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 (목적)'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24.04.20 §(106)한 생각 '이뭣고?'로 돌리면 그 자리가 선방 / 번뇌와 망상이 바로 진여불성에서 일어나는 파도 / 공부 굉장히 빨리 성취할 사람은? / 불교의 요점이 「각기 너희 마음 부처를 깨달으라」
  2. 2024.04.01 §(185) (게송)심경확연망피차~ / 참나를 깨달라서, 피와 오줌과 똥이 들어 있는 이 몸뚱이 그대로 부처님이 되는 것 / 행각(行脚) /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없이 참나를 찾는 공부해야. 1
  3. 2024.02.27 §(170) (게송)등한식득동풍면~ / 번뇌와 망상이 진여불성이 아니지만, 그것을 여의고 진여불성을 찾을 수가 없어. 바로 우리의 나아갈 길이, 정진해 나가는 데 눈을 박을 곳이 바로 여기에 있다. 2
  4. 2024.02.24 §(163) (게송)다년농중조~ / 참선해서 무엇을 깨닫느냐? 두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깨달은 것 / (게송)허공경계기사량~ / (게송)막파무심운시도~. 2
  5. 2021.08.17 §((151)) 참선은 내게 있는 나의 마음자리를 내가 찾는 공부라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 /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난다 / 바른 스승.
  6. 2021.08.07 §((세등28)) (게송)일편백운강상래~ /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 / 화두(話頭)를 든다=화두를 생각한다=화두를 관(觀)한다.
  7. 2021.07.20 §((512)) 참선은 내 생사 문제 해결 / (게송)피치삭발유래유~ / 부처님 법문은 '밖으로 치닫지 말고 한 생각 돌이켜서 바로 자기를 찾으라' / (게송)정체종래절성색~
  8. 2020.12.29 §((066)) 강을 건넜으면 배[방편]는 버려라 / '한 생각' 단속해 나가는 법이 참선 / 참선은 누구라도, 언제 어데서라도 할 수 있다 / 불법은 버리는 공부.
  9. 2020.09.17 §(세등64) (게송)윤회기중문래단~ / 견성성불을 해야만 우리의 한량없는 선망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열린다 / 무상을 깨닫고, 도심(道心)을 발하라.
  10. 2019.09.18 §(158) (게송)대지촬래속미립~ / (게송)생전부귀초두로~ /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이것이 바로 참선법 / (게송)인간부귀일시락~ / 생사는 본래 없다.
참선 (목적)2024. 4. 20. 07:58

§(106)퍼뜩 한 생각 '이뭣고?'하고 돌리면 그 자리가 선방(禪房) / 번뇌와 망상, 모든 중생심(衆生心)이 바로 진여불성에서 일어나는 파도,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 공부 굉장히 빨리 성취할 사람은?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 조화가 무궁무진한 놈, 그러면서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이뭣고?'
절대로 진짜 부처님은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 金佛不度爐 木佛不度火 泥佛不度水 / 부처님 가르치신 요점이 「각기 너희 마음 부처를 깨달으라」


우리의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팔만사천 가지의 중생심(衆生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진여불성에서 일어나는 파도이기 때문에 그 파도를 여의지 아니하고 그곳에서 한 생각 돌이키면 우리는 진여불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초(一超)에 직입여래지(直入如來地)라. 한 번 뛰어서 여래(如來) 땅에 올라간다」고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고,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여래의 땅에 도달한다」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듣기 싫은 소리 하면은 썽도 낼 줄 알고, 신경질도 낼 줄 알고, 슬퍼할 중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또 번뇌와 망상도 한량없이 퍼일어난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정진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여. 오히려 자격만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이라야 더 하기가 좋고, 했다 하면 공부가 굉장히 빨리 성취할 사람인 것입니다.

절대로 진짜 부처님은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몸밖에 있는 부처님 불상(佛像), 자기 안에 있는 부처님보다는 못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 자기 몸안에 있는 부처님은 산 부처님이고, 자기 몸밖에 있는 부처님은 돌 쇠로 된 불상 같으면 용광로에다 넣으면 녹을 것이고, 나무로 된 불상은 불에다 넣으면 탈 것이고, 흙으로 빚어서 맨든 불상은 물에다 집어넣으면 흐믈흐믈해 질 것입니다.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용광로에 넣어도 녹지 아니하고, 물에 넣어도 풀어지지 아니한 부처님은 바로 자기 마음의 부처님이여. 그 마음 찾으라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이여. 부처님께서 팔만사천 묘법(妙法)을 설하셨는데 그 묘법을 설하신 바로 그 핵심이요, 요점이 「각기 너희 마음 부처를 깨달으라」 그거거든.

**송담스님(No.106)—1979년 7월 관음재일 법문(79.07.24.음)(용106)

 

약 15분.


공부는 언제 · 어데서 · 무엇을 하고 있던지 상관이 없습니다. 퍼뜩 한 생각 돌리면, '이뭣고?'하고 돌리면 그 자리가 선방(禪房)입니다.
차중에서도 좋고, 길가에서 길 가운데서도 좋고, 밥 먹을 때도 좋고, 똥 눌 때도 좋고, 누구하고 얘기 할 때도 좋고 '이뭣고?' 썽날 때도 '이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 돌이키는 그 공덕(功德)이, 팔만사천에 마구니를 항복을 받고 무량겁 죄를 녹여버리는 그러한 위신력(威神力)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 거기에서 나오냐?

우리의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팔만사천 가지의 중생심(衆生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진여불성에서 일어나는 파도이기 때문에 그 파도를 여의지 아니하고 그곳에서 한 생각 돌이키면 우리는 진여불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초(一超)에 직입여래지(直入如來地)라. 한 번 뛰어서 여래(如來) 땅에 올라간다」고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고,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여래의 땅에 도달한다」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십만팔천 국토 서쪽에가 있다' 정토종의 경전에는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은 아니지마는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그러한 표현을 쓰셨습니다. 그 근기에 맞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표현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십만팔천 국토 서쪽으로 가야 있다'고 하는 말씀이나,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여래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하는 말은 정반대의 표현이지마는, 알고 보면 조끔도 차이가 없는 말씀인 것입니다.

번뇌망상 희로애락, 썽내고 웃고 슬퍼하고 그러한 생각들이 정말 우리 참선(參禪)하는 데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썽낼 일도 없고 기뻐할 일도 없고 슬퍼할 일도 없고 아주 숙맥(菽麥)이 되어서 맹충이가 되어 가지고 우두거니 반병신이, 무슨 어떤 정신적인 큰 충격을 받던지, 중풍 같은 그런 병을 앓아 가지고 그런 바보가 되었다면 가련하게도 그 사람은 참선을 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아주 완전히 마비가 되어 가지고 웃을 중도 모르고 울 중도 모르고 썽낼 중도 모르고 '에~ 헤' 하고 있다면 그 어떻게 참선을 하냐.

듣기 싫은 소리 하면은 썽도 낼 줄 알고, 신경질도 낼 줄 알고, 슬퍼할 중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또 번뇌와 망상도 한량없이 퍼일어난 사람, 따악 그 사람이야말로 정진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여. 오히려 자격만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이라야 더 하기가 좋고, 했다 하면 공부가 굉장히 빨리 성취할 사람인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는 전부가 다 참선을 하면 반드시 성취할 수 있는 그러한 상호(相好)를 타고나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법회 때마다 새로운 얼굴들이 나오신 것을 보고 대단히 반갑게 여겨지고 흐뭇하게 생각합니다.

처음 나오신 분도 들어보면 아실 것이고 이해가 되실 줄 생각합니다. 그동안에 다른 절을 다니셨건 또는 처음으로 오늘 나오셨건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아직 천수(千手)도 못 외와서 아직 불명(佛名)도 탈 수가 없고 참선을 아직 못합니다' 천수를 외우고 절에 많이 댕겨야만 불명도 타고 참선도 할 줄 그렇게 생각하신 분도 계신 거 같습니다.
이 참선은 오히려 그런 것을 외우지 못하고 다른 절에 다니면서 방편(方便)으로 된 그러한 의식 같은 것에 물들지 아니한 순박한 분이 오히려 더 공부를 잘하실 수 있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조끔도 뒤로 미룰 것이 없이 당장 이 자리에서부터서 참선을 시작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내가 부모한테 태어날 때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원래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 갖추고 있다. 진여불성이라고 편의상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마는 사실은 원래는 그러한 이름도 없는 것이고, 그런 특정한 모냥다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합니다.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대관절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길래 그렇게 조화(造化)가 무쌍(無雙)하냐 그 말이여.
여기 법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거든. 목포를 생각하면 목포가 환하고, 부산을 생각하면 부산이 환하고, 지리산을 생각하면 지리산이,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왔다갔다 번갯불보다도 더 빠르다.

눈을 통해서는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는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을 줄 알고, 입을 통해서는 맛볼 줄 알고, 말도 할 줄 알고, 발로는 걸어 다니고, 손으로는 뭘 잡고, 대관절 무슨 물건이 눈에도 보이지도 않고 손에도 잡을 수가 없는 것이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無窮無盡)하냐 그 말이여.

그러니, 그러면서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그거 '이뭣고?' '이뭣고?'
자꾸 '이뭣고?'를 챙겨서 그놈이 무엇인가를 참구(參究)를 하다 보면, '이뭣고?' 하고 혀도 까딱도 않고, '이뭣고?' 소리도 하기도 전에 벌써 알 수 없는 생각이 탁! 있거든. 그러면 그것이 이미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여 그게.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면 벌써 그것이 화두가 들어져 있는 거라.

지끔 요 얘기할 때도 환히 있거던, 화두가.
틀림없이 여러분들 지끔 제 말씀을 듣고 계시면서도 '이뭣고?'가 타악 되어져 있을 거여. '이뭣고?'

이런 법회 때 오히려 화두가 더 잘 들리고, 전강 조실 스님 녹음을 터억 틀어 놓고 앉었으면은 더 화두(話頭)가 성성(惺惺)하게 더 잘 들릴 줄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또 일이 있으면 일어나서 일하면, 일하는 가운데에도 그 알 수 없는 화두가 들어져 있는 상태에서 일을 하시도록 훈련을 쌓아 나가시면, 일을 해도 된 중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뭐 누구를 기달리거나 정거장에서 차를 기달려서도 조끔도 지루한 줄을 몰라. 차 올 때까지 '이뭣고?' 30분, 1시간 언제 지내간 중 모르게 지내가.

어떠한 근심이 있어도 '이뭣고?'를 하면 근심이 스르르르 근심만 없어질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러한 근심이 바꽈져 가지고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다고 나는 믿고 그러한 실증(實證)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 가서 기도를 하는 것도 좋고, 주력을 하는 것도 좋고, 염불을 하는 것도 좋고, 경을 읽은 것도 다 그 사람 정성껏 하면 다 효과가 있고, 감응(感應)이 있는 것입니다.
'참선은 죽도록 해서 나중에 깨달으면 몰라도, 부자 되고 아들 합격하고 남편 좋은 것에는 참선해 갖고는 소용이 없다. 그저 참선은 하면서도 그런 급한 일 있으면 강화 보문이나 강릉으로 쫓아가야지, 그거 안 된다' 혹 그런 생각을 가지신 분이 더러 있는 거 같습니다.

절대로 진짜 부처님은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몸밖에 있는 부처님 불상(佛像), 자기 안에 있는 부처님보다는 못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
자기 몸안에 있는 부처님은 산 부처님이고, 자기 몸밖에 있는 부처님은 돌 쇠로 된 불상 같으면 용광로에다 넣으면 녹을 것이고, 나무로 된 불상은 불에다 넣으면 탈 것이고, 흙으로 빚어서 맨든 불상은 물에다 집어넣으면 흐믈흐믈해 질 것입니다.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용광로에 넣어도 녹지 아니하고, 물에 넣어도 풀어지지 아니한 부처님은 바로 자기 마음의 부처님이여. 그 마음 찾으라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이여.
부처님께서 팔만사천 묘법(妙法)을 설하셨는데 그 묘법을 설하신 바로 그 핵심이요, 요점이 「각기 너희 마음 부처를 깨달으라」 그거거든.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충실히 실천한 사람에게 부처님이 복(福)을 주시지, 그것을 등한히 하고 팔도로 쫓아다닌다고 부처님이 그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복을 주시리라고 나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무리 '이뭣고?'를 해도 도저히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걱정이 되고 해서 마지못해서 집을 비우고 몇백 리 산속으로도 가고, 바다로도 가시는 뜻을 나는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가신 것을 꼭 나쁘다고 하진 않는데, 가서 거기서는 죽자사자 목탁을 치면서 목이 쇠도록 부르고, 오는 길에는 차중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그런 분들이 수없이 많이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차가 발딱 뒤집어져 갖고 팔이 부러지고. 여기에 오신 분들 가운데는 한 분도 그런 분이 안 계실 것을 잘 압니다.

앞으로 가을철이 되어서 단풍이 물들고 하면 공연히 옆구리 꾹꾹 찌르면서 '야! 설악산 가자. 오대산 가자' 오면서 가면서 화두는 다 놓쳐 버리고 엉뎅이 춤을 추면서 그러한 일이 지끔 이 시국에 있어서 정법을 믿는 여러분들은 그런 일이 없으셔야 할 걸로 생각합니다.
그런 성지(聖地)에 기도를 가신다던지 성지 순례하신 것은 좋은 일이지마는 거기에다가 관광을 깃들여서 얼근히 한 잔 취해 가지고 광태를 부리다가 사고가 난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지금 삼남(三南) 지방에는 수해(水害)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참 당하지 못할 재산과 인명 피해 속에서 있으니 만큼 여러분들도 분 따라서 분 따라서 그 의연금(義捐金)을 내시고, 그런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너무 지나치게 가을철을 낭비하시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실 것을 당부를 합니다.

풍송수성한(風送水聲寒)이요 운파청산로(雲破靑山露)로구나. (녹음 끊김) (31분52초~46분10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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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참고 ❸] 송담스님(No.401)—1989년 11월 첫째일요법회.(4분48초)
이제 가을도 가고 겨울철에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음력 10월 보름에 겨울철 안거(安居)가 시작이 됩니다. 보살님네는 뒤로 미루지 말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다 보면 한량이 없습니다. 탁! 큰 마음을 내서 결단심을 내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또 이 한 철을 열심히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에 새로 선방(禪房)을 확장을 했으니 어찌던지 와서 정진을 잘 하시길 바라고,
부득이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접 나와서 공부를 못하신 보살님네, 거사님네들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 속에서 항상 '바로 있는—발 디디고 서 있는 그 자리, 앉어 있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뭣고?」만 탁 들면 벌써 용화사 선원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용화사에 방부를 들이고, 와서 큰방에 앉어 계셔도 밤낮 여기 앉어서 집안 생각, 아들 생각, 딸 생각 그러고 있으면은 그건 방부 들이나마나 하는 거고.
댁에 계시더라도 항상 「이뭣고?」를 들고 일 하다가도 퍼뜩 챙기고, 앉어서 챙기고, 서서 챙기고, 밥 먹으면서 챙기고, 똥 누면서 챙기면은 바로 집이 용화사 선원이거든.

시간도 공간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척지간(咫尺之間)이 수천 리, 수천 리가 지척이 되는 것입니다. 백년 천년 하면 긴 것 같지마는 일 찰나간이고, 일 찰나간이 잠깐인 것 같지마는 이것이 바로 무량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법성게(法性偈)」를 외우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거든. 이것은 진리에 입각해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래.

둘이 나란히 한집에서 한 이불 속에서 자도 벌써 생각이 틀어져 버리면은 천리(千里)거든. 부부간도 천리 웬수여. 저 천리 밖에 떨어졌어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고 있으면은 벌써 부부일신(夫婦一身)이거든.

시간과 공간을 그것이 또 다른 것이 아니야. 시간이고 곧 공간이고, 공간이 시간이거든.
공간 없는 시간이 없고 시간 없는 공간이 없어. 시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공간이고 시간과 공간은 베의 날과 씨가 서로 이렇게 짜여져서 베를 짜듯이 시간과 공간도 역시 마찬가지여.

그래서 어느 때, 어느 시간 무엇을 하실 때라도 항상 화두를 들고, 화두 하나만을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저 딱 화두를 거각(擧却)하면 그 자리에는 부처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는 모든 조사(祖師)가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입승(立繩) 스님이 탁! 죽비를 들고 앉아 있는 자리다 그말이거든.

그러니 입승 스님이 죽비를 들고 앉아 있고, 조실 스님이 탁! 지켜보고 계시고, 모든 조사 스님이 그 자리에 계시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자리에 계시는데 어느 곳이 선불장(選佛場)이 아니겠습니까?(54분57초~59분45초)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대승의장(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마구니 ; 마(魔). [산스크리트어]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 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 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위신력(威神力) ; 부처님이 지닌, 헤아릴 수 없는 영묘하고도 불가사의한 힘. 중생에게 미치는 강력하고 불가사의한 능력.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 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일초(一超)에 직입여래지(直入如來地)라. 한 번 뛰어서 여래(如來) 땅에 올라간다’ ;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참고] 『증도가(證道歌)』 (영가永嘉 스님)에서.
覺卽了不施功  一切有爲法不同  住相布施生天福  猶如仰箭射虛空  勢力盡箭還墜  招得來生不如意

깨닫고 나면 공(功)을 베풀지 않으니 일체 유위법(有爲法)과 같지 않다. 상(相)에 머문 보시는 천상에 나는 복이나, 마치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올라가는 힘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니, 내생(來生)에 뜻과 같지 않음을 초래하게 되리라.

爭似無爲實相門  一超直入如來地  但得本莫愁末  如淨琉璃貪寶月  我今解此如意珠  自利利他終不竭

어찌 무위(無爲)의 실상문에, 한 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것만 하겠는가. 다만 근본을 얻을지언정 지엽은 근심하지 말라. 마치 깨끗한 유리구슬 안에 보배 달을 머금은 것과 같네. 내, 이제 여의주를 아나니 나와 남을 이롭게 함에 마침내 다함이 없도다.
*여래(如來) : 부처님 10호(十號)의 하나. 범어 tathāgata의 역(譯).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십만팔천 국토 서쪽에가 있다’ 정토종의 경전에는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 『아미타경(阿彌陀經)』에는 십만억 국토 또는 십만팔천 국토를 지나가야 극락세계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 국토란 것은 한 부처님의 교화하는 세계 곧 한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말함이다. 그러나 유형(有形)한 세계만을 말함이 아니라, 마음 가운데 있는 십악(十惡)과 팔사(八邪)를 없애 버리면 곧 극락이 된다는 뜻이다.

십악(十惡)은 십선(十善)의 반대로써 나쁜 과보(果報)를 가져오는 열 가지 악(惡)한 행위. 몸[身]과 말[口]과 생각[뜻, 意]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십악업(十惡業) · 십불선업(十不善業) · 십악업도(十惡業道) · 십흑악(十黑惡) 등이라고도 한다. 십악(十惡)을 고치면 곧 십선(十善)이 된다.
몸[身]으로 짓는 세 가지 : ①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②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③사음(邪淫 삿된 음행. 邪行).
말[口]로 짓는 네 가지 : ④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⑤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⑥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⑦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생각[뜻, 意]으로 짓는 세 가지 : ⑧탐욕(貪欲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⑨진에(瞋恚 성냄). ⑩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또는 치암(癡暗 어리석음).

팔사(八邪)는 팔정도(八正道)의 반대인데 ①진리를 그릇보는 망녕된 소견[邪見]. ②망녕된 생각[邪思惟]. ③온갖 바르지 못한 말[邪語]. ④부처님의 계율을 깨뜨리는 그릇된 행동[邪業]. ⑤그릇된 생활 방법[邪命]. ⑥그릇된 노력[邪方便]. ⑦그릇된 믿음[邪念]. ⑧그릇된 공부[邪定] 등이다.

이와 같은 죄업과 망상이 끊어지면 그곳이 곧 극락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에는 「여기에서 멀지 않다(去此不遠)」고 가르쳤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십만팔천 국토 서쪽에가 있다' 정토종의 경전에는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은 아니지마는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그러한 표현을 쓰셨습니다. 그 근기에 맞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표현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십만팔천 국토 서쪽으로 가야 있다'고 하는 말씀이나,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여래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하는 말은 정반대의 표현이지마는, 알고 보면 조끔도 차이가 없는 말씀인 것입니다 ; 

[참고] 『육조단경(六祖壇經)』 제2 「공덕과 정토를 설명하다(釋功德淨土)」 (심재열 강의 | 보련각) p196~200.
又問 弟子 常見僧俗이 念阿彌陀佛하야 願生西方하니 請和尙은 說하소서. 得生彼否이니까 願爲破疑하소서.
師 言하사대 使君아 善聽하라. 惠能이 與說호리라. 世尊이 在舍衛城中하사 說西方引化하사대 經文에 分明去此不遠이라 하시고 若論相說인댄 里數 有十萬八千은 卽身中에 十惡八邪니 便是說遠이라.

“제자가 항상 보니 승속 간에 흔히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염하여 서방(西方)에 태어나기를 원하옵는데 과연 저 곳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옵니까? 청컨대 화상께서는 이 의심을 풀어 주옵소서”
대사가 말씀하셨다. “사군이여, 잘 들어라. 혜능이 말하리라. 세존께서는 사위성 중에 계실 적에 서방으로 인도 교화하는 데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경문(經文)에 분명히 ‘여기서 멀지 않다’ 하셨고, ‘만일 현상계의 공간 거리로 말한다면 리수(里數)로 10만 8천이라’ 하셨는데, 이것은 몸 가운데 십악(十惡)과 팔사(八邪)를 가리킨 것으로써 ‘멀다’는 말씀인 것이다”

說遠은 爲其下根이오 說近은 爲其上智니 人有兩種이나 法無兩般이라 迷悟 有殊하야 見有遲疾일새. 迷人은 念佛하야 求生於彼하고 悟人은 自淨其心하나니 所以로 佛言하사대 隨其心淨하야 卽佛土淨이라 하시니

“멀다[遠]고 하신 것은 낮은 근기를 위함이고, 가깝다[近] 하신 것은 높은 근기를 위함인 바, 사람에게는 두 가지가 있지만 법(法)에는 두 가지가 없느니라. 어리석고 깨달음이 다르기에 견해가 더딤과 빠름이 있나니 어리석은 사람은 염불해서 저 곳에 태어나기를 구하고 깨달은 사람은 제 마음을 스스로 깨끗이 하나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마음의 깨끗함을 따라서 곧 불토(佛土)가 깨끗하다’ 하시니라”

使君아 東方人이라도 但心淨하면 卽無罪요 雖西方人이라도 心不淨하면 亦有愆이니 東方人이 造罪에 念佛하야 求生西方이어니와 西方人이 造罪에 念佛하야 求生何國고. 凡愚는 不了自性하야 不識身中淨土일새 願東願西어니와 悟人은 在處一般이라 所以로 佛言하사대 隨所住處하야 恒安樂이라 하시니라.

“사군이여, 동방 사람이라도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는 것이요, 서방 사람이라도 마음이 깨끗치 못하면 역시 허물이 있는 것이니, 동방 사람이 죄가 있을 때에는 염불함으로써 서방에 태어나기를 원하거니와, 서방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는 염불하여서 어느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할 것이냐?
어리석은 범부는 자성(自性)을 모르므로 제 몸 속의 정토(淨土)를 알지 못하고 동방이니 서방이니 원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어디에 있으나 한 가지이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머무는 바 곳을 따라서 항상 안락하다’ 하셨느니라”

使君아 心地 但無不善하면 西方이 去此不遙어니와 若懷不善之心이면 念佛하여도 往生難到니 今勸善知識하노니 先除十惡하면 卽行十萬이오 後除八邪하면 乃過八千이니 念念見性하야 常行平直하면 到如彈指하야 便覩彌陀니라.

“사군이여, 마음자리[心地]에 착하지 않은 것만 없으면 서방(西方)이 여기서 멀지 않으려니와, 만일 착하지 못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아무리 염불을 해 봐도 태어나기 어려우니라. 내 이제 여러 선지식들에게 권하노니 먼저 십악(十惡)을 없애는 것이 10만 리를 가는 것이고, 팔사(八邪)를 없애는 것이 8천 리를 지낸 것이니 생각생각 성품을 보아 항상 평등하고 바르게 행하면 이것이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사이에 문득 아미타불을 보는 것이니라”

使君아 但行十善하면 何須更願往生이며 不斷十惡之心이면 何佛이 卽來迎請이리오 若悟無生頓法하면 見西方이 只在刹那어니와 不悟하면 念佛求生하야도 路遙어니 如何得達이리오.

“사군아, 다만 십선(十善)을 행하면 어찌 왕생을 다시 원하며, 십악(十惡)의 마음을 끊지 않았다면 어느 부처님이 와서 맞아 줄 것이냐? 만일 ‘남이 없는 돈법[無生頓法]’을 깨닫는다면 서방(西方)을 찰나에 보려니와 깨닫지 못하면 염불로써 태어남을 구하더라도 길이 멀 것인데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숙맥(菽麥 콩 숙/보리 맥) ; ①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의 '숙맥불변(菽麥不辨)'에서 나온 말로 사리 분별을 못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을 이르는 말. ②콩과 보리. ‘쑥맥은’ 숙맥(菽麥)의 비표준어이다.
*상호(相好) ; ①얼굴의 생긴 모양. ②부처님의 몸에 갖추어진 용모와 형상.
*천수 ; 천수경(千手經).
*천수경(千手經) ; 관음신앙을 구체화하기 위해 엮어진 경으로, 현재 사찰에서 독송하고 있는 천수경의 구성은 천구백년 이후에 갖추어진 것이다.
천수경은 한국불교 신앙의례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경전으로, 천수관음(千手觀音)의 공덕을 찬탄하고 그에게 귀의하여 참회하고 발원하는 글과 진언(眞言)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19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모냥다리 ; 모양다리. ‘모양새(模樣-, 겉으로 보이는 모양의 상태)’를 속되게 이르는 말. '모냥'은 '모양'의 사투리. '-다리'는 일부 명사에 붙어, 그러한 상태를 대수롭지 아니하게 이르는 뜻을 더하여 명사를 만드는 말.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무쌍(無雙)하다 ; (사람이나 그 실력, 능력 따위가)서로 견줄 만한 짝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무궁무진(無窮無盡 없을 무/다할 궁/없을 무/다할 진) ; ①수량이 끝도 없고 다함도 없을 정도로 많다. ②끝도 없고 다함도 없음.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눈앞에 환히 드러나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 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전화위복(轉禍爲福 회전하다·바꾸다 전/재앙 화/되다·이루어지다 위/복·행복 복) ; 재앙[禍]이 바뀌어[轉] 오히려 복(福)이 된다[爲]는 뜻으로, 좋지 않은 일이 계기가 되어 오히려 좋은 일이 생김을 이르는 말.
*감응(感應) ; 감응도교(感應道交). 부처님과 수행자의 마음이 교류하는 것. 중생의 신심, 선근(善根)이 모든 부처님•보살에게 통해서 그 힘이 나타나는 것. 중생의 신심이 진실하게 느껴져, 부처님과 보살이 답하는 것.
중생 기감(機感,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중생의 소질이나 능력)이 뜨거우면 부처님의 응(應)하는 마음도 또한 깊다. 그쪽과 이쪽이 사이를 두지 않음을 도교(道交)라 한다.
*부처님[佛]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깨달은 어른), 지자(知者), 각(覺 깨달음)으로 한역(漢譯).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자기 몸안에 있는 부처님은 산 부처님이고, 자기 몸밖에 있는 부처님은 돌 쇠로 된 불상 같으면 용광로에다 넣으면 녹을 것이고, 나무로 된 불상은 불에다 넣으면 탈 것이고, 흙으로 빚어서 맨든 불상은 물에다 집어넣으면 흐믈흐믈해 질 것입니다 ; 
[참고 ❶] 조주삼전어(趙州三轉語) ; '조주의 세 마디 말' 선종의 화두[벽암록 96칙].
조주선사(778~897)가 상당(上堂)하여 말했다. "금불(金佛)은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목불(木佛)은 불을 건너지 못하며, 이불(泥佛 진흙으로 빚어 만든 불상)은 물을 건너지 못한다"

후에 벽암(碧巖 : 圜悟克勤 1065~1135)이 평창(評唱)하기를 「저 옛사람이 독특한 안목으로 사람들을 지도함에 있어서 이 말(삼전어)을 빌려서 이 소식(깨달은 경계)에 통하게 한 것은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중략)...
이불(泥佛 진흙으로 빚어 만든 불상)은 물을 건너게 되면 풀어지고, 금불(金佛)은 용광로를 건너가게 되면 녹아 버리고, 목불(木佛)은 불을 건너가게 되면 타 버리고 만다」

삼전어(三轉語)란 깨달음의 결정적 전기가 되는 세 가지 어구. 전어(轉語)는 미혹을 깨달음으로 반전시키는 어구라는 뜻이다. 이에 따라 일반적으로 삼전어는 철벽(鐵壁)과 같은 궁지(窮地 매우 곤란하고 어려운 일을 당한 처지)를 마주치고 나서 그것을 뒤집어 새로운 안목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는 화두의 기능을 지닌다.

[참고 ❷]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제14권)』 (卍續藏 제68책) '趙州眞際禪師語錄之餘'
師上堂 示衆云 金佛不度爐 木佛不度火 泥佛不度水 眞佛內裏坐 菩提涅槃 眞如佛性 盡是貼體衣服 亦名煩惱

조주선사가 상당(上堂)하여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금으로 만든 부처님은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님은 불을 건너지 못하며, 진흙으로 만든 부처님은 물을 건너지 못한다. 참부처님[眞佛]은 안에 앉아 있다. 보리 · 열반 · 진여 · 불성은 모두 몸에 걸친 의복과 같으니, 이 또한 번뇌라고 이름한다"

[참고 ❸]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28권 「諸方廣語 - 十二人見錄(제방 선사들의 긴 법어 - 12인 기록 있음)」 '조주 종심 화상(趙州從諗和尙)‘
上堂云 金佛不度爐 木佛不度火 泥佛不度水 眞佛內裏坐 菩提涅槃 眞如佛性 盡是貼體衣服 亦名煩惱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삼남(三南) ;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세 지방을 통틀어 이르는 말.
*(게송) 풍송수성한(風送水聲寒) 운파청산로(雲破靑山露) ; 바람 불어오고 물소리 차가운데, 구름 걷히니 청산이 드러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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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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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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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참선 (목적)2024. 4. 1. 10:20

§(185) (게송)심경확연망피차~ / 참선을 하면 마침내는 참나를 깨달라서, 속에 피와 오줌과 똥이 들어 있는 이 몸뚱이 그대로 부처님이 되는 것 /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낸 사람은 언제나 행각(行脚)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찾는 그 공부밖에는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송담스님(No.185)—1982년 11월 첫째일요법회(용185)

 

약 11분.


심경확연망피차(心境廓然忘彼此)하면  대천사계총포함(大千沙界總包含)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처처녹양감계마(處處綠楊堪繫馬)하고  가가유로투장안(家家有路透長安)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심경(心境)이 확연(廓然)하야 망피차(忘彼此)하면, 마음 경계가 확연(廓然)해서 피차(彼此)를 잊어버리면, '내다 남이다', '주관이다 객관이다', '좋다 나쁘다' 이러한 피차를 잊어버리면,
대천사계총포함(大千沙界總包含)이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일월성진(日月星辰) 산천초목(山川草木)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버린 거다 그 말이여.

마음속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내다 남이다', '이건 좋다 나쁘다' 이러한 차별심이, 차별(差別) 분별심(分別心)이 일어나면 육도(六道)가 분명히 있고, 중생과 부처님이 따로따로 있고, 온갖 재앙이 거기에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마음 경계가 확연(廓然)해서 인아상(人我相)이 뚝 떨어져 버리면 삼천대천세계가 그냥 고대로, 현실(現實) 있는 고대로 극락세계(極樂世界)가 되는 것이요, 부처님의 세계요 진리의 세계인 적광토(寂光土)가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처처녹양감계마(處處綠楊堪繫馬)요  가가유로투장안(家家有路透長安)이다.
곳곳에 푸른 버들에는 다 말을 맬 수가 있어. 사람이 옛날에는 다 말을 타고 다니다가 그 말에서 내리면 그 말을 그 나무에다가 고삐를 매는데, 어느 곳에 있는 아무 버드나무에도 그 말을 마음놓고 붙들어 맬 수가 있는 것이고,
가가유로투장안(家家有路透長安)이여. 집집마다 길이 있으면 그 길이 바로 장안(長安), 서울로 통하는 길이더라 그 말이여. 어느 집이고 그 문 앞에 있는 길로 나가기만 하면 거기서 바로 서울과 직통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참선(參禪)을 해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좋은 생각이 일어나거나,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슬픈 생각이 일어나거나, 기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인아(人我) 피차상(彼此相)에 떨어지지 않는 가장 요긴(要緊)한 길이고,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단속(團束)해 나가면 마침내는 참나를 깨달라서 바로 이 몸뚱이가 이대로, 속에 피와 오줌과 똥이 들어 있는 이 몸뚱이 그대로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에, 중국(中國)에 동산숭장로(東山崇藏老)라고 하는 선지식이 그 제자를, 참선하러 나가는, 행각(行脚)으로 나가는 제자에게 설(說)한 그 법문(法門)을 해 주셨는데, 설사 머리를 깎지 않고 속가(俗家)에서 가정을 가지고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하고 하는 그러한 생활을 하신 분, 또는 출가(出家)를 해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서 일평생을 도(道)를 닦는 그런 스님은 더욱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언제나 행각(行脚)을 지금 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도(道)를, 이 참선법(參禪法)을 믿지 아니하고 그렁저렁 살아가는 사람은 말고, 참으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낸 사람은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더라도 행각에 나서고 있다고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행각에 나선 사람은 자기의 고향과 부모를 다 여의고 떠나왔으며, 또 자기의 은사(恩師) 스님이 계시는 그 절도 이미 하직(下直)을 하고 선지식(善知識)과 도반(道伴)을 찾어서 이미 길을 떠나 있거든.
고향과 부모를 떠났고 거기에서 다시 은사와 자기가 살던 절도 버리고 걸망 하나를 짊어지고 행각에 나선 사람이, 무슨 딴생각을 할 겨를이 있으며 무슨 딴 일을 할 틈이 있겠느냐 그 말씀이여. 앉으나 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소지(掃地)를 할 때나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찾는 그 공부밖에는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처음~10분3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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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심경확연망피차(心境廓然忘彼此) 대천사계총포함(大千沙界總包含)’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예장종경 게송 참고.
*(게송) ‘처처녹양감계마(處處綠楊堪繫馬) 가가유로투장안(家家有路透長安)’ ; 불교 장의(葬儀) 의식 「시다림(尸陀林) : 죽은 이를 위해 설법하는 의식」 ‘발인(發靷)’ 기감(起龕) 참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줄여서 대천(大千), 대천계(大千界), 대천세계(大千世界), 삼천세계(三千世界), 대천국토(大千國土)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 • 중천 • 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아상(我相) ; 산스크리트어 ātma-saṃjñā ①오온(五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형성된 아(我)를 실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 ②나라는 관념·생각.  자아(自我)라는 관념·생각. 남과 대립하는 나라는 관념·생각.  타자와 구분짓는 자의식 또는 그것을 형성하는 온갖 관념의 집합.
 
[참고]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 육조구결(六祖口訣). (무비 역해 | 불광출판부 | p135~136) (『육조 스님 금강경』 원순 옮김 | 도서출판 법공양 | p98~99) 참고.
 衆生佛性 本無有異 緣有四相 不入無餘涅槃 有四相 卽是衆生 無四相 卽是佛 迷 卽佛是衆生 悟 卽衆生是佛
 
중생과 불성이 본래 다름이 없건만 사상(四相)이 있으므로 인하여 무여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니, 사상이 있으면 곧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곧 부처님입니다. 미(迷)하면 불(佛)이 곧 중생이 되고,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불(佛)입니다.
 
迷人 恃有財寶學問族姓 輕慢一切人 名我相 雖行仁義禮智信 而意高自負 不行普敬 言我解行仁義禮智信 不合敬爾 名人相 好事歸己 惡事施人 名衆生相 對境取捨分別 名壽者相 是謂凡夫四相
 
어리석은 사람이 재산이나 학문 또는 출신[族姓]이 있음에 의하여 모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을 아상(我相)이라 하고, 비록 인의예지신을 행하나 뜻이 높다는 자부심을 가져서 널리 모든 사람들을 공경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인의예지신을 행할 줄 안다’ 하고 남을 공경하지 않음을 인상(人相)이라 합니다.
좋은 일은 자기에게 돌리고 나쁜 일은 남에게 돌리는 것을 중생상(衆生相)이라 하고, 어떤 경계에 대하여 취사분별하는 것을 수자상(壽者相)이라 하니 이것들을 범부(凡夫)의 사상(四相)이라 합니다.
 
修行人 亦有四相 心有能所 輕慢衆生 名我相 自恃持戒 輕破戒者 名人相 厭三塗故 願生諸天 是衆生相 心愛長年 而勤修福業 諸執不忘 是壽者相 有四相 卽是衆生 無四相 卽是佛
 
수행인도 또한 사상(四相)이 있으니, 마음에 능소(能所)가 있어서 중생을 업신여기는 것을 아상이라 하고, 자신은 계를 지킨다고 파계자를 업신여기는 것을 인상이라 합니다.
삼악도의 고통을 싫어하여 천상에 나기를 원하는 것이 중생상이요, 오래 살고자 부지런히 복업을 닦으면서도 온갖 집착을 잊지 못하는 것이 수자상이니, 사상이 있으면 곧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곧 부처님입니다.

*인상(人相) ; 사람은 고귀하므로 지옥 중생이나 축생들과 다르다고 집착(執着)하는 견해.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중생(衆生) ; ①생존하는 것. 목숨이 있는 것. 산것. 살아있는 것. 특히 인간. 사람들. 세상 사람. 유정(有情)이라고도 함. ②번뇌에 얽매여 미혹한 모든 존재. ③부처가 될 수 있는 요소. 본질.
*부처님[佛] ; 불(佛)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Buddha의 음사(音寫)인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 깨달은 분) · 각(覺 깨달음)이라 번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적광토(寂光土) ; 상적광토(常寂光土). 항상[常] 변하지 않는[寂] 광명[光]의 세계[土]. 부처님의 거처나 빛나는 마음의 세계를 이르는 말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 말씀 화/어조사 두)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단속(團束)해 나가면’ ; 일념단속(一念團束).
*일념단속(一念團束) ;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에, 중국(中國)에 동산숭장로(東山崇藏老)라고 하는 선지식이 그 제자를, 참선하러 나가는, 행각(行脚)으로 나가는 제자에게 설(說)한 그 법문(法門)을 해 주셨는데’ ;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동산숭장주송자행각법어(東山崇藏主送子行脚法語, 동산 숭장주가 행각을 떠나는 제자에게 하신 법어)」 (가로판) p119~131.

 

① (전강 선사께서 하신 법문)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② (송담 스님께서 하신 법문)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4) ;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 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 화상(霽山和尙)을 은사(恩師)로, 응해 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득도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가서 제산 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였고, 예산 보덕사(報德寺)ㆍ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도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특히 백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3세 때인 1921년에 곡성 태안사 동리재를 넘다가 개오(開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창 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그 뒤 당대의 선사들을 찾아가 탁마(琢磨)를 하여 인가(印可)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의 한암(漢巖) 선사를 찾아가자 한암 선사가 묻기를, “육조(六祖) 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같은 해 서울 대각사(大覺寺)의 용성(龍城) 선사를 찾아가 제일구(第一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고, 부산 선암사(仙巖寺)의 혜월(慧月) 선사를 찾아가 공적영지(空寂靈知) 공안으로 인가를 받았다.

1923년 수덕사 금선대의 만공(滿空) 선사를 찾아가 예배하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다시 예배를 하였다. 만공 선사가 거듭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여,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자, “네 견성(見性)이 견성이 아니다” 하며 여지없이 부인하고 상대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재발심하여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 하였으며, 반철만에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길로 만공 선사의 처소에 나아가 마조원상 공안을 여지없이 이르니,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誰知更有夜行人]!” 하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인가하고, 옛 조사들의 중요한 공안에 대한 탁마를 낱낱이 마쳤다. 그 뒤 만공 선사 곁을 떠나려 하자, 만공 선사가 묻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였다. 곧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 선사가 “옳다. 옳다![善哉善哉]” 하고,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이 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猿嘯在後峯 (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라는 전법게(傳法偈)와 함께 선종 제77대의 법맥(法脈)을 전수하였다.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에 임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광주에서 가게를 차리고 제자 송담(松潭)의 오도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 뒤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및 전라남도 종무원장(宗務院長)이 되었다.

1957년 담양 보광사에 있을 때 10년 묵언을 하며 수행하던 제자 송담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니 오도송은 이러하였다.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했던고!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에 탁마하고는 흔연히 인가하였다.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로 있을 때, 법석에서 제자 송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내리고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시니, 대중이 모두 이를 증명하였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강 소나무에는 흰구름이 날더라.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그곳에서 1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와 함께 1962년 대구 동화사(桐華寺) 조실, 1966년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長老院) 장로를 역임하였고, 1970년 용주사(龍珠寺)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였으며,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5년 1월 13일(음 갑인년 12월 2일) 영가를 위한 천도법문(薦度法門)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아, “어떤 것이 생사대사(生死大事)인고? 할(喝), 구구(九九)는 번성팔십일(翻成八十一)이니라”는 법문과 함께,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다음 앉아서 입적하였다. 세수 77세, 법랍 61세.
평생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제창하였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로써 학자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입적한 날까지 10여 년 동안 새벽마다 수행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으며, 특히 700여 개의 육성테이프를 남겨 후학들이 참선공부를 할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傳法弟子)인 송담을 필두로, 정공(正空)ㆍ정우(正愚)ㆍ정무(正無)ㆍ정대(正大)ㆍ정락(正樂) 등 50여 명과 손상좌 200여 명이 있다. 전강대종사 법어집으로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가 있다.

*속가(俗家) ; ①스님이 되기 전에 속했던 가정(집). ②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의 집.
*출가(出家) : [산스크리트어] pravrajyā 또는 pravrajita '집[家]에서 나온다[出]'는 말이다. 가정 생활을 떠나서 수도와 포교를 전문으로 하기 위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몸 출가[身出家]보다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등 삼독(三毒)의 불이 늘 붙고 있는 번뇌 망상의 불집에서 뛰어나오는 마음 출가[心出家]를 하여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32~133. (가로판 p139)
出家爲僧이  豈細事乎아.  非求安逸也며  非求溫飽也며  非求利名也라 爲生死也며  爲斷煩惱也며  爲續佛慧命也며  爲出三界度衆生也니라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  몸의 안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고,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니라.
*행각(行脚) : ①수행자가 일정한 주소를 갖지 않고 스승이나 벗을 구하여, 자기의 수행이나 교화를 위해 곳곳을 편력하는 것. ②스승의 슬하(膝下)를 떠나서 선(禪) 수행을 위해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좋은 벗을 구하여, 마치 떠도는 구름과 흐르는 물과 같이 발길 닿는 대로 여러 곳을 편력하는 것. 이것을 행하는 자를 행각승(行脚僧) 또는 운수(雲水)라고 함.
*은사(恩師) ; ①가르침을 받은 은혜로운 스승. ②자기를 출가시켜 길러 준 스승.
*선지식(善知識) ; ①정직하고 덕(德)이 있는 벗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이. ②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연(佛緣)을 맺게 하는 사람. ③지식(知識) • 선우(善友) • 친우(親友) • 선친우(善親友) • 승우(勝友)라고도 함.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딴생각 ; 별념(別念).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일분일초(一分一秒) ; '1분과 1초'로 아주 짧은 시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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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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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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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참선 (목적)2024. 2. 27. 13:36

§(170) (게송)등한식득동풍면~ / 번뇌와 망상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아니지만, 그것을 여의고 진여불성을 찾을 수가 없어. 바로 우리의 나아갈 길이, 정진해 나가는 데 눈을 박을 곳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현상에 집착해서 찾을 수도 없거니와, 현상을 여의고 찾을 수도 없다 이것입니다.

**송담스님(No.170)—1982년(임술년) 하안거 결제 법어(82.04.15.음) (용170)

 

약 8분.

 


등한식득동풍면(等閑識得東風面)헌디  만자천홍총시춘(萬紫千紅總是春)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시겁래생사본(無始劫來生死本)인디  치인환작본래인(痴人喚作本來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등한식득동풍면(等閑識得東風面), 등한히 봄바람이 얼굴에 스쳐가는 것을 식득(識得)을 했어. 느꼈다 그 말이여. 무심히 앉았는데 봄바람이 솔솔 얼굴을 스쳐가.
만자천홍총시춘(萬紫千紅總是春)이로구나. 일만 붉은 것과 천 가지 빨간 울긋불긋한 가지가지 꽃이 피는데 그것들이 모두가 다 이 봄이더라 그 말이지.

무시겁래생사본(無始劫來生死本)을, 비롯함이 없이 저 무량겁래로 오면서 마치 봄이 되면 천 가지, 만 가지 초목이 싹이 트고 잎이 피고 꽃이 피듯이 천사량(千思量) 만사상(萬思想)이—좋은 생각, 악한 생각, 좋지도 악하지도 않은 생각, 별별 생각이 햇볕에 문지 일어난 것이 보이듯이 그렇게 무명업식(無明業識)이 그렇게 동요, 생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거 그 생사(生死)의 근본무명(根本無明)을 갖다가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본래인(本來人), '참 자기'로 착각을 하고 있더라 그 말이여.

봄이 되면 잎이 피고 꽃이 피고, 푸르고 붉고 노랗고 희고 울긋불긋하게 온갖 꽃이 피는데, 그것들을 모두가 합해서 그것을 봄이라 그런다 그 말이여. 그러면 빨간 꽃 하나를 가리켜서 그것을 봄이라 할 수는 없어.
빨간 꽃, 노란 꽃, 흰 꽃, 파란 이파리 그리고 얼굴을 스쳐가는 시원한 봄바람, 그러한 것들을 모두 합해서 봄이라고는 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스쳐간 그 바람을 가지고 봄이라 할 수 없고, 노란 꽃 한 송이를 가리켜서 그것을 봄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 말이여.

우리 중생에 천 가지 만 가지 희로애락, 탐진치 삼독, 팔만사천 번뇌 망상, 육도법계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두가 합해서 그것을 법계(法界)라 그러고, 그걸 갖다가 실상(實相)이라 이러는데, 그렇다고 해서 번뇌 망상 하나 일어나는 것을 가리켜서 그것을 진여(眞如)라 말할 수 없고.
전체가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체(法身體) 아닌 것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멩이 하나를 가리켜서 법신(法身)이라 말할 수가 없어. 우리 일어나는 번뇌 망상 하나를 가리켜서 깨달음이라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여.

그런데 노란 꽃, 흰 꽃, 파란 이파리, 그것들을 여의고 봄을 찾을 수도 없더라. 번뇌와 망상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아니지만, 그것을 여의고 진여불성을 찾을 수가 없어.
바로 우리의 나아갈 길이, 정진해 나가는 데 눈을 박을 곳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현상에 집착해서 찾을 수도 없거니와, 현상을 여의고 찾을 수도 없다 이것입니다.
바로 들어가는 길도 여기에 있고, 그르쳐 빠지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처음~7분49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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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등한식득동풍면(等閑識得東風面)  만자천홍총시춘(萬紫千紅總是春)’ ; 주희(朱熹 1130~1200)의 시(詩) ‘춘일(春日)’ 「勝日尋芳泗水濱 無邊光景一時新 等閑識得東風面 萬紫千紅總是春」
*(게송) 무시겁래생사본(無始劫來生死本)  치인환작본래인(痴人喚作本來人)’ ; 
[참고 ❶] 『벽암록(碧巖錄)』 제99칙 '본칙평창(本則評唱)'
長沙云 學道之人不識眞 只爲從前認識神 無量劫來生死本 癡人喚作本來人 如今人 只認得箇昭昭靈靈 便瞠眼努目 弄精魂 有什麼交涉

장사경잠이 말하기를 '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다못 종래로 식신(識神)을 (법신으로) 그릇 인식을 하고 있더라. 식신은 무량겁으로부터 이어 온 생사의 근본인데, 어리석은 사람은 본래인(本來人)이라고 부른다. 지금 사람들이 단지 또렷또렷하고 신령한[昭昭靈靈] 그것을 진실이라 오인하여 눈을 치켜뜨고 그 헛것과 놀아나지만 본질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참고 ❷] 『선문염송·염송설화 5』 (동국역경원刊) 제495칙 본명(本命)' p36 장사경잠(長沙景岑)선사 게송 참고.
學道之人不識眞 只爲從來認識神 無始劫來生死本 癡人喚作本來身

 


[참고 ❸] 송담스님(No.258)—1985년 신수기도 입재(85.02.22).(7분45초)
학도지인불식진(學道之人不識眞)하고  지위종래인식신(只爲從來認識神)이로구나
무시겁래생사본(無始劫來生死本)인대  치인환작본래신(癡人喚作本來身)이로구나

학도지인(學道之人)이 불식진(不識眞)하고 지위종래인식신(只爲從來認識神)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된 것을, 참 이치를 아지 못하고, 다못 종래로 식신(識神)을 삼어, 식신을 가지고 자기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고 그렇게 그릇 인식을 하고 있더라 그말이여.

그 식신(識神),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눈으로 무얼 보면 청·황·적·백을 분별을 하고 크고 작은 것을 알고, 코로 냄새를 맡으면은 ‘저거 좋은 향내다’ ‘저것은 독한 가스 냄새다’ 그 향내를 분별하고, 손으로 무엇을 만져 보면 부드럽고 까끄러운 것을 알고 차웁고 더운 것을 알고.
생각으로—무슨 말을 들으면 ‘저것은 좋은 일이다, 저것은 나쁜 일이다’ ‘저것은 예쁘다 밉다’ 그런 것을 분별을 하고. 이러한 것이 모두 우리의 식신(識神)의 작용이라 할 것입니다.

그 식신(識神)이라 하는 것은 무시겁래(無始劫來)의 생사본(生死本)이여. 저 비롯함이 없는 저 무량겁 이전으로부터서 오는 낳다 죽었다, 낳다 죽었다하는 생사윤회의 근본인데.
치인(癡人)은 환작본래신(喚作本來身)이요. 어리석은 사람은 이 생사의 근본인 이 알음알이를 불러 가지고 본래신(本來身)이라 하더라 그말입니다.

참선을 하게 되면은 '바로 이 눈으로 무얼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할 줄 아는 이놈을 내놓고 어디가 마음이라 하는 것이 있을 것인가? 바로 이놈이 나의 면목이다' 이러한 착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깨달은 분상에 보면은 눈으로 볼 줄 알고, 귀로 들을 줄 알고, 코로 냄새 맡을 줄 알고, 차웁고 더운 것을 알고,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그놈을 여의고 본래신(本來身)이 없겠지마는,
깨닫지 못한 분상에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웁고 더운 것을 알고, 뜻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바로 그놈이 바로 부처다. 그놈이 진여다. 그것이 바로 나의 참 면목이다. 이놈을 여의고 무엇이 있을 것인가, 바로 이놈이다’ 그러한 생각을 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그 생각 낼 때에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과 거의 같은 표현인 것 같지마는 천지(天地)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그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일 수 있으나 또 한 사람은 영원히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생사(生死)의 근본을 그릇 인식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하는 사람은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이 ‘아, 이것이로구나’ 그 생각이, 살생을 하려는 마음보다도, 도둑질을 하려는 마음보다도, 음행을 하려는 마음보다도 더 무서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하셨지만, 산목숨을 죽이면은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다가 다행히 영겁 뒤에 사람의 몸을 받아 난다 하더라고 단명보(短命報)를 받거나, 평생에 병고(病苦)를 받는다 하셨습니다.

살생(殺生)이 그렇게 무서운 죄지만 식신(識神), 생사윤회의 근본인 이 알음알이를 나의 본래의 부처라고 착각하는 그 죄는 영원한 생사(生死), 다시는 헤어나기 어려운—불조(佛祖)가 출세(出世)하셔도,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출세하셔도 구제할 수 없는 그러한 무서운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살생하는 죄는 참회(懺悔)를 하면 용서받을 수가 있지마는, 생사의 근본인 알음알이를 ‘참나’의 면목으로 착각해서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은 참회할 길이 없고 구제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착각에 빠진 사람은 남에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공부해 나가는 사람은 식신(識神)을 갖다가 자기의 본래신(本來身)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24분24초~32분8초)

*등한히(等閒- 같을 등/한가하다·등한하다 한) ; 무관심하거나 소홀하게.
*무시겁래(無始劫來 없을 무/처음·시초 시/가장 긴 시간 겁/이래·그 이후로 래(내)) ; 시작(始作)을 알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 이래(以來). 측정할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劫과 刧는 동자(同字).
*무량겁래(無量劫來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이래·그 이후로 래(내))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 이래(以來). 劫과 刧는 동자(同字).
*문지 ; ‘먼지’의 사투리.
*무명업식(無明業識) ; 있는 그대로의 평등한 참모습을 직관하지 못하고 그릇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차별을 일으켜 모든 괴로움을 나게 하는 근본번뇌,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그릇된 마음작용[業識].
*근본무명(根本無明) ; 모든 번뇌(煩惱)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깨닫지 못하고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마음을 가리킨다. 곧 진여(眞如)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한 생각으로 가장 미세하게 움직이는 마음이며, 생사윤회의 근본이 된다.
지말무명(枝末無明)의 상대어. 무시무명(無始無明), 근본혹(根本惑), 근본불각(根本不覺), 근본번뇌(根本煩惱), 원품무명(元品無明) 등과 같은 뜻이다.
*본래인(本來人) ; 본래의 사람. 본래면목 또는 본래의 자아. 본분인(本分人)과 같은 말.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 · 인간 · 천상).
*두두물물(頭頭物物) ; ‘두(頭)‘는 사물이나 사람의 단위. ‘각각의 존재[頭頭]와 모든 사물[物物]’이라는 말. 곧 모든 것을 가리킨다.
*법계(法界) : [산스크리트어] dharmadhatu  dharma 곧 법은 온갖 유형 무형의 물질과 모든 일과 어떤 이치이거나를 다 들어 말하고  dhatu는 경계(境界) 또는 범위(範圍)란 말이다. 그러므로 온갖 것[萬有]을 총괄하여 하는 말이니, 우주의 전체와 진리의 전체, 법 성품(法性)의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태양처럼 일체법을 비추어 관조하는 광대무변한 지혜를 지닌 부처님.
한역어로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法身)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법신(法身) : [범]  dharma - kaya  ‘법 몸’이란 말인데, 법불(法佛) · 이불(理佛) · 실불(實佛) · 법신불(法身佛) · 법성신(法性身) · 자성신(自性身) · 진여불(眞如佛) · 법계성(法界性) 같은 말들이 모두 한뜻이며, 「선가귀감」 첫머리에 있는 ‘한물건’이란 것도 이것이다.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진여의 청정한 법계를 가리키며,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여기에 해당한다.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여의 본 바탕(眞如本體)’을 이름이니, 중생에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고 부처님이라고 더 특별할 것이 없어, 본래 깨끗하고 빛나고 두렷하여 무한한 공간과 무궁한 시간에 꽉 차 있으되, 네 가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離四句) 백 가지 아닌 것으로도 옳게 가르칠 수 없으며(絶百非), 무엇으로나 형용하여 볼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 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눈을 박다 ; ①한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②생각의 초점(焦點)을 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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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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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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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참선 (목적)2024. 2. 24. 11:19

§(163) (게송)다년농중조~ / 참선을 해 가지고 '깨닫는다' 그러는데 무엇을 깨닫느냐? 두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깨달은 것 / (게송)허공경계기사량~ / (게송)막파무심운시도~.

노란 개나리꽃, 빨간 진달래꽃, 파란 버들을 보실 때마다 그 사이사이에 우는 새소리를 들을 때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빌고 해제 법어를 마치고자 합니다.

**송담(No.163)—1982년 동안거 해제(82.02.08) (용163)

 

(1) 약 17분.

 

(2) 약 10분.

 

 

(1)------------------

다년농중조(多年籠中鳥)가  금일부운비(今日負雲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임하십년몽(林下十年夢)이  호변일소신(湖邊一笑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다년농중조(多年籠中鳥)가  금일부운비(今日負雲飛)로구나.
여러 해 동안 농 속에, 새장 속에 갇혀 있던 새가 오늘에사 새장 속에서 풀려나 가지고 저 하늘에 구름을 등지고 날으는구나.

임하십년몽(林下十年夢)타가  호변일소신(湖邊一笑新)이로구나.
숲속에서, 숲 아래서 10년 동안을 꿈을 꾸다가 이제 호숫가에서 한바탕 웃으니 마음이 새롭구나.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수레바퀴, 생사고해(生死苦海)라고 하는 그 새장 속에 갇혀서 구속 생활을 하다가 오늘에사 그 생사(生死)의 감옥 속에서 풀려나 가지고 저 갓없는 푸른 하늘에 자유자재로 날을 수가 있게 되었구나.
석 달 동안 안거(安居)를 한 것을 마치 새장 속에다가, 새장 속에 갇혀 있는 것에다가 비유해서 한번 생각해 본 것입니다.

석 달 안거를 어찌 구속된 생활이라고 말하기는 안 되었지만, 맘대로 외출도 못하고 맘대로 여행도 못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맘대로 못하고 대중 규칙에 따르면서 대중과 같이 모든—잠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목욕하고 삭발하고 참선하고 소제하고, 모든 생활을 대중 법도에 맞춰서 해야지, 자기 맘대로 단 한 가지도 자기 맘대로 할 수가 없으니 새장 속에 갇혀서 사는 새와 같이 비교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해제(解制)를 맞이해서 해제가 끝나면 당장 문밖에 나가 가지고 어디를 갈 것인가?
그동안에 만나고 싶었던 도반(道伴)도 찾아가고, 가서 찾아가 뵈옵고 싶은 선지식(善知識)도 찾아가 뵈옵고, 또 어디 성지(聖地)도 가보고 싶고 또 몸이 아픈 이는 의원도 찾아가 보고 싶고, 찾아간다고 해서 누가 붙잡을 사람도 없고 막을 사람도 없고, 동서남북 어느 곳이고 가고 싶은 대로 갈 수가 있습니다.

숲속에 10년 동안을 꿈속에서 살다가, 10년 동안을 숲속에서 참선(參禪)을, 도(道)를 닦는데 그 10년이라고 한 세월이 꿈결같이 지내갔다 이 말씀이여.
석 달이라고 하는 세월도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은데, 석 달 동안이 언제 어떻게 지내간 줄 모르게 지내갔습니다. 하루처럼 지내갔습니다. 하룻밤 꿈꾸듯이 석 달이라고 하는 세월이 지내갔습니다.

석 달 동안 그 지내는 것을 하나의 꿈이라고 생각한다면, 해제(解制)를 하고 어느 산기슭에 호숫가를 지나다가 그 호수 잔잔한 물결 위에 떠 있는 물새 퍼득이는 소리를 듣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런지 누가 알겠습니까.

흔히 해제가 끝나고 떠억 걸망을 짊어지고 어느 개천을 건너고, 어느 산골짜구니를 지나고, 어느 산마루를 넘어가다가 홀연히 꿈을 깨고 지혜의 눈을 떴던 우리들의 과거에 선각자 스님네가 종종 계셨습니다.
과거 선지식만 그러란 법은 없고,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法寶禪院)에서 정진한 여러 스님네, 여러 보살님네 가운데도 가시는 차 속에서 또는 어느 숲 아래 개천가를 거닐면서 또 어느 산골짜기 오솔길을 가시다가 확철대오 할런지, 나는 반드시 그러한 납자(衲子)와 불자(佛子)가 나올 것을 기대합니다.

대관절 이 참선을 해 가지고 '깨닫는다' 그러는데 무엇을 깨닫느냐?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조사(祖師)들이 갖은 고행(苦行),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하시면서 도를 닦아 가지고 과연 무엇을 깨닫느냐?

오늘 산승(山僧)은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조사님네가 깨달은 바를 감히 공개하고자 합니다.
다른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니고, 각기 자기의 눈이 자기의 두 눈은 옆으로 백혀 있고, 자기의 코는 세로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랐습니다. 두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이렇게 붙어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조사 스님네만 눈이 옆으로 붙어 있고, 우리 중생들은 그렇지 않느냐?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습니다.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조사가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함께 다 그 도리를 깨달랐고, 모든 부처님께 승사(承事)하면서 불법을 믿고 수행하는 많은 불자(佛子)들 납자(衲子)들도 목적이 뭣이냐 하면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배우기 위해서 이렇게 고향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형제간을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목숨 바쳐서 이렇게 고행을 하면서 일생을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장서방 이서방도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습니다. 모든 동서고금에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눈은 두 눈이 나란히 옆으로 백혀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건마는,
날마다 세수할 때마다 그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백혀 있는 것을 느끼면서 거울을 볼 때마다 그것을 확인하면서 그러면서도 눈은 옆으로 백혀 있고, 코는 길이로 세로 백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왜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까?

분명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세로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은 알면서도, 그 도리는 깨닫지 못한 탓으로 해서 우리들은 오늘도 육도윤회(六途輪廻) 생사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산승이 오늘 이 자리에서 감히 이렇게 공개하는 이유가 뭣이냐 하면, 이 법회가 끝나거든 거울을 보고 확인을 하시던지, 가만히 손으로 두 눈을 더듬어 보고, 자기 코가 혹 옆으로 붙어 있지 않나? 눈은 혹 세로 박혀 있지 않는가를 확인을 해 보시고,
진정 자기 코도 모든 불조(佛祖)의 코와 다름없이 눈은 옆으로 백혀 있고, 코는 세로 백혀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신 찰나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生死)에 근본을 요달(了達)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처음~16분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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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경계기사량(虛空境界豈思量)고  대도청유이갱장(大道淸幽理更長)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단득오호풍월재(但得五湖風月在)하야  춘래의구백화향(春來依舊百花香)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허공경계(虛空境界)를 기사량(豈思量)고, 갓없는 이 허공 경계를 어찌 사량(思量)으로 더듬어 알 수가 있겠는가?
대도청유이갱장(大道淸幽理更長)이니라. 대도(大道). 대도가 청정하고 한없이 깊은 그 이치는 다시 길고 무한한 것이다. 허공보다도 더 크고, 허공보다도 더 높고, 허공보다도 더 맑은 이 대도(大道), 사량심(思量心)으로는 도저히 더듬어 알 수가 없는데.

단득오호풍월재(但得五湖風月在)라, 다못 오호(五湖)에 풍월(風月)이 있음을 얻어. 가을에는 서늘바람이 불고 둥근달이 휘황창 밝으며 단풍이 지고, 겨울에는 눈보라가 치고 기러기가 나르고.
그러다가 춘래의구백화향(春來依舊百花香)이라. 봄이 오면 옛을 의지해서 온갖 꽃이 향기롭게 피는 것, 가을이 오면 서늘해서 국화가 피고, 봄이 오면 따뜻해서 온갖 꽃이 난만(爛漫)히 피는 이 도리가 한없이 넓고 깊고 크고 맑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써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 도리를 여지없이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모질게 추웠던 삼동(三冬)이 지내가고 입춘을 맞이해서 이제 해제를 해서 머지않아서 산과 들에는 푸릇푸릇 풀과 나무에 싹이 트게 되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개나리는 노랗게 피어 늘어지고, 산에 산에는 빨간 진달래가 불타듯이 피어나겠습니다. 노란 개나리꽃, 빨간 진달래꽃, 파란 버들을 보실 때마다 그 사이사이에 우는 새소리를 들을 때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빌고 해제 법어를 마치고자 합니다.

 

 

 

막파무심운시도(莫把無心云是道)하라  무심유격일중관(無心猶隔一重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막파무심운시도(莫把無心云是道)하라. 무심(無心)을 잡아서 이것이 도(道)라고 이르지를 말어라.

무심(無心)도 유격일중관(猶隔一重關)이라. 무심(無心)도 오히려 한 중관(重關)을, 무거운 관(關)이 맥혀 있느니라.

 

도를 닦으면 자꾸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없어져서 무심(無心) 경계에 들어가고, 일체 번뇌와 망상이 끊어져 가지고 삼세육추(三細六麤)의 모든 번뇌가 다 끊어지면 무심 경계에 들어가는데, 그 무심 경계를 가지고 도(道)라고, 도라고 말을 하지를 말아라. 무심 경계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오히려 한 중(重)한 관(關)이 맥혀 있느니라.

 

오늘 해제를 했는데, 보름 뒤에 음력 2월 초하루에 선방 스님네들은 산철 결제를 하게 됩니다. 2월 초하룻날 산철 결제를 해 가지고 3월 그믐날 해제를 합니다. 이 두 달 동안 산철 결제를 해 가지고 이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두 달 동안을 정말 알뜰하게 정진을 하시게 되겠습니다.(16분38초~26분23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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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다년농중조(多年籠中鳥)~  ; 『선림구집(禪林句集)』 (일본) (영조선사英朝禪師 편집)
*(게송) 임하십년몽(林下十年夢) 호변일소신(湖邊一笑新) ; 『괴안국어(槐安國語)』 제2권. 日僧 白隱慧鶴(1685~1768) 著.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생사고해(生死苦海) ; 생사윤회하는 고통(苦痛)의 바다[海].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윤회의 고통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 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무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법도(法度 법 법/법도 도) ; 법칙(法則)과 제도(制度). 법규(法規)라고도 한다. 지켜야 할 규칙이나 의례를 가리키는 말이다.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보선원(法寶禪院) ; 인천시 미추홀구 주염로 43에 있는 용화선원(龍華禪院)에 있는 스님 선방(禪房)의 이름.
*납자(衲子 깁다·꿰매다·스님·장삼·스님의 옷 납/사람 자) ; 「납의(衲衣)를 입은 사람[子]」이란 뜻으로 스님이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납(衲)」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수지백납천창리) 三足金烏徹天飛(삼족금오철천비)』란 것이 있다. 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本色)을 말하는 것이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부처님[佛] ; 불(佛)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Buddha의 음사(音寫)인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 깨달은 분) · 각(覺 깨달음)이라 번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공경하는 뜻으로,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불교(佛敎)’ 그러면, ‘깨닫는[佛] 가르침[敎]’ ‘깨닫는 길’ 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깨달음 ; 각(覺). 진리(부처님의 가르침),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고행(苦行) ; ①천상(天上)에 태어난다든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로 단식(斷食)이나 호흡의 제어와 같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닦았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육체에 고통을 줄수록 정신이 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본능과 욕망을 끊는 것.
③의식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 12두타(頭陀)의 고행이 여기에 상응하며 정진(精進)의 의미를 포함한다.
④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한 이에 상응하는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 석취미모(惜取眉毛).
*석취미모(惜取眉毛 아낄 석/어조사 취/눈썹 미/터럭 모) ; '눈썹을 아낄지어다' 또는 '눈썹 아까운 줄 알라'
경(經)의 뜻을 잘못 해석하여 진리로부터 동떨어진 설법을 하면 미모(眉毛, 눈썹)가 빠진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런데 ‘한 물건(一物)’이라 표현하는 진리의 본체는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고 하였으니,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설법을 한다'는 것은 선지식의 중생을 위한 간절한 자비심을 나타내는 뜻이다.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 刊) p11~12.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너희들은 알겠는가?」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說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 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三敎聖人이 從此句出이니라 誰是擧者오 惜取眉毛어다
삼교의 성인이 모두 이 글귀를 쫓아 나왔느니라. 뉘라서 말할 텐가, 눈썹을 아낄지어다!

[참고 ❷]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247. (가로판 p253) '권말(卷末)에'
권말(卷末)에

인간의 두뇌와 손으로 이룩된 물질문명에 의해서 인간 자신들은 물론 온 자연계가 병들어 가고 있고 자칫하면 파멸해 버릴지도 모를 위기에 놓여 있다. 이런 시점에서 나와 인류와 자연을 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자아를 자각함으로써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러한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갈 때 온 세계는 한 집안이 되고 법계는 적광토가 될 것이다.
선가귀감은 서산대사의 저술로 팔만장경의 골수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의 안목이다. 종파와 종교를 초월해서 참사람 되는 길이 여기에 있다.
금번에 조선조 목판본 8~9종을 참조하여 원문(原文)과 현토(懸吐)를 바로잡았고 번역은 선학원판(1948년)을 본(本)으로 했으되, 지나친 의역(意譯)과 현대어투는 고전답게 교정하였다. 국내외적으로 참선에 대한 관심도가 나날이 높아가고 있는 이때에 참선수행의 올바른 지침서가 간절히 요청되고 있으므로 분(分)을 생각지 않고 감히 선가귀감을 간행하게 되었다. 이 책이 자아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면 눈썹을 아끼지 않은 보람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자기의 두 눈은 옆으로 백혀 있고, 자기의 코는 세로 붙어 있다’ ; 안횡비직(眼橫鼻直).
*안횡비직(眼橫鼻直) ; ‘눈은 가로 박혔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다’ ‘모든 사상(事象)이 그대로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는 뜻. 유록화홍(柳綠花紅)이라고 하는 것과 동일.
[참고]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함허득통 설의(說誼) 참고.
十類生與十方佛  一時成道  十方佛與十類生  同日涅槃  生佛相  本寂  能所度  亦寂  能所度  旣寂  我人相  何有  伊麽則  釋迦眼橫鼻直  人人亦眼橫鼻直  同居常寂光土  共受無生法樂

시방세계 온갖 중생이 시방의 부처님들과 더불어 일시에 도를 이루고, 시방의 부처님들이 시방세계 온갖 중생과 같은 날 열반(涅槃)하니 중생과 부처님의 상(相)이 본래 공적(空寂)하고, 능도(能度, 제도하는 이)와 소도(所度, 제도받는 이)도 또한 공적(空寂)이로다.
제도하는 이[能度]와 제도받는 이[所度]가 이미 공적한데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 어찌 있으리오.
이런즉 석가(釋迦)도 안횡비직(眼橫鼻直, 눈은 가로 박혔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다)이요, 사람사람도 또한 안횡비직이니 상적광토(常寂光土 법신불이 머무르는 정토)에 함께 머물러 무생법락(無生法樂 생멸이 없는 법의 즐거움)을 같이 받도다.

*승사(承嗣 받들 승/이을 사) ; 후임자나 후대가 선임자나 선대의 권리나 의무를 뒤이어 물려받음.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불조(佛祖) : 부처님과 조사(祖師), 불(佛)은 삼세제불(三世諸佛), 조(祖)는 역대(歷代)의 조사를 말함.
*요달(了達 마칠·완전히·밝을 료/통달할·이룰 달) ; ①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밝게 통달함. ②깨달음에 도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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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허공경계기사량(虛空境界豈思量)~’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야부 게송 참고.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사량계교(思量計較). 사량분별(思量分別).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난만히(爛漫- 빛날 란(난)/넘쳐 흐를 만) ; ①꽃이 한창 만발하여 성하게. ②빛이나 광채가 어지롭도록 강하고 선명하게. ③의견을 주고받는 일이 충분히 많고 활발하게.
*삼동(三冬) ; 겨울철의 석 달.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 회광(回光). 회광반조(廻光返照).
*회광반조(廻光返照 방향을 바꾸다·돌리다 회/빛 광/돌이키다 반/비칠 조) : 회광자간(廻光自看).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자신의 본성을 조견(照見)하는 것. 언어 문자에 의하지 않고 바로 자기 본래의 면목(面目)을 보는 것.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회(廻)'는 전환의 뜻이고, '광(光)'은 광명, 즉 불심 · 본성 · 본심을 가리킨다. '반조(返照)'는 석양이 비치는 것을 의미하는데, 밖으로 구하는 마음을 안으로 향하여 본심 · 불성을 밝힌다는 의미이다.

[참고] 송담스님(No.524)—19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 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 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오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게송) 막파무심운시도(莫把無心云是道)  무심유격일중관(無心猶隔一重關) ; 『전등록(傳燈錄)』 제29권. 동안찰선사(同安察禪師) 십현담(十玄談) 참고.

[참고] 동안찰선사(同安察禪師) 십현담(十玄談)에서 ‘심인(心印)’.

問君心印作何顏 心印何人敢授傳 歷劫坦然無異色 呼爲心印早虛言 須知本自虛空性 將喻紅爐火裏蓮 莫謂無心云是道 無心猶隔一重關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나 망상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구체적인 대상 속에 있으면서 그 대상에 대한 어떤 망상 분별도 없으므로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없다거나 사물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며, 대상을 지향하되 그 대상에 대한 망상 분별과 집착이 없음을 나타낸다. 또한 일정하게 정해진 마음의 양태가 없이 대상에 응하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지옥취(地獄趣)—>지옥도(地獄道).

*삼세육추(三細六麤 석 삼/가늘 세/석 삼/거칠 추) ;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의 3상(相)과 지말무명(枝末無明)의 6상(相)을 말함. 3세(細)란 그 상(相)의 작용이 미세하므로 세(細)라 하고, 6추(麤)는 거칠고 엉성하기 때문에 추(麤)라 함.

 

청정한 진여의 마음이 근본무명에 의하여 망동하여 유전하는, 진실에서 어긋난 마음으로의 3가지 미세한 마음 상태[三細]와 이어지는 거칠은 6단계의 마음 상태[六麤]를 설명하는 '대승기신론'에서 밝힌 교설.

*산철(散철) ; 본철(本철 - 하안거, 동안거)가 아닌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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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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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참선 (목적)2021. 8. 17. 06:27

§((151)) 참선 공부는 내가 참나의 면목(面目)을 깨닫는 공부, 내게 있는 나의 마음자리를 내가 찾는 공부라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 / 참선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법이기 때문에 이 참선법은 불교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에 수행 방법이요, 모든 종교 가운데에 불법이 최고에 종교가 된 원인.

최상승법은 대뜸 처음부터 '나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나도 결정코 이 몸을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다'고 믿는 데부터서 시작을 해야 하는 것 / 이 최상승법은 목숨 바쳐서 믿고, 목숨 바쳐서 여법(如法)하게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나고 마는 것.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로 돌아서는 것.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 생사해탈 묘법(妙法)이라 하는 것 / 핑계 대는 것은 다 발심(發心)을 못한 탓 / 사바세계라 하는 것은 원래가 믿지 못할 곳. 즐거운 것도 잠시요. 건강한 것도 잠시.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우리 중생들이여. 우리도 다맛 지혜의 눈만 뜨지 못했지, 분명 우리도 부처님 /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을 다 읽은 공덕과 같다 / 참선법은 날마다 해 가지고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해 갈수록 꽈악 맥혀서 알 수가 없는 공부.

이 공부가 최상승이요, 반드시 해야 하고, 하면 꼭 되는 것이지만, 첫째,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하는 것 / 바른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아서 공부를 했고, 바른 스승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아야 그것이 바른 스승이다 /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되는 것 / (게송)산광수색리~.

**송담스님(No.151)—1981년 9월 첫째일요법회(81.09.06) (용151) (참선)

 

 

 

(1/3) 약 17분.

 

 

(2/3) 약 13분.

 

 

(3/3) 약 14분.

 

 


(1/3)----------------

이 공부라 하는 것은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입니다.
이 공부는 내가 참나의 면목(面目)을 깨닫는 공부, 내게 있는 나의 마음자리를 내가 찾는 공부여. 이 공부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은 누구라도 하면 되는 것이고, 또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다 '참선, 참선' 요새 굉장히 그 참선이라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불법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이 참선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참선이 좋다고 하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그러면 참선을 내가 직접 하려고 하는 마당에는 '어디에 가서 참선을 지도를 받을 것인가? 어떻게 참선을 해야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문제에 부딪히면 망연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에 대한 책도 많이 나와서 책을 사 봐도 잘 모르겠고, 어떤 스님을 만나서 물어봐도 확실하지를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앉아서 몇 달, 몇 해씩을 해 봤지만, 이것이 옳게 하는 것인지, 잘못하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참선은 참 어려운 것이다. 여간해서는 참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 결론에 도달해 가지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낸 그런 거사님이나 보살님도 더러 계신 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참선은 제일, 불법 가운데에 제일 높은 수행 방법이면서 제일 쉬운 것입니다.
실지로 하려고 하는 마당에는 '어디 가서 배워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사실 내용에 있어서는 가장 쉬운 것이고 간단한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입니다.

불법(佛法)에 이 참선(參禪)이 없으면 쌀에 알맹이를 빼내 버린 거와 같은 것입니다. 광석 속에 금덩어리를 빼내 버린 광석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에 있어서 참선이라고 하는 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이 없다면 불교는 한낱 다른 종교와 별로 특수하게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참선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이 참선법은 불교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에 수행 방법이요, 모든 종교 가운데에 불법이 최고에 종교가 된 원인인 것입니다.

「이 참선법은 종교라 하기보다는 사람으로서 참사람이 되는 바른길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유교나 그밖에 종교에 있어서 '착한 일을 해라, 윤리 도덕을 지켜라, 바르게 살아라' 그러한 내용의 교리가 다른 종교에도 다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역시 다 그런 내용에 말씀도 참 많지만, 다맛 그런 것에 그쳐 버린다면 불교에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달라서 나도 석가모니 부처님과 똑같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데에 그 특수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종교인은 "그러면 석가여래 부처님은 사람이냐? 뭣이냐?"
"아, 그 사람이다"

"아하! 그러면 부처라 하는 것이 별로 별것이 아니로군요"
"왜 그리야?"

"깨달라 봤자 사람이라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겠느냐"고, 이렇게 말을 걸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면서 깨달음을 얻어 가지고 성현 가운데에 성현이 되셨다. 진리와 하나가 되셨다' 한 점에 있어서 우리는 더 부처님을 존경하게 되는데.
우리도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부처님께서 전(傳)하신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해서 열심히 도(道)를 닦으면, 목숨 바쳐서 도를 닦으면,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성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믿는 우리 불자(佛子)가 맨 먼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말세(末世)에 태어난 죄 많은 중생이 머리도 나쁘고, 지식도 없고, 몸도 건강틀 못하고, 여자로 태어났고, 우리 같은 사람이 참선을 한들 무슨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겠는가? 그저 금생에는 참선이 좋다 그러고, 선방 토방에 신발만 벗어 놔도 그 공덕으로 지옥에는 안 떨어진다고 그러니 금생에는 인연이나 맺으리라' 이러한 지나치게 겸손한 생각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만,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최상승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은 대뜸 처음부터 '나도 견성성불할 수 있다,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나도 결정코 이 몸을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다고 믿는데 부터서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고 대든 것하고, 벌써 처음부터서 안 될 줄 알고 하는 것과는 그 결과적으로 결과에 나타난 것은 하늘과 땅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참선법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을 할 때에도 '된다'고 믿고, 된다고 믿어지는 일에 온갖 정성을 쏟아야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안 될 줄 알고, 실패할 줄 알고, 심심풀이로 시험 삼아서 해 갖고 그 일이 백(百)에 하나도 성공할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범부(凡夫)를 고쳐서 성현(聖賢)을 맨드는 이 공부를 목숨을 바쳐서 해도 어려웁고 어려울 텐데. 처음부터 안 될 것을 알고, 안 될 폭을 대고, 미리서부터서 넘어질 자리부터 보고 씨름을 하려고 하는 사람과 같애서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 '나도 하면 된다'고 하는 신념. 그것이 서면 공부는 절반은 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공부는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꼭! 성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기 때문에 올바르게만 찾으면 틀림없이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떠한 보물이나 물건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을려고 할 때에는 혹 찾어지기도 하고, 혹 안 찾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마치 내 호주머니 속에 있는 어떤 물건을 찾은 거와 같애서 그 호주머니 속에 손만 집어넣으면 거기에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 공부는 믿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성취를 할 수가 있다고 단언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 '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나의 마음, 사람 사람이 다 '마음' 소리를 다 하고, '마음'이라는 것을 다 그 말을 알고 있지만, 사실 그 마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그것을 본격적으로 그 마음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은 정말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우리 일상생활 속에 단 일 초 동안도 우리로부터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우리와 같이 있는 것이지만, 이 마음이라 하는 것은 모냥이 없는 것이고, 형상이 없는 것이라 분명히 거기 있는데 찾으면 알 길이 없는 것이고, 보이지를 아니하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두 손을 이리저리 내저어서 더듬어 봤자 그 마음은 잡히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지만, 모든 것을 보는 그 자체를 볼려고 하면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분명히 눈을 통해서 볼 때 거기에 있었는데, 그 보는 그놈을 돌이켜서 다시 볼려고 하면 자취가 없습니다. 여기에 깨닫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웁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한 말을 과거에도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그르친다.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건 깨달음을 100프로 숨김없이 다 표현을 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은 목숨 바쳐서 믿고, 목숨 바쳐서 여법(如法)하게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에 선지식, 도인(道人)들이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라' 선지식 말 한마디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버린 분이 참 많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냐? 여지없이 믿어 버렸기 때문에, 믿으면 말 한마디에 끝나는 까닭인 것입니다.

설사 한마디 말 한마디에 깨닫지를 못한다 하더라도 화두 한마디를 받아 가지고, 여지없이 앞도 생각하지 않고, 뒤도 생각하지 않고, 옆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그 한마디 화두만을 의심(疑心), 의관(疑觀) 참구(參究)해 가면 조끔도 깨달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오직 이 한마디 의심뿐인 것입니다.

이 한마디의 의심에 철두철미(徹頭徹尾)해 버리고, '부처님이 나와서 설법을 한다. 깨닫게 해 준다' 해도 솔깃하지 아니하고, '염라대왕이 와서 끌어간다' 해도 조끔도 두려운 생각도 없고, 다못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한 앞에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염라대왕이 쇠사슬을 가지고 옥졸이 와서 묶어간다 하더라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되어 버린다면 그 사람은 깨달음을 기다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바로 최상승법이 어려웁고도 쉬웁고, 쉬우면서 어려운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판치생모' 화두뿐만이 아니라 '무자(無字)‘ 화두를 한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시삼마(是甚麼) '이뭣고?' 화두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을 할 때에도 '이뭣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뭣고?'
똥을 눌 때도 '이뭣고?'
일을 할 때에도 '이뭣고?'
차를 탈 때도, 속이 상할 때에도 퍼뜩 '이뭣고?'

다못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깨닫기를, 공연히 급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랜다고, 바래고 기다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깨달을려면 오직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따름인 것입니다.(16분5초~33분10초)




(2/3)----------------

우리는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잠시도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한 때가 없습니다. 눈으로 볼 때 일어나고, 귀로 무엇을 들을 때 일어나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일어나고, 혀로 음식을 맛볼 때 일어나고, 말할 때 일어나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처 일체시에 잠시도 생각이 안 일어날 때가 없는데, 일어나는 그 생각이 결국은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원인이 되는 것이여.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話頭)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이고, 생사해탈 묘법(妙法)이라 하는 것이여.

망상(妄想)이 일어나는 것을 조끔도 성화 댈 필요가 없어. 무슨 망상이건 상관이 없어. 일어났다 하면 퍼뜩 '이뭣고?' 백 번 일어나면 백 번, 천 번 일어나면 천 번.

백정(白丁)이 소를 때려잡을려고 도끼를 쳐들다가도 '이뭣고?'해 가지고 확철대오한 광액도아(廣額屠兒)라고 하는 도사가 있습니다.
백정이 소를 때려잡기 위해서 도끼를 쳐들 그 찰나에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거든, 그밖에 어느 장소, 어느 시간,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알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일이 많으니까 공부를 못한다. 복잡해서 공부를 못한다. 장사하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몸이 아프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다 발심(發心)을 못한 탓으로 핑계 대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참선은 기본자세가 있어서 가부좌(跏趺坐)나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떠억 정진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자세고, 그럴만한 시간이 있고, 그럴만한 장소가 있으면 기본자세로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시간과 장소가 없다고 해서 시간이 흘러가지 아니한 것이 아니고, 생사가 죽음이 나에게 오지 않고 기달려 주는 것이 아닐 바에는, 우리는 핑계 대고 공부를 아니할 수는 없는 것이여.
일이 바빠서 참선을 안 하다가 지옥에 왔다고 해서 염라대왕이 조끔도 사정을 봐주지는 않습니다.

정신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이 다 그것이 내 자신이 과거에 지은 죄업(罪業)으로 인해서 그러한 상황 속에 놓여져 있는데, 그러한 상황을 핑계 대고 공부를 아니하면 내생에는 더 고약한 환경에 태어날 것이요, 까딱하면 사람으로는 태어나지도 못하고 축생이나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 뻔한데, 그러한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일수록에 더 발심(發心)을 해야 하고, 더 이를 악물고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 놓여진 사람은 우선 아무 고통이 없으니까,
'참선이 무슨, 불법이 뭐, 나한테는 상관이 없다. 그냥 이대로 나쁜 짓 안 하고 살아가면 되었지 무슨 불교가 필요하냐? 뭐 참선 이까짓 것 필요...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고, 심심하면 텔레비젼도 보고, 그렇지 않으면 나가서 테니스도 치고, 등산도 하고, 아 이렇게 살면 족하지. 뭐 그렇게 앉어서 무릎 아프고, 허리 아프게 앉어서 무슨 참선을 하고... 인생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런 부질없는 지서리를 할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참선을 하라'고 하면 '쯧, 스님네들이나 하시지' 삐긋이 웃고 남의 일—자기하고는 상관없는 것처럼 아주 자신이 만만한 그러한 분들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그분도 역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난 사람이라 다행히 전생에 조끔 복 지은 것이 있어서 그놈 꽂감 빼 먹듯이 빼 먹느라고 별걱정이 없지만, 그 꽂감 몇 접 사다 논 것이 있기로서니 한 개 두 개 빼 먹다 보면 줄어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놈이 바닥이 나면 몸이 아프게 되기도 하고, 엊그제까지 건강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간경화증, 동맥경화증, 무슨 암, 무슨 당뇨병, 그러한 진단만 나왔다 하면, 어제의 그 쟁쟁 당당하던 그 용기가 간 곳이 없고, 그 많은 재산도 싫고, 명예 권리도 싫고, 아무 정황이 없다 그 말이여.
사업이 잘되어 갈 때는 큰소리치다가 사업이 벌써 기울어져 가지고 여기서 부도가 툭! 터지고, 저그 터지고 하면 아무 정황이 없어.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 죽게 되거나 하면 또 정신을 못 채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 하는 것은 원래가 그렇게 믿지 못할 곳인 것입니다. 즐거운 것도 잠시요. 건강한 것도 잠시. 일 초 일 초가 지내서 한 시간이 지내가고, 한 시간 한 시간이 지내서 하루가 지내고, 하루하루가 지내서 일 년이 지내고, 일 년 일 년이 지내다 보면 벌써 흰머리가 나고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가 아프고.
그래도 잘 타고난 사람은 환갑도 넘기고 칠십도 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뱃속에서도 죽고, 낳다가도 죽고, 두 살 세 살에도 죽고, 10살 20살에도 죽고, 30~40에 막 재미있게 살 만하다가 턱 꺼꾸러지고. '인생이 무상(無常)하다' 하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 죽은 것은 보고 '무상하다'고 하면서, 자기 앞에 무상함이 돌아 닥쳐오고 있다고 하는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어. 이것이 바로 '어리석다' 하는 것이여. 어리석은 탓으로 해서 우리는 윤회(輪廻)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을 이것을 '지혜(智慧) 있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여.

지혜, 부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지혜(智慧)의 눈을 뜬 범부(凡夫)이신 것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과 부처님의 차이는 그것뿐인 것입니다.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智慧)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우리 중생(衆生)들이여. 우리도 다맛 지혜의 눈만 뜨지 못했지, 분명 우리도 부처님이여.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과 마음과 부처, 이 세 가지는 추호도 다름이 없는 차별이 없는 하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저의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신다면, 그동안에 참선을 하신 분은 정말 오늘부터서는 단 일 초 동안도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정말 착실하게 정진을 하시게 될 것이고, 그동안에 참선을 본격적으로 믿고 실천하지 아니하고 '차츰 하리라. 아들딸 여워 놓고 하리라. 집이라도 하나 장만해 놓고 그때부터서 하리라. 나이 좀 먹거든 하리라' 이러한 뒤로 미루신 그런 분도 오늘부터서는 착실히 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특별한 의식이 있고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것도 아니고, 지식의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남녀노소도 상관이 없고,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여.
불경(佛經) 책을 많이 읽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여, 아직 불경을 한 권도 읽지 아니했어도 상관이 없어. '나모라 다나다라' 염불(念佛) 한마디도 외우지 못해도 그것도 상관이 없어.

다못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만 해 가면 되는 거여.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은 공덕과 같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서 올바르게 이해를 했다면 바로 '이뭣고? 해야겄다. 이뭣고? 해라' 그 말 한마디로 요약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경을 수십 권을 다 읽었어도 '이뭣고?'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그 경 잘못 읽은 사람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참선법을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이여. 소승법이 있고, 대승법이 있고, 그 위에 최상승법이 있는데, 이 참선법이 바로 그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33분11초~45분46초)





(3/3)----------------

이 최상승법은 날마다 해 가지고 조끔씩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여. 해 갈수록 꽈악 맥혀서 알 수가 없는 공부가 바로 이 참선법이여.
'저는 참선을 한 지가 3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정말... (녹음 끊김) 뭣헌 사람은 "공부를 하면 뭣이 흰옷 입은 것이 휙 지내가고 무슨.. 뭣이 부처님이 나와서 뭣을 주어서 받으려고 하니까 없어져 버리고 그랬다"고. 아주 자기가 공부를 잘한 것처럼 또 "부처님이 뭣을 줘서 그놈을 먹으니까 시원하니 아주 배창시까지 아주 얼음을 먹은 거 같이 그렇게 시원하고 좋더라"고, "이거 내가 도통한 거 아니냐"
그 말을 앉은 자리마다 이 새로 들어온 신도들한테 얘기를 해 가지고 자기는 아주 공부를 잘한 것처럼 으시대고 "이 소리는 누구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가지고는 그 소리를 듣고는 자기도 "뭣이, 뭐이 나와 가지고 무슨 뭘 줄까 하고, 밤낮 눈을 감고 몸부림을 쳐도 아무도 안 준다"고, "내가 공부를 잘못한 것이 아니냐"
"아니 그 소리를 어디서 들었냐?" 헌께 "자기가 그랬단 말 하지 말라고 하드라"고.

세상에 그분이 퍽 점잖은 분이고, 불교를 아주—소시(少時) 때부터 과부가 되어 가지고, 소시 때부터 삼사십 년간을 참선을 한 분인데, 세상에 그러한 요물 같은, 요사스런 삿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이여.
그 틈틈이 경을 읽어 가지고 설법을, 뭐 부처님 경에 있는 얘기를 하는데 어떻게 잘하는지 몰라. 그러다 내가 들어가면 딱! 입이 붙어버려.

참선이라 하는 것은 뭘 아는 것이 아니고, 뭣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여. 무슨 부처님이 나타나고, 관세음보살이 나타나고 그런 것이 아녀.
혹 참선을 하다 보면 혼침(昏沈)이 들어서 비몽사몽간에 뭣이 혹 보이기도 하고, 그리 아니한 것은 아니나, 그것이 까빡할 동안에 헛것이 보인 것이지, 어찌 그것이 견성(見性)이요 도통(道通)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런 것은 얘기할 거리도 못 되는 것이고, '하아, 내가 이거 도통하려고 이런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도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여.

참선은 '성성(惺惺)하다' 하는 것은 혼침(昏沈)에 떨어지지 아니한 것을 성성하다 그런 거여. 성성하면서도 적적해야 하는 거여. '적적(寂寂)하다'는 것은 산란심(散亂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여.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하면서도 성성한 가운데에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이 터억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의단(疑團)이, 의심(疑心)이 산을 봐도 '이뭣고?'
구름을 봐도 '이뭣고?'
흘러가는 강물을 봐도 '이뭣고?'

마치 칠십 먹은 노인이 과부가 외아들이 저 타관(他官)에 가서 온다고 하는 날짜가 되어도 오지 아니하고—한 달이 되어도 아니하고, 두 달이 되어도 아니하고, 일 년이 되어도 일자(一字) 서신(書信) 한마디 없이 소식 없을 때, 앉으나 서나, 밥을 먹으나,

먼 산에 구름을 봐도 아들 생각,
날아가는 새를 봐도 아들 생각,
떡을 봐도 아들 생각,
밥을 봐도 아들 생각,
맛있는 음식을 봐도 아들 생각,
어떤 청년을 봐도 아들 생각,
자나깨나 아들 생각하듯이 '이뭣고?' 자나깨나 '이뭣고?'

처음에는 잊어버리는 시간이 많지만, 자꾸 챙기고 또 챙기고 하면 그것도 길이 들어서 하려고 안 해도 제절로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이 걸어갈 때도, 앉아서도, 누워서도, 밥을 먹을 때도, 차를 탈 때도, 누가 나에게 억울한 소리를 할 때에도 퍼뜩 '이뭣고?' 이렇게 되어 진 때가 꼭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그것을 조끔 공부에 공부 길에 들어섰다. 조끔 득력(得力)을 했다. 혹 이렇게는..

그런 것도 '아, 내가 인자 공부가 아주 잘된다' 그것도 뽐낼 것도 되지도 안 혀. 인자 그렇게 되어 가야 인자 당연한 것이고, 그렇게 되어도 '좋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고, 한결같이 공부를 더 잘 지어 갈뿐이지, 그것도 어디다 뭘 자랑할 것, 그것도 내놓을 것이 아니여.

삿된 소견, 삿된 경계 나타나는 걸 가지고 자랑을 하고, 그렇게 더군다나 또 그런 소리를 듣고 자기도 빨리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앉았다면 어찌 그것을 최상승 학자라 할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이 공부는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 하는 공부는 백이면 백하나까지 못쓰게 되는 것이다.
이 공부는 바른 스승 없이 하면 열심히 할수록 빨리 미치거나, 삿된 지경에 경계에 빠지거나 하는 것이여. 하다 말다 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열심히 할수록 빨리 못쓰게 되는 것이 이 공부여.
그래서 이 공부가 최상승이요, 반드시 해야 하고, 하면 꼭 되는 것이지만, 첫째,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바른 스승이, 어떠한 사람이 과연 바른 스승이냐?

'바른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아서 공부를 했고, 바른 스승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아야 그것이 바른 스승이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려면 자기 자신이 정말 바른 신심(信心)을 가지면 묘(妙)하게 불보살(佛菩薩)의 지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불보살의 화현(化現)은 이 사바세계에 육도법계(六途法界)에 가뜩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심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라도 불보살의 화현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라 하는 것도 안에서 찾아야지, 밖에서 찾으면 그것은 참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유루복(有漏福)도 그렇거든 하물며 이 무루법(無漏法), 최상승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서—나, 참나를 찾아야 되는데, 참나는 번뇌 망상, 번뇌 망상을 버리고 찾지 말고, 중생의 탐심(貪心) · 진심(瞋心) · 치심(癡心) · 오욕락(五欲樂) · 번뇌(煩惱) · 망상(妄想) 바로 거기에서 그놈을 버리고 찾지 말고, 거기에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화두를 떠억 챙기면 그것이 공부를 바로 해 들어가는 것이여.
깨닫기를 바래지 말고 오직 의심(疑心)만을 관(觀)해 나가는 것이여. 망상이 일어나도 그 망상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바로 거기서 '이뭣고?'
이것이 바로 망상을 다스리는 공부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을 굴복 받는 길이요, 일체 업장(業障)을 소멸하는 길이여.


산광수색리(山光水色裡)여  면목자단적(面目自端的)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욕식개중의(欲識箇中意)인댄  팔냥시반근(八兩是半斤)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산광수색리(山光水色裡)에, 저 산에 푸르른 경치, 햇볕에 반짝거리는 물결, 그 모습이 면목자단적(面目自端的)이여. 면목이 그 면목(面目)의 단적(端的)을 갖다가 나타낸 것이다. 산은 푸르르고 흐르는 물이 반짝이는 그 모습이 바로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의 한 모습이다.

욕식개중의(欲識箇中意)인댄, 이 낱 가운데에 참뜻을 알고자 할진대는,
팔냥(八兩)이 시반근(是半斤)이라. 여덟 냥(兩)이 이 반 근(斤)이다.
열엿 냥(兩)이 한 근(斤)인데, 여덟 냥이 반 근이다. 여덟 냥이 반 근?

여기에 이르러서 중생이 사량분별심으로 '아하!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여. 털끝 하나에 하늘과 땅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앞으로 겨울 결제까지 두 달 남짓, 춥도 더웁지도 않는 좋은 계절입니다.
이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최상승법을 닦는, 참선을 하는 우리 도반들은 '이뭣고?' 참선을 열심히 하는, 한 글자도 없는 그 경책(經冊)을 열심히 읽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45분46초~59분50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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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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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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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참선 (목적)2021. 8. 7. 06:56

§((세등28)) (게송)일편백운강상래~ /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 /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린다 / 이 공부는 비우는 공부 /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 화두(話頭)를 든다=화두를 생각한다=화두를 관(觀)한다.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본참화두(本參話頭), 공안(公案)에 대한 간절한 참구(參究), 이론을 떠난 참구, 의단(疑團) 의심(疑心)으로 이것을 관조(觀照)함으로써 만이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송담스님(세등선원No.28)—1980년(경신년) 하안거 반결제 법문(80.05.30.음) (세등28)(참선의목적)

 

 

 

약 19분.

 

 


일편백운강상래(一片白雲江上來)한데  기조녹수암전거(幾條綠水岩前去)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한 쪼각 흰구름은 강(江) 위로 오는데, 몇 줄기 푸른 물은 바위 앞으로 가는고.

오늘 경신년(庚申年) 5월 30일, 중산림을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일대기(一代記) 법문(法門) 가운데에서 한 편을 잘 들었습니다.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이여.
내가 나를 어떻게 깨달으냐? 깨달라서 무엇을 하느냐?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밥 먹고, 옷 입고, 잠자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앉고 서고,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잠시도 여읠 수가 없는, 여의지 않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그것이 바로 나의 주인공(主人公)이요 난데,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이 도리(道理)는 너무 우리와 가깝고, 너무 평범(平凡)하고, 여읠라야 여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여.
먼 데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찾으면 찾아지고 잡으려고 하면 잡히겠지만, 너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찾으므로써 오히려 놓쳐 버리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보려고 하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여.

이러한 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는데, '어째서 잠시도 여읠라야 여읠 수 없는 것을 찾아야 하는고? 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며, 그러한 공부가 세상에 어디에 있어?'

그러기 때문에 이 도리는 아무리 자식이 사랑스럽다고 해서 자식에게도 가리켜 줄 수가 없고,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배울 수가 없는 도리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리킬라야 가리킬 수가 없고 배울라야 배울 수가 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너무 쉬웁기 때문에 어렵고, 원래로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찾으므로 해서 오히려 잃어버리고, 각기 제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배울 수가 없다고 하는 것.
너무도 이치가 분명하고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리켜 줄 수가 없는 것이여.

해는 동쪽 하늘에서 뜨고 석양(夕陽)에는 해가 서쪽으로 지는데 어떤 어린아이가, "왜 해는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뜹니까?" 하고 물어볼 때에 어른은 대답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은 너무나 평범(平凡)한 사실(事實)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 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고 하는 것.
'왜 원래(元來)로 있는 거, 원래로 갖추어져 있는 거, 찾을 것도 없이 언제나 있는 것을 왜 찾아야 하며, 어떻게 찾으며, 찾어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을 때에 우리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는 것이여.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도리를 위해서 우리는 청춘(靑春)을 바쳐야 하고, 목숨을 바쳐야 하고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성현들이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몇천 생, 몇만 생의 목숨을 바쳐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리(道理)를 모든 중생들에게 일러주기 위해서 손바닥 만한 땅도 불보살이 몸을 버리시지 아니한 곳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위대함과 불법의 높고 깊은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 얻어진 것이고 배운 것이고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라면 무엇이 어렵다고 할 것이며, 어찌 가리켜 줄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밖에서 얻어 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도리는 세간법(世間法)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간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듣고 해서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지만, 이 공부는 자꾸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본참화두(本參話頭), 공안(公案)에 대한 간절한 참구(參究), 이론을 떠난 참구, 의단(疑團) 의심(疑心)으로 이것을 관조(觀照)함으로써 만이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法門) 속에서,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데 있는 것이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는 마음길이 끊어져야만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최초에 읊으신 게송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사관(祖師關)이라는 게 무엇인가?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어떠한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달마조사가 서천(西天)에서, 인도(印度)에서 중국으로 오신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서,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板齒)에 털이 났느니라" 또는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니라" 또는 "마삼근(麻三斤)이니라" 이렇게 모다 대답을 하셨는데.

'어째서 마삼근(麻三斤)이라 했는고?'
'어째서 뜰 앞에 잣낭기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서, 조주스님이 "무(無)" 했으니,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는 이 시삼마(是甚麽) 화두를 하는 사람은, '이 무엇고?'
이것이 모다 천칠백 공안(公案) 가운데에 들어 있는 화두(話頭)입니다.

그 화두를 자기 멋대로 하나씩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적(指摘)을 받아 가지고, 지정된 자기의 화두 하나만을 간절히 한결같이 참구(參究)하는 것입니다.
참구라고 하면 이론적으로 따지기가 쉽지만, 이 화두,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화두는 따져 들어가는 게 아니여.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정전백수자가 무엇인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이렇게 의심(疑心)을 하는 것입니다.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크게 의심(疑心)해야만 반드시 크게 깨달을 수가 있다'
'크게 의심을 한다'고 하는 것은, 두 눈썹 미간(眉間)을 갖다가 찡그리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머리로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저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다가 떠억 두고서 숨을 깊이 들어마셔.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여.

'이 뭣고?'를 하는 분은,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무슨 망상(妄想)이 떠오르더라도 그 망상을 없애려고 하지도 말고, 망상을 갖다가 쫓아내려고 하지도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짜증스럽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냥 일어나는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이 뭣고?' 이렇게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를 들되, '관세음보살'이나 '옴 마니 반메 훔'을 부르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루에 만 번 또는 이만 번 이렇게 횟수를 많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이 화두는 드문드문 '이 뭣고?'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 뭣고?'

가끔 가끔 하되, '이 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있는 동안에는, 의심이 있는 그동안은 겹쳐서 '이 뭣고' '이 뭣고' '이 뭣고' 이렇게 아니해도 되아요.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묵묵히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해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다가 그 의심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희미해지거나 또는 그 의심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왔을 때에는 그때 '이 뭣고?' 그때 한 번 다시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話頭)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 이것입니다. '화두를 관(觀)한다' 이것입니다.

무슨 망상(妄想)이 들었을 때 '이 뭣고?'
혼침(昏沈)이 들어왔을 때 허리를 쭉 펴고 '이 뭣고?'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생각이 났을 때 '이 뭣고?'
무슨 근심 걱정이 있을 때 '이 뭣고?'

앉을 때 '이 뭣고?'
일어설 때 '이 뭣고?'
걸어갈 때 '이 뭣고?'
세수할 때 '이 뭣고?'

때와 장소가 없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이 뭣고?'

화두(話頭)가 처음에는 그렇게 들려고 해도 잘 안 들리고 딴생각만 일어나고 하지만, 자꾸 들고 또 들고, 한 행동으로부터 다른 행동으로 옮길 때 화두가 놓치지 않도록, 그때 화두가 놓쳐졌걸랑 다시 한 번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다구쳐 나가면, 나중에는 차츰 잊어버리는 시간은 줄어지고 화두가 들어지는 시간이 차츰차츰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들려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를 말고, 아무리 화두를 들려고 해도 놓쳐지고, 억지로 들려고 하면은 골치가 아퍼지고 목이 빳빳해지고 이러는 수가 있다 하더라도 짜증을 내지 말고,
정 화두(話頭)가 잘 안 들리고, 혼침(昏沈)이 퍼일어나고 몸이 뒤틀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럴 때에는, 조용하게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가지고 직선으로 따악 길을 정해 놓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갔다 포행(布行)을 한 5분간 하다가 정신이 청쾌해지면 다시 또 자기 자리로 돌아와 가지고 허리를 쭈욱 펴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 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갈 것입니다.(처음~18분44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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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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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참선 (목적)2021. 7. 20. 06:22

§((512)) 참선하는 뜻은 자기의 생사 문제를 해결한다. 자기 방생 / 참선, 화두를 들고 생활을 하면 저절로 자비심, 청정심, 진실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참선은 최상승법이고, 불법의 핵심.
(게송)피치삭발유래유~ / 부처님 모든 법문은 한마디로 '밖으로 치닫지 말고 한 생각 돌이켜서 바로 자기를 찾으라' / (게송)정체종래절성색~ / 바른 진리의 체(體)는 본래 성색(聲色)이 끊어진 자리.

**송담스님(No.512)—1993년 하안거해제 및 백종, 백일기도회향(93.09.01) (용512) (참선목적)

 

 

약 14분.

 


석 달 동안 그 무덥고 힘드는데, 서늘한 데에서 목욕을 하고 선풍기 틀어 놓고 낮잠도 자고 그러지 않고서 그 방부(房付)를 들이고 더운 데 와서 그 등어리에 땀이 줄줄줄줄 흐르는데 두 시간씩, 세 시간씩 앉아서 입선(入禪)을 하고, 새벽같이 일어나고 하루 종일 그렇게 사분정진(四分精進)을 하는 선방의 선객(禪客) 스님들 또 보살님네들, 또 시민선원의 모다 거사님네들, 참선(參禪)을 하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자기의 생사 문제를 해결한다. ‘생사 문제 해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방생입니다.
맨 처음에 자기가 자기를 방생을 시켜야 남도 죽게 되는 사람을 살려내지, 자기가 쇠사슬에 콱! 묶여 갖고 다른 사람 쇠사슬을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참선을 열심히 해서 우선 자기 방생을 하고, 자기 방생을 하면서도 항상 그 뜻은 보살심(菩薩心), 마음속에 탁! 뜨거운 보살심을 지니고서 열심히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고, 대중 속에서 정진을 하면서 행여나 자기가 하는 행동, 자기가 하는 말 한마디라도 대중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대중 공부하는데 폐를 끼치지 않도록 그렇게 정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돌아가서 또는 직장에 다니신 분은 직장에 나가서도 항상 말 한마디 조심하고, 발 한 걸음 옮길 때에도 조심을 해서 남에게 조그만한 피해도 가지 않고, 더군다나 큰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조금 기분만 언짢게 하는 그러한 정도의 일까지라도 조심을 해야 하는데, 마냥 조심을 하다 보면 살기가 대단히 불편할 것 같으나 항상 화두를 들고 정진하게 되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마음이 일어날 수가 없고, 항상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으로 화두를 들고 생활을 하게 되면 저절로 살생은커녕 자비심이 마음속에 넘쳐흐르는 거고, 남의 것을 훔치기커녕은 내 것을 남에게 보시하려는 그런 마음이 나오는 거고, 음행을 하기커녕은 항상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갖게 되고,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치기커녕은 항상 진실한 마음을 갖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은 이것이 최상승법이고, 이것을 갖다가 불법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피치삭발유래유(披緇削髮有來由)하되  막향청산공백두(莫向靑山空白頭)니라
나무~아미타불~
사십구년다소설(四十九年多少說)이  종횡위아지귀휴(縱橫爲我指歸休)니라
나무~아미타불~

먹물 옷을 입고 삭발(削髮)을 한, 세속의 모든 것을 버리고 청춘을 다 버리고 출가(出家)해서 도를 닦는 데는 반드시 그럴만한 까닭이 있고 깊은 뜻이 있는 것이어서,
막향청산공백두(莫向靑山空白頭)니라. 그런 깊은 원력(願力)과 그러한 뜻이 있어서 출가를 했는데, 어찌 청산 속에 공연히 머리가 희어 가고 있느냐.
정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해서 먹물 옷을 입고, 머리를 깎아서 수행자로서 나섰다면 정말 철저한 신심과 철저한 분심으로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금년 여름에 용화선원 선방 스님네나 또 용주사 중앙선원이나 위봉사 선원, 세등선원 여러 모다 선방에서 정말 모다 열심히 정진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랬다'고 그렇게 알뜰히 열심히 하셨지만, 도반의 입장에서—정말 해제를 하고서도 풀어진 마음으로 살지 말고, 해제 기간일수록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결제 중보다도 더 알뜰히 잡드리를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십구년다소설(四十九年多少說)이  종횡위아지귀휴(縱橫爲我指歸休)여.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팔만사천(八萬四千) 묘법(妙法)을 설하셨는데, 그 많은 법문(法門)이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종횡으로 팔만사천 가지 방편(方便)을 설하셨지만, 한마디로 '밖으로 치닫지 말고 한 생각 돌이켜서 바로 자기를 찾으라'는 그 한마디여.

그 한마디만을 철저하게 단속하고 철저하게 잡드리한다면 결제, 해제가 무슨 차등이 있겠느냐 그거거든. 산으로 가나, 들로 가나, 차를 타나 걷거나, 목욕탕에를 가거나 변소에를 가거나, 무엇을 하거나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옛날 도인은 장바닥에 가서 공부를 하신 분도 있었고, 노동판에 가서 정진하는 이도 있고, 곡천 선사(谷泉禪師)는 거짓으로 죄를 지어 가지고 감옥살이를 하면서 도를 닦으신 분도 있어.


정체종래절성색(正體從來絶聲色)한데  멱즉지군불견종(覓則知君不見蹤)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묘봉정상일전신(妙峰頂上一轉身)하면  시방무처불봉거(十方無處不逢渠)니라
나무~아미타불~

정체종래절성색(正體從來絶聲色)이여. 정체(正體), 바른 진리의 체(體)는 본래 성색(聲色)이 끊어진 자리여. 어떤 말도 거기에는 미치지 못하고, 어떠한 모양도 거기에는 찾아 볼 길이 없는 것이여.
멱즉지군불견종(覓則知君不見蹤)이야. 아무리 눈으로 보려고 하고, 귀로 들을라고 하고, 손으로 만지려고 하고, 생각으로 알라고 해도 그 자취를 볼 수가 없어. 그 자체는 성색(聲色)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런 거여.

묘봉정상(妙峰頂上)에 일전신(一轉身)하면,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거기서 행여나 떨어질까 봐서 그걸 붙잡고 발발 발발 떨지 말고 거기서 턱! 손을 놔 몸을 굴리면,
시방세계(十方世界)에 그를 만나지 아니한 곳이 없을 것이다. 온 법계(法界)가 다 정체(正體)가 여여(如如)한 면목이더라 그거거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 본참공안에 철저히 참(參)해서 사량복탁(思量卜度)을 하지 말고, 해 갈수록 알 수 없고, 알 수 없는 거기에서 다시 그놈을 되집어서 ‘이뭣고?’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가 없어야지 ‘하아,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이렇게 사량분별로 따지고, 알아지고 얻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 깨달음이 아니야.

우리의 선망부모가 오늘 이 백중날을 기해서 여러 석 달 동안 열심히 도를 닦은 청정한 수행자들의 간곡한 신심과 원력과 수행력에 의해서 우리의 선망부모가 오늘 천도가 잘 되실 것입니다. 이어서 법요식(法要式)이 진행이 될 것입니다.(44분46초~58분41초) (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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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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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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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참선 (목적)2020. 12. 29. 19:27

§((066)) 기도 · 염불 · 독경 · 주력, 어느 문(門)이라도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正法)으로 들어가는 좋은 방편(方便) / 강을 건넜으면 배[방편]는 버려라. 사교입선(捨敎入禪) / '한 생각' 단속이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 / ‘참을 인(忍)’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해 나가는 법이 바로 참선(參禪) 공부 /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 참선을 함으로써 지혜의 힘을 얻는 것, 그 지혜를 바탕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아야.

참선은 가장 간단하고도 쉬웁고도 누구라도—지식 유무(有無), 남녀노소, 빈부귀천도 상관없이—언제 어데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 / 무슨 생각이든, 일어나는 생각 바로 그놈을 가지고 「이뭣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라도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공부에 몸과 목숨을 다 바칠 만큼 절실해야 한다.

 

삼요(三要), 신념, 분심, 의심 / 선의(善意)의 경쟁을 하라 /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 불법(佛法)은 무엇을 많이 따 담는 공부가 아니라, 그 마음에 모든 생각을 버리는 데에 있는 것. 빨리 버리는 방법은 「이뭣고?」 이 한마디뿐.

「이뭣고?」 이 한마디가 팔만사천 마구니, 팔만사천 번뇌를 굴복 받고, 마구니와 번뇌를 한 생각에 돌려서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을 만든다 / 언제 어디서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심산유곡이요, 선방(禪房)이 되는 것.

 

**송담스님(No.066)—1978년(무오년) 신수기도 회향(78.01.09.음) (용066)

 

(1/3) 약 19분.

 

(2/3) 약 17분.

 

(3/3) 약 16분.

 

(1/3)----------------

 

무오년 새해를 맞이해서 여러 사대부중(四部大衆), 법보제자 여러분들께서 더욱 몸 건강하시고, 모든 크고 작은 소원 차례로 성취하시고, 정법문중(正法門中)에 신심견고(信心堅固)하셔서 참선 공부 잘해 가지고 결정코 이 몸으로 견성해탈(見性解脫)하시기를 진심으로 빌어 마지않습니다.

 

그러한 뜻으로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초삼일부터 초아흐레 날까지 7일 동안을 전강 조실 스님 계실 때부터서 연례행사로 신수(身數)기도를 봉행해 내려왔습니다. 금년도 역시 날씨가 그렇게 강추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들께서 이 7일 기도에 참여하셔서 정말 성심성의껏 기도를 봉행했습니다. 이 공덕으로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실 것을 저는 간절히 바라고 또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기도라든지, 염불이라든지 또는 경을 읽는다든지, 주력을 한다든지 이러한 것이 전부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正法)으로 들어가는 좋은 방편(方便)의 하나입니다. 염불 · 독경 · 기도 · 주력, 어느 문(門)이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반드시 정법으로 들어갈 수 있는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는 정법에 들어가서 나를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 가지나 되는 많은 법(法)의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중생이 각기 자기의 근기(根機) 따라서 어느 문으로 들어오든지 걸려들기만 하면은 드디어 정법 문안에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차례차례 층계를 놔 놓으셨습니다.

다행히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신남신녀 여러분께서는 부처님께서 열어 놓으신 그 문에 들어오셔 가지고 들어오시자마자 금방 정법에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듣고 참선을 하실 수 있는 그러한 선택된 부처님 제자가 되신 것을 나는 진심으로 환영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정법을 만나지 못하고 계속 그 방편문에만 걸려 가지고 3년, 5년, 10년 내지 일생을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그 방편의 단계에서 머물러서 계속 눈앞에 조그마한 복(福), 오욕(五慾)을 충족시키는,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충족시키는 그러한 데에 머물러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그러한 가엾은 그러한 신도들이 아직도 한량없이 많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설한 이 법은 강을 건널 때 사용하는 떼배와 같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떼배라 하는 것은 강을 건너는 데 꼭 없어서는 안 될 그러한 소중한 기구입니다. 그 배가 없으면은 그 넓은 강을 건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배는 필요한 것이지마는 일단 그 강을 건너고서는 그 배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강을 건너고 나서도 그 배를 계속 버리지를 못하고, '그 배로 인해서 내가 이 강물을 건넜으니까 얼마나 고마웁고 소중한 것이냐, 그러니 나는...' 이 배를 버리지를 못하고 계속 육지를 다니면서도 그 배를 짊어지고 육지를 돌아댕기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은 우습고도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계신 어느 불자(佛子)라도 전부 오늘 이 자리에 오시기까지는 그러한 작은 배, 조끔 더 큰 배, 한량없이 여러 개의 배를 타고 또 물을 건너고 또 타고 물을 건너고 해서, 오늘 이 자리에 까지 오셨습니다. 이 자리는 배를 짊어지고 걸어 다니는 그러한 장소가 아니라, 그 많은 배들을 깨끗이 그 강가에다가 버리고서 아무것도 손에 든 것이 없이 맨몸으로 이 자리에 나오셔야 됩니다.

 

그릇 속에 물건을 담을 때, 그 그릇 속에 어떠한 물건이라도 그릇 속에 채워져 있으면 그 그릇은 다른 좋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릇은 담기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필요할 때 담고 또 그것을 바로 비워 놓아야 그다음에 더 좋은 것을 또 담을 수가 있는 거와 같습니다.

 

참선은 자기가 그동안에 보고, 듣고, 그리고 알고 있는 모든 지식, 모든 살림살이 모든 얻은 바를 깨끗이 버림으로써 바른 참선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수십 권, 수백 권의 경(經)을 다 읽어서 능히 해설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힘을, 그러한 능력을 속에다 지니고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은 바른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육두 백판으로 다 외우고 다 능히 해설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생심(衆生心)으로 알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나의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치 금가루가 그렇게 소중한 것이지마는 그 금가루를 눈에다 집어넣었을 때에는 그 눈은 병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밥이 아무리 소중하다 하더라도 있을 자리 가 있어야지, 밥이 기도(氣道)로 콧구먹으로 들어간다든지 눈 속에다 집어넣어 가지고서는 배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설하신 팔만대장경이 한 말씀 한 말씀 다 참된 말씀이고 소중한 말씀이지마는, 그것은 근기(根機)에 따라서 잠깐 강을 건너는 데 사용하고 바로 버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인(古人)이 말씀하신 사교입선(捨敎入禪)입니다. '교(敎)를 버리고서 선(禪)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아까 순치황제가 중국에 천자(天子)로 19년 동안이라고 하는 세월을 참 훌륭하게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한 천자가 하루아침에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 순치황제의 출가하셔가지고 읊으신 시(詩)를 전강 조실 스님께서 그 일부를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그 순치황제는 전생에 인도(印度)에서 도를 닦던 한 참선하는 스님이 어쩌다가 '한 생각' 잘못 먹어가지고 중국에 천자로 태어났습니다.

 

도를 닦은 사람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람이라도 '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한 생각 자칫 잘못 먹어가지고 일생을 망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한 생각 잘 먹어가지고 일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우습게 알고 그럭저럭한 한 생각을 우습게 알고 그럭저럭 그렇게 해서 일생을 지내가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중생의 생애이지마는 제일 소중하고 무서운 것은 이 '한 생각'인 것입니다.

 

금은보화,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심결에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한 생각'을 어떻게 잘 단속을 해 나가느냐? 하는 그 문제야말로 우리의 무량겁을 두고 윤회(輪廻)해 내려오는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가깝게 봐서 일생 동안을 행복하게 살 수도 있고, 불행하게 살 수도 있는 그러한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외출을 했다가 여러 날 만에 집에를 돌아왔습니다. 밤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등잔불이 어슴프레 켜진 가운데에 자기 아내가 어떤 스님하고 한 이불 속에서 자고 있는 것을 발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은 대번에 분이 나가지고 부엌에 쫓아가서 식칼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물어볼 것도 없이 두 사람을 칼로 요절을 내려고 하다가 잠깐 오는 길에 있었던 일을 생각을 했습니다.

 

오다가 길가에서 어떤 사람이 보따리를 피어 놓고 떠억 사주(四柱) 관상(觀相)을 보고 있는데, 자꾸 그 사람이 “여보시오, 여 사주 하나 보고 가시오”

“아, 나, 사주 그런 거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래도 한 번만 보고 가시오”

“에! 안 본다”고.

 

“거저 봐줄 테니 한 번만 보고 가시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러면 좀 봐주시오”

 

"당신..."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별말 안 하고 ‘참을 인(忍)’ 자, 하나를 손바닥에다가 떠억 먹으로 써줬습니다. “이것을 절대로 물로 씻지 말고 닦이지 않도록 가서, 어떠한 큰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이 손바닥을 반드시 펴 보시오"

 

아, 그런 일이 문득 생각이 나가지고 ‘우선 칼로 목을 먼저 찌를 것이 아니라, 대관절 어떠한 사연이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한번 알아보고 죽여야지, 자고 있는 놈을 다짜고짜로 목을 찌를 일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칼을 한 손에다 쥐고서 이불을 걷어 제끼니까, 깜짝 놀래 가지고 두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바른대로 말해라, 너는 이놈 어떤 놈이냐?”

그러니까 그 부인이 하는 말이 “이 사람은 남자 스님이 아니라, 친정 사촌동생이 과부가 되어가지고 출가를 해서 중이 되었는데 오랜만에 여기를 지내다가 내 집에 들려서 이야기하다 오늘 하루저녁 자게 되었다”고.

 

아! 그래서 그 손에다가 써진 ‘참을 인(忍)’ 자를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그걸 보고, 평생토록 그 ‘참을 인(忍)’ 자를 손바닥에 써진 그 ‘참을 인(忍)’ 자를 마음속에다 새기고, 다시는 그러한 경솔한 일을 하지 않도록 해 가지고 그렇게 신경질을 잘 내고 그렇게 경거망동을 하던 그 사람이 일생 동안을 참 신중하고 아량이 있는 그러한 인격자가 되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 생각 잘못 먹으면은 아내 죽이고, 그 스님을 죽이고, 자기도 사형을 당해가지고 그 집안이 쑥대밭이 될 그러한 중대한 문제, 그것이 바로 한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아! 그 사주는 보아야 하는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그것은 생각을 잘못 생각하신 것이고.

 

신수기도를 일주일 동안 그렇게 정성스럽게 했습니다마는 이 신수기도를 우리 절에서 안 하면은 이 가운데에 계신 대부분 보살님네들은 모다 무당절, 또 가서 법문도 듣지도 못할 그러한 절에 가서 별별 이상스런 그 부작(符作) 같은 것을 많은 돈을 주고 사야 하고,

그리고 겁나는 협박적인 그러한 말을 한마디씩 듣고서 돈은 빼앗기면서 일 년 동안을 전전긍긍 불안에 떨면서 살지 아니하면 안 될 그러한 구렁텅이에 빠질까 두려워서, 신수기도를 우리 법보선원에서도 봉행을 하고 그리고서 입재(入齋) 때와 회향(廻向) 때에 정말 부처님의 정법을 여러분들에게 설(說)해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러한 삿된 구렁텅이에 빠질 것을 미리 방비하고, 나아가서 일 년 동안을 정말 바른 신심으로 안심하고, 장애 없이 잘 사시는 길을 여러분들에게 열어드리기 위해서 신수기도를 봉행한 것입니다.(처음~18분30초)

 

 

 

 

(2/3)----------------

 

'선방에서 무슨 기도를 한가? 기도는 참선하면은 그만이지 무슨 기도를 한가?'

여러분 가운데는 오래전부터서 참선을 하셔서 어떤 것은 방편(方便)이고, 어떠한 것은 정법(正法)인가를 잘 아시는 분들은 혹 그렇게 생각하실런지 모릅니다마는, 어떠한 방편이라도 바른 법을 가지신 분이 쓰면은 그 방편이 바로 정법이 되는 것이고, 아무리 부처님이 설하신 법이라 하더라도 삿된 사람이 쓰면은 사법(邪法)이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칼이라도 정의를 가진 사람이 들면은 사람을 살리고, 국가와 민족을 살리고 할 수 있지마는, 도적이 삿된 도적이 그 칼을 가지면은 선한 사람의 목숨을 해치고 큰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법(法)도 또한 그러해서 바르게 쓰면은 좋은 법이 되지만, 악한 사람이 잘못 쓰면은 많은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7일 동안 정성스럽게 잘 마쳐서 과거에 여러분들께 조그마한 허물이라도 또는 많은 허물이라도 있으신 분은 이 기도를 통해서 깨끗하게 소멸(消滅)이 되었을 것이 틀림이 없고, 그 경건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서 기도를 하시고 다시 일 년 동안을 정법에 의해서 수행을 잘하실 것을 다짐하셨기 때문에 새로 죄를 짓지 않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도하는 동안 십악참회(十惡懺悔)도 아울러서 계속해서 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저 가을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랗게 트인 가을 하늘처럼 그렇게 숭고하고, 청정하고 깨끗한 그러한 마음자리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그 마음자리가 앞으로 흐려지지 않도록, 흐트러지지 않도록 잘 단속만 해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단속해 나가는 법이 바로 참선(參禪) 공부인 것입니다.

 

달마스님 『혈맥론(血脈論)』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섭(攝)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을 관(觀)한다' 하는 것은 바로 참선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선만 하면은 일체 행(行)이 그 가운데 다 제절로 갖추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대승(大乘)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는 것이 대승보살의 과제입니다마는 그 육바라밀이 첫째, 보시(布施)를 할 것, 둘째, 계율(戒律)을 지킬 것, 셋째에 인욕(忍辱)을 할 것, 넷째에 정진(精進)을 할 것, 다섯째에 선정(禪定), 마음을 고요히 할 것, 여섯째, 지혜(智慧)를 닦을 것. 이렇게 육바라밀, 여섯 가지 저 언덕에 건너가는 좋은 법입니다.

그 여섯 가지 중에 무엇이 제일 소중하냐? 전부가 다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지마는 그중에 가장 근원적인 것은 맨 끝에 있는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입니다.

 

지혜는 어디로부터 나왔느냐? 참선(參禪)을 함으로써 지혜의 힘을 얻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서 지혜를 얻어서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보시라야 그 보시는 옳은 보시가 되는 것이고,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계율이라야 그 계율은 참으로 옳은 계율이 되는 것이여.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인욕이라야 그 인욕이 참 바른 인욕이며, 지혜를 바탕으로 한 정진이라야, 지혜를 바탕으로 한 선정이라야 다 옳은 법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보시를 했댔자 그것은 유루복(有漏福)에 지내지 못한 것이고, 계율을 지켜도 지혜가 없이 지킨 계율은 천상에는 태어날 수 있지마는 금방 복(福) 다 받으면 다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인욕도 지혜 있는 인욕이라야지, 어리석게 억지로 참기만 위주로 해서 한다면 단박 가슴이 아프고 목이 아프고, 골치가 아프고, 가슴앓이 속병이 생겨가지고 결국은 병만 쳐주고, 그 억지로 참은 것이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일생 동안을 억지로 참다 보면 나중에 여러 번 참다가 그놈이 축적이 되어가지고 터질 때는 무서운 위력을 내가지고 자기 신세 망치고, 집안을 쑥대밭을 맨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환자가 되어가지고 늙발에 한숨으로 세월을 보낼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를, 우리에게 급(急)한 것은 그 지혜가 제일 급한 것입니다.

그 지혜를 얻는 가장 간단하고도 쉬웁고도 누구라도 언제 어데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입니다. 참선은 지식의 유무(有無)도 상관이 없고, 남녀와 노소와 빈부귀천도 상관이 없습니다.

 

참선(參禪)이라 하면은 '꼭 절에 와서 그래가지고 조용하니 죽비(竹篦)를 치고 앉아야만 참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하면 참선은 못하는 것이다. 집안에서는 일이 많아서 참선은 못 합니다' 이렇게 노상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마는 참선은 일이 많고 적고 그것도 상관이 없고, 차 속이나 또는 시장 바닥이나 가정이나 또는 절이나 어디서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참선은 앉고 눕고 또는 서서 걸어 다니고 그러한 위의(威儀)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누웠어도 생각은 일어났다 꺼졌다 하고, 앉었을 때에도 생각은 이 생각 저 생각이 번갈아 드나들고, 걸어 갈 때도 이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한 만큼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그 생각이 좋은 생각이건, 악한 생각이건, 과거 생각이건, 무슨 슬픈 생각이건, 괴로운 생각이건, 무슨 생각 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그 일어나는 생각 그놈을, 바로 그놈을 가지고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라도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괴로운 생각, 억울한 생각, 슬픈 생각 그러한 생각이 속에 꽉 차 가지고 그 생각을 없애야만 참선이 될 텐데,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못한다' 이리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아직 참선하는 법을 잘 모르시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슬픈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무엇이 들어서 그 슬픈 생각을 하는가? 「이뭣고?」

몸이 아파도—'몸이 아파서 공부를 못합니다'—몸이 아픈 줄 아는 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여. 무엇이 그렇게 아픈 줄을 아는가? 그 아픈 줄 아는 생각만 있으면은 그 사람은 참선을 할 수 있는 충분한 힘과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외롭고 괴롭고 슬프고 노여움이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참선을 잘할 수 있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나는 단언을 합니다.

슬픈 생각도 없고, 괴로운 생각도 없고, 억울하고 분한 생각도 없는 목석(木石)처럼 그러한 사람은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어가지고 그런 사람은 정신병원이나 갖다 놓을까, 아무 쓸데가 없죠?

 

그러나 욕하면 썽낼 줄 알고, 신경질도 잘 내고, 슬픔에 가슴이 꽉 차서 어쩔 줄을 모르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정말 행복이 무엇인 중을 모르고, 육체적으로 온갖 병이 들어 있고 정신적으로 많은 충격을 받아가지고 정말 정신과 육체가 한목 병들어서 죽을 길밖에는 없다고 이렇게 인생을 포기하는 그런 사람일수록에 이 정법(正法)에 귀의(歸依)해서 바른 스승을 만나가지고 죽을 셈 치고 대들기만 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사람이 훨씬 더 도(道)를 깨닫기가 쉬웁고 좋은 것입니다.

그만한 인생을 전부를 아주 포기할 그러한 막바지에 도달한 그 사람은 한번 이 문에 들어와서 정법을 만났다 하면 다시는 다른 데에 정신을 빼앗길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이렇게 누구라도, 어떠한 사람이라도 하면 될 수 있는 것이고, 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마는 정말 이 몸과 목숨을 다 바치고 다시는 딴 데 한눈을 팔지 아니할 만큼 그만큼 절실한 사람이 아니면 아니 됩니다. 그 점이 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할려면은 첫째, 나도 하면, 나도 옳은 법을 배워 가지고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금생에 결정코 깨달을 수가 있다. 내가 지금 울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고, 눈으로 볼 줄도 알고, 괴로워할 줄도 아는 바로 이놈이 나의 불성(佛性)이요, 나의 마음자리다. 이것은 모든 불보살(佛菩薩)의 마음과 조끔도 차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날까지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 것은 그 법을 바로 만나지 못했거나 만났더라도 열심히 도를 닦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렇게 생사(生死)에 윤회를 하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다행히 이 법을 알았으니 이제 어디에 이 몸과 목숨을 바칠 곳이 있는가? 오직 나는 이 한 법을 위해서 이 목숨과 이 몸을 다 바칠 수가 있다. 나는 금생에 결정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굳센 신념(信念)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서 아직도 그 신념이 투철하지 못한 분은 이 자리를 기해서 철석(鐵石)같이 그 신념을 가지실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그러한 신념을 가지시기를 저는 간곡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그 신념이 있은 위에라야 우리의 공부는 바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서 둘째로 필요한 것은 분심(憤心)입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 과거에 부처님과 많은 성현들은 진즉 이 법에 의지해서 생사 문제를 해결을 하셔가지고 중생 교화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어찌 그러한 불보살과 성현들과 똑같은 마음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맴돌고 있는가? 이러한 점에 대해서 분심을 낼 줄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 국민학교 학생들도 자기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은 분이 나서 집에 와가지고 울면서 숙제를 하고 그래가지고 밤잠을 안 자면서 공부를 해가지고 그다음에 시험 볼 때는 더 잘할려고 발버둥을 치거든, 벌써 아들과 딸을 둘씩, 셋씩, 다섯씩, 여섯씩 나서 키워 가지고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가지고 내가 내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를 만나가지고 분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돈, 이웃집은 돈을 잘 벌고 자기는 잘 못 버는 그런 것을 보고는 입을 삐쭉빼쭉하고 시기를 낼 줄 알면서 내가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는 이 참선에 대해서 그러한 분심을 느낄 줄 모른다면 이것은 가엾기 그지없는 일인 것입니다.

 

이 참선은 언제나 저는 선의(善意)의 경쟁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선방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공부하시는 보살님네들, 한 분이 잠을 조끔이라도 덜 자고 공부하려고 애를 쓴 분이 있으면 자기도 따라서 공부를 하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의의 경쟁을 하는 데에서 반드시 공부에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가정에서 생활하시는 여러분들도 자기의 친구, 이웃, 아는 분들이 시간을 아껴서 그 시간을 쪼개서 정진하려고 애쓰는 분이 있으면 그이를 헐고 뜯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샘을 좀 내서 '나도 그 사람에게 지지 않고 더 공부를 잘하리라' 하는 이러한 선의의 경쟁심을 내고, 서로 충고하면서 보다 더 공부에 유익하도록 충고하고 노력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18분31초~35분40초)

 

 

 

 

(3/3)----------------

 

첫째, 신념. 둘째, 분심. 그리고 셋째에 가서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화두(話頭), 화두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간절하고 철저한 의심 덩이[疑團]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참선에는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두 가지로 노나서 가려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을 많이 보고, 설교를 많이 듣고 하는 또 다른 또 학식이 있고 그런 사람은 노상 어떠한 문제를 당했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지식을 총동원해 가지고 이리저리 분석해서 그럴싸한 결론을 내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론을 따져서 결론을 내려야만 결론을 얻어야만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 참선은, 활구참선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 참선을 다른, 사회의 어떤 수수께끼나 어떠한 문제들과 같이 이론적으로 따져서 결론을 지을려고 하고 그러한 방법으로 참선을 해 나가고 있는 사람은 활구참선이 아니라 사구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하는 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아무리 따져서 훌륭한 해답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중생(衆生)의 알음알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중생의 알음알이는 아무리 좋은 그럴싸한 알음알이라 하더라도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원인이 되는 것뿐인 것입니다.

 

참선은 쉬웁게 말해서 무엇을 많이 읽고,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해서 많이 속에다가 따 담는 공부가 아니라, 이미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모든 좋은 생각, 나쁜 생각, 심지어 불교의 교리까지 다 경전에 있는 말씀까지도 깨끗이 내쏟아 버려야 됩니다. 내쏟아 버려야만 그 마음이 정말 청정(淸淨)해지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으로 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금가루도 눈에 집어넣으면 안질(眼疾) 병이 생기는 것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마음속에다 넣고 이리저리 중생심으로 그것을 따둑거리고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있는 동안에는 중생의 경지, 중생심을 한 걸음도 벗어나지를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그러한 사람은 두고두고 육도윤회를 할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루빨리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해탈(解脫)하고자 하시는 분은 이론적으로 따지는 버릇을 놔야 합니다.

 

다못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몸이 아플 때도 「이뭣고?」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누웠을 때나, 걸어갈 때나, 차를 탈 때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다못 「이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슬픈 그 마음도 나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발판이 되어 주는 것이고, 썽내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는 그 찰나에 바로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단속해 나갈 때 불같이 일어났던 그 썽내는 그 한 생각이 나로 하여금 해탈도로 들어가는 하나의 발판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일구월심(日久月深), 날이 가고, 달이 감에 따라서 그 사람은 차츰차츰 마음이 착해지고 마음이 비워져서, 바로 속에 똥과 오줌과 피와 고름이 가뜩 들어있는 채, 불보살의 경지에 가까와가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무엇을 많이 따 담는 공부가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꾸 버리는 데 있는 것입니다.

 

보시(布施)라고 하는 것을 보통 내게 있는 돈과 물질을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보시라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참보시'가 아닙니다. 참보시에 들어가는 껍데기 보시, 초보적인 보시에 지내지 않은 것입니다.

참보시는 물질적인 것보다도 그 마음에 모든 생각을 버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말 한마디라도 남에게 잘 말을 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에 편안함을 얻게 하고, 부처님의 말씀 한마디라도 아는 대로 일러주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발심(發心)할 수 있는 동기가 되도록 해주는 그런 것도 역시 보시가 됩니다.

그러나 근원적인 보시는 내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좋은 생각, 나쁜 생각, 일체 과거 · 현재 · 미래의 모든 생각을 버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한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버릴려고 하는 그 생각 또한 중생의 마음이기 때문에—호수에 물결이 일어나는 물결을 고요하게 만들려면 그 일어나는 물결을 없애려고 손을 대서는 아니 됩니다. 손대면은 다시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모든 물결을 빨리 없애는 방법은 「이뭣고?」 이 한마디뿐인 것입니다. 이것은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성현들이 부처님의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에 의지해서 닦고 닦아서 오늘에 전해진 가장 훌륭한 법인 것입니다.

이 법(法), 한 법에 충실히 철저히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을 해 간다면 육바라밀도 그 속에 갖추어 있는 것이고, 팔만대장경을 독파한 읽고 또 읽고 한 그 공덕도 그 속에 바로 갖추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나가지고서도 믿지 아니하고 계속 여러 가지 방편, 크고 작은 낡아빠진 배들을 짊어지고 팔도를 돌아다니고 60, 70년 동안을 그 썩어 낡아진 배를 짊어지고 돌아다니는 분이 계시다면은 당장 이 자리에서 그 배를, 그 무거운 짐을 벗어 놓으십시오. 벗어 놓고 간단한 「이뭣고?」 하나를 터억 마음에 간직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 보십시오.

이 「이뭣고?」 이 한마디가 우리의 팔만사천 가지의 마구니를 항복 받고, 팔만사천의 번뇌를 굴복 받고, 마구니와 번뇌를 한 생각에 돌려서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을 맨들아서 우리는 이 육신으로 대해탈도를 증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 부처님과 많은 성현과 전강 조실스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단호히 여러분 앞에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7일이라고 하는 기간은 대단히 짧은 기간이지마는 또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7일이라고 하는 기간은 대단히 긴 기간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기다릴 때 30분 내지 10분이라고 하는 세월이 얼마나 지루한가를 느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 일 년, 이태라고 하는 세월이 얼마나 빠른 것인가를 또 느끼게 하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살고 있는 마음에 따라서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는 것입니다.

 

7일 동안을 하루같이 성심으로 기도를 잘해서 마쳤습니다. 기도 법사스님께서도 정말 일심으로 기도를 봉행을 하셨고 여기에 동참하신 신남신녀 여러분께서도 정말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기도를 잘 봉행을 해서 오늘 회향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소원을 마음속에 간직을 하시고 기도를 하셨건 간에 그 일들이 가장 긴박한 것부터서 차례차례 다 성취되실 것을 저는 다시 한번 빌고 또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이 초아흐레니까 앞으로 6일 후에는 정월 대보름날입니다. 그날도 사시(巳時)에 법회가 열리게 되겠습니다마는, 그날은 작년 10월 15일부터서 시작한 겨울철 결제가 그날 정월 보름날, 90일 마지막 해제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작년 10월 15일에 시작한 백일기도가 또 정월 15일에 또 회향을 하는 날입니다.

또 정월 대보름날은 우리나라 저 신라 때부터서 대보름날에는 그 찰밥, 오곡밥을 해서 천지신명과 조상과 모다 선영들에 다례를 올리는 날이고, 일체 재앙을 그래서 일체 재앙을 소멸을 하고, 소원을 또 성취하기 위한 발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날도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서로 권고해서 법회에 참여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원컨대, 솔바람 불고 칡넝쿨 우거진 사이로 밝은 달이 비친 그러한 골에 들어가서 영원히 생사 없는 대해탈도를 증득하는 참선을 하고자 하노라. 이러한 내용에 게송(偈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게송을 들으시고 '아하! 참선을 하려면은 저 심산유곡(深山幽谷)에 그런 데에 들어가야만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신다면은 이 게송의 뜻을 정말 똑바로 아신 것이 되지 못합니다.

시장바닥에서라도, 아들과 손자가 울고 똥을 싸서 뭉게는 그 속에서도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하면 바로 그 자리가 심산유곡이 되는 것입니다.

 

심산유곡이라야만 된다면 산중에서 사는 화전민(火田民)들은 다 도인(道人)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깊은 산중에서 살아도 신념이 없고, 분심이 없고,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다면 백 년을 두고 산중에서 산다고 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고, 시장바닥에서, 사회 가정에서, 자기 있는 일터에서, 어데서 언제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심산유곡이요, 선방(禪房)이 되는 것입니다.(35분43초~51분56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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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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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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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참선 (목적)2020. 9. 17. 13:23

 

 

§(세등64) (게송)윤회기중문래단~ / 견성성불을 해야만 우리의 한량없는 선망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열린다. 이것이 수도(修道)하는 목적 /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서 무상(無常)을 깨닫고, 우리는 도심(道心)을 발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송담스님(세등선원No.64)—1987(정묘)년 하안거 해제 법어(87.07.17) (세등64)

 

약 10분.

 

(윤회기중문래단輪廻幾重問來端  지리여하가자만至理如何可自瞞)

일념애원상적력(一念愛源常滴瀝)인데  만심욕해정미만(萬尋欲海政瀰漫)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윤회기중문래단(輪廻幾重問來端), 삼계(三界)와 육도(六途)를 돌고 도는 그 윤회가 몇 번이나 되었으며 그 많은 백천만 겁(劫)의 윤회의 그 까닭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무량겁을 두고 윤회를 해 왔는가?

지리여하가자만(至理如何可自瞞)고. 그 지극한 이치, 그 분명한 이치가 어떻게 스스로 그것을 속일 수가 있을 것인가? 윤회하는 그 원인, 그 까닭은 너무 분명해서 그것을 속일 수가 없다.

 

일념애원상적력(一念愛源常滴瀝)이여. 한 생각 애원(愛源)이, 애착 · 탐착하는 그 한 생각 근원으로부터서 육도 삼계를 윤회하는 그 한 생각 한 생각 그 방울 물이 모여 가지고 강이 되고 그것이 바다에 이르듯이, 그 한 생각 애착 · 탐착 때문에 만심욕해정미만(萬尋欲海政瀰漫)이다. 만 길이나 되는 그 깊고 넓은 바다, 들어갈수록 점점 더 깊어지더라.

 

 

오늘 정묘년 7월 17일 이 세등선원 해제날, 삼하안거(三夏安居) 해제날을 맞이해서 이렇게 사부대중이 한 자리에서 법요식(法要式)을 갖게 되는데, 거량(擧揚)을 통해서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우주법계에 한량없는 유주무주(有主無主) 고혼(孤魂)들이 이 자리에 청해서 이 법석(法席)에 참석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몸을 받아날 때, 육도법계 어느 세계에 몸을 받아날 때에도 다 몸을 받아날 때에는 반드시 부모의 힘을 빌어서 몸을 받아나는데, 그 선망부모에 은혜를 갚는 도리는 어서 속히 도업(道業)을 성취해서 도(道)의 힘으로 제도(濟度)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애정으로, 애정의 마음으로 잘 받들어 모신다 해도 그것은 인간 세상에 조그마한 효도에 지내지 못하고, 정말 큰 효도는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야만 우리의 한량없는 선망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금일 여러 대중들도 그러한 목적으로 해서 고향과 부모와 형제, 세간(世間)에 모든 오욕락(五慾樂)을 버리고서, 부귀와 영화를 다 버리고서 출가해 가지고 고행(苦行) 수도(修道)하는 그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너무도 간곡한 그 법문에 의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난 여름 석 달 동안 정말 태풍과 폭우에 의해서 많은 생명이 죽어 갔고, 많은 재산이 손실이 되었고, 많은 논과 밭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또 노사 분규로 인해서 크고 작은 공장, 회사가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상황 속에서, 다시 말하면 온 세계가 불이 붙어서 큰 화재가 나가지고 훨훨 타고 있고, 여기서 쓰러지고 저기서 넘어지고, 이러한 험난한 상황 속에서 우리 불법을 믿는 불자(佛子)들은 그럴수록에 더욱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죽을 사(死)'자를 이마에 얹어놓고 주삼야삼(晝三夜三)에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서 나의 무상(無常)을 깨닫고, 다른 사람 고통 받는 것을 보고 내가 발심을 하고.

육도법계에 우리가 어느 곳에 안 간 곳이 없습니다. 다 가서 직접 그 고통을 받아 보고 그래서, 그랬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무상한 줄 알고, 한마당 꿈에 지내지 못한 것을 보고 느끼고 깨달랐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부처님께 귀의(歸依)해서 이렇게 도를 닦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도는 몸뚱이를 돌아보지 아니해. 생사(生死)와 더불어 항상 우리는 도반(道伴)을 삼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뚱이도 생각 생각이 났다 죽었다, 우리의 생각도 일초 일초 났다 죽었다 하고,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형상이 찰나찰나 변하면서 났다 죽었다 하고,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도 났다 죽었다, 생사 변화해 가지 아니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변화로 인해서—변화가 바로 생사(生死)인데, 생사가 끊임없이 치열하게 반복되고 있는 그 상황을 보고 우리는 도심(道心)을 발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처음~9분56초)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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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참선 (목적)2019. 9. 18. 06:19

 

 

§(158) (게송)대지촬래속미립~ / (게송)생전부귀초두로~ /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이것이 바로 참선법 / (게송)인간부귀일시락~ / 생사는 본래 없다.

 

생사 속에서 중생의 욕심으로 아무리 생사를 면할려고 해도 면할 도리가 없습니다. 오직 불법, 최상승법만이 이 생사 속에서 생사를 해탈(解脫)하는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금방 녹음(錄音)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마는 「내가 나를 찾는 공부,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입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조금도 거짓을 붙이지 아니하고 사실 고대로 말하자면 「생사(生死)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어요. 정말로는 없는데, 현실적으로는 있습니다.

 

**송담스님(No.158)—1982년 1월 첫째일요법회(82.01.03) (용158)

 

(1) 약 18분.

(2) 약 5분.

 

(1)------------------

 

대지촬래속미립(大地撮來粟米粒)이요  일호두상현건곤(一毫頭上現乾坤)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감소일월부도처(堪笑日月不到處)에  개중별시일건곤(箇中別是一乾坤)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대지(大地)를 촬래(撮來)하니 속미립(粟米粒)이요. 대지. 지구덩어리. 이 지구 땅덩어리를 탁! 한 손으로 잡아오니 좁쌀 아레기, 좁쌀 한 톨밖에는 되지 아니하다.

일호두상(一毫頭上)에 현건곤(現乾坤)이로구나. 한 터럭끝에 하늘과 땅이 나타나는구나.

 

감소일월부도처(堪笑日月不到處)에, 우습구나, 해와 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개중별시일건곤(箇中別是一乾坤)이로구나. 이 가운데 따로 이 하늘과 땅이 있구나.

 

 

오늘은 1982년 1월 3일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과거에 온갖 슬픔과 괴로움, 모든 업장(業障)이 봄눈 녹듯이 다 녹아 없어져서, 새로운 희망과 보람으로 한 해를 맞이해서 모든 크고 작은 소원을 성취하시고, 특히 최상승법(最上乘法)에 돈독한 신심으로 도업(道業)을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축원을 합니다.

 

한 해가 시작했구나 싶으면 금방 봄이 지나가고, 더워졌구나 싶으면 금방 가을이 다가오고, 단풍이 졌구나 하면 벌써 백설이 휘날리고 그럭저럭 하다보면 또 한 해가 시작이 되고, 덧없는 세월이 이렇게 물 흘러가듯이 지나가노라면,

우리 인생도 아무 한 것 없이 백발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늘어가고, 아무리 머리에 물을 들이고 화장을 해서 흰머리와 주름살을 안 보이게 하려고 노력을 해도 눈은 침침해지고, 허리는 아파지고, 몸은 말을 듣지 않게 됩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지위가 높고, 권리가 높고, 명예가 있고, 재산이 있다 하드라도 이 길은 막을 도리가 없고 면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의 모습입니다.

생사 속에서 중생의 욕심으로 아무리 생사를 면할려고 해도 면할 도리가 없습니다. 오직 불법, 최상승법만이 이 생사 속에서 생사를 해탈(解脫)하는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 육체가 죽는 것을 면하고 이백 년, 삼백 년, 천 년 이렇게 살려고 하는 것은 신선도에서 그러한 길을 모색을 하고 있지만, 설사 몇백 년을 산다 하드라도 결국은 죽을 때가 있고만 마는 것이고, 그 죽는 그 자리는 허망하고 괴로운 것은 매양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오래 살려고 하는 길은 외도(外道)의 길이고, 생사 속에서 바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생전부귀초두로(生前富貴草頭露)요 신후풍류백상화(身後風流陌上花)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망망우주인무수(茫茫宇宙人無數)한데 기개남아시장부(幾箇男兒是丈夫)오

나무~아미타불~

 

생전(生前)에 부귀(富貴)는 초두로(草頭露)요. 풀끝에 이슬과 같은 것이고.

신후풍류(身後風流)는 백상화(陌上花)로구나. 죽은 뒤에 영화와 명예는 언덕 위에 핀 꽃과 같은 것이다.

 

살아생전에 큰 재산과 큰 명예 · 권리는 풀끝에 이슬과 같은 것이여. 풀끝에 이슬방울이 매달려 있을 때 햇빛이 거기에 비추면 보석처럼 찬란히 반짝거리지만 바람이 한번 휙 불거나, 사람이나 짐승에 그 풀이 닿아서 움직이면 그렇게 번쩍번쩍하던 보석 같은 이슬방울이 툭 떨어져버리면 간 곳이 없어지더라.

 

죽은 뒤에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세운 찬란한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서 비석을 세운다, 기념관을 세운다, 무슨 사업을 한다, 죽은 뒤에 굉장히 그분의 공적을 찬양을 하지만 아무리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하더라도 10년, 20년 가지 못해서 그 사람의 이름은 차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마치 언덕 위에 곱게 피었던 꽃이 불과 며칠이 안 가서 시들어져 떨어져버린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망망우주인무수(茫茫宇宙人無數)한데, 망망한 우주에 그 사람의 수가 한량이 없어. 지나간 과거에 살다가 간 사람이 몇억,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이 40억, 앞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또 가고 할 사람이 몇백 억이 될른지도 모릅니다.

그 한량없는 수 가운데에, 기개남아(幾箇男兒)가 시장부(是丈夫)냐. 그 가운데 몇 사람이 생사 문제를 해결한 남아(男兒) 대장부(大丈夫)가 되겠느냐? 남아 대장부가 그 가운데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생사 속에서 생사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 문제는 우리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긴급한 숙제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을 하지 않는 한(限)은 육도(六途)에 윤회(輪廻)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낳아서 차츰 커가면서 공부를 하고 온갖 노력을 해서, 일생 동안 수없는 고생을 하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이냐?

한 말로 말해서 보다 더 잘살기 위해서, 보다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한 목적일 것입니다. 보다 더 행복하게 잘살기 위해서 공부도 하고, 사업도 하고, 자기의 목표를 설정을 하고 밤잠을 안 자고 노력을 하고 있지마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지를 못한 채 한(恨)을 남기고 눈을 감고 이승을 하직하게 됩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에는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목적을 달성을 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눈을 감는 사람도 있지마는, 엄격하게 따져 보면 정말 그것이 자기를 참으로 행복하게 할 수가 있었던가? 또 그 업적이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인가?

따져 보면 별것이 아닌 것입니다. 재산이라든지 명예 · 권리라든지 또는 어떤 학문이라든지, 어떤 인간에 필요한 기계를 연구를 했다든지, 어떤 학설을 발표를 했다든지, 인간 세상에 일시 필요한 것일런지는 모르지만 궁극의 행복,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법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최상승법은 모든 중생들에게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참다운 길을 가르켜 주신 것입니다.

이 길이 먼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시 이 세상에 무엇보다도 가장 가까운 데에 그 길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간단한 것입니다.

 

금방 녹음(錄音)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마는 「내가 나를 찾는 공부,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입니다.(처음~18분2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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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부귀일시락(人間富貴一時樂)이요  지옥신산만겁장(地獄辛酸萬劫長)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세유백천한일월(世有百千閑日月)인데  인무일점호신심(人無一點好身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간부귀(人間富貴)는 일시락(一時樂)인데, 인간에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한때의 낙(樂)에 지나지 못하는데,

지옥신산만겁장(地獄辛酸萬劫長)이다. 지옥에 쓰라린 고통은 만겁(萬劫)이나 길고 길더라.

 

잠깐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내지 못한 인간의 즐거움 그것을 맛보다가,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 죄를 짓다가 그 잠깐 쌈박한 맛에 취해가지고 그것을 탐닉하다가 한번 지옥에 떨어지면 그 몸서리치고 쓰라리고 괴로운 그 고통은 무량겁이나 길고 지옥에서 나올 기약이 없더라.

 

세유백천한일월(世有百千閑日月)인데, 이 세상에 일월(日月), 해와 달, 하루하루가 가면 한 달, 한 달 한 달이 가면 일 년, 일 년 일 년이 가면 십 년, 수천 년, 만 년 이렇게 세월이 지나가는데, 그 많은 한가한 세월이 지나가는데.

 

그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몸이 아무 병이 없이 편안하고, 마음도 아무 고통이 없이 즐겁기만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더라[人無一點好身心].

오장육부 사지백체(四肢百體) 어디가 아프던지 아프고, 무슨 걱정이 있든지 걱정이 있지, 걱정도 없고 몸이 괴롭지도 않고 그러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더라 그 말씀이여.

 

 

자꾸 '생사가 두렵다. 인간이 무상하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정말 그놈의 생사를 어떻게 해야 면할 것인가? 여태까지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서 한 사람도 생사를 면한 사람이 없다니, 그럼 뭐 참선해 봤자 죽을 사람 다 죽고 그러니 뭐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는 소리가 뭔 소리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분명히 말하자면, 조금도 거짓을 붙이지 아니하고 사실 고대로 말하자면 「생사(生死)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어요. 그래서 해탈할 것도 없는 것이고.

우리가 가야 할 생사가 없는데 무슨 또 지옥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지옥도 없는 것이요, 천당도 없는 것이요, 생사도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증득해야 할 열반이라 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정말로는 없는데, 현실적으로는 있습니다.(58분17초~63분27초)(끝)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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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대지촬래속미립(大地撮來粟米粒) 일호두상현건곤(一毫頭上現乾坤)' ; 『호구소륭화상어록(虎丘紹隆和尙語錄)』 '평강부호구운암선사어록(平江府虎丘雲巖禪寺語錄)' 참고. (大地撮來粟米粒 一毛頭上現乾坤 居家不離途中事 常在途中不出門)

[참고] 호구소륭(虎丘紹隆 1077~1136) : 송(宋)의 스님. 임제종 양기파. 원오극근(1063~1135)의 법을 이어받고 20년 동안 시봉함.

*(게송) '감소일월부도처(堪笑日月不到處) 개중별시일건곤(箇中別是一乾坤)' ; 『禪宗頌古聯珠通集』 제20권 '大溈行' 게송 참고. (滿滿彎弓射不著 長長揮劒斫無痕 堪笑日月不到處 箇中別是一乾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해탈(解脫) : [범] Vimokṣa ; Vimukta ; mukti  [파] Vimokha ; Vimutta ;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또는 열반(涅槃)의 딴 이름으로도 쓰인다。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게송) '생전부귀초두로(生前富貴草頭露) 신후풍류백상화(身後風流陌上花)' ; 소식(蘇軾, 소동파)의 '陌上花(三首)' 참고.

*(게송) '망망우주인무수(茫茫宇宙人無數) 기개남아시장부(幾箇男兒是丈夫)' ; 여동빈(呂洞賓).

*대장부(大丈夫 큰·훌륭할 대/어른·존칭 장/사내·일꾼 부) ; 장부(丈夫).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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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인간부귀일시락(人間富貴一時樂) 지옥신산만겁장(地獄辛酸萬劫長)' ; 『석옥청홍선사어록(石屋淸洪禪師語錄)』 하권, '산거시(山居詩)' 참고.

*(게송) '세유백천한일월(世有百千閑日月) 인무일점호신심(人無一點好身心)' ;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峰和尙廣錄)』 제29권. '별우십수(別友十首)' 참고. (世有百千閑日月 人無一點好身心 知他爲甚麼邊事 添得茫茫業海深)

*겁(劫) ; (산) Kalpa 음을 따라 갈랍파(羯臘波) 또는 겁파(劫波)라 하고, 다시 줄여서 겁(劫)이라고만 한다. 인도에서의 가장 긴 시간단위. 지극히 긴 시간. 무한히 오랜 세월을 가리키는 말이다.

[참고] 겁(劫)의 무한히 긴 시간을 개자겁(芥子劫)•반석겁(盤石劫)으로 비유한다.

개자겁(芥子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성(城) 안에 겨자 씨를 채워, 100년에 한 알씩 집어내어 겨자 씨가 다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반석겁(盤石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큰 반석(盤石)을 부드러운 천으로 100년에 한 번씩 쓸어 반석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일장춘몽(一場春夢) ; 한바탕의 봄꿈이라는 뜻으로, 헛된 영화나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사지백체(四肢百體) ; 몸의 전체.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