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스님 약력2014. 3. 23. 08:58

마조도일(馬祖道一), 백장회해(百丈懷海), 황벽희운(黃檗希運), 조주종심(趙州從諗), 운문문언(雲門文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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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馬祖) : (709 – 788) 법명은 도일(道一), 속성은 마(馬)씨。사천성(四川省) 성도부(成都府) 십방(什放)에서 나서 어려서 출가하였다.

남악(南嶽)에 가서 좌선(坐禪)하고 있는데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묻기를,
『무엇하고 있는가?』 『좌선합니다』
『좌선은 해서 무엇하려는가?』 『부처 되려고 좌선하지요』

그 이튿날 회양선사가 도일의 앞에 가서 벽돌을 돌에 갈고 있었다。도일이 묻기를,
『스님 벽돌은 갈아서 무엇하렵니까?』 『거울을 만들려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겠읍니까?』 『앉아 있어서 부처가 될줄 아는가?』
『......그러면 어찌 하오리까?』
『우차가 가지 않을 때에 수레를 때려야 되겠는가, 소를 때려야 되겠는가? 선은 앉거나 눕는 데 상관없는 것이며, 부처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집착이 없고 취사(取捨)가 없는 것이 선이다!』하는 말 끝에 크게 깨쳤다.

그의 법을 받아 가지고, 강서성 남강(南康)의 공공산(龔公山)과 강서성 남창부(南昌府) 종릉(鍾陵) 개원사(開元寺)에서 교화하니, 그의 법을 받은 제자가 139인이나 되었다.

그의 제자 남전 보원(南泉普願)에게서 신라의 도균(道均)선사와 철감(哲鑑)국사가  나왔고,
염관 제안(鹽官齊安)에게서 범일(梵日) • 진감(眞鑑)의 두 국사가,
귀종 지상(歸宗知常)에게서 대모(大茅)화상이,
대매 법상(大梅法常)에게서 가지(迦智)선사와 충언(忠彥)선사가,
마곡 보철(麻谷寶徹)에게서 무염(無染)국사가,
서당 지장(西堂智藏)에게서 도의(道義)국사와 혜철(惠哲)국사와 홍척(洪陟)선사가,
장경 회운(章敬懷暉)에게서 현욱(玄昱)국사와 각체(覺體)선사 같은 신라의 큰 스님들이 나왔었다.

당나라 덕종(德宗) 정원(貞元) 4년에 80세로써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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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百丈) : (720 – 814) 법명은 회해(懷海), 속성은 왕(王)씨。복건성(福建省) 민후현(閩候縣) 곧 옛날의 장락현(長樂縣)에서 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대장경을 열람하였고, 뒤에 마조의 시자(侍者)가 되어 모시고 어디로 가는데,
물오리 떼가 울고 가는 것을 보고 마조가 묻기를,
『저게 무슨 소리냐?』 『물오리 소립니다』
한참 있다가 다시 묻기를,
『아까 그 소리가 어디 있느냐?』 『날아가 버렸읍니다』
이에 마조는 돌아서면서 백장의 코를 잡아 비틀었다. 그는 아픔을 못 이기어 소리질렀다.
그 때에 마조는 『그래도 날아갔다고 말할 터이냐?』하는 데서 처음 깨치고, 그 다음 마조가 「할」하는 데서 크게 깨쳤다.

마조가 입적한 뒤에 그 탑을 석문(石門)에 쌓고 10년 동안 모시고 지내면서 마조의 법석을 계승하다가, 홍주(洪州)의 대웅산(大雄山) 곧 지금의 남창부(南昌府) 봉신현(奉新縣)에 있는 백장산에 들어가서 교화하였다.

그 때까지의 선원은 모두 율종(律宗)의 제도를 그대로 써 왔던 것이므로, 선종의 독특한 제도를 창설하여 선원의 모든 규칙을 자세히 만들고 더구나 경제적인 기초를 세워 놓았다.
그리하여 <백장청규(百丈清規)>는 지금까지 중국•한국•일본 할것없이 불교 교단의 기본 법칙이 되고 있다.

또한 공부하는 이는 물론 누구나 반드시 노동할 것을 가르쳐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하여 죽을 때까지 날마다 몸소 일하였다.
제자들이 보기에 하도 딱해서 하루는 일하는 연장을 감추었더니 그 날은 굶었다고 한다.

95세로써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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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벽(黃檗) : (? – 850) 법명은 희운(希運), 복건성(福建省) 복주부(福州府) 민현(閩縣)에서 났다.

어려서 신동이라고 불리더니, 강서성 서주부 황벽산에 가서 출가하였다가, 백장에게서 마조의 할에 백장이 깨치던 사연을 듣고, 그 자리에서 크게 깨치고 나서 백장의 법을 이었다.
그 뒤에 배휴(裵休)의 청을 받아 여러 곳에서 교화하였으나, 가는 곳마다 그 산 이름을 처음 출가하던 산 이름 그대로 황벽산이라 하였다.

그가 염관사(鹽官寺)에 있어 예불하는 자리에서 뒷날의 선종(宣宗)이 그에게 법문을 묻는데, 그가 세 번이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
뒤에 선종이 즉위하여 그에게 「추행사문(麤行沙門)」 곧 행실이 거친 중이란 법호를 주려고 하자, 배휴가 간하기를 『황벽선사가 폐하에게 세 번 손질한 것은, 폐하의 삼제(三際 곧 三世) 윤회를 끊는 뜻입니다』하여 단제선사(斷際禪師)의 호를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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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趙州) : (778 – 897) 이름은 종심(從諗)이고 속성은 학(郝)씨인데, 산동성(山東省) 조주부(曹州府)에서 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남전(南泉) 보원선사(普願禪師)의 법을 받고, 그 문하에서 20년 동안 있었다.

80세까지 각처로 돌아다니다가(行脚) 비로소 조주(趙州)의 관음원(觀音院)에서 학자들을 제접(提接)하기 40년.

당나라 소종(昭宗) 건녕(乾寧) 4년 120세에 입적하였다.
<어록(語錄)> 3권이 남았고, 그의 교화가 참으로 커서 「조주 고불(趙州古佛)」이라고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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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雲門) : ( ? – 949 ) 법명은 문언(文偃), 속성은 장(張)씨。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에서 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처음에는 율종(律宗)을 숭상하였다.
목주(睦州)에 갔더니, 진 존숙(陳尊宿)이 그의 멱살을 잡고 『말해라 !  말해라!』하는데 대답하지 못하므로 문 밖으로 밀쳐서 내쫓고 문을 닫을 때, 그의 발이 문틈에 끼어서 발가락이 끊어졌다。그 바람에 깨쳤다.

그 뒤에 설봉 의존(雪峰義存) 화상에게 가서 더욱 크게 깨쳐 그의 법을 이었다. 운문산 광태선원(光泰禪院)에서 오래 교화하니, 입실(入室)한 제자가 88인이나 있었다.

어떤 날 설법하기를,
『빛을 꿰뚫지 못하는 데 두 가지 병이 있다.
온갖 곳에 밝지 못하고 눈앞에 무엇이 있는 것이 한 가지 병이고,
가령 온갖 법이 빈 이치를 뚫어 알았더라도 어렴풋이 무엇이 있는 듯한 것은 또한 완전히 뚫은 것이 못된다.

법신을 뚫는데도 또한 두 가지 병이 있는데,
법신 경계에까지 갔더라도 법에 대한 국집(法執)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나」의 소견이 아직도 가시어지지 못하여 법신 갓에 머물러 서게 되는 것이 한 가지 병이고,
설사 법신을 꿰뚫어 나갔다 하더라도 자세히 검찰하여 본다면, 어떤 숨 기운(氣息)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그것이 또한 병이니라』하였다.

Posted by 닥공닥정