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회(동지차례)2020. 5. 18. 17:20

 
 
§(058) 참선, 깨달음은 일상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다 / 견성 / 활구참선 / 선지식의 지도 / 공안은 깨달음에 이르는 좋은 열쇠요, 나침반.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문을 열매 뜰에는 나무가 섰다. 그 나무를 봄으로 해서 그 나무를 통해서 내가 나를 보는 것이 그것이 견성(見性)이라' 하셨습니다. 견성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의 부처를 친견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깨닫는 것—언제나 나의 부처, 나의 성품, 나의 마음자리는 이 몸으로부터 조금도 떠나 있지를 않습니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입으로 말하고 음식을 먹을 때, 발로 걸어 다닐 때, 울고 웃고 성낼 때 바로 그곳에 '나'가 있건만, 어째서 내가 나를 보지를 못합니까?
 
참선을 하는 것은 화두를 항시 의심을 해서 깨닫기 위해서 참선을 하는 것이지마는, 정말 바로 말하자면 찾음으로 해서 자기를 잃게 되는 소치인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찾되 선지식의 지도에 의해서 찾아야만, 찾음으로써 잃어버리는 그것을 보게 되는 까닭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물속에 앉아서 물을 찾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물속에 풍덩 주저앉아 가지고 목이 마르다고 물을 찾는 거와 같은 형상인 것입니다.
 
묻는 사람도 물속에 앉았고, '깨달랐다'고 온 사람도 물속에 같이 들어앉아서 "어떤 것이 물이냐? 물이 어디가 있느냐?"하고 물어본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물속에 들어앉은 줄을 모르고 물을 찾기 위해서 위로 아래로 두리번거리고 있다면 벌써 '아! 이 사람이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구나'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일체 공안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벌써 찾으면 저 죽는 것이고, 찾으면 그르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년 12월 22일)(정사년 11.12 음) (용058)

 

(1) 약 20분.

 

(2) 약 15분.

 

(1)------------------
 
이쪽으로 둘르고 앉으십시오. 그리고 저의 얼굴을 보시면서 말씀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동지(冬至)를 다다라서 날씨가 몹시 추움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법회에 참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금방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잘 들었습니다.
법문(法門)이 고준(高峻)할 때에는 저 도솔천내원궁보다도 더 높은 법문이요. 법문이 깊을 때에는 태평양 바다보다도 더 깊으며, 쉬웁고 평탄할 때에는 대지와 같이 누구라도 삼척동자라도, 나무하는 무식한 일꾼도 들으면 다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쉬웁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각기 자기 근기(根機) 따라서 잘 이해를 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동짓날로써 이 우주 삼라만상과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음(陰)과 양(陽), 두 가지 기운으로써 운행이 되고 있는데 오늘은 양의 기운이 하나 생겨나는, 비로소 처음 생겨나는 날입니다.
오늘부터서 한 양(陽)이 생겨나고 또 내일은 조금 더 생겨나고 그래서 오늘은 해가 제일 일 년 중에 짧고 밤이 제일 긴 날입니다.
 
내일부터서는 1분이 더 낮이 길어지고 밤이 짧아지고, 모레는 2분이 길어지고 해서 1 중에서 오늘이 낮이 제일 짧고 밤이  날이지마는, 하루하루 지남에 따라서 낮이 1 길어지고 밤은 1 짧아지고 이렇게 이렇게 해 가지고 내년엔 춘분(春分)에 가서 낮과 밤이 같아집니다.
그래 가지고 내년 여름 하지(夏至)에 가서는 오늘의 정반대로 낮이 제일 길고 밤이 제일 짧은 날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차츰차츰 길어져 가지고 더이상 길어지지 못하면 그다음 날부터서  짧아지기 시작하고, 짧아지다 짧아지다 더이상 짧아지지 못할 때에는, 못한 날이 되면은  이튿날부터서  길어지기시작하는 것입니다.
 
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초생달이 차츰차츰 하루하루 지내감에 따라서 커지다가 보름달이 되면 최고로 둥글어집니다. 열엿새 날부터서는 차츰차츰 작아지기 시작해 가지고 그믐이 돌아오면 깜깜해질 것입니다.
 
해와 , 이러한 날과 밤과 낮뿐만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 명예와 권리 재산 모든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욕심으로는 부자가 되어 가지고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고,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고 싶지마는, 자기의 분(分)이 있어서 분만큼 부자가 되면은 더이상 부자가   없을 때부터서 차츰차츰 얼마동안 유지해 나가다가 차츰차츰 줄어져서  가난해지고, 가난해지다 가난해지다 더이상 가난해지지 못하면은 그다음부터서는  차츰차츰 부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현들이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남을 업신여기거나 자만하지 말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자기 혼자만의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자기도 물론 필요한 만큼 사용해야 되겠지마는,  남은 재산을 이웃 · 사회 · 국가 · 인류를 위해서 보람 있게   알아야  사람이 우주 자연으로부터 자기에게 보관한 임시로 맡긴 재산을 가장보람 있게 훌륭하게  보관을 하면서 유용하게 쓰다 가는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좋은 재산을 맡겨도 그것을 한푼 올바르게 쓰지 못하고 자기 혼자 그놈을 ! 오그라 쥐고서 벌벌 떨다가 한푼도 쓰지 못한  애착만 ! 돈에 애착만 쏟고 있다가 죽어갈 때는 눈을감고 죽지 못하고.
설사 자손에게  재산을 물려준다 하더라도  자손이  재산을 수용할 만한 복(福)이 없으면은  재산으로 인해서  불행으로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영원히 가난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가난해지다가 가난해지다가 더이상 가난해질  없으면 부자 되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자가 되기 싫어도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바른길로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면은 차츰차츰 부자가 되는 것이니 만큼 가난하다고 해서 신세와 팔자를 한탄하고 저주하고 한숨 속에서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자로서 죄지은 사람이  많지, 가난한 사람이 죄지은 경우는 적은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루하루 벌어먹기 위해서  흘려 일하는 것뿐이고, 부자는  많은 돈을 억지로 모으기 위해서 해서는   그러한 일을 범하게 되는 수가 있는 것이니 만큼,
우리 부처님을 믿는 제자는 해가 낮이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는 이러한 우주 일월성신의 기상 변화, 이러한 것을 보고서도 항시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의 살아나갈 희망과 행복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겠다고 하는 것을 이러한 기회에 각오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법(正法)을 믿고 열심히 내가 나를 깨닫는 참선(參禪)을 하는 것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올바르게 그리고 희망과 행복을 가지고 살아갈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는 동지에 대한 말씀과 또 참선, 참선법에 대한 말씀 그리고 불공(佛供)을 드리는 법에 관한 말씀, 그리고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으로부터 인가(印可) 받을 때에 법담(法談)하신 내용, 그리고 조주 스님과 남전 스님의 고양이 문답 법문,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활구참선(活句參禪), 정말 실참실오(實參實悟), 실다웁게 닦아서 실다웁게 깨달라야만 생사(生死)를 당적(當敵)하는 것이지 간혜(乾慧), 영리해서 이리저리 발라 맞추고 따져서 말 잘하고 그러한 재주 기운 가지고 생사는 면(免)할 수 없다고 하는 말씀으로 끝을 맺으셨습니다.
 
참선은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은 탁자(卓子) 위에 모셔 놓은 부처님, 또는 삼천년 전에 정반왕에 탄생하셨다가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신 싯다르타(siddhartha), 석가모니 그 부처님만이 부처님인 줄 알고.
바로 지금 산승(山僧)은 말을 하고 있고, 여러분은 지금 산승의 말을 듣고 계십니다. 듣고 있는 그놈, 그놈을 여의고는 '참 부처님'은 안 계신 것입니다. 그놈을 항시 놓치지 말고 그놈에서 자기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놈이 있길래 눈을 통해서 볼 수 있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고, 코를 통해서 냄새 맡고, 입을 통해서 말하고 음식을 먹고,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문을 열매 뜰에는 나무가 섰다. 그 나무를 봄으로 해서 그 나무를 통해서 내가 나를 보는 것이 그것이 견성(見性)이라' 하셨습니다.
 
견성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의 부처를 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하 없는 모든 일은 다 할 수가 있어도 한 가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나의 몸으로부터서 부처님을 밖으로 내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백만 번 뛰었다 엎쳤다 온갖 짓을 다하고 한다 하더라도 나로부터서 나의 부처님을 밖으로 내몰 수가 없어요.
 
오히려 그 부처님을 안 볼려고 하고 내몰려고 할수록 나의 부처님은 더욱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나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너무 분명하고 가깝기 때문에 그것은 부처가 아닌 줄 알고 그놈을 내놓고 찾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나의 자성(自性)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뜰 앞에 있는 나무, 누가 못 보는 것입니까?
누구라도 장님이 아닌 도막에는 문을 열면은 뜰 앞에 있는, 뜰에 있는 나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무만 보고, 나무(나)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너무 평범한 것은 우리는 그것이 위대한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국왕의 은혜, 국가 민족의 은혜,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다 우리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갚을려고 해도 갚기가 어렵지마는 정말 고마운 것은 공기(空氣)라고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기가 참으로 고맙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무의식중(無意識中)에도 언제라도 우리는 제절로 이 공기가 우리 코를 통해서 드나들고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탄광, 장성에서 탄광에 화재가 나가지고 이번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마는, 그러한 일을 당해 봐야 공기가 맑은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 없을 때에는 공기가 얼마나 우리에게 고마움을 주고 있는가를 아무도 느끼지를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깨닫는 것—언제나 나의 부처, 나의 성품, 나의 마음자리는 이 몸으로부터 조금도 떠나 있지를 않습니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입으로 말하고 음식을 먹을 때, 발로 걸어 다닐 때, 울고 웃고 성낼 때 바로 그곳에 '나'가 있건만, 어째서 내가 나를 보지를 못해?
이것은 이론적으로 아무리 설명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설명을 들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통해서만이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이 무엇이냐?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그동안에 책을 보거나 법문을 듣거나 해서 알고 있는 불교의 모든 지식, 상식, 교리 그러한 것을 고대로 놔버리고 다못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화두 「이 무엇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각기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그 화두가 같은 분도 있고 다른 분도 계시겠지마는, 다른 분이야 무슨 화두를 받았건 말았건 자기가 받은 그 화두 그것을 이론을 통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못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그저 바보처럼, 하라고 하는 대로만 하는 사람은 길이 빠른 것이고,
영리하고 똑똑해서 자꾸 이리저리 그것을 사량복탁(思量卜度), 중생심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파고들고 비교하고 이러는 동안에 점점 시간만 굴러가고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나쁜 버릇만 자꾸 생겨 가지고 길이 늦어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목동이 소를 끌어다가 맑은 시냇물에다가 끌고 가서 대주면 그저 소는 꿀꺽꿀꺽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듯이 선지식이 '이렇게 하라'하면은 그렇게만 바보처럼 고지식하게 계속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한결같이 그렇게 들어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바보처럼 그렇게 하는 사람은 빨리 그리고 크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고, 그 말을 믿지 못해서 그 말이 아무래도 곧이가 들리지 않아서 이 책도 떠들어 보고 저 책도 떠들어 보고, 이리도 따져 보고 저리도 따져 보고 갈팡질팡 동서남북으로 다니면서 뭐 좋은 말이라도 한마디 더 듣고 싶어서 갈팡질팡하면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10년 20년 세월이 속절없이 지내가고 남는 것은 지해(知解), 사량심(思量心)만 더해 가지고 생사를 면하기는 썩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세지총명(世智總眀)은 득도(得道)하기가 어렵다'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말한 영리하고 지능지수가 높고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은 이 정법,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하기가 썩 어렵다고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선지식들도 하시는 말씀이 '이 자리에서 불보살(佛菩薩)이 나와서 설법을 한다 해도 깨닫자 생각지도 아니하고, 나찰귀신이 와서 죽인다고 해도 두려워할 줄도 모른, 콱! 맥힌 아주 쑥맥 바보가 된다면은 내가 이 자리에서 당장 너에게 생사해탈(生死解脫) 했다고 인가를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분도 계시는 것입니다.(처음~20분28초)
 
 
 
(2)------------------
 
활구참선은 이론을 통해서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성내고 슬퍼하고 걸어 다니고 하는 이놈. 분명히 눈으로 볼 줄도 알고 귀로 들을 줄도 알건마는 그놈이 어떻게 생겼는가 찾아보면 간 곳이 없어. 「이놈이 대관절 무엇인고? 이뭣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뭣고?」
걸어갈 때에도 「이뭣고?」
슬픈 일을 당했을 때에도 「이뭣고?」
기쁜 일을 당했을 때도 「이뭣고?」
산을 보아도 「이뭣고?」
기차 소리를 들어도 「이뭣고?」
 
다못 그렇게 일념 일념을 단속해 나가. 1초 1초를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면 결국은 「이뭣고?」를 할려고 안해도 저절로 화두가 항시 눈앞에 나타나게.
이렇게 해서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못 가서 반드시 확철대오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 "깨닫기 전에도 반드시 눈 밝은 선지식의 지도하에 화두를 타서 정진을 해야 하고, 깨달은 뒤에도 반드시 선지식의 인가를 받아서 깨달은 뒤에 수행하는 지도를 또 받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스승 없이 독학할 수도 있고 자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참선은 여러 가지 경전을 사다 놓고, 조사어록을 사다 놓고, 참선에 관한 일본 서적 · 한국 서적 · 중국 서적을 사다 놓고 혼자 이 책 저 책을 읽어 가면서 혼자 자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백 명 만 명 속에도 제대로 공부가 되질 못하는 것이고, 만 명 가운데 한 사람도 깨달은 사람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에는 몰라도 위음왕불 이후에는 스승 없이 깨달은 사람은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위음왕불은 부처님 가운데에 최초의 부처님이십니다.
땅속에서 땅을 파 가지고 금을 찾는다든지, 바닷속을 뒤져 가지고 보석을 찾는다든지 하는 것은 혼자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혹 눈에 띄기도 하겠지마는, 참선을 해서 내가 나를 깨달은 것은 스승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언제나 나와 같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벌써 찾으면 그르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 것은 화두를 항시 의심을 해서 깨닫기 위해서 참선을 하는 것이지마는, 정말 바로 말하자면 찾음으로 해서 자기를 잃게 되는 소치인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찾되 선지식의 지도에 의해서 찾아야만, 찾음으로써 잃어버리는 그것을 보게 되는 까닭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물속에 떠억 앉아서 물을 찾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물속에 풍덩 주저앉아 가지고 목이 마르다고 물을 찾는 거와 같은 형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 공안은 문헌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요, 천칠백 화두라 합니다마는 그 공안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좋은 열쇠요, 나침반입니다.
그러나 무슨 소견이 났을 때에는 그 공안은 바로 '그 사람이 바로 깨달은 사람이냐?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냐?'를 시험해 보기 위한 좋은 시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랐다'할 때에 그 사람에게 공안을 하나 턱 물어보면은 그 공안에 대해서 그 사람이 어떠한 표정을 짓느냐?
입 벌리기 전에 벌써 '저 사람은 바로 본 사람이다. 바로 못 본 사람이다. 바로 깨달은 사람이다.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하는 것을 입 벌리기 전에 선지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마는 짐짓 입을 벌리게 해 보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 봤자, 입 벌리기 전에 알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물속에—묻는 사람도 물속에 떠억 앉았고, 깨달랐다고 온 사람도 물속에 같이 들어앉아서 "어떤 것이 물이냐? 물이 어디가 있느냐?"하고 물어본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물속에 들어앉은 줄을 모르고 물을 찾기 위해서 위로 아래로 두리번거리고 있다면 벌써 그 사람 '아! 이 사람이 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구나' 대번에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일체 공안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벌써 찾으면 저 죽는 것이고, 찾으면 그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공안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깨닫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물쇠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하는 것을 깊이 인식을 하시고,
화두를 공부하다가 조금 잘 들리지 아니하고, 의심이 잘 들지 않는다고 해서 '화두가 나빠서 그런가 보다'해 가지고 이 화두, 저 화두 이렇게 화두를 바꿀려고 쌌거나 그래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누구라도 처음부터 한결같이 잘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곧 그렇게 하면은 곧 잘될 것 같지마는 얼마 해 가다 보면은 아무리 해도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마음의 눈 박을 곳을 얻지를 못한 채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몸이 뒤틀리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영 이것이 공부가 되는 것인지 안되는 것인지 조차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그러나 다못 무조건 하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그렇게 해 나감으로 해서 언젠가는 차츰차츰 번뇌와 망상은 이 알 수 없는 의심 앞에 굴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번뇌 망상 줄어지면서 화두 들어지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화두가 잘 들린다고 해서 좋아하지도 말고, 또 화두가 잘 안 들린다고 해서 짜증을 내거나 번뇌심을 내서는 아니됩니다.
심한 분은 '아휴, 내가 참선은 내가 인연이 없나 보다' '나는 나이가 먹고, 여자고, 말세중생이라 참선은 안되나 보다' 이래 해 가지고 다시 염불을 한다든지.
'내가 업장(業障)이 많으니까 기도를 해 갖고 업장을 소멸한 다음에 해야겠다' 이래 가지고 선방에서 몇 철씩 하다가도 기도하러 돌아다니고 이런 분을 가끔 볼 수가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공부가 잘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 보다는 영 가슴이 답답하고 알 수가 없고 잘 안될 때, 그때가 한 계단 공부가 올라서려는 그러한 고비에서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비를 잘 고비를 넘겨야만, 공부를 중단하지 아니하고 잘 넘겨야만 공부가 한층 수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동지를 기해서 다른 절에서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낱낱이 모다 독불공(獨佛供)을 하고 목탁을  치고 계속 이 불공을 하고 축원(祝願)을 하느라고 야단들인데,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여태까지 듣고 또 참선에 관한 말씀을 우리는 이야기하고 또 말씀을 듣고 계십니다.
 
참선 공부 열심히 함으로써만이 우리가 무량겁으로부터 윤회로, 고해(苦海) 속에서 헤매고 내려오는 그것을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지, 독불공해서 축원을 아무리 오래오래 한다 하더라도 그것 가지고서는 우리 인간에 조그마한 소원은 성취할는지 모르지마는 영원한 생사해탈은 기약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회가 법문이 끝나자마자 우리도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불공을 올리고 또 축원을 합니다. 낱낱이 '아무개 보체(保體), 아무개 보체' 안 하고, '법보제자(法寶齋者) 각각등보체(各各等保體)' 이러기만 해도 부처님은 다 잘 알고 계신 것입니다.
학교 학생이 수천 명 되는데, 그 많은 사람을 낱낱이 이름을 부를 때에 혹 이름을 잘못 부를 수도 있고 혹 빠뜨릴 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인천상업고등학교 학생' 그러면 눈먼 학생도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보제자 각각등보체'할 때에는 안심하고 마음으로 축원을 하세요. 이것이 우리 법보선원에 불공법입니다.
법문을 잘 듣고서 여러분의 정성스럽게 이 동지에 참석하신 모든 목적을 달성하고서 그리고서 오늘 법회를 마치는 것입니다.
 
'오늘 불공 동참(同參)을 했으니까 앞으로 이 일이 잘 성취되리라' 이렇게 생각하시지 말고, '이미 참석하려고 하는 마음을 냈을 때, 또 이 자리에 앉았을 때 성취했다'고 생각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 성취했다'고 생각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성취하기를 바라지 말고, '이미 했다'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성공할, 성취되는 잘되는 것입니다.
 
'이랬으니까 장차 되리라' 되기를 바라는 동안에는 '혹 안 될지도 모르겠다'하는 생각이 거기에 붙어 있기 때문에 '될까 말까? 될까 말까?'
다리를, 외나무다리를 건너갈 때 '떨어지면 어쩔꼬? 떨어지면 어쩔꼬?' 그러다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고 자신 있게 쑤욱 걸어가면은 무난히 건너갈 것도, 가다가 중간쯤 가다가 '떨어지면 어쩔꼬? 떨어지면 어쩔고?'하면서 계곡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은 영락없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믿어야 한다'고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을 하신 것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너무 길어지면 팥죽이 퍼지니까 말씀을 그만하고,
오늘 이 동참법회에 참석하신 사부대중은 지난 과거로부터 일 년 동안 모든 업장이 다 소멸이 되셨고, 앞으로 새해를 맞이해서 일 년 동안 몸 건강하시고 정법문중(正法門中)에 신심이 더욱 돈독해서 도업(道業)이 날로 진취가 있으실 것을 빌고, 집안에 크고 작은 모든 원(願)이 가까운 곳으로부터 차츰차츰 다 성취되시기를 간절히 빌면서 말씀을 마칩니다.(20분32초~35분6초)(끝)

 

Posted by 닥공닥정
법회(동지차례)2015. 12. 16. 06:18

 

 

§(224) (게송)외응중연수처적~ / 송광사 구산(九山) 방장 스님 열반 /무상한 허망한 경계 속에서 영원한 진리를 깨달라야 / (게송)도본무언상적멸~.

 

지혜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절서와 기후, 춘하추동의 변동에 따라서그것은 바로 유위법(有爲法) 세계의 양상이지마는, 생로병사(生老病死) 성주괴공(成住壞空) 그러한 허망한 경계 속에서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진리의 양상(樣相) 보고도 분별(分別) 망상(妄想) 일으켜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수레바퀴 속에 말려들어 가는 것이고.

 

동지를 맞이해서 구산 방장 스님의 열반이 결정적으로 우리 중생들을 위해서참으로 무상한 줄을 깨닫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라하는 살아 있는 법문으로 우리는 열반을 받아들여야 것이고, 동지, 기후의 변동을 통해서 우리의 무상한 생사 무대에서, 무상한 생사 속에서 영원을 깨달으라.

 

**송담스님(No.224)—83 동지법회(83.12.22) (용224)

 

(1) 약 19분.

(2) 약 7분.

 

(1)------------------

 

외응중연수처적(外應衆緣隨處寂)하고  내명일적응무휴(內冥一寂應無虧)니라

나무~아미타불~

토리회회여해대(肚裏恢恢如海大)하고  일임천차유여무(一任千差有與無)니라

나무~아미타불~

 

외응중연수처적(外應衆緣隨處寂)하고, 밖으로는 모든 인연을 ()허되 응하는 그곳을 따라서 적적(寂寂)하고,

내명일적응무휴(內冥一寂應無虧)로구나. 안으로는 적적한 데에 계합해 가지고 뻑뻑이 이지러짐이 없더라.

 

토리회회여해대(肚裏恢恢如海大)하고, 뱃속은 넓고 넓어서 바다와 같이 크고 큰데,

일임천차유여무(一任千差有與無)로구나. 가지, 가지 모든 있고 없는 차별에 일임(一任) 버리더라.

 

12 16일날 전라도 송광사 구산(九山) 방장(方丈)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큰스님 분상에는 오고가는 것이 없으시겠지만, 우리 종단이나 우리 국가나 인류를 위해서는 손실이라 아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세계가 나날이 위태로운 곳을 향해서 치닫고 있고, 우리 종단도 계속해서 분규가 가라앉지 않고 있는 이때에 그런 큰스님이 계셔야만 육신으로라도 계셔야만, 우리 종단의 쓰러지는 것을 받쳐 주시고, 길을 잃고 헤매는 중생들의 앞길을 비추어 주시고 이끌어 주실 텐데,

아직도 년이나 이십 년을 살으셔야 하고, 살아 계실 있는 그러한 대종사(大宗師) 갑자기 이렇게 사바세계를 하직을 하셨습니다.

 

삼천 전에 부처님께서도보통 사람의 정명(正命) 살이고, 부처님은 모든 과덕(果德) 구족(具足)하셔서 120세까지는 사실 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습니다.

말세(末世) 중생이 박복(薄福)해서, 닦는 데에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해서 당신이 수용하실 복을 물려주시기 위해서 미리 열반에 드셨다이렇게 말도 하지마는,

 

그것보다는 중생들이부처님은 언제라도 우리가 친견할 수가 있고 법문을 들을 수가 있다부처님이 출세(出世)하셔서 살아계신 것을 그렇게 생각을 하고 하루하루를 무섭게 정진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열반에 드심으로 해서 무상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고,

여래(如來) 그렇게 아무나, 아무데서라도 친견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하는 경책(警策) 주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 열반을 보이셨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구산 대종사의 열반도 또한 그와 같아서아무때라도 친견할 있고, 아무때라도 법문을 들을 수가 있다이렇게 생각하고 무상(無常) 신속(迅速) 망각하고 오늘도 이럭저럭, 내일도 이럭저럭, 허송세월하고 있는 어리석은 우리 중생들을 위해서 발심할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열반을 보이셨는지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미 생사 문제를 요달(了達) 분상(分上)에는 생사를 두려워 것도 없고, 오고가는 것에 얽매일 것이 없겠지만, 생사 문제를 요달하지 못한 분상에는 정말 생사는 두려운 것이며, 무상한 몸뚱이는 믿을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동짓날입니다. 동짓날은 중에 밤이 제일 날이고, 낮의 시간이 제일 짧은 날입니다. 기상대 발표에 의하면 금년 동지는 밤의 길이가 낮의 길이 보다 4시간 52분이 길다고 그랬습니다.

 

옛날부터 동지에는 속가에서도 팥죽을 쒀서 조상 사당(祠堂) 올리고 차례를 젓수고, 중국의 총림 선원에서도 동짓날에는 도량신(道場神) 선망부모(先亡父母) 선사(先師)들의 영단(靈壇) 목욕재계하고 () 올려왔습니다.

금년에 우리 용화선원에서도 이렇게 많은 사부대중이 모인 가운데에 법요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마는, 밤과 낮의 길이가 여름 하짓날에는 낮이 제일 길고 밤이 제일 짧은데, 동지에는 그와 반대로 밤이 제일 길고, 낮이 제일 짧은 날인 것입니다.

 

춘분과 추분은 길이와 길이가 똑같은 날입니다. 춘분에는 밤낮의 길이가 똑같은데 하루에 분씩 차츰차츰 낮의 시간이 분씩 길어져. 그래가지고 추분이 돌아오면 똑같아졌다가 다시 밤과 낮의 길이가 반대로 분씩 차이가 나다가, 오늘 동지에는 밤이 제일 길고 낮이 제일 짧은 날입니다.

하루에 분씩 길어지다가 더이상 길어지지 못하면 다시 다음부터서는 반대로 분씩이 줄어져 가는 것입니다.

 

밤과 낮의 길이가 짧아졌다가 길어졌다가 하는 것이 음양(陰陽) 이치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가 있느냐?

 

추위와 더위도 덥다 덥다 못해서 더이상 더울 수가 없으면 다음부터서는 차츰차츰 서늘해지고, 그래 가지고 차츰차츰 추워지기 시작해 가지고 더이상 추워질 수가 없으면 다시 차츰차츰 따뜻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춘하추동의 절서(節序) 양상이고,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가난한 사람이 노력을 가지고 차츰차츰 부자가 되어서 더이상 부자가 없을 만큼자기 분상에 부자가 만큼 되면 다시 가난해집니다. 가난해져 가지고 더이상 가난해질 없을 만큼 가난해지면 그때부터서는 차츰차츰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년의 절서와 기후 변동을 통해서 인생 문제를, 인생에 있어서의 지혜를 얻을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해졌다고 해서 낙망(落望) 필요도 없고,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교만을 필요도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가난하되 기가 죽지 아니하고, 부자로되 교만하지 아니한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업이 여의치 못해서 실패하고 가난해지면 한탄에 사무쳐서 견디고 실망에 빠져서 자기의 바를 찾지를 못하고,

재수가 있어서 돈을 벌고 남부럽지 않게 살면 오만불손(傲慢不遜)하고 안하무인(眼下無人) 되고, 거만에 빠져서 남을 업신여기고, 이건 어리석은 사람의 취할 바인 것입니다.

 

지혜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절서와 기후, 춘하추동의 변동에 따라서그것은 바로 유위법(有爲法) 세계의 양상이지마는, 생로병사(生老病死) 성주괴공(成住壞空) 그러한 허망한 경계 속에서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진리의 양상(樣相) 보고도 분별(分別) 망상(妄想) 일으켜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수레바퀴 속에 말려들어 가는 것이고.

 

오늘 동짓날을 맞이해서 오늘이 밤이 제일 길고 낮이 제일 짧지마는, 내일부터서는 분씩 다시 낮의 길이가 길어지고 밤의 길이가 짧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밖으로 모든 인연을 응하되 곳을 따라서 적적하다(外應衆緣隨處寂). 안으로 적적한 데에 명합(冥合) 되되, 뻑뻑이 이지러진 바가 없는 것이다(內冥一寂應無虧). 모자란 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이 길거나 낮이 길거나, 부자가 되거나 가난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마음속은 넓고 넓어서 바다와 같이 크고(肚裏恢恢如海大), 인간 세상에 생로병사와 희로애락과 성주괴공의 천차만별의 양상 속에 일임해 버리되, 바가 없는 것입니다(一任千差有與無).(처음~1829)

 

 

 

 

 

(2)------------------

 

도본무언상적멸(道本無言常寂滅)한데  호호선양비본심(浩浩宣揚非本心)이라

나무~아미타불~

약지황엽경비전(若知黃葉竟非錢)하면  하용애애측이문(何用獃獃側耳聞)이리오

나무~아미타불~

 

도본무언상적멸(道本無言常寂滅)이여. ()라고 하는 것은 본래 말이 없어. 항상 적멸(寂滅) 뿐이다 그말이여.

호호선양비본심(浩浩宣揚非本心)이여.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49 동안을 팔만 법문(八萬法門) 설하셨지마는 그것은 본심이 아니여.

설할 것이 있어서 설한 것이 아니여. 그러나 자비로써중생이 () 받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가련해서, 자비로써 설할 없는 곳을 향해서 많은 법을 설하신 것이다.

 

약지황엽(若知黃葉) 경비전(竟非錢)이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사천 방편 법문이 어린애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서 노랗게 물든 단풍잎을 집어 주면서, 여기 있다! 여기 있다!’하고, 그렇게 황엽(黃葉)이라고 하는 것이 돈이 아닌 줄을 알아버린다면,

하용애애측이문(何用獃獃側耳聞)이냐. 어찌 멍청하게 귀를 기울이고 들을 것이 있겠느냐.

 

동지를 맞이해서 구산 방장 스님의 열반이 결정적으로 우리 중생들을 위해서참으로 무상한 줄을 깨닫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라하는 살아 있는 법문으로 우리는 열반을 받아들여야 것이고,

동지, 낮과 밤이 제일 길고 짧은 기후의 변동을 통해서 우리의 생사 무대, 무상한 생사 무대에서, 무상한 생사 속에서 영원을 깨달으라.

 

지혜스럽게 관찰하면 일월성진과 산천초목과 생로병사와 성주괴공 속에서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언제 어디서라도 위없는 대해탈 법문을 우리는 보고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정태진 영가를 위해서 어느 불자가 대중공양을 올리니, 공양을 드시고 영가의 해탈이 되도록 작관(作觀) 잘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이어서 동지, 우리의 선망부모의 차례 법요식이 계속이 되겠습니다.(5219~5851)()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1)

 

*(게송) 외응중연수처적~’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함허득통 설의(說誼) 게송 참고.

*일임(一任) ; 모두 맡김.

*방장(方丈) ; ①선원(禪院) 운영을 주관하는 최고 책임자 스님, 또는 그가 거처하는 .

②선원(禪院강원(講院율원(律院) 모두 갖추고 있는 총림(叢林) 가장 높은 스님.

*종사(宗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조사선법(祖師禪法)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조사(祖師) 같다.

*정명(正命) ; 타고난 수명.

*과덕(果德 나무의 열매·해낼 /좋은 품격·공덕 ) ;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공덕.

*구족(具足 갖출 /충족할 ) ; 빠짐없이 두루 갖춤.

*말세(末世 /세상 )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 세상,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 세상,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 세상이라고 한다.

*박복(薄福 엷을·적을 / ) ; 복이 별로 없음. 또는 팔자(八字, 사람의 타고난 운수나 분수) 사나움.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②태어나는 .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③세간을 초월하는 . 출세간(出世間) 준말. 삼계(三界) 나오는 .

*여래(如來) : 부처님 10호의 하나。 범어 Tathagata () () 진여(眞如) 뜻이니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 뜻。  여거여래(如去如來)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경책(警策 깨우칠 , 채찍 ) ; 타이르고 채찍질하여 깨우치게 하는 .

*요달(了達 마칠·완전히 /통달할 ) ; 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분상(分上 분수 , )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젓수다 ; ①궁중에서잡수다 이르던 . 잡수다-->‘먹다 높임말. ②신과 부처님께 소원같은 것을 비는 . (사람이 제사를)차려 올리다.

*도량신(道場神) : 도량(道場) 수호신.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사람의 선망부모가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 수천만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부모가 바로 사람의 부모고, 사람의 부모가 부모여서,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 하는 것입니다.

*선사(先師) ; 돌아가신 스승.

*영단(靈壇) ; 영가의 위패를 두는 ().

*( 재계할 ) ; ‘()’ 본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 3(身口意 三業) 깨끗하게 하여 악업(惡業) 짓지 않아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방식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며 공덕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또한 법회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특히 돌아가신 영가를 위한 천도재(薦度齋)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통=천도재 여긴다.

*절서(節序 마디··절기 /차례 ) ; 절기(節氣, 해를 스물넷으로 나눈 기후의 표준점.15 내지 16일에 번씩 돌아온다) 차례. 또는 차례로 바뀌는 절기.

*낙망(落望) ; 희망을 잃음.

*오만불손(傲慢不遜 거만할 /거만할 /아니 /겸손할 ) ; 태도나 행동이 건방지고 공손하지 못함.

*유위법(有爲法) ; ①여러 인연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모든 현상. 여러 인연으로 생성되어 변해 가는 모든 현상. 인연의 모임과 흩어짐에 따라 변하는 모든 현상.

②온갖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형성된 현상. 분별을 잇달아 일으키는 의식 작용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차별 현상. 인식 주관의 망념으로 조작한 차별 현상.

*양상(樣相 모양·형태·상태 /서로·모양·바탕 ) ; 사물이나 현상의 모양이나 상태.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망상(妄想 망녕될 /생각 )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 생각() , 또는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

*생사윤회(生死輪廻 /죽을 /바퀴 /빙빙돌 )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 죽고()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 돌듯이()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명합(冥合 어두울·깊숙할·그윽할 /합할·들어맞을·일치함 ) ; 계합(契合). 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들어맞음.

 

 

 

 

 

------------------(2)

 

*(게송) 도본무언상적멸~’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함허득통 설의(說誼) 게송 참고.

*적멸(寂滅 고요할 /다할·끊어질 )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탐욕() 노여움() 어리석음() 소멸된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 여의고 있는 .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팔만(八萬) ; 팔만사천(八萬四千).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 )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 진리에 이르는 .

 

Posted by 닥공닥정
법회(동지차례)2015. 12. 12. 11:27

 

 

§(026) 동짓날 법회를 하는 이유? / 일체(一切) 유심조(唯心造) / 참선을 해야만 무주상 보시를 수가 있고, 무루복을 닦을 수가 있다.

 

동지가 돌아오건, 입춘이 돌아오건 그것이 무슨 참선해 나가는데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마는, 그러한 우주의 질서, 천지자연의 섭리를 보고서, 그것을 보고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옛날부터서 그러한 계절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법회(法會) 거행해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주의 변화, 대자연의 섭리 이런 것들이 전부가 뭐라고 표현할 없는 물건 발현인 것입니다.

 

허공이라고 하는 거울이 우리의 앞에나, 뒤에나, 머리 위에나, 다리 밑에나, 거울이 거울이, 무한대로 거울이 있는데, 거울에 보인 것이 자기의 얼굴이 보인 것이다. 자기의 마음이, 자기의 모습이 거울에 비추어서 반사되어서 자기에게 돌아온 것이다.

 

유루복이라 하는 것은 얼마 가면은 타락할 있는 복이다. ‘없을 ()’, ‘ ()’, 무루복은샘이 없는 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지은 복이 영원히 타락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무주상 보시를 수가 있고, 어떻게 해야 무루복을 닦을 있느냐? 거기에 가서 참선을 해야만 무주상 보시를 수가 있고, 무루복을 닦을 수가 있다 말씀입니다.

 

**송담스님(No.026)—76 동지법문 (76.12.22) (용026)

 

약 15분.

 

이쪽을 요리 두르고 앉아서 얼굴을 보시고 들으십시오.

오늘은 병진년 11 초이튿날 동짓날입니다. 오늘 동지(冬至) 오전 2 35 동지 () 그렇게 됐지마는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시간을 상관하지 아니하고 사시(巳時) 이렇게 법회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동지는 무슨 날인고 하면은 낮의 시간이 제일 짧고 그리고 시간이 제일 날입니다. 그러면 밤이 제일 짧고 낮이 날은 언제냐 하면 하짓날(夏至날)입니다.

하짓날은 낮이 제일 길고서 밤이 짧다가 차츰차츰 하루에 1분씩 낮이 길었던 날이 1분씩, 1분씩 짧아져 가지고, 추분(秋分) 돌아오면은 밤과 낮의 길이 똑같아졌다가 그것이 차츰차츰 반대로 1분씩 짧아져 가지고는 동지가 되면은 하지의 정반대로 낮이 제일 짧고, 밤이 제일 길어집니다.

 

동지가 지내면서부터 1분씩, 1분씩 낮이 길어지기 시작해 가지고, 이듬해 춘분(春分) 돌아오면은 같아집니다. 밤과 낮이 똑같아졌다가 춘분 이후로 1분씩, 1분씩 길어져 가지고 하지가 되면 제일 길어지고, 이렇게 해서 년을 통해서 그렇게 길어졌다, 같았다, 짧아져 이렇게 됩니다.

 

지구가 해를 년을 걸려서 자신이 하루에 바퀴씩 돌면서 태양을 바퀴 도는, 일년 걸려서 돌아가지고 다시 제자리에 돌아옴에 따라서 이렇게 낮과 밤의 시간이 차이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어째서 동짓날 이렇게 법회를 갖게 되느냐? 다른 절에서는 동짓날 () 새벽에 들었으면 새벽에 팥죽을 쑤어서 올리고 축원(祝願) 하고, 밤에 들었으면 밤에 팥죽을 쑤어서 올리고 축원을 하고 이러느냐?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질서가 음양(陰陽)으로 노나서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래는 그것이 음양이 없는 것이지마는일단 그것이 본래는 음도 없고 양도 없는 , 뭐라고 표현할 없는 것이지마는,

그것이 아무 바람도 없고, 아무 움직임이 없을 때는 물결이 일다가, 그것이 물결이 일어났다 하면은 물결, 버큼 하나 일어남으로 해서 조용했던 넓은 호수에 파도가 좌악 일기 시작한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물결 일어남으로 해서 일만 물결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본래는 음양도 없지마는 없는 자리에서 음양이 벌어지고, 음양이 팔괘(八卦), 팔괘에서 24, 24괘에서 360도로 이렇게 해서 세계가 벌어지고, 가운데 생로병사(生老病死)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 벌어져 가지고, 그것을 가리켜서 윤회(輪廻), 결국은 윤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윤회의 물결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자가 가난해졌다가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 부자가 되면 영원히 부자가 것이 아니라, 얼마 동안 가다가 가난해지고 이렇습니다. 한번 부자가 되면 영원히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지마는 시절인연(時節因緣) 도래(到來)하면은 차츰차츰 차츰 가난해지게 됩니다.

가난해져 가지고 영원히 가난하게 살면은 큰일날 텐데 가난한 사람이 차츰차츰 일어나기 시작하면은 국중(國中) 거부(巨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대(當代) 일생 동안 부귀를 누리기도 하고 , 가기도 하고, 대를 가기도 하고, 당신 일대에도 채우지 못하고 금방 말년에 고생을 하는 사람도 있고, 가지 각가지인데,

년에 24계절이 돌아가는 , 그것을 보고서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무상하다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라야만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지가 돌아오건, 입춘이 돌아오건 그것이 무슨 참선해 나가는데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마는, 그러한 우주의 질서, 천지자연의 섭리를 보고서, 그것을 보고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옛날부터서 그러한 계절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법회(法會) 거행해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주의 변화, 대자연의 섭리 이런 것들이 전부가 뭐라고 표현할 없는 물건 발현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물건이라고도 없는 진여자성(眞如自性) 자리에서 파도가 일어나 가지고 가지가 뻗고, 잎이 피고 하는 것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자기 마음이 바르고, 자기 마음이 편안하고, 자기 마음이 기쁘고 행복한 사람은 하늘을 봐도 희망에 넘치고, 꽃이 피는 것을 보고도 희망에 넘치고, 가을에 단풍이 지는 것을 보고도 조금도 슬퍼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이 고독하고, 자기 마음이 의지할 곳이 없고, 자기 마음이 서글픈 사람은 , 밝고 뚜렷한 가을의 고운 달을 보고도 눈물이 주루루 한숨이 쉬어지고, 곱게 곱게 꽃을 보고도 한숨을 쉬게 되고, 어떠한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도 하나도 아름다운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느냐? 자기 마음과 우주 법계에 삼라만상과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허공이라고 하는 커다란 거울이 있는데, 거울에 자기의 마음이 보인 것이 바로 우리의 눈으로 있는 것들이요, 귀로 들을 있는 것들이요, 코로 맡을 있는 것들이요, 입으로 맛볼 있는 것들이요, 몸뚱이로 촉감으로 감각할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 제일게(第一偈)일체(一切) 유심조(唯心造)’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일체(一切) 말은모든 이라 말이예요. 『삼라만상(森羅萬象) 모든 것이 마음으로 이루어졌다. 마음으로 되았다』 말이예요.

마음으로 되었다 말이 바로 아까 말씀드린자기의 마음이 밖으로 나타나 가지고, 그것이 다시 자기에게 비추어 것이다

 

허공이라고 하는 거울이 우리의 앞에나, 뒤에나, 머리 위에나, 다리 밑에나, 거울이 거울이, 무한대로 거울이 있는데, 거울에 보인 것이 자기의 얼굴이 보인 것이다. 자기의 마음이, 자기의 모습이 거울에 비추어서 반사되어서 자기에게 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이 참선을 하시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냉정히 관찰을 보고 반성을 보면 이러한 이치는 분명 여러분이, 과연 그렇구나!’하고 아실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동짓날을 맞이해서 우주 시간, 계절의 변화를 인연해서 자신의, 나의 일신(一身) 따르는 빈부귀천 모든 것이 그와 같다고 하는 이치를 우리는 되돌려서 깊이 뉘우치고, 거기에서참나 발견할 있는 참선법(參禪法) 가일층 정진을 하셔야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조실 스님 법문에는 너무나도 깊은, 그리고 중요한 법문을 여러 가지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무주상 보시(無住相布施), 무주상 보시를 해야 사람은 무루복(無漏福) 닦는 것이 된다. 무루복을 닦아야 영원히 타락이 없는 것이다.

 

유주상(有住相), 내가 누구에게 보시를 하거나, 부처님께 시주(施主) 하거나, 어떠한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희사(喜捨) 하거나, 이것이 보시에 들어갑니다마는,

보시를 하고서내가 이러한 보시를 했다, 이러한 희사를 했다, 이러한 시주를 했다 스스로 마음에 그러한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장한 일을 했다고 스스로 자부를 하면서, 남에게 자랑을 하고 뽐내고 으시대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유주상 보시(有住相布施), 유주상 보시를 하는 것은 무루복이 아니라 유루복(有漏福) 밖에는 되지 않는다.

 

유루복이라 하는 것은 얼마 가면은 타락할 있는 복이다 그말이여. ‘없을 ()’, ‘ ()’ 무루복은샘이 없는 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지은 복이 영원히 타락이 없다.

 

우리가 복을 지으면 복의 차이에 따라서  천당에 올라가게 됩니다. 아주 복을 많이 짓게 되면은 아무 괴로움이 없는 천당에 태어나는데, 천당에 태어나면은 영원히 천당에서 살수 있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복만큼 복을 누리고 나면은 지상으로 떨어지거나, 또는 축생이 되거나, 또는 그밖의 악도에 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루복을 닦은 사람, 무주상 보시를 사람은 천당에 태어나되, 천당에서 복을 누리는 기간이 오래간다 말씀이여.

그런데 무루복 가운데에도 () 없는 복을 닦을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무주상 보시를 수가 있고, 어떻게 해야 무루복을 닦을 있느냐?

거기에 가서 참선을 해야만 무주상 보시를 수가 있고, 무루복을 닦을 수가 있다 말씀입니다.


금강경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주상(無住相)이라고 것에 대해서 거의 전편(全篇) 걸쳐서 도리를 그렇게 간곡히 말씀을 주셨습니다.

지혜스럽게 닦아야 무주상을 수가 있고, 무루복을 닦을 수가 있어서 영원히 타락이 없는 해탈도에 이르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처음~152)

 

 

 

 

 

>>> 위의 법문 전체를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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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巳時) ; ①지난날에 쓰던 십이시(十二時)가운데 여섯 번째 (). 오전 9시부터 11까지를 말한다. ②지난날에 쓰던 이십사시(二十四時)가운데 열한 번째 (). 오전 9 반부터 10 반까지를 말한다.

*축원(祝願) ; 어떤 일이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불보살(佛菩薩) 간절히 원하고 .

*음양(陰陽) ; 우주 만물의 서로 반대되는 가지 기운으로서 이원적 대립 관계를 나타내는 . 달과 , 겨울과 여름, 북과 , 여자와 남자 등은 모두 음과 양으로 구분된다.

*버큼 ; ‘거품 사투리.

*팔괘(八卦) ; 중국 상고 시대의 복희씨(伏羲氏) 만들었다고 하는 여덟 가지 (). 양효(陽爻) 음효(陰爻) 이루어진 개의 효를 겹치어 자연 세계의 기본 요소인 여덟 가지의 () 나타내는 것으로 (:, 하늘), (:, ), (:, ), (:, ), (:, 우레), (:, 바람), (:, ), (:, ) 말한다.

*생로병사(生老病死) ; 중생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4가지 고통. ,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 하는데,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생주이멸(生住異滅) ; 모든 사물이 생기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함(). 또는 그런 현상.

*윤회(輪廻) ; ①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구르는 것과 같이, 중생이 번뇌와 () 의하여 삼계 육도(三界六道) 생사(生死) 세계를 그치지 아니하고 돌고 도는 . ②어떤 사물이 일련의 변화 과정을 단계에 따라 차례로 밟아 가거나 되풀이함.

*시절인연(時節因緣) ; 시절이 도래(到來)하고 인연이 합쳐지는 기회. [참고]시절(時節)—어떤 시기나 . 도래(到來)—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기회(機會)—어떠한 , 행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

*국중(國中) ; 나라의 .

* 물건 ; 일물(一物). 일상(一相). 물건 · 모양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이다.

*진여자성(眞如自性)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참선법(參禪法)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무주상(無住相) ; 집착함이 없는 모습. 집착함이 없는 상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대승불교도들의 실천덕목 하나. () 머뭄() 없는() 보시.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의미한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한다.

무주상보시는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05~106에서.

(46) 貧人이  來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을 따라 나누어 주라。한몸같이 두루 어여삐 여기는 것이 보시니라.

(註解) 自他爲一曰同體요,  空手來空手去가  吾家活計니라.

나와 남이 아닌 것이 몸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니라.

 

[참고] [금강경오가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무비 역해 | 불광출판부) p141~145, [금강경오가해 설의육조스님 금강경] (원순 옮김 | 도서출판 법공양) p101~104.

復次  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 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수보리야, 보살은 () 응당히 머문 없이 보시를 할지니, 이른바 ()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여 () 머물지 않아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만약 보살이 ()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복덕은 가히 헤아릴 없느니라.

 

(육조 스님 해의解義)

부차(復次) 것은 앞을 이어서 뒷말을 일으키려는 것이니라.

범부(凡夫) 보시는 다만 아름다운 외모와 오욕의 쾌락을 구하는 고로, 과보가 다하면 삼악도(三惡途 지옥,아귀,축생) 떨어지므로,

세존께서 크나큰 자비로어떠한 것에도 집착이 없는 무상보시(無相布施)’ 행하도록 가르치시니, 아름다운 외모나 오욕(五欲) 쾌락을 구하지 않고, 다만 안으로는 인색한 마음을 없애고 밖으로는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함이니, 이와 같이 상응(相應)하는 것이색에 머물지 않는 보시(不住色布施)’이니라.

 

무상(無相) 보시를 한다는 것은, '보시한다' 마음도 없고, 베푸는 물건도 없으며, 받는 사람도 분별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不住相布施)' 하느니라. 보살이 보시(布施) 행할 마음으로 바라는 것이 없으면 얻는 복이 시방(十方) 허공과 같아서 가히 헤아릴 없느니라.

 

일설에 '()' '(넓다)', '()' '(사방에 흩어버린다)'이니, 가슴 가운데 있는 모든 망념·습기·번뇌를 널리 흩어버려 사상(四相) 끊어지고 마음에 전혀 쌓여 있지 않는 것이 ' 보시(眞布施)' 하며, 일설에는 '()' '' 육진 경계(六塵境界) 머물지 않으며 유루(有漏) 분별도 하지 않아 오직 항상 청정한 돌아가서 만법(萬法) 공적(空寂)함을 요달함이니라.

만약 뜻을 요달하지 않으면 오직 온갖 () 더하므로 모름지기 안으로 탐애(貪愛) 없애고 밖으로 보시를 행해서 안밖이 상응하여야 무량한 복을 얻게 것이니라.

 

다른 사람들의 악행을 보아도 허물을 보지 않아서 자성(自性) 가운데 분별을 내지 않음이 '이상(離相)' 되느니라.

가르침에 의해 수행해서 마음에 능소(能所) 없는 것이 선법(善法) 것이라. 수행인이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선법이라 없고, 능소심(能所心) 멸하지 않으면 마침내 해탈치 못하니, 순간순간 항상 반야지혜를 행하여야 복이 무량무변한 것이니라.

 

이같은 수행에 의지하면 일체 인천(人天 사람과 하늘신) 공경하고 공양함이 따르니 이것을 복덕(福德)이라 하도다. 항상 부주상보시(不住相布施 어떠한 것에도 집착이 없는 보시) 행하여 널리 일체 모든 중생들을 공경하면 공덕이 끝이 없어서 가히 헤아릴 없느니라.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 의해서 내가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게 하여 무루복(無漏福) 유루복(有漏福)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시주(施主 베풀 , 주인 )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

*희사(喜捨 기쁠 , 버릴 ) ; 보상을 구하지 않고, 기쁘게 재보(財寶) 베푸는 . 정사(淨捨정시(淨施)라고도 .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 ; 남에게 보시 하되내가 보시를 했다하는 생각() 있고, ‘내가 이렇게 보시를 했으니까 나한테 보답을 해야 한다 하는 보답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는 보시.

이런 유주상보시는 조그마한 공덕 밖에는 안되고, 얻어봤자 유루복(有漏福) 밖에는 얻지를 못한다.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 복이어서 한도(限度)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받아버리면 다시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얻었던 것을 결국은 없애면서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죄를 짓지 않게 하고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 같은 좋은 방향으로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 설날통알 설날차례(1996.02.19)에서.

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 원수다.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 가게 되니까 그래서 유루복은 원수이고,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수도 없고, 생활도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좋은 방향으로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과보(果報) 바래.

공투세를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무루복을 참으로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전편(全篇 온전할·전체 / ) ; 글이나 영화 따위의 작품 전체.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