유, 어떠한 핑계도 여기에는 닿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어떠한 일이라 하더라도 죽음보다는 덜 급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누구도 막아줄 수 없고, 대신(代身)할 수 없고, 자기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대사를 앞에 두고 어떠한 이유를 대 가지고 뒤로 미루고 그럭저럭 지낸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하기가 그지없는 사람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물론 출가한 스님네는 오직 이 문제만을 위해서 부모와 형제와 가정과 고향을 버렸고, 청춘을 버렸고, 인생을 뚤뚤 뭉쳐서 오직 이 한 일만을 위해서 다 바쳤습니다.
그래서 물론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정진들을 하고 계시지만 이 문제는 꼭 스님네만 해야 하고 신도는 그럭저럭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차라리 스님들은 부양가족(扶養家族)도 없고, 돈을 벌어야 할 까닭도 없고 해서 자나깨나 ‘이뭣고?’니까 드문드문 한 번씩 해도 공부가 어느 정도 되어 가겠지만,
마을에 계신, 세속에 계신 여러분들은 스님네보다도 몇십 배 정신을 챙기지 아니하면 여간해서 공부에 힘 얻기가 어려울 줄 생각합니다.

위에로는 부모를 모셔야 하고, 남편을 보좌해야 하고,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돌봐야 하고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합니다. 정말 내용을 알고 보면 잠깐 새도 편할 날이 없으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이뭣고?’를 챙기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생각 생각이 ‘이뭣고?’를 하면서 그러한 일들을 해야만 자기의 과거의 빚도 갚으면서 앞으로 자기의 영원한 영혼을 위해서 자기 삶을 영위한 사람이 되겠지만,

참선 공부를 등한히 하고 오직 세속적인 빚만을 갚기 위해서 전전긍긍한다면 완전히 금생의 인생살이라 하는 것은 노예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노예라 하는 것은 희망이 없는 인종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오직 무서운 고된 일 밖에는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불쌍한 신세가 바로 노예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노예라고 하면 혹 분개를 하실른지 모르지만 정법을 믿고 열심히 정진을 하지 아니한다면 여러분은 정말 눈에 보이지 아니한 쇠고랑을 찬 노예와 무엇이 다를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빚을 갚지 아니하고, 자기의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지 아니하고, 전부 거기를 도피를 해라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가 지은 빚은 자기가 갚아야 하고, 빚을 갚으면서도 자기의 장래를 위해서 희망을 가지고 자기의 속 살림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사람다운 사람이고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빚을 갚지 않고 도피해 봤자 이자만 더욱 늘어날 뿐, 자기의 빚은 아무도 갚아주지도 않고 빚이 없어지지도 아니한 것입니다.
일단 아내로서, 자기의 자녀들의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처하게 되었다면 성의를 다해서 남편을 보조하고 부모를 봉양하고 아들딸들을 성심성의껏 잘 길르고 가르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한 생각 한 생각을 가다듬어서 화두를 들고 법문을 듣고 또 공부를 해 가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 고된 일들이 하나도 고된 줄을 모르고,
그러한 정법을 몰랐을 때는 자기의 신세가 분명 노예와 같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정말 고되고 지긋지긋한 그러한 일들이었지만, 정법을 알고 난 뒤부터서는 그러한 일들이 정말 성스러운 불사(佛事)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과 기쁨과 자신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불자(佛子)가 그 집안에 있음으로 해서 온 집안에 향기가 풍기고 온 집안사람들이 그 향기로 인해서 순화되어 갈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한 며느리가 진실한 불자가 되어 가지고 자기의 소임을 완성하고 마음으로 참선 공부를 열심히 할 때에,
그렇게 무섭고 마음에 싫었던 시어머니도 어느새 며느리를 딸처럼 아끼고 귀여워하게 되고, 자기도 그 시부모가 정말 친부모 못지않게 더 다정하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그런 어머니로 되어질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는 연세가 많으신 노보살님도 계십니다마는 열심히 법문을 듣고 참선을 열심히 하시고, 가정에 돌아가셔도 참선에 여념이 없고 언제 며느리나 손자손녀들에게 잔소리 할 겨를이 없어진다면,
평소에 별로 효심이 없다고 여겨졌던 며느리와 아들딸 손자손녀들도 그 달라진 할머니를 위해서 참으로 효심 있는 식구가 되어 줄 것입니다.

한 할머니가 그런 마음으로 정진을 하시고 여생을 마치실 때 그 가족의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들은 저절로 할머니의 뒤를 이어서 정법을 믿는 훌륭한 불제자가 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입으로 법을 설하기보다는 자기의 마음으로 정법을 설해야 하고 행동으로 정법을 설할 때, 정법은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온누리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흔히 예수교는 방방곡곡에 성당 교회당을 짓고 저렇게 신도를 갖다가 많이 포교(布敎)를 하고 굉장한데,
‘불교는 포교가 부족하다. 자꾸 산중에만 절이 있지 도회지에는 절이 없다’ 이렇게 해서 많이 불교의 부진한 포교에 대해서 개탄을 하시고 충고를 주신 분들을 만납니다마는,

형식적인 교회나 사찰을 많이 지어 가지고 종을 울리며 그래 가지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뜻이 있겠지만,

우리 불법(佛法)은 그러한 것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참되게 정법을 믿고 참되게 내 마음을 닦아감으로 해서,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이 순화가 되고 그 사람의 행동에서 보살도의 향내가 밖으로 풍겨나가서 많은 사람에 무언중 감화를 줄 수 있다면 이러한 포교활동이야말로 진실한 포교요, 진리에 적합한 포교요,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이 되는 포교라고 생각이 됩니다.

흔히 ‘선방 스님네들은 포교를 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해탈만을 위해서 철저한 이기주의적인 입장에서 자꾸 은폐적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는 비난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마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 자신의 생사 문제를 위해서 철저한 사람이라야만 남을 건져줄 수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선방에서 바보처럼 묵묵히 정진에 몰두하신 스님네야말로 가장 훌륭하게 포교를 하고 계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봄 석달 동안 춥지도 덥지도 않고 하는 그러한 아주 좋은 계절이 올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계절을 맞이해서 스님네와 신도 여러분들은 어쨌든지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공부에 열중하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헌디  무언동자암차허(無言童子暗嗟噓)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 눈이 있는 돌사람은 가지런히 눈물을 흘리고,
무언동자암차허(無言童子暗嗟噓)라. 말없는 동자는 은근히 한탄을 하더라.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이 도리가 다르냐 틀리냐?” 이렇게 만공 스님께서 조실 스님께 물으셨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29분53초~51분1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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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것을 원칙으로 한다.
*(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발심(發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칠통(漆桶)을 타파(打破) ; 칠통(漆桶)은 옻칠을 한 통으로, 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이므로 칠통에 비유한 말이다.
‘칠통을 타파한다’는 말은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핏대를 세우다 ;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몹시 화를 내거나 흥분하다.
*한만(汗漫)히 ; 되는대로 내버려두고 소홀하거나 무심하게.
*대신(代身)하다 ;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그것의 역할이나 책임을 떠맡아 하다.
*승속(僧俗) ; 스님과 스님이 아닌 속인(俗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부양가족(扶養家族) ; 자기가 돌보고 있는 가족.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제사,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이 중생을 교화(敎化)하는 일.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식이란 말이다。불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지혜목숨(慧命)을 이어가고, 법의 집과 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요원의 불길 ; ‘매우 빠르게 번지는 벌판의 불길’이라는 뜻으로, 걷잡을 수 없이 무섭게 퍼지는 세력이나 기세를이르는 말. *요원(燎原 화톳불·들불 료/언덕·들 원) ; 불타고 있는 벌판.
*(게송) ‘有眼石人齊下淚  無言童子暗嗟噓’ ; [다비문(茶毗文)] ‘입감(入龕)’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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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싼또샤

§(088) 화두, 화두의심, 깨달음

**송담스님(No.088) - (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약 18분.


그러면 그 활구참선법이란 어떠한 것이냐? 이론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참선이 아니라, 일체 이론을 배제하고 오직 꽉 맥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하나의 화두를 참구하여 일체 공안을 타파하고 확철대오하는 참선법입니다.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둘째 호흡을 바르게 한 다음, 셋째는 화두를 의심해 나가는데,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심, 깨달음>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剎那)에 확철대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 깨달음>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참선을 해 나가는데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할 화두를 지금부터 말씀을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여기에 참선법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여러분을 이끌고 계시는 만덕장보살이 가자고 해서 왔다고 혹 생각헐런지 모르지마는, 그것은 표면에 나타나는 한 조건에 지나지 못하고, 여기에 여러분이 온 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발이 여기를 온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몸뚱이가 제멋대로 온 것이 아니고, 남이 오자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 지금 편의상 ‘자신’이라는 말을 썼지마는 - ‘알 수 없는 놈’이 여기를 오기로 결정을 해서 그놈이 명령을 했기 때문에, 그 명령에 의해서 여러분의 몸이 움직여져 가지고 발로 걷기도 하고, 차를 타기도 해서 여러분은 여기에 와 진 것입니다.

그러면은 무엇이 여기를 ‘가자!’ 하고 이렇게 명령을 했겠느냐? 그놈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그놈’인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이 편의상 지어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이다 • 성품이다 • 주인공(主人公)이다 • 뭐 얼마든지.... 우리 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놨을 것입니다 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風月)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그만두고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에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 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가 봤을 것이고, 천당에도 가 봤을 것이고, 귀신으로도 떠돌아댕겨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온 그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눈을 통해서 보기도 하고, 귀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고, 입을 통해서는 맛도 보고 말도 하고, 몸뚱이를 가지고는 차웁고 • 덥고 • 부드럽고 • 까끄러운 것도 알고,
여기 앉아서 백 리 •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맘대로 왔다갔다하고,또 10년 전 • 20년 전 • 30년 전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합니다.

그렇게 신통이 자재하고, 시간 • 공간에 걸림이 없는 묘한 물건을 우리 모두 낱낱이 다 지니고 있고, 그놈에 의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자체를 깨닫지를 못하고 계속 생사윤회를 할 수밖에는 없느냐?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 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에 자유자재하고, 그놈을 마음껏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삼천 년이 된 이 말세(末世)에 겨우 이 문제를 이제사 알고,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는 그러한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후회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금생에라도 알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약에 금생에마저도 그것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면, 무량겁 미래 언제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이 법을 알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다면은 한없는 생사윤회를 거듭할 수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몸은 금생에 언젠가는 버리게 됩니다.
버리고 난 다음에 다시 또 육도(六道)의 어느 곳에 몸을 받아나게 됩니다마는, 금생에 일생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마지막에 숨 딱 거둘 때에도 참선하는 그 마음가짐, 그 화두 일념으로 딱 숨을 거두게 되면 내생에 금방 또 사람 몸을 받아서 좀더 일찍 좀더 공부하기 좋은 여건 하에 태어나게 되기 때문에 내생에는 훨씬 빨리 공부를 하여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도인들, 모든 성현(聖賢)들도 일 생, 이 생 닦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생을 공부해 가지고 금생에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을 받아 태어나 가지고 일찍 공부를 성취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입니다.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자리 걸음만을 하는 것 같지마는 결국 깨달을 때에는 중생의 상태에서 성현의 상태로, 비약적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러나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해놓으면 설사 금생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드라도 그 공부가 허사가 아니기 때문에, 올바르게 해 놓은 공부는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점진적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지 못한다고 조급한 생각을 낼 것도 없고, 금생에 나이가 먹도록 죽음에 이르도록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가운데 우리는 죽을 날을 받아 놨으면서도 그 죽는 날만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일분 일초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고 정말 알뜰하게 이 공부를 위해서 마음을 돌려 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여기를 오는 놈. 그놈이 슬퍼할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이 몸뚱이를 자유자재로이 작용하는 바로 이놈. 나의 주인공.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운전사.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그놈이 부모로부터 이 몸뚱이를 받어 가지고 이승을 하직(下直)할 때까지, 단 일초 동안도 이 몸으로부터 떠나보지 못한 채, 같이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는 그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 일 초 동안도 이 몸을 떠나서 존재해 보지 못한 그놈인데, 어째서 온갖 것은 다 보고 알고, 듣고 알고, 만져보고 알고, 생각해서 알면서, 바로 그 자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느냐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봐야 우리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봐야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물 - 우리 밖의 모든 사물 - 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있고, 그놈의 부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삼라만상, 우주법계를 내가 운전하고, 내가 요리하고,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밖의 물건에 의해서 내가 구속을 당하고 있고, 그 조종을 받고 있고, 그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나인데... 주인이 시원찮고 정신을 못 채리니까...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 내가 소유하고 있는 종들에게 주인이 멸시를 당하고, 주인이 종노릇을 하고, 종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들입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하! 그 공부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대단히 어렵겠구나!” 이렇게 생각허실런지 모르지마는 절대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내게 있는 것.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놈. 여러분이 듣고 있는 놈. 밥을 먹을 때는 먹고 있는 놈. 길을 걸어갈 때는 바로 그 걸어가는 놈. 성날 때는 바로 그 성내는 놈.
그놈을 돌이켜 살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날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괴로울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이고, 기쁠 때도 • 슬플 때도 • 밥을 먹을 때도 • 차를 탈 때도 • 앉었을 때도 • 누웠을 때도, 바로 <그때그때, 그 자리 그 자리>가 나를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는 것입니다.

책을 통해서 하는 공부는 장소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분위기가 필요하지마는, 이 공부는 때도 장소도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한 생각 퍼뜩 돌이키면 되는 것입니다.(51분28초~68분4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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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 이 법어는 송담(松潭)스님께서 1978년 10월 1일, 「법련사 불일 청년회」의 청법으로 설하신 내용이며, 스님께서 직접 편집하신 것을 『불일회보』(1988년 6. 7. 8월)에 게재했었던 원고임.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풍월(風月) ; 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어깨너머로 배운 짧은 지식.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사바세계(娑婆世界);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생사윤회(生死輪廻)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여래(如來) ; 여래 십호(如來十號)의 하나. 진여(眞如)의 세계, 곧 열반에 다다른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다타가타(tathāgata)의 번역어이다.
*하직(下直) ;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이 아래와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7,4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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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싼또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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