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산화상시각원상인(蒙山和尙示覺圓上人) (5/8) 몽산화상이 각원상인에게 주신 말씀.(재송도인 후편)

**전강선사(No.224)—몽산07. 몽산시 각원상인(5) (임자72.06.21) (재송도인 후편)

(1/3) 약 22분.

 

(2/3) 약 17분.

 

(3/3) 약 21분.


(1/3)----------------

양이유래(養爾留來)로 세월심(歲月深)인디  개롱불견이침침(開籠不見而沈沈)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상응지재추강상(想應只在秋江上)이나  명월노화하처심(明月蘆花何處尋)고
나무~아미타불~

양이유래(養爾留來)로 세월심(歲月深)인데, 너를 길러 온 지가, 너를 키워 온 지가 유래(留來)로 세월이 깊다.
그 네가 누구냔 말이여? 네가 누구여? 네가 나인데. 내가 나를 키워 온 지가 세월이 깊어.

내가 없어진 때가 있어야지. 어느 때든지 항상 있는 내인데. 밥 먹을 때 없나, 옷 입을 때 없나, 갈 때 없나, 올 때 없나, 잠잘 때 없나, 똥 누고 오줌 눌 때 없나, 항상 있는 ‘내’지.
‘내’지마는 찾아보면 나를 내가 찾아보면 알 수가 없어. 뭐가 들어서 이렇게 밥 먹자, 옷 입자, 가자 오자, 천 심바람(심부름), 만 가지를 다 시키는고?

내가 들어서 일체 천사만사(千事萬事)를 다 이름 붙이고, 모냥 맨들어내고 빛깔 붙여내고. 그놈이 들어 그러지, 그 허지. 무엇이 허는고?
내 하나, 개안즉견(開眼卽見)이다. 눈을 뜰 것 같으면 모도 보인다. 천 가지 만 가지 백만 가지 물건도 다 보인다, 눈만 뜨면. 눈감으면 아무것도 없으니 뭣이 있어? 천하에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없지.

세상에 이런 놈이 내게 있어서 이놈을 길러온 지가 세월이 오래다. 금생에는 또 와서 이 몸뚱이 하나 받아 가지고 이 몸뚱이를 끌고 댕긴다마는, 내생에는 또 뭐가 되어서 어떻게 살라는고? 뭣허고 댕길라는고?
응, 배때기를 깔고 꼬리 달려 가지고 기어댕길라는가? 뛰어 댕길라는가? 바다 속에서 헤엄질을 치면서 어족지류(魚族之類)가 되아 가지고 돌아댕길라는가? 뭐가 될 테냐 이 말이여? 그놈 생각해 볼수록 참 난사(難事)하지.

과연 유래(留來)로 세월심(歲月深)인디, 너를 이렇게 키워 온 지가 유래(留來)로 세월심(歲月深)인데.
항상 사람이나 허나 못 허나 되어 가지고 사람 노릇이나 하고, 늘 이 몸 또 내버리고 또 새 몸뚱이 받아 가지고 또 사람 노릇 허고 살다가 또 내버리고 또 되고 험사 차라리 거 무던하겠는데, 그렇게 되들 안 해. 된 법이 없고.

천억만 년에 한번 이 몸뚱이 얻어 가지고 사람 노릇 좀 허다가, 그만 사람의 짓을 잘 못해 놓으면은 별놈의 죄가 다 짓게 되고, 그래가지고 그놈의 죄 받느라고 들어가서 별놈의 몸뚱이를 다 받고, 별놈의 감옥생활을 다 하고, 별놈의 배고픈 귀신 생활을 다하고. 이놈의 짓, 이거 참 무슨 짓이냔 말이여?
인생의 문제다. 인생이란 이러헌 문제가 있구나.

상응지재추강상(想應只在秋江上)이다마는, 생각해 보건댄 추강상(秋江上)에 있을 듯 허다. 그 가을, 깨끗헌 가을에 그 강상에 어디 있지, 없어?
이 몸뚱이 속에, 그 강상(江上)인들 멀리 볼 것 뭐 있나? 깨끗한 곳을 말하니라고 강상이지. 그 강상에 있을 듯 헌디, 깨끗헌 그 깨끗한 일체 못된 마음 없이 일체 번뇌 망상 없는 곳에 그 깨끗한 데 있을 듯 헌디.


명월노화하처심(明月蘆花何處尋)이냐. 달도 밝고 갈대꽃도 흰디 어느 곳에 있느냐? 갈대꽃도 허옇고 달도 훤허니 깨끗헌데, 어디 있는데 어디가 있느냐?
허니, 그 깨끗한 곳 명월노화처(明月蘆花處)에, 일체 번뇌 망상도 없는 곳에, 일체 더러운 추헌 악심 없는 곳에, 아 거기에 있어.
그놈 하나, 그만 그 바로 봐 버리면은 그만 ‘내’일텐데, 내 낯반대기를 못 본다. 이것이 인생 문제니라.


사조(四祖) 도신대사, 오조(五祖) 홍인대사 재송도인(栽松道人)한테 법을 턱 전해버리시고서는, 오조 홍인대사는 법을 받아 가지고 오대산이 아니라 황매산에서 자리를 정하시고 중생 교화를 허고 계신다 그말이여.
일곱 살 먹어서 어머니 작별 딱! 해 버리고는 그만 그길로 들어와서 법(法) 받아 가지고는 얼마 좀 보림(保任)허시다가 차츰 조실이 되아 가지고는 인자, 황매산에서부텀 중생 교화를 허기 시작하시는데, 어머니가 찾아왔다 말이여.

자식을 그렇게 낳아서 그렇게 길러서 겨우 정(情)들자, 기가 맥힌 정이 들자 모자(母子) 상별(相別)을 해버렸으니 오직 헐 건가? 항상 자식 생각이 나서, 아들 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아자(兒子)는 어디 가 있는고?’ 주소를 알 수가 있나? 처소(處所)를 가르켜 주었나? 그대로 가버렸으니 어디 가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 그저, 그러나 저러나 하여간 자식 있는 곳을 묻기도 허고 찾아보기도 허고 열심히 인자 자식 한번 만나 볼 마음뿐인데, 그러자 인자 세월이 십 년이 되았는지 원, 이십 년이 되았는지 그렇게 세월이 깊었는데.

그 어머니는 처녀로서 아무 연고 없이, 부부지간도 없이 아들 하나를 낳아 가지고 길렀는데, 간 곳도 온 곳도 없이 이리 되아 있으니, ‘내가 뭐 어디 다시 재혼헐 리도 만무허고, 그대로 얻어먹고 댕기지 뭐 별거 있나?’ 허다가는, 아들이 중이 되아서 황매산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이거 요행히 들을 수가 있지, 모를 수가 있나? 어찌 공교(工巧)히 공교히 참 말을 들어 가지고는, 아들이 중이 되아서 조실 스님이 되어 가지고 중생을 교화한단 말을 듣고 찾아갔다.

이거 후편(後篇)인데, 후편을 내가 잘 안 하는데, 그 잘못 들으면 오해허면 재미없어. 그래 이제 그런 역경 속에, 그걸 잘 들어야 되거든.


어머니가 찾아 들어가니깐 그 아들이 본체만체 혀. 오조 스님, 천하에 오조(五祖) 스님인데, 오조 스님 같이 사사무애(事事無礙)를 다 깨달라서 환허니 도통을 했는데, 도통한 오조 스님이 어째서 어머니가 찾아갔는디 그 어머니를 그렇게도 박허게, 박정(薄情)하게 대하냐 그말이여. 본체만체 혀.
아! 그러더니, 본체만체만 해 버리면은 혹 모자지정(母子之情)을 잊어버리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마는 어머니를 갖다가 “방에다 가둬 버려라” 어머니를 거다 방에다 가두고서는 “밖으로 문을 채워버려라”
어머니를 세상에, 가두고 밖에다가 문 채워버린 법이 있겠어? 왜 그래? 참 그 해석허기 어렵지.

문을 채워번지고는 밥을 안 드리네. 때가 되어도 밥을 드린 법이 없어. 그러니까 공양주(供養主)나 그 채공(菜供) 허는 사람들이 몰리(몰래), 오조 큰스님 몰리 가만히 쇳대를 끌르고서는 밥을 드렸다. 그래 그 어머니는 갇혀 가지고는 그 밥을 잡순다. 그러니까 갇혀 가지고 얼마 좀 산 것이지.

나중에 오조 큰스님께서 그것을 알고서는 생벼락이 났다. “어째 문 잠가번지고 다시 그 문을 끄르지 못하게 해 놨는데, 열쇠를 가지고 문을 끄르고 밥을 갖다 드렸냐?”고, “어느 놈이 그렇게 했느냐?” 야단을 내고 산문출송(山門出送)을 시켜번지고.
그래 놓으니 뭔, 그 나중에는 누가 뭐 밥 줄 수가 있나? 통 뭐 가만히 안 줬어. 밥 준 사람이 없어. 할 수 없이 뭐 갇혀 있어 가지고는 그렇게 오래 오래 두니깐 아사(餓死)하지 별 수 있어? 굶어 아사해서 돌아가셨다.

아! 세상에 어머니를 그렇게 굶어 죽일 수가 있나?
그 후편에 그런 것이 있으니, 그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어 잘 허도 않지. 허지마는 그걸 잘 들어야 한다 그말이여. 그게 참, 그게 참, 법이여. 역경(逆境) 설법이여.

아! 그만 대중들이, 오조 스님 대중이 참 많어. 칠백 명 대중이나 되니까. 오조 스님 대중이 그렇게 많은디, 대중들이 오조 스님 법을 믿고 그 위법망구(爲法忘軀)로 법을 배우는데, 아! 생사해탈법을 배우는데. 생사해탈법을 배우는 큰스님한테 다시 그 무슨 뭐 얼마나 믿어 버렸어. 생명을 맽기고 법을 배우는데.
조금이나 신(信)이 불신(不信)을 혀? 불신허면 뭣할라고 그 밑에 가 있어? 무슨 놈의 법을 배우며?
믿음이 없는디 무슨 법을 배와? 믿어지지 않는디 무슨 소용이 있어? 아무 소용없는 것이여. 비방심만 나는디 무엇 허게? 점점 손해만 나지.

점점 믿고, 법을 배운 칠백 명 대중이 똑같이 한마음 한뜻으로써 오조(五祖) 큰스님만 믿고 법을 배우는데, 허는 짓이 어머니를 굶어 죽이다니! 허는 짓이 믿을 수가 없네.
'세상에, 어머니를 죽이다니! 굶어 죽이다니!' 배척심이 입승(立繩)으로부터서 모도 나가지고는 전 대중이 단결을 허고 결심허고 그만 배척을 해 버렸네. 반대를 해 버렸어.

‘그 세상에, 세상 악인도 그렇지 못헐 턴디, 도인(道人)이 대도를 통한 도인이, 부처님의 정맥(正脈)을 바로 이어 온 오조 스님이 이런 짓을 허니 우리가 그 법 믿어 뭣혀? 그까짓 법을 믿어 뭣하며, 거기서 무엇을 배울 것이냐? 부모를 굶어 죽이는 거기에 무슨 법을 배울 것이여’
전부 반대를 해 버렸습니다. 그래가지고서는 그 반대해 가지고는 황매산에 그 오조 스님 밑에 있을 것이 없으니깐 그길로 그만 걸망짐 다 싸 짊어지고서 쏵 도망갈라고 작정을 딱 해 놨는데, 공중에서 공청(空請)이 있어.

 

공중에서 공청을 허는 것은 누가 공청을 허는고 하니, 어머니가 공청을 했어. 그 재송도인 어머니가 공청을 허기를,
“대중들이여. 오조 큰스님을 믿는 대중들이여. 너희가 그런 사견심(邪見心)을 가지고 도를 구할 수가 있겠느냐? 나를 굶어 죽이는 것은, 굶어서 죽게 만든 것은 단식을 시켜서 내가 죽게 만든 것이다.
내가 이번에 금번에 오조 스님 회상에 들어와서 에미라고 찾아 들어와서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 아들!’허고 모자지인연(母子之因緣)을 계속을 헌다. 모자지인연을 계속해 가지고 내가 그 애정을 놓지 못하고 있으면은 나는 해탈(解脫)할 기회가 없다.
언제 내가 발심(發心)해서 해탈을 허겠느냐? 그 도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그 모도 애착심, 그 애(愛) 그것 때문에 생사해탈을 못허는 법인디, 내가 애정 애착심 그놈을 놓아 버리고 끊어버리고 단식허고 그러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 애착 끊어버린 그 속에서 굶어 죽을 때까지 용맹정진을 했다” 그 용맹정진 허는 것은 그도 알았지, 모를 리가 있는가? 성모(聖母)인디.

“그래서 그 애착심 끊고 금생에 결정코 성불(成佛)을 허게 맨들어서, 나를 성불허게 맨드시느라고 나를 단식을 시켜서 나를 이렇게 굶겨 죽였다마는, 몸뚱이는 내가 내버렸다마는 내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다”(처음~21분32초)





(2/3)----------------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나는 인자 조금도 생사에 걸릴 것이 없고, 생사에 맥힐 것이 없이 확철대오를 해서 가니, 대중들이여 느그 그런 사견심(邪見心) 버리고, 그러헌 상견심(相見心) 다 놓아 번지고 다시 더 믿어서 대도를 믿어 깨달라라”

그러헌 공청이 있어서, 아! 대중들이 그만 깜짝 놀래서 ‘아하, 오조 큰스님께서 그러헌 방편(方便)으로 써서 어머니를 제도허니라고 그랬구나’ 그 어머니 제도 편이여. 어머니를 그렇게 제도허니라고 그렇게 헌 것이여.

아, 그러니 그 일시의 단식해 가지고는 그 용맹정진(勇猛精進)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허게 만드는 그러헌 방편이 있다면은 아! 그런 방편을 반드시 쓸 수 있지, 안 써? 누대(累代) 겁(劫)을 앞으로 또 무량겁을 밤낮 그저 그만 애욕에나 빠져 가지고 대도를 닦지 못하고 생사죄나 받게 만들어 놔?

그러헌 후편(後篇)이 있어.
그러니 무수 방편(無數方便)이 있어. 방편이라는 것이 한량이 없어. 그러헌 방편도 있고, 저러헌 방편도 있고, 도인의 방편이 천만 가지의 방편이 있다 그말이여. 오조 스님 후편이 그거, 그까장 했어.


화두를 해 나가는데, 본각(本覺)이 미명(未明)이면, 내 화두, 해 나가는 화두, 본각.
내 화두(話頭), 모도 화두 얻어서 지금 화두를 해 나가는데, 그 화두가 미명(未明)이면 일일유의(一一有疑)다. 어떤 화두든지 다 의심이 있어.
내가 공부헌 화두를, 내 배운 화두를 깨닫지 못해서 의심이 있는데, 다른 화두가 의심이 없을 것인가?

깨달은 화두, 그놈의 의심이 확철히 없어 버려야사 ‘어떤 게 조사서래의인고?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
아, 그 확철히 의심이 없어야사 다른 화두가 다 의심이 없지. 벌써 다른 화두에 의심이 있으면 본각(本覺)이 미명(未明)이여. 본각만 바로 깨달라 버리면은 다른 화두에 의심이 없는 법이여.

본각(本覺)이 미명(未明)이면, 본각을 깨닫지 못하면은 일일유의(一一有疑)여. 낱낱이 의심이 있어. 대의즉유대오(大疑則有大悟)니라.
그러니 다른 디, 이것 좀 허다가 저것 좀 허다가 그러지 마라. 공부헐 때 요것 쫌 해보다가 저것 좀 해보다 그러지 말어. 꼭 한 가지만 고대로 해.

‘이뭣고?’면 ‘이뭣고?’뿐이지?
‘이뭣고?~’ 그저 그 밥 먹는 놈이고, 옷 입는 놈이고, 가는 놈이고, 아시방요(屙屎放尿) 헌 놈이고, 아시방요는 똥 싸고 오줌 누는 걸 아시방요라고 헌게, 아시방요 허는 놈이고.
일체처에 가고 오고 그놈이여. 낱낱 가는 놈이 오는 놈이고, 오는 놈이 가는 놈이고, 밥 먹는 놈이 옷 입는 놈이고, 물 먹는 놈이 오줌 눈 놈이고. 아, 그놈이여. 다른 놈이 아니여.

그러면 ‘밥 먹는 놈이 뭣고?’ ‘옷 입는 놈이 뭣고?’ ‘가는 놈이 뭣고?’ 이렇게 하면 쓸 것이여?
그렇게 하지를 말기 위해서, 그건 여러 가지 그렇게 자꾸 명상(名相)을 때려 붙일 것 없고.

‘이뭣고?’ 그놈이 총상(總相)이여. ‘이-’ 허면 가는 놈이나, 오는 놈이나, 밥 먹는 놈이나, 일체처에 행동하는 놈이 고놈이 이놈이여.
그러니 이놈이 ‘이-’ 이래 놓으면, ‘이-’ 고때 그놈이 뭐냐? 그말이여.


‘이-’, 벌써 ‘이-’ 해놓고 보니 ‘이것, 이놈이 뭐여?’ 그말이여. ‘이게 뭐여?’ 그말이여.

‘이- 뭣고?’ ‘이뭣고?’ ‘아, 이- 뭣고?’ 또 ‘이- 헌 놈이 뭐냔 말이여?’
자꾸 일받아. ‘이-’ 헌 놈을 또 일받고, ‘이-?’ 는 그 의심이니까.

‘이-?’ 그 뭐냔 말이여? ‘뭣고?~’
‘이-’ 해 놓고는 알 수 없는 관(觀)이 딱 백혔다. ‘이- 뭣고?’ ‘'대체 이뭣고?'


아, 이뭣고 하나가 필경 나오지, 안 나와?
고 ‘이뭣고?’ 헌 놈이 그놈이, 고 그 자리서 ‘이뭣고?’ 하는데 그놈이 안 불거져? 바로 낯반대기가 나오지. 안 나와?

‘이뭣고?’ 아! 이렇게 의심을 할 것 같으면은 의즉대오(疑則大悟)다. 의심이 크게 일어나 가지고는 필경에 깨달을 때가 있어.

대번에 ‘이뭣고?’를 해 가지고 그만 하루나 이틀이나 ‘이뭣고?’ 해 그만 툭 깬 이는 과거에 전생에 많이많이 닦아 나와 가지고 금생에 왔기 때문에 그만 그렇게 쉽게 깨달은 것이지, 대번 금생에 처음 나와서 배워 가지고 그렇게 될 것인가?
화두라는 것이 과거에 많이 해 나왔기 때문에 금생에 와서 또 그 인자 그렇게 쉽게 깨달아 또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하는 것이고 그 상근대지(上根大智)가 되는 것이지, 대번 되는 게 아니여. 이렇게 공부를 똑 해서 크게 대오를 헐 것이니라.

각부득장심대오(卻不得將心待悟)하라. 이건 낱낱이 있어 이런 말이.
각부득장심대오 하라. 문득 시러금 대오를 기다리지 말아라. 대오를 기다리는 것은 어서 깨기를 기다리지 말아라. 어서 깨기를 기다리는 것이 망상 아니냐?

어서 깨기를 기다리는 데 망상이 나는데, 그 망상이 일어나면은 그 망상으로 인해서 별것이 다 일어난다. ‘깨달으면은 그만 그 깨달은 것이 어떤 것인고?’ ‘깨달으면 어떤 변화가 있는가?’ ‘깨달으면은 생사에 어떻게 초월허는가?’ 뭐 별별 생각이 다 나.
그러니 어서 깨달을 생각을 내지 마라. 어서 깨달을 생각만 내면 화두에 지장이 적지 않다. 대오지심(待悟之心)을 두지 말아라.

우부득이의구오(又不得以意求悟)허며, 또한 뜻으로써 깨기를 구해.. 똑같은 말이지마는. 늘 마음으로써, ‘어서 못 깨달라? 어서 깨달라야겠는디’ 그런 구오지심(求悟之心)도 두지 마라.
조금 달러. 깨달을 마음 두는 것과 구오지심을 또 두는 것과는 좀 다르다 그말이여. 깨달음을 구하는 생각조차 두지 말아라.

또 인자 또 이치로 들어가서, ‘그래 아무리 찾아봐도 모냥이 없으니 모냥이 본래 없는 것인가? 모냥이 본래 없는 것인디, 없는 놈 까장도 다 그 공(空)해 버린 것인가?
그러면 없는 놈인디 없는 놈까지도 다 명상(名相)이 없으니, 그 아주 영원히 없는 그 진공(眞空), 참 공, 아주 공, 그놈이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인가 보다’ 고러지 말란 말이여. 고런 것이 못써.

고건 그 이치로 해(害)를 짓는 것인디, 없는 놈인디 없는 놈까장 뚝 떼 놓고 보니, 참 진공이거든.
‘옳다! 그 진공이다. 그러면은 진공(眞空)이라고 아는 놈이 그놈이 묘유(妙有)다. 그럼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가르켜 논 게 그것인가 보다’ 요렇게 말란 말이여.

고렇게 선(禪)을 알았다가는 그건 참 영원히 그건 참 깨달도 못허고, 그런 이치 참선에 떨어져서 참선이 아니여. 그까짓 그럴 것 같으면 뭐 뭐 입으로 다 따져서 다 말해 버리고 말지 뭐, 소용이 있어?
그런 입으로 견성했다고 지금 고렇게 떠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꽉 찼어. 삼공이요, 정관이요, 뭣이요, 다 따지고 다 해석을 혀.

무(無)로만 봐 버려도 다 유상(有相)도 무(無)지 뭐여? 유상도.
한 가지 무슨 유(有)가 있다 하드래도 유(有)도 이름이지, 이름 하나 붙였지. 거기에 무슨 이름이 있냐 그말이여.

작대기도 이놈 작대기라고 이름을 하나 작대기라고 붙였다. ‘작대기 이놈이 빛이 붉다. 작대기 이놈이 길다’ 맨 내가 붙였지. 작대기 제 놈에 들어가서 작대기 제가 ‘내가 작대기다, 내가 길다, 내가 냉기다’ 뭐 그거 있나? 모도 이렇게 붙여 보면은 다 붙일 수 있어.

입을 열어 가지고는 왼통 요런 놈의 이치로 때려 붙여서 야단친 것이 그것이 잘못된 것이여. 거 잘못된 참선이여.
그래 가지고 지금 무슨 뭐 일체 공안을 다 갖다가서 인자 붙여 대서 이르지. 그 되지 않는 소리여.

요새 구두선(口頭禪)이라는 게, 입 선, 말로 선. 깨달든 못하고 구두선.
무슨 말을 못혀? 구변가(口辯家)가 뭔 말을 못혀? 다 할 수 있는 것이여.

그러헌 작유무회(作有無會)를 짓지 말아라. ‘뭐 있는 것이다, 있는 놈까장도 없는 것.. 있는 놈도 없고, 없는 놈도 없고, 유무(有無)가 다 구공(俱空)헌 것이다’ 요런 생각을 짓지 말아라. 이건 이편에 들어가서 한 소리여.

부득작허무회(不得作虛無會)하라. 허무회(虛無會)도 ‘허무, 본래 허무다. 본래 그러니 생사도 없지, 허무니. 허무니 생사도 없다’
허무 허무, 그 신선(神仙) 모도 그 진공이 허무여. 노자도(老子道)도 허무지, 뭣이여?
그런 것, 그 신선도나 그런 건 허무도 있고, 무슨 현빈(玄牝)도 있고 별별 뭣이 있지마는, 우리 참선법은 그런 것 없어. 허무회(虛無會) 짓지 마라.

어찌던지 이치 길이 제일 손해인 것이여, 공부에는. 보통 망상보담도 이로(理路)가 제일 못써. 이치 길이.
그 이치 길을 짓지 말아라. 모도 인자 이치 길을 지어 가지고는 뭔 이치가 나가지고 ‘허무회(虛無會)다’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견성했다 하거든. 그 견성이여? 그것이? 허회(虛會)를 짓지 말아라.

또 그뿐 아니다. 부득작철소추(不得作鐵掃箒)하라. 쇠빗자락이라고 마라.
쇠빗자락은 빗자락이 오직 견고헌가, 쇠빗자락이니. 그 쇠빗자락으로 쏵 쓸어버리면은 그 본 땅까장 모도 패이지. 얼마나 여지없이 쓸려지는가.
그러니 그 철소추(鐵掃箒)를 짓지 말아라. ‘일체 번뇌 망상을 다 쓸어버리는 쇠빗자락이다. 뭐 있나? 일체 망(妄) 쓸어버리면 그만이지’ 요런 거 짓지 말아라.

이 활구선(活句禪)이여. 사선(死禪)에는, 고러헌 모도 고 사선이지마는 활구선에 가서는 이런 거 없어.

부득작계려궐용(不得作繫驢橛用)해라. 나귀 매는 말뚝, 나귀 매는 말뚝은—나귀라는 놈은 천하에 영리한 놈이기 따문에 둔한 놈보담 영리한 놈이 훨씬 더 이치가, 그놈이 이로(理路)가 많애. 이치가 많고. 미련헌 건 하나를 겨우 생각하면 영리헌 건 한 백 가지나 천 가지나 생각하는 거여.
나귀란 놈은 어떻게 영리헌지, 그놈이 짐승일지언정 말이라도 나귀는 굉장한 영리헌 놈이여.

나귀 매는 말뚝이라고 말아라.
나귀란 놈이 영리한 놈이여. 잘 달아난 놈이고, 그놈이 말뚝도 뺄 수 있고 그놈이 입으로 뭐 별짓 다할 수 있은게, 말뚝을 때려 딱 박아놓고, 말 딱 때려 매놓은 그 계려궐(繫驢橛)을 짓지 말아라. 나귀같이 영리허고 나귀같이 그 이로(理路)가 많은 놈을 꼼짝 못허게, 나귀란 놈 그런 이로(理路) 못 나게 꽉 때려 매놓은 고러헌 생각을 짓지 말아라.

참선 허는 사람들이여. 이렇게 그러헌 이로(理路)를 짓지 말아라. 이치 길, 요런 이치 길만 지으면은 그건 참선도 아니고, 그건 죽어 가는 혼(魂)이 망상만 더허고, 견성켕이는 그 뭣이여? 도깨비지.
이런 이로(理路)를 짓지 말아라.(21분33초~37분52초)





(3/3)----------------

종교의단(從敎疑團)이 일성(日盛)이다. 날이 맞도록 항상 의심이 일성(日盛)이다.
오늘보담도 내일은 의심이 더 일어나고, 또 명일은 또 더 일어나고, 자꾸 의심만 일어나는 것이 화두다.

천 망상, 만 망상이 안 나는 법 없다. 망상이 나드래도 나는 놈 그만 두어라. 그 나는 놈을 어떻게 할 테냐?
어린아 때, 젖 먹을 때, 어머니한테 커날 때, 고때 생각 같은 것 나는 것이라도, 그게 났지 안 나? 누가 안 나?
중생심이라는 것은 물에 파도와 같애서 항상 일어나는 것인데 안 일어날 수가 있나? 나거나 말거나 두어라.

염기(念起)를 불파(不怕)하고, 일어나는 염기를 두려워허지 말고 유공각지(唯恐覺遲)하라. 그 네 화두하나 챙기는 것만 그놈만 어쨌든지 단속해라. 그저 ‘이뭣고?’ 그저 ‘이뭣고?’
일어나면 언제 일어나면 그까짓 일어날까 뭐, 일어나는 것 무섭고 뭐 말고 ‘이뭣고?’ 이뭣고?만 챙겨.

그러드래도 그놈의 이뭣고? 챙기는 가운데 그 잡념이 하도 먼지같이 많어서 중생 잡념이 꽉 찼어. 그 꽉 찬 중생 잡념 속에서 이뭣고? 한 번 돌이켜 일으키는디 좀체로 잘 안 나와? ‘이뭣고?’가 잘 안 나와. 안 나올 때가 있어. 그때에 사마(邪魔)가 있다 했어, 사마.

화두를 일으킬라 하면은 나귀를 몰고 물에 들어갈라는 것 같은 때가 있고. 냉랭지계가 있고, 냉랭(冷冷)해서 화두가 안 나온 때가 있고. 열렬(熱烈)혀, 심두(心頭)가 더웁고 더워 열렬해서 또 안 나온 때가 있고. 그놈이 거 참 어려와. 과연 그러면 어려와.
거다가 잠 오지, 또. 조금만 또 조용허면 잠이 오지. 화두를 허면 그려. 또 잠 안 오면, 또 그놈이 일어나지. 그 이뭣고? 찾아보면 이뭣고?는 희미허니 나다가 말아 버리지. 고약혀. 참선허기가 그렇게 고약혀.

허지마는 참선이 아니면은 정법(正法)이 없어.
정법이라는 것은 생사를 해탈하지마는, 한 번만 깨달라 버릴 것 같으면은 깨달라서 보림(保任)만 한 번 해 버리면은 그 깨달은 곳을, 그 깨달은 내 본래 주인공을, 본래 확철대오 깨달은 그 일체 그 깨달은 곳에 가서는 중생념이 거 물들리지 않고 아무리 중생 속에 들어가도 소용없고 헌 그런 본각(本覺)이 있어.

우리 본각이 있어. 한량도 없는 본각이 있는데 그놈을 깨달라 놓아사 정법! 그 정법을 깨달라 놓아사 영원히 인생 문제를 해결이지.
그놈을 깨닫지 못하면은 복(福)? 암만 복을 뭐 천지 바다같이 지어놔도 그건 다할 때가 있어버려. 복 다 받으면 그만이여. 그놈 받아 버린 뒤에는 또 마찬가지여. 역사가 없으니까, 그놈의 역사가 없는 동안에 뭐 도로 또 미(迷)해서 받지 뭐, 허는 수가 있나?

허니, 아무리 안되고 안되드래도 참선을 안 헐 수가 없어.

허니까, 다 환(幻)이여. 다 환이여. 환(幻)이라는 것은 잠깐 있다 없어지는 환, 환이여.
지환즉리(知幻卽離)니라. 환(幻)인 줄 알면 여의어라. 왜 환인 줄 아는데, 환에 꺼꾸러지냐?


무슨 주문이니 뭣이니, 그 주문을 많이 외우면은 병이 낫고, 그 주문을 많이 외우면은 부자가 되고, 그 주문을 많이 외우면은 소원성취를 다 한다. 아들딸 다 낳고.
그 짓, 글씨 그것은 글씨 안 되는 건 아니나 되기는 되지마는, 그 일생 가운데 그것 좀 해서 얻어 놔 봤던들, 고것 조금 잠깐 동안 누리다가 나 죽어버리면 그만이요. 그런 것들이 다 그만 인자 아무리 얻은 것이라도 필경 그것은 다 내가 내버리는 건 사실인디, 그것 가지고는 어떻게 허냐 이 말이여.

그것 가지고 어디, 그 환(幻)이지. 그 환이지. 내가 암만 잘살아 보지, 잘살아 본 그까진 동안에 그건 환(幻)이지 뭣이여?
환인 줄 알거든 여의어라. 지환즉리(知幻卽離)니라. 그러니 참선허라는 것 아닌가? 참선 정법 밖에 더 있는가?

중이 되아 가지고 중이 사무승 노릇이나 하고, 사무나 보고, 절이나 지키고 앉아서 독살림이나 해서 쌀 들어오면 고놈 밥해 먹고, 돈 들어오면 고놈 밥해 먹고 부처님한테 올린다 하고, 뭐 들어오면 먹고, 고러고 사는 것이 중인가?
그 중 그렇게 살아 뭣 헐 건가? 중이라는 것이 고렇게 살아 가지고 그 부처님한테 올린다 하고는 제 먹고 제 살고 제 옷 해 입고, 거 뭣이여? 성 팔아 가지고는 매불자생(賣佛資生)하는 것이 뭣이여?
그러니 절 맨들어 가지고 벌써 부처님 턱 맨들어 놓고 앉어서, 맨 들어온 것이 부처님한테 기도헌다 뭣 헌다 해 들어와 가지고는 고놈 가지고 인자 혼자 독살림, 독식, 독생활하는 것이지. 그게 뭣허는 것이여?

척 들어오면은, 한 푼이라도 들어오면은 들어온 놈 그놈을 가지고는 척 들어와 부처님한테 올리면 부처님이 등상(等像) 부처인디, 냉기로 깎아서 맨든 부처님이나, 쇠로 지어서 맨든 부처님이나, 흙으로 모도 뭉쳐서 맨든 부처님이나, 그런 부처님 등상인디, 등상한테 놓으면은 그 부처님이 그것을 무슨 잡순가? 그걸 뭔 어쩐가?

다맛 거다가 올려 놓으면은 그놈을 척 내려와서 대중이—그 고마운 쌀이나 고마운 돈이나 그 어려운 돈을 가지고 왔으니, 그놈 갖다가서는 밥 잘 지어서 대중이 그놈을 먹고는 아침저녁 공부를 허니, 항상 공부를 허니,
위성도업(爲成道業)을 허니, 도업(道業)을 이루기 위해서 그 밥을 먹고 원융하게 앉어서 도 닦고, 아! 그래야사 고 시주(施主)가 복이 얼만고? 공부인(工夫人), 한 때 공양 올린 공덕으로 만 생을 부자가 된다고 했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보지. 도 닦는 스님네 옷 한 벌 해주고, 도 닦는 스님네 한 때 공양(供養) 올린 것이 삼세제불(三世諸佛) 공양 올린 것보담 낫다 했네.
삼세제불은 다 이미 일 마쳐 버려서 부처님 되어 버렸으니 뭐 뭐, 우리 중생은 지금 도를 닦아서 대도를 이룰 그러헌 도학자들을 밥 해 올리고 공양 올리면 복이 많다. 그래 공양 들어온 것이 그것이여.


화두를 이렇게 일일(日日) 일일 일성(日盛)이다. 날마당 날마당 화두만 챙겨서 그저 안되드래도 챙겨라. 안될 때 고때 챙기는 것이 공부가 되는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잘될 때야 그 무슨 뭐, 제대로 잘될 때야 화두 뭐 그렇게 힘 안 쓰고 잘되지마는, 되게 안될 때가 있는디, 되게 안될 때에 퇴타(退墮)허지를 말고 화두를 추켜들어라. 화두를 거각(擧却)해라.

고 안될 때 자꾸자꾸 해야사, 거 안될 때 막 망상이 녹아지고, 망상이 뿌럭지가 빠지고, 버릇이 잽히고 그런 것이지, 안된다고 그만 내버리고, 안된다고 그만 방심해 버리면은 항상 그 모냥이다.
좀 해보다가 안된다고, “에이! 때려치워 버려, 그녀러 것” 또 좀 해보다 안된다고 고만 내던져 버리고. 그것 안되아. 안될 때에 그때에 꼭! 정신을 챙겨라.

잘 알아들어. 이거 잘 알아듣는 말이여 이게.

내가 아침에 배가 고파 법문이 당최 안돼. 어제 저녁에 쌀가리 갈아 논 것 쬐끔 먹으니, 새벽에 좀 가라앉으면 먹으면 조금 나은디, 뭐 아침에 해 줘야지? 긍게 말이 나와야지?
이거 하기는 이것 꼭 헐 편(篇)인디. 아이고! 입만 해준다고? 내일 아침에 헌다고? 해 줘야지?

그런데, 날로 일성(日盛)을 해라. 날로 일성(日盛)이라는 건 조금씩 더 허라는 것이여. 오늘보담도 내일은 좀더 잡드리를 허고, 또 좀더 잡드리를 허고.

그 숭악한 번뇌 일어날 때, 그냥 아이고 그 안된게 그만 내던져 버리고 돌아댕기고.

내던져 버리고 그만 그거 안 허고 돌아댕기면 시원하거든. 그래도 아무 일도 없고.
그래서는 백만 년 해도 안되아.

날마당 더 더 애쓰고 더 그렇게 일성(日盛)을 해라. 일성 까닭이 있어.
이륙시중(二六時中)에 열두 때 가운데—하루가 열두 때여, 그 전에는. 지금은 24시간이지마는. 열두 때 가운데, 하루 열두 때 가운데 때마당 조금씩 더허고.
사위의내(四威儀內)에, 앉으나 서나 누우나 가나 그때에도, 그 누웠을 때 좀 곤해서 누울 때라도 그때라도 그 성의를 다해라. 정성을 다해라.

생사해탈 아니냐? 생사해탈인데, 죽고 사는 이 몸뚱이 생사를 면하는 법인데, 이 법을 그렇게 허다 말다가 안된다고 안 허고, 그럴 것이냐? 발심한 학자들이야. 참으로 정신채려라.

단단제개화두(單單提箇話頭)해라. 홑으로 홑으로 일체 그 먼지같은 망상 번뇌가 필경 하나도 붙지 못허게 단(單)으로 해라. 단(單)으로만 꼭 그저 ‘이뭣고?’만 해라. 판치생모(板齒生毛)면 판치생모? 화두를 그렇게만 똑 해 나가거라.
밀밀회광자간(密密廻光自看)이 될 때가 있다. 은밀히 은밀히 광(光)을 돌이켜 스스로 떡 보면은, 화두를 보면은 화두밖에는 없다. 알 수 없는 화두만 하나 딱 나오는구나.

거 굼벵이란 놈이 그 굼벵이 속에서 껍..(녹음 끊김)

와도 있고 가도 있지, 그놈이 없어진 법이 없어. 간(看)이 그놈이 알 수 없는 놈뿐이네.
알 수 없는 놈이—알 수 없는 놈을 생각해서 알 수 없는 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딱 백혀져 있어. 물 달처럼. 물에 달 떨어져 있는 놈처럼.

와도 간(看)이 있고, 가도 간(看)이 있어. 딱 붙어 백혀 있다.
그래 고놈이 인자 그 내나야 그 의단(疑團)이여. 의단이 그놈이 독로(獨露)헌 놈이 그대로 있어.

그래 가지고는 의단 하나 딱! 들어와서 의심이 있을 때는 자미(滋味)도 없어. 그 ‘공부가 글쎄 잘된다, 이만 했으면 잘된다, 자미가 있다’ 고것이 벌써 틀렸어. 그 간(看), ‘참 간(看)’이 아니여, 화두가.
‘의심이 잘된다, 공부가 이만 했으면 참 잘되는구나’ 고러헌 건 못써. 고놈이 필경 일체 또 잡념을, 못된 마음을 끌고 들어오는 것이여. 그런 마음도 통 그것 나드래도 그까짓 것 간섭 말아라. 똑! 화두만 간(看)해라.

또 그래서 ‘안된다’고 헌 마음이 또 떡 일어나 가지고는 번뇌가 난다, 거기서.
‘아, 또 어째 이놈이 또 이래 안되는고?’ 고 번뇌(煩惱) 한번 낼 때, 일체 번뇌란 놈이 다 따라 들어온다. 고때에 가서. 그 고약한 것이 쬐꼼만헌데 들어온다.

허니까, 그래서 의득중(疑得重)이다. 의(疑)가, 그 의심이 크게 중(重)할 때가 온다.
그러헌 화두가 자의(自疑)다. 인제 제대로 화두가 나와서 몸에 딱! 들어붙어서 추역불거허고, 내던져도 가지 않을 때가 있을 터이니. 해 봐라! 내가 거짓말 했는가? 해 보면 알 것 아니냐.

 

오늘 생일 불공(生日佛供) 오셔서 법문(法門)을 들으셔서 좋습니다. 하지마는 이 법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법문입니다.
이 법문은 똑 참선허는 공부인이 화두 헌 사람이 들어야 알지, 그 이외에는 아무리 들어봐도 모르는 것입니다.

화두 헌 사람만 알고, 화두 않는 사람은 아지 못하니까 법문이 아니고 뭐 시원찮고 뭐 어쩌고.. 화두 안 헌 이가 아지 못허고 들어도 그 공덕이라는 것은 말로 헐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방 들었은 게 깜깜허지? 그 참, 법문 듣는 그 인연, 그 법이 기가 맥힙니다. 오늘 아침 생일 불공에 제일가는 것이 법문입니다. 오늘 아침 생일에 오늘 이런 법문 들은 것을 대단히 참 큰 공덕으로 잘 알으시고.

앞으로써 항상 참선은 못혀. 참선은 아직 처음이라 못혀. 이치를 알어야지. 못허니까,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 ‘옴 마니 반메훔’을 늘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옴 마니 반메훔, 옴 마니 반메훔’
‘옴 마니 반메훔’은 부귀에도 제일 좋습니다. 뭔 재수에도 제일 좋고. 거 얼른 몇 번 해서, 얼른 몇백 번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여. 좀 많이 하는 것이지. 날마다 일과를 정해 놓고 백 번이고 이백 번이고, 항상 ‘옴 마니 반메훔’을 부르시란 말씀이여.

그러면은 요까짓 몸뚱이, 요 몸뚱이만 살다가 죽으면, 죽은 뒤야 뭐 아나?
허지마는, 요 몸뚱이 가지고도 자연 번뇌, 자연 집안에 마장(魔障)이 없어지고, 이 몸 돌아가실 때에 우선 참으로 참 장애 없이 잘 돌아가시고 돌아가신 뒤에 영혼이 좋은 데 가서 납니다.
한량도 없는 데 가서 나는 법이 있으니, 부디 생일 불공 와서 부처님한테 공양(供養)만 올리고 가는 그것이 생일 불공이 아니라, 이러헌 법문을 듣고 그래 그 좋은 이치를—‘옴 마니 반메훔’을 부르면은 한량(限量)없는 공덕이 있는 이치를 잘 듣고 알고 가서, 댁에 가서도 늘 ‘옴 마니 반메훔’ 많이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한량없는 보배입니다.

난중(亂中)이라도, 난리(亂離) 가운데라도 죽지 않는다고 했으니, 도병입최절(刀兵立摧折)이요, 칼 속에 들어가도 칼이 끊어지지 사람 몸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그랬어. 사자(死者)가 변성활(變成活)이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 했다 그말이여. 그러니깐 그렇게 알으시고 ‘옴 마니 반메훔’을 모르시거든 하나 써 가지고는 늘 부르시어.(37분53초~58분30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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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양이유래세월심~’ ; 『전당시(御定全唐詩)』 권 七七八-3 이귀당(李歸唐)의 시 ‘실로자(失鷺鶿)’, 「惜養來來歲月深 籠開不見意沈吟 也知只在秋江上 明月蘆花何處尋」 참고.
『사성진군영참(四聖眞君靈籤)』 ‘제18 中平 隨緣’  「養汝原來歲月深  開籠不見意沉沉  想應只在秋江上  明月蘆花何處尋」 참고. 沉은 沈(침)의 속자.

 

*심바람 ; ‘심부름(남이 시키는 일을 하여 주는 일)’의 사투리.


*난사(難事 어려울 난/일 사) ; 처리하거나 해결하기 어려운[難] 일[事]이나 사건.


*험사 ; ‘한다면, 하면’의 뜻의 사투리.


*공교히(工巧- 장인·공교할 공/공교할·솜씨가 있을 교) ; ①솜씨나 꾀가 재치 있고 교묘하게. ②뜻밖의 일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매우 기이하게.


*사사무애(事事無礙) ; 현상계의 일체의 사상(事象)이 서로 융합하여 방해하는 것이 없는 것을 말함. 일체의 사물이 서로 상즉무애(相卽無碍)인 것을 말함.
단일한 하나의 현상이 다른 모든 모든 현상과 어김없이 하나가 되는 관계처럼, 모든 차별적 존재가 서로 걸림없이 다른 모든 존재를 포섭하고 포섭되며 자재하게 뒤섞여 있는 법계의 실상을 나타낸다.

*공양주(供養主) ; 절에서 밥을 짓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채공(菜供) ; 절에서 반찬을 마련하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몰리 ; ‘몰래(남이 모르게 살짝)’의 사투리.

*쇳대 ; ‘열쇠’의 사투리.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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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대의즉유대오(大疑則有大悟) ; 대의지하(大疑之下) 필유대오(必有大悟). ‘큰 의심 끝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

[참고]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p52-53.
〇當於本叅公案上(당어본참공안상)에  有疑(유의)호리니  大疑之下(대의지하)에  必有大悟(필유대오)하리니  千疑萬疑(천의만의)를  倂作一疑(병작일의)하야  於本叅上(어본참상)에 取辦(취판)호리라
若不疑言句(약불의언구)가  是爲大病(시위대병)이니라  仍要盡捨諸緣(잉요진사제연)하고  於四威儀內(어사위의내)와  二六時中(이륙시중)에  單單提箇話頭(단단제개화두)하야  廻光自看(회광자간)호리라

바로 모름지기 본분을 의지하야 법다이 하야사 비로소 옳으리라。 반드시 본참공안상에 의정을 두리니 큰 의심 끝에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으리니, 천의만의(千疑萬疑)를 아울러 한 의심을 지어서 본참상에 판단할지니라.
만약 언구(言句,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이것이 큰 병이니라。 반드시 모든 인연을 다 버리고 사위의(四威儀)와 열두 때 가운데에 다만 화두를 잡아 빛을 돌이켜 스스로 볼지니라.

*이 무엇고(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是甚麼 시심마,시삼마) : ‘이 무엇고? 화두’는 천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 무엇고?'(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총상(總相) ; ①모두에게 통하는 특질. 병상(別相)의 상대되는 말. ②그것만의 순수한 모습. ③보편. 공통성. ④전체. ⑤전체의 모습. ⑥화엄교학에 있어서 만유의 하나하나에 다른 일체의 것을 포함하는 것.

*일받다 ; ‘일으키다’의 사투리.

*관(觀)한다 ;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715)—2007년(정해년) 동안거결제 법어(07.11.24)(2분)
화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냐 하면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하는 글자 석 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하는 것은 그 의심을 나게 하는 것이고, 그 ‘이뭣고?’함으로써 나온 그 의심을 떠억 관(觀)하는 것입니다. ‘관(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하는 건데.

그 화두는 혼침(昏沈)이 오고 그럴 때에는 미간(眉間)에다가 두고 관하고, 혼침이 안 올 때에는 배꼽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초학자가 너무 미간에다가 화두를 들고 관(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上氣)가 될 수가 있으니, 어쨌든지 숨을 들어마실 때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다 들어마셨으면 한참 머물렀다가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이뭣고?’

화두를 들 때에는 기왕이면 들었다가 내쉴 때 ‘이뭣고?’를 초학자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마는 나중에 익숙해지면 호흡에 상관없이 항상 알 수 없는 의심이 단전에 딱 있도록 호흡은 무심(無心) 속에 항상 단전호흡을 하도록 이렇게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39분12초~41분12초)

*상근대지(上根大智)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 뛰어나고, 지혜가 큰 사람.

*시러금 ; 문득. 도리어. 능히.

*구두선(口頭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의리선(義理禪).
이런 구두선(口頭禪) ·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구변가(口辯家 입 구/말 잘할 변/사람 가) ; 입[口]으로 말을 잘하는[辯] 재주나 솜씨가 있는 사람[家].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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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파염기(不怕念起) 유공각지(唯恐覺遲) ;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
[참고] 『수심결(修心訣)』 (보조지눌 스님)에서.
或者 不知善惡性空 堅坐不動 捺伏身心 如石壓草 以爲修心 是大惑矣 故云 聲聞 心心斷惑 能斷之心 是賊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의 성품이 빈 것임을 알지 못하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눌러 조복하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하면서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문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 하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라고 하셨다.

但諦觀殺盜淫妄 從性而起 起卽無起 當處便寂 何須更斷 所以云  不怕念起 唯恐覺遲 又云 念起卽覺 覺之卽無

다만 살생하고 도적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성품으로부터 일어난 것임을 자세히 관조한다면 일어남이 곧 일어남이 없는 것이라, 그 바탕이 고요한데 무엇을 다시 끊을 것인가. 그러므로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하셨고 또 ‘생각이 일어나거던 곧 깨달아라. 깨달으면 곧 없어진다.’하셨다.

故 悟人分上 雖有客塵煩惱 俱成醍醐 但照惑無本 空華三界 如風卷煙 幻化六塵 如湯消氷

그러므로 깨친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록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있다 해도 그것은 다 제호를 이룬다. 다만 미혹(迷惑)이란 근본이 없는 것임을 관조하여 알면 허공의 꽃과 같은 삼계(三界)가 바람이 연기를 거둠과 같고, 꼭두각시와 같은 육진(六塵)이 마치 끓는 물에 녹는 얼음과 같을 것이다.

若能如是念念修習 不忘照顧 定慧等持 則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 自然斷除 功行 自然增進 煩惱盡時  生死卽絶

만일 이처럼 생각생각에 닦고 익히며, 마음을 관조하기를 잊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면, 곧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자연히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밝게 드러날 것이다. 죄업이 자연히 없어지고, 공덕이 절로 늘어나서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도 끊어질 것이다.

若微細流注永斷 圓覺大智朗然獨存 卽現千百億化身 於十方國中 赴感應機 似月現九霄  影分萬水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快樂無憂 名之爲大覺世尊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근본 무명, 근본 번뇌)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나투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응용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쾌락(快樂)해 근심이 없으리니, 이름하여 ‘크게 깨친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마음 닦는 길(수심결 강의)』 (지눌 저,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14.  『수심결』 (지유선사 현토역해 | 도서출판 窓) p83~88 참고.

*사마(邪魔) ; 삿된 악마. ‘마’는 마라(魔羅 : 악한 귀신의 총칭)의 줄임말로 원래 욕계의 여섯 하늘 가운데 여섯 번째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머무는 천마(天魔)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지만 점차 불도(佛道)의 성취를 방해하는 것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또한 불도(佛道)의 수행(修行)을 방해하는 망령된 견해, 번뇌 따위를 사악한 마귀에 비유하여 ‘사마’라 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환(幻) : 또는 눈꽃(空眼花 • 空華)。근본 무명(根本無明)이 언제 일어났는지 그 시초를 알길 없으므로 '본래부터(從本已來)'라기도 하고, '시작도 없음(無始)'이라고도 한다。무명이 일어나는 곳도 없고, 또한 그 실상 자체(實相自體)도 없는 것이므로 곡두(환상)같다고도 하고, 눈이 어리어서 허공에서 아물거리는 눈꽃 같다고도 하는 것이다。이처럼 허환된 무명에서 나온 바 온갖 것이 또한 모두 환상이며 공화(空華)인 것이다.

*지환즉리(知幻卽離) 부작방편(不作方便) ; ‘환인 줄 알면 곧 여읜 것이라 더 방편을 지을 것이 없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87~88.
知幻卽離라  不作方便이요  離幻卽覺이라  亦無漸次니라.

환인 줄 알면 곧 여읜 것이라 더 방편을 지을 것이 없고, 환을 여의면 곧 깨친 것이라 또한 닦아 갈 것도 없느니라. 

(註解) 心爲幻師也요  身爲幻城也라  世界는  幻衣也요  名相은  幻食也니  至於起心動念과  言妄言眞이  無非幻也니라  又無始幻無明이  皆從覺心生이라.  幻幻이  如空花하니  幻滅하면  名不動이라  故로  夢瘡求醫者가  寤來에  無方便이라  知幻者도  亦如是니라.

마음은 환을 만드는 환사(幻師)요, 몸은 환의 성이라. 세계는 환의 옷이며, 이름과 형상은 환의 밥이니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내는 것이나 거짓이라 참이라 하는 것이 다 환 아닌 것이 없다。그러므로 시작도 없는 환상 같은 무명이 다 본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모든 환상은 실체가 없는 허공의 꽃과 같으므로 환상이 없어지면 그 자리가 곧 부동지(不動地)이다. 마치 꿈에 창병이 나서 의사를 찾던 사람이 잠을 깨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듯, 모든 것이 환인 줄을 알면 또한 이와 같으리라.

*매불자생(賣佛資生 팔 매/부처 불/재물·자본·밑천·장사할·의지할 자/살 생) ; 부처를 파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함.

*등상(等像) ; 나무, 돌, 흙 등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 11장
佛言  飯惡人百  不如飯一善人  飯善人千  不如飯一持五戒者  飯五戒者萬  不如飯一須陀洹  飯百萬須陀洹  不如飯一斯陀含  飯千萬斯陀含  不如飯一阿那含  飯一億阿那含  不如飯一阿羅漢  飯十億阿羅漢  不如飯一辟支佛  飯百億辟支佛  不如飯一三世諸佛  飯千億三世諸佛  不如飯一無念無住無修無證之者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백 명의 악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착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천 명의 착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오계를 지키는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만 명의 오계 지키는 사람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수다원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백만 명의 수다원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사다함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천만 명의 사다함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아나함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일 억의 아나함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아라한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십 억의 아라한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분의 벽지불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백 억의 벽지불을 공양하는 것보다 삼세제불 가운데, 한 분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다.
천 억의 삼세제불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분의 무념(無念) · 무주(無住) · 무수(無修) · 무증(無證)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다.

*공양(供養)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내나야 ; ①다름이 아니라. ②결국에 가서는.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자미(滋味 불을·증가할·맛있을 자/맛 미) ; ①좋은 맛[味]을 불어나게 함[滋]. ②맛. ③재미. ④기분. 심정. 감정.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옴마니반메훔 ; 자비의 화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성스러운 자비(慈悲)를 나타내는 진언(眞言)으로 ‘오! 연꽃 속의 보석이여!’라는 뜻이다. 여기서 보석은 자비의 상징이고, 연꽃은 지혜 · 깨달음의 상징이다.
산스크리트어 oṃ maṇi padme hūṃ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 육자진언(六字眞言)이라 한다. 이 진언을 외우면 관세음보살의 자비에 의해 번뇌와 죄악이 소멸되고, 온갖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된다.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말. [참고]헤살 ; 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